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정관정요 › 거둥을 논하다

論行幸第三十七

정관정요 貞觀政要 · 오긍(吳兢) · 8세기 초 · 단락 4 · 한자 784자 · 낭독 3.1분

「정관정요」 거둥을 논하다 「論行幸第三十七」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당 태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말을 주제별로 모은 책. 임금의 길에서 시작해 간언을 받아들이는 법, 벼슬아치를 고르는 법, 형벌과 세금과 정벌을 거쳐 「끝을 삼감」으로 끝난다. 위징이 낯을 맞대고 꺾어 말하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책의 뼈대다. 고구려 안시성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며 성주에게 비단을 내린 일, 방현령이 죽어 가며 요동 정벌을 말린 상소도 여기에 있다.

貞觀初,太宗謂侍臣曰:「隋煬帝廣造宮室,以肆行幸。自西京至東都,離宮別館,相望道次,乃至并州、涿郡,無不悉然。馳道皆廣數百步,種樹以飾其傍。人力不堪,相聚為賊。逮至末年,尺土一人,非復己有。以此觀之,廣宮室,好行幸,竟有何益?此皆朕耳所聞,目所見,深以自誡。故不敢輕用人力,惟令百姓安靜,不有怨叛而已。」

정관 처음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수 양제가 궁실을 널리 지어 마음껏 거둥하였다. 서경에서 동도에 이르기까지 딴 궁궐과 딴 집이 길을 따라 서로 바라보았고, 이에 병주와 탁군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달리는 길은 다 넓이가 수백 걸음이요 나무를 심어 그 곁을 꾸몄다. 사람의 힘이 감당하지 못하여 서로 모여 도적이 되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한 자 땅과 한 사람도 다시 제 것이 아니었다.

이로 보건대 궁실을 널리 하고 거둥을 좋아하는 것이 끝내 무슨 보탬이 있는가. 이는 다 짐이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라 깊이 스스로 경계로 삼는다. 그러므로 감히 사람의 힘을 가벼이 쓰지 않고 오직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하고 고요하여 원망하고 배반함이 없게 할 뿐이다.」

貞觀十一年,太宗幸洛陽宮,泛舟於積翠池,顧謂侍臣曰:「此宮觀臺沼並煬帝所為,所謂驅役生民,窮此雕麗,復不能守此一都,以萬民為慮。好行幸不息,民所不堪。昔詩人云:『何草不黃?何日不行?』『小東大東,杼軸其空。』正謂此也。遂使天下怨叛,身死國滅,今其宮苑盡為我有。隋氏傾覆者,豈惟其君無道,亦由股肱無良。如宇文述、虞世基、裴蘊之徒,居高官,食厚祿,受人委任,惟行諂佞,蔽塞聰明,欲令其國無危,不可得也。」司空長孫無忌奏言:「隋氏之亡,其君則杜塞忠讜之言,臣則茍欲自全,左右有過,初不糾舉,寇盜滋蔓,亦不實陳。據此,即不惟天道,實由君臣不相匡弼。」太宗曰:「朕與卿等承其餘弊,惟須弘道移風,使萬世永賴矣。」

정관 십일 년에 태종이 낙양궁에 거둥하여 적취지에 배를 띄우고 곁에서 모시는 신하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궁궐과 누각과 대와 못은 아울러 양제가 지은 바다. 이른바 살아 있는 백성을 몰아 부려 이 새김과 고움을 다한 것인데, 다시 이 한 서울도 지키지 못하고 만백성을 걱정으로 삼지 못하였다. 거둥하기를 좋아하여 그치지 않으니 백성이 감당하지 못하는 바였다.

옛날 시인이 이르기를 『어느 풀이 누렇게 되지 않으며 어느 날인들 가지 않으랴』 하였고, 『작은 동쪽 큰 동쪽에 베틀의 북이 비었다』 하였으니 바로 이를 이름이다. 마침내 천하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몸이 죽고 나라가 없어지게 하였으니, 이제 그 궁궐과 동산이 다 내 것이 되었다.

수씨가 기울어 엎어진 것이 어찌 오직 그 임금이 도가 없어서겠는가. 또한 팔다리 같은 신하가 좋지 않은 데서도 말미암았다. 우문술과 우세기와 배온의 무리 같은 이들은 높은 벼슬에 있고 두터운 녹을 먹으며 남의 맡김을 받고서도 오직 아첨만 행하여 총명함을 가려 막았으니, 그 나라에 위태로움이 없게 하려 한들 될 수 없었다.」

사공 장손무기가 아뢰었다.

「수씨의 망함은 그 임금은 곧 충성되고 곧은 말을 막고, 신하는 곧 구차히 제 몸만 온전히 하려 하여 좌우에 허물이 있어도 처음부터 들추어 밝히지 않고 도적이 불어나 뻗어도 또한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곧 하늘의 도뿐 아니라 참으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바로잡고 돕지 않은 데서 말미암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이 경들과 그 남은 폐단을 이어받았으니 오직 모름지기 도를 넓히고 풍속을 옮겨 만대가 길이 힘입게 해야 한다.」

貞觀十三年,太宗謂魏徵等曰:「隋煬帝承文帝餘業,海內殷阜,若能常處關中,豈有傾敗?遂不顧百姓,行幸無期,徑往江都,不納董純、崔象等諫諍,身戮國滅,為天下笑。雖復帝祚長短,委以玄天,而福善禍淫,亦由人事。朕每思之,若欲君臣長久,國無危敗,君有違失,臣須極言。朕聞卿等規諫,縱不能當時即從,再三思審,必擇善而用之。」

정관 십삼 년에 태종이 위징 등에게 말하였다.

「수 양제가 문제의 남은 업을 이어받아 나라 안이 넉넉하고 넘쳤으니, 만약 늘 관중에 머무를 수 있었다면 어찌 기울어 무너짐이 있었겠는가. 마침내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거둥에 기약이 없어 곧장 강도로 가고, 동순과 최상 등의 간쟁을 받아들이지 않아 몸이 죽고 나라가 없어져 천하의 비웃음이 되었다.

비록 다시 황제의 복이 길고 짧음이 그윽한 하늘에 맡겨졌으나, 착한 이에게 복 주고 음란한 이에게 재앙 주는 것은 또한 사람의 일에서 말미암는다. 짐이 이를 생각할 때마다, 만약 임금과 신하가 길고 오래가고 나라에 위태로움과 무너짐이 없게 하려면, 임금에게 어김과 잃음이 있을 때 신하가 모름지기 끝까지 말해야 한다. 짐이 경들의 법도 있는 간언을 들으면, 설사 그때 곧 좇지 못하더라도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살펴 반드시 좋은 것을 골라 쓴다.」

貞觀十二年,太宗東巡狩,將入洛,次於顯仁宮,宮苑官司多被責罰。侍中魏徵進言曰:「陛下今幸洛州,為是舊征行處,庶其安定,故欲加恩故老。城郭之民未蒙德惠,官司苑監多及罪辜,或以供奉之物不精,又以不為獻食。此則不思止足,志在奢靡,既乖行幸本心,何以副百姓所望?隋主先命在下多作獻食,獻食不多,則有威罰。上之所好,下必有甚,競為無限,遂至滅亡。此非載籍所聞,陛下目所親見。為其無道,故天命陛下代之。當戰戰栗栗,每事省約,參蹤前列,昭訓子孫,奈何今日欲在人之下?陛下若以為足,今日不啻足矣;若以為不足,萬倍於此,亦不足也。」太宗大驚曰:「非公,朕不聞此言。自今已後,庶幾無如此事。」

정관 십이 년에 태종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장차 낙양에 들려고 현인궁에 머물렀는데, 궁궐과 동산의 벼슬아치가 흔히 꾸짖음과 벌을 받았다. 시중 위징이 나아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이제 낙주에 거둥하신 것은 이곳이 옛날 정벌하러 다니시던 곳이라, 거의 그들이 편안히 정해지기를 바라 옛 노인들에게 은혜를 더하려 하심입니다. 그런데 성곽의 백성은 아직 덕과 은혜를 입지 못하였는데 벼슬아치와 동산 맡은 이는 흔히 죄에 걸립니다. 더러는 받들어 바친 물건이 정하지 않다 하시고, 또 음식을 바치지 않았다 하십니다.

이는 곧 그침과 넉넉함을 생각하지 않고 뜻이 사치와 화려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거둥하신 본디 마음과 어긋나니 무엇으로 백성이 바라는 바에 맞추시겠습니까.

수나라 임금이 먼저 아랫사람에게 명하여 음식 바치기를 많이 하게 하고, 바친 음식이 많지 않으면 곧 위엄 있는 벌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좋아하는 바를 아래에서 반드시 더 심하게 하여 다투어 끝없이 하다가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옛 기록에서 들은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눈으로 몸소 보신 바입니다. 그가 도가 없었으므로 하늘이 폐하께 명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마땅히 벌벌 떨며 일마다 덜고 줄여 앞선 반열에 자취를 나란히 하고 자손에게 밝게 가르치셔야 하는데, 어찌 오늘 남의 아래에 있으려 하십니까. 폐하께서 만약 넉넉하다 여기시면 오늘도 넉넉할 뿐 아니라 남습니다. 만약 넉넉하지 않다 여기시면 이보다 만 곱절이라도 또한 넉넉하지 않습니다.」

태종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공이 아니면 짐이 이 말을 듣지 못하였으리라. 이제부터 뒤로는 거의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