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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故國原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16 · 한자 804자 · 낭독 3.2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고국원왕이 즉위하다

故國原王,諱斯由。美川王十五年,立爲太子。三十二年,春,王薨。即位。

고국원왕은 이름이 사유(斯由)다. 미천왕 십오년에 세워 태자가 되었고, 삼십이년 봄에 왕이 죽으매 즉위하였다.

협주 2

一云國罡上王。

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다.

或云釗。

쇠(釗)라고도 한다.

2이년 — 졸본에서 시조 사당에 제사하다

二年,春二月,王如卒本,祀始祖廟。巡問百姓,老病賑給。三月,至自卒本。

이년 봄 이월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하였다. 백성을 돌아보며 위문하고 늙고 병든 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삼월에 졸본에서 돌아왔다.

3사년 — 평양성을 더 쌓다

四年,秋八月,增築平壤城。冬十二月,無雪。

사년 가을 팔월에 평양성을 더 쌓았다. 겨울 십이월에 눈이 오지 않았다.

4오년 —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다

五年,春正月,築國北新城。秋七月,隕霜殺穀。

오년 봄 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가을 칠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5육년 —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六年,春三月,大星流西北。遣使如晉,貢方物。

육년 봄 삼월에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렀다.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어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6구년 — 연나라가 신성에 이르다

九年,燕王皝來侵,兵及新城。王乞盟,乃還。

구년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침노하러 와서 군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왕이 맹세를 빌므로 이내 돌아갔다.

7십년 — 세자를 연나라에 보내다

十年,王遣世子,朝於燕王皝。

십년에 왕이 세자를 보내어 연나라 왕 모용황에게 조회하게 하였다.

8십이년 — 환도성이 무너지다

十二年春二月修葺丸都城,又築國内城。秋八月,移居丸都城。冬十月,燕王皝遷都龍城。立威將軍翰請:先取高句麗,後滅宇文,然後中原可圖。高句麗有二道,其北道平闊,南道險狹,衆欲從北道。翰曰:「虜以常情料之,必謂大軍從北道,當重北而輕南。王宜帥銳兵,從南道擊之,出其不意,丸都不足取也。別遣偏師,出北道,縱有蹉跌,其腹心已潰,四支無能為也。」皝從之。十一月,皝自將勁兵四萬,出南道。以慕容翰、慕容覇為前鋒,別遣長史王㝢等,將兵萬五千,出北道以來侵。王遣弟武,帥精兵五萬,拒北道,自帥羸兵,以備南道。慕容翰等先至戰,皝以大衆繼之,我兵大敗。左長史韓壽,斬我將阿佛和度加,諸軍乘勝,遂入丸都。王單騎走入斷熊谷,將軍慕輿埿,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

십이년 봄 이월에 환도성을 고쳐 손질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팔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다.

겨울 시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모용한이 청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취하고 뒤에 우문을 없앤 뒤에야 중원을 꾀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그 북쪽 길은 평평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습니다." 여럿이 북쪽 길을 좇고자 하였다.

한이 말하였다. "오랑캐는 예사 정리로 헤아려 반드시 큰 군사가 북쪽 길을 좇는다 여겨, 마땅히 북쪽을 무겁게 하고 남쪽을 가벼이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좇아 쳐서 그 뜻하지 않은 데로 나오시면 환도를 취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따로 한 갈래 군사를 보내어 북쪽 길로 나가게 하면, 비록 어긋남이 있더라도 그 심장이 이미 무너졌으니 팔다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따랐다.

십일월에 모용황이 몸소 굳센 군사 사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가며 모용한과 모용패를 앞장으로 삼고, 따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어 군사 일만 오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와 침노하게 하였다.

왕이 아우 무를 보내어 정예 군사 오만을 거느리고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스스로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에 대비하였다. 모용한 등이 먼저 이르러 싸우고 모용황이 큰 무리로 이었으므로 고구려 군사가 크게 졌다. 좌장사 한수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를 베고 여러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 마침내 환도에 들어왔다.

왕이 홀로 말을 타고 단웅곡으로 달아나니, 장군 모여니가 뒤쫓아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9십이년 — 미천왕의 무덤을 파다

會,王㝢等戰於北道,皆敗沒。由是,皝不復窮追,遣使招王,王不出。皝將還,韓壽曰:「高句麗之地,不可戍守。今,其主亡民散,潛伏山谷,大軍旣去,必復鳩聚,收其餘燼,猶足為患。請載其父尸,囚其生母而歸,俟其束身自歸,然後返之,撫以恩信,策之上也。」皝從之。發美川王墓,載其尸,收其府庫累世之寶,虜男女五萬餘口,燒其宮室,毁丸都城而還。

마침 왕우 등이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모두 지고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뒤쫓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왕을 불렀으나 왕이 나오지 않았다.

모용황이 돌아가려 하니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의 땅은 지켜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임금은 달아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큰 군사가 떠나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그 남은 무리를 거두어 오히려 근심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그 아비의 주검을 싣고 그 산 어미를 가두어 돌아가, 그가 몸을 묶어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린 뒤에 돌려주고 은혜와 믿음으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따랐다.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주검을 싣고, 그 창고의 여러 대 보배를 거두었으며, 남녀 오만여 사람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태우고 환도성을 헐고 돌아갔다.

10십삼년 —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 살다

十三年,春二月,王遣其弟,稱臣入朝於燕,貢珍異以千數。燕王皝乃還其父尸,猶留其母為質。秋七月,移居平壤東黃城,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遣使如晉朝貢。冬十一月,雪五尺。

십삼년 봄 이월에 왕이 그 아우를 보내어 신하라 일컫고 연나라에 들어가 조회하며 진기한 것 일천 가지를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주검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그대로 볼모로 두었다.

가을 칠월에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 살았으니, 성은 지금 서경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겨울 십일월에 눈이 다섯 자 내렸다.

11십오년 — 남소를 빼앗기다

十五年,冬十月,燕王皝使慕容恪來攻,拔南蘇,置戍而還。

십오년 겨울 시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을 시켜 치러 와서 남소를 빼앗고 수자리를 두고 돌아갔다.

12십구년 — 송황을 연나라에 보내다

十九年,王送前東夷護軍宋晃于燕。燕王雋赦之,更名曰活,拜為中尉。

십구년에 왕이 앞서 동이호군이던 송황을 연나라에 보냈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로 고쳐 중위로 삼았다.

13이십오년 — 어머니를 돌려받다

二十五年,春正月,立王子丘夫為王太子。冬十二月,王遣使詣燕,納質修貢,以請其母。燕王雋許之,遣殿中將軍刁原本「刀」龕,送王母周氏歸國。以王為征東大將軍營州刺史,封樂浪公,王如故。

이십오년 봄 정월에 왕자 구부를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십이월에 왕이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어 볼모를 들이고 공물을 닦아 그 어머니를 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나라로 돌려보냈다.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니 왕의 자리는 예전과 같았다.

14삼십구년 — 치양에서 지다

三十九年,秋九月,王以兵二萬,南伐百濟,戰於雉壤,敗績。

삼십구년 가을 구월에 왕이 군사 이만으로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치양에서 싸웠는데 졌다.

15사십년 — 모용평을 잡아 진나라에 보내다

四十年,秦王猛,伐燕破之。燕大傅慕容評來奔,王執送於秦。

사십년에 진나라 왕맹이 연나라를 쳐서 깨뜨렸다. 연나라 태부 모용평이 달아나 오므로 왕이 잡아 진나라에 보냈다.

16사십일년 — 고국원왕이 죽다

四十一年,冬十月,百濟王帥兵三萬,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是月二十三日,薨。葬于故國之原。

사십일년 겨울 시월에 백제 왕이 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치러 왔다. 왕이 군사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았다. 이달 스무사흘에 죽었다. 고국 벌판에 장사 지냈다.

협주 1

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

백제 개로왕이 위나라에 올린 표에 "쇠(釗)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