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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新大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9 · 한자 741자 · 낭독 3.0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신대왕이 즉위하다

新大王,諱伯固,太祖大王之季弟。儀表英特,性仁恕。初,次大王無道,臣民不親附,恐有禍亂,害及於己,遂遯於山谷。及次大王被弑,左輔菸支留與群公議,遣人迎致。及至,菸支留跪獻國璽曰:「先君不幸棄國,雖有子,不克有國家。夫天人之心,歸于至仁,謹拜稽首,請卽尊位。」於是,俯伏三讓而後卽位。時年七十七歲。

신대왕은 이름이 백고(伯固)요 태조대왕의 막내아우다. 거동과 모습이 빼어나고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처음에 차대왕이 도가 없어 신하와 백성이 가까이 붙지 않으므로, 화와 난이 있어 해가 제게 미칠까 두려워 마침내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었다. 차대왕이 시해되매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어 맞아 오게 하였다.

이르매 어지류가 꿇어앉아 나라의 도장을 바치며 말하였다. "앞 임금이 불행히 나라를 버리시고 비록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가질 수 없습니다. 무릇 하늘과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어진 이에게 돌아가니,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높은 자리에 오르시기를 청합니다."

이에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니 그때 나이 일흔일곱이었다.

협주 1

固,一作句。

고(固)는 구(句)로도 쓴다.

2이년 — 크게 사면하고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삼다

二年,春正月,下令曰:「寡人生忝王親,本非君德,向屬友于之政,頗乖貽厥之謨。畏害難安,離群遠遯,洎聞凶訃,但極哀摧。豈謂百姓樂推,群公勸進?謬以眇末,據于崇高,不敢遑寧,如涉淵海。宜推恩而及遠,遂與衆而自新,可大赦國內。」國人旣聞赦令,無不歡呼慶抃,曰:「大哉,新大王之德澤也!」初,明臨答夫之難,次大王太子鄒安逃竄,及聞嗣王赦令,卽詣王門,告曰:「嚮,國有災禍,臣不能死,遯于山谷,今聞新政,敢以罪告。若大王據法定罪,棄之市朝,惟命是聽,若賜以不死,放之遠方,則生死肉骨之惠也,臣所願也,非敢望也。」王卽賜狗山瀨、婁豆谷二所,仍封為讓國君。拜答夫為國相,加爵為沛者,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改左右輔為國相,始於此。

이년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과인이 외람되이 왕의 친척으로 났으나 본디 임금의 덕이 아니었다. 지난번 형제의 정사에 붙어 있으면서 자못 뒷사람에게 물려줄 꾀에 어긋났다. 해를 두려워하여 편안하기 어려우므로 무리를 떠나 멀리 달아났는데, 흉한 부고를 듣기에 이르러 다만 슬픔과 꺾임이 지극하였다. 어찌 백성이 즐거이 밀고 여러 대신이 나아가기를 권할 줄 헤아렸겠는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그릇되이 높은 자리에 있으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고 깊은 바다를 건너는 듯하다. 마땅히 은혜를 밀어 먼 데까지 미치고 마침내 여럿과 함께 스스로 새로워질 것이니, 나라 안을 크게 사면함이 옳다."

나라 사람이 사면하는 영을 듣고 기뻐 부르짖고 손뼉 치지 않는 이가 없어 말하였다. "크도다, 신대왕의 은덕이여."

처음에 명림답부의 난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이 달아나 숨었는데, 자리를 이은 왕의 사면하는 영을 듣고 곧 왕의 문에 나아가 아뢰었다. "지난번 나라에 재앙과 화가 있을 때 신은 죽지 못하고 산골짜기로 달아났습니다. 이제 새 정사를 들으니 감히 죄로써 아룁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따라 죄를 정하시어 저자에 버리신다면 오직 명을 듣겠고, 만약 죽이지 않으시고 먼 곳에 놓아주신다면 죽은 이를 살리고 뼈에 살을 붙이는 은혜이니, 신이 바라는 바이나 감히 바랄 것은 아닙니다."

왕이 곧 구산뢰와 누두곡 두 곳을 내리고 이어 봉하여 양국군으로 삼았다.

답부를 국상으로 삼고 벼슬을 더하여 패자로 삼아 안팎의 병마를 맡게 하고 아울러 양맥 마을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보와 우보를 고쳐 국상으로 삼은 것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3삼년 —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하다

三年,秋九月,王如卒本,祀始祖廟。冬十月,王至自卒本。

삼년 가을 구월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하였다. 겨울 시월에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4사년 — 현도에 딸리기를 빌다

四年,漢玄菟郡太守耿臨來侵,殺我軍數百人,王自降乞屬玄菟。

사년에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이 침노하러 와서 고구려 군사 수백 사람을 죽이니, 왕이 스스로 항복하고 현도에 딸리기를 빌었다.

5오년 — 부산의 도둑을 치다

五年,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討富山賊。

오년에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도둑을 쳤다.

6팔년 — 좌원에서 한나라 군사를 크게 깨뜨리다

八年,冬十一月,漢以大兵嚮我。王問群臣,戰守孰便。衆議曰:「漢兵恃衆輕我,若不出戰,彼以我為怯,數來。且我國山險而路隘,此所謂一夫當關,萬夫莫當者也。漢兵雖衆,無如我何,請出師禦之。」答夫曰:「不然。漢,國大民衆。今以强兵遠鬪,其鋒不可當也。而又兵衆者宜戰,兵少者宜守,兵家之常也。今漢人千里轉糧,不能持久。若我深溝高壘,淸野以待之,彼必不過旬月,饑困而歸。我以勁卒薄之,可以得志。」王然之,嬰城固守。漢人攻之不克,士卒饑餓引還。答夫帥數千騎追之,戰於坐原,漢軍大敗,匹馬不反。王大悅,賜答夫坐原及質山,為食邑。

팔년 겨울 십일월에 한나라가 큰 군사로 고구려로 향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은지 물었다.

여럿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사가 수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얕보니, 만약 나가 싸우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겁쟁이로 여겨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많으나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니, 군사를 내어 막기를 청합니다."

답부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이제 강한 군사로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칼끝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이는 마땅히 싸우고 군사가 적은 이는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가의 떳떳함입니다. 이제 한나라 사람이 천 리에 양식을 나르니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우고 기다리면, 저들은 반드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주리고 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굳센 군사로 다그치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을 지키고 굳게 막았다. 한나라 사람이 쳐도 이기지 못하고 군사가 주려 이끌고 돌아가므로, 답부가 수천 기를 거느리고 뒤쫓아 좌원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져서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내려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7십이년 — 남무를 왕태자로 삼다

十二年,春正月,群臣請立太子。三月,立王子男武為王太子。

십이년 봄 정월에 여러 신하가 태자 세우기를 청하였다. 삼월에 왕자 남무를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8십사년 — 일식이 있다

十四年,冬十月丙子晦,日有食之。

십사년 겨울 시월 그믐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9십오년 — 명림답부가 죽고 신대왕이 죽다

十五年,秋九月,國相答夫夫卒,年百十三歲。王自臨慟,罷朝七日。乃以禮葬於質山,置守墓二十家。冬十二月,王薨,葬於故國谷,號為新大王。

십오년 가을 구월에 국상 답부가 죽으니 나이 백열셋이었다. 왕이 몸소 나아가 슬퍼하고 이레 동안 조회를 그쳤다. 이에 예로 질산에 장사 지내고 무덤 지킬 스무 집을 두었다.

겨울 십이월에 왕이 죽으니 고국곡에 장사 지내고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