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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夫餘國

진서 사이전 晉書 四夷傳 · 방현령(房玄齡) 등 · 648년 (당 정관 22) · 단락 2 · 한자 398자 · 낭독 1.6분

「진서 사이전」 한 권 「부여국」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진(晉)나라가 본 사방의 이웃들. 모용외에게 깨진 부여를 조서를 내려 되세워 준 이야기, 마한·진한의 풍속과 소도(蘇塗), 숙신의 호시와 석노, 그리고 형과 아우가 말싸움으로 갈라선 토욕혼 일곱 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1예왕의 인장

夫餘國,在玄菟北千餘里,南接鮮卑,北有弱水,地方二千里,戶八萬,有城邑宮室,地宜五穀。其人強勇,會同揖讓之儀有似中國。其出使,乃衣錦罽,以金銀飾腰。其法,殺人者死,沒入其家;盜者一責十二;男女淫,婦人妒,皆殺之。若有軍事,殺牛祭天,以其蹄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死者以生人殉葬,有槨無棺。其居喪,男女皆衣純白,婦人著布面衣,去玉佩。出善馬及貂豽、美珠,珠大如酸棗。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被破。其王印文稱「穢王之印」。國中有古穢城,本穢貃之城也。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여 리에 있으니, 남쪽은 선비에 닿고 북쪽에 약수가 있다. 땅은 사방 이천 리요 호수는 팔만이며, 성읍과 궁실이 있고 땅은 오곡에 알맞다. 그 사람들은 굳세고 용감하며, 모여서 읍하고 사양하는 거동이 중국과 비슷하다. 사신으로 나갈 때는 비단과 모직을 입고 금은으로 허리를 꾸민다.

그 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그 집안을 몰수하며, 도둑질한 자는 하나에 열둘을 물리고, 남녀가 음란하거나 부인이 시새우면 다 죽인다. 군사 일이 있으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고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니, 발굽이 벌어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다. 죽은 이에게는 산 사람을 순장하며, 곽은 있고 관은 없다. 상을 입으면 남녀가 다 순백을 입고, 부인은 베로 낯가리개를 하며 옥패를 뗀다.

좋은 말과 담비·너구리와 아름다운 구슬이 나는데, 구슬은 크기가 멧대추만 하다. 그 나라는 넉넉하고 부유하여 선대 이래 깨진 적이 없다. 왕의 인장 글은 「예왕지인(穢王之印)」이라 하고, 나라 안에 옛 예성(穢城)이 있으니 본디 예맥의 성이다.

2나라를 되세워 준 조서

武帝時,頻來朝貢,至太康六年,爲慕容廆所襲破,其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帝爲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爲惡虜所滅,其湣念之。若其遺類足以復國者,當爲之方計,使得存立。」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失於機略。詔免嬰,以何龕代之。明年,夫餘後王依羅遣詣龕,求率見人還復舊國。仍請援。龕上列,遣督郵賈沈以兵送之。廆又要之于路,沈與戰,大敗之,廆衆退,羅得復國。爾後每爲廆掠其種人,賣於中國。帝湣之,又發詔以官物贖還,下司、冀二州,禁市夫餘之口。

무제 때 자주 와서 조공하더니, 태강 육년에 모용외에게 습격당해 깨져 왕 의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지켰다. 무제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이 대대로 충효를 지켰는데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당했으니 심히 가엾다. 그 남은 무리로 나라를 회복할 만하거든 마땅히 방책을 세워 주어 살아서 서게 하라.」

담당 관사가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기략을 그르쳤다고 아뢰니, 조서로 영을 파면하고 하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듬해 부여 후왕 의라가 하감에게 사자를 보내, 남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돌아가 옛 나라를 회복하겠다며 도움을 청하였다. 하감이 위에 아뢰고 독우 가침을 보내 군사로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또 길에서 맞아 막으니, 가침이 싸워 크게 깨뜨리자 외의 무리가 물러가고 의라가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뒤에도 모용외가 늘 그 종족 사람들을 노략해 중국에 팔았다. 무제가 가엾이 여겨 또 조서를 내려 관물(官物)로 사서 돌려보내게 하고, 사주·기주 두 주에 명해 부여 사람을 사고파는 것을 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