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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義慈王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25 · 한자 3,769자 · 낭독 15.1분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의자왕이 서고 대야성을 빼앗다

義慈王,武王之元子,雄勇有膽決。武王在位三十三年,立為太子。事親以孝,與兄弟以友,時號海東曾子。武王薨,太子嗣位。太宗遣祠部郞中鄭文表,冊命為柱國帶方郡王公百濟王。秋八月,遣使入唐,表謝,兼獻方物。二年,春正月,遣使入唐朝貢。二月,王巡撫州郡。慮囚,除死罪皆原之。秋七月,王親帥兵,侵新羅,下獼猴等四十餘城。八月,遣將軍允忠,領兵一萬,攻新羅大耶城。城主品釋與妻子出降。允忠盡殺之,斬其首,傳之王都,生獲男女一千餘人,分居國西州縣,留兵守其城。王賞允忠功,馬二十匹、穀一千石。

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씩씩하고 용맹하며 담력과 결단이 있었다. 무왕 재위 삼십삼년에 세워 태자가 되었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로 지내므로 그때 해동의 증자라 불렸다. 무왕이 죽으매 태자가 자리를 이었다. 태종이 사부낭중 정문표를 보내어 책명하여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삼았다.

가을 팔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표로 사례하고 아울러 그 지방 산물을 바쳤다.

이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이월에 왕이 주와 군을 돌아보며 어루만지고 죄수를 살펴 죽을죄를 뺀 나머지는 다 놓아주었다.

가을 칠월에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노하여 미후 등 사십여 성을 떨어뜨렸다.

팔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어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치게 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니 윤충이 다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에 보냈으며, 남녀 일천여 사람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을 상 주어 말 스무 필과 곡식 일천 섬을 내렸다.

2삼년 — 당항성을 치려다 그치다

三年,春正月,遣使入唐朝貢。冬十一月,王與高句麗和親,謀欲取新羅黨項城,以塞入朝之路。,遂發兵攻之。羅王德曼遣使,請救於唐,王聞之罷兵。

삼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겨울 십일월에 왕이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조회하러 가는 길을 막기를 꾀하여 마침내 군사를 내어 쳤다. 신라 왕 덕만이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왕이 이를 듣고 군사를 파하였다.

3사년 — 융을 태자로 삼다

四年,春正月,遣使入唐朝貢。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告諭兩國,王奉表陳謝。立王子隆為太子。大赦。秋九月,新羅將軍庾信領兵來侵,取七城。

사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어 두 나라에 알려 타이르니 왕이 표를 받들어 사례하였다. 왕자 융을 세워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구월에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노하러 와서 일곱 성을 빼앗았다.

4오년 — 신라 일곱 성을 빼앗다

五年,夏五月,王聞太宗親征高句麗,徵兵新羅。乘其間,襲取新羅七城。新羅遣將軍庾信,來侵。

오년 여름 오월에 왕이 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치며 신라에서 군사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 신라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가 장군 유신을 보내어 침노하러 왔다.

5칠년 — 의직이 무산성 아래에서 지다

七年,冬十月,將軍義直,帥步騎三千,進屯新羅茂山城下,分兵攻甘勿、桐岑二城,新羅將軍庾信,親勵士卒,決死而戰,大破之。義直匹馬而還。

칠년 겨울 시월에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삼천을 거느리고 신라 무산성 아래에 나아가 진 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과 동잠성 두 성을 쳤다. 신라 장군 유신이 몸소 군사를 격려하여 죽음을 결단하고 싸워 크게 깨뜨렸다. 의직이 홀로 말을 타고 돌아왔다.

6팔년 — 옥문곡에서 지다

八年,春三月,義直襲取新羅西鄙腰車等一十餘城。夏四月,進軍於玉門谷,新羅將軍庾信逆之,再戰大敗之。

팔년 봄 삼월에 의직이 신라 서쪽 변두리 요차 등 열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사월에 군사를 옥문곡으로 밀고 나아가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 번 싸워 크게 깨뜨렸다.

7구년 — 도살성 아래에서 지다

九年,秋八月,王遣左將殷相,帥精兵七千,攻取新羅石吐等七城,新羅將庾信、陳春、天存、竹旨等,逆擊之,不利,收散卒,屯於道薩城下,再戰,我軍敗北。冬十一月,雷。無氷。

구년 가을 팔월에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어 정예 군사 칠천을 거느리고 신라 석토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진춘·천존·죽지 등이 맞아 치다가 이롭지 못하여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살성 아래에 진 치고 두 번째 싸우니 백제 군사가 졌다. 겨울 십일월에 우레가 쳤다. 얼음이 얼지 않았다.

8십일년 — 고종이 새서로 타이르다 (앞)

十一年,遣使入唐朝貢。使還,高宗降璽書,諭王曰:「海東三國,開基日久,並列疆界,地實犬牙。近代已來,遂構嫌隙,戰爭交起,略無寧歲。遂令三韓之氓,命懸刀俎,築戈肆憤,朝夕相仍。朕代天理物,載深矜憫。去歲,高句麗、新羅等使,並來入朝,朕命釋玆讎怨,更敦款睦。新羅使金法敏奏言:「高句麗、百濟,脣齒相依,竟擧干戈,侵逼交至,大城重鎭,並爲百濟所倂,疆宇日蹙,威力並謝,乞詔百濟,令歸所侵之城。若不奉詔,卽自興兵打取,但得古地,卽請交和。」朕以其言旣順,不可不許。昔,齊桓列土諸侯,尚存亡國,况朕萬國之主,豈可不恤危藩!王所兼新羅之城,並冝還其夲國,新羅所獲百濟俘虜,亦遣還王。然後,解患釋紛,韜戈偃革,百姓獲息肩之願,三蕃無戰爭之勞。

십일년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이 새서를 내려 왕에게 타일렀다.

"바다 동쪽 세 나라가 터를 연 지 오래되어 강토가 나란히 벌여 있으니 땅이 실로 개의 이빨처럼 맞물렸다. 가까운 대 이래로 마침내 미움과 틈을 얽어 싸움이 번갈아 일어나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마침내 삼한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에 매달게 하고 창을 쌓아 분함을 부리기를 아침저녁으로 서로 잇게 하였다. 짐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매 가엾이 여김이 깊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아울러 와서 조회하매, 짐이 이 원수와 원한을 풀고 다시 정성과 화목을 도타이 하라고 명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이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침노하여 다그침이 번갈아 이르러, 큰 성과 요긴한 진이 모두 백제에게 넘어갔습니다. 강토가 날로 오그라들고 위엄과 힘이 아울러 스러졌으니,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노한 성을 돌려주게 하시기를 빕니다.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쳐서 취하되, 다만 옛 땅만 얻으면 곧 서로 화친하기를 청하겠습니다.'

짐이 그 말이 이미 순하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나라 환공은 여러 제후를 벌여 놓은 이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있게 하였거늘,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이니 어찌 위태로운 울타리를 돌보지 않겠는가.

왕이 아울러 가진 신라의 성은 아울러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주고, 신라가 얻은 백제의 사로잡힌 이들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게 하겠다. 그런 뒤에야 근심을 풀고 어지러움을 놓아 무기를 감추고 갑옷을 눕혀, 백성이 어깨를 쉬는 바람을 얻고 세 울타리가 싸움의 수고로움이 없게 될 것이다.

9십일년 — 고종이 새서로 타이르다 (뒤)

比夫流血邊亭,積屍疆埸,耕織並廢,士女無聊,豈可同年而語哉?王若不從進止,朕已依法敏所請,任其與王決戰,亦令約束高句麗,不許遠相救恤。高句麗若不承命,卽令契丹諸藩,度遼,深入抄掠。王可深思朕言,自求多福,審圗良策,無貽後悔。」

저 변방 정자에 피를 흘리고 강토에 주검을 쌓으며 밭갈이와 길쌈이 아울러 그쳐 남녀가 즐거움이 없는 것에 견주면, 어찌 나란히 놓고 견줄 것이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그침을 좇지 않는다면, 짐이 이미 법민이 청한 바에 따라 그가 왕과 결전하도록 맡길 것이요, 또한 고구려에 명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고 돌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하겠다. 고구려가 만약 명을 받들지 않으면 곧 거란과 여러 울타리로 하여금 요수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하게 하겠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며, 좋은 계책을 살펴 꾀하여 뒷날의 뉘우침을 남기지 말라."

10십이년 — 당나라에 조공하다

十二年,春正月,遣使入唐朝貢。

십이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11십삼년 — 왜국과 좋게 지내다

十三年,春,大旱。民饑。秋八月,王與倭國通好。

십삼년 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주렸다. 가을 팔월에 왕이 왜국과 통하여 좋게 지냈다.

12십오년 — 성충이 옥에서 죽으며 글을 올리다

十五年,春二月,修太子宮,極侈麗。立望海亭於王宮南。夏五月,騂馬入北岳烏含寺,鳴匝佛宇,數日死。。秋七月,重修馬川城。八月,王與高句麗、靺鞨,攻破新羅三十餘城。新羅王金春秋,遣使朝唐,表稱:「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沒三十餘城。」十六年,春三月,王與宮人,淫荒耽樂,飲酒不止。佐平成忠極諫,王怒,囚之獄中,由是,無敢言者。成忠瘐死不食。臨終上書曰:「忠臣死不忘君,願一言而死。臣常觀時察變,必有兵革之事。凡用兵,必審擇其地,處上流以延敵,然後可以保全。若異國兵來,陸路不使過沈峴,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擧其險隘以禦之,然後可也。」王不省焉。

십오년 봄 이월에 태자궁을 손질하니 사치하고 고움이 지극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

여름 오월에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와 불당을 돌며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

가을 칠월에 마천성을 고쳐 지었다. 팔월에 왕이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서른여 성을 쳐서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가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회하고 표로 아뢰었다. "백제가 고구려·말갈과 함께 우리 북쪽 경계를 침노하여 서른여 성을 없앴습니다."

십육년 봄 삼월에 왕이 궁인과 함께 음란하고 거칠게 즐기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이 지극히 간하니 왕이 노하여 옥 안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성충이 여위어 먹지 않고 죽으며,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바라건대 한마디 하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피니 반드시 싸움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반드시 그 땅을 살펴 가려, 상류에 자리 잡아 적을 맞은 뒤에야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뭍길로는 침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언덕에 들지 못하게 하여, 그 험하고 좁은 데에 기대어 막은 뒤에야 옳을 것입니다."

왕이 살피지 않았다.

협주 3

或云淨忠。

좌평 성충(成忠)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

一云炭峴

침현(沈峴)은 탄현(炭峴)이라고도 한다.

一云白江

기벌포(伎伐浦)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한다.

13십칠년·십구년 — 괴이한 일이 잇따르다

十七年,春正月,拜王庶子四十一人為佐平,各賜食邑。夏四月,大旱,赤地。十九年,春二月,衆狐入宮中,一白狐坐上佐平書案。夏四月,太子宮,雌雞與黃雀交。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五月,王都西南泗沘河,大魚出死,長三丈。秋八月,有女屍浮生草津,長十八尺。九月,宮中槐樹鳴,如人哭聲。夜,鬼哭於宮南路。

십칠년 봄 정월에 왕의 서자 마흔한 사람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내렸다. 여름 사월에 크게 가물어 땅이 붉게 되었다.

십구년 봄 이월에 여우 떼가 궁 안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앉았다. 여름 사월에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어 신라 독산성과 동잠성 두 성을 침노하여 쳤다.

오월에 왕도 서남쪽 사비하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었다. 가을 팔월에 여자의 주검이 생초진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열여덟 자였다. 구월에 궁 안의 홰나무가 우는데 사람의 곡소리 같았다. 밤에 궁 남쪽 길에서 귀신이 울었다.

14이십년 — 백제가 망한다는 소리

二十年,春二月,王都井水血色。西海濱,群魚出死,百姓食之,不能盡。泗沘河水,赤如血色。夏四月,蝦蟆數萬,集於樹上。王都市人,無故驚走,如有捕逐者,僵仆而死百餘人,亡失財物,不可數。五月,風雨暴至,震天王、道讓二寺塔,又震白石寺講堂。玄雲如龍,東西相鬪於空中。五月,王興寺衆僧皆見:若有船楫,隨大水,入寺門。有一犬狀如野鹿,自西至泗沘河岸,向王宮吠之,俄而不知所去。王都群犬集於路上,或吠或哭,移時卽散。有一鬼入宮中,大呼:「百濟亡,百濟亡!」卽入地,王怪之,使人掘地,深三尺許,有一龜。其背有文曰:「百濟同月輪,新羅如月新。」王問之巫者,曰:「同月輪者滿也,滿則虧。如月新者未滿也,未滿則漸盈。」王怒殺之。

이십년 봄 이월에 왕도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물가에 물고기 떼가 나와 죽으니 백성이 먹어도 다하지 못하였다. 사비하 물이 붉어 핏빛 같았다.

여름 사월에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왕도의 저자 사람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기를 붙잡아 쫓는 이가 있는 것처럼 하다가, 넘어져 죽은 이가 백여 사람이요 잃은 재물은 헤아릴 수 없었다.

오월에 바람과 비가 사납게 이르러 천왕사와 도양사 두 절의 탑에 벼락이 치고, 또 백석사 강당에 벼락이 쳤다. 용 같은 검은 구름이 동서로 공중에서 서로 싸웠다.

오월에 왕흥사의 여러 승려가 모두 보니, 배와 노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듯하였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에서 사비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이윽고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왕도의 개 떼가 길 위에 모여 더러는 짖고 더러는 울다가 때가 지나자 곧 흩어졌다.

한 귀신이 궁 안에 들어와 크게 외쳤다.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그러고는 곧 땅에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 자쯤에 거북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글이 있어 이르기를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하였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이지러집니다.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차츰 차오릅니다." 왕이 노하여 죽였다.

15이십년 —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르다

或曰:「同月輪者盛也,如月新者微也。意者國家盛,而新羅寖微者乎。」王喜。高宗詔:左衛大將軍蘇定方,為神丘道行軍大摠管,率左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統兵十三萬,以來征,兼以新羅王金春秋,爲嵎夷道行軍摠管,將其國兵,與之合勢。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至國西德物島,新羅王遣將軍金庾信,領精兵五萬以赴之。王聞之,會群臣,問戰守之宜。佐平義直進曰:「唐兵遠涉溟海,不習水者,在船必困。當其初下陸,士氣未平,急擊之,可以得志。新羅人恃大國之援,故有輕我之心,若見唐人失利,則必疑懼,而不敢銳進。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達率常永等曰:「不然。唐兵遠來,意欲速戰,其鋒不可當也。新羅人前屢見敗於我軍,今望我兵勢,不得不恐。

어떤 이가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성한 것이요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나라는 성하고 신라는 차츰 미약해진다는 것인가 합니다." 왕이 기뻐하였다.

고종이 조서로 좌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을 거느리고 군사 십삼만을 통솔하여 치러 오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그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형세를 합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 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정예 군사 오만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울 것인지 지킬 것인지 마땅함을 물었다.

좌평 의직이 나아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는데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배에서 반드시 지쳤을 것입니다. 그가 처음 뭍에 내려 사기가 아직 고르지 않을 때 급히 치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라 사람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으므로 우리를 얕보는 마음이 있으니, 만약 당나라 사람이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날카롭게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멀리서 와서 뜻이 빨리 싸우고자 하니 그 칼끝을 당할 수 없습니다. 신라 사람은 앞서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진 것을 보았으니, 이제 우리 군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이십년 — 흥수의 말을 쓰지 않다

今日之計,宜塞唐人之路,以待其師老。先使偏師,擊羅軍,折其銳氣,然後,伺其便而合戰,則可得以全軍,而保國矣。」王猶豫,不知所從。時,佐平興首得罪,流竄古馬彌知之縣,遣人問之曰:「事急矣,如之何而可乎?」興首曰:「唐兵旣衆,師律嚴明,況與新羅共謀掎角。若對陣於平原廣野,勝敗未可知也。白江、炭峴,我國之要路也。一夫單槍,萬人莫當,宜簡勇士,往守之。使唐兵不得入白江,羅人未得過炭峴。大王重閉固守,待其資粮盡,士卒疲,然後奮擊之,破之必矣。」於時,大臣等不信曰:「興首久在縲紲之中,怨君而不愛國,其言不可用也。莫若使唐兵入白江,沿流而不得方舟,羅軍升炭峴,由徑而不得幷馬。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사람의 길을 막고 그 군사가 지치기를 기다려, 먼저 한 갈래 군사를 시켜 신라 군사를 쳐서 그 날카로운 기운을 꺾은 뒤에 그 편함을 엿보아 어울려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왕이 머뭇거려 좇을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때 좌평 흥수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에 귀양 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이미 많고 군율이 엄하고 밝은 데다, 하물며 신라와 함께 앞뒤에서 잡아채기를 꾀합니다. 만약 평평한 벌판 넓은 들에서 진을 마주하면 이기고 짐을 알 수 없습니다. 백강과 탄현은 우리 나라의 요긴한 길이라, 한 사람이 홑창으로도 만 사람을 당할 수 있으니, 마땅히 용사를 가려 가서 지키게 하십시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지 못하게 하고 신라 사람으로 하여금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한 뒤, 대왕께서 거듭 닫고 굳게 지키며 그 밑천과 양식이 다하고 군사가 지치기를 기다린 뒤에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그때 대신들이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래 옥에 매인 가운데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쓸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와 물결을 따라가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 좁은 길로 가되 말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협주 2

或云伎伐浦。

백강(白江)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

或云沈峴。

탄현(炭峴)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

17이십년 — 계백이 죽고 성이 에워싸이다

當此之時,縱兵擊之,譬如殺在籠之雞、離網之魚也。」王然之。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遣將軍堦伯,帥死士五千,出黃山,與羅兵戰,四合皆勝之,兵寡力屈,竟敗,堦伯死之。於是,合兵禦熊津口,瀕江屯兵。定方出左涯,乘山而陣。與之戰,我軍大敗。王師乘潮,舳艫銜尾進,鼓而譟。定方將步、騎,直趍其都城,一舍止。我軍悉衆拒之,又敗,死者萬餘人。唐兵乘勝薄城。王知不免,嘆曰:「悔不用成忠之言,以至於此。」遂與太子孝,走北鄙。定方圍其城。王次子泰,自立為王,率衆固守。太子子文思,謂王子隆曰:「王與太子出,而叔擅為王,若唐兵解去,我等安得全?」遂率左右,縋而出而出,民皆從之,泰不能止。定方令士超堞,立唐旗幟,泰窘迫,開門請命。

이때를 당하여 군사를 놓아 치면, 비유하건대 우리 안에 든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그렇게 여겼다. 또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을 보내어 죽음을 무릅쓸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네 번 맞붙어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굽혀 마침내 지고 계백이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쳐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군사를 진 쳤다. 정방이 왼쪽 물가로 나와 산을 타고 진 쳤다. 그와 싸워 백제 군사가 크게 졌다. 당나라 군사가 밀물을 타고 뱃머리와 고물을 잇대어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었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그 도성으로 나아가 삼십 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 백제 군사가 무리를 다하여 막았으나 또 져서 죽은 이가 일만여 사람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고 성에 다가왔다.

왕이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탄식하였다. "성충의 말을 쓰지 않아 이에 이른 것이 뉘우쳐진다." 마침내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두리로 달아났다.

정방이 그 성을 에웠다.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서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자 융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나가셨는데 숙부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나라 군사가 에움을 풀고 가면 우리가 어찌 온전하겠는가." 마침내 좌우를 거느리고 줄을 타고 나가니 백성이 다 따르므로 태가 막지 못하였다.

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를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니, 태가 군색하고 다급하여 문을 열고 명을 청하였다.

18이십년 — 왕이 항복하고 복신이 일어나다

於是,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送京師。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各統州縣。擢渠長,為都督、刺史、縣令以理之。命郞將劉仁願守都城,又以左衛郞將王文度為熊津都督,撫其餘衆。定方以所俘見上,責而宥之。王病死,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許舊臣赴臨。詔葬孫皓、陳叔寶墓側,幷為竪碑。授隆司稼卿。文度濟海卒,以劉仁軌代之。武王從子福信,嘗將兵,乃與浮屠道琛,據周留城叛,迎古王子扶餘豊,嘗質於倭國者,立之為王。西北部皆應,引兵圍仁願於都城。詔起劉仁軌檢校帶方州刺史,將王文度之衆,便道發新羅兵,以救仁願。

이에 왕과 태자 효와 여러 성이 다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와 왕자 태·융·연과 대신과 장수와 군사 여든여덟 사람과 백성 일만 이천팔백일곱 사람을 서울로 보냈다.

나라에 본디 다섯 부와 서른일곱 군과 이백 성과 칠십육만 집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갈라서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 다섯 도독부를 두고 각각 주와 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와 현령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며, 또 좌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남은 무리를 어루만지게 하였다.

정방이 사로잡은 이들을 임금에게 보이니 꾸짖고 용서하였다. 왕이 병들어 죽으매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추증하고 옛 신하가 나아가 조상하기를 허락하였다. 조서로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고 아울러 비를 세우게 하였다. 융에게 사가경을 주었다.

문도가 바다를 건너다 죽으매 유인궤로 대신하게 하였다.

무왕의 조카 복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에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웅거하여 배반하고, 옛 왕자 부여풍으로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이를 맞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서북부가 다 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서 인원을 에웠다. 조서로 유인궤를 일으켜 검교대방주자사로 삼아 왕문도의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일으켜 인원을 구하게 하였다.

19용삭 원년 — 인궤가 웅진강 어귀에서 이기다

仁軌喜曰:「天將富貴此翁矣。」請唐曆及廟諱而行,曰:「吾欲掃平東夷,頒大唐正朔於海表。」仁軌御軍嚴整,轉鬪而前。福信等,立兩柵於熊津江口,以拒之。仁軌與新羅兵合擊之,我軍退走入柵,阻水橋狹,墮溺及戰死者萬餘人。福信等乃釋都城之圍,退保任存城,新羅人以粮盡引還。時,龍朔元年三月也。於是,道琛自稱領軍將軍福信自稱霜岑將軍,招集徒衆,其勢益張。使告仁軌曰:「聞大唐與新羅約誓,百濟無問老少,一切殺之,然後,以國付新羅,與其受死,豈若戰亡!所以聚結,自固守耳。」仁軌作書,具陳禍福,遣使諭之。道琛等,恃衆驕倨,置仁軌之使於外館,嫚報曰:「使人官小卑,我是一國大將,不合參。」不答書,徒遣之。仁軌以衆少與仁願合軍,休息士卒,上表,請合新羅圖之。

인궤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가." 당나라 책력과 종묘의 휘를 청하여 떠나며 말하였다. "내가 동이를 쓸어 평정하고 당나라의 책력을 바다 밖에 반포하려 한다."

인궤가 군사를 다스림이 엄하고 가지런하여 옮겨 싸우며 나아갔다.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목책 둘을 세워 막았다. 인궤가 신라 군사와 합쳐 치니 백제 군사가 물러나 목책으로 들어가는데, 물에 막히고 다리가 좁아 떨어져 빠지고 싸워 죽은 이가 일만여 사람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에움을 풀고 물러나 임존성을 지켰고, 신라 사람은 양식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갔다. 그때가 용삭 원년 삼월이다.

이에 도침이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일컫고 복신이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일컬으며 무리를 불러 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커졌다.

사람을 시켜 인궤에게 알렸다. "듣기로 당나라가 신라와 약속하여 맹세하기를, 백제는 늙고 젊음을 묻지 않고 모두 죽인 뒤에 나라를 신라에 붙인다 하였다. 죽음을 받느니 어찌 싸우다 죽는 것만 하겠는가. 그래서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킬 뿐이다."

인궤가 글을 지어 화와 복을 갖추어 펴고 사신을 보내어 타일렀다. 도침 등이 무리를 믿고 교만하고 거만하여 인궤의 사신을 바깥 객관에 두고 거만하게 답하였다. "사신의 벼슬이 작고 낮은데 나는 한 나라의 큰 장수이니 마주할 수 없다." 글에 답하지 않고 그냥 보냈다.

인궤가 무리가 적으므로 인원과 군사를 합쳐 군사를 쉬게 하고, 표를 올려 신라와 합쳐 꾀하기를 청하였다.

20용삭 이년 — 복신이 도침을 죽이다

羅王春秋奉詔,遣其將金欽,將兵救仁軌等,至古泗。福信邀擊,敗之。欽自葛嶺道遁還,新羅不敢復出。尋而福信殺道琛,幷其衆。豊不能制,但主祭而已。福信等,以仁願等孤城無援,遣使慰之曰:「大使等,何時西還?當遣相送。」二年七月,仁願、仁軌等,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殺獲甚衆,仍令分兵以鎭守之。福信等,以眞峴城臨江高嶮,當衝要,加兵守之。仁軌夜督新羅兵,薄城板堞,比明而入城,斬殺八百人,遂通新羅饟道。仁願奏請益兵,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遣左威衛將軍孫仁師,統衆浮海,以益仁願之衆。時,福信旣專權,與扶餘豊,寖相猜忌。福信稱疾,臥於窟室,欲俟豊問疾,執殺之。豊知之,帥親信,掩殺福信。

신라 왕 춘추가 조서를 받들어 그 장수 김흠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니 고사에 이르렀다. 복신이 맞아 쳐서 깨뜨렸다. 흠이 갈령도로 달아나 돌아가니 신라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이윽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렀다. 풍이 누르지 못하고 다만 제사만 주관할 뿐이었다.

복신 등이 인원 등이 외로운 성에 도움이 없다 하여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시려는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배웅하겠다."

이년 칠월에 인원과 인궤 등이 복신의 남은 무리를 웅진 동쪽에서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과 윤성·대산·사정 등의 목책을 빼앗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이어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이 진현성이 강에 임하고 높고 험하며 요긴한 길목에 해당한다 하여 군사를 더하여 지켰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의 판자 성가퀴에 다가가 날이 밝을 무렵 성에 들어가 팔백 사람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길을 통하게 하였다.

인원이 군사를 더해 주기를 아뢰어 청하니, 조서로 치주·청주·내주·해주의 군사 칠천 사람을 내어 좌위위장군 손인사에게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인원의 무리를 더하게 하였다.

그때 복신이 이미 권세를 오로지하여 부여풍과 차츰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이 병을 일컫고 굴방에 누워 풍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려 잡아 죽이려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가까이 믿는 이들을 거느리고 몰래 복신을 죽였다.

21용삭 삼년 — 백강 어귀에서 왜인을 깨뜨리다

遣使高句麗、倭國,乞師以拒唐兵。孫仁師中路迎擊破之,遂與仁願之衆相合,士氣大振。於是,諸將議所向,或曰:「加林城水陸之衝,合先擊之。」仁軌曰:「兵法『避實擊虛。』加林嶮而固,攻則傷士,守則曠日。周留城,百濟巢穴,群聚焉,若克之,諸城自下。」於是,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帥陸軍進,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帥水軍及粮船,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同趍周留城。遇倭人白江口,四戰皆克,焚其舟四百艘,煙炎灼天,海水為丹。王扶餘豊脫身而走,不知所在,或云奔高句麗,獲其寶劒。王子扶餘忠勝、忠志等,帥其衆,與倭人並降。獨遲受信據任存城,未下。初,黑齒常之嘯聚亡散,旬日間,歸附者三萬餘人。定方遣兵攻之。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어 군사를 빌려 당나라 군사를 막고자 하였다. 손인사가 도중에 맞아 쳐서 깨뜨리고 마침내 인원의 무리와 서로 합치니 사기가 크게 떨쳤다.

이에 여러 장수가 향할 곳을 의논하는데 어떤 이가 말하였다. "가림성은 물과 뭍의 요긴한 목이니 먼저 치는 것이 마땅하다."

인궤가 말하였다. "병법에 '실한 데를 피하고 빈 데를 친다' 하였다. 가림은 험하고 굳어 치면 군사를 상하고 지키면 날만 오래 끈다. 주류성은 백제의 둥지와 굴이라 무리가 모여 있으니, 만약 이기면 여러 성이 절로 떨어질 것이다."

이에 인사와 인원과 신라 왕 김법민이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륭이 수군과 군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나아갔다.

왜인을 백강 어귀에서 만나 네 번 싸워 다 이기고 그 배 사백 척을 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사르고 바닷물이 붉게 되었다.

왕 부여풍이 몸을 빼어 달아나 간 곳을 알 수 없었는데, 더러는 고구려로 달아났다고도 한다. 그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과 충지 등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항복하였다. 오직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상지가 흩어져 도망한 이들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돌아와 붙는 이가 삼만여 사람이었다. 정방이 군사를 보내어 쳤다.

22용삭 삼년 — 상지가 임존성을 빼앗다

常之拒戰敗之,復取二百餘城,定方不能克。常之與別部將沙吒相如據嶮,以應福信,至是皆降。仁軌以赤心示之,俾取任存自效,卽給鎧、仗、糒。仁師曰:「野心難信。若受甲濟粟,資寇便也。」仁軌曰:「吾觀相如、常之,忠而謀,因機立功,尚何疑?」二人訖取其城,遲受信委妻子,奔高句麗,餘黨悉平,仁師等振旅還。詔留仁軌,統兵鎭守。兵火之餘,比屋凋殘,殭屍如莽。仁軌始命,瘞骸骨,籍戶口,理村聚,署官長,通道塗,立橋梁,補堤堰,復坡塘,課農桑,賑貧乏,養孤老,立唐社稷,頒正朔及廟諱。民皆悅,各安其所。帝以扶餘隆為熊津都督,俾歸國,平新羅古憾,招還遺人。麟德二年,與新羅王會熊津城,刑白馬以盟。仁軌為盟辭,乃作金書鐵契,藏新羅廟中,盟辭見『新羅紀』中。

상지가 맞서 싸워 깨뜨리고 다시 이백여 성을 되찾으니 정방이 이기지 못하였다. 상지가 별부 장수 사타상여와 함께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게 응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 항복하였다.

인궤가 붉은 마음을 보이며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힘을 바치게 하고, 곧 갑옷과 병기와 마른밥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였다. "들짐승 같은 마음은 믿기 어렵다. 만약 갑옷을 받고 곡식을 건네면 도둑에게 밑천을 대는 편함이 될 뿐이다."

인궤가 말하였다.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충성스럽고 꾀가 있어 기회를 따라 공을 세울 것인데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이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 남은 무리가 다 평정되었다. 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갔다. 조서로 인궤를 남겨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싸움과 불의 나머지에 집집이 시들고 헐어 뻣뻣한 주검이 풀처럼 널렸다. 인궤가 비로소 명하여 해골을 묻고 호구를 장부에 적으며, 마을을 다스리고 관장을 두며, 길을 통하고 다리를 놓으며, 제방을 메우고 못을 되살리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매기고 가난한 이를 진휼하며, 외로운 늙은이를 기르고 당나라의 사직을 세우며, 책력과 종묘의 휘를 반포하였다. 백성이 다 기뻐하여 각각 그 살 곳을 편안히 하였다.

황제가 부여륭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나라에 돌아가 신라와의 묵은 원한을 고르게 하고 남은 사람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인덕 이년에 신라 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어 이에 쇠판에 금으로 써서 신라의 사당 안에 간직하였으니, 맹세하는 글은 「신라본기」 가운데 보인다.

23의봉 연간 — 나라의 계통이 끊어지다

仁願等還,隆畏衆携散,亦歸京師。儀鳳中,以隆為熊津都督帶方郡王,遣歸國,安輯餘衆,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時,新羅强,隆不敢入舊國,寄理治高句麗死。武后又以其孫敬襲王,而其地已為新羅、渤海、靺鞨所分,國系遂絶。

인원 등이 돌아가매 융이 무리가 이끌려 흩어질까 두려워 또한 서울로 돌아갔다.

의봉 연간에 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삼아 나라로 돌려보내어 남은 무리를 편안히 모으게 하고, 이어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거느리게 하였다. 그때 신라가 강하여 융이 감히 옛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붙어 다스리다가 죽었다.

무후가 또 그 손자 경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이 이미 신라와 발해와 말갈에게 나뉘어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끊어졌다.

24사론 — 백제가 망한 것도 마땅하다

論曰:《新羅古事》云:「天降金樻,故姓金氏。」其言可怪而不可信,臣修史,以其傳之舊,不得刪落其辭。然而又聞:「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故姓金氏,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姓高氏。」見《晋書》載記。《古史》曰:「百濟與高句麗,同出扶餘。」又云:「秦、漢亂離之時,中國人多竄海東。」則三國祖先,豈其古聖人之苗裔耶?何其享國之長也?至於百濟之季,所行多非道,又世仇新羅,與高句麗連和,以侵軼之,因利乘便,割取新羅重城、巨鎭,不已,非所謂親仁善鄰,國之寶也。於是,唐天子再下詔,平其怨,陽從而陰違之,以獲罪於大國,其亡也亦宜矣。

김부식이 논한다.

『신라고사』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하였다.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신이 역사를 닦으매 그것이 옛부터 전해 온 것이라 그 말을 깎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또 들으니 "신라 사람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 하고, 고구려도 또한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여 성을 고씨라 한다" 하니, 『진서(晉書)』의 기록에 보인다.

『고사』에 이르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진(秦)나라와 한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국 사람이 바다 동쪽으로 많이 달아나 숨었다" 하였다. 그러면 세 나라의 조상이 어찌 그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나라를 누린 것이 그토록 길었구나.

백제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행한 바가 도리에 어긋난 것이 많았다.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 이어 화친하여 침노하고 짓밟으며, 이로움을 인하고 편함을 타 신라의 요긴한 성과 큰 진을 갈라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것이 아니다.

이에 당나라 천자가 두 번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고르게 하였으나, 겉으로는 좇고 속으로는 어겨 큰 나라에 죄를 얻었으니 그 망한 것도 또한 마땅하다.

협주 1

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비」와 박거물이 짓고 요극일이 쓴 「삼랑사 비문」에 보인다.

25삼국사기 권 제이십팔

三國史記卷第二十八

삼국사기 권 제이십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