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필원잡기 › 본문

권2卷二

필원잡기 筆苑雜記 · 서거정(徐居正) · 1487년 (조선 성종 18) · 단락 79 · 한자 10,954자 · 낭독 43.8분

「필원잡기」 본문 「권2」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서거정이 한가한 틈에 붓 가는 대로 적어 1487년 의성에서 판에 새긴 잡기. 조선 개국부터 성종 때까지 백 년 사이의 조정과 재야 이야기 177단락이 실려 있다. 우산으로 새는 지붕을 가리던 유관, 아이 종이 문서에 오줌을 누어도 노하지 않은 황희, 호랑이를 쏘고도 무슨 짐승인지 몰랐던 최윤덕, 밤새 장서각 책을 다 읽은 성간처럼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았고, 세조 앞에서 사주의 수가 오십일만 팔천사백뿐이라며 녹명의 책을 믿을 수 없다고 아뢴 대목, 산수의 설과 시호의 법을 따진 대목처럼 지은이 자신의 생각을 밝힌 글도 함께 있다. 중국 사신의 사람됨을 하나하나 매기고, 『삼국사기』를 두고 「미더이 전하는 책이 아니다」라 한 자리도 여기 있다. 팽소·표연말·조위의 서문 셋과 이세좌의 발문을 함께 옮겼다.

1세 마당 장원은 있어도 세 마당 꼴찌는 없다

權翼平於庚午鄕會。殿三試皆居魁。金郡守秀光亦於鄕會殿三試皆居尾。時人笑曰。三場壯元。古今多有。三場爲尾。天下必無。

익평공 권람은 경오년 향시·회시·전시 세 시험에 다 으뜸을 차지하였다. 군수 김수광도 향시·회시·전시 세 시험에 다 꼴찌를 차지하였다. 그때 사람이 웃으며 「세 마당 장원은 고금에 많이 있으나 세 마당 꼴찌는 천하에 반드시 없을 것이다」 하였다.

2화응이 범질에게 옷과 바리를 전한 옛일

申高靈叔舟中己未科第三丁卯覆試第四。居正亦中甲子科第三丁丑覆試第四。謁高靈。笑謂居正曰。以子之才。何屈第四乎。居正曰。和凝之後有范質。金坵之前。豈無金仁鏡乎。申大笑。以予不才。非敢擬和范。但大言耳。昔和魯公凝中第十三。後知貢擧謂范魯公質曰。君文合居第一。暫屈十三者。用傳老夫衣鉢耳。高麗金貞肅仁鏡領貢擧。擢金坵爲第二。擧魯公傳鉢故事及之。貞肅亦明王朝。第二名也。

고령 신숙주는 기미년 과거에 셋째, 정묘년 복시에 넷째였다. 나 거정도 갑자년 과거에 셋째, 정축년 복시에 넷째였다. 고령을 뵈니 웃으며 나에게 「그대 재주로 어찌 넷째에 굽혔는가」 하였다. 내가 「화응 뒤에 범질이 있었으니 김구 앞에 어찌 김인경이 없었겠습니까」 하니 신이 크게 웃었다. 내가 재주 없으면서 감히 화응과 범질에 견준 것이 아니라 다만 큰소리를 쳤을 뿐이다. 옛날 노국공 화응이 열셋째로 급제하였는데 뒤에 공거를 맡아 노국공 범질에게 「그대의 글은 마땅히 첫째에 있어야 하나 잠시 열셋째에 굽힌 것은 늙은이의 옷과 바리를 전하기 위함일 뿐이다」 하였다. 고려 정숙공 김인경이 공거를 맡아 김구를 둘째로 뽑고 노공이 바리를 전한 옛일을 들어 말하였다. 정숙도 명종 조의 둘째 사람이었다.

3은문과 은전 — 임금이 몸소 뽑은 문생

世宗末年。尤重儒士。親策得人。最後曰。登俊試得十三人。臣居正獲居第三。世祖召臣等于內殿。若曰。古有座主門生之號。今是科予親策之。予當爲恩門。宜號是殿曰恩殿。臣等俯伏拜謝。越數日。兩殿坐思政殿。臣等獻爵。一如門生座主之例。寵恩優渥。吾東方前古所無之盛事也。

세종 말년에 유사를 더욱 무겁게 여기시어 몸소 책문하여 사람을 얻으셨다. 가장 뒤에는 등준시라 하여 열세 사람을 얻었는데 신 거정이 셋째를 차지하였다. 세조께서 신들을 내전으로 부르시고 「예부터 좌주와 문생의 이름이 있었다. 이번 과거는 내가 몸소 책문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은문(恩門)이 되겠다. 마땅히 이 전각을 은전(恩殿)이라 부르라」 하셨다. 신들이 엎드려 절하고 사례하였다. 며칠 뒤 두 전하께서 사정전에 앉으시고 신들이 잔을 올리니 한결같이 문생이 좌주를 뵙는 예와 같았다. 사랑과 은혜가 넉넉하니 우리 동방에 예로부터 없던 성대한 일이다.

4중국 사신들의 그릇을 매기다 — 고윤의 경박함

中朝使臣前後來者。皆文章節義之士。自陸顒端木孝思祝孟獻以下。皆可數。自居正所及見。世宗末年倪侍講謙司馬給事恂偕來。倪通而和。馬簡而正。才名馬不及倪。操行倪不及馬。陳吏部純李司正寬繼來。陳之節行。仰若山斗。李則風儀雋朗。處事在陳範圍之內。不露圭角。亦可人也。後有陳侍講鑑高太常閏。陳之文章亞於倪。而操行則同。高之文章不及於陳。而操行則愈下。初陳高二使渡鴨綠江。國家遣宣慰使遺節衣。不受。高作送衣不受詩。語甚倨傲。其作成均館記。有天理未嘗泯滅之語。詩亦有豺獺報本之辭。及跋陽村應制詩則曰。到朝鮮恨無物足以駭人觀聽。其傲視東方甚矣。題太平館樓詩自批曰。極盡豪華之氣。一以淸高爲主。成均館唱酬詩板尾自筆大書曰。詩不成者四人。後當足之。蓋譏我國宰相有不成詩者也。嘗書眞草數帖曰。義之之字。千金難得。學者宜寶藏之。其輕薄至此。時居正執事於館下。每見高作。勃然變色。或手裂擲地。同列皆笑。一日高倩承文院博士郭義卿書行錄。僕竊見之。首書思親詞一首。次書送衣不受詩。次書却妓詩。次書謁宣聖詩。記其餘覽物興懷之作。皆諱不書。僕曰。此虜將還中國。以此爲釣名之資。人之無狀至此哉。一日殿下至鞍馬。僕語同列曰。鞍馬非橐中之物。此輩必却之。如却之。高必作詩。卿等第觀之。俄而高作却鞍馬詩曰。漢文旣是輕千里。祖逖無心著一鞭。同列大笑。僕大怒曰。豈朝鮮寡弱。無一人分別是非。敢詐如是。將行。殿下贐好劍。閏作詩謝。皇華集旣成。閏初見喜。例讀至謝劍詩。憤然失色。其飾詐失使臣體如是。陳給事嘉猷寬平正大。觀其氣象。知其爲大人君子。文章亦平淡。張給事寧。其文章可伯仲於陳。而言行頗有强作處。然亦君子人也。金舍人湜工於七言四韻。筆法畫格亦高妙。但節行掃地。張舍人珹有溫雅氣象。而無奇節。姜行人浩有寬大之量。而少文雅。祈戶部順篤實有節行。文詞亦醇正。其陳張兩給事之儔乎。張行人瑾文章操行不及祈。而在其範圍之內耳。

중국 조정 사신으로 앞뒤에 온 이는 다 문장과 절의의 선비였다. 육옹·단목효사·축맹헌 이하로 다 헤아릴 만하다. 내가 본 이로부터 말하자면, 세종 말년에 시강 예겸과 급사 사마순이 함께 왔다. 예는 통달하고 화순하였으며 사마는 간략하고 발랐다. 재주와 이름은 사마가 예에 미치지 못하고 지조와 행실은 예가 사마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부 진순과 사정 이관이 잇달아 왔다. 진의 절행은 우러르기가 태산북두 같았고 이는 풍채가 뛰어나고 밝았으며 일 처리가 진의 테두리 안에 있어 모난 데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또한 괜찮은 사람이었다. 뒤에 시강 진감과 태상 고윤이 왔다. 진의 문장은 예에 다음가고 지조와 행실은 같았다. 고의 문장은 진에 미치지 못하고 지조와 행실은 더 아래였다. 처음에 진·고 두 사신이 압록강을 건널 때 나라에서 선위사를 보내 철에 맞는 옷을 주니 받지 않았다. 고가 「옷을 보냈으나 받지 않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말이 매우 거만하였다. 그가 지은 「성균관기」에 「하늘의 이치는 일찍이 없어진 적이 없다」는 말이 있고, 시에도 「승냥이와 수달도 근본에 갚는다」는 말이 있었다. 양촌의 응제시에 발문을 쓰면서는 「조선에 이르러 보고 들음을 놀라게 할 만한 물건이 없음이 한스럽다」 하였으니 동방을 업신여김이 심하였다. 태평관 누각에 시를 쓰고 스스로 비평하여 「호화한 기운을 다하되 한결같이 맑고 높음을 주로 삼았다」 하였다. 성균관에서 주고받은 시판 끝에는 스스로 큰 글씨로 「시를 이루지 못한 이가 네 사람이니 뒤에 마땅히 채워야 한다」 썼으니 대개 우리나라 재상 가운데 시를 이루지 못한 이가 있음을 비웃은 것이다. 일찍이 해서와 초서 몇 첩을 써 주며 「왕희지의 글씨는 천금으로도 얻기 어렵다. 배우는 이는 마땅히 보배로 간직하라」 하였으니 그 경박함이 이에 이르렀다. 그때 내가 관 아래서 일을 맡았는데 고의 지은 것을 볼 때마다 발끈하여 낯빛이 변하고 혹 손으로 찢어 땅에 던지니 동료가 다 웃었다. 하루는 고가 승문원박사 곽의경에게 행록을 쓰게 하였는데 내가 몰래 보니, 첫머리에 「사친사」 한 수를 쓰고 다음에 「옷을 보냈으나 받지 않다」 시를, 다음에 「기생을 물리치다」 시를, 다음에 「선성을 뵙다」 시를 썼으며, 그 밖에 물건을 보고 감회를 일으킨 작품은 다 숨기고 쓰지 않았다. 내가 「이 오랑캐가 장차 중국에 돌아가 이것으로 이름을 낚는 밑천을 삼으려는 것이다. 사람의 형편없음이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하루는 전하께서 안장 얹은 말을 보내셨다. 내가 동료에게 「안장 얹은 말은 자루에 넣을 물건이 아니니 이 무리가 반드시 물리칠 것이다. 물리치면 고가 반드시 시를 지을 것이니 여러분은 두고 보시오」 하였다. 이윽고 고가 「안장 얹은 말을 물리치다」 시를 지어 「한나라 문제는 이미 천 리 말을 가벼이 여겼고, 조적은 채찍 하나 대칠 마음이 없었네」 하니 동료가 크게 웃었다. 내가 크게 노하여 「어찌 조선이 잔약하다 하여 한 사람도 옳고 그름을 가릴 이가 없어 감히 이처럼 속이는가」 하였다. 떠나려 할 때 전하께서 좋은 칼을 노자로 주시니 고윤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다. 『황화집』이 이루어지자 고윤이 처음 보고 기뻐하다가 차례대로 읽어 「칼을 사례하다」 시에 이르러 발끈하여 낯빛을 잃었다. 그 속임을 꾸며 사신의 체를 잃음이 이와 같았다. 급사 진가유는 너그럽고 평평하며 바르고 커서 그 기상을 보면 대인군자임을 알 수 있었고 문장도 평담하였다. 급사 장녕은 그 문장이 진과 백중할 만하나 말과 행실에 자못 억지로 지은 데가 있었다. 그러나 또한 군자다운 사람이었다. 사인 김식은 칠언사운에 공교하고 필법과 그림의 격도 높고 묘하였으나 다만 절행이 땅을 쓴 듯하였다. 사인 장성은 따뜻하고 아담한 기상이 있으나 기이한 절개가 없었다. 행인 강호는 너그럽고 큰 도량이 있으나 문아가 적었다. 호부 기순은 독실하고 절행이 있으며 글도 순정하니 진·장 두 급사의 짝이 아니겠는가. 행인 장근은 문장과 지조와 행실이 기순에 미치지 못하나 그 테두리 안에 있었다.

5『요해편』 — 노옹과 오절이 우리 어진 이를 너무 억눌렀다

近得見遼海編。乃翰林侍講倪謙奉使我邦所作。附以我國諸賢酬酢贈別之作。如僕之不才。姓名亦在其中。布政司參議盧雍序之曰。初侍講到朝鮮。其國擇文學之臣。以爲館伴。公假顏色俯就之。其人操筆。面肆矜眩者。公乃發舒。其奇思如湧泉。信筆立就。殊不經意。而辭旨超逸。睥睨驅馭。旁若無人。擧國始皆駭愕歎仰無已。今考其詩。館伴則鄭文成公。麟趾也。面肆矜眩。豈公所爲耶。翰林侍講吳節跋之曰。曁公至國。其國廣擇素能詩文者。以司館伴。先生才思敏捷。若水湧山出。肆筆揮洒。頃刻而就。國人或聚首稱歎。斂縮不敢出所長。惟鄭麟趾申叔舟成三問三人。稍知警策。間能屬和。先生亦屢加奬進也。惜乎盧吳二子之尊崇侍講。而屈抑我東賢者太甚。今讀侍講遼海全編。只是平平之詩文耳。未見有洞盪發越奇偉橫絶之辭。如侍講雪霽登樓賦雖佳。而申文忠公叔舟次韻賦。文從字順。翩翩有楚聲。亦可以伯仲侍講矣。何可易之哉。盧吳二子之言。實非公論也。

요즈음 『요해편』을 보게 되었는데 곧 한림시강 예겸이 우리나라에 사명을 받들고 와서 지은 것이요, 우리나라 여러 어진 이가 주고받고 이별하며 준 작품을 붙인 것이다. 나같이 재주 없는 이의 이름도 그 가운데 있었다. 포정사참의 노옹이 서문을 쓰기를 「처음 시강이 조선에 이르자 그 나라가 문학하는 신하를 골라 관반으로 삼았다. 공이 낯빛을 빌려 몸을 굽혀 대하였는데, 그 사람이 붓을 잡고 낯에 방자하게 자랑하니 공이 이에 펼쳐 그 기이한 생각이 샘솟듯 하여 붓을 믿고 곧 이루었다. 자못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도 말뜻이 뛰어나 곁눈질하며 몰아가되 곁에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온 나라가 비로소 다 놀라고 감탄하며 우러러 마지않았다」 하였다. 이제 그 시를 상고하니 관반은 곧 문성공 정인지다. 「낯에 방자하게 자랑함」이 어찌 공이 할 짓이겠는가. 한림시강 오절이 발문을 쓰기를 「공이 그 나라에 이르자 그 나라가 평소 시문에 능한 이를 널리 골라 관반을 맡게 하였다. 선생의 재주와 생각이 민첩하여 물이 솟고 산이 나오듯 붓을 놓아 휘둘러 잠깐 사이에 이루니, 나라 사람이 혹 머리를 모아 일컫고 감탄하며 움츠러들어 감히 제 장기를 내지 못하였다. 오직 정인지·신숙주·성삼문 세 사람이 조금 경책을 알아 사이사이 화답할 수 있으니 선생도 여러 번 장려하고 나아가게 하였다」 하였다. 애석하다, 노와 오 두 사람이 시강을 높이면서 우리 동방의 어진 이를 억누름이 너무 심하다. 이제 시강의 『요해편』 전체를 읽어 보니 다만 평범한 시문일 뿐 툭 트여 드날리고 기이하고 위대하여 뛰어난 말은 보이지 않는다. 시강의 「눈 갠 뒤 누각에 오르다」 부는 비록 아름다우나, 문충공 신숙주가 차운한 부는 글이 따르고 글자가 순하여 훨훨 초나라 소리가 있으니 또한 시강과 백중할 만하다. 어찌 가벼이 여기겠는가. 노와 오 두 사람의 말은 실로 공정한 의논이 아니다.

6주척을 정하다 — 우리나라 자가 중국과 같다

昔人於法度之器。必用周尺而校定。尺式自古爲難。子朱子取司馬文正公家石刻本尺法。載之家禮。然家禮板本。行於世者不一。而周尺長短皆不同。亦難爲據。世宗時。許文敬公稠求得陳友諒子陳理家廟神主式。假作尺本。又於議郞姜天霔家。得紙本周尺。乃其父判三司事姜碩第有元院使金剛所藏象牙尺所傳也。面書云神主尺定式。以今官尺。去二寸五分。用七寸五分。卽與家禮附註潘時擧所云周尺。當今省尺七寸五分。弱之。語同二本。相較不差。於是始定尺制。凡士大夫家廟神主。與天文漏器道路里數射場步法。據此以爲定式。後司譯院事趙忠佐赴京。買得新造神主來。復以此尺較之。寸分相合。今我國所用周尺。與中國同。無疑矣。

옛사람은 법도의 그릇에 반드시 주척을 써서 견주어 정하였다. 자의 법식은 예부터 어려웠다. 주자가 사마온공 집의 돌에 새긴 본의 자 법을 취하여 『가례』에 실었다. 그러나 『가례』 판본으로 세상에 다니는 것이 하나가 아니고 주척의 길고 짧음이 다 같지 않으니 또한 근거로 삼기 어렵다. 세종 때 문경공 허조가 진우량의 아들 진리의 가묘 신주 법식을 구해 얻어 자의 본을 임시로 지었다. 또 의랑 강천주의 집에서 종이에 뜬 주척을 얻었는데, 곧 그 아버지 판삼사사 강석의 집에 원나라 원사 김강이 간직하던 상아자가 전한 것이었다. 겉에 「신주척 정식」이라 쓰고 「지금 관척으로 두 치 다섯 푼을 덜어 일곱 치 다섯 푼을 쓴다」 하였으니, 곧 『가례』 부주에 반시거가 말한 「주척은 지금 성척으로 일곱 치 다섯 푼에 조금 못 미친다」는 말과 같았다. 두 본을 서로 견주니 어긋나지 않았다. 이에 비로소 자의 제도를 정하였다. 무릇 사대부 집 가묘의 신주와 천문의 물시계, 길의 이수, 활터의 걸음 법을 다 이에 근거하여 정식으로 삼았다. 뒤에 사역원사 조충좌가 서울에 가서 새로 만든 신주를 사 왔는데 다시 이 자로 견주니 치와 푼이 서로 맞았다. 지금 조선에서 쓰는 주척이 중국과 같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7고려가 구한 지도를 진수공이 태워 버리다

夢溪筆談。煕寧中高麗入貢。所經州縣。悉要地圖。所至皆造送。山川道路。形勢險易。無不備載。至楊州。牒州取地圖。是時丞相陳秀公守楊。紿使者欲盡見兩浙所供圖。倣其規模供造。及圖至。都聚而焚之。具以事聞。按高麗爲遼所阻。不通於宋已久。神宗煕寧四年。高麗文宗二十五年辛亥。遣民部侍郞金悌。由登州入貢于宋。恐此時事也。

『몽계필담』에 「희령 연간에 고려가 조공을 오며 지나는 주현마다 다 지도를 요구하니 이르는 곳마다 다 만들어 보냈다. 산천과 도로, 지세의 험하고 쉬움이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양주에 이르러 첩을 보내 주의 지도를 구하였다. 이때 승상 진수공이 양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사자를 속여 두 절강에서 바친 지도를 다 보고 그 규모를 본떠 만들어 바치게 하겠다 하였다. 지도가 이르자 다 모아 태워 버리고 그 일을 갖추어 아뢰었다」 하였다. 살피건대 고려가 요나라에 막혀 송나라와 통하지 못한 지 이미 오래였다. 신종 희령 사년, 곧 고려 문종 이십오년 신해에 민부시랑 김제를 보내 등주를 거쳐 송나라에 조공하였으니 아마 이때 일인 듯하다.

8궁문 여는 때가 바뀌다

高麗時。當直丞宣至五更詣紫門。中官出則丞宣問上體仍請鑰。紫城諸門及羅城諸門盡開。本朝開國以後。五更三點罷漏。則宮城門及外城門盡開。自睿宗朝。平明時始開宮門。

고려 때 당직 승선이 오경에 자문에 나아가 중관이 나오면 승선이 임금의 옥체를 묻고 이어 열쇠를 청하여 자성의 여러 문과 나성의 여러 문을 다 열었다. 본조 개국 이후로는 오경 삼점에 파루를 치면 궁성 문과 외성 문을 다 열었다. 예종 조부터 날이 밝을 때 비로소 궁문을 열었다.

9대간은 백관이 다 나간 뒤에야 나간다

舊例。几大小朝會。文武二班分東西入。監察各一人立班後。糾察朝儀不如法者。本朝東西班每列各有臺官。東西相向立。蓋依中朝制也。且舊制臺諫官入班。吏各一人具袍笏。隨出隨入。及退班。臺諫於勤政門外永濟橋南。以次北向西上立。待百官皆出。乃出。蓋不欲混於庶僚也。

옛 규례에 무릇 크고 작은 조회에 문·무 두 반이 동과 서로 나뉘어 들고 감찰 각 한 사람이 반 뒤에 서서 조회 의식이 법대로 되지 않는 것을 규찰하였다. 본조에서는 동반과 서반의 줄마다 각기 대관이 있어 동과 서로 마주 보고 서니 대개 중국 조정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또 옛 제도에 대간의 관원이 반에 들 때 아전 각 한 사람이 도포와 홀을 갖추고 따라 나고 따라 들었다. 반에서 물러날 때 대간은 근정문 밖 영제교 남쪽에 차례로 북쪽을 향하고 서쪽을 위로 하여 서서 백관이 다 나가기를 기다린 뒤에야 나갔으니 대개 여러 요속과 섞이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10차자의 법 — 좋은 법도 폐단이 없을 수 없다

唐宋奏事。皆用箚子。居正之長憲府也。始建議立箚子之法。蓋懼言辭出納之際有遺失。且防後世近侍中官用事之漸。法初立。人皆以爲萬世可行之良法也。近來爲臺諫者。不識大體。小得過失。則深文羅織。極口詆壞。箚子之設。適足以害人而已。天下未有法立而無弊者也。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일을 아뢸 때는 다 차자를 썼다. 내가 헌부의 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논을 세워 차자의 법을 만들었다. 대개 말이 오가는 즈음에 빠뜨림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뒷세상에 가까이 모시는 중관이 일을 맡는 조짐을 막으려 함이었다. 법이 처음 서자 사람들이 다 만세에 행할 만한 좋은 법이라 하였다. 요즈음 대간이 된 이가 대체를 알지 못하여 작은 허물이 있으면 글을 깊이 얽어 짜서 입을 다하여 헐뜯고 무너뜨리니, 차자를 둔 것이 마침 사람을 해치기에 넉넉할 뿐이다. 천하에 법이 서고서 폐단이 없는 것은 없다.

11「내 낭사에 사람이 있다 하겠다」

散騎以下舊屬門下省。鄭公煕啓爲知門下府事。嘗與人賭博於都堂。諸省郞不行迎候禮。鄭公不坐而還。時趙文忠公浚爲首相。將赴衙。吏以不坐告。文忠笑曰。吾郞舍可謂有人矣。

산기 이하는 옛날에 문하성에 딸렸다. 정희계 공이 지문하부사가 되어 일찍이 도당에서 남과 도박을 하니 여러 성의 낭관이 맞이하고 기다리는 예를 행하지 않았다. 정공이 앉지 않고 돌아갔다. 그때 문충공 조준이 수상이었는데 관아에 나가려 하니 아전이 앉지 않았음을 고하였다. 문충이 웃으며 「내 낭사에 사람이 있다 하겠다」 하였다.

12「대인」 소리 듣기 싫어 사문 모임을 피하다

斯文古風。於文酒會。三館士執大鍾。滿酌呼先生。自高官。下逮卑職。皆然。其與會者。雖達官貴人。若不於紅紙上題名。則不呼曰先生。而曰大人。其風始於高麗。今或有不題名紅紙者。則故避斯文之會。蓋惡聞大人之聲耳。

사문(斯文)의 옛 풍습에, 글과 술의 모임에서 삼관의 선비가 큰 술잔을 잡고 가득 따라 「선생」이라 부르니, 높은 벼슬에서 낮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였다. 그 모임에 든 이는 비록 높은 벼슬 귀한 사람이라도 만약 붉은 종이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하였다. 그 풍습이 고려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혹 붉은 종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가 있으면 짐짓 사문의 모임을 피하니 대개 「대인」이라는 소리 듣기를 싫어할 뿐이다.

13예문응교는 고려에도 있었다

開國以來。擇文士將典文衡者。爲藝文應敎。以他官兼之。俾專文翰。自設集賢殿以後。以殿一員帶之。及罷集賢殿設藝文館。應敎一員亦實職本館員。隨例遷轉。不擇人授之。文翰之責不專。業亦不精。嘗聞驪興府院君閔公霽仕高麗。有寄銓曹詩曰。藝文應敎非吾分。三字華銜也不妨。則藝文應敎非始於國初。自高麗有之矣。三字則知製敎也。

개국 이래로 문사 가운데 장차 문형을 맡을 이를 골라 예문응교로 삼고 다른 벼슬로 겸하게 하여 문한을 오로지 맡게 하였다. 집현전을 둔 뒤로는 집현전 한 사람이 이를 띠었다. 집현전을 파하고 예문관을 두게 되자 응교 한 사람도 본관의 실직 관원이 되어 예에 따라 옮겨 다니고 사람을 가려 주지 않으니, 문한의 책임이 오로지 하지 못하고 학업도 정밀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여흥부원군 민제 공이 고려에서 벼슬할 때 전조에 부친 시가 있어 「예문응교는 내 분수가 아니나 세 글자 화려한 직함도 무방하다」 하였다 하니, 예문응교는 국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고려부터 있었던 것이다. 세 글자란 지제교다.

14시호가 법도를 잃었다

謚法古人所重。今但委之太常。新進後學不諳事體。加謚無法。如洪順孫。與於靖難功臣之後功最下。卒官僉知中樞秩又卑。乃以勳特加謚。太常謚襄武。蓋取因事有功爲襄。克定禍亂爲武。嗚呼其不知事體之甚也。克定禍亂之武。乃人君之武。其可施之於人臣乎。況旣曰因事有功。則其功可知矣。又加克定禍亂何耶。又如崔寧城恒。太常謚曰文靖。蓋取道德博聞爲文。恭已鮮言爲靖。旣曰道德博聞。則恭已鮮言。道德中之末事耳。曰文曰靖。不亦倒乎。如李中樞崇之。太常謚曰麥厲。蓋謚法無麥字。必夸字之誤耳。此類甚多。不可勝記。

시호의 법은 옛사람이 무겁게 여긴 바인데 이제 다만 태상에 맡기니, 새로 나아온 뒷 학자가 일의 체를 알지 못하여 시호 붙임에 법도가 없다. 홍순손 같은 이는 정난공신 뒤에 참여하여 공이 가장 낮고 죽을 때 벼슬이 첨지중추로 품계도 낮았는데, 훈공이라 하여 특별히 시호를 더하여 태상이 「양무(襄武)」라 하였다. 대개 「일로 말미암아 공이 있음을 양이라 하고, 화란을 이겨 정함을 무라 한다」에서 취한 것이다. 아, 일의 체를 알지 못함이 심하다. 화란을 이겨 정하는 무는 곧 임금의 무인데 그것을 신하에게 쓸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미 「일로 말미암아 공이 있다」 하였으면 그 공을 알 만한데 또 「화란을 이겨 정하였다」를 더함은 어째서인가. 또 영성 최항 같은 이에게 태상이 「문정(文靖)」이라 시호하였다. 대개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음을 문이라 하고,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음을 정이라 한다」에서 취한 것이다. 이미 「도덕이 있고 널리 들었다」 하였으면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은 도덕 가운데 끝의 일일 뿐이다. 문이라 하고 정이라 함이 또한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중추 이숭지 같은 이에게 태상이 「맥려(麥厲)」라 시호하였는데, 대개 시법에 맥(麥) 자가 없으니 반드시 과(夸) 자의 잘못일 것이다. 이런 무리가 매우 많아 다 적을 수 없다.

15「검은 꽃이 흰 깃에 떨어졌다」 — 사서에 없는 안시성

李文靖公穡貞觀吟曰。謂是囊中一物耳。那知玄花落白羽。玄花言其目。白羽言其箭。世傳。唐宗伐高麗至安巿城。箭中其目而還。考唐書通鑑。皆不載。但柳公權小說。太宗初見延壽惠眞。率渤海軍。布陣四十里。有懼色。亦未有言其中傷者。居正意以謂。當時雖有此事。史官必爲中國諱。毋怪乎其不書也。但金富軾三國,史亦不載。未知牧老何從得此。

문정공 이색의 「정관음」에 「주머니 속 한 물건이라 여겼더니, 검은 꽃이 흰 깃에 떨어질 줄 어찌 알았으랴」 하였다. 검은 꽃은 그 눈을 말함이요 흰 깃은 그 화살을 말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안시성에 이르러 화살이 그 눈에 맞아 돌아갔다」 한다. 『당서』와 『자치통감』을 상고하니 다 실려 있지 않다. 다만 유공권의 소설에 「태종이 처음 연수와 혜진이 발해 군사를 이끌고 사십 리에 진을 편 것을 보고 두려운 낯빛이 있었다」 하였을 뿐 그가 맞아 상하였다는 말은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 비록 이 일이 있었더라도 사관이 반드시 중국을 위해 숨겼을 것이니 적지 않은 것이 괴이하지 않다. 다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지 않으니 목은 노인이 어디서 이것을 얻었는지 알 수 없다.

16청주의 홍수 — 두 선생을 놓아준 하늘의 변고

高麗恭讓朝。尹彝李初之變。牧隱李文靖公陽村權文忠公。皆逮繫淸州獄。鞫問甚峻。事匹測。一日黎明天乃雨。未及日中。山崩水湧。壞城門漲入。屋舍皆沒。問事官漂溺。攀鴨脚樹僅免。事聞釋不問。文靖文忠由是得全。初玉川君劉敞聞兩公被誣逮獄。語人曰。兩先生乃天挺生之人。必有天變。其言卒驗。有人題詩曰。流言不幸及周公。忽有嘉禾起大風。聞道西原洪水漲。是知天道古今同。

고려 공양왕 조에 윤이·이초의 변으로 목은 문정공 이색과 양촌 문충공 권근이 다 청주 옥에 잡혀 갇혔다. 국문이 매우 준엄하여 일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하루는 새벽에 하늘이 비를 내렸는데 한낮이 되기 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아 성문을 무너뜨리고 넘쳐 들어와 집들이 다 잠겼다. 일을 묻던 관원이 떠내려가 빠졌다가 은행나무를 붙잡고 겨우 면하였다. 일이 알려져 놓아주고 묻지 않으니 문정과 문충이 이로 말미암아 온전할 수 있었다. 처음에 옥천군 유창이 두 공이 무고를 입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두 선생은 곧 하늘이 빼어나게 낸 사람이니 반드시 하늘의 변고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마침내 증험되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떠도는 말이 불행히 주공에게 미치자, 홀연 아름다운 벼에 큰바람이 일었네. 듣건대 서원에 큰물이 넘쳤다 하니, 이로써 하늘의 도가 예나 이제나 같음을 알겠네」 하였다.

17이색이 창을 세우자 한 일을 두고

麗季戊辰。僞主辛禑遜于江華。朝議欲立王氏。侍中曹敏修德李仁任薦拔之恩。謀立仁任族孫李琳女謹妃之子昌。恐諸將違己。以李穡名儒。欲藉其言。密問於穡。穡亦曰。當立前王之子。遂定議立昌。後臺諫論穡罪。不立王氏而立昌。是万世不忠罪惡之魁。後有史臣趙璞。論曰。晉元帝。顯著小吏牛金所生。王導輩實贊襄之。元帝雖假名。非帝不能鎭服人心。成中興之業。穡立昌之議。蓋亦如是。不可以是而全罪穡也。璞之言未知是否。然前史取之。而今删去。後之尙論之士。不可不知。

고려 말 무진년에 거짓 임금 신우가 강화로 물러났다. 조정의 의논이 왕씨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시중 조민수가 이인임이 뽑아 준 은혜를 덕으로 여겨 이인임의 겨레붙이 손자 이림의 딸 근비의 아들 창을 세우려 하였다. 여러 장수가 자기를 어길까 두려워, 이색이 이름난 유학자이므로 그 말을 빌리고자 몰래 이색에게 물었다. 이색도 「마땅히 앞 임금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하니 마침내 의논을 정하여 창을 세웠다. 뒤에 대간이 이색의 죄를 논하여 「왕씨를 세우지 않고 창을 세웠으니 이는 만세에 불충한 죄악의 으뜸이다」 하였다. 뒤에 사신 조박이 논하기를 「진나라 원제는 뚜렷이 작은 아전 우금의 소생인데 왕도의 무리가 실로 도와 이루었다. 원제가 비록 이름을 빌렸으나 원제가 아니었으면 인심을 눌러 굴복시키고 중흥의 업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색이 창을 세우자 한 의논도 대개 이와 같으니 이것으로 이색을 온전히 죄줄 수는 없다」 하였다. 조박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앞 사서는 이를 취하였는데 이제 깎아 버렸으니 뒷날 옛일을 논하는 선비가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

18유구 사신이 본 세 가지 장한 일

近日琉球使之還也。語人曰。我到朝鮮。見三壯事。曰慶會樓。石柱龍文纏繞。殊特奇絶。一壯也。曰押班宰相。長髥雪白。風彩凝俊。有老成之德。二壯也。蓋指蓬原鄭領相昌孫也。曰對客官。深杯大爵。酬酢無算。可飮一石。三壯也。蓋指成均司成李叔文也。

요즈음 유구 사신이 돌아갈 때 사람들에게 「내가 조선에 이르러 세 가지 장한 일을 보았다」 하였다. 하나는 「경회루의 돌기둥에 용 무늬가 얽혀 감겼으니 유달리 기이하고 뛰어나다. 이것이 첫째 장한 일이다」 하였다. 하나는 「반열을 이끄는 재상이 긴 수염이 눈처럼 희고 풍채가 어리어 준수하며 늙어 이룬 덕이 있다. 이것이 둘째 장한 일이다」 하였으니 대개 봉원부원군 영의정 정창손을 가리킨 것이다. 하나는 「손님을 맞는 관원이 깊은 잔과 큰 잔으로 주고받기를 셈 없이 하여 한 섬을 마실 만하다. 이것이 셋째 장한 일이다」 하였으니 대개 성균사성 이숙문을 가리킨 것이다.

19종을 시켜 남편을 옥에서 빼낸 허씨

朝官姓吳者。坐贓當死。讞部三覆啓已判。明日當刑。妻許氏出祕計。命一奴服婦人服。以帽裹頭。詣獄吏。告罪人吳某之妻許某。聞良人明當就戮。願一相訣。獄吏哀而許之。就一隙地。哭泣爲夫婦永訣之狀。奴預携刀鉅。隨手截去鎖杻。轉加身上。尋以室人服加主人。擠出獄門日。許氏告別辭去。別置駿馬於外。旋卽騎走。有頃。獄卒入視。非罪人乃奴也。追捕不及。世宗義其奴。免之。

오씨 성의 조관이 장물죄로 죽게 되었다. 얼(讞)을 맡은 부서에서 세 번 아뢰어 판결이 이미 났고 이튿날 형을 받을 참이었다. 아내 허씨가 은밀한 꾀를 내어 한 종에게 여인의 옷을 입히고 모자로 머리를 싸게 하여 옥리에게 나아가 「죄인 오 아무개의 아내 허 아무개인데, 남편이 내일 죽는다는 말을 듣고 한번 이별을 나누고자 합니다」 고하게 하였다. 옥리가 가엾이 여겨 허락하니 빈 자리에 나아가 곡하며 부부가 영원히 이별하는 모습을 지었다. 종이 미리 칼과 톱을 가지고 가 손 가는 대로 자물쇠와 차꼬를 끊어 제 몸에 옮겨 채우고, 이어 아내의 옷을 주인에게 입혀 옥문 밖으로 밀어내며 「허씨가 작별을 고하고 갑니다」 하였다. 밖에 따로 준마를 두었다가 곧 타고 달아났다. 얼마 뒤 옥졸이 들어가 보니 죄인이 아니라 종이었다.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세종께서 그 종을 의롭게 여겨 놓아주셨다.

20「아침에 도를 들으면」 — 신씨와 최씨 부인

有士族申氏女新寡。勳臣姓趙者。年踰七十求婚。申首鼠不決。趙有侄子爲駙馬新貴者。遣人解申曰。古人云朝聞道夕死可也。今君朝爲宰相妻。暮爲寡婦。亦不害爲令名。申稍識文理然之。及婚夕。趙忽發淋疾。如廁者再。重以喘疾。申於窓隙。覘其衰老遁去。明日訴于臺。臺官劾趙以勳相。强娶士族。失朝廷體。趙曰。申初聞朝聞道夕死之語許之。非强娶也。臺官劾申。申曰。駙馬儘有是語。妾初聞之。謂婦人守節不二。寧有意以大聖人之言爲奪節乎。臺官直申而非趙。趙落職。明年申適一老樞。物議紛然。予嘗見高麗仁宗朝平章事崔瓘。年八十餘。閱少時卜算。嘆曰。平生所歷。一如前定。但晩生貴子。是虛語耳。未幾隣有一達官家將納壻。壻暴死不果。瓘遣女奴求婚。父母不能決。一日閨中從容語女曰。以家閥女。嫁與微官而偕老。寧一日作宰相妻乎。女率爾曰可矣。遂婚有娠。越七月而瓘卒。生子曰洪胤。終身守節。洪胤擢明王癸巳乙科第一。官至平章事。一主司馬。四開禮闈。母夫人康强享福。如申氏者。崔夫人之罪人也。

사족 신씨의 딸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조씨 성의 훈신이 나이 일흔이 넘어 혼인을 구하였다. 신씨가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니, 조에게 부마가 되어 새로 귀해진 조카가 있어 사람을 보내 신씨를 달래기를 「옛사람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습니다. 이제 그대가 아침에 재상의 아내가 되고 저녁에 과부가 되어도 또한 좋은 이름이 되는 데 해롭지 않습니다」 하였다. 신씨가 조금 글의 이치를 알아 그렇게 여겼다. 혼인하는 저녁이 되자 조가 홀연 임질이 도져 뒷간에 두 번 가고 거기에 천식까지 겹쳤다. 신씨가 창틈으로 그 쇠하고 늙은 것을 엿보고 달아났다. 이튿날 대에 하소연하니 대관이 조를 탄핵하여 「훈신 재상으로 사족을 억지로 아내 삼아 조정의 체를 잃었다」 하였다. 조가 「신씨가 처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을 듣고 허락한 것이지 억지로 아내 삼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대관이 신씨를 탄핵하니 신씨가 「부마가 참으로 그런 말을 하였고 첩이 처음 그것을 들었습니다. 부인이 절개를 지켜 둘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어찌 큰 성인의 말씀으로 절개를 빼앗을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대관이 신씨를 옳다 하고 조를 그르다 하여 조가 벼슬을 잃었다. 이듬해 신씨가 한 늙은 중추에게 시집가니 물의가 어지러웠다. 내가 일찍이 보니 고려 인종 조 평장사 최관이 나이 여든 남짓에 젊을 때 본 점괘를 들추어 보고 탄식하여 「평생 지나온 것이 한결같이 앞서 정한 것과 같은데 다만 늘그막에 귀한 아들을 낳는다는 것만 빈말이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웃에 한 달관의 집이 사위를 맞으려 하는데 사위가 갑자기 죽어 이루지 못하였다. 최관이 계집종을 보내 혼인을 구하니 부모가 결단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안방에서 조용히 딸에게 「집안 문벌 있는 딸로서 낮은 벼슬아치에게 시집가 함께 늙는 것과, 하루라도 재상의 아내가 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니 딸이 선뜻 「좋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혼인하여 아이를 배었는데 일곱 달을 넘겨 최관이 죽었다. 아들을 낳으니 최홍윤이다. 몸을 마치도록 절개를 지켰다. 홍윤은 명종 계사년 을과 첫째로 뽑혀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고 한 번 사마시를 주관하고 네 번 예위를 열었으며, 어머니 부인은 굳세고 건강히 복을 누렸다. 신씨 같은 이는 최 부인의 죄인이다.

21「경은 부디 억지로 일을 아는 체하지 말라」

近有一奴容貌酷類女。奴自髫齕雌服。年踰四十。出入士大夫家門。事頗露。臺諫請論如法。世祖以事涉曖眛貸之。顧謂臣居正曰。於卿意如何。居正對曰。臣少閱江湖記問。江淮間一比丘尼善針繡。有良家。遣女兒師事之。忽覺有娠。爺孃詰責之。女曰與比丘日相寢處。如有人道之感。乃此至於斯。良家訴縣官覈之。審視比丘。則陰陽二道俱闕。縣官將貸之。有老嫠曰。法用鹽水。浸陽根之上。以黃狗舐之。陽道逆出。縣官試之果然。縣官判曰。在天之道。曰陰與陽。在人之道。曰男與女。今此比丘非男非女。亂人道之正。乃誅之。江淮人皆快。蓋天下事理無窮如是。世祖笑曰。卿愼勿强曉事。

요즈음 한 종이 있어 얼굴 모습이 몹시 여자를 닮았다. 종이 어릴 때부터 여자 옷을 입고 나이 마흔이 넘도록 사대부 집 문에 드나들었는데 일이 자못 드러났다. 대간이 법대로 논하기를 청하니 세조께서 일이 애매함에 걸린다 하여 용서하셨다. 나 거정을 돌아보시며 「경의 뜻에는 어떠한가」 물으셨다. 거정이 대답하기를 「신이 젊어서 강호의 기문을 보았는데, 강회 사이에 한 비구니가 바느질과 수를 잘하였습니다. 양가에서 딸아이를 보내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는데 홀연 아이 밴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가 꾸짖으니 딸이 『비구니와 날마다 함께 자고 지냈는데 사람의 도리를 느낀 듯한 일이 있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양가가 현관에 하소연하여 조사하게 하니, 비구니를 살펴본즉 음과 양 두 길이 다 없었습니다. 현관이 놓아주려 하니 한 늙은 과부가 『법에 소금물을 쓰는 것이 있습니다. 양근 자리를 적시고 누런 개로 핥게 하면 양도가 거꾸로 나옵니다』 하였습니다. 현관이 시험하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현관이 판결하기를 『하늘에 있는 도는 음과 양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는 도는 남자와 여자라 한다. 이제 이 비구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어서 사람 도리의 바름을 어지럽혔다』 하고 마침내 베니 강회 사람이 다 통쾌히 여겼습니다. 대개 천하의 사리는 이처럼 끝이 없습니다」 하였다. 세조께서 웃으시며 「경은 부디 억지로 일을 아는 체하지 말라」 하셨다.

22경주 노파가 얻은 구슬

慶州府有一村媼獨居。夜忽大震俄霽。庭中有一物。爛然光彩炯目。就視之。明珠團圓如鷄子大。置之房中。每夜光如燈燭。纖毫可鑑。媼知非常物。隣有一惡少濃誘袖去。詿曰納府。後六年媼訴府。朝廷遣官效問。惡少曰前府尹鄭發時納府。鄭不服。竟不得。鄕人曰惡少素窮乏。自得珠後。日就饒富。恐是珠使也。

경주부에 한 시골 노파가 홀로 살았다. 밤에 홀연 크게 우레가 치더니 이윽고 개었다. 뜰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 찬란한 광채가 눈에 빛났다. 나아가 보니 밝은 구슬이 둥글어 크기가 달걀만 하였다. 방 안에 두니 밤마다 빛이 등불 같아 가는 터럭도 비쳐 볼 만하였다. 노파가 예사 물건이 아님을 알았다. 이웃에 한 못된 젊은이가 있어 짙게 꾀어 소매에 넣어 가고는 「관부에 바쳤다」고 속였다. 여섯 해 뒤 노파가 부에 하소연하니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캐물었다. 못된 젊은이가 「앞 부윤 정발 때 부에 바쳤습니다」 하였으나 정이 인정하지 않아 끝내 얻지 못하였다. 고을 사람이 「못된 젊은이가 본디 궁핍하였는데 구슬을 얻은 뒤로 날로 넉넉하고 부유해졌으니 아마 이 구슬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23고양이와 뱀의 무덤

近有一僧。行乞閭閻。到忠州村舍。作寒乞聲。闃無人跡。久之聞婦人號哭聲。徊徨佇立。有老嫠。出語僧曰。老嫠夫妻與女三人同居。今日食頃間。夫與女。同時俱斃。蒼黃顚倒。岡知攸措。願師哀憐。僧入視。一堂之內。老父幼女貓蛇。四者狼藉同死。僧訊其由。嫠曰女兒忽患指腫。俄頃大如脛。腰腹亦如甕。卽死。蓋猫兒捕蛇。啗其尾遺其頭。蛇螫女兒至此。父怒猫欲殺。猫懼隱於架上。父怒未霽。作捕狀。猫猝飛下扼父喉。却不得劍猫而斃。父亦死。言未訖。痛哭幾絶。僧曰今四者三生罪業如是。若不脩冥福。劫劫難離。燒二屍灰之。收猫蛇作一塚。人稱曰猫蛇塚云。

요즈음 한 승려가 여염을 돌며 빌다가 충주의 시골집에 이르러 「추워 비는 소리」를 내었으나 고요하여 사람 자취가 없었다. 한참 뒤 부인의 곡하는 소리가 들려 서성이며 서 있으니 한 늙은 과부가 나와 승려에게 「늙은 과부가 남편과 딸 셋이 함께 살았는데 오늘 밥 한 끼 먹을 사이에 남편과 딸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창황하고 넘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니 스님께서 가엾이 여겨 주소서」 하였다. 승려가 들어가 보니 한 집 안에 늙은 아비와 어린 딸과 고양이와 뱀 넷이 어지러이 함께 죽어 있었다. 승려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과부가 「딸아이가 홀연 손가락이 붓는 것을 앓더니 잠깐 사이에 정강이만 해지고 허리와 배도 항아리 같아지더니 곧 죽었습니다. 대개 고양이가 뱀을 잡아 그 꼬리를 먹고 머리를 남겼는데 뱀이 딸아이를 쏘아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아비가 고양이에게 노하여 죽이려 하니 고양이가 두려워 시렁 위에 숨었습니다. 아비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잡는 시늉을 하니 고양이가 갑자기 날아 내려와 아비의 목을 조르고, 도리어 벗어나지 못하여 칼에 베여 죽었으며 아비도 죽었습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기 전에 통곡하여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하였다. 승려가 「이제 넷이 삼생의 죄업이 이와 같으니 만약 명복을 닦지 않으면 겁겁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두 주검을 태워 재로 만들고 고양이와 뱀을 거두어 한 무덤을 지으니 사람들이 「고양이와 뱀의 무덤」이라 일컬었다.

24흰옷을 숭상함은 양 가운데 음이다

嘗觀嬴蟲錄曰。高麗人好白衣。道詵曰東方屬木。宜尙靑。而尙白。是金剋木不可也。居正曰陽中有陰。陰中有陽。東方屬靑而尙白。是陽中之陰也。以此推之。西方屬金尙白。而西域人面皆靑。北方屬水尙黑。而人面皆紫。南方屬火尙赤。而人面皆烏。陰陽之義也。

일찍이 『영충록』을 보니 「고려 사람이 흰옷을 좋아한다. 도선이 『동방은 목에 딸리니 마땅히 푸른빛을 숭상해야 하는데 흰빛을 숭상하니 이는 금이 목을 이기는 것이라 옳지 않다』 하였다」 하였다. 나 거정은 이렇게 생각한다. 양 가운데 음이 있고 음 가운데 양이 있다. 동방은 푸름에 딸리면서 흰빛을 숭상하니 이는 양 가운데 음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서방은 금에 딸려 흰빛을 숭상하는데 서역 사람의 얼굴은 다 푸르고, 북방은 물에 딸려 검은빛을 숭상하는데 사람의 얼굴은 다 자줏빛이며, 남방은 불에 딸려 붉은빛을 숭상하는데 사람의 얼굴은 다 검다. 음양의 뜻이다.

25여자 무당은 많고 남자 무당은 적다

有女巫能爲鬼神語。試往事百中。問將來百不一中。少時狂斐數十輩直抵巫家。呼試之。巫口噤不開。蓋男子陽也。鬼神陰也。陰伏於陽。理之必然。且男巫少而女巫多。是其驗也。

귀신의 말을 할 줄 아는 여자 무당이 있었다. 지나간 일을 시험 삼아 물으면 백 번 다 맞혔으나 다가올 일을 물으면 백에 하나도 맞히지 못하였다. 젊어서 미친 듯 날뛰는 무리 수십이 곧바로 무당의 집에 이르러 불러 시험하니 무당이 입이 닫혀 열리지 않았다. 대개 남자는 양이요 귀신은 음이니 음이 양에 엎드리는 것은 이치에 반드시 그러하다. 또 남자 무당은 적고 여자 무당이 많은 것이 그 증험이다.

26연오와 세오 — 오우치 집안의 조상일까

日本國大內殿。以其先世出自我國。向慕之誠。異於尋常予嘗遍考前史。未知出處。但新羅殊異傳云。東海濱有人。夫曰迎烏。妻曰細烏。一日迎烏採藻海濱。忽漂至日本國。小島爲主。細烏尋其夫。又漂至其國。立爲妃。是時新羅日月無光。日者奏曰。迎烏細烏。日月之精。今去日本。故有斯怪。王遣使求二人。迎烏曰。我到此天也。乃以細烏所織綃。付送使者曰。以此祭天可矣。遂名祭天所曰迎日。仍置縣。是斯羅阿達王四年也。我國人之爲王於日本者。止此耳。但未知其說之是非也。大內之先。恐或出此。

일본국 오우치도노는 그 선대가 동방에서 나왔다 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여느 때와 달랐다. 내가 일찍이 앞 사서를 두루 상고하였으나 그 나온 데를 알지 못하였다. 다만 『신라수이전』에 이르기를, 동해 가에 사람이 있어 남편은 연오(迎烏)라 하고 아내는 세오(細烏)라 하였다. 하루는 연오가 바닷가에서 마름을 캐다가 홀연 일본국에 떠밀려 이르러 작은 섬의 주인이 되었다. 세오가 그 남편을 찾다가 또 그 나라에 떠밀려 이르러 왕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으니 일관이 아뢰기를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인데 이제 일본으로 갔으므로 이런 괴이함이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구하니 연오가 「내가 여기에 이른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고, 세오가 짠 비단을 사자에게 부쳐 보내며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하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하늘에 제사한 곳을 영일(迎日)이라 이름하고 이어 현을 두었다. 이는 사라 아달왕 사년의 일이다. 동방 사람으로 일본에서 왕이 된 이는 이뿐이다. 다만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다. 오우치의 선대는 아마 여기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27왕안석은 간신전인가 열전인가 — 『송사』가 오다

世宗朝。宋史不到本國。世宗屢陳請。未蒙欽賜。一日集賢諸先生論宋朝人物。居正亦在末席。或曰。作宋史。王安石合在何傳。諸先生皆曰。合在奸臣傳。有一二駁者曰。安石作新法亂天下。是誠小人。然安石文章節義。多有可稱者。而原其心未嘗不在於憂國憂民。其誤天下正者。迂闊執拗耳。不可齒列於秦檜蔡京之儔也。合在列傳。柳誠源力主是議。未幾宋史來。安石果在列傳。誠源喜曰。昔朱子綱目之未到我國也。益齋李先生高麗讀資治武后紀。喟然而嘆。作詩一聯云。那將周餘分。續我唐日月。後得綱目。朱子果黜周而尊唐。益齋先生頗亦自負。誠源雖不敢竊比益老。當受諸君降幡。

세종 조에 『송사』가 조선에 이르지 않았다. 세종께서 여러 번 청하셨으나 내려 주심을 입지 못하였다. 하루는 집현전 여러 선생이 송나라 조정의 인물을 논하는데 나 거정도 끝자리에 있었다. 어떤 이가 「『송사』를 지었다면 왕안석은 마땅히 어느 전에 있어야 하겠는가」 하니 여러 선생이 다 「마땅히 간신전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한두 사람이 반박하여 「왕안석이 새 법을 지어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는 참으로 소인이다. 그러나 왕안석의 문장과 절의는 일컬을 만한 것이 많고,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일찍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함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천하를 그르친 것은 세상 물정에 어둡고 고집스러웠을 뿐이니 진회·채경의 무리에 나란히 세울 수 없다. 마땅히 열전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유성원이 이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사』가 오니 왕안석이 과연 열전에 있었다. 유성원이 기뻐하며 「옛날 주자의 『강목』이 우리나라에 이르지 않았을 때, 익재 이 선생이 고려에서 『자치통감』의 무후기를 읽고 서글피 탄식하여 시 한 연을 짓기를 『어찌 주나라의 남은 몫을 가져다 우리 당나라의 해와 달을 이으랴』 하였다. 뒤에 『강목』을 얻으니 주자가 과연 주나라를 내치고 당나라를 높였다. 익재 선생이 자못 스스로 자부하였다. 내가 비록 감히 익재 노인에게 견주지는 못하나 마땅히 여러분의 항복 깃발은 받아야겠다」 하였다.

28고려 사신이 제 나라 세계를 가리지 못하다

宋煕寧中。高麗遣使入宋。神宗命曾鞏。撰高麗世次紀。以王氏高麗。上接朱蒙。高句麗已失世系矣。鞏請帝令臣畢仲行因話從容問高麗世次於使臣。若或未對。卽論歸本國討尋記錄。向後使人來附何如。於是問之。麗使則未能分別高句麗高麗世系而白之。深可恨也。今考麗史。煕寧三年。高麗使吏部尙書金悌。入貢于宋。今此使臣意金悌也。

송나라 희령 연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들었다. 신종이 증공에게 명하여 「고려세차기」를 짓게 하였는데, 왕씨 고려를 위로 주몽에 이었으니 고구려는 이미 세계를 잃은 것이다. 증공이 황제에게 청하여 신 필중행을 시켜 이야기하는 김에 조용히 고려의 세차를 사신에게 묻게 하고, 만약 대답하지 못하면 곧 본국에 돌아가 기록을 찾아보게 하여 뒤에 오는 사신이 붙여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였다. 이에 물으니 고려 사신은 고구려와 고려의 세계를 분별하여 아뢰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스럽다. 이제 고려 역사를 상고하니 희령 삼년에 고려가 이부상서 김제를 사신으로 보내 송나라에 조공하였다 하니, 이번 이 사신은 아마 김제일 것이다.

29능침에 비를 세우지 않은 것은 현릉부터

太祖健元陵碑。文忠公權近所製。太宗獻陵碑。文肅公卞季良所製。世宗英陵碑。文成公鄭麟趾所製。及文宗顯陵。依三陵例。將豎碑。功已就緖。獻議者以謂。自古人君行事之跡。備載國史。不必如士大夫立神道碑。請罷。從之。後日英陵之遷驪州。亦埋碑不用。國朝陵寢不立碑。自顯陵始。

태조의 건원릉 비는 문충공 권근이 지었고, 태종의 헌릉 비는 문숙공 변계량이 지었으며, 세종의 영릉 비는 문성공 정인지가 지었다. 문종의 현릉에 이르러 세 능의 예에 따라 장차 비를 세우려 하여 일이 이미 실마리를 잡았는데, 의논을 낸 이가 「예부터 임금이 하신 일의 자취는 나라 사서에 갖추어 실리니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여 그만두기를 청하니 따르셨다. 뒷날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에도 비를 묻고 쓰지 않았다. 국조의 능침에 비를 세우지 않는 것은 현릉부터 비롯되었다.

30중국에서 판에 새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崔致遠所著桂苑筆耕。載文獻通攷。以今觀之。致遠文章。詭奇澁僻。不足動天下。近有人得唐本一集而來。乃我國僧懶翁所著。翁本不學。後有精進之功。能解文字。所著語錄。詩句亦生疏。今皆刊板。行于中國。中國之人之繡梓者。不必盡善也。居正近赴京。有書生邵鎭者。以傭書爲業。誦李陶隱詩數首。問得之何處。曰。汝國宰相李邊所贈。鄭文成公嘗語曾赴京見一儒士云。汝國牧隱集最好。可與黃蘇頡頑。問得之何處。曰。汝國譯官金自安所贈。

최치원이 지은 『계원필경』이 『문헌통고』에 실려 있다. 이제 보건대 최치원의 문장은 괴이하고 기이하며 껄끄럽고 치우쳐 천하를 움직이기에 모자란다. 요즈음 어떤 이가 당본 한 집을 얻어 왔는데 곧 우리나라 승려 나옹이 지은 것이었다. 나옹은 본디 배우지 않았으나 뒤에 정진한 공이 있어 글자를 알게 되었다. 지은 어록의 시구도 생소하다. 이제 다 판에 새겨 중국에 다닌다. 중국 사람이 판에 새긴 것이 반드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요즈음 서울에 가니 소진이라는 서생이 글씨 품팔이를 업으로 하면서 도은 이숭인의 시 몇 수를 외웠다. 어디서 얻었는지 물으니 「그대 나라 재상 이변이 준 것이다」 하였다. 문성공 정인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서울에 갔을 때 한 유사를 보니 「그대 나라 목은집이 가장 좋아 황정견·소식과 겨룰 만하다」 하기에 어디서 얻었는지 물으니 「그대 나라 역관 김자안이 준 것이다」 하였다.

31『삼국사기』는 미더이 전하는 책이 아니다

我國自箕子受周封。興八條之敎。行井田法。當其時。豈無史官。而載籍不傳。新羅高句麗百濟。三國鼎峙。亦無史可傳。金富軾作三國史。掇拾通鑑三國誌南北史隋唐書爲傳記表志。已非傳信之書。至於記事。每引所出之書。尤非作史之體。又如侵伐會盟等事。以一事而疊書於三國紀。文不稍變。亦不足取。

동방은 기자가 주나라 봉함을 받은 뒤로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일으키고 정전법을 행하였다. 그때에 어찌 사관이 없었겠는가마는 실린 책이 전하지 않는다.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가 솥발처럼 섰으나 또한 전할 만한 사서가 없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자치통감』·『삼국지』·『남북사』·『수서』·『당서』를 주워 모아 전기와 표와 지를 만들었으니 이미 미더이 전하는 책이 아니다. 일을 적는 데 이르러서는 늘 나온 책을 끌어 대니 더욱 사서를 짓는 체가 아니다. 또 침범하고 회맹하는 따위의 일을 한 가지 일인데도 세 나라 기록에 거듭 적으면서 글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으니 또한 취할 것이 못 된다.

32고려 세계의 용손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金寬毅閔漬論高麗世系曰。龍孫曰唐貴姓者。皆誕妄無實。顯宗朝。黃周亮撰太祖以下七代實錄。無一言及此。寬毅漬生於數百載之後。能知周亮所不著載于冊。是尤可疑。若如是說。麗祖舍曾祖不祖。而反祖曾祖母之父。且父爲考。而女爲妣。天下寧有是理。知其說之誣也。然後之撰麗史者。取之附外紀。何耶。

김관의와 민지가 고려의 세계를 논하여 「용의 자손이다」 하고 「당나라의 귀한 성이다」 한 것은 다 허탄하고 실상이 없다. 현종 조에 황주량이 태조 이하 일곱 대의 실록을 지었는데 한마디도 이에 미친 것이 없다. 김관의와 민지는 수백 년 뒤에 나서 황주량이 책에 싣지 않은 것을 능히 알았다 하니 이것이 더욱 의심스럽다. 만약 그 말과 같다면 고려 태조가 증조를 할아버지로 삼지 않고 도리어 증조모의 아버지를 할아버지로 삼은 것이며, 또 아비를 아버지로 삼고 딸을 어머니로 삼은 셈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그런데 뒤에 고려 역사를 지은 이가 이를 취하여 외기(外紀)에 붙인 것은 어째서인가.

33고려 역사는 몇 번이나 시작되었나

高麗本史長編。成於本朝金宗瑞鄭麟趾。嘗見鄭摠序云。恭愍朝。李齊賢撰史略。止於肅宗。李仁復李穡撰金鏡錄。止於靖宗。史畧雖不見全書。齊賢之論行于世。金鏡錄不見其書。疑其書之未成也。我本朝開國之初。命鄭道傳鄭摠撰高麗史。鄭摠爲之序。然不見其書。疑其書之未成。抑雖成而有未盡處。不之傳耳。

『고려본사』 장편은 본조의 김종서·정인지에게서 이루어졌다. 일찍이 정총의 서문을 보니 「공민왕 조에 이제현이 『사략』을 지었는데 숙종에서 그쳤고, 이인복·이색이 『금경록』을 지었는데 정종에서 그쳤다」 하였다. 『사략』은 비록 온 책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제현의 논이 세상에 다니고, 『금경록』은 그 책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책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조선 개국 처음에 정도전·정총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짓게 하고 정총이 그 서문을 지었으나 그 책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책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아니면 비록 이루어졌더라도 다하지 못한 데가 있어 전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34어효첨의 집안 법 — 땅을 가리지 않고 묻다

魚文孝公嘗辨論山家地理之說。上疏極陳。明白正大。英陵問鄭文成公麟趾曰。孝瞻之論則然矣。其父母之窆葬。能不用此法乎。麟趾曰。嘗奉使到咸安。見孝瞻葬父於家園之側。似非惑於地理者也。然龍虎龜雀左右前後之神。無處不在。文成之論。雖言孝瞻之得。而亦未必不泥於山家法。後文孝葬母。與先君同域。及文孝卒。子世謙世恭葬於廣津瀕。亦不擇地。家法如此。

문효공 어효첨이 일찍이 산가 지리의 설을 따져 논하여 상소로 극진히 아뢰니 밝고 바르며 컸다. 영릉께서 문성공 정인지에게 「효첨의 논은 그러하나 그 부모의 무덤은 이 법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으셨다. 정인지가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함안에 이르러 보니 효첨이 그 아버지를 집 동산 곁에 묻었으니 지리에 홀린 이는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청룡·백호·현무·주작의 좌우와 앞뒤의 신이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문성의 논은 비록 효첨이 얻은 바를 말하였으나 또한 산가의 법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뒤에 문효가 어머니를 장사하며 선친과 같은 자리에 하였고, 문효가 죽자 아들 세겸과 세공이 광진 물가에 장사하며 또한 땅을 가리지 않았으니 집안 법이 이와 같았다.

35「공자의 찬」이라는 그림 — 억지로 일을 아는 체함

少日。與同學二三人遊山寺。見一畫佛。題其上曰。孔子贊吳道子畫蘇軾書。或曰古畫必妙。盍袖而去。或有强料事者曰。孔子周人也。漢明帝時。佛法始入中國。謂孔子贊佛無理。且吳道子唐人也。安有吳道子畫而孔子贊乎。蘇軾生於千百載之後。安得與孔子同時。而書所著之贊乎。必後世好事者所爲也。予等皆年少。不料事信之。後於一貴公子家見此畫。乃稱古今第一。而爲畫譜之首。矛審視之。則所謂孔子贊者。乃列子所言孔子曰西方有大聖人。名曰佛。不言而信無爲而化之說也。蘇軾取而書之。前日强料事者之言。可付之一笑。後世不知本末而强解事者。皆此類也。

젊은 날 함께 배우던 두세 사람과 산속 절에 놀러 갔다가 한 부처 그림을 보았는데 그 위에 「공자 찬, 오도자 그림, 소식 글씨」라 적혀 있었다. 어떤 이가 「옛 그림이니 반드시 묘할 것이다. 어찌 소매에 넣어 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억지로 일을 헤아리는 이가 있어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다. 한나라 명제 때 불법이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으니 공자가 부처를 찬하였다 함은 이치가 없다. 또 오도자는 당나라 사람인데 어찌 오도자의 그림에 공자의 찬이 있겠는가. 소식은 천백 년 뒤에 났는데 어찌 공자와 같은 때에 있어 그 지은 찬을 쓰겠는가. 반드시 뒷세상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이가 한 짓이다」 하였다. 우리는 다 나이가 어려 일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말을 믿었다. 뒤에 한 귀공자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니 곧 고금의 제일이라 일컬어 화보의 첫머리가 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른바 「공자의 찬」이라는 것은 곧 『열자』에 실린 「공자가 이르기를 『서방에 큰 성인이 있으니 이름이 불이다. 말하지 않아도 미덥고 하는 것 없이 교화한다』 하였다」는 말이었다. 소식이 이를 가져다 쓴 것이니, 지난날 억지로 일을 헤아린 이의 말은 한바탕 웃음거리로 붙일 만하다. 뒷세상에 본말을 알지 못하면서 억지로 일을 아는 체하는 이가 다 이런 무리다.

36붉은 종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 흠

南議政智黃議政守身。皆爲首相。功名富貴。當代無比。常曰男子不於紅紙上題名。餘不足觀。以此爲自欠耳。

의정 남지와 의정 황수신은 다 수상이 되어 공명과 부귀가 당대에 견줄 이가 없었다. 늘 말하기를 「사내가 붉은 종이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하여 이것을 스스로 모자란 것으로 여겼을 뿐이다.

37「경수도 아저씨입니다」 — 옛날의 곧은 사람

偰提學循性淳直。學問深邃。循之祖遜。元朝名進士。元季避亂來高麗。有三子。曰長壽。曰眉壽。曰庚壽。皆以文名顯稱。循入侍經筵。世宗問曰。卿之叔父幾人。循曰。長壽叔眉壽叔庚壽叔。上曰庚壽莫是卿父。循低聲曰唯唯。上笑曰。循眞古之遺直也。

제학 설순은 성품이 순박하고 곧으며 학문이 깊었다. 설순의 할아버지 설손은 원나라 조정의 이름난 진사인데 원나라 말에 난을 피해 고려에 왔다. 아들 셋이 있으니 장수·미수·경수라 하는데 다 글로 이름이 드러났다. 설순이 경연에 들어 모시니 세종께서 「경의 숙부는 몇 사람인가」 물으셨다. 설순이 「장수 아저씨, 미수 아저씨, 경수 아저씨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경수는 그대 아버지가 아닌가」 하시니 설순이 낮은 소리로 「예, 예」 하였다. 임금께서 웃으시며 「설순은 참으로 옛날의 남은 곧은 사람이다」 하셨다.

38「늙은 도적이 이미 내 꾀에 떨어졌다」

許恭簡公誠性執。嘗爲吏曹判書。奉公守正。關節不到。嫉人干請。有請必反其意。有一朝官。例遷當補外寄。請官南道。乃授平安道邊郡。一文士請爲文官華職。乃授外敎授。興德寺僧一雲。權詐多智計。欲住斷俗寺。誣訴曰。聞西道永明寺山水之勝。欲往一住。若住斷俗。吾事去矣。數日批下雲住斷俗。雲大笑曰。老賊已墮吾術中。

공간공 허성은 성품이 고집스러웠다. 일찍이 이조판서가 되어 공을 받들고 바름을 지키니 청탁이 이르지 못하였다.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청함이 있으면 반드시 그 뜻과 반대로 하였다. 한 조관이 으레 옮길 때가 되어 바깥 자리에 보충되게 되었는데 남쪽 도의 벼슬을 청하니 곧 평안도 변방 고을을 주었다. 한 문사가 문관의 화려한 직을 청하니 곧 바깥 교수를 주었다. 흥덕사 승려 일운은 권모와 속임이 많고 꾀가 많았는데 단속사에 살고자 하여 거짓으로 하소연하기를 「듣건대 서도 영명사의 산수가 뛰어나다 하니 가서 한번 살고 싶습니다. 만약 단속사에 살게 되면 제 일은 그만입니다」 하였다. 며칠 뒤 비답이 내려 일운을 단속사에 살게 하니 일운이 크게 웃으며 「늙은 도적이 이미 내 꾀에 떨어졌다」 하였다.

39「글씨 배우는 종이가 얼마나 든다고」

權文景公軫有兒子。學書費紙。夫人曰。紙價甚高。恐不能繼。文景曰惡是何言。有不肖子弟。靑樓沽酒。曰費萬錢。或耽於博奕游畋狗馬花卉。破壞家業者甚多。學書之紙。其費幾何。卿母多談。

문경공 권진에게 아이가 있어 글씨를 배우느라 종이를 많이 썼다. 부인이 「종잇값이 매우 비싸니 이어 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문경이 「아, 이 무슨 말인가. 못난 자제가 있어 푸른 다락에서 술을 사며 하루에 만 냥을 쓰기도 하고, 혹 노름과 사냥과 개와 말과 꽃에 빠져 집안 살림을 깨뜨리는 이가 매우 많다. 글씨 배우는 종이가 그 비용이 얼마나 되겠는가. 부인은 말이 많소」 하였다.

40주자는 마흔엿새에 상소 수십 통을 올렸다

梁文襄公誠之在集賢殿。屢封章論時事。諸君曰若不切時務。不必陳瀆如此。文襄曰。朱晦菴在宋光宗時。立朝四十六日。疏數十上。予侍從踰十年。疏未數十上。君何云爾也。

문양공 양성지가 집현전에 있으면서 여러 번 봉장으로 시사를 논하였다. 여러 사람이 「만약 시무에 절실하지 않다면 이처럼 번거로이 아뢸 것이 없다」 하니, 문양이 「주 회암이 송나라 광종 때 조정에 선 지 마흔엿새에 상소 수십 통을 올렸다. 나는 시종한 지 열 해가 넘었는데도 상소가 수십 통에 미치지 못한다. 그대는 어찌 그리 말하는가」 하였다.

41「벼루 물 가져오라, 신석조」 — 손자를 감싼 도량

辛武節公有定嘗遇倭賊。賊將跪而斬之。武節見賊兩脚間腎囊嚲下。猝以手拉之。賊踣地。抽劍斬之。時稱猛將。後杖鉞鎭邊。以武烈著稱。然性大急。見人不可。必極口怒罵而後止。孫文僖公碩祖每曰。鑑祖性急。佩韋自警。嘗修史春秋館。與一下僚。同事筆硯。下僚悤遽間顧吏高聲語曰。辛碩祖將硯水來。旋卽慙赧低頭不能仰視。文僖遽前執手曰。我輩少時失言於先生長者前。豈止此耶。卽呼酒來。滿酌對飮。人服其弘量。

무절공 신유정이 일찍이 왜적을 만났는데 적이 무릎 꿇리고 베려 하였다. 무절이 적의 두 다리 사이에 불알이 늘어진 것을 보고 갑자기 손으로 잡아채니 적이 땅에 넘어졌다. 칼을 뽑아 베니 그때 사나운 장수라 일컬었다. 뒤에 도끼를 잡고 변방을 지켜 무예와 매서움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그러나 성품이 몹시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음을 보면 반드시 입을 다하여 노하여 꾸짖은 뒤에야 그쳤다. 손자 문희공 신석조가 늘 「내 성품이 급하다」 하며 가죽을 차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일찍이 춘추관에서 사서를 닦으며 한 아래 요속과 붓과 벼루를 함께 썼다. 요속이 바쁜 사이에 아전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신석조, 벼루 물 가져오라」 하고는 곧 부끄러워 낯을 붉히고 머리를 숙여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문희가 얼른 나아가 손을 잡고 「우리도 젊을 때 선생과 어른 앞에서 말을 잘못한 일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하고 곧 술을 가져오게 하여 가득 따라 마주 마시니 사람들이 그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42「내 아이라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黃襄平公孝源爲義禁府提調時。有人訴一文士妻與家奴通生一兒。方推劾。士妻不服。有具鎭撫者。掌鞫問。告襄平曰。士妻固諱。然觀氣勢似是黃孝源之兒。襄平曰。若是吾兒。吾復何憂。大笑烘堂。

양평공 황효원이 의금부 제조가 되었을 때, 어떤 이가 한 문사의 아내가 집 종과 정을 통하여 아이 하나를 낳았다고 하소연하여 바야흐로 캐어 밝히는 중이었다. 문사의 아내가 인정하지 않았다. 구씨 성의 진무가 국문을 맡았는데 양평에게 고하기를 「선비의 아내가 굳이 숨깁니다만 기세를 보니 아마 황효원의 아이인 듯합니다」 하였다. 양평이 「만약 내 아이라면 내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니 온 방이 크게 웃었다.

43고죽 고을에 산다고 다 맑은 절개인가

居正嘗在集賢殿。與李文簡公承召同坐。有同僚柳誠源。請作海州李牧使挽章。柳曰。李卽雙梅學士之後。文簡曰。此是雙梅之後。何無馨德也。柳應聲曰。人居孤竹之鄕。盡有淸節乎。蓋海州別號孤竹。文簡之父母居海州。

내가 일찍이 집현전에 있으며 문간공 이승소와 함께 앉아 있었다. 동료 유성원이 해주 이 목사의 만장을 지어 달라 청하며 「이는 곧 쌍매 학사의 후손이다」 하였다. 문간이 「이 사람이 쌍매의 후손인데 어찌 꽃다운 덕이 없는가」 하니 유성원이 소리에 응하여 「사람이 고죽(孤竹)의 고장에 살면 다 맑은 절개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해주의 딴 이름이 고죽이요 문간의 부모가 해주에 살았기 때문이다.

44「이것이 이른바 꽥꽥거리는 고기입니까」

李貞靖公邊性峭直。爲吏曹參議。每詮注。多駁長官所爲。因與之不愜。一日外官有贈鮮魚美肉者。不受。聞長官已受。其日謁長官。饋以美肉。貞靖擧箸曰。此所謂鶂鶂之肉乎。長官深銜之。

정정공 이변은 성품이 가파르고 곧았다. 이조참의가 되어 벼슬을 매길 때마다 장관이 하는 일을 많이 반박하여 그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하루는 바깥 벼슬아치 가운데 싱싱한 물고기와 좋은 고기를 보낸 이가 있었는데 받지 않았다. 장관이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날 장관을 뵈러 가니 좋은 고기를 대접하였다. 정정이 젓가락을 들며 「이것이 이른바 꽥꽥거리는 고기입니까」 하니 장관이 깊이 마음에 품었다.

45「허 승은 오랫동안 귀가 먹었다」

李文簡公承召爲禮曹判書。一郞官日飮無何。公務多闕。同列有欲黜者。文簡笑曰。許丞多時耳聾重聽。長官不忍絶之。今郞官雖長醉。然醒時亦多。又何廢爲。

문간공 이승소가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한 낭관이 날마다 마셔 그침이 없어 공무를 많이 빠뜨렸다. 동료 가운데 내쫓으려는 이가 있으니 문간이 웃으며 「허 승은 오랫동안 귀가 먹어 잘 듣지 못하였으나 장관이 차마 끊지 못하였다. 이제 낭관이 비록 오래 취해 있으나 깨어 있는 때도 또한 많으니 또 어찌 그만두게 하겠는가」 하였다.

46누런 소를 타고 다닌 조운흘

趙碩澗云矻。自少奇偉卓犖。不與世低昂。麗李見世亂。托靑盲不仕。入本朝。尹鷄林江陵二府。未幾托病卜居廣州之古垣村。韜晦不見。一日左相上洛金公士衡歷訪。欲勸之一仕。碩澗穿闊袖布衫。頂葦笠。長楫不交一語。上洛曰。崛强是老。故態如之何。命駕而還。碩澗日騎牛往來鄭金廣津二院。施濟行旅。嘗自吟曰。騎黃牛傍靑山。麤麤乎其身彩。一疋布也不直。

석간 조운흘은 젊어서부터 기이하고 위대하며 뛰어나 세상과 높낮이를 함께하지 않았다. 고려 말에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눈이 멀었다 핑계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본조에 들어와 계림과 강릉 두 부의 부윤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하고 광주 고원촌에 살 곳을 정하고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는 좌상 상락 김사형 공이 지나는 길에 찾아와 한 번 벼슬하기를 권하려 하였다. 석간이 넓은 소매 베적삼을 입고 갈대 삿갓을 쓰고 길게 읍할 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상락이 「굴강한 이 늙은이의 옛 모습을 어찌하랴」 하고 수레를 명하여 돌아갔다. 석간이 날마다 소를 타고 정금원과 광진원 두 원을 오가며 길 가는 이를 도와 건네주었다. 일찍이 스스로 읊기를 「누런 소를 타고 푸른 산을 곁에 두니, 거칠고 거친 이 몸의 빛깔이여. 한 필 베에도 값하지 못하네」 하였다.

47「백도에게 아들이 없다」 — 하늘의 도를 알 수 없다

李文惠公孟畇學問精深。筆跡高妙。有韓山稼牧風。位至貳公。晩節以非罪蹉趺。且無後。嘗有詩云。自從人道起於人。父子相傳到此身。我罪伊何天不弔。未爲人父鬢絲新。有轗軻不盡之意。人皆曰。伯道無兒。天道未可知於文惠亦然。

문혜공 이맹균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필적이 높고 묘하여 한산 목은의 풍이 있었다. 자리가 이공(貳公)에 이르렀으나 늘그막에 죄 없이 넘어졌고 또 뒤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 일찍이 시가 있어 「사람의 도가 사람에게서 일어난 뒤로, 아비와 아들이 서로 전하여 이 몸에 이르렀네. 내 죄가 무엇이기에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남의 아비 되지 못한 채 살쩍만 새로 세는가」 하였으니 뜻대로 되지 않은 다하지 못한 뜻이 있다. 사람들이 다 「『백도에게 아들이 없다』 하였으니 하늘의 도는 알 수 없다는 말이 문혜에게도 그러하다」 하였다.

48「등잔 밑이 어둡다는 계를 맺자」

李文景公種善牧隱之子。權摠制踐陽村之子。文景爲摠制妹壻。摠制嘗醉語文景曰。君爲牧隱之子。而文章不足。我是陽村之兒。而文名又不及。君吾兄弟。當作燈下不明契。聞者皆笑。

문경공 이종선은 목은의 아들이요 총제 권천은 양촌의 아들이다. 문경이 총제의 매부가 되었다. 총제가 일찍이 취하여 문경에게 「그대는 목은의 아들인데 문장이 모자라고, 나는 양촌의 아이인데 글 이름이 또 미치지 못한다. 그대와 나 형제는 마땅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계를 맺어야겠다」 하니 듣는 이가 다 웃었다.

49「경을 잇는 이가 다 경 같다면 좋겠으나」

韓文靖公繼禧學問精詣。識見高邁。大爲光陵器遇。爲吏曹判書。從容啓曰。臣待罪銓衡。常開閤迎士大夫品題人物。尙恐不能甄拔賢愚。況今設循資之格。嚴奔競之禁。是使聾瞽卞聲色。乞罷之。上曰使繼卿者皆如卿則可。非卿不可。公之注擬人物。一出至公。不以私恩貸親舊。士大夫有或爲弟子求官者。不甚拒之曰。古人云內擧不廢親子弟尙賢言之者非過。用之者非私。苟以謂膏梁子弟稍存形迹。非知用人大體者。

문정공 한계희는 학문이 정밀히 나아갔고 식견이 높고 뛰어나 광릉께 크게 그릇으로 대접받았다. 이조판서가 되어 조용히 아뢰기를 「신이 전형의 자리에 죄를 기다리며 늘 문을 열고 사대부를 맞아 인물을 품평하면서도 오히려 어질고 어리석음을 가려 뽑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이제 순자의 격식을 두고 분경의 금지를 엄히 하니 이는 귀먹고 눈먼 이에게 소리와 빛을 가리게 하는 것입니다. 없애기를 빕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경을 잇는 이가 다 경 같다면 좋겠으나 경이 아니면 안 된다」 하셨다. 공이 인물을 매기는 것이 한결같이 지극한 공정함에서 나와 사사로운 은혜로 친구를 봐주지 않았다. 사대부 가운데 혹 제자를 위해 벼슬을 구하는 이가 있어도 심히 물리치지 않고 「옛사람이 『안으로 천거하되 친자제를 빼지 않는다』 하였다. 어짊을 높여 말하는 이는 지나침이 아니요 쓰는 이도 사사로움이 아니다」 하였다. 만일 기름진 집 자제라 하여 조금이라도 형적을 남긴다면 사람 쓰는 대체를 아는 이가 아니다.

50경악의 가까이 모시는 직분은 간쟁이 아니다

李文質公苪曰。經幄近侍之職。在於論思獻替。格君心之非而已。至於論國家大政是非人物。則思出其位非其職。近來侍從新進之輩。不識大體。喜論時政得失。或指擿宰相士大夫微過。暴揚於朝。期於廢黜。以自衒鬻。甚不可也。古人以政在臺閣。猶以爲非。若或出於侍從。吾不知其可也。

문질공 이예가 말하기를 「경악에서 가까이 모시는 직분은 논하고 생각하며 옳은 것을 올리고 그른 것을 바꾸어 임금 마음의 그릇됨을 바로잡는 데 있을 뿐이다. 나라의 큰 정사의 옳고 그름과 인물을 논하는 데 이르러서는 생각이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 그 직분이 아니다. 요즈음 시종하는 새로 나아온 무리가 대체를 알지 못하고 시정의 잘잘못을 논하기를 좋아하며, 혹 재상과 사대부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 조정에 드러내고 내쫓기를 기약하여 스스로를 팔고 자랑하니 매우 옳지 않다. 옛사람은 정사가 대각에 있는 것도 오히려 그르다 하였는데 하물며 시종에게서 나온다면 나는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51「어찌 짐승 때문에 사람에게 죄를 주랴」

金文平公守溫。自少好學不倦。博覽廣記。經史子家列莊老佛之書。靡幽不燭。靡頤不探。爲文亦奇偉峻壯。雖官至極品。處之淡然如寒素。常騎馬。瘦骨崢嶸。旬月之間。連喪數馬。或曰何不使掌馬者殷勤豢養。違則嚴加捶楚乎。文平曰安可爲畜物而罪及於人乎。其慈仁如此。

문평공 김수온은 젊어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널리 보고 넓게 기억하여 경·사·자·가와 열자·장자·노자·불서에 이르기까지 그윽하되 비추지 않은 것이 없고 깊되 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글을 지으면 또한 기이하고 위대하며 준엄하고 씩씩하였다. 비록 벼슬이 극품에 이르렀으나 담담히 처하기를 가난한 선비 같았다. 늘 말을 탔는데 여윈 뼈가 앙상하여 한 달 사이에 잇달아 말 몇 필을 죽였다. 어떤 이가 「어찌 말 맡은 이에게 은근히 잘 먹여 기르게 하고 어기면 엄히 매를 더하지 않습니까」 하니 문평이 「어찌 짐승 때문에 죄가 사람에게 미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 어질고 인자함이 이와 같았다.

52인물을 후려치는 것이 붕당의 시작이다

姜文良公希孟曰。宋朝朋黨之患。起於寇菜公搏擊人物。其流之弊。雖程朱亦不免於黨。今觀年少氣銳新進儒士。日以搏擊人物爲事。弊將何如。

문량공 강희맹이 말하기를 「송나라 조정의 붕당의 근심은 구래공(寇萊公)이 인물을 후려친 데서 일어났다. 그 흐름의 폐단은 정자와 주자도 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 나이 젊고 기운 날카로운 새로 나아온 유사가 날마다 인물 후려치기를 일삼으니 그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53소동파와 같은 사주

鄭文成公麟趾本命四柱曰。丙子辛丑戊戌乙卯。蘇東坡四柱曰。丙子辛丑戊午乙卯。其命畧同。而文章聞望。亦畧相同。居正嘗撰文成碑。造化四柱與蘇內翰相同之語。或有笑者曰。撰碑宜述道德。不宜論卜命。予曰。益齋李先生嘗撰菊齋權文正公碑有曰。戊子己未。虛拱壬巳之祿。互衝發之。蓋居正祖益齋。而有是說。或者笑之。

문성공 정인지의 본명 사주는 병자·신축·무술·을묘요, 소동파의 사주는 병자·신축·무오·을묘다. 그 명이 대략 같고 문장과 명망도 대략 서로 같다. 내가 일찍이 문성의 비를 지으며 「조화의 사주가 소 내한과 서로 같다」는 말을 넣으니 어떤 이가 웃으며 「비를 지을 때는 마땅히 도덕을 서술해야지 점과 명을 논함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내가 「익재 이 선생이 일찍이 국재 문정공 권부의 비를 지으며 『무자와 기미가 임과 사의 녹을 비워 마주 안고 서로 충하여 발한다』 하였다. 대개 나 거정은 익재를 조종으로 삼기에 이 말이 있는 것이다」 하니 어떤 이가 웃었다.

54「두 번 파직당한 것이 한 번도 못 된 것보다 낫지 않은가」

金文悼公壽寧再爲承旨。皆號職。姜文良公希孟曰。如何再爲承旨。再見罷黜。文悼曰。能再罷。不猶愈於一不爲者乎。蓋誚文良不爲承旨也。

문도공 김수녕이 두 번 승지가 되었는데 다 파직당하였다. 문량공 강희맹이 「어찌하여 두 번 승지가 되어 두 번 다 쫓겨나는가」 하니, 문도가 「두 번 파직당할 수 있는 것이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이보다 낫지 않은가」 하였다. 대개 문량이 승지가 되지 못한 것을 비꼰 것이다.

55「을과 첫째는 무엇을 취하겠는가」

文悼爲癸酉科壯元。丁丑將開重試。文悼語人曰。鄭麟趾之後。豈無鄭麟趾乎。蓋於初重試。皆爲壯元。金有啤睨壯元之志。而終落第。居正戱金曰。李廣爲將。自倚無雙。劉蕡對策。何以不第。金曰。不爲甲科一人。何取乙科一人乎。蓋誚我乙科一人也。

문도는 계유년 과거의 장원이었다. 정축년에 장차 중시를 열려 하니 문도가 사람들에게 「정인지 뒤에 어찌 정인지가 없겠는가」 하였다. 대개 처음 시험과 중시에 다 장원이 되었으므로 김이 장원을 넘볼 뜻이 있었으나 끝내 낙제하였다. 내가 김을 희롱하여 「이광이 장수가 되어 스스로 짝이 없다 믿었고, 유분은 대책을 올리고도 어찌 급제하지 못하였는가」 하니, 김이 「갑과 첫째가 되지 못한다면 을과 첫째를 어찌 취하겠는가」 하였다. 대개 내가 을과 첫째였음을 비꼰 것이다.

56「강 낭관은 열 해 안에 내 자리에 앉을 것이다」

黃翼成公之爲相也。姜文景公孟卿爲僚佐。翼成曰。老物閱人多矣。姜郞大器不出十年。當據吾座。後果如其言。

익성공 황희가 정승일 때 문경공 강맹경이 요좌였다. 익성이 「늙은 것이 사람을 겪은 것이 많다. 강 낭관은 큰 그릇이라 열 해가 지나지 않아 마땅히 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 말과 같았다.

57맥국과 예국 — 두 이름이 본디 한 나라가 아닐까

高麗史地理志曰。春州本貊國。春州卽今之春川。嘗考書武成曰。華夏蠻貊。罔不率俾。孟子曰。小貉大貉。貉音貊。註曰。貉北方夷狄之國。北方地寒。五穀不生。唯黍生之早熟。當武王之時。箕子未封朝鮮。而已有貊國。孟子之時。箕子子孫尙守朝鮮。安有貊國介於其間哉。高麗地志又曰。溟州本穢國。一云銑國。一云蕊國。溟州卽今之江陵府。嘗考韻會曰。穢貊東夷國名。漢武紀東夷穢君南誾。註曰。穢貊在辰韓之北高句麗沃沮之南。東窮大海。予竊疑。穢貊本爲一國而互稱之也。況春之距江陵不遠。春在嶺西。江在嶺東。地志亦謂。高麗時春屬交地道。江屬東界。分和州溟州爲朔方道。則以溟州爲朔。尤爲可疑。

『고려사』 지리지에 「춘주는 본디 맥국이다」 하였다. 춘주는 곧 지금의 춘천이다. 일찍이 『서경』 「무성」을 상고하니 「화하와 만맥이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하였고, 『맹자』에 「작은 맥과 큰 맥」이라 하였는데 맥(貉)의 음은 맥(貊)이다. 주에 「맥은 북방 이적의 나라다. 북방은 땅이 차서 오곡이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되 일찍 익는다」 하였다. 무왕 때에는 기자가 아직 조선에 봉해지지 않았는데도 이미 맥국이 있었고, 맹자 때에는 기자의 자손이 아직 조선을 지키고 있었으니 어찌 맥국이 그 사이에 끼어 있었겠는가. 『고려사』 지리지에 또 「명주는 본디 예국이다. 혹 선국이라 하고 혹 예국이라 한다」 하였다. 명주는 곧 지금의 강릉부다. 일찍이 『운회』를 상고하니 「예맥은 동이 나라의 이름이다」 하였고, 『한서』 무제기의 「동이 예군 남려」의 주에 「예맥은 진한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어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다」 하였다. 나는 가만히 의심한다. 예와 맥은 본디 한 나라인데 서로 달리 일컬은 것이 아닐까. 하물며 춘천은 강릉과 거리가 멀지 않고 춘천은 영서에 있고 강릉은 영동에 있다. 지리지에서도 「고려 때 춘천은 교주도에 딸리고 강릉은 동계에 딸렸는데, 화주와 명주를 갈라 삭방도로 삼았다」 하였으니 명주를 삭방으로 삼은 것이 더욱 의심스럽다.

58궁예와 대봉국

資治通鑑後梁紀曰。高麗石窟寺眇僧躬乂。聚衆據開州稱王。號大封國。遣佐良尉金立奇入貢于吳。蓋躬乂卽弓裔。開州卽開城府。大封卽泰封。今之鐵原。石窟寺卽世達寺。今不知在何處。

『자치통감』 후량기에 「고려 석굴사의 애꾸눈 승려 궁예가 무리를 모아 개주를 차지하고 왕이라 일컬어 나라 이름을 대봉(大封)이라 하였다. 좌량위 김입기를 보내 오나라에 조공하였다」 하였다. 대개 궁예(躬乂)는 곧 궁예(弓裔)요, 개주는 곧 개성부요, 대봉은 곧 태봉이니 지금의 철원이다. 석굴사는 곧 세달사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59표전에 피해야 할 글자 — 중국은 쓰지 않는다

太祖高皇帝詔頒表箋回避字樣。其傾覆頹敗絶滅夭短等字。意兇可回避。如億載無疆有道生知明哲等字。何以回避乎。近祁戶部順奉使來。予以回避字樣示之曰。中朝亦用之乎。曰無。雖海內諸侯表箋亦不用。此必但行於貴國而已。予意。洪武年間。帝怒金義殺使附胡元。遂歸罪於表詞不切。徵文臣鄭摠金若恒等抵罪。仍頒回避字樣。此出於皇上一時之命。不必行於後世也。

태조 고황제가 표전에서 피해야 할 글자의 본보기를 반포하셨다. 「기울어 엎어짐」·「무너져 패함」·「끊어져 없어짐」·「일찍 죽음」 같은 글자는 뜻이 흉하니 피할 만하다. 그러나 「억만 년 끝이 없음」·「도가 있음」·「나면서 앎」·「밝고 밝음」 같은 글자를 어찌 피하겠는가. 요즈음 호부 기순이 사명을 받들고 오기에 내가 피해야 할 글자의 본보기를 보이며 「중국 조정에서도 쓰는가」 물었다. 「없다. 비록 온 나라 안의 제후의 표전이라도 쓰지 않는다. 이는 반드시 다만 그대 나라에만 행해질 뿐이다」 하였다. 내 뜻에는, 홍무 연간에 황제가 김의가 사신을 죽이고 오랑캐 원나라에 붙은 것을 노하여 마침내 표문의 말이 절실하지 못하다는 데로 죄를 돌려, 문신 정총·김약항 등을 불러 죄에 이르게 하고 이어 피해야 할 글자의 본보기를 반포한 것이다. 이는 황제의 한때 명에서 나온 것이니 뒷세상에 행할 것이 못 된다.

60한양 터를 정할 때 — 인왕동 돌 위의 붉은 글씨

高麗肅宗時。衛尉丞金謂磾據道詵祕記。請遷都南京云楊州有木覓壤。可立都。王親行相之。又遣崔思諏尹瓘等審視。回奏云。蘆原海村龍山等處。山水不合建都。唯三角山面岳之南。山形水勢。符合古今。請於主幹中心大脉。壬坐丙向。隨形建都。從之。後於壬坐丙向之原。埋龍鳳帳。然則漢陽之爲李氏都。自高麗已知之矣。我太祖之將移都也。先審地於公州鷄龍山之南。董役後卜漢陽何耶。予年九歲十歲時。與國初日者李陽達同里閈。李年八十五六。精神不衰。常語曰。初定漢都時。河崙云。道詵記有漢水入明堂之語。宜建母岳南。必今衍禧宮之基。我云。華岳之南。實是大地。亦不害漢水八明堂之說。衆議不決。我云。道詵祕記曰。西有孔巖。又有丹書石壁。孔巖則於二地皆在西。須覓丹書可決。及得丹書於仁王洞石上。字畫磨滅。漫不可識。然得此定議建都。但不知面岳指何山。非華山。必負兒岳也。

고려 숙종 때 위위승 김위제가 도선의 비기에 근거하여 남경으로 도읍 옮기기를 청하며 「양주에 목멱양이 있으니 도읍을 세울 만합니다」 하였다. 왕이 몸소 가서 살피고 또 최사추·윤관 등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돌아와 아뢰기를 「노원·해촌·용산 등지는 산과 물이 도읍 세우기에 맞지 않습니다. 오직 삼각산 면악의 남쪽만이 산의 형세와 물의 형세가 고금에 부합합니다. 주된 줄기 한가운데 큰 맥에 임좌병향으로 형세를 따라 도읍을 세우기를 청합니다」 하니 따랐다. 뒤에 임좌병향의 언덕에 용봉장을 묻었다. 그렇다면 한양이 이씨의 도읍이 될 것을 고려에서 이미 알았던 것이다. 조선 태조께서 장차 도읍을 옮기려 하실 때 먼저 공주 계룡산 남쪽에 땅을 살피고 역사를 일으키신 뒤에 한양을 점친 것은 어째서인가. 내 나이 아홉, 열 살 때 국초의 일관 이양달과 한 마을에 살았다. 이의 나이 여든대여섯인데도 정신이 쇠하지 않아 늘 말하기를 「처음 한양 도읍을 정할 때 하륜은 『도선의 기록에 한수가 명당에 든다는 말이 있으니 마땅히 모악 남쪽에 세워야 한다』 하였으니 반드시 지금 연희궁 터다. 나는 『화악의 남쪽이 실로 큰 땅이요 또한 한수가 명당에 든다는 말에 해롭지 않다』 하였다. 뭇 의논이 결단되지 않으니 내가 『도선의 비기에 서쪽에 공암이 있고 또 붉은 글씨를 쓴 돌벽이 있다 하였다. 공암은 두 땅에서 다 서쪽에 있으니 모름지기 붉은 글씨를 찾아야 결단할 수 있다』 하였다. 인왕동 돌 위에서 붉은 글씨를 얻었는데 글자의 획이 닳아 없어져 흐릿하여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얻어 의논을 정하고 도읍을 세웠다. 다만 면악이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니 화산이 아니면 반드시 부아악일 것이다」 하였다.

61우리나라에 도교가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或問於予曰。中國則佛敎道敎並行。而道敎尤盛。我國佛敎雖盛。而道敎絶無。若二法並行。國小民貧。將何以堪。予曰。我國家有昭格署磨尼山塹城醮之類。乃道家之一事。中外村巷里落。雖無道服道言之人。士大夫家每歲初祈福。若繕修營造等事。禳災必用盲。瞽五六七人讀經。其所祝者皆星宿眞君之類。供費不貲。謂我國不行道敎。非料事者也。盲瞽祈福禳災。不見於古人。不行於中國。但我國時俗相傳故事耳。

어떤 이가 나에게 묻기를 「중국은 불교와 도교가 아울러 행해지되 도교가 더욱 성한데, 우리나라는 불교가 비록 성하나 도교는 전혀 없습니다. 만약 두 법이 아울러 행해지면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한데 장차 어찌 견디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에 소격서와 마니산 참성초 같은 것이 있으니 곧 도가의 한 가지 일이다. 서울과 지방의 마을과 동네에 비록 도복 입고 도가의 말을 하는 사람은 없으나, 사대부 집에서 해마다 정초에 복을 빌고 집을 고치거나 짓는 일이 있으면 재앙을 물리치는 데 반드시 소경을 쓴다. 소경 대여섯 일곱 사람이 경을 읽는데 그 비는 대상은 다 성수와 진군의 무리요 이바지하는 비용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 도교가 행해지지 않는다 함은 일을 헤아리는 이가 아니다」 하였다. 소경이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것은 옛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중국에서도 행하지 않으니 다만 우리나라의 세속에 서로 전하는 옛일일 뿐이다.

62산수의 설은 믿기에 모자란다

山水之說。昉於後漢靑烏子。陶侃郭璞踵而成之。唐有楊筠松。宋有胡舜申。皆碌碌小儒。不足語道理者。喜爲山家禍福之說。一以方位山水之美惡。以定子孫吉凶。牽合傅會。瑣屑叢冗。誕妄至甚。然後之人例皆惑於其說。有數年不葬父母者又有屢發祖先墳塋遷葬者。福未得而禍隨之。今山家者流曰。太王之遷岐。有相其山川原濕之語。周公之遷洛。有澗東瀍西之文。三代以前。非無地理之說。執此爲是。然遷岐遷洛。但取民居道里轉輸之便。非局於龍虎龜雀之說。今國中皇上寢園。同在一局。前朝五百年。君上陵寢。亦同一域。公卿士大夫死必三月而葬。其不擇地明甚。然代各有公侯將相。歷年悠長。山水之說。不足信也。

산수의 설은 후한의 청오자에게서 비롯되었고 도간과 곽박이 뒤를 이어 이루었다. 당나라에 양균송이 있고 송나라에 호순신이 있었으니 다 녹록한 작은 선비라 도리를 말하기에 모자란 이들이다. 산가의 화복설 하기를 좋아하여 한결같이 방위와 산수의 아름답고 미움으로 자손의 길흉을 정하니, 억지로 끌어다 붙이고 자질구레하며 번거로워 허탄하고 망령됨이 지극하다. 그런데도 뒷사람이 으레 다 그 설에 홀려, 몇 해가 되도록 부모를 장사하지 못하는 이가 있고 또 여러 번 조상의 무덤을 파서 옮겨 장사하는 이도 있다. 복은 얻지 못하고 화가 따른다. 이제 산가의 무리가 「태왕이 기산으로 옮길 때 『그 산천과 언덕과 진 땅을 살폈다』는 말이 있고, 주공이 낙읍으로 옮길 때 『간수의 동쪽 전수의 서쪽』이라는 글이 있으니 삼대 이전에도 지리의 설이 없지 않았다」 하며 이것을 잡아 옳다고 한다. 그러나 기산으로 옮기고 낙읍으로 옮긴 것은 다만 백성이 살고 길과 실어 나르기가 편함을 취한 것이지 청룡·백호·현무·주작의 설에 갇힌 것이 아니다. 이제 나라 안 임금의 침원이 다 한 국(局) 안에 함께 있고, 전조 오백 년의 임금의 능침도 또한 한 자리에 함께 있었다. 공경과 사대부는 죽으면 반드시 석 달 만에 장사하니 땅을 가리지 않음이 매우 분명하다. 그런데도 대마다 각기 공후와 장상이 있고 지나온 해가 길고 오래였으니 산수의 설은 믿기에 모자란다.

63삼공이 전하던 무소뿔 띠

自國初。有三公相傳犀帶一腰。傳必門生傳之得人則何如。或失人則爲世所譏。故不輕傳授。至河文孝公演。傳辛文僖公碩祖。文僖位纔正二品而卒。帶遂不傳。

국초부터 삼공이 서로 전하는 무소뿔 띠 한 벌이 있었다. 전하되 반드시 문생에게 전하는데, 사람을 얻으면 어떠하겠는가마는 혹 사람을 잘못 얻으면 세상의 비웃음이 되므로 가벼이 전하여 주지 않았다. 문효공 하연에 이르러 문희공 신석조에게 전하였는데, 문희가 자리가 겨우 정이품에 이르러 죽으니 띠가 마침내 전하지 않게 되었다.

64문형의 옷과 바리를 전하는 옛일

文章衣鉢相傳。自有故事。權文景公踶主文衡。病劇。物議在鄭文成公麟。趾文景囑安文靖公止而卒。文靖代之。未幾文靖罷。而文成主之。

문장의 옷과 바리를 서로 전함에는 절로 옛일이 있다. 문경공 권제가 문형을 맡았다가 병이 심해지니 물의는 문성공 정인지에게 있었다. 그런데 문경이 문정공 안지에게 부탁하고 죽으니 문정이 그를 대신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정이 파직되고 문성이 이를 맡았다.

65「자소탕이 새 술 만하며 찐 닭이 쇠염통구이 만하랴」

金直提學汶聰明過人。博通經史。尤長於史學。資治綱目通鑑皆磊落在腹。人有問歷代故事者。應聲對曰。在某卷第幾張。百不一失。世宗時撰訓義公之功居多。國朝以來。能通史學。以公爲首。世宗眷佑日隆。早卒不大厥施。公性能酒。嘗在集賢殿。與同僚開話。或曰。宋朝諸學士論茶品。以紫蘇湯爲第一。事林廣記禁中佳味。以蒸鷄爲第一。公微笑曰。紫蘇湯何如甕頭新酒。蒸鷄何如牛心炙。滿坐皆笑。

직제학 김문은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경서와 사서에 널리 통하였으며 특히 사학에 뛰어났다. 『자치통감강목』과 『자치통감』이 다 훤히 뱃속에 들어 있어, 사람이 역대의 옛일을 물으면 소리에 응하여 「아무 권 몇째 장에 있다」 대답하니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세종 때 『훈의』를 지음에 공의 공이 많았다. 국조 이래로 사학에 능히 통한 이로 공을 으뜸으로 친다. 세종께서 돌보심이 날로 높았으나 일찍 죽어 그 베풂을 크게 하지 못하였다. 공은 성품이 술에 능하였다. 일찍이 집현전에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이가 「송나라 여러 학사가 차의 품등을 논하며 자소탕을 첫째로 쳤고, 『사림광기』의 궁중 좋은 맛에는 찐 닭을 첫째로 쳤다」 하였다. 공이 빙그레 웃으며 「자소탕이 독 위의 새 술만 하겠으며, 찐 닭이 쇠염통구이만 하겠는가」 하니 온 자리가 다 웃었다.

66문성과 주성이 정기를 모아 낸 한 어진 이

尹文度公淮文章冠一時。世宗朝獨對經幄。然性喜酒過量。一日在家。泥酒大臥。世宗遣中使急召。左右扶起上馬。宿醉未醒。人皆懼之。及至上前。從容敷對。畧無醉色。上命草宣制。揮翰如飛。皆合睿旨。上曰眞天才也。時人語曰。文星酒星聚精生此一賢也。

문도공 윤회는 문장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 세종 조에 홀로 경악에서 임금을 마주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양을 넘겼다. 하루는 집에 있으면서 술에 곤죽이 되어 크게 누워 있었는데 세종께서 중사를 보내 급히 부르셨다. 좌우가 붙들어 일으켜 말에 태우니 묵은 취기가 아직 깨지 않아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다. 임금 앞에 이르자 조용히 아뢰고 대답하는데 조금도 취한 빛이 없었다. 임금께서 선제의 초를 잡으라 명하시니 붓 휘두르기를 나는 듯하여 다 임금의 뜻에 맞았다. 임금께서 「참으로 천재로다」 하셨다. 그때 사람들이 「문성(文星)과 주성(酒星)이 정기를 모아 이 한 어진 이를 냈다」 하였다.

67글씨는 늘그막에 더욱 나아간다

成文安公任。眞草隷三法皆妙。先恭惠公曰。仲父獨谷文景公以善書鳴一時。觀汝筆跡。似不墮家業。曰書法晩乃益進。嘗書圓覺寺碑。光陵嘉嘆之。近來書法。公最優。

문안공 성임은 해서·초서·예서 세 법이 다 묘하였다. 돌아가신 공혜공께서 「중부 독곡 문경공이 글씨를 잘하여 한 시대에 이름이 났는데, 네 필적을 보니 집안의 업을 떨어뜨리지 않을 듯하다」 하셨다. 글씨의 법은 늘그막에 더욱 나아갔다. 일찍이 원각사 비를 썼는데 광릉께서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셨다. 요즈음 글씨의 법으로는 공이 가장 뛰어나다.

68삼상(三上)보다 삼중(三中)

兪提學孝通能文章。善談恢。嘗在集賢殿。與諸君論作詩功夫。兪曰。古人以詩於三上尤可以屬思。馬上枕上廁上也。予則不然。在三中。諸君曰何耶。曰。閒中醉中月中也。諸君笑曰。君之三中。果優於三上。

제학 유효통은 문장에 능하고 우스운 이야기를 잘하였다. 일찍이 집현전에서 여러 사람과 시 짓는 공부를 논하는데 유가 「옛사람이 시는 세 위〔三上〕에서 더욱 생각을 붙일 만하다 하였으니 말 위, 베개 위, 뒷간 위다. 나는 그렇지 않아 세 가운데〔三中〕에 있다」 하였다. 여러 사람이 「무엇인가」 물으니 「한가한 가운데, 취한 가운데, 달 가운데다」 하였다. 여러 사람이 웃으며 「그대의 삼중이 과연 삼상보다 낫다」 하였다.

69경음당 — 고래처럼 마시는 이들

洪威平公允成。早年八相。家極豪富。日招佳賓開讌會。宴品豐潔。費不下萬錢。雖何曾不能過也。威平酒量甚雄。時黃烈成公守身金靖宣公何。酒量與威平相敵。雖終日痛飮。了無醉色。

위평공 홍윤성은 이른 나이에 재상이 되었고 집이 지극히 넉넉하고 부유하였다. 날마다 좋은 손님을 불러 잔치를 여니 잔치의 품격이 넉넉하고 정갈하여 비용이 만 냥에 밑돌지 않았다. 비록 하증이라도 이보다 지나칠 수 없었다. 위평은 술의 양이 매우 굳세었다. 그때 열성공 황수신과 정선공 김하가 술의 양이 위평과 맞먹어 비록 종일 통음하여도 조금도 취한 빛이 없었다.

70「주인이 고래처럼 마시는데 손이 어찌 사양하랴」

光陵嘗號威平。曰鯨飮堂。刻圖書賜之。隣有一儒士。亦好飮。嘗投刺內謁云。鯨飮主人鯨飮客。主人鯨飮客何辭。一時傳笑。

광릉께서 일찍이 위평을 「경음당(鯨飮堂)」이라 부르시고 도서를 새겨 내리셨다. 이웃에 한 유사가 있어 또한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명함을 넣고 안으로 뵙기를 청하며 「고래처럼 마시는 주인에 고래처럼 마시는 손이라, 주인이 고래처럼 마시는데 손이 어찌 사양하리」 하니 한때에 전하며 웃었다.

71문형을 이을 사람 걱정은 하지 말라

權承旨採早以文章鳴世。早歿。金將軍自雄深惜之。朴舍人以昌曰。子無患主文者之無其人。牧隱逝而陽村主之。陽村逝而春亭主之。春亭逝而尹大提學主之。提學逝而權止齋主之。止齋若逝。南秀文必主之。秀文若逝。我亦在。我逝。將軍亦在。何患採之早歿乎。其論文章日就卑下之意。隱然言表。

승지 권채는 일찍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냈으나 일찍 죽었다. 장군 김자웅이 깊이 애석해하니, 사인 박이창이 「그대는 문형을 맡을 사람이 없음을 근심하지 말라. 목은이 가시자 양촌이 맡았고, 양촌이 가시자 춘정이 맡았고, 춘정이 가시자 윤 대제학이 맡았고, 제학이 가시자 권 지재가 맡았다. 지재가 만약 가시면 남수문이 반드시 맡을 것이요, 수문이 만약 가면 나도 있으며, 내가 가면 장군도 있다. 어찌 권채가 일찍 죽은 것을 근심하는가」 하였다. 그가 문장이 날로 낮아짐을 논하는 뜻이 은연히 말 밖에 있었다.

72「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古例。吏曹參議必拜二品。居正以吏曹參議。爲謝恩使赴京。假著金帶而行。人皆謂。我必拜二品。我亦以古例自期。及使事訖還到鴨綠江。義州牧判官來迓船上。語我曰。君移拜禮曹參議。我則脫金帶還着銀帶。與主人相目而笑。我醉賦一絶云。曹聞橘渡淮爲枳。未見金過水作銀。滿坐大笑。

옛 규례에 이조참의는 반드시 이품에 임명되었다. 내가 이조참의로 사은사가 되어 서울에 갈 때 금띠를 빌려 띠고 갔다. 사람들이 다 「내가 반드시 이품에 임명될 것이다」 하였고 나도 옛 규례로 스스로 기약하였다. 사신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압록강에 이르니 의주목 판관이 배 위로 맞으러 와서 나에게 「그대는 예조참의로 옮겨 임명되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금띠를 벗고 도로 은띠를 띠었다. 주인과 서로 눈짓하며 웃었다. 내가 취하여 절구 한 수를 지어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은 들었으나, 금이 물을 지나 은이 된다는 것은 보지 못하였네」 하니 온 자리가 크게 웃었다.

73조수와 유방선 — 두 선생의 가르침

趙司藝須。博極羣書。無所不通。尤長於詩學。中遭家禍。禁錮者三十餘年。世宗惜其才。晩乃進用授司藝。命集賢殿儒士。輪日往復質問。公應對如響。人皆服其該博。尤精於韓文。人有受業者。公不携書帙。合眼低頭。口誦敎之。嘗曰聰明不如多讀。予於羣書。必讀百遍。是以雖老亦不忘耳。爲詩豪贍俊逸。有晩翠亭集數卷。居正之少也。亦摳衣於先生。得見詩藁。嘗其一臠。今稍稍記臆。但先生無後。藁竟不得。同時有主簿柳方善。亦禁廢不用。學問文章與趙相伯仲。而詩句淸絶過之。世宗亦命集賢儒士。往復質問。多所發揚。居正未釋褐時。與吉昌權公攬上黨韓公明澮。受業於先生者四五年。居正之盜竊文名。得至今日。皆先生賜也。

사예 조수는 여러 책을 널리 다하여 통하지 않은 바가 없고 특히 시학에 뛰어났다. 중간에 집안의 화를 만나 금고된 지 삼십여 년이었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끼시어 늘그막에 나아가 쓰시고 사예를 주셨다. 집현전 유사에게 명하여 날을 돌려 가며 오가며 물어보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메아리 같아 사람들이 다 그 두루 넓음에 탄복하였다. 특히 한유의 글에 정밀하였다.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공이 책을 들지 않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입으로 외워 가르쳤다. 일찍이 「총명함은 많이 읽는 것만 못하다. 나는 여러 책을 반드시 백 번을 읽었다. 그러므로 비록 늙어도 잊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시를 지으면 호방하고 넉넉하며 준수하고 뛰어났다. 『만취정집』 몇 권이 있다. 내가 젊었을 때 또한 선생께 옷자락을 걷고 배워 시고를 보아 그 한 점을 맛보았고 지금도 조금씩 기억한다. 다만 선생에게 뒤가 없어 원고를 끝내 얻지 못하였다. 같은 때에 주부 유방선이 있었는데 또한 금고되어 쓰이지 못하였다. 학문과 문장이 조와 백중하고 시구의 맑고 뛰어남은 그를 넘었다. 세종께서 또한 집현전 유사에게 명하여 오가며 물어보게 하시니 드날린 바가 많았다. 내가 아직 벼슬에 나아가기 전에 길창 권람 공, 상당 한명회 공과 함께 선생께 네댓 해를 배웠다. 내가 글 이름을 훔쳐 오늘에 이른 것은 다 선생이 주신 것이다.

74시학이 크게 이룬 것은 두 선생의 힘이다

本朝開國以後。詞學盡廢。歲戊午始設進士科。中場用詞賦。自此詩學大成。皆二先生訓誨之力也。柳則有泰齋集。行于世。

본조 개국 이후로 사학(詞學)이 다 폐하였다. 무오년에 비로소 진사과를 두고 중장에 사부를 쓰니 이로부터 시학이 크게 이루어졌다. 다 두 선생이 가르친 힘이다. 유에게는 『태재집』이 있어 세상에 다닌다.

75「가도의 문장은 젊은 날의 일」

金直殿久冏。以能詩著稱。時卞文肅公季良主斯文。金多短之。文肅頗不悅。嘗有詩誚金曰。賈島文章少日事。橫渠學問晩年時。蓋金少爲僧。賈島亦少爲僧。橫渠晩逃佛老。故云耳。一時傳笑。直殿早逝。

직전 김구경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드러났다. 그때 문숙공 변계량이 사문을 맡았는데 김이 그를 많이 헐뜯으니 문숙이 자못 기뻐하지 않았다. 일찍이 시가 있어 김을 비꼬기를 「가도의 문장은 젊은 날의 일이요, 횡거의 학문은 늘그막의 때로다」 하였다. 대개 김이 젊어서 승려가 되었고 가도도 젊어서 승려가 되었으며, 횡거는 늘그막에 불교와 노장에서 벗어났으므로 그리 말한 것이다. 한때에 전하며 웃었다. 직전은 일찍 죽었다.

76밤새 장서각의 책을 다 읽은 성간

成修撰侃自幼博覽廣記。無書不讀。經史百家諸子。天文地理醫藥卜筮道經釋敎算法譯語。皆涉獵其徑庭。聞士大夫朋友之家有幽經辟書。亦必求見乃已。予之在集賢殿。侃求見藏書閣中祕書。予曰。內祕書不宜輕示外人。難之。一日獨儤直。忽聞磬咳聲。乃侃也。求見祕書益切。乃許之。終夜張燈。不交一睫。閱之幾盡。後言閣中書籍體制卷帙。亦不少差。後十年侃亦登第入集賢殿。長坐閣中。左右書籍。窮日盡夜。閱盡群書。同列以書淫傳癖譏之。然讀過勞消瘦。成年三十而卒。惜也。

수찬 성간은 어려서부터 널리 보고 넓게 기억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경·사·백가와 제자, 천문·지리·의약·복서·도경·석교·산법·역어에 다 그 지름길을 섭렵하였다. 사대부와 벗의 집에 그윽한 경서나 궁벽한 책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또한 반드시 구해 보고야 말았다.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성간이 장서각 안의 비서를 보기를 구하였다. 내가 「안의 비서는 바깥 사람에게 가벼이 보일 것이 아니다」 하고 어려워하였다. 하루는 홀로 숙직하는데 홀연 헛기침 소리가 들리니 곧 성간이었다. 비서 보기를 구함이 더욱 간절하므로 이에 허락하였다. 밤새 등을 켜고 한 번도 눈을 붙이지 않고 거의 다 읽었다. 뒤에 각 안의 서적의 체제와 권질을 말하는데 또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열 해 뒤에 성간도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와 오래 각 안에 앉아 좌우의 서적을 날을 다하고 밤을 다하여 여러 책을 다 읽으니 동료가 「책에 빠지고 전기에 벽이 들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읽어 애쓰다 여위어 나이 서른에 죽었다. 애석하다.

77붉은 옷과 검은 옷 — 대와 간의 예도

諫院職諫諍。無他聽訟折獄之事。日以飮酒爲事。趙碩磵詩曰。一杯一杯復一杯。大諫醉倒春風前。正謂此也。院中故事。入直官未起寢。院吏隔窓呼曰椽吏拜謁。已起寢。具冠帶而坐。吏輩擧油蜜果案進呈。饌品亦極豐潔。以鵝卵大杯。行數巡而止。齋坐日亦設果案。歡飮終日。如此等事甚多。予拜諫大夫。果案等事已廢。椽吏拜謁如舊。又有薇垣禊飮會。儒士皆慕之。憲府糾察百官公務繁劇。凡事務皆嚴正愼肅。然臺中禮度頗有殊異。與他司不同。曰茶時。曰齊坐。禮度各異。執義出入。臺吏挾腋而行。襲前朝老執義故事也。予再爲大司憲。禮度小小節次。頗裁抑之。然至今未罷者。臺長將罷仕。臺吏一人俯伏大叫曰申時者三。小頃又呼曰都廳封櫃臺長可出。然後臺長以次出。若値禁酒。臺官不飮。諫官歡飮自若。諫官以朱衣爲前驅。臺官以烏衣爲前駈。嘗於禁酒時。朱衣大醉詆烏衣曰。我則日月沈。醉面朱故衣亦朱。汝則如汝臺官酸冷。不飮酒。面長有黑色故衣亦烏。聞者皆笑。

간원은 간쟁을 직분으로 삼아 달리 송사를 듣고 옥사를 결단하는 일이 없어 날마다 술 마시기를 일삼았다. 석간 조운흘의 시에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대간이 봄바람 앞에 취해 넘어졌네」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원 안의 옛일에, 입직 관원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원의 아전이 창 너머로 「연리가 절하고 뵙습니다」 부른다. 이미 일어났으면 관과 띠를 갖추고 앉으니 아전들이 유밀과 소반을 들어 올린다. 반찬의 품도 지극히 넉넉하고 정갈하다. 거위 알만 한 큰 잔으로 두어 순배를 돌리고 그친다. 재좌하는 날에도 과일 소반을 베풀고 종일 즐겁게 마신다. 이런 따위 일이 매우 많았다. 내가 간대부에 임명되었을 때는 과일 소반 같은 일은 이미 폐하였고 연리가 절하고 뵙는 것은 예와 같았다. 또 미원(薇垣)의 계 모임 술자리가 있어 유사가 다 사모하였다. 헌부는 백관을 규찰하여 공무가 번거롭고 바쁘니 모든 사무를 다 엄정하고 삼가고 엄숙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 안의 예도는 자못 남달라 다른 관사와 같지 않았다. 「다시(茶時)」라 하고 「제좌(齊坐)」라 하여 예도가 각기 달랐다. 집의가 드나들 때는 대의 아전이 겨드랑이를 끼고 다녔으니 전조의 늙은 집의 옛일을 이어받은 것이다. 내가 두 번 대사헌이 되어 예도의 자잘한 절차를 자못 마르고 눌렀다. 그러나 지금도 없애지 못한 것이 있으니, 대장이 장차 벼슬을 파하려 하면 대의 아전 하나가 엎드려 큰 소리로 「신시(申時)」라 세 번 외치고, 조금 뒤 또 「도청이 궤를 봉하였으니 대장께서 나가셔도 됩니다」 부른 뒤에야 대장이 차례로 나가는 것이다. 만약 술을 금할 때를 만나면 대관은 마시지 않고 간관은 즐겁게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간관은 붉은 옷으로 앞을 이끌고 대관은 검은 옷으로 앞을 이끈다. 일찍이 술을 금할 때 붉은 옷이 크게 취하여 검은 옷을 꾸짖기를 「나는 해와 달이 잠기도록 마셔 취한 낯이 붉으니 옷도 붉다. 너는 네 대관처럼 시고 차서 술을 마시지 않아 낯이 길고 검은빛이 있으니 옷도 검다」 하니 듣는 이가 다 웃었다.

78한 위공의 넓은 도량 — 나이를 속인 벼슬아치

高麗時省。五樞七宰相。數小相遞授職。故官高居閒者居半。七十必致仕。諱年齒不致仕者。物論鄙之。故年雖未滿七十。解組綬乞退者亦多。國朝以來。雖有致仕之法。大小朝官貪祿。冒年仍仕者。滔滔皆是。近日臺中疾其年甚老强從仕者。移文該曹。考年甲欲劾之。予曰。宋韓魏公當國。有朝官年踰七十不致仕者。同列欲劾之。魏公曰。冒年不致仕。過則在彼。苛摘人隱蔽之事。置之罪罟。我輩亦豈得哉。未幾朝官赧愧。致仕而去。魏公弘量大度宜可法也。議遂寢。自此年高者。稍稍致仕。

고려 때 성(省)에는 다섯 추와 일곱 재상이 있어 수가 적어 서로 갈아 가며 직을 주었다. 그러므로 벼슬이 높으면서 한가히 지내는 이가 절반이었다. 일흔이면 반드시 벼슬에서 물러났고, 나이를 숨기고 물러나지 않는 이는 물론이 낮추어 보았다. 그러므로 나이가 비록 일흔이 차지 않았어도 인끈을 풀고 물러나기를 비는 이가 또한 많았다. 국조 이래로 비록 치사하는 법이 있으나 크고 작은 조관이 녹을 탐하여 나이를 무릅쓰고 그대로 벼슬하는 이가 도도히 다 그러하다. 요즈음 대 안에서 나이가 매우 늙었는데도 억지로 벼슬을 좇는 이를 미워하여 해당 조에 글을 보내 나이를 상고하여 탄핵하려 하였다. 내가 「송나라 한 위공이 나라를 맡았을 때, 조관 가운데 나이 일흔이 넘도록 치사하지 않은 이가 있어 동료가 탄핵하려 하였다. 위공이 『나이를 무릅쓰고 치사하지 않는 것은 허물이 저에게 있다. 남의 숨긴 일을 가혹하게 들추어 죄의 그물에 두는 것을 우리인들 어찌 잘한다 하겠는가』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 조관이 낯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며 치사하고 떠났다. 위공의 넓은 도량과 큰 그릇은 마땅히 본받을 만하다」 하니 의논이 마침내 그쳤다. 이로부터 나이 높은 이가 조금씩 치사하였다.

79「마승」과 「차유」 — 장기판의 우스개

宰樞有名馬勝。朝官有名車有者。李文安公石亨。金文敬公禮蒙。同里閈。一日相對象戲。居正與宋中樞處寬後至。局已殘。見李有兩馬而勢强。金有一車而勢弱。余曰。其唯馬勝乎。金應聲曰。吾非車有乎。相與大笑。

재추 가운데 마승(馬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고 조관 가운데 차유(車有)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다. 문안공 이석형과 문경공 김예몽이 한 마을에 살았다. 하루는 마주 앉아 장기를 두는데 나 거정이 중추 송처관과 함께 뒤에 이르니 판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보니 이는 말 둘이 있어 형세가 강하고 김은 차 하나가 있어 형세가 약하였다. 내가 「그야 마승(馬勝)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이 소리에 응하여 「나는 차유(車有)가 아닌가」 하여 서로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