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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文武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23 · 한자 4,865자 · 낭독 19.5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문무왕이 즉위하다

文武王立,諱法敏,太宗王之元子。母,金氏文明王后,蘇判舒玄之季女,庾信之妹也。其姊夢登西兄山頂,坐旋流,徧國内。覺與季言夢。季戯曰:「予願買兄此夢。」因與錦裙爲直。後數日,庾信與春秋公蹴鞠,因踐落春秋衣紐。庾信曰:「吾家幸近,請往綴紐。」因與倶往宅,置酒,從容喚寶姫,持針線來縫。其姊有故不進,其季進前縫綴。淡粧輕服,光艶炤人。春秋見而悅之,乃請婚成禮,則有娠生男,是謂法敏。妃慈儀王后,波珍飡善品之女也。法敏姿表英特,聰明多智略。永徽初如唐,高宗授以大府卿。太宗元年,以波珍飡爲兵部令,尋封爲太子。顯慶五年,太宗與唐將蘇定方,平百濟,法敏從之,有大功,至是即位。

문무왕이 즉위하였으니 이름은 법민(法敏)이요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요 유신의 누이다.

그 언니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니 나라 안에 두루 퍼졌다. 깨어 아우에게 꿈을 말하니 아우가 장난삼아 말하였다. "제가 언니의 그 꿈을 사고 싶습니다." 이에 비단 치마를 값으로 주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축국을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였다. "다행히 우리 집이 가까우니 가서 고름을 달게 하십시다." 이에 함께 집으로 가서 술자리를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꿰매게 하였다. 그 언니는 일이 있어 나오지 않고 그 아우가 앞에 나와 꿰맸다. 엷은 화장에 가벼운 옷차림인데 빛나고 고와 사람을 비추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이에 혼인을 청하여 예를 이루니,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았다. 이가 법민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자태와 거동이 빼어나고 밝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영휘 초년에 당나라에 가니 고종이 대부경을 주었다. 태종 원년에 파진찬으로 병부령을 삼고 이내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현경 오년에 태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좇아가 큰 공이 있었고,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2원년 — 옹산성을 치다

元年六月,入唐宿衛仁問、儒敦等至,告王:「皇帝已遣蘇定方,領水陸三十五道兵,伐高句麗,遂命王擧兵相應。雖在服,重違皇帝勅命。」秋七月十七日,以金庾信爲大將軍,仁問、眞珠、欽突爲大幢將軍,天存、竹旨、天品爲貴幢摠管,品日、忠常、義服爲上州摠管,眞欽、衆臣、自簡爲下州摠管,軍官、藪世、高純爲南川州摠管,述實、達官、文穎爲首若州摠管,文訓、眞純爲河西州摠管,眞福爲誓幢摠管,義光爲郞幢摠管,慰知爲罽衿大監。八月,大王領諸將,至始飴谷停留。■使來告曰:「百濟殘賊,據甕山城,遮路,不可前。」大王先遣使諭之,不服。九月十九日,大王進次熊峴停,集諸摠管大監,親臨誓之。二十五日,進軍圍甕山城。至二十七日,先燒大柵,斬殺數千人,遂降之。

원년 유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과 유돈 등이 이르러 왕에게 알렸다. "황제가 이미 소정방을 보내어 물과 뭍의 서른다섯 길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고, 이어 왕에게 군사를 일으켜 서로 응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비록 상중에 있으나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무겁습니다."

가을 칠월 열이레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인문·진주·흠돌을 대당장군으로, 천존·죽지·천품을 귀당총관으로, 품일·충상·의복을 상주총관으로, 진흠·중신·자간을 하주총관으로, 군관·수세·고순을 남천주총관으로, 술실·달관·문영을 수약주총관으로, 문훈·진순을 하서주총관으로, 진복을 서당총관으로, 의광을 낭당총관으로, 위지를 계금대감으로 삼았다.

팔월에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에 이르러 머물렀다. 사신이 와서 알렸다. "백제의 남은 도둑이 옹산성에 웅거하여 길을 막으니 나아갈 수 없습니다." 대왕이 먼저 사신을 보내어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구월 열아흐레에 대왕이 웅현정으로 나아가 머물며 여러 총관과 대감을 모아 몸소 나아가 맹세하게 하였다. 스무닷새에 군사를 밀고 나아가 옹산성을 에웠다. 스무이레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태우고 수천 사람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항복하였다.

3원년 — 공을 논하고 평양으로 군량을 나르다

論功,賜角干、伊飡爲摠管者劒;迎飡、波珍飡、大阿飡爲摠管者戟,已下各一品位。築熊峴城。上州摠管品日,與一牟山郡太守大幢、沙尸山郡太守哲川等,率兵攻雨述城,斬首一千級。百濟達率助服、恩率波伽與衆謀降。賜位助服級飡,仍授古陁耶郡太守,波伽級飡,兼賜田宅衣物。冬十月二十九日,大王聞唐皇帝使者至,遂還京。唐使弔慰,兼勅祭前王,贈雜彩五百段。庾信等休兵,待後命,含資道摠管劉德敏至,傳勅旨,輸平壤軍粮。

공을 논하여, 각간과 이찬으로 총관이 된 이에게는 칼을 주고, 잡찬·파진찬·대아찬으로 총관이 된 이에게는 창을 주었으며, 그 아래는 각각 한 등급씩 벼슬을 올렸다. 웅현성을 쌓았다.

상주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쳐서 일천 급을 베었다.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무리와 꾀하여 항복하였다. 조복에게 급찬 벼슬을 주고 이어 고타야군 태수를 주었으며, 파가에게 급찬을 주고 아울러 밭과 집과 옷과 물건을 내렸다.

겨울 시월 스무아흐레에 대왕이 당나라 황제의 사자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당나라 사신이 조문하고 위로하며 아울러 칙명으로 앞 임금에게 제사하고, 여러 빛깔 비단 오백 단을 보냈다.

유신 등이 군사를 쉬며 뒤의 명을 기다렸는데,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이르러 칙명의 뜻을 전하니 평양으로 군량을 나르라는 것이었다.

4이년 — 눈길을 헤치고 평양에 군량을 대다

二年,春正月,唐使臣在館,至是,冊命王爲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拜伊飡文訓爲中侍。王命庾信與仁問、良圖等九將軍,以車二千餘兩,載米四千石、租二萬二千餘石,赴平壤。十八日,宿風樹村,氷滑道險,車不得行,並載以牛馬。二十三日,渡七重河,至䔉壤。貴幢弟監星川、軍師述川等,遇賊兵於梨峴,擊殺之。二月一日,庾信等至獐塞,距平壤三萬六千歩。先遣歩騎監裂起等十五人,赴唐營。是日,風雪寒沍,人馬多凍死。六日,至楊隩,庾信遣阿飡良圖、大監仁仙等致軍粮,贈定方以銀五千七百分、細布三十匹、頭髮三十兩、牛黄十九兩。定方得軍粮,便罷還。庾信等聞唐兵歸,亦還渡𤬁川。高句麗兵追之,廻軍對戰,斬首一萬餘級,虜小兄阿達兮等,得兵械萬數。

이년 봄 정월에 당나라 사신이 객관에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책명하였다. 이찬 문훈을 중시로 삼았다.

왕이 유신과 인문·양도 등 아홉 장군에게 명하여 수레 이천여 대에 쌀 사천 섬과 조 이만 이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열여드레에 풍수촌에서 묵었는데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아울러 소와 말에 실었다. 스무사흘에 칠중하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귀당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 등이 이현에서 적병을 만나 쳐서 죽였다.

이월 초하루에 유신 등이 장새에 이르니 평양에서 삼만 육천 보 거리였다. 먼저 보기감 열기 등 열다섯 사람을 당나라 진영으로 보냈다. 이날 바람과 눈이 차고 매서워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엿새에 양오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을 보내어 군량을 대게 하고, 정방에게 은 오천칠백 푼과 가는 베 서른 필, 머리카락 서른 냥, 우황 열아홉 냥을 주었다. 정방이 군량을 얻자 곧 군사를 파하고 돌아갔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사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또한 돌아와 표하를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뒤쫓으므로 군사를 돌려 맞서 싸워 일만여 급을 베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만여 개를 얻었다.

5이년 — 탐라가 항복하고 진주·진흠을 베다

論功,中分本彼宮財貨、田莊、奴僕,以賜庾信、仁問。靈廟寺災。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來降。耽羅自武德以來,臣屬百濟,故以佐平爲官號,至是,降爲屬國。三月,大赦。王以旣平百濟,命所司設大酺。秋七月,遣伊飡金仁問,入唐貢方物。八月,百濟殘賊,屯聚内斯只城作惡,遣欽純等十九將軍,討破之。大幢摠管眞珠、南川州摠管眞欽,詐稱病,閑放不恤國事,遂誅之,并夷其族。沙飡如冬打母,天雷雨震死,身上題須堂三字。南川州獻白鵲。

공을 논하여 본피궁의 재화와 밭과 노복을 반으로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내렸다. 영묘사에 불이 났다.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 이래로 백제에 신하로 딸렸으므로 좌평을 벼슬 이름으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삼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왕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맡은 관청에 명하여 큰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가을 칠월에 이찬 김인문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 지방 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팔월에 백제의 남은 도둑이 내사지성에 모여 나쁜 짓을 하므로 흠순 등 열아홉 장군을 보내어 쳐서 깨뜨렸다.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일컫고 한가로이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마침내 베고 아울러 그 집안을 없앴다.

사찬 여동이 어미를 때리니 하늘이 우레와 비를 내려 벼락으로 죽였는데, 몸 위에 '수당(須堂)'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협주 2

一作津。

좌평 도동음률의 율(律)은 진(津)으로도 쓴다.

字未詳。

글자를 알 수 없다.

6삼년 —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떨어뜨리다

三年,春正月,作長倉於南山新城。築富山城。二月,欽純、天存領兵,攻取百濟居列城,斬首七百餘級。又攻居勿城、沙平城降之,又攻德安城,斬首一千七十級。夏四月,大唐以我國爲鷄林大都督府,以王爲鷄林州大都督。五月,震靈廟寺門。百濟故將福信及浮圖道琛,迎故王子扶餘豊,立之,圍留鎭郞將劉仁願於熊津城。唐皇帝詔仁軌,檢校帶方州刺史,將前都督王文度之衆,與我兵向百濟營,轉鬪陷陳,所向無前。信等釋仁願圍,退保任存城。旣而福信殺道琛,并其衆,招還叛亡,勢甚張。仁軌與仁願合,解甲休士,乃請益兵。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至德物島,就熊津府城。王領金庾信等二十八將軍,與之合攻豆陵尹城、周留城等諸城,皆下之。

삼년 봄 정월에 남산신성에 긴 창고를 지었다. 부산성을 쌓았다.

이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칠백여 급을 베었다. 또 거물성과 사평성을 쳐서 항복시키고, 또 덕안성을 쳐서 일천칠십 급을 베었다.

여름 사월에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

오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세우고, 웅진성에 남아 지키던 낭장 유인원을 에웠다. 당나라 황제가 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검교대방주자사로 삼으니, 앞 도독 왕문도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함께 백제 진영으로 향하여, 옮겨 싸우며 진을 무너뜨리니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인원의 에움을 풀고 물러나 임존성을 지켰다. 이윽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러 배반하여 달아난 이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니 세력이 매우 커졌다.

인궤가 인원과 합쳐 갑옷을 벗고 군사를 쉬게 하고는 이내 군사를 더해 주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 손인사를 보내어 군사 사십만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이르러 웅진부성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김유신 등 스물여덟 장군을 거느리고 그들과 합쳐 두릉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 성을 쳐서 모두 떨어뜨렸다.

협주 2

一云三十。

유신 등 스물여덟은 서른이라고도 한다.

一作良。

두릉(豆陵)은 두량(豆良)으로도 쓴다.

7삼년 — 부여풍이 달아나다

扶餘豊脱身走,王子忠勝、忠志等,率其衆降,獨遲受信,據任存城,不下。自冬十月二十一日,攻之,不克,至十一月四日,班師,至舌利停,論功行賞有差。大赦,製衣裳,給留鎭唐軍。

부여풍이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충지 등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겨울 시월 스무하루부터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십일월 나흘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설리정에 이르러 공을 논하여 차등 있게 상 주었다. 크게 사면하고 옷을 지어 남아 지키는 당나라 군사에게 주었다.

협주 1

一作后。

설리(舌利)의 설(舌)은 후(后)로도 쓴다.

8사년 — 부녀도 중국 옷을 입게 하다

四年,春正月,金庾信請老,不允,賜几杖。以阿飡軍官爲漢山州都督。下敎:婦人亦服中朝衣裳。二月,命有司徙民於諸王陵園,各二十戸。角干金仁問、伊飡天存與唐勅使劉仁願、百濟扶餘隆,同盟于熊津。三月,百濟殘衆,據泗沘山城叛,熊津都督發兵,攻破之。地震。遣星川、丘日等三十八人於府城,學唐樂。秋七月,王命將軍仁問、品日、軍官、文穎等,率一善、漢山二州兵,與府城兵馬,攻高句麗突沙城,滅之。八月十四日,地震,壞民屋,南方尤甚。禁人擅以財貨田地施佛寺。

사년 봄 정월에 김유신이 늙었다 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렸다. 아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았다. 영을 내려 부녀도 중국 옷을 입게 하였다.

이월에 맡은 관청에 명하여 여러 왕릉의 원에 백성을 각각 스무 집씩 옮겨 살게 하였다. 각간 김인문과 이찬 천존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 부여륭과 함께 웅진에서 맹세하였다.

삼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배반하므로 웅진도독이 군사를 내어 쳐서 깨뜨렸다. 땅이 흔들렸다. 성천·구일 등 서른여덟 사람을 부성으로 보내어 당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칠월에 왕이 장군 인문·품일·군관·문영 등에게 명하여 일선·한산 두 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성의 군마와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쳐서 없앴다.

팔월 열나흘에 땅이 흔들려 백성의 집이 무너졌는데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사람들이 함부로 재화와 밭을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9오년 — 취리산에서 부여륭과 맹세하다

五年,春二月,中侍文訓致仕,以伊飡眞福爲中侍。伊飡文汪卒,以王子禮葬之。唐皇帝遣使來弔,兼進贈紫衣一襲、腰帶一條、彩綾羅一百匹、綃二百匹。王贈唐使者金帛尤厚。秋八月,王與勅使劉仁願、熊津都督扶餘隆,盟于熊津就利山。初,百濟,自扶餘璋與高句麗連和,屢侵伐封場。我遣使入朝求救,相望于路。及蘇定方旣平百濟,軍廻,餘衆又叛。王與鎭守使劉仁願、劉仁軌等,經略數年,漸平之。高宗詔:扶餘隆歸,撫餘衆,及令與我和好。至是,刑白馬而盟,先祀神祇及川谷之神,而後歃血。其盟文曰:「往者,百濟先王迷於逆順,不敦鄰好,不睦親姻,結託高句麗,交通倭國,共爲殘暴,侵削新羅,剽邑屠城,略無寧歳。天子憫一物之失所,憐百姓之無辜,頻命行人,遣其和好。

오년 봄 이월에 중시 문훈이 벼슬에서 물러나므로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았다. 이찬 문왕이 죽으니 왕자의 예로 장사 지냈다.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아울러 자줏빛 옷 한 벌과 허리띠 하나, 채색 비단 일백 필, 생사 이백 필을 보내 주었다. 왕은 당나라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두터이 주었다.

가을 팔월에 왕이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륭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맹세하였다.

처음에 백제는 부여장(무왕) 이래로 고구려와 이어 화친하고 여러 차례 신라 강토를 침노하므로,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들어가 구원을 청하는 이들이 길에 서로 바라볼 지경이었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군사가 돌아가자 남은 무리가 또 배반하였다. 왕이 진수사 유인원·유인궤 등과 함께 여러 해를 경략하여 차츰 평정하였다. 고종이 조서를 내려 부여륭을 돌려보내어 남은 무리를 어루만지게 하고 신라와 화친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과 내와 골짜기의 신에게 제사한 뒤에 피를 마셨다. 그 맹세하는 글은 이러하였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이 거스름과 따름에 어두워 이웃과 좋게 지내지 않고 인척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오가며 함께 모질고 사나운 짓을 하여 신라를 침노하고 깎아, 고을을 노략하고 성을 무찔러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가 한 사물이라도 제자리를 잃음을 가엾이 여기고 백성의 죄 없음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게 하였다.

10오년 — 맹세하는 글

負險恃遠,侮慢天經,皇赫斯怒,恭行弔伐,旌旗所指,一戎大定。固可瀦宮汚宅,作誡來裔,塞源拔本,垂訓後昆。然懷柔伐叛,前王之令典,興亡繼絶,往哲之通規。事必師古,傳諸曩冊。故立前百濟大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守其祭祀,保其桑梓,依倚新羅,長爲與國,各除宿憾,結好和親,各承詔命,永爲藩服。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親臨勸諭,具宣成旨。約之以婚姻,申之以盟誓,刑牲歃血,共敦終始,分災恤患,恩若弟兄,祗奉綸音,不敢失墜,旣盟之後,共保歳寒。若有背盟,二三其德,興兵動衆,侵犯邊陲,明神鑒之,百殃是降,子孫不育,社稷無守,禋祀磨滅,罔有遺餘。故作金書鐵券,藏之宗廟,子孫萬代,無敢違犯。

험함을 믿고 멂을 믿어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기니, 황제가 이에 노하여 삼가 조문하고 치는 일을 행하였다.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 한 번 군사를 내어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궁을 웅덩이로 만들고 집을 더럽혀 뒷세대에 경계를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뒷사람에게 가르침을 드리울 만하다. 그러나 따르는 이를 품고 배반하는 이를 치는 것은 앞선 임금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지난 어진 이들의 두루 통하는 규범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니 여러 옛 책에 전한다.

그러므로 앞 백제 대사가정경 부여륭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지키고 그 고향을 보전하며,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함께하는 나라가 되게 한다. 각각 묵은 원한을 없애고 좋게 사귀어 화친하며, 각각 조서의 명을 받들어 길이 울타리가 되게 한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몸소 나아가 권하고 타이르며 이룬 뜻을 갖추어 펴게 한다. 혼인으로 맺고 맹세로 거듭하며, 희생을 잡아 피를 마셔 처음과 끝을 함께 두터이 하고,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돌보아 은혜가 형제 같게 한다. 삼가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감히 떨어뜨리지 말라. 맹세한 뒤에는 함께 추운 겨울을 지키라.

만약 맹세를 저버리고 그 덕을 이랬다저랬다 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하면, 밝은 신이 이를 살펴 온갖 재앙을 내릴 것이니, 자손이 자라지 못하고 사직이 지켜지지 못하며 제사가 닳아 없어져 남는 것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쇠로 만든 글판에 금으로 써서 종묘에 간직하니 자손 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라.

협주 1

一作棄信不恒。或作乖背不恒。

「그 덕을 이랬다저랬다 하여」는 「믿음을 버려 한결같지 않고」로도 쓰고, 「어그러지고 등져 한결같지 않고」로도 쓴다.

11오년 — 비단 한 필의 자를 고치다

神之聽之,是享是福。」劉仁軌之辭也。歃訖,埋牲幣於壇之壬地,藏其書於我之宗廟。於是,仁軌領我使者及百濟、耽羅、倭人四國使,浮海西還,以會祠泰山。立王子政明爲太子,大赦。冬,以一善、居列二州民,輸軍資於河西州。絹布舊以十尋爲一匹,改以長七歩廣二尺爲一匹。

신이 이를 들으시고 이를 흠향하시어 복을 내리소서." 유인궤의 글이다.

피를 마시기를 마치자 희생과 폐백을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그 글을 신라 종묘에 간직하였다. 이에 인궤가 신라 사신과 백제·탐라·왜인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의 제사에 모였다.

왕자 정명을 세워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에 일선·거열 두 주의 백성으로 하서주에 군수품을 나르게 하였다. 명주와 베는 예전에 열 발을 한 필로 삼았는데, 고쳐서 길이 일곱 보 너비 두 자를 한 필로 삼았다.

12육년 — 연정토가 항복해 오다

六年,春二月,京都地震。夏四月,靈廟寺災。大赦。天存之子漢林、庾信之子三光,皆以奈麻入唐宿衛。王以旣平百濟,欲滅高句麗,請兵於唐。冬十二月,唐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摠管,以司列少常伯安陸、郝處俊副之,以擊高句麗。高句麗貴臣淵淨土,以城十二,戸七百六十三,口三千五百四十三來投。淨土及從官二十四人,給衣物、糧料、家舍,安置王都及州府。其十二城完,並遣士卒鎭守。

육년 봄 이월에 서울에 땅이 흔들렸다. 여름 사월에 영묘사에 불이 났다. 크게 사면하였다. 천존의 아들 한림과 유신의 아들 삼광이 모두 나마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왕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였다.

겨울 십이월에 당나라가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 안륙과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귀한 신하 연정토가 열두 성과 칠백육십삼 집, 삼천오백사십삼 사람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정토와 따라온 벼슬아치 스물네 사람에게 옷과 물건과 양식과 집을 주어 서울과 주부에 안치하였다. 그 열두 성이 온전하므로 아울러 군사를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13칠년 — 이적을 기다리다 돌아오다

七年,秋七月,大酺三日。唐皇帝勅以智鏡、愷元爲將軍,赴遼東之役,王即以智鏡爲波珍飡,愷元爲大阿飡。又皇帝勅以日原大阿飡爲雲麾將軍,王命於宮庭受命。遣大奈麻汁恒世,入唐朝貢。高宗命劉仁願、金仁泰從卑列道,又徴我兵,從多谷、海谷二道,以會平壤。秋八月,王領大角干金庾信等三十將軍,出京。九月,至漢城停,以待英公。冬十月二日,英公到平壤城北二百里,差遣尔同兮村主大奈麻江深,率契丹騎兵八十餘人,歴阿珍含城。至漢城,移書以督兵期,大王從之。十一月十一日,至獐塞,聞英公歸。王兵亦還。仍授江深位級飡,賜粟五百石。十二月,中侍文訓卒。唐留鎭將軍劉仁願,傳宣天子勅命,助征高句麗,仍賜王大將軍旌節。

칠년 가을 칠월에 사흘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므로,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으로,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 황제가 칙명으로 일원 대아찬을 운휘장군으로 삼으니 왕이 궁정에서 명을 받게 하였다. 대나마 즙항세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게 하였다.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에게 명하여 비열도를 좇게 하고, 또 신라 군사를 불러 다곡·해곡 두 길을 좇아 평양에서 모이게 하였다.

가을 팔월에 왕이 대각간 김유신 등 서른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을 나섰다. 구월에 한성정에 이르러 영공(이적)을 기다렸다.

겨울 시월 이틀에 영공이 평양성 북쪽 이백 리에 이르러, 이동혜촌주 대나마 강심을 보내어 거란 기병 팔십여 사람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지나 한성에 이르러 글을 보내 군사 낼 때를 재촉하니 대왕이 그것을 따랐다.

십일월 열하루에 장새에 이르러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도 돌아왔다. 이에 강심에게 급찬 벼슬을 주고 조 오백 섬을 내렸다.

십이월에 중시 문훈이 죽었다. 당나라에 남아 지키던 장군 유인원이 천자의 칙명을 전하여 고구려 치는 일을 돕게 하고, 이어 왕에게 대장군의 깃발과 부절을 내렸다.

14팔년 — 고구려를 치려 장수를 세우다

八年春,阿麻來服。遣元器與淨土入唐,淨土留不歸,元器還。有勅,此後禁獻女人。三月,拜波珍飡智鏡爲中侍。置比列忽州,仍命波珍飡龍文爲摠管。夏四月,彗星守天船。六月十二日,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摠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摠管右相檢校太子左中護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奉皇帝勅旨,與宿衛沙飡金三光到党項津。王使角干金仁問,迋迎之以大禮。於是,右相約束訖,向泉岡。二十一日,以大角干金庾信爲大幢大摠管;角干金仁問、欽純、天存、文忠、迎飡眞福、波珍飡智鏡、大阿飡良圖、愷元、欽突,爲大幢摠管;伊飡陳純、竹旨,爲京停摠管;伊飡品日、迎飡文訓、大阿飡天品,爲貴幢摠管;伊飡仁泰爲卑列道摠管;迎飡軍官、大阿飡都儒、阿飡龍長爲漢城州行軍摠管;迎飡崇信、大阿飡文穎、阿飡福世,爲卑列城州行軍摠管;波珍飡宣光、阿飡長順、純長,爲河西州行軍摠管;波珍飡宜福、阿飡天光,爲誓幢摠管;阿飡日原、興元,爲罽衿幢摠管。

팔년 봄에 아마가 와서 복종하였다. 원기와 정토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정토는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원기만 돌아왔다. 칙명이 있어 이 뒤로는 여자를 바치는 것을 금하였다.

삼월에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았다. 비열홀주를 두고 이어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사월에 살별이 천선 별자리를 지켰다.

유월 열이틀에 요동도안무부대사 요동행군부대총관 겸 웅진도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태자좌중호 상주국 낙성현개국남 유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하던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이르렀다. 왕이 각간 김인문을 시켜 큰 예로 맞게 하였다. 이에 우상이 약속을 마치고 천강으로 향하였다.

스무하루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흠순·천존·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총관으로 삼고, 이찬 진순·죽지를 경정총관으로 삼고,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총관으로 삼고, 이찬 인태를 비열도총관으로 삼고,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행군총관으로 삼고, 잡찬 숭신,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선광, 아찬 장순·순장을 하서주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의복, 아찬 천광을 서당총관으로 삼고, 아찬 일원·흥원을 계금당총관으로 삼았다.

협주 1

一作春。

봄이라고도 한다.

15팔년 — 평양을 에워싸고 고구려가 항복하다

二十二日,府城劉仁願遣貴干未肹,告高句麗大谷城、漢城等二郡十二城歸服,王遣一吉飡眞功稱賀。仁問、天存、都儒等,領一善州等七郡及漢城州兵馬,赴唐軍營。二十七日,王發京,赴唐兵。二十九日,諸道摠管發行,王以庾信病風,留京。仁問等遇英公,進軍於嬰留山下。秋七月十六日,王行次漢城州,敎諸摠管往會大軍。文穎等遇高句麗兵於蛇川之原,對戰大敗之。九月二十一日,與大軍合圍平壤,高句麗王先遣泉男産等,詣英公請降。於是,英公以王寶臧、王子福男、德男、大臣等二十餘萬口廻唐。角干金仁問、大阿飡助州隨英公歸,仁泰、義福、藪世、天光、興元隨行。初,大軍平高句麗,王發漢城指平壤,次肹次壤,聞唐諸將已歸,還至漢城。

스무이틀에 부성의 유인원이 귀간 미힐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한성 등 두 군 열두 성이 귀순하였음을 알리므로, 왕이 일길찬 진공을 보내어 하례하였다. 인문·천존·도유 등이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군마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스무이레에 왕이 서울을 떠나 당나라 군사에게로 나아갔다. 스무아흐레에 여러 길의 총관이 떠났는데, 왕은 유신이 풍병을 앓으므로 서울에 머물게 하였다. 인문 등이 영공을 만나 영류산 아래로 군사를 밀고 나아갔다.

가을 칠월 열엿새에 왕이 한성주로 거둥하여 여러 총관에게 가서 대군과 만나라고 명하였다. 문영 등이 사천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맞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구월 스무하루에 대군과 함께 평양을 에워싸니, 고구려 왕이 먼저 천남산 등을 보내어 영공에게 나아가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이 왕 보장과 왕자 복남·덕남과 대신 등 스무여만 사람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 갔고,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이 따라갔다.

처음에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이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다가 힐차양에 머물렀는데, 당나라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협주 1

嬰留山在今西京北二十里。

영류산은 지금 서경 북쪽 이십 리에 있다.

16팔년 — 공을 논하고 벼슬을 내리다

冬十月二十二日,賜庾信位太大角干,仁問大角干,已外伊飡、將軍等並爲角干,蘇判已下並增位一級。大幢少監本得,蛇川戰功第一。漢山州少監朴京漢,平壤城内殺軍主述脱,功第一。黑嶽令宣極,平壤城大門戰功第一,並授位一吉飡,賜租一千石;誓幢幢主金遁山,平壤軍營戰功第一,授位沙飡,賜租七百石;軍師南漢山北渠,平壤城北門戰功第一,授位述干,賜粟一千石;軍師斧壤、仇杞,平壤南橋戰功第一,授位述干,賜粟七百石;假軍師比列忽世活,平壤少城戰功第一,授位高干,賜粟五百石;漢山州少監金相京,蛇川戰死,功第一,贈位一吉飡,賜租一千石。牙述沙飡求律,蛇川之戰,就橋下渉水出,與賊鬪大勝,以無軍令,自入危道,功雖第一而不録,憤恨欲經死,旁人救之,不得死。

겨울 시월 스무이틀에 유신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인문에게 대각간 벼슬을 내리고, 그 밖의 이찬과 장군 등은 아울러 각간으로 삼았으며, 소판 이하는 아울러 벼슬을 한 등급씩 올렸다.

대당소감 본득은 사천 싸움의 공이 첫째였다. 한산주소감 박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공이 첫째였다. 흑악령 선극은 평양성 큰 문의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아울러 일길찬 벼슬을 주고 조 일천 섬을 내렸다.

서당당주 김둔산은 평양 군영의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 벼슬을 주고 조 칠백 섬을 내렸다. 군사 남한산 북거는 평양성 북문의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 벼슬을 주고 조 일천 섬을 내렸다. 군사 부양 구기는 평양 남쪽 다리의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 벼슬을 주고 조 칠백 섬을 내렸다. 가군사 비열홀 세활은 평양 작은 성의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고간 벼슬을 주고 조 오백 섬을 내렸다. 한산주소감 김상경은 사천에서 싸우다 죽었는데 공이 첫째였으므로 일길찬 벼슬을 주고 조 일천 섬을 내렸다.

아술 사찬 구율은 사천 싸움에서 다리 밑으로 나아가 물을 건너 나가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이 없이 스스로 위태로운 길에 들었으므로 공이 비록 첫째였으나 기록되지 못하였다. 분하고 한스러워 목을 매어 죽으려 하였으나 곁의 사람이 구하여 죽지 못하였다.

17팔년 — 선조 사당에 아뢰다

二十五日,王還國,次褥突驛,國原仕臣龍長大阿飡,私設筵,饗王及諸侍從。及樂作,奈麻緊周子能晏,年十五歳,呈加耶之舞,王見容儀端麗,召前撫背,以金盞勸酒,賜幣帛頗厚。十一月五日,王以所虜高句麗人七千入京。六日,率文武臣寮,朝謁先祖廟,告曰:「祗承先志,與大唐同擧義兵,問罪於百濟、高句麗,元凶伏罪,國歩泰靜,敢兹控告,神之聽之。」十八日,賚死事者,少監已上十■■匹,從者二十匹。十二月,靈廟寺災。

스무닷새에 왕이 나라로 돌아오다가 욕돌역에 머무니, 국원사신 용장 대아찬이 사사로이 자리를 베풀어 왕과 여러 시종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울리자 나마 긴주의 아들 능안이 나이 열다섯인데 가야의 춤을 바쳤다. 왕이 그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고운 것을 보고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며 금 술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을 자못 두터이 내렸다.

십일월 닷새에 왕이 사로잡은 고구려 사람 칠천을 데리고 서울에 들어갔다. 엿새에 문무 신하를 거느리고 선조 사당에 뵈어 아뢰었다. "삼가 선조의 뜻을 이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 죄를 물으니, 으뜸 흉악한 자가 죄에 엎드리고 나라의 걸음이 크게 고요해졌습니다. 감히 이를 아뢰오니 신이 들으소서."

열여드레에 싸우다 죽은 이들에게 내렸으니, 소감 이상은 열 (글자 빠짐) 필이요 따르던 이는 스무 필이었다. 십이월에 영묘사에 불이 났다.

18구년 — 크게 사면하는 영을 내리다

九年,春正月,以信惠法師爲政官大書省。唐僧法安來傳天子命求磁石。二月二十一日,大王會羣臣,下敎:「往者,新羅隔於兩國,北伐西侵,暫無寧歳,戰士曝骨,積於原野,身首分於庭界。先王愍百姓之殘害,忘千乘之貴重,越海入朝,請兵絳闕,本欲平定兩國,永無戰鬪,雪累代之深讎,全百姓之殘命。百濟雖平,高麗未滅,寡人承克定之遺業,終已成之先志。今兩敵旣平,四隅靜泰,臨陣立功者,並已酬賞,戰死幽魂者,追以冥資。但囹圄之中,不被泣辜之恩,枷鏁之苦,未蒙更新之澤。言念此事,寢食未安,可赦國内。自總章二年二月二十一日昧爽已前,犯五逆罪死已下,今見囚禁者,罪無小大,悉皆放出;其前赦已後,犯罪奪爵者,並令依舊;盜賊人,但放其身,更無財物可還者,不在徴限;其百姓貧寒,取他穀米者,在不熟之地者,子母倶不須還,若在熟處者,至今年收熟,只還其本,其子不須還。

구년 봄 정월에 신혜 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승려 법안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며 자석을 구하였다.

이월 스무하루에 대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영을 내렸다.

"지난날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막혀 북쪽으로 치고 서쪽으로 침노당하여 잠시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 싸우는 군사의 뼈가 들에 쌓이고 몸과 머리가 뜰과 지경에 나뉘었다. 선왕이 백성의 다치고 해침을 가엾이 여겨 천승의 귀중함을 잊고 바다를 건너 조정에 들어가 붉은 대궐에 군사를 청하였으니, 본디 두 나라를 평정하여 길이 싸움이 없게 하고 여러 대의 깊은 원수를 씻어 백성의 남은 목숨을 온전히 하려던 것이다.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는데, 과인이 이겨 평정한 유업을 이어 마침내 이미 이룬 선왕의 뜻을 마쳤다. 이제 두 적이 이미 평정되어 네 모퉁이가 고요하고 태평하니, 진에 나아가 공을 세운 이는 아울러 이미 상으로 갚았고, 싸우다 죽은 그윽한 넋은 저승의 밑천으로 좇아 주었다.

다만 옥에 갇힌 이들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고, 칼과 쇠사슬의 괴로움을 겪는 이들은 새로워지는 은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 일을 생각하니 자고 먹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나라 안을 사면함이 옳다.

총장 이년 이월 스무하루 동틀 무렵 이전에 오역의 죄로 죽을 죄 이하를 지어 지금 갇혀 있는 자는 죄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놓아 내보내라. 앞서 사면한 뒤에 죄를 지어 벼슬을 빼앗긴 자는 아울러 예전대로 하게 하라. 도둑질한 사람은 다만 그 몸을 놓아주되 돌려줄 재물이 없는 자는 물어내게 하지 말라. 그 백성으로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꾸어 쓴 자는, 흉년 든 땅에 있는 자는 본곡과 이자를 모두 돌려주지 않게 하고, 잘된 곳에 있는 자는 올해 거두어들일 때에 이르러 다만 그 본곡만 돌려주고 그 이자는 돌려주지 않게 하라.

19구년 — 나무 쇠뇌와 말 기르는 곳

今月三十日爲限,所司奉行!」夏五月,泉井、比列忽、各連等三郡民饑,發倉賑恤。遣祇珍山級飡等,入唐獻磁石二箱。又遣欽純角干、良圖波珍飡,入唐謝罪。冬,唐使到傳詔,與弩師仇珍山沙飡廻。命造木弩,放箭三十歩。帝問曰:「聞在爾國造弩射一千歩,今纔三十歩,何耶?」對曰:「材不良也,若取材本國,則可以作之。」天子降使求之,即遣福漢大奈麻獻木。乃命改造,射至六十歩。問其故,答曰:「臣亦不能知其所以然,殆木過海,爲濕氣所侵者歟。」天子疑其故不爲,劫之以重罪,而終不盡呈其能。頒馬阹凡一百七十四所:屬所内二十二,宫十,賜庾信太大角干六,仁問太角干五,角干七人各三,伊飡五人各二,蘇判四人各二,波珍飡六人、大阿飡十二人各一,以下七十四所,隨宜賜之。

이달 그믐을 기한으로 삼으니 맡은 관청은 받들어 행하라."

여름 오월에 천정·비열홀·각련 등 세 군의 백성이 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나누어 주었다. 기진산 급찬 등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치게 하였다. 또 흠순 각간과 양도 파진찬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겨울에 당나라 사신이 이르러 조서를 전하고, 쇠뇌 만드는 장인 구진산 사찬과 함께 돌아갔다. 나무 쇠뇌를 만들라 명하니 화살을 서른 보 날렸다. 황제가 물었다. "듣기로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일천 보를 쏜다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보이니 어찌 된 일이냐." 답하였다. "재목이 좋지 않아서입니다. 만약 본국에서 재목을 가져오면 만들 수 있습니다."

천자가 사신을 내려보내어 구하니 곧 복한 대나마를 보내어 나무를 바쳤다. 이에 명하여 고쳐 만들게 하니 예순 보에 이르렀다.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였다. "신 또한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나무가 바다를 건너며 축축한 기운에 스민 것인가 합니다." 천자가 그가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라 의심하여 무거운 죄로 겁주었으나, 끝내 그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말 기르는 곳 모두 일백일흔네 곳을 나누어 주었다. 소내에 딸린 것이 스물둘, 궁에 열, 유신 태대각간에게 여섯, 인문 태각간에게 다섯, 각간 일곱 사람에게 각각 셋, 이찬 다섯 사람에게 각각 둘, 소판 네 사람에게 각각 둘, 파진찬 여섯 사람과 대아찬 열두 사람에게 각각 하나, 그 아래 일흔네 곳은 마땅함을 따라 내렸다.

20십년 — 안승을 금마저에 살게 하다

十年,春正月,高宗許欽純還國,留囚良圖,終死于圓獄。以王擅取百濟土地遺民,皇帝責怒,再留使者。三月,沙飡薛烏儒與高句麗太大兄高延武,各率精兵一萬,度鴨渌江,至屋骨,■■■靺鞨兵先至皆敦壤待之。夏四月四日,對戰,我兵大克之,斬獲不可勝計。唐兵繼至,我兵退保白城。六月,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收合殘民,自窮牟城,至浿江南,殺唐官人及僧法安等。向新羅行,至西海史冶島,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迎致漢城中,奉以爲君,遣小兄多式等,來告曰:「興滅國,繼絶世,天下之公義也,惟大國是望。我國先王以失道見滅,今臣等得國貴族安勝,奉以爲君,願作藩屏,永世盡忠。」王處之國西金馬渚。漢祗部女人一産三男一女,賜粟二百石。

십년 봄 정월에 고종이 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가두어 두니 마침내 옥에서 죽었다. 왕이 백제의 땅과 남은 백성을 함부로 차지하였다 하여 황제가 꾸짖고 노하여 사신을 다시 붙들어 두었다.

삼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예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니, 말갈 군사가 먼저 개돈양에 이르러 기다렸다. 여름 사월 나흘에 맞서 싸워 신라 군사가 크게 이겼는데 베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셀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이어 이르므로 신라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유월에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 대형이 남은 백성을 거두어 모아 궁모성에서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인과 승려 법안 등을 죽였다. 신라로 향하여 가다가 서해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고, 소형 다식 등을 보내어 와서 아뢰었다. "없어진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공변된 의로움이니, 오직 큰 나라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선왕은 도를 잃어 망하였으나, 이제 신들이 나라의 귀족 안승을 얻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으니, 울타리가 되어 길이 충성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왕이 그를 나라 서쪽 금마저에 살게 하였다. 한기부의 여인이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으므로 조 이백 섬을 내렸다.

21십년 — 백제를 치고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다

秋七月,王疑百濟殘衆反覆,遣大阿飡儒敦於熊津都督府請和,不從,乃遣司馬禰軍窺覘。王知謀我,止禰軍不送,擧兵討百濟。品日、文忠、衆臣、義官、天官等,攻取城六十三,徙其人於内地。天存、竹旨等取城七,斬首二千。軍官、文穎取城十二,擊狄兵,斬首七千級,獲戰馬兵械甚多。王還,以衆臣、義官、達官、興元等■■■寺營退却,罪當死,赦之免職。倉吉于■■■■一,各授位級飡,賜租有差。遣沙飡須彌山,封安勝爲高句麗王。其冊曰:「維咸亨元年歳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積德北山,立功南海,威風振於靑丘,仁敎被於玄菟。子孫相繼,本支不絶,開地千里,年將八百。至於建、産兄弟,禍起蕭墻,釁成骨肉,家國破亡,宗社湮滅,生人波蕩,無所託心。

가을 칠월에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가 이랬다저랬다 함을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이에 사마 예군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왕이 신라를 꾀하려는 줄 알고 예군을 붙들어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문충·중신·의관·천관 등이 성 예순셋을 쳐서 빼앗고 그 사람들을 안쪽 땅으로 옮겼다. 천존·죽지 등이 성 일곱을 빼앗고 이천 급을 베었다. 군관·문영이 성 열둘을 빼앗고 적의 군사를 쳐서 칠천 급을 베었으며 싸움말과 병기를 매우 많이 얻었다.

왕이 돌아와, 중신·의관·달관·흥원 등이 (글자 빠짐) 진영에서 물러난 것은 죄가 죽음에 해당하나 사면하여 벼슬만 면하게 하였다. 창길우 (글자 빠짐) 하나에게 각각 급찬 벼슬을 주고 조를 차등 있게 내렸다.

사찬 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은 이러하였다.

"함형 원년 경오 가을 팔월 초하루 신축에 신라 왕이 고구려 사자 안승에게 명을 전한다.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워, 위엄과 풍모가 청구에 떨치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에 입혀졌다. 자손이 서로 이어 본가와 갈래가 끊어지지 않고, 땅을 일천 리 열어 해가 장차 팔백이었다. 건과 산 형제에 이르러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틈이 골육에서 이루어져, 집과 나라가 깨어져 망하고 종묘와 사직이 잠기어 없어지며, 산 사람이 물결처럼 떠돌아 마음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협주 1

一云彌。

사마 예(禰)는 미(彌)라고도 한다.

22십년 — 왜가 일본으로 이름을 고치다

公避危難於山野,投單身於鄰國,流離辛苦,迹同晉文,更興亡國,事等衛侯。夫百姓不可以無主,皇天必有以眷命,先王正嗣,唯公而已,主於祭祀,非公而誰?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公宜撫集遺民,紹興舊緖,永爲鄰國,事同昆弟,敬哉敬哉。兼送粳米二千石,甲具馬一匹,綾五匹,絹、細布各十匹,綿十五稱,王其領之!」十二月,土星入月。京都地震。中侍智鏡退。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爲名。漢城州摠管藪世取百濟■■■■■■國,適彼事覺,遣大阿飡眞珠,誅之。

공은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산과 들에서 피하고 홑몸을 이웃 나라에 던져, 떠돌며 괴로움을 겪은 자취가 진나라 문공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킨 일이 위나라 임금과 같다.

무릇 백성은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하늘은 반드시 돌보는 명이 있으니, 선왕의 바른 대를 이을 이는 오직 공뿐이요, 제사를 주관할 이가 공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어 나아가 책명을 펴 공을 고구려 왕으로 삼는다. 공은 마땅히 남은 백성을 어루만져 모으고 옛 실마리를 이어 일으켜 길이 이웃 나라가 되어, 섬기기를 형제와 같이 하라. 공경하고 공경하라.

아울러 멥쌀 이천 섬과 갑옷 갖춘 말 한 필, 능 다섯 필, 비단과 가는 베 각각 열 필, 솜 열다섯 칭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십이월에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땅이 흔들렸다. 중시 지경이 물러났다. 왜국이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고쳤는데, 스스로 해 뜨는 곳에 가깝다 하여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성주총관 수세가 백제의 (글자 빠짐) 나라로 가려 하다가 그 일이 드러나므로, 대아찬 진주를 보내어 베었다.

협주 1

十二□□□賁書所六云,□□,僵事同異可攷。

십이 (글자 빠짐) 분서소 여섯에 이르기를 (글자 빠짐) 하니, 굳은 일의 같고 다름을 상고할 만하다.

23삼국사기 권 제육

三國史記,第六卷

삼국사기 권 제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