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亂龍篇

논형 論衡 · 왕충(王充) · 80년 무렵 · 단락 30 · 한자 2,026자 · 낭독 8.1분

「논형」 난룡편 「亂龍篇」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후한 사람 왕충이 스스로 밝힌 이 책의 뜻은 넉 자다 — 「疾虛妄」, 헛되고 망령된 것을 미워한다. 하늘이 사람 일에 응해 재앙을 내린다느니, 죽으면 귀신이 되어 앙갚음한다느니, 날을 가려야 탈이 없다느니 하는 그 시대의 말을 하나하나 붙들고 따진다. 따지는 결이 남다르다. 어른의 말이라 하여 그냥 두지 않는다 — 공자에게 묻고(問孔), 맹자를 찌르고(刺孟), 한비를 그르다 한다(非韓). 하늘이 꾸짖어 재앙을 내린다는 말에는, 그러면 하늘은 어찌 임금 하나를 두고 온 나라에 가뭄을 내리느냐고 되묻는다. 「虛」 자가 붙은 아홉 편(書虛·變虛·異虛·感虛·福虛·禍虛·龍虛·雷虛·道虛)이 한 줄로 서서, 옛 책에 적힌 신통한 이야기를 차례로 붙든다. 「增」 자가 붙은 세 편(語增·儒增·藝增)은 말이 어떻게 부풀려지는가를 다룬다. 길험편에는 부여의 동명이 활을 잘 쏘아 왕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남은 동명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꼴이다.

董仲舒申《春秋》之雩,設土龍以招雨,其意以雲龍相致。

동중서가 「춘추」의 기우제를 펴서 흙 용을 두어 비를 부르니 그 뜻은 구름과 용이 서로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易》曰:「雲從龍,風從虎。」

「역」에 이르기를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하였다.

以類求之,故設土龍。陰陽從類,雲雨自至。儒者或問曰:夫《易》言雲從龍者,謂真龍也,豈謂土哉?楚葉公好龍,牆壁盤盂皆畫龍,必以象類為若真,是則葉公之國常有雨也。《易》又曰「風從虎」,謂虎嘯而谷風至也。風之與虎,亦同氣類。設為土虎,置之谷中,風能至乎?夫土虎不能而致風,土龍安能而致雨?古者畜龍,乘車駕龍,故有豢龍氏、御龍氏。夏后之庭,二龍常在;季年夏衰,二龍低伏。

무리로 구하므로 흙 용을 두었다. 음양이 무리를 따르니 구름과 비가 절로 이른다는 것이다. 유자가 더러 묻는다. 무릇 「역」에 구름이 용을 따른다 말한 것은 참 용을 이른 것이니 어찌 흙을 이르겠는가. 초나라 섭공이 용을 좋아하여 담벽과 쟁반과 사발에 다 용을 그렸는데 반드시 본뜬 무리를 참과 같다 하면 이는 곧 섭공의 나라에 늘 비가 있었을 것이다. 「역」에 또 「바람은 범을 따른다」 하니 범이 울면 골바람이 이름을 이른다. 바람과 범도 또한 같은 기운의 무리다. 흙 범을 만들어 골짜기 가운데 두면 바람이 이를 수 있는가. 무릇 흙 범이 바람을 이르게 할 수 없는데 흙 용이 어찌 비를 이르게 하겠는가. 옛날에 용을 길러 수레를 타고 용을 메웠으므로 환룡씨와 어룡씨가 있었다. 하후의 뜰에 두 용이 늘 있었는데 말년에 하나라가 쇠하자 두 용이 낮게 엎드렸다.

真龍在地,猶無雲雨,況偽象乎?禮,畫雷樽象雷之形,雷樽不聞能致雷,土龍安能而動雨?頓牟掇芥,磁石引針,皆以其真是,不假他類。他類肖似,不能掇取者,何也?氣性異殊,不能相感動也。

참 용이 땅에 있어도 오히려 구름과 비가 없는데 하물며 거짓 상이랴. 예에 뇌준에 우레의 꼴을 본떠 그리는데 뇌준이 우레를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흙 용이 어찌 비를 움직이겠는가. 돈모가 겨자를 줍고 자석이 바늘을 끎은 다 그 참으로 옳은 것이라 다른 무리를 빌리지 않는다. 다른 무리가 비슷하여도 주워 취할 수 없음은 어째서인가. 기운과 성품이 달라 서로 감동시킬 수 없어서다.

劉子駿掌雩祭,典土龍事,桓君山亦難以頓牟、磁石不能真是,何能掇針、取芥,子駿窮無以應。子駿,漢朝智襄,筆墨淵海,窮無以應者,是事非議誤,不得道理實也。

유자준이 기우제를 맡아 흙 용의 일을 맡았는데 환군산이 또한 돈모와 자석은 참으로 옳은 것이 아니면 어찌 바늘을 줍고 겨자를 취하겠느냐고 따지니 자준이 궁하여 응할 것이 없었다. 자준은 한나라 조정의 지혜 주머니요 붓과 먹의 깊은 바다인데 궁하여 응할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일이 의논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 도리의 실상을 얻지 못한 것이다.

曰:夫以非真難,是也;不以象類說,非也。夫東風至,酒湛溢。〔按酒味酸,從東方木也。其味酸,故酒湛溢也〕。

답한다. 무릇 참이 아닌 것으로 따짐은 옳으나 본뜬 무리로 말하지 않음은 그르다. 무릇 동풍이 이르면 술이 잠겨 넘친다. 〔살피건대 술맛은 시니 동방 나무를 따른다. 그 맛이 시므로 술이 잠겨 넘친다.〕

天道自然,非人事也。事與彼雲龍相從,同一實也。

하늘의 도는 절로 그러함이니 사람의 일이 아니다. 일이 저 구름과 용이 서로 따름과 한가지 실상이다.

日,火也;月,水也。水火感動,常以真氣。今伎道之家,鑄陽燧取飛火於日,作方諸取水於月,非自然也,而天然之也。土龍亦非真,何為不能感天?一也。陽燧取火於天,五月丙午日中之時,消煉五石,鑄以為器,乃能得火。今妄取刀劍偃月之鉤,摩以向日,亦能感天。夫土龍既不得比於陽燧,當與刀劍偃月鉤為比。二也。

해는 불이요 달은 물이다. 물과 불이 감동함은 늘 참 기운으로 한다. 이제 기예와 도술의 집이 양수를 부어 해에서 나는 불을 취하고 방저를 만들어 달에서 물을 취하니 절로 그러한 것이 아니나 하늘이 그렇게 한다. 흙 용도 참이 아닌데 어찌 하늘을 느끼게 할 수 없는가. 첫째다. 양수가 하늘에서 불을 취함은 오월 병오일 한낮 때 다섯 돌을 녹여 부어 그릇을 만들어야 곧 불을 얻을 수 있다. 이제 함부로 칼과 검과 언월도 갈고리를 취하여 갈아 해를 향하여도 또한 하늘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무릇 흙 용은 이미 양수에 견줄 수 없으나 마땅히 칼과 검과 언월도 갈고리와 견줄 만하다. 둘째다.

齊孟常君夜出秦關,關未開,客為雞鳴而真雞鳴和之。夫雞可以奸聲感,則雨亦可以偽象致。三也。

제나라 맹상군이 밤에 진나라 관문을 나가는데 관문이 아직 열리지 않아 손이 닭 울음을 내니 참 닭이 울어 화답하였다. 무릇 닭이 간사한 소리로 느낄 수 있으면 비도 거짓 상으로 이르게 할 수 있다. 셋째다.

李子長為政,欲知囚情,以梧桐為人,象囚之形。鑿地為坎,以盧為槨,臥木囚其中。囚罪正則木囚不動,囚冤侵奪,木囚動出。不知囚之精神著木人乎?將精神之氣動木囚也?夫精神感動木囚,何為獨不應從土龍?四也。

이자장이 정사를 함에 죄수의 정을 알려 하여 오동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죄수의 꼴을 본떴다.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갈대로 곽을 삼아 나무 죄수를 그 가운데 눕혔다. 죄수의 죄가 바르면 나무 죄수가 움직이지 않고 죄수가 억울하게 침탈당하였으면 나무 죄수가 움직여 나왔다. 죄수의 정신이 나무 사람에 붙은 것인지 정신의 기운이 나무 죄수를 움직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무릇 정신이 나무 죄수를 감동시키는데 어찌 홀로 흙 용에는 응하여 따르지 않는가. 넷째다.

舜以聖德,入大麓之野,虎狼不犯,蟲蛇不害。禹鑄金鼎象百物,以入山林,亦辟凶殃。論者以為非實,然而上古久遠,周鼎之神,不可無也。夫金與土,同五行也,使作土龍者如禹之德,則亦將有雲雨之驗。五也。

순이 성스러운 덕으로 큰 산기슭의 들에 들어가니 범과 이리가 범하지 않고 벌레와 뱀이 해치지 않았다. 우가 쇠솥을 부어 온갖 물건을 본떠 산림에 들어가니 또한 흉한 재앙을 피하였다. 논하는 이는 실상이 아니라 하나 상고는 오래고 멀어 주나라 솥의 신령함이 없을 수 없다. 무릇 쇠와 흙은 같은 오행이니 흙 용을 만드는 이가 우의 덕 같다면 또한 장차 구름과 비의 증험이 있을 것이다. 다섯째다.

頓牟掇芥,磁石、鉤象之石非頓牟也,皆能掇芥,土龍亦非真,當與磁石、鉤象為類。六也。

돈모가 겨자를 줍고 자석과 갈고리 모양의 돌은 돈모가 아닌데 다 겨자를 주울 수 있으니 흙 용도 참이 아니나 마땅히 자석과 갈고리 모양과 무리가 된다. 여섯째다.

楚葉公好龍,牆壁盂樽皆畫龍象,真龍聞而下之。夫龍與雲雨同氣,故能感動,以類相從。葉公以為畫致真龍,今獨何以不能致雲雨?七也。

초나라 섭공이 용을 좋아하여 담벽과 사발과 준에 다 용의 상을 그리니 참 용이 듣고 내려왔다. 무릇 용과 구름과 비는 같은 기운이므로 감동시킬 수 있어 무리로 서로 따른다. 섭공이 그림으로 참 용을 이르게 하였는데 이제 홀로 어찌 구름과 비를 이르게 할 수 없는가. 일곱째다.

神靈示人以象不以實,故寢臥夢悟見事之象。將吉,吉象來;將凶,凶象至。神靈之氣,雲雨之類,(八也)神靈以象見實,土龍何獨不能以偽致真?〔八〕也。

신령은 사람에게 상으로 보이고 실상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자다가 꿈에 일의 상을 본다. 장차 길하면 길한 상이 오고 장차 흉하면 흉한 상이 이른다. 신령의 기운은 구름과 비의 무리다. 신령이 상으로 실상을 보이는데 흙 용이 어찌 홀로 거짓으로 참을 이르게 할 수 없는가. 여덟째다.

神靈以象見實,土龍何獨不能以偽致真也?上古之人,有神荼、郁壘者,昆弟二人,性能執鬼,居東海度朔山上,立桃樹下,簡閱百鬼。鬼無道理,妄為人禍,荼與郁壘縛以盧索,執以食虎。故今縣官斬桃為人,立之戶側;畫虎之形,著之門闌。夫桃人非荼、郁壘也,畫虎非食鬼之虎也,刻畫效象,冀以御凶。今土龍亦非致雨之龍,獨信桃人畫虎,不知土龍。九也。

신령이 상으로 실상을 보이는데 흙 용이 어찌 홀로 거짓으로 참을 이르게 할 수 없는가. 상고의 사람에 신도와 울루라는 이가 있어 형제 두 사람이 성품이 귀신을 잡을 수 있어 동해 도삭산 위에 살며 복숭아나무 아래 서서 온갖 귀신을 가려 살폈다. 귀신이 도리가 없어 망령되이 사람의 화가 되면 도와 울루가 갈대 새끼로 묶어 잡아 범에게 먹였다. 그러므로 지금 현관이 복숭아나무를 베어 사람을 만들어 문 곁에 세우고 범의 꼴을 그려 문틀에 붙인다. 무릇 복숭아 사람은 도와 울루가 아니요 그린 범은 귀신 먹는 범이 아니나 새기고 그려 상을 본떠 흉함을 막기를 바란다. 이제 흙 용도 비를 이르게 하는 용이 아닌데 홀로 복숭아 사람과 그린 범은 믿고 흙 용은 알지 못한다. 아홉째다.

此尚因緣昔書,不見實驗。魯般、墨子刻木為鳶,蜚之三日而不集,為之巧也。使作土龍者若魯般、墨子,則亦將有木鳶蜚不集之類。夫蜚鳶之氣,雲雨之氣也。氣而蜚木鳶,何獨不能從土龍?十也。

이는 오히려 옛 책에 연유한 것이라 실다운 증험을 보지 못한 것이다. 노반과 묵자가 나무를 새겨 솔개를 만들어 날리니 사흘 동안 내려앉지 않았으니 만듦이 교묘해서다. 흙 용을 만드는 이가 노반과 묵자 같다면 또한 장차 나무 솔개가 날아 내려앉지 않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무릇 나는 솔개의 기운은 구름과 비의 기운이다. 기운이 나무 솔개를 날리는데 어찌 홀로 흙 용을 따를 수 없는가. 열째다.

夫雲雨之氣也,知於蜚鳶之氣,未可以言。釣者以木為魚,丹漆其身,近之水流而擊之,起水動作,魚以為真,并來聚會。夫丹木非真魚也,魚含血而有知,猶為象至。雲雨之知,不能過魚。見土龍之象,何能疑之?十一也。

무릇 구름과 비의 기운이 나는 솔개의 기운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낚시하는 이가 나무로 물고기를 만들어 그 몸에 붉은 칠을 하여 물의 흐름에 가까이 하고 치면 물이 일어 움직여 물고기가 참이라 여겨 아울러 와서 모인다. 무릇 붉은 나무는 참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는 피를 머금어 앎이 있는데도 오히려 상 때문에 이른다. 구름과 비의 앎이 물고기를 지날 수 없다. 흙 용의 상을 보고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열한째다.

此尚魚也,知不如人。匈奴敬畏郅都之威,刻木象都之狀,交弓射之,莫能一中。不知都之精神在形象邪?亡(也)將匈奴敬鬼精神在木也?

이는 오히려 물고기라 앎이 사람만 못하다. 흉노가 질도의 위엄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나무를 새겨 도의 모양을 본떠 번갈아 활을 쏘았으나 하나도 맞힐 수 없었다. 도의 정신이 형상에 있는지 흉노가 공경하는 귀신의 정신이 나무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如都之精神在形象,天龍之神亦在土龍。如匈奴精在於木人,則雩祭者之精亦在土龍。十二也。

도의 정신이 형상에 있다면 하늘 용의 신도 흙 용에 있다. 흉노의 정기가 나무 사람에 있다면 기우제하는 이의 정기도 흙 용에 있다. 열두째다.

金翁叔,休屠王之太子也,與父俱來降漢,父道死,與母俱來,拜為騎者尉。母死,武帝圖其母於甘泉殿上,署曰休屠王焉提。翁叔從上上甘泉,拜謁起立,向之泣涕沾襟,久乃去。夫圖畫,非母之實身也,因見形象,涕泣輒下,思親氣感,不待實然也。夫土龍猶甘泉之圖畫也,雲雨見之,何為不動?十三也。

김옹숙은 휴도왕의 태자로 아비와 함께 한나라에 항복하러 오다가 아비가 길에서 죽어 어미와 함께 와서 기도위에 배해졌다. 어미가 죽자 무제가 그 어미를 감천전 위에 그리고 휴도왕의 왕비 연지(焉提)라 적었다. 옹숙이 임금을 따라 감천에 올라 절하고 뵙고 일어서서 그것을 향해 울어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오래 있다가 갔다. 무릇 그림은 어미의 실다운 몸이 아닌데 형상을 봄으로 인해 눈물이 곧 내리니 어버이를 생각하는 기운이 느껴 실로 그러함을 기다리지 않는다. 무릇 흙 용은 감천의 그림과 같으니 구름과 비가 그것을 보면 어찌 움직이지 않겠는가. 열셋째다.

此尚夷狄也。有若似孔子,孔子死,弟子思慕,共坐有若孔子之座。

이는 오히려 이적이다. 유약이 공자와 비슷하니 공자가 죽자 제자가 사모하여 함께 유약을 공자의 자리에 앉혔다.

弟子知有若非孔子也,猶共坐而尊事之。雲雨之知,使若諸弟子之知,雖知土龍非真,然猶感動,思類而至。十四也。

제자는 유약이 공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오히려 함께 앉혀 높여 섬겼다. 구름과 비의 앎이 여러 제자의 앎 같다면 비록 흙 용이 참이 아님을 알아도 오히려 감동하여 무리를 생각하여 이를 것이다. 열넷째다.

有若,孔子弟子,疑其體象,則謂相似。孝武皇帝幸李夫人,夫人死,思見其形。道士以術為李夫人,夫人步入殿門,武帝望見,知其非也,然猶感動,喜樂近之。使雲雨之氣如武帝之心,雖知土龍非真,然猶愛好感起而來。十五也。

유약은 공자의 제자로 그 몸과 모양을 의심하니 서로 비슷하다 한 것이다. 효무황제가 이부인을 총애하였는데 부인이 죽자 그 꼴을 보기를 생각하였다. 도사가 술법으로 이부인을 만드니 부인이 걸어 전문에 들어오매 무제가 바라보고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오히려 감동하여 기뻐하며 가까이하였다. 구름과 비의 기운이 무제의 마음 같다면 비록 흙 용이 참이 아님을 알아도 오히려 사랑하고 좋아하여 감동하여 일어나 올 것이다. 열다섯째다.

既效驗有十五,又亦有義四焉。

이미 보람의 증험이 열다섯이 있고 또 뜻이 넷이 있다.

立春東耕,為土象人,男女各二人,秉耒把鋤。或立土牛,未必能耕也。順氣應時,示率下也。今設土龍,雖知不能致雨,亦當夏時以類應變,與立土人土牛同(一)義。〔一〕也。

입춘에 동쪽에서 밭을 갊에 흙으로 상 사람을 만드는데 남녀 각 두 사람이 쟁기를 잡고 호미를 쥔다. 혹 흙 소를 세우니 반드시 밭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운을 따르고 때에 응하여 아래를 거느림을 보이는 것이다. 이제 흙 용을 둠은 비록 비를 이르게 할 수 없음을 알아도 또한 마땅히 여름철에 무리로 변고에 응하니 흙 사람과 흙 소를 세움과 같은 뜻이다. 첫째다.

禮,宗廟之主,以木為之,長尺二寸,以象先祖。孝子入廟,主心事之,雖知木主非親,亦當盡敬。有所主事,土龍與木主同。雖知非真,示當感動,立意於象。二也。

예에 종묘의 신주는 나무로 만들어 길이 한 자 두 치로 선조를 본뜬다. 효자가 사당에 들어가 마음을 주로 하여 섬기니 비록 나무 신주가 어버이가 아님을 알아도 또한 마땅히 공경을 다한다. 주로 삼아 섬기는 바가 있으니 흙 용과 나무 신주는 같다. 비록 참이 아님을 알아도 마땅히 감동함을 보여 상에 뜻을 세운다. 둘째다.

塗車、芻靈,聖人知其無用,示象生存,不敢無也。夫設土龍知其不能動雨也,示若塗車、芻靈而有致。三也。

진흙 수레와 풀 인형은 성인이 그 쓸데없음을 알면서도 살아 있음을 본뜸을 보여 감히 없이 하지 않는다. 무릇 흙 용을 둠은 그 비를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아도 진흙 수레와 풀 인형처럼 이르게 함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셋째다.

天子射熊,諸侯射麋,卿大夫射虎豹,土射鹿豕,示服猛也。名布為侯,示射無道諸侯也。夫畫布為熊麋之象,名布為侯,禮貴意象,示義取名也。土龍亦夫熊麋、布侯之類。四也。

천자는 곰을 쏘고 제후는 고라니를 쏘고 경대부는 범과 표범을 쏘고 선비는 사슴과 돼지를 쏘니 사나운 것을 복종시킴을 보인다. 베를 후라 이름함은 무도한 제후를 쏨을 보인다. 무릇 베에 곰과 고라니의 상을 그리고 베를 후라 이름함은 예가 뜻과 상을 귀히 여겨 뜻을 보이고 이름을 취하는 것이다. 흙 용도 저 곰과 고라니와 베 과녁의 무리다. 넷째다.

夫以象類有十五驗,以禮示意有四義。仲舒覽見深鴻,立事不妄,設土龍之象,果有狀也。龍暫出水,雲雨乃至。古者畜龍御龍常存無雲雨,猶舊交相闊遠,卒然相見,歡欣歌笑,或至悲泣涕,偃伏少久,則示行各恍忽矣。《易》曰:「雲從龍。」非言龍從雲也。

무릇 상과 무리로 열다섯 증험이 있고 예로 뜻을 보임에 네 뜻이 있다. 중서가 보고 살핌이 깊고 넓어 일을 세움에 망령되지 않으니 흙 용의 상을 둠은 과연 모양이 있다. 용이 잠깐 물에서 나오면 구름과 비가 곧 이른다. 옛날에 용을 기르고 용을 몰 때 늘 있어도 구름과 비가 없었음은 옛 사귐이 서로 멀리 떨어졌다가 갑자기 서로 만나면 기뻐 노래하고 웃거나 혹 슬퍼 울어 눈물 흘림에 이르나 엎드려 조금 오래되면 곧 가는 데가 저마다 어렴풋한 것과 같다. 「역」에 이르기를 「구름은 용을 따른다」 하였지 용이 구름을 따른다 말하지 않았다.

云樽刻雷雲之象,龍安肯來?夫如是傳之者何可解,則桓君山之難可說也,則劉子駿不能對,劣也。劣則董仲舒之龍說不終也。《論衡》終之。故曰「亂龍」。〔亂〕者,終也。

뇌준에 우레와 구름의 상을 새기는데 용이 어찌 오려 하겠는가. 무릇 이러하면 전하는 이가 어찌 풀 수 있겠는가 하면 환군산의 따짐을 말할 수 있고 유자준이 대답하지 못함은 못한 것이다. 못하면 동중서의 용 설이 마치지 못한다. 「논형」이 이를 마친다. 그러므로 「난룡」이라 한다. 난이란 마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