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量知篇

논형 論衡 · 왕충(王充) · 80년 무렵 · 단락 10 · 한자 2,008자 · 낭독 8.0분

「논형」 양지편 「量知篇」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후한 사람 왕충이 스스로 밝힌 이 책의 뜻은 넉 자다 — 「疾虛妄」, 헛되고 망령된 것을 미워한다. 하늘이 사람 일에 응해 재앙을 내린다느니, 죽으면 귀신이 되어 앙갚음한다느니, 날을 가려야 탈이 없다느니 하는 그 시대의 말을 하나하나 붙들고 따진다. 따지는 결이 남다르다. 어른의 말이라 하여 그냥 두지 않는다 — 공자에게 묻고(問孔), 맹자를 찌르고(刺孟), 한비를 그르다 한다(非韓). 하늘이 꾸짖어 재앙을 내린다는 말에는, 그러면 하늘은 어찌 임금 하나를 두고 온 나라에 가뭄을 내리느냐고 되묻는다. 「虛」 자가 붙은 아홉 편(書虛·變虛·異虛·感虛·福虛·禍虛·龍虛·雷虛·道虛)이 한 줄로 서서, 옛 책에 적힌 신통한 이야기를 차례로 붙든다. 「增」 자가 붙은 세 편(語增·儒增·藝增)은 말이 어떻게 부풀려지는가를 다룬다. 길험편에는 부여의 동명이 활을 잘 쏘아 왕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남은 동명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꼴이다.

《程材》所論,論材能行操,未言學知之殊奇也。夫儒生之所以過文吏者,學問日多,簡練其性,雕琢其材也。故夫學者所以反情治性,盡材成德也。材盡德成,其比於文吏亦雕琢者,程量多矣。貧人與富人,俱齎錢百,并為賻禮死哀之家。知之者知貧人劣能共百,以為富人饒羨有奇餘也;不知之者,見錢俱百,以為財貨貧富皆若一也。文吏、儒生(皆)有似於此。皆為掾吏,并典一曹,將知之者,知文吏、儒生筆同,而儒生胸中之藏,尚多奇餘。不知之者,以為皆吏,深淺多少同一量,失實甚矣。地性生草,山性生木。如地種葵韭,山樹棗栗,名曰美園茂林,不復與一恆地庸山比矣。文吏、儒生,有似於此,俱有材能,并用筆墨,而儒生奇有先王之道。先王之道,非徒葵韭棗栗之謂也。恆女之手,紡績織經;如或奇能,織錦刺繡,名曰卓殊,不復與恆女科矣。夫儒生與文吏程材,而儒生侈有經傳之學,猶女工織錦刺繡之奇也。

「정재」에서 논한 것은 재능과 행실과 몸가짐을 논하였고 배움과 앎의 특별함은 말하지 않았다. 무릇 유생이 문리보다 나은 까닭은 학문이 날로 많아 그 성품을 가려 단련하고 그 재주를 새겨 다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릇 배움이란 정을 돌이켜 성품을 다스리고 재주를 다하여 덕을 이루는 것이다. 재주가 다하고 덕이 이루어지면 그 문리에 견줌이 또한 새겨 다듬은 것이라 매기고 헤아림이 많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다 돈 백을 가지고 아울러 죽음을 슬퍼하는 집에 부의 예를 한다. 아는 이는 가난한 사람이 못하여도 백을 바치고 부유한 사람은 넉넉하여 남음이 있음을 안다. 모르는 이는 돈이 다 백임을 보고 재물의 가난하고 부유함이 다 하나 같다 여긴다. 문리와 유생은 이와 비슷함이 있다. 다 연리가 되어 아울러 한 조를 맡으면 장수로서 아는 이는 문리와 유생이 붓은 같으나 유생의 가슴속 간직함이 오히려 남음이 많음을 안다. 모르는 이는 다 아전이라 하여 깊고 얕음과 많고 적음이 같은 한 양이라 여기니 실상을 잃음이 심하다. 땅의 성품은 풀을 내고 산의 성품은 나무를 낸다. 땅에 아욱과 부추를 심고 산에 대추와 밤을 심으면 이름하여 아름다운 동산과 무성한 숲이라 하니 다시 한 예사 땅과 보통 산과 견주지 않는다. 문리와 유생은 이와 비슷함이 있으니 다 재능이 있고 아울러 붓과 먹을 쓰나 유생은 특별히 선왕의 도가 있다. 선왕의 도는 한갓 아욱과 부추와 대추와 밤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예사 여자의 손은 실을 잣고 베를 짜는데 혹 기이한 능력이 있어 비단을 짜고 수를 놓으면 이름하여 뛰어나게 다르다 하니 다시 예사 여자와 같은 과로 하지 않는다. 무릇 유생과 문리의 재주를 매김에 유생이 넉넉히 경전의 배움이 있음은 여공이 비단을 짜고 수를 놓는 기이함과 같다.

貧人好濫而富人守節者,貧人不足而富人饒侈。儒生不為非而文吏好為奸者,文吏少道德而儒生多仁義也。貧人富人,并為賓客,受賜於主人,富人不慚而貧人常愧者,富人有以效,貧人無以復也。儒生、文吏,俱以長吏為主人者也。儒生受長吏之祿,報長吏以道;文吏空胸無仁義之學,居往食祿,終無以效,所謂尸位素餐者也。素者,空也;空虛無德,餐人之祿,故曰素餐。無道藝之業,不曉政治,默坐朝庭,不能言事,與尸無異,故曰尸位。然則文吏所謂尸位素餐者也。居右食嘉,見將傾邪,豈能舉記陳言得失乎?一則不能見是非,二則畏罰不敢直言。《禮》曰:「情欲巧。」

가난한 사람은 넘치기 좋아하고 부유한 사람은 절개를 지키는 것은 가난한 사람은 부족하고 부유한 사람은 넉넉하기 때문이다. 유생은 그름을 하지 않고 문리는 간사함을 하기 좋아하는 것은 문리는 도덕이 적고 유생은 인의가 많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아울러 손님이 되어 주인에게 은사를 받을 때 부유한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늘 부끄러워하는 것은 부유한 사람은 갚을 것이 있고 가난한 사람은 갚을 것이 없어서다. 유생과 문리는 다 장리를 주인으로 삼는 이다. 유생은 장리의 녹을 받고 장리에게 도로 갚으며, 문리는 가슴이 비어 인의의 배움이 없이 머물러 녹을 먹으며 끝내 갚을 것이 없으니 이른바 시위소찬이다. 소는 빔이니 비어 덕이 없으면서 남의 녹을 먹으므로 소찬이라 한다. 도와 재주의 업이 없어 정치를 알지 못하고 조정에 잠자코 앉아 일을 말하지 못하니 주검과 다름이 없으므로 시위라 한다. 그러니 문리는 이른바 시위소찬이다. 오른쪽에 머물러 좋은 것을 먹으며 장수가 기울고 사악함을 보고도 어찌 기록을 들어 잘잘못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는 옳고 그름을 볼 수 없고 둘은 벌을 두려워하여 감히 곧게 말하지 못한다. 「예」에 이르기를 「정은 교묘하려 한다」 하였다.

其能力言者,文丑不好(者),有骨無肉,脂腴不足,犯干將(相)指,遂取間。為地戰者不能立功名,貪爵祿者不能諫於上。文吏貪爵祿,一日居位,輒欲圖利以當資用,侵漁徇身,不為將(貪)官顯義。雖見太山之惡,安肯揚舉毛髪之言。事理如此,何用自解於尸位素餐乎?儒生學大義,以道事將,不可則止,有大臣之志,以經勉為公正之操,敢言者也。位又疏遠,遠而近諫,禮謂之諂,此則郡縣之府庭所以常廓無人者也。

그 힘써 말할 수 있는 이는 글이 못나 좋아하지 않으니 뼈만 있고 살이 없어 기름기가 부족하여 장수와 재상의 뜻을 범하여 마침내 틈을 취한다. 땅을 위해 싸우는 이는 공명을 세울 수 없고 작록을 탐하는 이는 위에 간할 수 없다. 문리는 작록을 탐하여 하루 자리에 있으면 곧 이익을 꾀하여 밑천으로 삼으려 하고 침탈하여 몸을 좇으며 장수와 벼슬을 위해 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비록 태산 같은 악을 보아도 어찌 터럭만 한 말을 들어 올리려 하겠는가. 일의 이치가 이러하니 무엇으로 시위소찬에서 스스로 풀겠는가. 유생은 큰 뜻을 배워 도로 장수를 섬기고 안 되면 그치니 대신의 뜻이 있어 경으로 힘써 공정한 몸가짐을 삼아 감히 말하는 이다. 자리가 또 멀고 성긴데 멀면서 가까이 간함을 예에서 아첨이라 하니 이것이 군현의 관부 뜰이 늘 텅 비어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或曰:「文吏筆扎之能,而治定簿書,考理煩事,雖無道學,筋力材能盡於朝庭,此亦報上之效驗也。」

어떤 이는 말한다. 「문리는 붓과 찰의 능함으로 부서를 다스려 정하고 번거로운 일을 살펴 다스리니 비록 도의 배움이 없어도 힘줄과 힘과 재능을 조정에 다하니 이 또한 위에 갚는 보람이다.」

曰:此有似於貧人負官重責,貧無以償,則身為官作,責乃畢竟。夫官之作,非屋廡則牆壁也。屋廡則用斧斤,牆壁則用筑鍤。荷斤斧,把筑鍤,與彼握刀持筆何以殊?

답한다. 이는 가난한 사람이 관의 무거운 빚을 지고 가난하여 갚을 수 없으면 몸으로 관의 일을 하여 빚을 마침내 마치는 것과 비슷하다. 무릇 관의 일은 집채가 아니면 담이다. 집채면 도끼를 쓰고 담이면 달굿대와 삽을 쓴다. 도끼를 메고 달굿대와 삽을 잡음이 저 칼을 쥐고 붓을 잡음과 무엇이 다른가.

苟謂治文書者報上之效驗,此則治屋廡牆壁之人,亦報上也。俱為官作,刀筆斧斤筑鍤鈞也。抱布貿絲,交易有亡,各得所願。儒生抱道貿祿,文吏無所抱,何用貿易?農商殊業,所畜之貨,貨不可同,計其精粗,量其多少,其出溢者名曰富人,富人在世,鄉里願之。夫先王之道,非徒農商之貨也;其為長吏立功致化,百徒富多出溢之榮也。且儒生之業,豈徒出溢哉?其身簡練,知慮光明,見是非,審尤(可)奇也。

진실로 문서를 다스리는 이가 위에 갚는 보람이라 한다면 이는 집채와 담을 다스리는 사람도 위에 갚는 것이다. 다 관의 일을 하니 도필과 도끼와 달굿대와 삽이 고르다. 베를 안고 실을 사면 사고팖에 있고 없음이 있어 저마다 바라는 바를 얻는다. 유생은 도를 안고 녹을 사는데 문리는 안은 것이 없으니 무엇으로 사고팔겠는가. 농부와 상인은 업이 달라 쌓는 재화가 같을 수 없으니 그 정밀하고 거침을 헤아리고 그 많고 적음을 재어 넘쳐 나오는 이를 이름하여 부유한 사람이라 하니 부유한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 향리가 바란다. 무릇 선왕의 도는 한갓 농부와 상인의 재화가 아니니 그가 장리를 위해 공을 세우고 교화를 이루는 것은 온갖 무리 가운데 부유하고 많아 넘쳐 나오는 영화다. 또 유생의 업이 어찌 한갓 넘쳐 나올 뿐이겠는가. 그 몸이 가려 단련되고 앎과 생각이 밝아 옳고 그름을 보고 더욱 기이함을 살핀다.

蒸所與眾山之材干同也,(代)〔伐〕以為蒸,熏以火,(煙)〔〕熱究浹,光色澤潤,之於堂,其耀浩廣,火灶之效加也。繡之未刺,錦之未織,恆絲庸帛,何以異哉?加五采之巧,施針縷之飾,文章炫耀,黼黻華蟲,山龍日月。學士有文章(之學),猶絲帛之有五色之巧也。本質不能相過,學業積聚,超逾多矣。物實無中核者謂之郁,無刀斧之斷者謂之朴。文吏不學,世之教無核也,郁朴之人,孰與程哉?骨曰切,象曰磋,玉曰琢,石曰磨,切磋琢磨,乃成寶器。人之學問知能成就,猶骨象玉石切磋琢磨也。雖欲勿用,賢君其舍諸?孫武、闔廬,世之善用兵者也,知或學其法者,戰必勝。不曉什伯之陣,不知擊刺之術者,強使之軍,軍覆師敗,無其法也。谷之始熟曰粟。舂之於臼,簸其秕糠;蒸之於甑,爨之以火,成熟為飯,乃甘可食。可食而食之,味生肌腴成也。粟未為米,米未成飯,氣腥未熟,食之傷人。夫人之不學,猶谷未成粟,米未為飯也。知心亂少,猶食腥谷,氣傷人也。學士簡練於學,成熟於師,身之有益,猶谷成飯,食之生肌腴也。銅錫未采,在眾石之間,工師鑿掘,爐(橐)〔〕鑄鑠乃成器。未更爐(橐)〔〕,名曰積石,積石與彼路畔之瓦、山間之礫,一實也。故夫谷未舂蒸曰粟,銅未鑄鑠曰積石,人未學問曰。者,竹木之類也。夫竹生於山,木長於林,未知所入。截竹為筒,破以為牒,加筆墨之跡,乃成文字,大者為經,小者為傳記。斷木為槧,之為板,力加刮削,乃成奏牘。夫竹木,粗苴之物也,雕琢刻削,乃成為器用。況人含天地之性,最為貴者乎!

섶은 뭇 산의 재목과 줄기가 같으나 베어 섶을 만들어 불로 그을려 연기와 열이 두루 스며 빛깔이 윤택하면 마루에 두면 그 빛남이 넓으니 불 부엌의 보람이 더해진 것이다. 수를 아직 놓지 않고 비단을 아직 짜지 않은 예사 실과 보통 비단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섯 빛깔의 교묘함을 더하고 바늘과 실의 꾸밈을 베풀면 무늬가 빛나 보불과 화충과 산과 용과 해와 달이 된다. 학사에게 문장이 있음은 실과 비단에 다섯 빛깔의 교묘함이 있음과 같다. 본디 바탕은 서로 지나칠 수 없으나 학업이 쌓이면 뛰어넘음이 많다. 물건에 속 알맹이가 없는 것을 울(郁)이라 하고 칼과 도끼의 끊음이 없는 것을 박(朴)이라 한다. 문리가 배우지 않으니 세상의 가르침에 알맹이가 없어 울박한 사람이라 어찌 매기겠는가. 뼈는 절(切)이라 하고 상아는 차(磋)라 하고 옥은 탁(琢)이라 하고 돌은 마(磨)라 하니 절차탁마하여야 곧 보배 그릇이 된다. 사람의 학문과 지능이 이루어짐은 뼈와 상아와 옥과 돌을 절차탁마함과 같다. 비록 쓰지 않으려 한들 어진 임금이 어찌 버리겠는가. 손무와 합려는 세상에 군사를 잘 쓴 이니 앎이 혹 그 법을 배운 이는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십백의 진을 깨닫지 못하고 치고 찌르는 술법을 모르는 이에게 억지로 군사를 부리게 하면 군사가 엎어지고 무리가 패하니 그 법이 없어서다. 곡식이 처음 익은 것을 속(粟)이라 한다. 절구에 찧어 그 쭉정이와 겨를 까부르고 시루에 쪄서 불로 때어 익혀 밥이 되어야 곧 달아 먹을 만하다. 먹을 만하여 먹으면 맛이 나고 살이 오른다. 조가 아직 쌀이 되지 않고 쌀이 아직 밥이 되지 않으면 기운이 비리고 익지 않아 먹으면 사람을 상한다. 무릇 사람이 배우지 않음은 곡식이 아직 조가 되지 않고 쌀이 아직 밥이 되지 않음과 같다. 앎과 마음이 어지럽고 적음은 비린 곡식을 먹어 기운이 사람을 상함과 같다. 학사가 배움에 가려 단련되고 스승에게 익어 몸에 유익함은 곡식이 밥이 되어 먹으면 살이 오름과 같다. 구리와 주석을 아직 캐지 않아 뭇 돌 사이에 있는데 공사가 뚫어 파고 풀무로 부어 녹여야 곧 그릇이 된다. 아직 풀무를 거치지 않으면 이름하여 적석이라 하니 적석은 저 길가의 기와와 산 사이의 자갈과 한가지 실상이다. 그러므로 무릇 곡식이 아직 찧고 찌지 않은 것을 속이라 하고 구리가 아직 부어 녹이지 않은 것을 적석이라 하고 사람이 아직 배우고 묻지 않은 것을 몽(矇)이라 한다. 몽이란 대와 나무의 무리다. 무릇 대는 산에서 나고 나무는 숲에서 자라 아직 들어갈 바를 모른다. 대를 잘라 통을 만들고 쪼개어 첩을 만들어 붓과 먹의 자취를 더하여야 곧 문자가 되니 큰 것은 경이 되고 작은 것은 전기가 된다. 나무를 잘라 참을 만들고 켜서 판을 만들어 힘써 깎아야 곧 주독이 된다. 무릇 대와 나무는 거친 물건이나 새기고 다듬고 깎아야 곧 그릇으로 쓰이게 된다. 하물며 사람은 하늘과 땅의 성품을 머금어 가장 귀한 것임에랴!

不入師門,無經傳之教,以郁朴之實,不曉禮義,立之朝庭,植笮樹表之類也,其何益哉?山野草茂,鉤鐮斬刈,乃成道路也。士未入道門,邪惡未除,猶山野草木未斬刈,不成路也。染練布帛,名之曰采,貴吉之服也。無染練之治名粗,粗不吉,喪人服之。人無道學,仕宦朝庭,其不能招致也,猶喪人服粗不能招吉也。能削柱梁,謂之木匠。能穿鑿穴坎,謂之士匠。能雕琢文書,謂之史匠。夫文吏之學,學治文書也,當與木土之匠同科,安得程於儒生哉?御史之遇文書,不失分銖。有司之陳籩豆,不誤行伍。其巧習者,亦先學之,人不貴者也,小賤之能,非尊大之職也。無經藝之本,有筆墨之末,大道未足而小伎過多,雖曰吾多學問,御史之知、有司之惠也。飯黍梁者饜,餐糟糠者飽,雖俱曰食,為腴不同。儒生文吏,學俱稱習,其於朝庭,有益不鈞。

스승의 문에 들지 않아 경전의 가르침이 없이 울박한 실상으로 예의를 알지 못하고 조정에 세우면 울타리 세우고 표지 꽂는 무리니 그 무엇이 유익한가. 산과 들에 풀이 무성하면 갈고리와 낫으로 베어야 곧 길이 된다. 선비가 아직 도의 문에 들지 않아 사악함이 아직 없어지지 않음은 산과 들의 풀과 나무를 아직 베지 않아 길이 되지 않음과 같다. 베와 비단을 물들이고 다듬으면 이름하여 채라 하니 귀하고 길한 옷이다. 물들이고 다듬는 손질이 없으면 이름하여 거칠다 하니 거칠면 길하지 않아 상제가 입는다. 사람이 도의 배움이 없이 조정에 벼슬하면 그 불러 이르게 하지 못함은 상제가 거친 것을 입어 길함을 부를 수 없음과 같다. 기둥과 들보를 깎을 수 있으면 목장이라 하고 구멍과 구덩이를 뚫을 수 있으면 토장이라 하고 문서를 새겨 다듬을 수 있으면 사장이라 한다. 무릇 문리의 배움은 문서 다스림을 배우는 것이니 마땅히 나무와 흙의 장인과 같은 과니 어찌 유생에 매기겠는가. 어사가 문서를 다룸에 푼과 수를 잃지 않고 유사가 변두를 벌임에 줄을 그르치지 않는다. 그 교묘히 익힌 이도 또한 먼저 배운 것이나 사람이 귀히 여기지 않는 것은 작고 천한 능함이지 높고 큰 직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예의 근본이 없고 붓과 먹의 끝이 있어 큰 도가 부족하고 작은 재주가 많으면 비록 내가 학문이 많다 하여도 어사의 앎이요 유사의 슬기다. 기장과 조밥을 먹는 이는 물리고 술지게미와 겨를 먹는 이도 배부르니 비록 다 먹는다 하나 살이 되는 것은 같지 않다. 유생과 문리가 배움을 다 익혔다 일컬으나 그 조정에 유익함은 고르지 않다.

鄭子皮使尹何為政,子產比於未能操刀使之割也。子路使子羔為費宰,孔子曰:「賊夫人之子。」皆以未學不見大道也。醫無方術,云:「吾能治病。」問之曰:「何用治病?」曰:「用心意。」病者必不信也。吏無經學,曰:「吾能治民。」問之曰:「何用治民?」曰:「以材能。」

정나라 자피가 윤하에게 정사를 시키니 자산이 아직 칼을 잡을 수 없는데 베게 하는 것에 견주었다. 자로가 자고에게 비의 재를 시키니 공자가 말하였다. 「남의 아들을 해친다.」 다 아직 배우지 않아 큰 도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의원에게 방술이 없으면서 「나는 병을 다스릴 수 있다」 하여 「무엇으로 병을 다스리는가」 물으니 「마음과 뜻으로 한다」 하면 병자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다. 아전에게 경학이 없으면서 「나는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 하여 「무엇으로 백성을 다스리는가」 물으니 「재능으로 한다」 한다.

是醫無方術,以心意治病也,百姓安肯信向,而人君任用使之乎!手中無錢之市,使貨主問曰「錢何在」,對曰「無錢」,貨主必不與也。夫胸中不學,猶手中無錢也。欲人君任使之,百姓信向之,奈何也!

이는 의원이 방술 없이 마음과 뜻으로 병을 다스리는 것이니 백성이 어찌 믿고 향하며 임금이 맡겨 부리려 하겠는가! 손에 돈 없이 저자에 가서 물건 주인이 「돈이 어디 있는가」 묻는데 「돈이 없다」 대답하면 물건 주인이 반드시 주지 않을 것이다. 무릇 가슴속에 배움이 없음은 손에 돈이 없음과 같다. 임금이 맡겨 부리고 백성이 믿고 향하기를 바란들 어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