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행世説新語 德行第一
1진중거는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며 천하를 맑히려는 뜻을 품었다
陳仲舉言爲士則,行爲世範,登車攬轡,有澄淸天下之志。爲豫章太守,至,便問徐孺子所在,欲先看之。主簿白:「群情欲府君先入廨。」陳曰:「武王式商容之閭,席不暇煖。吾之禮賢,有何不可?」
진중거는 말이 선비의 법이 되고 행실이 세상의 본이 되었으며,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면 천하를 맑히려는 뜻이 있었다.
예장 태수가 되어 이르자 곧 서유자가 어디 있는지 물어 먼저 보려 하였다. 주부가 아뢰었다. "뭇사람의 뜻은 부군께서 먼저 관아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진중거가 말하였다. "무왕은 상용의 마을을 지나며 수레 앞턱에 절하느라 자리가 데워질 겨를이 없었다. 내가 어진 이에게 예를 차리는 것이 무엇이 안 될 일인가."
협주 5
《汝南先賢傳》曰:「陳蕃字仲舉,汝南平輿人。有室荒蕪不掃除,曰:『大丈夫當爲國家掃天下。』値漢桓之末,閹豎用事,外戚豪橫。及拜太傅,與大將軍竇武謀誅宦官,反爲所害。」
『여남선현전』에 이르기를 「진번은 자가 중거요 여남 평여 사람이다. 방이 거칠고 어지러운데도 쓸지 않고 말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나라를 위해 천하를 쓸어야 한다』 하였다. 한나라 환제 말년을 만나 내시들이 일을 쥐고 외척이 사납게 굴었다. 태부에 오르자 대장군 두무와 함께 환관 죽일 일을 꾀하다가 도리어 해를 입었다」 하였다.
《海内先賢傳》曰:「蕃爲尚書,以忠正忤貴戚,不得在臺,遷豫章太守。」
『해내선현전』에 이르기를 「진번이 상서가 되어 참되고 바름으로 귀한 외척의 뜻을 거슬러 조정에 있지 못하고 예장 태수로 옮겨졌다」 하였다.
謝承《後漢書》曰:「徐穉字孺子,豫章南昌人。淸妙髙跱,超世絶俗。前後爲諸公所辟,雖不就,及其死,萬里赴弔。常豫炙鷄一隻,以綿漬酒中,㬥乾以裹鷄,徑到所赴冢隧外,以水漬綿,斗米飯,白茅爲藉,以鷄置前。酹酒畢,留謁即去,不見喪主。」
사승의 『후한서』에 이르기를 「서치는 자가 유자요 예장 남창 사람이다. 맑고 묘하며 높이 서서 세상을 뛰어넘고 속됨을 끊었다. 앞뒤로 여러 공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들이 죽으면 만 리를 달려가 조문하였다. 늘 미리 닭 한 마리를 구워 솜을 술에 적셨다가 볕에 말려 닭을 싸 가지고, 곧장 조문할 무덤길 밖에 이르러 솜을 물에 적시고 쌀 한 말 밥을 지어 흰 띠풀을 자리 삼아 닭을 앞에 놓았다. 술을 붓고 나면 뵙기를 청하는 글만 남기고 곧 떠나 상주를 만나지 않았다」 하였다.
許叔重曰:「商容,殷之賢人,老子師也。」車上跽曰式。」
허숙중이 말하기를 「상용은 은나라의 어진 사람이요 노자의 스승이다」 하였다. 수레 위에서 무릎 꿇는 것을 식이라 한다.
袁宏《漢紀》曰:「蕃在豫章,爲穉獨設一榻,去則懸之,見禮如此。」
원굉의 『한기』에 이르기를 「진번이 예장에 있을 때 서치를 위해 홀로 평상 하나를 두었다가 그가 떠나면 걸어 두었으니, 예로 대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2한 달만 황숙도를 보지 못하면 인색한 마음이 되살아난다
周子居常云:「吾時月不見黃叔度,則鄙吝之心已復生矣。」
주자거가 늘 말하였다. "내가 한 달포만 황숙도를 보지 못하면 인색한 마음이 어느새 되살아난다."
협주 1
子居別見《典略》曰:「黃憲字叔度,汝南愼陽人。時論者咸云『顏子復生』。而族出孤鄙,父爲牛醫。潁川荀季和執憲手曰:『足下吾師範也。』後見袁奉髙曰:『卿國有顏子,寧知之乎?』奉髙曰:『卿見吾叔度邪?』戴良少所服下,見憲則自降簿,悵然若有所失。母問:『汝何不樂乎?復從牛醫兒所來邪?』良曰:『瞻之在前,忽焉在後,所謂良之師也。』」
자거는 따로 보인다. 『전략』에 이르기를 「황헌은 자가 숙도요 여남 신양 사람이다. 그때 따지는 이들이 다 『안회가 다시 났다』 하였다. 그런데 겨레가 외지고 낮은 데서 나와 아버지가 소 고치는 이였다. 영천의 순계화가 황헌의 손을 잡고 『그대는 내 스승이요 본이다』 하였다. 뒤에 원봉고를 보고 『그대 나라에 안회가 있는데 아는가』 하니 봉고가 『그대는 우리 숙도를 보았는가』 하였다. 대량은 남에게 굽히는 일이 드물었는데 황헌을 보면 스스로 낮추고 무언가 잃은 듯 서운해하였다. 어머니가 『너는 어찌 즐겁지 않으냐. 또 소 고치는 이의 아들에게서 오는 길이냐』 하니, 대량이 『우러르면 앞에 있다가 홀연 뒤에 있으니, 이른바 저의 스승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3황숙도는 만 이랑 못처럼 넘실거린다
郭林宗至汝南造袁奉髙,車不停軌,鸞不輟軛。詣黃叔度,乃彌日信宿。人問其故,林宗曰:「叔度汪汪如萬頃之陂。澄之不淸,擾之不濁,其器深廣,難測量也。」
곽임종이 여남에 이르러 원봉고를 찾아갔을 때는 수레가 바퀴 자국에 머물지 않고 방울이 멍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황숙도에게 가서는 하루를 지나 이틀 밤을 묵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임종이 말하였다. "숙도는 만 이랑 못처럼 넘실거린다. 맑히려 해도 더 맑아지지 않고 흐리려 해도 흐려지지 않으니, 그 그릇이 깊고 넓어 헤아리기 어렵다."
협주 2
《續漢書》曰:「郭泰字林宗,太原介休人。泰少孤,年二十,行學至成皋屈伯彦精廬。乏食,衣不蓋形,而處約味道,不改其樂。李元禮一見稱之曰:『吾見士多矣,無如林宗者也。』及卒,蔡伯喈爲作碑,曰:『吾爲人作銘,未嘗不有慚容,唯爲郭有道碑頌無愧耳。』初,以有道君子徴。泰曰:『吾觀乾象人事,天之所廢不可支也。』遂辭以疾。」《汝南先賢傳》曰:「袁宏字奉髙,愼陽人。友黃叔度於童齒,薦陳仲舉於家巷。辟太尉掾,卒。」
『속한서』에 이르기를 「곽태는 자가 임종이요 태원 개휴 사람이다. 곽태는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스무 살에 배우러 다니다가 성고의 굴백언 글방에 이르렀다. 먹을 것이 모자라 옷이 몸을 가리지 못하였으나 검소하게 지내며 도를 맛보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 이원례가 한 번 보고 일컫기를 『내가 선비를 많이 보았으나 임종만 한 이가 없다』 하였다. 죽자 채백개가 비문을 지으며 『내가 남을 위해 명을 지으면서 부끄러운 낯이 없은 적이 없는데, 오직 곽유도의 비만은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다. 처음에 유도군자로 부름을 받으니 곽태가 『내가 하늘의 짓과 사람의 일을 보건대 하늘이 버리는 것은 붙들 수 없다』 하고 마침내 병으로 사양하였다」 하였다. 『여남선현전』에 이르기를 「원굉은 자가 봉고요 신양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황숙도와 벗하였고 진중거를 마을에서 천거하였다. 태위의 아전으로 불렸다가 죽었다」 하였다.
《泰別傳》曰:「薛恭祖問之,泰曰:『奉髙之器,譬諸汎濫,雖淸易挹也。』」
『태별전』에 이르기를 「설공조가 물으니 곽태가 『봉고의 그릇은 넘쳐흐르는 물에 견줄 만하여, 맑기는 하나 쉬이 퍼낼 수 있다』 하였다」 하였다.
4그의 마루에 오른 이를 용문에 올랐다 한다
李元禮風格秀整,髙自標持,欲以天下名教是非爲己任。後進之士,有升其堂者,皆以爲登龍門。
이원례는 풍모와 격이 빼어나고 가지런하여 스스로 높이 지켰고, 천하의 이름과 가르침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을 제 소임으로 삼으려 하였다.
뒤에 오는 선비 가운데 그의 마루에 오른 이가 있으면 다들 용문에 올랐다 하였다.
협주 2
薛瑩《後漢書》曰:「李膺字元禮,潁川襄城人。抗志淸妙,有文武雋才。遷司隸校尉,爲黨事自殺。」
설영의 『후한서』에 이르기를 「이응은 자가 원례요 영천 양성 사람이다. 뜻을 높이 하고 맑고 묘하며 글과 무예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사예교위로 옮겼다가 당고의 일로 스스로 죽었다」 하였다.
《三秦記》曰:「龍門,一名河津,去長安九百里。水懸絶,龜魚之屬莫能上,上則化爲龍矣。」
『삼진기』에 이르기를 「용문은 다른 이름을 하진이라 하며 장안에서 구백 리 떨어져 있다. 물이 매달린 듯 끊어져 거북과 물고기 무리가 오르지 못하는데, 오르면 용이 된다」 하였다.
5순군의 맑은 식견과 종군의 지극한 덕
李元禮嘗嘆荀淑、鍾皓曰:「荀君淸識難尚,鍾君至德可師。」
이원례가 일찍이 순숙과 종호를 기려 말하였다. "순군은 맑은 식견을 따르기 어렵고, 종군은 지극한 덕을 스승 삼을 만하다."
협주 2
《先賢行狀》曰:「荀淑,字季和,潁川潁陰人也。所拔韋褐芻牧之中,執案刀筆之吏,皆爲英彦。舉方正,補朗陵侯相,所在流化。鍾皓字季明,潁川長社人。父、祖至德著名。皓髙風承世,除林慮長,不之官。人位不足,天爵有餘。」
『선현행장』에 이르기를 「순숙은 자가 계화요 영천 영음 사람이다. 그가 베옷 입고 꼴 베고 짐승 치는 가운데서, 또 문서 다루는 아전 가운데서 뽑아낸 이들이 다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방정으로 천거되어 낭릉후의 상이 되니 있는 곳마다 가르침이 흘렀다. 종호는 자가 계명이요 영천 장사 사람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극한 덕으로 이름났다. 종호는 높은 풍모로 대를 이어 임려의 장으로 뽑혔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의 자리는 모자랐으나 하늘이 준 벼슬은 남았다」 하였다.
《海内先賢傳》曰:「潁川先輩,爲海内所師者:定陵陳穉叔、潁陰荀淑、長社鍾皓。少府李膺宗此三君,常言:『荀君淸識難尚,陳鍾至德可師。』」
『해내선현전』에 이르기를 「영천의 앞선 어른으로 온 세상이 스승 삼은 이는 정릉의 진치숙과 영음의 순숙과 장사의 종호다. 소부 이응이 이 세 분을 높여 늘 『순군은 맑은 식견을 따르기 어렵고 진군과 종군은 지극한 덕을 스승 삼을 만하다』 하였다」 하였다.
6진태구가 순낭릉을 찾아가니 참사람이 동쪽으로 간다 하였다
陳太丘詣荀朗陵,貧儉無僕役。乃使元方將車,季方持杖後從。長文尚小,載箸車中。既至,荀使叔慈應門,慈明行酒,餘六龍下食。文若亦小,坐箸厀前。於時太史奏:「眞人東行。」
진태구가 순낭릉을 찾아가는데 가난하고 검소하여 부릴 종이 없었다. 이에 원방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계방은 지팡이를 들고 뒤를 따르게 하였다. 장문은 아직 어려 수레 안에 태웠다.
이르자 순숙은 숙자에게 문을 맞게 하고 자명에게 술을 돌리게 하고 나머지 여섯 용에게 음식을 내게 하였다. 문약도 아직 어려 무릎 앞에 앉혔다.
그때 태사가 아뢰었다. "참사람이 동쪽으로 갑니다."
협주 4
陳寔字仲弓,潁川許昌人。爲聞喜令、太丘長,風化宣流。
진식은 자가 중궁이요 영천 허창 사람이다. 문희령과 태구장이 되어 가르침이 널리 흘렀다.
《先賢行狀》曰:「陳紀字元方,寔長子也。至德絶俗,與寔髙名並著,而弟諶又配之。毎宰府辟召,羔鴈成群,世號『三君』,百城皆圖畫。」
『선현행장』에 이르기를 「진기는 자가 원방이요 진식의 맏아들이다. 지극한 덕이 세속을 끊어 진식의 높은 이름과 나란히 드러났고 아우 진심이 또 이에 짝하였다. 재상부에서 부를 때마다 폐백이 무리를 이루었고 세상이 『세 임금』이라 하였으며 온 고을이 다 그림으로 그렸다」 하였다.
張璠《漢紀》曰:「淑有八子:儉、鯤、靖、燾、汪、爽、肅、敷。淑居西豪里,縣令苑康曰,『昔髙陽氏有才子八人』,遂署其里爲『髙陽里』。時人號曰『八龍』。」
장번의 『한기』에 이르기를 「순숙에게 아들 여덟이 있었으니 검·곤·정·도·왕·상·숙·부다. 순숙이 서호리에 살았는데 현령 원강이 『옛날 고양씨에게 재주 있는 아들 여덟이 있었다』 하고 마침내 그 마을을 『고양리』라 이름 붙였다. 그때 사람들이 『여덟 용』이라 불렀다」 하였다.
檀道鸞《續晉陽秋》曰:「陳仲弓從諸子姪造荀父子,於時德星聚,太史奏:『五百里賢人聚。』」
단도란의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진중궁이 여러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순숙 부자를 찾아가니 그때 덕의 별이 모였다 하여 태사가 『오백 리 안에 어진 이가 모였다』 아뢰었다」 하였다.
7계수나무가 어찌 태산의 높음을 알겠는가
客有問陳季方:「足下家君太丘,有何功德,而荷天下重名?」季方曰:「吾家君譬如桂樹生泰山之阿,上有萬仞之髙,下有不測之深;上爲甘露所霑,下爲淵泉所潤。當斯之時,桂樹焉知泰山之髙,淵泉之深,不知有功德與無也!」
어떤 손이 진계방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버님 태구께서는 무슨 공덕이 있어 천하의 무거운 이름을 지고 계십니까."
계방이 말하였다. "우리 아버님은 비유하자면 계수나무가 태산 기슭에 난 것과 같습니다. 위로는 만 길 높음이 있고 아래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이 있으며, 위로는 단 이슬에 젖고 아래로는 깊은 샘에 적셔집니다.
이러할 때에 계수나무가 어찌 태산이 높은 줄, 깊은 샘이 깊은 줄을 알겠습니까. 공덕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협주 1
《海内先賢傳》曰:「陳諶字季方,寔少子也。才識博達,司空掾公車徴,不就。」
『해내선현전』에 이르기를 「진심은 자가 계방이요 진식의 작은아들이다. 재주와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사공의 아전으로 수레를 보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였다.
8원방을 형이라 하기 어렵고 계방을 아우라 하기 어렵다
陳元方子長文有英才,與季方子孝先,各論其父功德,爭之不能決,咨於太丘。太丘曰:「元方難爲兄,季方難爲弟。」
진원방의 아들 장문은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계방의 아들 효선과 저마다 제 아버지의 공덕을 따지다가 다투어 가리지 못하고 태구에게 여쭈었다.
태구가 말하였다. "원방을 형이라 하기 어렵고 계방을 아우라 하기 어렵다."
협주 3
《魏書》曰:「陳群字長文,祖寔,嘗謂宗人曰:『此兒必興吾宗。』及長,有識度。其所善,皆父黨。」
『위서』에 이르기를 「진군은 자가 장문이다. 할아버지 진식이 일찍이 겨레붙이에게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키리라』 하였다. 자라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그가 좋게 여긴 이는 다 아버지의 벗들이었다」 하였다.
《陳氏譜》曰:「諶子忠,字孝先。州辟不就。」
『진씨보』에 이르기를 「진심의 아들 진충은 자가 효선이다. 고을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였다.
一作「元方難爲弟,季方難爲兄」。
어떤 본에는 「원방을 아우라 하기 어렵고 계방을 형이라 하기 어렵다」로 되어 있다.
9순거백이 벗의 병을 보러 갔다가 도적을 물리다
荀巨伯遠看友人疾,値胡賊攻郡,友人語巨伯曰:「吾今死矣,子可去!」巨伯曰:「遠來相視,子令吾去;敗義以求生,豈荀巨伯所行邪?」賊既至,謂巨伯曰:「大軍至,一郡盡空。汝何男子,而敢獨止?」巨伯曰:「友人有疾,不忍委之,寧以我身代友人命。」賊相謂曰:「我輩無義之人,而入有義之國!」遂班軍而還,一郡並獲全。
순거백이 멀리 벗의 병을 보러 갔다가 오랑캐 도적이 고을을 치는 때를 만났다. 벗이 거백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는다. 그대는 가라."
거백이 말하였다. "멀리서 보러 왔는데 그대가 나더러 가라 하는구나. 옳음을 무너뜨려 삶을 구하는 것이 어찌 순거백이 할 바이겠는가."
도적이 이르러 거백에게 말하였다. "큰 군사가 이르러 온 고을이 다 비었다. 너는 어떤 사내이기에 감히 홀로 남았느냐."
거백이 말하였다. "벗이 병들어 차마 버리지 못하니, 차라리 내 몸으로 벗의 목숨을 대신하겠다."
도적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는 옳음이 없는 사람인데 옳음이 있는 나라에 들어왔구나."
마침내 군사를 돌려 물러가니 온 고을이 다 온전하였다.
협주 1
《荀氏家傳》曰:「巨伯,漢桓帝時人也。亦出潁川,未詳其始末。」
『순씨가전』에 이르기를 「거백은 한나라 환제 때 사람이다. 또한 영천에서 났는데 그 처음과 끝은 자세하지 않다」 하였다.
10화흠은 엄하고 진씨 형제는 부드러웠으나 둘 다 어긋나지 않았다
華歆遇子弟甚整,雖閒室之内,嚴若朝典。陳元方兄弟恣柔愛之道,而二門之裏,兩不失雍熙之軌焉。
화흠은 자제를 대하기가 몹시 가지런하여 한가한 방 안에서도 조정의 법도처럼 엄하였다. 진원방 형제는 부드럽고 사랑하는 길을 마음껏 하였는데, 두 집안 안이 다 화목한 법도를 잃지 않았다.
협주 1
《魏志》曰:「歆字子魚,平原髙唐人。」《魏略》曰:「靈帝時,與北海邴原、管寧倶遊學相善,時號三人爲一龍。謂歆爲龍頭,原爲龍腹,寧爲龍尾。
『위지』에 이르기를 「화흠은 자가 자어요 평원 고당 사람이다」 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영제 때 북해의 병원·관녕과 함께 배우러 다니며 서로 좋아하니 그때 세 사람을 한 마리 용이라 하여, 화흠을 용의 머리, 병원을 용의 배, 관녕을 용의 꼬리라 하였다」 하였다.
11관녕이 자리를 갈라 앉다
管寧、華歆共園中鋤菜,見地有片金,管揮鋤與瓦石不異,華捉而擲去之。又嘗同席讀書,有乘軒冕過門者,寧讀如故,歆廢書出看。寧割席分坐曰:「子非吾友也。」
관녕과 화흠이 함께 밭에서 김을 매다가 땅에 금 조각이 있는 것을 보았다. 관녕은 호미질하기를 기와나 돌과 다름없이 하였고, 화흠은 집어 들었다가 던져 버렸다.
또 일찍이 한자리에서 글을 읽는데, 수레를 타고 관을 쓴 이가 문 앞을 지나가자 관녕은 그대로 읽었고 화흠은 책을 덮고 나가 보았다.
관녕이 자리를 갈라 따로 앉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내 벗이 아니오."
협주 2
《傅子》曰:「寧字幼安,北海朱虚人,齊相管仲之後也。」
『부자』에 이르기를 「관녕은 자가 유안이요 북해 주허 사람이니 제나라 재상 관중의 뒤다」 하였다.
《魏略》曰:「寧少恬靜,常笑邴原、華子魚有仕宦意。及歆爲司徒,上書讓寧。寧聞之笑曰:『子魚本欲作老吏,故榮之耳。』」
『위략』에 이르기를 「관녕은 젊어서 조용하고 담박하여 늘 병원과 화자어에게 벼슬할 뜻이 있음을 웃었다. 화흠이 사도가 되어 글을 올려 관녕에게 자리를 사양하니, 관녕이 이를 듣고 웃으며 『자어는 본디 늙은 아전이 되고자 하였으니 그것을 영화로 여길 뿐이다』 하였다」 하였다.
12화흠을 배운다면서 껍데기만 배웠다
王朗毎以識度推華歆。歆蜡日,嘗集子姪燕飲,王亦學之。有人向張華説此事,張曰:「王之學華,皆是形骸之外,去之所以更遠。」
왕랑은 늘 식견과 도량으로 화흠을 높였다. 화흠이 납일에 자질을 모아 잔치를 벌인 일이 있었는데 왕랑도 이를 따라 하였다.
어떤 이가 장화에게 이 일을 말하니 장화가 말하였다. "왕랑이 화흠을 배운 것은 다 겉껍데기라, 배울수록 더 멀어지는 것이다."
협주 3
《魏書》曰:「朗字景興,東海郯人,魏司徒。」
『위서』에 이르기를 「왕랑은 자가 경흥이요 동해 담 사람이며 위나라 사도다」 하였다.
《禮記》曰:「天子大蜡八,伊耆氏始爲蜡。蜡,索也。歳十二月,合聚萬物而索饗之。」《五經要義》曰:「三代名臘:夏曰嘉平,殷曰淸祀,周曰大蜡,總謂之臘。」晉博士張亮議曰:「蜡者,合聚百物索饗之,歳終休老息民也。臘者,祭宗廟五祀。《傳》曰:『臘,接也。』祭則新故交接也。秦漢以來,臘之明日爲祝歳,古之遺語也。」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는 여덟 신에게 큰 납제를 지내니 이기씨가 처음 납제를 지냈다. 납이란 찾는 것이다. 해의 열두째 달에 만물을 모아 찾아서 흠향하게 한다」 하였다. 『오경요의』에 이르기를 「세 나라가 납제를 이름하기를 하나라는 가평, 은나라는 청사, 주나라는 대사라 하였으니 통틀어 납이라 이른다」 하였다. 진나라 박사 장량이 논하여 이르기를 「사란 온갖 것을 모아 찾아서 흠향하게 하고 해가 저물어 늙은이를 쉬게 하고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다. 납이란 종묘와 다섯 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전』에 이르기를 『납은 잇는 것이다』 하였으니, 제사로 새것과 옛것이 서로 잇는 것이다.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로 납제 이튿날을 축세라 하였으니 옛말이 남은 것이다」 하였다.
王隱《晉書》曰:「張華字茂先,范陽人也。累遷司空,而爲趙王倫所害。」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장화는 자가 무선이요 범양 사람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사공에 이르렀다가 조왕 사마륜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13이미 받아들였는데 급하다고 버릴 수 있겠는가
華歆、王朗倶乘船避難,有一人欲依附,歆輒難之。朗曰:「幸尚寬,何爲不可?」後賊追至,王欲捨所攜人。歆曰:「本所以疑,正爲此耳。既已納其自託,寧可以急相棄邪?」遂攜拯如初。世以此定華王之優劣。
화흠과 왕랑이 함께 배를 타고 난을 피하는데, 한 사람이 붙어 오기를 바랐다. 화흠이 곧 어려워하니 왕랑이 말하였다. "다행히 아직 넉넉한데 어찌 안 되겠소."
뒤에 도적이 쫓아오자 왕랑이 데려온 사람을 버리려 하였다. 화흠이 말하였다. "처음에 내가 망설인 까닭이 바로 이것이오. 이미 그가 몸을 맡긴 것을 받아들였는데 급하다고 버릴 수 있겠소."
마침내 처음처럼 데리고 건졌다. 세상이 이 일로 화흠과 왕랑의 낫고 못함을 정하였다.
협주 1
華嶠《譜敘》曰:「歆爲下邽令,漢室方亂,乃與同志士鄭太等六七人避世。自武關出,道遇一丈夫獨行,願得與倶。皆哀許之。歆獨曰:『不可。今在危險中,禍福患害,義猶一也。今無故受之,不知其義,若有進退,可中棄乎?』衆不忍,卒與倶行。此丈夫中道墮井,皆欲棄之。歆乃曰:『已與倶矣,棄之不義。』卒共還,出之而後別。」
화교의 『보서』에 이르기를 「화흠이 하규령이 되었을 때 한나라 왕실이 바야흐로 어지러워지자 뜻을 같이한 선비 정태 등 예닐곱 사람과 세상을 피하였다. 무관을 나서다가 길에서 홀로 가는 사내 하나를 만나 함께 가기를 바라니 다들 딱히 여겨 허락하였다. 화흠만이 홀로 『안 된다. 이제 위태로운 가운데 있어 재앙과 복, 근심과 해로움이 옳음으로 보면 한가지다. 이제 까닭 없이 그를 받아들이면 그 뜻을 알지 못하니, 만일 나아가고 물러설 일이 생기면 도중에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무리가 차마 못하여 마침내 함께 갔다. 이 사내가 도중에 우물에 빠지자 다들 버리려 하였다. 화흠이 이에 『이미 함께하였으니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마침내 다 함께 돌아가 그를 꺼낸 뒤에 헤어졌다」 하였다.
14왕상이 나무를 안고 울다
王祥事後母朱夫人甚謹,家有一李樹,結子殊好,母恆使守之。時風雨忽至,祥抱樹而泣。祥嘗在別床眠,母自往闇斫之。値祥私起,空斫得被。既還,知母憾之不已,因跪前請死。母於是感悟,愛之如己子。
왕상이 계모 주부인을 몹시 삼가 섬겼다. 집에 오얏나무 한 그루가 있어 열매가 매우 좋았는데 어머니가 늘 그것을 지키게 하였다. 바람과 비가 갑자기 이르자 왕상이 나무를 안고 울었다.
왕상이 일찍이 다른 평상에서 자는데 어머니가 몸소 가서 몰래 찍으려 하였다. 마침 왕상이 뒷일로 일어난 참이라 헛되이 이불만 찍었다. 돌아와 어머니가 여전히 미워하는 줄을 알고 무릎 꿇고 앞에 나아가 죽기를 청하였다. 어머니가 이에 느껴 깨닫고 제 아들처럼 그를 아꼈다.
협주 2
《晉諸公贊》曰:「祥字休徴,琅邪臨沂人。」《祥世家》曰:「祥父融,娶髙平薛氏,生祥。繼室以廬江朱氏,生覽。」《晉陽秋》曰:「後母數譖祥,屢以非理使祥,弟覽輒與祥倶。又虐使祥婦,覽妻亦趨而共之。母患,方盛寒冰凍,母欲生魚,祥解衣將剖冰求之,會有處冰小解,魚出。」蕭廣濟《孝子傳》曰:「祥後母忽欲黃雀炙,祥念難卒致。須臾,有數十黃雀飛入其幕。母之所須,必自奔走,無不得焉。其誠至如此。」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왕상은 자가 휴징이요 낭야 임기 사람이다」 하였다. 『상세가』에 이르기를 「왕상의 아버지 왕융이 고평 설씨를 맞아 왕상을 낳고, 이어 여강 주씨를 맞아 왕람을 낳았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계모가 자주 왕상을 헐뜯고 여러 번 결에 맞지 않는 일을 시켰는데 아우 왕람이 늘 왕상과 함께하였다. 또 왕상의 아내를 모질게 부리니 왕람의 아내도 달려가 함께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바야흐로 매서운 추위에 얼음이 얼었는데 어머니가 산 물고기를 바랐다. 왕상이 옷을 벗고 얼음을 깨어 구하려 하니 마침 얼음이 조금 풀린 데가 있어 물고기가 나왔다」 하였다. 소광제의 『효자전』에 이르기를 「왕상의 계모가 문득 누런 참새 구이를 바라니 왕상이 갑자기 마련하기 어렵다 여겼다. 잠깐 사이에 누런 참새 수십 마리가 그 장막 안으로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이면 반드시 스스로 달려가 얻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그 정성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虞預《晉書》曰:「祥以後母故,陵遲不仕。年向六十,刺史呂虔檄爲別駕,時人歌之曰:『海沂之康,寔賴王祥;邦國不空,別駕之功!』累遷太保。」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왕상은 계모 때문에 뜻을 굽히고 벼슬하지 않았다. 나이 예순에 가까워 자사 여건이 격문을 보내 별가로 삼으니 그때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바닷가의 편안함은 참으로 왕상 덕이요, 나라가 비지 않음은 별가의 공이다』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태보에 이르렀다」 하였다.
15완사종은 남을 좋다 나쁘다 한 적이 없다
晉文王稱阮嗣宗至愼,毎與之言,言皆玄遠,未嘗臧否人物。
진나라 문왕이 완사종을 지극히 삼가는 이라 일컬으며, 그와 말할 때마다 말이 다 아득하고 멀었고 남을 좋다 나쁘다 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협주 1
《魏書》曰:「文王諱昭,字子上,宣帝第二子也。」《魏氏春秋》曰:「阮籍字嗣宗,陳留尉氏人,阮瑀子也。宏達不羈,不拘禮俗。兗州刺史王昶請與相見,終日不得與言。昶愧嘆之,自以不能測也。口不論事,自然髙邁。」李康《家誡》曰:「昔嘗侍坐於先帝,時有三長史倶見,臨辭出,上曰:『爲官長當淸、當愼、當勤,修此三者,何患不治乎?』並受詔。上顧謂吾等曰:『必不得已而去,於斯三者何先?』或對曰『淸固爲本』。復問吾,吾對曰:『淸愼之道,相須而成,必不得已,愼乃爲大。』上曰:『辦言得之矣,可舉近世能愼者誰乎?』吾乃舉故太尉荀景倩、尚書董仲達、僕射王公仲。上曰:『此諸人者,温恭朝夕,執事有恪,亦各其愼也。然天下之至愼者,其唯阮嗣宗乎!毎與之言,言及玄遠,而未嘗評論時事,臧否人物,可謂至愼乎!』」
『위서』에 이르기를 「문왕은 휘가 소요 자가 자상이니 선제의 둘째 아들이다」 하였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완적은 자가 사종이요 진류 위씨 사람이며 완우의 아들이다. 넓고 통달하여 매이지 않고 예와 풍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연주자사 왕창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온종일 말을 나누지 못하였다. 왕창이 부끄러워 탄식하며 스스로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입으로 일을 따지지 않고 저절로 높고 뛰어났다」 하였다. 이강의 『가계』에 이르기를 「옛날 선제를 모시고 앉았을 때 장사 셋이 함께 뵈었다. 하직하고 나가려 하자 임금이 『벼슬의 어른이 되려면 마땅히 맑아야 하고 삼가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이 셋을 닦으면 무엇이 다스려지지 않을까 근심하겠는가』 하니 다 조칙을 받들었다. 임금이 우리를 돌아보며 『굳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셋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가』 하였다. 어떤 이가 『맑음이 참으로 뿌리입니다』 하였다. 다시 나에게 물으니 내가 『맑음과 삼감의 길은 서로 기다려 이루어지나, 굳이 하라시면 삼감이 큽니다』 하였다. 임금이 『네 말이 맞다. 요즈음 삼갈 줄 아는 이로 누구를 들 수 있는가』 하였다. 내가 이에 옛 태위 순경천과 상서 동중달과 복야 왕공중을 들었다. 임금이 『이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따뜻하고 공손하며 일을 함에 삼감이 있으니 또한 저마다 삼가는 이다. 그러나 천하에 지극히 삼가는 이는 오직 완사종이로다. 그와 말할 때마다 말이 아득하고 먼 데 미치되 일찍이 그때 일을 따지거나 사람을 좋다 나쁘다 한 적이 없으니 지극히 삼간다 하겠다』 하였다」 하였다.
16혜강과 스무 해를 살며 기뻐하거나 성내는 낯을 본 적이 없다
王戎云:「與嵇康居二十年,未嘗見其喜慍之色。」
왕융이 말하였다. "혜강과 스무 해를 함께 살았으나 그가 기뻐하거나 성내는 낯빛을 본 적이 없다."
협주 1
《康集敘》曰:「康字叔夜,譙國銍人。」王隱《晉書》曰:「嵇本姓溪,其先避怨徙上虞,移譙國銍縣。以出自會稽,取國一支,音同本奚焉。」虞預《晉書》曰:「銍有嵇山,家於其側,因氏焉。」《康別傳》曰:「康性含垢藏瑕,愛惡不爭於懷,喜怒不寄於顏。所知王濬沖在襄城,面數百,未嘗見其疾聲朱顏。此亦方中之美範,人倫之勝業也。」《文章敘録》曰:「康以魏長樂亭主婿遷郎中,拜中散大夫。」
『강집서』에 이르기를 「혜강은 자가 숙야요 초국 질 사람이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혜씨는 본디 성이 계였는데 그 선조가 원한을 피해 상우로 옮겼다가 초국 질현으로 옮겼다. 회계에서 나왔으므로 나라 이름의 한 갈래를 따랐으니 소리가 본디 해와 같다」 하였다.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질에 혜산이 있어 그 곁에 집을 두었으므로 이를 성으로 삼았다」 하였다. 『강별전』에 이르기를 「혜강은 성품이 때를 머금고 흠을 감추어 사랑과 미움을 마음에서 다투지 않고 기쁨과 성냄을 낯에 부치지 않았다. 아는 이 왕준충이 양성에 있으면서 낯을 맞댄 것이 수백 번인데 그가 소리를 거칠게 하거나 낯을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였다. 이 또한 몸가짐의 아름다운 본이요 사람됨의 뛰어난 업이다」 하였다. 『문장서록』에 이르기를 「혜강은 위나라 장락정주의 사위로 낭중에 오르고 중산대부에 임명되었다」 하였다.
17화교는 산 효자요 왕융은 죽는 효자다
王戎、和嶠同時遭大喪,倶以孝稱。王鷄骨支床,和哭泣備禮。武帝謂劉仲雄曰:「卿數省王和不?聞和哀苦過禮,使人憂之。」仲雄曰:「和嶠雖備禮,神氣不損;王戎雖不備禮,而哀毀骨立。臣以和嶠生孝,王戎死孝。陛下不應憂嶠,而應憂戎。」
왕융과 화교가 같은 때에 큰 상을 당하여 둘 다 효성으로 일컬어졌다. 왕융은 닭뼈처럼 여위어 평상에 기대었고 화교는 곡하며 예를 다 갖추었다.
무제가 유중웅에게 말하였다. "경은 왕융과 화교를 자주 살피는가. 듣건대 화교가 슬퍼함이 예를 넘는다 하니 사람을 근심스럽게 하오."
중웅이 말하였다. "화교는 비록 예를 갖추었으나 정신과 기운이 상하지 않았고, 왕융은 비록 예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슬픔에 헐어 뼈만 남았습니다. 신은 화교를 산 효자라 하고 왕융을 죽는 효자라 합니다. 폐하께서는 화교를 근심하실 것이 아니라 왕융을 근심하셔야 합니다."
협주 3
《晉諸公贊》曰:「戎字濬沖,琅邪人,太保祥宗族也。文皇帝輔政,鍾會薦之曰:『裴楷淸通,王戎簡要。』即倶辟爲掾。晉踐祚,累遷荊州刺史,以平呉功,封安豐侯。」《晉陽秋》曰:「戎爲豫州刺史,遭母憂,性至孝,不拘禮制,飲酒食肉,或觀棊弈,而容貌毀悴,杖而後起。時汝南和嶠,亦名士也,以禮法自持。處大憂,量米而食,然憔悴哀毀,不逮戎也。」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왕융은 자가 준충이요 낭야 사람이니 태보 왕상의 겨레다. 문황제가 정사를 도울 때 종회가 그를 천거하며 『배해는 맑고 통하며 왕융은 간결하고 요긴합니다』 하니 곧 둘 다 아전으로 불렀다. 진나라가 자리에 오르자 여러 벼슬을 거쳐 형주자사가 되었고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안풍후에 봉해졌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융이 예주자사가 되었을 때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우면서도 예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아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더러는 바둑 두는 것을 보기도 하였으나, 낯과 몸이 헐고 여위어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났다. 그때 여남의 화교도 이름난 선비였는데 예법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큰 상을 치르며 쌀을 되어 먹었으나 초췌하고 슬픔에 헐기는 왕융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였다.
王隱《晉書》曰:「劉毅字仲雄,東萊掖人,漢城陽景王後也。亮直淸方,見有不善,必評論之。王公大人,望風憚之。僑居陽平,太守杜恕致爲功曹,沙汰郡吏三百餘人。三魏僉曰:『但聞劉功曹,不聞杜府君。』累遷尚書、司隸校尉。」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유의는 자가 중웅이요 동래 액 사람이니 한나라 성양경왕의 뒤다. 밝고 곧으며 맑고 반듯하여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따져 말하니, 왕공과 큰 사람들이 그 풍모를 바라보고 꺼렸다. 양평에 붙어 살 때 태수 두서가 공조로 삼으니 고을 아전 삼백여 사람을 걸러 냈다. 세 위나라 땅이 다 이르기를 『유공조만 들리고 두부군은 들리지 않는다』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와 사예교위에 이르렀다」 하였다.
《晉陽秋》曰:「世祖及時談以此貴戎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세조와 그때 이야기하던 이들이 이로써 왕융을 귀히 여겼다」 하였다.
18남는 데서 덜어 모자란 데를 채우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梁王、趙王,國之近屬,貴重當時。裴令公歳請二國租錢數百萬,以恤中表之貧者。或譏之曰:「何以乞物行惠?」裴曰:「損有餘,補不足,天之道也。」
양왕과 조왕은 나라의 가까운 겨레로 그때에 귀하고 무거웠다. 배영공이 해마다 두 나라의 조세 수백만을 청하여 안팎 친척 가운데 가난한 이를 도왔다.
어떤 이가 나무라 말하였다. "어찌 남에게 얻은 물건으로 은혜를 베푸시오."
배영공이 말하였다. "남는 데서 덜어 모자란 데를 채우는 것이 하늘의 길이오."
협주 3
朱鳳《晉書》曰:「宣帝張夫人生梁孝王彤,字子徽,位至太宰。桓夫人生趙王倫,字子彝,位至相國。」
주봉의 『진서』에 이르기를 「선제의 장부인이 양효왕 사마융을 낳으니 자가 자휘요 자리가 태재에 이르렀다. 환부인이 조왕 사마륜을 낳으니 자가 자이요 자리가 상국에 이르렀다」 하였다.
《晉諸公贊》曰:「裴楷字叔則,河東聞喜人,司空秀之從弟也。父徽,冀州刺史,有雋識。楷特精易義。累遷河南尹、中書令,卒。」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배해는 자가 숙칙이요 하동 문희 사람이니 사공 배수의 사촌아우다. 아버지 배휘는 기주자사로 뛰어난 식견이 있었다. 배해는 『역』의 뜻에 특히 밝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하남윤과 중서령에 이르렀다가 죽었다」 하였다.
《名士傳》曰:「楷行己取與,任心而動,毀譽雖至,處之晏然,皆此類。」
『명사전』에 이르기를 「배해는 제 몸을 지키고 주고받음에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 헐뜯음과 기림이 이르러도 이를 태연히 대하였으니 다 이런 것들이다」 하였다.
19덕이 그 말을 가린 것이 아니겠는가
王戎云:「太保居在正始中,不在能言之流。及與之言,理中淸遠,將無以德掩其言!」
왕융이 말하였다. "태보께서는 정시 연간에 말 잘하는 축에 들지 않으셨다. 그런데 더불어 말해 보면 결이 맞고 맑고 멀었으니, 덕이 그 말을 가린 것이 아니겠는가."
협주 1
《晉陽秋》曰:「祥少有美德行。」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상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덕행이 있었다」 하였다.
20한 번 통곡이 사람을 상하게 한다면
王安豐遭艱,至性過人。裴令往弔之,曰:「若使一慟果能傷人,濬沖必不免滅性之譏。」
왕안풍이 상을 당하여 지극한 성품이 남보다 더하였다. 배영공이 조문하러 가서 말하였다. "만일 한 번 통곡하는 것이 참으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면, 준충은 반드시 목숨을 해쳤다는 나무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협주 1
《曲禮》曰:「居喪之禮,毀瘠不形,視聽不衰,不勝喪,乃比於不慈不孝。」孝經曰:「毀不滅性,聖人之教也。」
『곡례』에 이르기를 「상중의 예는 몸이 헐고 여위어도 뼈가 드러나지 않게 하고 보고 듣는 것이 쇠하지 않게 하니, 상을 이기지 못하면 곧 자애롭지 못하고 효도롭지 못한 데 견준다」 하였다. 『효경』에 이르기를 「헐되 목숨을 없애지 않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였다.
21아버지 부의로 온 수백만을 왕융이 다 받지 않다
王戎父渾有令名,官至涼州刺史。渾薨,所歴九郡義故,懷其德惠,相率致賻數百萬,戎悉不受。
왕융의 아버지 왕혼은 좋은 이름이 있었고 벼슬이 양주자사에 이르렀다. 왕혼이 죽자 그가 지나온 아홉 고을의 옛 벼슬아치들이 그 덕과 은혜를 그리워하여 서로 이끌고 부의 수백만을 보냈는데, 왕융이 하나도 받지 않았다.
협주 2
《世語》曰:「渾字長源,有才望。歴尚書、涼州刺史。」
『세어』에 이르기를 「왕혼은 자가 장원이요 재주와 명망이 있었다. 상서와 양주자사를 지냈다」 하였다.
虞預《晉書》曰:「戎由是顯名。」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왕융이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드러났다」 하였다.
22베 오백 필로 죄인을 속량해 종사중랑으로 삼다
劉道眞嘗爲徒,扶風王駿以五百疋布贖之,既而用爲從事中郎。當時以爲美事。
유도진이 일찍이 죄지어 부역하는 이가 되었는데, 부풍왕 사마준이 베 오백 필로 그를 속량하고 이내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그때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협주 2
《晉百官名》曰:「劉寶字道眞,髙平人。」徒,罪役作者。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유보는 자가 도진이요 고평 사람이다」 하였다. 도란 죄지어 부역하는 이다.
虞預《晉書》曰:「駿字子臧,宣帝第十七子,好學至孝。」《晉諸公贊》曰:「駿八歳爲散騎常侍,侍魏齊王講。晉受禪,封扶風王,鎭關中,爲政最美。薨,贈武王。西土思之,但見其碑贊者,皆拜之而泣。其遺愛如此。」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사마준은 자가 자장이요 선제의 열일곱째 아들이니 배우기를 좋아하고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하였다.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사마준은 여덟 살에 산기상시가 되어 위나라 제왕의 강론을 모셨다. 진나라가 선양을 받자 부풍왕에 봉해져 관중을 지키며 정사가 가장 아름다웠다. 죽자 무왕을 내려 주었다. 서쪽 땅이 그를 그리워하여 그 비문과 기림을 보는 이마다 절하며 울었으니 그 남긴 사랑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23이름과 가르침 안에도 즐거운 데가 있다
王平子、胡毋彦國諸人,皆以任放爲達,或有裸體者。樂廣笑曰:「名教中自有樂地,何爲乃爾也!」
왕평자와 호무언국 같은 이들이 다 멋대로 굴기를 통달함으로 삼아 더러는 벌거벗는 이도 있었다.
악광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름과 가르침 안에도 절로 즐거운 데가 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협주 1
《晉諸公贊》曰:「王澄,字平子,有達識,荊州刺史。」《永嘉流人名》曰:「胡毋輔之字彦國,泰山奉髙人,湘州刺史。」王隱《晉書》曰:「魏末阮籍,嗜酒荒放,露頭散髮,裸袒箕踞。其後貴遊子弟阮瞻、王澄、謝鯤、胡毋輔之之徒,皆祖述於籍,謂得大道之本。故去巾幘,脱衣服,露醜惡,同禽獸。甚者名之爲通,次者名之爲達也。」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왕징은 자가 평자요 통달한 식견이 있었으며 형주자사였다」 하였다. 『영가유인명』에 이르기를 「호무보지는 자가 언국이요 태산 봉고 사람이며 상주자사였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위나라 말에 완적이 술을 즐기고 거칠게 놀아 머리를 드러내고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벌거벗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 뒤 귀한 집 자제 완첨·왕징·사곤·호무보지의 무리가 다 완적을 본떠 큰 도의 뿌리를 얻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두건을 벗고 옷을 벗어 추한 데를 드러내어 짐승과 같아졌다. 심한 이를 통이라 이름하고 그 다음을 달이라 이름하였다」 하였다.
24치공이 밥을 볼에 물고 와 두 아이에게 뱉어 먹이다
郗公値永嘉喪亂,在鄕里甚窮餒,鄕人以公名德,傳共飴之。公常攜兄子邁及外生周翼二小兒往食。鄕人曰:「各自饑困,以君之賢,欲共濟君耳;恐不能兼有所存。」公於是獨往食,輒含飯著兩頰邊,還吐與二兒。後並得存,同過江。郗公亡,翼爲剡縣解職歸,席苫於公靈床頭,心喪終三年。
치공이 영가의 난리를 만나 시골에서 몹시 궁하고 주렸다. 시골 사람들이 그의 이름과 덕 때문에 서로 돌아가며 함께 먹여 주었다.
치공이 늘 형의 아들 치매와 누이의 아들 주익 두 아이를 데리고 가서 먹었다. 시골 사람들이 말하였다. "저마다 주리고 곤궁하나 그대가 어질기에 함께 그대를 건지려는 것입니다. 아울러 둘까지는 못할 듯합니다."
치공이 이에 홀로 가서 먹으면서 밥을 두 볼에 물고 돌아와 두 아이에게 뱉어 먹였다. 뒤에 둘 다 살아남아 함께 강을 건넜다.
치공이 죽자 주익은 섬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공의 영좌 머리맡에 거적을 깔고 마음으로 세 해 상을 마쳤다.
협주 2
《郗鑒別傳》曰:「鑒字道徽,髙平金鄕人。漢御史大夫郗慮後也。少有體正,耽思經籍,以儒雅著名。永嘉末,天下大亂,饑饉相望,冠帶以下,皆割己之資供鑒。元皇徴爲領軍,遷司空、太尉。」《中興書》曰:「鑒兄子邁,字思遠,有幹世才略。累遷少府、中護軍。」
『치감별전』에 이르기를 「치감은 자가 도휘요 고평 금향 사람이다. 한나라 어사대부 치려의 뒤다. 어려서부터 바른 몸가짐이 있었고 경전에 마음을 쏟아 儒雅로 이름났다. 영가 말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굶주림이 서로 이어지니 벼슬아치 아래로 다 제 밑천을 갈라 치감에게 바쳤다. 원황제가 불러 영군으로 삼았고 사공과 태위로 옮겼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치감의 형의 아들 치매는 자가 사원이요 세상을 다스릴 재주와 슬기가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소부와 중호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周氏譜》曰:「翼字子卿,陳郡人。祖奕,上谷太守。父優,車騎咨議。歴剡令、靑州刺史、少府卿,六十四而卒。」
『주씨보』에 이르기를 「주익은 자가 자경이요 진군 사람이다. 할아버지 주혁은 상곡태수요 아버지 주우는 거기자의였다. 섬령·청주자사·소부경을 지내고 예순넷에 죽었다」 하였다.
25고기 굽던 이가 뒷날 강을 건널 때마다 곁을 지켜 주었다
顧榮在洛陽,嘗應人請,覺行炙人有欲炙之色,因輟己施焉;同坐嗤之。榮曰:「豈有終日執之,而不知其味者乎?」後遭亂渡江,毎經危急,常有一人左右己;問其所以,乃受炙人也。
고영이 낙양에 있을 때 남의 청을 받아 갔다가, 고기 굽는 이에게 그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낯빛이 있음을 알아채고 제 몫을 덜어 주었다. 같이 앉은 이들이 이를 비웃으니 고영이 말하였다. "어찌 온종일 고기를 잡고 있으면서 그 맛을 모르는 이가 있겠소."
뒤에 난리를 만나 강을 건널 때 위태로운 고비를 지날 때마다 늘 한 사람이 곁에서 지켜 주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곧 그 고기를 받은 사람이었다.
협주 1
《文士傳》曰:「榮字彦先,呉郡人。其先越王句踐之支庶,封於顧邑,子孫遂氏焉,世爲呉著姓。大父雍,呉丞相。父穆,宜都太守。榮少朗雋機警,風穎標徹,歴廷尉正。曾在省與同僚共飲,見行炙者有異於常僕,乃割炙以噉之。後趙王倫篡位,其子爲中領軍,逼用榮爲長史。及倫誅,榮亦被執。凡受戮等輩十有餘人。或有救榮者,問其故。曰:『某省中受炙臣也。』榮乃悟而嘆曰:『一餐之惠,恩今不忘,古人豈虚言哉!』」
『문사전』에 이르기를 「고영은 자가 언선이요 오군 사람이다. 그 선조는 월왕 구천의 갈래로 고읍에 봉해져 자손이 마침내 이를 성으로 삼았으니 대대로 오나라의 이름난 성이었다. 할아버지 고옹은 오나라 승상이요 아버지 고목은 의도태수였다. 고영은 젊어서 밝고 뛰어나며 재빠르고 슬기로워 풍모가 두드러졌고 정위정을 지냈다. 일찍이 관아에서 동료들과 함께 마시는데, 고기 굽는 이가 여느 종과 다름을 보고 이에 고기를 갈라 먹였다. 뒤에 조왕 사마륜이 자리를 빼앗고 그 아들이 중령군이 되어 고영을 억지로 장사로 썼다. 사마륜이 베인 뒤 고영도 잡혔다. 함께 죽임을 당할 무리가 열 남짓이었는데, 어떤 이가 고영을 건지려 하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아무개는 관아에서 고기를 받은 신하입니다』 하였다. 고영이 이에 깨닫고 탄식하기를 『한 끼의 은혜를 이제까지 잊지 않으니 옛사람의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26백리해가 어찌 양가죽 다섯 장보다 가볍겠는가
祖光祿少孤貧,性至孝,常自爲母炊爨作食。王平北聞其佳名,以兩婢餉之,因取爲中郎。有人戲之者曰:「奴價倍婢。」祖云:「百里奚亦何必輕於五羖之皮邪?」
조광록은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가난하였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늘 몸소 어머니를 위해 불을 때어 밥을 지었다. 왕평북이 그 좋은 이름을 듣고 계집종 둘을 보내고 이내 중랑으로 삼았다.
어떤 이가 놀려 말하였다. "사내종 값이 계집종의 갑절이구려."
조광록이 말하였다. "백리해인들 어찌 반드시 양가죽 다섯 장보다 가볍겠는가."
협주 3
王隱《晉書》曰:「祖納字士言,范陽遒人,九世孝廉。納諸母三兄,最治行操,能淸言,歴太子中庶子,廷尉卿。避地江南,温嶠薦爲光祿大夫。」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조납은 자가 사언이요 범양 주 사람이니 아홉 대에 걸친 효렴 집안이다. 조납은 여러 어머니와 세 형 가운데 몸가짐을 가장 잘 닦았고 맑은 이야기를 잘하였으며 태자중서자와 정위경을 지냈다. 강남으로 피난하니 온교가 천거하여 광록대부가 되었다」 하였다.
《王乂別傳》曰:「乂字叔元,琅邪臨沂人。時蜀新平,二將作亂,文帝西之長安,乃徴爲相國司馬,遷大尚書、出督幽州諸軍事、平北將軍。」
『왕예별전』에 이르기를 「왕예는 자가 숙원이요 낭야 임기 사람이다. 그때 촉이 갓 평정되고 두 장수가 난을 일으키자 문제가 서쪽 장안으로 갔는데, 이에 불려 상국사마가 되었다가 대상서로 옮기고 유주의 여러 군사 일을 감독하는 평북장군으로 나갔다」 하였다.
《楚國先賢傳》曰:「百里奚字凡伯,楚國人。少仕於虞,爲大夫。晉欲假道於虞以伐虢,諫而不聽,奚乃去之。」《説苑》曰:「秦穆公使賈人載鹽於虞,諸賈人買百里奚以五羊皮。穆公觀鹽,怪其牛肥,問其故,對曰:『飲食以時,使之不暴,是以肥也。』公令有司沐浴衣冠之。公孫支讓其卿位,號曰『五羖大夫』。」
『초국선현전』에 이르기를 「백리해는 자가 범백이요 초나라 사람이다. 젊어서 우나라에서 벼슬하여 대부가 되었다. 진나라가 우나라에 길을 빌려 괵나라를 치려 하자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백리해가 이에 떠났다」 하였다. 『설원』에 이르기를 「진나라 목공이 장사꾼을 시켜 우나라에 소금을 싣고 가게 하였는데, 여러 장사꾼이 백리해를 양가죽 다섯 장에 샀다. 목공이 소금을 살피다가 그 소가 살진 것을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먹이기를 제때에 하고 부리기를 사납게 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살졌습니다』 하였다. 목공이 맡은 이를 시켜 목욕시키고 옷과 관을 갖추게 하였다. 공손지가 그 경의 자리를 사양하니 『오고대부』라 불렀다」 하였다.
27호위의 맑음인들 이보다 더하겠는가
周鎭罷臨川郡還都,未及上住,泊靑溪渚。王丞相往看之。時夏月,暴雨卒至,舫至狹小,而又大漏,殆無復坐處。王曰:「胡威之淸,何以過此!」即啓用爲呉興郡。
주진이 임천군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아직 거처를 얻지 못하여 청계 물가에 배를 대고 있었다. 왕승상이 가서 보았다.
때는 여름철이라 소나기가 갑자기 이르렀는데, 배가 몹시 좁고 또 크게 새어 앉을 데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왕승상이 말하였다. "호위의 맑음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곧 아뢰어 오흥군에 쓰이게 하였다.
협주 3
《永嘉流人名》曰:「鎭字康時,陳留尉氏人也。祖父和,故安令。父震,司空長史。」《中興書》曰:「鎭淸約寡慾,所在有異績。」
『영가유인명』에 이르기를 「주진은 자가 강시요 진류 위씨 사람이다. 할아버지 주화는 옛 안령이요 아버지 주진은 사공장사였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주진은 맑고 검소하며 바라는 것이 적어 있는 곳마다 남다른 자취가 있었다」 하였다.
《丞相別傳》曰:「王導字茂弘,琅邪人。祖覽,以德行稱。父裁,侍御史。導少知名,家世貧約,恬暢樂道,未嘗以風塵經懷也。」
『승상별전』에 이르기를 「왕도는 자가 무홍이요 낭야 사람이다. 할아버지 왕람은 덕행으로 일컬어졌고 아버지 왕재는 시어사였다. 왕도는 어려서부터 이름이 알려졌는데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고 검소하였으나 편안하고 화창하게 도를 즐겨 일찍이 티끌 같은 일을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하였다.
《晉陽秋》曰:「胡威字伯虎,淮南人。父質以忠淸顯。質爲荊州,威自京師往省之。及告歸,質賜威絹一匹。威跪曰:『大人淸髙,於何得此?』質曰:『是吾奉祿之餘,故以爲汝糧耳。』威受而去。毎至客舍,自放驢取樵爨炊。食畢,復隨旅進道。質帳下都督陰齎糧要之,因與爲伴。毎事相助經營之,又進少飯,威疑之,密誘問之,乃知都督也。謝而遣之。後以白質,質杖都督一百,除其吏名。父子淸愼如此。及威爲徐州,世祖賜見,與論邊事及平生。帝嘆其父淸,因謂威曰:『卿淸孰與父?』對曰:『臣淸不如也。』帝曰:『何以爲勝汝邪?』對曰:『臣父淸畏人知,臣淸畏人不知,是以不如遠矣。』」
『진양추』에 이르기를 「호위는 자가 백호요 회남 사람이다. 아버지 호질이 참되고 맑음으로 드러났다. 호질이 형주에 있을 때 호위가 서울에서 뵈러 갔다. 돌아가겠다 아뢰니 호질이 호위에게 비단 한 필을 주었다. 호위가 무릎 꿇고 『아버님은 맑고 높으신데 어디서 이것을 얻으셨습니까』 하니, 호질이 『이는 내 녹의 나머지이니 네 양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호위가 받아 떠났다. 객사에 이를 때마다 몸소 나귀를 놓아 먹이고 땔나무를 해서 밥을 지었고, 다 먹으면 다시 나그네를 따라 길을 갔다. 호질의 장하도독이 몰래 양식을 지니고 그를 기다렸다가 짝이 되어, 일마다 서로 도와 꾸려 주고 또 밥도 조금 더 주었다. 호위가 이를 의심하여 가만히 꾀어 물으니 곧 도독임을 알았다. 사례하고 돌려보냈다. 뒤에 호질에게 아뢰니 호질이 도독을 곤장 백 대 치고 그 아전 이름을 지웠다. 아버지와 아들의 맑고 삼감이 이와 같았다. 호위가 서주자사가 되었을 때 세조가 만나 보고 변방 일과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금이 그 아버지의 맑음을 탄식하고 이에 호위에게 『경의 맑음은 아버지와 견주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맑음은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엇으로 그대보다 나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버지는 맑음이 남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였고 신은 맑음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멀리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28등유가 조카를 살리려 제 아들을 버리다
鄧攸始避難,於道中棄己子,全弟子。既過江,取一妾,甚寵愛。歴年後訊其所由,妾具説,是北人遭亂,憶父母姓名,乃攸之甥也。攸素有德業,言行無玷,聞之哀恨終身,遂不復畜妾。
등유가 처음 난을 피할 때 길에서 제 아들을 버리고 아우의 아들을 온전히 하였다.
강을 건넌 뒤 첩 하나를 두고 몹시 사랑하였는데, 여러 해 뒤에 그 내력을 물으니 첩이 낱낱이 말하기를 북쪽 사람으로 난리를 만났다 하며 부모의 성과 이름을 떠올렸는데 곧 등유의 생질이었다.
등유는 본디 덕과 업이 있어 말과 행실에 흠이 없었는데, 이를 듣고 한평생 슬퍼하고 한스러워하며 마침내 다시는 첩을 두지 않았다.
협주 1
《晉陽秋》曰:「攸字伯道,平陽襄陵人。七歳喪父母及祖父母,持重九年。性淸愼平簡。」鄧粲《晉紀》曰:「永嘉中,攸爲石勒所獲,召見,立幕下與語,説之,坐而飯焉。攸車所止,與胡人鄰轂,胡人失火燒車營,勒吏案問胡,胡誣攸。攸度不可與爭,乃曰:『向爲老姥作粥,失火延逸,罪應萬死。』勒知遣之。所誣胡厚德攸,遺其驢馬,護送令得逸。」王隱《晉書》曰:「攸以路遠,斫壞車,以牛馬負妻子以叛,賊又掠其牛馬。攸語妻曰:『吾弟早亡,唯有遺民。今當歩走,儋兩兒盡死,不如棄己兒,抱遺民。吾後猶當有兒。』婦從之。」《中興書》曰:「攸棄兒於草中,兒啼呼追之,至莫復及。攸明日繫兒於樹而去,遂渡江,至尚書左僕射,卒。弟子綏服攸齊衰三年。」
『진양추』에 이르기를 「등유는 자가 백도요 평양 양릉 사람이다. 일곱 살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여의고 아홉 해 상복을 입었다. 성품이 맑고 삼가며 평온하고 간결하였다」 하였다.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영가 연간에 등유가 석륵에게 사로잡혀 불려 가 장막 아래 서서 말을 나누었는데, 석륵이 기뻐하여 앉히고 밥을 먹였다. 등유의 수레가 머문 데가 오랑캐와 바퀴를 나란히 하였는데, 오랑캐가 불을 내어 수레 진영을 태우자 석륵의 아전이 오랑캐를 캐물으니 오랑캐가 등유를 무고하였다. 등유가 다툴 수 없다 헤아리고 이에 『아까 늙은 할멈을 위해 죽을 쑤다가 불을 내어 번졌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석륵이 알고 그를 보내 주었다. 무고당한 오랑캐가 등유를 두터이 덕스럽게 여겨 그 나귀와 말을 주고 호송하여 벗어나게 하였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등유가 길이 멀다 하여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에 아내와 자식을 싣고 달아났는데, 도적이 또 그 소와 말을 빼앗았다. 등유가 아내에게 『내 아우가 일찍 죽고 오직 유민만 남았다. 이제 걸어가야 하는데 두 아이를 메면 다 죽을 것이니 내 아이를 버리고 유민을 안는 것만 못하다. 나는 뒤에 오히려 아이를 둘 수 있다』 하니 아내가 따랐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등유가 아이를 풀숲에 버리니 아이가 울부짖으며 쫓아와 저물도록 다시 미치지 못하였다. 등유가 이튿날 아이를 나무에 매어 두고 떠나 마침내 강을 건넜고 상서좌복야에 이르러 죽었다. 아우의 아들 등수가 등유를 위해 자최 세 해 상을 입었다」 하였다.
29곡짝을 봉해 두고 차마 열지 못하다
王長豫爲人謹順,事親盡色養之孝。丞相見長豫輒喜,見敬豫輒嗔。長豫與丞相語,恒以愼密爲端。丞相還臺,及行,未嘗不送至車後。恒與曹夫人併當箱篋。長豫亡後,丞相還臺,登車後,哭至臺門。曹夫人作簏,封而不忍開。
왕장예는 사람됨이 삼가고 순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낯빛을 살펴 봉양하는 효도를 다하였다. 승상은 장예를 보면 문득 기뻐하고 경예를 보면 문득 성내었다.
장예는 승상과 말할 때 늘 삼가고 빈틈없음을 실마리로 삼았다. 승상이 관아로 돌아갈 때에는 떠날 적마다 수레 뒤까지 바래다 드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늘 조부인과 함께 상자와 궤를 갈무리하였다.
장예가 죽은 뒤 승상은 관아로 돌아가며 수레에 오른 뒤부터 관아 문에 이르도록 울었다. 조부인은 장예가 만든 대바구니를 봉해 두고 차마 열지 못하였다.
협주 3
《中興書》曰:「王悅字長豫,丞相導長子也。仕至中書侍郎。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열은 자가 장예요 승상 왕도의 맏아들이다. 벼슬이 중서시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文字志》曰:「王恬字敬豫,導次子也。少卓犖不羈,疾學尚武,不爲導所重。至中軍將軍。多才藝,善隸書,與濟陽江虨以善奕聞。」
『문자지』에 이르기를 「왕념은 자가 경예요 왕도의 둘째 아들이다. 젊어서 뛰어나고 매이지 않아 배우기를 싫어하고 무예를 좋아하여 왕도가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중군장군에 이르렀다. 재주가 많고 예에 밝았으며 예서를 잘 썼고 제양의 강빈과 함께 바둑 잘 두기로 알려졌다」 하였다.
《王氏譜》曰:「導娶彭城曹韶女,名淑。」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도가 팽성 조소의 딸을 맞으니 이름이 숙이다」 하였다.
30환상시가 심공을 흉보지 않다
桓常侍聞人道深公者,輒曰:「此公既有宿名,加先達知稱,又與先人至交,不宜説之。」
환상시는 사람들이 심공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 문득 말하였다. "이분은 이미 오래된 이름이 있고 게다가 앞선 어른들이 알아주고 일컬었으며 또 돌아가신 아버님과 지극히 가까웠으니,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다."
협주 1
《桓彝別傳》曰:「彝字茂倫,譙國龍亢人,漢五更桓榮十世孫也。父穎,有髙名。彝少孤,識鑒明朗,避亂渡江,累遷散騎常侍。」僧法深,不知其俗姓,蓋衣冠之胤也。道徽髙扇,譽播山東,爲中州劉公弟子。値永嘉亂,投跡楊土,居止京邑,内持法綱,外允具瞻,弘道之法師也。以業慈淸淨,而不耐風塵,考室剡縣東二百里𡵙山中,同遊十餘人,髙棲浩然。支道林宗其風範,與髙麗道人書,稱其德行。年七十有九,終於山中也。」
『환이별전』에 이르기를 「환이는 자가 무륜이요 초국 용항 사람이니 한나라 오경박사 환영의 십 대 손이다. 아버지 환영은 높은 이름이 있었다. 환이는 어려서 아비를 여의었으나 식견이 밝고 환하였으며 난을 피해 강을 건너 여러 벼슬을 거쳐 산기상시에 이르렀다」 하였다. 승려 법심은 그 속성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벼슬한 집안의 자손일 것이다. 도의 아름다움이 높이 퍼져 기림이 산동에 퍼졌고 중주 유공의 제자가 되었다. 영가의 난을 만나 양 땅에 자취를 붙이고 서울에 머물러 살며, 안으로 법의 벼리를 지니고 밖으로 우러름에 맞으니 도를 넓힌 법사다. 자애롭고 맑고 깨끗함을 업으로 삼아 티끌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섬현 동쪽 이백 리 앙산 가운데 방을 마련하니 함께 노니는 이가 열 남짓이었고 높이 깃들어 넓고 컸다. 지도림이 그 풍모와 본을 마루로 삼아 고구려 스님에게 보낸 글에서 그 덕행을 일컬었다. 나이 일흔아홉에 산속에서 마쳤다.
31제가 편치 않다고 남에게 옮길 수 있겠는가
庾公乘馬有的盧,或語令賣去。庾云:「賣之必有買者,即復害其主。寧可不安己而移於他人哉?」昔孫叔敖殺兩頭蛇以爲後人,古之美談,效之,不亦達乎!」
유공이 타는 말에 적로가 있었다. 어떤 이가 팔아 버리라 하니 유공이 말하였다. "이를 팔면 반드시 사는 이가 있을 터인데 그러면 다시 그 주인을 해칠 것이다. 어찌 제가 편치 않다고 남에게 옮길 수 있겠는가.
옛날 손숙오가 머리 둘 달린 뱀을 죽여 뒷사람을 위한 일이 옛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니, 이를 본받는 것이 또한 통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협주 3
《晉陽秋》曰:「庾亮字元規,潁川鄢陵人,明穆皇后長兄也。淵雅有德量,時人方之夏侯太初、陳長文之倫。侍從父琛,避地會稽,端拱嶷然,郡人嚴憚之。覲接之者,數人而已。累遷征西大將軍、荊州刺史。」《伯樂相馬經》曰:「馬白頟入口至齒者,名曰楡鴈,一名的盧。奴乘客死,主乘棄市,凶馬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유량은 자가 원규요 영천 언릉 사람이니 명목황후의 맏오빠다. 깊고 우아하며 덕과 도량이 있어 그때 사람들이 하후태초와 진장문의 무리에 견주었다. 작은아버지 유침을 모시고 회계로 피난하여 단정히 손을 모으고 우뚝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몹시 꺼렸다. 만나 뵌 이가 몇 사람뿐이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정서대장군과 형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백락상마경』에 이르기를 「말의 흰 이마가 입에서 이까지 들어간 것을 유안이라 하고 다른 이름을 적로라 한다. 종이 타면 객사하고 주인이 타면 저자에서 죽으니 흉한 말이다」 하였다.
《語林》曰:「殷浩勸公賣馬。」
『어림』에 이르기를 「은호가 유공에게 말을 팔라고 권하였다」 하였다.
賈誼《新書》曰:「孫叔敖爲兒時,出道上,見兩頭蛇,殺而埋之。歸見其母,泣。問其故,對曰:『夫見兩頭蛇者,必死。今出見之,故爾。』母曰:『蛇今安在?』對曰:『恐後人見,殺而埋之矣。』母曰:『夫有陰德,必有陽報,爾無憂也。』後遂興於楚朝。及長,爲楚令尹。」
가의의 『신서』에 이르기를 「손숙오가 어릴 적에 길에 나갔다가 머리 둘 달린 뱀을 보고 죽여 묻었다. 돌아와 어머니를 뵙고 울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머리 둘 달린 뱀을 본 이는 반드시 죽는다 합니다. 이제 나갔다가 보았으므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뱀은 지금 어디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뒷사람이 볼까 두려워 죽여 묻었습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무릇 숨은 덕이 있으면 반드시 드러난 갚음이 있으니 너는 근심하지 마라』 하였다. 뒤에 마침내 초나라 조정에서 일어났고 자라서 초나라 영윤이 되었다」 하였다.
32내게 수레가 있는데 남이 빌리지 못한다면 수레가 무엇이겠는가
阮光祿在剡,曾有好車,借者無不皆給。有人葬母,意欲借而不敢言。阮後聞之,嘆曰:「吾有車而使人不敢借,何以車爲?」遂焚之。
완광록이 섬현에 있을 때 좋은 수레가 있어 빌리려는 이에게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떤 이가 어머니를 장사 지내는데 빌리고 싶어 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완광록이 뒤에 이를 듣고 탄식하였다. "내게 수레가 있는데 남이 감히 빌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수레가 무엇에 쓰겠는가."
마침내 태워 버렸다.
협주 1
《阮光祿別傳》曰:「裕字思曠,陳留尉氏人。祖略,齊國内史。父顗,汝南太守。裕淹通有理識,累遷侍中。以疾築室會稽剡山。徴金紫光祿大夫,不就。年六十一卒。」
『완광록별전』에 이르기를 「완유는 자가 사광이요 진류 위씨 사람이다. 할아버지 완략은 제나라 내사요 아버지 완의는 여남태수였다. 완유는 넓게 통하고 결과 식견이 있어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에 이르렀다. 병으로 회계 섬산에 집을 지었다. 금자광록대부로 불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예순하나에 죽었다」 하였다.
33여덟 살 아우가 형에게 늙은이를 딱하다 하다
謝奕作剡令,有一老翁犯法,謝以醇酒罰之,乃至過醉,而猶未已。太傅時年七八歳,箸靑布絝,在兄膝邊坐,諫曰:「阿兄,老翁可念,何可作此?」奕於是改容曰:「阿奴欲放去邪?」遂遣之。
사혁이 섬현령이 되었을 때 한 늙은이가 법을 어기자 사혁이 독한 술로 벌하니 지나치게 취하는 데 이르렀는데도 그치지 않았다.
태부가 그때 나이 일고여덟 살이라 푸른 베 바지를 입고 형의 무릎 곁에 앉아 있다가 간하였다. "형님, 늙은이가 딱합니다.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사혁이 이에 낯빛을 고쳐 말하였다. "아우가 놓아 주기를 바라느냐."
마침내 보내 주었다.
협주 1
《中興書》曰:「謝奕字無奕,陳郡陽夏人。祖衡,太子少傅。父裒,吏部尚書。奕少有器鑒,辟太尉掾、剡令,累遷豫州刺史。」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혁은 자가 무혁이요 진군 양하 사람이다. 할아버지 사형은 태자소부요 아버지 사부는 이부상서였다. 사혁은 젊어서 그릇을 보는 눈이 있었고 태위의 아전과 섬령으로 불렸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예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34저계야는 말이 없어도 네 철의 기운이 다 갖추어져 있다
謝太傅絶重褚公,常稱:「褚季野雖不言,而四時之氣亦備。」
사태부가 저공을 지극히 무겁게 여겨 늘 일컬었다. "저계야는 비록 말이 없으나 네 철의 기운이 또한 갖추어져 있다."
협주 1
《文字志》曰:「謝安字安石,奕弟也。世有學行,安弘粹通遠,温雅融暢。桓彝見其四歳時,稱之曰:『此兒風神秀徹,當繼蹤王東海。』善行書。累遷太保、録尚書事。贈太傅。」《晉陽秋》曰:「褚裒字季野,河南陽翟人。祖䂮,安東將軍。父治,武昌太守。裒少有簡貴之風,沖默之稱。累遷江兗二州刺史。贈侍中、太傅。」
『문자지』에 이르기를 「사안은 자가 안석이요 사혁의 아우다. 대대로 학문과 행실이 있었는데 사안은 넓고 순수하며 통하고 멀었으며 따뜻하고 우아하고 화창하였다. 환이가 그의 네 살 적을 보고 일컫기를 『이 아이는 풍모와 정신이 빼어나고 환하니 마땅히 왕동해의 자취를 이으리라』 하였다. 행서를 잘 썼다. 여러 벼슬을 거쳐 태보와 녹상서사에 이르렀고 태부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저부는 자가 계야요 하남 양적 사람이다. 할아버지 저략은 안동장군이요 아버지 저치는 무창태수였다. 저부는 젊어서 간결하고 귀한 풍모와 조용하고 말없다는 일컬음이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강주와 연주 두 주의 자사에 이르렀다. 시중과 태부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35내가 빈 지 오래다
劉尹在郡,臨終綿惙,聞閣下祠神鼓舞。正色曰:「莫得淫祀!」外請殺車中牛祭神。眞長答曰:「丘之禱久矣,勿復爲煩。」
유윤이 고을에 있다가 죽음에 다다라 숨이 가물거리는데, 관아 아래에서 귀신에게 제사하며 북 치고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낯빛을 바로 하고 말하였다. "함부로 제사하지 마라."
바깥에서 수레 끄는 소를 잡아 귀신에게 제사하기를 청하니 진장이 대답하였다. "내가 빈 지 오래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마라."
협주 2
《劉尹別傳》曰:「惔字眞長,沛國蕭人也。漢氏之後。眞長有雅裁,雖蓽門陋巷,晏如也。歴司徒左長史、侍中、丹陽尹。爲政務鎭靜信誠,風塵不能移也。」
『유윤별전』에 이르기를 「유담은 자가 진장이요 패국 소 사람이다. 한나라 왕실의 뒤다. 진장은 우아한 마름이 있어 비록 사립문 누추한 골목에 살아도 편안하였다. 사도좌장사·시중·단양윤을 지냈다. 정사를 함에 고요히 누르고 미쁘고 정성스러움에 힘써 티끌 세상이 그를 옮기지 못하였다」 하였다.
包氏《論語》曰:「禱,請也。」孔安國曰:「孔子素行合於神明,故曰:『丘之禱久矣。』」
포씨의 『논어』 주에 이르기를 「도는 비는 것이다」 하였다. 공안국이 이르기를 「공자의 평소 행실이 신명에 맞았으므로 『내가 빈 지 오래다』 한 것이다」 하였다.
36나는 늘 나로써 아이를 가르친다
謝公夫人教兒,問太傅:「那得初不見君教兒?」答曰:「我常自教兒。」
사공의 부인이 아이를 가르치다가 태부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여태 그대가 아이를 가르치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늘 나로써 아이를 가르치오."
협주 1
《謝氏譜》曰:「安娶沛國劉耽女。」按:太尉劉子眞,淸潔有志操,行己以禮。而二子不才,並黷貨致罪。子眞坐免官。客曰:「子奚不訓導之?」子眞曰:「吾之行事,是其耳目所聞見,而不放效,豈嚴訓所變邪?」安石之旨,同子眞之意也。
『사씨보』에 이르기를 「사안이 패국 유탐의 딸을 맞았다」 하였다. 살피건대 태위 유자진은 맑고 깨끗하며 지조가 있어 예로써 몸가짐을 하였다. 그런데 두 아들이 재주가 없어 다 재물을 더럽혀 죄를 얻으니 자진이 이에 걸려 벼슬을 잃었다. 어떤 손이 「그대는 어찌 그들을 가르쳐 이끌지 않았소」 하니, 자진이 「내가 하는 일이 그 아이들의 귀와 눈이 보고 듣는 바인데도 본받지 않으니, 어찌 엄한 가르침으로 바뀌겠소」 하였다. 안석의 뜻이 자진의 뜻과 같다.
37쥐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할 수야 있겠는가
晉簡文爲撫軍時,所坐床上塵不聽拂,見鼠行跡,視以爲佳。有參軍見鼠白日行,以手板批殺之,撫軍意色不悅,門下起彈;教曰:「鼠被害,尚不能忘懷;今復以鼠損人,無乃不可乎?」
진나라 간문제가 무군장군이던 때에 앉는 평상 위의 먼지를 털지 못하게 하고, 쥐가 다닌 자취를 보면 이를 좋게 여겼다.
어떤 참군이 쥐가 대낮에 다니는 것을 보고 손에 든 홀로 쳐 죽였다. 무군이 뜻과 낯빛이 언짢아하니 아랫사람들이 그를 탄핵하려 하였다.
무군이 일러 말하였다. "쥐가 해를 입은 것도 오히려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는데, 이제 다시 쥐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한다면 안 될 일이 아니겠는가."
협주 1
《續晉陽秋》曰:「帝諱昱,字道萬,中宗少子也。仁聞有智度。穆帝幼沖,以撫軍輔政。大司馬桓温廢海西公而立帝,在位三年而崩。」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임금은 휘가 욱이요 자가 도만이니 중종의 작은아들이다. 어질다는 소문이 있고 슬기와 도량이 있었다. 목제가 어려 무군장군으로 정사를 도왔다. 대사마 환온이 해서공을 폐하고 임금을 세우니 자리에 있은 지 세 해 만에 돌아갔다」 하였다.
38아파서 운 것이 아니라 몸을 다치지 않으려던 것입니다
范宣年八歳,後園挑菜,誤傷指,大啼。人問:「痛邪?」答曰:「非爲痛也;但身體髮膚,不敢毀傷,是以啼耳。」宣潔行廉約,韓豫章遺絹百匹,不受;減五十匹,復不受。如是減半,遂至一匹,既終不受。韓後與范同載,就車中裂二丈與范,云:「人寧可使婦無褌邪?」范笑而受之。
범선이 여덟 살 때 뒤뜰에서 나물을 캐다가 잘못 손가락을 다쳐 크게 울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아프냐."
대답하였다. "아파서가 아닙니다. 다만 몸과 터럭과 살갗을 감히 헐고 다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우는 것입니다."
범선은 행실이 깨끗하고 검소하였다. 한예장이 비단 백 필을 보내니 받지 않았고, 쉰 필로 줄여도 또 받지 않았다. 이렇게 반으로 줄여 마침내 한 필에 이르렀는데도 끝내 받지 않았다.
한예장이 뒤에 범선과 함께 수레를 탔다가 수레 안에서 두 길을 찢어 범선에게 주며 말하였다. "사람이 어찌 아내에게 속바지도 없게 하겠소."
범선이 웃으며 받았다.
협주 2
《宣別傳》曰:「宣字子宣,陳留人,漢萊蕪長范丹後也。年十歳,能誦詩書。兒童時,手傷改容,家人以其年幼,皆異之。徴太學博士、散騎常侍,一無所就。年五十四卒。」
『선별전』에 이르기를 「범선은 자가 자선이요 진류 사람이니 한나라 내무장 범단의 뒤다. 열 살에 시와 서를 욀 수 있었다. 아이 때에 손을 다치고 낯빛을 고치니 집안 사람들이 그 나이가 어리므로 다 이상히 여겼다. 태학박사와 산기상시로 불렸으나 하나도 나아가지 않았다. 쉰넷에 죽었다」 하였다.
《中興書》曰:「宣家至貧,罕交人事。豫章太守殷羡見宣茅茨不完,欲爲改室,宣固辭。羡愛之,以宣貧,加年饑疾疫,厚餉給之,宣又不受。」《續晉陽秋》曰:「韓伯字康伯,潁川人。好學,善言理。歴豫章太守、領軍將軍。」
『중흥서』에 이르기를 「범선은 집이 지극히 가난하고 사람과 사귀는 일이 드물었다. 예장태수 은선이 범선의 띠집이 온전하지 않은 것을 보고 방을 고쳐 주려 하니 범선이 굳이 사양하였다. 은선이 그를 아껴, 범선이 가난한 데다 흉년과 돌림병까지 겹쳤으므로 두터이 보내 주었으나 범선이 또 받지 않았다」 하였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한백은 자가 강백이요 영천 사람이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결을 잘 말하였다. 예장태수와 영군장군을 지냈다」 하였다.
39오직 치씨와 헤어진 일이 생각납니다
王子敬病篤,道家上章應首過,問子敬「由來有何異同得失?」子敬云:「不覺有餘事,唯憶與郗家離婚。」
왕자경의 병이 깊어지자, 도가에서 글을 올리려면 마땅히 허물을 먼저 아뢰어야 한다 하여 자경에게 물었다. "여태 무슨 어긋남과 잘잘못이 있으셨습니까."
자경이 말하였다. "다른 일은 깨닫지 못하겠고, 오직 치씨 집안과 헤어진 일이 생각날 뿐이오."
협주 1
《王氏譜》曰:「獻之娶髙平郗曇女,名道茂,後離婚。」《獻之別傳》曰:「祖父曠,淮南太守。父羲之,右將軍。咸寧中,詔尚餘姚公主,遷中書令,卒。」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헌지가 고평 치담의 딸을 맞으니 이름이 도무인데 뒤에 헤어졌다」 하였다. 『헌지별전』에 이르기를 「할아버지 왕광은 회남태수요 아버지 왕희지는 우장군이다. 함녕 연간에 조칙으로 여요공주에게 장가들고 중서령으로 옮겼다가 죽었다」 하였다.
40가난은 선비의 떳떳함인데 어찌 가지에 올라 뿌리를 버리겠는가
殷仲堪既爲荊州,値水儉,食常五盌,外無餘肴。飯粒脱落盤席閒,輒拾以噉之。雖欲率物,亦縁其性眞素。毎語子弟云:「勿以我受任方州,云我豁平昔時意。今吾處之不易。貧者士之常,焉得登枝而捐其本?爾曹其存之!」
은중감이 형주에 있을 때 물난리로 흉년이 들자 밥상에 늘 다섯 그릇뿐 그 밖에 다른 반찬이 없었다. 밥알이 소반과 자리 사이에 떨어지면 문득 주워 먹었다. 비록 남을 이끌려 함이기도 하였으나 또한 그 성품이 참되고 수수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자제에게 늘 일렀다. "내가 한 지방을 맡았다 하여 내가 옛 뜻을 넓혀 버렸다 이르지 마라. 이제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쉽지 않다. 가난은 선비의 떳떳함이니 어찌 가지에 올랐다고 그 뿌리를 버리겠느냐. 너희는 이를 마음에 두어라."
협주 1
《晉安帝紀》曰:「仲堪,陳郡人,太常融孫也。車騎將軍謝玄請爲長史,孝武説之,俄爲黃門侍郎。自殺袁悅之後,上深爲晏駕後計,故先出王恭爲北蕃。荊州刺史王忱死,乃中詔用仲堪代焉。」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은중감은 진군 사람이니 태상 은융의 손자다. 거기장군 사현이 청하여 장사로 삼았고 효무제가 그를 좋아하여 이내 황문시랑이 되었다. 원열을 죽인 뒤로 임금이 붕어한 뒤의 일을 깊이 꾀하였으므로 먼저 왕공을 북쪽 울타리로 내보냈다. 형주자사 왕침이 죽자 이에 조칙을 내려 은중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하였다.
41은기가 낯빛을 고요히 하고 물러가다
初桓南郡、楊廣共説殷荊州,宜奪殷覬南蠻以自樹。覬亦即曉其旨,嘗因行散,率爾去下舍,便不復還。内外無預知者,意色蕭然,遠同鬬生之無慍。時論以此多之。
처음에 환남군과 양광이 함께 은형주를 달래어 은기의 남만교위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세력을 세우게 하려 하였다.
은기도 곧 그 뜻을 알아채고, 약을 먹고 거니는 길에 문득 아랫집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안팎에 미리 안 이가 없었고, 뜻과 낯빛이 고요하여 멀리 투생과 같이 성내는 빛이 없었다. 그때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높이 쳤다.
협주 2
《桓玄別傳》曰:「玄字敬道,譙國龍亢人,大司馬温少子也。幼童中,温甚愛之。臨終命以爲嗣。年七歳,襲封南郡公,拜太子洗馬、義興太守。不得志,少時去職,歸其國。與荊州刺史殷仲堪素舊,情好甚隆。」周祗《隆安記》曰:「廣字德度,弘農人,楊震後也。」《晉安帝紀》曰:「覬字伯道,陳郡人。由中書郎出爲南蠻校尉。覬亦以率易才悟著稱,與從弟仲堪倶知名。」《中興書》曰:「初,仲堪欲起兵,密邀覬,覬不同。楊廣與弟佺期勸殺覬,仲堪不許。」
『환현별전』에 이르기를 「환현은 자가 경도요 초국 용항 사람이니 대사마 환온의 작은아들이다. 어린아이 때에 환온이 몹시 아꼈고 죽을 때 뒤를 잇게 하라 명하였다. 일곱 살에 남군공을 이어받고 태자세마와 의흥태수에 임명되었다. 뜻을 얻지 못해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제 나라로 돌아갔다. 형주자사 은중감과 본디 오래 사귀어 정이 몹시 두터웠다」 하였다. 주지의 『융안기』에 이르기를 「양광은 자가 덕도요 홍농 사람이니 양진의 뒤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은기는 자가 백도요 진군 사람이다. 중서랑에서 남만교위로 나갔다. 은기도 시원스럽고 재주가 밝기로 일컬어져 사촌아우 은중감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처음에 은중감이 군사를 일으키려고 은기를 몰래 불렀으나 은기가 함께하지 않았다. 양광과 아우 양전기가 은기를 죽이라 권하였으나 은중감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였다.
《春秋傳》曰:「楚令尹子文,鬬氏也。」《論語》曰:「令尹子文,三仕爲令尹,無喜色;三已之,無慍色。」
『춘추전』에 이르기를 「초나라 영윤 자문은 투씨다」 하였다. 『논어』에 이르기를 「영윤 자문이 세 번 영윤이 되었으나 기뻐하는 낯이 없었고, 세 번 그만두었으나 성내는 낯이 없었다」 하였다.
42왕수를 시험 삼아 효자 노릇 한다 하다
王僕射在江州,爲殷桓所逐,奔竄豫章,存亡未測。王綏在都,既憂戚在貌,居處飲食,毎事有降。時人謂爲試守孝子。
왕복야가 강주에 있다가 은중감과 환현에게 쫓겨 예장으로 달아나 숨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왕수는 서울에 있으면서 근심과 슬픔이 낯에 드러나고 거처와 마시고 먹는 것을 일마다 낮추었다. 그때 사람들이 시험 삼아 효자 노릇을 한다 하였다.
협주 2
徐廣《晉紀》曰:「王愉字茂和,太原晉陽人,安北將軍坦之次子也。以輔國司馬,出爲江州刺史。愉始至鎭,而桓玄、楊佺期舉兵以應王恭,乘流奄至,愉無防,惶遽奔臨川,爲玄所得。玄篡位,遷尚書左僕射。」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왕유는 자가 무화요 태원 진양 사람이니 안북장군 왕탄지의 둘째 아들이다. 보국사마로 강주자사에 나갔다. 왕유가 진에 이르자마자 환현과 양전기가 군사를 일으켜 왕공에게 호응하여 물길을 타고 갑자기 이르니, 왕유가 막지 못하고 허둥지둥 임천으로 달아나 환현에게 잡혔다. 환현이 자리를 빼앗자 상서좌복야로 옮겼다」 하였다.
《中興書》曰:「綏字彦猷,愉子也。少有令譽。自王渾至坦之,六世盛德,綏又知名,於時冠冕,莫與爲比。位至中書令、荊州刺史。桓玄敗後,與父愉謀反,伏誅。」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수는 자가 언유요 왕유의 아들이다. 젊어서 좋은 기림이 있었다. 왕혼에서 왕탄지까지 여섯 대에 성한 덕이 있었고 왕수가 또 이름이 알려져 그때 벼슬한 집안 가운데 견줄 이가 없었다. 자리가 중서령과 형주자사에 이르렀다. 환현이 무너진 뒤 아버지 왕유와 함께 모반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43나기생이 죽음을 앞두고 아우 하나를 빌어 어머니를 모시게 하다
桓南郡既破殷荊州,收殷將佐十許人,咨議羅企生亦在焉。桓素待企生厚,將有所戮,先遣人語云:「若謝我,當釋罪。」企生荅曰:「爲殷荊州吏,今荊州奔亡,存亡未判,我何顏謝桓公?」既出市,桓又遣人問欲何言?答曰:「昔晉文王殺嵇康,而嵇紹爲晉忠臣。從公乞一弟以養老母。」桓亦如言宥之。桓先曾以一羔裘與企生母胡,胡時在豫章,企生問至,即日焚裘。
환남군이 은형주를 깨뜨리고 은씨의 장수와 보좌 열댓 사람을 잡았는데 자의 나기생도 그 안에 있었다.
환현이 본디 나기생을 두터이 대하였으므로 죽이려 하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 일렀다. "만일 나에게 사과하면 죄를 풀어 주겠다."
나기생이 대답하였다. "은형주의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이제 형주가 달아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려지지 않았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환공에게 사과하겠는가."
저잣거리에 끌려 나가자 환현이 또 사람을 보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대답하였다. "옛날 진나라 문왕이 혜강을 죽였으나 혜소는 진나라의 참된 신하가 되었소. 공께 아우 하나를 빌어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해 주시오."
환현도 그 말대로 용서해 주었다.
환현이 앞서 새끼양 갖옷 하나를 나기생의 어머니 호씨에게 준 일이 있었다. 호씨가 그때 예장에 있었는데 나기생의 소식이 이르자 그날로 갖옷을 태웠다.
협주 4
玄也
환현이다.
《玄別傳》曰:「玄克荊州,殺殷道護及仲堪參軍羅企生、鮑季禮,皆仲堪所親仗也。」
『현별전』에 이르기를 「환현이 형주를 이기고 은도호와 은중감의 참군 나기생과 포계례를 죽였으니 다 은중감이 가까이 믿던 이들이었다」 하였다.
《中興書》曰:「企生字宗伯,豫章人。殷仲堪初請爲府功曹,桓玄來攻,轉咨議參軍。仲堪多疑少決,企生深憂之,謂其弟遵生曰:『殷侯仁而無斷,事必無成。成敗天也,吾當死生以之。』及仲堪走,文武並無送者,唯企生從焉。路經家門,遵生紿之曰:『作如此分別,何可不執手?』企生回馬授手,遵生便牽下之,謂曰:『家有老母,將欲何行?』企生揮泣曰:『今日之事,我必死之。汝等奉養,不失子道,一門之内,有忠與孝,亦復何恨!』遵生抱之愈急,仲堪於路待之。企生遙呼曰:『今日死生是同,願少見待!』仲堪見其無脱埋,策馬而去。俄而玄至,人士悉詣玄,企生獨不往而營理仲堪家。或謂曰:『玄性猜急,未能取卿誠節,若遂不詣,禍必至矣!』企生正色曰:『我殷侯吏,見遇以國士,不能共殄醜逆,致此奔敗,何面目就桓求生乎?』玄聞,怒而收之。謂曰:『相遇如此,何以見負?』企生曰:『使君口血未乾,而生此姦計,自傷力劣,不能翦定凶逆,我死恨晩爾!』玄遂斬之。時年三十有七,衆咸悼之。」
『중흥서』에 이르기를 「나기생은 자가 종백이요 예장 사람이다. 은중감이 처음에 청하여 부의 공조로 삼았고 환현이 쳐들어오자 자의참군으로 옮겼다. 은중감이 의심이 많고 결단이 적으니 나기생이 이를 깊이 걱정하여 그 아우 나준생에게 『은후는 어질되 끊음이 없으니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루고 못 이룸은 하늘이니 나는 마땅히 죽고 사는 것을 이와 함께하겠다』 하였다. 은중감이 달아날 때 문무 벼슬아치가 다 바래다주지 않았고 오직 나기생만이 따랐다. 길이 제 집 문을 지나는데 나준생이 속여 『이렇게 헤어지는데 어찌 손을 잡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기생이 말을 돌려 손을 내미니 나준생이 곧 끌어내리며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신데 어디로 가려는가』 하였다. 나기생이 눈물을 뿌리며 『오늘 일은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너희가 받들어 모셔 자식의 도리를 잃지 않으면 한집안 안에 참됨과 효도가 있으니 또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였다. 나준생이 더욱 급히 껴안았고 은중감은 길에서 그를 기다렸다. 나기생이 멀리서 부르기를 『오늘 죽고 사는 것을 함께하려 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은중감이 그가 벗어날 길이 없음을 보고 말을 채찍질하여 떠났다. 이윽고 환현이 이르러 선비들이 다 환현에게 나아갔으나 나기생만은 가지 않고 은중감의 집안을 돌보았다. 어떤 이가 『환현은 성품이 시새우고 급하여 그대의 참된 절개를 알아주지 못할 터인데, 끝내 나아가지 않으면 화가 반드시 이르리라』 하였다. 나기생이 낯빛을 바로 하고 『나는 은후의 아전으로 국사의 대접을 받았는데, 함께 추한 역적을 없애지 못하고 이렇게 달아나 무너지게 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환현에게 나아가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환현이 듣고 성내어 그를 잡았다. 일러 말하기를 『서로 이렇게 대하였는데 어찌 나를 저버리는가』 하니, 나기생이 『사군의 입에 피가 마르기도 전에 이런 간사한 꾀를 내니, 스스로 힘이 모자라 흉한 역적을 베어 없애지 못함을 서러워할 뿐이요, 나는 죽는 것이 늦은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하였다. 환현이 마침내 그를 베었다. 그때 나이 서른일곱이라 뭇사람이 다 슬퍼하였다」 하였다.
王隱《晉書》曰:「紹字延祖,譙國銍人。父康有奇才雋辯。紹十歳而孤,事母孝謹,累遷散騎常侍。惠帝敗於蕩陰,百官左右皆奔散,唯紹儼然端冕,以身衞帝。兵交御輦,飛箭雨集,遂以見害也。」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혜소는 자가 연조요 초국 질 사람이다. 아버지 혜강은 뛰어난 재주와 빼어난 말솜씨가 있었다. 혜소는 열 살에 아비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성스럽고 삼가 섬겼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산기상시에 이르렀다. 혜제가 탕음에서 지자 온갖 벼슬아치와 곁의 사람들이 다 달아나 흩어졌는데 혜소만이 엄연히 관을 바로 하고 몸으로 임금을 막았다. 군사가 임금의 수레에 부딪치고 나는 화살이 비처럼 모여 마침내 해를 입었다」 하였다.
44나는 몸에 여벌 물건을 두지 않습니다
王恭從會稽還,王大看之,見其坐六尺簟,因語恭:「卿東來,故應有此物,可以一領及我?」恭無言。大去後,即舉所坐者送之。既無餘席,便坐薦上。後大聞之,甚驚,曰:「吾本謂卿多,故求耳。」對曰:「丈人不悉恭;恭作人無長物。」
왕공이 회계에서 돌아오니 왕대가 보러 와서 그가 여섯 자 대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왕공에게 말하였다. "경이 동쪽에서 왔으니 본디 이런 물건이 있겠구려. 한 닢쯤 나에게 줄 수 있겠소."
왕공이 아무 말이 없었다. 왕대가 간 뒤 곧 제가 앉았던 것을 보냈다. 남은 자리가 없어 거적 위에 앉았다.
뒤에 왕대가 이를 듣고 몹시 놀라 말하였다. "나는 본디 경에게 많은 줄 알고 구한 것이오."
대답하였다. "어르신께서 저를 모르십니다. 저는 사람됨이 여벌 물건을 두지 않습니다."
협주 2
周祗《隆安記》曰:「恭字孝伯,太原晉陽人。祖父濛,司徒左長史,風流標望。父蘊,鎭軍將軍,亦得世譽。」《恭別傳》曰:「恭淸廉貴峻,志存格正。起家著作郎,歴丹陽尹、中書令。出爲五州都督、前將軍、靑兗二州刺史。」
주지의 『융안기』에 이르기를 「왕공은 자가 효백이요 태원 진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왕몽은 사도좌장사로 풍류와 이름이 높았고 아버지 왕온은 진군장군으로 또한 세상의 기림을 얻었다」 하였다. 『공별전』에 이르기를 「왕공은 맑고 청렴하며 귀하고 준엄하여 뜻이 바로잡는 데 있었다. 저작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단양윤과 중서령을 지냈다. 다섯 주의 도독과 전장군과 청주·연주 두 주의 자사로 나갔다」 하였다.
王忱,小字佛大。《晉安帝紀》曰:「忱字元達,平北將軍坦之第四子也。甚得名於當世,與族子恭少相善,齊聲見稱。仕至荊州刺史。」
왕침이니 아이 적 이름이 불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왕침은 자가 원달이요 평북장군 왕탄지의 넷째 아들이다. 그때 세상에서 이름을 크게 얻었고 겨레붙이 조카 왕공과 어려서부터 서로 좋아하여 나란히 일컬어졌다. 벼슬이 형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45누룽지를 모으던 이가 홀로 살아남다
呉郡陳遺,家至孝,母好食鐺底焦飯。遺作郡主簿,恒裝一囊,毎煮食,輒貯録焦飯,歸以遺母。後値孫恩賊出呉郡,袁府君即日便征,遺已聚斂得數斗焦飯,未展歸家,遂帶以從軍。戰於滬瀆,敗。軍人潰散,逃走山澤,皆多餓死;遺獨以焦飯得活。時人以爲純孝之報也。
오군의 진유는 집에서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어머니가 솥바닥 누룽지를 즐겨 먹었다. 진유가 고을 주부가 되어 늘 자루 하나를 챙겨 밥을 지을 때마다 누룽지를 담아 두었다가 돌아가 어머니께 드렸다.
뒤에 손은 도적이 오군에 나오자 원부군이 그날로 곧 나아가 치니, 진유는 이미 누룽지 몇 말을 모아 두었으나 집에 돌아갈 겨를이 없어 그대로 지고 군사를 따랐다.
호독에서 싸워 졌다. 군사가 무너져 흩어져 산과 못으로 달아나 다들 많이 굶어 죽었는데 진유만이 누룽지로 살아남았다. 그때 사람들이 순수한 효도의 갚음이라 하였다.
협주 3
未詳
자세하지 않다.
《晉安帝紀》曰:「孫恩一名靈秀,琅邪人。叔父泰,事五斗米道,以謀反誅。恩逸逃於海上,聚衆十萬人,攻沒郡縣。後爲臨海太守辛昺斬首送之。」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손은은 다른 이름이 영수요 낭야 사람이다. 작은아버지 손태가 오두미도를 섬기다 모반을 꾀하여 베였다. 손은이 바다 위로 달아나 무리 십만을 모아 여러 고을을 쳐서 함락하였다. 뒤에 임해태수 신병에게 목이 베여 보내졌다」 하였다.
山松別見
원산송은 따로 보인다.
46공복야가 온종일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가 참효자라 하였다
孔僕射爲孝武侍中,豫蒙眷接烈宗山陵。孔時爲太常,形素羸瘦,著重服,竟日涕泗流漣,見者以爲眞孝子。
공복야가 효무제의 시중이 되어 돌보아 주심을 입었는데 열종의 능에 나아갈 때였다. 공복야가 그때 태상이었는데 몸이 본디 여위었고 무거운 상복을 입고 온종일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니 보는 이가 참효자라 하였다.
협주 1
《續晉陽秋》曰:「孔安國字安國,會稽山陰人,車騎愉第六子也。少而孤貧,能善樹節,以儒素見稱。歴侍中、太常、尚書,遷左僕射、特進,卒。」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공안국은 자가 안국이요 회계 산음 사람이니 거기장군 공유의 여섯째 아들이다.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가난하였으나 절개를 잘 세워 儒素로 일컬어졌다. 시중·태상·상서를 지내고 좌복야와 특진으로 옮겼다가 죽었다」 하였다.
47오씨 두 형제의 울음이 이웃의 마음을 움직이다
呉道助、附子兄弟,居在丹陽郡。後遭母童夫人艱,朝夕哭臨。及思至,賓客弔省,號踊哀絶,路人爲之落涙。韓康伯時爲丹陽尹,母殷在郡,毎聞二呉之哭,輒爲悽惻。語康伯曰:「汝若爲選官,當好料理此人。」康伯亦甚相知。韓後果爲吏部尚書。大呉不免哀制,小呉遂大貴達。
오도조와 부자 형제가 단양군에 살았다. 뒤에 어머니 동부인의 상을 당하여 아침저녁으로 곡하였다. 생각이 사무칠 때나 손이 조문하러 올 때면 부르짖고 뛰며 슬픔에 숨이 끊길 듯하니 길 가던 이도 이 때문에 눈물을 떨구었다.
한강백이 그때 단양윤이었는데 어머니 은씨가 고을에 있으면서 두 오씨의 곡소리를 들을 때마다 문득 애처로워하였다. 강백에게 일렀다. "네가 만일 사람 뽑는 벼슬을 하거든 이 사람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
강백도 그들을 매우 알아주었다. 한강백이 뒤에 과연 이부상서가 되었다. 큰 오씨는 상제를 견디지 못하였고 작은 오씨는 마침내 크게 귀해졌다.
협주 2
道助,坦之小字。附子,隱之小字也。《呉氏譜》曰:「坦之字處靖,濮陽人。仕至西中郎將功曹。父堅,取東苑童儈女,名秦姬。」
도조는 오탄지의 아이 적 이름이요 부자는 오은지의 아이 적 이름이다. 『오씨보』에 이르기를 「오탄지는 자가 처정이요 복양 사람이다. 벼슬이 서중랑장공조에 이르렀다. 아버지 오견이 동원 동회의 딸을 맞으니 이름이 진희다」 하였다.
鄭緝《孝子傳》曰:「隱之字處默,少有孝行,遭母喪,哀毀過禮。時與太常韓康伯鄰居,康伯母揚州刺史殷浩之妹,聰明婦人也。隱之毎哭,康伯母輒輟事流涕,悲不自勝,終其喪如此。謂康伯曰:『汝後若居銓衡,當用此輩人。』後康伯爲吏部尚書,乃進用之。」《晉安帝紀》曰:「隱之既有至性,加以廉潔,奉祿頒九族,冬月無被。桓玄欲革嶺南之弊,以爲廣州刺史。去州二十里有貪泉,世傳飲之者其心無厭。隱之乃至水上,酌而飲之,因賦詩曰:『石門有貪泉,一歃重千金。試使夷齊飲,終當不易心。』爲盧循所攻,還京師。歴尚書、領軍將軍。」《晉中興書》曰:「舊云:往廣州,飲貪泉,失廉潔之性。呉隱之爲刺史,自酌貪泉飲之,題石門爲詩云云。」
정집의 『효자전』에 이르기를 「오은지는 자가 처묵이요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픔에 헐기가 예를 넘었다. 그때 태상 한강백과 이웃하여 살았는데, 강백의 어머니는 양주자사 은호의 누이로 총명한 부인이었다. 오은지가 곡할 때마다 강백의 어머니가 문득 일을 그치고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고 그 상이 끝나도록 이와 같았다. 강백에게 이르기를 『너는 뒤에 만일 사람 저울질하는 자리에 있거든 마땅히 이런 이를 써야 한다』 하였다. 뒤에 강백이 이부상서가 되어 이에 그를 나아가 쓰게 하였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오은지는 지극한 성품이 있는 데다 깨끗하기까지 하여 녹을 아홉 겨레에 나누어 주고 겨울에도 이불이 없었다. 환현이 영남의 폐단을 고치고자 그를 광주자사로 삼았다. 주에서 이십 리 떨어진 데에 탐천이 있어 세상에 그 물을 마시면 마음에 싫증이 없어진다고 전하였다. 오은지가 이에 물가에 이르러 떠 마시고 시를 짓기를 『석문에 탐천이 있어 한 모금이 천금만큼 무겁다. 백이와 숙제에게 마시게 한들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하였다. 노순에게 쫓겨 서울로 돌아왔다. 상서와 영군장군을 지냈다」 하였다. 『진중흥서』에 이르기를 「예부터 이르기를 광주에 가서 탐천을 마시면 청렴한 성품을 잃는다 하였다. 오은지가 자사가 되어 스스로 탐천을 떠 마시고 석문에 시를 지어 새겼다 운운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