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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왕眞德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11 · 한자 1,372자 · 낭독 5.5분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진덕왕이 즉위하다

眞德王立,名勝曼,眞平王母弟國飯葛文王之女也,母,朴氏月明夫人。勝曼姿質豊麗,長七尺,垂手過膝。

진덕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승만(勝曼)이요 진평왕의 어머니가 같은 아우 국반 갈문왕의 딸이며,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와 바탕이 넉넉하고 고왔으며 키가 일곱 자요 손을 드리우면 무릎을 지났다.

협주 1

一云國芬。

국분(國芬)이라고도 한다.

2원년 — 비담을 베고 비령자 부자가 죽다

元年,正月十七日,誅毗曇,坐死者三十人。二月,拜伊飡閼川爲上大等,大阿飡守勝爲牛頭州軍主。唐太宗遣使持節,追贈前王爲光祿大夫。仍冊命王爲柱國封樂浪郡王。秋七月,遣使入唐謝恩。改元太和。八月,彗星出於南方,又衆星北流。■■■■■■■■■■■■■■■■(16字缺)冬十月,百濟兵圍茂山、甘勿、洞岑三城,王遣庾信,率歩騎一萬以拒之,苦戰氣竭。庾信麾下丕寧子及其子擧眞,入敵陣,急格死之,衆皆奮撃,斬首三千餘級。十一月,王親祀神宮。

원년 정월 열이레에 비담을 베니 이에 걸려 죽은 이가 서른이었다.

이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삼았다. 당나라 태종이 사신에게 부절을 들려 보내어 앞선 왕에게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이어 왕을 주국으로 책봉하고 낙랑군왕에 봉하였다.

가을 칠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은혜에 사례하고 연호를 태화(太和)로 고쳤다. 팔월에 살별이 남쪽에 나타나고 또 뭇별이 북쪽으로 흘렀다. (열여섯 자 빠짐)

겨울 시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감물·동잠 세 성을 에워싸므로, 왕이 유신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일만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괴로이 싸워 기운이 다하였는데, 유신의 부하 비령자(丕寧子)와 그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치다가 죽으니, 무리가 모두 떨쳐 쳐서 삼천여 급을 베었다. 십일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하였다.

3이년 —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다

二年,春正月,遣使大唐朝貢。三月,百濟將軍義直,侵西邊,陷腰車等一十餘城。王患之,命押梁州都督庾信以謀之。庾信於是訓勵士卒,將以發行,義直拒之。庾信分軍爲三道,夾撃之,百濟兵敗走。庾信追北,殺之幾盡。王悅賞賜士卒有差。冬,使邯帙許朝唐。太宗勅御史問:「新羅臣事大朝,何以別稱年號?」帙許言:「曾是天朝未頒正朔,是故先祖法興王以來,私有紀年,若大朝有命,小國又何敢焉?」太宗然之。遣伊飡金春秋及其子文汪朝唐,太宗遣光祿卿柳亨,郊勞之。旣至,見春秋儀表英偉,厚待之。春秋請詣國學,觀釋奠及講論,太宗許之,仍賜御製温湯及晉祠碑并新撰《晉書》。嘗召燕見,賜以金帛尤厚,問曰:「卿有所懷乎?」春秋跪奏曰:「臣之本國,僻在海隅,伏事天朝,積有歳年,而百濟強猾,肆侵凌,況往年大擧深入,攻陷數十城,以塞朝宗之路。

이년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삼월에 백제 장군 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노하여 요차 등 열여 성을 함락하였다. 왕이 걱정하여 압량주 도독 유신에게 명하여 꾀하게 하였다. 유신이 이에 군사를 훈련하여 떠나려 하니 의직이 막았다. 유신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치니 백제 군사가 져서 달아났다. 유신이 달아나는 것을 뒤쫓아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군사에게 차등 있게 상 주었다.

겨울에 한질허를 사신으로 보내어 당나라에 조회하였다. 태종이 어사에게 칙명을 내려 묻게 하였다. "신라가 큰 조정을 신하로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일컫는가."

한질허가 말하였다. "일찍이 천자의 조정이 책력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이 연호를 두었습니다. 만약 큰 조정의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또 어찌 감히 그리하였겠습니까." 태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니, 태종이 광록경 유형을 보내어 교외에서 맞아 위로하였다. 이르러 춘추의 거동과 모습이 빼어나고 훤칠한 것을 보고 두터이 대접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을 보기를 청하니 태종이 허락하고, 이어 몸소 지은 「온탕비」와 「진사비」와 새로 지은 『진서』를 내렸다. 일찍이 불러 잔치를 베풀고 금과 비단을 더욱 두터이 내리며 물었다. "경은 품은 바가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의 본국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 천자의 조정을 엎드려 섬긴 지 여러 해입니다. 그런데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함부로 침노하고 짓밟습니다. 하물며 지난해에는 크게 일으켜 깊이 들어와 수십 성을 쳐서 함락하여 조회하러 오는 길을 막았습니다.

4이년 — 당 태종이 군사를 내기로 하다

若陛下不借天兵,翦除凶惡,則敝邑人民,盡爲所虜,則梯航述職,無復望矣。」太宗深然之,許以出師。春秋又請改其章服,以從中華制。於是,内出珍服,賜春秋及其從者。詔授春秋爲特進,文汪爲左武衛將軍。還國詔令三品已上燕餞之,優禮甚備。春秋奏曰:「臣有七子,願使不離聖明宿衛。」乃命其子文汪與大監而還。春秋還至海上,遇高句麗邏兵。春秋從者温君解,高冠大衣,坐於船上,邏兵見以爲春秋,捉殺之。春秋乘小船至國。王聞之嗟痛,追贈君解爲大阿飡,優賞其子孫。

만약 폐하께서 천자의 군사를 빌려 흉악한 것을 베어 없애지 않으신다면, 저희 나라 백성이 다 사로잡혀 사다리와 배로 직분을 아뢰는 일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깊이 옳게 여겨 군사를 내기로 허락하였다.

춘추가 또 그 옷과 관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르기를 청하였다. 이에 안에서 귀한 옷을 내어 춘추와 그 따르는 이들에게 내렸다. 조서를 내려 춘추에게 특진을, 문왕에게 좌무위장군을 주었다.

나라로 돌아갈 때 조서를 내려 삼품 이상에게 잔치를 베풀어 전송하게 하니 넉넉한 예가 매우 갖추어졌다. 춘추가 아뢰었다.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성스럽고 밝으신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에 그 아들 문왕과 대감에게 명하여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춘추가 돌아오다 바다에서 고구려 순라군을 만났다. 춘추를 따르던 온군해(温君解)가 높은 관을 쓰고 큰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으니, 순라군이 보고 춘추인 줄 알아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나라에 이르렀다. 왕이 듣고 슬퍼하여 군해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넉넉히 상 주었다.

5삼년 — 도살성 아래서 백제를 크게 무찌르다

三年,春正月,始服中朝衣冠。秋八月,百濟將軍殷相率衆來,攻陷石吐等七城。王命大將軍庾信,將軍陳春、竹旨、天存等出拒之。轉鬪經旬不解,進屯於道薩城下。庾信謂衆曰:「今日必有百濟人來諜,汝等佯不知,勿敢誰何!」乃使徇于軍中曰:「堅壁不動,明日待援軍,然後決戰。」諜者聞之,歸報殷相。殷相等謂有加兵,不能不疑懼。於是,庾信等進撃大敗之,殺虜將士一百人,斬軍卒八千九百八十級,獲戰馬一萬匹,至若兵仗,不可勝數。

삼년 봄 정월에 비로소 중국의 옷과 관을 입었다.

가을 팔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 등 일곱 성을 쳐서 함락하였다. 왕이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죽지·천존 등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하였다. 옮겨 다니며 싸운 지 열흘이 지나도 풀리지 않으므로 나아가 도살성 아래 진을 쳤다.

유신이 무리에게 말하였다. "오늘 반드시 백제 사람이 와서 엿볼 것이다. 너희는 짐짓 모르는 체하고 감히 누구냐고 묻지 말라." 그러고는 군중에 돌려 알리게 하였다. "벽을 굳게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군을 기다린 뒤에 결전한다."

엿보던 이가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알렸다. 은상 등이 더할 군사가 있다 여겨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나아가 쳐서 크게 무찔러, 장수와 군사 백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군졸 팔천구백팔십 급을 베고 전마 일만 필을 얻었다. 병기 같은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6사년 — 태평송을 지어 바치다

四年,夏四月,下敎:以眞骨在位者,執牙笏。六月,遣使大唐,告破百濟之衆。王織錦作五言太平頌,遣春秋子法敏,以獻唐皇帝。其辭曰:「大唐開洪業,巍巍皇猷昌,止戈戎威定,修文繼百王。統天崇雨施,理物體含章。深仁偕日月,撫運邁時康。幡旗何赫赫,錚鼓何鍠鍠。外夷違命者,剪覆被天殃。淳風凝幽顯,遐邇競呈祥。四時和玉燭,七曜巡萬方。維嶽降宰輔,維帝任忠良。五三成一德,昭我唐家皇。」高宗嘉焉,拜法敏爲太府卿以還。是歳,始行中國永徽年號。

사년 여름 사월에 가르침을 내려, 진골로서 벼슬자리에 있는 이는 상아 홀을 잡게 하였다.

유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 무리를 깨뜨린 것을 알렸다. 왕이 비단을 짜서 오언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내어 당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그 글은 이러하다.

"당나라가 넓은 업을 여니 / 높고 높은 황제의 꾀가 창성하다 / 창을 멈추어 오랑캐의 위엄을 안정시키고 / 글을 닦아 온 임금을 이었다 / 하늘을 거느려 비 내림을 높이고 / 사물을 다스려 빛남을 품는다 / 깊은 어짊은 해와 달과 나란하고 / 운수를 어루만져 때의 편안함을 넘어선다 /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며 / 징과 북은 어찌 그리 울리는가 / 바깥 오랑캐로 명을 어기는 자는 / 베이고 엎어져 하늘의 재앙을 입으리라 / 순박한 바람이 그윽한 데와 드러난 데 엉기고 / 멀고 가까운 데서 다투어 상서를 바친다 / 네 철이 옥촛불처럼 고르고 / 일곱 별이 만방을 돈다 / 산악이 재상을 내리고 / 황제는 충량한 이를 맡긴다 / 삼황오제가 한 덕을 이루니 / 우리 당나라 황실을 밝히리라."

고종이 아름다이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해에 비로소 중국의 영휘(永徽) 연호를 썼다.

협주 3

一作巨

대(大)는 거(巨)로도 쓴다.

一作契

수문계(修文繼)의 계(繼)는 계(契)로도 쓴다.

陶唐/陶康

무운매시강(撫運邁時康)은 도당(陶唐)·도강(陶康)으로도 쓴다.

7사론 — 사사로이 연호를 쓴 일

論曰:三代更正朔,後代稱年號,皆所以大一統,新百姓之視聽者也。是故苟非乘時並起,兩立而爭天下,與夫姦雄,乘間而作,覬覦神器,則偏方小國,臣屬天子之邦者,固不可以私名年。若新羅以一意事中國,使航貢篚,相望於道,而法興自稱年號,惑矣。厥後承愆襲繆,多年所聞太宗之誚讓,猶且因循,至是然後,奉行唐號。雖出於不得已,而抑可謂過而能改者矣。

김부식이 논한다.

세 왕조가 책력을 고치고 뒷세대가 연호를 일컬은 것은 모두 하나로 크게 통합하고 백성의 보고 듣는 바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때를 타고 나란히 일어나 둘이 서서 천하를 다투는 경우나, 간사한 영웅이 틈을 타 일어나 신령한 그릇을 넘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로 속한 자는 진실로 사사로이 해를 이름할 수 없다.

신라 같은 나라는 한뜻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의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 서로 이어졌는데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일컬었으니 미혹된 일이다. 그 뒤로 허물을 잇고 그름을 물려받아 여러 해가 지났고, 태종의 나무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당나라 연호를 받들어 썼다. 비록 마지못해 나온 일이나, 또한 허물을 짓고서 고칠 줄 안 자라 이를 만하다.

8오년 — 하정례가 여기서 비롯하다

五年,春正月朔,王御朝元殿,受百官正賀。賀正之禮,始於此。二月,改稟主爲執事部,仍拜波珍飡竹旨爲執事中侍,以掌機密事務。新罗遣波珍飡金仁問入唐朝貢,仍留宿衛■■■■。

오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모든 벼슬아치의 새해 하례를 받았다. 새해를 하례하는 예가 여기서 비롯하였다.

이월에 품주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이어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로 삼아 기밀 사무를 맡게 하였다. 신라가 파진찬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어 조공하고 이어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글자 빠짐)

9육년 — 왕궁 남문이 저절로 무너지다

六年,春正月,以波珍飡天曉爲左理方府令,遣使大唐朝貢。三月,京都大雪,王宮南門,無故自毀。

육년 봄 정월에 파진찬 천효를 좌이방부령으로 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삼월에 서울에 큰 눈이 내리고 왕궁 남문이 까닭 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10칠년 — 금총포를 바치다

七年,冬十一月,遣使大唐,獻金緫布。

칠년 겨울 십일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금총포(金緫布)를 바쳤다.

11팔년 — 왕이 죽고 성골이 끊어지다

八年,春三月,王薨。諡曰眞德,葬沙梁部。唐高宗聞之,爲擧哀於永光門,使太常丞張文收持節吊祭之,贈開府儀同三司,賜綵段三百。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謂之聖骨;自武烈至末王,謂之眞骨。唐令狐澄《新羅記》曰:「其國王族,謂之第一骨,餘貴族第二骨。」

팔년 봄 삼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 지냈다. 당나라 고종이 듣고 영광문에서 슬퍼하는 예를 행하고, 태상승 장문수에게 부절을 들려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비단 삼백 단을 내렸다.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시조 혁거세부터 진덕까지 스물여덟 왕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 이르기를 "그 나라 왕족을 제일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을 제이골이라 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