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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 — 고려 말과 국호 조선朝鮮 一

명사 조선전 明史 朝鮮傳 · 장정옥(張廷玉) 등 · 1739년 (청 건륭 4) · 단락 13 · 한자 2,331자 · 낭독 9.3분

「명사 조선전」 한 권 「조선 1 — 고려 말과 국호 조선」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명나라가 본 조선 삼백 년. 위화도 회군과 「조선」이라는 국호, 종계변무 이백 년의 씨름, 그리고 절반을 차지하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전말(평양·벽제관·울산·노량)까지 — 「속국이라 일컬었으나 나라 안과 다름이 없었다」로 맺는 마지막 정사 조선전이다.

1기자에서 왕씨까지

朝鮮,箕子所封國也。漢以前曰朝鮮。始為燕人衞滿所據,漢武帝平之,置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漢末,有扶餘人高氏據其地,改國號曰高麗,又曰高句麗,居平壤,即樂浪也。已,為唐所破,東徙。後唐時,王建代高氏,兼併新羅、百濟地,徙居松岳,曰東京,而以平壤為西京。其國北鄰契丹,西則女直,南曰日本。元至元中,西京內屬,置東寧路總管府,盡慈嶺為界。

조선은 기자가 봉해진 나라다. 한나라 이전에는 조선이라 하였다. 처음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점거되었다가 한 무제가 평정하여 진번·임둔·낙랑·현도 네 군을 두었다. 한나라 말에 부여 사람 고씨가 그 땅을 차지해 나라 이름을 고려라 고치니 고구려라고도 하며, 평양에 사니 곧 낙랑이다. 뒤에 당나라에게 깨져 동으로 옮겼다. 오대 후당 때 왕건이 고씨를 대신하여 신라·백제 땅을 아우르고 송악으로 옮겨 살며 동경이라 하고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그 나라는 북으로 거란과 이웃하고 서쪽은 여직(여진)이요 남쪽은 일본이다. 원 지원 연간에 서경이 내속하여 동녕로총관부를 두고 자비령을 경계로 삼았다.

2공민왕과 홍무제

明興,王高麗者王顓。太祖即位之元年遣使賜璽書。二年送還其國流人。顓表賀,貢方物,且請封。帝遣符璽郎偰斯齎詔及金印誥文封顓為高麗國王,賜曆及錦綺。其秋,顓遣總部尚書成惟得、千牛衞大將軍金甲兩上表謝,并賀天壽節,因請祭服制度,帝命工部製賜之。惟得等辭歸,帝從容問:「王居國何為?城郭修乎?兵甲利乎?宮室壯乎?」頓首言:「東海波臣,惟知崇信釋氏,他未遑也。」遂以書諭之曰:「古者王公設險,未嘗去兵。民以食為天,而國必有出政令之所。今有人民而無城郭,人將何依?武備不修,則威弛;地不耕,則民艱於食;且有居室,無廳事,無以示尊嚴。此數者朕甚不取。夫國之大事,在祀與戎。苟闕斯二者,而徒事佛求福,梁武之事,可為明鑑。王國北接契丹、女直,而南接倭,備禦之道,王其念之。」因賜之六經、四書、通鑑。自是貢獻數至,元旦及聖節皆遣使朝賀,歲以為常。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 고려에 왕 노릇 하던 이는 왕전(王顓·공민왕)이다. 태조가 즉위한 원년에 사신을 보내 새서를 내리고, 2년에 그 나라의 유민을 돌려보냈다. 전이 표로 하례하고 방물을 바치며 아울러 책봉을 청하니, 황제가 부새랑 설사를 보내 조서와 금인과 고문을 지니고 가서 전을 고려국왕에 봉하고 책력과 비단을 내렸다. 그해 가을 전이 총부상서 성유득과 천우위대장군 김갑량을 보내 표를 올려 사례하고 아울러 천수절을 하례하며, 그 김에 제복(祭服) 제도를 청하니 황제가 공부에 명해 지어 내렸다. 유득 등이 하직하고 돌아갈 때 황제가 조용히 물었다. 「왕은 나라에서 무엇을 하는가. 성곽은 닦았는가. 병기는 날카로운가. 궁실은 장한가.」 머리를 조아려 말하였다. 「동해의 물가 신하라 오직 부처 높이 믿을 줄만 알고 다른 것은 겨를이 없습니다.」 드디어 글을 내려 타일렀다. 「옛날 왕공은 험한 것을 베풀어 일찍이 군사를 버리지 않았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고, 나라에는 반드시 정령이 나오는 곳이 있어야 한다. 이제 인민은 있는데 성곽이 없으면 사람들이 장차 무엇에 의지하랴. 무비를 닦지 않으면 위엄이 풀리고, 땅을 갈지 않으면 백성이 먹기에 군색하다. 또 거처하는 집은 있는데 정사 보는 청사가 없으면 존엄을 보일 길이 없다. 이 몇 가지를 짐은 매우 취하지 않는다. 무릇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군사에 있다. 진실로 이 둘을 빼놓고 한갓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한다면 양 무제의 일이 밝은 거울이 될 만하다. 왕의 나라는 북으로 거란·여직에 접하고 남으로 왜에 접하니, 막아 지키는 도리를 왕은 유념하라.」 그리고 육경과 사서와 통감을 내렸다. 이로부터 공헌이 자주 이르고, 설날과 성절마다 사신을 보내 조하하니 해마다 상례가 되었다.

협주 1

成惟得至金甲兩上表謝成惟得,高麗史卷四一作「成准得」。金甲兩,作「金甲雨」。

「성유득과 김갑량이 표를 올려 사례하였다」 — 성유득은 고려사 권41에 「성준득」으로, 김갑량은 「김갑우」로 되어 있다.

3삼 년에 한 번 조빙하라

三年正月命使往祀其國之山川。是歲頒科舉詔於高麗,顓表謝,貢方物,并納元所授金印。中書省言:「高麗貢使多齎私物入貨,宜征稅;又多攜中國物出境,禁之便。」俱不許。五年表請遣子弟入太學,帝曰:「入學固美事,但涉海遠,不欲者勿強。」貢使洪師範、鄭夢周等一百五十餘人來京,失風溺死者三十九人,師範與焉。帝憫之,遣元樞密使延安答里往諭入貢毋數。而顓復遣其門下贊成事姜仁裕來貢馬,其賀正旦使金湑等已先至,帝悉遣還。謂中書省臣曰:「高麗貢獻繁數,既困敝其民,而涉海復虞覆溺。宜遵古諸侯之禮,三年一聘。貢物惟所產,毋過侈。其明諭朕意。」

3년 정월에 사신을 시켜 가서 그 나라의 산천에 제사하게 하였다. 이해에 과거 조서를 고려에 반포하니, 전이 표로 사례하고 방물을 바치며 아울러 원나라가 주었던 금인을 바쳤다. 중서성이 「고려 공사(貢使)가 사사로운 물건을 많이 가지고 들어와 파니 세를 물려야 하고, 또 중국 물건을 많이 가지고 나가니 금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으나 다 허락하지 않았다. 5년에 표로 자제를 태학에 들여보내기를 청하니, 황제가 「입학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나 바다를 건너기 머니 원치 않는 자는 억지로 시키지 말라」 하였다. 공사 홍사범·정몽주 등 백오십여 명이 서울에 오다가 바람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은 이가 서른아홉인데 사범도 그 속에 있었다. 황제가 가엾이 여겨 원나라 추밀사 연안답리를 보내 조공을 자주 하지 말라 타일렀다. 그런데 전이 다시 문하찬성사 강인유를 보내 말을 바치고, 하정사 김서 등이 이미 먼저 와 있으므로 황제가 다 돌려보냈다. 중서성 신하에게 일렀다. 「고려의 공헌이 잦아 백성을 피곤하게 하고, 바다를 건너다 또 빠질 근심이 있다. 마땅히 옛 제후의 예를 따라 삼 년에 한 번 조빙하고, 공물은 나는 것으로만 하되 지나치게 사치하지 말라. 짐의 뜻을 밝게 타이르라.」

4공민왕이 시해되다

六年,顓遣甲兩等貢馬五十匹,道亡其二,甲兩以聞。及進,以私馬足之。帝惡其不誠,卻之。七年遣監門護軍周誼、鄭庇等來貢,表請每歲一貢,貢道從陸,由定遼,毋涉海,其貢物稱「送太府監」。中書省言:「元時有太府監,本朝未嘗有,言涉不誠。」帝命卻其貢。是歲顓為權相李仁人所弒。顓無子,以寵臣辛肫之子禑為子,於是仁人立禑。

6년에 전이 갑량 등을 보내 말 오십 필을 바쳤는데 길에서 둘을 잃으니, 갑량이 아뢰고 바칠 때 제 말로 채웠다. 황제가 그 불성실을 미워하여 물리쳤다. 7년에 감문호군 주의와 정비 등을 보내 조공하고, 표로 해마다 한 번 조공하되 공로(貢路)는 뭍으로 정료(定遼)를 거쳐 바다를 건너지 않게 해 달라 청했는데, 그 공물에 「태부감에 보낸다」고 일컬었다. 중서성이 「원나라 때는 태부감이 있었으나 본조에는 없으니 말이 불성실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 공물을 물리치라 명하였다. 이해에 전이 권상(權相) 이인인에게 시해되었다. 전이 아들이 없어 총신 신돈의 아들 우(禑)를 아들로 삼았으므로, 이에 인인이 우를 세웠다.

협주 1

顓為權相李仁人所弒李仁人,李朝實錄太祖實錄卷一恭讓王元年十二月條、明世宗實錄卷一0四嘉靖八年八月壬午條都作「李仁任」。作「仁人」或係傳訛。太祖實錄卷二二一洪武二十五年九月庚寅條、葉向高朝鮮考,統作「仁人」,今姑仍之。下同。

「전(顓·공민왕)이 권상 이인인에게 시해되었다」 — 이인인(李仁人)은 이조실록 태조실록 공양왕 원년 12월조와 명 세종실록 가정 8년 8월 임오조에 다 「이인임(李仁任)」으로 되어 있다. 「인인」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나, 태조실록 홍무 25년 9월 경인조와 섭향고의 조선고가 다 「인인」으로 쓰므로 이제 우선 그대로 둔다. 아래도 같다.

5말 천 필과 볼모 같은 세공

八年,禑遣判宗簿事崔原來告哀,且言前有貢使金義殺朝使蔡斌,今嗣王禑已誅義,籍其家。帝疑其詐,拘原而遣使往祭弔。十年,使來請故王顓諡號,帝曰:「顓被殺已久,今始請諡,將假吾朝命,鎮撫其民,且掩其弒逆之跡,不可許。前所留使者,其遣之。」於是釋原歸。其夏,復遣周誼貢馬及方物,卻不受。冬,又遣使賀明年正旦。帝曰:「高麗王顓被弒,奸臣竊命,春秋之義,亂臣必誅,夫又何言。第前後使者皆稱嗣王所遣,中書宜遣人往問嗣王如何,政令安在。若政令如前,嗣王不為羈囚,則當依前王言,歲貢馬千匹,明年貢金百斤、銀萬兩、良馬百、細布萬,仍悉送還所拘遼東民,方見王位真而政令行,朕無惑已。否則弒君之賊,必討無赦。」

8년에 우가 판종부사 최원을 보내 상을 알리고, 아울러 앞서 공사 김의가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였는데 이제 사왕(嗣王) 우가 이미 의를 베고 그 집을 적몰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속임을 의심하여 원을 붙들어 두고 사신을 보내 제사하고 조문하였다. 10년에 사신이 와서 옛 왕 전의 시호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전이 살해된 지 이미 오래인데 이제야 시호를 청하니, 우리 조정의 명을 빌려 그 백성을 진무하고 또 시역의 자취를 덮으려는 것이라 허락할 수 없다. 앞서 붙들어 둔 사자는 보내라.」 이에 원을 놓아 돌려보냈다. 그해 여름 다시 주의를 보내 말과 방물을 바쳤으나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겨울에 또 사신을 보내 이듬해 정단을 하례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고려왕 전이 시해되고 간신이 명을 훔쳤다. 춘추의 의리에 난신은 반드시 베는 법이니 무슨 말이 더 있으랴. 다만 앞뒤 사자가 다 사왕이 보냈다 일컬으니, 중서는 사람을 보내 사왕이 어떤지, 정령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라. 정령이 전과 같고 사왕이 갇힌 몸이 아니라면, 마땅히 전왕(前王)의 말대로 해마다 말 천 필을 바치고, 명년에는 금 백 근·은 만 냥·좋은 말 백 필·가는 베 만 필을 바치며, 아울러 붙들어 둔 요동 백성을 다 돌려보내라. 그래야 왕위가 참되고 정령이 행해짐을 보아 짐이 의혹이 없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임금 시해한 도적을 반드시 토벌하여 용서하지 않으리라.」

6국교가 얼어붙다

十一年四月,禑復命誼來貢。十二年敕遼東守將潘敬、葉旺等謹飭邊備。其冬,禑遣李茂芳等來貢,以不如約卻之。十三年,遼東送高麗使誼至京師,帝敕敬等曰:「高麗弒君,又殺朝使,前堅請入貢又不如期,今遣誼來,以虛文飾詐,他日必為邊患。自今來者,其絕勿通。」因留誼於京師。十六年來貢,卻之,命禮部責其朝貢過期、陪臣侮慢之罪;誠欲聽約者,當以前五歲違約不貢之物幷至。十七年六月,禑遣司僕正崔涓、禮儀判書金進宜貢馬二千匹。且言金非地所產,願以馬代輸,餘皆如約。遼東守將唐勝宗為之請,帝許之。然請顓諡號,襲王爵,未允也。

11년 4월에 우가 다시 주의를 시켜 조공하였다. 12년에 요동 수장 반경·엽왕 등에게 칙하여 변경 방비를 삼가 단속하게 하였다. 그해 겨울 우가 이무방 등을 보내 조공했으나 약속대로가 아니라 하여 물리쳤다. 13년에 요동이 고려 사신 의를 서울로 보내니, 황제가 반경 등에게 칙하였다. 「고려가 임금을 시해하고 또 조정 사신을 죽였으며, 앞서는 조공을 굳이 청하고도 기한을 어기더니, 이제 의를 보내 헛된 글로 속임을 꾸미니 뒷날 반드시 변경의 근심이 되리라. 이제부터 오는 자는 끊고 통하지 말라.」 그리고 의를 서울에 붙들어 두었다. 16년에 조공해 왔으나 물리치고, 예부에 명해 조공 기한을 넘긴 죄와 배신(陪臣)이 오만한 죄를 꾸짖으며, 참으로 약속을 따르려거든 지난 다섯 해 동안 약속을 어겨 못 바친 물건을 아울러 가져오라 하였다. 17년 6월에 우가 사복정 최연과 예의판서 김진의를 보내 말 이천 필을 바치고, 아울러 금은은 땅에서 나지 않으니 말로 대신 바치고 나머지는 다 약속대로 하겠다 말하였다. 요동 수장 당승종이 그를 위해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그러나 전의 시호와 왕작 세습 청은 아직 윤허하지 않았다.

7삼 년 일공으로 줄이다

十八年正月,貢使至。帝諭禮臣曰:「高麗屢請約束,朕數不允,而其請不已,故索歲貢以試其誠偽,非以此為富也。今既聽命,宜損其貢數,今三年一朝,貢馬五十匹。至二十一年正旦乃貢。」七月,禑上表請襲爵,幷請故王諡。命封禑為高麗國王,賜故王顓諡恭愍。

18년 정월에 공사가 이르렀다. 황제가 예부 신하에게 타일렀다. 「고려가 여러 번 약속을 청했으나 짐이 자주 윤허하지 않았는데도 청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세공을 요구하여 그 진실과 거짓을 시험한 것이지 이로써 부자가 되려던 것이 아니다. 이제 이미 명을 들었으니 마땅히 공물 수를 덜어 삼 년에 한 번 조회하고 말 오십 필을 바치되, 21년 정단에 바치게 하라.」 7월에 우가 표를 올려 작위 세습을 청하고 아울러 옛 왕의 시호를 청하니, 우를 고려국왕에 봉하고 옛 왕 전에게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8철령위 통보

十九年二月遣使貢布萬匹、馬千匹。九月,表賀,貢方物。其後貢獻輒踰常額,且未嘗至三年也。冬,詔遣指揮僉事高家奴以綺布市馬於高麗。二十年三月,高家奴還,陳高麗表辭馬直,帝敕如數償之。先是,元末遼、瀋兵起,民避亂,轉徙高麗。至是因市馬,帝令就索之,遂以遼、瀋流民三百餘口來歸。十二月命戶部咨高麗王:「鐵嶺北,東西之地,舊屬開元者,遼東統之。鐵嶺之南,舊屬高麗者,本國統之。各正疆境,毋侵越。」

19년 2월에 사신을 보내 베 만 필과 말 천 필을 바치고, 9월에 표로 하례하며 방물을 바쳤다. 그 뒤 공헌이 늘 정한 액수를 넘었고 또 삼 년에 이른 적이 없었다. 겨울에 조서로 지휘첨사 고가노를 보내 비단과 베로 고려에서 말을 사게 하였다. 20년 3월에 고가노가 돌아와 고려의 표문과 말값을 아뢰니 황제가 수대로 갚으라 칙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 말 요양·심양에 병란이 일자 백성이 난을 피해 고려로 옮겨 갔는데, 이에 이르러 말 사는 편에 황제가 찾아오게 하니 드디어 요·심 유민 삼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2월에 호부에 명해 고려왕에게 자문을 보냈다. 「철령 이북과 동서의 땅으로 예전에 개원에 속했던 것은 요동이 통할하고, 철령 이남으로 예전에 고려에 속했던 것은 본국이 통할하여, 저마다 강역을 바로 하고 침범하지 말라.」

9압록강이 옛 경계다

二十一年四月,禑表言,鐵嶺之地實其世守,乞仍舊便。帝曰:「高麗舊以鴨綠江為界,今飾辭鐵嶺,詐偽昭然。其以朕言諭之,,俾安分,毋生釁端。」

21년 4월에 우가 표로, 철령 땅은 실로 대대로 지켜 온 것이니 옛대로 두시기를 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려는 예부터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이제 철령이라고 말을 꾸미니 거짓이 뚜렷하다. 짐의 말로 타일러 분수를 지켜 말썽을 만들지 말게 하라.」

10위화도 회군의 소식

八月,高麗千戶陳景來降,言:「是年四月,禑欲寇遼東,使都軍相崔瑩、李成桂繕兵西京。成桂使陳景屯艾州,以糧不繼退師。王怒,殺成桂之子。成桂還兵攻破王城,囚王及瑩。」景懼及,故降。帝敕遼東嚴守備,仍遣人偵之。十月,禑請遜位於其子昌。帝曰:「前聞其王被囚,此必成桂之謀,姑俟之以觀變。」

8월에 고려 천호 진경이 와서 항복하고 말하였다. 「이해 4월에 우가 요동을 침노하려고 도군상 최영과 이성계를 시켜 서경에서 군사를 갖추게 했습니다. 성계가 진경을 애주에 주둔시켰는데 군량이 잇대지 못해 군사를 물렸습니다. 왕이 노하여 성계의 아들을 죽이니, 성계가 군사를 돌려 왕성을 쳐서 깨뜨리고 왕과 영을 가두었습니다.」 경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항복한 것이다. 황제가 요동에 칙해 수비를 엄히 하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다. 10월에 우가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앞서 왕이 갇혔다 들었으니 이는 반드시 성계의 꾀다. 우선 기다리며 변화를 보라」 하였다.

11왕씨의 대가 끊기다

二十二年,權國事昌奏乞入朝,帝不許。是歲,成桂廢昌,而立定昌國院君瑤。二十三年正月遣使來告。二十四年三月詔市馬高麗。八月,權國事瑤進所市馬千五百匹。帝曰:「三韓君臣悖亂,二紀於茲。今王瑤嗣立,乃王氏苗裔,宜遣使勞之。」十二月,瑤遣其子奭朝賀明年正旦。奭未歸而成桂自立,遂有其國,瑤出居原州。王氏自五代傳國數百年,至是絕。

22년에 권국사 창이 입조를 청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에 성계가 창을 폐하고 정창국원군 요(瑤·공양왕)를 세웠다. 23년 정월에 사신을 보내와 알렸다. 24년 3월에 조서로 고려에서 말을 사게 하고, 8월에 권국사 요가 사들인 말 천오백 필을 바치니 황제가 「삼한의 군신이 어그러지고 어지러운 지 이제 스물네 해다. 이제 왕요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왕씨의 후예이니 사신을 보내 위로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12월에 요가 아들 석(奭)을 보내 이듬해 정단을 하례했는데, 석이 돌아가기 전에 성계가 스스로 서서 드디어 나라를 차지하니 요는 원주로 나가 살았다. 왕씨가 오대부터 나라를 전한 지 수백 년 만에 이에 끊겼다.

12조선이라는 국호

二十五年九月,高麗知密直司事趙胖等持國都評議司奏言:「本國自恭愍王薨,無嗣,權臣李仁人以辛肫子禑主國事,昏暴好殺,至欲興師犯邊,大將李成桂以為不可而回軍。禑負罪惶懼,遜位於子昌。國人弗順,啟請恭愍王妃安氏擇宗親瑤權國事。已及四年,昏戾信讒,戕害勳舊,子奭癡騃不慧,國人謂瑤不足主社稷。今以安氏命,退瑤於私第。王氏子姓無可當輿望者,中外人心咸繫成桂。臣等與國人耆老共推主國事,惟聖王俞允。」帝以高麗僻處東隅,非中國所治,令禮部移諭:「果能順天道,合人心,不啟邊釁,使命往來,實爾國之福,我又何誅。」冬,成桂聞皇太子薨,遣使表慰,幷請更國號。帝命仍古號曰朝鮮。

25년 9월에 고려 지밀직사사 조반 등이 국도평의사의 아룀을 가지고 와서 말하였다. 「본국은 공민왕이 죽은 뒤 후사가 없어, 권신 이인인이 신돈의 아들 우를 세워 나랏일을 맡겼는데, 어둡고 사나워 죽이기를 좋아하며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범하려 하니, 대장 이성계가 안 된다 하여 군사를 돌렸습니다. 우가 죄를 지고 두려워 아들 창에게 자리를 물렸으나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공민왕비 안씨께 청해 종친 요를 가려 국사를 맡겼습니다. 이미 네 해가 되었는데 어둡고 사나우며 참소를 믿어 훈구를 해치고, 아들 석은 어리석어 슬기롭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이 요는 사직을 맡기에 부족하다 합니다. 이제 안씨의 명으로 요를 사제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왕씨의 자손에 여망을 감당할 만한 이가 없고 안팎 인심이 다 성계에게 매였으므로, 신들이 나라 사람들과 기로와 함께 성계를 밀어 국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성왕께서 윤허하소서.」 황제는 고려가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 중국이 다스릴 바가 아니라 하여, 예부로 하여금 타이르게 하였다. 「과연 천도를 따르고 인심에 맞아 변경의 말썽을 열지 않는다면, 사명이 오가는 것이 실로 너희 나라의 복이니 내가 또 무엇을 나무라랴.」 겨울에 성계가 황태자의 죽음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로 위문하고 아울러 국호를 고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옛 이름대로 조선(朝鮮)이라 하라 명하였다.

13이름을 단(旦)으로 고치다

二十六年二月遣使進馬九千八百餘匹,命運紵絲綿布一萬九千七百餘匹酬之。六月表謝,貢馬及方物,幷上前恭愍王金印,請更己名曰旦。從之。是月,遼東都指揮使司奏,朝鮮國招引女直五百餘人,潛渡鴨綠江,欲入寇。乃遣使敕諭,示以禍福。旦得敕,惶懼陳謝,上貢,幷械送逋逃軍民三百八十餘人至遼東。

26년 2월에 사신을 보내 말 구천팔백여 필을 바치니 저사와 면포 만 구천칠백여 필을 날라 갚게 하였다. 6월에 표로 사례하고 말과 방물을 바치며 아울러 전 공민왕의 금인을 올리고, 제 이름을 단(旦)으로 고치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달에 요동도지휘사사가, 조선국이 여직 오백여 명을 꾀어 몰래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려 한다고 아뢰니, 이에 사신을 보내 칙유하여 화복을 보였다. 단이 칙서를 받고 황공하여 사죄를 아뢰고 조공을 올리며, 아울러 도망한 군민 삼백팔십여 명을 묶어 요동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