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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文聖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17 · 한자 1,039자 · 낭독 4.2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문성왕이 즉위하다

文聖王立,諱慶膺,神武王太子,母貞繼夫人。八月,大赦。敎曰:「淸海鎭大使弓福,嘗以兵助神考,滅先朝之巨賊,其功烈可忘耶?」乃拜爲鎭海將軍,兼賜章服。

문성왕이 즉위하였으니 이름은 경응(慶膺)이요 신무왕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정계부인이다.

팔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영을 내려 말하였다. "청해진 대사 궁복이 일찍이 군사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도와 앞 조정의 큰 도둑을 없앴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진해장군으로 삼고 아울러 장복을 내렸다.

협주 1

一云定宗太后

어머니 정계부인(貞繼夫人)은 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한다.

2이년 — 학생 백다섯 사람이 돌아오다

二年,春正月,以禮徵爲上大等,義琮爲侍中,良順爲伊飡。自夏四月至六月,不雨。唐文宗勑鴻臚寺,放還質子及年滿合歸國學生,共一百五人。冬,饑。

이년 봄 정월에 예징을 상대등으로, 의종을 시중으로, 양순을 이찬으로 삼았다. 여름 사월부터 유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당나라 문종이 홍려시에 칙명하여, 볼모로 와 있던 이와 햇수가 차서 나라로 돌아가야 할 학생 모두 백다섯 사람을 놓아 돌려보냈다. 겨울에 주렸다.

3삼년 — 김운경을 사신으로 삼아 책봉하다

三年,春,京都疾疫。一吉飡弘弼謀叛,事發逃入海島,捕之不獲。秋七月,唐武宗勑,歸國新羅官,前入新羅,宣慰副使前充兗州都督府司馬賜緋魚袋金雲卿,可淄州長史,仍爲使。冊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諸軍使上柱國新羅王,妻朴氏爲王妃。

삼년 봄에 서울에 돌림병이 돌았다. 일길찬 홍필이 배반을 꾀하다가 일이 드러나 바다 섬으로 달아났는데 잡지 못하였다.

가을 칠월에 당나라 무종이 칙명하여, 나라로 돌아가는 신라 관리로서 앞서 신라에 들어갔던 선위부사이자 연주도독부 사마를 지내고 비어대를 받은 김운경을 치주장사로 삼고 이어 사신으로 삼았다.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 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영해제군사 상주국 신라왕으로 삼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삼았다.

4사년 — 위흔의 딸을 왕비로 맞다

四年,春三月,納伊飡魏昕之女爲妃。

사년 봄 삼월에 이찬 위흔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

5오년 — 범 다섯 마리가 신궁 뜰에 들어오다

五年,春正月,侍中義琮病免,伊飡良順爲侍中。秋七月,五虎入神宮園。

오년 봄 정월에 시중 의종이 병으로 면직되므로 이찬 양순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칠월에 범 다섯 마리가 신궁 뜰에 들어왔다.

6육년 — 혈구진을 두다

六年,春二月甲寅朔,日有食之。太白犯鎭星。三月,京都雨雹。侍中良順退,大阿飡金茹爲侍中。秋八月,置穴口鎭,以阿飡啓弘爲鎭頭。

육년 봄 이월 초하루 갑인에 일식이 있었다. 태백이 진성을 범하였다. 삼월에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시중 양순이 물러나므로 대아찬 김여를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팔월에 혈구진을 두고 아찬 계홍을 진두로 삼았다.

7칠년 — 궁복의 딸을 왕비로 들이지 않다

七年,春三月,欲娶淸海鎭大使弓福女爲次妃,朝臣諫曰:「夫婦之道,人之大倫也。故夏以塗山興,殷以㜪氏昌,周以褒姒滅,晉以驪姬亂。則國之存亡,於是乎在,其可不愼乎?今,弓福海島人也,其女豈可以配王室乎?」王從之。冬十一月,雷,無雪。十二月朔,三日並出。

칠년 봄 삼월에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맞아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니, 조정 신하가 간하여 말하였다.

"부부의 도는 사람의 큰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도산씨로 일어나고 은나라는 신씨로 창성하였으며, 주나라는 포사로 망하고 진나라는 여희로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니 나라의 있고 없어짐이 여기에 달렸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궁복은 바다 섬 사람인데 그 딸을 어찌 왕실에 짝 지을 수 있겠습니까."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겨울 십일월에 우레가 치고 눈이 오지 않았다. 십이월 초하루에 해가 셋이 나란히 나타났다.

8팔년 — 염장이 궁복을 베다

八年,春,淸海弓福,怨王不納女,據鎭叛。朝廷將討之,則恐有不測之患,將置之,則罪不可赦,憂慮不知所圖。武州人閻長者,以勇壯聞於時,來告曰:「朝廷幸聽臣,臣不煩一卒,持空拳,以斬弓福以獻。」王從之。閻長佯叛國,投淸海。弓福愛壯士,無所猜疑,引爲上客,與之飮極歡。及其醉,奪弓福劒斬訖,召其衆說之,伏不敢動。

팔년 봄에 청해의 궁복이 왕이 딸을 들이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진에 웅거하여 배반하였다. 조정이 치자 하니 뜻하지 않은 근심이 있을까 두렵고, 그냥 두자 하니 죄를 용서할 수 없으므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꾀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이라는 이는 용맹하고 씩씩함으로 그때에 이름났는데, 와서 아뢰었다. "조정이 다행히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은 군사 한 사람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염장이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체하고 청해에 투항하니, 궁복이 씩씩한 사람을 아껴 시기하고 의심하는 바가 없어 이끌어 상객으로 삼고 함께 마시며 몹시 즐거워하였다. 그가 취하자 궁복의 칼을 빼앗아 베고 나서 그 무리를 불러 타이르니,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9구년 — 양순과 흥종이 배반하다

九年,春二月,重修平議臨海二殿。夏四月,伊飡良順波珍飡興宗等叛,伏誅。秋八月,封王子爲王太子。侍中金茹卒,伊飡魏昕爲侍中。

구년 봄 이월에 평의전과 임해전 두 전각을 고쳐 지었다. 여름 사월에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 등이 배반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가을 팔월에 왕자를 봉하여 왕태자로 삼았다. 시중 김여가 죽으므로 이찬 위흔을 시중으로 삼았다.

10십년 — 하늘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나다

十年,春夏旱。侍中魏昕退,波珍飡金啓明爲侍中。冬十月,天有聲如雷。

십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시중 위흔이 물러나므로 파진찬 김계명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시월에 하늘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11십일년 — 김이·대흔 등이 배반하다

十一年,春正月,上大等禮徵卒,伊飡義正爲上大等。秋九月,伊飡金貳大昕等叛,伏誅,大阿飡昕鄰緣坐罪。

십일년 봄 정월에 상대등 예징이 죽으므로 이찬 의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가을 구월에 이찬 김이와 대흔 등이 배반하다가 베임을 당하고, 대아찬 흔린이 연좌되어 죄를 받았다.

12십이년 — 흙비가 내리다

十二年,春正月,土星入月。京都雨土,大風拔木。赦獄囚殊死已下。

십이년 봄 정월에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흙비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뽑았다. 옥에 갇힌 죄수로 죽을죄 이하를 사면하였다.

13십삼년 — 청해진을 없애다

十三年,春二月,罷淸海鎭,徙其人於碧骨郡。夏四月,隕霜。入唐使阿飡元弘,齎佛經幷佛牙來,王出郊迎之。

십삼년 봄 이월에 청해진을 없애고 그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옮겼다. 여름 사월에 서리가 내렸다. 당나라에 들어갔던 사신 아찬 원홍이 불경과 아울러 부처의 어금니를 가지고 오므로 왕이 교외에 나가 맞았다.

14십사년 — 왕태자가 죽다

十四年,春二月,波珍飡眞亮爲熊州都督。調府火。秋七月,重修鳴鶴樓。冬十一月,王太子卒。

십사년 봄 이월에 파진찬 진량을 웅주 도독으로 삼았다. 조부에 불이 났다. 가을 칠월에 명학루를 고쳐 지었다. 겨울 십일월에 왕태자가 죽었다.

15십오년 — 메뚜기가 나다

十五年,夏六月,大水。秋八月,西南州郡,蝗。

십오년 여름 유월에 큰물이 났다. 가을 팔월에 서남쪽 주군에 메뚜기가 났다.

16십칠년 — 진각성에 불이 나다

十七年,春二月,發使撫問西南百姓。冬十二月,珍閣省災。土星入月。

십칠년 봄 이월에 사신을 보내어 서남쪽 백성을 위문하였다. 겨울 십이월에 진각성에 불이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17십구년 — 문성왕이 죽고 유조를 남기다

十九年,秋九月,王不豫,降遺詔曰:「寡人以眇末之資,處崇高之位,上恐獲罪於天鑑,下慮失望於人心,夙夜兢兢,若涉淵氷。賴三事大夫,百辟卿士,左右挾維,不墜重器。今者,忽染疾疹,至于旬日,怳惚之際,恐先朝露。惟祖宗之大業,不可以無主,軍國之萬機,不可以暫廢。顧惟舒弗邯誼靖,先皇之令孫,寡人之叔父,孝友明敏寬厚仁慈,久處台衡,挾贊王政,上可以祗奉宗廟,下可以撫育蒼生。爰釋重負,委之賢德,付託得人,夫復何恨?!况生死始終,物之大期,壽夭脩短,命之常分。逝者可以達理,存者不必過哀。伊爾多士,竭力盡忠,送往事居,罔或違禮。布告國內,明知朕懷!」越七日,王薨,諡曰文聖,葬于孔雀趾。

십구년 가을 구월에 왕이 편치 않아 유조를 내려 말하였다.

"과인이 보잘것없는 밑천으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위로는 하늘의 살피심에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에 실망을 줄까 걱정하여, 밤낮으로 조심하기를 깊은 물과 얼음을 건너는 듯하였다. 세 대부와 여러 벼슬아치가 좌우에서 붙들어 준 데 힘입어 무거운 그릇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이제 문득 병에 걸려 열흘에 이르니, 어릿어릿한 즈음에 아침 이슬보다 먼저 사라질까 두렵다. 오직 조종의 큰 업은 임금이 없을 수 없고, 군사와 나라의 온갖 일은 잠시도 그칠 수 없다.

돌아보건대 서불한 의정은 앞 임금의 아름다운 손자요 과인의 숙부다.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밝고 재빠르고 너그럽고 두터우며 어질고 자애로워, 오래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와 밝혔다. 위로는 종묘를 삼가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어루만져 기를 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풀어 어진 덕을 지닌 이에게 맡기니, 부탁할 사람을 얻었은즉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물며 나고 죽고 처음과 끝이 있음은 만물의 큰 기약이요, 오래 살고 일찍 죽고 길고 짧음은 목숨의 떳떳한 몫이다. 가는 이는 이치에 통달할 수 있고 남은 이는 지나치게 슬퍼할 것이 없다. 너희 여러 선비는 힘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가는 이를 보내고 산 이를 섬김에 혹시라도 예를 어기지 말라. 나라 안에 널리 알려 짐의 뜻을 밝히 알게 하라."

이레가 지나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