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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瑠璃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20 · 한자 2,219자 · 낭독 8.9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유리명왕이 즉위하다

瑠璃明王立。諱類利,或云孺留。朱蒙元子,母禮氏。初,朱蒙在扶餘,娶禮氏女有娠。朱蒙歸後乃生,是為類利。幼年,出遊陌上,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婦人罵曰:「此兒無父,故頑如此。」類利慙,歸問母氏:「我父何人,今在何處?」母曰:「汝父非常人也,不見容於國,逃歸南地,開國稱王。歸時謂予曰:『汝若生男子,則言我有遺物,藏在七稜石上松下,若能得此者,乃吾子也。』」類利聞之,乃往山谷,索之不得,倦而還。一旦在堂上,聞柱礎間若有聲,就而見之,礎石有七稜。乃搜於柱下,得斷劒一段。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行至卒本,見父王,以斷劒奉之。王出己所有斷劒,合之,連為一劒。王悅之,立為太子,至是繼位。

유리명왕이 즉위하였으니 이름은 유리(類利)요 유류(孺留)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예씨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돌아간 뒤에 낳았으니 이가 유리다.

어린 나이에 밖에 나가 길 위에서 놀다가 참새를 쏘려다 잘못하여 물 긷는 부인의 질그릇을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었다. "이 아이는 아비가 없으므로 이처럼 완악하다." 유리가 부끄러워 돌아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말하였다. "네 아버지는 예사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남쪽 땅으로 달아나 나라를 열고 왕이라 일컬었다. 갈 때 나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사내아이를 낳거든, 내가 남긴 물건이 있는데 일곱 모 난 돌 위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라. 만약 이것을 얻는 자면 곧 내 아들이다' 하였다."

유리가 이를 듣고 이내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있는데 기둥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나는 듯하여 나아가 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가 났다. 이에 기둥 아래를 뒤져 부러진 칼 한 동강을 얻었다.

마침내 이를 가지고 옥지·구추·도조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에 이르러 아버지 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받들어 올렸다. 왕이 자기가 가진 부러진 칼을 내어 맞추니 이어져 한 자루 칼이 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세워 태자로 삼았고, 이때에 이르러 자리를 이었다.

2이년 —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다

二年,秋七月,納多勿侯松讓之女為妃。九月,西狩獲白獐。冬十月,神雀集王庭。百濟始祖溫祚立。

이년 가을 칠월에 다물후 송양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 구월에 서쪽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시월에 신령한 참새가 왕 뜰에 모였다. 백제 시조 온조가 즉위하였다.

3삼년 — 꾀꼬리 노래

三年,秋七月,作離宮於鶻川。冬十月,王妃松氏薨。王更娶二女姬以繼室,一曰禾姬,鶻川人之女也,一曰雉姬,漢人之女也。二女爭寵,不相和,王於涼谷造東西二宮,各置之。後,王田於箕山,七日不返。二女姬爭鬪,禾姬罵雉姬曰:「汝漢家婢妾,何無禮之甚乎?」雉姬慙恨亡歸。王聞之,策馬追之,雉姬怒不還。王嘗息樹下,見黃鳥飛集,乃感而歌曰:「翩翩黃鳥,雌雄相依,念我之獨,誰其與歸?」

삼년 가을 칠월에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겨울 시월에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맞아 이어 아내로 삼았으니, 하나는 화희(禾姬)로 골천 사람의 딸이요 하나는 치희(雉姬)로 한나라 사람의 딸이다. 두 여자가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이 양곡에 동서 두 궁을 지어 각각 두었다.

뒤에 왕이 기산에서 사냥하여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자가 다투었는데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말하였다. "너는 한나라 집의 계집종인데 어찌 예의 없음이 이리 심한가."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달아나 돌아갔다.

왕이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뒤쫓았으나 치희가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나무 아래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와 모이는 것을 보고 이에 느껴 노래하였다.

"펄펄 나는 꾀꼬리 암수 서로 의지하는구나. 외로운 이 내 몸을 생각하니 뉘와 함께 돌아갈꼬."

4십일년 — 부분노가 선비를 굴복시키다

十一年,夏四月,王謂群臣曰:「鮮卑恃險,不我和親,利則出抄,不利則入守,為國之患。若有人能折此者,我將重賞之。」扶芬奴進曰:「鮮卑險固之國,人勇而愚,難以力鬪,易以謀屈。」王曰:「然則為之奈何?」答曰:「宜使人反間入彼,僞說:『我國小而兵弱,怯而難動。』則鮮卑必易我,不為之備。臣俟其隙,率精兵從間路,依山林以望其城。王使以羸兵出其城南,彼必空城而遠追之。臣以精兵走入其城,王親率勇騎挾擊之,則可克矣。」王從之。鮮卑果開門出兵追之。扶芬奴將兵走入其城,鮮卑望之,大驚還奔。扶芬奴當關拒戰,斬殺甚多。王擧旗鳴鼓而前,鮮卑首尾受敵,計窮力屈,降為屬國。王念扶芬奴功,賞以食邑,辭曰:「此王之德也。臣何功焉。」遂不受,王乃賜黃金三十斤、良馬一十匹。

십일년 여름 사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선비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아, 이로우면 나와 노략하고 이롭지 않으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이 된다. 만약 이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무겁게 상 주겠다."

부분노가 나아가 말하였다. "선비는 험하고 굳은 나라요 사람이 용맹하나 어리석으니, 힘으로 싸우기는 어려우나 꾀로 굽히기는 쉽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겠는가."

답하였다. "마땅히 사람을 시켜 반간으로 저쪽에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사가 약하며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보아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그 틈을 엿보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샛길을 좇아 산림에 기대어 그 성을 바라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시면, 저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뒤쫓을 것입니다. 신이 정예 군사로 달려 그 성에 들어가고, 왕께서 몸소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끼고 치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선비가 과연 문을 열고 군사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그 성에 들어가니, 선비가 바라보고 크게 놀라 돌아 달려왔다. 부분노가 관문을 막고 맞서 싸워 베어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나아가니, 선비가 앞뒤로 적을 받아 꾀가 다하고 힘이 굽혀 항복하여 딸린 나라가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으로 상 주니 사양하여 말하였다. "이는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마침내 받지 않으니, 왕이 이에 황금 서른 근과 좋은 말 열 필을 내렸다.

5십삼년 — 형혹이 심성을 지키다

十三年,春正月,熒惑守心星。

십삼년 봄 정월에 형혹성이 심성을 지켰다.

6십사년 — 대소가 침노하다

十四年,春正月,扶餘王帶素遣使來聘,請交質子,王憚扶餘强大,欲以太子都切為質,都切恐不行,帶素恚之。冬十一月,帶素以兵五萬來侵,大雪人多凍死,乃去。

십사년 봄 정월에 부여 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어 예방하고 볼모를 주고받기를 청하였다. 왕이 부여가 강대함을 꺼려 태자 도절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으니 대소가 성내었다.

겨울 십일월에 대소가 군사 오만으로 침노하러 왔다가 큰 눈이 내려 사람이 많이 얼어 죽으므로 이내 갔다.

7십구년 — 제사에 쓸 돼지를 상하게 하다

十九年,秋八月,郊豕逸,王使託利、斯卑追之,至長屋澤中得之,以刀斷其脚筋。王聞之怒曰:「祭天之牲,豈可傷也?」遂投二人坑中殺之。九月,王疾病,巫曰:「託利、斯卑為祟。」王使謝之,卽愈。

십구년 가을 팔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므로 왕이 탁리와 사비를 시켜 뒤쫓게 하였다. 장옥택 가운데 이르러 잡고는 칼로 그 다리 힘줄을 끊었다. 왕이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하늘에 제사할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할 수 있는가."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에 던져 죽였다.

구월에 왕이 병들었는데 무당이 말하였다.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되었습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사죄하게 하니 곧 나았다.

8이십년 — 태자 도절이 죽다

二十年,春正月,太子都切卒。

이십년 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죽었다.

9이십일년 — 설지가 국내 땅을 살피다

二十一年,春三月,郊豕逸。王命掌牲薛支,逐之。至國內尉那巖得之,拘於國內人家,養之。返見王,曰:「臣逐豕,至國內尉那巖,見其山水深險,地宜五穀,又多麋鹿魚鼈之産。王若移都,則不唯民利之無窮,又可免兵革之患也。」夏四月,王田于尉中林。秋八月,地震。九月,王如國內,觀地勢,還至沙勿澤,見一丈夫坐澤上石。謂王曰:「願為王臣。」王喜許之,因賜名沙勿,姓位氏。

이십일년 봄 삼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므로 왕이 희생을 맡은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 매어 두고 기르게 하였다.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였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그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에 마땅하고 또 고라니와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다만 백성의 이로움이 끝없을 뿐 아니라 또한 싸움의 근심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 사월에 왕이 위중림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팔월에 땅이 흔들렸다.

구월에 왕이 국내에 가서 땅의 형세를 보고 돌아오다가 사물택에 이르러, 한 사내가 못 위 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왕에게 말하였다. "왕의 신하가 되기를 바랍니다." 왕이 기뻐하여 허락하고, 이로 인하여 사물이라는 이름과 위(位)라는 성을 내렸다.

10이십이년 —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협보가 떠나다

二十二年,冬十月,王遷都於&國內國內城,築尉那巖城。十二月,王田于質山陰,五日不返。大輔陜父諫曰:「王新移都邑,民不安堵。宜孜孜焉,刑政之是恤,而不念此,馳騁田獵,久而不返,若不改過自新,臣恐政荒民散,先王之業,墜地。」王聞之,震怒,罷陜父職,俾司官園。陜父憤去之南韓。

이십이년 겨울 시월에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십이월에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여 닷새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 협보가 간하였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이 편안히 살지 못합니다.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형벌과 정사를 걱정하셔야 하는데,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하며 오래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만약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으시면, 신은 정사가 거칠어지고 백성이 흩어져 앞선 임금의 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왕이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벼슬을 파하고 관원의 동산을 맡게 하였다. 협보가 분하여 남한으로 떠났다.

11이십삼년 — 해명을 태자로 삼다

二十三年,春二月,立王子解明,為太子,大赦國內。

이십삼년 봄 이월에 왕자 해명을 세워 태자로 삼고 나라 안을 크게 사면하였다.

12이십사년 — 겨드랑이에 깃이 있는 사람

二十四年,秋九月,王田于箕山之野,得異人,兩腋有羽。登之朝賜姓羽氏,俾尚王女。

이십사년 가을 구월에 왕이 기산 들에서 사냥하다가 기이한 사람을 얻었는데 두 겨드랑이에 깃이 있었다. 조정에 올려 우(羽)라는 성을 내리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13이십칠년 — 해명이 활을 꺾다

二十七年,春正月,王太子解明在古都,有力而好勇。黃龍國王聞之,遣使以强弓為贈。解明對其使者,挽而折之曰:「非予有力,弓自不勁耳。」黃龍王慙。王聞之怒,告黃龍曰:「解明為子不孝,請為寡人誅之。」三月,黃龍王遣使,請太子相見。太子欲行,人有諫者,曰:「今隣國無故請見,其意不可則測也。」太子曰:「天之不欲殺我,黃龍王其如我何?」遂行。黃龍王始謀殺之,及見不敢加害,禮送之。

이십칠년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맹을 좋아하였다. 황룡국 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해명이 그 사자 앞에서 당겨 꺾으며 말하였다. "내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이 절로 굳세지 못할 뿐이다." 황룡왕이 부끄러워하였다.

왕이 듣고 노하여 황룡에게 알렸다. "해명이 자식으로서 효도하지 않으니 청컨대 과인을 위하여 베어 주시오."

삼월에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어 태자와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가려 하니 어떤 이가 간하였다. "이제 이웃 나라가 까닭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태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황룡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마침내 갔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죽이려 꾀하였으나 보고서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로 보냈다.

14이십팔년 — 해명이 창에 몸을 던지다

二十八年,春三月,王遣人,謂解明曰:「吾遷都,欲安民以固邦業,汝不我隨,而恃剛力,結怨於隣國,為子之道,其若是乎?」乃賜劒使自裁。太子即欲自殺,或止之曰:「大王長子已卒,太子正當為後。今使者一至而自殺,安知其非詐乎?」太子曰:「嚮,黃龍王以强弓遺之,我恐其輕我國家,故挽折而報之,不意見責於父王。今父王以我為不孝,賜劒自裁,父之命,其可逃乎?」乃往礪津東原,以槍揷地,走馬觸之而死,時年,二十一歲。以太子禮,葬於東原,立廟。號其地為槍京。

이십팔년 봄 삼월에 왕이 사람을 보내어 해명에게 일렀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여 나라의 업을 굳게 하려 함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굳센 힘을 믿어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와 같으냐." 이에 칼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스스로 죽으려 하니 어떤 이가 말렸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으실 자리입니다. 이제 사자 하나가 이르렀다 하여 스스로 죽으시니, 그것이 속임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가 우리 나라를 얕볼까 두려워 당겨 꺾어 갚았는데, 뜻하지 않게 아버지 왕께 꾸지람을 받았다. 이제 아버지 왕이 나를 효도하지 않는다 하여 칼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시니, 아버지의 명을 어찌 피하겠는가."

이에 여진 동쪽 들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부딪쳐 죽으니 그때 나이 스물하나였다. 태자의 예로 동쪽 들에 장사 지내고 사당을 세웠으며, 그 땅을 창경(槍京)이라 하였다.

15사론 —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

論曰:「孝子之事親也,當不離左右以致孝,若文王之為世子。解明在於別都,以好勇聞,其於得得罪也,宜矣。又聞之,傳曰:「愛子敎之以義方,弗納於邪。」今王,始未嘗敎之,及其惡成,疾之已甚,殺之而後已。可謂父不父,子不子矣。秋八月,扶餘王帶素使來讓王曰:「我先王,與先君東明王相好,而誘我臣逃至此,欲完聚以成國家。夫國有大小,人有長幼,以小事大者,禮也,以幼事長者,順也。今王若能以禮順事我,則天必祐之,國祚永終,不然則欲保其社稷,難矣。」於是,王自謂:立國日淺,民孱兵弱,勢合忍恥屈服,以圖後効。乃與群臣謀,報曰:「寡人僻在海隅,未聞禮義。今承大王之敎,敢不惟命之從。」時,王子無恤,年尚幼少。聞王欲報扶餘言,自見其使曰:「我先祖神靈之孫,賢而多才,大王妬害,讒之父王,辱之以牧馬,故不安而出。

김부식이 논한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도를 다해야 하니, 문왕이 세자로 있을 때와 같아야 한다. 해명은 딴 도읍에 있으면서 용맹을 좋아함으로 이름났으니 그가 죄를 얻은 것은 마땅하다.

또 듣건대 옛글에 이르기를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길로 가르쳐 그릇된 데 들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제 왕이 처음에는 일찍이 가르치지 않다가, 그 악이 이루어지매 미워하기를 너무 심히 하여 죽인 뒤에야 그쳤으니,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 할 만하다.

가을 팔월에 부여 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꾸짖어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군 동명왕과 서로 좋게 지냈는데, 우리 신하를 꾀어 여기로 달아나게 하여 온전히 모아 나라를 이루려 하였다. 무릇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있으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섬기는 것이 예요 어린 것으로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다. 이제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나라의 복이 길이 이어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 사직을 지키고자 하여도 어려울 것이다."

이에 왕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를 세운 날이 얕고 백성이 잔약하고 군사가 약하니 형세로 보아 부끄러움을 참고 굽혀 뒷날의 보람을 꾀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와 꾀하여 답하였다. "과인이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예의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왕의 가르치심을 받았으니 감히 명을 좇지 않겠습니까."

그때 왕자 무휼이 나이 아직 어렸는데, 왕이 부여에 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자를 보고 말하였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 어질고 재주가 많았는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아버지 왕에게 참소하여 말 먹이는 일로 욕보였으므로 편치 못하여 나오셨다.

16이십팔년 — 알을 쌓아 놓은 것 같다

今大王不念前愆,但恃兵多,輕蔑我邦邑,請使者,歸報大王:『今有累卵於此,若大王不毁其卵,則臣將事之,不然則否。』」扶餘王聞之,問群下。有一老嫗對曰:「累卵者危也,不毁其卵者安也。」其意曰:王不知己危,而欲人之來,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이제 대왕이 앞선 허물은 생각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만 믿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니, 청컨대 사자는 돌아가 대왕께 아뢰라. '이제 여기 알을 쌓아 놓은 것이 있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헐지 않으면 신이 장차 섬기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부여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아랫사람에게 물으니, 한 늙은 할미가 답하였다. "알을 쌓아 놓은 것은 위태로움이요, 그 알을 헐지 않는 것은 편안함입니다." 그 뜻은, 왕이 제 위태로움을 알지 못하면서 남이 오기를 바라니,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어 스스로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17이십구년 —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

二十九年,夏六月,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黑蛙不勝,死。議者曰:「黑,北方之色,北扶餘破滅之徵也。」秋七月,作離宮於豆谷。

이십구년 여름 유월에 모천 가에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떼 지어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의논하는 이가 말하였다. "검은빛은 북방의 빛이니 북부여가 깨어져 없어질 조짐이다."

가을 칠월에 두곡에 이궁을 지었다.

18삼십일년 — 왕망이 하구려후라 부르다

三十一年,漢王莽發我兵,伐胡。吾人不欲行,强迫遣之,皆亡出塞,因犯法為寇。遼西大尹田譚追擊之,為所殺,州郡歸咎於我。嚴尤奏言:「貊人犯法,宜令州郡,且慰安之。今猥被以大罪,恐其遂叛。扶餘之屬,必有和者,匈奴未克,扶餘、獩貊復起,此大憂也。」王莽不聽,詔尤擊之。尤誘我將侯雛,斬之,傳首京師。莽悅之,更名吾王為下句麗侯,布告天下,令咸知焉。於是,寇漢邊地,愈甚。

삼십일년에 한나라 왕망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를 치려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가려 하지 않는데 억지로 다그쳐 보내니, 모두 달아나 변방을 나가 이로 인하여 법을 어기고 도둑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뒤쫓아 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와 군이 허물을 고구려에 돌렸다.

엄우가 아뢰었다.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마땅히 주와 군으로 하여금 우선 달래어 편안케 하여야 합니다. 이제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도 반드시 화답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흉노를 이기지 못한 데다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조서로 엄우에게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 장수 후추를 꾀어 베고 머리를 서울로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여 고구려 왕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널리 알려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나라 변경 땅을 노략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협주 1

兩《漢書》及《南北史》皆云:「誘句麗侯騶斬之。」

두 『한서』와 『남사』·『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騶)를 꾀어 베었다" 하였다.

19삼십이년 — 학반령에서 부여를 깨뜨리다

三十二年,冬十一月,扶餘人來侵。王使子無恤,率師禦之。無恤以兵小,恐不能敵,設奇計,親率軍,伏于山谷以待之。扶餘兵直至鶴盤嶺下,伏兵發,擊其不意,扶餘軍大敗,棄馬登山。無恤縱兵盡殺之。三十三年,春正月,立王子無恤為太子,委以軍國之事。秋八月,王命鳥伊烏伊、摩離,領兵二萬,西伐梁貊,滅其國,進兵襲取漢高句麗縣。

삼십이년 겨울 십일월에 부여 사람이 침노하러 오므로 왕이 아들 무휼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이 군사가 적어 대적하지 못할까 두려워 기이한 꾀를 내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매 숨은 군사가 일어나 뜻하지 않게 치니, 부여 군사가 크게 져서 말을 버리고 산에 올랐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다 죽였다.

삼십삼년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세워 태자로 삼고 군사와 나라의 일을 맡겼다.

가을 팔월에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이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쳐서 그 나라를 없애고, 군사를 밀고 나아가 한나라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협주 1

縣屬玄菟郡

그 현은 현도군에 딸렸다.

20삼십칠년 — 유리명왕이 죽다

三十七年,夏四月,王子如津,溺水死。王哀慟,使人求屍,不得。後沸流人祭須得之,以聞,遂以禮葬於王骨嶺,賜祭須金十斤、田十頃。秋七月,王幸豆谷。冬十月,薨於豆谷離宮。葬於豆谷東原,號為瑠璃明王。

삼십칠년 여름 사월에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여 사람을 시켜 주검을 찾게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뒤에 비류 사람 제수가 얻어 알리므로, 마침내 예로 왕골령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 금 열 근과 밭 열 이랑을 내렸다.

가을 칠월에 왕이 두곡에 거둥하였다. 겨울 시월에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쪽 들에 장사 지내고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