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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儒學第二十七

정관정요 貞觀政要 · 오긍(吳兢) · 8세기 초 · 단락 6 · 한자 985자 · 낭독 3.9분

「정관정요」 유학을 높이다 「崇儒學第二十七」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당 태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말을 주제별로 모은 책. 임금의 길에서 시작해 간언을 받아들이는 법, 벼슬아치를 고르는 법, 형벌과 세금과 정벌을 거쳐 「끝을 삼감」으로 끝난다. 위징이 낯을 맞대고 꺾어 말하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책의 뼈대다. 고구려 안시성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며 성주에게 비단을 내린 일, 방현령이 죽어 가며 요동 정벌을 말린 상소도 여기에 있다.

太宗初踐阼,即於正殿之左置弘文館,精選天下文儒,令以本官兼署學士,給以五品珍膳,更日宿直,以聽朝之隙引入內殿,討論墳典,商略政事,或至夜分乃罷。又詔勛賢三品以上子孫為弘文學生。

태종이 처음 자리에 오르자 곧 정전 왼쪽에 홍문관을 두고 천하의 글하는 선비를 정밀히 골라, 본디 벼슬로 학사를 겸하게 하고 오품의 진귀한 음식을 주며 날을 바꾸어 숙직하게 하였다. 조회를 듣는 틈에 안 전각으로 이끌어 들여 옛 전적을 따지고 정사를 헤아리다가 더러 밤이 갈릴 때에야 파하였다. 또 공훈 있고 어진 삼품 이상의 자손을 홍문학생으로 삼으라 조서하였다.

貞觀二年,詔停周公為先聖,始立孔子廟堂於國學,稽式舊典,以仲尼為先聖,顏子為先師,兩邊俎豆干戚之容,始備於茲矣。是歲大收天下儒士,賜帛給傳,令詣京師,擢以不次,布在廊廟者甚眾。學生通一大經以上,咸得署吏。國學增築學舍四百餘間,國子、太學、四門、廣文亦增置生員,其書、算各置博士、學生,以備眾藝。太宗又數幸國學,令祭酒、司業、博士講論,畢,各賜以束帛。四方儒生負書而至者,蓋以千數。俄而吐蕃及高昌、高麗、新羅等諸夷酋長,亦遣子弟請入於學。於是國學之內,鼓篋升講筵者,幾至萬人,儒學之興,古昔未有也。

정관 이 년에 조서로 주공을 선성으로 삼는 일을 그치게 하고, 비로소 국학에 공자의 사당을 세웠다. 옛 법도를 상고하여 중니를 선성으로 삼고 안자를 선사로 삼으니, 양쪽에 제기와 방패와 도끼를 벌여 놓는 모습이 비로소 여기서 갖추어졌다.

이해에 천하의 유학 선비를 크게 거두어 비단을 내리고 역마를 주어 서울에 오게 하고, 차례를 뛰어넘어 뽑으니 조정에 벌여 선 이가 몹시 많았다. 학생으로 큰 경 하나 이상에 통한 이는 다 벼슬아치로 임명될 수 있었다. 국학에 학사 사백여 칸을 더 지었고 국자와 태학과 사문과 광문에도 또한 학생 수를 더하였으며, 그 글씨와 셈에도 저마다 박사와 학생을 두어 뭇 재예에 갖추었다.

태종이 또 여러 번 국학에 거둥하여 좨주와 사업과 박사에게 강론하게 하고, 마치면 저마다 비단 묶음을 내렸다. 사방에서 유생이 책을 지고 온 이가 대개 천으로 셀 만하였다. 이윽고 토번과 고창과 고구려와 신라 등 여러 오랑캐의 우두머리도 또한 자제를 보내 학교에 들기를 청하였다. 이에 국학 안에서 책 상자를 두드리며 강의 자리에 오른 이가 거의 만 사람에 이르렀으니, 유학의 흥함이 옛날에도 있지 않았다.

貞觀十四年詔曰:「梁皇侃、褚仲都,周熊安生、沈重,陳沈文阿、周弘正、張譏,隋何妥、劉炫,並前代名儒,經術可紀,加以所在學徒,多行其講疏,宜加優賞,以勸後生,可訪其子孫見在者,錄姓名奏聞。」二十一年詔曰:「左丘明、卜子夏、公羊高、谷梁赤、伏勝、高堂生、戴聖、毛萇、孔安國、劉向、鄭眾、杜子春、馬融、盧植、鄭玄、服虔、何休、王肅、王弼、杜預、範寧等二十有一人,並用其書,垂於國胄,既行其道,理合褒崇。自今有事於太學,可並配享尼父廟堂。」其尊儒重道如此。

정관 십사 년에 조서를 내렸다.

「양나라의 황간과 저중도, 주나라의 웅안생과 심중, 진나라의 심문아와 주홍정과 장기, 수나라의 하타와 유현은 아울러 앞선 세상의 이름난 유학자라 경술이 적을 만하다. 게다가 있는 곳마다 배우는 무리가 흔히 그 강소를 행하니, 마땅히 넉넉한 상을 더하여 뒷사람을 권해야 한다. 그 자손으로 지금 살아 있는 이를 찾아 물어 성과 이름을 적어 아뢰라.」

이십일 년에 조서를 내렸다.

「좌구명·복자하·공양고·곡량적·복승·고당생·대성·모장·공안국·유향·정중·두자춘·마융·노식·정현·복건·하휴·왕숙·왕필·두예·범녕 등 스물한 사람은 아울러 그 책을 써서 나라의 자제에게 드리웠다. 이미 그 도를 행하였으니 이치가 기려 높임에 맞다. 이제부터 태학에 일이 있으면 아울러 니보의 사당에 함께 제사하게 하라.」

유학을 높이고 도를 무겁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貞觀二年,太宗謂侍臣曰:「為政之要,惟在得人。用非其才,必難致治。今所任用,必須以德行、學識為本。」諫議大夫王珪曰:「人臣若無學業,不能識前言往行,豈堪大任?漢昭帝時,有人詐稱衛太子,聚觀者數萬人,眾皆致惑。雋不疑斷以蒯聵之事。昭帝曰:『公卿大臣,當用經術明於古義者,此則固非刀筆俗吏所可比擬。』」上曰:「信如卿言。」

정관 이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정사를 하는 요긴함은 오직 사람을 얻는 데 있다. 그 재주가 아닌 이를 쓰면 반드시 다스림에 이르기 어렵다. 이제 맡겨 쓰는 데 반드시 덕과 행실과 학식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간의대부 왕규가 말하였다.

「신하에게 만약 배운 업이 없으면 앞선 말과 지난 행실을 알 수 없으니 어찌 큰 소임을 감당하겠습니까. 한 소제 때 어떤 사람이 위태자를 사칭하여 모여 구경하는 이가 수만 사람이었는데 무리가 다 미혹되었습니다. 준불의가 괴외의 옛일을 들어 판결하였습니다. 소제가 말하기를 『공경과 대신은 마땅히 경술로 옛 뜻에 밝은 이를 써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곧 참으로 붓과 칼을 쥔 속된 벼슬아치가 견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참으로 경의 말과 같다.」

貞觀四年,太宗以經籍去聖久遠,文字訛謬,詔前中書侍郎顏師古於秘書省考定五經。及功畢,復詔尚書左僕射房玄齡集諸儒重加詳議。時諸儒傳習師說,舛謬已久,皆共非之,異端蜂起。而師古輒引晉、宋以來古本,隨方曉答,援據詳明,皆出其意表,諸儒莫不嘆服。太宗稱善者久之,賜帛五百匹,加授通直散騎常侍,頒其所定書於天下,令學者習焉。太宗又以文學多門,章句繁雜,詔師古與國子祭酒孔穎達等諸儒,撰定五經疏義,凡一百八十卷,名曰《五經正義》,付國學施行。

정관 사 년에 태종은 경서가 성인의 때에서 멀어져 글자가 그릇되고 어긋났으므로, 앞서 중서시랑이던 안사고에게 조서하여 비서성에서 오경을 상고하여 정하게 하였다. 일이 끝나자 다시 상서좌복야 방현령에게 조서하여 여러 유학자를 모아 거듭 자세히 의논하게 하였다.

그때 여러 유학자가 스승의 설을 전하여 익혀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이미 오래였으므로, 다 함께 그르다 하여 다른 주장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그런데 사고가 문득 진나라와 송나라 이래의 옛 책을 끌어 대며 곳마다 밝혀 답하니, 근거를 대는 것이 자세하고 밝아 다 그들의 뜻 밖에서 나왔다. 여러 유학자가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종이 오래도록 좋다 일컫고 비단 오백 필을 내렸으며 통직산기상시를 더하여 주고, 그가 정한 책을 천하에 반포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다.

태종이 또 글과 학문이 문이 많고 장구가 번잡하다 하여, 사고와 국자좨주 공영달 등 여러 유학자에게 조서하여 오경의 소의를 지어 정하게 하니 무릇 백팔십 권이었다. 이름을 『오경정의』라 하고 국학에 부쳐 시행하게 하였다.

太宗嘗謂中書令岑文本曰:「夫人雖稟定性,必須博學以成其道,亦猶蜃性含水,待月光而水垂;木性懷火,待燧動而焰發;人性含靈,待學成而為美。是以蘇秦刺股,董生垂帷。不勤道藝,則其名不立。」文本對曰:「夫人性相近,情則遷移,必須以學飭情,以成其性。《禮》云:『玉不琢,不成器;人不學,不知道。』所以古人勤於學問,謂之懿德。」

태종이 일찍이 중서령 잠문본에게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비록 정해진 성품을 받았어도 반드시 널리 배워야 그 도를 이룬다. 또한 마치 대합의 성품이 물을 머금었어도 달빛을 기다려야 물을 드리우고, 나무의 성품이 불을 품었어도 부시가 움직이기를 기다려야 불꽃이 이는 것과 같다. 사람의 성품이 신령함을 머금었어도 배움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소진은 넓적다리를 찌르고 동중서는 휘장을 드리웠다. 도와 재예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곧 그 이름이 서지 않는다.」

문본이 대답하였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서로 가까우나 정은 곧 옮겨 가니, 반드시 배움으로 정을 다잡아 그 성품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배우고 묻는 데 부지런한 것을 아름다운 덕이라 일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