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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安邊第三十六

정관정요 貞觀政要 · 오긍(吳兢) · 8세기 초 · 단락 6 · 한자 2,145자 · 낭독 8.6분

「정관정요」 변방을 편안케 함을 논하다 「論安邊第三十六」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당 태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말을 주제별로 모은 책. 임금의 길에서 시작해 간언을 받아들이는 법, 벼슬아치를 고르는 법, 형벌과 세금과 정벌을 거쳐 「끝을 삼감」으로 끝난다. 위징이 낯을 맞대고 꺾어 말하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책의 뼈대다. 고구려 안시성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며 성주에게 비단을 내린 일, 방현령이 죽어 가며 요동 정벌을 말린 상소도 여기에 있다.

貞觀四年,李靖擊突厥頡利,敗之,其部落多來歸降者。詔議安邊之策,中書令溫彥博議:「請於河南處之。準漢建武時,置降匈奴於五原塞下,全其部落,得為捍蔽,又不離其土俗,因而撫之,一則實空虛之地,二則示無猜之心,是含育之道也。」太宗從之。秘書監魏徵曰:「匈奴自古至今,未有如斯之破敗,此是上天剿絕,宗廟神武。且其世寇中國,萬姓冤仇,陛下以其為降,不能誅滅,即宜遣發河北,居其舊土。匈奴人面獸心,非我族類,強必寇盜,弱則卑伏,不顧恩義,其天性也。秦、漢患之者若是,故時發猛將以擊之,收其河南以為郡縣。陛下以內地居之,且今降者幾至十萬,數年之後,滋息過倍,居我肘腋,甫邇王畿,心腹之疾,將為後患,尤不可處以河南也。」溫彥博曰:「天子之於萬物也,天覆地載,有歸我者則必養之。今突厥破除,餘落歸附,陛下不加憐湣,棄而不納,非天地之道,阻四夷之意,臣愚甚謂不可,宜處之河南。所謂死而生之,亡而存之,懷我厚恩,終無叛逆。」魏徵曰:「晉代有魏時,胡部落分居近郡,江統勸逐出塞外,武帝不用其言,數年之後,遂傾瀍、洛。前代覆車,殷鑒不遠。陛下必用彥博言,遣居河南,所謂養獸自遺患也。」彥博又曰:「臣聞聖人之道,無所不通。突厥餘魂,以命歸我,收居內地,教以禮法,選其酋首,遣居宿衛,畏威懷德,何患之有?且光武居河南單於於內郡,以為漢藩翰,終於一代,不有叛逆。」又曰:「隋文帝勞兵馬,費倉庫,樹立可汗,令復其國,後孤恩失信,圍煬帝於雁門。今陛下仁厚,從其所欲,河南、河北,任情居住,各有酋長,不相統屬,力散勢分,安能為害?」給事中杜楚客進曰:「北狄人面獸心,難以德懷,易以威服。今令其部落散處河南,逼近中華,久必為患。至如雁門之役,雖是突厥背恩,自由隋主無道。中國以之喪亂,豈得云興復亡國以致此禍?夷不亂華,前哲明訓,存亡繼絕,列聖通規。臣恐事不師古,難以長久。」太宗嘉其言,方務懷柔,未之從也。卒用彥博策,自幽州至靈州,置順、祐、化、長四州都督府以處之,其人居長安者近且萬家。

정관 사 년에 이정이 돌궐 힐리를 쳐 무찌르니 그 부락에서 돌아와 항복하는 이가 많았다. 조서로 변방을 편안케 할 계책을 의논하게 하였다. 중서령 온언박이 의논하였다.

「청컨대 하남에 두소서. 한나라 건무 때 항복한 흉노를 오원 요새 아래에 두어 그 부락을 온전히 하고 막이 되게 한 일에 견주고, 또 그 땅의 풍속을 떠나지 않게 하여 그대로 어루만지십시오. 하나는 곧 빈 땅을 채우는 것이요, 둘은 곧 시새우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것이니 이것이 머금어 기르는 도입니다.」

태종이 이를 좇았다. 비서감 위징이 말하였다.

「흉노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처럼 무너지고 무너진 적이 없으니, 이는 위 하늘이 끊어 없앤 것이요 종묘의 신령한 무예입니다. 또 그들이 대대로 중국을 도적질하여 만백성의 원수인데, 폐하께서 그들이 항복하였다 하여 베어 없애지 못하시겠거든 곧 마땅히 하북으로 보내 그 옛 땅에 살게 하셔야 합니다.

흉노는 사람의 낯에 짐승의 마음이라 우리 겨레가 아닙니다. 굳세면 반드시 도적질하고 약하면 곧 낮추어 엎드리며 은혜와 의로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그 타고난 성품입니다. 진(秦)나라와 한나라가 이를 걱정한 것이 이와 같았으므로, 때로 사나운 장수를 내어 이를 치고 그 하남을 거두어 군과 현으로 삼았습니다.

폐하께서 안쪽 땅에 그들을 살게 하시는데, 또 지금 항복한 이가 거의 십만에 이르고 몇 해 뒤에는 불어남이 곱절을 넘을 것입니다. 우리 팔꿈치와 겨드랑이에 살면서 왕의 서울에 갓 가까우니 가슴과 배의 병이라 장차 뒷걱정이 됩니다. 더욱 하남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온언박이 말하였다.

「천자가 만물에 대함은 하늘이 덮고 땅이 싣는 것과 같아, 나에게 돌아오는 이가 있으면 곧 반드시 이를 길러야 합니다. 이제 돌궐이 무너져 없어지고 남은 무리가 붙어 돌아왔는데, 폐하께서 가엾이 여기지 않으시고 버려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하늘과 땅의 도가 아니요 사방 오랑캐의 뜻을 막는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으나 몹시 옳지 않다 여기니, 마땅히 하남에 두어야 합니다. 이른바 죽을 것을 살리고 없어질 것을 남기는 것이니, 우리의 두터운 은혜를 품어 끝내 배반하고 거스름이 없을 것입니다.」

위징이 말하였다.

「진(晉)나라 시대에 위나라 때의 오랑캐 부락이 가까운 군에 나뉘어 살았는데, 강통이 요새 밖으로 내쫓기를 권하였으나 무제가 그 말을 쓰지 않아 몇 해 뒤에 마침내 전수와 낙수 지방이 기울었습니다. 앞선 세상의 엎어진 수레라 은나라의 거울이 멀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반드시 언박의 말을 쓰시어 하남에 살게 하시면 이른바 짐승을 길러 스스로 걱정을 남기는 것입니다.」

언박이 또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성인의 도는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 합니다. 돌궐의 남은 넋이 목숨을 가지고 우리에게 돌아왔으니, 거두어 안쪽 땅에 살게 하고 예와 법을 가르치며 그 우두머리를 골라 보내 숙위하게 하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품을 터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또 광무제가 하남의 선우를 안쪽 군에 살게 하여 한나라의 울타리로 삼으니, 한 대가 끝나도록 배반하고 거스름이 있지 않았습니다.」

또 말하였다.

「수 문제가 군사와 말을 수고롭게 하고 곳간을 쓰며 가한을 세워 그 나라를 되찾게 하였는데, 뒤에 은혜를 저버리고 믿음을 잃어 안문에서 양제를 에워쌌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어질고 두터워 그 바라는 바를 좇으시고, 하남과 하북에 정에 맡겨 살게 하며 저마다 우두머리가 있어 서로 거느려 붙지 않게 하시면, 힘이 흩어지고 형세가 나뉘는데 어찌 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급사중 두초객이 나아가 말하였다.

「북쪽 오랑캐는 사람의 낯에 짐승의 마음이라 덕으로 품기 어렵고 위엄으로 복종시키기 쉽습니다. 이제 그 부락을 하남에 흩어 살게 하여 중화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면 오래되면 반드시 걱정이 됩니다.

안문의 싸움 같은 것은 비록 돌궐이 은혜를 등진 것이나 수나라 임금이 도가 없음에서 절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중국이 이로써 상하고 어지러워졌으니, 어찌 망한 나라를 일으켜 되찾아 준 것이 이 재앙을 부른 것이라 이르겠습니까.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함은 앞선 슬기로운 이의 밝은 가르침이요, 없어진 것을 남기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여러 성인의 통하는 법도입니다. 신은 일이 옛것을 스승 삼지 않으면 길고 오래가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태종이 그 말을 아름답게 여겼으나 바야흐로 품어 부드럽게 하기에 힘쓰던 터라 이를 좇지 않았다. 마침내 언박의 계책을 써서 유주에서 영주에 이르기까지 순·우·화·장 네 고을에 도독부를 두어 그들을 두었는데, 그 사람으로 장안에 사는 이가 거의 만 집에 가까웠다.

自突厥頡利破後,諸部落首領來降者,皆拜將軍中郎將,布列朝廷,五品以上百餘人,殆與朝士相半。惟拓拔不至,又遣招慰之,使者相望於道。涼州都督李大亮以為於事無益,徒費中國,上疏曰:「臣聞欲綏遠者必先安近。中國百姓,天下根本,四夷之人,猶於枝葉,擾其根本以厚枝葉,而求久安,未之有也。自古明王,化中國以信,馭夷狄以權。故《春秋》云:『戎狄豺狼,不可厭也;諸夏親昵,不可棄也。』自陛下君臨區宇,深根固本,人逸兵強,九州殷富,四夷自服。今者招致突厥,雖入提封,臣愚稍覺勞費,未悟其有益也。然河西民庶,鎮禦藩夷,州縣蕭條,戶口鮮少,加因隋亂,減耗尤多,突厥未平之前,尚不安業,匈奴微弱以來,始就農畝,若即勞役,恐致防損,以臣愚惑,請停招慰。且謂之荒服者,故臣而不納。是以周室愛民攘狄,竟延八百之齡;秦王輕戰事胡,故四十載而絕滅。漢文養兵靜守,天下安豐;孝武揚威遠略,海內虛耗,雖悔輪臺,追已不及。至於隋室,早得伊吾,兼統鄯善,且既得之後,勞費日甚,虛內致外,竟損無益。遠尋秦、漢,近觀隋室,動靜安危,昭然備矣。伊吾雖已臣附,遠在藩磧,民非夏人,地多沙鹵。其自豎立稱藩附庸者,請羈縻受之,使居塞外,必畏威懷德,永為藩臣,蓋行虛惠而收實福矣。近日突厥傾國入朝,既不能俘之江淮,以變其俗,乃置於內地,去京不遠,雖則寬仁之義,亦非久安之計也。每見一人初降,賜物五匹,袍一領,酋長悉授大官,祿厚位尊,理多糜費。以中國之租賦,供積惡之兇虜,其眾益多,非中國之利也。」太宗不納。

돌궐 힐리가 무너진 뒤로 여러 부락 우두머리로 와서 항복한 이에게 다 장군과 중랑장을 주어 조정에 벌여 세우니, 오품 이상이 백여 사람이라 거의 조정 선비와 서로 반이었다. 오직 탁발만이 이르지 않으므로 또 사람을 보내 불러 위로하니 사신이 길에서 서로 바라볼 지경이었다.

양주도독 이대량이 일에 보탬이 없고 한갓 중국을 쓸 뿐이라 여겨 상소하였다.

「신이 듣건대 먼 곳을 편안케 하려는 이는 반드시 먼저 가까운 곳을 편안히 한다 합니다. 중국 백성은 천하의 뿌리와 밑동이요 사방 오랑캐 사람은 마치 가지와 잎 같습니다. 그 뿌리와 밑동을 흔들어 가지와 잎을 두터이 하면서 오래 편안하기를 구하는 일은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밝은 왕은 중국을 믿음으로 가르치고 오랑캐를 저울질로 부렸습니다. 그러므로 『춘추』에 이르기를 『융과 적은 승냥이와 이리라 만족을 모르고, 여러 중화는 가까이 친하니 버릴 수 없다』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온 누리에 임금으로 임하신 뒤로 뿌리를 깊이 하고 밑동을 굳혀, 사람이 편안하고 군사가 굳세며 아홉 고을이 넉넉하여 사방 오랑캐가 절로 복종합니다. 그런데 이제 돌궐을 불러들여 비록 봉토 안에 들였으나, 신은 어리석어 차츰 수고롭고 비용이 든다고 느낄 뿐 그 보탬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서의 백성은 변방 오랑캐를 눌러 막느라 고을과 현이 쓸쓸하고 호구가 드물고 적습니다. 게다가 수나라 어지러움으로 인해 줄고 닳음이 더욱 많았습니다. 돌궐이 아직 평정되기 전에는 오히려 업에 편안하지 못하였고, 흉노가 미약해진 뒤에야 비로소 밭일에 나아갔습니다. 만약 곧 부역시키면 지키고 막는 데 덜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의 어리석고 미혹한 생각으로는 청컨대 불러 위로함을 그치소서.

또 거친 땅이라 이르는 것은 그러므로 신하로 삼되 들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나라 왕실은 백성을 사랑하고 오랑캐를 물리쳐 마침내 팔백 년의 나이를 늘였고, 진나라 왕은 싸움을 가벼이 여기고 오랑캐를 일삼아 마흔 해에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한 문제는 군사를 기르고 고요히 지켜 천하가 편안하고 넉넉하였고, 효무제는 위엄을 드날리고 멀리 꾀하여 나라 안이 비고 닳았으니, 비록 윤대를 뉘우쳤으나 좇아도 이미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수나라 왕실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이오를 얻고 아울러 선선을 거느렸으나, 이미 얻은 뒤에 수고와 비용이 날로 심하여 안을 비워 밖에 이르니 마침내 덜기만 하고 보탬이 없었습니다. 멀리 진나라와 한나라를 찾고 가까이 수나라 왕실을 보면 움직임과 고요함과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밝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오가 비록 이미 신하로 붙었으나 멀리 변방 모래벌에 있어 백성이 중화 사람이 아니고 땅에 모래와 소금기가 많습니다. 그 스스로 서서 번방이라 일컫고 붙좇는 이들은 청컨대 굴레만 씌워 받아들여 요새 밖에 살게 하시면, 반드시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품어 길이 울타리 신하가 될 것이니, 대개 헛된 은혜를 행하고 실속 있는 복을 거두는 것입니다.

요사이 돌궐이 온 나라가 조정에 들어왔는데, 이미 그들을 강회 지방에 사로잡아 그 풍속을 바꾸게 하지 못하고 이에 안쪽 땅에 두어 서울에서 멀지 않게 하셨습니다. 비록 너그럽고 어진 뜻이나 또한 오래 편안할 계책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처음 항복할 때마다 물건 다섯 필과 도포 한 벌을 내리고 우두머리는 다 큰 벼슬을 주어 녹이 두텁고 자리가 높으니, 이치가 흔히 헛되이 쓰는 것이 많습니다. 중국의 조세로 모짊을 쌓은 흉악한 오랑캐를 대며 그 무리가 더욱 많아지니 중국의 이로움이 아닙니다.」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十三年,太宗幸九成宮。突利可汗弟中郎將阿史那結社率陰結所部,並擁突利子賀羅鶻夜犯御營,事敗,皆捕斬之。太宗自是不直突厥,悔處其部眾於中國,還其舊部於河北,建牙於故定襄城,立李思摩為乙彌泥熟俟利苾可汗以主之。因謂侍臣曰「中國百姓,實天下之根本,四夷之人,乃同枝葉,擾其根本以厚枝葉,而求久安,未之有也。初不納魏徵言,遂覺勞費日甚,幾失久安之道。」

십삼 년에 태종이 구성궁에 거둥하였다. 돌리 가한의 아우 중랑장 아사나결사솔이 몰래 제 부하를 맺고 아울러 돌리의 아들 하라골을 끼고 밤에 임금의 진영을 범하였다. 일이 무너지자 다 잡아 베었다.

태종이 이로부터 돌궐을 곧게 여기지 않아, 그 부하 무리를 중국에 둔 것을 뉘우치고 그 옛 부락을 하북으로 돌려보내 옛 정양성에 대장기를 세우게 하고, 이사마를 세워 을미니숙사리필가한으로 삼아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중국 백성은 참으로 천하의 뿌리와 밑동이요 사방 오랑캐 사람은 곧 가지와 잎과 같다. 그 뿌리와 밑동을 흔들어 가지와 잎을 두터이 하면서 오래 편안하기를 구하는 일은 있어 본 적이 없다. 처음에 위징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마침내 수고와 비용이 날로 심함을 느꼈고 거의 오래 편안할 도를 잃을 뻔하였다.」

貞觀十四年,侯君集平高昌之後,太宗欲以其地為州縣。魏徵曰:「陛下初臨天下,高昌王先來朝謁,自後數有商胡稱其遏絕貢獻,加之不禮大國詔使,遂使王誅載加。若罪止文泰,斯亦可矣。未若因撫其民而立其子,所謂伐罪吊民,威德被於遐外,為國之善者也。今若利其土壤以為州縣,常須千餘人鎮守,數年一易。每來往交替,死者十有三四,遣辦衣資,離別親戚。十年之後,隴右空虛,陛下終不得高昌撮谷尺布以助於中國。所謂散有用而事無用,臣未見其可。」太宗不從,竟以其地置西州,仍以西州為安西都護府,每歲調發千餘人防遏其地。

정관 십사 년에 후군집이 고창을 평정한 뒤에 태종이 그 땅을 주와 현으로 삼으려 하였다. 위징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처음 천하에 임하셨을 때 고창왕이 먼저 와서 조회하여 뵈었습니다. 그 뒤로 여러 번 장사하는 오랑캐가 그들이 조공을 막고 끊었다 일컫고, 게다가 큰 나라의 조서 가진 사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 하여 마침내 왕의 벰이 더해졌습니다. 만약 죄가 문태에 그친다면 이 또한 될 만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 백성을 어루만지고 그 아들을 세우는 것만 못합니다. 이른바 죄를 치고 백성을 위로하여 위엄과 덕이 먼 밖에 덮이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길입니다.

이제 만약 그 땅을 이롭게 여겨 주와 현으로 삼으면, 늘 모름지기 천여 사람이 진 치고 지켜야 하고 몇 해에 한 번 바꿔야 합니다. 오갈 때마다 갈마들면 죽는 이가 열에 서넛이요, 옷과 밑천을 마련해 보내고 친척과 헤어져야 합니다. 열 해 뒤에는 농우 지방이 텅 비고, 폐하께서 끝내 고창에서 한 줌 곡식이나 한 자 베도 얻어 중국을 돕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른바 쓸모 있는 것을 흩어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이니 신은 그 옳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태종이 좇지 않고 끝내 그 땅에 서주를 두었으며, 이어 서주를 안서도호부로 삼아 해마다 천여 사람을 뽑아 보내 그 땅을 지키고 막게 하였다.

黃門侍郎褚遂良亦以為不可,上疏曰:「臣聞古者哲后臨朝,明王創業,必先華夏而後夷狄,廣諸德化,不事遐荒。是以周宣薄伐,至境而反;始皇遠塞,中國分離。陛下誅滅高昌,威加西域,收其鯨鯢,以為州縣。然則王師初發之歲,河西供役之年,飛芻挽粟,十室九空,數郡蕭然,五年不復。陛下每歲遣千餘人而遠事屯戍,終年離別,萬里思歸。去者資裝,自須營辦,既賣菽粟,傾其機杼。經途死亡,復在言外。兼遣罪人,增其防遏,所遣之內,復有逃亡,官司捕捉,為國生事。高昌途路,沙磧千里,冬風冰冽,夏風如焚,行人遇之多死。《易》云『安不忘危,治不忘亂。』設令張掖塵飛,酒泉烽舉,陛下豈能得高昌一人菽粟而及事乎?終須發隴右諸州,星馳電擊。由斯而言,此河西者方於心腹,彼高昌者他人手足,豈得糜費中華,以事無用?陛下平頡利於沙塞,滅吐渾於西海,突厥餘落,為立可汗,葉渾遺萌,更樹君長,復立高昌,非無前例,此所謂有罪而誅之,既服而存之。宜擇高昌可立者,徵給首領,遣還本國,負戴洪恩,長為藩翰。中國不擾,既富且寧,傳之子孫,以貽後代。」疏奏,不納。

황문시랑 저수량 또한 옳지 않다 여겨 상소하였다.

「신이 듣건대 옛날 슬기로운 임금이 조정에 임하고 밝은 왕이 업을 열 때는, 반드시 중화를 먼저 하고 오랑캐를 뒤로 하며, 여러 덕과 가르침을 넓히고 먼 거친 곳을 일삼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서 주 선왕은 엷게 쳐서 지경에 이르러 돌아왔고, 시황은 멀리 요새를 쌓다가 중국이 나뉘어 헤어졌습니다.

폐하께서 고창을 베어 없애 위엄이 서역에 더해지고, 그 우두머리를 거두어 주와 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왕의 군사가 처음 떠나던 해와 하서가 부역에 이바지하던 해에, 꼴을 날리고 조를 끌어 열 집에 아홉이 비고 몇 군이 쓸쓸하여 다섯 해가 되도록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해마다 천여 사람을 보내 멀리 진 치고 지키는 일을 하게 하시니, 해가 다하도록 헤어져 있고 만 리에서 돌아가기를 그리워합니다. 가는 이의 밑천과 차림은 절로 모름지기 마련해야 하니, 이미 콩과 조를 팔고 그 베틀까지 기울입니다. 길을 지나다 죽는 일은 다시 말 밖에 있습니다. 아울러 죄인을 보내 그 지키고 막음을 더하는데, 보낸 이 가운데 다시 달아나는 이가 있어 관사가 잡으려 하니 나라를 위해 일을 냅니다.

고창 가는 길은 모래벌이 천 리라 겨울바람은 얼음처럼 차고 여름바람은 불타는 듯하여, 길 가는 이가 이를 만나면 흔히 죽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설사 장액에 티끌이 날고 주천에 봉화가 오른다면, 폐하께서 어찌 고창의 한 사람 콩과 조를 얻어 일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끝내 모름지기 농우 여러 고을을 내어 별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쳐야 합니다.

이로 말하면 이 하서는 가슴과 배에 견주고 저 고창은 남의 손발이니, 어찌 중화를 헛되이 써서 쓸모없는 것을 일삼겠습니까. 폐하께서 힐리를 모래 요새에서 평정하고 토욕혼을 서해에서 없애시매, 돌궐의 남은 부락에는 가한을 세워 주시고 토욕혼의 남은 싹에는 다시 임금과 어른을 세워 주셨습니다. 고창을 다시 세우는 것도 앞선 예가 없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죄가 있으면 베고 복종하면 남겨 두는 것입니다.

마땅히 고창에서 세울 만한 이를 골라 우두머리를 불러 주고 본디 나라로 돌려보내시면, 큰 은혜를 지고 이고 길이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중국이 시끄럽지 않아 이미 넉넉하고 또 편안하며,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뒷세상에 남기실 것입니다.」

상소를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至十六年,西突厥遣兵寇西州,太宗謂侍臣曰:「朕聞西州有警急,雖不足為害,然豈能無憂乎?往者初平高昌,魏徵、褚遂良勸朕立麴文泰子弟,依舊為國,朕竟不用其計,今日方自悔責。昔漢高祖遭平城之圍而賞婁敬,袁紹敗於官渡而誅田豐,朕恒以此二事為誡,寧得忘所言者乎!」

십육 년에 이르러 서돌궐이 군사를 보내 서주를 침노하였다.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짐이 서주에 급한 경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비록 해가 되기에 넉넉하지 않으나 어찌 걱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 처음 고창을 평정하였을 때 위징과 저수량이 짐에게 국문태의 자제를 세워 예전대로 나라를 삼게 하기를 권하였는데, 짐이 끝내 그 계책을 쓰지 않아 오늘에야 비로소 스스로 뉘우치고 꾸짖는다. 옛날 한 고조는 평성의 에워쌈을 만나고서 누경에게 상 주었고, 원소는 관도에서 무너지고서 전풍을 베었다. 짐이 늘 이 두 가지 일을 경계로 삼으니 어찌 말한 이를 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