刺孟篇
孟子見梁惠王,王曰:「叟!不遠千里而來,將何以利吾國乎?」孟子曰:「仁義而已,何必曰利。」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나니 왕이 말하였다. 「노인장!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무엇으로 내 나라를 이롭게 하시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인의일 뿐이니 어찌 반드시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夫利有二,有貨財之利,有安吉之利。惠王曰「何以利吾國」,何以知不欲安吉之利,而孟於徑難以貨財之利也?《易》曰:「利見大人」,「利涉大川」,「《乾》,元享利貞」。《尚書》曰:「黎民亦尚有利哉。」皆安吉之利也。行仁義,得安吉之利。孟子(不)〔必〕且語問惠王何謂利吾國,惠王言貨財之利,乃可答。
무릇 이로움에 둘이 있으니 재물의 이로움이 있고 편안하고 길함의 이로움이 있다. 혜왕이 「무엇으로 내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가」 하였는데 편안하고 길함의 이로움을 바라지 않음을 어떻게 알고 맹자가 바로 재물의 이로움으로 따졌는가. 「역」에 이르기를 「대인을 봄이 이롭다」,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 「건은 원형이정이다」 하였고 「상서」에 이르기를 「백성도 오히려 이로움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다 편안하고 길함의 이로움이다. 인의를 행하면 편안하고 길함의 이로움을 얻는다. 맹자가 반드시 먼저 혜왕에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물어 혜왕이 재물의 이로움을 말하였다면 곧 답할 수 있었다.
若設令惠王問,未知何趣,孟子徑答以貨財之利。如惠王實問貨財,孟子(無)〔有〕以驗效也;如問安吉之利,而孟子答以貨財之利,失對上之指,違道理之實也。
가령 혜왕이 물었는데 무슨 취지인지 알지 못하고 맹자가 바로 재물의 이로움으로 답하였다면, 혜왕이 실로 재물을 물은 것이라면 맹자가 증험할 것이 있으나, 편안하고 길함의 이로움을 물었는데 맹자가 재물의 이로움으로 답하였다면 윗사람에게 대답하는 뜻을 잃고 도리의 실상을 어긴 것이다.
齊王問時子:「我欲中國而授孟子室,養弟子以萬鐘,使諸大夫國人皆有所矜式。子盍為我言之。」時子因陳子而以告孟子。孟子曰:「夫時子惡知其不可也?如使予欲富,辭十萬而受萬,是為欲富乎?」
제왕이 시자에게 물었다. 「내가 나라 가운데에 맹자에게 집을 주고 제자를 만 종으로 길러 여러 대부와 나라 사람이 다 본받을 바가 있게 하려 한다. 그대가 어찌 나를 위해 말하지 않는가.」 시자가 진자를 통해 맹자에게 알렸다. 맹자가 말하였다. 「무릇 시자가 어찌 그 불가함을 알겠는가? 내가 부유하기를 바란다면 십만을 사양하고 만을 받는 것이 부유하기를 바라는 것이겠는가?」
夫孟子辭十萬,失謙讓之理也。夫富貴者,人之所欲也,不以其道得之,不居也。故君子之於爵祿也,有所辭,有所不辭,豈以己不貪富貴之故,而以距逆宜當受之賜乎?
무릇 맹자가 십만을 사양한 것은 겸양의 이치를 잃은 것이다. 무릇 부귀는 사람이 바라는 바이나 그 도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가 작록에 대해 사양하는 바가 있고 사양하지 않는 바가 있으니 어찌 제가 부귀를 탐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은사를 막고 거스르겠는가.
陳臻問曰:「於齊,王餽兼金一百鎰而不受;於宋,歸七十鎰而受;於薛,歸五十鎰而受。
진진이 물었다. 「제나라에서 왕이 겸금 백 일을 주니 받지 않으시고, 송나라에서 칠십 일을 주니 받으시고, 설나라에서 오십 일을 주니 받으셨습니다.
取前日之不受是,則今受之非也。今日之受是,則前日之不受非也。夫(君)子必居一於此矣。」孟子曰:「皆是也。當在宋也,予將有遠行,行者必以贐,辭曰歸贐,予何為不受?當在薛也,予有戒心,辭曰聞戒,故為兵戒歸之備乎,予何為不受?若於齊,則未有處也,無處而歸之,是貨之也,焉有君子而可以貨取乎?」
전날 받지 않으신 것이 옳다면 오늘 받으신 것이 그르고, 오늘 받으신 것이 옳다면 전날 받지 않으신 것이 그릅니다. 무릇 선생께서는 반드시 이 가운데 하나에 계실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다 옳다. 송나라에 있을 때 내가 장차 먼 길을 떠나려 하였고 떠나는 이는 반드시 노자를 주니 말하기를 노자를 드린다 하였으니 내가 어찌 받지 않겠는가. 설나라에 있을 때 내가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고 말하기를 경계함을 들었으므로 병기를 갖추도록 드린다 하였으니 내가 어찌 받지 않겠는가. 제나라에서는 곳이 없었다. 곳이 없는데 주는 것은 재물로 사는 것이니 어찌 군자로서 재물로 살 수 있겠는가.」
夫金歸或受或不受,皆有故。非受之時已貪,當不受之時己不貪也。金有受不受之義,而室亦宜有受不受之理。今不曰己無功,若己致仕受室非理;而曰己不貪富,引前辭十萬以況後萬。
무릇 금을 줌에 받거나 받지 않음이 다 까닭이 있다. 받을 때 제가 탐한 것도 아니고 받지 않을 때 제가 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금에 받고 받지 않는 뜻이 있으면 집에도 마땅히 받고 받지 않는 이치가 있다. 이제 제게 공이 없다거나 제가 벼슬을 그만두고 집을 받음이 이치가 아니라 말하지 않고, 제가 부를 탐하지 않는다 하며 앞의 십만 사양을 끌어 뒤의 만에 견주었다.
前當受十萬之多,安得辭之?
앞에 마땅히 십만의 많음을 받아야 하였는데 어찌 사양하는가.
彭更問曰:「後車數十乘,從者數百人,以傳食於諸侯,不亦泰乎?」孟子曰:「非其道,則一簞食而不可受於人;如其道,則舜受堯之天下,不以為泰。」
팽경이 물었다. 「뒤따르는 수레 수십 승과 따르는 이 수백 사람으로 제후에게 돌아가며 먹으니 또한 너무하지 않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그 도가 아니면 한 그릇 밥도 남에게 받을 수 없으나 그 도라면 순이 요의 천하를 받아도 너무하다 여기지 않는다.」
受堯天下,孰與十萬?舜不辭天下者,是其道也。今不曰受十萬非其道,而曰己不貪富貴,失謙讓也。安可以為戒乎?
요의 천하를 받음이 십만에 견주어 어떠한가. 순이 천하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그 도이기 때문이다. 이제 십만을 받음이 그 도가 아니라 말하지 않고 제가 부귀를 탐하지 않는다 하니 겸양을 잃었다. 어찌 경계로 삼을 수 있겠는가.
沈同以其私問曰:「燕可伐與?」孟子曰:「可。子噲不得與人燕,子之不得受燕於子噲。有士於此,而子悅之,不告於王,而私與之子之爵祿。夫士也,亦無王命而私受之,於子,則可乎?何以異於是。」齊人伐燕,或問曰:「勸齊伐燕,有諸?」曰:「未也。沈同曰:『燕可伐與?『吾應之曰:『可。』彼然而伐之。如曰:『孰可以伐之?『則應之曰:『為天吏則可以伐之。』今有殺人者,或問之曰:『人可殺與?『則將應之曰:『可。』彼如曰:『孰可以殺之?『則應之曰:『為士師則可以殺之。』今以燕伐燕,何為勸之也?」
심동이 사사로이 물었다. 「연나라를 칠 수 있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할 수 있다. 자쾌가 남에게 연나라를 줄 수 없고 자지가 자쾌에게서 연나라를 받을 수 없다. 여기 선비가 있어 그대가 그를 기뻐하여 왕에게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그대의 작록을 준다면, 무릇 그 선비도 왕의 명이 없이 사사로이 그대에게서 받는다면 되겠는가. 무엇이 이와 다른가.」 제나라 사람이 연나라를 치자 어떤 이가 물었다. 「제나라에 연나라를 치라 권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말하였다. 「아니다. 심동이 『연나라를 칠 수 있습니까?』 하기에 내가 『할 수 있다』 응하였다. 저들이 그렇다 하고 쳤다. 『누가 칠 수 있습니까?』 하였다면 『하늘의 관리가 되면 칠 수 있다』 응하였을 것이다. 이제 사람을 죽인 이가 있어 어떤 이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물으면 장차 『할 수 있다』 응할 것이다. 저가 『누가 죽일 수 있습니까?』 하면 『옥을 맡은 벼슬아치가 되어야 죽일 수 있다』 응할 것이다. 이제 연나라로 연나라를 치는데 어찌 권하겠는가.」
夫或問孟子勸王伐燕,不誠是乎?沈同問「燕可伐與」,此挾私意欲自伐之也。知其意慊於是,宜曰:「燕雖可伐,須為天吏乃可以伐之。」沈同意絕,則無伐燕之計矣。不知有此私意而徑應之,不省其語,是不知言也。
무릇 어떤 이가 맹자가 왕에게 연나라 치기를 권하였다고 물은 것이 참으로 옳지 않은가. 심동이 「연나라를 칠 수 있습니까」 물은 것은 사사로운 뜻을 끼고 스스로 치려 한 것이다. 그 뜻이 여기에 마음 두었음을 알았다면 마땅히 「연나라는 비록 칠 수 있으나 하늘의 관리가 되어야 칠 수 있다」 해야 하였다. 심동의 뜻이 끊기면 연나라를 칠 계책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사로운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바로 응하여 그 말을 살피지 않았으니 이는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公孫丑問曰:「敢問夫子惡乎長?」孟子曰:「我知言。」又問:「何謂知言?」曰:「辭知其所蔽,淫辭知其所陷,邪辭知其所離,遁辭知其所窮。生於其心,害於其政,發於其政,害於其事,雖聖人復起,必從吾言矣。」孟子知言者也,又知言之所起之禍,其極所致之(福)〔害〕,見彼之問,則知其措辭所欲之矣。知其所之,則知其極所當害矣。
공손추가 물었다. 「감히 묻건대 선생께서는 무엇에 뛰어나십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나는 말을 안다.」 또 물었다. 「말을 안다 함은 무슨 말씀입니까?」 말하였다. 「치우친 말에 그 가려진 바를 알고 방탕한 말에 그 빠진 바를 알고 사악한 말에 그 떠난 바를 알고 회피하는 말에 그 궁한 바를 안다. 그 마음에서 생겨 그 정사를 해치고 그 정사에서 일어나 그 일을 해치니 비록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를 것이다.」 맹자는 말을 아는 이요 또 말이 일어나는 바의 화와 그 끝에 이르는 해를 아니 저의 물음을 보면 그 말을 둔 바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 가는 바를 알면 그 끝에 마땅히 해로울 바를 안다.
孟子有云:「民舉安,王庶幾改諸!予日望之。」孟子所去之王,豈前所不朝之王哉?而是,何其前輕之疾而後重之甚也?如非是,前王則不去,而於後去之,是後王不肖甚於前;而去三日宿,於前不甚,不朝而宿於景丑氏,何孟子之操前後不同,所以為王,終始不一也?
맹자가 이르기를 「백성이 다 편안할 것이니 왕이 거의 고치실 것이다! 나는 날마다 바란다」 하였다. 맹자가 떠난 왕이 어찌 앞서 조회하지 않은 왕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앞서는 가벼이 미워하고 뒤에는 무겁게 여김이 심한가. 그렇지 않다면 앞의 왕은 떠나지 않고 뒤에 떠났으니 이는 뒤의 왕이 어질지 못함이 앞보다 심한 것인데 떠나며 사흘을 묵었고, 앞에는 심하지 않은데 조회하지 않고 경추씨에게 묵었으니 어찌 맹자의 몸가짐이 앞뒤가 같지 않고 왕을 위하는 바가 처음과 끝이 하나가 아닌가.
且孟子在魯,魯平公欲見之,嬖人臧倉毀孟子,止平公。樂正子以告。曰:「行或使之,止或尼之,行止非人所能也。予之不遇魯侯,天也!」前不遇於魯,後不遇於齊,無以異也。前歸之天,今則歸之於王。孟子論稱竟何定哉?夫不行於齊,王不用,則若臧倉之徒毀讒之也。此亦止或尼之也,皆天命不遇,非人所能也。去,何以不徑行而留三宿乎?天命不當遇於齊,王不用其言,天豈為三日之間易命使之遇乎?在魯則歸之於天,絕意無冀;在齊則歸之於王,庶幾有望。夫如是,不遇之議一在人也。
또 맹자가 노나라에 있을 때 노 평공이 만나려 하였는데 총애하는 사람 장창이 맹자를 헐뜯어 평공을 막았다. 악정자가 알렸다. 말하였다. 「감은 더러 시키는 것이 있고 멈춤은 더러 막는 것이 있으니 가고 멈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노후를 만나지 못함은 하늘이다!」 앞에 노나라에서 만나지 못하고 뒤에 제나라에서 만나지 못함이 다를 것이 없다. 앞에는 하늘에 돌리고 이제는 왕에게 돌렸다. 맹자의 논함이 끝내 무엇으로 정하는가. 무릇 제나라에서 행해지지 않아 왕이 쓰지 않은 것은 장창의 무리가 헐뜯은 것과 같다. 이 또한 멈춤에 막는 것이니 다 하늘의 명이 만나지 못한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떠남에 어찌 바로 가지 않고 사흘을 묵어 머물렀는가. 하늘의 명이 제나라에서 만나지 않아야 하여 왕이 그 말을 쓰지 않았는데 하늘이 어찌 사흘 사이에 명을 바꾸어 만나게 하겠는가. 노나라에서는 하늘에 돌려 뜻을 끊고 바람이 없었고 제나라에서는 왕에게 돌려 거의 바람이 있었다. 이러하면 만나지 못한다는 의논이 한결같이 사람에 있는 것이다.
或曰:初去,未可以定天命也,冀三日之間,王復追之,天命或時在三日之間故可也。夫言如是,齊王初使之去者,非天命乎?如使天命在三日之間,魯平公比三日亦時棄臧倉之議,更用樂正子之言,往見孟子,孟子歸之於天,何其早乎?如三日之間,公見孟子,孟子奈前言何乎?
어떤 이는 말한다. 처음 떠날 때는 아직 하늘의 명을 정할 수 없어 사흘 사이에 왕이 다시 뒤쫓기를 바랐으니 하늘의 명이 혹 사흘 사이에 있으므로 옳다. 무릇 말이 이러하면 제왕이 처음 떠나게 한 것은 하늘의 명이 아닌가. 하늘의 명이 사흘 사이에 있다면 노 평공도 사흘에 이르러 또한 때로 장창의 의논을 버리고 다시 악정자의 말을 써서 가서 맹자를 만났을 것이니 맹자가 하늘에 돌린 것이 어찌 그리 이른가. 사흘 사이에 공이 맹자를 만났다면 맹자는 앞의 말을 어찌하였겠는가.
孟子去齊,充虞塗問曰:「夫子若不豫色然。前日,虞聞諸夫子曰:君子不怨天,不尤人。」曰:「彼一時也,此一時也。五百年必有王者興,其間必有名世者矣。由周以來,七百有餘歲矣,以其數則過矣;以其時考之,則可矣。夫天未欲平治天下乎?如欲平治天下,當今之世,舍我而誰也?吾何為不豫哉?」
맹자가 제나라를 떠나는데 충우가 길에서 물었다. 「선생께서 기쁘지 않은 빛이 있으신 듯합니다. 전날 우가 선생께 들으니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말하였다. 「저것도 한때요 이것도 한때다. 오백 년에 반드시 왕자가 일어나고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이가 있다. 주나라 이래로 칠백 남짓 해니 그 수로는 지났고 그 때로 살피면 옳다. 무릇 하늘이 아직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려 하지 않는가.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려 한다면 지금 세상에 나를 버리고 누구겠는가.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夫孟子言五百年有王者興,何以見乎?帝嚳王者,而堯又王天下;堯傳於舜,舜又王天下;舜傳於禹,禹又王天下。四聖之王天下也,斷踵而興。禹至湯且千歲,湯至周亦然,始於文王,而卒傳於武王。武王崩,成王、周公共治天下。由周至孟子之時,又七百歲而無王者。五百歲必有王者之驗,在何世乎?云五百歲必有王者,誰所言乎?論不實事考驗,信浮淫之語;不遇去齊,有不豫之色;非孟子之賢效與俗儒無殊之驗也?五百年者,以為天出聖期也,又言以天未欲平治天下也,其意以為天欲平治天下,當以五百年之間生聖王也。如孟子之言,是謂天故生聖人也。然則五百歲者,天生聖人之期乎?如是其期,天何不生聖?聖王非其期,故不生。孟子猶信之,孟子不知天也。
무릇 맹자가 오백 년에 왕자가 일어난다 말한 것은 무엇으로 보았는가. 제곡이 왕자인데 요가 또 천하에 왕 노릇하였고, 요가 순에게 전하니 순이 또 천하에 왕 노릇하였고, 순이 우에게 전하니 우가 또 천하에 왕 노릇하였다. 네 성인이 천하에 왕 노릇함은 발꿈치를 이어 일어났다. 우에서 탕까지 거의 천 년이요 탕에서 주까지 또한 그러하니 문왕에서 비롯하여 마침내 무왕에게 전하였다. 무왕이 죽으니 성왕과 주공이 함께 천하를 다스렸다. 주에서 맹자의 때까지 또 칠백 해에 왕자가 없다. 오백 해에 반드시 왕자가 있다는 증험은 어느 세상에 있는가. 오백 해에 반드시 왕자가 있다 함은 누가 말한 것인가. 논함에 일을 실답게 살피지 않고 뜬 말을 믿으며, 만나지 못하고 제나라를 떠나며 기쁘지 않은 빛이 있으니, 맹자의 어짊의 보람이 속된 유자와 다름없다는 증험이 아닌가. 오백 년이란 하늘이 성인을 내는 기한이라 여긴 것이요 또 하늘이 아직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려 하지 않는다 말하니, 그 뜻은 하늘이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려 하면 마땅히 오백 년 사이에 성왕을 낸다는 것이다. 맹자의 말대로라면 이는 하늘이 일부러 성인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백 해는 하늘이 성인을 내는 기한인가. 그 기한이 이러하다면 하늘이 어찌 성인을 내지 않는가. 성왕은 그 기한이 아니므로 나지 않는다. 맹자가 오히려 이것을 믿으니 맹자는 하늘을 알지 못한다.
「自周已來,七百餘歲矣,以其數則過矣;以其時考之,則可矣。」何謂數過?何謂〔時〕可乎?數則時,時則數矣。數過,過五百年也。從周到今七百餘歲,逾二百歲矣。設或王者生,失時矣,又言時可,何謂也?
「주나라 이래로 칠백 남짓 해니 그 수로는 지났고 그 때로 살피면 옳다.」 무엇을 수가 지났다 하고 무엇을 때가 옳다 하는가. 수는 곧 때요 때는 곧 수다. 수가 지났다 함은 오백 년을 지난 것이다. 주에서 지금까지 칠백 남짓 해니 이백 해를 넘었다. 설혹 왕자가 나더라도 때를 잃었는데 또 때가 옳다 하니 무슨 말인가.
云五百年必有王者興,又言其間必有名世,與王者同乎異也?如同,為再言之;如異,名世者謂何等也?謂孔子之徒、孟子之輩,教授後生,覺悟頑愚乎?已有孔子,己又以生矣。如謂聖臣乎,當與聖〔王〕同時。聖王出,聖臣見矣。言五百年而已,何為言其間?如不謂五百年時,謂其中間乎,是謂二三百年之時也。(聖)〔生〕不與五百年時聖王相得。夫如是,孟子言其間必有名世者,竟謂誰也?「夫天未欲平治天下也,如欲治天下,舍予而誰也?」
오백 년에 반드시 왕자가 일어난다 하고 또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이가 있다 하니 왕자와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거듭 말한 것이요 다르다면 세상에 이름난 이는 어떤 이를 이르는가. 공자의 무리와 맹자의 무리가 후생을 가르쳐 어리석음을 깨우침을 이르는가. 이미 공자가 있었고 제가 또 났다. 성스러운 신하를 이른다면 마땅히 성왕과 같은 때다. 성왕이 나면 성스러운 신하가 나타난다. 오백 년이라 말할 뿐이지 어찌 그 사이라 말하는가. 오백 년의 때를 이르지 않고 그 중간을 이른다면 이는 이삼백 년의 때를 이르는 것이다. 나서 오백 년 때의 성왕과 서로 만나지 못한다. 이러하면 맹자가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이가 있다 말한 것은 끝내 누구를 이르는가. 「무릇 하늘이 아직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려 하지 않는다. 천하를 다스리려 한다면 나를 버리고 누구겠는가.」
言若此者,不自謂當為王者,有王者若為王臣矣。為王者臣,皆天也。己命不當平治天下,不浩然安之於齊,懷恨有不豫之色,失之矣。
말이 이러하면 스스로 마땅히 왕자가 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왕자가 있으면 왕의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다. 왕자의 신하가 됨도 다 하늘이다. 제 명이 마땅히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지 못하는데 넓게 제나라에 편안하지 못하고 한을 품어 기쁘지 않은 빛이 있으니 잃은 것이다.
彭更問曰:「士無事而食,可乎?」孟子曰:「不通功易事,以羨補不足,則農有餘粟,女有餘布。子如通之,則梓匠、輪輿,皆得食於子。於此有人焉,入則孝,出則悌,守先王之道,以待後世之學者,而不得食於子。子何尊梓匠、輪輿而輕為仁義者哉?」曰:「梓匠、輪輿,其志將以求食也。君子之為道也,其志亦將以求食與?」孟子曰:「子何以其志為哉?其有功於子,可食而食之矣。且子食志乎,食功乎?」曰:「食志。」曰:「有人於此,毀瓦畫墁,其志將以求食也,則子食之乎?」曰:「否。」曰:「然則子非食志,食功也。」
팽경이 물었다. 「선비가 일 없이 먹는 것이 옳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공을 통하고 일을 바꾸어 남는 것으로 부족을 보태지 않으면 농부에게 남는 곡식이 있고 여자에게 남는 베가 있다. 그대가 통하게 하면 목수와 수레장이가 다 그대에게서 먹을 것을 얻는다. 여기 사람이 있어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손하며 선왕의 도를 지켜 후세의 배우는 이를 기다리는데 그대에게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한다. 그대는 어찌 목수와 수레장이를 높이고 인의를 하는 이를 가벼이 여기는가?」 말하였다. 「목수와 수레장이는 그 뜻이 장차 먹을 것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군자가 도를 함도 그 뜻이 또한 장차 먹을 것을 구하려는 것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그대가 어찌 그 뜻을 따지는가? 그대에게 공이 있어 먹일 만하면 먹이는 것이다. 또 그대는 뜻을 먹이는가, 공을 먹이는가?」 말하였다. 「뜻을 먹입니다.」 말하였다. 「여기 사람이 있어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을 그리는데 그 뜻이 장차 먹을 것을 구하려는 것이라면 그대는 먹이겠는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말하였다. 「그러면 그대는 뜻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공을 먹이는 것이다.」
夫孟子引毀瓦畫墁者,欲以詰彭更之言也。知毀瓦畫墁無功而有志,彭更必不食也。雖然,引毀瓦畫墁非所以詰彭更也。何則?諸志欲求食者,毀瓦畫墁者不在其中。不在其中,則難以詰人矣。夫人無故毀瓦畫墁,此不痴狂則遨戲也。痴狂人之志不求食,遨戲之人亦不求食。求食者,皆多人所(不)〔共〕得利之事,以作此鬻賣於市,得賈以歸,乃得食焉。今毀瓦畫墁,無利於人,何志之有?有知之人,知其無利,固不為也。無知之人,與痴狂比,固無其志。夫毀瓦畫墁,猶比童子擊壤於塗,何以異哉?擊壤於塗者,其志亦欲求食乎?此尚童子,未有志也。巨人博戲,亦畫墁之類也。博戲之人,其志復求食乎?博戲者尚有相奪錢財,錢財眾多,己亦得食,或時有志。夫投石超距,亦畫墁之類也。投石超距之人,其志有求食者乎?然則孟子之詰彭更也,未為盡之也。如彭更以孟子之言,可謂御人以口給矣。
무릇 맹자가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 그리는 이를 끌어온 것은 팽경의 말을 힐난하려 한 것이다.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 그리는 것이 공은 없고 뜻만 있어 팽경이 반드시 먹이지 않을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 그리는 것을 끌어옴은 팽경을 힐난할 것이 아니다. 어째서인가. 뜻이 먹을 것을 구하려는 여러 이 가운데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 그리는 이는 그 안에 있지 않다. 그 안에 있지 않으면 사람을 힐난하기 어렵다. 무릇 사람이 까닭 없이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을 그리면 이는 미치지 않았으면 장난이다. 미친 사람의 뜻은 먹을 것을 구하지 않고 장난하는 사람도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다. 먹을 것을 구하는 이는 다 뭇사람이 함께 이익을 얻는 일로 이것을 지어 저자에서 팔아 값을 얻어 돌아와야 곧 먹는다. 이제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을 그림은 사람에게 이익이 없으니 무슨 뜻이 있는가. 앎이 있는 사람은 그 이익 없음을 알아 본디 하지 않는다. 앎이 없는 사람은 미친 이와 견주어지니 본디 그 뜻이 없다. 무릇 기와를 부수고 담에 그림 그림은 아이가 길에서 땅치기 하는 것과 견주어 무엇이 다른가. 길에서 땅치기 하는 이는 그 뜻이 또한 먹을 것을 구하려는 것인가. 이는 오히려 아이라 아직 뜻이 없다. 어른이 박희하는 것도 담에 그림 그리는 무리다. 박희하는 사람은 그 뜻이 또 먹을 것을 구하는가. 박희하는 이는 오히려 서로 돈과 재물을 빼앗음이 있어 돈과 재물이 많으면 저도 먹을 것을 얻으니 더러 뜻이 있다. 무릇 돌 던지기와 뛰어넘기도 담에 그림 그리는 무리다. 돌 던지고 뛰어넘는 사람에 그 뜻이 먹을 것을 구하는 이가 있는가. 그러면 맹자가 팽경을 힐난함은 다한 것이 아니다. 팽경이 맹자의 말로 하였다면 입의 재빠름으로 사람을 막았다 할 만하다.
匡章子曰:「陳仲子豈不誠廉士乎!居於於陵,三日不食,耳無聞、目無見也。井上有李,螬食實者過半,扶服往將食之,三咽,然後耳有聞、目有見也。」孟子曰:「於齊國之士,吾必以仲子為巨擘焉。雖然,仲子惡能廉?充仲子之操,則蚓而後可者也。夫蚓上食槁壤,下飲黃泉。仲子之所居室,伯夷之所筑與,抑亦盜蹠之所筑與?所食之粟,伯夷之所樹與,抑亦盜蹠之所樹與?是未可知也。」曰:「是何傷哉?彼身織屨,妻辟以易之也。」曰:「仲子,齊之世家,兄戴,蓋祿萬鍾。以兄之祿為不義之祿,而不食也。以兄之室為不義之室,而弗居也。辟兄離母,處於於陵。他日歸,則有餽其兄生鵝者也。己頻蹙曰:惡用是者為哉?他日,其母殺是鵝也,與之食之。其兄自外至,曰:是之肉也。出而吐之。
광장자가 말하였다. 「진중자는 어찌 참으로 청렴한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오릉에 살며 사흘을 먹지 않아 귀에 들림이 없고 눈에 보임이 없었습니다. 우물 위에 오얏이 있어 굼벵이가 열매를 먹은 것이 반이 넘는데 기어가서 먹으니 세 번 삼킨 뒤에야 귀에 들림이 있고 눈에 보임이 있었습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제나라 선비 가운데 나는 반드시 중자를 엄지손가락으로 삼는다. 그러나 중자가 어찌 청렴할 수 있는가? 중자의 몸가짐을 채우려면 지렁이가 된 뒤에야 될 것이다. 무릇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 누런 샘을 마신다. 중자가 사는 집은 백이가 지은 것인가, 아니면 도척이 지은 것인가. 먹는 곡식은 백이가 심은 것인가, 아니면 도척이 심은 것인가. 이는 알 수 없다.」 말하였다. 「그것이 무엇이 상하겠습니까? 저는 몸소 신을 삼고 아내는 삼을 삼아 바꿉니다.」 말하였다. 「중자는 제나라의 세가로 형 대가 개 땅의 녹이 만 종이다. 형의 녹을 의롭지 않은 녹이라 하여 먹지 않고 형의 집을 의롭지 않은 집이라 하여 살지 않았다. 형을 피하고 어미를 떠나 오릉에 살았다. 어느 날 돌아가니 그 형에게 산 거위를 준 이가 있었다. 저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였다. 이 꽥꽥거리는 것을 어디에 쓰는가? 어느 날 그 어미가 이 거위를 죽여 그에게 먹였다. 그 형이 밖에서 이르러 말하였다. 이것이 꽥꽥거리던 것의 고기다. 나가서 토하였다.
以母則不食,以妻則食之;以兄之室則不居,以於陵則居之。是尚能為充其類也乎?若仲子者,蚓而後充其操者也。」
어미로 하면 먹지 않고 아내로 하면 먹으며, 형의 집으로 하면 살지 않고 오릉으로 하면 산다. 이것이 오히려 그 무리를 채울 수 있는가. 중자 같은 이는 지렁이가 된 뒤에야 그 몸가짐을 채우는 이다.」
夫孟子之非仲子也,不得仲子之短矣。仲子之怪鵝如吐之者,豈為在母不食乎?乃先譴鵝曰:「惡用者為哉?」他日,其母殺以食之,其兄曰:「是之肉。」仲子恥負前言,即吐而出之。而兄不告則不吐,不吐,則是食於母也。謂之在母則不食,失其意矣。使仲子執不食於母,鵝膳至,不當食也。今既食之,知其為鵝,怪而吐之。故仲子之吐鵝也,恥食不合己志之物也,非負親親之恩而欲勿母食也。
무릇 맹자가 중자를 그르다 함은 중자의 단점을 얻지 못하였다. 중자가 거위를 괴이하게 여겨 토한 것이 어찌 어미에게 있어 먹지 않은 것이겠는가. 곧 먼저 거위를 꾸짖어 「꽥꽥거리는 것을 어디에 쓰는가?」 하였다. 어느 날 그 어미가 죽여 먹이니 그 형이 「이것이 꽥꽥거리던 것의 고기다」 하였다. 중자가 앞의 말을 저버림을 부끄러워하여 곧 토해 내었다. 형이 알리지 않았으면 토하지 않았을 것이요 토하지 않았으면 이는 어미에게서 먹은 것이다. 어미에게 있으면 먹지 않는다 함은 그 뜻을 잃은 것이다. 중자가 어미에게서 먹지 않기를 고집하였다면 거위 반찬이 이르렀을 때 먹지 않았어야 한다. 이제 이미 먹고 그것이 거위임을 알고 괴이하게 여겨 토하였다. 그러므로 중자가 거위를 토한 것은 제 뜻에 맞지 않는 물건을 먹음을 부끄러워한 것이지 어버이를 친애하는 은혜를 저버려 어미의 밥을 먹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다.
又「仲子惡能廉?充仲子之性,則蚓而後可者也」。夫蚓上食槁壤,下飲黃泉,是謂蚓為至廉也。仲子如蚓,乃為廉潔耳。今所居之宅,伯夷之所筑;所食之粟,伯夷之所樹。仲子居而食之,於廉潔可也。或時食盜蹠之所樹粟,居盜蹠之所筑室,污廉潔之行矣。用此非仲子,亦復失之。室因人故,粟以屨易之,正使盜之所樹筑,己不聞知。今兄之不義,有其操矣。操見於眾,昭晰議論,故避於陵,不處其宅,織屨辟,不食其祿也。而欲使仲子處於陵之地,避若兄之宅,吐若兄之祿,耳聞目見,昭晰不疑,仲子不處不食,明矣。今於陵之宅不見筑者為誰,粟不知樹者為誰,何得成室而居之,得成粟而食之?孟子非之,是為太備矣。仲子所居,或時盜之所筑,仲子不知而居之,謂之不充其操,唯蚓然後可者也。夫盜室之地中亦有蚓焉,食盜宅中之槁壤,飲盜宅中之黃泉,蚓惡能為可乎?在仲子之操,滿孟子之議,魚然後乃可。夫魚處江海之中,食江海之士,海非盜所鑿,士非盜所聚也。
또 「중자가 어찌 청렴할 수 있는가. 중자의 성품을 채우려면 지렁이가 된 뒤에야 될 것이다」 하였다. 무릇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 누런 샘을 마시니 이는 지렁이를 지극히 청렴하다 이른 것이다. 중자가 지렁이 같아야 곧 청렴결백할 뿐이다. 이제 사는 집은 백이가 지은 것이요 먹는 곡식은 백이가 심은 것이다. 중자가 살고 먹으니 청렴결백에 옳다. 혹 때로 도척이 심은 곡식을 먹고 도척이 지은 집에 살면 청렴결백한 행실을 더럽힌다. 이것으로 중자를 그르다 함도 또한 잃은 것이다. 집은 남으로 말미암은 까닭이고 곡식은 신으로 바꾼 것이니 바로 도둑이 심고 지은 것이라 하여도 저는 듣고 알지 못한다. 이제 형의 의롭지 않음은 그 몸가짐이 있다. 몸가짐이 뭇사람에게 드러나고 의논에 밝으므로 오릉으로 피하여 그 집에 살지 않고 신을 삼고 삼을 삼아 그 녹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중자에게 오릉의 땅에 살면서 형의 집 같은 것을 피하고 형의 녹 같은 것을 토하기를 바라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밝게 의심 없으면 중자가 살지 않고 먹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제 오릉의 집은 지은 이가 누구인지 보지 못하고 곡식은 심은 이가 누구인지 모르니 어찌 이루어진 집을 얻어 살고 이루어진 곡식을 얻어 먹지 않겠는가. 맹자가 그르다 함은 너무 갖추기를 구하는 것이다. 중자가 사는 데가 혹 때로 도둑이 지은 것인데 중자가 알지 못하고 살았다 하여 그 몸가짐을 채우지 못하니 오직 지렁이가 된 뒤에야 된다 하였다. 무릇 도둑의 집 땅 가운데도 지렁이가 있어 도둑 집 가운데의 마른 흙을 먹고 도둑 집 가운데의 누런 샘을 마시니 지렁이가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중자의 몸가짐에 맹자의 의논을 채우려면 물고기가 된 뒤에야 될 것이다. 무릇 물고기는 강과 바다 가운데 살며 강과 바다의 흙을 먹는데 바다는 도둑이 판 것이 아니요 흙은 도둑이 모은 것이 아니다.
然則仲子有大非,孟子非之不能得也。夫仲子之去母辟兄,與妻獨處於陵,以兄之宅為義之宅,以兄之祿為不義之祿,故不處不食,廉潔之至也。然則其徒陵歸候母也,宜自齎食而行。鵝膳之進也,必與飯俱。母之所為飯者,兄之祿也。母不自有私粟,以食仲子,明矣。仲子食兄祿也。伯夷不食周粟。餓死於首陽之下,豈一食周粟而以污其潔行哉?仲子之操,近不若伯夷,而孟子謂之若蚓乃可,失仲子之操所當比矣。
그러니 중자에게 큰 그름이 있는데 맹자가 그르다 하여도 얻지 못하였다. 무릇 중자가 어미를 떠나고 형을 피하여 아내와 홀로 오릉에 살며 형의 집을 의롭지 않은 집이라 하고 형의 녹을 의롭지 않은 녹이라 하여 살지 않고 먹지 않았으니 청렴결백의 지극함이다. 그러니 그가 오릉에서 돌아와 어미를 문안할 때 마땅히 스스로 먹을 것을 가지고 갔어야 한다. 거위 반찬이 나옴에 반드시 밥과 함께였을 것이다. 어미가 밥을 지은 것은 형의 녹이다. 어미가 스스로 사사로운 곡식을 가져 중자를 먹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중자는 형의 녹을 먹은 것이다. 백이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었으니 어찌 한 번이라도 주나라 곡식을 먹어 그 깨끗한 행실을 더럽혔겠는가. 중자의 몸가짐은 가까이 백이만 못한데 맹자가 지렁이 같아야 된다 하였으니 중자의 몸가짐이 마땅히 견줄 바를 잃은 것이다.
孟子曰:「莫非天命也,順受其正。是故知命者不立乎岩牆之下。」盡其道而死者,為正命也。桎梏而死者,非天命也。
맹자가 말하였다. 「하늘의 명 아닌 것이 없으니 그 바른 것을 순히 받는다. 이 때문에 명을 아는 이는 바위 담 아래 서지 않는다.」 그 도를 다하고 죽는 이는 바른 명이다. 차꼬와 수갑을 차고 죽는 이는 하늘의 명이 아니다.
夫孟子之言,是謂人無觸值之命也。順操行者得正命,妄行苟為得非正〔命〕,是天命於操行也。
무릇 맹자의 말은 사람에게 부딪쳐 만나는 명이 없다는 말이다. 몸가짐을 순히 하는 이는 바른 명을 얻고 망령되이 행하고 구차히 하는 이는 바르지 않은 명을 얻는다면 이는 하늘이 몸가짐에 명한다는 것이다.
夫子不王,顏淵早夭,子夏失明,伯牛為癘。四者行不順與?何以不受正命?比干剖,子胥烹,子路菹,天下極戮,非徒桎梏也。必以桎梏效非正命,則比干、子胥行不順也。人稟性命,或當壓溺兵燒,雖或慎操修行,其何益哉?竇廣國與百人俱臥積炭之下,炭崩,百人皆死,廣國獨濟,命當封侯也。積炭與岩牆何以異?命不壓,雖岩崩,有廣國之命者猶將脫免。行或使之,止或尼之,命當壓,猶或使之立於牆下。孔甲所入主人〔之〕子(之),天命當賤,雖載入宮,猶為守者。不立岩牆之下,與孔甲載子入宮,同一實也。
공자는 왕이 되지 못하고 안연은 일찍 죽고 자하는 눈을 잃고 백우는 문둥병이 되었다. 넷은 행실이 순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바른 명을 받지 못하였는가. 비간은 가슴이 갈리고 자서는 삶기고 자로는 젓 담겨졌으니 천하의 지극한 형벌이지 한갓 차꼬와 수갑이 아니다. 반드시 차꼬와 수갑으로 바르지 않은 명을 증험한다면 비간과 자서는 행실이 순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성명을 받음에 더러 마땅히 눌리고 빠지고 병기에 죽고 불에 타니 비록 더러 몸가짐을 삼가고 행실을 닦아도 그것이 무슨 보탬이 있는가. 두광국이 백 사람과 함께 쌓인 숯 아래 누웠는데 숯이 무너져 백 사람이 다 죽고 광국만 홀로 건졌으니 명이 마땅히 후에 봉해질 것이었다. 쌓인 숯과 바위 담이 무엇이 다른가. 명이 눌리지 않을 것이면 비록 바위가 무너져도 광국의 명이 있는 이는 오히려 벗어나 면한다. 감에 더러 시키는 것이 있고 멈춤에 더러 막는 것이 있으니 명이 마땅히 눌릴 것이면 오히려 더러 시켜 담 아래 서게 한다. 공갑이 들어간 주인의 아들은 하늘의 명이 마땅히 천하여 비록 실어 궁에 들여도 오히려 지키는 이가 되었다. 바위 담 아래 서지 않음과 공갑이 아들을 실어 궁에 들임은 한가지 실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