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1卷一
1우리 동방의 햇수가 중국과 같다
嘗考。自唐堯元年甲辰。至洪武元年戊申。摠三千七百八十五年。自檀君元年戊辰。至我太祖元年壬申。亦三千七百八十五年。吾東方歷年之數。大槩與中國相同。帝堯作而檀君興。周武立而箕子封。漢定天下而衛滿來平壤。宋太祖將興而高麗太祖已起。我太祖開國亦與太祖高皇帝同時。
일찍이 상고해 보니 당나라 요임금 원년 갑진에서 홍무 원년 무신까지 모두 삼천칠백팔십오 년이요, 단군 원년 무진에서 조선 태조 원년 임신까지도 삼천칠백팔십오 년이다. 동방이 지나온 햇수가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요임금이 일어나자 단군이 일어났고, 주나라 무왕이 서자 기자가 봉함을 받았으며, 한나라가 천하를 정하자 위만이 평양에 왔고, 송 태조가 일어나려 하자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조선 태조가 나라를 여신 것도 명 태조 고황제와 같은 때다.
2단군이 천 년을 살았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古記云。檀君與堯同日而立。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享年一千四十有八。當時文籍不傳。其眞僞不得而考。至今傳襲。以古記爲說。居正以爲當堯之時。人文昭宣。至于夏商。世漸澆薄。人君享國久長者不過四五十年。人壽。上壽白年。中壽六七十年。下壽四五十年。安有檀君獨壽千百年以享一國乎。知其說之誣也。又云。檀君生子扶婁。是爲東扶餘王。至禹會諸侯於塗山。檀君遣扶婁朝焉。其說無據。若檀君享國久長。扶婁往會塗山。則雖我國文籍不備。中國之書豈無一語及之乎。檀氏相傳享國之數。千四十八年者。無疑矣。權文忠公近詩曰。聞說鴻荒日。檀君降樹邊。世傳不知幾。歷年曾過千。蓋言其傳世歷年之久也。
『고기(古記)』에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날에 섰고 우·하를 지나 상나라 무정 팔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누린 해가 일천사십팔 년이다」 하였다. 당시의 문적이 전하지 않아 그 참과 거짓을 상고할 수 없는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며 『고기』를 말의 근거로 삼는다. 거정은 이렇게 생각한다. 요임금 때는 인문이 밝게 펴졌으나 하·상에 이르러 세상이 점점 야박해졌다. 임금이 나라를 누린 것이 길어야 사오십 년을 넘지 않고, 사람의 수명은 상수가 백 년, 중수가 육칠십 년, 하수가 사오십 년이다. 어찌 단군만 홀로 천백 년을 살며 한 나라를 누렸겠는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또 「단군이 아들 부루를 낳으니 이가 동부여 왕이 되었고, 우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를 모을 때 단군이 부루를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 하나 그 말은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나라를 오래 누리고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갔다면, 비록 우리나라 문적이 갖추어지지 않았더라도 중국의 책에 어찌 한마디도 미친 것이 없겠는가. 단씨가 서로 전하여 나라를 누린 햇수가 일천사십팔 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문충공 권근의 시에 「듣건대 아득한 옛날, 단군이 나무 곁에 내렸다네. 대를 전한 것이 몇인지 모르나, 지나온 해는 일찍이 천을 넘었네」 하였으니, 대개 그 대를 전하고 해를 지낸 것이 오램을 말한 것이다.
3기자가 평양에 도읍한 팔백칠십팔 년
箕子封朝鮮。在周武己卯。至後王準。漢高祖丙午。衛滿侵之。浮海而南。其都平壤者八百七十八年也。準移都金馬郡。是謂馬韓。歷四郡二府之時。至百濟溫祚王二十六年戊辰而亡。亦百四十餘年矣。金富軾三國史。但書百濟王襲馬韓取之。不明言箕氏世係。當時亦必無可考者矣。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은 주나라 무왕 기묘년이다. 뒤에 준왕에 이르러 한 고조 병오년에 위만이 침노하니 바다에 떠서 남쪽으로 갔다. 평양에 도읍한 것이 팔백칠십팔 년이다. 준왕이 금마군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를 마한이라 한다. 사군과 이부의 때를 지나 백제 온조왕 이십육년 무진에 망하였으니 또한 백사십여 년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다만 백제 왕이 마한을 습격하여 취하였다고만 적고 기씨의 세계를 밝혀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반드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4함허자의 말 가운데 근거 없는 것
按天運紹統。涵虛子曰。朝鮮在安東國之東。古肅愼氏之地。武王封箕子爲諸侯。以奉殷祀。爲中國藩邦。自周亡至後漢千餘年。爲公孫康所簒。箕子之統緖失傳焉。又云。箕子率中國五千人入朝鮮。其詩書禮樂醫巫陰陽卜筮之流。百工技藝。皆從而往焉。故曰半萬殷人渡遼水者是也。今考公孫康所簒者無據。其曰半萬殷人渡遼水者。又不知出於何書也。
『천운소통(天運紹統)』을 살피니 함허자가 말하기를 「조선은 안동국의 동쪽에 있으니 옛 숙신씨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로 삼아 은나라 제사를 받들게 하고 중국의 번방으로 삼았다. 주나라가 망한 뒤 후한까지 천여 년에 공손강에게 찬탈당하여 기자의 계통이 전함을 잃었다」 하였다. 또 「기자가 중국 사람 오천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가니 시·서·예·악과 의술·무당·음양·복서의 무리와 온갖 장인의 기예가 다 따라갔다. 그러므로 반만의 은나라 사람이 요수를 건넜다 한다」 하였다. 이제 상고하니 공손강에게 찬탈당하였다는 것은 근거가 없고, 반만의 은나라 사람이 요수를 건넜다는 말도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5기자가 팔조의 가르침으로 교화한 일
涵虛子又曰。箕子至朝鮮。言語不能通。譯而亦知之。敎以詩書。使知中國禮樂之制。父子君臣之道始行。五常之禮始備。敎以百工技藝。醫巫陰陽卜筮之術始有焉。以禮義田蠶。制八條之敎而化之。逾年而民自化。相殺者以財償。相傷者以穀償。盜者男沒爲奴。女子爲婢。不三年人皆向化。崇尙信義而篤儒術。釀成中國之風。可謂聖化。敎以勿尙兵鬪。謂一日之亂。十年不定生民塗炭。不能安其業。故以德服强暴。隣國皆慕其義而相親之。爲中國之蕃邦。故歷代親信於中國。受封爵。朝貢不絶。禮義之道不缺。衣冠制度。悉同乎中國各代之制。故曰。詩書禮樂之邦仁義之國也。而箕子始之也。居正以爲。涵虛子論與漢書畧同。深悉我東國風俗。歷代諸史及國朝渾一誌所論。紕繆無據。皆出於所聞之誤耳。
함허자가 또 말하기를 「기자가 조선에 이르니 말이 통하지 않아 통역하여 알았다. 시와 서를 가르쳐 중국의 예악 제도를 알게 하니 아비와 아들, 임금과 신하의 도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의 예가 비로소 갖추어졌다. 온갖 장인의 기예를 가르치니 의술·무당·음양·복서의 술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예의와 밭 갈고 누에 치는 것으로 팔조의 가르침을 지어 교화하니 한 해가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서로 죽인 자는 재물로 갚고, 서로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몰수하여 종으로 삼고 여자는 계집종으로 삼았다. 삼 년이 못 되어 사람이 다 교화되어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을 도타이 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루었으니 성인의 교화라 할 만하다. 군사와 싸움을 숭상하지 말라 가르치며 이르기를 『하루의 난리가 십 년이 되어도 안정되지 않아 백성이 도탄에 빠져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덕으로 사납고 강한 자를 복종시키니 이웃 나라가 다 그 의를 사모하여 서로 친하였다. 중국의 번방이 되었으므로 역대로 중국과 친하고 믿어 봉작을 받고 조공이 끊이지 않았으며 예의의 도가 이지러지지 않았고 의관 제도가 다 중국 역대의 제도와 같았다. 그러므로 시·서·예·악의 나라요 인의의 나라라 하니 기자가 그것을 시작하였다」 하였다. 거정은 이렇게 생각한다. 함허자의 논이 『한서』와 대략 같아 우리 동국의 풍속을 깊이 알았다. 역대 여러 사서와 국조의 『혼일지』에서 논한 것은 그릇되고 근거가 없으니 다 들은 것이 잘못된 데서 나왔을 뿐이다.
6우리 분야가 연나라와 같다 하신 세종의 근심
我國分野。古人擬以燕都。己巳年間。彗星出燕分。日官奏云。於本國不干。世宗深以爲憂曰。我國同燕之分。安得爲不干乎。己巳秋正統皇帝陷北庭我世宗上賓。與燕同分之說。庶幾近之。
조선의 분야를 옛사람은 연나라 도읍에 견주었다. 기사년 사이에 살별이 연의 분야에 나타나니 일관이 아뢰기를 「본국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다. 세종께서 깊이 근심하며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연과 분야가 같은데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셨다. 기사년 가을에 정통 황제가 북쪽 뜰에서 사로잡히고 세종께서 승하하셨으니, 연과 분야가 같다는 말이 거의 가까운 듯하다.
7한양의 명당이 어디인가
沸流溫祚登負兒岳。相可居之地。沸流都彌鄒忽。溫祚都慰禮城。後溫祚移都南漢山城。卽今廣州。又移都北漢山城。卽今漢陽。其所卜明堂。未知何地也。以漢陽爲李氏都者。見於道詵圖讖。是以高麗建南京于漢陽。種李樹擇李姓以尹。王亦歲一巡幸。埋龍鳳帳壓之。居正嘗考高麗史。漢陽明堂。但書曰壬坐丙向之原。不明言其地。今考景福昌德兩宮正殿。皆壬坐丙向。臆意高麗所卜。要不外此兩宮之基耳。近有術士崔揚善。以承文院古基爲正明堂。或者又以宗廟樂天亭爲大地者。皆淺見無稽之說也。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보아,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뒤에 온조가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곧 지금의 광주요, 또 북한산성으로 옮기니 곧 지금의 한양이다. 그 점쳐 잡은 명당이 어느 땅인지는 알 수 없다. 한양을 이씨의 도읍이라 한 것은 도선의 도참에 보인다. 그러므로 고려가 한양에 남경을 세우고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 성을 가려 부윤으로 삼았으며, 왕도 해마다 한 번 순행하고 용봉의 장막을 묻어 눌렀다. 거정이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하니 한양 명당을 다만 「임좌병향의 언덕」이라고만 적고 그 땅을 밝혀 말하지 않았다. 이제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의 정전을 상고하니 다 임좌병향이다. 짐작건대 고려가 점쳐 잡은 곳은 요컨대 이 두 궁의 터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근래 술사 최양선이 승문원 옛터를 바른 명당이라 하고, 어떤 이는 또 종묘의 낙천정을 큰 땅이라 하나 다 얕은 견해요 근거 없는 말이다.
8도선의 태어남과 갈매기 숲
道詵百濟人。初詵母爲處子。出遊川澤上。得一美大瓜啖之。忽覺有娠。及生兒。父母以爲不祥。而棄之川上。時方冱寒。羣鷗數千來集。上下承覆之。不死十數日。父母異以收養之。及長出家。入山修鍊。有天仙下降。授天文地理陰陽之祕。又入唐。學一行法。世傳圖讖。皆詵所著也。近得唐本星曜一帙。有曰高麗國師賦。而議論精微。非詵不能爲也。然其所與議論者耶律楚財。時之相距甚遠。是可疑也。安知高麗國師者。密傳詵術。不傳於東方而傳於中國乎。今靈巖縣道岬寺。有詵碑。亦有鷗林。
도선은 백제 사람이다. 처음에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로 시내와 못 가에 나가 놀다가 크고 좋은 오이 하나를 얻어 먹고 문득 아이 밴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자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시냇가에 버렸다. 때는 바야흐로 몹시 추웠는데 갈매기 수천 마리가 모여들어 위아래로 받아 덮어 주어 십수 일을 죽지 않았다. 부모가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자라서 집을 나가 산에 들어가 수련하니 하늘 신선이 내려와 천문·지리·음양의 비결을 주었다. 또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법을 배웠다. 세상에 전하는 도참이 다 도선이 지은 것이다. 근래 당나라 본 『성요(星曜)』 한 질을 얻으니 「고려국사부」라 한 것이 있는데 의논이 정밀하고 미묘하여 도선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의논한 이가 야율초재이니 시대의 거리가 매우 멀어 이것이 의심스럽다. 고려 국사라는 이가 도선의 술을 몰래 전하여 동방에 전하지 않고 중국에 전한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지금 영암현 도갑사에 도선의 비가 있고 또 갈매기 숲이 있다.
9우리 동국의 필법은 김생이 제일이다
我東國筆法。金生爲第一。姚學士克一僧坦然靈業亞之。皆法右軍。李奎報嘗評論。以崔忠獻爲神品第一。坦然爲第二。柳紳爲第三。阿附權貴非公論也。自元以來。學字者皆法趙孟頫焉。先生平生手跡。遍滿四海。其流傳東國我所得見者。不下數百本。墨跡如新。所不得閱者不知其幾。散在天下者又不知其幾。自趙距今尙遠。吾東方在一偏隅。得見趙跡猶多。自唐距晉亦不遠。文皇以天下之大。求右軍眞跡。遣蕭異。間關崎區。勞然後得何耶。己巳年間倪學士謙。奉使來曰。趙公筆法。中國罕見。蓋嘆我國之多有也。竊謂。高麗忠宣王入元朝。構萬卷堂。日與當世名儒六七人。從容談論。趙公其一也。我國文儒如李先生齊賢。侍從亦多。王之東還。文籍書畫。馱載萬籤。趙之手跡滿於東方。蓋由是也。吾東方人得趙公筆法精神者。杏村李嵒一人而已。
우리 동국의 필법은 김생이 제일이요 학사 요극일과 승려 탄연·영업이 그다음인데 다 왕희지를 본받았다. 이규보가 일찍이 평론하여 최충헌을 신품 제일로, 탄연을 제이로, 유신을 제삼으로 삼았으나 권세 있는 이에게 아부한 것이지 공정한 논의가 아니다. 원나라 이래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를 본받는다. 선생의 평생 손자취가 사해에 두루 가득하다. 동국에 흘러 전하여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을 내려가지 않고 먹 자취가 새것 같다.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모르고 천하에 흩어져 있는 것이 또 얼마인지 모른다. 조맹부에서 지금까지가 오히려 먼데 우리 동방은 한 모퉁이에 있으면서도 조씨의 자취를 본 것이 오히려 많다. 당나라에서 진나라까지도 멀지 않은데 문황제가 천하의 큼으로 왕희지의 진적을 구하며 소익을 보내 험한 길을 애써 수고한 뒤에야 얻은 것은 어째서인가. 기사년 사이에 학사 예겸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조공의 필법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 하였으니 대개 우리나라에 많이 있음을 감탄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만권당을 짓고 날마다 당대의 이름난 선비 예닐곱 사람과 조용히 담론하였는데 조공이 그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문유로 이제현 선생 같은 이가 모신 것도 많았다. 왕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 문적과 서화를 만 축이나 실었으니 조씨의 손자취가 동방에 가득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우리 동방 사람으로 조공의 필법과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 이암 한 사람뿐이다.
10두 중국 사람이 왕희지의 글씨인 줄 안 김생의 글씨
金生新羅元聖王時人。以能書聞。宋崇寧中。高麗學士洪瓘入宋。翰林待詔楊球李革奉帝勅書圖簇。瓘以金生行草一卷示之。二人大駭曰。不圖今日得見右軍眞跡。瓘曰。此乃新羅人金生書也。二人笑曰。天下除右軍。焉有妙筆如此哉。瓘卞之終不信。近見趙學士子昂昌林寺碑跋尾曰。右唐新羅僧金生所書其國昌林寺碑。字畫深有典刑。雖唐人名刻。未能遠過之也。古語云。何地不生木。信然。觀趙學士此跋。金生筆法之冠絶古今知也。
김생은 신라 원성왕 때 사람으로 글씨 잘 쓰기로 이름났다. 송나라 숭녕 연간에 고려 학사 홍관이 송나라에 들어갔는데,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그림 족자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홍관이 김생의 행초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 「오늘 왕희지의 진적을 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관이 「이는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입니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천하에 왕희지를 빼고 어찌 이처럼 묘한 글씨가 있겠는가」 하였다. 홍관이 밝혔으나 끝내 믿지 않았다. 근래 학사 조자앙의 창림사 비 발문을 보니 「위는 당나라 신라 승려 김생이 쓴 그 나라 창림사 비다. 글자의 획에 깊이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나라 사람의 이름난 각이라도 멀리 넘어서지 못한다」 하였다. 옛말에 「어느 땅엔들 나무가 나지 않으랴」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다. 조 학사의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으뜸임을 알겠다.
11땅속 귀신도 이미 몰래 베기로 의논하였다
崔文昌侯致遠入唐登第。從高騈伐黃巢。其檄巢曰。非特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巢讀至於此。不覺下牀。因此名聞天下。今桂苑筆耕多有不解處。恐當時氣習如此。或東方文體未能如古也。新羅之文。傳於今者絶無。只有元曉薛聰所著一二篇而已。予嘗見新羅獻唐織錦五言古詩。高句麗乙支文德贈于仲文五言四句。皆精到。當時能文之士。不爲不多矣。而今無所傳於萬一惜哉。
문창후 최치원은 당나라에 들어가 급제하고 고변을 따라 황소를 쳤다. 그 황소를 꾸짖은 격문에 「천하 사람이 다 드러내어 죽일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땅속 귀신도 이미 몰래 벨 것을 의논하였다」 하니, 황소가 여기까지 읽고 저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왔다. 이로 인해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지금 『계원필경』에 알기 어려운 곳이 많은데 아마 당시의 기습이 이러하였거나 혹 동방의 문체가 옛만 못하였던 듯하다. 신라의 글로 지금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가 당나라에 바친 「직금」 오언고시와 고구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준 오언 네 구를 보니 다 정밀하고 지극하였다. 당시에 글 잘하는 선비가 적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다.
12열둘에 당나라에 들어가 스물여덟에 돌아온 이
唐學士顧雲送崔致遠還鄕詩。有十二乘舟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之語。又有贈言者曰。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蓋十二而入唐。二十八而東還也。東還之後。其遭遇設施。未有所考。或云時適世亂。隱於伽倻山海印寺。與緇流遊燕。公所築瀛洲等三山。紅流洞鳳下石。書巖遺跡。至今宛然。不知所終。世稱仙去。按唐僖宗十二年乙巳。新羅憲康王十一年。致遠自唐捧帝詔還。越十年甲寅眞聖王八年。致遠進時務十餘條。王嘉納之。時後百濟甄萱。據完山叛。已三年矣。越二十五年戊寅高麗太祖王建立。越十年丁亥甄萱入新羅弑王。則致遠年方七十。不至衰耗。而其出處無所考。可疑也。
당나라 학사 고운이 최치원을 고향으로 보내며 지은 시에 「열둘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이 중화의 나라를 감동시켰네」 하는 말이 있다. 또 말을 준 이가 「무협 겹봉의 해에 실오라기로 중화에 들어오고, 은하 별자리의 해에 비단으로 동국에 돌아간다」 하였으니, 대개 열둘에 당나라에 들어가 스물여덟에 동쪽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쪽으로 돌아온 뒤 그 만남과 베푼 것은 상고할 것이 없다. 어떤 이는 「때마침 세상이 어지러워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승려들과 노닐었다」 한다. 공이 쌓은 영주 등 세 산과 홍류동 봉하석, 서암의 남은 자취가 지금도 완연하나 마친 곳을 알지 못하여 세상에서 신선이 되어 갔다 일컫는다. 상고하니 당나라 희종 십이년 을사는 신라 헌강왕 십일년인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다. 십 년을 지나 갑인년 진성왕 팔년에 최치원이 시무 십여 조를 올리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 후백제 견훤이 완산을 차지하고 반란한 지 이미 세 해였다. 이십오 년을 지나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섰고, 십 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 왕을 죽였으니, 그때 최치원의 나이 바야흐로 일흔이라 쇠하여 없어질 나이가 아닌데 그 나아가고 물러남을 상고할 데가 없으니 의심스럽다.
13사대의 표전은 정밀하고 절실해야 한다
事大表牋。要須精切。高麗時。遼人欲過鴨綠江爲界。朴參政寅亮脩陳情表。立語用事。明白懇切。遼帝寢其議。我太祖高皇帝二十九年賀正。淸城君鄭擢撰表。光山君金若恒撰牋。西城君鄭摠吉昌君權近潤色之。帝怒表牋語涉戲侮。徵摠若恒近詰責。近蒙宥以還。摠等被留不還。高麗知製誥崔甫淳嘗撰賀金帝登極表云。五馬渡江。表晉帝之開新主。六龍馭極。符羲易之見大人。時金主兄弟爭國。惡其觸實。勅曰引用晉元事不當。崔由是得譴。崔之表辭。非不工也。而觸帝之怒。則由用事不切也。
사대의 표문과 전문은 반드시 정밀하고 절실해야 한다. 고려 때 요나라 사람이 압록강을 넘어 경계로 삼으려 하자 참정 박인량이 진정표를 지었는데 말을 세우고 고사를 쓴 것이 명백하고 간절하여 요나라 황제가 그 의논을 그쳤다. 우리 태조 고황제 이십구년 하정에 청성군 정탁이 표를 짓고 광산군 김약항이 전을 지었으며 서성군 정총과 길창군 권근이 윤색하였다. 황제가 표전의 말이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데 걸린다 하여 노하여 정총·김약항·권근을 불러 꾸짖었다. 권근은 용서를 입어 돌아왔으나 정총 등은 붙들려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 지제고 최보순이 일찍이 금나라 황제 등극을 하례하는 표를 짓기를 「다섯 말이 강을 건너니 진나라 황제가 새 임금을 여심을 표하고, 여섯 용이 극에 오르니 복희씨 역의 대인을 봄에 맞습니다」 하였다. 이때 금나라 임금의 형제가 나라를 다투었으므로 사실에 저촉됨을 미워하여 칙명에 「진 원제의 일을 인용한 것이 마땅치 않다」 하니 최보순이 이로 말미암아 견책을 받았다. 최보순의 표문 말이 공교롭지 않은 것은 아니나 황제의 노여움을 산 것은 고사를 씀이 절실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14김부식이 정지상을 해쳤다는 세상의 말
世傳。金富軾妬才忌能。害鄭知常。今考麗史。知常墮妙淸術中。羽翼悉去而。自全實難。非富軾所得私貸。且本傳及諸書。無一語及枉害。而世之所傳如是何耶。近考金台鉉東國文鑑註曰。金鄭於文字間積不平。然則當時已有是言矣。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이 재주를 시기하고 능한 이를 꺼려 정지상을 해쳤다 한다. 이제 『고려사』를 상고하니 정지상이 묘청의 술수에 빠져 날개가 다 없어졌으니 스스로 온전하기가 실로 어려웠고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또 본전과 여러 책에 억울하게 해쳤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는데 세상에 전하는 것이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근래 김태현의 『동국문감』 주를 상고하니 「김씨와 정씨가 문자 사이에 불평을 쌓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15송나라 우신관의 여선상
金富軾入宋。詣祐神館。見一堂設女仙像。館伴王黼曰。此貴國之神。公等知之乎。遂言曰。古有帝室之女。不夫而孕。爲人所疑。乃泛海。抵辰韓生子。爲海東始主。帝女爲地仙長在仙桃山。此其像也。今考之。新羅高句麗百濟之初。無此帝女事。但東明之出。有柳花事。恐中國誤認有此說也。
김부식이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에 이르러 한 집에 여선의 상을 모신 것을 보았다. 관반 왕보가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아십니까」 하고 마침내 말하기를 「옛날 황실의 딸이 있어 지아비 없이 아이를 배어 남에게 의심을 받자 바다에 떠서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고, 황제의 딸은 지선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다. 이것이 그 상이다」 하였다. 이제 상고하니 신라·고구려·백제의 처음에 이런 황제 딸의 일은 없고 다만 동명이 난 데 유화의 일이 있으니, 아마 중국이 잘못 알아 이런 말이 있는 듯하다.
16최영이 죽음에 임하여 한 말
高麗季。人心皆歸我太祖。而牧隱李先生穡稍存形跡。然撰桓王碑在太祖潛邸之時。用周邦雖舊其命維新之語何耶。崔都統瑩臨死語曰。李廣平常言判三司事當爲國主。廣平都統皆當國大臣。而尙有是言。天命人心之歸我太祖。不待戊辰而可知矣。
고려 말에 인심이 다 조선 태조께 돌아갔는데 목은 이색 선생은 조금 형적을 지켰다. 그러나 환왕의 비문을 지은 것이 태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인데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나 그 명이 새롭다」는 말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도통 최영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이광평이 늘 판삼사사가 마땅히 나라 임금이 되리라 하였다」 하였다. 광평과 도통은 다 나라를 맡은 대신인데도 오히려 이런 말이 있었으니, 천명과 인심이 조선 태조께 돌아간 것은 무진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다.
17연왕을 보고 천하가 정해지지 않았다 하신 태종
我太宗之朝京師也。太宗文皇帝以燕王在藩邸。太宗過謁。文皇帝與言大悅。寵遇款至。及太宗還國。我朝士大夫問太宗曰。天下其大定乎。時高皇倦勤。建文爲太子。太宗曰。我觀燕王。天日之表。龍鳳之姿。恢廓大度。非久爲藩王者也。天下之定未可知也。未幾文皇帝以燕王有天下。人皆服太宗先見之明。文皇帝登極。眷祐我太宗異常數。每語國人曰。朕嘗見汝國主。眞天人也。
조선 태종께서 경사에 조회하실 때 태종 문황제가 연왕으로 번저에 계셨다. 태종께서 지나며 뵈니 문황제가 더불어 말하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하고 대우함이 지극하였다. 태종께서 나라에 돌아오시자 조선 조정 사대부가 태종께 「천하가 크게 정해지겠습니까」 물었다. 이때 고황제가 정사에 게으르고 건문이 태자였다. 태종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과 해 같은 모습이요 용과 봉황 같은 자태이며 도량이 넓고 커서 오래 번왕으로 있을 이가 아니다. 천하가 정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셨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연왕으로 천하를 차지하니 사람들이 다 태종의 앞을 내다보신 밝음에 탄복하였다. 문황제가 등극하여 조선 태종을 돌보아 주심이 남달랐고, 늘 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짐이 일찍이 너희 나라 임금을 보았는데 참으로 하늘 사람이다」 하였다.
18준마를 가리고 인재를 분별하는 일
我國進貢馬。太宗親御揀閱。有一馬。班在下列。命置於首圉。人皆怪之。旣進。文皇見之勅曰。朝鮮國王愛我。首進之馬甚良。然後知聖神所見畧同太宗敎延편臣曰。擇駿馬。辨人才。予當不讓於古人。
조선에서 말을 진공할 때 태종께서 친히 가려 보셨다. 한 말이 아래 반열에 있었는데 첫째 마구간에 두라 명하시니 사람들이 다 괴이하게 여겼다. 바친 뒤에 문황제가 보고 칙명을 내리기를 「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여 첫째로 바친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스럽고 신묘한 이의 보는 바가 대략 같음을 알았다. 태종께서 조정 신하에게 이르시기를 「준마를 가리고 인재를 분별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옛사람에게 양보하지 않겠다」 하셨다.〔저본의 이 자리에 한글 「편」 한 자가 끼어 있으나 무슨 글자인지 가릴 수 없어 자료 그대로 두었다.〕
19백 번 읽고 또 백 번 읽으신 세종
世宗天性好學。其未出閤。每讀書必百遍。於左傳楚詞。又加百遍。嘗違豫。亦不輟讀。病漸劇。太宗命中官。猝至其所。盡搜書帙而來。獨歐蘇手簡一卷。遺在屛障間。世宗讀千百遍。及卽位日。御經筵無書不讀。緝煕時敏之功。高出百王。嘗語近臣曰。讀書有益。如寫字製作。人君不必留意也。晩年倦勤不視朝。然於文學之事。尤所軫慮。命儒臣分局。撰次諸書。曰高麗史。曰治平要覽。曰兵要。曰諺文。曰韻書。曰五禮儀。曰四書五經音解。同時撰修皆經睿裁成書。一日御覽可數十卷。其可謂天行健純亦不已也。
세종께서는 천성이 배우기를 좋아하셨다. 아직 궁 밖에 계실 때 책을 읽으면 반드시 백 번을 읽으셨고 『좌전』과 『초사』는 또 백 번을 더하셨다. 일찍이 편찮으실 때도 읽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병이 점점 깊어지자 태종께서 내관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곳에 이르러 책을 다 뒤져 오게 하셨는데, 홀로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어 세종께서 천백 번을 읽으셨다. 즉위하신 날에 이르러 경연에 나아가 읽지 않은 책이 없으셨으니 밝음을 이어 때로 힘쓰신 공이 백 왕보다 높이 뛰어나셨다. 일찍이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시기를 「책을 읽는 것은 유익하나 글씨를 쓰고 글을 짓는 것 같은 일은 임금이 굳이 마음 둘 것이 아니다」 하셨다. 늘그막에 정사에 게을러 조회를 보지 않으셨으나 문학의 일에는 더욱 마음을 쓰셨다. 유신에게 명하여 국을 나누어 여러 책을 엮게 하셨으니 『고려사』·『치평요람』·『병요』·『언문』·『운서』·『오례의』·『사서오경음해』다. 같은 때 편찬하고 닦은 것이 다 성상의 재결을 거쳐 책을 이루었으니 하루에 보신 것이 수십 권이 되었다. 하늘의 운행이 굳세어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는다 할 만하다.
20박연과 장영실 — 때에 응하여 난 사람들
世宗始制雅樂。朴中樞堧贊成之。每坐臥。手於心胷之間。爲戛擊形。嘯於口吻之中。爲律呂聲。積十餘年乃成。世宗深倚重之。世宗又制自擊漏。簡儀臺欽敬閣仰釜日晷。制作極爲精緻。皆出於宸衷。雖百工匠。無能副上意者。惟護軍蔣英實仰承睿智。運奇騁巧。無不沕合。上甚重之。人皆曰。堙與英實。皆爲我世宗制作之盛。應期而生也。
세종께서 처음 아악을 지으실 때 중추 박연이 도왔다. 앉으나 누우나 가슴 사이에 손으로 치는 모양을 하고 입술 사이로 휘파람 불어 율려의 소리를 내기를 십여 년을 쌓아 마침내 이루었다. 세종께서 깊이 그를 의지하고 중히 여기셨다. 세종께서 또 자격루와 간의대·흠경각·앙부일구를 만드셨는데 제작이 지극히 정밀하였으니 다 성상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온갖 장인이라도 임금의 뜻에 맞출 수 있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호군 장영실이 성상의 지혜를 우러러 받들어 기이함을 부리고 공교함을 달려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께서 매우 중히 여기셨다. 사람들이 다 이르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다 우리 세종의 제작이 성대함을 위하여 때에 응하여 난 것이다」 하였다.
21사정전훈의 — 지금도 옛날에도 없던 정밀함
世宗嘗留意於溫公資治通鑑。患其箋釋未盡句讀不明。命儒臣博採群書。隨事夾註。以便觀覽。於是據胡三省音注及源委釋文集覽等書。删潤之。有未盡處。旁採他書以補。且文學回互艱深處。輒註本史全句。或書句字於句下。以便句讀。以至字釋翻音。莫不詳備。皆取睿裁。名之曰思政殿訓義。綱目通鑑亦如是。其訓義之精。今古所無。近見今皇朝所撰綱目通鑑輯覽。頗有疏漏處。又不夾註於句下。以附於每卷之末。觀覽亦不便。臣妄意當以我朝訓義爲第一。且訓義之成。在正統丙辰。而輯覽之成在近日。當中國輯覽之時。見我國訓義。則必歎賞不暇矣。
세종께서 일찍이 사마온공의 『자치통감』에 마음을 두셨는데 그 주석이 다하지 않고 구두가 밝지 않음을 근심하시어 유신에게 명하여 여러 책을 널리 캐어 일에 따라 협주를 달아 보기 편하게 하셨다. 이에 호삼성의 음주와 『원위』·『석문』·『집람』 등의 책에 근거하여 깎고 다듬으며, 다하지 않은 곳은 곁으로 다른 책을 캐어 보충하고, 또 글 뜻이 서로 얽혀 어렵고 깊은 곳은 문득 본사의 온 구절을 주로 달거나 구절 글자를 구절 아래 적어 구두를 편하게 하며, 글자 풀이와 소리 뒤집기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니 다 성상의 재결을 받아 이름을 『사정전훈의』라 하였다. 『강목』과 『통감』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훈의의 정밀함은 지금도 옛날에도 없던 것이다. 근래 지금 황조에서 엮은 『강목통감집람』을 보니 자못 성기고 빠뜨린 곳이 있고 또 구절 아래 협주를 달지 않고 매 권 끝에 붙여 보기에도 편치 않다. 신은 망령되이 생각건대 마땅히 우리 조정의 훈의를 제일로 삼아야 한다. 또 훈의가 이루어진 것은 정통 병진년이요 『집람』이 이루어진 것은 근래이니, 중국에서 『집람』을 만들 때 우리나라의 훈의를 보았다면 반드시 감탄하고 칭찬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22경자자와 갑인자 — 활자의 내력
太宗始作鑄字。模樣有未盡善。歲庚子世宗命李蕆。以中國善書字樣改鑄。比舊尤精。是謂庚子字。甲寅世宗命爲善陰陽字樣改鑄。極爲精緻。是謂甲寅字。庚子字小而甲寅字大。其所印書冊極好。世宗末年。用瑢所書樣及姜希顏所書字樣改鑄。其所印書冊。漸不如舊。今則銅字盡爲工匠所盜。而兼用木字。字之大小生熟不同。行列不齊。視舊印冊本。迥然不侔矣。
태종께서 처음 주자를 만드셨으나 모양이 다 좋지는 못하였다. 경자년에 세종께서 이천에게 명하여 중국의 잘 쓴 글자 모양으로 고쳐 부으니 옛것보다 더욱 정밀하였다. 이를 경자자라 한다. 갑인년에 세종께서 명하여 『위선음즐』의 글자 모양으로 고쳐 부으니 지극히 정밀하고 고왔다. 이를 갑인자라 한다. 경자자는 작고 갑인자는 커서 그것으로 찍은 책이 지극히 좋았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 이용이 쓴 모양과 강희안이 쓴 글자 모양으로 고쳐 부으니 그것으로 찍은 책이 점점 옛만 못하였다. 지금은 구리 활자를 장인들이 다 훔쳐 가서 나무 활자를 겸하여 쓰니 글자의 크고 작음과 익고 선 것이 같지 않고 줄이 가지런하지 않아 옛날 찍은 책본에 견주면 아주 다르다.
23집현전과 흰 까치, 그리고 말라 죽은 버들
世宗勵精文治。高出萬古。歲庚子始置集賢殿。選文士十人充之。後增三十員。又改二十員。十人帶經筵。十人帶書筵。專任文翰。討論今古。朝夕論思。文章之士。彬彬輩出。得人甚盛。集賢殿南有大柳。歲己巳庚午間。有白鵲來巢。子皆白。數年間布列顯要皆出於集賢。如鄭領相麟趾李左相思哲鄭領相昌孫李領院季甸安領院止金判書銚金參判墩金判樞鉤金判樞末申領相叔舟權左相擥朴參贊仲孫崔領相恒金判書淡李判樞石亨尹議政子雲魚判樞孝瞻盧參判叔同梁判書誠之成判書任李判書克堪李府尹鳴謙金判書禮蒙盧領府思愼韓西平繼禧洪贊成應李參贊承召李參判坡李判書苪趙府尹瑾姜府尹希顏姜判書希孟崔府尹善復朴參判捷。雖以居正之無狀。亦獲列其間。又如朴仲林朴彭年河緯地成三問李塏柳誠源。一時顯隆。歲癸酉甲戌柳盡枯。或戱誠源曰。禍必自柳始。誠源敗。言果驗。集賢殿尋罷。
세종께서 문치에 정성을 다하시어 만고에 높이 뛰어나셨다. 경자년에 처음 집현전을 두고 문사 열 사람을 뽑아 채우셨다가 뒤에 서른 명으로 늘리고 또 스무 명으로 고치셨다. 열 사람은 경연을 띠고 열 사람은 서연을 띠어 오로지 문한을 맡아 고금을 토론하고 아침저녁으로 논하고 생각하니, 문장의 선비가 성하게 잇달아 나와 사람 얻음이 매우 성대하였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둥지를 트니 새끼가 다 희었다. 몇 해 사이에 요직에 벌여 선 이가 다 집현전에서 나왔으니, 영상 정인지·좌상 이사철·영상 정창손·영원 이계전·영원 안지·판서 김조·참판 김돈·판추 김구·판추 김말·영상 신숙주·좌상 권람·참찬 박중손·영상 최항·판서 김담·판추 이석형·의정 윤자운·판추 어효첨·참판 노숙동·판서 양성지·판서 성임·판서 이극감·부윤 이명겸·판서 김예몽·영부 노사신·서평 한계희·찬성 홍응·참찬 이승소·참판 이파·판서 이예·부윤 조근·부윤 강희안·판서 강희맹·부윤 최선복·참판 박첩 같은 이들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거정도 그 사이에 낄 수 있었다. 또 박중림·박팽년·하위지·성삼문·이개·유성원 같은 이도 한때에 드러나고 높았다. 계유년과 갑술년에 버드나무가 다 말라 죽으니 어떤 이가 유성원에게 희롱하여 「화는 반드시 유(柳)에서 시작할 것이다」 하였는데 유성원이 패하니 그 말이 과연 징험되었다. 집현전은 곧 파하였다.
24산에 놀며 책 읽기를 허락한 사가독서
世宗設集賢殿。聚文學之士。培養數十年。人材輩出。尙慮朝衙夕直。不專意講讀。選年少有才行者數人。許暇遊山讀書。官給供具。肆意於經史百子天文地理醫藥卜筮。淹貫該博。無所不通。將爲大用之地。前有辛文僖碩祖權承旨採南直殿秀文。後有申文忠公叔舟。餘皆名士也。文宗朝。洪南陽應李韓山坡。雖以居正之無似。亦獲是選。眞一時盛事。
세종께서 집현전을 두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수십 년을 길러 인재가 잇달아 나왔다. 그래도 아침에 관아에 나가고 저녁에 숙직하여 강독에 뜻을 오로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나이 젊고 재주와 행실 있는 이 몇 사람을 뽑아 말미를 주어 산에 놀며 책 읽기를 허락하고 관에서 이바지를 대게 하셨다. 경사·백가·천문·지리·의약·복서에 마음껏 하여 널리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게 하여 장차 크게 쓸 바탕으로 삼으셨다. 앞에는 문희공 신석조·승지 권채·직전 남수문이 있고 뒤에는 문충공 신숙주가 있으며 나머지도 다 이름난 선비다. 문종 조에 남양 홍응과 한산 이파, 그리고 비록 보잘것없는 거정도 이 뽑힘을 얻었으니 참으로 한때의 성대한 일이다.
25동정귤 소반에 쓰신 문종의 글씨
文宗之爲世子。幸喜雨亭。以洞庭橘一盤賜近臣。御書盤面曰。栴檀便宜鼻。脂膏偏宜口。最愛洞庭橘。香鼻又甘口。字畫動龍蛇。光燭日月。予嘗臨其字藏之。眞天下之至寶也。
문종께서 세자로 계실 때 희우정에 거둥하시어 동정귤 한 소반을 가까운 신하에게 내리시고 소반 위에 손수 쓰시기를 「전단은 코에 마땅하고, 기름진 것은 입에 마땅하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동정귤, 코에 향기롭고 또 입에 달다」 하셨다. 글자의 획이 용과 뱀을 움직이고 빛이 해와 달을 밝히니, 내가 일찍이 그 글씨를 본떠 간직하였다. 참으로 천하의 지극한 보배다.
26무정과 유정 — 문종의 붉은 붓
文宗睿藻精到。集賢殿嘗製棘城祭文以進。文宗賜覽。以朱筆抹之。御書數語。其畧曰。無情之謂陰陽。有情之謂鬼神。無情則不可與語。有情則可以理曉。且曰。水火養人。而有時乎殺人。鬼神生人。而有時乎傷人。天語渾成。非詞臣儒士所能到。
문종의 글솜씨는 정밀하고 지극하셨다. 집현전에서 일찍이 극성 제문을 지어 올리니 문종께서 보시고 붉은 붓으로 지우고 몇 마디를 손수 쓰셨다. 그 대략에 「정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 하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 정이 없으면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정이 있으면 이치로 깨우칠 수 있다」 하시고, 또 「물과 불은 사람을 기르나 때로 사람을 죽이고, 귀신은 사람을 낳으나 때로 사람을 다치게 한다」 하셨다. 하늘의 말씀이 혼연히 이루어져 사신이나 유생이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27죽은 이를 살린다던 요망한 중
宋仁宗崩。英宗皇帝悲慕。有妄議者曰。能神術使死者復生。英宗命試其術無效。乃曰。太宗與仁宗。宴臨白玉闌干賞牧丹。無意復來人間。英宗知誕妄。不深罪。我世宗初喪。有妖僧來獻是策。試於他屍無效。虛僞無理文。宗亦不之罪。
송나라 인종이 승하하자 영종 황제가 슬피 사모하였는데, 망령되이 의논하는 자가 「신묘한 술법으로 죽은 이를 다시 살릴 수 있다」 하였다. 영종이 그 술법을 시험하게 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이에 「태종과 인종이 백옥 난간에 임하여 잔치하며 모란을 감상하시니 다시 인간에 올 뜻이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이 허탄하고 망령됨을 알았으나 깊이 벌하지 않았다. 조선 세종 초상 때에도 요망한 중이 와서 이 계책을 바쳤다. 다른 시체에 시험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허위이며 이치 없는 글이었는데 문종께서도 벌하지 않으셨다.
28양녕대군이 세조께 아뢴 말
世祖天縱豪邁。平時議論。慨然慕唐太宗。而薄漢高祖。一日上從容與讓寧大君禔。論古今帝王。而謂唐宗不可及。讓寧對曰。殿下遠過唐宗。上改容曰。惡是何言。叔父之言過矣。讓寧曰。太宗以一微事而殺張薀古。殿下必不爲也。況我殿下家法之正。非太宗之所及也。上微笑。又語及征蒲州江野人事。讓寧曰。古人云千鈞之弩。不爲鼷鼠發機。願殿下留意焉。讓寧所見亦奇。
세조께서는 하늘이 내신 호매함으로 평소 의논하실 때 개연히 당 태종을 사모하시고 한 고조를 얕게 여기셨다. 하루는 임금께서 조용히 양녕대군 이제와 고금의 제왕을 논하시며 당 태종은 미칠 수 없다 하셨다. 양녕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당 태종을 멀리 넘으십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낯빛을 고치며 「아, 이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의 말씀이 지나칩니다」 하셨다. 양녕이 「태종은 한 가지 하찮은 일로 장온고를 죽였으니 전하께서는 반드시 그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전하의 가법이 바른 것은 태종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또 포주강 야인을 정벌하는 일에 말이 미치자 양녕이 「옛사람이 이르기를 『천 균의 쇠뇌는 생쥐를 위하여 기틀을 놓지 않는다』 하였으니 전하께서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양녕의 보는 바도 기이하다.
29임금이 부처에게 절해야 하는가
世祖嘗從容語臣曰。汝儒者。自古人君。於佛可拜否。爾毋隱焉。臣對曰。昔宋太祖幸相國寺。佛像前燒香。問當拜與否。僧贊寧曰。拜在佛不拜過去佛。太祖笑而不拜。然則人君不拜佛正也。拜佛權也。上大笑。臣又曰。太宗朝。中朝宦官黃儼。持濟州銅佛而來。使太宗先拜佛而後行禮。太宗欲不拜。河崙等請曰。黃儼兇險喜生事。宜從權先拜佛。太宗曰。彼佛若自中國來。則當敬皇帝之命拜之。今此佛自我國濟州而來。何拜之有。羣臣無人陳此者。予以謂不拜可也。竟不拜。儼屈遂行禮。大聖人所見各同。世祖又笑之。
세조께서 일찍이 조용히 신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유자다. 예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할 수 있는가. 너는 숨기지 말라」 하셨다. 신이 대답하기를 「옛날 송 태조가 상국사에 거둥하여 불상 앞에 향을 사르며 절해야 하는지 물으니 승려 찬녕이 『현재의 부처는 지나간 부처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하여 태조가 웃고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 바른 것이요 절하는 것은 권도입니다」 하니 임금께서 크게 웃으셨다. 신이 또 아뢰기를 「태종 조에 중국 조정의 환관 황엄이 제주의 구리 부처를 가지고 와서 태종께 먼저 부처에게 절한 뒤에 예를 행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태종께서 절하지 않으려 하시자 하륜 등이 『황엄이 흉험하여 일 만들기를 좋아하니 마땅히 권도를 따라 먼저 부처에게 절하소서』 하고 청하였습니다. 태종께서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하겠으나 이제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어찌 절할 것이 있겠는가』 하시니 뭇 신하 가운데 이를 아뢴 이가 없었습니다. 신은 절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마침내 절하지 않으시고 황엄이 굽혀 마침내 예를 행하였습니다. 큰 성인의 보시는 바가 각기 같습니다」 하니 세조께서 또 웃으셨다.
30검소하신 세조
世祖聖性恭儉。嘗入內殿。見御紺色木綿虎裘。穿靑草鞋。笠纓用純木。携竹杖。雖漢文澣濯。亦不如是其儉素也。
세조께서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셨다. 일찍이 내전에 들어가 뵈니 감색 무명 호구를 입으시고 푸른 짚신을 신으셨으며 갓끈은 순전한 나무를 쓰고 대지팡이를 짚으셨다. 비록 한나라 문제가 빨아 입었다 하나 이처럼 검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1신 정승과 구 정승 — 종일 벌주를 마신 두 재상
申高靈叔舟爲領相。具綾城致寬新拜右相。世祖急召兩相于內殿。上曰。今日有問於卿等。能對則已。不能對則罰不可辭。卿等自度何如。兩相拜謝曰。庶幾謹飭無罰。俄而上呼申政丞。申卽對。上曰予呼新政丞。子失對。罰一大爵。又呼曰具政丞。具卽對。上曰予呼舊政丞。子失對也。罰一大爵。上又呼曰具政丞。申卽對。上曰予呼姓子失對也。罰之。又呼曰申政丞。具卽對。上曰予呼姓子失對也。罰之。上又呼曰申政丞。申具皆不對。又呼曰具政丞。具申皆不對。上曰人君有召人。臣。不對非禮也。亦罰之。如是終日。兩相飮罰極醉上大笑。
고령 신숙주가 영상이 되고 능성 구치관이 새로 우상에 제수되었다. 세조께서 급히 두 재상을 내전으로 부르시고 이르시기를 「오늘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하면 그만이거니와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사양하지 못한다. 경들은 스스로 헤아려 어떠한가」 하셨다. 두 재상이 절하고 사례하며 「삼가 조심하여 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윽고 임금께서 「신 정승」 하고 부르시니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나는 새 정승〔新政丞〕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시고 큰 잔으로 한 번 벌하셨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시니 구치관이 곧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나는 옛 정승〔舊政丞〕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시고 큰 잔으로 한 번 벌하셨다. 임금께서 또 「구 정승」 하시니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나는 성〔具〕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시고 벌하셨다. 또 「신 정승」 하시니 구치관이 곧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나는 성〔申〕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시고 벌하셨다. 임금께서 또 「신 정승」 하시니 신숙주와 구치관이 다 대답하지 않았고, 또 「구 정승」 하시니 구치관과 신숙주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임금이 사람을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시고 또 벌하셨다. 이와 같이 종일 하니 두 재상이 벌주를 마시고 몹시 취하매 임금께서 크게 웃으셨다.
32어효첨은 순후하고 윤사분은 시험하다
魚判樞孝瞻唇厚。世祖嘗戱曰。魚孝瞻淳厚。尹議政士芬顋醓。朴文憲元亨對曰。尹士芬猜險。上大笑。
판중추 어효첨은 입술이 두터웠다. 세조께서 일찍이 희롱하여 「어효첨은 순후(淳厚)하다」 하시니, 의정 윤사분은 뺨이 붉었는데 문헌공 박원형이 「윤사분은 시험(猜險)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크게 웃으셨다.
33사주는 오십일만 팔천사백뿐인데 사람은 억조다
世祖於陰陽地理之書。無不淹貫。洞見是非而睿斷之。嘗謂臣居正曰。祿命之書。儒者窮理之一事。汝知之乎。臣對曰粗嘗涉獵。上曰汝作假令一書。臣退而裒集諸書。撮其大要。分門類聚。先之以凡例。次之以吉凶神殺。終之以吉凶論斷。以進。上曰予非崇信祿命之書。欲作假令使宮中之人不煩指授。開卷自明耳。且謂臣曰。卿意謂祿命何如。臣對曰。甲己之年正月丙寅。甲巳之日生時甲子。以六十位類推之。其數極於七百二十而盡。以七百二十之年。加七百二十之日時。則命之四柱極於五十一萬八千四百。而無復加矣。天下盛時。戶口至有千五六百萬。則億兆林林之衆。豈止五十一万八千四百而已哉。今於閭巷間。固有四柱皆同。禍福全不相似。以耳目所見。常有편二。則耳目之所不接者。安知非千百者乎。且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四柱則中國四海荒服之人無不同也。而中國則有公侯伯子男卿士大夫吏胥庶人之分。爵位科第之高下。皆一一有辨。四海荒服之俗。或同禽獸。無貴賤之分。是何囿於五十一万八千四百之人命。而其不同若是其紛紛耶。祿命之書不足信也。或曰。如李淳風李虛中邵堯夫徐子平。發無不中。則安可盡得而非之乎。臣意以謂。有明鏡於此。物來照之。姸媸自見。於李淳風邵堯夫輩。心本虛靈。如鏡之明。事至物來。吉凶禍福自燭難逃耳。非如後世術士徒守古人之糟粕。以五十一万八千四百之人命。惟斷天下億兆之人命也。臣以謂祿命之書不可信也。上笑曰。汝言是也。
세조께서는 음양과 지리의 책에 두루 통하지 않음이 없으시어 옳고 그름을 환히 보고 밝게 결단하셨다. 일찍이 신 거정에게 이르시기를 「녹명(祿命)의 책은 유자가 이치를 궁구하는 한 가지 일이다. 너는 아느냐」 하시기에 신이 「대략 섭렵하였습니다」 대답하니, 임금께서 「너는 가령(假令) 한 책을 지으라」 하셨다. 신이 물러나 여러 책을 모아 그 요점을 뽑고 갈래를 나누어 모아, 먼저 범례를 놓고 다음에 길흉 신살을, 끝에 길흉 논단을 두어 올렸다. 임금께서 「내가 녹명의 책을 높이 믿는 것이 아니다. 가령을 지어 궁중 사람이 번거롭게 가르침을 받지 않고 책을 펴면 스스로 밝게 하려는 것뿐이다」 하시고, 또 신에게 「경의 뜻에는 녹명이 어떠한가」 물으셨다. 신이 대답하기를 「갑·기의 해는 정월이 병인이고 갑·기의 날은 태어난 시가 갑자이니 육십 자리로 미루면 그 수가 칠백이십에서 다합니다. 칠백이십의 해에 칠백이십의 날과 시를 더하면 명의 사주가 오십일만 팔천사백에서 다하여 더할 것이 없습니다. 천하가 성할 때 호구가 천오륙백만에 이르니 억조의 빽빽한 무리가 어찌 오십일만 팔천사백에 그치겠습니까. 지금 여염 사이에도 사주가 다 같으면서 화복이 전혀 서로 같지 않은 이가 참으로 있습니다. 눈과 귀로 본 것만으로도 늘 한둘〔저본의 이 자리에 한글 「편」 한 자가 끼어 있으나 무슨 글자인지 가릴 수 없어 자료 그대로 두었다〕이 있으니,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에 천백이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또 천 리에 바람이 같지 않고 백 리에 풍속이 같지 않은데, 사주는 중국과 사해 황복의 사람이 같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공·후·백·자·남과 경·사대부·아전·서인의 나뉨이 있어 작위와 과거의 높낮이가 다 하나하나 분별이 있고, 사해 황복의 풍속은 혹 짐승과 같아 귀천의 나뉨이 없습니다. 이 어찌 오십일만 팔천사백의 사람 명에 갇혀 있으면서 그 같지 않음이 이처럼 어지럽겠습니까. 녹명의 책은 믿기에 모자랍니다」 하였다. 어떤 이는 「이순풍·이허중·소요부·서자평 같은 이는 말하면 맞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다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한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밝은 거울이 있어 물건이 와서 비치면 곱고 미움이 절로 드러나듯이, 이순풍·소요부 같은 이는 마음이 본디 비고 신령하여 거울의 밝음 같으므로 일이 이르고 물건이 오면 길흉과 화복이 절로 비쳐 도망하기 어려웠을 뿐입니다. 뒷세상 술사가 한갓 옛사람의 찌꺼기를 지켜 오십일만 팔천사백의 사람 명으로 천하 억조의 사람 명을 오직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은 녹명의 책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금께서 웃으시며 「네 말이 옳다」 하셨다.
34손수 「예종」이라 쓰신 일
睿宗初政。銳意圖治。未幾玉體漸乖。嘗手寫冊背曰睿宗。又曰。死得此諡足矣。不數月上賓。羣臣上諡曰睿宗。果合聖意。嗚呼悲哉。
예종께서 처음 정사를 하실 때 뜻을 날카롭게 하여 다스림을 도모하셨는데 얼마 안 되어 옥체가 점점 어그러지셨다. 일찍이 손수 책 등에 「예종(睿宗)」이라 쓰시고 또 「죽어서 이 시호를 얻으면 넉넉하다」 하셨다. 몇 달이 안 되어 승하하시니 뭇 신하가 시호를 올려 예종이라 하여 과연 성상의 뜻에 맞았다. 아, 슬프다.
35덕을 쌓아 여든다섯을 누린 권부
菊齋權文正公溥。壬戌年壬子月己未日己巳時生。卜者曰。命限不永。先文淸公坦曰。若積德少可延長。嘗聞天寶山僧。積德之目。有三。曰行不中道。曰浴不流水。曰食不擇精。汝宜勉之。菊齋終身佩服。造次必於是。終享壽八十五。位至極品。一家九封君。福祿之盛今古罕比。人皆曰積德之效。予嘗觀益齋先生文菊齋碑曰。戊子己未虛拱壬巳之祿。互衝發之。蓋贊其造化之妙也。卜者謂之不永。亦不可知。
국재 문정공 권부는 임술년 임자월 기미일 기사시에 났다. 점치는 이가 「명의 한도가 길지 못하다」 하니 아버지 문청공 권탄이 「덕을 쌓으면 조금 늘릴 수 있다. 일찍이 천보산 승려에게 들으니 덕을 쌓는 조목이 셋인데 길 가운데로 다니지 않는 것, 흐르는 물에 목욕하지 않는 것, 먹을 때 정한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너는 마땅히 힘쓰라」 하였다. 국재가 죽을 때까지 마음에 새겨 잠시도 이것을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수를 여든다섯 누리고 자리가 극품에 이르렀으며 한 집안에 아홉 봉군이 나니 복록의 성함이 고금에 견줄 데가 드물었다. 사람들이 다 「덕을 쌓은 효험이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익재 선생이 지은 국재의 비문을 보니 「무자와 기미가 임과 사의 녹을 비워 마주 안고 서로 충하여 발한다」 하였으니 대개 그 조화의 묘함을 기린 것이다. 점치는 이가 길지 못하다 한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36정몽주의 세 가지 잘못이라는 것
圃隱鄭文忠公。平生有志節。人無間言。或戱曰。人言子有三失。知之乎。文忠曰。試言之。或曰人言子於朋友讌飮。先入後罷。飮酒太遲。文忠曰誠有之。少在鄕曲。得一盆濁醪。思欲與親戚朋友一懽。今旣富貴。座上客常滿。樽中酒不空。吾豈悻悻然哉。或曰人言子於色不得淡然。文忠笑曰。好色人之常情。孔子亦曰。如好好色。則孔子非不知好色也。或曰人言子於唐物貿易。不得無心。文忠變色曰。老夫家貧。子女寔繁。婚姻之禮。例用唐物吾不能免俗耳。況貿遷有無。聖人之遺制。吾何嫌乎哉。或曰前言戲耳。
포은 문충공 정몽주는 평생 지조와 절개가 있어 사람들이 헐뜯는 말이 없었다. 어떤 이가 희롱하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세 가지 잘못이 있다 하는데 아는가」 하니 문충이 「시험 삼아 말해 보라」 하였다. 그가 「사람들이 『그대는 벗과 잔치하며 마실 때 먼저 들어와 뒤에 파하니 술 마심이 너무 더디다』 합니다」 하니, 문충이 「참으로 그렇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때 막걸리 한 동이를 얻으면 친척과 벗과 함께 한번 즐기고자 하였다. 이제 이미 부귀하여 자리에 손님이 늘 가득하고 동이에 술이 비지 않으니 내가 어찌 매몰차게 굴겠는가」 하였다. 그가 「사람들이 『그대는 여색에 담담하지 못하다』 합니다」 하니, 문충이 웃으며 「색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정이다. 공자도 『좋은 빛을 좋아하듯 하라』 하셨으니 공자도 색 좋아함을 모르신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사람들이 『그대는 당나라 물건 무역에 무심하지 못하다』 합니다」 하니, 문충이 낯빛을 바꾸며 「이 늙은이는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실로 많다. 혼인의 예에 으레 당나라 물건을 쓰니 내가 풍속을 면할 수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있고 없는 것을 옮겨 바꾸는 것은 성인이 남긴 제도이니 내가 무엇을 꺼리겠는가」 하였다. 그가 「앞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37따지지 않고 값을 물어 준 권근
權文忠公近常赴京師道遇雨。假郵吏笠帽。旣還之。訟公不還。責其直。公不較而與之。後有一郵吏。冒認氈衫之失。責其直。公又欲與之。使臣孛羅知其誣。鞫郵吏。乃曰此人前不較而與直。故敢爾。非失也。孛羅罰其人。
문충공 권근이 일찍이 경사에 가다가 길에서 비를 만나 역리의 삿갓을 빌려 썼다가 돌려주었다. 그런데 그 역리가 공이 돌려주지 않았다고 송사하여 그 값을 물리려 하니 공이 따지지 않고 주었다. 뒤에 한 역리가 전삼(氈衫)을 잃었다고 거짓으로 인정하여 그 값을 물리려 하니 공이 또 주려 하였다. 사신 발라가 그 무고임을 알고 역리를 국문하니 「이 사람이 앞서도 따지지 않고 값을 주었으므로 감히 그리하였을 뿐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발라가 그 사람을 벌하였다.
38활을 잡아 본 적 없이 한 화살로 맞힌 권근
權文忠公嘗謫居忠州。癸酉春太祖幸鷄龍山。召赴行在。一日太祖賜銀盤一面于扈從諸宰樞。爭射賭之。武臣以次皆不中。文忠平生一不操弓。是日一箭中之。得銀盤。人皆曰。射以觀德。此之謂也。
문충공 권근이 일찍이 충주에 귀양살이하였다. 계유년 봄에 태조께서 계룡산에 거둥하시며 불러 행재소에 나아가게 하셨다. 하루는 태조께서 은반 하나를 호종한 여러 재추에게 내리시고 다투어 쏘아 걸게 하셨다. 무신들이 차례로 다 맞히지 못하였는데, 문충은 평생 한 번도 활을 잡아 본 적이 없으면서 이날 한 화살로 맞혀 은반을 얻었다. 사람들이 다 「활쏘기로 덕을 본다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39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정도전의 신
鄭三峯道傳嘗赴早衙。穿靴一白一黑。及公坐。胥吏以告。三峯俯視一笑。竟不易。及衙罷。騎馬而行。笑謂傔從曰。爾毋怪乎。吾靴之黑白也。左者見白不見黑。右者見黑不見白。亦何傷乎。其不外飾如此。
삼봉 정도전이 일찍이 이른 아침 관아에 나가는데 신을 한 짝은 흰 것, 한 짝은 검은 것을 신었다. 공석에 앉자 아전이 아뢰니 삼봉이 굽어보고 한 번 웃을 뿐 끝내 바꾸지 않았다. 관아가 파하자 말을 타고 가며 웃으며 종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신의 검고 흼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왼쪽에 있는 이는 흰 것만 보고 검은 것을 보지 못하며, 오른쪽에 있는 이는 검은 것만 보고 흰 것을 보지 못하니 또한 무엇이 해롭겠느냐」 하였다. 그가 겉을 꾸미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40「중심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라 한 이색의 말
李文靖公穡朝京師。太祖高皇帝引見與語曰。汝之漢語似納哈出。穡貌不揚。帝曰此翁堪畫。及穡東還。語人曰。今皇帝中無所主之主也。人皆以穡言爲失。今觀大明有天下百有餘年。列聖相承。持盈守成。一遵高皇帝遺制。不得變更。其規模制度。遠過漢唐。曾謂中無所主之主乎。然穡大儒也。不知高皇帝之爲大聖人。焉得爲智乎。臆意以謂。高皇帝初定天下。駕馭英雄。恢拓邊疆。留神軫慮於創造大業。其視穡豎儒如嬰兒啼笑於坐側而不加之意也。穡之意亦以爲。高皇在位未久。天下之事。未可知也。而待外人。簡傲侮慢如是也。是以有此言。高皇以光武之待馬援者而待穡。必無此言矣。
문정공 이색이 경사에 조회하니 태조 고황제가 불러 보고 말하기를 「너의 한어는 나하추와 비슷하다」 하였다. 이색은 모습이 훤칠하지 않았는데 황제가 「이 늙은이는 그릴 만하다」 하였다. 이색이 동쪽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지금 황제는 중심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다」 하니 사람들이 다 이색의 말을 잘못이라 하였다. 이제 보건대 대명이 천하를 차지한 지 백여 년에 여러 성군이 서로 이어 가득 참을 지키고 이룬 것을 지켜 한결같이 고황제가 남긴 제도를 따라 고치지 못하니, 그 규모와 제도가 한·당을 멀리 넘는다. 어찌 중심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이색은 큰 선비다. 고황제가 큰 성인임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짐작건대 고황제가 처음 천하를 정하여 영웅을 어거하고 변방을 넓히며 큰 업을 창조하는 데 마음을 쓰고 염려하느라, 이색 같은 선비를 마치 어린아이가 곁에서 울고 웃는 것처럼 보아 뜻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색의 뜻도 「고황제가 자리에 오른 지 오래지 않아 천하의 일을 알 수 없는데 바깥 사람 대접하기를 이처럼 소홀하고 오만하며 업신여긴다」 하여 이 말을 한 것이리라. 고황제가 광무제가 마원을 대하듯 이색을 대하였다면 반드시 이 말이 없었을 것이다.
41한 번 보면 다 외운 조용
趙文貞公庸學問精邃。尤深於性理之學。長國學二十餘年。誨人不倦。作成有效。凡文章操紙立就。詞理精到。性聰敏。一覽輒記。少時聞一書生得元朝文選策問祕之。文貞求見。生不許。他日更往求之。則生爲借三日。文貞一覽盡記。如約而還。一日文貞與生同在黌舍。誦策三四道。不差一字。生以謂偶熟此而已。亂抽諸策令誦之。亦如此。生曰。如公者。雖張巡不能及也。
문정공 조용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특히 성리의 학에 깊었다. 국학을 이십여 년 맡아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이룬 것이 효험이 있었다. 무릇 문장은 종이를 잡으면 곧 이루었고 말과 이치가 정밀하고 지극하였다. 성품이 총명하여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젊을 때 한 서생이 원나라 조정의 『문선』 책문을 얻어 감춘다는 말을 듣고 문정이 보기를 청하니 서생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가서 청하니 서생이 사흘을 빌려 주었다. 문정이 한 번 보고 다 외워 약속대로 돌려주었다. 하루는 문정이 서생과 함께 학사에 있으면서 책문 서너 편을 외우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서생이 「우연히 이것만 익혔을 뿐이다」 하고 여러 책문을 어지러이 뽑아 외우게 하였으나 또한 이와 같았다. 서생이 「공 같은 이는 비록 장순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42피리 소리로 계신 줄 알던 맹사성
孟文貞公思誠淸簡端重。在相府持大體。公年庚子。嘗因戱托癸卯契。一日在上前。上問公年有幾。文貞對以庚子。朝退。契中以非同庚出之。一時傳笑。文貞性解音律。常執一笛。日弄三四聲。關門不接賓客。有稟事者。令人開門引接。夏則坐松陰。冬則坐房內蒲茵。左右無他物。稟事者去。旋卽關門。稟事者到洞口。聞笛聲則知公之必在。
문정공 맹사성은 맑고 간략하며 단정하고 무거워 상부에 있으면서 대체를 지켰다. 공의 나이는 경자생인데 일찍이 희롱으로 계묘생 계에 붙었다. 하루는 임금 앞에 있는데 임금께서 공의 나이가 몇인지 물으시니 문정이 경자생이라 대답하였다. 조회에서 물러나자 계 사람들이 동갑이 아니라 하여 내보내니 한때에 전하며 웃었다. 문정은 성품이 음률을 알아 늘 피리 하나를 잡고 날마다 서너 소리를 놀았다. 문을 닫고 손님을 맞지 않다가 여쭐 일이 있는 이가 오면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맞아들였다.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았는데 좌우에 다른 물건이 없었다. 여쭐 일이 있는 이가 가면 곧 문을 닫았다. 여쭐 일이 있는 이가 동네 어귀에 이르러 피리 소리를 들으면 공이 반드시 계신 줄 알았다.
43남산 기슭에 못을 파고 연을 심은 권홍
權文順公弘早以文翰著名。尤工於篆隷。位至極品。享年八十七。嘗卜宅南山陲。鑿雙池種蓮。幅巾藜杖。逍遙自適。洒然若神仙。其書獻陵碑篆成均館碑甚好。嘗世宗朝上書請立箕子祠碑。言頗得體。
문순공 권홍은 일찍이 문한으로 이름이 났고 특히 전서와 예서에 공교하였다. 자리가 극품에 이르고 나이 여든일곱을 누렸다. 일찍이 남산 기슭에 집터를 잡아 못 둘을 파고 연을 심었으며 폭건에 명아주 지팡이로 거닐며 스스로 만족하니 시원하기가 신선 같았다. 그가 쓴 헌릉 비의 전서와 성균관 비가 매우 좋다. 일찍이 세종 조에 글을 올려 기자 사당의 비를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자못 체를 얻었다.
44사금파리로 땅에 시를 쓴 박안신
朴貞肅公安信器度寬偉。嘗與孟文貞公思誠同在臺。論事忤旨當誅。文貞面有黑色。蒼黃罔措。貞肅顏色自若。作詩一絶。有恐君留殺諫臣名之句。無紙筆。以磁尖畫地成字。瞋目語獄吏曰。當以是上聞。否則我爲厲鬼。爾屬無焦類矣。太宗聞而霽威赦之。後貞肅奉使日本還遇海賊。賊抽刃攔入船上。抄掠行具。人皆搖手不得。貞肅踞胡床不動。從容指揮。賊畏不敢近。一行賴以安全。
정숙공 박안신은 기량이 너그럽고 컸다. 일찍이 문정공 맹사성과 함께 대(臺)에 있으면서 일을 논하다 임금의 뜻을 거슬러 죽게 되었다. 문정은 낯빛이 검어지고 창황하여 어쩔 줄 몰랐으나 정숙은 낯빛이 태연하여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임금께 간하는 신하를 죽였다는 이름이 남을까 두렵다」는 구가 있었다. 종이와 붓이 없어 사금파리 끝으로 땅에 그어 글자를 이루고, 눈을 부릅뜨고 옥리에게 「마땅히 이것을 위에 아뢰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여귀가 되어 너희 무리를 씨도 없게 하겠다」 하였다. 태종께서 들으시고 위엄을 거두어 놓아주셨다. 뒤에 정숙이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돌아오다 바다 도적을 만났다. 도적이 칼을 뽑아 배 위로 뛰어들어 행장을 노략하니 사람들이 다 손을 흔들며 어쩌지 못하였다. 정숙만 호상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지휘하니 도적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여 일행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였다.
45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우산 없는 집은 어찌하랴」
柳文貞公寬公廉方正。雖位極人臣。茅屋一間。布衣芒鞋。淡如也。公退之暇。敎誨不倦。摳衣者坌集。有來內謁。顧之而已。不問姓名。公之第在興仁門外。時開史局于金輪寺。寺在城內。公領脩史。嘗以軟帽杖屨而行。不煩輿馬。或携童冠。嘯咏往還。人服其雅重。寺今已廢。嘗霖雨經月。屋漏如麻。公手傘庇雨。顧夫人曰。無傘之家。何以能堪。夫人曰。無傘者必有備。公笑。
문정공 유관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방정하여 비록 자리가 신하로서 지극하였으나 띠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담하였다. 관아에서 물러난 틈에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옷자락을 걷고 배우러 오는 이가 몰려들었다. 안에 뵈러 온 이가 있으면 돌아볼 뿐 이름을 묻지 않았다. 공의 집은 흥인문 밖에 있었는데 그때 사국을 금륜사에 열었고 절은 성안에 있었다. 공이 사서 편찬을 맡아 늘 연모를 쓰고 지팡이와 신으로 다니며 수레와 말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고, 때로 아이와 어른을 이끌고 휘파람 불고 읊으며 오갔으니 사람들이 그 아담하고 무거움에 탄복하였다. 절은 지금 이미 폐하였다. 일찍이 장맛비가 달을 넘겨 지붕이 삼대처럼 샜다. 공이 손수 우산을 들어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우산 없는 집은 어찌 견디겠소」 하니 부인이 「우산 없는 이는 반드시 대비가 있지요」 하였다. 공이 웃었다.
46쑥 갓 꿈과 지극한 효성
成文景公石磷少有倜儻奇節。嘗爲楊伯顏幕下禦倭。失律當刑。公假寐。有人告曰。公著蒿冠無憂也。公自解曰。蒿冠以蒿裹頭。不祥莫甚。竟貸死除名。後爲首相曰。吾夢蒿冠者高官也。早年與四五同僚在政房。辛旽負手傍觀。指文景曰。終必大顯。福德非諸君所及。卒如其言。老賊亦復具眼。公年六十。慈氏亦年踰七十。病革。瞑目不言者數日。藥餌無效。公焚香祈禱。哀號幾絶。俄而慈氏曰。是何聲也。侍者驚喜曰。祈禱聲也。慈氏曰。天遣人賜几杖曰。有子至誠如此。可扶而起。病尋愈。人皆嘆文景孝誠之篤。
문경공 성석린은 젊어서 척당하고 기이한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양백안의 막하가 되어 왜를 막다가 군율을 잃어 형을 받게 되었다. 공이 선잠이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공은 쑥 갓〔蒿冠〕을 쓸 것이니 근심하지 마시오」 하였다. 공이 스스로 풀기를 「쑥 갓은 쑥으로 머리를 싸는 것이니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하였는데,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이름만 지워졌다. 뒤에 수상이 되어 「내 꿈의 쑥 갓은 높은 벼슬〔高官〕이었구나」 하였다. 젊은 시절 네댓 동료와 정방에 있는데 신돈이 뒷짐 지고 곁에서 보다가 문경을 가리키며 「끝내 반드시 크게 드러날 것이니 복덕이 여러분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도적도 또한 눈이 있었다. 공의 나이 예순에 어머니도 일흔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하지 않은 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었다. 공이 향을 사르고 빌며 슬피 부르짖어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이것이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던 이가 놀라고 기뻐하며 「비는 소리입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하늘이 사람을 보내 안석과 지팡이를 주며 『아들의 지극한 정성이 이와 같으니 붙들어 일으킬 만하다』 하더라」 하였다.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다 문경의 효성이 도타움에 감탄하였다.
47강한 활을 몰래 익힌 하경복
河襄靖公敬復晉州人。母夢鼈入懷中。因有娠生。小字王八。自幼膂力過人。補甲士宿衛。直禁門。時適冬至。上林苑熨養梅花數盆。將進置於禁門之側。公折一長條。揷兜牟上。掌者大驚叱之。公曰。吾家籬邊繫牛馬者此樹。折爲薪樵者也。有何所貴。不小屈。人皆笑其麤猛。而大其氣。以武能擢拔大顯。嘗出鎭東北面。有野人以三百斤强弓請公彎之者。公爲置酒歡飮。且語曰。此弓制作甚妙。急呼弓手。依樣制造。潛令人爆之。筋力少解。從容引滿。野人叩頭下拜。
양정공 하경복은 진주 사람이다. 어머니가 자라가 품에 드는 꿈을 꾸고 아이를 배어 낳았으므로 어릴 적 이름이 왕팔(王八)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남보다 뛰어나 갑사에 보충되어 숙위하며 금문을 지켰다. 때마침 동짓날이라 상림원에서 매화 몇 분을 다스려 길러 장차 올리려고 금문 곁에 두었다.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 투구 위에 꽂으니 맡은 이가 크게 놀라 꾸짖었다. 공이 「우리 집 울타리 가에 소와 말을 매는 것이 이 나무요 꺾어 땔감으로 쓰는 것이다. 무슨 귀할 것이 있는가」 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그 거칠고 사나움을 웃었으나 그 기개는 크게 여겼고 무예로 발탁되어 크게 드러났다. 일찍이 동북면에 나가 지킬 때 어떤 야인이 삼백 근 강한 활을 가지고 공에게 당겨 보기를 청하였다. 공이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마시며 「이 활은 만듦새가 매우 묘하다」 하고 급히 활 만드는 이를 불러 그 모양대로 만들게 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 불에 쬐게 하니 힘줄의 힘이 조금 풀렸다. 조용히 당겨 가득히 하니 야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였다.
48「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물으소서」 — 변계량의 고집
卞文肅公季良性固執。宣德年間賀白雉表詞中。有惟玆白雉之語。文肅曰玆字宜中行。諸公曰不屬上何謂中行。文肅固執之。諸公曰宜取旨。世宗是諸公之議。文肅復啓曰。耕當問奴。織當問婢。殿下爲國。若鷹犬宜問文孝宗輩。至於詞命。當依任老臣。不可輕許他議。世宗不得已從之。
문숙공 변계량은 성품이 고집스러웠다. 선덕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문 가운데 「오직 이 흰 꿩〔惟玆白雉〕」이라는 말이 있었다. 문숙이 「자(玆) 자는 마땅히 가운데 줄에 놓아야 한다」 하니 여러 공이 「위에 붙지 않는데 어찌 가운데 줄이라 하는가」 하였다. 문숙이 고집하니 여러 공이 「임금의 뜻을 받자」 하였다. 세종께서 여러 공의 의논을 옳다 하시니 문숙이 다시 아뢰기를 「밭 가는 일은 마땅히 종에게 묻고 베 짜는 일은 마땅히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심에 매와 개 같은 것은 마땅히 문효종의 무리에게 물으시고, 사명(辭命)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늙은 신하에게 맡기시고 가벼이 다른 의논을 허락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세종께서 부득이 그 말을 따르셨다.
49호랑이를 쏘고도 무슨 짐승인지 몰랐던 최윤덕
崔貞烈公潤德生而母卒。父雲海鎭邊不能擧。托養于同隣楊水尺家。稍長膂力絶人。挽强射堅。時隨水尺出獵。所獲實多。一日牧山中。有大蟲瞥出林莽。諸畜犇散。公驟騎一發一箭斃之。來報水尺曰。有物斑紋。其大顒然。是何物。吾已射殪之。水尺往見。乃一大虎也。水尺異之。家君出鎭合蒲。水尺以公往謁。譽公不已。家君曰當試之。及與校獵。公左右馳射。發無不中。觀者嘖嘖稱美。家君笑曰。兒手雖敏。而尙未識軌範。兒今所爲乃山虞技耳。不可謂之長技。仍敎射禦之方。遂爲名將。
정렬공 최윤덕은 나면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 최운해가 변방을 지키느라 기를 수 없어 이웃의 양수척 집에 맡겨 기르게 하였다. 조금 자라자 힘이 남보다 뛰어나 강한 활을 당기고 굳은 것을 쏘았다. 때로 수척을 따라 사냥을 나가면 잡는 것이 실로 많았다. 하루는 산속에서 짐승을 치는데 큰 짐승이 숲에서 언뜻 나오자 여러 가축이 달아나 흩어졌다. 공이 말을 달려 한 화살로 죽이고 와서 수척에게 「얼룩무늬가 있고 크기가 우뚝한 물건이 있기에 무슨 물건인가 하여 내가 이미 쏘아 죽였다」 하였다. 수척이 가서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였다. 수척이 기이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합포에 나가 지킬 때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 뵈며 공을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땅히 시험해 보리라」 하고 함께 사냥하니 공이 좌우로 말을 달리며 쏘아 쏘는 것마다 맞히지 않음이 없어 보는 이들이 혀를 차며 칭찬하였다. 아버지가 웃으며 「아이의 손은 비록 재빠르나 아직 법도를 알지 못한다. 아이가 지금 하는 것은 곧 산지기의 재주일 뿐이니 뛰어난 재주라 할 수 없다」 하고 이어 쏘고 모는 법을 가르치니 마침내 이름난 장수가 되었다.
50아이 종이 오줌을 누어도 노하지 않은 황희
黃翼成公喜度量寬洪。有大臣之體。居相位三十年。享年九十。論決國事。務從寬大。平居淡如。雖兒孫僮僕羅列左右啼號戱噱。畧不可禁。或有挽胡批頰者。亦從其所爲。嘗引僚佐議事。方濡筆書牘。有童奴溺其上。公無怒色。但以手拭之而已。其德量如此。嘗謫在南原七年。閉門端坐不接賓客。手執韻書一帙。凝神注目而已。後雖年高。於字書音義偏傍點畫。百不一失。
익성공 황희는 도량이 너그럽고 넓어 대신의 체가 있었다. 재상 자리에 삼십 년을 있었고 나이 아흔을 누렸다. 나랏일을 논하고 결단할 때 너그럽고 큰 것을 따르기에 힘썼다. 평소 담담하여 비록 아이와 손자, 종들이 좌우에 벌여 울부짖고 희롱하며 웃어도 조금도 금하지 않았고, 혹 수염을 잡아당기고 뺨을 치는 이가 있어도 그 하는 대로 두었다. 일찍이 요좌를 불러 일을 의논하며 붓을 적셔 문서를 쓰는데 아이 종이 그 위에 오줌을 누었다. 공이 노한 낯빛 없이 다만 손으로 닦을 뿐이었으니 그 덕과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에 귀양살이 일곱 해 동안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손님을 맞지 않고 손에 운서 한 질을 잡아 정신을 모아 눈여겨볼 뿐이었다. 뒤에 나이가 높아서도 글자의 소리와 뜻, 편방과 점획에 백에 하나도 그르치지 않았다.
51「산수는 좋으나 품관이 몹시 나쁩니다」
河文孝公演讌居常著烏紗帽。去軟角。焚香靜坐。終日唫哦。爲詩奇僻近古。筆法遒勁得體。嘗言。少時在春坊。作詩手寫之。河浩亭嘆曰。河文學作而河文學寫。亦一人間寶玩也。文孝嘗按慶尙道。南政丞智爲亞使。公甚器重。不以僚佐待之。嘗行至晉州。文孝嘆山川雲物之勝。公晉人也。南改容曰。山水雖勝。而品官甚惡。文孝大笑。人服其雅量。後與南同升黃閣。
문효공 하연은 한가히 거처할 때 늘 오사모를 쓰되 연각을 떼고 향을 사르며 고요히 앉아 종일 읊조렸다. 시를 지으면 기이하고 벽스러워 옛에 가까웠고 필법은 굳세어 체를 얻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젊을 때 춘방에 있으며 시를 지어 손수 썼더니 하 호정이 감탄하여 『하 문학이 짓고 하 문학이 썼으니 또한 인간의 한 보배로운 완상거리다』 하였다」 하였다. 문효가 일찍이 경상도를 안찰할 때 정승 남지가 아사가 되었는데, 공이 매우 그릇으로 여겨 요좌로 대하지 않았다. 일찍이 진주에 이르러 문효가 산천과 경물의 뛰어남을 감탄하였다. 공은 진주 사람이었는데 남지가 낯빛을 고치며 「산수는 비록 뛰어나나 품관이 몹시 나쁩니다」 하니 문효가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뒤에 남지와 함께 황각에 올랐다.
52「여윈 매 재상」이라 불린 허조
許文敬公稠簡嚴方正。公廉淸謹。動慕聖賢。每鷄鳴盥櫛。冠帶正坐。雖終日不見惰容。矻矻常以國事爲念。言不及私。論議國政。自信獨守。不與人軒輊。時稱賢宰相。家法亦嚴。子弟有過。必告祠堂罰之。奴婢有罪。按律治之。公自幼銷瘦如削。肩背傴僂。嘗判禮曹。定上下服色儀制。截然有分。巿井輕薄子深疾之。號曰瘦鷹宰相。蓋鷹肥則颺去。瘦則思搏禽也。
문경공 허조는 간략하고 엄하며 방정하고, 공정하고 청렴하며 맑고 삼갔으며 움직이면 성현을 사모하였다. 닭이 울 때마다 세수하고 빗질하고 관대를 갖추어 바로 앉아 종일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부지런히 늘 나랏일을 마음에 두고 말이 사사로움에 미치지 않았으며, 국정을 논의할 때 스스로 믿고 홀로 지켜 남과 높낮이를 다투지 않으니 당시에 어진 재상이라 일컬었다. 가법도 엄하여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벌하였으며 노비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따라 다스렸다. 공은 어려서부터 깎은 듯 여위고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를 맡아 위아래 옷 빛깔과 의제를 정하여 뚜렷이 분별이 있게 하니 저잣거리의 경박한 자들이 몹시 미워하여 「여윈 매 재상」이라 불렀다. 대개 매는 살찌면 날아가 버리고 여위면 새 잡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53저 쌍비둘기는 암수가 나란한데
金孝襄公孝誠莊襄公南秀之子也。莊襄與妻吉氏異居。孝襄年四五歲。有奴抱立桑樹下。忽有雙鳩來集。孝襄曰。瞻彼雙鳩。雌雄並行。吾父母各在東西何耶。仍泣下奴異之。告吉氏亦泣。鄕閭皆異之。公事母至孝。公年五十七。而吉氏卒。廬墓喪祭。一出至誠。物論多之。
효양공 김효성은 장양공 김남수의 아들이다. 장양이 아내 길씨와 따로 살았는데 효양이 네다섯 살 때 종이 안고 뽕나무 아래 섰더니 문득 비둘기 한 쌍이 와서 앉았다. 효양이 「저 쌍비둘기를 보니 암수가 나란히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각기 동과 서에 계심은 어째서인가」 하고 이어 눈물을 흘렸다. 종이 기이하게 여겨 길씨에게 고하니 길씨도 울었고 향리가 다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공의 나이 쉰일곱에 길씨가 죽으니 여묘살이와 상제를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에서 하여 물론이 훌륭히 여겼다.
54시와 그림과 글씨 삼절 강희안
姜戴敏公碩德性好古。風流文雅。近代無比。作詩最高古。書畫亦妙絶。諡之曰敏宜矣。諡法好古不怠曰敏。此元朝學士趙文敏之敏也。世之人以公不於紅紙上題名輕之。甚非也。子府尹希顏字景愚。畫詩書三絶。獨步一時。詩似韋柳。畫似劉郭。書兼王趙。爲人有才有德。眞大人君子也。不大厥施。惜哉。
대민공 강석덕은 성품이 옛것을 좋아하고 풍류와 문아가 근대에 견줄 데가 없었다. 시를 지으면 가장 높고 예스러웠으며 글씨와 그림도 묘하게 빼어났다. 시호를 민(敏)이라 한 것이 마땅하다. 시법에 「옛것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음을 민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원나라 학사 조문민(趙文敏)의 민이다. 세상 사람이 공을 홍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하여 가벼이 여기니 매우 잘못이다. 아들 부윤 희안은 자가 경우인데 그림과 시와 글씨 세 가지가 뛰어나 한 시대에 홀로 걸었다. 시는 위응물·유종원 같고 그림은 유송년·곽희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겸하였다. 사람됨이 재주가 있고 덕이 있어 참으로 대인군자였는데 그 베풂을 크게 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55썩어도 집안 식구에게 맛보이지 않은 청렴
趙中樞吾倅陜川。暑月鱸魚山積。雖腐爛不許家小得嘗。人皆服其廉。或曰與其腐爛棄之於地。寧使家小得嘗。況不以此傷廉乎。趙家至貧。其爲禮曹正郞。避方賃屋。桂玉不繼。同僚有以白粒三斗問之者。不受。後於公座誇之。人或有譏其矜作。然平居。關節不到。後退老村莊。室如懸磬。無絲毫干請於人。眞廉謹篤信君子也。
중추 조오가 합천 원이 되었는데 더운 달에 농어가 산처럼 쌓여도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집안 식구가 맛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그 청렴에 탄복하였다. 어떤 이는 「썩어 문드러져 땅에 버리느니 차라리 집안 식구가 맛보게 하는 것이 낫다. 하물며 이것으로 청렴을 손상하지 않음에랴」 한다. 조씨 집안은 지극히 가난하였다. 그가 예조정랑이 되었을 때 셋집을 빌려 살며 땔감과 쌀이 이어지지 않았다. 동료 가운데 흰쌀 서 말을 보낸 이가 있었으나 받지 않고 뒤에 공석에서 그 일을 자랑하니 어떤 이는 그 자랑함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 청탁이 이르지 않았고 뒤에 시골집으로 물러나 늙으니 집이 텅 비어 경쇠를 단 듯하였으며 털끝만큼도 남에게 청하는 일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삼가며 도타이 미더운 군자였다.
56「이 공은 혹 도둑이었던 것 아닌가」
權安肅公蹲聰明過人。明達吏體。嘗爲讞部。決獄如神。有二盜殺一家三人。情跡稍存。贓證未白。前後官吏首鼠未決。幾四五年。一日安肅前二盜而語曰。爾輩情跡甚明。敢不服。我有一語。爾無遁情。爾輩初議爲盜。如是如是。中爲作賊。如是如是。終始本末俱陳之。如是如是。爾敢隱乎哉。盜相顧吐舌曰。此公莫是曾爲盜者耶。何悉我情跡如是。遂服。
안숙공 권준은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아전의 체에 밝게 통달하였다. 일찍이 얼(讞)을 맡아 옥사를 결단함이 귀신 같았다. 두 도둑이 한 집안 세 사람을 죽였는데 정황과 자취는 조금 남았으나 장물과 증거가 밝혀지지 않아 앞뒤 관리가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한 지 거의 네댓 해였다. 하루는 안숙이 두 도둑을 앞에 놓고 말하기를 「너희 정황과 자취가 매우 밝은데 감히 복종하지 않느냐. 내게 한마디가 있으니 너희는 정을 숨기지 말라. 너희가 처음 도둑질을 의논하기를 이러이러하였고, 중간에 도적질하기를 이러이러하였으며, 처음과 끝의 본말을 다 갖추어 말하면 이러이러하다. 네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였다. 도둑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두르고 「이 공은 혹 일찍이 도둑이었던 이가 아닌가. 어찌 우리 정황과 자취를 이처럼 다 아는가」 하고 마침내 자복하였다.
57눈 속의 연꽃 — 이십 년 전의 말이 이루어지다
甲午春權文景公踶。趙判書克寬。權參判克和。金參判墩俱失志禮闈。抵水原蓮亭。文景曰。吾輩眺矂落魄至此。他日得意。細雨濛濛。雨雪霏霏。明月八簾。荷香滿座。與二三子相與觴詠。亦足賞今日之行矣。諸公抵掌曰。雨旣濛濛。雪不當霏霏。雪旣霏霏。月不當明。荷香又豈雪中得乎。何言之不倫也。文景無以應。是年秋榜。文景居大魁。諸公相繼擢第。壬子文景爲京畿監司諸公會餞。趙執盞言曰。水州雪中荷花。今可賞矣。文景笑曰。欲與君共耳。不數月趙出宰是府。文景巡臨。趙行禮詣就座。適荷花盛開。相目而笑。文景有詩曰。雨雪霏霏月政明。荷香荏苒滿亭淸。當時此說神應祕。二十年前事已成。
갑오년 봄에 문경공 권제와 판서 조극관, 참판 권극화, 참판 김돈이 다 과거에 뜻을 잃고 수원 연정에 이르렀다. 문경이 「우리가 낙심하여 여기까지 왔으나 뒷날 뜻을 얻으면 가랑비 부슬부슬하고 눈발 흩날리며 밝은 달이 발에 들고 연꽃 향기가 자리에 가득할 때 두세 분과 서로 술 마시고 읊는다면 또한 오늘의 걸음을 상 줄 만하겠다」 하였다. 여러 공이 손뼉을 치며 「비가 이미 부슬부슬하면 눈이 흩날려서는 안 되고, 눈이 이미 흩날리면 달이 밝아서는 안 되며, 연꽃 향기를 또 어찌 눈 속에서 얻겠는가. 어찌 말이 이처럼 조리가 없는가」 하니 문경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해 가을 방에 문경이 장원을 차지하고 여러 공이 잇달아 급제하였다. 임자년에 문경이 경기 감사가 되니 여러 공이 모여 전별하였다. 조극관이 잔을 잡고 「수원의 눈 속 연꽃을 이제 감상할 만하겠소」 하니 문경이 웃으며 「그대와 함께하고자 할 뿐이오」 하였다. 몇 달이 안 되어 조극관이 그 고을 원으로 나갔고 문경이 순시하여 이르니 조극관이 예를 행하고 자리에 나아갔는데 마침 연꽃이 활짝 피었다. 서로 눈짓하며 웃었다. 문경이 시를 지어 「비와 눈이 흩날리는데 달이 마침 밝고, 연꽃 향기 스며들어 정자에 가득 맑네. 그때 이 말은 신이 응하여 감춘 것이니, 이십 년 전 일이 이미 이루어졌네」 하였다.
58세 김씨와 스승의 으뜸 윤상
金文長公鈞。金文長公末。金大司成泮。皆博通經史。尤邃性理之學。同時選授胄監。誨人不倦。作成有效。人稱曰三金。而泮先逝。兩金皆年踰八耋。官躋一品。俱謚曰文長。諡法博聞多見曰文。誨人不倦曰長。其得此謚宜矣。尹提學祥時爲胄監之長。學問尤精。諸生爭先摳衣。絲分縷柝。耳提面授。終日矻矻不知倦。今之達官聞人。皆公弟子也。國朝以來。爲師範之最。
문장공 김구와 문장공 김말, 대사성 김반은 다 경사에 널리 통하고 특히 성리의 학에 깊었다. 같은 때 뽑혀 성균관에 제수되어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이룬 것이 효험이 있으니 사람들이 「세 김씨」라 일컬었다. 김반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두 김씨는 다 나이 여든을 넘고 벼슬이 일품에 올랐으며 다 시호를 문장(文長)이라 하였다. 시법에 「널리 듣고 많이 보는 것을 문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장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시호를 얻은 것이 마땅하다. 제학 윤상이 그때 성균관의 장이 되었는데 학문이 더욱 정밀하여 여러 생도가 앞을 다투어 배웠다. 실오라기를 나누고 올을 쪼개듯 귀에 대고 낯을 마주하여 가르치며 종일 부지런히 하여 게으름을 몰랐다. 지금의 높은 벼슬아치와 이름난 이가 다 공의 제자다. 국조 이래로 사범으로는 으뜸이다.
59바르게 얻어 죽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냐
金文長公末有一女無子。嘗曰。聞開千眼者得陰報。予自筮仕以來五十餘年。未嘗不待學館職。敎誨不倦。卒無嗣。豈非予荒蕪僞學未能德於人耶。將終。沐浴冠帶執笏端坐。家人痛哭。公止之曰。予位至一品。官非不達。年踰八耋。壽非不高。生死常理。得正而死。豈非幸歟。尋卒。
문장공 김말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일찍이 「듣건대 천 사람의 눈을 열어 준 이는 저승의 갚음을 얻는다 하였다. 내가 벼슬한 뒤 오십여 년에 일찍이 학관의 직을 맡지 않은 적이 없어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끝내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어찌 내가 거칠고 거짓된 학문으로 남에게 덕을 베풀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세상을 마치려 할 때 목욕하고 관대를 갖추고 홀을 잡고 단정히 앉으니 집안사람이 통곡하였다. 공이 그치게 하며 「내 자리가 일품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통달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나이가 여든을 넘었으니 수가 높지 않은 것이 아니다.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니 바르게 얻어 죽는 것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느냐」 하고 곧 세상을 떠났다.
60환관의 관을 고치자는 의논을 막다
崔先生萬理嘗爲集賢殿副提學。上書極論宦官著軟脚烏紗帽。不合古制。依中朝例著冠。其言曰。自古歷代人主。寵任宦官。權傾天下者甚多。然不能易其冠者。蓋以閽寺之流。不可混於縉紳。駭人觀聽耳。言甚切至。諸宦官側目相視。議遂寢。
최만리 선생이 일찍이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글을 올려, 환관이 연각 오사모를 쓰는 것은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중국 조정의 예에 따라 관을 쓰게 하자는 것을 힘써 논하였다. 그 말에 「예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총애하고 맡겨 권세가 천하를 기울인 이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 관을 바꾸지 못한 것은 대개 문지기 무리를 진신과 섞을 수 없어 사람의 보고 듣는 것을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니 여러 환관이 곁눈질하며 서로 보았고 그 의논이 마침내 그쳤다.
61『고려사절요』 초고는 남수문의 손에서 나왔다
柳先生義孫。權先生採。辛文僖碩祖。南先生秀文。同在集賢殿。文章齊名一時。而物論尤推重南先生。高麗史節要初草。大抵皆出於南手也。諸君皆不大達。惜也。
유의손 선생과 권채 선생, 문희공 신석조, 남수문 선생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며 문장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물론은 남 선생을 더욱 높이 쳤다. 『고려사절요』 초고는 대개 다 남 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여러 분이 다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62여섯 해 붕어를 먹지 않고 세 해 전복을 먹지 않다
奇公虔嘗宰延安府。鮒魚多產。公私徵請輻湊。弊或及民。前此有宰姓金者。喜食鮒魚。邑人嘲之。大書館壁曰。六年何事業。喫盡一池魚。奇欲避謗。六年不食鮒魚。又出牧濟州。濟之有鰒。猶延之有鮒也。三年亦不食。人皆服其執而疑其作也。
기건 공이 일찍이 연안부 원이 되었다. 붕어가 많이 나서 공사간의 요구가 몰려들어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씨 성의 원이 있었는데 붕어 먹기를 좋아하니 고을 사람이 조롱하여 객관 벽에 크게 쓰기를 「여섯 해에 무슨 사업을 하였나, 한 못의 물고기를 다 먹었네」 하였다. 기건이 비방을 피하려고 여섯 해 동안 붕어를 먹지 않았다. 또 제주 목사로 나갔는데 제주에 전복이 있는 것은 연안에 붕어가 있는 것과 같았다. 세 해 동안 또한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그 지킴에 탄복하면서도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인가 의심하였다.
63금규화 아래 엎드리기를 바랍니다
金判書銚早以文學著名。世宗嘗宴群臣。皆酒酣。上曰。今日諸君。各陳平生所願。銚曰。臣願百年之內日侍御榻。進退俯伏於金葵花底而已。群臣皆曰。臣等所願無踰於銚。上笑。
판서 김요는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세종께서 일찍이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다들 술이 얼근하자 임금께서 「오늘 여러분은 각기 평생 바라는 바를 말하라」 하셨다. 김요가 「신은 백 년 안에 날마다 임금의 걸상을 모시며 금규화 아래에서 나아가고 물러나며 엎드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니 뭇 신하가 다 「신들이 바라는 바도 김요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웃으셨다.
64도둑은 그쳤으나 억울한 죽음도 많았다
金文節公淡性溫雅淡簡。喜怒不形於色。然善治盜。嘗守忠州安東慶州三邑。人有犯盜情跡。少有可疑。必殺勿饒。盜不入境。民賴以安。然枉殺亦多。公享年不永。刑罰之於人。甚可畏也。
문절공 김담은 성품이 따뜻하고 아담하며 담박하고 간략하여 기쁨과 노함을 낯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도둑 다스리기를 잘하였다. 일찍이 충주·안동·경주 세 고을을 맡았는데 도둑질한 정황과 자취가 있는 자는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았다. 도둑이 경내에 들지 못하여 백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하였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인 이도 또한 많았다. 공은 수를 길게 누리지 못하였다. 형벌을 사람에게 쓰는 일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65먹지 않고 사느니 먹고 죽겠다 — 가죽신 술잔
李文安公思哲體質豐大。飮食過人。每食一大器飯二蒸鷄一壺酒。患背腫臨絶。醫云宜忌炙肉毒酒。公曰與其不食而生。毋寧食之而死乎。飮酒啗炙如常。卒獲平善。人皆曰享富貴者。飮食亦異於常矣。文安之少也。與諸輩遊三角山僧寺。各佩壺。但無飮器。時權斯文枝穿新制馬皮套鞋。文安先酌飮之。諸公以次飮之。相視大笑曰。皮鞋杯自我作古。不亦可乎。後文安貴顯。語權曰。今日金杯酒味。大不如遊山時皮鞋杯也。
문안공 이사철은 몸이 크고 넉넉하며 먹고 마심이 남보다 지나쳤다. 끼니마다 큰 그릇 밥 하나에 찐 닭 둘, 술 한 병을 먹었다. 등창을 앓아 죽게 되니 의원이 「구운 고기와 독한 술을 삼가야 합니다」 하였다. 공이 「먹지 않고 사느니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술 마시고 구운 고기 먹기를 평소같이 하였는데 마침내 평안함을 얻었다. 사람들이 다 「부귀를 누리는 이는 먹고 마심도 보통과 다르다」 하였다. 문안이 젊을 때 여러 벗과 삼각산 절에 놀러 갔다. 각기 술병을 찼으나 마실 그릇이 없었다. 그때 사문 권지가 새로 지은 말가죽 신을 신었는데 문안이 먼저 거기 따라 마시고 여러 공이 차례로 마셨다. 서로 보며 크게 웃고 「가죽신 잔은 나로부터 옛일이 되었으니 또한 좋지 않은가」 하였다. 뒤에 문안이 귀하게 드러나자 권에게 「오늘 금 잔의 술맛은 산에 놀 때 가죽신 잔만 크게 못하다」 하였다.
66제 아들을 방에서 지워 버린 정갑손
鄭貞節公甲孫性淸直嚴峻。子弟不敢干以私。嘗爲咸吉道監司。被召如京。及還道見解榜。子烏亦中焉。公奮髥怒罵試官曰。老奴敢狐媚我乎。吾兒烏業未精。豈可僥倖欺君耶。遂鉤去之。竟黜試官。
정절공 정갑손은 성품이 맑고 곧으며 엄하고 준엄하여 자제가 감히 사사로움으로 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가 되었다가 부름을 받아 서울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향시의 방을 보니 아들 정오도 거기 들어 있었다. 공이 수염을 떨치며 노하여 시관을 꾸짖기를 「늙은 종놈이 감히 나에게 아첨하느냐. 내 아이 정오는 학업이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지워 버렸다. 끝내 시관을 내쫓았다.
67장막 틈으로 떨어진 잔 — 「거위 알 같은 것이 무엇이냐」
貞節爲大司憲。激濁揚淸。朝綱大振。然寬厚持大體。舊例公會臺諫必連幕而次。或時飮酒捲帳相屬。號曰捲帳飮。若値酒禁臺諫執法不飮。諫院飮醉自如。一日諫官持抔引滿。戲於帳隙示臺長。臺長亦戲以袖拂之。杯從帳隙中而墮。圜轉止於憲長案前。諸臺長惶懼無措。臺吏亦相目未敢猝止。終日在前。臺中恐生事。將仕罷。貞節語吏曰。彼如鵝卵者何物耶。可容水精珠幾顆乎。吏曰可容百顆。貞節曰可從所出隙中擲之。滿座皆服其雅量。諫院相傳。有杯形如鵝卵。可容一升許水精珠。玩禁而設者。
정절이 대사헌이 되어 흐린 것을 씻고 맑은 것을 드날리니 조정의 벼리가 크게 떨쳤다. 그러나 너그럽고 두터워 대체를 지켰다. 옛 규례에 공적인 모임에서 대간은 반드시 장막을 잇대어 자리를 잡았다. 때로 술을 마실 때 장막을 걷고 서로 잔을 권하니 이를 「걷은 장막 술」이라 불렀다. 만약 술을 금할 때를 만나면 대(臺)는 법을 잡아 마시지 않고 간원은 마시고 취하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이 잔을 잡아 가득 채우고 희롱하여 장막 틈으로 대장에게 보이니 대장도 희롱으로 소매로 떨쳤다. 잔이 장막 틈을 따라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 헌장 앞에 멎었다. 여러 대장이 두렵고 어쩔 줄 몰랐고 대의 아전도 서로 눈짓하며 감히 갑자기 치우지 못하여 종일 앞에 있었다. 대 안에서 일이 날까 두려워 장차 자리를 파하려 하였다. 정절이 아전에게 「저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슨 물건이냐. 수정 구슬 몇 낱을 담을 수 있겠느냐」 하니 아전이 「백 낱은 담겠습니다」 하였다. 정절이 「나온 틈을 따라 던져 주어라」 하니 온 자리가 다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에서 서로 전하기를 「거위 알 모양의 잔이 있어 한 되 남짓 수정 구슬을 담을 만하니 금할 때 완상하려고 둔 것이다」 하였다.
68석 잔으로 정한 것이 도리어 술을 권한 셈
尹文度公淮南集賢秀文皆能文章。而性喜酒。常飮過度。世宗惜其才。命飮酒毋過三爵。自後凡宴會。二公必飮三大椀。名雖三爵而實倍飮於他人。世宗聞而笑曰。予之戒飮。適所以勸飮也。
문도공 윤회와 남수문은 다 집현전에서 빼어나 글을 잘하였는데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늘 지나치게 마셨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끼시어 술 마시기를 석 잔을 넘지 말라 명하셨다. 그 뒤로 무릇 잔치가 있으면 두 공이 반드시 큰 사발로 셋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나 실은 남보다 갑절을 마셨다. 세종께서 들으시고 웃으시며 「내가 술을 경계한 것이 마침 술을 권한 셈이 되었구나」 하셨다.
69「달이 어디쯤 있는가」 — 동정에 있습니다
鄭文成公麟趾天資豪邁。胸次豁達。嘗酒酣。尙論古人曰。如我者倘遊聖門。純粹如顏子。篤實如曾子。固不可及。如遊夏之徒。未知何如也。歲庚午翰林侍講倪謙奉使來。文成爲官伴。周旋交際。得儐使體。又與之商礭古今。往復酬唱。侍講敬重之。常夜坐。侍講曰月在何分。公曰在東井。侍講嘆服。及辭別。侍講曰如夜深何。公曰可怕李金吾。侍講曰莫逢王玉汝。相與笑曰。天下未嘗無無對之句。歲丙寅昭憲王后赴山陵。大雨江漲。梓宮不可渡。權厝樂天亭。或云南首。或云北首。議竟未決。文成後至曰。禮在殯南首。不死其親之意。在玄宮北首之。幽之故也。今亦殯宜南首。諸公曰。宰相不可不用讀書人。
문성공 정인지는 타고난 바탕이 호매하고 가슴이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얼근하여 옛사람을 논하며 「나 같은 이가 만약 성인의 문에 놀았다면 순수하기가 안자 같고 독실하기가 증자 같기는 참으로 미치지 못하겠으나, 자유·자하의 무리 같은 것은 어떠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오년에 한림시강 예겸이 사명을 받들고 오니 문성이 관반이 되어 두루 응대하고 사귀어 손님 맞는 체를 얻었다. 또 그와 고금을 헤아려 따지고 오가며 시를 주고받으니 시강이 공경하고 무겁게 여겼다. 늘 밤에 앉아 있는데 시강이 「달이 어느 자리에 있는가」 물으니 공이 「동정(東井)에 있습니다」 하였다. 시강이 감탄하고 탄복하였다. 헤어질 때 시강이 「밤이 깊으니 어찌하리」 하니 공이 「이 금오(李金吾)가 두렵습니다」 하였다. 시강이 「왕 옥여(王玉汝)를 만나지 마시오」 하고 서로 웃으며 「천하에 짝 없는 글귀란 없구나」 하였다. 병인년에 소헌왕후를 산릉으로 모시는데 큰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 재궁을 건널 수 없어 낙천정에 임시로 모시게 되었다. 어떤 이는 머리를 남으로 두자 하고 어떤 이는 북으로 두자 하여 의논이 끝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이 뒤에 이르러 「예에 빈소에서 머리를 남으로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은 이로 여기지 않는 뜻이요, 현궁에서 북으로 두는 것은 그윽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빈소이니 마땅히 남으로 두어야 합니다」 하니 여러 공이 「재상은 글 읽은 사람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70「이계전의 상소가 또 왔구나」
侍從封章。始盛於李文烈公季甸。文烈在集賢殿。屢欲封章論事。有一二同列。官居文烈之上。每沮之曰。自古喜論事者。終受禍。況我侍從者。講論德義。啓沃輔道而已。至於諫諍非職也。君勿好事。文烈曰。人各有心。論事之敗之榮。不如含默之恥之深耶。遂率下僚抗疏極陳者。非一再矣。而上官終不署名。物論譏之。每進封章。世宗曰。季甸之疏又來矣。遂有大用之志。尋擢同副承旨。
시종이 봉장을 올리는 일은 문열공 이계전에게서 비로소 성하였다. 문열이 집현전에 있으며 여러 번 봉장으로 일을 논하려 하였는데 한두 동료가 벼슬이 문열보다 위에 있어 늘 막으며 「예부터 일 논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끝내 화를 받는다. 하물며 우리 시종하는 자는 덕과 의를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을 적시고 도와 이끌 뿐이니 간쟁에 이르러서는 직분이 아니다. 그대는 일 벌이기를 좋아하지 말라」 하였다. 문열이 「사람은 각기 마음이 있다. 일을 논하다 그르치는 것이 머금고 잠잠한 부끄러움이 깊은 것만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아래 요속을 이끌고 상소하여 극진히 아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윗자리 관원은 끝내 이름을 적지 않으니 물론이 그것을 나무랐다. 봉장을 올릴 때마다 세종께서 「이계전의 상소가 또 왔구나」 하시고 마침내 크게 쓰실 뜻을 두어 곧 동부승지로 뽑으셨다.
71「얻고 못 얻는 것이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權翼平公擥弱齡有大志。博覽强記。才名挺出儕輩。然屢屈場屋。怡然自處。不屑屑於懷。予誦孟郊詩曰。出門卽有礙。誰謂天地寬。郊之落第悲悴困窮者。無所容其身者。今子將無然乎。翼平笑曰。得不得寧非命耶。予知其爲大器。後翼平年三十五。以文擢壯元。四十六入相。爲一代元勳之首。蓋眺矂悲傷。士之常情。而公之大度如是。郊之不遇。豈非局小使然耶。
익평공 권람은 어린 나이에 큰 뜻이 있어 널리 보고 굳세게 기억하며 재주와 이름이 또래에서 뛰어났다. 그러나 여러 번 과장에서 굽혀도 기꺼이 스스로 처하여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내가 맹교의 시를 외워 「문을 나서면 곧 막힘이 있으니 누가 하늘과 땅이 넓다 하였는가」 하고, 「맹교가 낙제하여 슬퍼하고 초췌하며 곤궁하여 그 몸을 둘 데가 없던 것이 지금 그대는 그렇지 않은가」 하였다. 익평이 웃으며 「얻고 못 얻는 것이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하니 나는 그가 큰 그릇이 될 줄 알았다. 뒤에 익평이 나이 서른다섯에 글로 장원에 뽑히고 마흔여섯에 정승에 들어 한 시대 원훈의 으뜸이 되었다. 대개 실의하여 슬퍼함은 선비의 떳떳한 정인데 공의 도량이 이와 같았다. 맹교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도 어찌 국량이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72태풍 속에서도 태연하고, 밤새 책을 읽다
申文忠公叔舟嘗奉使日本。回還到我境。不及數里。忽遭颶風。未及艤岸。衆皆蒼黃。公神色自若曰。大丈夫當遠游四方以蕩襟懷。今涉洪濤。見日出之鄕。足爲壯觀。倘乘此風。得泊金陵。飽見山河雲物之盛。亦一快也。時刷還孕婦在舟中。衆曰。自古孕婦於行船大忌。宜投海以穰。公曰。殺人求活。於德不祥。强止之。俄而風定。文忠始登第。選入集賢殿。一日當直入藏書閣。取平昔所未見書讀之。漏已下三鼓。世宗遣小宦覘視。端坐讀書。及四鼓又遣覘之。亦如是。函賜御衣以奬。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우리 경계에 이르렀는데 몇 리를 못 미쳐 홀연 태풍을 만나 언덕에 배를 대지 못하였다. 여럿이 다 창황하였으나 공은 낯빛이 태연하여 「대장부는 마땅히 멀리 사방에 놀아 가슴을 씻어야 한다. 이제 큰 물결을 건너 해 뜨는 고장을 보았으니 넉넉히 장한 구경이 된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에 닿는다면 산하와 구름과 물건의 성함을 실컷 볼 것이니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데려오는 아이 밴 여인이 배 안에 있었는데 여럿이 「예부터 아이 밴 여인은 배 다니는 데 크게 꺼립니다. 마땅히 바다에 던져 액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였다. 공이 「사람을 죽여 살기를 구하는 것은 덕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굳이 말렸다. 이윽고 바람이 자었다. 문충이 처음 급제하여 집현전에 뽑혀 들어갔다. 하루는 숙직하다 장서각에 들어가 평소 못 보던 책을 가져다 읽었다. 물시계가 이미 삼경을 알리니 세종께서 작은 환관을 보내 엿보게 하시니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사경이 되어 또 엿보게 하셨는데 또한 그와 같았다. 임금께서 어의를 함에 담아 내리시어 장려하셨다.
73「참의는 내가 마음대로 한다 여겨 참여치 않으려는가」
具忠烈公致寬性方嚴公正。嘗判吏曹。關節不行。前此長銓曹者。例於除授之際。親執官案。恣行胸臆。亞官以下。袖手傍觀。公嘗憤之。思欲矯其弊。凡進退人物。博採群議。雖小官卑職。未嘗獨薦。又不以私恩貸親舊。嫉人干請。有或干請者。當遷不敍。時居正爲參議。一日在政房。適醉睡。公厲聲曰。參議謂致寬。注擬人物。恣行胸臆。不欲與聞耶。他日有用人之失參議其曰在家不知耶。嘗擬一文士知名者。爲臺官。駁者曰。此子滑稽不可。公曰若然則漢武帝何取於東方朔耶。竟擬臺官。又一文士調外郡敎官。十年不遷。公欲擬縣職。駁者曰。此子迂闊不可。公曰。天道十年必復。安可使人久屈如是。遂擬縣職。果有治效。公之用捨。一出至公如此。
충렬공 구치관은 성품이 방정하고 엄하며 공정하였다. 일찍이 이조를 맡으니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전조를 맡은 이는 으레 벼슬 주는 즈음에 몸소 관안을 잡고 제 뜻대로 마음껏 하였고 아관 이하는 팔짱 끼고 곁에서 볼 뿐이었다. 공이 일찍이 이를 분하게 여겨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무릇 사람을 나아가게 하고 물리침에 뭇 의논을 널리 캐어 비록 작은 벼슬 낮은 자리라도 홀로 천거한 적이 없었다. 또 사사로운 은혜로 친구를 봐주지 않고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이가 있으면 마땅히 옮길 자리라도 쓰지 않았다. 그때 나 거정이 참의였는데 하루는 정방에 있다가 마침 취해 졸았다. 공이 소리를 높여 「참의는 내가 사람을 매기는 데 제 뜻대로 마음껏 한다 여겨 참여해 듣고자 하지 않는가. 다른 날 사람 쓰는 잘못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몰랐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난 한 문사를 대관으로 매기니 반박하는 이가 「이 사람은 골계라 안 됩니다」 하였다. 공이 「그렇다면 한 무제는 동방삭에게서 무엇을 취하였는가」 하고 마침내 대관으로 매겼다. 또 한 문사가 바깥 고을 교관으로 옮겨 열 해를 옮기지 못하였는데 공이 현의 직을 주려 하니 반박하는 이가 「이 사람은 세상 물정에 어둡습니다」 하였다. 공이 「하늘의 도는 열 해면 반드시 돌아온다. 어찌 사람을 이처럼 오래 굽히게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현직에 매기니 과연 다스린 효험이 있었다. 공이 쓰고 버림이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함에서 나옴이 이와 같았다.
74「우리나라 표문이 정밀하고 절실하다」
崔文靖公恒性謙恭簡正。端介無華。平生與人語。先示退損。不自表襮又不立崖岸自異。爲文章。不襲古人畦畛。自出機杼。大放以肆雄豪富瞻。如長江大河。滔滔汩汩。百折逶迤。勢不能止。尤工於騈驪。凡朝廷事大表牋。皆出其手。華人每稱。我國表辭精切。皆公所著也。平居雖隆冬盛暑。整衣冠終日端坐。不設情容。未嘗疾語遽色。天性然也。
문정공 최항은 성품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간략하고 바르며 단정하고 꿋꿋하여 꾸밈이 없었다. 평생 남과 말할 때 먼저 물러나 겸양함을 보였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언덕처럼 높이 세워 홀로 다름을 세우지 않았다. 문장을 지으면 옛사람의 밭두렁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베틀을 내어 크게 놓아 웅호하고 넉넉하니 긴 강과 큰 내가 도도히 흘러 백 번 굽이쳐도 그 형세를 그칠 수 없는 것 같았다. 특히 변려문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의 사대 표전이 다 그 손에서 나왔다. 중국 사람이 늘 「우리나라 표문의 말이 정밀하고 절실하다」 일컬었는데 다 공이 지은 것이다. 평소 지낼 때 비록 한겨울 무더위라도 옷과 관을 정제하고 종일 단정히 앉아 편한 모습을 짓지 않았으며 급히 말하거나 갑작스러운 낯빛을 보인 적이 없으니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75구결을 정하다 — 「영성은 참으로 천재다」
世祖嘗嘆。東方學者。語音不正。句讀不明。雖有先儒權近鄭夢周口訣。紕繆尙多。腐儒俗士。傳訛承誤。遂命老臣宿儒。分授四書五經。考古證今。參定口訣。又會文儒講同異。上親加睿裁。文靖常在左右。每承顧問。毫分縷析。應對如響。上聽之亹亹不厭。語左右曰。寧城眞天才也。
세조께서 일찍이 「동방의 학자는 말소리가 바르지 않고 구두가 밝지 못하다. 비록 앞선 유학자 권근·정몽주의 구결이 있으나 그릇된 것이 아직 많아 썩은 선비와 속된 선비가 잘못을 전하고 그릇된 것을 이어받는다」 하고 탄식하셨다. 마침내 늙은 신하와 익은 유학자에게 명하여 사서오경을 나누어 맡겨 옛것을 상고하고 지금 것을 증험하여 구결을 헤아려 정하게 하셨다. 또 문유를 모아 같고 다름을 강론하게 하고 임금께서 몸소 밝은 재결을 더하셨다. 문정이 늘 좌우에 있어 물으실 때마다 터럭처럼 나누고 올처럼 쪼개어 메아리처럼 대답하니 임금께서 부지런히 들으시고 싫증내지 않으셨다. 좌우에 이르시기를 「영성(寧城)은 참으로 천재다」 하셨다.
76「춘추 때 났다면 숙향과 자산 아래가 아니었을 것」
朴文憲公元亨明達事體。諳熟典故。中原使臣陳鑑高閏張寧陳嘉猷之來。皆爲儐。周旋交際。咸中其宜。張奉使嘗語文憲曰。如子之才。生於春秋之時。當不在叔向子產之下矣。
문헌공 박원형은 사리에 밝게 통달하고 전고에 익숙하였다. 중국 사신 진감·고윤·장녕·진가유가 왔을 때 다 손님 맞는 자리를 맡아 두루 응대하고 사귀는 것이 다 마땅함에 맞았다. 장이 사명을 받들고 왔을 때 일찍이 문헌에게 「그대 같은 재주가 춘추의 때에 났다면 마땅히 숙향과 자산의 아래에 있지 않았을 것이오」 하였다.
77이시애의 난 — 칼이 담처럼 둘러도 태연히
尹文憲公子雲。爲咸吉道體察使。至安邊。聞李施愛殺節度使康孝文。又殺吉州牧使薛丁新。據州以叛。分遣腹心于諸郡。殺守令殆盡。兇徒所在響應。公倍道至咸興。是夕賊又作亂。殺監司申㴐。盡殺公差官吏。尋移兵抵公所。排闥露刃環庭者如墻。公整衣冠端坐。言笑自若。賊懼而退。嘯聚之黨。恣行胸臆。狙詐不測。公在圍中者七日。處之泰然。屹不動心。賊悔悟。或有周旋左右爲公地者。卒全身而還。
문헌공 윤자운이 함길도 체찰사가 되어 안변에 이르렀는데, 이시애가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또 길주목사 설정신을 죽이고 고을을 차지하여 반란한 것을 들었다. 심복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보내 수령을 거의 다 죽이니 흉한 무리가 가는 곳마다 호응하였다. 공이 길을 갑절로 달려 함흥에 이르렀는데 그날 저녁 도적이 또 난을 일으켜 감사 신면을 죽이고 공이 데린 관리를 다 죽였다. 이어 군사를 옮겨 공이 있는 곳에 이르러 문을 밀치고 칼을 드러내어 뜰을 두른 것이 담과 같았다. 공이 옷과 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말하고 웃기를 태연히 하니 도적이 두려워 물러갔다. 휘파람으로 모인 무리가 제 뜻대로 마음껏 하며 속임이 헤아릴 수 없었으나 공이 에워싸인 가운데 이레를 있으면서도 태연히 처하여 우뚝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도적이 뉘우쳐 깨닫고 혹 좌우에서 두루 공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이도 있어 마침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왔다.
78솥을 부수어 근량대로 나누라
咸東原禹治嘗爲全羅道監司。有閥閱兄弟爭釜大小訴於官者。咸怒命吏。亟取大小二釜來曰。當擊碎均其斤兩而分之。二人服。訴遂止。
동원군 함우치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다. 벌열 집안의 형제가 솥의 크고 작음을 다투어 관에 하소연한 일이 있었다. 함이 노하여 아전에게 명하여 급히 크고 작은 두 솥을 가져오게 하고 「마땅히 쳐서 부수어 그 근량을 고르게 하여 나누어 주겠다」 하니 두 사람이 굴복하여 하소연이 마침내 그쳤다.
79칼이 정수리를 스쳐도 돌아보지 않은 홍일동
洪中樞逸童器宇卓犖。性任天眞。不脩邊幅。善詞賦劇飮。無何醉則用草葉作吹笛聲。悲壯震厲。平居獨撫古琴。有絃無譜。嘗曰。吾之琴得淵明千古不傳之趣。昔伯牙鼓琴。唯子期知之。吾之琴。淵明不生。世無知者。天地間奇男子也。嘗於上前論佛事。世祖佯怒曰。當殺此虜以謝佛氏。命左右取劍來。逸童論辨自若。左右佯以劍撫頂者再。亦不顧視。無懼色。世祖壯之曰。汝能飮乎。逸童曰。樊噲漢士也。項王他主也。巵酒彘肩不敢辭。況聖賜乎。賜酒一銀盆。健倒。上曰頗畏死乎。逸童曰。當死則死。當生則生。敢以生死而易其心乎。上喜賜貂裘一領。慰解之。
중추 홍일동은 기량이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함에 맡겨 겉을 꾸미지 않았다. 사부에 능하고 몹시 마셨다. 얼마 안 되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니 슬프고 씩씩하며 떨쳐 울렸다. 평소 홀로 옛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으나 악보가 없었다. 일찍이 「내 거문고는 도연명의 천고에 전하지 않는 취를 얻었다. 옛날 백아가 거문고를 타매 오직 종자기가 알았는데 내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지 않았으니 세상에 아는 이가 없다」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의 기이한 사내다. 일찍이 임금 앞에서 불사를 논하니 세조께서 짐짓 노한 체하시며 「마땅히 이놈을 죽여 부처에게 사죄하겠다」 하시고 좌우에 칼을 가져오라 명하셨다. 일동이 논변하기를 태연히 하니 좌우가 짐짓 칼로 정수리를 두 번 스쳐도 또한 돌아보지 않고 두려운 낯빛이 없었다. 세조께서 장하게 여기시고 「너는 마실 수 있느냐」 하시니 일동이 「번쾌는 한나라 신하요 항왕은 남의 주인이었는데도 큰 잔 술과 돼지 어깨를 감히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거룩한 임금께서 내리심에랴」 하였다. 술 한 은동이를 내리시니 씩씩하게 기울였다. 임금께서 「자못 죽기를 두려워하느냐」 하시니 일동이 「죽어야 하면 죽고 살아야 하면 삽니다.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기뻐하시어 담비 갖옷 한 벌을 내리고 위로하여 풀어 주셨다.
80「뜻이 있어도 펴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逸童嘗遊眞寬寺。食餠一器麪三椀飯三鉢豆腐麪九椀。及到山下。有餉之者。食蒸鷄二隻魚羹三椀魚膾一盤酒四十餘觚。觀者壯之。明日世祖聞之。召逸童問曰。信如是能喫乎。逸童拜謝。上曰壯士也。然常時出入。但食餌屑醇酒而已。不喫飯。後到洪州劇飮。尋卒。人疑其爛腹也。有志不施。位不滿能。惜哉。
일동이 일찍이 진관사에 놀러 가 떡 한 그릇, 국수 세 사발, 밥 세 바리, 두부 국수 아홉 사발을 먹었다. 산 아래 이르러 대접하는 이가 있어 찐 닭 두 마리, 생선국 세 사발, 생선회 한 소반, 술 마흔 잔 남짓을 먹으니 보는 이가 장하게 여겼다. 이튿날 세조께서 들으시고 일동을 불러 「참으로 그처럼 먹을 수 있느냐」 물으시니 일동이 절하고 사례하였다. 임금께서 「장사로다」 하셨다. 그러나 평소 드나들 때는 다만 떡가루와 진한 술만 먹고 밥은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에 이르러 몹시 마시고 곧 죽으니 사람들이 배가 문드러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뜻이 있어도 펴지 못하고 자리가 재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81매성유와 윤서 — 희롱과 스스로 기약한 말이 다 맞다
唐末鄭谷以詩鳴於世。時人稱其官爲鄭都官。宋梅聖兪晩年得都官。一日會歐陽永叔家。劉原父戲之曰。聖兪官必至於此。昔有鄭都官。今有梅都官。座客皆驚。而聖兪亦不樂。未幾病卒。居正少與尹恕同游學。恕嘗自言。萬一登第得爲司諫院正言。必休官。男子於紅旌上。書正言二字足矣。諸君勿訝也。恕與居正同登甲子科。庚午辛末年間。始授正言。居正戲曰。可休官矣。恕笑曰。第觀之。未幾病卒。蓋原父戲聖兪。尹恕之自期。果合於言。是何理耶。
당나라 말에 정곡이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그때 사람이 그 벼슬을 일컬어 「정도관(鄭都官)」이라 하였다. 송나라 매성유가 늘그막에 도관 벼슬을 얻었다. 하루는 구양수의 집에 모였는데 유원보가 희롱하여 「성유의 벼슬은 반드시 여기에 이를 것이다. 옛날에 정도관이 있었고 지금 매도관이 있다」 하였다. 자리의 손님이 다 놀랐고 성유도 즐거워하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나 거정은 젊어서 윤서와 함께 배웠다. 윤서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만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이 된다면 반드시 벼슬을 그만두겠다. 사내가 붉은 명정 위에 『정언』 두 글자를 쓰면 넉넉하다. 여러분은 의아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윤서가 나와 함께 갑자년 과거에 올랐고 경오·신미 사이에 비로소 정언에 제수되었다. 내가 희롱하여 「벼슬을 그만두어야겠구나」 하니 윤서가 웃으며 「두고 보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대개 유원보가 매성유를 희롱한 것과 윤서가 스스로 기약한 것이 과연 말과 맞았으니 이 무슨 이치인가.
82권근의 『입학도설』과 권채의 『작성도』
陽村權文忠公常著入學圖說。依周子太極圖及朱子中庸章句之說。作天人心性合一之圖。廣大該包。精深微妙。擴前聖之未發。開後學於無窮。君子修之吉小人悖之凶之說。則但擧大綱以示學者。其旨深矣。猶子權先生採。亦依圖說及朱子中庸大學章句或問之說。以著天理流行發育之象及學者變化氣質作聖之道。其進德先後之目則引孔曾思孟之說。用功淺深之意則斷以程朱諸子之論。其論天人心性之說。多有所發揚陽村之意焉。於是著作聖圖。
양촌 문충공 권근은 일찍이 『입학도설』을 지었는데, 주자(周子)의 태극도와 주자(朱子) 『중용장구』의 설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지도」를 지었다. 넓고 커서 다 아우르고 정밀하고 깊어 미묘하니, 앞선 성인이 밝히지 못한 것을 넓히고 뒷 학자를 끝없이 열어 주었다. 군자가 닦으면 길하고 소인이 어기면 흉하다는 설은 다만 큰 벼리만 들어 배우는 이에게 보였으니 그 뜻이 깊다. 조카 권채 선생도 『도설』과 주자의 『중용』·『대학』 장구와 혹문의 설에 의거하여, 천리가 흘러 다니며 발육하는 모습과 배우는 이가 기질을 변화시켜 성인이 되는 길을 지었다. 덕에 나아가는 앞뒤의 조목은 공자·증자·자사·맹자의 설을 끌어 왔고, 공부의 얕고 깊은 뜻은 정자·주자 여러 분의 논으로 끊었다. 그 천인심성을 논한 설은 양촌의 뜻을 드날린 것이 많다. 이에 『작성도(作聖圖)』를 지었다.
83주사위는 주사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近世好事者。有成佛圖。有從政圖。皆用骰子。權先生採。著作聖圖。其目有十三。曰論圖象。曰論性理。曰論陰陽。曰論造化。曰論氣質。曰論誠敬。曰論資質。曰論功夫淺深。曰論用功作輟。曰論賢智。曰論愚不肖。曰論進德先後。曰摠論。於十三論之中。亦有多少節目。又用骰子。六面書誠敬肆僞四字。但誠再書而肆僞一書。其爲字。皆有分數。擲之以分數多少。爲進修次第。凡人之性。厭學問而樂戲玩。成佛從政之圖之類。亦博奕之流也。徒費曰力。而無所用心。先生之作此圖。初非戲玩設也。欲學者因其所樂而開牖之也。不知者以用骰子近於博奕。故不深究其意。不思之甚矣。夫用骰子。意非在於骰子。以示誠敬肆僞之分耳。誠敬肆僞。乃學者用心之地。因骰子而開示指道於初學。尤爲親切。卽圖而求之。雖愚稚孩童。亦可以知所向方。而進德之序。有條不紊。可與聖賢同歸矣。圖未行而先生卒。今知者蓋鮮。先生之文章。有仲父陽村風。
요즈음 일 벌이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성불도」가 있고 「종정도」가 있는데 다 주사위를 쓴다. 권채 선생이 지은 「작성도」는 조목이 열셋이니 도상을 논함, 성리를 논함, 음양을 논함, 조화를 논함, 기질을 논함, 성경을 논함, 자질을 논함, 공부의 얕고 깊음을 논함, 공부의 이어짐과 그침을 논함, 어짊과 지혜로움을 논함, 어리석고 못남을 논함, 덕에 나아가는 앞뒤를 논함, 그리고 총론이다. 열세 논 가운데 또 크고 작은 조목이 있다. 또 주사위를 쓰되 여섯 면에 성(誠)·경(敬)·사(肆)·위(僞) 네 글자를 쓰는데, 다만 성은 두 번 쓰고 사와 위는 한 번씩 쓴다. 그 글자마다 분수가 있어 던져서 분수의 많고 적음으로 나아가 닦는 차례를 삼는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학문을 싫어하고 놀이를 즐긴다. 「성불도」·「종정도」 같은 것도 노름의 갈래라 한갓 날과 힘을 허비하고 마음 쓸 데가 없다. 선생이 이 그림을 지은 것은 처음부터 놀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가 즐기는 것을 따라 열어 주려 한 것이다. 알지 못하는 이는 주사위 쓰는 것이 노름에 가깝다 하여 그 뜻을 깊이 캐지 않으니 생각하지 않음이 심하다. 무릇 주사위를 쓰는 것은 뜻이 주사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사·위의 나뉨을 보이려는 것뿐이다. 성·경·사·위는 곧 배우는 이가 마음 쓰는 자리다. 주사위를 빌려 처음 배우는 이에게 열어 보이고 가리켜 이끄니 더욱 친절하다. 그림에 나아가 구하면 비록 어리석은 아이라도 향할 바를 알 수 있고, 덕에 나아가는 차례가 조리 있어 어지럽지 않아 성현과 함께 돌아갈 수 있다. 그림이 행해지지 못한 채 선생이 죽으니 이제 아는 이가 대개 드물다. 선생의 문장에는 중부 양촌의 풍이 있었다.
84『대학연의집략』을 두고 갈린 의논
李文安公石享嘗因眞德秀大學衍義。删繁就簡。添入麗史之可爲勸戒者。爲一書。名曰大學衍義輯略。請於經筵進講。上嘉納之。公之意以謂。經書時方經進高麗之事。傳聞所及。鑑誡最切。故或删或約或添之。其於觀覽。不無有益。然論者以謂。經以載道。皆聖人之言。德秀之編。皆非苟爲。今盡删去。於義未安。因舊衍義之文。添入麗史。庶幾近之矣。
문안공 이석형이 일찍이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가져다 번거로운 것을 깎고 간략함에 나아가며, 고려 역사에서 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넣어 한 책을 만들고 『대학연의집략』이라 이름하였다. 경연에서 나아가 강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셨다. 공의 뜻은 「경서는 지금 바야흐로 나아가 강하고 있고 고려의 일은 전해 들은 것이 미치는 바라 거울과 경계가 가장 절실하다. 그러므로 혹 깎고 혹 줄이고 혹 넣었으니 보는 데 유익함이 없지 않다」 함이었다. 그러나 논하는 이는 「경은 도를 실은 것이라 다 성인의 말이요, 진덕수가 엮은 것도 다 구차히 한 것이 아닌데 이제 다 깎아 버렸으니 의리에 편안하지 못하다. 옛 『연의』의 글에 따라 고려 역사를 넣었더라면 거의 가까웠을 것이다」 하였다.
85고려의 호명법과 우리 조정의 과거법
高麗文宗朝。禮部尙書鄭惟產立糊名取士之法。凡赴試諸生。卷首寫姓名本貫四祖糊封。試前數日呈試院。開場前一日午後。主文具題脚於狀。詣紫門實封進呈。上自折封賜覽。各於題上落點。封押而出。主文承奉到試院。翌日黎明折封放題。當直承宣擎奉金印往試院。與主文同坐。於擧子卷封。一一印之。上又遣內侍二員賜酒果。主文亦設筵以慰。間一日當直承宣到試院。開拆放榜。第二場亦如之。第三場至二更放題。餘同儀。間兩日主文各於中選卷子背上。科次貼黃函封。進詣紫門。上坐便殿。承宣二員捧函上前折封。文儒承宣讀過其科次。上下竝依主文之望而放榜焉。其後相襲。大槩如此。至國朝。科擧之法漸備。糊名卷子與高麗同。餘皆不同。其收卷官封彌官査同官枝同官易書等事。皆遵元朝制。兩頭場始於世宗朝。或講經或製述。隨時不同。
고려 문종 조에 예부상서 정유산이 이름을 풀로 붙여 가리고 선비를 뽑는 법을 세웠다. 무릇 시험에 나아가는 여러 생도는 시권 머리에 성명과 본관과 사조를 쓰고 풀로 봉하여 시험 며칠 전에 시원에 냈다. 과장을 열기 전날 오후에 주문이 문제의 요목을 장에 갖추어 자문에 나아가 실봉하여 올린다. 임금이 몸소 봉함을 뜯어 보시고 각기 제목 위에 점을 찍고 봉하여 눌러 내주신다. 주문이 받들어 시원에 이르러 이튿날 새벽에 봉함을 뜯고 제목을 낸다. 당직 승선이 금인을 받들고 시원에 가서 주문과 함께 앉아 거자의 시권 봉한 데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는다. 임금이 또 내시 두 사람을 보내 술과 과일을 내리시고 주문도 자리를 베풀어 위로한다. 하루 걸러 당직 승선이 시원에 이르러 봉함을 뜯어 방을 낸다. 둘째 마당도 이와 같이 한다. 셋째 마당은 이경에 이르러 제목을 내고 나머지는 같은 의식이다. 이틀 걸러 주문이 각기 뽑힌 시권 등에 등수를 누런 종이로 붙여 함에 봉하여 자문에 나아간다. 임금이 편전에 앉으시고 승선 두 사람이 함을 받들어 앞에서 봉함을 뜯으면 문유 승선이 그 등수를 읽는다. 위아래를 아울러 주문이 바란 대로 하여 방을 낸다. 그 뒤로 서로 이어받아 대개 이와 같았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 과거의 법이 점점 갖추어졌다. 이름 붙여 가린 시권은 고려와 같으나 나머지는 다 같지 않다. 수권관·봉미관·사동관·지동관·역서 같은 일은 다 원나라 제도를 따랐다. 두 마당은 세종 조에서 비롯되었는데 혹 경을 강하고 혹 글을 짓게 하여 때에 따라 같지 않았다.
86문과에 일산, 무과에 기 — 무반이 기뻐하지 않다
古者無武科。太宗朝始設焉。故事文武科放榜日。賜牌賜花酒。文武科一等三人。別賜皁蓋。一時榮之。世祖朝文科賜蓋。武科賜旗。遊街之日。癡兒愚婦皆辨其爲文武科也。武班頗不悅。尋罷復舊制。
옛날에는 무과가 없었는데 태종 조에 처음 두었다. 옛일에 문·무과 방을 내는 날 패와 꽃과 술을 내리고, 문·무과 일등 세 사람에게는 따로 검은 일산을 내리니 한때에 영광으로 여겼다. 세조 조에 문과에는 일산을 내리고 무과에는 기를 내리니, 거리를 도는 날 어리석은 아이와 어리석은 아낙까지 다 그것이 문과인지 무과인지 가려냈다. 무반이 자못 기뻐하지 않아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옛 제도로 돌아갔다.
87삼품이 문과에 나아간 것은 권반에게서 비롯되었다
舊例官至三品者。不赴文科。六品者不赴生員進士試。以堂上官赴試始於權花山攀。宗親極品赴試始於永順君溥。駙馬極品赴試始於世祖朝。事尋罷。
옛 규례에 벼슬이 삼품에 이른 이는 문과에 나아가지 않고, 육품인 이는 생원·진사 시험에 나아가지 않았다. 당상관으로 시험에 나아간 것은 화산군 권반에게서 비롯되었고, 종친으로 극품이면서 시험에 나아간 것은 영순군 이부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부마로 극품이면서 시험에 나아간 것은 세조 조에서 비롯되었는데 일이 얼마 안 되어 그쳤다.
88「해동청」을 「백고」로 읽은 과장
近日場屋。有出賦題曰海東靑。韻府群玉書。有古人詩一句曰。麗句妙於天下白。高才駿似海東靑。有一擧子誤解曰。麗句妙於天下則惟白高。一介才士之駿似海東靑者矣。擧場和之。以白高爲賦。至有成句曰。繫海東之爲靑。同白高之駿才。試官亦取之。多有登第者。聞者縮頸。
요즈음 과장에서 부의 제목으로 「해동청(海東靑)」을 낸 일이 있었다. 『운부군옥』이라는 책에 옛사람의 시 한 구가 있어 「고운 글귀는 천하백보다 묘하고, 높은 재주는 해동청처럼 날래다」 하였다. 한 거자가 잘못 풀어 「고운 글귀가 천하에 묘한 것은 오직 백고(白高)뿐이니, 한 낱 재주 있는 선비로 해동청처럼 날랜 이다」 하였다. 과장이 이에 화답하여 「백고」로 부를 지으니, 「해동의 푸름에 매고 백고의 날랜 재주와 같다」는 구절을 이룬 이까지 있었다. 시관도 이를 뽑아 급제한 이가 많았다. 듣는 이가 목을 움츠렸다.
89과장의 문체가 서곤체로 다 변하다
國朝以來。科場文體穩平。自癸酉甲戌以來。一二文士詭奇崛强之文。擢巍科。四五六年之間。文體盡變爲西崑。今國學及科場。擧歐陽公黜劉幾故事。黜其甚者。文體稍稍如舊。然未能盡變也。近於殿策起頭。有一主曰。披沙揀金有大冶之精。執策臨馬有伯樂之明。有一主曰。天開於子。地闢於丑。人生於寅。其浮華不切。
국조 이래로 과장의 문체가 온화하고 평평하였는데, 계유·갑술년 이래로 한두 문사가 괴이하고 기이하며 굴강한 글로 높은 과에 뽑히니, 네댓 해 사이에 문체가 다 변하여 서곤체가 되었다. 이제 국학과 과장에서 구양수가 유기를 내쫓은 옛일을 들어 그 심한 것을 내치니 문체가 조금씩 옛과 같아졌다. 그러나 다 변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요즈음 전시의 책문 첫머리에 한 사람은 「모래를 헤쳐 금을 가리니 큰 대장장이의 정밀함이 있고, 채찍을 잡고 말에 임하니 백락의 밝음이 있다」 하고, 한 사람은 「하늘은 자(子)에 열리고 땅은 축(丑)에 열리며 사람은 인(寅)에 났다」 하였으니 그 뜬 화려함이 절실하지 못하다.
90「찻잔은 오늘부터 커지고 술잔은 지난해가 깊었네」
舊例諸科會試。每三場日。禮曹設宴。又別有內賜酒果。諸試官懽飮爲榮。於諸生亦置淡粥淸酒數十盆。以解渴喉。及式例出。而皆罷之。近在試院有一參試官。戲成一句云。座主不飮香醪一盞。何烘其頭。諸生甘吸墨水數升。皆黔其吻。僕亦有句云。茶椀始從今日大。酒杯仍憶去年深。滿座皆笑。
옛 규례에 여러 과거의 회시 때 세 마당 날마다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고, 또 따로 안에서 술과 과일을 내리니 여러 시관이 기쁘게 마시며 영광으로 여겼다. 여러 생도에게도 묽은 죽과 맑은 술 수십 동이를 두어 목마른 목을 풀게 하였다. 정한 규례가 나온 뒤로는 다 그만두었다. 요즈음 시원에서 한 참시관이 희롱으로 한 구를 지어 「좌주는 향기로운 막걸리 한 잔도 마시지 못하니 무엇으로 그 머리를 붉히며, 여러 생도는 먹물 두어 되를 달게 마시니 다들 그 입술을 검게 하네」 하였다. 나도 구가 있어 「찻잔은 오늘부터 커지고, 술잔은 지난해가 깊었음을 생각하네」 하니 온 자리가 다 웃었다.
91두 번 장원하고 세 방에 으뜸 한 이들
河東鄭相國麟趾。魁甲午初榜。又魁丁未覆試。國朝以來一人而已。李延城石亨魁辛酉進士生員及第三榜。三韓以來未之聞也。南司成季英魁生員及第二榜。亦其次也。
하동 정 상국 인지는 갑오년 초시에 장원하고 또 정미년 복시에 장원하였으니 국조 이래 한 사람뿐이다. 연성 이석형은 신유년 진사·생원과 급제 세 방에 다 으뜸이었으니 삼한 이래로 듣지 못한 일이다. 사성 남계영은 생원과 급제 두 방에 으뜸이었으니 또한 그다음이다.
92아버지와 아들이, 형과 아우가 잇달아 장원하다
父子相繼爲壯元者。權文景公踶。權翼平公攬。兄弟相繼爲壯元者。柳正自濱。柳校理自漢也。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장원한 이는 문경공 권제와 익평공 권람이요, 형과 아우가 잇달아 장원한 이는 정 유자빈과 교리 유자한이다.
93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이 되다
父子相繼入相者。黃翼成公喜。黃成烈公守身。沈議政溫。沈左相澮也。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에 든 이는 익성공 황희와 성렬공 황수신이요, 의정 심온과 좌상 심회다.
94장원으로 정승에 든 이들
國朝以壯元入相。河東鄭公麟趾。吉昌權公攬。寧城崔公恒。洪南陽應。以前朝壯元入本朝爲相。柳政丞亮。孟政丞思誠也。
국조에서 장원으로 정승에 든 이는 하동 정인지 공, 길창 권람 공, 영성 최항 공, 남양 홍응이다. 전조의 장원으로 본조에 들어와 정승이 된 이는 유량 정승과 맹사성 정승이다.
95한 방의 넷이 잇달아 정승이 되다
甲寅別試。崔寧城恒爲壯元。曺昌寧錫文爲榜眼。朴延城元亨爲探花。具綾城致寬居丙科。在世祖朝。四人相繼入相。古今所無也。
갑인년 별시에 영성 최항이 장원이 되고, 창녕 조석문이 방안이 되고, 연성 박원형이 탐화가 되고, 능성 구치관이 병과에 들었다. 세조 조에 네 사람이 잇달아 정승에 드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96향을 사르고 빌어 장원을 뽑다
甲午秋親試。讀卷官河崙等。取擧子三人卷子以進。太宗曰。當依古焚香祝壯元故事。信手抽之。乃權文景公蹈也。
갑오년 가을 친시에 독권관 하륜 등이 거자 세 사람의 시권을 골라 올렸다. 태종께서 「마땅히 옛날 향을 사르고 빌어 장원을 뽑던 옛일에 따르리라」 하시고 손 가는 대로 뽑으시니 곧 문경공 권도였다.
97「이 방은 곧 나의 문생이다」
上喜曰。予悼蹈父近之早逝。今得子爲壯元。聊復自謂。顧語崙等曰。此榜乃予門生。卿等不得爲自家桃李也。崙等終不受禮謁。庚午殿試。讀卷官以權翼平攬擬第四人。榜旣出。
임금께서 기뻐하시며 「내가 권도의 아버지 권근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는데 이제 그 아들을 얻어 장원으로 삼으니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가 된다」 하시고, 하륜 등을 돌아보며 「이 방은 곧 나의 문생이다. 경들은 제 집안의 복숭아와 오얏으로 삼을 수 없다」 하셨다. 하륜 등이 끝내 예로 뵙는 것을 받지 않았다. 경오년 전시에 독권관이 익평공 권람을 넷째 사람으로 매겼다. 방이 이미 나오자,
98몸소 붓을 들어 첫째로 매기시다
文宗曰權攬居幾。左右曰第四。上督令左右進諸卷子。讀至第四曰。此誠壯元也。親札第一。蹈後改名踶。踶父子壯元。皆御賜也。
문종께서 「권람이 몇째인가」 물으시니 좌우가 「넷째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좌우를 재촉하여 여러 시권을 올리게 하시고 넷째에 이르러 읽으시고는 「이야말로 참으로 장원이다」 하시고 몸소 붓을 들어 첫째로 매기셨다. 권도는 뒤에 이름을 권제로 고쳤다. 권제 부자의 장원이 다 임금께서 내리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