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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金陽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4 · 한자 913자 · 낭독 3.7분

「삼국사기」 열전 「김양」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김양이 균정을 받들다

金陽,字魏昕,太宗大王九世孫也。曾祖周元伊飡,祖宗基蘇判,考貞茹波珍飡,皆以世家為將相。陽生而英傑。太和和二年,興德王三年,為固城郡太守,尋拜中原大尹,俄轉武州都督,所臨有政譽。開成元年丙辰,興德王薨,無嫡嗣,王之堂弟均貞,堂弟之子悌隆,爭嗣位。陽與均貞之子阿飡祐徵、均貞妹壻禮徵,奉均貞為王,入積板宮,以族兵宿衛。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陽陳兵宮門,以拒之曰:「新君在此,爾等何敢兇逆如此。」遂引弓射殺十數人。悌隆下裴萱伯,射陽中股。均貞曰:「彼衆我寡,勢不可遏,公其佯退,以為後圖。」陽,於是,突圍而出,至韓歧市,均貞沒於亂兵,陽號泣旻天,誓心白日,潛藏山野,以俟時來。至開成二年八月,前侍中祐徵,收殘兵,入淸海鎭,結大使弓福,謀報不同天之讐。

김양은 자가 위흔이요 태종대왕의 구세손이다. 증조는 이찬 주원이요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요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이니, 다 대대로 집안이 장수와 재상이 되었다. 김양은 나면서 빼어나고 뛰어났다.

태화 이년, 흥덕왕 삼년에 고성군 태수가 되고, 이윽고 중원대윤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 무주도독으로 옮겼는데 이르는 곳마다 정사의 기림이 있었다.

개성 원년 병진에 흥덕왕이 죽고 적자가 없어, 왕의 사촌아우 균정과 사촌아우의 아들 제륭이 자리 잇기를 다투었다. 김양이 균정의 아들 아찬 우징과 균정의 매부 예징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에 들어가 겨레의 군사로 숙위하였다.

제륭의 무리 김명과 이홍 등이 와서 에우니, 김양이 궁문에 군사를 벌이고 막으며 말하였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신데 너희가 어찌 감히 흉악하고 거스름이 이와 같은가." 마침내 활을 당겨 십여 사람을 쏘아 죽였다.

제륭의 부하 배훤백이 김양을 쏘아 넓적다리를 맞혔다. 균정이 말하였다. "저쪽은 무리가 많고 우리는 적어 형세로 보아 막을 수 없다. 공은 짐짓 물러나 뒷일을 꾀하라."

김양이 이에 에움을 뚫고 나가 한기시에 이르렀는데 균정이 난병에게 죽었다. 김양이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고 밝은 해에 마음을 맹세하며 산과 들에 숨어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개성 이년 팔월에 이르러 앞서 시중이던 우징이 남은 군사를 거두어 청해진에 들어가 대사 궁복과 맺어 함께 하늘을 이지 못할 원수를 갚기를 꾀하였다.

협주 1

一作漢祇。

한기시(韓歧市)는 한기(漢祇)로도 쓴다.

2대구에서 왕의 군사를 깨뜨리다

陽聞之,募集謀士兵卒,以三年二月,入海,見祐徵,與謀擧事。三月,以勁卒五千人,襲武州,至城下,州人悉降,進次南原,迕新羅兵,與戰克之。祐徵以士卒久勞,且歸海鎭,養兵秣馬。冬,彗孛見西方,芒角指東,衆賀曰:「此除舊布新,報寃雪恥之祥也。」陽號為平東將軍,十二月再出,金亮詢以鵡洲軍來,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六將統兵,軍容甚盛,鼓行至武州鐵冶縣北川。新羅大監金敏周,以兵逆之,將軍駱金、李順行,以馬兵三千,突入彼軍,殺傷殆盡。四年正月十九日,軍至大丘,王以兵迎拒,逆擊之,王軍敗北,生擒斬獲,莫之能計。時,王顚沛逃人入離宮,兵士尋害之。陽於是命左右將軍領騎士,徇曰:「本為報讐,今,渠魁就戮,衣冠士女百姓,宜各安居,勿妄動。

김양이 이를 듣고 꾀 있는 선비와 군사를 모아, 삼년 이월에 바다에 들어가 우징을 보고 함께 일으키기를 꾀하였다.

삼월에 굳센 군사 오천 사람으로 무주를 습격하여 성 아래 이르니 주 사람이 다 항복하였다. 나아가 남원에 머물러 신라 군사를 만나 싸워 이겼다. 우징이 군사가 오래 수고로웠다 하여 우선 청해진에 돌아가 군사를 기르고 말을 먹였다.

겨울에 살별이 서쪽에 나타나 빛살 끝이 동쪽을 가리키니 여럿이 하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펴며 원한을 갚고 부끄러움을 씻을 상서다."

김양을 평동장군이라 하고 십이월에 다시 나아갔다. 김양순이 무주의 군사를 이끌고 오고, 우징이 또 날래고 용맹한 염장·장변·정년·낙금·장건영·이순행 여섯 장수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게 하니 군용이 매우 성하였다. 북을 치며 나아가 무주 철야현 북천에 이르렀다.

신라 대감 김민주가 군사로 맞으니 장군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삼천으로 저 군사에 들이쳐 죽이고 다치게 하여 거의 다 없앴다.

사년 정월 열아흐레에 군사가 대구에 이르렀다. 왕이 군사로 맞아 막으므로 맞아 치니 왕의 군사가 져서 달아나, 사로잡고 벤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왕이 엎어지고 자빠지며 달아나 이궁에 들어갔는데 군사가 찾아내어 해쳤다. 김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사를 거느리고 돌아다니며 알리게 하였다. "본디 원수를 갚으려 한 것인데 이제 그 우두머리가 죽임을 당하였으니, 의관을 갖춘 남녀와 백성은 마땅히 각각 편안히 살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3배훤백을 용서하고 신무왕을 세우다

」遂復王城,人民案堵。陽召萱伯曰:「犬各吠非其主,爾以其主射我,義士也,我勿校,爾安無恐。」衆聞之曰:「萱伯如此,其他何憂。」無不感悅。四月淸宮,奉迎侍中祐徵卽位,是為神武王。至七月二十三日,大王薨,太子嗣位,是為文聖王。追錄功,授蘇判兼倉部令,轉侍中兼兵部令,唐聘問,兼授公檢校衛尉卿。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薨于私第,享年五十。訃聞,大王哀慟,追贈舒發翰,其贈賻殮葬,一依金庾信舊例。以其年十二月八日,陪葬于太宗大王之陵。從父兄昕,字泰,父璋如,仕至侍中波珍飡。昕幼而聰悟,好學問。長慶二年,憲德王將遣人入唐,難其人,或薦昕太宗之裔,精神朗秀,器宇深沈,可以當選。遂令入朝宿衛。歲餘請還,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

마침내 왕성을 되찾으니 백성이 편안히 살았다.

김양이 훤백을 불러 말하였다. "개는 각각 제 주인이 아닌 이에게 짖는 법이다.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로운 선비다. 내가 따지지 않을 것이니 너는 편안히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럿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훤백이 이러하니 그 밖의 사람이야 무엇을 걱정하랴."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월에 궁궐을 맑게 하고 시중 우징을 받들어 맞아 즉위하게 하니 이가 신무왕이다.

칠월 스무사흘에 이르러 대왕이 죽고 태자가 자리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다. 공을 뒤좇아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주고, 시중 겸 병부령으로 옮겼다. 당나라가 예방하매 아울러 공에게 검교위위경을 주었다.

대중 십일년 팔월 열사흘에 사삿집에서 죽으니 나이 쉰이었다. 부고가 들리매 대왕이 슬퍼하고 서발한을 추증하였으며, 그 부의와 염과 장사를 한결같이 김유신의 옛 예대로 하였다. 그해 십이월 여드레에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사촌형 흔은 자가 태(泰)요 아버지 장여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깨달음이 빨라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 이년에 헌덕왕이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려 하는데 그 사람을 얻기 어려웠다. 어떤 이가 천거하기를 흔은 태종의 후예로 정신이 밝고 빼어나며 그릇과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힐 만하다 하였다. 마침내 조정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였다. 한 해 남짓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로 금자광록대부 시태상경을 주었다.

4김흔이 소백산에 들어가다

及歸,國王以不辱命,擢授南原太守,累遷至康州大都督,尋加伊飡兼相國。開成己未閏正月,為大將軍,領軍十萬,禦淸海兵於大丘,敗績。自以敗軍,又不能死綏,不復仕宦。入小白山,葛衣蔬食,與浮圖遊。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感疾終於山齋,享年四十七歲,以其年九月十日,葬於奈靈郡之南原。無嗣子,夫人主喪事,後為比丘尼。

돌아오매 국왕이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뽑아 남원 태수를 주었고, 여러 번 옮겨 강주대도독에 이르렀으며 이윽고 이찬 겸 상국을 더하였다.

개성 기미 윤정월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청해의 군사를 대구에서 막다가 졌다. 스스로 군사를 지고도 또 물러섬에 죽지 못하였다 하여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소백산에 들어가 칡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며 승려와 함께 노닐었다.

대중 삼년 팔월 스무이레에 이르러 병들어 산의 집에서 마치니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그해 구월 열흘에 나령군 남원에 장사 지냈다. 뒤이을 아들이 없어 부인이 상사를 주관하였고 뒤에 비구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