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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상寶藏王上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21 · 한자 4,543자 · 낭독 18.2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보장왕이 즉위하다

王,諱藏,以失國故無諡。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建武王在位第二十五年,蓋蘇文弑之,立藏繼位。新羅謀伐百濟,遣金春秋乞師,不從。

왕은 이름이 장(藏)이니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건무왕의 아우 대양왕의 아들이다. 건무왕이 자리에 있은 지 이십오년에 개소문이 시해하고 장을 세워 자리를 잇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치기를 꾀하여 김춘추를 보내어 군사를 빌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협주 1

或云寶藏。

보장(寶藏)이라고도 한다.

2이년 — 도교를 청하고 당나라가 책명하다

二年,春正月,封父為王。遣使入唐朝貢。三月,蘇文告王曰:「三敎譬如鼎足,闕一不可。今儒釋並興,而道敎未盛,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伏請遣使於唐,求道敎以訓國人。」大王深然之,奉表陳請。太宗遣道士叔達等八人,兼賜老子『道德經』。王喜,取僧寺館之。閏六月,唐太宗曰:「蓋蘇文弑其君,而專國政,誠不可忍。以今日兵力,取之不難,但不欲勞百姓,吾欲使契丹、靺鞨擾之,何如?」長孫無忌曰:「蘇文自知罪大,畏大國之討,嚴設守備。陛下姑為之隱忍,彼得以自安,必更驕惰,愈肆其惡,然後討之,未晚也。」帝曰:「善。」遣使持節備禮冊命,詔曰:「懷遠之規,前王令典,繼世之義,列代舊章。高句麗國王藏,器懷昭敏,識宇詳正,早習禮敎,德義有聞。肇承藩業,誠款先著,宜加爵命,允玆故實,可上柱國遼東郡王高句麗王。」秋九月,新羅遣使於唐,言:百濟攻取我四十餘城,復與高句麗連兵,謀絶入朝之路。乞兵救援。十五日,夜明不見月,衆星西流。

이년 봄 정월에 아버지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삼월에 개소문이 왕에게 아뢰었다. "세 가르침은 비유하면 솥의 발과 같아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제 유교와 불교는 아울러 일어났으나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을 갖춘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나라 사람을 가르치게 하소서."

대왕이 깊이 그렇게 여겨 표를 받들어 청하였다. 태종이 도사 숙달 등 여덟 사람을 보내고 아울러 노자의 『도덕경』을 내렸다. 왕이 기뻐하여 절을 가져다 관사로 삼았다.

윤유월에 당나라 태종이 말하였다. "개소문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 정사를 오로지하니 참으로 참을 수 없다. 오늘의 군사 힘으로 취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으니, 내가 거란과 말갈로 하여금 어지럽히게 하려는데 어떠한가."

장손무기가 말하였다. "소문이 스스로 죄가 큰 줄 알고 큰 나라가 칠까 두려워하여 지킴을 엄히 갖추었습니다. 폐하께서 우선 참으시면 저가 스스로 편안하다 여겨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 그 악을 더욱 마음대로 할 것이니, 그런 뒤에 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좋다."

사신에게 부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게 하고 조서를 내렸다. "먼 곳을 품는 법도는 앞선 임금의 아름다운 법이요, 대를 잇는 의로움은 여러 대의 옛 법이다. 고구려국왕 장은 그릇과 품은 뜻이 밝고 재빠르며 식견이 자세하고 바르고, 일찍이 예의 가르침을 익혀 덕과 의로움으로 들림이 있다. 비로소 울타리의 업을 이어받아 정성이 먼저 드러났으니 마땅히 벼슬과 명을 더하여 이 옛 법을 좇을 것이라.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으로 삼을 만하다."

가을 구월에 신라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아뢰었다. "백제가 우리 사십여 성을 쳐서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군사를 이어 조회하러 가는 길을 끊기를 꾀합니다. 군사로 구원해 주기를 빕니다."

열닷새에 밤이 밝은데 달이 보이지 않고 뭇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3삼년 — 현장이 와서 타이르다

三年,春正月,遣使入唐朝貢。帝命司農丞相里玄奬,賚璽書賜王曰:「新羅委質國家,朝貢不乏,爾與百濟,各宜戢兵。若更攻之,明年發兵,擊爾國矣。」玄奬入境,蓋蘇文已將兵擊新羅,破其兩城。王使召之,乃還。玄奬諭以勿侵新羅,蓋蘇文謂玄奬曰:「我與新羅,怨隙已久。往者,隋人入寇,新羅乘釁,奪我地五百里,其城邑皆據有之。自非歸我侵地,兵恐未能已。」玄奬曰:「旣往之事,焉可追論?今遼東諸城,本皆中國郡縣,中國尚且不言,高句麗豈得必求故地?」莫離支竟不從。玄奬還,具言其狀。太宗曰:「蓋蘇文弑其君,賊其大臣,殘虐其民,今又違我詔命,侵暴鄰國,不可以不討。」秋七月,帝將出兵,勅、饒、江三州,造四百艘,以載軍糧。遣營州都督張儉等,帥幽、營二都督兵,及契丹、奚、靺鞨,先擊遼東,以觀其勢。

삼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명하여 새서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내리게 하였다. "신라가 나라에 몸을 맡겨 조공이 모자람이 없다. 너와 백제는 각각 마땅히 군사를 거두라. 만약 다시 친다면 내년에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치겠다."

현장이 지경에 들어올 때 개소문이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그 두 성을 깨뜨렸다. 왕이 사람을 시켜 불렀으므로 이내 돌아왔다. 현장이 신라를 침노하지 말라 타이르니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과 틈이 이미 오래다. 지난날 수나라 사람이 쳐들어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 우리 땅 오백 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다 차지하였다. 신라가 빼앗아 간 우리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군사는 아마 그칠 수 없을 것이다."

현장이 말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좇아 따지겠는가. 이제 요동의 여러 성은 본디 다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이 오히려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가 어찌 반드시 옛 땅을 구할 수 있겠는가."

막리지가 끝내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 그 정황을 갖추어 말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개소문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그 대신을 해쳤으며 그 백성을 모질게 하였고, 이제 또 나의 조명을 어기고 이웃 나라를 침노하여 사납게 하니 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칠월에 황제가 장차 군사를 내려고 홍주·요주·강주 세 주에 배 사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였다. 영주도독 장검 등을 보내어 유주와 영주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해·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4삼년 — 장안의 노인들에게 이르다

以大理卿韋挺,爲餽輸使,自河北諸州,皆受挺節度,聽以便宜從事。又命少卿蕭銳,轉河南諸州糧入海。九月,莫離支貢白金於唐。楮遂良曰:「莫離支弑其君,九夷所不容。今將討之,而納其金,此郜鼎之類也,臣謂不可受。」帝從之。使者又言:「莫離支遣官五十,入宿衛。」帝怒謂使者曰:「汝曹皆事高武,有官爵,莫離支弑逆,汝曹不能復讎,今更為之遊說,以欺大國,罪孰大焉?」悉以屬大理。冬十月,平壤雨色赤。帝欲自將討之,召長安耆老,勞曰:「遼東,故中國地,而莫離支賊殺其主,朕將自行經略之。故與父老約,子若孫從我行者,我能拊循之,無容恤也。」則厚賜布粟。群臣皆勸帝毋行。帝曰:「吾知之矣,去本以趣末;捨高以取下;釋近而之遠,三者為不祥,伐高句麗,是也。

대리경 위정을 군량 나르는 사신으로 삼고 하북의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절도를 받아 형편에 따라 일하기를 허락하였다. 또 소경 소예에게 명하여 하남 여러 주의 양식을 옮겨 바다로 들이게 하였다.

구월에 막리지가 당나라에 백금을 바쳤다. 저수량이 말하였다. "막리지가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아홉 오랑캐도 용납하지 않는 바입니다. 이제 장차 치려 하면서 그 금을 받는 것은 고나라 솥과 같은 것이니, 신은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 말을 좇았다.

사자가 또 말하였다. "막리지가 벼슬아치 쉰 사람을 보내어 숙위하게 하겠습니다."

황제가 노하여 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다 고무를 섬겨 벼슬이 있었는데, 막리지가 시해하고 거스르매 너희가 원수를 갚지 못하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하여 큰 나라를 속이니 죄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모두 대리에 붙였다.

겨울 시월에 평양에 붉은빛 비가 내렸다.

황제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치려 하여 장안의 노인을 불러 위로하며 말하였다. "요동은 옛 중국 땅인데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장차 몸소 가서 경략하겠다. 그러므로 부로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 나를 따라가는 이는 내가 어루만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곧 베와 곡식을 두터이 내렸다.

여러 신하가 다 황제에게 가지 말기를 권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안다. 근본을 버리고 끝으로 나아가는 것,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는 것, 가까운 것을 놓고 먼 데로 가는 것, 이 셋은 상서롭지 못하니 고구려를 치는 것이 그것이다.

5사년 — 군사를 일으키다

然蓋蘇文弑君,又戮大臣以逞,一國之人,延頸待救,議者顧未亮耳。」於是,北輸粟營州,東儲粟古大人城。十一月,帝至洛陽。前宜州刺史鄭天璹,已致仕,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召詣行在問之。對曰:「遼東道遠,糧轉艱阻,東夷善守城,不可猝下。」帝曰:「今日非隋之比,公但聽之。」以刑部尚書張亮,為平壤道行軍大摠管,帥江、淮、嶺、硤兵四萬,長安、洛陽募士三千,戰艦五百艘,自東州泛海,趣平壤。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為遼東道行軍大摠管,帥步騎六萬,及蘭、河二州降胡,趣遼東。兩軍合勢,大集於幽州。遣行軍摠管姜行本、少監丘行淹,先督衆士,造梯衝於安羅山。時,遠近勇士應募,及獻攻城器械者,不可勝數。帝皆親加損益,取其便易。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또 대신을 죽여 뜻대로 하니, 한 나라 사람이 목을 늘이고 구원을 기다리는데 의논하는 이가 도리어 밝지 못할 뿐이다."

이에 북쪽으로 영주에 곡식을 나르고 동쪽으로 고대인성에 곡식을 쌓았다.

십일월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앞서 의주자사이던 정천숙이 이미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황제가 그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좇아 고구려를 쳤다 하여 불러 행재소에 오게 하여 물었다. 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 나르기가 어렵고 막히며, 동이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오늘은 수나라에 견줄 바가 아니니 공은 다만 듣기만 하라."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회·영·협의 군사 사만과 장안·낙양에서 모은 군사 삼천과 전함 오백 척을 거느리고 동주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좌위솔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육만과 난주·하주 두 주의 항복한 오랑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게 하였다. 두 군사가 형세를 합쳐 유주에 크게 모였다.

행군총관 강행본과 소감 구행엄을 보내어 먼저 여러 군사를 감독하여 안라산에서 사다리와 충차를 만들게 하였다. 그때 멀고 가까운 곳의 용사가 모집에 응하고 성 치는 기계를 바치는 이가 이루 셀 수 없었다. 황제가 다 몸소 덜고 더하여 그 편하고 쉬운 것을 취하였다.

6사년 — 반드시 이길 다섯 가지 까닭

又手詔諭天下:「以高句麗蓋蘇文,弑主虐民,情何可忍?今欲巡幸幽、薊,問罪遼、碣,所過營頓,無為勞費。」且言:「昔,隋煬帝殘暴其下,高句麗王,仁愛其民。以思亂之軍,擊安和之衆,故不能成功。今略言必勝之道有五:一曰,以大擊小;二曰,以順討逆;三曰,以理乘亂;四曰,以逸敵勞;五曰,以悅當怨,何憂不克?布告元元,勿為疑懼。」於是,凡頓舍供備之具,減者太半。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分道擊之。

또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에 타일렀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사납게 하니 정으로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와 계주에 돌아보러 가서 요동과 갈석에 죄를 물으려 하니, 지나는 곳의 진영과 머무는 곳은 수고롭고 허비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말하였다. "옛날 수나라 양제는 그 아랫사람에게 모질고 사나웠고 고구려 왕은 그 백성을 어질게 사랑하였다. 어지러움을 생각하는 군사로 편안하고 화목한 무리를 쳤으므로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반드시 이길 도리를 대강 말하면 다섯이 있다. 첫째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침이요, 둘째는 순한 쪽으로 거스른 쪽을 치는 것이요, 셋째는 다스려진 것으로 어지러운 것을 탐이요, 넷째는 편안한 것으로 수고로운 것을 맞섬이요, 다섯째는 기뻐하는 것으로 원망하는 것을 당함이니, 어찌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백성에게 널리 알리니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이에 무릇 머무는 집과 이바지하는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조서로 여러 군사와 신라·백제·해·거란에게 길을 나누어 치게 하였다.

7사년 — 개모성을 빼앗다

四年,春正月,李世勣軍,至幽州。三月,帝至定州,謂侍臣曰:「遼東本中國之地,隋氏四出師,而不能得。朕今東征,欲爲中國,報子弟之讎,高句麗雪君父之恥耳。且方隅大定,唯此未平,故及朕之未老,用士大夫餘力,以取之。」帝發定州,親佩弓矢,手結雨衣於鞍後。李世勣軍發柳城,多張形勢,若出懷遠鎭者,而潛師北趣甬道,出我不意。夏四月,世勣自通定,濟遼水,至玄菟,我城邑大駭,皆閉門自守。副大摠管江夏王道宗,將兵數千,至新城,折衝都尉曹三良,引十餘騎,直壓城門,城中驚懼,無敢出者。營州都督張儉,將胡兵為前鋒,進度遼水,趨建安城,破我兵,殺數千人。李世勣、江夏王道宗,攻盖牟城,拔之,獲一二萬人、糧十萬石,以其地為盖州。

사년 봄 정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유주에 이르렀다.

삼월에 황제가 정주에 이르러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요동은 본디 중국의 땅인데 수씨가 네 번 군사를 내고도 얻지 못하였다. 짐이 이제 동쪽을 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 자제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임금과 아비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함일 뿐이다. 또 사방이 크게 정해졌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짐이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의 남은 힘을 써서 취하려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떠나며 몸소 활과 화살을 차고 손수 비옷을 안장 뒤에 매었다.

이세적의 군사가 유성을 떠나며 형세를 크게 벌여 회원진으로 나가는 듯이 하고, 몰래 군사를 북쪽 용도로 향하게 하여 고구려가 뜻하지 않은 데로 나왔다.

여름 사월에 세적이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니, 고구려 성읍이 크게 놀라 다 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이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니, 절충도위 조삼량이 십여 기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을 다그쳤으나 성 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는 이가 없었다.

영주도독 장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앞장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나아가 고구려 군사를 깨뜨리고 수천 사람을 죽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빼앗고 일이만 사람과 양식 십만 섬을 얻었으며 그 땅을 개주로 삼았다.

8사년 — 요동성 아래에서 싸우다

張亮帥舟師,自東萊度海,襲卑沙城。城四面懸絶,惟西門可上。程名振引兵夜至,副摠管王大度先登。五月,城陷,男女八千口沒焉。李世勣進至遼東城下。帝至遼澤,泥淖二百餘里,人馬不可通。將作大匠閻立德,布土作橋,軍不留行,度澤東。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救遼東。江夏王道宗,將四千騎逆之,軍中皆以為衆寡懸絶,不若深溝高壘,以待車駕之至。道宗曰:「賊恃衆有輕我心,遠來疲頓,擊之必敗。當淸路以待乘輿,乃更以賊遺君父乎?」都尉馬文擧曰:「不遇勍敵,何以顯壯士?」策馬奔擊,所向皆靡。衆心稍安,旣合戰,行軍摠管張君乂退走,唐兵敗衄。道宗收散卒,登高而望見,我軍陣亂,與驍騎數千衝之。李世勣引兵助之,我軍大敗,死者千餘人。

장량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매달린 듯 끊어지고 오직 서쪽 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이르러 부총관 왕대도가 먼저 올랐다. 오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팔천 사람이 없어졌다.

이세적이 나아가 요동성 아래에 이르렀다. 황제가 요택에 이르니 진창이 이백여 리라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었다. 장작대장 염립덕이 흙을 펴 다리를 만드니 군사가 머무르지 않고 늪 동쪽을 건넜다.

왕이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사만을 내어 요동을 구하게 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사천 기를 거느리고 맞으니, 군중에서 다 무리의 많고 적음이 크게 차이 나므로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여 임금의 수레가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도종이 말하였다. "도둑이 무리 많음을 믿고 우리를 얕보는 마음이 있으며 멀리 와서 지치고 고단하니, 치면 반드시 진다. 마땅히 길을 맑게 하여 임금의 수레를 기다려야지, 도리어 도둑을 임금과 아비에게 남기겠는가."

도위 마문거가 말하였다. "굳센 적을 만나지 않고 어찌 씩씩한 군사를 드러내겠는가."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치니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졌다.

여럿의 마음이 차츰 편안해져 이윽고 맞붙어 싸웠는데, 행군총관 장군예가 물러나 달아나 당나라 군사가 졌다. 도종이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다가 고구려 군사의 진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날랜 기병 수천과 함께 들이쳤다.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어 도우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져서 죽은 이가 일천여 사람이었다.

9사년 — 요동성이 떨어지다

帝度遼水,撤橋以堅士卒之心,軍於馬首山。勞賜江夏王道宗,超拜馬文擧中郞將,斬張君乂。帝自將數百騎,至遼東城下,見士卒負土塡塹,帝分其尤重者,於馬上持之,從官爭負土置城下。李世勣攻遼東城,晝夜不息,旬有二日。帝引精兵會之,圍其城數百里,鼓噪聲振天地。城有朱蒙祠,祠有鎖甲銛矛。妄言前燕世天所降。方圍急,飾美女以婦神,巫言:「朱蒙悅,城必完。」勣列砲車,飛大石過三百步,所當輒潰。吾人積木為樓,結絙網,不能拒,以衝車撞陴屋碎之。時,百濟上金髹鎧,又以玄金爲文鎧,士被以從。帝與勣會,甲光炫日。南風急,帝遣銳卒,登衝竿之末,熱其西南樓。火延燒城中,因揮將士登城。我軍力戰不克,死者萬餘人。見捉勝兵萬餘人,男女四萬口,糧五十萬石,以其城為遼州。

황제가 요수를 건너 다리를 거두어 군사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에 진 쳤다.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내리고 마문거를 뛰어 중랑장으로 삼았으며 장군예를 베었다.

황제가 몸소 수백 기를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군사가 흙을 지고 참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황제가 그 가장 무거운 것을 나누어 말 위에 들었으므로 따르는 벼슬아치가 다투어 흙을 지고 성 아래에 두었다.

이세적이 요동성을 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기를 열이틀이었다. 황제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모여 그 성을 수백 리로 에워싸니 북을 치고 떠드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성에 주몽 사당이 있고 사당에 사슬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앞선 연나라 때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였다. 바야흐로 에움이 급하매 미녀를 꾸며 신의 아내로 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주몽이 기뻐하니 성이 반드시 온전하리라."

세적이 포차를 벌여 큰 돌을 삼백 걸음 넘게 날리니 맞는 것마다 문득 무너졌다. 고구려 사람이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굵은 밧줄로 그물을 얽었으나 막지 못하였고, 충차로 성가퀴의 집을 들이받아 부수었다.

그때 백제가 금칠한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무늬 갑옷을 만들어 군사가 입고 좇았다. 황제가 세적과 만나니 갑옷 빛이 해에 번쩍였다.

남풍이 급하매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어 충간 끝에 올라 그 서남쪽 다락을 태우게 하였다. 불이 번져 성 안을 태우니, 이로 인하여 장수와 군사에게 손짓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여 죽은 이가 일만여 사람이었다. 사로잡힌 굳센 군사가 일만여 사람이요 남녀가 사만 사람이요 양식이 오십만 섬이었으며,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10사년 — 백암성이 항복하다

李世勣進攻白崖城西南,帝臨其西北。城主孫伐音,潛遣腹心請降,臨城投刀鉞爲信,曰:「奴願降,城中有不從者。」帝以唐幟與其使曰:「必降者,宜立之城上。」代音立幟,城中人以為唐兵已登城,皆從之。帝之克遼東也,白巖城請降,旣而中悔。帝怒其反覆,令軍中曰:「得城,當悉以人物,賞戰士。」李世勣見帝將受其降,帥甲士數十人,請曰:「士卒所以爭冒矢石,不顧其死者,貪虜獲耳。今城垂拔,奈何更受其降,孤戰士之心?」帝下馬謝曰:「將軍言是也,然縱兵殺人,而虜其妻孥,朕所不忍。將軍麾下有功者,朕以庫物賞之,庶因將軍贖此一城。」世勣乃退,得城中男女萬餘口,臨水設幄,受其降,仍賜之食,八十已上,賜帛有差。他城之兵在白巖者,悉慰諭給糧仗,任其所之。

이세적이 나아가 백암성 서남쪽을 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임하였다. 성주 손벌음이 몰래 심복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성에 임하여 칼과 도끼를 던져 믿음으로 삼고 말하였다. "종은 항복하기를 바라나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그 사자에게 주며 말하였다. "반드시 항복하려거든 마땅히 이것을 성 위에 세우라." 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 사람이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올랐다 여겨 다 그를 좇았다.

황제가 요동을 이겼을 때 백암성이 항복을 청하였다가 이윽고 뉘우쳤다. 황제가 그 이랬다저랬다 함에 노하여 군중에 영을 내렸다. "성을 얻거든 마땅히 사람과 물건을 다 싸운 군사에게 상으로 주겠다."

이세적이 황제가 그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보고 갑사 수십 사람을 거느리고 청하였다. "군사가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그 죽음을 돌보지 않는 까닭은 사로잡아 얻기를 탐해서일 뿐입니다. 이제 성이 곧 빼앗기려 하는데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 싸우는 군사의 마음을 외롭게 하십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례하며 말하였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하지 못할 바다. 장군의 부하로 공이 있는 이는 짐이 곳간의 물건으로 상 주리니, 부디 장군으로 말미암아 이 한 성을 속죄하고자 한다."

세적이 이에 물러났다. 성 안의 남녀 만여 사람을 얻어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 항복을 받았으며, 이어 먹을 것을 내리고 여든 이상에게는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렸다. 다른 성의 군사로 백암에 있던 이는 다 위로하고 타일러 양식과 병기를 주고 그 가고자 하는 대로 맡겼다.

11사년 — 안시성으로 나아가다

先是,遼東城長史,為部下所殺,其省事奉其妻子,奔白巖。帝憐其有義,賜帛五匹,為長史造靈輿,歸之平壤。以白巖城為巖州,以孫代音為刺史。初,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戍蓋牟城,李世勣盡虜之。其人請從軍自效。帝曰:「汝家皆在加尸,汝為我戰,莫離支必殺汝妻子。得一人之力,而滅一家,吾不忍也。」皆稟賜遣之。以盖牟城為蓋州。帝至安市城,進兵攻之。北部耨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眞,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救安市。帝謂侍臣曰:「今為延壽策有三。引兵直前,連安市城為壘,據高山之險,食城中之粟,縱靺鞨掠吾牛馬,攻之不可猝下,欲歸則泥潦爲阻,坐困吾軍,上策也;拔城中之衆,與之宵遯,中策也;不度智能,來與吾戰,下策也。卿曹觀之,彼必出下策,成擒在吾目中矣。

이보다 앞서 요동성 장사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성사가 그 처자를 받들어 백암으로 달아났다. 황제가 그 의로움 있음을 가엾이 여겨 비단 다섯 필을 내리고 장사를 위하여 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백암성을 암주로 삼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처음에 막리지가 가시성 칠백 사람을 보내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다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이 종군하여 스스로 힘 바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다 가시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자고 한 집안을 없애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한다." 다 양식을 주어 보냈다. 개모성을 개주로 삼았다.

황제가 안시성에 이르러 군사를 밀고 나아가 쳤다.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고구려 군사와 말갈 군사 십오만을 거느리고 안시를 구원하였다.

황제가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이제 연수를 위한 계책에 셋이 있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과 이어 보루를 삼고 높은 산의 험함에 웅거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을 놓아 우리 소와 말을 노략하게 하면, 쳐도 갑자기 떨어뜨릴 수 없고 돌아가려 하면 진창이 막아 앉아서 우리 군사를 곤하게 할 것이니 상책이다. 성 안의 무리를 빼내어 그와 함께 밤에 달아나는 것이 중책이다. 슬기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이 하책이다. 경들은 보라. 저들이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사로잡힘이 내 눈 안에 있다."

12사년 — 고정의의 말을 듣지 않다

」時,對盧高正義年老習事,謂延壽曰:「秦王内芟羣雄,外服戎狄,獨立為帝,此命世之才。今據擧海內之衆而來,不可敵也。為吾計者,莫若頓兵不戰,曠日持久,分遣奇兵,斷其糧道。糧食旣盡,求戰不得,欲歸無路,乃可勝。」延壽不從,引軍直進,去安市城四十里。帝恐其低徊不至,命大將軍阿史那社尒,將突厥千騎以誘之。兵始交而僞走,延壽曰:「易與耳。」競進乘之,至安市城東南八里,依山而陣。帝悉召諸將問計。長孫無忌對曰:「臣聞:'臨敵將戰,必先觀士卒之情。'臣適行經諸營,見士卒聞高句麗至,皆拔刀結旆,喜形於色。此必勝之兵也。陛下未冠,身親行陣。凡出奇制勝,皆上稟聖謀,諸將奉成筭耳。今日之事,乞陛下指蹤。」帝笑曰:「諸公以此見讓,朕當為諸公商度。

그때 대로 고정의가 나이 늙고 일에 익숙하여 연수에게 말하였다. "진왕이 안으로 뭇 영웅을 베고 밖으로 오랑캐를 굴복시켜 홀로 서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에 이름난 재목이오. 이제 온 나라 안의 무리를 들어 왔으니 맞설 수 없소. 우리를 위한 계책은 군사를 머물러 싸우지 않고 날을 오래 끌면서, 기이한 군사를 나누어 보내어 그 양식 길을 끊는 것만 못하오. 양식이 이미 다하면 싸우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려 하여도 길이 없으니, 이에 이길 수 있소."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사십 리 되는 곳에 이르렀다.

황제가 그가 머뭇거려 오지 않을까 두려워 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하여 돌궐 기병 일천을 거느리고 꾀게 하였다. 군사가 처음 맞붙자 거짓으로 달아나니 연수가 말하였다. "더불어 하기 쉽다." 다투어 나아가 그 기세를 타고 안시성 동남쪽 팔 리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다 불러 계책을 물었다. 장손무기가 답하였다. "신이 듣기로 '적에 임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군사의 마음을 보라' 하였습니다. 신이 마침 여러 진영을 지나며 보니, 군사가 고구려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다 칼을 빼고 깃발을 매며 기쁨이 낯에 드러났습니다. 이는 반드시 이길 군사입니다. 폐하께서 관을 쓰기 전부터 몸소 진에 나아가셨고, 무릇 기이함을 내어 이김을 얻는 것은 다 위로 거룩한 꾀를 받아 여러 장수가 이룬 셈을 받들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도 폐하께서 가리켜 주시기를 빕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였다. "여러 공이 이로써 사양하니 짐이 마땅히 여러 공을 위하여 헤아리겠다."

13사년 — 밤에 군사를 나누어 두다

」乃與無忌等,從數百騎,乘高望之,觀山川形勢,可以伏兵及出入之所。我軍與靺鞨合兵為陣,長四十里。帝望之,有懼色。江夏王道宗曰:「高句麗傾國以拒王師,平壤之守必弱。願假臣精卒五千,覆其本根,則數十萬之衆,可不戰而降。」帝不應。遣使紿延壽曰:「我以爾國强臣弑其主,故來問罪,至於交戰,非吾本心。入爾境,芻粟不給,故取爾數城,俟爾國修臣禮,則所失必復矣。」延壽信之,不復設備。帝夜召文武計事,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陣於西嶺,長孫無忌、牛進達,將精兵萬一千,為奇兵,自山北出於狹谷,以衝其後,帝自將步騎四千,挾鼓角,偃旗幟,登山。帝勅諸軍,聞鼓角,齊出奮擊。因命有司,張受降幕於朝堂之側。是夜,流星墜延壽營。

이에 무기 등과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높은 데 올라 바라보며 산천의 형세와 군사를 숨길 만한 곳과 드나들 곳을 살폈다. 고구려 군사가 말갈과 군사를 합쳐 진을 이루니 길이가 사십 리였다. 황제가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 임금의 군사를 막으니 평양의 지킴이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정예 군사 오천을 빌려 주시면 그 뿌리를 뒤엎겠으니, 그러면 수십만의 무리가 싸우지 않고 항복할 것입니다." 황제가 응하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어 연수를 속여 말하였다. "내가 너희 나라의 강한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죄를 물으러 온 것이지, 맞붙어 싸움에 이르는 것은 내 본마음이 아니다. 너희 지경에 들어와 꼴과 곡식을 대지 못하므로 너희 몇 성을 취하였을 뿐이니,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닦기를 기다리면 잃은 것은 반드시 돌려받을 것이다."

연수가 이를 믿고 다시 대비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 신하를 불러 일을 꾀하고, 이세적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일만 오천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 진 치게 하며, 장손무기와 우진달에게 정예 군사 일만 일천을 거느리고 기이한 군사가 되어 산 북쪽에서 좁은 골짜기로 나와 그 뒤를 찌르게 하고, 황제 스스로 보병과 기병 사천을 거느리고 북과 뿔피리를 끼고 깃발을 눕히고 산에 올랐다. 황제가 여러 군사에게 칙명하여 북과 뿔피리 소리를 듣거든 일제히 나와 떨쳐 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맡은 관청에 명하여 조당 곁에 항복 받는 장막을 치게 하였다.

이날 밤에 유성이 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14사년 — 연수와 혜진이 항복하다

旦日,延壽等,獨見李世勣軍小,勒兵欲戰。帝望見無忌軍塵起,命作鼓角,擧旗幟,諸軍鼓噪並進。延壽等懼,欲分兵禦之,而其陣已亂。會,有雷電,龍門人薛仁貴,著奇服,大呼陷陣,所向無敵,我軍披靡。大軍乘之,我軍大潰,死者三二萬餘人。帝望見仁貴,拜遊擊將軍。延壽等將餘衆,依山自固。帝命諸軍圍之,長孫無忌悉撤橋梁,斷其歸路。延壽、惠眞,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請降,入軍門,拜伏請命。帝簡耨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遷之內地,餘皆縱之,使還平壤,收靺鞨三千三百人,悉坑之。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它器械稱是。更名所幸山,曰駐驆山。以高延壽爲鴻臚卿,高惠眞為司農卿。帝之克白巖也,謂李世勣曰:「吾聞,安市城險而兵精,其城主村材勇,莫離支之亂,城守不服,莫離支擊之,不能下,因而與之。

이튿날 연수 등이 홀로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만 보고 군사를 몰아 싸우려 하였다. 황제가 무기의 군사가 일으킨 먼지를 바라보고 북과 뿔피리를 울리고 깃발을 들게 하니, 여러 군사가 북을 치고 떠들며 아울러 나아갔다. 연수 등이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 하였으나 그 진이 이미 어지러웠다.

마침 우레와 번개가 있었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진을 무너뜨리니 향하는 곳마다 맞설 이가 없어 고구려 군사가 쓰러졌다. 큰 군사가 그 기세를 타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져 죽은 이가 이만여 사람이었다. 황제가 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을 주었다.

연수 등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기대어 스스로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에워싸게 하고 장손무기가 다리를 다 거두어 그 돌아갈 길을 끊었다. 연수와 혜진이 그 무리 삼만 육천팔백 사람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여 군문에 들어와 엎드려 절하고 명을 청하였다.

황제가 욕살 이하 벼슬아치 삼천오백 사람을 가려 안쪽 땅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다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 삼천삼백 사람을 거두어 다 구덩이에 묻었다. 말 오만 필과 소 오만 마리와 명광개 일만 벌을 얻었고 다른 병기도 이만하였다. 거둥한 산의 이름을 고쳐 주필산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황제가 백암을 이겼을 때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주 있고 용맹하여, 막리지의 난에 성을 지키고 복종하지 않으매 막리지가 쳤으나 떨어뜨리지 못하고 그대로 그에게 주었다 한다.

15사년 — 안시성을 치다

建安兵弱而糧小,若出其不意,攻之必克。公可先攻建安,建安下,則安市在吾腹中。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對曰:「建安在南,安市在北,吾軍糧皆在遼東。今踰安市,而攻建安,若麗人斷吾糧道,將若之何?不如先攻安市,安市下,則鼓行而取建安耳。」帝曰:「以公為將,安得不用公策,勿誤吾事!」世勣遂攻安市。安市人望見帝旗蓋,輒乘城鼓噪,帝怒。世勣請克城之日,男子皆坑之。安市人聞之,益堅守,攻久不下。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奴旣委身大國,不敢不獻其誠。欲天子早成大功,奴得與妻子相見。安市人顧惜其家,人自為戰,未易猝拔。今,奴以高句麗十餘萬衆,望旗沮潰,國人膽破。烏骨城耨薩老耄,不能堅守,移兵臨之,朝至夕克,其餘當道小城,必望風奔潰。

건안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니 만약 그 뜻하지 않은 데로 나가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을 칠 만하니, 건안이 떨어지면 안시는 내 뱃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 이른바 '성에는 치지 않을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답하였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사의 양식은 다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이 우리 양식 길을 끊으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하니, 안시가 떨어지면 북을 치며 나아가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겠는가. 내 일을 그르치지 말라."

세적이 마침내 안시를 쳤다. 안시 사람이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문득 성에 올라 북 치고 떠드니 황제가 노하였다. 세적이 성을 이기는 날에 사내는 다 구덩이에 묻기를 청하였다. 안시 사람이 이를 듣고 더욱 굳게 지켜 쳐도 오래 떨어지지 않았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였다. "종이 이미 큰 나라에 몸을 맡겼으니 감히 그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일찍 큰 공을 이루시어 종이 처자와 서로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시 사람은 그 집을 아끼고 애석히 여겨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니 갑자기 빼앗기 쉽지 않습니다. 이제 종이 고구려 십여만 무리로 깃발을 바라보고 무너졌으니 나라 사람의 담이 부서졌습니다. 오골성 욕살은 늙어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군사를 옮겨 그에 임하면 아침에 이르러 저녁에 이길 것이요 그 밖에 길에 있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바람만 바라보고 달아나 무너질 것입니다.

16사년 — 흙산이 무너지다

然後收其資糧,鼓行而前,平壤必不守矣。」羣臣亦言:「張亮兵在沙城,召之,信宿可至。乘高句麗忷懼,倂力拔烏骨城,度鸭渌水,直取平壤,在此擧矣。」帝將從之,獨長孫無忌以為天子親征,異於諸將,不可乘危徼幸,今建安、新城之虜衆,猶十萬,若向烏骨,皆躡吾後,不如先破安市,取建安,然後長驅而進,此萬全之策也。帝乃止。諸將急攻安市。帝聞城中雞彘聲,謂世勣曰:「圍城積久,城中烟火日微,今鷄彘甚喧,此必饗士,欲夜出襲我,宜嚴兵備之。」是夜,我軍數百人,縋城而下。帝聞之,自至城下,召兵急擊。我軍死者數十人,餘軍退走。江夏王道宗,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侵逼其城。城中亦增高其城,以拒之。士卒分番,交戰日六七合。衝車、礮石,壞其樓堞,城中隨立木柵,以塞其缺。

그런 뒤에 그 밑천과 양식을 거두어 북을 치며 나아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도 또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으니 부르면 이틀 밤이면 이를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 떠는 틈을 타 힘을 아울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취하는 것이 이 한 번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그 말을 좇으려 하였으나, 홀로 장손무기가 천자의 친정은 여러 장수와 달라 위태로움을 타고 요행을 바랄 수 없으며, 이제 건안과 신성의 오랑캐 무리가 오히려 십만이라 만약 오골로 향하면 다 우리 뒤를 밟을 것이니, 먼저 안시를 깨뜨리고 건안을 취한 뒤에 멀리 몰아 나아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라 하였다. 황제가 이에 그쳤다.

여러 장수가 안시를 급히 쳤다. 황제가 성 안의 닭과 돼지 소리를 듣고 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에운 지 오래되어 성 안의 연기와 불이 날로 적어졌는데, 이제 닭과 돼지가 몹시 시끄러우니 이는 반드시 군사를 먹여 밤에 나와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를 엄히 하여 대비하라."

이날 밤에 고구려 군사 수백 사람이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왔다. 황제가 듣고 몸소 성 아래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로 죽은 이가 수십 사람이요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 달아났다.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감독하여 성 동남쪽 모퉁이에 흙산을 쌓아 그 성을 침노하여 다그쳤다. 성 안에서도 또한 그 성을 높여 막았다. 군사가 차례를 나누어 하루에 예닐곱 번씩 싸웠다. 충차와 포석이 그 다락과 성가퀴를 무너뜨리니 성 안에서 따라 나무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17사년 — 군사를 돌리다

道宗傷是足,帝親為之針。築山,晝夜不息,凡六旬,用功五十萬。山頂去城數丈,下臨城中。道宗使果毅傅伏愛,將兵屯山頂,以備敵。山頹壓城,城崩。會,伏愛私離所部,我軍數百人,從城缺出戰,遂奪據土山,塹而守之。帝怒,斬伏愛以徇,命諸將攻之,三日不能克。道宗徒跣詣旗下,請罪。帝曰:「汝罪當死,但朕以漢武殺王恢,不如秦穆用孟明,且有破盖牟、遼東之功,故特赦汝耳。」帝以遼左早寒,草枯水凍,士馬難久留,且糧食將盡,勅班師。先拔遼、盖二州戶口,度遼,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城中皆屛跡不出。城主登城拜辭,帝嘉其固守,賜縑百疋,以勵事君。命世勣、道宗,將步騎四萬為殿,至遼東度遼水。遼澤泥潦,車馬不通。命無忌,將萬人,翦草塡道,水深處,以車為梁,帝自薪於馬鞘,以助役。

도종이 발을 다치니 황제가 몸소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아 무릇 육십 일에 든 품이 오십만이었다. 산꼭대기가 성에서 몇 길 떨어져 아래로 성 안을 굽어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진 쳐 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산이 무너져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복애가 사사로이 그 부대를 떠났으므로, 고구려 군사 수백 사람이 성 무너진 데로 나와 싸워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웅거하고 참호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복애를 베어 조리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으나 사흘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다만 짐이 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쓴 것만 못하다고 여기고, 또 개모와 요동을 깨뜨린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황제가 요동 왼쪽이 일찍 추워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무르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하려 하므로 칙명으로 군사를 돌렸다. 먼저 요주와 개주 두 주의 호구를 빼내어 요수를 건너게 하고, 이에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뽐내고 돌아가니 성 안이 다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고 하직하니, 황제가 그 굳게 지킴을 아름다이 여겨 비단 백 필을 내려 임금 섬김을 힘쓰게 하였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사만을 거느리고 뒤를 맡게 하여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넜다. 요택이 진창이라 수레와 말이 지나지 못하므로, 무기에게 명하여 일만 사람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았으며, 황제가 스스로 말채찍에 섶을 매어 부역을 도왔다.

18사년 — 위징이 있었더라면

冬十月,帝至蒲溝駐馬,督塡道。諸軍度渤錯水,暴風雪,士卒沾濕多死者。勅燃火於道以待之。凡拔玄菟、橫山、盖牟、磨米、遼東、白岩、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徙遼、盖、岩三州戶口,入中國者七萬人。高延壽自降後,常憤歎,尋以憂死,惠眞竟至長安。新城、建安、駐蹕三大戰,我軍及唐兵馬死亡者,甚衆。帝以不能成功,深悔之。嘆曰:「魏徵若在,不使我有是行也。」

겨울 시월에 황제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머무르고 길 메우기를 감독하였다. 여러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사나운 바람과 눈이 몰아쳐 군사가 젖어 죽은 이가 많았다. 칙명으로 길에 불을 피워 기다리게 하였다.

무릇 현도·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후황 열 성을 빼앗고, 요주·개주·암주 세 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에 들어간 이가 칠만 사람이었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 늘 분해하고 탄식하다가 이윽고 걱정으로 죽고, 혜진은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건안·주필의 세 큰 싸움에서 고구려 군사와 당나라 군사와 말로 죽은 이가 매우 많았다. 황제가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깊이 뉘우쳐 탄식하였다.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 걸음이 있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사론 — 안시성주의 이름이 빠졌다

論曰:唐太宗,聖明不世出之君。除亂比於湯、武,致理幾於成、康。至於用兵之際,出奇無窮,所向無敵。而東征之功,敗於安市,則其城主,可謂豪傑非常者矣。而史失其姓名,與楊子所云:「齊、魯大臣,史失其名。」無異。甚可惜也。

김부식이 논한다.

당나라 태종은 거룩하고 밝아 세상에 흔히 나지 않는 임금이다. 어지러움을 없앰은 탕왕과 무왕에 견주고 다스림에 이른 것은 성왕과 강왕에 가깝다. 군사를 쓰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기이함을 냄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에 맞설 이가 없었다. 그런데 동쪽을 친 공이 안시에서 무너졌으니, 그 성주는 호걸이며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역사에 그 성과 이름이 빠졌으니, 양자가 이른바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빠졌다" 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매우 애석하다.

20오년 — 태종이 다시 치기를 의논하다

五年,春二月,太宗還京師,謂李靖曰:「吾以天下之衆,困於小夷,何也?」靖曰:「此,道宗所解。」帝顧問道宗,具陳:在駐蹕時,乘虛取平壤之言。帝悵然曰:「當時悤悤,吾不憶也。」夏五月,王及莫離支蓋金,遣使謝罪,幷獻二美女。帝還之,謂使者曰:「色者人所重,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我不取也。」東明王母塑像,泣血三日。初,帝將還,帝以弓服賜盖蘇文,受之不謝,而又益驕恣。雖遣使奉表,其言率皆詭誕,又待唐使者倨傲,常窺伺邊隙。屢勅令不攻新羅,而侵凌不止。太宗詔勿受其朝貢,更議討之。

오년 봄 이월에 태종이 서울에 돌아와 이정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하의 무리로 작은 오랑캐에게 곤함을 당하였으니 어째서인가."

이정이 말하였다. "이는 도종이 풀 것입니다."

황제가 도종을 돌아보고 물으니, 주필에 있을 때 빈틈을 타 평양을 취하자던 말을 갖추어 아뢰었다. 황제가 서글퍼하며 말하였다. "그때 바빠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였다."

여름 오월에 왕과 막리지 개금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둘을 바쳤다. 황제가 돌려보내며 사자에게 말하였다. "여색은 사람이 무겁게 여기는 바이나, 그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할 것을 가엾이 여기니 나는 취하지 않겠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처음에 황제가 돌아가려 할 때 활과 옷을 개소문에게 내렸는데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고 또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였다. 비록 사신을 보내어 표를 받들었으나 그 말이 다 거짓되고 허황하였으며, 또 당나라 사자를 거만하게 대하고 늘 변방의 틈을 엿보았다. 여러 번 칙명으로 신라를 치지 말라 하였으나 침노하고 짓밟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조서로 그 조공을 받지 말게 하고 다시 치기를 의논하였다.

21삼국사기 권 제이십일

三國史記卷第二十一

삼국사기 권 제이십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