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禮樂第二十九
太宗初即位,謂侍臣曰:「準《禮》,名,終將諱之。前古帝王,亦不生諱其名,故周文王名昌,《周詩》云:『克昌厥後。』春秋時魯莊公名同,十六年《經》書:『齊侯、宋公同盟於幽。』惟近代諸帝,妄為節制,特令生避其諱,理非通允,宜有改張。」因詔曰:「依《禮》,二名義不偏諱,尼父達聖,非無前指。近世以來,曲為節制,兩字兼避,廢闕已多,率意而行,有違經語。今宜依據禮典,務從簡約,仰效先哲,垂法將來,其官號人名,及公私文籍,有『世』及『民』兩字不連讀,並不須避。」
태종이 처음 자리에 올라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예기』에 견주면 이름은 마친 뒤에 장차 피하는 것이다. 앞선 옛날의 제왕도 또한 살아 있을 때 그 이름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 문왕의 이름이 창인데 『주시』에 이르기를 『그 뒤를 능히 창성하게 한다』 하였고, 춘추 때 노 장공의 이름이 동인데 십육 년 『경』에 적기를 『제후와 송공이 유에서 동맹하였다』 하였다. 오직 요사이 세상의 여러 황제만이 함부로 제한을 두어 특별히 살아 있을 때 그 피할 글자를 피하게 하였으니, 이치가 두루 마땅함이 아니라 마땅히 고쳐 베풂이 있어야 한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예기』에 따르면 두 글자 이름은 뜻이 한쪽만 피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니보가 성인에 통달함에 앞서 가리킨 바가 없지 않았다. 요사이 세상 이래로 굽혀 제한을 두어 두 글자를 아울러 피하니 없어지고 빠진 것이 이미 많다. 뜻대로 행하여 경의 말을 어김이 있다. 이제 마땅히 예의 법전에 따라 간략함을 좇기에 힘써, 우러러 앞선 슬기로운 이를 본받고 앞날에 법을 드리우라. 그 벼슬 이름과 사람 이름 및 공사의 문서에 「세」와 「민」 두 글자가 잇달아 읽히지 않는 것은 아울러 모름지기 피하지 말라.」
貞觀二年,中書舍人高季輔上疏曰:「竊見密王元曉等俱是懿親,陛下友愛之懷,義高古昔,分以車服,委以藩維,須依禮儀,以副瞻望。比見帝子拜諸叔,諸叔亦即答拜,王爵既同,家人有禮,豈合如此顛倒昭穆?伏願一垂訓誡,永循彜則。」太宗乃詔元曉等,不得答吳王恪、魏王泰兄弟拜。
정관 이 년에 중서사인 고계보가 상소하였다.
「가만히 보건대 밀왕 이원효 등은 다 아름다운 친척이라 폐하께서 우애하시는 마음이 의로움으로 옛날보다 높으시어, 수레와 옷을 나누어 주시고 변방을 지키는 소임을 맡기셨습니다. 모름지기 예의를 따라 우러러보는 데 맞게 하셔야 합니다. 요사이 보건대 황제의 아들이 여러 숙부에게 절하면 여러 숙부 또한 곧 답절합니다. 왕의 작위가 이미 같고 집안사람에게 예가 있으나, 어찌 이토록 소목을 뒤집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한번 가르쳐 경계하시어 길이 떳떳한 법을 좇게 하소서.」
태종이 이에 원효 등에게 조서하여 오왕 이각과 위왕 이태 형제의 절에 답절하지 못하게 하였다.
貞觀四年,太宗謂侍臣曰:「經聞京城士庶居父母喪者,乃有信巫書之言,辰日不哭,以此辭於吊問,拘忌輟哀,敗俗傷風,極乖人理。宜令州縣教導,齊之以禮典。」
정관 사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듣건대 서울의 선비와 백성으로 부모의 상을 당한 이가 이에 무당 책의 말을 믿어 진일에는 곡하지 않으며, 이로써 조문을 사양하고 꺼림에 얽매여 슬픔을 그친다 한다. 풍속을 무너뜨리고 기풍을 다치게 하여 사람의 도리에 지극히 어긋난다. 마땅히 주와 현으로 하여금 가르쳐 이끌어 예의 법전으로 가지런히 하게 하라.」
貞觀五年,太宗謂侍臣曰:「佛道設教,本行善事,豈遣僧尼道士等妄自尊崇,坐受父母之拜,損害風俗,悖亂禮經,宜即禁斷,仍令致拜於父母。」
정관 오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불도가 가르침을 베푼 것은 본디 착한 일을 행하려는 것인데, 어찌 승려와 비구니와 도사 등으로 하여금 함부로 스스로 높이고 받들어 앉아서 부모의 절을 받아, 풍속을 덜고 해치며 예의 경전을 어그러뜨려 어지럽히게 하겠는가. 마땅히 곧 금하여 끊고, 이어 부모에게 절을 하게 하라.」
貞觀六年,太宗謂尚書左僕射房玄齡曰:「比有山東崔、盧、李、鄭四姓,雖累葉陵遲,猶恃其舊地,好自矜大,稱為士大夫。每嫁女他族,必廣索聘財,以多為貴,論數定約,同於市賈,甚損風俗,有紊禮經。既輕重失宜,理須改革。」乃詔吏部尚書高士廉、御史大夫韋挺、中書侍郎岑文本、禮部侍郎令狐德棻等,刊正姓氏,普責天下譜牒,兼據憑史傳,剪其浮華,定其真偽,忠賢者褒進,悖逆者貶黜,撰為《氏族志》。士廉等及進定氏族等第,遂以崔幹為第一等。太宗謂曰:「我與山東崔、盧、李、鄭,舊既無嫌,為其世代衰微,全無官宦,猶自云士大夫,婚姻之際,則多索財物,或才識庸下,而偃仰自高,販鬻松槚,依托富貴,我不解人間何為重之?且士大夫有能立功,爵位崇重,善事君父,忠孝可稱,或道義清素,學藝通博,此亦足為門戶,可謂天下士大夫。今崔、盧之屬,惟矜遠葉衣冠,寧比當朝之貴?公卿已下,何暇多輸錢物,兼與他氣勢,向聲背實,以得為榮。我今定氏族者,誠欲崇樹今朝冠冕,何因崔幹猶為第一等,只看卿等不貴我官爵耶?不論數代已前,只取今日官品、人才作等級,宜一量定,用為永則。」遂以崔幹為第三等。至十二年,書成,凡百卷,頒天下。又詔曰:「氏族之美,實系於冠冕,婚姻之道,莫先於仁義。自有魏失御,齊氏雲亡,市朝既遷,風俗陵替,燕、趙古姓,多失衣冠之緒,齊、韓舊族,或乖禮義之風。名不著於州閭,身未免於貧賤,自號高門之胄,不敦匹嫡之儀,問名惟在於竊貲,結褵必歸於富室。乃有新官之輩,豐財之家,慕其祖宗,競結婚姻,多納貨賄,有如販鬻。或自貶家門,受辱於姻婭;或矜其舊望,行無禮於舅姑。積習成俗,迄今未已,既紊人倫,實虧名教。朕夙夜兢惕,憂勤政道,往代蠹害,咸已懲革,唯此弊風,未能盡變。自今以後,明加告示,使識嫁娶之序,務合禮典,稱朕意焉。」
정관 육 년에 태종이 상서좌복야 방현령에게 말하였다.
「요사이 산동의 최·노·이·정 네 성이 비록 여러 대에 걸쳐 기울고 낮아졌는데도, 오히려 그 옛 땅을 믿고 스스로 뽐내어 크게 여기기를 좋아하며 사대부라 일컫는다. 딸을 다른 겨레에 시집보낼 때마다 반드시 널리 폐백 재물을 찾아 많은 것을 귀히 여기고, 수를 논하여 약속을 정하기가 저자의 장사꾼과 같으니 풍속을 몹시 덜고 예의 경전을 어지럽힘이 있다. 이미 가볍고 무거움이 마땅함을 잃었으니 이치가 모름지기 고쳐야 한다.」
이에 이부상서 고사렴과 어사대부 위정과 중서시랑 잠문본과 예부시랑 영호덕분 등에게 조서하여 성씨를 깎아 바로잡게 하였다. 널리 천하의 족보를 거두고 아울러 사서와 전기에 기대어, 그 뜬 화려함을 자르고 그 참과 거짓을 정하며, 충성되고 어진 이는 기려 나아가게 하고 어긋나고 거스른 이는 낮추어 물리쳐 『씨족지』를 지었다.
사렴 등이 씨족의 등급을 정해 올리면서 마침내 최간을 첫째 등급으로 삼았다. 태종이 말하였다.
「내가 산동의 최·노·이·정과 예로부터 이미 꺼릴 것이 없다. 그들이 대대로 쇠하고 미약해져 아주 벼슬한 이가 없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사대부라 이르고, 혼인할 즈음에는 곧 재물을 많이 찾으며, 더러는 재주와 앎이 못나고 낮으면서도 드러누워 스스로 높다 하고, 소나무와 개오동을 팔며 넉넉함과 귀함에 기대니, 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무겁게 여기는지 알지 못하겠다.
또 사대부에 공을 세울 수 있어 작위가 높고 무거우며 임금과 아비를 잘 섬겨 충성과 효도를 일컬을 만한 이가 있고, 더러는 도와 의로움이 맑고 수수하며 학문과 재예가 두루 넓은 이가 있으니, 이 또한 문호가 되기에 넉넉하여 천하의 사대부라 이를 만하다. 이제 최씨와 노씨의 무리는 오직 먼 옛 대의 벼슬만 뽐내니 어찌 지금 조정의 귀함에 견주겠는가. 공경 이하가 무슨 겨를에 돈과 물건을 많이 보내고 아울러 남에게 기세를 주며, 소리를 향하고 실속을 등지면서 그렇게 되는 것을 영화로 여기는가.
내가 이제 씨족을 정하는 것은 참으로 지금 조정의 벼슬아치를 높여 세우려 함이다. 무슨 까닭으로 최간이 오히려 첫째 등급인가. 다만 경들이 내 벼슬과 작위를 귀히 여기지 않는 것을 볼 뿐인가. 몇 대 이전은 논하지 말고 다만 오늘의 벼슬 품계와 인재만 취해 등급을 지어, 마땅히 한 번 헤아려 정하고 길이 법으로 삼으라.」
마침내 최간을 셋째 등급으로 삼았다. 십이 년에 이르러 책이 이루어지니 무릇 백 권이라 천하에 반포하였다. 또 조서를 내렸다.
「씨족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벼슬에 매였고 혼인의 도는 어짊과 의로움보다 앞선 것이 없다. 위나라가 다스림을 잃고 제씨가 구름처럼 사라진 뒤로, 저자와 조정이 이미 옮기고 풍속이 무너져 떨어졌다. 연나라와 조나라의 옛 성이 흔히 벼슬의 실마리를 잃었고, 제나라와 한나라의 옛 겨레가 더러 예와 의로움의 풍모에 어긋났다. 이름이 고을과 마을에 드러나지 않고 몸이 가난하고 천함을 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높은 문벌의 자손이라 일컫는다. 짝을 맞추는 의례를 도타이 하지 않고, 이름을 묻는 것이 오직 재물을 훔치는 데 있으며, 혼례를 맺음이 반드시 넉넉한 집으로 돌아간다.
이에 새로 벼슬한 무리와 재물이 넉넉한 집이 그 조상을 사모하여 다투어 혼인을 맺고 재물과 뇌물을 많이 들이니 장사와 같은 데가 있다. 더러는 스스로 집안 문을 낮추어 사돈에게 욕을 받고, 더러는 그 옛 명망을 뽐내어 시부모에게 무례한 짓을 행한다. 익힘이 쌓여 풍속을 이루어 지금까지 그치지 않으니, 이미 사람의 인륜을 어지럽히고 참으로 이름과 가르침을 이지러뜨린다.
짐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정사의 도에 걱정하고 부지런하여, 지난 시대의 좀먹고 해로운 것을 다 이미 징계하여 고쳤으나, 오직 이 폐단만은 다 바꾸지 못하였다. 이제부터 뒤로는 밝게 알려 보여, 시집가고 장가가는 차례를 알아 예의 법전에 맞기에 힘써 짐의 뜻에 맞게 하라.」
禮部尚書王珪子敬直,尚太宗女南平公主。珪曰:「《禮》有婦見舅姑之儀,自近代風俗弊薄,公主出降,此禮皆廢。主上欽明,動循法制,吾受公主謁見,豈為身榮,所以成國家之美耳。」遂與其妻就位而坐,令公主親執巾,行盥饋之道,禮成而退。太宗聞而稱善。是後公主下降有舅姑者,皆遣備行此禮。
예부상서 왕규의 아들 왕경직이 태종의 딸 남평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왕규가 말하였다.
「『예기』에 며느리가 시부모를 뵙는 의례가 있는데, 요사이 세상 풍속이 무너지고 엷어져 공주가 시집가면 이 예를 다 폐한다. 임금께서 공경하고 밝으시어 움직임에 법도를 좇으시니, 내가 공주의 뵙는 절을 받는 것이 어찌 제 몸의 영화를 위함이겠는가. 나라의 아름다움을 이루려는 까닭일 뿐이다.」
마침내 그 아내와 함께 자리에 나아가 앉고, 공주로 하여금 몸소 수건을 잡아 손 씻을 물을 드리고 음식을 올리는 도리를 행하게 하여, 예가 이루어진 뒤에 물러갔다. 태종이 듣고 좋다 일컬었다. 이 뒤로 공주가 시집가서 시부모가 있는 이는 다 이 예를 갖추어 행하게 하였다.
貞觀十二年,太宗謂侍臣曰:「古者諸侯入朝,有湯沐之邑,芻禾百車,待以客禮。晝坐正殿,夜設庭燎,思與相見,問其勞苦。又漢家京成亦為諸郡立邸舍。頃聞考使至京者,皆賃房以坐,與商人雜居,才得容身而已。既待禮之不足,必是人多怨嘆,豈肯竭情於共理哉?」乃令就京城閑坊,為諸州考使各造邸第。及成,太宗親幸觀焉。
정관 십이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제후가 조회에 들면 목욕할 고을이 있고 꼴과 곡식이 백 수레였으며 손님의 예로 대하였다. 낮에는 정전에 앉고 밤에는 뜰에 화톳불을 놓아, 서로 보기를 생각하고 그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물었다. 또 한나라 집안은 서울에 또한 여러 군을 위해 저택을 세웠다. 요사이 들으니 고과 사신으로 서울에 이르는 이가 다 방을 빌려 앉고 장사꾼과 섞여 살아 겨우 몸 둘 데를 얻을 뿐이라 한다. 이미 예로 대함이 모자라니 반드시 사람들에게 원망과 탄식이 많을 터인데, 어찌 함께 다스림에 정을 다하려 하겠는가.」
이에 서울 안 한가한 마을에 여러 고을 고과 사신을 위해 저마다 저택을 짓게 하였다. 이루어지자 태종이 몸소 거둥하여 보았다.
貞觀十三年,禮部尚書王珪奏言:「準令,三品以上,遇親王於路,不合下馬,今皆違法申敬,有乖朝典。」太宗曰:「卿輩欲自崇貴,卑我兒子耶?」魏徵對曰:「漢、魏已來,親王班皆次三公下。今三品並天子六尚書九卿,為王下馬,王所不宜當也。求諸故事,則無可憑,行之於今,又乖國憲,理誠不可。」帝曰:「國家立太子者,擬以為君。人之修短,不在老幼。設無太子,則母弟次立。以此而言,安得輕我子耶?」徵又曰:「殷人尚質,有兄終弟及之義。自周已降,立嫡必長,所以絕庶孽之窺窬,塞禍亂之源本。為國家者,所宜深慎。」太宗遂可王珪之奏。
정관 십삼 년에 예부상서 왕규가 아뢰었다.
「법령에 견주면 삼품 이상은 길에서 친왕을 만나도 말에서 내리는 것이 맞지 않는데, 이제 다 법을 어기고 공경을 펴니 조정의 법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경들이 스스로 높고 귀하게 여기고 내 아들을 낮추려 하는가?」
위징이 대답하였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로 친왕의 반열은 다 삼공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제 삼품은 아울러 천자의 육상서와 구경인데 왕을 위해 말에서 내리는 것은 왕이 마땅히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옛일에서 구하면 곧 기댈 것이 없고 오늘에 행하면 또 나라의 법도에 어긋나니 이치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나라가 태자를 세우는 것은 임금으로 삼으려 함이다. 사람의 목숨이 길고 짧음은 늙고 어린 데 있지 않다. 설사 태자가 없으면 곧 어머니가 같은 아우가 차례로 즉위한다. 이로 말하면 어찌 내 아들을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위징이 또 말하였다.
「은나라 사람은 바탕을 높여 형이 마치면 아우가 잇는 뜻이 있었습니다. 주나라 이래로는 적자를 세우되 반드시 맏이로 하였으니, 서자가 넘겨다보는 것을 끊고 재앙과 어지러움의 근본을 막으려는 까닭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마땅히 깊이 삼갈 바입니다.」
태종이 마침내 왕규의 아룀을 옳다 하였다.
貞觀十四年,太宗謂禮官曰:「同爨尚有緦麻之恩,而嫂叔無服,又舅之與姨,親疏相似,而服之有殊,未為得禮,宜集學者詳議。餘有親重而服輕者,亦附奏聞。」是月尚書八座與禮官定議曰:
정관 십사 년에 태종이 예관에게 말하였다.
「한솥밥을 먹은 사이에도 오히려 시마의 은혜가 있는데 형수와 시아주버니 사이에는 복이 없다. 또 외숙과 이모는 가깝고 성근 것이 서로 비슷한데 복에 다름이 있으니 예를 얻은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학자를 모아 자세히 의논하게 하라. 그 밖에 가까움이 무거운데 복이 가벼운 것이 있으면 또한 덧붙여 아뢰라.」
이달에 상서팔좌와 예관이 의논을 정해 아뢰었다.
臣竊聞之,禮所以決嫌疑、定猶豫、別同異、明是非者也,非從天下,非從地出,人情而已矣。人道所先,在乎敦睦九族。九族敦睦,由乎親親,以近及遠。親屬有等差,故喪紀有隆殺,隨恩之薄厚,皆稱情以立文。原夫舅之與姨,雖為同氣,推之於母,輕重相懸。何則?舅為母之本宗,姨乃外戚他姓,求之母族,姨不與焉,考之經史,舅誠為重。故周王念齊,是稱舅甥之國;秦伯懷晉,實切《渭陽》之詩。今在舅服止一時之情,為姨居喪五月,徇名喪實,逐末棄本,此古人之情或有未達,所宜損益,實在茲乎。
신들이 가만히 듣건대 예는 혐의를 결단하고 머뭇거림을 정하며 같음과 다름을 가르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바라 합니다. 하늘에서 좇아 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사람의 정일 뿐입니다.
사람의 도리에 먼저 할 바는 아홉 겨레를 도타이 화목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홉 겨레가 도타이 화목함은 가까운 이를 가까이하여 가까운 데서 먼 데로 미침에서 말미암습니다. 친속에 등급의 차이가 있으므로 상례에 융성함과 덞이 있으니, 은혜의 엷고 두터움을 따라 다 정에 맞추어 글을 세웁니다.
무릇 외숙과 이모는 비록 같은 기운이나 어머니에게 미루면 가볍고 무거움이 서로 아득합니다. 어찌해서입니까. 외숙은 어머니의 본종이 되고 이모는 곧 다른 성의 외척입니다. 어머니의 겨레에서 구하면 이모는 여기에 들지 않고, 경서와 사서에서 상고하면 외숙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주나라 왕이 제나라를 생각하매 이를 외숙과 생질의 나라라 일컬었고, 진 목공이 진나라를 그리매 참으로 「위양」의 시가 간절하였습니다.
이제 외숙의 복은 한 철의 정에 그치고 이모를 위해서는 다섯 달 상을 사니, 이름을 좇고 실상을 잃으며 끝을 좇고 밑동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옛사람의 정에 더러 이르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이니, 덜고 더해야 할 바가 참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禮記》曰:「兄弟之子猶子也,蓋引而進之也。嫂叔之無服,蓋推而遠之也。」禮,繼父同居則為之期,未嘗同居則不為服。從母之夫,舅之妻,二人相為服。或曰「同爨緦麻」。然則繼父且非骨肉,服重由乎同爨,恩輕在乎異居。固知制服雖系於名文,蓋亦緣恩之厚薄者也。或有長年之嫂,遇孩童之叔,劬勞鞠養,情若所生,分饑共寒,契闊偕老,譬同居之繼父,方他人之同爨,情義之深淺,寧可同日而言哉?在其生也,乃愛同骨肉,於其死也,則推而遠之,求之本源,深所未喻。若推而遠之為是,則不可生而共居;生而共居為是,則不可死同行路。重其生而輕其死,厚其始而薄其終,稱情立文,其義安在?且事嫂見稱,載籍非一。鄭仲虞則恩禮甚篤,顏弘都則竭誠致感,馬援則見之必冠,孔伋則哭之為位,此蓋並躬踐教義,仁深孝友,察其所行之旨,豈非先覺者歟?但於時上無哲王,禮非下之所議,遂使深情郁於千載,至理藏於萬古,其來久矣,豈不惜哉!
『예기』에 이르기를 「형제의 아들도 아들 같으니 대개 이끌어 나아가게 함이요, 형수와 시아주버니에게 복이 없는 것은 대개 밀어 멀리함이다」 하였습니다.
예에 이어진 아비와 함께 살면 곧 그를 위해 일 년 복을 입고, 일찍이 함께 살지 않았으면 곧 복을 입지 않습니다. 이모의 남편과 외숙의 아내 두 사람은 서로 복을 입습니다. 더러는 「한솥밥에는 시마」라 합니다. 그러한즉 이어진 아비는 또 골육이 아닌데 복이 무거운 것은 한솥밥에서 말미암고, 은혜가 가벼운 것은 따로 사는 데 있습니다. 참으로 복을 정하는 것이 비록 이름과 글에 매였으나 대개 또한 은혜의 두텁고 엷음을 따르는 것임을 압니다.
더러 나이 많은 형수가 어린아이 시아주버니를 만나 수고로이 길러 정이 제가 낳은 것 같고, 굶주림을 나누고 추위를 함께하며 헤어지고 만나며 함께 늙는 일이 있으니, 함께 산 이어진 아비에 견주고 남남끼리 한솥밥 먹은 것에 견주면 정과 의로움의 깊고 얕음을 어찌 같은 날에 말하겠습니까. 그 살아 있을 때는 곧 사랑하기를 골육같이 하다가 그가 죽은 데 이르러서는 곧 밀어 멀리하니, 근원을 구해 보아도 깊이 깨닫지 못할 바입니다.
만약 밀어 멀리하는 것이 옳다면 곧 살아서 함께 살 수 없고, 살아서 함께 사는 것이 옳다면 곧 죽어서 길 가는 사람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그 삶을 무겁게 하고 그 죽음을 가벼이 하며 그 처음을 두터이 하고 그 끝을 엷게 하니, 정에 맞추어 글을 세운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형수 섬긴 일로 일컬어진 것이 기록에 하나가 아닙니다. 정중우는 곧 은혜와 예가 몹시 도타웠고, 안홍도는 곧 정성을 다해 느꺼움을 이루었으며, 마원은 곧 형수를 보면 반드시 갓을 썼고, 공급은 곧 곡할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다 몸소 가르침과 의로움을 밟은 것이라 어짊이 깊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한 것이니, 그 행한 바의 뜻을 살피면 어찌 먼저 깨달은 이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때 위에 슬기로운 왕이 없어 예를 아랫사람이 의논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깊은 정이 천 년에 막히고 지극한 이치가 만고에 묻혔으니 그 온 지 오래라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今陛下以為尊卑之敘,雖煥乎已備,喪紀之制,或情理未安,爰命秩宗,詳議損益。臣等奉遵明旨,觸類傍求,采摭群經,討論傳記,或抑或引,兼名兼實,損其有餘,益其不足,使無文之禮咸秩,敦睦之情畢舉,變薄俗於既往,垂篤義於將來,信六籍所不能談,超百王而獨得者也。
이제 폐하께서 높고 낮음의 차례는 비록 빛나게 이미 갖추어졌으나 상례의 제도는 더러 정과 이치가 편안하지 않다 여기시어, 이에 예를 맡은 이에게 명하여 덜고 더할 것을 자세히 의논하게 하셨습니다. 신들이 밝은 뜻을 받들어 좇아, 무리에 닿는 대로 곁으로 구하고 여러 경서를 캐어 모으며 전과 기록을 따져 논하였습니다. 더러 누르고 더러 이끌어 이름과 실상을 겸하며, 그 남는 것을 덜고 그 모자란 것을 더하여, 글 없던 예가 다 차례를 얻고 도타이 화목한 정이 다 들리게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엷은 풍속을 바꾸고 앞날에 도타운 의로움을 드리우니, 참으로 여섯 경서가 이야기하지 못하던 바요 백 왕을 넘어 홀로 얻은 것입니다.
謹按曾祖父母,舊服齊衰三月,請加為齊衰五月;嫡子婦,舊服大功,請加為期;眾子婦,舊服小功,今請與兄弟子婦同為大功九月;嫂叔,舊無服,今請服小功五月。其弟妻及夫兄亦小功五月。舅,舊服緦麻,請加與從母同服小功五月。
삼가 살피건대 증조부모는 예전에 자최 석 달이었으나 청컨대 더하여 자최 다섯 달로 하고, 맏며느리는 예전에 대공이었으나 청컨대 더하여 일 년으로 하며, 여러 아들의 며느리는 예전에 소공이었으나 이제 청컨대 형제 아들의 며느리와 같이 대공 아홉 달로 하고, 형수와 시아주버니는 예전에 복이 없었으나 이제 청컨대 소공 다섯 달로 하며, 그 아우의 아내와 남편의 형도 또한 소공 다섯 달로 하고, 외숙은 예전에 시마였으나 청컨대 더하여 이모와 같이 소공 다섯 달로 하소서.
詔從其議。此並魏徵之詞也。
조서로 그 의논을 좇았다. 이는 아울러 위징의 말이다.
貞觀十七年十二月癸丑,太宗謂侍臣曰:「今日是朕生日。俗間以生日可為喜樂,在朕情,翻成感思。君臨天下,富有四海,而追求侍養,永不可得。仲由懷負米之恨,良有以也。況《詩》云:『哀哀父母,生我劬勞。』奈何以劬勞之辰,遂為宴樂之事!甚是乖於禮度。」因而泣下久之。
정관 십칠 년 십이월 계축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짐의 생일이다. 세속에서는 생일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을 만하다 하나, 짐의 정에는 도리어 그리움이 된다. 천하에 임금으로 임하여 넉넉히 사해를 두었으나 모시고 봉양하기를 좇아 구하여도 길이 얻을 수 없다. 중유가 쌀 지던 한을 품은 것이 참으로 까닭이 있다. 하물며 『시경』에 이르기를 『애달프다 부모여, 나를 낳아 수고로우셨다』 하였다. 어찌 수고로우시던 날을 마침내 잔치하고 즐기는 일로 삼겠는가. 예의 법도에 몹시 어긋난다.」
그러고는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太常少卿祖孝孫奏所定新樂。太宗曰:「禮樂之作,是聖人緣物設教,以為撙節,治政善惡,豈此之由?」御史大夫杜淹對曰:「前代興亡,實由於樂。陳將亡也為《玉樹後庭花》,齊將亡也而為《伴侶曲》,行路聞之,莫不悲泣,所謂亡國之音。以是觀之,實由於樂。」太宗曰:「不然,夫音聲豈能感人?歡者聞之則悅,哀者聽之則悲。悲悅在於人心,非由樂也。將亡之政,其人心苦,然苦心相感,故聞之則悲耳。何樂聲哀怨,能使悅者悲乎?今《玉樹》、《伴侶》之曲,其聲具存,朕能為公奏之,知公必不悲耳。」尚書右丞魏徵進曰:「古人稱:禮云,禮云,玉帛云乎哉!樂云,樂云,鐘鼓云乎哉!樂在人和,不由音調。」太宗然之。
태상소경 조효손이 정한 새 풍류를 아뢰었다. 태종이 말하였다.
「예와 악을 지은 것은 성인이 사물을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스스로 누르고 덜게 한 것이다. 정사를 다스림의 착함과 모짊이 어찌 이에서 말미암겠는가.」
어사대부 두엄이 대답하였다.
「앞선 세상의 흥함과 망함이 참으로 풍류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진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매 「옥수후정화」를 지었고 제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매 「반려곡」을 지었는데, 길 가는 이가 이를 듣고 슬퍼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른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소리입니다. 이로 보건대 참으로 풍류에서 말미암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무릇 소리가 어찌 사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기뻐하는 이가 들으면 곧 즐겁고 슬퍼하는 이가 들으면 곧 슬퍼진다. 슬픔과 즐거움은 사람의 마음에 있지 풍류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장차 망하려는 정사에서는 그 사람의 마음이 괴로운데, 괴로운 마음이 서로 느끼는 까닭에 이를 들으면 곧 슬플 뿐이다. 어찌 풍류 소리가 슬프고 원망스러워 기뻐하는 이를 슬프게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옥수」와 「반려」의 곡조가 그 소리가 다 남아 있으니 짐이 공을 위해 연주할 수 있다. 공이 반드시 슬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다.」
상서우승 위징이 나아가 말하였다.
「옛사람이 일컫기를 『예라 예라 하지만 옥과 비단을 이르겠는가. 악이라 악이라 하지만 종과 북을 이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악은 사람의 화함에 있지 소리의 가락에서 말미암지 않습니다.」
태종이 그렇게 여겼다.
貞觀七年,太常卿蕭瑀奏言:「今《破陳樂舞》,天下之所共傳,然美盛德之形容,尚有所未盡。前後之所破劉武周、薛舉、竇建德、王世充等,臣願圖其形狀,以寫戰勝攻取之容。」太宗曰:「朕當四方未定,因為天下救焚拯溺,故不獲已,乃行戰伐之事,所以人間遂有此舞,國家因茲亦制其曲。然雅樂之容,止得陳其梗概,若委曲寫之,則其狀易識。朕以見在將相,多有曾經受彼驅使者,既經為一日君臣,今若重見其被擒獲之勢,必當有所不忍,我為此等,所以不為也。」蕭瑀謝曰:「此事非臣思慮所及。」
정관 칠 년에 태상경 소우가 아뢰었다.
「이제 「파진악무」는 천하가 함께 전하는 바이나, 성한 덕을 아름답게 그리는 데는 오히려 다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앞뒤로 무찌른 유무주와 설거와 두건덕과 왕세충 등을 신은 그 모습을 그려 싸워 이기고 쳐서 취한 모양을 그려 내기를 바랍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이 사방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를 만나 천하를 위해 불에서 건지고 물에서 건져야 했으므로 마지못하여 이에 싸우고 치는 일을 행하였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마침내 이 춤이 있게 되었고 나라도 이로 인해 또한 그 곡을 지었다. 그러나 우아한 풍류의 모습은 다만 그 큰 줄기만 벌여 놓을 수 있을 뿐이니, 만약 굽이굽이 그려 낸다면 곧 그 모양을 알아보기 쉽다. 짐이 보건대 지금 있는 장수와 재상 가운데 일찍이 그들에게 부림을 받은 이가 많다. 이미 하루라도 임금과 신하가 되었던 터에, 이제 만약 그가 사로잡히던 형세를 거듭 본다면 반드시 마땅히 차마 못 할 바가 있으리라. 내가 이들을 위하는 까닭에 하지 않는 것이다.」
소우가 사례하였다.
「이 일은 신의 생각과 헤아림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