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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림답부明臨荅夫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1 · 한자 262자 · 낭독 1.0분

「삼국사기」 열전 「명림답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명림답부가 좌원에서 이기다

明臨荅夫,高句麗人也。新大王時,為國相。漢玄菟郡大守太守耿臨,發大兵欲攻我,王問群臣戰守孰便。衆議曰:「漢兵,恃衆輕我,若不出戰,彼以我為怯,數來,且我國山險而路隘,此所謂一夫當關,萬夫莫當者也。漢兵雖衆,無如我何,請出師禦之。」荅夫曰:「不然,漢國大民衆,今以强兵遠鬪,其鋒不可當也。而又兵衆者宜戰,兵小少者宜守,兵家之常也。今,漢人千里轉糧,不能持久,若我深溝高壘,淸野以待之,彼必不過旬月,饑困而歸。我以勁卒迫之,可以得志。」王然之,嬰城固守。漢人攻之不克,士卒饑餓引還。荅夫帥師數千騎,追之,戰於坐原,漢軍大敗,匹馬不反。王大悅,賜答夫坐原及質山,為食邑。十五年秋九月卒,年百十三歲。王自臨慟,罷朝七日,以禮葬於質山,置守墓二十家。

명림답부는 고구려 사람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이 큰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려 하니, 왕이 여러 신하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은지 물었다.

여럿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사가 수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얕보니, 만약 나가 싸우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겁쟁이로 여겨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많으나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니, 군사를 내어 막기를 청합니다."

답부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이제 강한 군사로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칼끝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이는 마땅히 싸우고 군사가 적은 이는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가의 떳떳함입니다. 이제 한나라 사람이 천 리에 양식을 나르니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우고 기다리면, 저들은 반드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주리고 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굳센 군사로 다그치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을 지키고 굳게 막았다. 한나라 사람이 쳐도 이기지 못하고 군사가 주려 이끌고 돌아가므로, 답부가 수천 기를 거느리고 뒤쫓아 좌원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져서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내려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십오년 가을 구월에 죽으니 나이 백열셋이었다. 왕이 몸소 나아가 슬퍼하고 이레 동안 조회를 그쳤으며, 예로 질산에 장사 지내고 무덤 지킬 스무 집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