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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

삼국사기 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 · 1145년 (고려 인종 23) · 단락 17 · 한자 1,987자 · 낭독 7.9분

「삼국사기」 열전 「궁예」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 신라·고구려·백제 본기와 지·표·열전으로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곳곳에 「論曰」로 자기 평을 달아 두어, 편찬자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나무랐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궁예가 버려지다

弓裔,新羅人,姓金氏。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母憲安王嬪御,失其姓名。或云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以五月五日,生於外家。其時屋上有素光,若長虹,上屬天。日官奏曰:「此兒以重午日生,生而有齒,且光焰異常,恐將來不利於國家,宜勿養之。」王勑中使抵其家殺之。使者取於襁褓中,投之樓下。乳婢竊捧之,誤以手觸,眇其一目。抱而逃竄,劬勞養育。年十餘歲,遊戱不止。其婢告之曰:「子之生也,見棄於國,予不忍,竊養,以至今日。而子之狂如此,必為人所知,則予與子俱不免,為之奈何?」弓裔泣曰:「若然,則吾逝矣,無為母憂。」便去世達寺,今之興教寺是也。祝髮為僧,自號善宗。及壯,不拘檢僧律軒輊,有膽氣。甞赴齋,行次有烏鳥銜物,落所持鉢中,視之牙籤,書「王」字,則秘而不言,頗自負。

궁예는 신라 사람이니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마흔일곱째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인데 그 성과 이름을 잃었다. 마흔여덟째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오월 초닷샛날 외갓집에서 났다.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 같은 것이 위로 하늘에 이어졌다. 일관이 아뢰었다. "이 아이는 중오일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 빛과 불꽃이 예사롭지 않으니, 앞으로 나라에 이롭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기르지 마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에게 칙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하였다. 사자가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아래로 던졌다. 젖어미가 몰래 받았는데 잘못 손이 닿아 그 한 눈을 멀게 하였다. 안고 달아나 숨어 애써 길렀다.

나이 열몇 살에 놀이를 그치지 않으매 그 젖어미가 알렸다. "네가 났을 때 나라에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못하여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에게 알려질 것이요, 그러면 나와 네가 함께 면하지 못할 터이니 어찌하랴."

궁예가 울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않겠소."

곧 세달사로 갔으니 지금의 흥교사가 이것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 하였다.

장성하매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담기가 있었다. 일찍이 재에 나아가는데 가는 길에 까마귀가 물건을 물고 있다가 지닌 바리때 속에 떨어뜨렸다. 보니 상아 산가지에 「왕(王)」 자가 적혀 있었다. 곧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나 자못 스스로 자부하였다.

2기훤에게 몸을 던지다

見新羅衰季,政荒民散,王畿外州縣叛附相半,逺近羣盜蜂起蟻聚,善宗謂乗亂聚衆可以得志,以真聖王即位五年,大順二年辛亥,投竹州賊魁箕萱。箕萱侮慢,不禮善宗,鬱悒不自安,潜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為友。

신라가 쇠하고 저물어 정사가 거칠고 백성이 흩어지며, 서울 밖의 주와 현이 배반하여 붙는 것이 반반이요 멀고 가까운 곳에 뭇 도둑이 벌 떼처럼 일어나고 개미처럼 모이는 것을 보았다. 선종이 어지러움을 타 무리를 모으면 뜻을 얻을 만하다 여겨, 진성왕이 자리에 오른 다섯째 해인 대순 이년 신해에 죽주의 도둑 우두머리 기훤에게 몸을 던졌다.

기훤이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선종을 예로 대하지 않으매, 답답하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므로 몰래 기훤의 아래에 있는 원회와 신훤 등과 맺어 벗을 삼았다.

3양길에게 가다

景福元年壬子,投北原賊梁吉。吉善遇之,委任以事,遂分兵,使東略地。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경복 원년 임자에 북원의 도둑 양길에게 몸을 던졌다. 양길이 잘 대접하고 일을 맡기며 마침내 군사를 나누어 동쪽 땅을 치게 하였다.

이에 나가 치악산 석남사에 묵고, 주천과 내성과 울오와 어진 등 현을 다니며 습격하여 다 항복시켰다.

4스스로 장군이 되다

乾寧元年,入溟州,有衆三千五百人,分為十四隊,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為舍上。與士卒同甘苦勞逸,至於予奪,公而不私,是以衆心畏愛,推為將軍。於是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軍聲甚盛。現浿西賊寇來降者衆多,善宗自以為衆大,可以開國稱君,始設內外官職。我太祖自松岳郡來投,便授鐵圓郡太守。

건녕 원년에 명주에 들어가니 무리가 삼천오백 사람이었다. 나누어 열네 대를 만들고 김대와 검모와 흔장과 귀평과 장일 등을 사상으로 삼았다.

사졸과 더불어 달고 씀과 괴로움과 편함을 같이하고 주고 빼앗음에 이르러서는 공변되고 사사롭지 않았다. 이로써 무리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밀어 장군으로 삼았다.

이에 저족과 성천과 부약과 금성과 철원 등 성을 쳐서 깨뜨리니 군사의 소리가 몹시 성하였다. 패서의 도둑 무리로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선종이 스스로 무리가 크다 여겨 나라를 열고 임금이라 일컬을 만하다 하여 비로소 안팎의 벼슬자리를 베풀었다.

고려 태조가 송악군에서 와서 몸을 던지니 곧 철원군 태수를 주었다.

협주 1

舍上謂部長也。

사상(舍上)은 부장(部長)을 이른다.

5송악에 도읍을 정하다

三年丙辰,攻取僧嶺、臨江兩縣。四年丁巳,仁物縣降。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山水竒秀,遂定以為都。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時梁吉猶在北原,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聞善宗地廣民衆,大怒,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善宗潜認先擊,大敗之。

삼년 병진에 승령과 임강 두 현을 쳐서 빼앗았다. 사년 정사에 인물현이 항복하였다.

선종이 송악군은 한수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요 산과 물이 기이하고 빼어나다 하여 마침내 정하여 도읍으로 삼았다. 공암과 검포와 혈구 등 성을 쳐서 깨뜨렸다.

그때 양길이 아직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 등 서른여 성을 취하여 가졌다. 선종이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서른여 성의 굳센 군사로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몰래 알고 먼저 쳐서 크게 무찔렀다.

6팔관회를 처음 열다

光化元年戊午春二月,葺松岳城。以我太祖為精騎大監,伐楊州、見州。冬十一月,始作八關會。

광화 원년 무오 봄 이월에 송악성을 손질하였다. 고려 태조를 정기대감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쳤다. 겨울 십일월에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7태조에게 아찬을 주다

三年庚申,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青州、槐壤等,皆平之。以功授太祖阿飡之職。

삼년 경신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와 충주와 당성과 청주와 괴양 등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공으로 태조에게 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협주 1

或云青川。

청주(青州)는 청천(青川)이라고도 한다.

8스스로 왕이라 일컫다

天復元年辛酉,善宗自稱王,謂人曰:「徃者新羅請兵於唐,以破高勾麗,故平壤舊都,鞠為茂草。吾必報其讎。」蓋怨生時見棄,故有此言。甞南巡至興州浮石寺,見壁畫新羅王像,發劒擊之,其刃迹猶在。

천복 원년 신유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깨뜨렸으므로 평양 옛 서울이 잡초 덮인 곳이 되었다.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 날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였으므로 이런 말이 있은 것이다.

일찍이 남쪽을 돌다가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린 신라 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그 칼 자국이 아직도 있다.

9나라 이름을 마진이라 하다

天祐元年甲子,立國號為摩震,年號為武泰。始置廣評省,備員匡治奈、徐事、外書。又置兵部、大龍部、壽春部、奉賔部、義刑臺、納貨府、調位府、內奉省、禁書省、南廂壇、水壇、元鳳省、飛龍省、物藏省。又置史臺、植貨府、障繕府、珠淘省。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秋七月,移青州人戶一千入鐵圓城為京。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公州將軍弘竒來降。

천우 원년 갑자에 나라 이름을 세워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처음으로 광평성을 두고 벼슬아치로 광치나와 서사와 외서를 갖추었다. 또 병부와 대룡부와 수춘부와 봉빈부와 의형대와 납화부와 조위부와 내봉성과 금서성과 남상단과 수단과 원봉성과 비룡성과 물장성을 두었다. 또 사대와 식화부와 장선부와 주도성을 두었다. 또 정광과 원보와 대상과 원윤과 좌윤과 정조와 보윤과 군윤과 중윤 등 품계와 벼슬을 베풀었다.

가을 칠월에 청주 사람 천 호를 옮겨 철원성에 들여 서울로 삼았다. 상주 등 서른여 주와 현을 쳐서 빼앗으니 공주 장군 홍기가 와서 항복하였다.

협주 20

今侍中。

광치나(匡治奈)는 지금의 시중(侍中)이다.

今侍郞。

서사(徐事)는 지금의 시랑(侍郞)이다.

今員外郞。

외서(外書)는 지금의 원외랑(員外郞)이다.

今倉部。

대룡부(大龍部)는 지금의 창부(倉部)다.

今禮部。

수춘부(壽春部)는 지금의 예부(禮部)다.

今禮賔省。

봉빈부(奉賓部)는 지금의 예빈성(禮賓省)이다.

今刑部。

의형대(義刑臺)는 지금의 형부(刑部)다.

今大府寺。

납화부(納貨府)는 지금의 대부시(大府寺)다.

今三司。

조위부(調位府)는 지금의 삼사(三司)다.

今都省。

내봉성(內奉省)은 지금의 도성(都省)이다.

今秘書省。

금서성(禁書省)은 지금의 비서성(秘書省)이다.

今將作監。

남상단(南廂壇)은 지금의 장작감(將作監)이다.

今水部。

수단(水壇)은 지금의 수부(水部)다.

今翰林院。

원봉성(元鳳省)은 지금의 한림원(翰林院)이다.

今太僕寺。

비룡성(飛龍省)은 지금의 태복시(太僕寺)다.

今少府監。

물장성(物藏省)은 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이다.

掌習諸譯語。

사대(史臺)는 여러 나라 말을 익히는 일을 맡는다.

掌栽植菓樹。

식화부(植貨府)는 과실나무 심고 가꾸는 일을 맡는다.

掌修理城隍。

장선부(障繕府)는 성과 해자 고치는 일을 맡는다.

掌造成器物。

주도성(珠淘省)은 기물 만드는 일을 맡는다.

10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하다

天祐二年乙丑,入新京,修葺觀闕、樓臺,窮奢極侈。改武泰為聖冊元年。分定浿西十三鎮。平壤城主將軍黔用降,甑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善宗以強盛自矜,意欲并呑,令國人呼新羅為滅都,凡自新羅來者,盡誅殺之。

천우 이년 을축에 새 서울에 들어가 대궐과 다락과 누대를 고쳐 손질하니 사치가 다하고 지나침이 지극하였다. 무태를 고쳐 성책 원년이라 하였다. 패서의 열세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 성주 장군 검용이 항복하고 증성의 붉은 옷 누런 옷 도둑 명귀 등이 돌아와 복종하였다.

선종이 강하고 성함을 스스로 뽐내어 아울러 삼키고자 하는 뜻이 있어, 나라 사람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고 무릇 신라에서 오는 자는 다 베어 죽였다.

11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다

朱梁乾化元年辛未,改聖冊為水德萬歲元年,改國號為泰封。遣太祖率兵伐錦城等,以錦城為羅州。論功,以太祖為大阿飡、將軍。善宗自稱彌勒佛,頭戴金幘,身被方袍,以長子為青光菩薩,季子為神光菩薩。出則常騎白馬,以綵餙其鬃尾,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又命比丘二百餘人梵唄隨後。又自述經二十餘卷,其言妖妄,皆不經之事。時或正坐講說,僧釋聰謂曰:「皆邪說恠談,不可以訓。」善宗聞之怒,以鐵推打殺之。

주량 건화 원년 신미에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 원년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고쳐 태봉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로 삼았다.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선종이 스스로 미륵불이라 일컫고 머리에 금 두건을 쓰고 몸에 방포를 걸쳤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였다. 나갈 때는 늘 흰 말을 타고 채색으로 갈기와 꼬리를 꾸미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로 하여금 깃발과 일산과 향과 꽃을 받들어 앞에서 이끌게 하고, 또 비구 이백여 사람에게 명하여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또 스스로 경 스무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때로 바로 앉아 강설하니 승려 석총이 말하였다. "다 삿된 말과 괴이한 이야기라 가르침으로 삼을 수 없다." 선종이 듣고 노하여 쇠몽둥이로 쳐 죽였다.

12태조가 시중이 되다

三年癸酉,以太祖為波珍飡、侍中。

삼년 계유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13백선장군

四年甲戌,改水德萬歲為政開元年。以太祖為百船將軍。

사년 갑술에 수덕만세를 고쳐 정개 원년이라 하였다. 태조를 백선장군으로 삼았다.

14아내와 두 아들을 죽이다

貞明元年,夫人康氏以王多行非法,正色諫之。王惡之曰:「汝與他人奸,何耶?」康氏曰:「安有此事?」王曰:「我以神通觀之。」以烈火熱鐵杵撞其陰殺之,及其兩兒。爾後多疑急怒,諸寮佐將吏,下至平民,無辜受戮者,頻頻有之,斧壤、鐵圓之人不勝其毒焉。

정명 원년에 부인 강씨가 왕이 법 아닌 일을 많이 행하므로 낯빛을 바로하여 간하였다. 왕이 미워하여 말하였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어찌 된 일이냐."

강씨가 말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내가 신통으로 보았다." 세찬 불에 달군 쇠 절굿공이로 그 음부를 찔러 죽이고 그 두 아이에게까지 미쳤다.

이 뒤로 의심이 많고 성냄이 급하여, 여러 벼슬아치와 장수와 아전으로부터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임을 받는 이가 자주 있으니, 부양과 철원 사람이 그 독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15거울에 나타난 글

先是,有商客王昌瑾自唐來,寓鐵圓市廛。至貞明四年戊寅,於市中見一人,狀貌魁偉,鬢髮盡白,着古衣冠,左手持甆椀,右手持古鏡,謂昌瑾曰:「能買我鏡乎?」昌瑾即以米換之。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不知去處。昌瑾懸其鏡於壁上,日映鏡面,有細字書,讀之若古詩。其畧曰:「上帝降子於辰馬,先操鷄,後搏鴨。於巳年中,二龍見,一則藏身青木中,一則顯形黑金東。」昌瑾初不知有文,及見之,謂非常,遂告于王。王命有司與昌瑾物色,求其鏡主不見,唯於㪍颯寺佛堂有鎮星塑像,如其人焉。王嘆異久之,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含弘等相謂曰:「上帝降子於辰馬者,謂辰韓、馬韓也。二龍見,一藏身青木,一顯形黑金者,青木,松也,松岳郡人以龍為名者之孫,今波珍飡、侍中之謂歟?黑金,鐵也,今所都鐵圓之謂也。

이보다 앞서 장사꾼 왕창근이 당나라에서 와 철원 저잣거리에 붙어 살았다.

정명 사년 무인에 이르러 저자 가운데서 한 사람을 보니 생김새가 크고 씩씩하며 귀밑머리와 머리털이 다 희고 옛 옷과 관을 입었는데, 왼손에 사기그릇을 들고 오른손에 옛 거울을 들고 창근에게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소." 창근이 곧 쌀로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빌어먹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뒤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었더니 해가 거울 낯에 비치매 잔 글씨가 있어 읽으니 옛 시 같았다.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리시니 /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치리라 / 뱀해 가운데 두 용이 나타나 / 하나는 푸른 나무 속에 몸을 감추고 /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 몰랐다가 보고 나서 예사롭지 않다 여겨 마침내 왕에게 알렸다. 왕이 맡은 관청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낯빛을 살펴 그 거울 주인을 찾게 하였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발삽사 불당에 진성의 흙 상이 있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탄식하고 기이하게 여기기를 오래 하다가 글하는 사람 송함홍과 백탁과 허원 등에게 명하여 풀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말하였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렸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이름이다. 두 용이 나타나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 용으로 이름을 삼은 이의 손자, 곧 지금의 파진찬 시중을 이름인가. 검은 쇠는 쇠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을 이름이다.

16여러 장수가 태조를 밀다

今主上初興於此,終滅於此之驗也。先操鷄,後搏鴨者,波珍飡、侍中先得鷄林,後收鴨綠之意也。」宋含弘等相謂曰:「今主上虐亂如此,吾輩若以實言,不獨吾輩為葅醢,波珍飡亦必遭害。」廼飾辭告之。王凶虐自肆,臣寮震懼,不知所措。夏六月,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此,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四人密謀,夜詣太祖私第,言曰:「今主上淫刑以逞,殺妻戮子,誅夷臣寮,蒼生塗炭,不自聊生。自古廢昏立明,天下之大義也。請公行湯、武之事。」太祖作色,拒之曰:「吾以忠純自許,今雖暴亂,不敢有二心。夫以臣替君,斯謂革命。予實否德,敢效殷、周之事乎?」諸將曰:「時乎不再來,難遭而易失。天與不取,反受其咎。今政亂國危,民皆疾視其上如仇讐。

지금 임금이 처음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망하리라는 증험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얻고 뒤에 압록을 거두리라는 뜻이다."

송함홍 등이 서로 말하였다. "지금 임금의 모짐과 어지러움이 이와 같으니, 우리가 만약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만 젓갈이 될 뿐 아니라 파진찬도 반드시 해를 만날 것이다." 이에 말을 꾸며 알렸다.

왕이 흉악하고 모짊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니 신하들이 떨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름 유월에 장군 홍술과 백옥과 삼능산과 복사귀가 — 이는 홍유와 배현경과 신숭겸과 복지겸의 어릴 적 이름이다 — 네 사람이 몰래 꾀하고 밤에 태조의 사삿집에 나아가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지나친 형벌로 마음을 채워 아내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며 신하를 베어 없애니, 백성이 도탄에 빠져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두운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로움입니다. 청컨대 공은 탕임금과 무왕의 일을 행하소서."

태조가 낯빛을 바꾸어 물리치며 말하였다. "나는 충성되고 순수함으로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이제 비록 사납고 어지러우나 감히 두 마음을 두지 못한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갈아 대는 것을 혁명이라 이르거니와, 내가 실로 덕이 없으니 감히 은나라와 주나라의 일을 본받겠는가."

여러 장수가 말하였다.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습니다. 이제 정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이 다 그 윗사람 보기를 원수같이 미워합니다.

17궁예가 망하다

今之德望,未有居公之右者。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豈可雌伏,取死獨夫之手乎?」夫人柳氏聞諸將之議,廼謂太祖曰:「以仁伐不仁,自古而然。今聞衆議,妾猶發憤,況大丈夫乎?今羣心忽變,天命有歸矣。」手提甲領,進太祖,諸將扶衛太祖出門,令前唱曰:「王公已舉義旗!」於是前後奔走來隨者不知其幾人。又有先至宮城門皷噪以待者,亦一萬餘人。王聞之,不知所圖,廼微服逃入山林,尋為斧壤民所害。弓裔起自唐大順二年,至朱梁貞明四年,凡二十八年而滅。

지금의 덕망으로는 공의 오른쪽에 있을 이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으니, 어찌 암컷처럼 엎드려 홀로 된 사내의 손에 죽음을 취하겠습니까."

부인 유씨가 여러 장수의 의논을 듣고 이에 태조에게 말하였다. "어짊으로 어질지 않음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이제 여럿의 의논을 들으니 첩도 오히려 분함이 일어나거늘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이제 뭇 마음이 홀연히 변하였으니 천명이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가 태조를 붙들어 지키며 문을 나서서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드셨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 따르는 이가 몇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또 먼저 궁성 문에 이르러 북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이도 또한 만여 사람이었다.

왕이 이를 듣고 꾀할 바를 알지 못하여 이에 미복으로 산림에 달아나 들었다가 이내 부양 백성에게 해를 입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 이년에 일어나 주량 정명 사년에 이르렀으니 무릇 스물여덟 해 만에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