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하金庾信下
1흠순과 인문이 고구려로 가다
麟德元年甲子三月,百濟餘衆,又聚泗沘城反叛,熊州都督,發所管兵士攻之,累日霧塞,不辨人物,是故,不能戰,使伯山來告之,庾信授之陰謀,以克之。麟德二年,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兼冊庾信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乾封元年,皇帝勑召庾信長子大阿飡三光,為左武衛翊府中郞將,仍令宿衛。摠章元年戊辰,唐高宗皇帝,遣英國公李勣,興師伐高句麗,遂徵兵於我。文武大王,欲出兵應之,遂命欽純、仁問為將軍。欽純告王曰:「若不與庾信同行,恐有後悔。」王曰:「公等三臣,國之寶也。若摠向敵場,儻有不虞之事,而不得歸,則其如國何。故欲留庾信守國,則隱然若長城,終無憂矣。」欽純,庾信之弟,仁問,庾信之外甥,故尊事之,不敢抗。
인덕 원년 갑자 삼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가 또 사비성에 모여 배반하니, 웅주도독이 거느린 군사를 내어 쳤다. 여러 날 안개가 막혀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못하므로 싸울 수 없어, 백산을 보내어 알려 오니 유신이 그윽한 꾀를 주어 이기게 하였다.
인덕 이년에 고종이 사신 양동벽과 임지고 등을 보내어 예방하고, 아울러 유신을 봉상정경 평양군개국공으로 책봉하고 식읍 이천 집을 주었다.
건봉 원년에 황제가 칙명으로 유신의 맏아들 대아찬 삼광을 불러 좌무위익부중랑장으로 삼고 이어 숙위하게 하였다.
총장 원년 무진에 당나라 고종황제가 영국공 이적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게 하고 마침내 신라에 군사를 불렀다. 문무대왕이 군사를 내어 응하고자 마침내 흠순과 인문에게 명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흠순이 왕에게 아뢰었다. "만약 유신과 함께 가지 않으면 뒤에 뉘우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공들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요. 만약 다 적의 싸움터로 향하다가 뜻하지 않은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하면 그 나라를 어찌하겠소. 그러므로 유신을 남겨 나라를 지키게 하려는 것이니, 그러면 은연히 긴 성 같아 마침내 걱정이 없을 것이오."
흠순은 유신의 아우요 인문은 유신의 생질이므로 높여 섬기어 감히 맞서지 못하였다.
2유신이 두 사람에게 이르다
至是,告庾信曰:「吾等不材,今從大王,就不測之地,為之奈何,願有所指誨。」答曰:「夫為將者,作國之干城,君之爪牙。決勝否於矢石之間,必上得天道,下得地理,中得人心,然後可得成功。今我國以忠信而存,百濟以慠慢而亡,高句麗以驕滿而殆,今若以我之直,擊彼之曲,可以得志。況憑大國明天子之威稜哉。往矣勉焉,無墮乃事!」二公拜曰:「奉以周旋,不敢失墮。」文武大王旣與英公,破平壤,還到南漢州,謂群臣曰:「昔者,百濟明襛王在古利山,謀侵我國,庾信之祖武力角干,為將逆擊之,乘勝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以折其衝。又其父舒玄,為良州摠管,屢與百濟戰,挫其銳,使不得犯境。故邊民安農桑之業,君臣無宵旰之憂。今,庾信承祖考之業,為社稷之臣,出將入相,功績茂焉。
이때에 이르러 유신에게 아뢰었다. "우리가 재주 없이 이제 대왕을 좇아 헤아릴 수 없는 땅으로 나아가니 어찌하리까.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답하였다. "무릇 장수 된 이는 나라의 방패와 성이 되고 임금의 손톱과 어금니가 된다. 화살과 돌 사이에서 이기고 짐을 결단하되, 반드시 위로 하늘의 도를 얻고 아래로 땅의 이로움을 얻으며 가운데로 사람의 마음을 얻은 뒤에야 공을 이룰 수 있다. 이제 우리 나라는 충성과 믿음으로 남아 있고 백제는 거만함으로 망하였으며 고구려는 교만하고 자만함으로 위태로우니, 이제 만약 우리의 곧음으로 저들의 굽음을 치면 뜻을 얻을 수 있다. 하물며 큰 나라 밝은 천자의 위엄에 기대었음에랴. 가서 힘쓰고 너희 일을 떨어뜨리지 말라."
두 공이 절하고 말하였다. "받들어 두루 행하여 감히 떨어뜨리지 않겠습니다."
문무대왕이 영공과 함께 평양을 깨뜨리고 돌아와 남한주에 이르러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옛날 백제 명농왕이 고리산에 있으면서 우리 나라를 침노하기를 꾀할 때, 유신의 할아버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맞아 쳐서 이긴 기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사람과 군사를 사로잡아 그 칼끝을 꺾었다. 또 그 아버지 서현은 양주총관이 되어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날카로움을 꺾어 지경을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변방 백성이 농사와 누에치기의 업을 편안히 하고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걱정하는 일이 없었다. 이제 유신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을 이어 사직의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재상이라 공적이 무성하다.
3태대서발한을 주고 유신이 병들다
若不倚賴公之一門,國之興亡,未可知也,其於職賞,宜如何也。」群臣曰:「誠如王旨。」於是,授太大舒發翰之職,食邑五百戶。仍賜輿杖,上殿不趨,其諸察寮佐,各賜位一級。摠章元年,唐皇帝,旣策英公之功,遂遣使宣慰,濟師助戰,兼賜金帛。亦授詔書於庾信,以褒奬之,且諭入朝,而不果行。其詔書傳於家,至五世孫失焉。咸寧咸亨四年癸酉,是文武大王十三年。春,妖星見地震,大王憂之。庾信進曰:「今之變異,厄在老臣,非國家之災也,王請勿憂。」大王曰:「若此則寡人所甚憂也。」命有司祈禳之。夏六月,人或見戎服持兵器數十人,自庾信宅泣而去,俄而不見。庾信聞之曰:「此必陰兵護我者,見我福盡,是以去,吾其死矣。」後,旬有餘日,寢疾,大王親臨慰問,庾信曰:「臣願竭股肱之力,以奉元首,而犬馬之疾至此,今日之後,不復再見龍顔矣。
만약 공의 한 집안에 기대지 않았다면 나라의 흥하고 망함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니, 그 벼슬과 상을 마땅히 어찌하겠는가."
여러 신하가 말하였다. "참으로 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태대서발한의 벼슬을 주고 식읍 오백 집을 주었다. 이어 수레와 지팡이를 내리고 전각에 오를 때 종종걸음 하지 않게 하였으며, 그 여러 살피는 벼슬아치와 보좌에게 각각 벼슬 한 등급을 내렸다.
총장 원년에 당나라 황제가 이미 영공의 공을 책봉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위로를 펴며 군사를 더하여 싸움을 돕고 아울러 금과 비단을 내렸다. 또한 유신에게 조서를 주어 기려 권장하고 또 조회하러 오라 타일렀으나 가지 못하였다. 그 조서가 집에 전하다가 오세손에 이르러 잃었다.
함형 사년 계유는 문무대왕 십삼년이다. 봄에 요망한 별이 나타나고 땅이 흔들리니 대왕이 이를 걱정하였다.
유신이 나아가 말하였다. "이제의 변괴는 액이 늙은 신하에게 있는 것이지 나라의 재앙이 아니니,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대왕이 말하였다. "그러하다면 이는 과인이 몹시 걱정하는 바요." 맡은 관청에 명하여 빌어 물리치게 하였다.
여름 유월에 어떤 사람이 군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사람이 유신의 집에서 울며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윽고 보이지 않았다. 유신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이는 반드시 나를 지키던 그윽한 군사인데, 내 복이 다한 것을 보고 이 때문에 간 것이니 나는 죽으리라."
뒤에 열흘 남짓하여 병들어 누웠다. 대왕이 몸소 나아가 위문하니 유신이 말하였다. "신이 팔다리의 힘을 다하여 으뜸 되시는 분을 받들기를 바랐으나 개와 말의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오늘 뒤로는 다시 용안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4유신이 죽다
」大王泣曰:「寡人之有卿,如魚有水,若有不可諱,其如人民何,其如社稷何。」庾信對曰:「臣愚不肖,豈能有益於國家,所幸者,明上,用之不疑,任之勿貳,故得攀附王明,成尺寸功,三韓為一家,百姓無二心,雖未至太平,亦可謂小康。臣觀自古繼體之君,靡不有初,鮮克有終,累世功績,一朝隳廢,甚可痛也。伏願:殿下,知成功之不易,念守成之亦難,疏遠小人,親近君子,使朝廷和於上,民物安於下,禍亂不作,基業無窮,則臣死且無憾。」王泣而受之。至秋七月一日,薨于私第之正寢,享年七十有九。大王聞訃震慟,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以供喪事,給軍樂鼓吹一百人,出葬于金山原,命有司立碑,以紀功名,又定入民戶,以守墓焉。妻智炤夫人,太宗大王第三女也。
대왕이 울며 말하였다.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소.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백성을 어찌하며 사직을 어찌하겠소."
유신이 답하였다. "신은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니 어찌 나라에 보탬이 있었겠습니까. 다행한 것은 밝으신 임금께서 쓰시되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되 두 마음을 두지 않으신 까닭에, 왕의 밝으심에 붙어 조그마한 공을 이루어 삼한이 한 집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이 없게 된 것입니다. 비록 태평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조금 편안하다 할 만합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를 이은 임금으로 처음이 없는 이는 없으나 능히 끝을 마치는 이는 드물어,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몹시 아픈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룸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이룬 것을 지킴도 또한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하시어 위로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와 난이 일어나지 않고 터의 업이 끝이 없게 하시면, 신은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왕이 울며 이를 받았다.
가을 칠월 초하루에 이르러 사삿집의 정침에서 죽으니 나이 일흔아홉이었다. 대왕이 부고를 듣고 놀라 슬퍼하여 채색 비단 일천 필과 조 이천 섬을 부의로 보내어 상사에 쓰게 하고, 군악의 북과 피리 부는 이 일백 사람을 주어 금산 벌판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맡은 관청에 명하여 비를 세워 공과 이름을 적게 하고, 또 민호를 정하여 들여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아내 지소부인은 태종대왕의 셋째 딸이다.
5자손과 흥무대왕
生子五人,長曰三光伊飡,次元述蘇判,次元貞海干,次長耳大阿飡,次元望大阿飡。女子四人,又庶子軍勝阿飡,失其母姓氏。後,智炤夫人,落髮衣褐,為比丘尼,時,大王謂夫人曰:「今,中外平安,君臣高枕而無憂者,是太大角干之賜也,惟夫人宜其室家,儆誡相成,陰功茂焉,寡人欲報之德,未嘗一日忘于心。其餽南城租每年一千石。」後,興德大王封公為興武大王。初,法敏王,納高句麗叛衆,又據百濟故地有之。唐高宗大怒,遣師來討,唐軍與靺鞨,營於石門之野。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營於帶方之野。時,長槍幢獨別營,遇唐兵三千餘人,捉送大將軍之營。於是,諸幢共言:「長槍營獨處成功,必得厚賞,吾等不宜屯聚,徒自勞耳。」遂各別兵分散。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맏이는 이찬 삼광이요, 다음은 소판 원술이요, 다음은 해간 원정이요, 다음은 대아찬 장이요, 다음은 대아찬 원망이다. 딸이 넷이요, 또 서자 아찬 군승이 있는데 그 어미의 성씨를 잃었다.
뒤에 지소부인이 머리를 깎고 굵은 베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그때 대왕이 부인에게 말하였다. "이제 안팎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하여 걱정이 없는 것은 태대각간이 주신 바요. 오직 부인이 그 집안을 잘하여 경계하고 서로 이루어 그윽한 공이 무성하니, 과인이 그 덕을 갚고자 하여 일찍이 하루도 마음에 잊은 적이 없소." 남성의 조를 해마다 일천 섬씩 보내게 하였다.
뒤에 흥덕대왕이 공을 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삼았다.
처음에 법민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말갈과 함께 석문 들에 진을 치므로, 왕이 장군 의복과 춘장 등을 보내어 막게 하여 대방 들에 진을 쳤다.
그때 장창당이 홀로 따로 진을 쳤는데 당나라 군사 삼천여 사람을 만나 잡아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여러 당이 함께 말하였다. "장창의 진영이 홀로 공을 이루었으니 반드시 두터운 상을 얻으리라. 우리는 모여 있어 헛되이 스스로 수고로울 뿐이다." 마침내 각각 군사를 따로 하여 흩어졌다.
6원술이 죽지 못하다
唐兵與靺鞨,乘其未陣擊之,吾人大敗,將軍曉川、義文等死之。庾信子元述,為裨將,亦欲戰死,其佐淡凌,止之曰:「大丈夫,非死之難,處死之為難也。若死而無成,不若生而圖後效。」答田曰:「男兒不苟生,將何面目以見吾父乎。」便欲策馬而走,淡凌攬轡不放,遂不能死,隨上將軍出蕪荑嶺,唐兵追及之。居烈州大監阿珍含一吉干,謂上將軍曰:「公等努力速去。吾年已七十,能得幾時活也!此時是吾死日也。」便橫戟突陣而死,其子亦隨而死。大將軍等,微行入京。大王聞之,問庾信曰:「軍敗如此,奈何。」對曰:「唐人之謀,不可測也。宜使將卒各守要害。但元述不惟辱王命,而亦負家訓,可斬也。」大王曰:「元述裨將,不可獨施重刑。」乃赦之。元述慙懼,不敢見父,隱道遁於田園,至父薨後,求見母氏。
당나라 군사가 말갈과 함께 그 진 치지 못한 틈을 타 치니 신라 사람이 크게 지고 장군 효천과 의문 등이 죽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이 비장이 되어 또한 싸우다 죽으려 하니, 그 보좌 담릉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가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만약 죽어도 이루는 것이 없다면 살아서 뒷날의 보람을 꾀하는 것만 못합니다."
답하였다. "사내가 구차히 살면 장차 무슨 낯으로 내 아버지를 뵙겠는가." 곧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 하니 담릉이 고삐를 잡고 놓지 않으므로 마침내 죽지 못하였다.
상장군을 따라 무이령을 나서니 당나라 군사가 뒤쫓아 미쳤다. 거열주 대감 아진함 일길간이 상장군에게 말하였다. "공들은 힘써 빨리 가시오. 내 나이 이미 일흔이니 얼마나 더 살겠소. 이때가 바로 내가 죽을 날이오." 곧 창을 비껴들고 진에 부딪쳐 죽고 그 아들도 또한 따라 죽었다.
대장군 등이 몰래 다녀 서울에 들어왔다. 대왕이 이를 듣고 유신에게 물었다. "군사가 이처럼 졌으니 어찌하겠소."
답하였다. "당나라 사람의 꾀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마땅히 장수와 군사로 하여금 각각 요긴한 곳을 지키게 하소서.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집안의 가르침도 저버렸으니 베어야 합니다."
대왕이 말하였다. "원술은 비장이니 홀로 무거운 형벌을 줄 수 없소." 이에 용서하였다.
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길을 숨어 시골로 달아났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이르러 어머니를 뵙기를 구하였다.
7원술을 어머니가 보지 않다
母氏曰:「婦人有三從之義,今旣寡矣,宜從於子。若元述者,旣不得為子於先君,吾焉得為其母乎。」遂不見之。元述慟哭擗踴而不能去,夫人終不見焉。元述嘆曰:「為淡凌所誤,至於此極。」乃入大伯山太伯山。至乙亥年,唐兵來,攻買蘇川城,元述聞之,欲死之,以雪前恥,遂力戰有功賞,以不容於父母,憤恨不仕,以終其身。嫡孫允中,仕聖德大王,為大阿飡,屢承恩顧,王之親屬,頗嫉妬之。時,屬仲秋之望,王登月城岑頭眺望,乃與侍從官,置酒以娛,命喚允中,有諫者曰:「今,宗室戚里,豈無好人,而獨召疎遠之臣,豈所謂親親者乎。」王曰:「今,寡人與卿等,安平無事者,允中祖之德也,若如公言,忘棄之,則非善善及子孫之義也。」遂賜允中密坐,言及其祖平生,日晚告退,賜絶影山馬一匹,群臣觖望而已。
어머니가 말하였다. "부인에게 세 가지 좇는 의로움이 있는데 이제 이미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아들을 좇아야 한다. 그러나 원술 같은 이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께 자식이 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 마침내 보지 않았다.
원술이 통곡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굴렀으나 떠나지 못하였고 부인이 끝내 보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였다. "담릉에게 그르침을 당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에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을해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가 와서 매소천성을 치니, 원술이 이를 듣고 죽어 앞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여 마침내 힘껏 싸워 공이 있어 상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하였다 하여 분하고 한스러워 벼슬하지 않고 그 몸을 마쳤다.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어 여러 번 은혜와 돌보심을 받으니, 왕의 친속이 자못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그때 마침 한가위 보름이라 왕이 월성 봉우리에 올라 바라보고, 이에 모시고 따르는 벼슬아치와 함께 술자리를 베풀어 즐기며 윤중을 불러오라 명하였다.
간하는 이가 있어 말하였다. "이제 종실과 외척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홀로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어찌 이른바 친한 이를 친히 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이제 과인이 경들과 함께 편안하고 평온하여 일이 없는 것은 윤중의 할아버지의 덕이다. 만약 공의 말과 같이 잊고 버린다면 착한 이를 착하게 여겨 자손에까지 미치는 의로움이 아니다."
마침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내리고 그 할아버지의 평생에 말이 미쳤다. 날이 저물어 물러가기를 아뢰매 절영산의 말 한 필을 내리니 여러 신하가 서운해할 뿐이었다.
8윤중과 김암
開元二十一年,大唐遣使敎翰諭曰:「靺鞨、渤海,外稱蕃翰,內懷狡猾,今欲出兵問罪,卿亦發兵,相為掎角,聞有舊將金庾信孫允中在,須差此人為將。」仍賜允中金帛若干。於是,大王命允中、弟允文等四將軍,率兵會唐兵,伐渤海。允中庶孫巖,性聰敏,好習方術,少壯為伊飡,入唐宿衛,間就師,學陰陽家法,聞一隅,則反之以三隅,自述遁甲立成之法,呈於其師,師撫憮然曰:「不圖吾子之明達,至於此也。」從是而後,不敢以弟子待之。大曆中還國,為司天大博士,歷良、康、漢三州大守太守,復為執事侍郞、浿江鎭頭上。所至盡心撫字,三務之餘,敎之以六陣兵法,人皆便之。嘗有蝗蟲,自西入浿江之界,蠢然蔽野,百姓憂懼。巖登山頂,焚香析祈天,忽風雨大作,蝗蟲盡死。
개원 이십일년에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서로 타일렀다. "말갈과 발해가 밖으로는 울타리라 일컬으면서 안으로 교활함을 품는다. 이제 군사를 내어 죄를 물으려 하니 경도 군사를 내어 서로 앞뒤에서 잡아채라. 듣건대 옛 장수 김유신의 손자 윤중이 있다 하니 모름지기 이 사람을 가려 장수로 삼으라." 이어 윤중에게 금과 비단 얼마를 내렸다.
이에 대왕이 윤중과 그 아우 윤문 등 네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만나 발해를 치게 하였다.
윤중의 서손 암(巖)은 성품이 총명하고 재빨라 방술 익히기를 좋아하였다. 젊어 이찬이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며 틈틈이 스승에게 나아가 음양가의 법을 배웠는데, 한 모퉁이를 들으면 세 모퉁이로 돌이켜 알았다. 스스로 둔갑입성의 법을 지어 그 스승에게 드리니 스승이 어루만지며 놀라 말하였다. "그대의 밝고 통달함이 이에 이를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 뒤로 감히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
대력 연간에 나라에 돌아와 사천대박사가 되었고, 양주·강주·한주 세 주의 태수를 지냈으며 다시 집사시랑과 패강진 두상이 되었다.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어루만지고 사랑하였으며, 세 철 농사의 여가에 육진병법을 가르치니 사람들이 다 편하게 여겼다.
일찍이 메뚜기가 서쪽에서 패강 지경에 들어와 꿈틀거리며 들을 덮으니 백성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암이 산꼭대기에 올라 향을 사르고 하늘에 비니, 문득 바람과 비가 크게 일어 메뚜기가 다 죽었다.
9김암이 일본에 가고 유신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다
大曆十四年己未,受命聘日本國。其國王,知其賢,欲勒留之。會,大唐使臣高鶴林來,相見甚懽。倭人認巖為大國所知,故不敢留乃還。夏四月,旋風坌起,自庾信墓,至始祖大王之陵,塵霧暗冥,不辨人物,守陵人聞其中若有哭泣悲嘆之聲。惠恭大王,聞之恐懼,遣大臣金敬信,致祭謝過,仍於鷲仙寺,納田三十結,以資冥福。是寺,庾信平麗、濟二國,所營立也。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作行錄十卷,行於世。頗多釀辭,故刪落之,取其可書者,為之傳。論曰:唐李絳對憲宗曰:「遠邪侫,進忠直,與大臣言,敬而信,無使小人參焉,與賢者遊,親而禮,無使不肖預焉。」誠哉,斯言也,實為君之要道也。故《書》曰:「任賢勿貳,去邪勿疑。」觀夫新羅之待庾信也,親近而無間,委任而不貳,謀行言聽,不使怨乎不以,可謂得六五童蒙之吉。
대력 십사년 기미에 명을 받아 일본국에 예방하였다. 그 나라 왕이 그가 어짊을 알고 억지로 머무르게 하려 하였다. 마침 당나라 사신 고학림이 오매 서로 보고 몹시 기뻐하였다. 왜인이 암을 큰 나라에 알려진 이로 여겨 그러므로 감히 머무르게 하지 못하여 이내 돌아왔다.
여름 사월에 회오리바람이 뭉게뭉게 일어 유신의 무덤에서 시조대왕의 능까지 이르니, 티끌과 안개가 어둡고 캄캄하여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못하였다. 능 지키는 사람이 그 가운데서 곡하며 울고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나는 듯함을 들었다.
혜공대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제사하고 허물을 빌게 하고, 이어 취선사에 밭 서른 결을 들여 저승의 복을 돕게 하였다. 이 절은 유신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지어 세운 것이다.
유신의 현손 신라 집사랑 장청이 「행록」 열 권을 지어 세상에 다닌다. 자못 지어 낸 말이 많으므로 덜어 내고 그 적을 만한 것만 취하여 전을 삼는다.
김부식이 논한다.
당나라 이강이 헌종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하고 충성되고 곧은 이를 나아가게 하며, 대신과 말할 때는 공경하고 믿어 소인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어진 이와 사귈 때는 가까이하고 예로 하여 어질지 못한 이가 참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참되구나, 이 말이여. 실로 임금 된 이의 요긴한 도리다. 그러므로 『서경』에 이르기를 "어진 이를 맡기되 두 마음을 두지 말고 간사한 이를 버리되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저 신라가 유신을 대한 것을 보건대, 가까이하여 틈이 없고 맡기어 두 마음을 두지 않으며, 꾀하면 행하고 말하면 들어 쓰이지 않는다는 원망이 없게 하였으니, 육오 동몽의 길함을 얻었다 할 만하다.
10사론 — 이 나라 사람이 지금도 기린다
故庾信得以行其志,與上國協謀,合三土為一家,能以功名終焉。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皋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若庾信,則鄕人稱頌之,至今不亡。士大夫知之,可也,至於蒭童牧豎,亦能知之,則其為人也,必有以異於人矣。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을 행할 수 있어 상국과 꾀를 합쳐 세 땅을 한 집으로 만들고 공과 이름으로 마칠 수 있었다.
비록 을지문덕의 슬기와 지략과 장보고의 의로움과 용맹이 있어도, 중국의 글이 없었다면 없어져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유신 같은 이는 이 나라 사람이 기려 일컬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사대부가 아는 것은 그럴 만하거니와, 꼴 베는 아이와 소 치는 아이까지도 능히 아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남과 다른 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