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敬順王
1경순왕이 즉위하다
敬順王立。金氏諱傅,文聖大王之裔孫孝宗伊湌之子也。母,桂娥太后。爲甄萱所舉即位,舉前王屍,殯於西堂,與羣下慟哭上。謚曰景哀。葬南山,蟹目嶺。太祖遣使弔。
경순왕이 즉위하였으니 김씨요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대왕의 후손인 효종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태후다. 견훤에게 밀려 즉위하고, 앞 임금의 주검을 들어 서당에 빈소를 차리고 여러 신하와 함께 통곡하며 시호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였다. 남산 해목령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2원년 — 견훤이 대목군을 침노하다
元年十一月,追尊考爲神興大王母爲王大后。十二月,甄萱侵大木郡燒盡田野積聚。
원년 십일월에 아버지를 신흥대왕으로,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십이월에 견훤이 대목군을 침노하여 들에 쌓아 둔 곡식을 다 태웠다.
3이년 — 견훤이 무곡성을 함락하다
二年,春正月,髙麗將金相與草八城賊興宗戰,不克死之。夏五月,康州將軍有文降於甄萱。六月,地震。秋八月,甄萱命將軍官昕築城於陽山,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率兵擊走之。甄萱進屯於大耶城下,分遣軍士,芟取大木郡禾稼。冬十月,甄萱攻䧟武谷城。
이년 봄 정월에 고려 장수 김상이 초팔성의 도둑 흥종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여름 오월에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유월에 땅이 흔들렸다.
가을 팔월에 견훤이 장군 관흔에게 명하여 양산에 성을 쌓게 하므로, 태조가 명지성 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쫓았다. 견훤이 대야성 아래로 나아가 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보내어 대목군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시월에 견훤이 무곡성을 쳐서 함락하였다.
4삼년 — 홍술이 싸우다 죽다
三年,夏六月,天笁國,三藏摩睺羅抵髙麗。秋七月,甄萱攻義城府城。髙麗將洪述出戰,不克死之。順州將軍元逢降於甄萱。太祖聞之,怒然以元逢前㓛,宥之,伹攺順州爲縣。冬十月,甄萱圍加恩縣不克而歸。
삼년 여름 유월에 천축국의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이르렀다.
가을 칠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을 쳤다. 고려 장수 홍술이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앞선 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고쳐 현으로 삼았다.
겨울 시월에 견훤이 가은현을 에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5사년 — 태조가 병산 아래에서 크게 이기다
四年,春正月,載巖城將軍善弼降髙麗。太祖厚禮待之,稱爲尚父。初,太祖將通好新羅善弼引噵之,至是降也。念其有㓛且老,故寵褒之。太祖與甄萱戰古昌郡甁山之下,大捷,殺虜甚衆。其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相次降於太祖。二月,太祖遣使告捷,王報聘兼請相㑹。秋九月,國東㳂海州郡部落,盡降於太祖。
사년 봄 정월에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태조가 두터운 예로 대접하고 상보(尙父)라 일컬었다. 처음에 태조가 신라와 좋게 통하려 할 때 선필이 이끌어 인도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그 공이 있고 또 늙었음을 생각하여 그러므로 사랑하여 기린 것이다.
태조가 견훤과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그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서른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이긴 것을 알리니, 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아울러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가을 구월에 나라 동쪽 바닷가 주군의 마을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6오년 — 태조가 서울에 오다
五年,春二月,太祖率五十餘騎至京畿逋謁。王與百官郊迎,入宮相對,曲盡情禮。置宴於臨海殿,酒酣,王言曰:「吾以不天,寖致禍亂。甄萱恣行不義,喪我國家,何痛如之。」因泫然涕泣,左右無不嗚咽,太祖亦流涕慰藉。因留數旬廻駕,王送至穴城,以堂弟裕廉為質,隨駕焉。太祖麾下軍士肅正,不犯秋毫,都人士女相慶曰:「昔甄氏之來也,如逢豺虎;今王公之至也,如見父母。」秋八月,太祖遣使,遺王以錦彩、鞍馬,幷賜群僚將士布帛,有差。
오년 봄 이월에 태조가 오십여 기를 거느리고 서울 근교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궁에 들어가 마주하니 정과 예를 다하였다.
임해전에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무르익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차츰 화와 난을 부르고, 견훤이 의롭지 못한 짓을 마음대로 하여 우리나라를 잃게 하였으니 무엇이 이보다 아프겠습니까." 이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니, 좌우가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고 태조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다.
이로 인하여 여러 열흘을 머물다가 수레를 돌리니, 왕이 혈성까지 배웅하고 사촌아우 유렴을 볼모로 삼아 수레를 따르게 하였다. 태조의 부하 군사는 엄숙하고 바르며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으니, 도성의 남녀가 서로 기뻐하며 말하였다. "지난날 견씨가 왔을 때는 승냥이와 범을 만난 듯하더니, 이제 왕공이 오심은 어버이를 뵙는 듯하다."
가을 팔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비단과 안장 얹은 말을 보내고, 아울러 여러 벼슬아치와 장수와 군사에게 베와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렸다.
7육년 — 김불을 당나라에 보내다
六年,春正月,地震。夏四月,遣便執事侍郎金昢、副使司賔卿李儒,入唐朝貢。
육년 봄 정월에 땅이 흔들렸다. 여름 사월에 사신으로 집사시랑 김불과 부사 사빈경 이유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게 하였다.
8칠년 — 명종이 고려에 명을 내리다
七年,唐明宗遣使髙麗,錫命。
칠년에 당나라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명을 내렸다.
9팔년 — 운주 지경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八年,秋九月,老人星見。運州界三十餘郡縣降於太祖。
팔년 가을 구월에 노인성이 나타났다. 운주 지경의 서른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10구년 — 나라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다
九年,冬十月,王以四方土地,盡為他有,國弱勢孤,不能自安,乃與群下謀,擧土降太祖。群臣之議,或以為可,或以為不可。王子曰:「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宜以一千年社稷,一旦輕以與人?」王曰:「孤危若此,勢不能全。旣不能强,又不能弱,至使無辜之民,肝腦塗地,吾所不能忍也。」乃使侍郞金封休,齎書請降於太祖。王子哭泣辭王,徑歸皆骨山。倚巖為屋,麻衣草食,以終其身。十一月,太祖受王書,送大相王鐵等迎之。王率百寮,發自王都,歸于太祖。香車寶馬,連亘三十餘里,道路塡咽,觀者如堵。太祖出郊迎勞,賜宮東甲第一區,以長女樂浪公主妻之。十二月,封為正丞公,位在太子之上,給祿一千石,侍從員將,皆錄用之。
구년 겨울 시월에 왕이 사방의 땅이 다 남의 것이 되고 나라가 약하고 형세가 외로워 스스로 편안할 수 없으므로, 이에 여러 신하와 꾀하여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였다. 여러 신하의 의논이 더러는 옳다 하고 더러는 옳지 않다 하였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있고 없어짐은 반드시 하늘의 명이 있으니, 다만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와 함께 민심을 거두어 모아 스스로 굳게 하여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둘 일입니다. 어찌 마땅히 일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온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어,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바르게 하는 데 이르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다."
이에 시랑 김봉휴를 시켜 글을 가지고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가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곧바로 개골산으로 가서 바위에 기대어 집을 짓고 삼베옷에 풀을 먹으며 그 몸을 마쳤다.
십일월에 태조가 왕의 글을 받고 대상 왕철 등을 보내어 맞이하였다. 왕이 모든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왕도를 떠나 태조에게 돌아가니, 향기로운 수레와 보배로운 말이 서른여 리에 이어지고 길이 막히며 보는 이가 담처럼 늘어섰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 맞아 위로하고 궁 동쪽 좋은 집 한 채를 내리며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주었다. 십이월에 봉하여 정승공으로 삼으니 자리가 태자 위에 있었고, 녹 일천 섬을 주었으며 모시고 따르던 관원과 장수를 모두 거두어 벼슬에 썼다.
11구년 — 신라를 경주로 고치다
改新羅為慶州,以為公之食邑。初,新羅之降也,太祖甚喜,旣待之以厚禮,使告曰:「今王以國與寡人,其為賜大矣。願結昏於宗室,以永甥舅之好。」答曰:「我伯父億廉匝干,知大耶郡事,其女子德容雙美,非是,無以備內政。」太祖遂取之生子,是顯宗之考,追封為安宗。至景宗獻和大王,聘正承公女,納為王妃,仍封正承公為尚父令。公至大宋興國四三年戊寅,薨,諡曰敬順。新羅國自始祖至此,分爲三代。自初至眞德二十八王,謂之上代;自武烈至惠恭八王,謂之中代;自宣德至敬順二十王,謂之下代云。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에 신라가 항복하매 태조가 몹시 기뻐하여 이미 두터운 예로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알렸다.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셨으니 그 내리심이 큽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혼인을 맺어 사위와 장인의 좋음을 길이 하고자 합니다."
답하였다. "나의 백부 억렴 잡간이 대야군의 일을 맡고 있는데, 그 딸의 덕과 얼굴이 다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살림을 갖출 수 없습니다."
태조가 마침내 맞아들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현종의 아버지로 안종(安宗)으로 추봉되었다. 경종 헌화대왕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들이고, 이어 정승공을 봉하여 상보령으로 삼았다. 공이 대송 흥국 무인년에 이르러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신라국은 시조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셋으로 나뉜다. 처음부터 진덕까지 스물여덟 임금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부터 혜공까지 여덟 임금을 중대(中代)라 하며, 선덕부터 경순까지 스무 임금을 하대(下代)라 한다.
협주 1
一云孝哀。
효애(孝哀)라고도 한다.
12사론 — 신라가 예의의 나라가 되기까지
論曰:「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金氏從天入金櫃而降,或云乘金車,此尤詭怪不可信。然世俗相傳,為之實事。政和中,我朝遣尚書李資諒,入宋朝貢。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詣佑神神舘,見一堂設女仙像。舘伴學士王黼曰:「此貴國之神,公等知之乎?」遂言曰:「古有帝室之女,不夫而孕,為人所疑。乃泛海抵辰韓生子,為海東始主,帝女為地仙,長在仙桃山,此其像也。」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有『娠賢肇邦』之句,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今但原厥初。在上者,其為己也儉;其為人也寬;其設官也略;其行事也簡,以至誠事中國,梯航朝聘之使,相續不絶,常遣子弟,造朝而宿衛,入學而講習,于以襲聖賢之風化,革鴻荒之俗,為禮義之邦。
김부식이 논한다.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났고, 김씨는 하늘로부터 금궤에 들어 내려왔다 하며 더러는 금수레를 탔다고도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이 서로 전하여 실제 있었던 일로 삼는다.
정화 연간에 우리 조정이 상서 이자량을 보내어 송나라에 들어가 조공할 때, 신 부식이 글 짓는 소임으로 따라갔다. 우신관에 나아가니 한 집에 여자 신선의 상을 모신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였다. "이는 그대 나라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는가." 마침내 말하였다. "옛날에 황실의 딸이 있어 지아비 없이 아이를 배어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바다에 떠서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고, 황제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오래 선도산에 있으니 이것이 그 상이다."
신이 또 대송 국신사 왕양이 지은 「제동신성모문」을 보니 '어진 이를 배어 나라를 열었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동신이 곧 선도산 신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느 때에 왕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제 다만 그 처음을 캐어 보면, 윗자리에 있는 이가 자기를 위함에는 검소하고 남을 위함에는 너그러우며, 벼슬을 베풂에는 간략하고 일을 행함에는 간소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겨 사다리와 배로 조회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고, 늘 자제를 보내어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고 학교에 들어가 강습하게 하였다. 이로써 성현의 풍속과 교화를 이어받아 거칠고 어두운 풍속을 고쳐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
13사론 — 경순왕이 태조에게 돌아간 일
又憑王師之威靈,平百濟、高句麗,取其地郡縣之,可謂盛矣。而奉浮屠之法,不知其弊,至使閭里,比其塔廟,齊民逃於緇褐,兵農浸小,而國家日衰,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於是時也,景哀加之以荒樂,與宮人左右,出遊鮑石亭,置酒燕衎,不知甄萱之至,與夫門外韓擒虎、樓頭張麗華,無以異矣。若敬順之歸命太祖,雖非獲已,亦可嘉矣。向若力戰守死,以抗王師,至於力屈勢窮,則必覆其宗族,害及于無辜之民。而乃不待告命,封府庫籍郡縣,以歸之,其有功於朝廷,有德於生民,甚大。昔,錢氏以吳、越入宋,蘇子瞻謂之忠臣,今新羅功德,過於彼遠矣。我太祖,妃嬪衆多,其子孫亦繁衍,而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此後繼統者,皆其子孫,豈非陰德之報者歟?!」
또 천자의 군사의 위엄과 신령함에 기대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얻어 군현으로 삼았으니 성대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부처의 법을 받들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마다 탑과 절이 늘어서고 백성이 승려의 옷 속으로 달아나 군사와 농사가 차츰 줄어들어 나라가 날로 쇠하였으니, 어찌 어지러워지고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때에 경애가 거기에다 거친 놀이를 더하여, 궁인과 좌우와 함께 포석정에 나가 놀며 술자리를 벌여 즐기다가 견훤이 이른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저 문밖의 한금호와 다락 위의 장려화와 다를 것이 없다.
경순이 태조에게 목숨을 맡긴 것으로 말하면, 비록 마지못한 일이었으나 또한 아름답다 할 만하다. 만약 힘껏 싸워 죽음으로 지키며 천자의 군사에 맞서다가 힘이 굽히고 형세가 다하는 데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을 엎고 해가 죄 없는 백성에게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곳간을 봉하고 군현을 장부에 적어 돌아갔으니, 그가 조정에 세운 공과 백성에게 베푼 덕이 매우 크다.
옛날에 전씨가 오와 월을 가지고 송나라에 들어가매 소자첨이 그를 충신이라 하였는데, 이제 신라의 공과 덕은 저보다 훨씬 낫다.
우리 태조는 왕비와 빈이 많아 그 자손 또한 번성하였는데, 현종이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올랐고 그 뒤로 대를 이은 이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남모르게 쌓은 덕의 갚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