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명사 조선전 › 한 권

조선 3 — 종계변무와 임진왜란朝鮮 三

명사 조선전 明史 朝鮮傳 · 장정옥(張廷玉) 등 · 1739년 (청 건륭 4) · 단락 17 · 한자 2,368자 · 낭독 9.5분

「명사 조선전」 한 권 「조선 3 — 종계변무와 임진왜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명나라가 본 조선 삼백 년. 위화도 회군과 「조선」이라는 국호, 종계변무 이백 년의 씨름, 그리고 절반을 차지하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전말(평양·벽제관·울산·노량)까지 — 「속국이라 일컬었으나 나라 안과 다름이 없었다」로 맺는 마지막 정사 조선전이다.

1종계변무의 시작

初,成桂之自立也,與宰相李仁人本異族。永樂間,降祭海嶽祝文,稱成桂為仁人子,而祖訓亦載仁人子成桂更名旦。後成桂子芳遠奏辨,太宗許令改正。至是修大明會典,仍列祖訓於朝鮮國。貢使市以歸,懌上疏備陳世系,辨先世無弒逆事,乞改正。禮部議:「會典詳載本朝制度,事涉外國,疑似之際,在所略。況成桂得國出皇祖命,其不繫仁人後,太宗詔可徵,宜從其請。」詔曰:「可。」

처음 성계가 스스로 설 때 재상 이인인과는 본디 다른 집안이었다. 그런데 영락 연간에 내린 바다와 산에 제사하는 축문에 성계를 인인의 아들이라 일컫고, 조훈(祖訓)에도 인인의 아들 성계가 이름을 단으로 고쳤다고 실렸다. 뒤에 성계의 아들 방원이 아뢰어 변명하니 태종이 고치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대명회전을 엮으며 여전히 조훈의 글을 조선국 조에 실었다. 공사가 사서 돌아가니, 역이 소를 올려 세계(世系)를 갖추어 아뢰고 선대에 시역한 일이 없음을 변명하며 바로잡기를 빌었다. 예부가 「회전은 본조의 제도를 자세히 싣는 것이라 외국에 관계된 일은 의심스러운 즈음이면 생략하는 바입니다. 하물며 성계가 나라를 얻은 것은 황조(태조)의 명에서 나왔고, 인인의 후손이 아님은 태종의 조서로 증거할 수 있으니 그 청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하니 조서로 「가하다」 하였다.

2물색을 그치게 하다

十五年冬,命內官封懌子峼為世子,賜懌金帛珠玉,令括取異物及童男女以進。十六年,世宗即位,禮官言:「天子初踐祚,宜正中國之體,絕外裔狎侮之端。請諭懌非朝廷意,召內臣還,毋有所索取。」帝從之。

15년 겨울에 내관을 명해 역의 아들 호(峼)를 세자로 봉하고 역에게 금백과 주옥을 내리며, 기이한 물건과 사내아이 계집아이를 구해 바치게 하였다. 16년에 세종이 즉위하니 예관이 「천자께서 처음 자리에 오르셨으니 마땅히 중국의 체모를 바로 하고 바깥 나라를 함부로 대하는 실마리를 끊어야 합니다. 역에게 조정의 뜻이 아님을 타이르고 내신을 불러들이며 찾아 거두는 것이 없게 하소서」 하니 황제가 따랐다.

3왜의 포로를 바치다

嘉靖二年八月,以俘獲倭夷來獻,幷送還中國被掠八人。賜白金錦紵。

가정 이년 8월에 사로잡은 왜이(倭夷)를 바치고 아울러 노략되었던 중국 사람 여덟 명을 돌려보내니 백금과 비단을 내렸다.

4유부의 상소

八年八月,陪臣柳溥上言:「國祖李旦係本國全州人。二十八世祖瀚仕新羅為司空。新羅亡,六世孫兢休入高麗。十三世孫安社仕元為南京千戶所達魯花赤。元季兵興,安曾孫子春與男成桂避地東遷。至正辛丑,當恭愍王之十年,有紅巾賊入境,成桂擊賊有功,授武班職事,時尚未知名。恭愍無嗣,陰蓄寵臣辛肫之子禑為子,晚為嬖臣洪倫、內豎崔萬生所弒。權臣李仁人誅倫、萬生而立禑,擢成桂為門下侍中。禑遣成桂侵遼東,成桂不從,返兵。禑懼,遜位於子昌。昌以偽姓見黜,復立王氏裔定昌君瑤,竄仁人於外。瑤復不道,國人戴成桂,請於高皇帝,立為王,更名旦,贍瑤別邸,終其身,實未嘗為弒。前永樂、正德間屢經奏請,俱蒙俞允,而迄未改正。今遇重修會典,乞賜昭雪。」詔送史館編纂。

8년 8월에 배신 유부가 아뢰었다. 「국조(國祖) 이단은 본국 전주 사람입니다. 28세조 한(翰)이 신라에 벼슬해 사공이 되었고, 신라가 망하자 6세손 긍휴가 고려에 들어갔으며, 13세손 안사가 원나라에 벼슬해 남경 천호소 다루가치가 되었습니다. 원나라 말 병란에 안사의 증손 자춘이 아들 성계와 함께 난을 피해 동으로 옮겼습니다. 지정 신축년,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지경에 드니 성계가 도적을 쳐서 공이 있어 무반 직사를 받았는데 그때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공민왕이 후사가 없어 몰래 총신 신돈의 아들 우를 길러 아들로 삼았다가, 만년에 폐신 홍륜과 내시 최만생에게 시해되니, 권신 이인인이 륜과 만생을 베고 우를 세우고 성계를 문하시중으로 올렸습니다. 우가 성계를 시켜 요동을 침노하게 했는데 성계가 따르지 않고 군사를 돌이켰습니다. 우가 두려워 아들 창에게 자리를 물렸으나 창이 거짓 성씨라 하여 쫓겨나고, 다시 왕씨의 후예 정창군 요를 세우고 인인을 밖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요가 다시 무도하니 나라 사람들이 성계를 떠받들어 고황제께 청해 왕으로 세웠고, 이름을 단으로 고치고 요를 별저에서 부양하여 그 몸을 마치게 했으니, 실로 시해한 일이 없습니다. 지난 영락·정덕 연간에 여러 번 아뢰어 다 윤허를 입었으나 아직 바로잡히지 못했습니다. 이제 회전을 다시 엮는 때를 만났으니 밝게 씻어 주시기를 빕니다.」 조서로 사관(史館)에 보내 편찬하게 하였다.

5명당 배향의 하례

十八年二月,睿宗祔太廟,配享明堂禮成,懌表賀。帝特御奉天門引見,賜宴禮部。

18년 2월에 예종을 태묘에 부제하고 명당 배향의 예가 이루어지니 역이 표로 하례하였다. 황제가 특별히 봉천문에 나아가 인견하고 예부에서 잔치를 내렸다.

6인종과 명종

二十三年冬,懌卒。二十四年正月來訃,賜諡恭僖。詔立其子峼。峼未踰年卒,賜諡榮靖。九月,峼弟權國事峘遣使謝祭諡,幷請襲封,詔許之。

23년 겨울에 역이 죽었다. 24년 정월에 부고가 오니 시호를 공희(恭僖)라 내리고 조서로 아들 호(인종)를 세웠다. 호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으니 시호를 영정(榮靖)이라 내렸다. 9월에 호의 아우 권국사 환(峘·명종)이 사신을 보내 제사와 시호를 사례하고 아울러 습봉을 청하니 조서로 허락하였다.

7표류민 육백 명

二十五年,峘遣使送下海番人六百餘至邊,賜金幣。二十六年正月,峘咨稱:「福建人從無泛海至本國者,因往日本市易,為風所漂,前後共獲千人以上,皆挾軍器貨物,致中國火礮亦為倭有,恐起兵端。」詔:「頃年沿海奸民犯禁,福建尤甚,往往為外國所獲,有傷國體。海道官員令巡按御史察參。仍賜王銀幣,以旌其忠。」

25년에 환이 사신을 보내 바다에 표류한 번인(番人) 육백여 명을 변경에 보내니 금과 폐백을 내렸다. 26년 정월에 환이 자문으로 말하였다. 「복건 사람이 바다를 건너 본국에 온 일이 예전엔 없었는데, 일본에 장사하러 가다 바람에 떠밀린 자를 앞뒤로 천 명 넘게 잡았습니다. 다 병기와 화물을 끼고 있어 중국의 화포마저 왜의 차지가 되었으니 병란의 실마리가 될까 두렵습니다.」 조서하였다. 「요사이 연해의 간사한 백성이 금령을 범함이 복건이 더욱 심하여, 이따금 외국에 잡혀 나라 체모를 상한다. 해도(海道) 관원은 순안어사에게 살펴 아뢰게 하라. 아울러 왕에게 은과 폐백을 내려 그 충성을 표창한다.」

8율관을 청하다

三十一年冬,以洪武、永樂間所賜樂器敝壞,奏求律管,更乞遣樂官赴京校習,許之。

31년 겨울에 홍무·영락 연간에 내린 악기가 해져 못 쓰게 되었다 하여 율관(律管)을 아뢰어 구하고, 다시 악관을 서울에 보내 교습받기를 비니 허락하였다.

9왜선을 무찌르다

三十五年五月有倭船四自浙、直敗還,漂入朝鮮境。峘遣兵擊殲之,得中國被俘及助逆者三十餘人來獻,因賀冬至節,帝賜璽書褒諭。三十八年十一月奏:「今年五月,有倭寇駕船二十五隻來抵海岸,臣命將李鐸等剿殺殆盡,獲中國民陳春等三百餘人,內招通倭嚮導陳得等十六人,俱獻闕下。」復降敕奬勵,厚賚銀幣,幷賜鐸等有差。

35년 5월에 왜선 네 척이 절강·직례에서 패해 돌아가다 조선 지경에 떠밀려 들어오니, 환이 군사를 보내 쳐서 다 죽이고 사로잡혔던 중국 사람과 역적을 도운 자 서른여 명을 얻어 바치고 그 김에 동지절을 하례하니, 황제가 새서로 기려 타일렀다. 38년 11월에 아뢰었다. 「올해 5월에 왜구가 배 스물다섯 척을 몰고 해안에 이르니, 신이 장수 이탁 등에게 명해 무찔러 거의 다 죽이고, 중국 백성 진춘 등 삼백여 명을 얻었는데 그 안에서 왜와 통해 길잡이 노릇 한 진득 등 열여섯 명을 가려내어 다 대궐 아래 바칩니다.」 다시 칙을 내려 장려하고 은과 폐백을 두터이 내리며 탁 등에게도 차등 있게 내렸다.

10회전에 덧붙이다

四十二年九月,峘復上書辨先世非李仁人後,今修會典雖蒙釐正,乞著始祖旦、父子春之名,帝令附錄會典。

42년 9월에 환이 다시 글을 올려 선대가 이인인의 후손이 아님을 변명하니, 이번 회전 수찬에서 이미 바로잡음을 입었으나 시조 단과 아버지 자춘의 이름을 실어 주기를 빌매, 황제가 회전에 덧붙여 기록하게 하였다.

11명종이 죽다

隆慶元年六月遣官頒即位詔。時帝將幸太學,來使乞留觀禮,許之。是年冬,峘卒,賜諡恭憲,命其姪昖襲封。

융경 원년 6월에 관원을 보내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때 황제가 태학에 거둥하려 하니 온 사신이 남아 관례(觀禮)하기를 빌므로 허락하였다. 이해 겨울에 환이 죽으니 시호를 공헌(恭憲)이라 내리고 조카 연(昖·선조)이 이어 봉해지게 하였다.

12회전을 받아 내다

萬曆元年正月上穆宗尊諡、兩宮徽號禮成,昖表賀,獻方物馬匹。時昖屢請賜皇明會典,為其先康獻王旦雪冤。十六年正月,會典成,適貢使愈泓在京,請給前書,以終前命。許之。十七年十一月,陪臣奇芩等入賀冬至,奏稱本年六月,大琉球國船遭風至海岸,所有男婦合解京,給文放歸。從之。

만력 원년 정월에 목종의 존시와 두 궁의 휘호를 올리는 예가 이루어지니 연이 표로 하례하고 방물과 말을 바쳤다. 그때 연이 여러 번 황명회전을 내려 선조 강헌왕 단의 원통함을 씻어 주기를 청하였다. 16년 정월에 회전이 이루어졌는데 마침 공사 유홍이 서울에 있으면서 앞서의 명을 마무리해 책을 달라 청하니 허락하였다. 17년 11월에 배신 기침 등이 동지를 하례하러 들어와, 올해 6월에 대유구국 배가 바람을 만나 해안에 이르렀기에 남녀를 다 서울로 풀어 보낸다고 아뢰니, 문서를 주어 돌려보내게 하였다.

13관백 수길이 온다

十九年十一月奏,倭酋關白平秀吉聲言明年三月來犯,詔兵部申飭海防。平秀吉者,薩摩州人,初隨倭關白信長。會信長為其下所弒,秀吉遂統信長兵,自號關白,劫降六十餘州。朝鮮與日本對馬島相望,時有倭夷往來互市。二十年夏五月,秀吉遂分渠帥行長、清正等率舟師逼釜山鎮,潛渡臨津。時朝鮮承平久,兵不習戰,昖又湎酒,弛備,猝島夷作難,望風皆潰。昖棄王城,令次子琿攝國事,奔平壤。已,復走義州,願內屬。七月,兵部議令駐劄險要,以待天兵;號召通國勤王,以圖恢復。而是時倭已入王京,毀墳墓,劫王子、陪臣,剽府庫,八道幾盡沒,旦暮且渡鴨綠江,請援之使絡繹於道。廷議以朝鮮為國藩籬,在所必爭。遣行人薛潘諭昖以興復大義,揚言大兵十萬且至。而倭業抵平壤,朝鮮君臣益急,出避愛州。遊擊史儒等率師至平壤,戰死。副總兵祖承訓統兵渡鴨綠江援之,僅以身免。

19년 11월에, 왜의 추장 관백 평수길이 명년 3월에 쳐들어온다고 소리 낸다고 아뢰니, 조서로 병부에 해방(海防)을 거듭 단속하게 하였다. 평수길은 살마주 사람으로 처음 왜 관백 신장을 따랐는데, 신장이 그 부하에게 시해되자 수길이 드디어 신장의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관백이라 이름하며 예순여 주를 쳐서 항복받았다. 조선은 일본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아 늘 왜이가 오가며 교역하였다. 20년 여름 5월에 수길이 드디어 우두머리 행장(고니시 유키나가)·청정(가토 기요마사) 등을 나누어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부산진에 다가와 몰래 임진강을 건넜다. 그때 조선은 태평이 오래라 군사가 싸움에 익지 않았고, 연도 술에 빠져 방비를 늦추었으니, 갑자기 섬 오랑캐가 난을 일으키자 바람만 바라보고 다 무너졌다. 연이 왕성을 버리고 둘째 아들 혼(琿)에게 국사를 대신하게 한 뒤 평양으로 달아났다. 이윽고 다시 의주로 달아나 내속(內屬)을 원하였다. 7월에 병부가, 험요에 주둔해 명군을 기다리고 온 나라에 근왕을 호소해 회복을 꾀하라고 의논하였다. 이때 왜는 이미 왕경에 들어 무덤을 헐고 왕자와 배신을 위협해 잡고 부고를 노략하니 팔도가 거의 다 넘어갔고, 조석에 압록강을 건널 판이라 구원 청하는 사신이 길에 잇달았다. 조정 의논이 조선은 나라의 울타리라 반드시 다투어야 할 곳이라 하여, 행인 설반을 보내 연에게 부흥의 대의를 타이르고 대군 십만이 곧 이른다고 소문을 놓았다. 그런데 왜가 벌써 평양에 다다르니 조선 군신이 더욱 급해 애주로 나가 피하였다. 유격 사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이르러 싸우다 죽고, 부총병 조승훈이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구원했으나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14평양 대첩과 벽제관

中朝震動,以宋應昌為經略。八月,倭入豐德等郡,兵部尚書石星計無所出,議遣人偵探之,於是嘉興人沈惟敬應募。惟敬者,市中無賴也。是時秀吉次對馬島,分其將行長等守要害為聲援。惟敬至平壤,執禮甚卑。行長紿曰:「天朝幸按兵不動,我不久當還。以大同江為界,平壤以西盡屬朝鮮耳。」惟敬以聞。廷議倭詐未可信,乃趣應昌等進兵。而星頗惑於惟敬,乃題署遊擊,赴軍前,且請金行間。十二月,以李如松為東征提督。明年正月,如松督諸將進戰,大捷於平壤。行長渡大同江,遁還龍山。所失黃海、平安、京畿、江原四道並復,清正亦遁還王京。如松既勝,輕騎趨碧蹄館,敗,退駐開城。事具如松傳。

중조(中朝)가 진동하여 송응창을 경략으로 삼았다. 8월에 왜가 풍덕 등 군에 들어오니, 병부상서 석성이 계책이 나올 데 없어 사람을 보내 정탐하기를 의논하매, 이에 가흥 사람 심유경이 응모하였다. 유경은 저자의 무뢰배다. 이때 수길은 대마도에 머물며 장수 행장 등을 나누어 요해를 지켜 성원으로 삼았다. 유경이 평양에 이르러 예를 잡기 몹시 낮게 하니, 행장이 속여 말하기를 「천조가 다행히 군사를 눌러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오래지 않아 돌아가리다.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아 평양 서쪽은 다 조선에 붙이겠소」 하였다. 유경이 아뢰니, 조정 의논은 왜의 속임을 믿을 수 없다 하여 이에 응창 등에게 진병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성은 유경에게 자못 홀려 유격 벼슬로 제수해 군전에 보내고 또 이간질할 금을 청하였다. 12월에 이여송을 동정제독으로 삼았다. 이듬해 정월에 여송이 여러 장수를 독려해 나아가 싸워 평양에서 크게 이기니, 행장이 대동강을 건너 용산으로 달아나 돌아갔다. 잃었던 황해·평안·경기·강원 네 도가 다 회복되고 청정도 왕경으로 달아나 돌아갔다. 여송이 이긴 김에 가벼운 기병으로 벽제관에 달려갔다가 패하여 물러나 개성에 주둔하였다. 일은 여송의 전에 갖추어져 있다.

협주 1

黃海平安京畿江原四道並復江原,原作「江源」,據李朝實錄世宗實錄卷一五三地理志改。

「황해·평안·경기·강원 네 도가 다 회복되었다」의 강원(江原)은 원래 「강源」으로 되어 있는데, 이조실록 세종실록 권153 지리지에 따라 고쳤다.

15강화 의론이 일다

初,如松誓師,欲斬惟敬,以參軍李應試言而止。至是敗,氣縮,而應昌急圖成功,倭亦乏食有歸志,因而封貢之議起。應昌得倭報惟敬書,乃令遊擊周弘謨同惟敬往諭倭,獻王京,返王子,如約縱歸。倭果於四月棄王城遁。時漢江以南千有餘里朝鮮故土復定,兵部言宜令王還國居守,我各鎮兵久疲海外,以次撤歸為便。詔可。應昌疏稱:「釜山雖瀕海南,猶朝鮮境,有如倭覘我罷兵,突入再犯,朝鮮不支,前功盡棄。今撥兵協守為第一策,即議撤,宜少需,俟倭盡歸,量留防戍。」部議留江浙兵五千,分屯要害,仍諭昖蒐練軍實,毋恃外援。已而沈惟敬歸自釜山,同倭使來請款,而倭隨犯咸安、晉州,逼全羅,聲復漢江以南,以王京、漢江為界。如松計全羅饒沃,南原府尤其咽喉,乃命諸將分守要害。已,倭果分犯,我師並有斬獲。兵科給事中張輔之、遼東都御史趙燿皆言款貢不可輕受。七月,倭從釜山移西生浦,送回王子、陪臣。

처음 여송이 군사에 맹세할 때 유경을 베려 했는데 참군 이응시의 말로 그만두었다. 이에 이르러 패하자 기가 꺾였고, 응창도 성공을 서두르며 왜도 먹을 것이 모자라 돌아갈 뜻이 있으니, 이로 인해 봉공(封貢)의 의논이 일어났다. 응창이 왜가 유경에게 답한 글을 얻고, 이에 유격 주홍모를 유경과 함께 보내 왜에 타이르기를, 왕경을 바치고 왕자를 돌려보내면 약속대로 놓아 돌려보내마 하였다. 왜가 과연 4월에 왕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한강 이남 천여 리 조선 옛 땅이 다시 안정되니, 병부가 왕에게 나라에 돌아와 지키게 하고 오래 해외에 지친 각 진의 군사를 차례로 거두어 돌아옴이 편하다 하니 조서로 허락하였다. 응창이 소를 올렸다. 「부산은 바다 남쪽 끝이라 해도 여전히 조선 지경이니, 만일 왜가 우리의 철병을 엿보아 갑자기 다시 쳐들어오면 조선이 지탱하지 못하고 앞의 공이 다 버려집니다. 이제 군사를 나누어 함께 지키는 것이 제일책이요, 철수를 의논하더라도 조금 기다려 왜가 다 돌아간 뒤 헤아려 남겨 방수해야 합니다.」 부의(部議)로 강·절 군사 오천을 남겨 요해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아울러 연에게 군실을 모아 훈련하며 바깥 도움만 믿지 말라 타일렀다. 이윽고 심유경이 부산에서 돌아와 왜사와 함께 와서 관백의 항표(降表)를 청하였다. 그러나 왜는 곧 함안·진주를 범하고 전라를 핍박하며 한강 이남을 되찾겠다 소리 내고 왕경·한강으로 경계를 삼자 하였다. 여송은 전라가 기름지고 남원부가 그 목구멍임을 헤아려 여러 장수에게 요해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이윽고 왜가 과연 나누어 범하니 우리 군사가 다 베고 사로잡음이 있었다. 병과급사중 장보지와 요동도어사 조요가 다 관공(款貢)을 가벼이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7월에 왜가 부산에서 서생포로 옮기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냈다.

16유정만 남기다

時師久暴露,聞撤,勢難久羈。應昌請留劉綎川兵,吳惟忠、駱尚志等南兵,合薊、遼兵共萬六千,聽綎分布慶尚之大丘,月餉五萬兩,資之戶兵二部。先是,發帑給軍費,已累百萬。廷臣言虛內實外非長策,請以所留川兵命綎訓練,兵餉令本國自辦。於是詔撤惟忠等兵,止留綎兵防守。諭朝鮮世子臨海君珒居全慶,以顧養謙為經略。

그때 군사가 오래 드러나 지쳤는데 철수한다는 소문이 나니 형세가 오래 붙들기 어려웠다. 응창이 유정의 사천 군사와 오유충·낙상지 등의 남병을 남겨 계·요 군사와 합쳐 만 육천으로 유정에게 경상의 대구에 나누어 배치하게 하고, 월향 오만 냥을 호부·병부 두 부에서 대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내탕을 내어 군비에 준 것이 이미 백만에 쌓였었다. 조정 신하들이 안을 비우고 밖을 채움은 장책이 아니라 말하며, 남긴 사천 군사는 정에게 명해 훈련하고 군량은 본국이 스스로 마련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조서로 유충 등의 군사를 거두고 정의 군사만 남겨 방수하게 하며, 조선 세자 임해군 진(珒)에게 전라·경상에 살게 하도록 타이르고, 고양겸을 경략으로 삼았다.

17증위방의 논책

九月,昖以三都既復,疆域再造,上表謝恩。然時倭猶據釜山也,星益一意主款。九月,兵部主事曾偉芳言:「關白大眾已還,行長留待。知我兵未撤,不敢以一矢加遺。欲歸報關白捲土重來,則風不利,正苦冬寒。故款亦去,不款亦去。沈惟敬前於倭營講購,咸安、晉州隨陷,而欲恃款冀來年不攻,則速之款者,正速之來耳。故款亦來,不款亦來。宜令朝鮮自為守,弔死問孤,練兵積粟,以圖自強。」帝以為然,因敕諭昖者甚至。

9월에 연이 세 도읍이 회복되고 강역이 다시 만들어졌다 하여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왜는 여전히 부산에 웅거해 있었는데 석성은 더욱 한뜻으로 강화를 주장하였다. 9월에 병부주사 증위방이 말하였다. 「관백의 대군은 이미 돌아가고 행장만 남아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군사가 아직 철수하지 않음을 알아 감히 화살 하나 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돌아가 관백에게 알리고 권토중래하려 해도 바람이 불리하고 한겨울 추위가 괴로우니, 강화해도 갈 것이요 강화하지 않아도 갈 것입니다. 심유경이 지난날 왜 진영에서 강화를 이야기했어도 함안·진주가 잇달아 함락되었으니, 강화를 믿고 명년에 안 쳐들어오기를 바란다면 강화를 재촉하는 것이 바로 쳐들어옴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화해도 올 것이요 강화하지 않아도 올 것입니다. 마땅히 조선이 스스로 지키게 하여, 죽은 이를 조문하고 외로운 이를 위문하며 군사를 단련하고 곡식을 쌓아 자강을 꾀하게 해야 합니다.」 황제가 옳다 여겨 연에게 칙유함이 몹시 지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