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 — 노량에서 광해군까지朝鮮 五
1노량 — 왜가 다 돌아가다
九月,將士分道進兵,劉綎進逼行長營,約行長為好會。翌日,攻城,斬首九十二。陳璘舟師協堵擊,毀倭船百餘。行長潛出千餘騎扼之,綎不利,退,璘亦棄舟走。麻貴至蔚山,頗有斬獲,倭偽退誘之。貴入空壘,伏兵起,遂敗。董一元進取晉州,乘勝渡江,連燬二寨。倭退保泗州老營,鏖戰下之,前逼新寨。寨三面臨江,一面通陸,引海為濠,海艘泊寨下千計,築金海、固城為左右翼。十月,董一元遣將四面攻城,用火器擊碎寨門,兵競前拔柵。忽營中火藥崩,烟焰漲天。倭乘勢衝擊,固城倭亦至,兵遂大潰,奔還晉州。帝聞,命斬二遊擊以徇,一元等各帶罪立功。是月,福建都御史金學曾報七月九日平秀吉死,各倭俱有歸志。十一月,清正發舟先走,麻貴遂入島山、酉浦,劉綎攻奪曳橋。石曼子引舟師救行長,陳璘邀擊敗之。諸倭揚帆盡歸。
9월에 장사들이 길을 나누어 진병하였다. 유정이 행장의 진영을 다그치고 행장과 좋게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이튿날 성을 쳐서 아흔두 급을 베고, 진린의 수군이 협공으로 막아 쳐서 왜선 백여 척을 부수었다. 행장이 몰래 기병 천여를 내어 막으니 정이 불리하여 물러나고 린도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마귀는 울산에 이르러 자못 베고 사로잡았는데, 왜가 거짓 퇴각으로 꾀니 귀가 빈 보루에 들어갔다가 복병이 일어나 드디어 패했다. 동일원은 나아가 진주를 취하고 이긴 김에 강을 건너 잇달아 두 목책을 불살랐다. 왜가 물러나 사주 노영(老營)을 지키니 힘껏 싸워 함락시키고 앞으로 새 목책을 다그쳤다. 목책은 세 면이 강에 임하고 한 면이 뭍에 통하며 바다를 끌어 해자로 삼았는데, 바다 배 천으로 헤아리는 것이 목책 아래 대고 금해·고성을 좌우 날개로 삼았다. 10월에 동일원이 장수들을 보내 사면으로 성을 치며 화기로 목책 문을 부수니 군사가 다투어 나아가 목책을 뽑았다. 그런데 문득 진영 안 화약이 터져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넘치니, 왜가 기세를 타고 부딪쳐 치고 고성의 왜도 이르니 군사가 드디어 크게 무너져 진주로 달아나 돌아왔다. 황제가 듣고 유격 둘을 베어 조리돌리게 하고 일원 등은 저마다 죄를 진 채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달에 복건도어사 김학증이 7월 9일에 평수길이 죽어 왜들이 다 돌아갈 뜻이 있다고 알렸다. 11월에 청정이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나니, 마귀가 드디어 도산·유포에 들어가고 유정이 예교를 쳐서 빼앗았다. 석만자가 수군을 이끌고 행장을 구하러 오니 진린이 맞아 쳐서 깨뜨렸다. 왜들이 돛을 올려 다 돌아갔다.
협주 1
麻貴遂入島山酉浦酉浦,本書卷二三八麻貴傳作「西浦」,疑是。
「마귀가 드디어 도산·유포에 들어가고」의 유포(酉浦)는 본서 권238 마귀전에 「서포(西浦)」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옳은 듯하다.
2칠 년 전쟁의 셈
自倭亂朝鮮七載,喪師數十萬,糜餉數百萬,中朝與屬國迄無勝算,至關白死而禍始息。
왜가 조선을 어지럽힌 일곱 해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요 쓴 군량이 수백만인데, 중조와 속국이 끝내 이길 셈이 없다가 관백이 죽어서야 화가 비로소 그쳤다.
3평왜 조서
二十七年閏四月,以平倭詔告天下,又敕諭昖曰:「倭奴平秀吉肆為不道,蹂躪爾邦。朕念王世篤忠貞,深用憫惻。七年之中,日以此賊為事。始行薄伐,繼示包容,終加嚴討。蓋不殺乃天之心,而用兵非予得已。安疆靖亂,宜取蕩平。神惡凶盈,陰殲魁首,大師乘之,追奔逐北,鯨鯢盡戮,海隅載清,捷書來聞,憂勞始釋。惟王雖還舊物,實同新造,振凋起敝,為力倍艱。倭雖遁歸,族類尚在。茲命邢玠振旅歸京,量留萬世德等分布戍守。王宜臥薪嘗膽,無忘前恥,惟忠惟孝,纘紹前休。」
27년 윤4월에 평왜(平倭) 조서를 천하에 알리고, 또 연에게 칙유하였다. 「왜노 평수길이 함부로 무도한 짓을 하여 너희 나라를 짓밟았다. 짐은 왕이 대대로 충정을 도타이 함을 생각하여 깊이 가엾이 여겼다. 일곱 해 동안 날마다 이 도적을 일삼아, 처음에 가볍게 치고 이어 포용을 보이고 끝내 엄한 토벌을 더하였다. 죽이지 않음은 하늘의 마음이요 용병은 내가 부득이한 것이었다. 강토를 편안히 하고 어지러움을 안정시키려면 소탕을 취해야 하는 법이라, 신이 흉악한 우두머리를 은밀히 죽이니 대군이 이를 타고 달아나는 것을 쫓아 고래 같은 무리를 다 죽이니, 바다 모퉁이가 맑아지고 승첩의 글이 이르러 근심과 수고를 비로소 놓았다. 왕은 옛 것을 되찾았다 하나 실은 새로 만든 것과 같으니, 시듦을 일으키고 해짐을 세움에 힘이 갑절로 어렵다. 왜는 도망해 돌아갔으나 족류가 아직 있다. 이에 형개에게 군사를 정돈해 서울로 돌아오게 하고 만세덕 등을 헤아려 남겨 나누어 지키게 한다. 왕은 마땅히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며 지난 부끄러움을 잊지 말고, 충성하고 효도하여 앞의 아름다움을 이으라.」
협주 1
二十七年閏四月閏四月,原作「四月」,脫「閏」字,據本書卷二一神宗紀、神宗實錄卷三三四萬曆二十七年閏四月丙戌條補。
「27년 윤4월」의 윤4월은 원래 「4월」로 되어 「윤」 자가 빠졌는데, 본서 권21 신종기와 신종실록 만력 27년 윤4월 병술조에 따라 보충했다.
4선후책 열 가지
五月,玠條陳東征善後事宜十事。一,留戍兵,馬步水陸共計三萬四千有奇,馬三千匹。一,定月餉,每年計銀九十一萬八千有奇。一,定本色,合用米豆,分派遼東、天津、山東等處,每年十三萬石。一,留中路海防道。一,裁餉司。一,重將領。一,添巡捕。一,分汛地。一,議操練。一,責成本國。廷臣議:「數年疲耗,今始息肩,自宜內固根本,不當更為繁費。況彼國兵荒之後,不獨苦倭之擾,兼苦我兵。故今日善後事宜,仍當商之彼國,先量彼餉之贏絀,始可酌我兵之去留。至於增買馬匹,添補標兵,創立巡捕,及至管餉府佐,悉宜停止。」帝命督撫會同國王酌奏。八月,昖獻方物,助大工,褒賞如例。十月,請留水兵八千,以資戍守。其撤回官兵,駐劄遼陽備警。二十八年四月請將義州等倉遺下米豆運回遼陽。戶部議:「輸運維艱,莫若徑與彼國,振其彫敝,以昭皇仁。」詔曰:「可。」
5월에 개가 동정(東征) 선후 사의 열 가지를 조목으로 아뢰었다. 하나, 수자리 군사를 남기니 마보·수륙 합쳐 삼만 사천 남짓에 말 삼천 필이다. 하나, 월향을 정하니 해마다 은 구십일만 팔천 남짓이다. 하나, 본색(현물)을 정하니 쓸 쌀과 콩을 요동·천진·산동 등지에 나누어 해마다 십삼만 석이다. 하나, 중로 해방도를 남긴다. 하나, 향사(餉司)를 줄인다. 하나, 장령을 무겁게 한다. 하나, 순포를 더 둔다. 하나, 지경을 나눈다. 하나, 조련을 의논한다. 하나, 본국에 책임 지운다. 조정 의논은 「여러 해 지치고 소모되어 이제 겨우 어깨를 쉬니 안으로 근본을 굳힘이 마땅하지 다시 큰 비용을 쓸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 나라는 병란과 흉년 뒤라 왜의 시달림뿐 아니라 우리 군사도 괴로워하니, 오늘의 선후책은 마땅히 그 나라와 상의하여 먼저 저들 군량의 남고 모자람을 헤아린 뒤에 우리 군사의 거취를 짐작해야 합니다. 말을 더 사고 표병을 더 두고 순포를 새로 두고 향사 관원을 두는 일은 다 그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황제가 독무에게 국왕과 만나 짐작해 아뢰라 명하였다. 8월에 연이 방물을 바치고 큰 공사를 도우니 전례대로 표창해 상 주었다. 10월에 수군 팔천을 남겨 수자리를 돕고 거두어 돌아가는 관병은 요양에 주둔해 경비하기를 청하였다. 28년 4월에 의주 등 창고에 남은 쌀과 콩을 요양으로 날라 가기를 청하니, 호부가 「나르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그 나라에 주어 시듦을 건져 황제의 어짊을 밝히는 것만 못합니다」 의논하매 조서로 「가하다」 하였다.
협주 1
留中路海防道中路,原作「中都」,據明史稿傳一九四朝鮮傳、神宗實錄卷三三五萬曆二十七年五月壬戌條改。
「중로 해방도를 남긴다」의 중로(中路)는 원래 「중도(中都)」로 되어 있는데, 명사고 조선전과 신종실록 만력 27년 5월 임술조에 따라 고쳤다.
5경리와 독신의 일곱 조목
二十九年二月,兵部覆奏經督條陳七事:「一,練兵士。麗人鷙悍耐寒苦,而長衫大袖,訓練無方,宜以束伍之法教之。一,守衝要。朝鮮三面距海,釜山與對馬相望,巨濟次之,宜各守以重兵,幷蔚山、開山等處皆宜戍守。一,修險隘。王京北倚叢山,南環滄海。忠州左右烏、竹二嶺,羊腸繞曲,有一夫當關之險。今營壘遺址尚存,亟宜修葺。一,建城池。朝鮮八道,十九無城。平壤西北鴨、浿二江,俱南通海。倘倭別遣一旅占據平壤,則王京聲援斷絕,皆應修築屯聚。一,造器械。倭戰便陸不便海,以船制重大,不利攻擊。今准福唬造百十艘為奇兵,幷添造神機百子火箭。一,訪異材。朝鮮貴世官,賤世役,一切禁錮,往往走倭走敵,為本國患,宜破格搜採。一,修內治。國家東南臨海,以登、旅為門戶,鎮江為咽喉,應援之兵,不宜盡撤。我自固,亦所以固朝鮮也。」詔朝鮮刻勵以行。九月,奏所頒誥命冕服遭變淪失,祈補給,從之。
29년 2월에 병부가 경리와 독신이 조목으로 아뢴 일곱 가지를 복주하였다. 「하나, 군사를 단련한다. 고려 사람은 사납고 추위와 괴로움을 견디나 긴 적삼 큰 소매로 훈련에 방도가 없으니, 마땅히 속오법으로 가르쳐야 한다. 하나, 요충을 지킨다. 조선은 세 면이 바다에 닿고 부산은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며 거제가 그다음이니 저마다 중병으로 지키고, 울산·개산 등지도 다 수자리 둠이 마땅하다. 하나, 험애를 닦는다. 왕경은 북으로 뭇 산을 지고 남으로 푸른 바다를 둘렀으며, 충주 좌우 오·죽 두 고개는 양의 창자처럼 굽어 한 사람이 관문을 막을 험함이라, 이제 옛 보루 터가 남았으니 빨리 고쳐 쌓아야 한다. 하나, 성지를 세운다. 조선 팔도에 열에 아홉은 성이 없다. 평양 서북 압록·패수 두 강이 다 남으로 바다에 통하니, 왜가 따로 한 부대를 보내 평양을 차지하면 왕경의 성원이 끊긴다. 다 닦아 쌓고 모여 지켜야 한다. 하나, 기계를 만든다. 왜는 뭍싸움에 익고 바다싸움에 서투니 배가 무겁고 커서 치기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이제 복선·호선 백십 척을 만들어 기병(奇兵)으로 삼고 아울러 신기백자화전을 더 만들기를 허락한다. 하나, 남다른 인재를 찾는다. 조선은 대대로 벼슬하는 이를 귀히 여기고 대대로 부리는 이를 천히 여겨 일체 금고하니, 이따금 왜에게 가고 적에게 가서 본국의 근심이 되니 격식을 깨고 거두어 뽑음이 마땅하다. 하나, 안 다스림을 닦는다. 국가는 동남이 바다에 임하니 등주·여순을 문호로 삼고 진강을 목구멍으로 삼아 응원하는 군사를 다 거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스스로 굳으면 또한 조선을 굳히는 길이다.」 조서로 조선에 힘써 행하게 하였다. 9월에, 내려 준 고명과 면복을 변란에 잃었다고 아뢰며 다시 주기를 비니 따랐다.
협주 2
倭戰便陸不便海原作「倭便戰陸不便海」,據神宗實錄卷三五六萬曆二十九年二月辛卯條改。
「왜는 뭍싸움에 익고 바다싸움에 서투니」는 원래 「왜편전륙불편해」로 되어 있는데, 신종실록 만력 29년 2월 신묘조에 따라 고쳤다.
並添造神機百子火箭火,原作「大」,據神宗實錄卷三五六萬曆二十九年二月辛卯條改。
「아울러 신기백자화전을 더 만든다」의 화(火)는 원래 「대(大)」로 되어 있는데, 신종실록 만력 29년 2월 신묘조에 따라 고쳤다.
6대마도의 강화 요구
時倭國內亂,對馬島主平義智悉遣降人還朝鮮,遺書乞和,且揚言秀吉將家康將輸糧數十萬石為軍興資,以脅朝鮮。朝鮮與對馬島一水相望,島地不產五穀,資米於朝鮮。兵興後,絕開市,因百計脅款。秀吉死,我軍盡撤,朝鮮畏倭滋甚。欲與倭通款,又懼開罪中國。十二月,昖以島倭求款來請命。兵部以事難遙度,令總督世德酌議,詔可。三十年十一月,昖言倭使頻來要挾和款,兵端漸露,乞選將率兵,督同本國訓練修防。帝曰:「曾留將士教習,成法具在,無容再遣。」因命其使臣齎敕誡勵。三十三年九月,昖復請封琿為世子,禮部仍執立長之議。三十五年四月,昖以家康求和來告,兵部議聽王自計而已。由是和款不絕,後三年始畫開市之事。
그때 왜국이 안에서 어지러워, 대마도주 평의지가 항복한 사람들을 다 조선에 돌려보내고 글을 보내 화친을 빌며, 수길의 대장 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군량 수십만 석을 실어 군흥의 밑천으로 삼으리라 소리 내어 조선을 위협하였다. 조선은 대마도와 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데, 섬 땅에 오곡이 나지 않아 조선에서 쌀을 대었다. 군사가 일어난 뒤 개시(開市)가 끊기니 백 가지 꾀로 강화를 협박한 것이다. 수길이 죽고 우리 군사가 다 거두자 조선이 왜를 더욱 두려워하여, 왜와 통관(通款)하고자 하면서도 중국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였다. 12월에 연이 섬 왜가 강화를 구한다 하여 와서 명을 청하니, 병부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라 하여 총독 세덕에게 짐작해 의논하게 하매 조서로 허락하였다. 30년 11월에 연이, 왜사가 자주 와서 화관(和款)을 요협하니 병란의 실마리가 점점 드러난다 하여, 장수와 군사를 뽑아 본국을 데리고 훈련하고 방비를 닦게 해 주기를 비니, 황제가 「일찍이 장사를 남겨 교습시켜 이룬 법이 그대로 있으니 다시 보낼 것 없다」 하고, 그 사신에게 칙을 지니고 가서 경계하고 격려하게 하였다. 33년 9월에 연이 다시 혼을 세자로 봉하기를 청했으나 예부가 여전히 맏이 세우는 의논을 고집하였다. 35년 4월에 연이 가강이 화친을 구함을 알리니, 병부가 왕이 스스로 헤아리게 하자고 의논할 뿐이었다. 이로부터 화관이 끊이지 않아 세 해 뒤에 비로소 개시의 일을 확정하였다.
7광해군의 즉위
三十六年,昖卒。光海君琿自稱署國事,遣陪臣來訃,且請諡。帝惡其擅,不允,令該國臣民公議以聞。時我大清兵征服各部,漸近朝鮮。兵部議令該王大修武備,整飭邊防,幷請敕遼左督撫鎮臣,遣官宣達毋相侵犯之意。從之。十月,封琿為國王,從其臣民請也。三十七年二月,諡昖曰昭敬,遣官賜琿及妃柳氏誥命。
36년에 연이 죽었다. 광해군 혼이 스스로 서국사(署國事)라 일컬으며 배신을 보내 부고하고 아울러 시호를 청하였다. 황제가 그 제멋대로임을 미워하여 윤허하지 않고 그 나라 신민이 공론으로 아뢰게 하였다. 그때 우리 대청(大淸) 군사가 각부를 정복하며 점점 조선에 가까워지니, 병부가 그 왕에게 무비를 크게 닦고 변방을 정돈하게 하고, 아울러 요좌 독무·진신에게 칙해 관원을 보내 서로 침범하지 말자는 뜻을 전하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10월에 혼을 국왕에 봉하니 그 신민의 청을 따른 것이다. 37년 2월에 연에게 소경(昭敬)이라 시호하고 관원을 보내 혼과 비 유씨에게 고명을 내렸다.
8부산 유언비어
初,朝鮮失守,賴中國力得復,倭棄釜山遁。然陰謀啟疆,為患不已。於是海上流言倭圖釜山,朝鮮與之通。四十一年九月,總兵官楊宗業以聞。琿疏辨,詔慰解之。
처음 조선이 지킴을 잃었다가 중국의 힘에 힘입어 회복되고 왜는 부산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몰래 강토를 열 꾀를 품어 근심이 그치지 않으니, 이에 바다 위에 왜가 부산을 노리는데 조선이 그와 통한다는 유언(流言)이 돌았다. 41년 9월에 총병관 양종업이 아뢰니 혼이 소를 올려 변명하매 조서로 위로해 풀어 주었다.
9생모 추봉
四十二年四月,奏請追封生母金氏。禮部按會典,嫡母受封而生母先亡者得追贈,乃命封為國王次妃。四十三年十一月,表賀冬至,因奏買回吾學編、弇山堂別集等書,載本國事與會典乖錯,乞改正。禮部言:「野史不足憑。今所請恥與逆黨同譏,宜憫其誠,宣付史館。」報可。初,琿為生母已得封,至是復祈給冠服。禮臣以金氏側室,禮有隆殺,執不可。四十五年正月,琿請至再,帝以琿屢次懇陳,勉從之。
42년 4월에 낳은 어머니 김씨를 추봉하기를 아뢰었다. 예부가 회전을 살피니 적모가 봉함을 받았고 생모가 먼저 죽은 경우 추증할 수 있으므로, 이에 국왕 차비(次妃)로 봉하도록 명하였다. 43년 11월에 동지를 표로 하례하며, 사 가지고 돌아간 오학편·엄산당별집 등 책에 본국 일이 회전과 어긋나게 실렸으니 바로잡아 주기를 아뢰었다. 예부가 「야사는 근거 삼기에 족하지 않습니다. 이번 청은 역당과 같이 기롱됨을 부끄러워함이니 그 정성을 딱하게 여겨 사관에 내려 주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처음 혼이 생모를 위해 봉함을 얻고 이에 이르러 다시 관복을 청하니, 예부 신하가 김씨는 측실이라 예에 높낮이가 있다 하여 불가를 고집하였다. 45년 정월에 혼이 두 번 세 번 청하니 황제가 여러 번 간곡히 아룀을 보아 애써 따랐다.
10심하 전역과 광해군의 변명
四十七年,楊鎬督馬林、杜松、劉綎等出師,為我大清兵所敗。朝鮮助戰兵將,或降或戰死。琿告急,詔加優恤。十一月,兵部覆:朝鮮入貢之道,宜添兵防守。詔鎮江等處設兵將,令經略熊廷弼調委。四十八年正月,琿奏:「敵兵八月中攻破北關,金台吉自焚,白羊出降。鐵嶺之役,蒙古宰賽亦為所滅。聞其國謀議以朝鮮、北關、宰賽皆助兵南朝,今北關、宰賽皆滅,不可使朝鮮獨存。又聞設兵牛毛寨、萬遮嶺,欲略寬奠、鎮江等處。寬奠、鎮江與昌城、義州諸堡隔水相望,孤危非常。敵若從靉陽境上鴉鶻關取路遶出鳳凰城裏,一日長軀,寬鎮、昌城俱莫自保。內而遼左八站,外而東江一城,彼此隔斷,聲援阻絕,可為寒心。望速調大兵,共為掎角,以固邊防。」時遼鎮塘報稱朝鮮與大清講和,朝議遂謂琿陽衡陰順,宜遣官宣諭,或命將監護,其說紛挐。琿疏辨:「二百年忠誠事大,死生一節。」詞極剴摯。禮、兵二部請降敕令曉諭,以安其心。帝是其議,然敕令陪臣往,不遣官也。
47년에 양호가 마림·두송·유정 등을 독려해 군사를 냈다가 우리 대청 군사에게 패하였다. 조선이 싸움을 도운 군사와 장수는 혹 항복하고 혹 싸우다 죽었다. 혼이 위급을 알리니 조서로 우휼을 더하였다. 11월에 병부가, 조선 조공길에 군사를 더해 지킴이 마땅하다고 복주하니, 조서로 진강 등지에 군사와 장수를 두고 경략 웅정필에게 조발해 맡기게 하였다. 48년 정월에 혼이 아뢰었다. 「적병이 팔월에 북관을 쳐 깨뜨려 금태길은 스스로 불타 죽고 백양골은 나와 항복했으며, 철령 싸움에는 몽고 재새도 멸망당했습니다. 들으니 그 나라의 꾀가, 조선과 북관과 재새가 다 남조(명)를 도왔는데 이제 북관과 재새가 다 멸했으니 조선만 남겨 둘 수 없다 한답니다. 또 우모채와 만차령에 군사를 두어 관전·진강 등지를 노리려 한다 합니다. 관전·진강은 창성·의주 여러 보와 물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니 외롭고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적이 애양 지경 아골관에서 길을 잡아 봉황성 안쪽으로 돌아 나와 하루에 길게 몰면 관전·진강과 창성이 다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안으로 요좌 팔참과 밖으로 동강 한 성이 피차 끊겨 성원이 막히니 한심하다 할 만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대군을 조발해 함께 기각을 이루어 변방을 굳히소서.」 그때 요진의 당보(塘報)가 조선이 대청과 강화한다고 일컬으니, 조정 의논이 드디어 혼이 겉으로 버티고 속으로 따른다 하여, 관원을 보내 선유하자느니 장수에게 명해 감호하자느니 그 말이 어지러웠다. 혼이 소를 올려 「이백 년 충성으로 사대하여 죽으나 사나 한 절개」라고 변명하니 말이 지극히 간절하였다. 예부·병부가 칙을 내려 타일러 그 마음을 편안케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그 의논을 옳다 하되 배신에게 칙을 가져가게 하고 관원은 보내지 않았다.
11모문룡과 가도
天啟元年八月,改朝鮮貢道,自海至登州,直達京師。時毛文龍以總兵鎮皮島,招集逃民為兵,而仰給於朝鮮。十一月,琿奏力難餽餉,乞循萬曆東征例,發運山東粟,從之。
천계 원년 8월에 조선 공로(貢路)를 고쳐 바다로 등주에 이르러 곧장 서울에 닿게 하였다. 그때 모문룡이 총병으로 피도(가도)를 지키며 도망한 백성을 모아 군사로 삼고 조선에 기대어 먹으니, 11월에 혼이 군량 대기 힘겨움을 아뢰고 만력 동정의 전례를 따라 산동 곡식을 날라 주기를 비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