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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嬰陽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22 · 한자 3,425자 · 낭독 13.7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영양왕이 즉위하다

嬰陽王,諱元,平原王長子也。風神俊爽,以濟世安民自任。平原王在位七年,立為太子。三十二年,王薨,太子卽位。隋文帝遣使拜王,為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郡公,賜衣一襲。

영양왕은 이름이 원(元)이요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풍채와 정신이 준수하고 시원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을 스스로 맡았다. 평원왕이 자리에 있은 지 칠년에 세워 태자가 되었고, 삼십이년에 왕이 죽으매 태자가 즉위하였다. 수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군공의 벼슬을 잇게 하며 옷 한 벌을 내렸다.

협주 2

一云平陽。

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

一云大元。

대원(大元)이라고도 한다.

2이년 — 고구려왕으로 책봉되다

二年,春正月,遣使入隋,奉表謝恩進奉,因請封王,帝許之。三月,策封為高句麗王,仍賜車服。夏五月,遣使謝恩。

이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에 들어가 표를 받들어 은혜를 사례하고 바쳤으며, 이로 인하여 왕으로 봉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삼월에 책봉하여 고구려왕으로 삼고 이어 수레와 옷을 내렸다. 여름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은혜를 사례하였다.

3삼년 — 수나라에 조공하다

三年,春正月,遣使入隋朝貢。

삼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4팔년 — 수나라에 조공하다

八年,夏五月,遣使入隋朝貢。

팔년 여름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5구년 — 수 문제의 군사가 무너지다

九年,春二月王率靺鞨之衆萬餘,侵遼西,營州摠管韋冲撃退之。隋文帝聞而大怒,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將水陸三十萬來伐。夏六月,帝下詔黜王官爵。漢王諒軍出臨渝關,値水潦,餽轉不繼,軍中乏食,復遇疾疫。周羅睺自東泛海,趣平壤城,亦遭風,舡多漂沒。秋九月,師還,死者十八九。王亦恐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某。帝於是罷兵,待之如初。百濟王昌遣使奉表,請為軍導。帝下詔:諭以高句麗服罪,朕已赦之,不可致伐。厚其使而遣之。王知其事,侵掠百濟之境。

구년 봄 이월에 왕이 말갈의 무리 일만여를 거느리고 요서를 침노하니, 영주총관 위충이 쳐서 물리쳤다.

수나라 문제가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세적에게 명하여 아울러 원수로 삼고 물과 뭍의 군사 삼십만을 거느리고 치러 왔다. 여름 유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깎았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을 나섰는데 장맛비를 만나 군량 나르기가 이어지지 못하여 군중에 먹을 것이 모자랐고 다시 돌림병을 만났다. 주라후가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또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떠내려가고 잠겼다. 가을 구월에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이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왕 또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똥흙의 신하 아무개'라 일컬었다. 황제가 이에 군사를 파하고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백제 왕 창이 사신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군사의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에 복종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칠 수 없다" 하고, 그 사신을 두터이 대접하여 보냈다. 왕이 그 일을 알고 백제의 지경을 침노하여 노략하였다.

6십일년 — 『신집』 다섯 권을 짓다

十一年,春正月,遣使入隋朝貢。詔:太學博士李文眞,約古史為『新集』五卷。國初始用文字時,有人記事一百卷,名曰《留記》,至是刪修。

십일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조서를 내려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옛 역사를 간추려 『신집(新集)』 다섯 권을 짓게 하였다. 나라 처음에 비로소 글자를 쓸 때 어떤 사람이 일을 적은 것이 일백 권 있어 이름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덜고 고친 것이다.

7십사년 — 북한산성을 치다

十四年,秋八月王遣將軍高勝,攻新羅北漢山城,羅王率兵,過漢水。城中鼓噪相應,勝以彼衆我寡,恐不克而退。

십사년 가을 팔월에 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어 신라 북한산성을 치니, 신라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넜다. 성 안에서 북을 치고 떠들며 서로 응하므로, 승이 저쪽은 무리가 많고 고구려 쪽은 적어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 물러났다.

8십팔년 — 배구가 양제를 부추기다

十八年,初,煬帝之幸啓民帳也,我使者在啓民所。啓民不敢隱,與之見帝。黃門侍郞裴矩說帝曰:「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漢、晋皆為郡縣。今乃不臣,別為異域,先帝欲征之久矣。但楊諒不肖,師出無功。當陛下之時,安可不取,使冠帶之境,遂為蠻貊之鄕乎?今其使者,親見啓民擧國從化,可因其恐懼,脅使入朝。」帝從之,勑牛弘宣旨曰:「朕以啓民誠心奉國,故親至其帳,明年當往涿郡。爾還日語爾王,宜早來朝,勿自疑懼,存育之禮,當如啓民,苟或不朝,將帥啓民,往巡彼土。」王懼:藩禮頗闕,帝將討之。啓民,突厥可汗也。夏五月,遣師攻百濟松山城,不下,移襲石頭城,虜男女三千而還。

십팔년에 처음에 양제가 계민의 장막에 거둥하였을 때 고구려 사자가 계민이 있는 곳에 있었다.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그와 함께 황제를 뵈었다.

황문시랑 배구가 황제를 달래어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디 기자를 봉한 땅이요 한나라와 진나라 때 모두 군현이었습니다. 이제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다른 지경이 되었으므로 앞 임금이 치고자 한 지 오래입니다. 다만 양량이 어질지 못하여 군사를 내고도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때를 당하여 어찌 취하지 않으시고, 의관을 갖춘 지경으로 하여금 마침내 오랑캐의 고을이 되게 하겠습니까. 이제 그 사자가 계민이 나라를 들어 교화를 좇는 것을 몸소 보았으니, 그 두려워함을 틈타 위협하여 조회하게 하십시오."

황제가 그 말을 따라 우홍에게 칙명하여 뜻을 펴게 하였다. "짐이 계민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나라를 받듦을 아름다이 여겨 몸소 그 장막에 이르렀고,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에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에 너의 왕에게 일러 마땅히 일찍 와서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말게 하라. 두어 기르는 예는 마땅히 계민과 같이 할 것이나,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그 땅을 돌아보러 갈 것이다."

왕이 두려워하였으니 울타리의 예를 자못 빠뜨려 황제가 장차 치려 하였기 때문이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이다.

여름 오월에 군사를 보내어 백제 송산성을 쳤으나 떨어뜨리지 못하고, 옮겨 석두성을 습격하여 남녀 삼천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9십구년 —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十九年,春二月,命將襲新羅北境,虜獲八千人。夏四月,拔新羅牛鳴山城。

십구년 봄 이월에 장수에게 명하여 신라 북쪽 지경을 습격하여 팔천 사람을 사로잡았다. 여름 사월에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았다.

10이십이년 — 양제가 조서로 고구려를 치다

二十二年,春二月,煬帝下詔,討高句麗。夏四月,車駕至涿郡之臨朔宮,四方兵皆集涿郡。

이십이년 봄 이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사월에 임금의 수레가 탁군의 임삭궁에 이르고 사방의 군사가 모두 탁군에 모였다.

11이십삼년 — 양제의 조서 (앞)

二十三年,春正月壬午,帝下詔曰:「高句麗小醜,迷昏不恭,崇聚渤、碣之間,荐食遼、濊之境。雖復漢、魏誅戮,巢穴暫傾,亂離多阻,種落還集。萃川藪於往代,播寔繁以汔今。睠彼華壤,翦爲夷類,歷年永久,惡稔旣盈。天道禍淫,亡徵已兆。亂常敗德,非可勝圖,掩慝懷姦,唯曰日不足。移告之嚴,未嘗面受;朝覲之禮,莫肯躬親。誘納亡叛,不知紀極;充斥邊垂,亟勞烽候。關柝以之不靜,生人為之廢業。在昔薄伐,已漏天網,旣緩前禽之戮,未卽後服之誅,曾不懷恩,翻爲長惡,乃兼契丹之黨,處劉海戍,習靺鞨之服,侵軼遼西。又靑丘之表,咸修職貢,碧海之濱,同稟正朔,遂復敓攘琛賮,遏絶往來。虐及弗辜,誠而遇禍。輶車奉使,爰曁海東,旌節所次,途經藩境,而擁塞道路,拒絶王人,無事君之心,豈為臣之禮?此而可忍,孰不可容!且法令苛酷,賦斂煩重,强臣豪族,咸執國鈞,朋黨比周,以之成俗。

이십삼년 봄 정월 임오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의 작은 무리가 어둡고 미혹하여 공손하지 않고,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의 지경을 거듭 먹었다. 비록 다시 한나라와 위나라가 베고 죽여 그 둥지와 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어지럽고 막힘이 많아 겨레붙이가 도로 모였다. 지난 대에 냇물과 늪에 모여 퍼져 자라 이제에 이르렀다. 저 빛나는 땅을 돌아보건대 잘리어 오랑캐 무리가 되었고, 해가 오래되매 악이 익어 이미 가득 찼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조짐이 이미 나타났다. 떳떳함을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림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사특함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기를 오직 날이 모자란다 하였다. 옮겨 알린 엄한 뜻을 일찍이 낯을 맞대어 받지 않았고, 조회하는 예를 몸소 하려 하지 않았다. 달아나 배반한 이를 꾀어 받아들이기를 끝을 알지 못하고, 변두리에 가득 차 자주 봉화를 수고롭게 하였다. 관문의 딱따기가 이로써 고요하지 못하고 산 사람이 이 때문에 생업을 그만두었다.

옛적에 조금 쳤을 때 이미 하늘의 그물에서 새어, 이미 앞서 잡은 짐승을 죽이기를 늦추었고 뒤에 복종한 이를 베지 않았거늘,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자라게 하였다. 이에 거란의 무리를 아울러 바닷가 수자리를 죽이고, 말갈의 옷을 익혀 요서를 침노하였다.

또 청구 바깥이 다 직분의 공물을 닦고 푸른 바다 물가가 함께 책력을 받는데, 마침내 다시 보배와 예물을 빼앗고 오감을 막아 끊었다. 사나움이 죄 없는 이에게 미치고 정성스러운 이가 화를 만났다. 가벼운 수레로 사신을 받들어 이에 바다 동쪽에 이르렀는데, 깃발과 부절이 머무는 곳마다 길이 울타리 지경을 지나거늘, 길을 막고 임금의 사람을 막아 끊으니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없다. 어찌 신하 된 예이겠는가.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을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이 번거롭고 무거우며, 강한 신하와 호걸의 겨레가 다 나라의 벼리를 잡고, 무리 지어 편을 짜는 것이 이로써 풍속을 이루었다.

12이십삼년 — 양제의 조서 (뒤)

賄貨如市,寃枉莫申。重以仍歲災凶,比屋饑饉,兵戈不息,徭役無期,力竭轉輸,身塡溝壑。百姓愁苦,爰誰適從?境內哀惶,不勝其弊。廻首面內,各懷性命之圖,黃髮稚齒,咸興酷毒之歎。省俗觀風,爰屆幽、朔,弔人問罪,無俟再駕。於是,親摠六師,用申九伐,拯厥阽危。協從天意,殄玆逋穢,剋嗣先謨。今宜授律啓行,分麾届路,掩渤海而雷震,歷扶餘以電掃。比戈按甲誓旅而後行,三先五申,必勝而後戰。左十二軍,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右十二軍,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等道。絡繹引途,摠集平壤。」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號二百萬。

뇌물이 저자와 같고 원통하고 억울함을 펼 곳이 없다. 거기에 거듭 해마다 재앙과 흉년이 들어 집집이 주리고, 싸움이 그치지 않고 부역이 기약이 없어, 힘은 나르는 데 다하고 몸은 구렁에 채워진다. 백성이 시름겹고 괴로우니 이에 누구를 좇겠는가. 지경 안이 슬프고 두려워하여 그 폐단을 이기지 못한다. 머리를 돌려 안을 향하여 각각 목숨의 꾀를 품고, 흰머리와 어린아이가 다 모진 독의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기풍을 보며 이에 유주와 삭방에 이르렀으니, 백성을 위로하고 죄를 물음에 두 번 수레 몰기를 기다릴 것이 없다. 이에 몸소 여섯 군사를 거느려 아홉 가지 치는 법을 펴고 그 위태로움을 건지겠다. 하늘의 뜻을 좇아 이 도망한 더러움을 없애고 앞선 꾀를 이어 이루겠다.

이제 마땅히 군율을 주어 길을 떠나고 깃발을 나누어 길에 이르러, 발해를 덮어 우레같이 떨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쓸겠다. 창을 나란히 하고 갑옷을 살펴 군사에게 맹세한 뒤에 나아가고, 세 번 먼저 알리고 다섯 번 거듭 일러 반드시 이긴 뒤에 싸우겠다.

왼쪽 열두 군은 누방·장잠·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로 나가고, 오른쪽 열두 군은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돈·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 등의 길로 나가라. 잇달아 길을 이끌어 모두 평양에 모이라."

무릇 일백열세 만 삼천팔백 사람인데 이백만이라 일컬었다.

13이십삼년 — 요수를 건너다

其餽輸者倍之。宜社於南桑乾水上,類上帝於臨朔宮南,祭馬祖於薊城北。帝親授節度,每軍上將、亞將各一人,騎兵四十隊。隊百人,十隊為團。步卒八十隊,分為四團,團各有偏將一人,其鎧胄、纓拂、旗旛,每團異色。日遣一軍,相去四十里,連營漸進,終四十日發,乃盡。首尾相繼,鼓角相聞,旌旗亘九百六十里。御營內,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次後發,又亘八十里。近古出師之盛,未之有也。二月,帝御師進至遼水,衆軍摠會,臨水為大陣。我兵阻水拒守,隋兵不得濟。帝命工部尚書宇文愷,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旣成,引橋趣東岸,短不及岸丈餘。我兵大至,隋兵驍勇者,爭赴水接戰,我兵乘高擊之,隋兵不得登岸,死者甚衆。

군량을 나르는 이는 그 곱절이었다.

남쪽 상건수 가에서 사직에 제사하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에게 유제를 지내며,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 제사하였다. 황제가 몸소 절도를 주니 군마다 상장과 아장이 각각 한 사람이요 기병이 마흔 대였다. 한 대는 백 사람이요 열 대가 한 단이 되었다. 보병은 여든 대인데 나누어 네 단으로 삼고 단마다 각각 편장 한 사람이 있으며, 그 갑옷과 투구와 갓끈과 깃발이 단마다 빛깔이 달랐다.

날마다 한 군씩 보내되 서로 사십 리씩 떨어져 진영을 이어 차츰 나아가게 하니, 마흔 날이 되어서야 다 떠났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뿔피리 소리가 서로 들리며 깃발이 구백육십 리에 뻗쳤다. 어영 안에는 열두 위와 삼대와 오성과 구시를 합쳐 안팎·앞뒤·좌우 여섯 군에 나누어 딸리게 하고 그 뒤에 떠나게 하니 또 팔십 리에 뻗쳤다. 가까운 옛날에 군사를 낸 성함이 이런 일은 있지 않았다.

이월에 황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요수에 이르러 여러 군사가 모두 모여 물가에 큰 진을 쳤다. 고구려 군사가 물을 막고 지키니 수나라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황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 뜬다리 세 길을 만들게 하였다. 이루어지매 다리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나아갔으나 짧아 언덕에 한 길 남짓 미치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크게 이르니 수나라 군사 가운데 날래고 용맹한 이들이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맞붙어 싸웠으나, 고구려 군사가 높은 데를 타고 치므로 수나라 군사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가 매우 많았다.

14이십삼년 — 양제가 장수들을 꾸짖다

麥鐵杖躍登岸,與錢士雄、孟金叉等,皆戰死,乃斂兵引橋,復就西岸。更命少府監何稠接橋,二日而成。諸軍相次繼進,大戰于東岸。我兵大敗,死者萬計。諸軍乘勝,進圍遼東城,則漢之襄平城也。車駕到度遼,下詔赦天下,命刑部尚書衛文昇等,撫遼左之民,給復十年,建置郡縣,以相統攝。夏五月,初,隋諸將之東下也,帝戒之曰:「凡軍事進止,皆須奏聞待報,無得專擅。」遼東數出戰不利,乃嬰城固守。帝命諸軍攻之,又勅諸將,高句麗若降,則宜撫納,不得縱兵。遼東城將陷,城中人輒言請降,諸將奉旨,不敢赴機,先令馳奏。比報至,城中守禦亦備,隋隨出拒戰。如此再三,帝終不悟,旣而城久不下。六月己未,帝幸遼東城南,觀其城池形勢,因召諸將,詰責之曰:「公等自以官高,又恃家世,欲以暗懦待我邪?在都之日,公等皆不願我來,恐見病敗耳。

맥철장이 뛰어 언덕에 올랐으나 전사웅·맹금차 등과 함께 모두 싸우다 죽으니, 이에 군사를 거두고 다리를 끌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나아갔다.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니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여러 군사가 차례로 이어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다. 고구려 군사가 크게 져서 죽은 이가 만으로 헤아렸다. 여러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고 나아가 요동성을 에우니 곧 한나라의 양평성이다.

임금의 수레가 요수를 건너매 조서를 내려 천하를 사면하고, 형부상서 위문승 등에게 명하여 요동 왼쪽 백성을 어루만지고 부역을 열 해 면하게 하며 군현을 세워 서로 거느리게 하였다.

여름 오월에 처음 수나라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갈 때 황제가 경계하였다. "무릇 군사 일의 나아가고 그침은 다 모름지기 아뢰어 회답을 기다리고 마음대로 하지 말라."

요동이 여러 번 나가 싸워 이롭지 못하매 이에 성을 지키고 굳게 막았다. 황제가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칙명하기를,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거든 마땅히 어루만져 받아들이고 군사를 놓지 말라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할 때 성 안 사람이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니, 여러 장수가 뜻을 받들어 감히 기회에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달려가 아뢰게 하였다. 회답이 이를 즈음에는 성 안의 지킴이 또한 갖추어져 수나라를 좇아 나와 맞서 싸웠다. 이와 같이 두세 번 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니, 이윽고 성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유월 기미에 황제가 요동성 남쪽에 거둥하여 그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이로 인하여 여러 장수를 불러 꾸짖었다. "공들이 스스로 벼슬이 높다 하고 또 집안 내력을 믿어 어리석고 나약함으로 나를 대하려 하는가. 서울에 있던 날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병들고 지는 것을 보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15이십삼년 — 을지문덕이 항복을 가장하다

我今來此,正欲觀公等所為,斬公輩爾,公今畏死,莫肯盡力,謂我不能殺公邪?」諸將咸戰懼失色。帝因留止城西數里,御六合城,我諸城堅守不下。左翊衛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舳艫數百里,浮海先進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與我軍相遇,進擊大破之。護兒欲乘勝趣其城,副摠管周法尚止之,請俟諸軍至俱進。護兒不聽,簡精甲數萬,直造城下。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出兵與護兒戰,而僞敗。護兒逐之入城,縱兵俘掠,無復部伍。伏兵發,護兒大敗,僅而獲免,士卒還者,不過數千人。我軍追至舡所,周法尚整陣待之,我軍乃退。護兒引兵還屯海浦,不敢復留應接諸軍。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左驍衛大將軍荊元恒,出遼東道;右翊衛大將軍薛世雄,出沃沮道;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右禦衛將軍張瑾,出襄平道;右武侯將軍趙孝才,出碣石道;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出增地道,皆會於鴨綠水西。

내가 이제 여기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을 베려 함이다. 공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려 하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하리라 여기는가." 여러 장수가 다 떨고 두려워 낯빛을 잃었다.

황제가 이로 인하여 성 서쪽 몇 리에 머물러 육합성에 나아갔으나 고구려 여러 성이 굳게 지켜 떨어지지 않았다.

좌익위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가 수백 리에 이어져 바다에 떠 먼저 나아가 패수로 들어와 평양에서 육십 리 되는 곳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와 서로 만나 나아가 쳐서 크게 깨뜨렸다. 호아가 이긴 기세를 타고 그 성으로 나아가려 하니, 부총관 주법상이 말리며 여러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가기를 청하였다. 호아가 듣지 않고 정예 갑사 수만을 가려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가 나곽 안 빈 절에 군사를 숨기고, 군사를 내어 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졌다. 호아가 뒤쫓아 성에 들어와 군사를 풀어 사로잡고 노략하니 다시 대오가 없었다. 숨었던 군사가 일어나니 호아가 크게 져서 겨우 벗어났고 군사로 돌아간 이가 수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 군사가 뒤쫓아 배 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주법상이 진을 가지런히 하고 기다리므로 고구려 군사가 이내 물러났다. 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해포에 돌아가 진 치고 감히 다시 머물러 여러 군사에 응하지 못하였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로,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로,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도로,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로,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16이십삼년 — 우문술과 우중문이 다투다

述等兵,自瀘河、懷遠二鎭,人馬皆給百日糧,又給排甲、槍矟并衣資、戎具、火幕,人別三石已上,重莫能勝致。下令軍中:「遺棄米粟者斬!」士卒皆於幕下,掘坑埋之,纔行及中路糧已將盡。王遣大臣乙支文德,詣其營詐降,實欲觀虛實。于仲文先奉密旨:「若遇王及文德來者,必擒之。」仲文將執之,尚書右丞劉士龍,為慰撫使,固止之。仲文遂聽,文德還,旣而悔之,遣人紿文德曰:「更欲有言,可復來。」文德不顧,濟鴨綠水而去。仲文與述等,旣失文德,內不自安。述以糧盡欲還。仲文議以精銳追文德,可以有功,述固止之。仲文怒曰:「將軍仗十萬之衆,不能破小賊,何顔以見帝?且仲文此行,固知無功。何則?古之良將,能成功者,軍中之事,決在一人。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와 회원 두 진에서 사람과 말에 다 백 날 양식을 주고, 또 갑옷과 창과 아울러 옷과 밑천과 병기와 화막을 주니, 사람마다 따로 석 섬이 넘어 무거워 감당하지 못하였다. 군중에 영을 내렸다. "쌀과 곡식을 버리는 자는 벤다." 군사가 다 장막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으니, 겨우 중간 길에 이르러 양식이 이미 다하려 하였다.

왕이 대신 을지문덕을 그 진영에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니, 실은 허와 실을 보고자 함이었다. 우중문이 먼저 밀지를 받았다. "만약 왕이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 중문이 잡으려 하니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가 되어 굳이 말렸다. 중문이 마침내 그 말을 들어 문덕이 돌아갔는데 이윽고 뉘우쳐 사람을 보내어 문덕을 속였다. "다시 할 말이 있으니 돌아오라." 문덕이 돌아보지 않고 압록수를 건너갔다.

중문이 우문술 등과 함께 이미 문덕을 놓치매 속으로 스스로 편치 못하였다. 우문술이 양식이 다하였다 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중문이 정예로 문덕을 뒤쫓으면 공이 있으리라 의논하니 우문술이 굳이 말렸다.

중문이 노하여 말하였다. "장군이 십만의 무리를 거느리고도 작은 도둑을 깨뜨리지 못하니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겠는가. 또 중문이 이번 걸음에 진실로 공이 없을 줄 알았다. 어째서인가. 옛날의 좋은 장수로 공을 이룬 이는 군중의 일이 한 사람에게서 결정되었다.

17이십삼년 — 살수에서 크게 이기다

今人各有心,何以勝敵?」時,帝以仲文有計劃,令諸軍諮稟節度,故有此言。由是,述等不得已而從之,與諸將,渡水追文德。文德見述軍士有饑色,故欲疲之,每戰輒走。述一日之中,七戰皆捷,旣恃驟勝,又逼群議,於是,遂進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因山為營。文德復遣使詐降,請於述曰:「若旋師者,當奉王,朝行在所。」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又平壤城險固,度難猝拔,遂因其詐而還。述等為方陣而行,我軍四面鈔撃,述等且戰且行。秋七月,至薩水,軍半濟,我軍自後擊其後軍,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於是,諸軍俱潰,不可禁止。將士奔還,一日一夜,至鴨綠水,行四百五十里。將軍天水王仁恭為殿,擊我軍却之。來護兒聞述等敗,亦引還。唯衛文昇一軍獨全。

이제 사람마다 각각 마음이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그때 황제가 중문에게 계획이 있다 하여 여러 군사로 하여금 절도를 물어 받게 하였으므로 이 말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그를 좇아 여러 장수와 함께 물을 건너 문덕을 뒤쫓았다.

문덕이 우문술의 군사에게 주린 빛이 있음을 보고 짐짓 지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문득 달아났다. 우문술이 하루 사이에 일곱 번 싸워 다 이기니, 이미 갑작스러운 이김을 믿고 또 여럿의 의논에 몰려, 이에 마침내 나아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삼십 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며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돌리시면 마땅히 왕을 받들어 행재소에 조회하겠습니다."

우문술이 군사가 지치고 피폐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굳어 갑자기 빼앗기 어려움을 헤아려, 마침내 그 속임을 인하여 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네모진 진을 이루어 가니 고구려 군사가 사면에서 노략하여 치므로, 우문술 등이 싸우면서 갔다.

가을 칠월에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널 때 고구려 군사가 뒤에서 그 뒷군을 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싸우다 죽었다. 이에 여러 군사가 다 무너져 막을 수 없었다. 장수와 군사가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 낮 하루 밤에 압록수에 이르니 사백오십 리를 간 것이다. 장군 천수 사람 왕인공이 뒤를 맡아 고구려 군사를 쳐서 물리쳤다. 내호아가 우문술 등이 졌다는 말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오직 위문승의 한 군사만 홀로 온전하였다.

18이십삼년 — 삼십만 오천 가운데 이천칠백이 돌아오다

初,九軍到度遼,凡三十萬五千,及還至遼東城,唯二千七百人,資儲器械巨萬計,失亡蕩盡。帝大怒,鎖繋述等,癸卯引還。初,百濟王璋遣使,請討高句麗。帝使之覘我動靜,璋內與我潛通。隋軍將出,璋使其臣國智牟,入隋請師期。帝大悅,厚加賞賜,遣尚書起部郞席律,詣百濟,告以期會。及隋軍渡遼,百濟亦嚴兵境上,聲言助隋,實持兩端。是行也,唯於遼水西,拔我武厲邏,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처음에 아홉 군이 요수를 건널 때 무릇 삼십만 오천이었는데, 돌아와 요동성에 이르매 오직 이천칠백 사람뿐이었고, 밑천과 쌓아 둔 것과 병기가 거만으로 헤아리는데 다 잃어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에 이끌고 돌아갔다.

처음에 백제 왕 장이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그로 하여금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는데, 장이 속으로는 고구려와 몰래 통하였다. 수나라 군사가 나가려 할 때 장이 그 신하 국지모를 시켜 수나라에 들어가 군사 낼 때를 묻게 하였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두터이 상 주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어 만날 때를 알렸다. 수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너매 백제도 지경 위에 군사를 엄히 하고 수나라를 돕는다고 소리쳤으나 실은 두 끝을 잡았다.

이 걸음에 오직 요수 서쪽에서 고구려 무려라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었을 뿐이다.

19이십사년 — 다시 요동을 치다

二十四年,春正月,帝詔徵天下兵,集涿郡,募民為驍果,修遼東古城,以貯軍糧。二月,帝謂侍臣曰:「高句麗小虜,侮慢上國。今,拔海移山,猶望克果,况此虜乎?」乃復議代伐。左光祿大夫郭榮諫曰:「戎狄失禮,臣下之事。千鈞之弩,不為鼷鼠發機。奈何親辱萬乘,以敵小寇乎?」帝不聽。夏四月,車駕度遼,遣宇文述與楊義臣,趣平壤。王仁恭出扶餘道,進軍至新城。我兵數萬拒戰,仁恭帥勁騎一千,擊破之。我軍嬰城固守。帝命諸將攻遼東,聽以便宜從事。飛樓橦、雲梯、地道,四面俱進,晝夜不息。我應變拒之,二十餘日不拔。主客死者甚衆。衝梯竿長十五丈,驍果沈光升其端,臨城與我軍戰,短兵接殺十數人。我軍競擊之,而墜未及地,適遇竿有垂絙,光接而復上。

이십사년 봄 정월에 황제가 조서로 천하의 군사를 불러 탁군에 모으고, 백성을 모아 날랜 군사(驍果)로 삼으며 요동의 옛 성을 손질하여 군량을 쌓게 하였다.

이월에 황제가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의 작은 오랑캐가 상국을 업신여긴다. 이제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기는 일도 오히려 이루기를 바라거늘 하물며 이 오랑캐이겠는가." 이에 다시 치기를 의논하였다.

좌광록대부 곽영이 간하였다. "오랑캐가 예를 잃은 것은 신하 된 이의 일입니다. 천 균의 쇠뇌는 생쥐를 위하여 기틀을 당기지 않습니다. 어찌 몸소 만승을 욕되게 하여 작은 도둑을 맞서겠습니까." 황제가 듣지 않았다.

여름 사월에 임금의 수레가 요수를 건너 우문술과 양의신을 보내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 군사를 밀고 신성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수만이 막아 싸우니 인공이 굳센 기병 일천을 거느리고 쳐서 깨뜨렸다. 고구려 군사가 성을 지키고 굳게 막았다.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치되 형편에 따라 일하기를 허락하였다. 나는 다락과 충차와 구름사다리와 땅굴로 사면에서 함께 나아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가 변화에 따라 막으니 스무여 날이 되도록 빼앗지 못하였다. 주인과 손님으로 죽은 이가 매우 많았다.

충제의 장대 길이가 열다섯 길인데 날랜 군사 심광이 그 끝에 올라 성에 임하여 고구려 군사와 싸워 짧은 병기로 맞붙어 십여 사람을 죽였다. 고구려 군사가 다투어 치니 떨어져 땅에 미치기 전에 마침 장대에 드리운 밧줄이 있어 광이 잡고 다시 올라갔다.

20이십사년 — 양현감의 반란으로 물러가다

帝望見壯之,卽拜朝散大夫。遼東城久不下,帝遣造布囊百餘萬口,滿貯士土,欲積為魚梁大道,闊三十步,高與城齊,使戰士登而攻之。又作八輪樓車,高出於城,夾魚梁道,欲俯射城內。指期將攻,城內危蹙。會,楊玄感叛書至,帝大懼。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益憂之。兵部侍郞斛斯政,素與玄感善,內不自安,來奔。帝夜密召諸將,使引軍還。軍資器械攻具,積如丘山,營壘帳幕,案堵不動,衆心恟懼,無復部分,諸道分散。我軍卽時覺之,然不敢出,但於城內鼓噪。至來日午時,方漸出外,猶疑隋軍詐之。經二日,乃出數千兵追躡,畏隋軍之衆,不敢逼,常相去八九十里。將至遼水,知御營畢度,乃敢逼後軍。時,後軍猶數萬人,我軍隨而鈔撃,殺略數千人。

황제가 바라보고 씩씩하게 여겨 곧 조산대부를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황제가 베 자루 백여만 개를 만들어 흙을 가득 채워, 어량대도를 쌓되 너비 서른 걸음에 높이가 성과 나란하게 하여 싸우는 군사로 하여금 올라가 치게 하려 하였다. 또 여덟 바퀴 달린 다락 수레를 만들어 성보다 높이 하고 어량도를 끼고서 성 안을 굽어 쏘려 하였다. 때를 정하여 치려 하니 성 안이 위태롭고 오그라들었다.

마침 양현감이 배반하였다는 글이 이르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 높은 벼슬아치의 자제가 다 현감이 있는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더욱 걱정하였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본디 현감과 사이가 좋아 속으로 스스로 편치 못하여 달아나 왔다.

황제가 밤에 몰래 여러 장수를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게 하였다. 군수품과 병기와 치는 기구가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진영과 보루와 장막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여럿의 마음이 두려워 다시 나뉜 대오가 없이 여러 길로 흩어졌다.

고구려 군사가 곧 이를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 안에서 북을 치고 떠들었다. 이튿날 낮에 이르러서야 차츰 밖으로 나왔으나 오히려 수나라 군사가 속이는가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 이에 수천 군사를 내어 뒤쫓았으나 수나라 군사의 많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다그치지 못하고 늘 팔구십 리씩 떨어졌다. 요수에 이르러 어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서야 감히 뒷군을 다그쳤다. 그때 뒷군이 오히려 수만 사람이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따라가며 노략하여 쳐서 수천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21이십오년 — 왕이 항복을 빌다

二十五年,春二月,帝詔百寮,議伐高句麗,數日無敢言者。詔復徵天下兵,百道俱進。秋七月,車駕次懷遠鎭。時,天下已亂,所徵兵多失期不至,吾國亦困弊。來護兒至卑奢城,我兵逆戰。護兒擊克之,將趣平壤。王懼,遣使乞降,因囚送斛斯政。帝大悅,遣使持節,召護兒還。八月,帝自懷遠鎭班師。冬十月,帝還西京,以我使者及斛斯政,告大廟,仍徵王入朝,王竟不從。勅將帥嚴裝,更圖後擧,竟不果行。

이십오년 봄 이월에 황제가 모든 벼슬아치에게 조서로 고구려 치기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며칠이 되도록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조서로 다시 천하의 군사를 불러 백 길로 함께 나아가게 하였다.

가을 칠월에 임금의 수레가 회원진에 머물렀다. 그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 부른 군사가 많이 기일을 어겨 이르지 않았고 고구려도 또한 곤하고 지쳤다.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니 고구려 군사가 맞아 싸웠다. 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이로 인하여 곡사정을 가두어 보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사신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호아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팔월에 황제가 회원진에서 군사를 돌렸다. 겨울 시월에 황제가 서경에 돌아가 고구려 사신과 곡사정을 태묘에 고하고, 이어 왕을 불러 조회하게 하였으나 왕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장수들에게 칙명하여 엄히 차리고 다시 뒷일을 꾀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가지 못하였다.

22이십구년 — 영양왕이 죽다

二十九年,秋九月,王薨,號曰嬰陽王。

이십구년 가을 구월에 왕이 죽었다. 영양왕(嬰陽王)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