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應篇
儒者論太平瑞應,皆言氣物卓異,朱草、醴泉、翔(鳳)〔風〕、甘露、景星、嘉禾、脯、莢、屈軼之屬。
유자가 태평의 상서로운 응함을 논함에 다 기운과 물건이 뛰어나게 다르다 하니 주초·예천·상서로운 바람·감로·경성·가화·삽포·명협·굴일 따위다.
又言山出車,澤出舟,男女異路,市無二价,耕者讓畔,行者讓路,頒白不提挈,關梁不閉,道無虜掠,風不鳴條,雨不破塊,五日一風,十日一雨,其盛茂者,致黃龍、騏、鳳皇。夫儒者之言,有溢美過實。瑞應之物,或有或無。夫言鳳皇、騏之屬,大瑞較然,不得增飾;其小瑞徵應,恐多非是。夫風氣雨露,本當和適。言其(鳳)〔風〕翔、甘露、風不鳴條、雨不破塊,可也;言其五日一風、十日一雨,褒之也。風雨雖適,不能五日、十日,正如其數。言男女不相干、市价不相欺,可也;言其異路、無二价,褒之也。太平之時,豈更為男女各作道哉?不更作道,一路而行,安得異乎?太平之時,無商人則可;如有,必求便利以為業。買物安肯不求賤,賣貨安肯不求貴!有求貴賤之心,必有二价之語。此皆有其事而褒增過其實也。若夫脯、莢、屈軼之屬,殆無其物。何以驗之?說以實者,太平無有此物。
또 산에서 수레가 나오고 못에서 배가 나오며 남녀가 길을 달리하고 저자에 두 값이 없으며 밭 가는 이는 두둑을 사양하고 길 가는 이는 길을 사양하며 반백의 늙은이는 짐을 들지 않고 관문과 다리를 닫지 않으며 길에 노략질이 없고 바람은 가지를 울리지 않고 비는 흙덩이를 깨뜨리지 않으며 닷새에 한 번 바람 불고 열흘에 한 번 비 오니 그 성한 것은 황룡·기린·봉황을 이르게 한다 한다. 무릇 유자의 말은 넘치게 기려 실상을 지나침이 있다. 상서로운 응함의 물건은 혹 있고 혹 없다. 무릇 봉황과 기린의 무리를 말함은 큰 상서가 뚜렷하여 더하여 꾸밀 수 없으나 그 작은 상서와 징험은 아마 많이 그르다. 무릇 바람과 기운과 비와 이슬은 본디 마땅히 화하고 알맞다. 그 바람이 상서롭고 감로가 내리고 바람이 가지를 울리지 않고 비가 흙덩이를 깨뜨리지 않는다 말함은 옳으나 그 닷새에 한 번 바람 불고 열흘에 한 번 비 온다 말함은 기림이다. 바람과 비가 비록 알맞아도 닷새 열흘로 바로 그 수와 같을 수 없다. 남녀가 서로 범하지 않고 저자 값이 서로 속이지 않는다 말함은 옳으나 그 길을 달리하고 두 값이 없다 말함은 기림이다. 태평한 때에 어찌 다시 남녀를 위해 저마다 길을 내겠는가. 다시 길을 내지 않으면 한 길로 다니니 어찌 다르겠는가. 태평한 때에 장사꾼이 없으면 옳으나 있으면 반드시 이로움을 구해 업을 삼는다. 물건을 사며 어찌 싼 것을 구하지 않고 물건을 팔며 어찌 비싼 것을 구하지 않겠는가! 비싸고 싼 것을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두 값의 말이 있다. 이는 다 그 일이 있으나 기려 더함이 실상을 지나친 것이다. 저 삽포·명협·굴일 따위는 거의 그 물건이 없다. 무엇으로 증험하는가. 실상으로 말하면 태평에 이 물건이 없다.
儒者言脯生於庖廚者,言廚中自生肉脯,薄如形,搖鼓生風,寒涼食物,使之不臭。夫太平之氣雖和,不能使廚生肉,以為寒涼。若能如此,則能使五谷自生,不須人為之也。能使廚自生肉,何不使飯自蒸於甑,火自燃於灶乎!凡生者,欲以風吹食物也,何不使食物自不臭,何必生以風之乎?廚中能自生,則冰室何事而復伐冰以寒物乎?人夏月操,須手搖之,然後生風,從手握持,以當疾風,不鼓動,言脯自鼓,可也?須風乃鼓,不風不動,從手風來,自足以寒廚中之物,何須脯!世言燕太子丹使日再中,天雨粟,烏白頭,馬生角,廚門〔木〕象生肉足。論之既虛,則脯之語,五應之類,恐無其實。
유자는 삽포가 부엌에서 난다 말하니 부엌 가운데 절로 고기포가 나서 얇기가 부채 모양 같고 흔들어 바람을 일으켜 먹을 것을 차게 하여 냄새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무릇 태평의 기운이 비록 화하여도 부엌에 고기를 나게 하여 부채로 삼을 수 없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오곡을 절로 나게 하여 사람이 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부엌에 절로 고기를 나게 할 수 있다면 어찌 밥이 시루에서 절로 찌고 불이 부뚜막에서 절로 타게 하지 않는가! 무릇 부채를 냄은 바람으로 먹을 것을 불려는 것인데 어찌 먹을 것이 절로 냄새나지 않게 하지 않고 하필 부채를 내어 바람을 보내는가. 부엌 가운데 절로 부채가 날 수 있다면 얼음 창고는 무슨 일로 다시 얼음을 베어 물건을 차게 하는가. 사람이 여름에 부채를 잡음에 손으로 흔든 뒤에야 바람이 나니 손에 쥠을 따라 사나운 바람을 맞으니 흔들지 않고 삽포가 절로 흔든다 말함이 옳은가. 바람을 기다려 흔들고 바람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니 손 따라 바람이 오면 절로 부엌 물건을 차게 하기에 넉넉한데 어찌 삽포가 필요한가! 세상은 연 태자 단이 해를 다시 한가운데 있게 하고 하늘에서 조가 비 내리고 까마귀가 흰 머리 되고 말에 뿔이 나고 부엌 문의 나무 코끼리에 고기 발이 났다 말한다. 논함에 이미 헛되니 삽포의 말은 다섯 응함의 무리라 아마 그 실상이 없다.
儒者又言:古者莢夾階而生,月朔,日一莢生,至十五日而十五莢;於十六日,日一莢落,至月晦莢盡,來月朔,一莢復生。王者南面視莢生落,則知日數多少,不須煩擾案日歷以知之也。夫天既能生莢以為日數,何不使莢有日名,王者視莢之字則知今日名乎?徒知日數,不知日名,猶復案歷,然後知之,是則王者視日則更須擾,不省莢之生,安能為福?夫,草之實也,猶豆之有莢也,春夏未生,其生必於秋末。冬月隆寒,霜雪隕零,萬物皆枯,儒者敢謂莢達冬獨不死乎?如與萬物俱生俱死,莢成而以秋末,是則季秋得察莢,春夏冬三時不得案也。且月十五日生十五莢,於十六日莢落,二十一日六莢落,落莢棄殞,不可得數,猶當計未落莢以知日數,是勞心苦意,非善佑也。使莢生於堂上,人君坐戶牖間,望察莢生以知日數,匪謂善矣。今云夾階而生,生於堂下也。王者之堂,墨子稱堯、舜高三尺,儒家以為卑下。假使之然,高三尺之堂,莢生於階下,王者欲視其莢,不能從戶牖之間見也,須臨堂察之,乃知莢數。夫起視堂下之莢,孰與懸歷日於坐,傍顧輒見之也?天之生瑞欲以娛王者,須起察乃知日數,是生煩物以累之也。且莢,草也,王者之堂,旦夕所坐,古者雖質,宮室之中,草生輒耘,安得生莢而人得經月數之乎?且凡數日一二者,欲以紀識事也,古有史官典歷主日,王者何事而自數莢?堯候四時之中,命曦和察四星以占時氣,四星至重,猶不躬視,而自察莢以數日也?
유자가 또 말한다. 옛날에 명협이 섬돌을 끼고 나서 달 초하루에 날마다 한 꼬투리가 나 보름날에 열다섯 꼬투리요 열엿샛날에 날마다 한 꼬투리가 떨어져 그믐에 이르면 꼬투리가 다하고 다음 달 초하루에 한 꼬투리가 다시 난다. 왕자가 남면하여 꼬투리가 나고 떨어짐을 보면 날 수의 많고 적음을 알아 번거로이 달력을 살펴 알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무릇 하늘이 이미 꼬투리를 내어 날 수를 삼을 수 있으면 어찌 꼬투리에 날 이름이 있게 하여 왕자가 꼬투리의 글자를 보면 오늘 이름을 알게 하지 않는가. 한갓 날 수만 알고 날 이름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다시 달력을 살핀 뒤에야 아니 이는 왕자가 날을 봄에 다시 번거로워야 하고 꼬투리가 남을 덜지 않으니 어찌 복이 되겠는가. 무릇 명협은 풀의 열매니 콩에 꼬투리가 있음과 같아 봄과 여름에 아직 나지 않고 그 남이 반드시 가을 끝에 있다. 겨울 달 매서운 추위에 서리와 눈이 떨어져 만물이 다 마르니 유자가 감히 명협이 겨울에 이르러 홀로 죽지 않는다 하겠는가. 만물과 함께 나고 함께 죽으면 꼬투리가 가을 끝에 이루어지니 이는 늦가을에야 꼬투리를 살필 수 있고 봄·여름·겨울 세 철에는 살필 수 없다. 또 달 보름날에 열다섯 꼬투리가 나고 열엿샛날에 꼬투리가 떨어지고 스무하룻날에 여섯 꼬투리가 떨어지니 떨어진 꼬투리는 버려져 셀 수 없으니 오히려 마땅히 떨어지지 않은 꼬투리를 세어 날 수를 알아야 하니 이는 마음을 수고롭히고 뜻을 괴롭히는 것이지 착한 도움이 아니다. 명협이 당 위에 나서 임금이 문과 창 사이에 앉아 꼬투리가 남을 바라보아 날 수를 안다 하여도 착하다 할 수 없다. 이제 섬돌을 끼고 난다 하니 당 아래 남이다. 왕자의 당은 묵자가 요·순은 높이가 석 자라 일컫고 유가는 낮다 여긴다. 가령 그러하여 높이 석 자의 당에 꼬투리가 섬돌 아래 나면 왕자가 그 꼬투리를 보려 하여도 문과 창 사이에서 볼 수 없고 당에 임하여 살펴야 곧 꼬투리 수를 안다. 무릇 일어나 당 아래의 꼬투리를 봄이 달력을 자리에 걸어 두고 곁을 돌아보면 곧 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은가. 하늘이 상서를 냄은 왕자를 즐겁게 하려 함인데 일어나 살펴야 곧 날 수를 아니 이는 번거로운 물건을 내어 누를 끼침이다. 또 명협은 풀이라 왕자의 당은 아침저녁 앉는 곳이니 옛날이 비록 질박하여도 궁실 가운데 풀이 나면 곧 매었으니 어찌 명협이 나서 사람이 달을 지나 세게 하겠는가. 또 무릇 날을 하나둘 셈은 일을 기록하려 함인데 옛날에 사관이 있어 달력을 맡고 날을 주관하니 왕자가 무슨 일로 스스로 꼬투리를 세는가. 요가 사철의 가운데를 살핌에 희·화에게 명하여 네 별을 살펴 철 기운을 점치게 하니 네 별이 지극히 무거워도 오히려 몸소 보지 않았는데 스스로 꼬투리를 살펴 날을 세겠는가.
儒者又言:太平之時,屈軼生於庭之末,若草之狀,主指佞人,佞人入朝,屈軼庭末以指之,聖王則知佞人所在。夫天能故生此物以指佞人,不使聖王性自知之;或佞人本不生出,必復更生一物以指明之,何天之不憚煩也!聖王莫過堯、舜,堯、舜之治,最為平矣,即屈軼已自於庭之末,佞人來輒指知之,則舜何難於知佞人,而使皋陶陳知人之術?《經》曰:「知人則哲,惟帝難之。」
유자가 또 말한다. 태평한 때에 굴일이 뜰 끝에 나니 풀의 모양 같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리킴을 주관하여 아첨하는 사람이 조정에 들면 굴일이 뜰 끝에서 굽어 가리키니 성왕이 곧 아첨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안다는 것이다. 무릇 하늘이 일부러 이 물건을 내어 아첨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할 수 있으면서 성왕이 성품으로 절로 알게 하지 않고, 혹 아첨하는 사람이 본디 나오지 않게 하지 않고 반드시 다시 한 물건을 내어 가리켜 밝히니 어찌 하늘이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음인가! 성왕은 요·순보다 나은 이가 없고 요·순의 다스림이 가장 평안하였으니 곧 굴일이 이미 절로 뜰 끝에 있어 아첨하는 사람이 오면 곧 가리켜 알았다면 순이 어찌 아첨하는 사람 앎을 어려워하여 고요에게 사람 아는 술법을 펴게 하였는가. 「경」에 이르기를 「사람을 알면 밝음이니 임금도 어렵게 여긴다」 하였다.
人含五常,音氣交通,且猶不能相知。屈軼草也,安能知佞?如儒者之言是,則太平之時,草木逾賢聖也。獄訟有是非,人情有曲直,何不并令屈軼指其非而不直者,必苦心聽訟,三人斷獄乎?故夫屈軼之草,或時無有而空言生,或時實有而虛言能指,假令能指,或時草性見人而動。古者質朴,見草之動,則言能指,能指則言指佞人。司南之杓,投之於地,其柢指南。魚肉之蟲,集地北行,夫蟲之性然也。
사람은 오상을 품고 소리와 기운이 서로 통하여도 오히려 서로 알지 못한다. 굴일은 풀인데 어찌 아첨을 알겠는가. 유자의 말이 옳다면 태평한 때에 풀과 나무가 어진 이와 성인보다 나은 것이다. 옥사와 송사에 옳고 그름이 있고 사람의 정에 굽고 곧음이 있으니 어찌 아울러 굴일에게 그 그르고 곧지 않은 이를 가리키게 하지 않고 반드시 마음을 괴롭혀 송사를 듣고 세 사람이 옥사를 끊는가. 그러므로 무릇 굴일의 풀은 혹 때로 있지 않은데 헛되이 난다 말하고 혹 때로 실로 있으나 헛되이 가리킬 수 있다 말한다. 가령 가리킬 수 있어도 혹 때로 풀의 성품이 사람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다. 옛날은 질박하여 풀이 움직임을 보면 가리킬 수 있다 말하고 가리킬 수 있으면 아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말하였다. 지남 국자를 땅에 던지면 그 자루가 남쪽을 가리킨다. 물고기와 고기의 벌레는 땅에 모여 북으로 가니 무릇 벌레의 성품이 그러하다.
今草能指,亦天性也。聖人因草能指,宣言曰庭末有屈軼能指佞人,百官臣子懷奸心者,則各變性易操,為忠正之行矣,猶今府廷畫皋陶〔〕也。
이제 풀이 가리킬 수 있음도 하늘의 성품이다. 성인이 풀이 가리킬 수 있음으로 인하여 펴 말하기를 뜰 끝에 굴일이 있어 아첨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다 하니 백관과 신하로 간사한 마음을 품은 이가 저마다 성품을 바꾸고 지조를 고쳐 충성되고 바른 행실을 하니 지금 관청 뜰에 고요와 해치를 그림과 같다.
儒者說云:〔〕者,一角之羊也,性知有罪。皋陶治獄,其罪疑者令羊觸之,有罪則觸,無罪則不觸。斯蓋天生一角聖獸,助獄為驗,故皋陶敬羊,起坐事之。此則神奇瑞應之類也。曰:夫〔〕則復屈軼之語也。羊本二角,〔〕一角,體損於群,不及眾類,何以為奇?鱉三足曰能,龜三足曰賁。案能與賁,不能神於四足之龜鱉;一角之羊,何能聖於兩角之禽?
유자의 설에 이르기를 「해치는 뿔 하나의 양이니 성품이 죄 있음을 안다. 고요가 옥사를 다스림에 그 죄가 의심스러운 이는 양에게 받게 하니 죄가 있으면 받고 죄가 없으면 받지 않는다. 이는 아마 하늘이 뿔 하나의 성스러운 짐승을 내어 옥사를 도와 증험이 되게 한 것이므로 고요가 양을 공경하여 일어나고 앉음에 섬겼다」 하니 이는 곧 신령하고 기이한 상서로운 응함의 무리다. 답한다. 무릇 해치는 곧 다시 굴일의 말이다. 양은 본디 뿔이 둘인데 해치는 뿔이 하나니 몸이 무리보다 덜하여 뭇 무리에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기이함이 되는가. 자라 세 발을 능이라 하고 거북 세 발을 분이라 한다. 살피건대 능과 분은 네 발의 거북과 자라보다 신령할 수 없다. 뿔 하나의 양이 어찌 두 뿔의 짐승보다 성스러울 수 있겠는가.
知往,乾鵲知來,鸚鵡能言,天性能一,不能為二。或時〔〕之性,徒能觸人,未必能知罪人,皋陶欲神事助政,惡受罪者之不厭服,因〔〕觸人則罪之,欲人畏之不犯,受罪之家,沒齒無怨言也。夫物性各自有所知,如以〔〕能觸謂之為神,則
저산은 지난 일을 알고 까치는 올 일을 알고 앵무는 말할 수 있으니 하늘 성품은 하나만 할 수 있고 둘을 할 수 없다. 혹 때로 해치의 성품이 한갓 사람을 받을 수 있을 뿐 반드시 죄인을 알 수는 없으니 고요가 일을 신령하게 하여 정사를 도우려 하고 죄 받는 이가 승복하지 않음을 미워하여 해치가 사람을 받으면 곧 죄주니 사람이 두려워하여 범하지 않고 죄 받은 집이 죽을 때까지 원망하는 말이 없게 하려 한 것이다. 무릇 물건의 성품이 저마다 절로 아는 바가 있으니 해치가 받을 수 있음으로 신령하다 하면
之徒皆為神也。巫知吉凶,占人禍福,無不然者。如以〔〕謂之巫類,則巫何奇而以為善?斯皆人欲神事立化也。師尚父為周司馬,將師伐紂,到孟津之上,杖鉞把旄,號其眾曰倉(光)〔兕〕。倉(光)〔兕〕者,水中之獸也,善覆人船,因神以化,欲令急渡,不急渡,倉(光)〔兕〕害汝,則復〔〕之類也。河中有此異物,時出浮揚,一身九頭,人畏惡之,未必覆人之舟也,尚父緣河有此異物,因以威眾。夫〔〕之觸罪人,猶倉(光)〔兕〕之覆舟也,蓋有虛名,無其實效也。人畏怪奇,故空褒增。
저산의 무리가 다 신령한 것이다. 무당이 길흉을 알아 사람의 화복을 점침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해치를 무당의 무리라 하면 무당이 무엇이 기이하여 착하다 하는가. 이는 다 사람이 일을 신령하게 하여 교화를 세우려 함이다. 사상보가 주나라 사마가 되어 군사를 거느려 주를 치는데 맹진 위에 이르러 도끼를 짚고 깃발을 잡고 그 무리에게 외치기를 「창시」라 하였다. 창시는 물속의 짐승이니 사람의 배를 잘 뒤집는다. 신령함으로 인해 교화하여 급히 건너게 하려 하니 급히 건너지 않으면 창시가 너희를 해친다 한 것이니 곧 다시 해치의 무리다. 하수 가운데 이 다른 물건이 있어 때로 나와 떠오르니 한 몸에 아홉 머리라 사람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나 반드시 사람의 배를 뒤집지는 않으니 상보가 하수에 이 다른 물건이 있음으로 인하여 무리를 겁준 것이다. 무릇 해치가 죄인을 받음은 창시가 배를 뒤집음과 같아 아마 헛된 이름이 있고 그 실다운 효험은 없다. 사람이 괴이하고 기이함을 두려워하므로 헛되이 기려 더한다.
又言太平之時有景星。《尚書中候》曰:「堯時景星見於軫。」
또 태평한 때에 경성이 있다 한다. 「상서중후」에 이르기를 「요 때 경성이 진에 나타났다」 하였다.
夫景星,或時五星也,大者歲星、太白也。彼或時歲星、太白行於軫度,古質不能推步五星,不知歲星、太白何如狀,見大星則謂景星矣。《詩》又言:「東有啟明,西有長庚。」
무릇 경성은 혹 때로 오성이니 큰 것은 세성과 태백이다. 저 혹 때로 세성과 태백이 진의 도수를 다니는데 옛날은 질박하여 오성을 미루어 셈할 수 없어 세성과 태백이 어떤 모양인지 알지 못하고 큰 별을 보면 경성이라 한 것이다. 「시」에 또 말하였다. 「동쪽에 계명이 있고 서쪽에 장경이 있네.」
亦或時復歲星、太白也。或時昏見於西,或時晨出於東,詩人不知,則名曰啟明、長庚矣。
또한 혹 때로 다시 세성과 태백이다. 혹 때로 저녁에 서쪽에 보이고 혹 때로 새벽에 동쪽에 나오니 시인이 알지 못하여 곧 계명·장경이라 이름한 것이다.
然則長庚與景星同,皆五星也。太平之時,日月精明。五星,日月之類也,太平更有景星,可復更有日月乎?詩人,俗人也。《中候》之時,質世也。俱不知星。王莽之時,太白經天,精如半月,使不知星者見之,則亦復名之曰景星。《爾雅》《釋四時》章曰:「春為發生,夏為長嬴,秋為收成,冬為安宁。四氣和為景星。」
그러니 장경과 경성은 같으니 다 오성이다. 태평한 때에 해와 달이 정하고 밝다. 오성은 해와 달의 무리다. 태평에 다시 경성이 있으면 다시 해와 달이 있을 수 있는가. 시인은 속인이다. 「중후」의 때는 질박한 세상이다. 다 별을 알지 못하였다. 왕망 때 태백이 하늘을 가로질러 정기가 반달 같으니 별을 모르는 이가 보게 하면 또한 다시 경성이라 이름할 것이다. 「이아」 「석사시」 장에 이르기를 「봄은 발생이 되고 여름은 장영이 되고 가을은 수성이 되고 겨울은 안녕이 된다. 네 기운이 화한 것이 경성이 된다」 하였다.
夫如《爾雅》之言,景星乃四時氣和之名也,恐非著天之大星。《爾雅》之書,《五經》之訓,故儒者所共觀察也,而不信從,更謂大星為景星,豈《爾雅》所言景星與儒者之所說異哉!《爾雅》又言:「甘露時降,萬物以嘉,謂之醴泉。」
무릇 「이아」의 말대로라면 경성은 곧 사철의 기운이 화한 이름이니 아마 하늘에 붙은 큰 별이 아니다. 「이아」의 책은 오경의 풀이라 그러므로 유자가 함께 살피는 바인데 믿고 따르지 않고 도리어 큰 별을 경성이라 하니 어찌 「이아」가 말한 경성과 유자가 말하는 바가 다르겠는가! 「이아」에 또 말하였다. 「감로가 때로 내려 만물이 아름다워지니 이를 예천이라 한다.」
醴泉乃謂甘露也。今儒者說之,謂泉從地中出,其味甘若醴,故曰醴泉。二說相遠,實未可知。案《爾雅》《釋水》〔章〕:「泉(章)一見一否曰。檻泉正出,正出,涌出也;沃泉懸出,懸出,下出也。」
예천은 곧 감로를 이른다. 지금 유자가 이를 말하기를 샘이 땅속에서 나와 그 맛이 달기가 단술 같으므로 예천이라 한다 한다. 두 설이 서로 머니 실은 알 수 없다. 살피건대 「이아」 「석수」 장에 「샘이 한 번 보이고 한 번 아니면 얼이라 한다. 함천은 바로 나오니 바로 나옴은 솟아 나옴이요 옥천은 매달려 나오니 매달려 나옴은 아래로 나옴이다」 하였다.
是泉出之異,輒有異名。使太平之時,更有醴泉從地中出,當於此章中言之,何故反居《釋四時》章中,言甘露為醴泉乎?若此,儒者之言醴泉從地中出,又言甘露其味甚甜,未可然也。
이는 샘이 나옴에 다름이 있으면 곧 다른 이름이 있음이다. 태평한 때에 다시 예천이 땅속에서 나옴이 있다면 마땅히 이 장 가운데 말해야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도리어 「석사시」 장 가운데 있어 감로를 예천이라 말하는가. 이렇다면 유자가 예천이 땅속에서 나온다 말하고 또 감로가 그 맛이 매우 달다 말함은 그렇다 할 수 없다.
儒曰:「道至大者,日月精明,星辰不失其行,翔風起,甘露降。雨(濟)〔霽〕而陰(一)〔〕者謂之甘雨,非謂雨水之味甘也。」
유자가 말한다. 「도가 지극히 큰 이는 해와 달이 정하고 밝고 별이 그 다님을 잃지 않고 상서로운 바람이 일고 감로가 내린다. 비가 개고 흐린 것을 단비라 하니 빗물의 맛이 달다 이름이 아니다.」
推此以論,甘露必謂其降下時,適潤養萬物,未必露味甘也。亦有露甘味如飴蜜者,俱太平之應,非養萬物之甘露也。何以明之?案甘露如飴蜜者,著於樹木,不著五谷。彼露味不甘者,其下時,土地滋潤,流濕萬物,洽沾濡溥。由此言之,《爾雅》且近得實。緣《爾雅》之言,驗之於物,案味甘之露,下著樹木,察所著之樹,不能茂於所不著之木。然今之甘露,殆異於《爾雅》之所謂甘露。欲驗《爾雅》之甘露,以萬物丰熟,災害不生,此則甘露降下之驗也。甘露下,是則醴泉矣。
이를 미루어 논하면 감로는 반드시 그 내릴 때 마침 만물을 적셔 기름을 이르니 반드시 이슬 맛이 단 것은 아니다. 또한 이슬이 단맛이 엿과 꿀 같은 것이 있으니 다 태평의 응함이지 만물을 기르는 감로가 아니다. 무엇으로 밝히는가. 살피건대 감로가 엿과 꿀 같은 것은 나무에 붙고 오곡에 붙지 않는다. 저 이슬 맛이 달지 않은 것은 그 내릴 때 흙과 땅이 불어 젖어 만물을 흘러 적셔 두루 젖어 넓다. 이로써 말하면 「이아」가 또 실상에 가깝다. 「이아」의 말을 따라 물건에 증험하면 살피건대 맛이 단 이슬이 내려 나무에 붙어도 붙은 나무를 살피면 붙지 않은 나무보다 무성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의 감로는 거의 「이아」가 이르는 감로와 다르다. 「이아」의 감로를 증험하려면 만물이 넉넉히 익고 재해가 나지 않음으로 하니 이것이 곧 감로가 내린 증험이다. 감로가 내리면 이것이 곧 예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