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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18 · 한자 819자 · 낭독 3.3분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탈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脫解尼師今立,時年六十二,姓昔。妃阿孝夫人。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有娠七年,乃生大卵。王曰:「人而生卵,不祥也,宜棄之。」其女不忍,以帛裏卵并寶物置於櫝中,浮於海,任其所往。初至金官國海邊,金官人怪之,不取。又至辰韓阿珍浦口,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時海邊老母以繩引繫海岸,開櫝見之,有一小兒在焉。其母取養之。及壯,身長九尺,風神秀朗,知識過人。或曰:「此兒不知姓氏。初,櫝來時,有一鵲飛鳴而隨之。宜省鵲字,以昔爲氏。又解韞櫝而出,宜名脫解。」脫解始以漁釣爲業,供養其母,未嘗有懈色。母謂曰:「汝非常人,骨相殊異,宜從學以立功名。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였으니 그때 나이 예순둘이요 성은 석(昔)이다.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 동북쪽 일천 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아이를 밴 지 일곱 해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였다.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 그 여인이 차마 그러지 못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을 함께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맡겼다.

처음에 금관국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또 진한 아진포 어귀에 이르니, 이때가 시조 혁거세 재위 삼십구년이었다. 그때 바닷가의 늙은 할미가 줄로 끌어 바닷가에 매어 두고 궤를 열어 보니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 할미가 거두어 길렀다.

자라매 키가 아홉 자요 풍채가 빼어나고 밝으며 아는 것이 남보다 나았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다. 처음에 궤가 올 때 까치 한 마리가 날며 울며 따라왔으니, 마땅히 작(鵲) 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아야 한다. 또 궤를 풀고 나왔으니 마땅히 탈해(脫解)라 이름해야 한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그 어머니를 봉양하며 한 번도 게으른 빛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너는 예사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남다르니 마땅히 학문을 좇아 공과 이름을 세워라."

협주 1

一云吐解。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2학문을 닦아 대보에 오르다

」於是專精學問,兼知地理。望楊山下瓠公宅,以爲吉地,設詭計以取而居之,其地後爲月城。至南解王五年,聞其賢以其女妻之。至七年,登庸爲大輔,委以政事。儒理將死,曰:「先王顧命曰:『吾死後,無論子壻,以年長且賢者繼位。』是以寡人先立。今也宜傳其位焉。」

이에 학문에 정성을 다하고 아울러 지리에도 밝았다.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바라보고 좋은 터라 여겨, 꾀를 내어 빼앗아 살았으니 그 땅이 뒷날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 오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딸을 시집보냈다. 칠년에 이르러 들어 써서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으려 할 때 말하였다. "선왕이 돌아가시며 명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 아들이든 사위든 가리지 말고 나이 많고 어진 이로 자리를 잇게 하라' 하셨다. 그래서 과인이 먼저 즉위하였다. 이제 마땅히 그 자리를 물려야겠다."

3이년 — 호공을 대보로 삼다

二年春正月,拜瓠公爲大輔。二月,親祀始祖廟。

이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로 삼았다. 이월에 몸소 시조 사당에 제사하였다.

4삼년 — 왜국과 좋게 지내다

三年春三月,王登吐含山。有玄雲如蓋,浮王頭上,良久而散。夏五月,與倭國結好交聘。六月,有孛星于天船。

삼년 봄 삼월에 왕이 토함산에 올랐다. 검은 구름이 일산처럼 왕의 머리 위에 떠 있다가 한참 만에 흩어졌다. 여름 오월에 왜국(倭國)과 좋게 지내기로 하고 사신을 주고받았다. 유월에 천선(天船)에 살별이 나타났다.

5오년 — 마한 장수가 항복하다

五年秋八月,馬韓將孟召以覆巖城降。

오년 가을 팔월에 마한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6칠년 — 백제가 만나기를 청하다

七年冬十月,百濟王拓地,至娘子谷城,遣使請會,王不行。

칠년 겨울 시월에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7팔년 — 백제가 두 성을 치다

八年秋八月,百濟遣兵攻蛙山城。冬十月,又攻狗壤城。王遣騎二千擊走之。十二月,地震,無雪。

팔년 가을 팔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쳤다. 겨울 시월에 또 구양성을 쳤다. 왕이 기병 이천을 보내어 쳐서 쫓았다. 십이월에 땅이 흔들리고 눈이 오지 않았다.

8구년 — 김알지가 나오고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 하다

九年春三月,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遲明,遣瓠公視之,有金色小櫝掛樹枝,白雞鳴於其下。瓠公還告,王使人取櫝開之,有小男兒在其中,姿容奇偉。上喜,謂左右曰:「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乃收養之。及長,聰明多智略,乃名閼智。以其出於金櫝,姓金氏。改始林名雞林,因以爲國號。

구년 봄 삼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 나무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을 무렵 호공을 보내어 살피게 하니, 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아뢰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 열게 하였다. 어린 사내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모습이 빼어나고 훤칠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좌우에게 말하였다.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름다운 아들을 내려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거두어 길렀다. 자라매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알지(閼智)라 이름하였다. 금 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그것으로 나라 이름을 삼았다.

9십년 — 백제가 와산성을 빼앗다

十年,百濟攻取蛙山城,留二百人居守,尋取之。

십년에 백제가 와산성을 쳐서 빼앗고 이백 명을 남겨 지키게 하였는데, 얼마 뒤 되찾았다.

10십일년 — 주주와 군주를 두다

十一年春正月,以朴氏貴戚分理國內州郡,號爲州主、郡主。二月,以順貞爲伊伐飡,委以政事。

십일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한 친척으로 나라 안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의 우두머리를 주주(州主), 군의 우두머리를 군주(郡主)라 불렀다. 이월에 순정을 이벌찬으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11십사년 — 백제가 침노하다

十四年,百濟來侵。

십사년에 백제가 침노해 왔다.

12십칠년 — 왜인이 목출도를 치다

十七年,倭人侵木出㠀,王遣角干羽烏禦之,不克,羽烏死之。

십칠년에 왜인(倭人)이 목출도(木出㠀)를 침노하므로 왕이 각간 우오(羽烏)를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가 죽었다.

13십팔년 —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다

十八年秋八月,百濟寇邊,遣兵拒之。

십팔년 가을 팔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막았다.

14십구년 — 백제가 와산성을 함락하다

十九年,大旱,民饑,發倉賑給。冬十月,百濟攻西鄙蛙山城,拔之。

십구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나누어 주었다. 겨울 시월에 백제가 서쪽 변두리 와산성을 쳐서 함락하였다.

15이십년 — 와산성을 되찾다

二十年秋九月,遣兵伐百濟,復取蛙山城,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盡殺之。

이십년 가을 구월에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쳐서 와산성을 다시 빼앗고, 백제에서 와 살던 이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16이십일년 — 가야와 황산진에서 싸우다

二十一年秋八月,阿飡吉門與加耶兵戰於黃山津口,獲一千餘級。以吉門爲波珍飡,賞功也。

이십일년 가을 팔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 군사와 황산진 어귀에서 싸워 일천여 급을 베었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았으니 공을 상 준 것이다.

17이십삼년 — 혜성

二十三年春二月,慧星見東方,又見北方,二十日乃滅。

이십삼년 봄 이월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고 또 북쪽에 나타났다가 스무 날 만에 사라졌다.

18이십사년 — 왕이 죽다

二十四年夏四月,京都大風,金城東門自壞。秋八月,王薨,葬城北壤井丘。

이십사년 여름 사월에 서울에 큰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팔월에 왕이 죽으니 성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