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삼국사기 › 열전

열기裂起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2 · 한자 389자 · 낭독 1.6분

「삼국사기」 열전 「열기」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열기가 소정방에게 가다

裂起,史失族姓。文武王元年,唐皇帝遣蘇定方,討高句麗,圍平壤城。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送軍資平壤。王命大角干金庾信,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到獐塞,風雪沍寒,人馬多凍死。麗人知兵疲,欲要擊之。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欲移書而難其人。時裂起以步騎監輔行,進而言曰:「某雖駑蹇,願備行人之數。」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持弓劒走馬,麗人望之,不能遮閼。凡兩日致命於蘇將軍,唐人聞之,喜慰廻書。裂起又兩日廻,庾信嘉其勇,與級飡位。及軍還,庾信告王曰:「裂起、仇近,天下之勇士也。臣以便宜許位級飡,而未副功勞,願加位沙飡。」王曰:「沙飡之秩,不亦過乎?」庾信再拜曰:「爵祿公器,所以酬功,何謂過乎?」王允之。

열기는 역사에 겨레와 성을 잃었다.

문무왕 원년에 당나라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어 고구려를 쳐서 평양성을 에웠다.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국왕에게 명을 전하여 군수품을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왕이 대각간 김유신에게 명하여 쌀 사천 섬과 조 이만 이천이백쉰 섬을 나르게 하였는데, 장새에 이르러 바람과 눈에 얼어붙는 추위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 사람이 군사가 지친 줄 알고 요격하려 하였다.

당나라 진영에서 삼만여 걸음 떨어졌는데 나아갈 수 없어 글을 보내려 하나 그 사람을 얻기 어려웠다.

그때 열기가 보기감으로 따라갔는데 나아가 말하였다. "제가 비록 둔하나 바라건대 심부름꾼의 수를 채우고자 합니다."

마침내 군사 구근 등 열다섯 사람과 함께 활과 칼을 지니고 말을 달리니, 고구려 사람이 바라보고도 막지 못하였다. 무릇 이틀에 소 장군에게 명을 전하니 당나라 사람이 이를 듣고 기뻐 위로하며 답서를 보냈다. 열기가 또 이틀에 돌아오매 유신이 그 용맹을 아름다이 여겨 급찬 자리를 주었다.

군사가 돌아오매 유신이 왕에게 아뢰었다.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형편에 따라 급찬 자리를 허락하였으나 아직 공로에 맞지 않으니, 바라건대 사찬 자리를 더하소서."

왕이 말하였다. "사찬의 품계는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유신이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벼슬과 녹은 공변된 그릇이라 공을 갚는 바인데 어찌 지나치다 하겠습니까." 왕이 허락하였다.

2열기와 구근의 뒷일

後庾信之子三光執政,裂起就求郡守,不許。裂起與祗園寺僧順憬曰:「我之功大,請郡不得,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順憬說三光,三光授以三年山郡大守太守。仇近從元貞公,築西原述城,元貞公聞人言,謂怠於事,杖之。仇近曰:「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不辱大角干之命,大角干不以僕為無能,待以國士,今以浮言罪之,平生之辱,無大此焉。」元貞聞之,終身羞悔。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이 정사를 잡으매 열기가 나아가 군수 되기를 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지원사 승려 순경에게 말하였다. "내 공이 큰데 군을 청하여도 얻지 못하니, 삼광이 아마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나를 잊은 것인가." 순경이 삼광을 달래니 삼광이 삼년산군 태수를 주었다.

구근이 원정공을 좇아 서원 술성을 쌓을 때, 원정공이 남의 말을 듣고 일에 게으르다 하여 매질하였다.

구근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열기와 함께 헤아릴 수 없는 땅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이 저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나라의 선비로 대하였습니다. 이제 뜬말로 죄주시니 평생의 욕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원정이 이를 듣고 몸을 마치도록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