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淵蓋蘇文
1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다
蓋蘇文,姓淵氏。自云生水中,以惑衆。儀表雄偉,意氣豪逸。其父東部大人大對盧死,蓋蘇文當嗣。而國人以性忍暴,惡之,不得立。蘇文頓首謝衆,請攝職。如有不可,雖廢無悔。衆哀之,遂許。嗣位而凶殘不道,諸大人與王密議欲誅。事洩,蘇文悉集部兵,若將校閱者,并盛陳酒饌於城南,召諸大臣共臨視。賔至,盡殺之,凡百餘人。馳入宮弑王,斷為數叚,棄之溝中。立王弟之子臧為王,自為莫離支。其官如唐兵部尚書兼中書令職也。於是號令逺近,專制國事,甚有威嚴。身佩五刀,左右莫敢仰視。每上下馬,常令貴人、武將伏地而履之。出行必布隊伍,前導者長呼,則人皆奔迸,不避坑谷,國人甚苦之。唐太宗聞蓋蘇文弑君而專國,欲伐之。
개소문은 성이 연씨다. 스스로 물속에서 났다 하여 무리를 미혹하였다. 거동과 모습이 씩씩하고 뛰어나며 뜻과 기운이 호방하였다.
그 아버지 동부 대인 대대로가 죽으매 개소문이 마땅히 이어야 하였다. 그러나 나라 사람이 성품이 모질고 사납다 하여 미워하므로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려 여럿에게 사과하고 벼슬을 대신 맡기를 청하며, 만약 옳지 않으면 비록 폐하여도 뉘우침이 없겠다 하니 여럿이 가엾이 여겨 마침내 허락하였다.
자리를 이으매 흉악하고 잔인하며 도가 없으므로 여러 대인이 왕과 몰래 의논하여 베려 하였다. 일이 새매 소문이 부의 군사를 다 모아 장차 사열할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안주를 성대히 벌여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보게 하였다. 손님이 이르매 다 죽이니 무릇 백여 사람이었다.
궁으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몇 동강으로 끊어 도랑 가운데 버렸다. 왕의 아우의 아들 장을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그 벼슬은 당나라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직과 같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 호령하고 나라 일을 오로지 다스리니 위엄이 매우 있었다. 몸에 칼 다섯을 차니 좌우가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말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늘 귀한 이와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그 등을 밟았다. 나갈 때는 반드시 대오를 벌이고 앞에서 이끄는 이가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다 달아나 흩어져 구덩이와 골짜기도 피하지 않으니, 나라 사람이 몹시 괴로워하였다.
당나라 태종이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오로지한다는 말을 듣고 치고자 하였다.
협주 2
或云蓋金。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或云西部。
그 아버지 동부(東部)는 서부(西部)라고도 한다.
2현장이 와서 타이르다
長孫無忌曰:「蘇文自知罪大,畏大國之討,設其守備。陛下姑為之隱忍,彼得以自安,愈肆其惡,然後取之,未晩也。」帝從之。蘇文告王曰:「聞中國三教並行,而國家道教尚缺,請遣使於唐求之。」王遂表請。唐遣道士叔達等八人,兼賜《道德經》。於是取浮屠寺館之。會新羅入唐,告:「百濟攻取我四十餘城,復與高勾麗連兵,謀絶入朝之路。小國不得已出師,伏乞天兵救援。」於是太宗命司農丞相聖玄奬賚璽書,勑王曰:「新羅委真國家,朝貢不闕。爾與百濟,宜各戢兵。若更攻之,明年發兵討爾國矣。」初,玄奬入境,蘇文已將兵擊新羅,王使召之乃還。玄奬宣勑,蘇文曰:「往者隋人侵我,新羅乘釁,奪我城邑五百里,自此怨隙已久。若非還我侵地,兵不能已。
장손무기가 말하였다. "소문이 스스로 죄가 큰 줄 알고 큰 나라가 칠까 두려워하여 그 지킴을 갖추었습니다. 폐하께서 우선 참으시면 저가 스스로 편안하다 여겨 그 악을 더욱 마음대로 할 것이니, 그런 뒤에 취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황제가 그 말을 좇았다.
소문이 왕에게 아뢰었다. "듣건대 중국에 세 가르침이 아울러 행하는데 나라에 도교가 아직 빠졌으니, 청컨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구하소서." 왕이 마침내 표로 청하였다. 당나라가 도사 숙달 등 여덟 사람을 보내고 아울러 『도덕경』을 내렸다. 이에 절을 가져다 관사로 삼았다.
마침 신라가 당나라에 들어가 아뢰었다. "백제가 우리 사십여 성을 쳐서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군사를 이어 조회하러 가는 길을 끊기를 꾀합니다. 작은 나라가 마지못하여 군사를 내니 엎드려 하늘의 군사로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에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명하여 새서를 가지고 왕에게 칙명하게 하였다. "신라가 참으로 나라에 몸을 맡겨 조공이 빠지지 않는다. 너와 백제는 마땅히 각각 군사를 거두라. 만약 다시 친다면 내년에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치겠다."
처음에 현장이 지경에 들어올 때 소문이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왕이 사람을 시켜 부르매 이내 돌아왔다.
현장이 칙명을 펴니 소문이 말하였다. "지난날 수나라 사람이 우리를 침노할 때 신라가 틈을 타 우리 성읍 오백 리를 빼앗았으니, 이로부터 원한과 틈이 이미 오래다. 만약 우리가 침노당한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군사는 그칠 수 없다."
3남생 형제가 갈라지다
」玄奬曰:「既徃之事,焉可追論?今遼東本皆中國郡縣,中國尚不言,勾麗豈得必求故地?」蘇文不從,玄奬還具言之。太宗曰:「蓋蘇文弑其君,賊其大臣,殘虐其民。今又違我詔命,不可以不討。」又遣使蔣儼諭旨。蘇文竟不奉詔,乃以兵脅。使者不屈,遂囚之窟室中。於是太宗大舉兵親征之。事具《勾麗本紀》。蘇文至乾封元年死。子男生,字元德。九𡻷,以父任為先人,遷中裏小兄,猶唐謁者也。又為中裏大兄,知國政,凡辭令皆男生主之。進中裏位頭大兄。乆之,為莫離支兼三軍大將軍,加大莫離支,出按諸部。而弟男建、男産知國事。或曰:「男生惡君等逼己,將除之。」建、産未之信。又有謂男生:「將不納君。」男生遣諜徃。男建捕得,即矯王命召之。
현장이 말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좇아 따지겠는가. 이제 요동은 본디 다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이 오히려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가 어찌 반드시 옛 땅을 구할 수 있겠는가."
소문이 따르지 않으매 현장이 돌아가 갖추어 말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개소문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그 대신을 해쳤으며 그 백성을 모질게 하였다. 이제 또 나의 조명을 어기니 치지 않을 수 없다."
또 사신 장엄을 보내어 뜻을 타일렀다. 소문이 마침내 조서를 받들지 않고 이에 군사로 위협하였다. 사자가 굽히지 않으매 마침내 굴방 안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몸소 쳤으니 일은 「고구려본기」에 갖추어져 있다.
소문이 건봉 원년에 이르러 죽었다.
아들 남생은 자가 원덕이다. 아홉 살에 아버지의 임명으로 선인이 되었고 중리소형으로 옮겼으니 당나라 알자와 같다. 또 중리대형이 되어 나라 정사를 맡으니 무릇 말과 명령을 다 남생이 주관하였다. 중리위두대형에 올랐다.
오래되어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되고 대막리지를 더하여 나가서 여러 부를 살폈다. 그러자 아우 남건과 남산이 나라 일을 맡았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남생이 그대들이 자기를 다그침을 미워하여 없애려 한다." 건과 산이 이를 믿지 않았다. 또 남생에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장차 그대를 들이지 않으려 한다."
남생이 첩자를 보내어 가게 하였는데 남건이 잡아 얻고, 곧 왕의 명이라 속여 불렀다.
4남생과 헌성
男生懼不敢入。男建殺其子獻忠,男生走保國內城,率其衆與契丹、靺鞨兵附唐,遣子獻誠訴之。高宗拜獻誠右武衛將軍,賜乗輿、馬、瑞錦、寳刀,使還報。詔契苾何力率兵援之,男生乃免。授平壤道行軍大捴管,兼持節安撫大使,舉哥勿、南蘇、倉巖等城以降。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就軍慰勞,賜帶金釦七事。明年,召入朝,遷遼東大都督、玄菟郡公,賜第京師。因詔還軍,與李勣攻平壤,入禽王。帝詔遣子,即遼水勞賜。還,進右衛大將軍、卞國公。年四十六卒。男生純厚有禮,奏對敏辯,善射藝。其初至,伏斧鑕待罪。世以此稱焉。獻誠,天授中以右衛大將軍兼羽林衛。武后甞出金幣,於文武官內擇善射者五人,中者以賜之。內史張光輔先讓獻誠,為第一。獻誠後讓右王鈐衛大將軍薛吐摩支,摩支又讓獻誠。
남생이 두려워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그 아들 헌충을 죽이니, 남생이 달아나 국내성을 지키고 그 무리와 거란과 말갈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붙었으며 아들 헌성을 보내어 하소연하였다.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장군을 주고 수레와 말과 상서로운 비단과 보배로운 칼을 내려 돌아가 알리게 하였다. 조서로 계필하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도우라 하니 남생이 이에 벗어났다.
평양도행군대총관 겸 지절안무대사를 주니, 가물과 남소와 창암 등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 서대사인 이건역에게 명하여 군중에 나아가 위로하게 하고 금 단추 일곱 가지가 달린 띠를 내렸다.
이듬해에 불러 조정에 들이고 요동대도독 현도군공으로 옮기며 서울에 집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조서로 군사에 돌아가 이적과 함께 평양을 쳐서 들어가 왕을 사로잡았다. 황제가 조서로 아들을 보내어 곧 요수에서 위로하고 내리게 하였다. 돌아와 우위대장군 변국공에 올랐다. 나이 마흔여섯에 죽었다.
남생은 순수하고 도타우며 예가 있고 아뢰고 답함에 재빠르고 말을 잘하였으며 활 재주를 잘하였다. 처음 이르렀을 때 도끼와 모탕에 엎드려 죄를 기다렸으므로 세상이 이로써 일컬었다.
헌성은 천수 연간에 우위대장군으로 우림위를 겸하였다. 무후가 일찍이 금과 비단을 내어 문무 벼슬아치 가운데 활 잘 쏘는 이 다섯을 가려 맞히는 자에게 주려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사양하여 헌성이 첫째가 되었다. 헌성이 뒤에 우왕검위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사양하니 마지가 또 헌성에게 사양하였다.
5헌성이 억울하게 죽다
既而獻誠奏曰:「陛下擇善射者,然多非華人。臣恐唐官以射為恥,不如罷之。」后嘉納。來俊臣甞求貨,獻誠不答,乃誣其謀叛,縊殺之。后後知其寃,贈右羽林衛大將軍,以禮改葬。
이윽고 헌성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이를 가리시나 중국 사람이 아닌 이가 많습니다. 신은 당나라 벼슬아치가 활쏘기를 부끄럽게 여길까 두려우니 그만두는 것만 못합니다." 무후가 아름다이 여겨 받아들였다.
내준신이 일찍이 재물을 구하였으나 헌성이 답하지 않으매, 이에 배반을 꾀하였다고 무고하여 목매어 죽였다. 무후가 뒤에 그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로 고쳐 장사 지냈다.
6사론 — 개소문은 큰 거스름에 이르렀다
論曰: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太宗伐高勾麗,何以不克?」介甫曰:「蓋蘇文非常人也。」然則蘇文亦才士也,而不能以直道奉國,殘暴自肆,以至大逆。《春秋》「君弑賊不討,謂之國無人」,而蘇文保腰領以死於家,可謂幸而免者。男生、獻誠,雖有聞於唐室,而以本國言之,未免為叛人者矣。
김부식이 논한다.
송나라 신종이 왕개보와 일을 논하여 말하였다. "태종이 고구려를 쳐서 어찌 이기지 못하였는가."
개보가 말하였다. "개소문은 예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소문도 또한 재주 있는 선비다. 그러나 곧은 도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하고 사나움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여 큰 거스름에 이르렀다.
『춘추』에 "임금이 시해되었는데 도둑을 치지 않으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 한다" 하였는데, 소문이 허리와 목을 보전하여 집에서 죽었으니 요행히 면하였다 할 만하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나라 왕실에 들림이 있었으나, 본국으로 말하면 배반한 사람이 됨을 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