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元聖王
1원성왕이 즉위하다
元聖王立。諱敬信,奈勿王十二世孫。母,朴氏繼烏夫人;妃,金氏,神述角干之女。初,惠恭王末年,叛臣跋扈,宣德時爲上大等,首唱除君側之惡。敬信預之,平亂有功,洎宣德即位,即爲上大等。及宣德薨,無子。群臣議後,欲立王之族子周元。周元宅於京北二十里,會大雨,閼川水漲,周元不得渡。或曰:「即人君大位,固非人謀,今日暴雨,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今上大等敬信,前王之弟,德望素高,有人君之體。」於是,衆議翕然,立之繼位。既而雨止,國人皆呼萬歳。二月,追封高祖大阿飡法宣爲玄聖大王,曾祖伊飡義寬爲神英大王,祖伊飡魏文爲興平大王,考一吉飡孝讓爲明德大王,母朴氏爲昭文太后,立子仁謙爲王太子。毀聖德大王、開聖大王二廟,以始祖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考明德大王爲五廟。
원성왕이 즉위하였으니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내물왕의 십이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요, 왕비는 김씨로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에 혜공왕 말년에 배반한 신하가 날뛸 때, 선덕이 그때 상대등이 되어 임금 곁의 나쁜 무리를 없애자고 앞장서 외쳤다. 경신이 여기에 참여하여 난을 평정한 공이 있었으므로, 선덕이 즉위하자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뒤를 의논하여 왕의 조카뻘 되는 주원을 세우려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이십 리에 있었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알천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임금의 큰 자리에 오르는 것은 진실로 사람이 꾀할 바가 아니다. 오늘 사나운 비가 내리니 하늘이 혹 주원을 세우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제 상대등 경신은 앞 임금의 아우요 덕망이 본디 높으며 임금의 몸가짐이 있다."
이에 여럿의 의논이 한결같아 그를 세워 자리를 잇게 하였다. 이윽고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월에 고조부 대아찬 법선을 현성대왕으로, 증조부 이찬 의관을 신영대왕으로, 할아버지 이찬 위문을 흥평대왕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을 명덕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삼았으며, 아들 인겸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태종대왕·문무대왕과 할아버지 흥평대왕, 아버지 명덕대왕으로 오묘를 삼았다.
2원년 — 벼슬을 한 등급 올리다
增文武百官爵一級。拜伊飡兵部令忠廉爲上大等,伊飡悌恭爲侍中。悌恭免,伊飡世強爲侍中。三月,出前妃具足王后於外宮,賜租三萬四千石。浿江鎭進赤烏。改摠管爲都督。
문무 백관의 벼슬을 한 등급 올렸다. 이찬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이찬 제공을 시중으로 삼았다. 제공이 면직되므로 이찬 세강을 시중으로 삼았다.
삼월에 앞 왕비 구족왕후를 바깥 궁으로 내보내고 조 삼만 사천 섬을 내렸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총관을 도독으로 고쳤다.
3이년 — 덕종이 조서를 내리다
二年,夏四月,國東雨雹,桑麥皆傷。遣金元全入唐,進奉方物。德宗下詔書曰:「勅新羅王金敬信。金元全至,省表及所進奉具悉。卿俗敦信義,志秉貞純,夙奉邦家,克遵聲敎。撫兹藩服,皆禀儒風,禮法興行,封部寧乂,而竭誠向闕,述職無虧。累遣使臣,聿修貢獻,雖溟渤遐廣,道路悠長,贄幣往來,率循舊典,忠効益著,嘉歎良深。朕君臨萬方,作人父母,自中及外,合軌同文,期致太和,共躋仁壽。卿宜保安封内,勤恤蒼生,永作藩臣,以寧海裔。今賜卿羅錦綾綵等三十匹,衣一副,銀榼一口,至宜領之;妃錦綵綾羅等二十匹,押金線繡羅裙衣一副,銀椀一;大宰相一人,衣一副,銀椀一;次宰相二人,各衣一副,銀椀各一。卿宜領受分給。夏中盛熱,卿比平安好,宰相已下,並存問之。
이년 여름 사월에 나라 동쪽에 우박이 내려 뽕과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원전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덕종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신라 왕 김경신에게 칙명한다. 김원전이 이르러 표와 바친 물건을 살펴 다 알았다. 경은 풍속이 신의를 도타이 하고 뜻이 곧고 순수함을 잡아, 일찍부터 나라를 받들고 천자의 가르침을 잘 좇았다. 이 울타리 땅을 어루만지매 모두 선비의 풍속을 받아 예법이 일어나 행해지고 봉토 안이 편안하며, 정성을 다하여 대궐을 향하고 직분을 아뢰는 데 이지러짐이 없었다.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공물 바치기를 닦으니, 비록 바다가 멀고 넓으며 길이 아득히 멀어도 폐백의 오감이 옛 법을 따랐다. 충성의 보람이 더욱 드러나니 아름다워 탄식함이 참으로 깊다.
짐이 만방에 임하여 사람의 부모가 되었으니, 안에서 밖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합치고 글을 같이하여 큰 화평에 이르고 함께 어질고 오래 삶에 오르기를 기약한다. 경은 마땅히 봉토 안을 지켜 편안히 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아, 길이 울타리 신하가 되어 바다 끝을 편안히 하라.
이제 경에게 비단과 능라와 채색 비단 등 서른 필과 옷 한 벌, 은 술통 하나를 내리니 이르거든 마땅히 받으라. 왕비에게는 비단과 채색 비단과 능라 등 스무 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저고리 한 벌, 은 사발 하나를 내린다. 대재상 한 사람에게 옷 한 벌과 은 사발 하나, 다음 재상 두 사람에게 각각 옷 한 벌과 은 사발 하나씩을 내리니, 경은 마땅히 받아 나누어 주라. 여름 한더위에 경은 요사이 평안하고 좋은가. 재상 이하도 아울러 위문한다.
4이년 — 무오가 병법을 바치다
遣書指不多及。」秋七月,旱。九月,王都民饑,出粟三萬三千二百四十石以賑給之。冬十月,又出粟三萬三千石以給之。大舍武烏,獻《兵法》十五卷、《花鈴圖》二卷,授以屈押縣令。
글을 보내나 뜻을 다 미치지 못한다."
가을 칠월에 가물었다. 구월에 왕도의 백성이 주리므로 좁쌀 삼만 삼천이백사십 섬을 내어 나누어 주었다. 겨울 시월에 또 좁쌀 삼만 삼천 섬을 내어 주었다.
대사 무오가 『병법』 열다섯 권과 『화령도』 두 권을 바치므로 굴압현령을 주었다.
협주 1
一作屈岬縣。
굴압현(屈押縣)은 굴갑현(屈岬縣)으로도 쓴다.
5삼년 — 메뚜기가 곡식을 해치다
三年,春二月,京都地震。親祀神宮。大赦。夏五月,太白晝見。秋七月,蝗害穀。八月辛巳朔,日有食之。
삼년 봄 이월에 서울에 땅이 흔들렸다. 몸소 신궁에 제사하였다.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오월에 태백이 낮에 보였다. 가을 칠월에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팔월 초하루 신사에 일식이 있었다.
6사년 — 독서삼품으로 사람을 뽑다
四年,春,始定讀書三品以出身。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而能通其義,兼明《論語》、《孝經》者爲上;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讀《曲禮》、《孝經》者爲下。若博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超擢用之。前祇以弓箭選人,至是改之。秋,國西旱蝗,多盜賊,王發使安撫之。
사년 봄에 처음으로 글 읽기의 세 등급을 정하여 벼슬에 나아가게 하였다. 『춘추좌씨전』이나 『예기』나 『문선』을 읽어 그 뜻에 통하고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이를 상으로 하고, 『곡례』와 『논어』와 『효경』을 읽은 이를 중으로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이를 하로 하였다. 만약 오경과 삼사와 제자백가의 글에 널리 통한 이는 등급을 뛰어넘어 뽑아 썼다. 앞서는 다만 활쏘기로 사람을 뽑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쳤다.
가을에 나라 서쪽이 가물고 메뚜기가 나며 도둑이 많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어루만졌다.
7오년 — 모초가 자옥을 막아 말하다
五年,春正月甲辰朔,日有食之。漢山州民饑,出粟以賙之。秋七月,隕霜傷穀。九月,以子玉爲楊根縣小守,執事史毛肖駁言:「子玉不以文籍出身,不可委分憂之職。」侍中議云:「雖不以文籍出身,曾入大唐爲學生,不亦可用耶?」王從之。
오년 봄 정월 초하루 갑진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이 주리므로 좁쌀을 내어 구제하였다. 가을 칠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다쳤다.
구월에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으니, 집사사 모초가 막아 말하였다. "자옥은 글로 벼슬에 나아간 것이 아니니 근심을 나누는 소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시중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비록 글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학생이 되었으니 또한 쓸 만하지 않은가." 왕이 그 말을 따랐다.
8사론 — 배우고 나서 벼슬해야 한다
論曰:「惟學焉然後聞道,惟聞道然後,灼知事之本末。故學而後仕者,其於事也,先本而末自正。譬如擧一綱,萬目從而皆正。不學者反此,不知事有先後、本末之序,但區區弊精神於枝末,或掊斂以爲利,或苛察以相高,雖欲利國安民,而反害之。是故,《學記》之言,終於《務本》,而《書》亦言:『不學牆面,蒞事惟煩。』則執事毛肖一言,可爲萬世之模範者焉。
김부식이 논한다.
오직 배운 뒤에야 도를 듣고, 오직 도를 들은 뒤에야 일의 근본과 끝을 환히 안다. 그러므로 배운 뒤에 벼슬한 이는 일에서 근본을 먼저 하니 끝은 절로 바르게 된다. 비유하면 벼리 하나를 들면 만 코가 따라서 다 바르게 되는 것과 같다.
배우지 않은 이는 이와 반대여서 일에 먼저와 나중, 근본과 끝의 차례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잘하게 가지와 끝에 정신을 지치게 한다. 더러는 거두어들여 이익으로 삼고 더러는 까다롭게 살펴 서로 잘난 체하니,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여도 도리어 해친다.
이런 까닭에 『학기』의 말은 「무본(務本)」으로 끝맺었고, 『서경』에도 "배우지 않으면 담을 마주한 것 같아 일에 임하매 오직 번거롭다" 하였다. 그러니 집사 모초의 한마디 말은 만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9육년 — 벽골제를 더 쌓다
六年,春正月,以宗基爲侍中。增築碧骨堤,徴全州等七州人,興役。熊川州進赤烏。三月,以一吉飡伯魚使北國。大旱。夏四月,太白辰星,聚于東井。五月,出粟賑漢山、熊川二州饑民。
육년 봄 정월에 종기를 시중으로 삼았다. 벽골제를 더 쌓는데 전주 등 일곱 주 사람을 불러 역사를 일으켰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삼월에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크게 가물었다. 여름 사월에 태백성과 진성이 동정 별자리에 모였다. 오월에 좁쌀을 내어 한산·웅천 두 주의 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10칠년 — 제공이 배반하다
七年,春正月,王太子卒,諡曰惠忠。伊飡悌恭叛,伏誅。熊川州向省大舍妻,一産三男。冬十月,京都雪三尺,人有凍死。侍中宗基免,大阿飡俊邕爲侍中。十二月,京都地震。内省侍郞金言爲三重阿飡。
칠년 봄 정월에 왕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이 배반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웅천주 향성 대사의 아내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시월에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려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다. 시중 종기가 면직되므로 대아찬 준옹을 시중으로 삼았다. 십이월에 서울에 땅이 흔들렸다. 내성시랑 김언을 삼중아찬으로 삼았다.
11팔년 — 김정란을 당나라에 바치다
八年,秋七月,遣使入唐,獻美女金井蘭,其女國色身香。八月,封王子義英爲太子。上大等忠廉卒,伊飡世強爲上大等。侍中俊邕病免,伊飡崇斌爲侍中。冬十一月壬子朔,日有食之。
팔년 가을 칠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미녀 김정란을 바쳤는데, 그 여자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미색이요 몸에서 향기가 났다.
팔월에 왕자 의영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상대등 충렴이 죽으므로 이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면직되므로 이찬 숭빈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십일월 초하루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12구년 — 흰 꿩을 바치다
九年,秋八月,大風折木偃禾,奈麻金惱獻白雉。
구년 가을 팔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꺾고 벼를 쓰러뜨렸다. 나마 김뇌가 흰 꿩을 바쳤다.
13십년 — 봉은사를 세우다
十年,春二月,地震。太子義英卒,諡曰憲平。侍中崇斌免,以迊湌彦昇爲侍中。秋七月,始創奉恩寺。漢山州進白烏。起望恩樓於宮西。
십년 봄 이월에 땅이 흔들렸다. 태자 의영이 죽으니 시호를 헌평(憲平)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면직되므로 잡찬 언승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칠월에 처음으로 봉은사를 세웠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궁 서쪽에 망은루를 세웠다.
14십일년 — 준옹을 태자로 삼다
十一年,春正月,封惠忠太子之子俊邕爲太子。夏四月,旱,親録囚。至六月乃雨。秋八月,隕霜害穀。
십일년 봄 정월에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여름 사월에 가물므로 몸소 죄수를 살폈는데 유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가을 팔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15십이년 — 창고를 열어 진휼하다
十二年,春,京都飢疫,王發倉廩賑恤之。夏四月,侍中彦昇爲兵部令,伊飡智原爲侍中。
십이년 봄에 서울에 주림과 돌림병이 있으므로 왕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여름 사월에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이찬 지원을 시중으로 삼았다.
16십삼년 — 메뚜기가 곡식을 해치다
十三年,秋九月,國東,蝗害穀。大水山崩。侍中智原免,阿飡金三朝爲侍中。
십삼년 가을 구월에 나라 동쪽에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큰물이 나고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면직되므로 아찬 김삼조를 시중으로 삼았다.
17십사년 — 원성왕이 죽다
十四年,春三月,宮南樓橋災。望德寺二塔相撃。夏六月,旱。屈自郡石南烏大舍妻,一産三男一女。冬十二月二十九日,王薨。諡曰元聖,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
십사년 봄 삼월에 궁 남쪽 누교에 불이 났다.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유월에 가물었다. 굴자군의 석남오 대사의 아내가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십이월 스무아흐레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널을 들어 봉덕사 남쪽에서 태웠다.
협주 1
《唐書》云:「貞元十四年,敬信死。」《通鑑》云:「貞元十六年,敬信死。」以本史考之,《通鑑》誤。
『당서』에는 "정원 십사년에 경신이 죽었다" 하였고 『통감』에는 "정원 십육년에 경신이 죽었다" 하였는데, 본사로 상고하면 『통감』이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