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삼국사기 › 열전

최치원崔致遠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5 · 한자 1,247자 · 낭독 5.0분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과거에 오르다

崔致遠,字孤雲,王京沙梁部人也。史傳泯滅,不知其世系。致遠少,精敏好學。至年十二,將隨海舶入唐求學,其父謂曰:「十年不第,卽非吾子也,行矣勉之!」致遠至唐,追師學問無怠。乾符元年甲午,禮部侍郞裴瓚下,一擧及第,調授宣州溧水縣尉。考績為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時黃巢叛,高騈為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辟致遠為從事,以委書記之任,其表狀書啓傳之至今。及年二十八歲,有歸寧之志,僖宗知之,光啓元年,使將詔書來聘。留為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致遠自以西學多所得,及來將行己志,而衰季多疑忌,不能容,出為山郡太守。唐昭宗景福二年,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沒於海,卽差橻城郡太守金峻為告奏使。

최치원은 자가 고운이요 왕경 사량부 사람이다. 역사의 전함이 없어져 그 계보를 알 수 없다.

치원이 어려서 정밀하고 재빠르며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열둘이 되매 바닷배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배움을 구하려 하니, 그 아버지가 말하였다. "열 해에 과거에 오르지 못하면 곧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라."

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건부 원년 갑오에 예부시랑 배찬 아래에서 한 번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위에 임명되었고 고과에 따라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어 자금어대를 받았다.

그때 황소가 배반하매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어 쳤다. 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고 서기의 소임을 맡기니, 그 표와 장과 서와 계가 지금까지 전한다.

나이 스물여덟이 되매 어버이를 뵈러 돌아갈 뜻이 있으니, 희종이 이를 알고 광계 원년에 조서를 가지고 예방하게 하였다. 머물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가 되었다.

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 하여, 돌아와 제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한 말세라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못하고, 나가서 산골 고을 태수가 되었다.

당나라 소종 경복 이년에 정절을 바치러 가던 사신 병부시랑 김처회가 바다에 빠져 죽으매, 곧 추성군 태수 김준을 가려 고주사로 삼았다.

협주 1

或云海雲。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2태사시중에게 올린 글

時致遠為富城郡太守,王召為賀正使,以比歲饑荒,因之,盜賊交午,道梗不果行。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但不知其歲月耳。故其文集有上太師侍中狀云:「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句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為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貞觀中,我唐太宗皇帝,親統六軍渡海,恭行天罰,高句麗畏威請和,文皇受降廻蹕。此際我武烈大王,請以犬馬之誠,助定一方之難,入唐朝謁,自此而始。後以高句麗、百濟,踵前造惡,武烈入朝請為鄕導。至高宗皇帝顯慶五年,勅蘇定方,統十道强兵、樓舡萬隻,大破百濟,乃於其地,置扶餘都督府,招緝遺氓,蒞以漢官,以臭味不同,屢聞離叛,遂徙其人於河南。

그때 치원이 부성군 태수였는데 왕이 불러 하정사로 삼았다. 그러나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하여 도둑이 어지러이 일어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 치원도 또한 일찍이 사신을 받들어 당나라에 갔으나 다만 그 해와 달을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상태사시중장」이 있어 이르기를 이러하다.

"엎드려 들으니, 동해 밖에 세 나라가 있어 그 이름이 마한과 변한과 진한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온전히 성하던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라, 남으로 오와 월을 침노하고 북으로 유주와 연주와 제와 노를 어지럽혀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다스림을 잃은 것은 요동을 친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정관 연간에 우리 당나라 태종황제가 몸소 여섯 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삼가 하늘의 벌을 행하시니,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매 문황이 항복을 받고 수레를 돌리셨습니다.

이때에 우리 무열대왕이 개와 말의 정성으로 한 지방의 어려움을 평정하는 데 돕기를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고 뵈니, 이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앞의 악을 이어 행하매 무열이 조정에 들어가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종황제 현경 오년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칙명하여 열 길의 강한 군사와 다락배 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크게 깨뜨리고, 이에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어 남은 백성을 불러 모으고 중국 관리로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질이 서로 맞지 않아 여러 번 떠나 배반한다는 말이 들리므로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으로 옮겼습니다.

3발해와 무열대왕의 공

摠章元年,命英公李勣,破高句麗,置安東都督府。至儀鳳三年,徙其人於河南、隴右。高句麗殘孽類聚,北依太白山下,國號為渤海。開元二十年,怨恨天朝,將兵掩襲登州,殺刺史韋俊。於是,明皇帝大怒,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卿金思蘭,發兵過海攻討,仍就加我王金某,為正太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以冬深雪厚,蕃、漢苦寒,勅命廻軍。至今三百餘年,一方無事,滄海晏然,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今某儒門末學,海外凡村材,謬奉表章,來朝樂土,凡有誠懇,禮合披陳。伏見:元和十二年,本國王子,金張廉風飄,至明州下岸,浙東某官,發送入京。中和二年,入朝使金直諒,為叛臣作亂,道路不通,遂於楚州下岸,邐迤至楊州,得知聖駕幸蜀。

총장 원년에 영공 이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습니다. 의봉 삼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로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기대어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습니다.

개원 이십년에 천자의 조정을 원망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를 몰래 습격하여 자사 위준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가 크게 노하시어 내사 고품과 하행성과 태복경 김사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 쳐 치게 하시고, 이어 우리 왕 김 아무개에게 정태위 지절 충영해군사 계림주대도독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겨울이 깊고 눈이 두터워 번인과 한인이 추위에 괴로워하므로 칙명으로 군사를 돌리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삼백여 년에 한 지방에 일이 없고 푸른 바다가 편안하니, 이는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입니다.

이제 저는 유가의 문에 끝 배움이요 바다 밖 예사 시골의 재목인데, 그릇되이 표장을 받들고 즐거운 땅에 조회하러 왔습니다. 무릇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있으면 예로 마땅히 펴 아뢰어야 합니다.

엎드려 보건대 원화 십이년에 본국 왕자 김장렴이 바람에 떠밀려 명주에 이르러 언덕에 내리매 절동의 어떤 벼슬아치가 서울로 보냈고, 중화 이년에 조회하러 가던 사신 김직량이 배반한 신하가 난을 일으켜 길이 통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초주에 내려 이리저리 양주에 이르러 성상의 수레가 촉에 거둥하신 줄 알았는데,

4배와 말을 대어 주기를 청하다

高大尉太尉差都頭張儉,監押送至西川。已前事例分明。伏乞:太師侍中,俯降台恩,特賜水陸券牒,令所在供給舟舡,熟食及長行驢馬草料,幷差軍將,監送至駕前。」此所謂太師侍中,姓名亦不可知也。致遠自西事大唐,東歸故國,皆遭亂世,屯邅蹇連,動輒得咎,自傷不遇,無復仕進意,逍遙自放,山林之下、江海之濱,營臺榭植松竹,枕藉書史,嘯詠風月。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凉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此皆遊焉之所。最後,帶家隱伽耶山海印寺,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結為道友,棲遲偃仰,以終老焉。始西遊時,與江東詩人羅隱相知。隱負才自高,不輕許可人,示致遠所製歌詩五軸。又與同年顧雲友善,將歸,顧雲以詩送別,略曰:「我聞海上三金鼈,金鼈頭戴山高高。

고태위가 도두 장검을 가려 감압하여 서천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앞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엎드려 비오니 태사시중께서 굽어 큰 은혜를 내리시어, 특별히 물길과 뭍길의 문서를 내리시어 있는 곳마다 배와 익힌 밥과 먼 길 갈 나귀와 말과 꼴을 대어 주게 하시고, 아울러 군장을 가려 임금의 수레 앞까지 감독하여 보내게 하소서."

여기 이른바 태사시중은 성명 또한 알 수 없다.

치원이 서쪽으로 당나라를 섬기고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와서도 다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머뭇거리고 걸리며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으니,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여 다시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이리저리 노닐며 스스로 놓아 산림 아래와 강과 바닷가에 대와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며, 책과 역사를 베고 깔고 바람과 달을 읊었다.

경주 남산과 강주 빙산과 합주 청량사와 지리산 쌍계사와 합포현의 별장 같은 곳이 다 그가 노닐던 곳이다.

맨 나중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친형인 승려 현준과 정현 스승과 도의 벗을 맺어 한가로이 지내며 늙어 마쳤다.

처음 서쪽에 노닐 때 강동의 시인 나은과 서로 알았다. 나은이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아 남을 가벼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치원이 지은 가시 다섯 축을 보였다.

또 같은 해에 급제한 당나라 시인 고운(顧雲)과 사이가 좋았는데, 돌아가려 할 때 고운이 시로 이별을 보내니 대략 이러하다.

"내 들으니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가 있어 금자라가 머리에 산을 이니 산이 높고 높다.

5고운의 송별시와 최치원의 뒷일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傍邊一點雞林碧,鼈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橫行戰詞苑,一箭射破金門策。」《新唐書藝文志》云:「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注云:「崔致遠高麗人,賓貢及第為高騈從事。」其名聞上國如此。又有《文集》三十卷,行於世。初我太祖作興,致遠知非常人,必受命開國,因致書問有「雞林黃葉,鵠嶺靑松」之句。其門人等,至國初來朝,仕至達官者非一。顯宗在位,為致遠密贊祖業,功不可忘,下敎,贈內史令,至十四歲太平二三年癸亥五二月,贈諡文昌侯。

산 위에는 구슬 궁궐과 조개 대궐과 황금 전각이요 산 아래에는 천 리 만 리의 큰 물결이라. 그 곁의 한 점 계림이 푸르니 자라산이 빼어남을 품어 기특한 이를 낳았구나. 열둘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이 중화의 나라를 감동시켰다. 열여덟에 글밭을 가로질러 싸워 화살 하나로 금문의 책문을 쏘아 깨뜨렸다."

『신당서』 「예문지」에 이르기를 "최치원의 『사륙집』 한 권과 『계원필경』 스무 권"이라 하고, 주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고려 사람이니 빈공으로 급제하여 고변의 종사가 되었다" 하였으니, 그 이름이 상국에 들림이 이와 같다. 또 『문집』 서른 권이 있어 세상에 다닌다.

처음에 고려 태조가 일어나매 치원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명을 받아 나라를 열 줄 알고, 이로 인하여 글을 보내어 문안하며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문인들이 나라 초에 이르러 조정에 와서 벼슬이 높은 벼슬아치에 이른 이가 하나가 아니다.

현종이 자리에 있을 때 치원이 몰래 조상의 업을 도와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영을 내려 내사령을 추증하고, 십사년 태평 이년 계해 이월에 이르러 시호를 문창후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