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왕 하寶藏王下
1육년 — 자주 작은 군사를 보내어 지치게 하다
六年,春二月太宗將復行師,朝議以為:「高句麗依山為城,不可猝拔。前大駕親征,國人不得耕種,所克之城,實收其穀,繼以旱災,民太半乏食。今若數遣偏師,更迭擾其疆場,使彼疲於奔命,釋耒入堡,數年之間,千里蕭條,則人心自離,鴨淥之北,可不戰而取矣。」帝從之,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為靑丘道行軍大摠管,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發兵萬餘人,乘樓舡,自萊州,泛海而入,又以太子詹事李世勣,為遼東道行軍大摠管,右武衛將軍孫貳朗等副之,將兵三千人,因營州都督府兵,自新城道入。兩軍,皆選習水善戰者,配之。夏五月李世勣軍既度遼,歷南蘇等數城,皆背城拒戰,世勣擊破之,焚其羅郭而還。秋七月,牛進達、李海岸入我境,凡百餘戰,攻石城拔之,進至積利城下。我兵萬餘人出戰,李海岸擊克之,我軍死者二千級。八月太宗勅宋州刺史王波利等,發江南十二州工人,造大數百艘,欲以伐我。冬十二月,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入謝罪,帝許之。
육년 봄 이월에 태종이 장차 다시 군사를 내려 하니 조정이 의논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기대어 성을 삼았으므로 갑자기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앞서 임금의 수레가 몸소 치실 때 나라 사람이 밭 갈고 씨 뿌리지 못하였고, 이긴 성에서는 실로 그 곡식을 거두었으며, 이어 가뭄이 들어 백성의 태반이 먹을 것이 모자랍니다. 이제 만약 자주 작은 군사를 보내어 번갈아 그 강토를 어지럽혀 저들이 달려 나오기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에 들게 하면, 몇 해 사이에 천 리가 쓸쓸해져 인심이 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강 북쪽을 싸우지 않고 취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그 말을 좇아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우무위장군 이해안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일만여 사람을 내어 다락배를 타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고, 또 태자첨사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우무위장군 손이랑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삼천 사람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에 힘입어 신성 길로 들어오게 하였다. 두 군사에 다 물에 익숙하고 싸움 잘하는 이를 가려 붙였다.
여름 오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넌 뒤 남소 등 몇 성을 지났는데, 다 성을 등지고 맞서 싸우므로 세적이 쳐서 깨뜨리고 그 나곽을 태우고 돌아갔다.
가을 칠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고구려 지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번 싸워 석성을 쳐서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일만여 사람이 나가 싸우니 이해안이 쳐서 이기고 고구려 군사로 죽은 이가 이천 급이었다.
팔월에 태종이 송주자사 왕파리 등에게 칙명하여 강남 열두 주의 장인을 불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고구려를 치려 하였다.
겨울 십이월에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를 보내어 사죄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2칠년 — 배를 만들어 다시 칠 것을 꾀하다
七年,春正月,遣使入唐朝貢。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為靑丘道行軍大摠管,右衛將軍裴行方副之,將兵三萬餘人,及樓舡戰艦,自萊州,泛海來擊。夏四月,烏胡鎭將古神感,將兵浮海來擊,遇我步騎五千,戰於易山,破之。其夜,我軍萬餘人,襲神感舡,神感伏發,乃敗。六月帝謂我困弊,議以明年發三十萬衆,一擧滅之。或以為大軍東征,須備經歲之糧,非畜乘所能載,宜具是舟艦,為水轉。隋末劒南,獨無寇盜,屬者遼東之役,劒南復不預及。其百姓富庶,宜使之造舟艦。帝從之。秋七月,王都女産子,一身兩頭。太宗遣左領左右府長史強偉於劒南道,伐木造舟艦。大者或長百尺,其廣半之。別遣使行水道,自巫峽,抵江、楊,趣萊州。九月,群獐渡河西走,群狼向西行,三日不絶。
칠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황제가 조서로 우무위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 배행방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삼만여 사람과 다락배와 전함을 거느리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치러 오게 하였다.
여름 사월에 오호진장 고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치러 오다가 고구려 보병과 기병 오천을 만나 역산에서 싸워 깨뜨렸다. 그날 밤에 고구려 군사 일만여 사람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신감이 숨겨 둔 군사를 일으키니 이내 졌다.
유월에 황제가 고구려가 곤하고 지쳤다 여겨, 이듬해에 삼십만 무리를 내어 한 번에 없애기를 의논하였다. 어떤 이가 큰 군사가 동쪽을 치려면 모름지기 한 해 지날 양식을 갖추어야 하는데 짐승과 수레로 실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마땅히 배와 전함을 갖추어 물로 나르게 하자 하였다. 수나라 말에 검남만이 홀로 도둑이 없었고 지난번 요동의 싸움에도 검남은 다시 참여하지 않아 그 백성이 넉넉하니 마땅히 배와 전함을 만들게 하자 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좇았다.
가을 칠월에 왕도의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장사 강위를 검남도에 보내어 나무를 베어 배와 전함을 만들게 하였다. 큰 것은 더러 길이가 백 자요 그 너비가 그 반이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어 물길로 가게 하여 무협에서 강주와 양주에 이르러 내주로 향하게 하였다.
구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가기를 사흘 동안 그치지 않았다.
3팔년 — 박작성을 치다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渡海入鴨淥,至泊灼城南四十里,止營。泊灼城主所夫孫,帥步騎萬餘,拒之,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領步卒及諸軍乘之,我兵潰。行方等進兵圍之,泊灼城因山設險,阻鴨淥水以爲固,攻之不拔。我將高文,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來援,分置兩陣,萬徹分軍以當之,我軍敗潰。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轉糧及器械,貯於烏胡島,將欲大擧。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어 치러 왔다. 바다를 건너 압록에 들어와 박작성 남쪽 사십 리에 이르러 진영을 멈추었다.
박작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일만여를 거느리고 막으니, 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어 보병과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타게 하매 고구려 군사가 무너졌다. 행방 등이 군사를 밀고 나아가 에워쌌는데, 박작성이 산에 기대어 험함을 베풀고 압록수를 막아 굳게 하였으므로 쳐도 빼앗지 못하였다.
고구려 장수 고문이 오골과 안지 여러 성의 군사 삼만여 사람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두니,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맞서매 고구려 군사가 져서 무너졌다.
황제가 또 조서로 내주자사 이도유에게 양식과 기계를 날라 오호도에 쌓아 두고 장차 크게 일으키려 하였다.
4팔년 — 태종이 죽다
八年,夏四月,唐太宗崩。遺詔罷遼東之役。
팔년 여름 사월에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남긴 조서로 요동의 싸움을 그치게 하였다.
5사론 — 방현령이 간한 말
論曰:初,太宗有事於遼東也,諫者非一。又自安市旋軍之後,自以不能成功,深悔之。歎曰:「若使魏徵在,不使我有此行也。」及其將復伐也,司空房玄齡病中上表,諫以為:「《老子》曰:『知足不辱,知止不殆。』陛下威名功德,旣云足矣,拓地開疆,亦可止矣。且陛下每決一重囚,必令三復五奏,進素膳,止音樂者,重人命也。今驅無罪之士卒,委之鋒刃之下,使肝腦塗地,獨不足憫乎?嚮使高句麗違失臣節,誅之可也;侵擾百姓,滅之可也;他日能為中國患,除之可也。今無此三條,而坐煩中國,内爲前代雪恥,外爲新羅報讎,豈非所存者小,所損者大乎?願陛下許高句麗自新,焚凌波之舡,罷應募之衆。自然華夷慶賴,遠肅邇安。」梁公將死之言,諄諄若此,而帝不從,思欲丘墟東域而自快,死而後已。
김부식이 논한다.
처음에 태종이 요동에 일을 벌일 때 간하는 이가 하나가 아니었다. 또 안시에서 군사를 돌린 뒤에는 스스로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여 깊이 뉘우쳐 탄식하였다.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 걸음이 있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치려 할 때 사공 방현령이 병중에 표를 올려 간하였다.
"『노자』에 이르기를 '넉넉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하였습니다. 폐하의 위엄과 이름과 공과 덕이 이미 넉넉하다 이를 만하고, 땅을 넓히고 지경을 여는 것도 또한 그칠 만합니다.
또 폐하께서는 무거운 죄수 하나를 결단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시며, 소찬을 올리고 음악을 그치게 하시니 이는 사람의 목숨을 무겁게 여기심입니다. 이제 죄 없는 군사를 몰아 칼날 아래에 맡겨 간과 뇌를 땅에 바르게 하시니, 어찌 가엾지 않겠습니까.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베는 것이 옳고, 백성을 침노하고 어지럽혔다면 없애는 것이 옳으며, 뒷날 중국의 근심이 될 만하다면 없애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이 세 가지가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는 앞선 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원수를 갚아 주려 하시니, 어찌 두는 바는 작고 잃는 바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워짐을 허락하시고, 물결을 헤치는 배를 태우시며 모집에 응한 무리를 파하소서. 그러면 저절로 중국과 오랑캐가 경사로이 힘입어 먼 곳이 삼가고 가까운 곳이 편안할 것입니다."
양공이 죽으려 할 때의 말이 이처럼 간곡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언덕과 터로 만들어 스스로 시원하게 하기를 생각하여 죽은 뒤에야 그쳤다.
6사론 — 유공권의 기록
史論曰:「好大喜功,勤勒兵於遠者。」非此之謂乎?柳公權小說曰:「駐蹕之役,高句麗與靺鞨合軍,方四十里,太宗望之,有懼色。」又曰:「六軍為高句麗所乘,殆將不振。候者告英公之麾,黑旗被圍,帝大恐。」雖終於自脫,而危懼如彼,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不言者,豈非為國諱之者乎?
사론에 이르기를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여 먼 곳에 군사를 부지런히 몰았다" 하였으니 이것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유공권의 소설에 이르기를 "주필의 싸움에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치니 사방 사십 리라, 태종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여섯 군사가 고구려에게 밀려 거의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척후가 영공의 깃발이 검은 깃발에 에워싸였다고 알리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하였다.
비록 마침내 스스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저와 같았는데, 『신당서』와 『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에 말하지 않은 것은 어찌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7구년 — 보덕화상이 남쪽으로 옮기다
九年,夏六月,盤龍寺普德和尚,以國家奉道,不信佛法,南移完山孤大山。秋七月,霜雹害穀,民饑。
구년 여름 유월에 반룡사의 보덕화상이 나라가 도교를 받들고 불법을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 완산 고대산으로 옮겼다. 가을 칠월에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쳐 백성이 주렸다.
8십일년 — 당나라에 조공하다
十一年,春正月,遣使入唐朝貢。
십일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9십삼년 — 신성에서 크게 지다
十三年,夏四月,人或言:「於馬嶺上,見神人,曰:『汝君臣,奢侈無度,敗亡無日矣。』」冬十月,王遣將安固出師,及靺鞨兵,擊契丹。松漠都督李窟哥禦之,大敗我軍於新城。
십삼년 여름 사월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마령 위에서 신인을 보았는데 이르기를 '너희 임금과 신하가 사치가 도를 넘으니 패망할 날이 멀지 않다' 하였다."
겨울 시월에 왕이 장수 안고를 보내어 군사를 내고 말갈 군사와 함께 거란을 쳤다. 송막도독 이굴가가 막아 신성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10십사년 — 정명진이 귀단수를 건너다
十四年,春正月,先是,我與百濟、靺鞨,侵新羅北境,取三十三城,新羅王金春秋,遣使於唐求援。三月,高宗遣營州都督名振、左右衛中郞將蘇定方,將兵來擊。夏五月,程名振等,渡遼水。吾人見其兵少,開門度貴端水,逆戰。名振等奮擊,大克之,殺獲千餘人,焚其外郭及村落而歸。
십사년 봄 정월에, 이보다 앞서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지경을 침노하여 서른세 성을 빼앗으니, 신라 왕 김춘추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구하였다.
삼월에 고종이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우위중랑장 소정방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치러 오게 하였다.
여름 오월에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넜다. 고구려 사람이 그 군사가 적음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 맞아 싸웠다. 명진 등이 떨쳐 쳐서 크게 이기고 일천여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 바깥 성곽과 마을을 태우고 돌아갔다.
11십오년 — 왕도에 쇠비가 내리다
十五年,夏五月,王都雨鐵。冬十二月,遣使入唐,賀冊皇太子。
십오년 여름 오월에 왕도에 쇠비가 내렸다. 겨울 십이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황태자 책봉을 하례하였다.
12십칠년 — 당나라 군사가 이기지 못하다
十七年,夏六月,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右領軍中郞將薛仁貴,將兵來攻,不能克。
십칠년 여름 유월에 당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치러 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3십팔년 — 범 아홉 마리가 성에 들다
十八年,秋九月,九虎一時入城食人,捕之不獲。冬十一月,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與我將溫沙門,戰於橫山,破之。
십팔년 가을 구월에 범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으므로 잡으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겨울 십일월에 당나라 우령군중랑장 설인귀 등이 고구려 장수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워 깨뜨렸다.
14십구년 — 여러 길로 나누어 치러 오다
十九年,秋七月,平壤河水血色,凡三日。冬十一月,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為浿江道行軍大摠管;左武衛大將軍蘇定方,為遼東道行軍大摠管;左驍衛將軍劉伯英,為平壤道行軍大摠管;蒲州刺史程名振,為鏤方道摠管,將兵分道來擊。
십구년 가을 칠월에 평양의 강물이 핏빛이 되기를 사흘 하였다.
겨울 십일월에 당나라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 정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치러 오게 하였다.
15이십년 — 소정방이 평양성을 에우다
十年,春正月,唐募河南、北、淮南六十七州兵,得四萬四千餘人,詣平壤、鏤方行營,又以鴻臚卿蕭嗣業,為扶餘道行軍摠管,帥回紇等諸部兵,詣平壤。夏四月,以任雅相,為浿江道行軍摠管;契苾何力,為遼東道行軍摠管;蘇定方,為平壤道行軍摠管,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水陸分道並進。帝欲自將大軍,蔚州刺史李君球立言:「高句麗小國,何至傾中國事之有?如高句麗旣滅,必發兵以守。小發則威不振,多發則人不安,是天下疲於轉戍。臣謂:征之未如勿征,滅之未如勿滅。」亦會武后諫,帝乃止。夏五月,王遣將軍惱音信,領靺鞨衆,圍新羅北漢山城,浹旬不解,新羅餉道絶,城中危懼。忽有大星落於我營,又雷雨震擊,惱音信等,疑駭別引退。秋八月,蘇定方破我軍於浿江,奪馬邑山,遂圍平壤城。
이십년 봄 정월에 당나라가 하남·하북·회남 예순일곱 주의 군사를 모아 사만 사천여 사람을 얻어 평양과 누방의 행영에 나아가게 하고, 또 홍려경 소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사월에 임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과 여러 오랑캐 군사와 함께 무릇 서른다섯 군이 물과 뭍으로 길을 나누어 아울러 나아가게 하였다.
황제가 몸소 큰 군사를 거느리려 하니 울주자사 이군구가 나서서 말하였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을 기울여 섬길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없어지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하는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치지 못하고 많이 내면 사람이 편치 못하니, 이는 천하가 수자리 옮기기에 지치는 것입니다. 신은 이르기를, 치는 것이 치지 않는 것만 못하고 없애는 것이 없애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합니다." 또한 마침 무후가 간하므로 황제가 이내 그쳤다.
여름 오월에 왕이 장군 뇌음신을 보내어 말갈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 북한산성을 에워싸 열흘이 되도록 풀지 않으니, 신라의 군량 길이 끊겨 성 안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문득 큰 별이 고구려 진영에 떨어지고 또 우레와 비가 쳐 뇌음신 등이 의심하고 놀라 따로 이끌고 물러났다.
가을 팔월에 소정방이 패강에서 고구려 군사를 깨뜨리고 마읍산을 빼앗아 마침내 평양성을 에워쌌다.
16이십년 — 계필하력이 얼음을 타고 건너다
九月,蓋蘇文遣其子男生,以精兵數萬,守鴨淥,諸軍不得渡。契苾何力至,値氷大合,何力引衆乘氷渡水,鼓噪而進,我軍潰奔。何力追數十里,殺三萬人。餘衆悉降,男生僅以身免。會,有詔班師,乃還。
구월에 개소문이 그 아들 남생을 보내어 정예 군사 수만으로 압록을 지키게 하니 여러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계필하력이 이르매 마침 얼음이 크게 얼어붙었으므로, 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떠들며 나아가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삼만 사람을 죽였다. 남은 무리가 다 항복하고 남생이 겨우 몸만 벗어났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있어 이내 돌아갔다.
17이십일년 — 방효태가 사수에서 죽다
二十一年,春正月,唐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龐孝泰,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擧軍沒,與其子十三人,皆戰死。蘇定方圍平壤,會大雪,解而退。凡前後之行,皆無大功而退。
이십일년 봄 정월에 당나라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가에서 싸워 온 군사가 없어지고, 그 아들 열세 사람과 함께 다 싸우다 죽었다.
소정방이 평양을 에웠으나 마침 큰 눈이 내려 에움을 풀고 물러났다. 무릇 앞뒤의 걸음이 다 큰 공 없이 물러났다.
18이십오년 — 남생 형제가 갈라지다
二十五年,王遣太子福男入唐,侍祠泰山。蓋蘇文死,長子男生代為莫離支。初,知國政,出巡諸城,使其弟男建、男産,留知後事。或謂二弟曰:「男生惡二弟之逼,意欲除之,不如先為計。」二弟初未之信。又有告男生者,曰:「二弟恐兄還奪其權,欲拒兄不納。」男生潛遣所親,往平壤伺之。二弟收掩得之,乃以王命召男生,男生不敢歸。男建自為莫離支,發兵討之。男生走據國內城,使其子獻誠,詣唐求哀。六月,高宗命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帥兵應接之,男生脫身奔唐。秋八月,王以男建為莫離支,兼知內外兵馬事。九月,帝詔男生,授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封玄菟郡公。冬十二月,高宗以李勣,為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以司列少常伯安陸、郝處俊副之。龐同善、契苾何力,並爲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其水陸諸軍摠管,并轉糧使竇義、獨孤卿雲、郭待封等,並受勣處分。河北諸州租賦,悉詣遼東,給軍用。
이십오년에 왕이 태자 복남을 당나라에 보내어 태산의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에 나라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돌아보러 나가면서 그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하여금 남아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이가 두 아우에게 말하였다. "남생이 두 아우가 다그침을 미워하여 없애려는 뜻이 있으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남생에게 알리는 이가 있어 말하였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와 그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 형을 막고 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남생이 몰래 가까운 이를 보내어 평양에 가서 엿보게 하였다. 두 아우가 거두어 덮쳐 잡고 이에 왕의 명이라 하여 남생을 부르니 남생이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쳤다. 남생이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고 그 아들 헌성을 시켜 당나라에 나아가 슬픔을 아뢰게 하였다.
유월에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이어 주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나라로 달아났다.
가을 팔월에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고 안팎의 병마 일을 아울러 맡게 하였다.
구월에 황제가 조서로 남생에게 특진 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겨울 십이월에 고종이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사열소상백 안륙과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았다. 방동선과 계필하력을 아울러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았다. 그 물과 뭍의 여러 군 총관과 아울러 양식 나르는 사신 두의적·독고경운·곽대봉 등이 다 이적의 처분을 받게 하였다. 하북 여러 주의 조세를 다 요동으로 보내어 군용으로 대게 하였다.
협주 1
《新唐書》云男福。
왕이 태자 복남(福男)을 보냈다 한 것은 『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 하였다.
19이십육년 — 이적이 신성을 빼앗다
二十六年,秋九月,李勣拔新城,使契苾何力守之。勣初渡遼,謂諸將曰:「新城,高句麗西邊要害,不先得之,餘城未易取也。」遂攻之。城人師夫仇等,縛城主,開門降。勣引兵進擊,一十六城皆下。龐同善、高侃尚在新城,泉男建遣兵襲其營,左武衛將軍薛仁貴,擊破之。侃進至金山,與我軍戰敗。我軍乘勝逐北,薛仁貴引兵橫擊之,殺我軍五萬餘人,拔南蘇、木氐、蒼嵒三城,與泉男生軍合。郭待封以水軍,自別道,趣平壤。勣遣別將馮師本,載糧仗以資之,師本舡破失期,待封軍中飢窘。欲作書與勣,恐為他所得,知其虛實,乃作離合詩,以與勣。勣怒曰:「軍事方急,何以詩為?必斬之。」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為釋其義,勣乃更遣糧仗赴之。萬頃作檄文曰:「不知守鴨淥之險?」泉男建報曰:「謹聞命矣。」即移兵據鴨淥津,唐兵不得度。高宗聞之,流萬頃於嶺南。郝處俊在安市城下,未及成列,我軍三萬掩至,軍中大駭。郝處俊據胡床,方食乾糒,簡精銳,擊敗之。
이십육년 가을 구월에 이적이 신성을 빼앗아 계필하력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적이 처음 요수를 건널 때 여러 장수에게 말하였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해처이니 먼저 얻지 못하면 나머지 성도 취하기 쉽지 않다." 마침내 쳤다. 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이적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치니 열여섯 성이 다 떨어졌다.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천남건이 군사를 보내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쳐서 깨뜨렸다. 고간이 나아가 금산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싸워 졌다. 고구려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고 달아나는 이를 뒤쫓으니,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옆에서 쳐서 고구려 군사 오만여 사람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 세 성을 빼앗아 천남생의 군사와 합쳤다.
곽대봉이 수군으로 딴 길에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적이 별장 풍사본을 보내어 양식과 병기를 실어 대게 하였는데, 사본의 배가 부서져 기일을 어기니 대봉의 군중이 주리고 군색해졌다. 이적에게 글을 쓰려 하였으나 남이 얻어 그 허와 실을 알까 두려워, 이에 이합시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이적이 노하여 말하였다. "군사 일이 바야흐로 급한데 어찌 시를 짓는가. 반드시 베겠다." 행군관기 통사사인 원만경이 그 뜻을 풀어 주니 이적이 이에 다시 양식과 병기를 보내 주었다.
만경이 격문을 지어 말하였다. "압록의 험함을 지킬 줄을 모르는가." 천남건이 답하였다. "삼가 명을 들었다." 곧 군사를 옮겨 압록 나루에 웅거하니 당나라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만경을 영남으로 귀양 보냈다.
학처준이 안시성 아래에 있었는데 미처 대오를 이루기 전에 고구려 군사 삼만이 몰래 이르니 군중이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걸상에 걸터앉아 바야흐로 마른밥을 먹다가 정예를 가려 쳐서 깨뜨렸다.
20이십칠년 — 부여성이 떨어지다
二十七年,春正月,以右相劉仁軌,為遼東道副大摠管,郝處俊、金仁問副之。二月,李勣等,拔我扶餘城。薛仁貴旣破我軍於金山,乘勝,將三千人,將攻扶餘城,諸將以其兵少,止之。仁貴曰:「兵不必多,顧用之何如耳。」遂為前鋒以進,與我軍戰,勝之,殺獲我軍,遂拔扶餘城,扶餘州中四十餘城,皆請服。侍御史賈言忠奉使,自遼東還。帝問:「軍中云何?」對曰:「必克。昔,先帝問罪,所以不得志者,虜未有釁也。諺曰:『軍無媒,中道回。』今男生兄弟鬩狠為我嚮導,虜之情僞,我盡知之,將忠士力,臣故曰必克。且高句麗《秘記》曰:『不及九百年,當有八十大將,滅之。』高氏自漢有國,今九百年,勣年八十矣。虜仍荐饑,人相掠賣,地震裂,狼狐入城,穴於門,人心危駭,是行不再擧矣。
이십칠년 봄 정월에 우상 유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과 김인문을 부장으로 삼았다.
이월에 이적 등이 고구려 부여성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이미 금산에서 고구려 군사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고 삼천 사람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치려 하니, 여러 장수가 그 군사 적음을 들어 말렸다. 인귀가 말하였다. "군사는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쓰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을 뿐이다." 마침내 앞장이 되어 나아가 고구려 군사와 싸워 이기고 고구려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부여성을 빼앗으니 부여주 안의 사십여 성이 다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시어사 가언충이 사신을 받들고 요동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물었다. "군중이 어떠하냐."
답하였다. "반드시 이깁니다. 옛날 앞선 황제께서 죄를 물으실 때 뜻을 얻지 못하신 까닭은 오랑캐에게 아직 틈이 없어서였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군사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이제 남생 형제가 서로 다투어 우리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오랑캐의 참과 거짓을 우리가 다 알고, 장수는 충성스럽고 군사는 힘쓰니 신이 그러므로 반드시 이긴다 하는 것입니다.
또 고구려의 『비기』에 이르기를 '구백 년에 미치지 못하여 마땅히 여든 살 대장이 있어 없애리라' 하였습니다.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져 이제 구백 년이요 이적의 나이가 여든입니다. 오랑캐가 거듭 흉년이 들어 사람이 서로 노략하여 팔고, 땅이 흔들려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와 문에 굴을 파니 인심이 위태롭고 놀랐습니다. 이 걸음에 두 번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21이십칠년 — 평양이 떨어지다
」泉男建復遣兵五萬人,救扶餘城,與李勣等,遇於薛賀水,合戰敗,死者三萬餘人。勣進攻大行城。夏四月,彗星見於畢、昴之間。唐許敬宗曰:「彗見東北,高句麗將滅之兆也。」秋九月,李勣拔平壤。勣旣克大行城,諸軍出他道者,皆與勣會,進至鴨淥柵。我軍拒戰,勣等敗之,追奔二百餘里,拔辱夷城,諸城遁逃及降者,相繼。契苾何力先引兵,至平壤城下,勣軍繼之,圍平壤月餘。王藏遣泉男産,帥首領九十八人,持白幡,詣勣降,勣以禮接之。泉男建猶閉門拒守,頻遣兵出戰,皆敗。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密遣人詣勣,請為內應。後五日,信誠開門,勣縱兵登城,鼓噪焚城。男建自刺不死。執王及男建等。冬十月,李勣將還,高宗命:先以王等獻于昭陵,具軍容,奏凱歌,入京師,獻于大廟。
천남건이 다시 군사 오만 사람을 보내어 부여성을 구하게 하였는데, 이적 등과 설하수에서 만나 맞붙어 싸워 져서 죽은 이가 삼만여 사람이었다. 이적이 나아가 대행성을 쳤다.
여름 사월에 살별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이 말하였다. "살별이 동북쪽에 나타났으니 고구려가 장차 없어질 조짐이다."
가을 구월에 이적이 평양을 빼앗았다. 이적이 이미 대행성을 이기매, 여러 군사로 딴 길로 나갔던 이들이 다 이적과 만나 나아가 압록책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적 등이 깨뜨리고 이백여 리를 뒤쫓아 욕이성을 빼앗으니, 여러 성이 달아나거나 항복하는 것이 서로 이어졌다.
계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에 이르고 이적의 군사가 뒤를 이어, 평양을 에운 지 한 달 남짓이었다. 왕 장이 천남산을 보내어 우두머리 아흔여덟 사람을 거느리고 흰 깃발을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 맞았다.
천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막아 지키며 자주 군사를 내어 싸웠으나 다 졌다. 남건이 군사 일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다. 신성 스님이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몰래 사람을 이적에게 보내어 안에서 응하기를 청하였다. 닷새 뒤에 신성 스님이 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오르게 하여 북 치고 떠들며 성을 태웠다. 남건이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왕과 남건 등을 잡았다.
겨울 시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하매 고종이 명하기를, 먼저 왕 등을 소릉에 바치고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아뢰며 서울에 들어와 태묘에 바치라 하였다.
22이십칠년 — 안동도호부를 두다
十二月,帝受俘于含元殿。以王政非己出,赦以為司平太常伯員外同正;以泉男産為司宰少卿;僧信誠為銀靑光祿大夫;泉男生為右衛大將軍。李勣已下,封賞有差,泉男建流黔州。分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萬餘戶,為九都督府,四十二州,百縣,置安東都護府於平壤,以統之。擢我將帥有功者,為都督、刺史、縣令,與華人叅理。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檢校安東都護,摠兵二萬人,以鎭撫之。是高宗摠章元年戊辰歲也。
십이월에 황제가 함원전에서 사로잡은 이들을 받았다. 왕이 정사가 제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여 용서하고 사평태상백 원외동정으로 삼았다. 천남산을 사재소경으로, 승려 신성을 은청광록대부로, 천남생을 우위대장군으로 삼았다. 이적 이하에게 봉하고 상 주기를 차등 있게 하였으며 천남건은 검주로 귀양 보냈다.
다섯 부와 일백일흔여섯 성과 육십구만여 집을 나누어 아홉 도독부와 마흔두 주와 일백 현으로 삼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두어 거느리게 하였다. 고구려 장수로 공이 있는 이를 뽑아 도독과 자사와 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과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이만 사람을 거느리고 지켜 어루만지게 하였다. 이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다.
23이년 — 안승이 신라에 투항하다
二年,己巳二月,王之庶子安勝,率四千餘戶,投新羅。夏四月,高宗移二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이년 기사 이월에 왕의 서자 안승이 사천여 집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사월에 고종이 이만 팔천삼백 집을 강회 남쪽과 산남과 경서 여러 주의 빈 땅으로 옮겼다.
24함형 원년 — 검모잠이 나라를 일으키려 하다
至咸亨元年庚午歲,夏四月,劒牟岑欲興復國家,叛唐,立王外孫安舜為主。唐高宗遣大將軍高侃,為東州道行軍摠管,發兵討之。安舜殺劒牟岑,奔新羅。
함형 원년 경오년 여름 사월에 이르러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당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치게 하였다.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협주 1
《羅紀》作勝。
왕의 외손 안순(安舜)은 「신라본기」에는 안승(安勝)으로 되어 있다.
25이년 — 고간이 안시성에서 깨뜨리다
二年辛未歲,秋七月,高侃破餘衆於安市城。
이년 신미년 가을 칠월에 고간이 남은 무리를 안시성에서 깨뜨렸다.
26삼년 — 백수산에서 싸우다
三年壬申歲,十二月,高侃與我餘衆,戰于白水山,破之。新羅遣兵救我,高侃擊克之,虜獲二千人。
삼년 임신년 십이월에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에서 싸워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를 구하니 고간이 쳐서 이기고 이천 사람을 사로잡았다.
27사년 — 호로하에서 지다
四年癸酉歲,夏閏五月,燕山道摠管大將軍李謹行,破我人於瓠瀘河,俘獲數千人。餘衆皆奔新羅。
사년 계유년 여름 윤오월에 연산도총관 대장군 이근행이 고구려 사람을 호로하에서 깨뜨리고 수천 사람을 사로잡았다. 남은 무리가 다 신라로 달아났다.
28의봉 이년 — 요동주도독으로 삼다
儀鳳二年丁丑歲,春二月,以降王為遼東州都督,封朝鮮王,遣歸遼東,安輯餘衆。東人先在諸州者,皆遣與王俱歸,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王至遼東,謀叛,潛與靺鞨通。
의봉 이년 정축년 봄 이월에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 남은 무리를 편안히 모으게 하였다. 동쪽 사람으로 앞서 여러 주에 있던 이들도 다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고, 이어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거느리게 하였다. 왕이 요동에 이르러 배반을 꾀하고 몰래 말갈과 통하였다.
29개요 원년 — 고씨의 임금이 끊어지다
開耀元年召還卬州,以永淳初死。贈衛尉卿,詔送至京師,頡利墓左,樹碑其阡,散徙其人於河南、隴右諸州。貧者留安東城傍舊城,往往沒於新羅,餘衆散入靺鞨及突厥。高氏君長遂絶。
개요 원년에 공주로 불러들여 영순 초에 죽었다.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로 서울에 보내어 힐리의 무덤 왼쪽에 묻고 그 길에 비를 세웠다.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의 여러 주로 흩어 옮겼다. 가난한 이는 안동성 곁 옛 성에 남았는데 이따금 신라에 들어가고, 남은 무리는 흩어져 말갈과 돌궐에 들어갔다. 고씨의 임금이 마침내 끊어졌다.
30수공 이년 — 덕무가 안동도독이 되다
垂拱二年,以降王孫寶元,為朝鮮郡王,至聖曆初,進左鷹揚衛大將軍,更封忠誠國王,使統安東舊部,不行。明年,以降王子德武,為安東都督,後稍自國,至元和十三年,遣使入唐,獻樂工。
수공 이년에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고, 성력 초에 이르러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리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부를 거느리게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뒤에 차츰 스스로 나라를 이루어 원화 십삼년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악공을 바쳤다.
31사론 —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論曰:玄菟、樂浪,本朝鮮之地,箕子所封。箕子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設禁八條。是以其民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飮食以籩豆,此仁賢之化也。而又天性柔順,異於三方。故孔子悼道不行,欲浮桴於海以居之,有以也夫。然而《易》之「爻,二多譽,四多懼,近也。」高句麗自秦、漢之後,介在中國東北隅,其北隣,皆天子有司,亂世則英雄特起,僭竊名位者也,可謂居多懼之地,而無謙巽之意,侵其封場以讐之,入其郡縣以居之。是故兵連禍結,略無寧歲。及其東遷,値隋、唐之一統,而猶拒詔命以不順,囚王人於土室。其頑然不畏如此,故屢致問罪之師。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而終於王降,國滅而後止。然觀始末,當其上下和,衆庶睦,雖大國,不能以取之,及其不義於國,不仁於民,以興衆怨,則崩潰而不自振。
김부식이 논한다.
현도와 낙랑은 본디 조선의 땅이니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을 예의와 밭 갈기와 누에치기와 길쌈으로 가르치고 금하는 여덟 조목을 베풀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훔치지 않아 문호를 닫는 일이 없고, 부인이 곧고 믿음직하여 음란하지 않으며, 마시고 먹기를 변두로 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의 교화다. 또 천성이 부드럽고 순하여 세 방면과 달랐다. 그러므로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뗏목을 바다에 띄워 거기 살고자 하였으니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효는 둘째가 기림이 많고 넷째가 두려움이 많으니 가깝기 때문이다" 하였다. 고구려는 진나라와 한나라 뒤로 중국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 그 북쪽 이웃이 다 천자의 벼슬아치요 어지러운 세상이면 영웅이 특히 일어나 이름과 자리를 참람히 훔치는 자들이었으니, 두려움 많은 땅에 살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겸손하고 순한 뜻이 없어 그 봉토를 침노하여 원수로 삼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런 까닭에 싸움이 이어지고 화가 맺혀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그 동쪽으로 옮김에 이르러 수나라와 당나라의 하나로 아우름을 만났는데도, 오히려 조명을 막아 따르지 않고 임금의 사람을 흙집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여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여러 번 죄를 묻는 군사를 불렀다. 비록 때로 기이한 꾀를 베풀어 큰 군사를 빠뜨린 일이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없어진 뒤에야 그쳤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그 위아래가 화합하고 뭇사람이 화목할 때에는 비록 큰 나라라도 취할 수 없었고, 나라에 의롭지 못하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뭇 원망을 일으키매 무너져 스스로 떨치지 못하였다.
32사론 — 억지로 술을 마시며 취함을 싫어하랴
故孟子曰:「天時、地利,不如人和。」《左氏》曰:「國之興也,以福;其亡也,以禍。國之興也,視民如傷,是其福也;其亡也,以民為土芥,是其禍也。」有味哉,斯言也!夫然則凡有國家者,縱暴吏之驅迫,强宗之聚斂,以失人心,雖欲理而不亂,存而不亡,又何異强酒而惡醉者乎?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하였다. 『좌씨전』에 이르기를 "나라가 일어남은 복으로써요 그 망함은 화로써다. 나라가 일어날 때는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 하니 이것이 그 복이요, 그 망할 때는 백성을 흙과 지푸라기로 여기니 이것이 그 화다" 하였다. 맛이 있구나, 이 말이여.
무릇 그렇다면 나라를 가진 이가 사나운 벼슬아치의 몰아 다그침과 강한 겨레의 거두어들임을 놓아두어 인심을 잃고서, 비록 다스려져 어지럽지 않기를 바라고 남아 망하지 않기를 바란들, 또한 억지로 술을 마시면서 취함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33삼국사기 권 제이십이
三國史記卷第二十二
삼국사기 권 제이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