感虛篇
儒者傳書言:堯之時,十日并出,萬物焦枯。堯上射十日,九日去,一日常出。此言虛也。夫人之射也,不過百步矢力盡矣。日之行也,行天星度。天之去人以萬里數,堯上射之,安能得日?使堯之時,天地相近不過百步,則堯射日,矢能及之;過百步,不能得也。假使堯時天地相近,堯射得之,猶不能傷日。傷日何肯去?何則?日,火也。使在地之火附一把矩,人從旁射之,雖中,安能滅之?地火不為見射而滅,天火何為見射而去?此欲言堯以精誠射之,精誠所加,金石為虧,蓋誠無堅則亦無遠矣。夫水與火,各一性也。能射火而滅之,則當射水而除之。洪水之時,流濫中國,為民大害。堯何不推精誠射而除之?堯能射日,使火不為害,不能射河,使水不為害。夫射水不能卻水,則知射日之語虛非實也。或曰:日,氣也。射雖不及,精誠滅之。夫天亦遠,使其為氣,則與日月同;使其為體,則與金石等。以堯之精誠滅日虧金石,上射日則能穿天乎?世稱桀、紂之惡,射天而地;譽高宗之德,政消桑谷。今堯不能以德滅十日,而必射之;是德不若高宗,惡與桀、紂同也。安能以精誠獲天之應也?
유자가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요 때에 해 열 개가 나란히 나와 만물이 타고 말랐다. 요가 위로 열 개의 해를 쏘니 아홉 개가 떨어지고 하나만 늘 나온다 한다. 이 말은 헛되다. 무릇 사람이 쏘는 것은 백 걸음을 넘지 못하여 화살의 힘이 다한다. 해의 감은 하늘의 별자리 도수를 간다. 하늘이 사람에게서 떨어진 것이 만 리로 헤아리는데 요가 위로 쏜들 어찌 해를 맞히겠는가. 요 때에 하늘과 땅이 서로 가까워 백 걸음을 넘지 않았다면 요가 해를 쏘아 화살이 미칠 수 있으나, 백 걸음을 넘으면 맞힐 수 없다. 가령 요 때에 하늘과 땅이 서로 가까워 요가 쏘아 맞혔다 하여도 오히려 해를 상하게 할 수 없다. 상하게 하지 못하는데 어찌 떨어지려 하겠는가. 어째서인가. 해는 불이다. 땅에 있는 불이 한 줌 삼대에 붙었는데 사람이 곁에서 쏘면 비록 맞혀도 어찌 끌 수 있겠는가. 땅의 불도 쏘였다고 꺼지지 않는데 하늘의 불이 어찌 쏘였다고 떨어지겠는가.
이는 요가 정성으로 쏘아 정성이 더해진 바에 쇠와 돌도 이지러진다 말하려는 것이니, 정성에 굳은 것이 없다면 또한 먼 것도 없을 것이다. 무릇 물과 불은 저마다 한 성품이다. 불을 쏘아 끌 수 있다면 마땅히 물을 쏘아 없앨 수 있어야 한다. 큰물 때에 흘러넘쳐 중국에 백성의 큰 해가 되었다. 요는 어찌 정성을 미루어 쏘아 없애지 않았는가. 요가 해를 쏘아 불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으면서 하수를 쏘아 물이 해를 끼치지 못하게는 할 수 없었다. 무릇 물을 쏘아 물을 물리치지 못하니 해를 쏘았다는 말이 헛되어 실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한다. 해는 기운이니 쏘아서 미치지 못하여도 정성이 끈다는 것이다. 무릇 하늘도 멀어서 기운이라면 해와 달과 같고 몸이라면 쇠와 돌과 같다. 요의 정성으로 해를 끄고 쇠와 돌을 이지러뜨린다면 위로 해를 쏘아 하늘을 뚫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걸과 주의 악을 일컬을 때 하늘을 쏘고 땅을 쳤다 하고, 고종의 덕을 기릴 때 정사로 뽕나무와 닥나무를 없앴다 한다. 이제 요가 덕으로 열 개의 해를 없애지 못하고 반드시 쏘았다면, 이는 덕이 고종만 못하고 악이 걸과 주와 같은 것이다. 어찌 정성으로 하늘의 응함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傳書言:武王伐紂,渡孟津,陽侯之波逆流而擊,疾風晦冥,人馬不見。於是武王左操黃鉞,右執白旄,目而麾之曰:「余在,天下誰敢害吾意者。」於是風霽波罷。此言虛也。武王渡孟津時,士眾喜樂,前歌後舞。天人同應,人喜天怒,非實宜也。前歌後舞,未必其實。麾風而止之,跡近為虛。夫風者,氣也;論者以為天地之號令也。武王誅紂是乎,天當安靜以佑之;如誅紂非乎,而天風者,怒也。武王不奉天令,求索己過,目言曰「余在,天下誰敢害吾者」,重天怒、增己之惡也,風何肯止?父母怒,子不改過,目大言,父母肯貰之乎?如風天所為,禍氣自然,是亦無知,不可目麾之故止。夫風猶雨也,使武王目以旄麾雨而止之乎!武王不能止雨,則亦不能止風。或時武王適麾之,風偶自止,世褒武王之德,則謂武王能止風矣。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무왕이 주(紂)를 치러 맹진을 건널 때 양후의 물결이 거슬러 흘러 치고 빠른 바람에 어두컴컴하여 사람과 말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무왕이 왼손에 누런 도끼를 잡고 오른손에 흰 깃대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휘두르며 말하였다. 「내가 있는데 천하에 누가 감히 내 뜻을 해치겠는가.」 이에 바람이 개고 물결이 그쳤다 한다. 이 말은 헛되다. 무왕이 맹진을 건널 때 군사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앞에서 노래하고 뒤에서 춤추었다. 하늘과 사람은 같이 응하는데 사람이 기뻐하고 하늘이 노한다는 것은 실상에 마땅하지 않다. 앞에서 노래하고 뒤에서 춤추었다는 것도 반드시 실상이 아니다. 바람을 휘둘러 그치게 하였다는 것은 자취가 헛됨에 가깝다.
무릇 바람이란 기운이니 논하는 이는 하늘과 땅의 호령이라 한다. 무왕이 주를 벤 것이 옳다면 하늘이 마땅히 고요히 도왔을 것이요, 주를 벤 것이 그르다면 하늘의 바람은 노여움이다. 무왕이 하늘의 명령을 받들지 않고 제 허물을 찾지도 않고 눈을 부릅뜨고 「내가 있는데 천하에 누가 감히 나를 해치겠는가」 하였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무겁게 하고 제 악을 더한 것이니 바람이 어찌 그치려 하겠는가. 어버이가 노하는데 자식이 허물을 고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치면 어버이가 용서하려 하겠는가. 바람이 하늘이 하는 바라면 재앙의 기운이 절로 그러한 것이니 이 또한 앎이 없어 눈을 부릅뜨고 휘두른다고 그치지 않는다. 무릇 바람은 비와 같다. 무왕이 눈을 부릅뜨고 깃대로 비를 휘둘러 그치게 할 수 있었겠는가. 무왕이 비를 그치게 할 수 없으면 또한 바람도 그치게 할 수 없다. 아마 무왕이 마침 휘두르고 바람이 우연히 절로 그쳤는데, 세상이 무왕의 덕을 기려 무왕이 바람을 그치게 할 수 있었다 한 것이다.
傳書言:魯(襄)〔陽〕公與韓戰,戰酣日暮,公援戈而麾之,日為之反三舍。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노양공이 한나라와 싸우는데 싸움이 한창일 때 해가 저물어 공이 창을 들어 휘두르니 해가 그를 위해 세 자리를 돌아왔다 한다.
此言虛也。凡人能以精誠感動天,專心一意,委務積神,精通於天,天為變動,然尚未可謂然。(襄)〔陽〕公志在戰,為日暮一麾,安能令日反?使聖人麾日,日終之反。(襄)〔陽〕公何人,而使日反乎!《鴻范》曰:「星有好風,星有好雨。日月之行,則有冬有夏。月之從星,則有風雨。」夫星與日月同精,日月不從星,星輒復變。明日月行有常度,不得從星之好惡也,安得從(襄)〔陽〕公之所欲?星之在天也,為日月舍,猶地有郵亭,為長吏廨也。二十八舍有分度,一舍十度,或增或減。
이 말은 헛되다. 무릇 사람이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마음을 오로지하고 뜻을 하나로 하여 일을 맡기고 정신을 쌓아 정기가 하늘에 통하면 하늘이 변동하겠지만, 그래도 아직 그렇다 할 수 없다. 양공은 뜻이 싸움에 있어 해가 저문다고 한 번 휘두른 것인데 어찌 해를 돌아오게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이 해를 휘둘러도 해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양공이 어떤 사람이기에 해를 돌아오게 하겠는가. 「홍범」에 이르기를 「별에는 바람을 좋아하는 것이 있고 별에는 비를 좋아하는 것이 있다. 해와 달의 감에 겨울이 있고 여름이 있다. 달이 별을 따르면 바람과 비가 있다」 하였다. 무릇 별은 해와 달과 정기가 같은데 해와 달이 별을 따르지 않으면 별이 곧 다시 변한다. 해와 달의 감에 일정한 도수가 있어 별의 좋아하고 싫어함을 따를 수 없음이 분명한데 어찌 양공이 바라는 바를 따르겠는가. 별이 하늘에 있는 것은 해와 달의 집이 되니 땅에 우정이 있어 벼슬아치의 관사가 되는 것과 같다. 스물여덟 집에 나뉜 도수가 있어 한 집이 열 도인데 더러 더하고 더러 덜한다.
言日反三舍,乃三十度也。日,日行一度。一麾之間,反三十日時所在度也。如謂舍為度,三度亦三日行也。一麾之間,令日卻三日也。宋景公推誠,出三善言,熒惑徙三舍。實論者猶謂之虛。(襄)〔陽〕公爭斗,惡日之暮,以此一戈麾,無誠心善言,日為之反,殆非其意哉!且日,火也,聖人麾火,終不能卻;(襄)〔陽〕公麾日,安能使反?或時戰時日正卯,戰迷,謂日之暮,麾之轉左,曲道日若卻。世好神怪,因謂之反,不道所謂也。
해가 세 자리를 돌아왔다 함은 곧 서른 도다. 해는 하루에 한 도를 간다. 한 번 휘두르는 사이에 서른 날 때 있던 도수로 돌아온 것이다. 집을 도라 한다면 세 도도 사흘의 감이다. 한 번 휘두르는 사이에 해를 사흘 물러가게 한 것이다. 송 경공이 정성을 미루어 세 착한 말을 내니 형혹이 세 자리를 옮겼다는 것도 실상을 논하는 이는 오히려 헛되다 한다. 양공이 다투어 싸우며 해가 저무는 것을 싫어하여 이 한 창을 휘둘렀는데 정성스러운 마음도 착한 말도 없이 해가 그를 위해 돌아왔다니 아마 그 뜻이 아닐 것이다. 또 해는 불이니 성인이 불을 휘둘러도 끝내 물리칠 수 없는데 양공이 해를 휘두른다고 어찌 돌아오게 하겠는가. 아마 싸울 때 해가 바로 묘의 자리에 있었는데 싸움에 홀려 해가 저문다 하고 휘둘러 왼쪽으로 돌자 굽은 길이라 해가 물러간 것 같았을 것이다. 세상이 신령하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여 이로 인해 돌아왔다 하고 무엇을 이르는지 말하지 않는다.
傳書言:荊軻為燕子謀刺秦王,白虹貫日。衛先生為秦畫長平之事,太白蝕昴。此言精感天,天為變動也。夫言白虹貫日,太白蝕昴,實也。言荊軻之謀,衛先生之畫,感動皇天,故白虹貫日,太白蝕昴者,虛也。夫以箸撞鐘,以算擊鼓,不能鳴者,所用撞擊之者,小也。今人之形不過七尺,以七尺形中精神,欲有所為,雖積銳意,猶箸撞鐘、算擊鼓也,安能動天?精非不誠,所用動者小也。且所欲害者人也,人不動,天反動乎!問曰:「人之害氣,能相動乎?」曰:「不能!」「豫讓欲害趙襄子,襄子心動。貫高欲篡高祖,高祖亦心動。二子懷精,故兩主振感。」曰:「禍變且至,身自有怪,非適人所能動也。何以驗之?時或遭狂人於途,以刃加己,狂人未必念害己身也,然而己身先時已有妖怪矣。由此言之,妖怪之至,禍變自凶之象,非欲害己者之所為也。且凶之人卜得惡兆,筮得凶卦,出門見之吉,占危睹禍氣,禍氣見於面,猶白虹太白見於天也。變見於天,妖出於人,上下適然,自相應也。」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형가가 연나라 태자를 위해 진왕을 찌를 것을 꾀하니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위 선생이 진나라를 위해 장평의 일을 꾀하니 태백성이 묘성을 먹었다 한다. 이는 정기가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변동하였다는 말이다. 무릇 흰 무지개가 해를 꿰고 태백성이 묘성을 먹었다는 것은 실상이다. 형가의 꾀와 위 선생의 계책이 하늘을 감동시켜 그래서 흰 무지개가 해를 꿰고 태백성이 묘성을 먹었다는 것은 헛되다. 무릇 젓가락으로 종을 치고 산가지로 북을 쳐서 울리지 못하는 것은 쳐서 두드리는 것이 작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의 몸은 일곱 자를 넘지 않는데 일곱 자 몸속의 정신으로 무엇을 하려 하면 비록 날카로운 뜻을 쌓아도 젓가락으로 종을 치고 산가지로 북을 치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하늘을 움직이겠는가. 정성이 참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이려 쓰는 것이 작은 것이다. 또 해치려는 것은 사람인데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하늘이 도리어 움직이겠는가.
묻는다. 「사람의 해치는 기운이 서로 움직일 수 있는가?」 답한다. 「없다!」 「예양이 조 양자를 해치려 하니 양자가 마음이 움직였다. 관고가 고조를 찬탈하려 하니 고조도 마음이 움직였다. 두 사람이 정기를 품었으므로 두 임금이 떨려 느꼈다.」 답한다. 「화와 변고가 장차 이르면 몸에 절로 괴이함이 있으니 마침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증험하는가. 때로 길에서 미친 사람을 만나 칼로 제 몸에 대는데, 미친 사람이 반드시 제 몸을 해치려 생각한 것이 아닌데도 제 몸에는 그보다 앞서 이미 요사한 괴이함이 있었다. 이로써 말하면 요사한 괴이함이 이르는 것은 화와 변고가 절로 흉한 상이지 저를 해치려는 이가 하는 바가 아니다. 또 흉한 사람이 점쳐 나쁜 조짐을 얻고 시초로 흉한 괘를 얻으며, 문을 나서 길함을 보고 위태로움을 점쳐 화의 기운을 보는데, 화의 기운이 낯에 나타나는 것은 흰 무지개와 태백성이 하늘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변고는 하늘에 나타나고 요사함은 사람에게 나오니 위아래가 마침 그러하여 절로 서로 응한 것이다.」
傳書言:燕太子丹朝於秦,不得去,從秦王求歸。秦王執留之,與之誓曰:「使日再中,天雨粟,令烏白頭,馬生角,廚門木象生肉足,乃得歸。」當此之時,天地佑之,日為再中,天雨粟,烏白頭,馬生角,廚門木象生肉足。秦王以為聖,乃歸之。此言虛也。燕太子丹何人,而能動天?聖人之拘,不能動天,太子丹賢者也,何能致此!夫天能佑太子,生諸瑞以免其身,則能和秦王之意以解其難。見拘一事而易,生瑞五事而難。舍一事之易,為五事之難,何天之不憚勞也?湯困夏台,文王拘里,孔子厄陳、蔡。三聖之困,天不能佑,使拘之者睹佑知聖,出而尊厚之。或曰:「拘三聖者不與(三)〔之〕誓,三聖心不願,故佑聖之瑞無因而至。天之佑人,猶借人以物器矣。人不求索,則弗與也。」曰:「太子願天下瑞之時,豈有語言乎!」心願而已。然湯閉於夏台,文王拘於里,時心亦願出;孔子厄陳、蔡,心願食。天何不令夏台、里關鑰毀敗,湯、文涉出;雨粟陳、蔡,孔子食飽乎?太史公曰:「世稱太子丹之令天雨粟、馬生角,大抵皆虛言也。」太史公書漢世實事之人,而云虛言,近非實也。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조회하였다가 떠나지 못하고 진왕에게 돌아가기를 구하였다. 진왕이 잡아 두고 맹세하여 말하였다. 「해가 다시 한낮이 되고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리고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말에 뿔이 나고 부엌문의 나무 코끼리에 살로 된 발이 나야 돌아갈 수 있다.」 이때에 하늘과 땅이 도와 해가 다시 한낮이 되고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리고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말에 뿔이 나고 부엌문의 나무 코끼리에 살로 된 발이 났다. 진왕이 성스럽다 여겨 이에 돌려보냈다 한다. 이 말은 헛되다. 연나라 태자 단이 어떤 사람이기에 하늘을 움직이겠는가. 성인이 갇혀도 하늘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태자 단은 어진 이일 뿐이니 어찌 이런 데 이르겠는가. 무릇 하늘이 태자를 도와 여러 상서를 내어 그 몸을 면하게 할 수 있었다면 진왕의 뜻을 고르게 하여 그 어려움을 풀 수 있었을 것이다. 갇힘을 보는 것은 한 가지 일이라 쉽고 상서를 내는 것은 다섯 가지 일이라 어렵다. 한 가지 쉬운 일을 버리고 다섯 가지 어려운 일을 하였다니 하늘은 어찌 수고를 꺼리지 않는가. 탕은 하대에서 곤액을 겪고 문왕은 유리에 갇히고 공자는 진과 채에서 곤궁하였다. 세 성인의 곤액에 하늘이 돕지 못하여 가둔 이가 도움을 보고 성인인 줄 알아 내보내고 높이 대접하게 하지 못하였다.
어떤 이는 말한다. 「세 성인을 가둔 이는 그와 맹세하지 않았고 세 성인도 마음으로 바라지 않았으므로 성인을 돕는 상서가 말미암을 데 없이 이르지 않았다. 하늘이 사람을 돕는 것은 남에게 물건을 빌려주는 것과 같아 사람이 구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 답한다. 「태자가 천하의 상서를 바랄 때 어찌 말이 있었겠는가. 마음으로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탕이 하대에 갇히고 문왕이 유리에 갇혔을 때도 마음으로 나가기를 바랐고, 공자가 진과 채에서 곤궁할 때도 마음으로 먹기를 바랐다. 하늘은 어찌 하대와 유리의 빗장이 무너져 탕과 문왕이 걸어 나오게 하고, 진과 채에 곡식을 비로 내려 공자가 배불리 먹게 하지 않았는가.」 태사공이 말하였다. 「세상이 태자 단이 하늘에 곡식을 비로 내리고 말에 뿔이 나게 하였다 일컬으나 대개 다 헛말이다.」 태사공은 한나라 세상의 실제 일을 적은 사람인데 헛말이라 하였으니 실상이 아님에 가깝다.
傳書言:杞梁氏之妻向城而哭,城為之崩。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기량씨의 아내가 성을 향해 우니 성이 그를 위해 무너졌다 한다.
此言杞梁從軍不還,其妻痛之,向城而哭,至誠悲痛,精氣動城,故城為之崩也。夫言向城而哭者,實也。城為之崩者,虛也。夫人哭悲莫過雍門子。雍門子哭對孟嘗君,孟嘗君為之於邑。蓋哭之精誠,故對向之者淒愴感動也。夫雍門子能動孟嘗之心,不能感孟嘗衣者,衣不知惻怛,不以人心相關通也。今城,土也。土猶衣也,無心腹之藏,安能為悲哭感動而崩?使至誠之聲能動城土,則其對林木哭,能折草破木乎?向水火而泣,能涌水滅火乎?夫草木水火與土無異,然杞梁之妻不能崩城,明矣。或時城適自崩,杞梁妻適哭。下世好虛,不原其實,故崩城之名,至今不滅。
이는 기량이 군사를 따라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매 그 아내가 슬퍼하여 성을 향해 울었는데, 지극한 정성과 슬픔의 정기가 성을 움직였으므로 성이 그를 위해 무너졌다는 말이다. 무릇 성을 향해 울었다는 것은 실상이다. 성이 그를 위해 무너졌다는 것은 헛되다. 무릇 사람의 울음이 슬프기로 옹문자를 넘는 이가 없다. 옹문자가 맹상군을 마주하고 우니 맹상군이 그 때문에 목이 메었다. 울음의 정성이 있으므로 마주한 이가 처량하게 느껴 움직인 것이다. 무릇 옹문자가 맹상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어도 맹상군의 옷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 것은, 옷은 슬픔을 모르고 사람의 마음으로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성은 흙이다. 흙은 옷과 같아 심장과 창자가 없으니 어찌 슬픈 울음에 감동하여 무너지겠는가. 지극한 정성의 소리가 성의 흙을 움직일 수 있다면 숲과 나무를 마주하고 울면 풀을 꺾고 나무를 깨뜨릴 수 있고 물과 불을 향해 울면 물을 솟게 하고 불을 끌 수 있겠는가. 무릇 풀과 나무와 물과 불은 흙과 다를 것이 없으니 기량의 아내가 성을 무너뜨릴 수 없음이 분명하다. 아마 성이 마침 절로 무너지고 기량의 아내가 마침 울었을 것이다. 뒷세상이 헛된 것을 좋아하여 그 실상을 캐지 않으므로 성을 무너뜨렸다는 이름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傳書言:鄒衍無罪,見拘於燕,當夏五月,仰天而嘆,天為隕霜。此與杞梁之妻哭而崩城,無以異也。言其無罪見拘,當夏仰天而嘆,實也。言天為之雨霜,虛也。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추연이 죄 없이 연나라에 갇혀 여름 오월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니 하늘이 그를 위해 서리를 내렸다 한다. 이는 기량의 아내가 울어 성을 무너뜨렸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가 죄 없이 갇혀 여름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는 것은 실상이나 하늘이 그를 위해 서리를 내렸다는 것은 헛되다.
夫萬人舉口并解吁嗟,猶未能感天,皺衍一人冤而壹嘆,安能下霜?鄒衍之冤不過曾子、伯奇。曾子見疑而吟,伯奇被逐而歌。疑、〔逐〕與拘同。吟、歌與嘆等。曾子、伯奇不能致寒,鄒衍何人,獨能雨霜?被逐之冤,尚未足言。申生伏劍,子胥刎頸。實孝而賜死,誠忠而被誅。且臨死時皆有聲辭,聲辭出口,與仰天嘆無異。天不為二子感動,獨為鄒衍動,豈天痛見拘,不悲流血哉!
무릇 만 사람이 입을 모아 함께 탄식하여도 오히려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추연 한 사람이 억울하여 한 번 탄식한다고 어찌 서리를 내리겠는가. 추연의 억울함은 증자와 백기를 넘지 못한다. 증자는 의심을 받고 읊었고 백기는 쫓겨나 노래하였다. 의심받고 쫓겨남은 갇힘과 같고 읊고 노래함은 탄식과 같다. 증자와 백기가 추위를 이르게 하지 못하였는데 추연이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서리를 내리겠는가. 쫓겨난 억울함은 오히려 말할 것도 못 된다. 신생은 칼에 엎드리고 자서는 목을 찔렀다. 실로 효성스러운데 죽음을 받았고 참으로 충성스러운데 죽임을 당하였다. 또 죽을 때 다 소리와 말이 있었으니 소리와 말이 입에서 나온 것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것과 다름이 없다. 하늘이 두 사람에게는 감동하지 않고 홀로 추연에게 감동하였다면, 어찌 하늘이 갇힘은 아파하고 피 흘림은 슬퍼하지 않는가.
(伯奇)〔何其〕冤痛相似而感動不同也?夫一炬火一鑊水,終日不能熱也;倚一尺冰置庖廚中,終夜不能寒也。何則?微小之感不能動大巨也。今鄒衍之嘆,不過如一炬尺冰,而皇天巨大,不徒鑊水庖廚之丑類也。一仰天嘆,天為隕霜。何天之易感,霜之易降也?夫哀與樂同,喜與怒均。衍興怨痛,使天下霜。使衍蒙非望之賞,仰天而笑,能以冬時使天熱乎?變復之家曰:「人君秋賞則溫,夏罰則寒。」寒不累時則霜不降,溫不兼日則冰不釋。一夫冤而一嘆,天輒下霜,何氣之易變,時之易轉也!寒溫自有時,不合變復之家。且從變復之說,或時燕王好用刑,寒氣應至;而衍囚拘而嘆,嘆時霜適自下。世見適嘆而霜下,則謂鄒衍嘆之致也。
어찌 억울함과 아픔은 서로 비슷한데 감동은 같지 않은가. 무릇 한 자루 횃불로 한 가마솥의 물을 종일 데워도 뜨겁게 할 수 없고, 한 자 얼음을 부엌 가운데 두어도 밤새 춥게 할 수 없다. 어째서인가. 작은 느낌이 큰 것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추연의 탄식은 한 자루 횃불과 한 자 얼음에 지나지 않는데 하늘은 거대하여 한갓 가마솥 물과 부엌의 무리가 아니다. 한 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니 하늘이 서리를 내렸다면 어찌 하늘이 그리 쉬이 감동하고 서리가 그리 쉬이 내리는가. 무릇 슬픔과 즐거움은 같고 기쁨과 노여움은 고르다. 추연이 원통함을 일으켜 하늘에 서리를 내리게 하였다면, 추연이 바라지 않던 상을 받아 하늘을 우러러 웃으면 겨울에 하늘을 덥게 할 수 있겠는가. 변복을 말하는 이는 「임금이 가을에 상 주면 따뜻하고 여름에 벌 주면 춥다」 한다. 추위가 여러 때 쌓이지 않으면 서리가 내리지 않고 따뜻함이 여러 날 겹치지 않으면 얼음이 풀리지 않는다. 한 사내가 억울하여 한 번 탄식하니 하늘이 곧 서리를 내렸다면 어찌 기운이 그리 쉬이 변하고 때가 그리 쉬이 바뀌는가. 춥고 따뜻함에는 절로 때가 있어 변복을 말하는 이와 맞지 않는다. 또 변복의 말을 따르면 아마 연나라 왕이 형벌 쓰기를 좋아하여 찬 기운이 응하여 이르렀고 추연이 갇혀 탄식할 때 서리가 마침 절로 내렸을 것이다. 세상이 마침 탄식하자 서리가 내린 것을 보고 추연의 탄식이 이르게 하였다 한 것이다.
傳書言:師曠奏《白雪》之曲,而神物下降,風雨暴至。平公因之癃病,晉國赤地。或言師曠《清角》之曲,一奏之,有云從西北起:再奏之,大風至,大雨隨之,裂帷幕,破俎豆,墜廊瓦,坐者散走。平公恐懼,伏乎廊室;晉國大旱,赤地三年;平公癃病。夫《白雪》與《清角》,或同曲而異名,其禍敗同一實也。傳書之家,載以為是;世俗觀見,信以為然。原省其實,殆虛言也。夫《清角》,何音之聲而致此?《清角》,木音也,故致風(而)〔雨),如木為風,雨與風俱。三尺之木,數弦之聲,感動天地,何其神也!此復一哭崩城、一嘆下霜之類也。師曠能鼓《清角》,必有所受,非能質性生出之也。其初受學之時,宿昔習弄,非直一再奏也。審如傳書之言,師曠學《清角》時,風雨當至也。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사광이 「백설」의 곡을 타니 신령한 것이 내려오고 바람과 비가 갑자기 이르렀다. 평공이 이로 인해 곱사병이 들고 진나라 땅이 벌겋게 말랐다 한다. 더러는 사광의 「청각」의 곡을 한 번 타니 구름이 서북에서 일어나고 두 번 타니 큰바람이 이르고 큰비가 따라 휘장을 찢고 제기를 깨뜨리고 행랑의 기와를 떨어뜨려 앉은 이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평공이 두려워하여 행랑방에 엎드렸고 진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땅이 벌겋게 마르기를 세 해였으며 평공이 곱사병이 들었다 한다. 무릇 「백설」과 「청각」은 아마 같은 곡에 이름이 다른 것이니 그 화와 패함이 같은 한 실상이다. 책을 전하는 이는 실어 옳다 하고 세속은 보고 그렇다 믿는다. 그 실상을 캐면 아마 헛말일 것이다. 무릇 「청각」은 무슨 소리의 음이기에 이런 데 이르는가. 「청각」은 나무의 음이므로 바람을 이르게 한다 하니, 나무가 바람이 된다면 비는 바람과 함께한다. 석 자의 나무와 몇 줄의 소리가 하늘과 땅을 감동시킨다니 어찌 그리 신령한가. 이 또한 한 번 울어 성을 무너뜨리고 한 번 탄식하여 서리를 내렸다는 무리다. 사광이 「청각」을 탈 수 있었다면 반드시 받은 바가 있지 바탕과 성품으로 절로 낸 것이 아니다. 그 처음 배울 때 밤낮으로 익히고 놀렸을 것이니 다만 한두 번 탄 것이 아니다. 참으로 전하는 책의 말대로라면 사광이 「청각」을 배울 때 바람과 비가 마땅히 이르렀어야 한다.
傳書言:瓠芭鼓瑟,淵魚出聽;師曠鼓琴,六馬仰秣。或言:師曠鼓《清角》,一奏之,有玄鶴二八自南方來,集於廊門之危;再奏之而列;三奏之,延頸而鳴,舒翼而舞,音中宮商之聲,聲吁於天。平公大悅,坐者皆喜。《尚書》曰:「擊石拊石,百獸率舞。」此雖奇怪,然尚可信。何則?鳥獸好悲聲,耳與人耳同也。禽獸見人(欲)〔之〕食,亦欲食之;聞人之樂,何為不樂?然而魚聽、仰秣、玄鶴延頸、百獸率舞,蓋且其實。風雨之至、晉國大旱、赤地三年、平公癃病,殆虛言也。或時奏《清角》時,天偶風雨、風雨之後,晉國適旱;平公好樂,喜笑過度,偶發癃病。傳書之家,信以為然,世人觀見,遂以為實。實者樂聲不能致此。何以驗之?風雨暴至,是陰陽亂也。樂能亂陰陽,則亦能調陰陽也。王者何須修身正行,擴施善政?使鼓調陰陽之曲,和氣自至,太平自立矣。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호파가 비파를 타니 못의 고기가 나와 듣고 사광이 거문고를 타니 여섯 말이 꼴을 먹다 우러렀다 한다. 더러는 사광이 「청각」을 한 번 타니 검은 학 열여섯 마리가 남쪽에서 와서 행랑문의 마루에 모이고, 두 번 타니 줄지어 서고, 세 번 타니 목을 늘이고 울며 날개를 펴고 춤추어 소리가 궁과 상의 음에 맞아 하늘에 울렸다. 평공이 크게 기뻐하고 앉은 이들이 다 기뻐하였다 한다. 「상서」에 이르기를 「돌을 치고 돌을 두드리니 온갖 짐승이 따라 춤추었다」 하였다. 이는 비록 기이하고 괴이하나 오히려 믿을 만하다. 어째서인가. 새와 짐승은 슬픈 소리를 좋아하니 귀가 사람의 귀와 같다. 짐승이 사람이 먹는 것을 보면 또한 먹으려 하니 사람의 음악을 듣고 어찌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고기가 듣고 꼴 먹다 우러르고 검은 학이 목을 늘이고 온갖 짐승이 따라 춤춘 것은 아마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바람과 비가 이르고 진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땅이 벌겋게 마르기를 세 해였고 평공이 곱사병이 들었다는 것은 아마 헛말일 것이다. 아마 「청각」을 탈 때 하늘이 우연히 바람과 비를 내렸고 바람과 비 뒤에 진나라가 마침 가물었으며, 평공이 음악을 좋아하여 기뻐 웃기를 지나치게 하다가 우연히 곱사병이 났을 것이다. 책을 전하는 이가 그렇다 믿고 세상 사람이 보고 마침내 실상이라 여겼다. 실상은 음악 소리가 이런 데 이르게 할 수 없다. 무엇으로 증험하는가. 바람과 비가 갑자기 이르는 것은 음양이 어지러운 것이다. 음악이 음양을 어지럽힐 수 있다면 또한 음양을 고르게 할 수도 있다. 왕이 무엇 때문에 몸을 닦고 행실을 바로 하며 착한 정사를 널리 베풀겠는가. 음양을 고르는 곡을 타게 하면 고른 기운이 절로 이르고 태평이 절로 설 것이다.
傳書言:湯遭七年旱,以身禱於桑林,自責以六過,天乃雨。或言:五年。禱辭曰:余一人有罪,無及萬夫。萬夫有罪,在余一人。(天)〔無〕以一人不敏,使上帝鬼神傷民之命。於是剪其髪,麗其手,自以為牲,用祈福於上帝。上帝甚說,時雨乃至。言湯以身禱於桑林自責,若言剪髪麗手,自以為牲,用祈福於上帝,實也。言雨至,為湯自責以身禱之故,殆虛言也。孔子疾病,子路請禱。孔子曰:「有諸?」子路曰:「有之。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탕이 일곱 해 가뭄을 만나 몸으로 상림에서 빌며 여섯 허물로 스스로를 꾸짖으니 하늘이 이에 비를 내렸다 한다. 더러는 다섯 해라 한다. 비는 말에 「나 한 사람에게 죄가 있으니 만 사람에게 미치지 마소서. 만 사람에게 죄가 있으면 나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밝지 못하다 하여 상제와 귀신이 백성의 목숨을 상하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이에 그 머리털을 자르고 그 손을 묶어 스스로 희생이 되어 상제에게 복을 빌었다. 상제가 매우 기뻐하여 때맞은 비가 이에 이르렀다 한다. 탕이 몸으로 상림에서 빌며 스스로를 꾸짖었다는 것과 머리털을 자르고 손을 묶어 스스로 희생이 되어 상제에게 복을 빌었다는 것은 실상이다. 비가 이른 것이 탕이 스스로를 꾸짖고 몸으로 빈 까닭이라는 것은 아마 헛말일 것이다. 공자가 병이 심하자 자로가 빌기를 청하였다. 공자가 「그런 것이 있느냐?」 하니 자로가 말하였다. 「있습니다.
誄曰:禱爾於上下神祗。」孔子曰:「丘之禱久矣。」聖人修身正行,素禱之日久,天地鬼神知其無罪,故曰禱久矣。《易》曰:「大人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敘,與鬼神合其吉凶。」此言聖人與天地、鬼神同德行也。即須禱以得福,是不同也。湯與孔子俱聖人也,皆素禱之日久。孔子不使子路禱以治病,湯何能以禱得雨?孔子素禱,身猶疾病。湯亦素禱,歲猶大旱。然則天地之有水旱,猶人之有疾病也。疾病不可以自責除,水旱不可以禱謝去,明矣。湯之致旱,以過乎?是不與天地同德也。今不以過致旱乎?自責禱謝,亦無益也。人形長七尺,形中有五常,有癉(一作瘴)熱之病,深自克責,猶不能愈,況以廣大之天,自有水旱之變。湯用七尺之形,形中之誠,自責禱謝,安能得雨邪?人在層台之上,人從層台下叩頭,求請台上之物。台上之人聞其言,則怜而與之;如不聞其言,雖至誠區區,終無得也。夫天去人,非徒層台之高也,湯雖自責,天安能聞知而與之雨乎?夫旱,火變也;湛,水異也。堯遭洪水,可謂湛矣。堯不自責以身禱祈,必舜、禹治之,知水變必須治也。除湛不以禱祈,除旱亦宜如之。由此言之,湯之禱祈不能得雨。或時旱久,時當自雨;湯以旱久,亦適自責。世人見雨之下,隨湯自責而至,則謂湯以禱祈得雨矣。
뇌에 이르기를, 너를 위해 위아래 신에게 빈다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빈 지 오래다.」 성인은 몸을 닦고 행실을 바로 하여 평소에 빈 날이 오래여서 하늘과 땅과 귀신이 그 죄 없음을 아므로 빈 지 오래다 한 것이다. 「역」에 이르기를 「대인은 하늘과 땅과 그 덕을 합하고 해와 달과 그 밝음을 합하고 네 철과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한다」 하였다. 이는 성인이 하늘과 땅과 귀신과 덕과 행실이 같다는 말이다. 빌어야 복을 얻는다면 같지 않은 것이다. 탕과 공자는 다 성인이라 다 평소에 빈 날이 오래다. 공자가 자로를 시켜 빌어 병을 다스리게 하지 않았는데 탕이 어찌 빌어 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공자가 평소에 빌었어도 몸이 오히려 병들었고 탕도 평소에 빌었어도 해가 오히려 크게 가물었다. 그러니 하늘과 땅에 장마와 가뭄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병이 있는 것과 같다. 병은 스스로 꾸짖어 없앨 수 없고 장마와 가뭄은 빌고 사죄하여 없앨 수 없음이 분명하다. 탕이 가뭄을 이르게 한 것이 허물 때문인가. 그러면 하늘과 땅과 덕이 같지 않은 것이다. 허물로 가뭄을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꾸짖고 빌고 사죄한들 또한 보탬이 없다. 사람의 몸은 길이 일곱 자요 몸속에 오상이 있는데, 황달과 열병이 있어 깊이 스스로 꾸짖어도 오히려 낫지 않거늘 하물며 넓고 큰 하늘에 절로 장마와 가뭄의 변화가 있음에랴. 탕이 일곱 자의 몸과 몸속의 정성으로 스스로 꾸짖고 빌고 사죄한들 어찌 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층대 위에 있는데 사람이 층대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려 대 위의 물건을 청한다 하자. 대 위의 사람이 그 말을 들으면 가엾이 여겨 주겠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하면 비록 지극한 정성이 간절하여도 끝내 얻는 것이 없다. 무릇 하늘이 사람에게서 떨어진 것은 한갓 층대의 높이가 아니니 탕이 비록 스스로 꾸짖은들 하늘이 어찌 들어 알고 비를 주겠는가. 무릇 가뭄은 불의 변고요 장마는 물의 이변이다. 요가 큰물을 만난 것은 장마라 할 만하다. 요가 몸으로 빌어 스스로를 꾸짖지 않고 반드시 순과 우가 다스렸으니 물의 변고는 반드시 다스려야 함을 안 것이다. 장마를 없애는 데 빌지 않았으니 가뭄을 없애는 것도 마땅히 그와 같아야 한다. 이로써 말하면 탕의 빎은 비를 얻을 수 없다. 아마 가뭄이 오래되어 때가 마땅히 절로 비 올 것이었고 탕은 가뭄이 오래되었으므로 또한 마침 스스로를 꾸짖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이 비가 내리는 것이 탕이 스스로를 꾸짖는 것을 따라 이른 것을 보고 탕이 빌어 비를 얻었다 한 것이다.
傳書言:「倉頡作書,天雨粟,鬼夜哭。」此言文章興而亂漸見,故其妖變,致天雨粟、鬼夜哭也。夫見天雨粟、鬼夜哭,實也。言其應倉頡作書,虛也。夫河出圖,洛出書,聖帝明王之瑞應也。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창힐이 글자를 지으니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울었다」 하였다. 이는 글이 일어나매 어지러움이 차츰 나타나므로 그 요사한 변고가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우는 데 이르렀다는 말이다. 무릇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운 것을 보았다는 것은 실상이다. 그것이 창힐이 글자를 지은 데 응하였다는 것은 헛되다. 무릇 하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이 나온 것은 성스러운 임금과 밝은 왕의 상서로운 응함이다.
圖書文章與倉頡所作字畫何以異?天地為圖書,倉頡作文字,業與天地同,指與鬼神合,何非何惡而致雨粟(神)〔鬼〕哭之怪?使天地、鬼神惡人有書,則其出圖書,非也;天不惡人有書,作書何非而致此怪?或時倉頡適作書,天適雨粟,鬼偶夜哭,而雨粟、鬼神哭自有所為。世見應書而至,則謂作書生亂敗之象,應事而動也。天雨谷,論者謂之從天而下,〔應〕變而生。
그림과 글의 문장이 창힐이 지은 글자와 무엇이 다른가. 하늘과 땅이 그림과 글을 만들고 창힐이 글자를 지었으니 업이 하늘과 땅과 같고 뜻이 귀신과 합하는데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미워 곡식을 비로 내리고 귀신이 우는 괴이함에 이르렀는가. 하늘과 땅과 귀신이 사람에게 글이 있는 것을 미워한다면 그림과 글을 낸 것이 그르고, 하늘이 사람에게 글이 있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글자를 지은 것이 무엇이 그르다고 이런 괴이함에 이르렀는가. 아마 창힐이 마침 글자를 짓고 하늘이 마침 곡식을 비로 내리고 귀신이 우연히 밤에 운 것이니 곡식이 비로 내리고 귀신이 운 것은 절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글자에 응하여 이른 것을 보고 글자를 짓는 것이 어지러워 패할 상을 낳아 일에 응하여 움직였다 한 것이다.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린 것을 논하는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와 변고에 응하여 났다 한다.
如以雲雨論之,雨谷之變,不足怪也。何以驗之?夫雲(雨)〔氣〕出於丘山,降散則為雨矣。人見其從上而墜,則謂之天雨水也。夏日則雨水,冬日天寒則雨凝而為雪,皆由雲氣發於丘山,不從天上降集於地,明矣。夫谷之雨,猶復雲(布)〔雨〕之亦從地起,因與疾風俱飄,參於天,集於地。人見其從天落也,則謂之天雨谷。建武三十一年中,陳留雨谷,谷下蔽地。案視谷形,若茨而黑,有似於稗實也。此或時夷狄之地,生出此谷。夷狄不粒食,此谷生於草野之中,成熟垂委於地,遭疾風暴起,吹揚與之俱飛,風衰谷集,墜於中國。中國見之,謂之雨谷。
구름과 비로 논하면 곡식이 비로 내리는 변고는 괴이할 것이 없다. 무엇으로 증험하는가. 무릇 구름의 기운은 언덕과 산에서 나와 내려와 흩어지면 비가 된다. 사람이 그것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하늘이 물을 비로 내린다 한다. 여름에는 물이 비로 내리고 겨울에는 하늘이 추워 비가 엉겨 눈이 되니, 다 구름의 기운이 언덕과 산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말미암지 하늘 위에서 내려와 땅에 모이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무릇 곡식의 비도 구름과 비처럼 또한 땅에서 일어나 빠른 바람과 함께 날려 하늘에 올랐다가 땅에 모인다. 사람이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린다 한다. 건무 삼십일년에 진류에 곡식이 비로 내려 곡식이 내려 땅을 덮었다. 곡식의 꼴을 살펴보니 남가새 같고 검어 피의 열매와 비슷하였다. 이는 아마 오랑캐 땅에서 이 곡식이 나는 것이다. 오랑캐는 낟알을 먹지 않으니 이 곡식이 풀과 들 가운데 나서 익어 땅에 늘어져 있다가 빠른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불어 올려 함께 날았고, 바람이 잦자 곡식이 모여 중국에 떨어졌다. 중국이 그것을 보고 곡식이 비로 내렸다 한 것이다.
何以效之?野火燔山澤,山澤之中,草木皆燒,其葉為灰,疾風暴起,吹揚之,參天而飛,風衰葉下,集於道路。夫天雨谷者,草木葉燒飛而集之類也。而世以為雨谷,作傳書者以〔為〕變怪。天主施氣,地主產物。有葉、實可啄食者,皆地所生,非天所為也。今谷非氣所生,須土以成。雖雲怪變,怪變因類。生地之物,更從天集,生天之物,可從地出乎?地之有萬物,猶天之有列星也。星不更生於地,谷何獨生於天乎?傳書又言:伯益作井,龍登玄雲,神栖昆侖。言(龍)井有害,故龍神為變也。
무엇으로 살피는가. 들불이 산과 못을 태우면 산과 못 가운데 풀과 나무가 다 타서 그 잎이 재가 되는데, 빠른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불어 올리면 하늘에 올라 날다가 바람이 잦으면 잎이 내려 길에 모인다. 무릇 하늘이 곡식을 비로 내린다는 것은 풀과 나무의 잎이 타서 날아 모이는 무리다. 그런데 세상은 곡식이 비로 내렸다 하고 책을 전하는 이는 변고와 괴이함이라 한다. 하늘은 기운을 베푸는 것을 맡고 땅은 물건을 낳는 것을 맡는다. 잎과 열매가 있어 쪼아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땅이 낳은 것이지 하늘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제 곡식은 기운이 낳은 것이 아니라 흙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비록 괴이한 변고라 하여도 괴이한 변고는 무리를 따른다. 땅에서 나는 물건이 다시 하늘에서 모인다면 하늘에서 나는 물건이 땅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땅에 만물이 있는 것은 하늘에 뭇 별이 있는 것과 같다. 별이 다시 땅에서 나지 않는데 곡식이 어찌 홀로 하늘에서 나겠는가.
전하는 책에 또 이르기를, 백익이 우물을 만드니 용이 검은 구름에 오르고 신이 곤륜에 깃들였다 한다. 우물에 해가 있으므로 용과 신이 변고를 일으켰다는 말이다.
夫言龍登玄雲,實也。言神栖昆侖,又言為作井之故,龍登神去,虛也。夫作井而飲,耕田而食,同一實也。伯益作井,致有變動。始為耕耘者,何故無變?神農之橈木為耒,教民耕,民始食谷,谷始播種。耕土以為田,鑿地以為井。井出水以救渴,田出谷以拯飢,天地、鬼神所欲為也,龍何故登雲?神何故栖昆侖?夫龍之登玄雲,古今有之,非始益作井而乃登也。方今盛夏,雷雨時至,龍多登雲。雲龍相應,龍乘雲雨而行,物類相致,非有為也。堯時,五十之民擊壤於塗。觀者曰:「大哉,堯之德也!」擊壤者曰:「吾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飲,耕田而食。堯何等力?」堯時已有井矣。唐、虞之時,豢龍御龍,龍常在朝。夏末政衰,龍乃隱伏。
무릇 용이 검은 구름에 올랐다는 것은 실상이다. 신이 곤륜에 깃들였다는 것과 또 우물을 만든 까닭으로 용이 오르고 신이 떠났다는 것은 헛되다. 무릇 우물을 만들어 마시고 밭을 갈아 먹는 것은 같은 한 실상이다.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변동이 있었다면 처음 밭을 갈고 김맨 이는 무슨 까닭으로 변고가 없었는가. 신농이 나무를 휘어 쟁기를 만들고 백성에게 밭갈이를 가르쳐 백성이 비로소 곡식을 먹고 곡식을 비로소 뿌려 심었다. 흙을 갈아 밭을 만들고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든다. 우물은 물을 내어 목마름을 구하고 밭은 곡식을 내어 굶주림을 건지니 하늘과 땅과 귀신이 하고자 하는 바인데 용이 무슨 까닭으로 구름에 오르고 신이 무슨 까닭으로 곤륜에 깃들이겠는가. 무릇 용이 검은 구름에 오르는 것은 예나 이제나 있는 일이지 백익이 처음 우물을 만들고서야 오른 것이 아니다. 바야흐로 한여름에 우레와 비가 때때로 이르면 용이 흔히 구름에 오른다. 구름과 용이 서로 응하여 용이 구름과 비를 타고 다니니 물건의 무리가 서로 이르게 하는 것이지 일부러 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요 때에 쉰 살 된 백성이 길에서 땅을 치며 놀았다. 보는 이가 「크도다, 요의 덕이여!」 하니 땅을 치던 이가 말하였다. 「나는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며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요가 무슨 힘인가?」 요 때에 이미 우물이 있었다. 당과 우의 때에 용을 기르고 용을 몰아 용이 늘 조정에 있었다. 하나라 말에 정사가 쇠하매 용이 이에 숨었다.
非益鑿井,龍登雲也。所謂神者,何神也?百神皆是。百神何故惡人為井?使神與人同,則亦宜有飲之欲。有飲之欲,憎井而去,非其實也。夫益殆之鑿井,龍不為鑿井登雲,神不栖於昆侖。傳書意妄,造生之也。
백익이 우물을 파서 용이 구름에 오른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신이란 무슨 신인가. 온갖 신이 다 그것이다. 온갖 신이 무슨 까닭으로 사람이 우물 만드는 것을 미워하는가. 신이 사람과 같다면 또한 마땅히 마시려는 욕심이 있을 것이다. 마시려는 욕심이 있으면서 우물을 미워하여 떠났다는 것은 실상이 아니다. 무릇 백익이 우물을 팠는데 용은 우물을 팠다고 구름에 오르지 않았고 신은 곤륜에 깃들이지 않았다. 책을 전하는 이의 뜻이 망령되어 지어낸 것이다.
傳書言:梁山崩,壅河三日不流,晉君憂之。晉伯宗以輦者之言,令景公素縞而哭之,河水為之流通。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양산이 무너져 하수를 막아 사흘 동안 흐르지 않으니 진나라 임금이 근심하였다. 진나라 백종이 수레꾼의 말로 경공에게 흰옷을 입고 울게 하니 하수가 그 때문에 흘러 통하였다 한다.
此虛言也。夫山崩壅河,猶人之有癰腫,血脈不通也。治癰腫者,可復以素服哭泣之聲治乎?堯之時,洪水滔天,懷山襄陵。帝堯吁嗟,博求賢者。水變甚於河壅,堯憂深於景公,不聞以素縞哭泣之聲能厭勝之。堯無賢人若輦者之朮乎?將洪水變大,不可以聲服除也?如素縞而哭,悔過自責也,堯、禹之治水以力役,不自責。梁山,堯時山也;所壅之河,堯時河也。山崩河壅,天雨水踊,二者之變無以殊也。堯、禹治洪水以力役,輦者治壅河用自責。變同而治異,人鈞而應殊,殆非賢聖變復之實也。凡變復之道,所以能相感動者,以物類也。有寒則復之以溫,溫復解之以寒。故以龍致雨,以刑逐(暑)〔景〕,皆緣五行之氣用相感勝之。山崩壅河,素縞哭之,於道何意乎?此或時何壅之時,山初崩,土積聚,水未盛。三日之後,水盛土散,稍坏沮矣。坏沮水流,竟注東去。遭伯宗得輦者之言,因素縞而哭,哭之因流,流時謂之河變,起此而復,其實非也。何以驗之?使山恆自崩乎,素縞哭無益也。使其天變應之,宜改政治。素縞而哭,何政所改而天變復乎?
이는 헛말이다. 무릇 산이 무너져 하수를 막은 것은 사람에게 종기가 있어 혈맥이 통하지 않는 것과 같다. 종기를 다스리는 이가 흰옷과 울음소리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요 때에 큰물이 하늘에 닿아 산을 안고 언덕을 넘었다. 요 임금이 탄식하며 널리 어진 이를 구하였다. 물의 변고가 하수를 막은 것보다 심하고 요의 근심이 경공보다 깊었으나 흰옷과 울음소리로 눌러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요에게 수레꾼 같은 어진 이의 술법이 없었는가, 아니면 큰물의 변고가 커서 소리와 옷으로 없앨 수 없었는가. 흰옷을 입고 우는 것이 허물을 뉘우쳐 스스로를 꾸짖는 것이라면, 요와 우가 물을 다스린 것은 힘으로 부린 것이지 스스로를 꾸짖은 것이 아니다. 양산은 요 때의 산이요 막힌 하수는 요 때의 하수다. 산이 무너져 하수를 막은 것과 하늘이 비를 내려 물이 솟은 것은 두 변고가 다를 것이 없다. 요와 우는 큰물을 힘으로 부려 다스렸고 수레꾼은 막힌 하수를 스스로 꾸짖음으로 다스렸다. 변고가 같은데 다스림이 다르고 사람이 고른데 응함이 다르니 아마 어질고 성스러운 이의 변복의 실상이 아닐 것이다. 무릇 변복의 도가 서로 감동시킬 수 있는 까닭은 물건의 무리로써다. 추위가 있으면 따뜻함으로 되돌리고 따뜻함은 추위로 푼다. 그러므로 용으로 비를 이르게 하고 형벌로 더위를 쫓으니 다 오행의 기운을 따라 서로 감동시켜 이기게 하는 것이다. 산이 무너져 하수를 막았는데 흰옷을 입고 울면 도에 무슨 뜻이 있는가. 이는 아마 하수가 막힐 때 산이 처음 무너져 흙이 쌓이고 물이 아직 성하지 않았다가, 사흘 뒤에 물이 성하고 흙이 흩어져 차츰 무너지고 허물어졌을 것이다. 무너지고 허물어져 물이 흘러 마침내 동으로 쏟아져 갔다. 백종이 수레꾼의 말을 얻어 흰옷을 입고 울었는데 울자 물이 흐르매 흐를 때 하수의 변고가 이로 말미암아 되돌아왔다 하였으니 그 실상은 아니다. 무엇으로 증험하는가. 산이 늘 절로 무너지는 것이라면 흰옷을 입고 우는 것이 보탬이 없다. 하늘의 변고가 응한 것이라면 마땅히 정치를 고쳐야 한다. 흰옷을 입고 울어서 무슨 정치를 고쳤기에 하늘의 변고가 되돌아왔는가.
傳書言:曾子之孝,與母同氣。曾子出薪於野,有客至而欲去,曾母曰:「願留,參方到。」即以右手扼其左臂。曾子左臂立痛,即馳至問母:「臂何故痛?」母曰:「今者客來欲去,吾扼臂以呼汝耳。」蓋以至孝,與父母同氣,體有疾病,精神輒感。曰:此虛也。夫孝悌之至,通於神明,乃謂德化至天地。俗人緣此而說,言孝悌之至,精氣相動。如曾母臂痛,曾子臂亦輒痛,曾母病(乎),曾子亦病〔乎〕?曾母死,曾子輒死乎?考事,曾母先死,曾子不死矣。此精氣能小相動,不能大相感也。世稱申喜夜聞其母歌,心動,開關問歌者為誰,果其母。蓋聞母聲,聲音相感,心悲意動,開關而問,蓋其實也。今曾母在家,曾子在野,不聞號呼之聲,母小扼臂,安能動子?疑世人頌成,聞曾子之孝天下少雙,則為空生母扼臂之說也。
전하는 책에 이르기를, 증자의 효는 어미와 기운이 같았다. 증자가 들에 나가 나무하는데 손이 왔다가 떠나려 하니 증자의 어미가 「머무르십시오, 삼이 곧 옵니다」 하고 곧 오른손으로 제 왼팔을 잡았다. 증자가 왼팔이 곧 아파 곧 달려와 어미에게 「팔이 무슨 까닭으로 아프십니까?」 물으니 어미가 「아까 손이 와서 떠나려 하기에 내가 팔을 잡아 너를 부른 것이다」 하였다 한다. 지극한 효로 어버이와 기운이 같아 몸에 병이 있으면 정신이 곧 느낀다는 것이다. 답한다. 이는 헛되다. 무릇 효도와 우애의 지극함이 신명에 통한다는 것은 덕의 교화가 하늘과 땅에 이른다는 말이다. 속인이 이를 따라 말하여 효도와 우애의 지극함은 정기가 서로 움직인다 한다. 증자의 어미가 팔이 아프면 증자의 팔도 곧 아프다면, 증자의 어미가 병들면 증자도 병들고 증자의 어미가 죽으면 증자도 곧 죽는가. 일을 살피면 증자의 어미가 먼저 죽었으나 증자는 죽지 않았다. 이는 정기가 작게 서로 움직일 수는 있어도 크게 서로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일컫기를 신희가 밤에 그 어미의 노래를 듣고 마음이 움직여 문을 열고 노래하는 이가 누구냐 물으니 과연 그 어미였다 한다. 어미의 소리를 듣고 소리가 서로 느껴 마음이 슬프고 뜻이 움직여 문을 열고 물은 것이니 아마 실상일 것이다. 이제 증자의 어미는 집에 있고 증자는 들에 있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어미가 팔을 조금 잡았다고 어찌 아들을 움직이겠는가. 아마 세상 사람이 기려 이루어 증자의 효가 천하에 짝이 적다는 것을 듣고 헛되이 어미가 팔을 잡았다는 말을 낳은 것이다.
世稱:南陽卓公為緱氏令,蝗不入界。
세상이 일컫기를, 남양의 탁공이 구씨의 수령이 되니 메뚜기가 경계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다.
蓋以賢明至誠,災蟲不入其縣也。此又虛也。夫賢明至誠之化,通於同類,能相知心,然後慕服。蝗蟲,閩虻之類也,何知何見而能知卓公之化?使賢者處深野之中,閩虻能不入其舍乎?閩虻不能避賢者之舍,蝗蟲何能不入卓公之縣?如謂蝗蟲變與閩虻異,夫寒溫亦災變也,使一郡皆寒,賢者長一縣,一縣之界能獨溫乎?夫寒溫不能避賢者之縣,蝗蟲何能不入卓公之界?夫如是,蝗蟲適不入界,卓公賢名稱於世,世則謂之能卻蝗蟲矣。何以驗之?夫蝗之集於野,非能普博盡蔽地也,往往積聚多少有處。
어질고 밝고 지극한 정성으로 재앙의 벌레가 그 현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헛되다. 무릇 어질고 밝고 지극한 정성의 교화는 같은 무리에 통하여 서로 마음을 알 수 있은 뒤에야 사모하여 복종한다. 메뚜기는 모기와 등에의 무리인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 탁공의 교화를 알 수 있겠는가. 어진 이가 깊은 들 가운데 있게 하면 모기와 등에가 그 집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기와 등에가 어진 이의 집을 피할 수 없는데 메뚜기가 어찌 탁공의 현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메뚜기의 변고가 모기와 등에와 다르다 한다면, 무릇 춥고 따뜻함도 재앙의 변고인데 한 군이 다 추울 때 어진 이가 한 현의 수령이면 한 현의 경계만 홀로 따뜻할 수 있겠는가. 무릇 춥고 따뜻함이 어진 이의 현을 피하지 못하는데 메뚜기가 어찌 탁공의 경계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하니 메뚜기가 마침 경계에 들어오지 않았고 탁공의 어진 이름이 세상에 일컬어지자 세상이 곧 메뚜기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 것이다. 무엇으로 증험하는가. 무릇 메뚜기가 들에 모이는 것은 두루 땅을 다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쌓여 모이는 데 많고 적음이 있다.
非所積之地,則盜蹠所居;所少之野,則伯夷所處也。集過有多少,不能盡蔽覆也。夫集地有多少,則其過縣有留去矣。多少,不可以驗善惡;有無,安可以明賢不肖也?蓋時蝗自過,不謂賢人界不入,明矣。
쌓이지 않은 땅은 곧 도척이 사는 데요 적은 들은 곧 백이가 사는 데다. 모여 지나는 데 많고 적음이 있어 다 덮을 수 없다. 무릇 모이는 땅에 많고 적음이 있으면 그 현을 지나는 데 머물고 떠남이 있다. 많고 적음으로 착하고 악함을 증험할 수 없는데 있고 없음으로 어찌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밝히겠는가. 아마 때마침 메뚜기가 절로 지나간 것이지 어진 사람의 경계라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