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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 — 정유재란朝鮮 四

명사 조선전 明史 朝鮮傳 · 장정옥(張廷玉) 등 · 1739년 (청 건륭 4) · 단락 12 · 한자 2,201자 · 낭독 8.8분

「명사 조선전」 한 권 「조선 4 — 정유재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명나라가 본 조선 삼백 년. 위화도 회군과 「조선」이라는 국호, 종계변무 이백 년의 씨름, 그리고 절반을 차지하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전말(평양·벽제관·울산·노량)까지 — 「속국이라 일컬었으나 나라 안과 다름이 없었다」로 맺는 마지막 정사 조선전이다.

1봉공 강행

二十二年正月,昖遣金晬等進方物謝恩。禮部郎中何喬遠奏:「晬涕泣言倭寇猖獗,朝鮮束手受刃者六萬餘人。倭語悖慢無禮,沈惟敬與倭交通,不云和親,輒曰乞降。臣謹將萬曆十九年中國被掠人許儀所寄內地書、倭夷答劉綎書及歷年入寇處置之宜,乞特敕急止封貢。」詔兵部議。時廷臣交章,皆以罷封貢、議戰守為言。八月,養謙奏講貢之說,貢道宜從寧波,關白宜封為日本王,諭行長部倭盡歸,與封貢如約。九月,昖請許保國。帝乃切責羣臣阻撓,追褫御史郭實等。詔小西飛入朝,集多官面議,要以三事:一,勒倭盡歸巢;一,既封不與貢;一,誓無犯朝鮮。倭俱聽從,以聞。帝復諭於左闕,語加周複。十二月,封議定,命臨淮侯李宗城充正使,以都指揮楊方亨副之,同沈惟敬往日本,王給金印,行長授都督僉事。

22년 정월에 연이 김수 등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사은하였다. 예부낭중 하교원이 아뢰었다. 「수가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왜구가 창궐하여 조선에서 손 놓고 칼날을 받은 이가 육만이 넘는다 합니다. 왜의 말이 어그러지고 무례한데, 심유경은 왜와 내통하며 화친이라 하지 않고 문득 항복을 빈다고 합니다. 신이 삼가 만력 십구년 중국 피로인 허의가 내지로 부친 글과 왜이가 유정에게 답한 글과 역년 침입을 처치한 마땅함을 갖추었으니, 특별히 칙을 내려 봉공을 급히 그치소서.」 조서로 병부에 의논하게 하였다. 그때 조정 신하들이 글을 잇달아 올려 다 봉공을 파하고 싸움과 지킴을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8월에 양겸이 강공(講貢)의 설을 아뢰니, 공로(貢路)는 영파를 따르고 관백은 일본왕에 봉하며, 행장에게 타일러 거느린 왜를 다 돌려보내고 봉공을 약속대로 하게 하자 하였다. 9월에 연이 나라를 보전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뭇 신하의 저지를 간곡히 꾸짖고 어사 곽실 등의 벼슬을 빼앗았다. 조서로 소서비(小西飛)를 입조시켜 여러 관원을 모아 면전에서 의논하게 하니,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하나, 왜는 다 소굴로 돌아갈 것. 하나, 봉하되 조공은 허락하지 않을 것. 하나, 맹세코 조선을 범하지 말 것. 왜가 다 따르겠다 하므로 아뢰니, 황제가 다시 좌궐에서 타이르매 말이 더욱 정중하였다. 12월에 봉하는 의논이 정해져, 임회후 이종성을 정사로 삼고 도지휘 양방형을 부사로 삼아 심유경과 함께 일본에 가게 하니, 왕에게 금인을 주고 행장에게 도독첨사를 제수하였다.

2광해군 세자 책봉을 막다

二十三年九月,昖奏立次子琿為嗣。先是,昖庶長子臨海君珒陷賊中,驚憂成疾,次子光海君琿收集流散,頗著功績,奏請立之。禮部尚書范謙言繼統大義,長幼定分,不宜僭差,遂不許。至是復奏,引永樂間恭定王例上請,禮臣執奏,不從。二十四年五月,昖復疏請立琿,禮部仍執不可,詔如議。時國儲未建,中外恫疑,故尚書范謙於朝鮮易封事三疏力持云。

23년 9월에 연이 둘째 아들 혼(琿·광해군)을 후사로 세우기를 아뢰었다. 이보다 앞서 연의 서장자 임해군 진은 적진에 잡혀 놀라고 근심하다 병이 되었고, 둘째 광해군 혼이 흩어진 무리를 거두어 자못 공적이 드러났으므로 세우기를 청한 것이다. 예부상서 범겸이, 계통을 잇는 대의는 장유의 분수가 정해져 있으니 어그러져서는 안 된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다시 아뢰며 영락 연간 공정왕(태종)의 전례를 끌어 청했으나 예부 신하가 고집해 아뢰니 따르지 않았다. 24년 5월에 연이 다시 소를 올려 혼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예부가 여전히 불가를 고집하니 조서로 의논대로 하였다. 그때 명나라의 국본(태자)이 아직 서지 않아 안팎이 두려워 의심하던 터라, 상서 범겸이 조선의 세자 바꾸는 일에 세 번 소를 올려 힘써 버틴 것이다.

3일본에 간 책봉사

九月,封使至日本。先是,沈惟敬抵釜山,私奉秀吉蟒玉、翼善冠、地圖、武經、良馬。而李宗城以貪淫為倭守臣所逐,棄璽書夜遁。事聞,逮問。乃以方亨充正使,加惟敬神機營銜副之。及是奉冊至,關白怒朝鮮王子不來謝,止遣二使奉白土綢為賀,拒其使不見,語惟敬曰:「若不思二子、三大臣、三都、八道悉遵天朝約付還,今以卑官微物來賀,辱小邦邪?辱天朝邪?且留石曼子兵於彼,候天朝處分,然後撤還。」翌日奉貢,遣使賫表文二道,隨冊使渡海至朝鮮。廷議遣使於朝鮮,取表文進驗,其一謝恩,其一乞天子處分朝鮮。

9월에 책봉사가 일본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심유경이 부산에 이르러 사사로이 수길에게 망룡의·익선관·지도·무경·좋은 말을 바쳤고, 이종성은 탐욕과 음행으로 왜 수신(守臣)에게 쫓겨 새서를 버리고 밤에 달아났다. 일이 알려지자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에 방형을 정사로 삼고 유경에게 신기영 직함을 더해 부사로 삼았다. 책서를 받들고 이르니, 관백은 조선 왕자가 와서 사례하지 않음에 노하여, 두 사신이 백토주(白土綢)를 받들어 하례할 뿐이자 그 사신을 물리쳐 보지 않고 유경에게 말하였다. 「두 왕자와 세 대신과 세 도읍과 팔도를 다 천조의 약속대로 돌려준 것을 생각지 않고, 이제 낮은 벼슬아치와 하찮은 물건으로 와서 하례하니, 작은 나라를 욕함인가, 천조를 욕함인가. 석만자(시마즈)의 군사를 저기 남겨 천조의 처분을 기다린 뒤에 거두어 돌아가겠다.」 이튿날 공물을 받들고 사신을 시켜 표문 두 통을 지니고 책사를 따라 바다를 건너 조선에 이르게 하였다. 조정 의논으로 조선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가져다 검증하니, 하나는 사은이요 하나는 천자가 조선을 처분해 주기를 비는 것이었다.

4석성과 심유경의 몰락

初,方亨詭報去年從釜山渡海,倭於大版受封,即回和泉州。然倭方責備朝鮮,仍留兵釜山如故,謝表後時不發,方亨徒手歸。至是,惟敬始投表文,案驗潦草,前折用豐臣圖書,不奉正朔,無人臣禮。而寬奠副總兵馬棟報清正擁二百艘屯機張營。方亨始直吐本未,委罪惟敬,幷呈石星前後手書。帝大怒,命逮石星、沈惟敬案問。以兵部尚書邢玠總督薊、遼;改麻貴為備倭大將軍,經理朝鮮;僉都御史楊鎬駐天津,申警備;楊汝南、丁應泰贊畫軍前。

처음에 방형은 지난해 부산에서 바다를 건너 왜가 대판(오사카)에서 책봉을 받고 곧 화천주로 돌아갔다고 거짓 보고하였다. 그러나 왜는 바야흐로 조선을 책망하며 여전히 부산에 군사를 남겨 두기를 예전같이 하고 사은 표문도 때 지나도록 내지 않으니, 방형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에 이르러 유경이 비로소 표문을 바쳤는데, 살펴보니 초솔하여 앞 접은 데는 풍신(豐臣) 도장을 쓰고 정삭을 받들지 않아 신하의 예가 없었다. 그런데 관전부총병 마동이 청정이 이백 척을 껴안고 기장영에 진 쳤다고 알렸다. 방형이 비로소 본말을 바로 토하며 죄를 유경에게 미루고 아울러 석성의 앞뒤 친필 글을 바쳤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석성과 심유경을 잡아 문초하라 명하고, 병부상서 형개로 계·요를 총독하게 하며, 마귀를 비왜대장군으로 고쳐 조선을 경리하게 하고, 첨도어사 양호는 천진에 주둔해 경비를 거듭 단속하며, 양여남·정응태를 군전 찬획으로 삼았다.

5형개가 싸움을 결심하다

五月,玠至遼。行長建樓,清正布種,島倭窖水,索朝鮮地圖,玠遂決意用兵。麻貴望鴨綠江東發,所統兵僅萬七千人,請濟師。玠以朝鮮兵惟嫺水戰,乃疏請募兵川、浙,幷調薊、遼、宣、大、山、陝兵及福建、吳淞水師,劉綎督川、漢兵聽剿。貴密報候宣、大兵至,乘倭未備,掩釜山,則行長擒,清正走。玠以為奇計,乃檄楊元屯南原,吳惟忠屯忠州。

5월에 형개가 요동에 이르렀다. 행장은 다락을 세우고 청정은 씨를 뿌리며 섬 왜들이 물을 길어 움에 저장하고 조선 지도를 찾으니, 개가 드디어 용병을 결심하였다. 마귀가 압록강 동쪽을 바라고 떠나는데 거느린 군사가 겨우 만 칠천이라 군사를 더해 주기를 청하였다. 개는 조선 군사가 물싸움에만 익다 하여, 소를 올려 사천·절강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아울러 계·요·선부·대동·산서·섬서 군사와 복건·오송 수군을 조발하며, 유정이 사천·한중 군사를 거느리고 무찌름을 감독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귀가 은밀히, 선부·대동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왜가 대비하지 않은 틈에 부산을 덮치면 행장을 사로잡고 청정은 달아나리라 알리니, 개가 기이한 계책이라 여겨, 이에 격문으로 양원을 남원에, 오유충을 충주에 주둔시켰다.

협주 1

五月玠至遼按邢玠至遼東,以及上文所述楊方亨自朝鮮還奏、邢玠為薊遼總督等事,均在萬曆二十五年,見神宗實錄卷三0八三月己酉、己未各條,傳文失載年分。

「5월에 형개가 요동에 이르렀다」 — 형개가 요동에 이른 것과 앞글의 양방형이 조선에서 돌아와 아뢴 일, 형개가 계·요 총독이 된 일 등은 다 만력 25년의 일이니, 신종실록 권308 3월 기유·기미 각 조에 보인다. 전문(傳文)이 해를 적지 않았다.

6한산도가 무너지다

六月,倭數千艘泊釜山,戮朝鮮郡守安弘國,漸逼梁山、熊川。惟敬率營兵二百,出入釜山。玠陽為慰藉,檄楊元襲執之,縛至貴營,惟敬執而嚮導始絕。七月,倭奪梁山、三浪,遂入慶州,侵閑山。統制元均兵潰,遂失閑山。閑山島在朝鮮西海口,右障南原,為全羅外藩,一失守則沿海無備,天津、登、萊皆可揚帆而至。而我水兵三千甫抵旅順,閑山破,經略檄守王京西之漢江、大同江,扼倭西下,兼防運道。

6월에 왜선 수천 척이 부산에 닿아 조선 군수 안홍국을 죽이고 차츰 양산·웅천을 다그쳤다. 유경이 영병 이백을 거느리고 부산을 드나들므로, 개가 겉으로 위로하는 체하며 격문으로 양원을 시켜 습격해 잡아 귀의 진영에 묶어 보내니, 유경이 잡히자 길잡이가 비로소 끊겼다. 7월에 왜가 양산·삼랑을 빼앗고 드디어 경주에 들어 한산(閑山)을 침노하였다. 통제 원균의 군사가 무너져 드디어 한산을 잃었다. 한산도는 조선 서해 어귀에 있어 오른쪽으로 남원을 가리니 전라의 바깥 울타리라, 한 번 지킴을 잃으면 연해에 방비가 없어 천진과 등주·내주가 다 돛을 달고 이를 수 있다. 우리 수군 삼천이 겨우 여순에 닿았을 때 한산이 깨지니, 경략이 격문으로 왕경 서쪽 한강과 대동강을 지켜 왜가 서쪽으로 내려옴을 막고 아울러 운송로를 방비하게 하였다.

7남원 함락과 왕경 방어

八月,清正圍南原,乘夜猝攻,守將楊元遁。時全州有陳愚衷,去南原僅百里,南原告急,愚衷不敢救,聞已破,棄城走。麻貴遣遊擊牛伯英赴援,與愚衷合兵,屯公州。倭遂犯全慶,逼王京。王京為朝鮮八道之中,東阻烏嶺、忠州,西則南原、全州,道相通。自二城失,東西皆倭,我兵單弱,因退守王京,依險漢江。麻貴請於玠,欲棄王京退守鴨綠江。海防使蕭應宮以為不可,自平壤兼程趨王京止之。麻貴發兵守稷山,朝鮮亦調都體察使李元翼由烏嶺出忠清道遮賊鋒。玠既身赴王京,人心始定。玠召參軍李應試問計,應試請問廟廷主畫云何。玠曰:「陽戰陰和,陽剿陰撫,政府八字密畫,無泄也。」應試曰:「然則易耳。倭叛以處分絕望,其不敢殺楊元,猶望處分也。直使人諭之曰沈惟敬不死,則退矣。

8월에 청정이 남원을 에워싸고 밤을 타 갑자기 치니 수장 양원이 달아났다. 그때 전주에 진우충이 있어 남원과 겨우 백 리인데, 남원이 위급을 알려도 우충이 감히 구원하지 못하고 이미 깨졌다는 말을 듣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마귀가 유격 우백영을 보내 구원하러 가서 우충과 군사를 합쳐 공주에 주둔하였다. 왜가 드디어 전라·경상을 범하고 왕경을 다그쳤다. 왕경은 조선 팔도의 가운데라, 동쪽은 오령·충주에 막히고 서쪽은 남원·전주로 길이 서로 통하는데, 두 성을 잃은 뒤로 동서가 다 왜요 우리 군사는 홑지고 약하므로, 이에 물러나 왕경을 지키며 한강의 험함에 의지하였다. 마귀가 개에게 청해 왕경을 버리고 물러나 압록강을 지키고자 하니, 해방사 소응궁이 안 된다 하여 평양에서 길을 갑절로 달려 왕경으로 가서 말렸다. 마귀가 군사를 내어 직산을 지키고, 조선도 도체찰사 이원익을 조발해 오령에서 충청도로 나가 적의 칼끝을 막게 하였다. 개가 몸소 왕경에 다다르니 인심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개가 참군 이응시를 불러 계책을 물으니, 응시가 조정의 주된 그림이 무엇인지 여쭈었다. 개가 「겉으로 싸우며 속으로 화친하고, 겉으로 무찌르며 속으로 어루만짐이니, 정부의 여덟 자 밀획을 새게 하지 말라」 하니, 응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쉽습니다. 왜가 배반한 것은 처분에 절망해서요, 감히 양원을 죽이지 않은 것도 오히려 처분을 바라서입니다. 다만 사람을 시켜 심유경이 죽지 않았다고 타이르면 물러갈 것입니다.」

협주 1

東阻烏嶺烏嶺,原作「鳥嶺」,據本書卷二四七劉綎傳、神宗實錄卷三一五萬曆二十五年十月辛酉條改。下同。

「동쪽은 오령·충주에 막히고」의 오령(烏嶺)은 원래 「조령(鳥嶺)」으로 되어 있는데, 본서 권247 유정전과 신종실록 만력 25년 10월 신유조에 따라 고쳤다. 아래도 같다.

8직산의 싸움

」因請使李大諫於行長,馮仲纓於清正,玠從之。九月,倭至漢江,楊鎬遣張貞明持惟敬手書往,責其動兵,有乖靜候處分之實。行長、正成亦尤清正輕舉,乃退屯井邑。麻貴遂報青山、稷山大捷。蕭應宮揭言:「倭以惟敬手書而退,青山、稷山幷未接戰,何得言功?」玠、鎬怒,遂劾應宮恇怯,不親解惟敬,並逮。

그리하여 이대간을 행장에게, 풍중영을 청정에게 사신 보내기를 청하니 개가 따랐다. 9월에 왜가 한강에 이르자, 양호가 장정명을 시켜 유경의 친필 글을 지니고 가서, 군사를 움직여 고요히 처분 기다리는 실상에 어긋남을 꾸짖게 하였다. 행장과 정성(마사나리)도 청정의 경거를 탓하니 이에 물러나 정읍에 진 쳤다. 마귀가 드디어 청산·직산의 대첩을 보고하였다. 소응궁이 게첩으로 「왜는 유경의 친필 글로 물러간 것이요 청산·직산은 접전한 적도 없는데 어찌 공을 말하는가」 하니, 개와 호가 노하여 드디어 응궁이 겁내어 유경을 몸소 압송하지 않았다고 탄핵해 아울러 잡아갔다.

9울산을 에워싸다

十一月,玠徵兵大集,帝發帑金犒軍,賜玠尚方劍,而以御史陳效監其軍。玠大會諸將,分三協。鎬同貴率左右協,自忠州、烏嶺向東安,趨慶州,專攻清正。使李大諫通行長,約勿往援。復遣中協屯宜城,東援慶州,西扼全羅。以餘兵會朝鮮合營,詐攻順天等處,以牽制行長東援。十二月,會慶州。麻貴遣黃應賜賄清正約和,而率大兵奄至其營。時倭屯蔚山,城依山險,中一江通釜寨,其陸路由彥陽通釜山。貴欲專攻蔚山,恐釜倭由彥陽來援,乃多張疑兵,又遣將遏其水路,遂進逼倭壘。遊擊擺寨以輕騎誘倭入伏,斬級四百餘,獲其勇將,乘勝拔兩柵。

11월에 개가 군사를 징발해 크게 모으니, 황제가 내탕금을 내어 군사를 호궤하고 개에게 상방검을 내리며 어사 진효로 그 군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개가 여러 장수를 크게 모아 세 협(協)으로 나누었다. 호가 귀와 함께 좌·우협을 거느리고 충주·오령에서 동안으로 향해 경주로 나아가 청정만을 오로지 치고, 이대간을 시켜 행장과 통해 구원하러 가지 말기를 약속하게 하였다. 다시 중협을 의성에 주둔시켜 동으로 경주를 돕고 서로 전라를 누르게 하였다. 남은 군사는 조선과 합영하여 순천 등지를 치는 체하여 행장이 동으로 구원함을 견제하였다. 12월에 경주에 모였다. 마귀가 황응사를 보내 청정에게 뇌물을 주고 화친을 약속하며 대군을 거느리고 갑자기 그 진영에 이르렀다. 그때 왜는 울산에 진 쳤는데 성이 산의 험함을 의지하고 가운데 강 하나가 부산 목책으로 통하며, 뭍길은 언양을 거쳐 부산과 통했다. 귀는 울산만을 오로지 치려 하되 부산 왜가 언양으로 와서 구원할까 두려워, 의병(疑兵)을 많이 벌이고 또 장수를 보내 물길을 막고 드디어 나아가 왜의 보루를 다그쳤다. 유격 파새가 가벼운 기병으로 왜를 꾀어 매복에 넣어 사백여 급을 베고 용장을 사로잡았으며 이긴 김에 두 목책을 빼앗았다.

협주 2

遣黃應賜賄清正約和黃應賜,明史稿傳一九四朝鮮傳、國榷卷七八頁四八0五作「黃應暘」。

「황응사를 보내 청정에게 뇌물을 주고 화친을 약속하며」의 황응사(黃應賜)는 명사고 조선전과 국각 권78에 「황응양(黃應暘)」으로 되어 있다.

時倭屯蔚山蔚山,原作「尉山」,據本書卷二五九楊鎬傳及卷二三八麻貴傳、神宗實錄卷三一七萬曆二十五年十二月丙戌條、國榷卷七七頁四八0四改。下同。

「그때 왜가 울산에 진 쳤다」의 울산(蔚山)은 원래 「위산(尉山)」으로 되어 있는데, 본서 양호전·마귀전과 신종실록 만력 25년 12월 병술조와 국각에 따라 고쳤다. 아래도 같다.

10도산의 참패

倭焚死者無算,遂奔島山,連築三寨。翌日,遊擊茅國器統浙兵先登,連破之,斬獲甚多,倭堅壁不出。島山視蔚山高,石城堅甚,我師仰攻多損傷。諸將乃議曰:「倭艱水道,餉難繼,第坐困之,清正可不戰縛也。」鎬等以為然,分兵圍十日夜,倭饑甚,偽約降緩攻。俄行長援兵大至,將繞出軍後。鎬不及下令,策馬西奔,諸軍皆潰。遂撤兵還王京,士卒物故者二萬。上聞之,震怒。乃罷鎬聽勘,以天津巡撫萬世德代。事詳鎬傳。

왜의 불타 죽은 자가 셀 수 없었고 드디어 도산(島山)으로 달아나 잇달아 세 목책을 쌓았다. 이튿날 유격 모국기가 절강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올라 잇달아 깨뜨려 베고 사로잡음이 몹시 많으니 왜가 벽을 굳히고 나오지 않았다. 도산은 울산보다 높고 돌성이 몹시 굳어 우리 군사가 우러러 치니 손상이 많았다. 여러 장수가 의논하기를 「왜는 물길이 군색해 군량을 잇대기 어려우니 다만 앉아서 곤하게 하면 청정을 싸우지 않고 묶을 수 있다」 하니 호 등이 그렇다 여겨, 군사를 나누어 열흘 밤낮을 에워쌌다. 왜가 몹시 굶주려 거짓으로 항복을 약속하며 공격을 늦추었다. 이윽고 행장의 구원병이 크게 이르러 군사 뒤로 돌아 나오려 하니, 호가 미처 영을 내리지 못하고 말을 채찍질해 서쪽으로 달아나매 여러 군이 다 무너졌다. 드디어 군사를 거두어 왕경으로 돌아오니 죽은 사졸이 이만이었다. 임금이 듣고 진노하였다. 이에 호를 파면해 심문을 기다리게 하고 천진순무 만세덕으로 대신하였다. 일은 호의 전에 자세하다.

11수륙 사로(四路)

二十六年正月,邢玠以前役乏水兵無功,乃益募江南水兵,議海運,為持久計。二月,都督陳璘以廣兵,劉綎以川兵,鄧子龍以浙、直兵先後至。玠分兵三協,為水陸四路,路置大將。中路如梅,東路貴,西路綎,水路璘,各守汛地,相機行剿。時倭亦分三窟。東路則清正,據蔚山。西路則行長,據粟林、曳橋,建砦數重。中路則石曼子,據泗州。而行長水師番休濟餉,往來如駛。我師約日並進,尋報遼陽警,李如松敗沒,詔如梅還赴之,中路以董一元代。

26년 정월에 형개가, 앞 싸움은 수군이 모자라 공이 없었다 하여 이에 강남 수군을 더 모집하고 해운을 의논해 지구책을 세웠다. 2월에 도독 진린이 광동 군사로, 유정이 사천 군사로, 등자룡이 절강·직례 군사로 앞뒤로 이르렀다. 개가 군사를 세 협으로 나누어 수륙 네 길로 삼고 길마다 대장을 두니, 중로는 이여매, 동로는 마귀, 서로는 유정, 수로는 진린이라, 저마다 지경을 지키며 기회를 보아 무찌르게 하였다. 그때 왜도 세 굴로 나뉘니, 동로는 청정이 울산에 웅거하고, 서로는 행장이 율림·예교에 웅거해 목책을 여러 겹 세우고, 중로는 석만자가 사주(사천)에 웅거했으며, 행장의 수군이 번갈아 쉬며 군량을 나르니 오감이 나는 듯하였다. 우리 군사가 날을 약속해 함께 나아가려는데, 마침 요양의 경보가 알려지고 이여송이 패해 죽으니, 조서로 여매를 돌려 달려가게 하고 중로는 동일원으로 대신하였다.

12정응태 사건

當應泰之劾鎬也,昖請回乾斷,崇勵鎮撫,以畢征討。上不許。又應泰曾以築城之議為鎬罪案,謂堅城得志,啟朝鮮異日之患,於是昖奏辨。帝曰:「連年用兵發餉,以爾國素効忠順故也,毋以人言自疑。」

정응태가 양호를 탄핵할 때 연이, 성상의 결단을 돌이켜 진무를 높이 격려해 정토를 마치게 해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응태가 일찍이 축성 의논을 호의 죄안으로 삼아, 굳은 성으로 뜻을 얻으면 조선의 뒷날 근심을 연다고 말했으므로 연이 아뢰어 변명하니, 황제가 「해마다 군사를 내고 군량을 낸 것은 너희 나라가 본디 충순했기 때문이니, 남의 말로 스스로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협주 1

又應泰曾以築城之議為鎬罪案應泰,原作「應」,脫「泰」字,據上文及神宗實錄卷三二七萬曆二十六年十月癸丑條補。「應泰」指丁應泰,不宜省。

「또 응태가 일찍이 축성 의논을 양호의 죄안으로 삼았다」의 응태(應泰)는 원래 「응(應)」으로만 되어 「태」 자가 빠졌는데, 앞글과 신종실록 만력 26년 10월 계축조에 따라 보충했다. 「응태」는 정응태를 가리키니 줄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