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增篇
世谷所患,患言事增其實;著文垂辭,辭出溢其真,稱美過其善,進惡沒其罪。何則?俗人好奇。不奇,言不用也。故譽人不增其美,則聞者不快其意;毀人不益其惡,則聽者不愜於心。聞一增以為十,見百益以為千。使夫純朴之事,十剖百判;審然之語,千反萬畔。墨子哭於練絲,楊子哭於歧道,蓋傷失本,悲離其實也。蜚流之言,百傳之語,出小人之口,馳閭巷之間,其猶是也。諸子之文,筆墨之疏,(人)〔大〕賢所著,妙思所集,宜如其實,猶或增之;儻經藝之言如其實乎,言審莫過聖人,經藝萬世不易,猶或出溢增過其實。增過其實皆有事為,不妄亂誤以少為多也。然而必論之者,方言經藝之增與傳語異也。經增非一,略舉較著,令恍惑之人,觀覽采擇,得以開心通意,曉解覺悟。
세속이 근심하는 바는 일을 말함에 그 실상을 보태고 글을 지어 말을 남김에 말이 그 참됨을 넘치게 나오며 아름다움을 일컬음이 그 착함을 지나치고 악을 나아가게 함이 그 죄를 덮는 것을 근심한다. 어째서인가. 속인은 기이함을 좋아한다. 기이하지 않으면 말이 쓰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림에 그 아름다움을 보태지 않으면 듣는 이가 그 뜻에 유쾌하지 않고, 사람을 헐뜯음에 그 악을 더하지 않으면 듣는 이가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하나를 들으면 보태어 열이라 하고 백을 보면 더하여 천이라 한다. 저 순박한 일로 하여금 열로 쪼개고 백으로 가르며 참으로 그러한 말을 천 번 뒤집고 만 번 어긋나게 한다. 묵자가 흰 실에 울고 양자가 갈림길에 운 것은 근본을 잃음을 아파하고 그 실상을 떠남을 슬퍼한 것이다. 날아 흐르는 말과 백 번 전한 말이 소인의 입에서 나와 마을 사이를 달리는 것이 그것과 같다. 제자의 글과 붓과 먹의 기록은 큰 현인이 지은 것이요 묘한 생각이 모인 것이라 마땅히 그 실상과 같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러 보탠다. 만일 경예의 말이 그 실상과 같은가. 말의 살핌이 성인보다 지나친 이가 없고 경예는 만세에 바뀌지 않는데 오히려 더러 넘치게 나와 보태어 그 실상을 지나친다. 보태어 그 실상을 지나침은 다 일의 까닭이 있으니 망령되고 어지러이 그릇 적음을 많다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논하는 것은 바야흐로 경예의 보탬이 전하는 말과 다름을 말하려는 것이다. 경의 보탬은 하나가 아니니 대략 두드러진 것을 들어 홀리고 미혹된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살펴 가려 취하여 마음을 열고 뜻을 통하며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다.
《尚書》「協和萬國」,是美堯德致太平之化,化諸夏并及夷狄也。言協和方外,可也;言萬國,增之也。
「상서」의 「만국을 화합하였다」는 요의 덕이 태평의 교화를 이루어 교화가 제하와 아울러 이적에까지 미쳤음을 아름답게 한 것이다. 방외를 화합하였다 말함은 옳으나 만국이라 말함은 보탠 것이다.
夫唐之與周,俱治五千里內。周時諸侯千七百九十三國,荒服、戎服、要服及四海之外不粒食之民,若穿胸、儋耳、焦僥、跋踵之輩,并合其數,不能三千。天之所覆,地之所載,盡於三千之中矣。而《尚書》云萬國,褒增過實以美堯也。欲言堯之德大,所化者眾,諸夏夷狄,莫不雍和,故曰萬國。猶《詩》言「子孫千億」矣,美周宣王之德能慎天地,天地祚之,子孫眾多,至於千億。言子孫眾多,可也;言千億,增之也。夫子孫雖眾,不能千億,詩人頌美,增益其實。案后稷始受邰封,訖於宣王,宣王以至外族內屬,血脈所連,不能千億。夫千與萬,數之大名也。萬言眾多,故《尚書》言萬國,《詩》言千億。
무릇 당과 주는 다 오천 리 안을 다스렸다. 주나라 때 제후가 천칠백구십삼 나라인데 황복·융복·요복과 사해 밖의 곡식을 먹지 않는 백성으로 천흉·담이·초요·발종의 무리까지 그 수를 아울러 합해도 삼천이 될 수 없다. 하늘이 덮는 바와 땅이 싣는 바가 삼천 가운데 다한다. 그런데 「상서」가 만국이라 이름은 기리고 보태어 실상을 지나쳐 요를 아름답게 한 것이다. 요의 덕이 커서 교화한 바가 많아 제하와 이적이 화합하지 않음이 없다 말하려 하였으므로 만국이라 하였다. 「시」에 「자손이 천억」이라 말한 것과 같으니 주 선왕의 덕이 하늘과 땅을 삼갈 수 있어 하늘과 땅이 복을 주어 자손이 많아 천억에 이른다고 아름답게 한 것이다. 자손이 많다 말함은 옳으나 천억이라 말함은 보탠 것이다. 무릇 자손이 비록 많아도 천억이 될 수 없으니 시인이 기리고 아름답게 하여 그 실상을 보탠 것이다. 살피건대 후직이 처음 태에 봉함을 받아 선왕에 이르기까지, 선왕으로 외족과 내속까지 혈맥이 이어진 바가 천억이 될 수 없다. 무릇 천과 만은 수의 큰 이름이다. 만은 많음을 말하므로 「상서」는 만국이라 말하고 「시」는 천억이라 말하였다.
《詩》云:「鶴鳴九皋,聲聞於天。」言鶴鳴九折之澤,聲猶聞於天,以喻君子修德窮僻,名猶達朝廷也。〔言〕其聞高遠,可矣;言其聞於天,增之也。
「시」에 이르기를 「학이 구고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 하였다. 학이 아홉 굽이 못에서 울면 소리가 오히려 하늘에 들린다는 말이니, 군자가 궁벽한 데서 덕을 닦으면 이름이 오히려 조정에 이름을 비유한 것이다. 그 들림이 높고 멀다 말함은 옳으나 하늘에 들린다 말함은 보탠 것이다.
彼言聲聞於天,見鶴鳴於雲中,從地聽之,度其聲鳴於地,當復聞於天也。夫鶴鳴雲中,人聞聲仰而視之,目見其形。耳目同力,耳聞其聲,則目見其形矣。然則耳目所聞見,不過十里,使參天之鳴,人不能聞也。何則?天之去人以萬數遠,則目不能見,耳不能聞。今鶴鳴從下聞之,鶴鳴近也。以從下聞其聲,則謂其鳴於地,當復聞於天,失其實矣。其鶴鳴於雲中,人從下聞之,如鳴於九皋。人無在天上者,何以知其聞於天上也?無以知,意從准況之也。詩人或時不知,至誠以為然;或時知而欲以喻事,故增而甚之。
저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 말함은 학이 구름 가운데서 우는 것을 보고 땅에서 들으며 그 소리가 땅에서 우는 것을 헤아려 마땅히 다시 하늘에 들린다고 한 것이다. 무릇 학이 구름 가운데서 울면 사람이 소리를 듣고 우러러보아 눈이 그 꼴을 본다. 귀와 눈은 힘이 같으니 귀가 그 소리를 들으면 눈이 그 꼴을 본다. 그러니 귀와 눈이 듣고 보는 바는 십 리에 지나지 않으니 하늘에 닿는 울음이라면 사람이 들을 수 없다. 어째서인가. 하늘이 사람에게서 떨어짐이 만으로 헤아리게 머니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들을 수 없다. 이제 학 울음을 아래에서 듣는 것은 학의 울음이 가까워서다. 아래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하여 그것이 땅에서 울면 마땅히 다시 하늘에 들린다 하니 그 실상을 잃은 것이다. 그 학이 구름 가운데서 우는데 사람이 아래에서 들으면 구고에서 우는 것과 같다. 사람이 하늘 위에 있는 이가 없는데 무엇으로 그것이 하늘 위에 들림을 아는가. 알 길이 없으니 뜻으로 견주어 헤아린 것이다. 시인이 혹 때로 알지 못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그렇다 여겼거나, 혹 때로 알면서 일을 비유하려 하였으므로 보태어 심하게 한 것이다.
《詩》曰:「維周黎民,靡有孑遺」是謂周宣王之時,遭大旱之災也。
「시」에 이르기를 「주나라 백성이 남은 하나도 없다」 하니 이는 주 선왕 때 큰 가뭄의 재앙을 만난 것을 이른다.
詩人傷早之甚,民被其害,言無有孑遺一人不愁痛者。夫早甚,則有之矣;言無孑遺一人,增之也。
시인이 가뭄의 심함에 백성이 그 해를 입음을 아파하여 남은 한 사람도 시름하고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다 말한 것이다. 무릇 가뭄이 심함은 있었으나 남은 한 사람도 없다 말함은 보탠 것이다.
夫周之民,猶今之民也。使今之民也,遭大旱之災,貧羸無蓄積,扣心思雨。若其富人,谷食饒足者,廩不空,口腹不飢,何愁之有?天之旱也,山林之間不枯,猶地之水,丘陵之上不湛也。山林之間,富貴之人,必有遣脫者矣,而言靡有孑遺,增益其文,欲言旱甚也。
무릇 주나라 백성은 지금 백성과 같다. 지금 백성으로 하여금 큰 가뭄의 재앙을 만나게 하면 가난하고 여윈 이가 쌓아 둔 것이 없어 가슴을 치며 비를 생각한다. 그 부자로 곡식이 넉넉한 이는 창고가 비지 않고 배가 주리지 않으니 무슨 시름이 있겠는가. 하늘이 가물어도 산림 사이는 마르지 않으니 땅의 물이 언덕 위에는 잠기지 않는 것과 같다. 산림 사이와 부귀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벗어난 이가 있는데 남은 하나도 없다 말함은 그 글을 보태어 더하여 가뭄이 심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易》曰:「丰其屋,其家,窺其戶,闃其無人也。」非其無人也,無賢人也。《尚書》曰:「毋曠庶官。」曠,空;庶,眾也。毋空眾官,置非其人,與空無異,故言空也。
「역」에 이르기를 「그 집을 크게 하고 그 집을 가리며 그 문을 엿보니 고요하여 사람이 없다」 하였다.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상서」에 이르기를 「뭇 벼슬을 비우지 마라」 하였다. 광은 비움이요 서는 뭇이다. 뭇 벼슬을 비우지 말라 함은 그 사람이 아닌 이를 두면 빔과 다름이 없으므로 비었다 말한 것이다.
夫不肖者皆懷五常,才劣不逮,不成純賢,非狂妄頑,身中無一知也。德有大小,材有高下,居官治職,皆欲勉效在官。《尚書》之官,《易》之戶中,猶能有益,如何謂之空而無人?《詩》曰:「濟濟多士,文王以寧。」此言文王得賢者多而不肖者少也。今《易》宜言闃其少人,《尚書》宜言無少眾官。以少言之,可也;言空而無人,亦尤甚焉。
무릇 어질지 못한 이도 다 오상을 품었으니 재주가 못하여 미치지 못하여 순수한 어진 이가 되지 못한 것이지 미치고 망령되고 어리석어 몸 가운데 한 가지 앎도 없는 것이 아니다. 덕에 크고 작음이 있고 재주에 높고 낮음이 있으나 벼슬에 있어 직분을 다스림에 다 힘써 벼슬에서 보람 내기를 바란다. 「상서」의 벼슬과 「역」의 문 안은 오히려 유익함이 있을 수 있는데 어찌 비어 사람이 없다 하는가. 「시」에 이르기를 「많고 많은 선비여, 문왕이 편안하다」 하였다. 이는 문왕이 어진 이를 얻음이 많고 어질지 못한 이가 적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역」은 마땅히 고요하여 사람이 적다 말해야 하고 「상서」는 마땅히 뭇 벼슬을 적게 하지 마라 말해야 한다. 적다고 말함은 옳으나 비어 사람이 없다 말함은 또한 더욱 심하다.
五谷之於人也,食之皆飽。稻粱之味,甘而多腴。豆麥雖糲,亦能愈飢。食豆麥者,皆謂糲而不甘,莫謂腹空無所食。竹木之杖,皆能扶病。竹杖之力,弱劣不及木。或操竹杖,皆謂不勁,莫謂手空無把持。夫不肖之臣,豆麥、竹杖之類也。《易》(持其)具臣在戶,言無人者,惡之甚也。
오곡이 사람에게 먹으면 다 배부르다. 벼와 기장의 맛은 달고 기름지다. 콩과 보리가 비록 거칠어도 또한 주림을 낫게 할 수 있다. 콩과 보리를 먹는 이는 다 거칠어 달지 않다 하지 배가 비어 먹을 것이 없다 하지 않는다. 대와 나무 지팡이는 다 병을 부축할 수 있다. 대 지팡이의 힘은 약하여 나무에 미치지 못한다. 더러 대 지팡이를 잡으면 다 굳세지 않다 하지 손이 비어 잡을 것이 없다 하지 않는다. 무릇 어질지 못한 신하는 콩과 보리와 대 지팡이의 무리다. 「역」이 자리만 채우는 신하가 문 안에 있는데 사람이 없다 말함은 미워함이 심한 것이다.
《尚書》眾官,亦容小材,而云無空者,刺之甚也。
「상서」의 뭇 벼슬도 작은 재주를 용납하는데 비었다 이름은 찌름이 심한 것이다.
《論語》曰:「大哉,堯之為君也!蕩蕩乎民無能名焉。」傳曰:「有年五十擊壤於路者,觀者曰:大哉,堯德乎!擊壤者曰:吾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飲,耕田而食,堯何等力!」此言蕩蕩無能名之效也。言蕩蕩,可也;乃欲言民無能名,增之也。四海之大,萬民之眾,無能名堯之德者,殆不實也。
「논어」에 이르기를 「크도다, 요의 임금 됨이여! 넓고 넓어 백성이 이름할 수 없도다」 하였다. 전에 이르기를 「나이 쉰에 길에서 땅치기 놀이를 하는 이가 있었는데 보는 이가 말하기를 크도다, 요의 덕이여 하니 땅치기 하는 이가 말하기를 나는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며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 먹으니 요가 무슨 힘이 있는가 하였다」 하였다. 이는 넓고 넓어 이름할 수 없다는 보람을 말한 것이다. 넓고 넓다 말함은 옳으나 곧 백성이 이름할 수 없다 말하려 함은 보탠 것이다. 사해의 큼과 만민의 많음에 요의 덕을 이름할 수 있는 이가 없다 함은 아마 실상이 아니다.
夫擊壤者曰:「堯何等力!」欲言民無能名也。觀者曰:「大哉,堯之德乎!」此何等民者,猶能知之。實有知之者,云無,竟增之。
무릇 땅치기 하는 이가 「요가 무슨 힘이 있는가」 한 것은 백성이 이름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보는 이가 「크도다, 요의 덕이여」 한 것은 이 어떤 백성이 오히려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아는 이가 있는데 없다 하니 끝내 보탠 것이다.
儒書又言:「堯、舜之民,可比屋而封。」言其家有君子之行,可皆官也。夫言可封,可也;言比屋,增之也。
유가의 책에 또 이르기를 「요·순의 백성은 집을 잇대어 봉할 만하다」 하였다. 그 집에 군자의 행실이 있어 다 벼슬시킬 만하다는 말이다. 무릇 봉할 만하다 말함은 옳으나 집을 잇대어라 말함은 보탠 것이다.
人年五十為人父,為人父而不知君,何以示子?太平之世,家為君子,人有禮義,父不失禮,子不廢行。夫有行者有知,知君莫如臣,臣賢能知君,能知其君,故能治其民。今不能知堯,何可封官?年五十擊壤於路,與豎子未成人者為伍,何等賢者?子路使子羔為宰,孔子以為不可:未學,無所知也。擊壤者無知,官之如何?稱堯之蕩蕩,不能述其可比屋而封;言賢者可比屋而封,不能議讓其愚。而無知之夫擊壤者,難以言比屋,比屋難以言蕩蕩。二者皆增之所由起,美堯之德也。
사람이 나이 쉰이면 남의 아비가 되는데 남의 아비가 되어 임금을 모르면 무엇으로 자식에게 보이겠는가. 태평한 세상에 집마다 군자가 되어 사람에게 예의가 있고 아비가 예를 잃지 않으며 자식이 행실을 버리지 않는다. 무릇 행실이 있는 이는 앎이 있으니 임금을 앎은 신하만 한 이가 없고 신하가 어질면 임금을 알 수 있으며 그 임금을 알 수 있으므로 그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 이제 요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벼슬에 봉할 수 있는가. 나이 쉰에 길에서 땅치기 놀이를 하며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들과 짝하였으니 어떤 어진 이인가. 자로가 자고에게 재를 시키니 공자가 옳지 않다 여겼으니 배우지 않아 아는 것이 없어서다. 땅치기 하는 이가 아는 것이 없는데 벼슬시킴이 어떠한가. 요의 넓고 넓음을 일컬으면 그 집을 잇대어 봉할 만함을 말할 수 없고 어진 이가 집을 잇대어 봉할 만하다 말하면 그 어리석음을 의논하여 사양할 수 없다. 무지한 사내로 땅치기 하는 이는 집을 잇대어라 말하기 어렵고 집을 잇대어는 넓고 넓다 말하기 어렵다. 둘은 다 보탬이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니 요의 덕을 아름답게 한 것이다.
《尚書》曰:「祖伊諫紂曰:今我民罔不欲喪。」罔,無也;我天下民無不欲王亡者。夫言欲王之亡,可也;言無不,增之也。
「상서」에 이르기를 「조이가 주(紂)에게 간하였다. 이제 우리 백성이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다」 하였다. 망은 없음이니 우리 천하 백성이 왕이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무릇 왕이 망하기를 바란다 말함은 옳으나 바라지 않는 이가 없다 말함은 보탠 것이다.
紂雖惡,民臣蒙恩者非一,而祖伊增語,欲以懼紂也。故曰:語不益,心不惕;心不惕,行不易。增其語欲以懼之,冀其警悟也。
주가 비록 악하여도 백성과 신하로 은혜를 입은 이가 하나가 아닌데 조이가 말을 보탠 것은 주를 두렵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 보태지지 않으면 마음이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이 두려워하지 않으면 행실이 바뀌지 않는다 한다. 그 말을 보태어 두렵게 하려 함은 그가 경계하여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蘇秦說齊王曰:「臨淄之中,車轂擊,人肩磨,舉袖成幕,連衽成帷,揮汗成雨。」齊雖熾盛,不能如此。蘇秦增語,激齊王也。祖伊之諫紂,猶蘇秦之說齊王也。賢聖增文,外有所為,內未必然。何以明之?夫《武成》之篇,言武王伐紂,血流浮杵。助戰者多,故至血流如此。皆欲紂之亡也,土崩瓦解,安肯戰乎?然祖伊之言民無不欲,如蘇秦增語。
소진이 제왕에게 유세하였다. 「임치 가운데 수레바퀴가 부딪치고 사람 어깨가 스치며 소매를 들면 장막이 되고 옷섶을 이으면 휘장이 되며 땀을 뿌리면 비가 됩니다.」 제나라가 비록 성하여도 이와 같을 수 없다. 소진이 말을 보탠 것은 제왕을 격동시킨 것이다. 조이가 주에게 간한 것은 소진이 제왕에게 유세한 것과 같다. 현인과 성인이 글을 보탬은 밖으로 하는 바가 있으나 안으로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무엇으로 밝히는가. 무릇 「무성」 편에 무왕이 주를 치는데 피가 흘러 절굿공이를 띄웠다 하였다. 싸움을 도운 이가 많으므로 피가 흐름이 이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 주가 망하기를 바랐다면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풀리듯 하였을 것인데 어찌 싸우려 하였겠는가. 그러니 조이의 말에 백성이 바라지 않는 이가 없다 함은 소진이 말을 보탠 것과 같다.
《武成》言血流浮杵,亦太過焉。死者血流,安能浮杵?案武王伐紂於牧之野。河北地高,壤靡不干燥。兵頓血流,輒燥入土,安得杵浮?且周、殷士卒,皆齎盛糧,無杵臼之事,安得杵而浮之?言血流杵,欲言誅紂,惟兵頓士傷,故至浮杵。
「무성」이 피가 흘러 절굿공이를 띄웠다 말함도 너무 지나쳤다. 죽은 이의 피가 흐른들 어찌 절굿공이를 띄우겠는가. 살피건대 무왕이 주를 목야에서 쳤다. 하북은 땅이 높아 흙이 마르지 않은 데가 없다. 군사가 쓰러져 피가 흘러도 곧 말라 흙에 들어가니 어찌 절굿공이가 뜨겠는가. 또 주나라와 은나라 군사는 다 마른 양식을 지녀 절구와 공이의 일이 없었으니 어찌 절굿공이를 얻어 띄우겠는가. 피가 절굿공이를 띄웠다 말함은 주를 베는데 오직 군사가 쓰러지고 선비가 상하여 절굿공이를 띄움에 이르렀다 말하려는 것이다.
《春秋》莊公七年:「夏四月辛卯,夜中恆星不見,星如雨。」《公羊傳》曰:「如雨者何?非雨也。非雨則曷為謂之如雨?不修《春秋》曰:(如)雨星不及地尺而復。君子修之,星如雨。」
「춘추」 장공 칠년에 「여름 사월 신묘에 밤중에 항성이 보이지 않고 별이 비 같았다」 하였다. 「공양전」에 이르기를 「비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가 아니다. 비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비 같다 하는가. 닦지 않은 「춘추」에 이르기를 비 오듯 한 별이 땅에 한 자 미치지 못하고 다시 올랐다 하였다. 군자가 닦아 별이 비 같았다 하였다」 하였다.
不修《春秋》者,未修《春秋》時魯史記,曰「雨星不及地尺如復」。君子者,謂孔子也。孔子修之,「星如雨」。如雨者,如雨狀也。山氣為雲,上不及天,下而為(雲)〔雨〕。雨星,星隕不及地,上復在天,故曰如雨。孔子正言也。夫星或時至地,或時不能,尺丈之數,難審也。史記言尺,亦以太甚矣。夫地有樓台山陵,安得言尺?孔子言如雨,得其實矣。孔子作《春秋》,故正言如雨。如孔子不作,不及地尺之文,遂傳至今。
닦지 않은 「춘추」란 「춘추」를 닦기 전 노나라 사기로 「비 오듯 한 별이 땅에 한 자 미치지 못하고 다시 올랐다」 한 것이다. 군자란 공자를 이른다. 공자가 닦아 「별이 비 같았다」 하였다. 비 같다는 것은 비 오는 모양 같다는 것이다. 산의 기운이 구름이 되어 위로 하늘에 미치지 못하고 내려와 비가 된다. 비 오듯 한 별은 별이 떨어져 땅에 미치지 못하고 위로 다시 하늘에 있으므로 비 같다 한 것이다. 공자의 바른 말이다. 무릇 별이 혹 때로 땅에 이르고 혹 때로 이르지 못하니 자와 장의 수는 살피기 어렵다. 사기가 한 자라 말함도 너무 심하다. 무릇 땅에 누대와 산과 언덕이 있는데 어찌 한 자라 말하는가. 공자가 비 같다 말함은 그 실상을 얻은 것이다. 공자가 「춘추」를 지었으므로 바르게 비 같다 말하였다. 공자가 짓지 않았다면 땅에 한 자 미치지 못하였다는 글이 마침내 지금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光武皇帝之時,郎中汝南賁光上書,言孝文皇帝時居明光宮,天下斷獄三人。頌美文帝,陳其效實。光武皇帝曰:「孝文時不居明光宮,斷獄不三人。」積善修德,美名流之,是以君子惡居下流。夫賁光上書於漢,漢為今世,增益功美,猶過其實,況上古帝王久遠,賢人從後褒述,失實離本,獨已多矣。不遭光武論,千世之後,孝文之事載在經藝之上,人不知其增,居明光宮斷獄三人,而遂為實事也。
광무황제 때 낭중 여남 분광이 글을 올려 효문황제 때 명광궁에 살았는데 천하의 옥사 결단이 세 사람이었다 말하였다. 문제를 기리고 아름답게 하여 그 보람과 실상을 편 것이다. 광무황제가 말하였다. 「효문 때 명광궁에 살지 않았고 옥사 결단이 세 사람이 아니었다.」 착함을 쌓고 덕을 닦으면 아름다운 이름이 흐르니 이 때문에 군자는 하류에 사는 것을 미워한다. 무릇 분광이 한나라에 글을 올렸는데 한나라는 지금 세상인데도 공과 아름다움을 보태어 더함이 오히려 그 실상을 지나쳤으니, 하물며 상고의 제왕은 오래되고 멀어 어진 사람이 뒤에서 기리고 서술함에 실상을 잃고 근본을 떠남이 홀로 이미 많다. 광무의 논함을 만나지 않았다면 천세 뒤에 효문의 일이 경예 위에 실려 사람들이 그 보탬을 알지 못하고 명광궁에 살고 옥사 결단이 세 사람이었다는 것이 마침내 실상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