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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乙支文德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4 · 한자 515자 · 낭독 2.1분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다

乙支文德,未詳其世系。資沈鷙有智數,兼解屬文。隋開皇大業中,煬帝下詔征高句麗。於是,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與九軍至鴨淥水。文德受王命,詣其營詐降,實欲觀其虛實。述與仲文,先奉密旨,若遇王及文德來,則執之,仲文等,將留之,尚書右丞劉士龍,為慰撫使,固止之,遂聽文德歸,深悔之,遣人紿文德曰:「更欲有議言,可復來。」文德不顧,遂濟鴨淥而歸。述與仲文,旣失文德,內不自安。述以粮盡欲還,仲文議以精銳追文德,可以有功,述止之。仲文怒曰:「將軍仗十萬兵,不能破小賊,何顔以見帝。」述等不得已而從之,度鴨淥水追之。文德見隋軍士有饑色,欲疲之,每戰輒北走,述等一日之中,七戰皆捷。旣恃驟勝,又逼群議,遂進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因山為營。文德遺仲文詩曰:

을지문덕은 그 계보가 자세하지 않다. 바탕이 침착하고 굳세며 슬기와 꾀가 있고 아울러 글 짓는 법도 알았다.

수나라 개황과 대업 연간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에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아홉 군과 함께 압록수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명을 받아 그 진영에 나아가 거짓으로 항복하니 실은 그 허와 실을 보고자 함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먼저 밀지를 받았으니, 만약 왕이나 문덕이 오면 잡으라는 것이었다. 중문 등이 붙들어 두려 하였으나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가 되어 굳이 말리므로 마침내 문덕을 돌려보냈다가 깊이 뉘우쳤다. 사람을 보내어 문덕을 속였다. "다시 의논할 말이 있으니 돌아오라." 문덕이 돌아보지 않고 마침내 압록을 건너 돌아갔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미 문덕을 놓치매 속으로 스스로 편치 못하였다. 우문술이 양식이 다하였다 하여 돌아가려 하니, 중문이 정예로 문덕을 뒤쫓으면 공이 있으리라 의논하였으나 우문술이 말렸다.

중문이 노하여 말하였다. "장군이 십만 군사를 거느리고도 작은 도둑을 깨뜨리지 못하니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는가." 우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그를 좇아 압록수를 건너 뒤쫓았다.

문덕이 수나라 군사에게 주린 빛이 있음을 보고 지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문득 져서 달아나니, 우문술 등이 하루 사이에 일곱 번 싸워 다 이겼다. 이미 갑작스러운 이김을 믿고 또 여럿의 의논에 몰려,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삼십 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냈다.

2우중문에게 준 시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다하였고 기묘한 셈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넉넉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3살수에서 수나라 군사를 무찌르다

仲文答書諭之。文德又遣使詐降,請於述曰:「若旋師者,當奉王朝行在所。」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又平壤城險固,難以猝拔,遂因其詐而還,為方陣而行。文德出軍,四面鈔擊之,述等且戰且行,秋七月至薩水,軍半濟,文德進軍,擊其後軍,殺右屯衛將軍辛世雄。於是,諸軍俱潰,不可禁止,九軍將士奔還,一日一夜,至鴨淥水,行四百五十里。初,度遼,凡軍三十萬五千人,及還至遼東城,唯二千七百人。

중문이 글로 답하여 타일렀다.

문덕이 또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며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돌리시면 마땅히 왕을 받들어 행재소에 조회하겠습니다."

우문술이 군사가 지치고 피폐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굳어 갑자기 빼앗기 어려움을 보고, 마침내 그 속임을 인하여 돌아가며 네모진 진을 이루어 갔다.

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면에서 노략하여 치니 우문술 등이 싸우면서 갔다. 가을 칠월에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널 때 문덕이 군사를 밀고 나아가 그 뒷군을 쳐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사가 다 무너져 막을 수 없었다. 아홉 군의 장수와 군사가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 낮 하루 밤에 압록수에 이르니 사백쉰 리를 간 것이다.

처음에 요수를 건널 때 무릇 군사가 삼십만 오천 사람이었는데 돌아와 요동성에 이르매 오직 이천칠백 사람뿐이었다.

4사론 — 군자가 없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論曰:煬帝遼東之役,出師之盛,前古未之有也,高句麗一偏方小國,而能拒之,不唯自保而已,滅其軍幾盡者,文德一人之力也。《傳》曰:「不有君子,其能國乎。」信哉。

김부식이 논한다.

양제의 요동 싸움은 군사를 낸 성함이 예로부터 있지 않은 것이었다. 고구려는 한 치우친 지방의 작은 나라인데도 능히 막아, 다만 스스로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다 없앴으니 문덕 한 사람의 힘이다. 옛글에 이르기를 "군자가 없이 능히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였으니 참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