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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眞興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29 · 한자 1,555자 · 낭독 6.2분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진흥왕이 즉위하다

眞興王立,諱彡麥宗,時年七歲,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母,夫人金氏,法興王之女;妃,朴氏思道夫人。王幼少,王太后攝政。

진흥왕이 즉위하였으니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요 그때 나이 일곱이었다.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부인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요,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이다. 왕이 어리므로 왕태후가 정사를 대신 보았다.

협주 1

或作深麥夫。

심맥부(深麥夫)로도 쓴다.

2원년 — 크게 사면하다

元年八月,大赦。賜文武官爵一級。冬十月,地震。桃李華。

원년 팔월에 크게 사면하고 문무 벼슬아치에게 벼슬 한 등급을 내렸다. 겨울 시월에 땅이 흔들렸다. 복숭아와 오얏이 꽃을 피웠다.

3이년 — 이사부에게 병마사를 맡기다

二年,春三月,雪一尺。拜異斯夫爲兵部令,掌內外兵馬事。百濟遣使請和,許之。

이년 봄 삼월에 눈이 한 자 내렸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안팎의 병마사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므로 허락하였다.

4오년 — 흥륜사가 이루어지다

五年,春二月,興輪寺成。三月,許人出家爲僧尼,奉佛。

오년 봄 이월에 흥륜사가 이루어졌다. 삼월에 사람이 집을 나가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5육년 — 나라 역사를 짓다

六年,秋七月,伊飡異斯夫奏曰:「國史者,記君臣之善惡,示褒貶於萬代。不有修撰,後代何觀?」王深然之,命大阿飡居柒夫等,廣集文士,俾之修撰。

육년 가을 칠월에 이찬 이사부가 아뢰었다. "나라 역사란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적어 만대에 기림과 나무람을 보이는 것입니다. 지어 두지 않으면 뒷세상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왕이 깊이 옳게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글 하는 선비를 모아 짓게 하였다.

6구년 — 백제를 구하다

九年,春二月,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百濟請救。王遣將軍朱珍,領勁卒三千擊之,殺獲甚衆。

구년 봄 이월에 고구려가 예(穢) 사람과 함께 백제 독산성을 치므로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장군 주진을 보내어 굳센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치게 하니,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7십년 — 양나라가 사리를 보내다

十年春,梁遣使與入學僧覺德,送佛舍利。王使百官,奉迎興輪寺前路。

십년 봄에 양나라가 사신과 유학승 각덕을 보내어 부처의 사리를 보냈다. 왕이 모든 벼슬아치에게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게 하였다.

8십일년 — 두 성을 빼앗다

十一年,春正月,百濟拔高句麗道薩城。三月,高句麗陷百濟金峴城。王乘兩國兵疲,命伊飡異斯夫出兵擊之,取二城增築,留甲士一千戍之。

십일년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빼앗았다. 삼월에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을 함락하였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치게 하고, 두 성을 빼앗아 더 쌓고 갑사 일천을 남겨 지키게 하였다.

9십이년 — 우륵과 가야금

十二年,春正月,改元開國。三月,王巡守次娘城,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乘勝取十郡。

십이년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삼월에 왕이 순수하다가 낭성에 머물렀는데, 우륵(于勒)과 그 제자 이문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불렀다. 왕이 하림궁에 머물며 그 음악을 아뢰게 하니 두 사람이 저마다 새 노래를 지어 아뢰었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이 열두 줄 가야금을 만들어 열두 달의 가락을 본떴고, 이에 우륵에게 명하여 그 곡을 짓게 하였다.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안고 신라에 왔으니, 그 음악 이름이 가야금(加耶琴)이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노하게 하니, 이긴 김에 열 고을을 빼앗았다.

10십삼년 — 세 사람이 우륵에게 배우다

十三年,王命階古、注知、萬德三人,學樂於于勒。于勒量其人之所能,敎階古以琴,敎法知以歌,敎萬德以舞。業成,王命奏之曰:「與前娘城之音無異。」厚賞焉。

십삼년에 왕이 계고·주지·만덕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이 그 사람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배움이 이루어지자 왕이 아뢰게 하고 말하였다. "앞서 낭성에서 듣던 가락과 다름이 없다." 두터이 상 주었다.

11십사년 — 황룡사와 아찬 무력

十四年,春二月,王命所司,築新宮於月城東,黃龍見其地,王疑之,改爲佛寺,賜號曰皇龍。秋七月,取百濟東北鄙,置新州,以阿飡武力爲軍主。冬十月,娶百濟王女爲小妃。

십사년 봄 이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용이 그 땅에 나타났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절로 고치고 이름을 황룡(皇龍)이라 내렸다. 가을 칠월에 백제 동북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두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시월에 백제 왕의 딸을 맞아 작은 왕비로 삼았다.

12십오년 — 관산성에서 백제 왕이 죽다

十五年,秋七月,修築明活城。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逆戰失利。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及交戰,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急擊殺百濟王。於是,諸軍乘勝,大克之,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匹馬無反者。

십오년 가을 칠월에 명활성을 고쳐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襛)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치므로,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맞붙어 싸우는데,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사가 이긴 김에 크게 무찔러 좌평 넷과 군사 이만 구천육백 명을 베니 말 한 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13십육년 — 북한산에 거둥하여 지경을 정하다

十六年,春正月,置完山州於比斯伐。冬十月,王巡幸北漢山,拓定封疆。十一月,至自北漢山,敎所經州郡,復一年租調。曲赦,除二罪,皆原之。

십육년 봄 정월에 비사벌에 완산주를 두었다. 겨울 시월에 왕이 북한산에 거둥하여 지경을 넓혀 정하였다. 십일월에 북한산에서 돌아오며, 지나온 주와 군에 가르침을 내려 한 해 조세를 면하게 하였다. 부분적으로 사면하여 두 가지 죄를 뺀 나머지를 모두 풀어 주었다.

14십칠년 — 비열홀주를 두다

十七年,秋七月,置比列忽州,以沙飡成宗爲軍主。

십칠년 가을 칠월에 비열홀주를 두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

15십팔년 — 국원을 소경으로 삼다

十八年,以國原爲小京。廢沙伐州,置甘文州,以沙飡起宗爲軍主。廢新州,置北漢山州。

십팔년에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다.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두어 사찬 기종을 군주로 삼았다. 신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두었다.

16십구년 — 포노를 만들다

十九年,春二月,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以實國原。奈麻身得作砲弩上之,置之城上。

십구년 봄 이월에 귀한 친척의 자제와 여섯 부의 넉넉한 백성을 옮겨 국원을 채웠다. 나마 신득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치므로 성 위에 두었다.

17이십삼년 — 사다함이 상을 세 번 사양하다

二十三年,秋七月,百濟侵掠邊戶,王出師拒之,殺獲一千餘人。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栴檀門,立白旗,城中恐懼,不知所爲。異斯夫引兵臨之,一時盡降。論功,斯多含爲最,王賞以良田及所虜三百口,斯多含三讓,王强之,乃受。其生口,放爲良人,田分與戰士,國人美之。

이십삼년 가을 칠월에 백제가 변경의 집을 침노하여 노략질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일천여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구월에 가야가 배반하므로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치게 하고 사다함(斯多含)을 부장으로 삼았다. 사다함이 기병 오천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를 세우니, 성 안이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한꺼번에 다 항복하였다.

공을 논하니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밭과 사로잡은 삼백 사람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 사양하였다. 왕이 억지로 권하므로 이내 받았다. 그 사로잡은 사람은 놓아 양인으로 삼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이 여겼다.

18이십오년 —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五年,遣使北齊朝貢。

이십오년에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19이십육년 — 진나라가 불경을 보내다

二十六年,春二月,北齊武成皇帝詔,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秋八月,命阿飡春賦,出守國原。九月,廢完山州,置大耶州。陳遣使劉思與僧明觀,來聘,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이십육년 봄 이월에 북제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가을 팔월에 아찬 춘부에게 명하여 나가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 구월에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두었다. 진(陳)나라가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어 오면서 불경과 논서 일천칠백여 권을 보냈다.

20이십칠년 — 황룡사가 이루어지다

二十七年,春二月,祇園、實際二寺成。立王子銅輪爲王太子。遣使於陳貢方物。皇龍寺畢功。

이십칠년 봄 이월에 기원사와 실제사 두 절이 이루어졌다.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세웠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황룡사가 공사를 마쳤다.

21이십팔년 —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八年,春三月,遣使於陳貢方物。

이십팔년 봄 삼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22이십구년 — 연호를 대창으로 고치다

二十九年,改元大昌。夏六月,遣使於陳貢方物。冬十月,廢北漢山州,置南川州。又廢比列忽州,置達忽州。

이십구년에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고쳤다. 여름 유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겨울 시월에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두었다. 또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두었다.

23삼십일년 —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一年,夏六月,遣使於陳獻方物。

삼십일년 여름 유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24삼십이년 —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二年,遣使於陳,貢方物。

삼십이년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25삼십삼년 — 팔관연회를 베풀다

三十三年,春正月,改元鴻濟。三月,王太子銅輪卒。遣使北齊朝貢。冬十月二十日,爲戰死士卒,設八關筵會於外寺,七日罷。

삼십삼년 봄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고쳤다. 삼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겨울 시월 스무날에 싸우다 죽은 군사를 위하여 바깥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베풀어 이레 만에 마쳤다.

26삼십오년 — 황룡사 장륙상을 만들다

三十五年,春三月,鑄成皇龍寺丈六像。銅重三萬五千七斤,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삼십오년 봄 삼월에 황룡사 장륙상을 부어 만들었다. 구리 무게가 삼만 오천칠 근이요 도금한 금 무게가 일만 백구십팔 푼이었다.

27삼십육년 — 장륙상이 눈물을 흘리다

三十六年,春夏旱。皇龍寺丈六像,出淚至踵。

삼십육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황룡사 장륙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이르렀다.

28삼십칠년 — 원화에서 화랑으로

三十七年春,始奉源花。初,君臣病無以知人,欲使類聚,遊,以觀其行義,然後擧而用之。遂簡美女二人,一曰南毛,一曰俊貞,聚徒三百餘人。二女爭娟相妬,俊貞引南毛於私第,强勸酒,至醉,曳而投河水,以殺之。俊貞伏誅,徒人失和罷散。其後,更取美貌男子,粧飾之,名花郞以奉之。徒衆雲集,或相磨以道義,或相悅以歌樂,遊娛山水,無遠不至。因此知其人邪正,擇其善者,薦之於朝。故金大問『花郞世記』曰:「賢佐忠臣,從此而秀,良將勇卒,由是而生。」崔致遠鸞郞碑序曰:「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接化群生。且如入則孝於家,出則忠於國,魯司寇之旨也;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周柱史之宗也;諸惡莫作,諸善奉行,竺乾太子之化也。

삼십칠년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가 사람을 알아볼 길이 없음을 걱정하여, 무리 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과 의로움을 살핀 뒤에 들어 쓰고자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여자 둘을 뽑았으니 하나는 남모(南毛)요 하나는 준정(俊貞)이었고, 무리 삼백여 사람을 모았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제 집으로 이끌어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뒤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죽임을 당하니 무리가 화합을 잃고 흩어졌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사내를 뽑아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이라 이름하여 받들었다. 따르는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 더러는 도의로 서로 갈고 더러는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며 산수에 놀아 멀다고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그름과 바름을 알아 착한 이를 가려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빼어나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났다" 하였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이르기를 "나라에 그윽하고 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는데, 실로 세 가르침을 아울러 품고 뭇 삶을 맞아 교화한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의 뜻이요, 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의 마루이며, 온갖 악을 짓지 않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다" 하였다.

29삼십칠년 — 안홍이 돌아오고 왕이 죽다

」唐令狐澄『新羅國記』曰:「擇貴人子弟之美者,傅粉粧飾之,名曰花郞,國人皆尊事之也。」安弘法師入隋求法,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秋八月,王薨,諡曰眞興,葬于哀公寺北峯。王幼年卽位,一心奉佛,至末年祝髮被僧衣,自號法雲,以終其身。王妃亦,效之爲尼,住永興寺。及其薨也,國人以禮葬之。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이르기를 "귀한 이의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가려 분을 발라 곱게 꾸미고 화랑이라 이름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 하였다.

안홍 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하고 오랑캐 승려 비마라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승만경』과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가을 팔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려 옷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이름하며 그 몸을 마쳤다. 왕비도 이를 본받아 여승이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그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예로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