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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武烈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16 · 한자 2,621자 · 낭독 10.5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무열왕이 즉위하다

太宗武烈王立,諱春秋,眞智王子伊飡龍春之子也。母,天明夫人,眞平王女;妃,文明夫人,舒玄角飡女也。王儀表英偉,幼有濟世志。事眞德,位歴伊飡,唐帝授以特進。及眞德薨,羣臣請閼川伊飡攝政。閼川固讓曰:「臣老矣,無德行可稱,今之德望崇重,莫若春秋公,實可謂濟世英傑矣。」遂奉爲王,春秋三讓,不得已而就位。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춘추(春秋)요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이니 진평왕의 딸이요, 왕비는 문명부인이니 서현 각찬의 딸이다.

왕은 거동과 모습이 빼어나고 훤칠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건질 뜻이 있었다. 진덕을 섬겨 벼슬이 이찬을 거쳤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을 주었다.

진덕이 죽자 여러 신하가 알천 이찬에게 정사를 대신 보기를 청하였다.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신은 늙었고 일컬을 만한 덕행이 없습니다. 이제 덕망이 높고 무겁기로는 춘추공만 한 이가 없으니, 참으로 세상을 건질 영걸이라 이를 만합니다."

마침내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춘추가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자리에 올랐다.

협주 2

一云龍樹。

용수(龍樹)라고도 한다.

唐書以爲眞德之弟,誤也。

『당서』에 진덕의 아우라 한 것은 잘못이다.

2원년 — 이방부격 예순여 조를 정하다

元年,夏四月,追封王考爲文興大王,母爲文貞太后。大赦。五月,命理方府令良首等,詳酌律令,修定理方府格六十餘條。唐遣使持節備禮,冊命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王遣使入唐表謝。

원년 여름 사월에 왕의 아버지를 문흥대왕으로, 어머니를 문정태후로 추봉하고 크게 사면하였다.

오월에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자세히 헤아려 이방부격(理方府格) 예순여 조를 고쳐 정하게 하였다. 당나라가 사신에게 부절을 들려 보내어 예를 갖추고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표를 올려 사례하였다.

3이년 — 고구려·백제·말갈이 서른세 성을 빼앗다

二年,春正月,拜伊飡金剛爲上大等,波珍飡文忠爲中侍。高句麗與百濟、靺鞨連兵,侵軼我北境,取三十三城。王遣使入唐求援三月,唐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衛中郞將蘇定方,發兵撃高句麗。立元子法敏爲太子,庶子文汪爲伊飡,老旦爲海飡,仁泰爲角飡,智鏡、愷元各爲伊飡。冬十月,牛首州獻白鹿。屈弗郡進白猪,一首二身八足。王女智照,下嫁大角飡庾信。立鼓樓月城内。

이년 봄 정월에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삼았다.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군사를 이어 신라 북쪽 경계를 침노하여 서른세 성을 빼앗았다. 왕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삼월에 당나라가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우위중랑장 소정방을 보내어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우고, 서자 문왕을 이찬으로, 노단을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겨울 시월에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요 다리가 여덟이었다. 왕의 딸 지조를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4삼년 — 김인문이 돌아오다

三年,金仁問自唐歸,遂任軍主,監築獐山城。秋七月,遣子左武衛將軍文王朝唐。

삼년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마침내 군주에 임명되어 장산성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가을 칠월에 아들 좌무위장군 문왕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다.

5사년 —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지다

四年,秋七月,一善郡大水,溺死者三百餘人。東吐含山地燃,三年而滅。興輪寺門自壞。■■■北巖崩碎爲米,食之如陳倉米。

사년 가을 칠월에 일선군에 큰물이 나 빠져 죽은 이가 삼백여 사람이었다. 동쪽 토함산 땅이 타 세 해 만에 꺼졌다.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글자 빠짐) 북쪽 바위가 무너져 부서져 쌀이 되었는데 먹어 보니 묵은 창고의 쌀 같았다.

6오년 — 하슬라를 주로 삼다

五年,春正月,中侍文忠改爲伊飡,文王爲中侍。三月,王以何瑟羅地連靺鞨,人不能安,罷京爲州,置都督以鎭之。又以悉直爲北鎭。

오년 봄 정월에 중시 문충을 이찬으로 고치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삼월에 왕이 하슬라 땅이 말갈과 이어져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경(京)을 없애고 주(州)로 삼아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다.

7육년 — 죽은 신하가 나타나 알리다

六年,夏四月,百濟頻犯境,王將伐之,遣使入唐乞師。秋八月,以阿飡眞珠爲兵部令。九月,何瑟羅州進白鳥。公州基郡江中,大魚出死,長百尺,食者死。冬十月,王坐朝,以請兵於唐不報,憂形於色。忽有人於王前,若先臣長春、罷郞者。言曰:「臣雖枯骨,猶有報國之心,昨到大唐,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領兵以來年五月,來伐百濟,以大王勤佇如此,故控告。」言畢而滅。王大驚異之,厚賞兩家子孫,仍命所司,創漢山州莊義寺,以資冥福。

육년 여름 사월에 백제가 자주 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치려 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빌었다.

가을 팔월에 아찬 진주를 병부령으로 삼았다. 구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공주 기군 강 가운데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백 자였고, 먹은 이가 죽었다.

겨울 시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으므로 근심이 얼굴에 드러났다. 문득 왕 앞에 먼저 죽은 신하 장춘과 파랑 같은 이가 나타나 말하였다. "신들이 비록 마른 뼈이오나 오히려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습니다. 어제 당나라에 이르러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듬해 오월에 와서 백제를 치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처럼 부지런히 기다리시므로 알려 드립니다."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 기이하게 여겨 두 집안 자손에게 두터이 상 주고, 이어 담당 관청에 명하여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저승의 복을 빌게 하였다.

8칠년 — 황산벌과 백제의 멸망

七年,春正月,上大等金剛卒。拜伊飡金庾信爲上大等。三月,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摠管,金仁問爲副大摠管,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军,以伐百濟,勅王爲嵎夷道行軍摠管,使將兵,爲之聲援。夏五月二十六日,王與庾信、眞珠、天存等,領兵出京。六月十八日,次南川停。定方發自萊州,舳艫千里,隨流東下。二十一日,王遣太子法敏,領兵船一百艘,迎定方於德物島。定方謂法敏曰:「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與大王兵會,屠破義慈都城。」法敏曰:「大王立待大軍,如聞大將軍來,必蓐食而至。」定方喜,還遣法敏,徴新羅兵馬。法敏至,言定方軍勢甚盛,王喜不自勝。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等,率精兵五萬,應之,王次今突城。

칠년 봄 정월에 상대등 김강이 죽으므로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삼월에 당나라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과 함께 물과 뭍의 군사 십삼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왕에게 칙명을 내려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성원하게 하였다.

여름 오월 스무엿새에 왕이 유신·진주·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나섰다. 유월 열여드레에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이 내주에서 떠나니 배의 고물과 이물이 천 리에 이어져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스무하루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어 병선 일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정방을 맞게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칠월 열흘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무찔러 깨뜨리려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서서 대군을 기다리시니, 대장군이 온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자리에서 밥을 자시고 이르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여 법민을 돌려보내고 신라 군마를 부르게 하였다.

법민이 이르러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흠춘 등에게 명하여 정예 오만을 거느리고 응하게 하고,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협주 1

或作,純

흠춘(欽春)은 순(純)으로도 쓴다.

9칠년 — 황산벌, 반굴과 관창

秋七月九日,庾信等進軍於黄山之原,百濟將軍階伯,擁兵而至,先據嶮,設三營以待。庾信等,分軍爲三道,四戰不利,士卒力竭。將軍欽純謂子盤屈曰:「爲臣莫若忠,爲子莫若孝,見危致命,忠孝兩全。」盤屈曰:「謹聞命矣。」乃入陣,力戰死。左將軍品日,喚子官状,立於馬前,指諸將曰:「吾兒年纔十六,志氣頗勇,今日之役,能爲三軍標的乎?」官状曰:「唯!」以甲馬單槍,徑赴敵陣,爲賊所擒,生致階伯。階伯俾脱胄,愛其少且勇,不忍加害,乃嘆曰:「新羅不可敵也,少年尚如此,況壯士乎!」乃許生還。官状告父曰:「吾入敵中,不能斬將搴旗者,非畏死也。」言訖,以手掬井水飮之,更向敵陣疾鬪。階伯擒斬首,繋馬鞍以送之。

가을 칠월 아흐레에 유신 등이 황산 벌판으로 군사를 밀고 나아갔다. 백제 장군 계백(階伯)이 군사를 이끌고 이르러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고 세 진영을 세워 기다렸다. 유신 등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이롭지 못하여 군사의 힘이 다하였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 된 자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 된 자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둘 다 온전하다."

반굴이 말하였다. "삼가 명을 듣겠습니다." 이에 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状)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이가 나이 겨우 열여섯이나 뜻과 기운이 자못 용감하다.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본보기가 될 수 있겠느냐."

관장이 말하였다. "예." 갑옷 입은 말에 홑창을 들고 곧바로 적진으로 달려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 그 어리고도 용감함을 아껴 차마 해치지 못하고 이내 탄식하였다. "신라를 대적할 수 없구나. 소년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장년의 군사이겠는가." 이에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관장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제가 적 가운데 들어가 장수를 베고 깃발을 뽑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적진을 향해 빠르게 싸웠다. 계백이 사로잡아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협주 1

一云官昌。

관장(官状)은 관창(官昌)이라고도 한다.

10칠년 — 유신이 도끼를 짚고 서다

品日執其首,流血濕袂。曰:「吾兒面目如生,能死於王事,幸矣!」三軍見之,慷慨有死志,鼓噪進撃,百濟衆大敗,階伯死之,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是日,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到伎伐浦,遇百濟兵,逆撃大敗之。庾信等至唐營,定方以庾信等後期,將斬新羅督軍金文穎於軍門。庾信言於衆曰:「大將軍不見黄山之役,將以後期爲罪。吾不能無罪而受辱,必先與唐軍決戰,然後破百濟。」乃杖鉞軍門,怒髮如植,其腰間寶劒,自躍出鞘。定方右將董寶亮,躡足曰:「新羅兵將有變也。」定方乃釋文穎之罪。百濟王子,使佐平覺伽,移書於唐將軍,哀乞退兵。十二日,唐、羅軍■■■圍義慈都城,進於所夫里之原。定方有所忌不能前,庾信説之,二軍勇敢。

품일이 그 머리를 잡으니 흐르는 피가 소매를 적셨다.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듯하다. 나랏일에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이 보고 슬프고 분하여 죽을 뜻을 품고, 북을 울리며 나아가 치니 백제 무리가 크게 져서 계백이 죽고 좌평 충상·상영 등 스무여 사람을 사로잡았다.

이날 정방이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이르러 백제 군사를 만나 맞아 쳐서 크게 무찔렀다.

유신 등이 당나라 진영에 이르니, 정방은 유신 등이 기약에 늦었다 하여 신라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기약에 늦은 것을 죄로 삼으려 한다. 나는 죄 없이 욕을 받을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한 뒤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도끼를 짚고 군문에 서니 성난 머리털이 곧추섰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발을 밟으며 말하였다. "신라 군사에게 변고가 있으려 합니다." 정방이 이에 문영의 죄를 풀어 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사를 물려 주기를 애걸하였다.

열이틀에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글자 빠짐) 의자의 도성을 에워싸고 소부리 벌판으로 나아갔다.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나아가지 못하므로 유신이 달래니 두 군사가 용감해졌다.

협주 1

或作,永。

나독군 김문영(金文穎)의 영(穎)은 영(永)으로도 쓴다.

11칠년 — 의자가 항복하다

四道齊振。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饔餼豐腆,定方却之。王庶子躬與佐平六人,詣前乞罪,又揮之謂十三日,義慈率左右,夜遁走,保熊津城,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法敏跪隆於馬前,唾面罵曰:「向者,汝父枉殺我妹,埋之獄中,使我二十年間,痛心疾首,今日汝命在吾手中!」隆伏地無言。十八日,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自熊津城來降。王聞義慈降,二十九日,自今突城至所夫里城,遣弟監天福,露布於大唐。八月二日,大置酒勞將士,王與定方及諸將,坐於堂上,坐義慈及子隆於堂下,或使義慈行酒,百濟佐平等羣臣,莫不鳴咽流涕。是日,捕斬毛尺。毛尺本新羅人,亡入百濟,與大耶城黔日同謀陷城,故斬之。又捉黔日,數曰:「汝在大耶城,與毛尺謀,引百濟之兵,燒亡倉庫,令一城乏食致敗,罪一也。

네 길로 가지런히 떨쳐 나아갔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을 시켜 넉넉한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물리쳤다. 왕의 서자가 몸소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앞에 나아가 죄를 빌었으나 또한 물리쳤다.

열사흘에 의자가 좌우를 거느리고 밤에 달아나 웅진성을 지켰다. 의자의 아들 융(隆)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지난날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 안에 묻어, 나로 하여금 스무 해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리를 앓게 하였다. 오늘 네 목숨이 내 손에 있다." 융이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열여드레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방령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에서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가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스무아흐레에 금돌성에서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 천복을 보내어 당나라에 승전을 알렸다.

팔월 이틀에 크게 술자리를 베풀어 장수와 군사를 위로하였다. 왕이 정방 및 여러 장수와 함께 마루 위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을 마루 아래 앉히고, 더러 의자에게 술을 돌리게 하니 백제 좌평 등 여러 신하가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잡아 베었다. 모척은 본디 신라 사람인데 백제로 달아나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꾀하여 성을 함락시켰으므로 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를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 있으면서 모척과 꾀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태워 없애 온 성이 먹을 것이 모자라 지게 하였으니 죄가 첫째다.

12칠년 — 남은 도둑과 왕문도의 죽음

逼殺品釋夫妻,罪二也。與百濟來攻本國,罪三也。」以四支解,投其尸於江水,百濟餘賊,據南岑、貞峴、■■■城,又佐平正武聚衆,屯豆尸原嶽,抄掠唐、羅人。二十六日,攻任存大柵,兵多地嶮,不能克,但攻破小柵。九月三日,郞將劉仁願,以兵一萬人,留鎭泗沘城,王子仁泰與沙飡日原、級飡吉那,以兵七千副之。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百姓一萬二千人,自泗沘乘廻唐。金仁問與沙飡儒敦、大奈麻中知等偕行。二十三日,百濟餘賊入泗沘,謀掠生降人,留守仁願出唐、羅人,撃走之。賊退上泗沘南嶺,竪四五柵,屯聚伺隙,抄掠城邑,百濟人叛而應者二十餘城。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二十八日,至三年山城,傳詔,文度面東立,大王面西立。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였으니 죄가 둘째다.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쳤으니 죄가 셋째다." 사지를 찢어 그 주검을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남은 도둑이 남잠·정현 (글자 빠짐) 성에 웅거하고, 또 좌평 정무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에 진 치고 당나라와 신라 사람을 노략질하였다. 스무엿새에 임존의 큰 목책을 쳤으나 군사가 많고 땅이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 쳐서 깨뜨렸다.

구월 사흘에 낭장 유인원이 군사 일만으로 사비성에 남아 지키고,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 급찬 길나와 함께 군사 칠천으로 도왔다. 정방이 백제 왕과 왕족과 신하 아흔세 사람, 백성 일만 이천 사람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이 사찬 유돈, 대나마 중지 등과 함께 갔다.

스무사흘에 백제의 남은 도둑이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사람들을 노략하려 꾀하므로, 유수 인원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을 내어 쳐서 쫓았다. 적이 물러나 사비 남쪽 고개에 올라 네댓 목책을 세우고 모여 틈을 엿보며 성과 고을을 노략하니, 백제 사람으로 배반하여 호응한 곳이 스무여 성이었다.

당나라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보내어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스무여드레에 삼년산성에 이르러 조서를 전하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해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해 섰다.

13칠년 — 남은 성을 거두고 공을 논하다

錫命後,文度欲以宣物授王,忽疾作便死。從者攝位畢事。十月九日,王率太子及諸軍攻𠇍禮城。十八日,取其城置官守,百濟二十餘城,震懼皆降。三十日,攻泗沘南嶺軍柵,斬首一千五百人。十一月一日,高句麗侵攻七重城,軍主匹夫死之。五日,王行渡雞灘,攻王興寺岑城,七日乃克,斬首七百人。二十二日,王來自百濟論功,以罽衿卒、宣服,爲級飡,軍師豆迭爲高干。戰死儒史知、未知活、寶弘伊、屑儒等四人,許職有差。百濟人員,並量才任用,佐平忠常、常永,達率自簡,授位一吉飡,充職摠管,恩率武守,授位大奈麻,充職大監,恩率仁守,授位大奈麻,充職弟監。

명을 내린 뒤 문도가 황제가 내린 물건을 왕에게 주려 하다가 문득 병이 나서 곧 죽었다. 따르던 이가 자리를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시월 아흐레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이례성을 쳤다. 열여드레에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스무여 성이 두려워 떨며 모두 항복하였다. 서른날에 사비 남쪽 고개의 군사 목책을 쳐서 일천오백 사람을 베었다.

십일월 초하루에 고구려가 칠중성을 쳐서 군주 필부가 죽었다. 닷새에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을 치고 이레 만에 이겨 칠백 사람을 베었다.

스무이틀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공을 논하였다. 계금졸 선복을 급찬으로,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다. 싸우다 죽은 유사지·미지활·보홍이·설유 등 네 사람에게 벼슬을 차등 있게 내렸다. 백제 사람도 아울러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니, 좌평 충상·상영과 달솔 자간에게 일길찬을 주어 총관 직을 맡기고, 은솔 무수에게 대나마를 주어 대감 직을 맡기고, 은솔 인수에게 대나마를 주어 제감 직을 맡겼다.

14팔년 — 두량윤성에서 이기지 못하다

八年,春二月,百濟殘賊,來攻泗沘城。王命伊飡品日爲大幢將軍,迎飡文王,大阿飡良圖,阿飡忠常等副之。迎飡文忠爲上州將軍、阿飡眞王副之。阿飡義服爲下州將軍,武欻、旭川等爲南川大監,文品爲誓幢將軍,義光爲郞幢將軍,往救之。三月五日,至中路,品日分麾下軍,先行,往豆良尹城南,相營地。百濟人望陣不整,猝出急撃不意,我軍驚駭潰北。十二日,大軍來屯古沙比城外,進攻豆良尹城一朔有六日,不克。夏四月十九日,班師,大幢誓幢先行,下州軍殿後,至賓骨壤,遇百濟軍,相鬪敗退。死者雖小,失亡兵械輜重甚多,上州郞幢遇賊於角山,而進撃克之,遂入百濟屯堡,斬獲二千級。王聞軍敗大驚,遣將軍金純、眞欽、天存、竹旨濟師救援。

팔년 봄 이월에 백제의 남은 도둑이 와서 사비성을 쳤다.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등을 부장으로 삼았다.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으로 삼고 아찬 진왕을 부장으로 삼았다.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으로, 무흘·욱천 등을 남천대감으로,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 가서 구하게 하였다.

삼월 닷새에 도중에 이르러 품일이 부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게 하여 두량윤성 남쪽에 가서 진 칠 땅을 살피게 하였다. 백제 사람이 진이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 뜻하지 않게 급히 치니 신라 군사가 놀라 무너져 달아났다.

열이틀에 대군이 와서 고사비성 밖에 진 치고 두량윤성을 쳤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사월 열아흐레에 군사를 돌리는데 대당과 서당이 먼저 가고 하주 군사가 뒤를 맡았다. 빈골양에 이르러 백제 군사를 만나 서로 싸우다가 져서 물러났다. 죽은 이는 비록 적었으나 잃은 병기와 치중이 매우 많았다. 상주와 낭당이 각산에서 적을 만나 나아가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이천 급을 베고 사로잡았다.

왕이 군사가 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진흠·천존·죽지를 보내어 군사를 더해 구원하게 하였다.

협주 1

一作伊。

두량윤(豆良尹)의 윤(尹)은 이(伊)로도 쓴다.

15팔년 — 동타천이 북한산성을 지키고 왕이 죽다

至加尸兮津,聞軍退至加召川,乃還。王以諸將敗績,論罰有差。五月九日,高句麗將軍惱音信,與靺鞨將軍生偕合軍,來攻述川城,不克。移攻北漢山城,列抛車飛石,所當陴屋輒壞,城主大舍冬陁川,使人擲鐵蒺藜於城外,人馬不能行,又破安養寺廩廥,輸其材,隨城壞處,即構爲樓櫓,結絙網,懸牛馬皮綿衣,内設弩砲以守。時,城内只有男女二千八百人,城主冬陁川,能激勵少弱,以敵強大之賊,凡二十餘日。然糧盡力疲,至誠告天,忽有大星,落於賊營,又雷雨以震,賊疑懼解圍而去。王嘉奬冬陁川,擢位大奈麻,移押督州於大耶,以阿飡宗貞爲都督。六月,大官寺井水爲血,金馬郡地流血廣五歩。王薨。諡曰武烈,葬永敬寺北,上號太宗。高宗聞訃,擧哀於洛城門。

가시혜진에 이르러 군사가 물러나 가소천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내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가 패한 것을 두고 차등 있게 벌을 논하였다.

오월 아흐레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군사를 합쳐 와서 술천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옮겨 북한산성을 쳤다. 포차를 벌여 돌을 날리니 맞는 성가퀴와 집이 곧 무너졌다.

성주 대사 동타천(冬陁川)이 사람을 시켜 성 밖에 쇠마름쇠를 던지게 하니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또 안양사의 곳간을 헐어 그 재목을 날라, 성이 무너진 곳을 따라 곧 다락과 망루를 세우고 굵은 줄로 그물을 얽어 소와 말의 가죽과 솜옷을 걸고, 안에 쇠뇌와 포를 두어 지켰다.

그때 성 안에는 다만 남녀 이천팔백 사람이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리고 약한 이들을 북돋아 강하고 큰 적을 맞선 지 스무여 날이었다. 그러나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지쳐 정성을 다해 하늘에 아뢰니, 문득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우레와 비가 치므로, 적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에움을 풀고 갔다. 왕이 동타천을 아름다이 여겨 벼슬을 대나마로 올렸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삼았다.

유월에 대관사 우물물이 피가 되고, 금마군 땅에 피가 흘러 너비가 다섯 보였다.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으며 태종(太宗)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슬퍼하는 예를 행하였다.

협주 1

一云十一日。

열하루라고도 한다.

16삼국사기 권 제오

三國史記,第五卷

삼국사기 권 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