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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 — 태종에서 중종까지朝鮮 二

명사 조선전 明史 朝鮮傳 · 장정옥(張廷玉) 등 · 1739년 (청 건륭 4) · 단락 18 · 한자 2,484자 · 낭독 9.9분

「명사 조선전」 한 권 「조선 2 — 태종에서 중종까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명나라가 본 조선 삼백 년. 위화도 회군과 「조선」이라는 국호, 종계변무 이백 년의 씨름, 그리고 절반을 차지하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전말(평양·벽제관·울산·노량)까지 — 「속국이라 일컬었으나 나라 안과 다름이 없었다」로 맺는 마지막 정사 조선전이다.

1표전 사건

二十七年,旦遣子入貢。二十八年遣使柳珣賀明年正旦。帝以表文語慢,詰責之。珣言表文乃門下評理鄭道傳所撰,遂命逮道傳,釋珣歸。二十九年送撰表人鄭總等三人至,云表實總等所撰,道傳病不能行。帝以總等亂邦搆釁,留不遣。三十年冬,復以表涉譏訕,拘其使。建文初,旦表陳年老,以子芳遠襲位。許之。

27년에 단이 아들을 보내 조공하고, 28년에 사신 유순을 보내 이듬해 정단을 하례하였다. 황제가 표문의 말이 오만하다 하여 힐책하니, 순이 표문은 문하평리 정도전이 지은 것이라 말하매 드디어 도전을 잡아 오라 명하고 순을 놓아 돌려보냈다. 29년에 표문 지은 정총 등 세 사람을 보내며, 표는 실상 총 등이 지었고 도전은 병들어 올 수 없다 하니, 황제가 총 등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말썽을 얽었다 하여 붙들고 보내지 않았다. 30년 겨울에 다시 표문이 기롱과 헐뜯음에 걸린다 하여 그 사신을 붙들었다. 건문 초에 단이 표로 나이 늙음을 아뢰고 아들 방원(芳遠)에게 자리를 잇게 하니 허락하였다.

2태종과 조선

成祖立,遣官頒即位詔。永樂元年正月,芳遠遣使朝貢。四月復遣陪臣李貴齡入貢,奏芳遠父有疾,需龍腦、沉香、蘇合、香油諸物,齎布求市。帝命太醫院賜之,還其布。芳遠表謝,因請冕服書籍。帝嘉其能慕中國禮,賜金印、誥命、冕服、九章、圭玉、珮玉,妃珠翠七翟冠、霞帔、金墜,及經籍綵幣表裏。自後貢獻,歲輒四五至焉。

성조가 서자 관원을 보내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영락 원년 정월에 방원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4월에 다시 배신 이귀령을 보내 조공하며, 방원의 아버지가 병이 있어 용뇌·침향·소합·향유 등 물건이 필요하다고 아뢰고 베를 가져와 사기를 구하니, 황제가 태의원에 명해 내리고 그 베는 돌려주었다. 방원이 표로 사례하고 그 김에 면복과 서적을 청하니, 황제가 중국의 예를 사모할 줄 앎을 가상히 여겨 금인·고명·면복 구장·규옥·패옥과, 왕비의 주취칠적관·하피·금추와 경적과 채색 비단 안팎감을 내렸다. 이 뒤로 공헌이 해마다 너덧 번씩 이르렀다.

3세자 제(禔)의 입조

二年十二月詔立芳遠子禔為世子,從其請也。五年十二月,貢馬三千匹至遼東,命戶部運絹布萬五千匹償之。六年,世子禔來朝,賜織金文綺。及歸,帝親製詩賜之。時朝鮮納女後宮,立為妃嬪者四人。其秋,遣陪臣鄭擢來告其父旦之喪。命官弔祭,賜諡康獻。

2년 12월에 조서로 방원의 아들 제(禔)를 세자로 세우니 그 청을 따른 것이다. 5년 12월에 말 삼천 필을 바쳐 요동에 이르니, 호부에 명해 명주와 베 만 오천 필을 날라 갚게 하였다. 6년에 세자 제가 조회하러 오니 직금문기를 내리고, 돌아갈 때 황제가 친히 시를 지어 내렸다. 그때 조선이 후궁에 여자를 바쳐 비빈으로 선 이가 넷이었다. 그해 가을 배신 정탁을 보내 아버지 단의 상을 알리니, 관원에게 명해 조문하고 제사하며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4세종을 세우다

十六年奏世子禔不肖,第三子祹孝弟力學,國人所屬,請立為嗣,詔聽王所擇。因上表謝,幷陳己年老,請以祹理國事。命光祿少卿韓確、鴻臚丞劉泉封祹為朝鮮國王。時帝已遷北都,朝鮮益近,而事大之禮益恭,朝廷亦待以加禮,他國不敢望也。

16년에 아뢰기를, 세자 제가 못나고 셋째 아들 도(祹·세종)가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배움에 힘써 나라 사람들이 촉망하니 후사로 세우기를 청한다 하매, 조서로 왕이 가리는 대로 들어주었다. 이에 표를 올려 사례하고 아울러 제 나이 늙음을 아뢰어 도에게 나랏일을 다스리게 하기를 청하니, 광록소경 한확과 홍려승 유천을 명해 도를 조선국왕에 봉하였다. 그때 황제가 이미 북경으로 도읍을 옮겨 조선이 더욱 가까워졌는데, 사대의 예가 더욱 공손하고 조정도 예를 더해 대접하니 다른 나라는 감히 바라지 못할 정도였다.

5말 만 필

二十年,芳遠卒,賜諡恭定。二十一年七月,祹請立嫡子珦為世子,從之。先是,敕祹貢馬萬匹,至是如數至,賜白金綺絹。

20년에 방원이 죽으니 공정(恭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1년 7월에 도가 적자 향(珦)을 세자로 세우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보다 앞서 도에게 칙해 말 만 필을 바치게 했는데, 이에 이르러 수대로 이르니 백금과 비단을 내렸다.

6선덕 연간의 일들

宣德二年三月遣中官賜白金紵紗,別敕進馬五千匹,資邊用。九月如數至。四年賜祹書:「珍禽異獸,非朕所貴,其勿獻。」後又敕祹:「金玉之器,非爾國所產,宜止之,土物效誠而已。」八年,祹奏遣子弟詣太學或遼東學,帝不許,賜五經、四書、性理、通鑑綱目諸書。

선덕 이년 3월에 중관을 보내 백금과 모시와 깁을 내리고, 따로 칙하여 말 오천 필을 바쳐 변경 쓰임에 대게 하니 9월에 수대로 이르렀다. 4년에 도에게 글을 내려 「진기한 새와 짐승은 짐이 귀히 여기는 바 아니니 바치지 말라」 하였다. 뒤에 또 도에게 칙하기를 「금과 옥 그릇은 너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그치고 토산물로 정성을 표하라」 하였다. 8년에 도가 자제를 태학이나 요동 학교에 보내기를 아뢰니,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오경·사서·성리·통감강목 등 책을 내렸다.

7정통 연간 — 왜구를 사로잡아 바치다

正統元年三月放朝鮮婦女金黑等五十三人還其國。金黑等自宣德初至京師,至是遣中官送回。三年八月賜祹遠游冠、絳紗袍、玉佩、赤舄。先是,建州長童倉避居朝鮮界,已復還建州。朝鮮言:「昔以窮歸臣,臣遇之善。今負恩還建州李滿住所,慮其同謀擾邊。」建州長言,所部為朝鮮追殺,阻留一百七十餘家。五年詔祹還之。七年五月諭祹曰:「鴨綠江一帶東寧等衞,密邇王境,中多細人逃至王國,或被國人誘脅去者,無問漢人、女直,至即解京。」初,瓦剌密令女直諸部誘朝鮮,使背中國。祹拒之,白其事於朝。帝嘉其忠,敕奬之,幷賜綵幣。九年春,倭寇犯邊,祹命將擒獲五十餘人,械送京師。十年又獲餘黨來獻。帝連敕奬諭,賜賚加等。十三年冬,命使調發朝鮮及野人女直兵會遼東,征北寇。時英宗北狩,郕王即位,遣官頒詔於其國。

정통 원년 3월에 조선 부녀 김흑 등 쉰세 명을 그 나라로 돌려보냈다. 김흑 등은 선덕 초부터 서울에 왔다가 이에 이르러 중관을 보내 데려다준 것이다. 3년 8월에 도에게 원유관·강사포·옥패·적석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건주 추장 동창(童倉)이 조선 지경에 피해 살다가 이윽고 건주로 돌아갔다. 조선이 「지난날 궁하여 신에게 귀부했을 때 신이 잘 대접했는데, 이제 은혜를 저버리고 건주 이만주에게 돌아갔으니 함께 꾀해 변경을 어지럽힐까 염려됩니다」 하고, 건주 추장은 제 부(部)가 조선에게 뒤쫓겨 죽고 백칠십여 집이 억류되었다 말하니, 5년에 조서로 도에게 돌려보내게 하였다. 7년 5월에 도에게 타일렀다. 「압록강 일대 동녕 등 위(衛)는 왕의 지경에 바싹 가까워, 그 안의 백성이 왕의 나라로 도망해 가거나 나라 사람에게 꾀이고 위협받아 간 자가 많으니, 한인이든 여직이든 묻지 말고 이르는 대로 서울로 풀어 보내라.」 처음 와랄(오이라트)이 몰래 여직 여러 부를 시켜 조선을 꾀어 중국을 등지게 했는데, 도가 물리치고 그 일을 조정에 아뢰니, 황제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칙으로 장려하고 아울러 채색 비단을 내렸다. 9년 봄에 왜구가 변경을 범하자 도가 장수에게 명해 쉰여 명을 사로잡아 서울로 묶어 보내고, 10년에 또 남은 무리를 잡아 바치니, 황제가 잇달아 칙으로 장려하고 상을 등급을 더해 내렸다. 13년 겨울에 사신을 명해 조선과 야인여직 군사를 조발해 요동에 모아 북쪽 도적을 치게 하였다. 그때 영종이 북으로 잡혀가고 성왕(경태제)이 즉위하여 관원을 보내 그 나라에 조서를 반포하였다.

8경태 연간 — 문종과 단종

景泰元年貢馬五百匹。奏稱奉敕辦馬二三萬匹,比因鄰寇搆釁,馬畜踣斃,一時未能。詔曰:「寇今少息。馬已至者,償其直。未至者,止勿貢。」是年夏,祹卒,賜弔祭,諡莊憲,封子珦為國王。會遼東奏報開原、瀋陽有寇入境,掠人畜,係建州、海西、野人女直頭目李滿住等為嚮導,因諭珦相為掎角截殺之。其秋,續貢馬千五百餘匹。賜冕服,幷償其直。冬又賜珦及妃權氏誥命,封其子弘暐為世子。二年冬,以建州頭目潛與朝鮮通,戒珦絕其使。

경태 원년에 말 오백 필을 바치며 아뢰기를, 칙을 받들어 말 이삼만 필을 마련하려 했으나 이웃 도적이 말썽을 얽은 탓에 말이 죽어 한때에 다 못 한다 하니, 조서하기를 「도적이 이제 좀 잠잠하다. 이미 이른 말은 값을 갚고 아직 안 이른 것은 그만두고 바치지 말라」 하였다. 이해 여름 도가 죽으니 조문과 제사를 내리고 시호를 장헌(莊憲)이라 하며 아들 향(문종)을 국왕에 봉하였다. 마침 요동이 개원·심양에 도적이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노략하는데 건주·해서·야인여직 두목 이만주 등이 길잡이라 아뢰니, 향에게 타일러 기각을 이루어 끊어 치게 하였다. 그 가을 잇달아 말 천오백여 필을 바치니 면복을 내리고 아울러 값을 갚았다. 겨울에 또 향과 비 권씨에게 고명을 내리고 아들 홍위(弘暐·단종)를 세자로 봉하였다. 2년 겨울에 건주 두목이 몰래 조선과 통한다 하여 향에게 그 사신을 끊으라 경계하였다.

9세조가 서다

三年秋,珦卒,來告哀。遣中官往弔祭,賜諡恭順,命子弘暐嗣立。弘暐立三年,以年幼且嬰夙疾,請以叔瑈權國事。七年上表遜位,乃封瑈為國王。瑈請立子暲為世子,從之。

3년 가을에 향이 죽어 와서 상을 알리니, 중관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며 시호를 공순(恭順)이라 하고 아들 홍위가 이어 서게 하였다. 홍위가 선 지 세 해에, 나이 어리고 또 묵은 병이 있다 하여 숙부 유(瑈·세조)에게 국사를 맡기기를 청하고, 7년에 표를 올려 자리를 물리니 이에 유를 국왕에 봉하였다. 유가 아들 장(暲)을 세자로 세우기를 청하니 따랐다.

10건주와의 말썽

天順三年,邊將奏,有建州三衞都督私與朝鮮結,恐為中國患。因敕瑈毋作不靖,貽後悔。瑈疏辨,復諭曰:「宣德、正統年間,以王國與彼互相侵掠,敕解怨息兵,初不令交通給賞授官也。彼既受朝廷官職,王又加之,是與朝廷抗也。王素秉禮義,何爾文過飾非?後宜絕私交,以全令譽。」四年復諭瑈曰:「王奏毛憐衞都督郎卜兒哈通謀煽亂,已置之法。夫法止可行於國中,豈得加於鄰境。郎卜兒哈有罪,宜奏朝廷區處。今輒行殺害,何怪其子阿比車之思復讐也。聞阿比車之母尚在,宜急送遼東都司,令阿比車領回,以解讐怨。」五年,建州衞野人至義州殺掠,瑈奏乞朝命還所掠。兵部議:「朝鮮先嘗誘殺郎卜兒哈,繼又誘致都指揮兀克,縱兵掠其家屬。今野人實係復讐,宜諭朝鮮,寇盜之來皆自取,惟守分安法,庶弭邊釁。」從之。

천순 삼년에 변장이, 건주삼위 도독이 사사로이 조선과 맺으니 중국의 근심이 될까 두렵다고 아뢰므로, 칙으로 유에게 불온한 짓을 말고 뒷날 뉘우침을 남기지 말라 하였다. 유가 소를 올려 변명하니 다시 타일렀다. 「선덕·정통 연간에 왕의 나라와 저들이 서로 침노하기에 칙으로 원한을 풀고 군사를 쉬게 했을 뿐, 애초에 교통하며 상을 주고 벼슬을 주라 한 것이 아니다. 저들이 이미 조정의 관직을 받았는데 왕이 또 더한다면 이는 조정과 맞서는 것이다. 왕은 본디 예의를 지키면서 어찌 허물을 꾸며 감추는가. 뒤로는 사사로운 사귐을 끊어 아름다운 이름을 온전히 하라.」 4년에 다시 유에게 타일렀다. 「왕이 모련위 도독 낭복아합이 반란을 통모하므로 이미 법에 처했다고 아뢰었다. 무릇 법은 나라 안에서만 행할 수 있는 것이지 어찌 이웃 지경에 더할 수 있으랴. 낭복아합이 죄가 있으면 조정에 아뢰어 처분해야 마땅한데, 이제 문득 죽였으니 그 아들 아비거가 원수 갚기를 생각함을 어찌 괴이타 하랴. 들으니 아비거의 어미가 아직 있다 하니, 빨리 요동도사에 보내 아비거가 데려가게 하여 원한을 풀라.」 5년에 건주위 야인이 의주에 이르러 죽이고 노략하니, 유가 조정의 명으로 노략한 것을 돌려받게 해 달라 아뢰었다. 병부가 의논하였다. 「조선이 앞서 낭복아합을 꾀어 죽이고, 이어 도지휘 올극을 꾀어 이르게 하고는 군사를 놓아 그 가속을 노략했습니다. 이번 야인의 일은 실로 원수 갚음이니, 조선에 타이르되 도적이 온 것은 다 스스로 부른 것이라, 오직 분수를 지키고 법을 편안히 여겨야 변경의 말썽이 그치리라 해야 합니다.」 따랐다.

11건주 정벌을 돕다

成化元年冬,陪臣李門炯來朝,卒於道。命給棺賜祭,幷賜綵幣慰其家。時朝鮮頻貢異物,三年春,敕諭瑈修常貢,勿事珍奇。是時朝廷用兵征建州,敕瑈助兵進剿。瑈遣中樞府知事康純統眾萬餘渡鴨綠、潑猪二江,攻破九獮府諸寨,斬獲多。

성화 원년 겨울에 배신 이문형이 조회하러 오다가 길에서 죽으니, 관을 주고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채색 비단으로 그 집을 위로하였다. 그때 조선이 자주 기이한 물건을 바치므로 3년 봄에 칙유하여 상공(常貢)만 닦고 진기한 것은 일삼지 말게 하였다. 이때 조정이 군사를 써서 건주를 치면서 유에게 칙해 군사로 도와 치게 하니, 유가 중추부지사 강순에게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발저 두 강을 건너게 하여 구미부의 여러 목책을 쳐서 깨뜨리니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12내신 책봉사를 그만두다

四年正月遣官來獻俘。詔從厚賚,敕奬諭之。是年,瑈卒,賜諡惠莊。遣太監鄭同、崔安封世子晄為王,給妃韓氏誥命。既行,巡按遼東御史侯英奏曰:「遼東連年被寇,瘡痍未起,今復禾稼不登,軍民乏食。太監鄭同等隨從人員所過驛騷。臣考先年曾於翰林院中,選有學行文望者出使。今同、安俱朝鮮人,墳墓宗族皆在,見其國王,不免屈節,殊褻中國體。乞寢成命,或翰林,或給事中及行人內推選一員,往使為便。」帝曰:「英所言良是。自後賞賚遣內臣,其冊封正副使,選廷臣有學行者。」

4년 정월에 관원을 보내와 포로를 바치니 조서로 후히 상 주고 칙으로 장려해 타일렀다. 이해에 유가 죽으니 시호를 혜장(惠莊)이라 내리고, 태감 정동과 최안을 보내 세자 황(晄·예종)을 왕에 봉하고 비 한씨에게 고명을 주었다. 떠난 뒤에 순안요동어사 후영이 아뢰었다. 「요동이 해마다 도적을 입어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곡식이 익지 않아 군민이 먹을 것이 모자랍니다. 태감 정동 등의 수행원들이 지나는 곳마다 역참이 소란합니다. 신이 상고하니 지난날에는 한림원에서 학행과 문망 있는 이를 골라 사신 보냈습니다. 이제 동과 안은 다 조선 사람이라 분묘와 종족이 다 거기 있으니, 국왕을 보면 절개를 굽히지 않을 수 없어 중국의 체모를 심히 더럽힙니다. 성명을 거두시고 한림이나 급사중이나 행인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보내는 것이 편합니다.」 황제가 「영의 말이 참으로 옳다. 이 뒤로 상 내리는 데는 내신을 보내되, 책봉 정·부사는 학행 있는 조정 신하를 고르라」 하였다.

13예종과 성종

六年,晄病篤,以所生子幼,命其兄故世子暲之子娎權國事,遣陪臣以聞。及卒,賜諡襄悼,命娎嗣位,娎妻韓氏封王妃。十年追贈娎父世子暲為國王,諡懷簡,母韓氏為王妃,從所請也。

6년에 황이 병이 위독한데 낳은 아들이 어리므로, 형인 옛 세자 장의 아들 혈(娎·성종)에게 국사를 맡기라 명하고 배신을 보내 아뢰었다. 죽으니 시호를 양도(襄悼)라 내리고 혈이 자리를 잇게 하며 혈의 아내 한씨를 왕비에 봉하였다. 10년에 혈의 아버지 세자 장을 국왕으로 추증해 시호를 회간(懷簡)이라 하고 어머니 한씨를 왕비로 삼으니, 청한 바를 따른 것이다.

14활 재료를 허락하다

十一年四月,娎奏建州野人糾聚毛憐等衞侵擾邊境不已,乞朝命戒飭。十二年十月,娎為繼妻尹氏請封,賜誥命冠服。時禁外國互市兵器,娎奏:「小邦北連野人,南鄰倭島,五兵之用,不可缺一。而弓材所需牛角,仰於上國。高皇帝時嘗賜火藥、火礮,今望特許收買弓角,不與外番同禁。」兵部議歲市弓角五十,後以不足於用,請無限額,詔許倍市。

11년 4월에 혈이, 건주 야인이 모련 등 위를 모아 변경을 침요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조정의 명으로 경계해 신칙해 주기를 아뢰었다. 12년 10월에 혈이 계비 윤씨의 봉함을 청하니 고명과 관복을 내렸다. 그때 외국에 병기 교역을 금했는데 혈이 아뢰었다. 「작은 나라가 북으로 야인에 잇닿고 남으로 왜도(倭島)와 이웃하니 다섯 가지 병기에 하나도 빠질 수 없습니다. 활 재료로 쓰는 쇠뿔은 상국에 기대는데, 고황제 때 일찍이 화약과 화포를 내리셨으니, 이제 특별히 궁각(弓角) 사들이기를 허락하시어 다른 외번과 같이 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병부가 해마다 궁각 오십 부를 사도록 의논했는데, 뒤에 쓰기에 모자란다 하여 한도를 없애기를 청하니 조서로 갑절로 사도록 허락하였다.

15성화의 협공

十五年十月命娎出兵夾擊建州女直。娎遂遣右贊成魚有沼率兵至滿浦江,以氷泮後期。復遣左議政尹弼商、節度使金嶠等渡江進剿。十六年春遣陪臣來獻捷,帝命內官齎敕奬其能繼先烈,賜金幣,領兵官賞賚如例。後使還,遣其臣許熙伴送。熙歸至開州,建州騎二千邀之,掠其從卒三十餘人,馬二百三十餘匹,他所亡物稱是。奏聞,英國公張懋、吏部尚書尹旻等以遼東連年用兵,未可輕動,宜以此意諭娎。敕遼東守臣整飭邊備,更令譯者窮究所掠,期在必得,仍賜熙白金綵幣慰安之。

15년 10월에 혈에게 명해 군사를 내어 건주여직을 협공하게 하였다. 혈이 드디어 우찬성 어유소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만포강에 이르게 했는데 얼음이 풀려 기한을 놓쳤다. 다시 좌의정 윤필상과 절도사 김교 등을 보내 강을 건너 나아가 치게 하였다. 16년 봄에 배신을 보내와 승첩을 바치니, 황제가 내관을 시켜 칙을 지니고 가서 선대의 공렬을 잘 이었음을 장려하고 금과 폐백을 내리며 군사 거느린 관원에게도 전례대로 상을 주었다. 뒤에 사신이 돌아갈 때 그 신하 허희를 시켜 배웅하게 했는데, 희가 돌아오다 개주에 이르러 건주 기병 이천이 노려, 따르던 군졸 서른여 명과 말 이백서른여 필을 노략하고 잃은 물건도 그만큼이었다. 아뢰니, 영국공 장무와 이부상서 윤민 등이 요동이 해마다 군사를 써서 가벼이 움직일 수 없으니 이 뜻으로 혈에게 타이르자 하매, 요동 수신에게 칙해 변비를 정돈하고 통역을 시켜 노략된 것을 끝까지 찾아 기어이 돌려받게 하며, 희에게 백금과 채색 비단을 내려 위로하였다.

16왕비를 바꾸다

十七年,娎奏繼妃尹氏失德,廢置,乞更封副室尹氏。從之。十九年四月封娎長子㦕為世子。

17년에 혈이 계비 윤씨가 덕을 잃어 폐치했다 아뢰고 부실 윤씨를 다시 봉하기를 비니 따랐다. 19년 4월에 혈의 맏아들 융(㦕·연산군)을 세자로 봉하였다.

17연산군

弘治七年十二月,娎卒,賜諡康靖。明年四月,封㦕為國王,妻慎氏為王妃。十二年,㦕奏:「本國人屢有違禁匿海島,誘引軍民,漸至滋蔓。乞許本國自行搜刷。其係上國地方,請敕官追捕。」時遼東守臣亦奏如㦕言,報可。十五年冬,封㦕長子𩔇為世子。

홍치 칠년 12월에 혈이 죽으니 시호를 강정(康靖)이라 내렸다. 이듬해 4월에 융을 국왕에 봉하고 아내 신씨를 왕비로 삼았다. 12년에 융이 아뢰었다. 「본국 사람이 여러 번 금령을 어기고 바다 섬에 숨어 군민을 꾀어 끌어들여 점점 불어납니다. 본국이 스스로 뒤져 잡기를 허락하시고, 상국 지방에 딸린 데는 관원에게 칙해 뒤쫓아 잡게 하소서.」 그때 요동 수신도 융의 말대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15년 겨울에 융의 맏아들 황(𩔇)을 세자로 봉하였다.

18중종이 즉위하다

正德二年,㦕以世子𩔇夭亡,哀慟成疾,奏請以國事付其弟懌,其國人復奏請封懌。禮部議命懌權理國事,俟㦕卒乃封。既,陪臣盧公弼等以朝貢至京,復請封懌,廷議不允。十二月,㦕母妃奏懌長且賢,堪付重寄。於是禮部奏:「㦕以痼疾辭位,懌以親弟承托,接受既明,友愛不失。通國臣民舉無異詞,宜順其請。」上乃允懌嗣位,遣中官敕封,幷賜其妃尹氏誥命。

정덕 이년에 융이 세자 황이 일찍 죽어 슬픔이 병이 되었다며 국사를 아우 역(懌·중종)에게 맡기기를 아뢰고, 나라 사람들도 다시 역의 책봉을 청하였다. 예부가 역에게 국사를 임시로 다스리게 하고 융이 죽기를 기다려 봉하자고 의논하였다. 이윽고 배신 노공필 등이 조공하러 서울에 와서 다시 역의 책봉을 청했으나 조정 의논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융의 모비(母妃)가 역이 나이 많고 어질어 무거운 부탁을 감당할 만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예부가 「융이 고질로 자리를 사양하고 역이 친아우로 부탁을 받아, 주고받음이 이미 분명하고 우애를 잃지 않았으며, 온 나라 신민이 다 다른 말이 없으니 그 청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아뢰니, 임금이 이에 역이 자리를 잇도록 윤허하고 중관을 보내 칙봉하며 아울러 비 윤씨에게 고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