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世説新語 言語第二
1요임금의 덕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 옷을 거꾸로 입었을 뿐입니다
邊文禮見袁奉髙,失次序。奉髙曰:「昔堯聘許由,面無怍色;先生何爲『顛倒衣裳』?」文禮答曰:「明府初臨,堯德未彰,是以賤民顛倒衣裳耳。」
변문례가 원봉고를 뵙는데 차례를 잃었다. 봉고가 말하였다. "옛날 요임금이 허유를 부를 때에도 낯에 부끄러운 빛이 없었는데, 선생은 어찌 『옷을 거꾸로 입었소』."
문례가 대답하였다. "부군께서 갓 오시어 요임금의 덕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천한 백성이 옷을 거꾸로 입었을 뿐입니다."
협주 4
閎也
원굉이다.
《文士傳》曰:「邊讓字文禮,陳留人。才俊辯逸,大將軍何進聞其名,召署令史,以禮見之。讓占對閑雅,聲氣如流,坐客皆慕之。讓出就曹,時孔融、王朗等並前爲掾,共書刺從讓,讓平衡與交接。後爲九江太守,爲魏武帝所殺。」
『문사전』에 이르기를 「변양은 자가 문례요 진류 사람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말솜씨가 시원하여 대장군 하진이 그 이름을 듣고 불러 영사에 임명하고 예로 만났다. 변양은 묻고 답함이 한가롭고 우아하며 소리와 기운이 물 흐르는 듯하여 앉은 손들이 다 그를 그리워하였다. 변양이 나와 조로 가니 그때 공융과 왕랑 들이 다 먼저 아전이 되어 있어 함께 명함을 써서 변양을 따랐는데, 변양은 저울처럼 고르게 그들과 사귀었다. 뒤에 구강태수가 되었다가 위나라 무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皇甫謐曰:「由字武仲,陽城槐里人也。堯舜皆師而學事焉,後隱於沛澤之中,堯乃致天下而讓焉。由爲人據義履方,邪席不坐,邪饍不食,聞堯讓而去。其友巣父聞由爲堯所讓,以爲汚己,乃臨池洗耳。池主怒曰:『何以汚我水?』由於是遁耕於中嶽潁水之陽,箕山之下,終身無經天下色。死葬箕山之巓,在陽城之南十里。堯因就其墓,號曰『箕山公神』,以配食五嶽,世世奉祀,至今不絶也。」
황보밀이 이르기를 「허유는 자가 무중이요 양성 괴리 사람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 그를 스승 삼아 배우고 섬겼는데, 뒤에 패택 가운데 숨으니 요임금이 이에 천하를 가져다 물려주려 하였다. 허유는 사람됨이 옳음에 기대고 반듯함을 밟아, 비뚤어진 자리에는 앉지 않고 비뚤어진 음식은 먹지 않았는데, 요임금이 물려주려 한다는 말을 듣고 떠났다. 그 벗 소보가 허유가 요임금에게 물려받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제 몸을 더럽혔다 여겨 이에 못에 나아가 귀를 씻었다. 못 주인이 성내어 『어찌 내 물을 더럽히는가』 하였다. 허유가 이에 달아나 중악 영수 북녘 기산 아래에서 밭을 갈며 한평생 천하를 다스릴 낯빛이 없었다. 죽어 기산 꼭대기에 묻혔으니 양성 남쪽 십 리에 있다. 요임금이 이에 그 무덤에 나아가 『기산공신』이라 부르고 오악에 짝하여 제사하니 대대로 받들어 이제까지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按:袁閎卒於太尉掾,未嘗爲汝南,斯説謬矣。
살피건대 원굉은 태위의 아전으로 죽었고 일찍이 여남을 맡은 적이 없으니 이 말은 그르다.
2달 속에 아무것도 없으면 지극히 밝겠구나
徐孺子年九歳,嘗月下戲,人語之曰:「若令月中無物,當極明邪!」徐曰:「不然,譬如人眼中有瞳子,無此必不明。」
서유자가 아홉 살 때 달 아래서 놀았는데 어떤 이가 말하였다. "만일 달 속에 아무것도 없다면 지극히 밝겠구나."
서유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사람 눈에 눈동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없으면 반드시 밝지 못합니다."
협주 2
穉也
서치다.
《五經通議》曰:「月中有兔、蟾蜍者何?月,陰也;蟾蜍,亦陰也;而與兔並明,陰繫於陽也。」
『오경통의』에 이르기를 「달 속에 토끼와 두꺼비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달은 음이요 두꺼비도 음인데 토끼와 함께 밝으니 음이 양에 매인 것이다」 하였다.
3어릴 때 똑똑하다고 커서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니다
孔文舉年十歳,隨父到洛。時李元禮有盛名,爲司隸校尉,詣門者皆雋才淸稱,及中表親戚乃通。文舉至門,謂吏曰:「我是李府君親。」既通,前坐。元禮問曰:「君與僕有何親?」對曰:「昔先君仲尼與君先人伯陽,有師資之尊;是僕與君奕世爲通好也。」元禮及賓客莫不奇之。太中大夫陳韙後至,人以其語語之。韙曰:「小時了了,大未必佳!」文舉曰:「想君小時,必當了了!」韙大踧踖。
공문거가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낙양에 이르렀다. 그때 이원례가 이름이 성하여 사예교위였는데, 그 문에 나아가는 이는 다 뛰어난 재주와 맑은 일컬음이 있는 이였고 안팎 친척이라야 통할 수 있었다.
문거가 문에 이르러 아전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부군의 친척이오."
통하고 나서 앞에 앉으니 원례가 물었다. "그대와 나에게 무슨 친함이 있는가."
대답하였다. "옛날 저의 선조 중니와 그대의 선조 백양께서 스승과 제자의 높음이 있었으니, 이는 저와 그대가 대를 이어 사귀어 온 사이입니다."
원례와 손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중대부 진위가 뒤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 말을 전하니 진위가 말하였다. "어릴 때 똑똑한 이가 커서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니오."
문거가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대는 어릴 때 반드시 똑똑하셨겠습니다."
진위가 크게 무안해하였다.
협주 2
融也
공융이다.
《續漢書》曰:「孔融字文舉,魯國人,孔子二十四世孫也。髙祖父尚,鉅鹿太守。父宙,泰山都尉。」《融別傳》曰:「融四歳,與兄食梨,輒引小者。人問其故?答曰:『小兒,法當取小者。』年十歳,隨父詣京師。河南尹李膺有重名,融欲觀其爲人,遂造之。膺問:『髙明父祖,嘗與僕周旋乎?』融曰:『然。先君孔子與君先人李老君,同德比義,而相師友。則融與君累世通家也。』衆坐莫不歎息,僉曰:『異童子也!』太中大夫陳韙後至,同坐以告。韙曰:『人小時了了者,長大未必能奇。』融應聲曰:『即如所言,君之幼時,豈實慧乎?』膺大笑,顧謂融曰:『長大必爲偉器。』」
『속한서』에 이르기를 「공융은 자가 문거요 노나라 사람이니 공자의 이십사 대 손이다. 고조부 공상은 거록태수요 아버지 공주는 태산도위였다」 하였다. 『융별전』에 이르기를 「공융이 네 살에 형과 배를 먹는데 늘 작은 것을 집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린아이는 법으로 마땅히 작은 것을 가져야 합니다』 하였다. 열 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이르렀다. 하남윤 이응이 무거운 이름이 있어 공융이 그 사람됨을 보고자 마침내 찾아갔다. 이응이 『높고 밝은 그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일찍이 나와 오간 일이 있는가』 하니, 공융이 『그렇습니다. 선조 공자와 그대의 선조 이노군은 덕이 같고 옳음이 견주어 서로 스승이자 벗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와 그대는 여러 대에 걸쳐 사귄 집안입니다』 하였다. 앉은 이들이 다 탄식하며 모두 『남다른 아이다』 하였다. 태중대부 진위가 뒤에 이르러 같이 앉은 이가 이를 알리니, 진위가 『사람이 어릴 때 똑똑한 이는 자라서 반드시 기이하지는 않다』 하였다. 공융이 소리에 응하여 『곧 말씀대로라면 그대의 어릴 때는 어찌 참으로 슬기로웠겠습니까』 하였다. 이응이 크게 웃고 공융을 돌아보며 『자라면 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 하였다」 하였다.
4훔치는 데 어찌 예를 차리겠소
孔文舉有二子,大者六歳,小者五歳。晝日父眠,小者床頭盜酒飲之。大兒謂曰:「何以不拜?」荅曰:「偸,那得行禮!」
공문거에게 아들 둘이 있어 큰아이는 여섯 살이요 작은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낮에 아버지가 잠든 사이 작은아이가 평상 머리에서 술을 훔쳐 마셨다.
큰아이가 말하였다. "어찌 절하지 않느냐."
대답하였다. "훔치는데 어찌 예를 차리겠소."
5엎어진 둥지 아래 성한 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孔融被收,中外惶怖。時融兒大者九歳,小者八歳。二兒故琢釘戲,了無遽容。融謂使者曰:「冀罪止於身,二兒可得全不?」兒徐進曰:「大人豈見覆巣之下,復有完卵乎?」尋亦收至。
공융이 잡히자 안팎이 두려워 떨었다. 그때 공융의 아이는 큰아이가 아홉 살이요 작은아이가 여덟 살이었는데, 두 아이는 짐짓 못 박기 놀이를 하며 조금도 허둥대는 낯이 없었다.
공융이 심부름꾼에게 말하였다. "죄가 내 몸에서 그치고 두 아이는 온전할 수 있기를 바라오."
아이가 천천히 나아가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엎어진 둥지 아래에 다시 성한 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윽고 잡으러 오는 이가 이르렀다.
협주 1
《魏氏春秋》曰:「融對孫權使有訕謗之言,坐棄市。二子方八歳、九歳,融見收,奕棋端坐不起。左右曰:『而父見執。』二子曰:『安有巣覆而卵不破者哉!』遂倶見殺。」《世語》曰:「魏太祖以歳儉禁酒,融謂酒以成禮,不宜禁。由是惑衆,太祖收寘法焉。二子齠齔見收,顧謂二子曰:『何以不辟?』二子曰:『父尚如此,復何所辟?』」裴松之以爲《世語》云融兒不辟,知必倶死,猶差可安。孫盛之言,誠所未譬。八歳小兒,能懸了禍患,聰明特達,卓然既遠,則其憂樂之情,固亦有過成人矣。安有見父被執,而無變容,奕棋不起,若在暇豫者乎?昔申生就命,言不忘父,不以己之將死而廢念父之情也。父安尚猶若茲,而況顛沛哉!盛以此爲美談,無乃賊夫人之子與?蓋由好奇情多,而不知言之傷理也。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공융이 손권의 사신을 대하여 헐뜯는 말을 하여 저잣거리에서 죽는 벌을 받았다. 두 아들이 바야흐로 여덟 살과 아홉 살이었는데, 공융이 잡히자 바둑을 두며 단정히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곁의 사람이 『네 아버지가 잡히셨다』 하니, 두 아들이 『어찌 둥지가 엎어졌는데 알이 깨지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세어』에 이르기를 「위나라 태조가 흉년이라 하여 술을 금하니, 공융이 술은 예를 이루는 것이므로 금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무리를 홀렸다 하여 태조가 잡아 법에 부쳤다. 두 아들이 젖니를 갈 나이에 잡히니, 공융이 돌아보며 『어찌 피하지 않느냐』 하니 두 아들이 『아버지도 이러하신데 다시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하였다」 하였다. 배송지는 이렇게 여겼다. 『세어』에서 공융의 아이가 피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함께 죽을 줄 알았기 때문이라 하니 그래도 좀 편안하다. 손성의 말은 참으로 깨닫지 못하겠다. 여덟 살 어린아이가 화와 근심을 훤히 알아 총명함이 남달리 통하고 우뚝하게 멀리 내다보았다면, 그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마음도 본디 어른보다 더한 데가 있었을 것이다. 어찌 아버지가 잡히는 것을 보고도 낯빛이 바뀌지 않고 바둑을 두며 일어나지 않아 한가한 듯할 수 있겠는가. 옛날 신생은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말에 아버지를 잊지 않았으니, 제가 죽게 되었다 하여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가 편안할 때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엎어지는 때이겠는가. 손성이 이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삼았으니 남의 자식을 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많아 말이 결을 다치게 함을 알지 못한 탓이다.
6높고 밝은 임금이 어찌 충신과 효자를 벌하겠소
潁川太守髠陳仲弓。客有問元方:「府君何如?」元方曰:「髙明之君也。」「足下家君何如?」曰:「忠臣孝子也。」客曰:「《易》稱『二人同心,其利斷金;同心之言,其臭如蘭。』何有髙明之君而刑忠臣孝子者乎?」元方曰:「足下言何其謬也!故不相荅。」客曰:「足下但因傴爲恭不能答。」元方曰:「昔髙宗放孝子孝己,尹吉甫放孝子伯奇,董仲舒放孝子符起。唯此三君,髙明之君;唯此三子,忠臣孝子。」客慚而退。
영천 태수가 진중궁의 머리를 깎는 형을 내렸다. 어떤 손이 원방에게 물었다. "부군은 어떤 분이오."
원방이 말하였다. "높고 밝은 임금이오."
"그대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오."
말하였다. "참된 신하요 효도하는 아들이오."
손이 말하였다. "『역』에 이르기를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같이한 말은 그 향기가 난초 같다』 하였소. 어찌 높고 밝은 임금이 있어 참된 신하와 효도하는 아들에게 형을 내리는 일이 있겠소."
원방이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어찌 그리 그른가. 그러므로 대답하지 않겠소."
손이 말하였다. "그대는 다만 곱사등이라 공손한 척하며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오."
원방이 말하였다. "옛날 고종은 효자 효기를 내쳤고, 윤길보는 효자 백기를 내쳤고, 동중서는 효자 부기를 내쳤소. 오직 이 세 임금이 높고 밝은 임금이요, 오직 이 세 아들이 참된 신하요 효도하는 아들이오."
손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협주 5
按,寔之在鄕里,州郡有疑獄不能決者,皆將詣寔,或到而情首,或中途改辭,或託狂悸,皆曰「寧爲刑戮所苦,不爲陳君所非。」豈有盛德感人若斯之甚,而不自衞,反招刑辟,殆不然乎?此所謂東野之言耳!
살피건대 진식이 시골에 있을 때 주와 군에 의심스러워 가리지 못하는 옥사가 있으면 다 진식에게 나아갔는데, 더러는 이르러 실정을 자백하고 더러는 중도에 말을 바꾸고 더러는 미친 척하여, 다들 「차라리 형벌에 괴로울지언정 진군에게 그르다는 말을 듣지 않겠다」 하였다. 어찌 성한 덕이 사람을 움직임이 이토록 심한데 제 몸을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형벌을 부르는 일이 있겠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시골 사람의 말일 뿐이다.
王廙注《繫辭》曰:「金,至堅矣,同心者,其利無不入。蘭,芳物也,無不樂者。言其同心者,物無不樂也。」
왕이가 『계사』에 주하여 이르기를 「쇠는 지극히 굳으니 마음을 같이한 이는 그 날카로움이 들어가지 않는 데가 없다. 난초는 향기로운 것이니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다. 마음을 같이한 이는 사물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하였다.
《帝王世紀》曰:「殷髙宗武丁有賢子孝己,其母蚤死,髙宗惑後妻之言,放之而死,天下哀之。」
『제왕세기』에 이르기를 「은나라 고종 무정에게 어진 아들 효기가 있었는데 그 어미가 일찍 죽고 고종이 뒷아내의 말에 홀려 내치니 죽었다. 천하가 그를 슬퍼하였다」 하였다.
《琴操》曰:「尹吉甫,周卿也,有子伯奇,母死更娶。後妻生子曰伯邽。乃譖伯奇於吉甫,於是放伯奇於野。宣王出遊,吉甫從,伯奇乃作歌,以言感之。宣王聞之曰:『此孝子之辭也。』吉甫乃求伯奇於野,而射殺後妻。」
『금조』에 이르기를 「윤길보는 주나라 경이다. 아들 백기가 있었는데 어미가 죽어 다시 장가들었다. 뒷아내가 아들을 낳아 백규라 하였다. 이에 윤길보에게 백기를 헐뜯으니 백기를 들에 내쳤다. 선왕이 놀러 나갈 때 윤길보가 따랐는데 백기가 이에 노래를 지어 말로 그를 움직였다. 선왕이 이를 듣고 『이는 효자의 말이다』 하였다. 윤길보가 이에 들에서 백기를 찾고 뒷아내를 쏘아 죽였다」 하였다.
未詳
자세하지 않다.
7제 어버이를 아끼지 않고 남을 아끼면 덕에 어그러지지 않겠소
荀慈明與汝南袁閬相見,問潁川人士,慈明先及諸兄。閬笑曰:「士但可因親舊而已乎?」慈明曰:「足下相難,依據者何經?」閬曰:「方問國士而及諸兄,是以尤之耳。」慈明曰:「昔者祁奚内舉不失其子,外舉不失其讎,以爲至公。公旦《文王》之詩,不論堯舜之德,而頌文武者,親親之義也。《春秋》之義,内其國而外諸夏。且不愛其親而愛他人者,不爲悖德乎?」
순자명이 여남의 원랑과 만나 영천의 인물을 물으니 자명이 먼저 제 여러 형에게 미쳤다.
원랑이 웃으며 말하였다. "선비란 다만 친하고 오랜 이를 말미암을 뿐이오."
자명이 말하였다. "그대가 나를 나무라는데 무슨 경전에 기대는 것이오."
원랑이 말하였다. "바야흐로 나라의 선비를 물었는데 여러 형에게 미쳤으므로 나무란 것이오."
자명이 말하였다. "옛날 기해는 안으로 천거하되 제 아들을 빠뜨리지 않았고 밖으로 천거하되 제 원수를 빠뜨리지 않았으니 지극히 공변되다 하였소. 주공 단이 「문왕」의 시에서 요임금과 순임금의 덕을 따지지 않고 문왕과 무왕을 기린 것은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는 옳음이오. 『춘추』의 옳음도 제 나라를 안으로 하고 여러 중원 나라를 밖으로 하오. 또 제 어버이를 아끼지 않고 남을 아끼는 것이 덕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겠소."
협주 2
荀爽,一名諝。《漢南紀》曰:「諝文章典籍無不渉,時人諺曰:『荀氏八龍,慈明無雙。』潛處篤志,徴聘無所就。」張璠《漢紀》曰:「董卓秉政,復徴爽,爽欲遁去,吏持之急。起布衣,九十五日而至三公。」
순상이니 다른 이름은 순서다. 『한남기』에 이르기를 「순서는 글과 서적에 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때 사람들의 속담에 『순씨의 여덟 용 가운데 자명이 짝이 없다』 하였다. 조용히 지내며 뜻을 도타이 하여 부름에 나아가는 바가 없었다」 하였다. 장번의 『한기』에 이르기를 「동탁이 정사를 잡고 다시 순상을 부르니 순상이 달아나려 하였으나 아전이 급히 붙들었다. 베옷에서 일어나 아흔닷새 만에 삼공에 이르렀다」 하였다.
《春秋傳》曰:「祁奚爲中軍尉,請老,晉侯問嗣焉。稱解狐,其讎也。將立之而卒。又問焉。對曰:『午也可。』其子也。君子謂祁奚可謂能舉善矣。稱其讎不爲諂,立其子不爲比。」
『춘추전』에 이르기를 「기해가 중군위가 되었다가 늙어 물러나기를 청하니 진나라 임금이 뒤이을 이를 물었다. 해호를 일컬었으니 그 원수다. 세우려 하였는데 죽었다. 또 물으니 대답하기를 『오가 좋습니다』 하였는데 그 아들이다. 군자가 이르기를 기해는 착한 이를 천거할 줄 안다 하겠으니, 그 원수를 일컬은 것은 아첨이 아니요 그 아들을 세운 것은 패거리가 아니다 하였다」 하였다.
8예형이 어양삼과를 두드리다
禰衡被魏武謫爲鼓吏,正月半試鼓。衡揚枹爲漁陽摻撾,淵淵有金石聲,四坐爲之改容。孔融曰:「禰衡罪同胥靡,不能發明王之夢。」魏武慚而赦之。
예형이 위나라 무제에게 벌을 받아 북 치는 아전이 되었는데, 정월 보름에 북을 시험하였다. 예형이 북채를 들어 어양삼과를 치니 깊고 깊게 쇠와 돌 소리가 나 온 자리가 이 때문에 낯빛을 고쳤다.
공융이 말하였다. "예형의 죄는 서미와 같으나 밝은 임금의 꿈을 일으키지는 못하는군요."
위나라 무제가 부끄러워하며 그를 놓아 주었다.
협주 2
《典略》曰:「衡字正平,平原般人也。」《文士傳》曰:「衡不知先所出,逸才飄舉。少與孔融作爾汝之交,時衡未滿二十,融已五十。敬衡才秀,共結殷勤,不能相違。以建安初北遊,或勸其詣京師貴遊者,衡懷一刺,遂至漫滅,竟無所詣。融數與武帝牋,稱其才,帝傾心欲見。衡稱疾不肯往,而數有言論。帝甚忿之,以其才名不殺,圖欲辱之,乃令録爲鼓吏。後至八月朝會,大閲試鼓節,作三重閣,列坐賓客。以帛絹製衣,作一岑牟,一單絞及小㡓。鼓吏度者,皆當脱其故衣,著此新衣。次傳衡,衡撃鼓爲漁陽摻檛,蹋地來前,躡𫘈腳足,容態不常,鼓聲甚悲,音節殊妙。坐客莫不慷慨,知必衡也。既度,不肯易衣。吏呵之曰:『鼓吏何獨不易服?』衡便止。當武帝前,先脱㡓,次脱餘衣,裸身而立。徐徐乃著岑牟,次著單絞,後乃著㡓。畢,復撃鼓摻槌而去,顏色無怍。武帝笑謂四坐曰:『本欲辱衡,衡反辱孤。』至今有漁陽摻檛,自衡造也。爲黃祖所殺。」
『전략』에 이르기를 「예형은 자가 정평이요 평원 반 사람이다」 하였다. 『문사전』에 이르기를 「예형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뛰어난 재주가 훌쩍 날았다. 젊어서 공융과 너나 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때 예형은 스물이 못 되었고 공융은 이미 쉰이었다. 예형의 재주가 빼어남을 공경하여 함께 도타운 사이를 맺어 서로 어기지 못하였다. 건안 처음에 북쪽으로 노닐 때 어떤 이가 서울의 귀한 이를 찾아보라 권하니, 예형이 명함 하나를 품었는데 마침내 글자가 다 닳도록 끝내 찾아간 데가 없었다. 공융이 자주 무제에게 글을 올려 그 재주를 일컬으니 임금이 마음을 기울여 보고자 하였다. 예형이 병을 핑계로 가려 하지 않고 자주 말을 하니 임금이 몹시 성내었으나, 그 재주와 이름 때문에 죽이지는 않고 욕보이려 하여 이에 북 치는 아전으로 적게 하였다. 뒤에 팔월 조회에 이르러 북 가락을 크게 살펴 겨루는데, 삼 층 다락을 짓고 손들을 늘어앉혔다.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잠모 하나와 홑저고리와 작은 바지를 만들었다. 북 치는 아전으로 지나는 이는 다 제 옛 옷을 벗고 이 새 옷을 입어야 하였다. 차례가 예형에게 이르니 예형이 북을 쳐 어양삼과를 하는데, 땅을 밟고 앞으로 나오며 발을 옮기니 몸짓이 예사롭지 않고 북소리가 몹시 슬프며 가락이 자못 묘하였다. 앉은 손이 북받치지 않는 이가 없어 반드시 예형인 줄 알았다. 지나고 나서 옷을 바꾸려 하지 않으니 아전이 꾸짖어 『북 치는 아전이 어찌 홀로 옷을 바꾸지 않는가』 하니 예형이 곧 멈추었다. 무제 앞에서 먼저 바지를 벗고 다음에 나머지 옷을 벗어 알몸으로 섰다. 천천히 이에 잠모를 쓰고 다음에 홑저고리를 입고 뒤에 바지를 입었다. 마치고 다시 북을 치고 채를 놀리며 갔는데 낯빛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무제가 웃으며 온 자리에 말하기를 『본디 예형을 욕보이려 하였는데 예형이 도리어 나를 욕보였다』 하였다. 이제까지 어양삼과가 있으니 예형에게서 지어진 것이다. 황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皇甫謐《帝王世紀》曰:「武丁夢天賜己賢人,使百工寫其象,求諸天下。見築者胥靡,衣褐於傅巖之野,是謂傅説。」張晏曰:「胥靡,刑名。胥,相也;靡,從也。謂相從坐輕刑也。」
황보밀의 『제왕세기』에 이르기를 「무정이 하늘이 저에게 어진 이를 내려 주는 꿈을 꾸고 온갖 장인에게 그 모습을 그리게 하여 천하에서 찾았다. 담 쌓는 서미가 부암 들에서 갈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이가 부열이다」 하였다. 장안이 이르기를 「서미는 형벌 이름이다. 서는 서로요 미는 따름이니, 서로 따라 가벼운 형을 받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9방사원이 이천 리를 가 사마덕조를 찾다
南郡龐士元聞司馬德操在潁川,故二千里候之。至,遇德操采桑,士元從車中謂曰:「吾聞丈夫處世,當帶金佩紫,焉有屈洪流之量,而執絲婦之事。」德操曰:「子且下車,子適知邪徑之速,不慮失道之迷。昔伯成耦耕,不慕諸侯之榮;原憲桑樞,不易有官之宅。何有坐則華屋,行則肥馬,侍女數十,然後爲奇。此乃許父所以忼慨,夷齊所以長嘆。雖有竊秦之爵,千駟之富,不足貴也!」士元曰:「僕生出邊垂,寡見大義。若不一叩洪鐘,伐雷鼓,則不識其音響也。」
남군의 방사원이 사마덕조가 영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짐짓 이천 리를 가서 그를 찾았다.
이르러 덕조가 뽕잎 따는 것을 만나니, 사원이 수레 안에서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대장부가 세상에 살면 마땅히 금인을 차고 자줏빛 인끈을 매야 한다 하였는데, 어찌 큰 물결 같은 도량을 굽혀 실 잣는 아낙의 일을 잡고 계시오."
덕조가 말하였다. "그대는 우선 수레에서 내리시오. 그대는 지름길이 빠른 줄만 알고 길 잃어 헤맬 것은 헤아리지 않는구려.
옛날 백성자고는 나란히 밭을 갈며 제후의 영화를 그리워하지 않았고, 원헌은 뽕나무로 지도리를 삼고도 벼슬 있는 집과 바꾸지 않았소. 어찌 앉으면 화려한 집이요 다니면 살진 말이요 시중드는 계집이 수십이라야 기이한 것이겠소.
이것이 바로 허유와 소보가 슬퍼한 바요 백이와 숙제가 길이 탄식한 바요. 비록 진나라를 훔친 벼슬과 사천 마리 말의 넉넉함이 있더라도 귀하기에 넉넉하지 않소."
사원이 말하였다. "저는 변두리에서 나고 자라 큰 옳음을 본 것이 적습니다. 만일 한 번 큰 종을 두드리고 우레 같은 북을 치지 않았다면 그 소리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협주 7
《蜀志》曰:「龐統字士元,襄陽人。少時樸鈍,未有識者。潁川司馬徽有知人之鑒,士元弱冠往見徽,徽采桑樹上,坐士元樹下,共語,自晝至夜。徽異之曰:『生當爲南州士人之冠冕。』由是漸顯。」《襄陽記》曰:「士元,德公之從子也。年少未有識者,唯德公重之。年十八,使往見德操,與語,歎曰:『德公誠知人,實盛德也。』後劉備訪世事於德操,德操曰:『俗士豈識時務,此閒自有伏龍、鳳雛。』謂諸葛孔明與士元也。」《華陽國志》曰:「劉備引士元爲軍師中郎將,從攻洛,爲流矢所中,卒。時年三十八。」
『촉지』에 이르기를 「방통은 자가 사원이요 양양 사람이다. 젊을 때는 수수하고 무디어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영천의 사마휘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는데, 사원이 스무 살에 사마휘를 보러 가니 사마휘가 뽕나무 위에서 잎을 따고 사원은 나무 아래 앉아 함께 이야기하여 낮부터 밤까지 이르렀다. 사마휘가 기이하게 여겨 『마땅히 남녘 선비의 으뜸이 되리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차츰 드러났다」 하였다. 『양양기』에 이르기를 「사원은 방덕공의 조카다. 나이 어려 알아보는 이가 없었고 오직 덕공만이 그를 무겁게 여겼다. 열여덟에 덕조를 보러 가게 하니 함께 말하고 탄식하기를 『덕공은 참으로 사람을 아니 실로 성한 덕이다』 하였다. 뒤에 유비가 덕조에게 세상일을 물으니 덕조가 『속된 선비가 어찌 때의 일을 알겠습니까. 여기 절로 엎드린 용과 봉의 새끼가 있습니다』 하였으니, 제갈공명과 사원을 이른 것이다」 하였다. 『화양국지』에 이르기를 「유비가 사원을 이끌어 군사중랑장으로 삼았는데, 낙을 치는 데 따라갔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하였다.
《司馬徽別傳》曰:「徽字德操,潁川陽翟人。有人倫鑒識,居荊州。知劉表性暗,必害善人,乃括囊不談議時人。有以人物問徽者,初不辨其髙下,毎輒言『佳』。其婦諫曰:『人質所疑,君宜辨論,而一皆言佳,豈人所以咨君之意乎?』徽曰:『如君所言,亦復佳。』其婉約遜遁如此。嘗有妄認徽豬者,便推與之。後得其豬,叩頭來還,徽又厚辭謝之。劉表子琮往候徽,遣問在不?會徽自鋤園,琮左右問:『司馬君在邪?』徽曰:『我是也。』琮左右見其醜陋,罵曰:『死傭,將軍諸郎欲求見司馬君,汝何等田奴,而自稱是邪!』徽歸,刈頭著幘出見。琮左右見徽故是向老翁,恐,向琮道之。琮起,叩頭辭謝。徽乃謂曰:『卿眞不可,然吾甚羞之。此自鋤園,唯卿知之耳。』有人臨蠶求簇箔者,徽自棄其蠶而與之。或曰:『凡人損己以贍人者,謂彼急我緩也。今彼此正等,何爲與人?』徽曰:『人未嘗求己,求之不與將慚。何有以財物令人慚者!』人謂劉表曰:『司馬德操,奇士也,但未遇耳。』表後見之,曰:『世閒人爲妄語,此直小書生耳。』其智而能愚皆此類。荊州破,爲曹操所得,操欲大用,會其病死。」
『사마휘별전』에 이르기를 「사마휘는 자가 덕조요 영천 양적 사람이다. 사람됨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형주에 살았다. 유표의 성품이 어두워 반드시 착한 사람을 해칠 줄 알고, 이에 주머니를 여미어 그때 사람을 말하지 않았다. 인물을 사마휘에게 묻는 이가 있어도 처음부터 그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늘 『좋다』고만 하였다. 그 아내가 간하기를 『남이 실로 의심하는 바를 그대가 마땅히 가려 말해야 할 터인데 한결같이 다 좋다고만 하니, 어찌 남이 그대에게 여쭙는 뜻이겠습니까』 하니, 사마휘가 『그대의 말도 또한 좋소』 하였다. 그 부드럽고 겸손히 물러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사마휘의 돼지라고 함부로 우기는 이가 있어 곧 밀어 주었다. 뒤에 제 돼지를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돌려주니 사마휘가 또 두터운 말로 사례하였다. 유표의 아들 유종이 사마휘를 찾아가 있는지 물으러 보냈다. 마침 사마휘가 몸소 밭을 매고 있는데 유종의 곁 사람이 『사마군이 계신가』 물으니 사마휘가 『내가 그요』 하였다. 유종의 곁 사람이 그 꼴이 추한 것을 보고 꾸짖기를 『죽을 놈아, 장군의 여러 아드님이 사마군을 뵈려 하는데 너는 어떤 밭종이기에 스스로 그렇다 하느냐』 하였다. 사마휘가 돌아가 머리를 다듬고 두건을 쓰고 나와 보니, 유종의 곁 사람이 사마휘가 바로 아까 그 늙은이임을 보고 두려워하여 유종에게 말하였다. 유종이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니 사마휘가 이에 이르기를 『그대는 참으로 안 될 일이오. 그러나 나는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오. 이는 스스로 밭을 매던 것이니 오직 그대만이 알 뿐이오』 하였다. 누에 칠 때를 맞아 섶과 채반을 구하는 이가 있으니 사마휘가 제 누에를 버리고 주었다. 어떤 이가 『무릇 사람이 제 것을 덜어 남에게 대는 것은 저쪽이 급하고 나는 느긋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쪽저쪽이 꼭 같은데 어찌 남에게 주십니까』 하니, 사마휘가 『남이 일찍이 나에게 구한 적이 없는데 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것이오. 어찌 재물로 남을 부끄럽게 하겠소』 하였다. 어떤 이가 유표에게 『사마덕조는 기이한 선비인데 다만 만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니, 유표가 뒤에 그를 보고 『세상 사람이 헛말을 하는구나. 이는 다만 작은 서생일 뿐이다』 하였다. 그 슬기로우면서 어리석을 수 있음이 다 이런 것들이다. 형주가 무너지자 조조에게 얻은 바 되어 조조가 크게 쓰려 하였는데 마침 병들어 죽었다」 하였다.
《莊子》曰:「堯治天下,伯成子髙立爲諸侯,禹爲天子,伯成辭諸侯而耕於野。禹往見之,趨就下風而問焉。子髙曰:『昔堯治天下,不賞而民勸,不罰而民畏。今子賞罰而民且不仁,德自此衰,刑自此立。夫子盍行邪?毋落吾事!』」
『장자』에 이르기를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백성자고가 서서 제후가 되었는데, 우임금이 천자가 되자 백성자고가 제후를 사양하고 들에서 밭을 갈았다. 우임금이 가서 보고 바람 아래로 나아가 물었다. 자고가 『옛날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상 주지 않아도 백성이 힘쓰고 벌하지 않아도 백성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제 그대가 상 주고 벌하는데도 백성이 어질지 않으니, 덕이 이로부터 쇠하고 형벌이 이로부터 섰습니다. 그대는 어찌 가지 않습니까. 내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하였다.
《家語》曰:「原憲字子思,宋人,孔子弟子。居魯,環堵之室,茨以生草,蓬戸不完,桑樞而瓮牖,上漏下濕,坐而絃歌。子貢軒車不容巷,往見之,曰:『先生何病也?』憲曰:『憲聞無財謂之貧,學而不能行謂之病。今憲貧也,非病也。夫希世而行,比周而友,學以爲人,教以爲己。仁義之慝,輿馬之飾,憲不忍爲也。』」
『가어』에 이르기를 「원헌은 자가 자사요 송나라 사람이며 공자의 제자다. 노나라에 살았는데 사방 한 길 되는 방에 생풀로 지붕을 이었고 쑥대 문이 성하지 않으며 뽕나무로 지도리를 삼고 깨진 항아리로 창을 내어, 위에서 새고 아래는 축축한데 앉아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였다. 자공이 높은 수레가 골목에 들어가지 못한 채 가서 보고 『선생은 무슨 병이시오』 하니, 원헌이 『제가 듣기에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이르고 배우고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 이릅니다. 이제 저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닙니다. 무릇 세상에 바라며 행하고 패를 지어 벗하며 배움을 남에게 보이려 하고 가르침을 저를 위해 하며, 어짊과 옳음을 감추어 나쁜 짓을 하고 수레와 말을 꾸미는 일은 제가 차마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許由、巣父。
허유와 소보다.
《孟子》曰:「伯夷、叔齊目不視惡色,耳不聽惡聲,與鄕人居,若在塗炭,蓋聖人之淸也。」
『맹자』에 이르기를 「백이와 숙제는 눈으로 나쁜 빛을 보지 않고 귀로 나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시골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진흙과 숯 속에 있는 듯하였으니 대개 성인의 맑음이다」 하였다.
《古史考》曰:「呂不韋爲秦子楚行千金貨於華陽夫人,請立子楚爲嗣。及子楚立,封不韋洛陽十萬戸,號文信侯。」以詐獲爵,故曰竊也。《論語》曰:「齊景公有馬千駟,民無德而稱焉。」孔安國曰:「千駟,四千匹。」
『고사고』에 이르기를 「여불위가 진나라 자초를 위하여 천금의 재물을 화양부인에게 써서 자초를 뒤로 세우기를 청하였다. 자초가 서자 여불위를 낙양 십만 호에 봉하고 문신후라 불렀다」 하였다. 속임수로 벼슬을 얻었으므로 훔쳤다 한 것이다. 『논어』에 이르기를 「제나라 경공에게 말 사천 마리가 있었으나 백성이 덕으로 일컫는 것이 없었다」 하였다. 공안국이 이르기를 「천사는 사천 필이다」 하였다.
10폐하의 그물눈이 성기지 않은 탓이기도 합니다
劉公幹以失敬罹罪,文帝問曰:「卿何以不謹於文憲?」楨荅曰:「臣誠庸短,亦由陛下綱目不疎。」
유공간이 공경함을 잃어 죄에 걸리자 문제가 물었다. "경은 어찌 글로 된 법을 삼가지 않았는가."
유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참으로 못나고 모자란 탓이기도 하나, 또한 폐하의 그물눈이 성기지 않은 탓이기도 합니다."
협주 2
《典略》曰:「劉楨字公幹,東平寧陽人。建安十六年,世子爲五官中郎將,妙選文學,使楨隨侍太子。酒酣坐歡,乃使夫人甄氏出拜,坐上客多伏,而楨獨平視。他日公聞,乃收楨,減死輸作部。」《文士傳》曰:「楨性辯捷,所問應聲而答。坐平視甄夫人,配輸作部,使磨石。武帝至尚方觀作者,見楨匡坐正色磨石。武帝問曰:『石何如?』楨因得喩己自理,跪而對曰:『石出荊山懸巖之巓,外有五色之章,内含卞氏之珍。磨之不加瑩,雕之不增文,稟氣堅貞,受之自然。顧其理枉屈紆繞而不得申。』帝顧左右大笑,即日赦之。」
『전략』에 이르기를 「유정은 자가 공간이요 동평 영양 사람이다. 건안 십육 년에 세자가 오관중랑장이 되어 글하는 이를 잘 가려 뽑아 유정으로 하여금 태자를 따라 모시게 하였다. 술이 무르익어 자리가 즐거워지자 이에 부인 견씨를 나와 절하게 하니 자리에 있던 손들이 흔히 엎드렸는데 유정만이 홀로 바로 보았다. 다른 날 조조가 듣고 이에 유정을 잡아 죽음에서 덜어 부역하는 데 보냈다」 하였다. 『문사전』에 이르기를 「유정은 성품이 말솜씨가 있고 재빨라 묻는 바에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였다. 앉아서 견부인을 바로 보아 부역하는 데 배정되어 돌을 갈게 되었다. 무제가 상방에 이르러 일하는 이를 보다가 유정이 단정히 앉아 낯빛을 바로 하고 돌을 가는 것을 보았다. 무제가 『돌이 어떠한가』 물으니, 유정이 이로써 제 처지를 빗대어 풀 수 있게 되어 무릎 꿇고 대답하기를 『돌은 형산 벼랑 꼭대기에서 나와 밖으로는 다섯 빛깔 무늬가 있고 안으로는 변씨의 보배를 품었습니다. 갈아도 더 빛나지 않고 새겨도 무늬가 더해지지 않으니, 받은 기운이 굳고 곧아 저절로 그러함에서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결이 굽고 얽혀 펴지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곁을 돌아보며 크게 웃고 그날로 놓아 주었다」 하였다.
《魏志》曰:「帝諱丕,字子桓,受漢禪。」按,諸書或云楨被刑魏武之世,建安二十年病亡。後七年,文帝乃即位。而謂楨得罪黃初之時,謬矣。
『위지』에 이르기를 「임금은 휘가 비요 자가 자환이니 한나라의 선양을 받았다」 하였다. 살피건대 여러 책에 더러 유정이 위나라 무제 때에 벌을 받아 건안 이십 년에 병들어 죽었다 한다. 그 뒤 일곱 해에 문제가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유정이 황초 때에 죄를 얻었다 하니 그르다.
11떨리고 두려워 땀이 물처럼 흘렀습니다
鍾毓、鍾會少有令譽。年十三,魏文帝聞之,語其父鍾繇曰:「可令二子來。」於是敕見。毓面有汗,帝曰:「卿面何以汗?」毓對曰:「戰戰惶惶,汗出如漿。」復問會:「卿何以不汗?」對曰:「戰戰慄慄,汗不敢出。」
종육과 종회가 어려서부터 좋은 기림이 있었다. 열세 살 때 위나라 문제가 이를 듣고 그 아버지 종요에게 말하였다. "두 아이를 오게 하시오."
이에 조칙으로 만났다. 종육의 낯에 땀이 있으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의 낯에는 어찌 땀이 있는가."
종육이 대답하였다. "떨리고 두려워 땀이 물처럼 흘렀습니다."
다시 종회에게 물었다. "경은 어찌 땀이 없는가."
대답하였다. "떨리고 떨려 땀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협주 2
《魏書》曰:「毓字穉叔,潁川長社人,相國繇長子也。年十四,爲散騎侍郎,機捷談笑有父風,仕至車騎將軍。」
『위서』에 이르기를 「종육은 자가 치숙이요 영천 장사 사람이니 상국 종요의 맏아들이다. 열넷에 산기시랑이 되었는데 재빠르고 담소에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으며 벼슬이 거기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魏志》曰:「繇字元常,家貧好學,爲《周易》、《老子》訓。歴大理、相國,遷太傅。」
『위지』에 이르기를 「종요는 자가 원상이요 집이 가난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여 『주역』과 『노자』의 풀이를 지었다. 대리와 상국을 지내고 태부로 옮겼다」 하였다.
12훔치는 것은 본디 예가 아니므로 절하지 않았습니다
鍾毓兄弟小時,値父晝寢,因共偸服藥酒。其父時覺,且託寐以觀之。毓拜而後飲,會飲而不拜。既而問毓何以拜?毓曰:「『酒以成禮』,不敢不拜。」又問會何以不拜?會曰:「偸本非禮,所以不拜。」
종육 형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낮잠 자는 때를 만나 함께 약술을 훔쳐 마셨다. 그 아버지가 그때 깨어 있었으나 짐짓 자는 척하며 이를 보았다.
종육은 절하고 나서 마셨고 종회는 마시고 절하지 않았다. 이윽고 종육에게 어찌 절하였느냐 물으니 종육이 말하였다. "『술은 예를 이루는 것』이니 감히 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종회에게 어찌 절하지 않았느냐 물으니 종회가 말하였다. "훔치는 것은 본디 예가 아니므로 절하지 않았습니다."
협주 1
《魏志》曰:「會字士季,繇少子也。敏惠夙成。中護軍蔣濟著論,謂觀其眸子,足以知人。會年五歳,繇遣見濟。濟甚異之,曰:『非常人也!』及壯,有才數,精練名理,累遷黃門侍郎。諸葛誕反,文王征之,會謀居多,時人謂之子房。拜鎭西將軍。伐蜀,蜀平,進位司徒。自謂功名蓋世,不可復爲人下。謂所親曰:『我淮南已來,畫無遺策,四海共知,持此欲安歸乎?』遂謀反,見誅,時年四十。」
『위지』에 이르기를 「종회는 자가 사계요 종요의 작은아들이다. 재빠르고 슬기로워 일찍 이루어졌다. 중호군 장제가 논을 지어 그 눈동자를 보면 사람을 알기에 넉넉하다 하였다. 종회가 다섯 살에 종요가 장제에게 보냈는데, 장제가 몹시 기이하게 여겨 『예사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자라서 재주와 꾀가 있고 이름과 결에 정통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황문시랑에 이르렀다. 제갈탄이 반란하자 문왕이 이를 치는데 종회의 꾀가 많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자방이라 하였다. 진서장군에 임명되었다. 촉을 쳐서 촉이 평정되자 사도로 자리가 올랐다. 스스로 공과 이름이 세상을 덮으니 다시 남의 아래에 있을 수 없다 여겼다. 가까운 이에게 『내가 회남 이래로 꾀에 빠뜨림이 없어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이를 가지고 어디로 돌아가려 하는가』 하였다. 마침내 모반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그때 나이 마흔이었다」 하였다.
13이 집 이름을 위양이라 하십시오
魏明帝爲外祖母築舘於甄氏。既成,自行視,謂左右曰:「舘當以何爲名?」侍中繆襲曰:「陛下聖思齊於哲王;罔極過於曾閔。此舘之興,情鍾舅氏,宜以『渭陽』爲名。」
위나라 명제가 외할머니를 위해 견씨 집안에 집을 지었다. 다 되자 몸소 가서 보고 곁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집을 무엇으로 이름 하면 좋겠는가."
시중 무습이 말하였다. "폐하의 거룩한 생각은 밝은 임금들과 가지런하고 다함없는 효성은 증삼과 민자건을 넘습니다. 이 집을 세우심은 마음이 외가에 모인 것이니 마땅히 『위양』으로 이름 하십시오."
협주 3
《魏本傳》曰:「帝諱叡,字元仲,文帝太子。以其母廢,未立爲嗣。文帝與倶獵,見子母鹿,文帝射其母,應絃而倒。復令帝射其子,帝置弓泣曰:『陛下已殺其母,臣不忍復殺其子。』文帝曰:『好語動人心。』遂定爲嗣。是爲明帝。」《魏書》曰:「文昭甄皇后,明帝母也。父逸,上蔡令。烈宗即位,追封上蔡君。嫡孫象襲爵,象薨,子暢嗣,起大第,車駕親自臨之。」
『위본전』에 이르기를 「임금은 휘가 예요 자가 원중이니 문제의 태자다. 그 어머니가 폐해졌으므로 아직 뒤로 서지 못하였다. 문제가 함께 사냥할 때 어미와 새끼 사슴을 보고 문제가 그 어미를 쏘아 활시위 소리에 맞추어 넘어뜨렸다. 다시 임금에게 그 새끼를 쏘게 하니, 임금이 활을 놓고 울며 『폐하께서 이미 그 어미를 죽이셨는데 신은 차마 다시 그 새끼를 죽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문제가 『좋은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고 마침내 뒤로 정하니 이가 명제다」 하였다. 『위서』에 이르기를 「문소견황후는 명제의 어머니다. 아버지 견일은 상채령이었는데 열종이 자리에 오르자 상채군으로 추봉하였다. 맏손자 견상이 벼슬을 이어받고 견상이 죽자 아들 견창이 이었는데, 큰 집을 지으니 임금의 수레가 몸소 이르렀다」 하였다.
《文章敘録》曰:「襲字熙伯,東海蘭陵人。有才學,累遷侍中、光祿勳。」
『문장서록』에 이르기를 「무습은 자가 희백이요 동해 난릉 사람이다. 재주와 학문이 있어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광록훈에 이르렀다」 하였다.
《秦詩》曰:「渭陽,康公念母也。康公之母,晉獻公之女。文公遭驪姬之難,未反而秦姬卒。穆公納文公,康公時爲太子,贈送文公於渭之陽,念母之不見也。我見舅氏,如母存焉。」按,《魏書》:「帝於後園爲象母起觀,名其里曰渭陽。」然則象母即帝之舅母,非外祖母也。且「渭陽」爲舘名,亦乖舊史也。
『진시』에 이르기를 「위양은 강공이 어머니를 생각한 것이다. 강공의 어머니는 진나라 헌공의 딸이다. 문공이 여희의 난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진희가 죽었다. 목공이 문공을 들이니 강공이 그때 태자로 위수 북녘에서 문공을 보내며 어머니를 보지 못함을 생각하였다. 내가 외삼촌을 보니 어머니가 계신 듯하다 한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위서』에 「임금이 뒤뜰에 견상의 어머니를 위해 누각을 세우고 그 마을을 위양이라 이름 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견상의 어머니는 곧 임금의 외숙모이지 외할머니가 아니다. 또 『위양』을 집 이름으로 삼은 것도 옛 사서와 어긋난다.
14오석산을 먹으면 정신이 환히 열린다
何平叔云:「服五石散,非唯治病,亦覺神明開朗。」
하평숙이 말하였다. "오석산을 먹으면 병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정신이 환히 열리는 것을 느낀다."
협주 1
《魏略》曰:「何晏字平叔,南陽宛人,漢大將軍進孫也。或云何苗孫也。尚主,又好色,故黃初時無所事任。正始中,曹爽用爲中書,主選舉,宿舊者多得濟拔。爲司馬宣王所誅。」秦丞相《寒食散論》曰:「寒食散之方雖出漢代,而用之者寡,靡有傳焉。魏尚書何晏首獲神效,由是大行於世,服者相尋也。」
『위략』에 이르기를 「하안은 자가 평숙이요 남양 완 사람이니 한나라 대장군 하진의 손자다. 어떤 이는 하묘의 손자라 한다. 공주에게 장가들고 또 여색을 좋아하였으므로 황초 때에는 맡은 일이 없었다. 정시 연간에 조상이 그를 중서로 써서 사람 뽑는 일을 맡게 하니 오래된 이들이 흔히 건져 뽑혔다. 사마선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진나라 승상의 『한식산론』에 이르기를 「한식산의 처방은 한나라 때에 나왔으나 쓰는 이가 드물어 전하는 것이 없었다. 위나라 상서 하안이 처음으로 신묘한 효험을 얻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크게 퍼져 먹는 이가 잇달았다」 하였다.
15자 되는 그림자로도 천문의 도수를 살핀다
嵇中散語趙景眞:「卿瞳子白黑分明,有白起之風;恨量小狹。」趙云:「尺表能審璣衡之度,寸管能測往復之氣;何必在大?但問識如何耳!」
혜중산이 조경진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눈동자의 희고 검은 데가 또렷하여 백기의 풍모가 있으나, 도량이 좁은 것이 아쉽소."
조경진이 말하였다. "한 자 되는 그림자 막대로도 천문 기구의 도수를 살필 수 있고, 한 치 되는 대롱으로도 오가는 기운을 잴 수 있습니다. 어찌 반드시 큰 데 있겠습니까. 다만 아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을 뿐입니다."
협주 4
嵇紹《趙至敘》曰:「至字景眞,代郡人。漢末,其祖流宕客緱氏。令新之官,至年十二,與母共道傍看,母曰:『汝先世非微賤家也,汝後能如此不?』至曰:『可爾耳。』歸便求師誦書,蚤聞父耕叱牛聲,釋書而泣。師問之,答曰:『自傷不能致榮華,而使老父不免勤苦。』年十四,入太學觀,時先君在學寫石經古文,事訖去。遂隨車問先君姓名。先君曰:『年少何以問我?』至曰:『觀君風器非常,故問耳。』先君具告之。至年十五,陽病,數數狂走五里三里,爲家追得,又炙身體十數處。年十六,遂亡命,徑至洛陽,求索先君不得。至鄴,沛國史仲和是魏領軍史渙孫也,至便依之,遂名翼,字陽和。先君到鄴,至具道太學中事,便逐先君歸山陽經年。至長七尺三寸,潔白黑髮,赤脣明目,鬢鬚不多,閒詳安諦,體若不勝衣。先君嘗謂之曰:『卿頭小而鋭,瞳子白黑分明,視瞻停諦,有白起風。』至論議淸辯,有從橫才,然亦不以自長也。孟元基辟爲遼東從事,在郡斷九獄,見稱淸當。自痛棄親遠遊,母亡不見,吐血發病,服未竟而亡。」
혜소의 『조지서』에 이르기를 「조지는 자가 경진이요 대군 사람이다. 한나라 말에 그 할아버지가 떠돌다 구지에 붙어 살았다. 현령이 새로 부임하는데 조지가 열두 살에 어머니와 함께 길가에서 보았다. 어머니가 『네 선대는 미천한 집안이 아니었는데 네가 뒤에 이렇게 될 수 있겠느냐』 하니, 조지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돌아와 곧 스승을 구해 글을 외웠는데, 아침에 아버지가 밭 갈며 소를 꾸짖는 소리를 듣고 책을 놓고 울었다. 스승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스스로 영화를 이루지 못하여 늙은 아버지가 애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이 서럽습니다』 하였다. 열넷에 태학에 들어가 보았는데, 그때 선군께서 학교에서 석경의 옛글을 베끼시다가 일을 마치고 떠나셨다. 마침내 수레를 따라가 선군의 이름을 물으니, 선군께서 『나이 어린데 어찌 나에게 묻는가』 하셨다. 조지가 『그대의 풍모와 그릇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았으므로 물을 뿐입니다』 하였다. 선군께서 갖추어 일러 주셨다. 조지가 열다섯에 거짓 병을 앓아 자주 미친 듯이 삼 리 오 리를 내달리다가 집에 붙들려 오고 또 몸 십여 군데에 뜸을 떴다. 열여섯에 마침내 달아나 곧장 낙양에 이르러 선군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업에 이르니 패국 사중화는 위나라 영군 사환의 손자인데, 조지가 곧 그에게 붙어 마침내 이름을 익이라 하고 자를 양화라 하였다. 선군께서 업에 이르시자 조지가 태학에서 있었던 일을 갖추어 말하고 곧 선군을 좇아 산양으로 돌아가 한 해를 지냈다. 조지는 키가 일곱 자 세 치요 살결이 희고 머리털이 검으며 입술이 붉고 눈이 밝았으며 살쩍과 수염이 많지 않고 한가롭고 자세하며 편안하고 살펴,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다. 선군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그대는 머리가 작고 뾰족하며 눈동자의 희고 검은 데가 또렷하고 바라보는 것이 멎어 자세하니 백기의 풍모가 있다』 하셨다. 조지는 따짐이 맑고 밝아 종횡의 재주가 있었으나 또한 이로써 스스로 뛰어나다 하지 않았다. 맹원기가 불러 요동종사로 삼으니 고을에서 아홉 옥사를 가려 맑고 마땅하다 일컬어졌다. 스스로 어버이를 버리고 멀리 노닐어 어머니가 죽어도 뵙지 못한 것을 아파하여 피를 토하고 병이 나, 상복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하였다.
嚴尤《三將敘》曰:「白起,平原君勸趙孝成王受馮亭,王曰:『受之,秦兵必至,武安君必將,誰能當之者乎?』對曰:『澠池之會,臣察武安君小頭而面鋭,瞳子白黑分明,視瞻不轉。小頭而面鋭者,敢斷決也;瞳子白黑分明者,見事明也;視瞻不轉者,執志強也。可與持久,難與爭鋒。廉頗爲人,勇鷙而愛士,知難而忍恥,與之野戰則不如,持守足以當之。』王從其計。」
엄우의 『삼장서』에 이르기를 「백기에 대하여, 평원군이 조나라 효성왕에게 풍정을 받으라 권하니 왕이 『받으면 진나라 군사가 반드시 이를 터인데 무안군이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니 누가 그를 당하겠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민지의 모임에서 신이 무안군을 살피니 머리가 작고 낯이 뾰족하며 눈동자의 희고 검은 데가 또렷하고 바라보는 것이 돌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작고 낯이 뾰족한 이는 과감히 끊고, 눈동자의 희고 검은 데가 또렷한 이는 일을 봄이 밝고, 바라보는 것이 돌지 않는 이는 뜻을 잡음이 굳셉니다. 더불어 오래 버틸 수는 있어도 더불어 칼끝을 다투기는 어렵습니다. 염파의 사람됨은 날래고 사나우며 선비를 아끼고, 어려움을 알고 부끄러움을 참으니, 그와 들에서 싸우면 못하지만 지키기로는 그를 당하기에 넉넉합니다』 하였다. 왕이 그 꾀를 좇았다」 하였다.
《周髀》曰:「夏至,北方二萬六千里,冬至,南方十三萬五千里,日中樹表則無影矣。周髀長八尺,夏至日,晷尺六寸。髀,股也;晷,句也。正南千里,句尺五寸;正北千里,句尺七寸。周髀之書也。」
『주비』에 이르기를 「하지에는 북쪽으로 이만 육천 리요 동지에는 남쪽으로 십삼만 오천 리인데, 한낮에 막대를 세우면 그림자가 없다. 주비의 길이는 여덟 자요 하짓날 그림자는 한 자 여섯 치다. 비는 넓적다리요 귀는 갈고리다. 바로 남쪽 천 리에서는 갈고리가 한 자 다섯 치요 바로 북쪽 천 리에서는 갈고리가 한 자 일곱 치다. 『주비』의 글이다」 하였다.
《呂氏春秋》曰:「黃帝使伶倫自大夏之西、崑崙之陰,取竹之嶰谷生,其竅厚薄均者,斷兩節,閒而吹之,以爲黃鐘之管。製十二笛,以聽鳳凰之鳴。雄鳴六,雌鳴六,以爲律呂。」《續漢書·律暦志》曰:「十二律之變,至於六十,以律候氣。候氣之法:爲室三重,戸閉,塗釁必周,密布緹幔,以木爲案,加律其上,以葭莩灰抑其内,爲氣所動者,其灰散也。以此候之。」
『여씨춘추』에 이르기를 「황제가 영륜을 시켜 대하 서쪽 곤륜 북녘에서 해곡에 난 대를 얻게 하였는데, 그 구멍의 두께가 고른 것으로 두 마디를 끊어 사이를 불어 황종의 대롱을 삼았다. 열두 피리를 만들어 봉황의 울음을 들었다. 수컷이 여섯 번 울고 암컷이 여섯 번 우니 이로써 율과 여를 삼았다」 하였다. 『속한서·율력지』에 이르기를 「열두 율의 바뀜이 예순에 이르니 율로써 기운을 살핀다. 기운을 살피는 법은 방을 세 겹으로 하고 문을 닫아 바르고 틈 메우기를 반드시 두루 하며, 붉은 휘장을 촘촘히 두르고 나무로 상을 만들어 그 위에 율을 얹고 갈대 속껍질 재를 그 안에 눌러 두는데, 기운에 움직인 것은 그 재가 흩어진다. 이로써 살핀다」 하였다.
16법이 두려워 왔을 뿐입니다
司馬景王東征,取上黨李喜,以爲從事中郎。因問喜曰:「昔先公辟君不就,今孤召君,何以來?」喜對曰:「先公以禮見待,故得以禮進退;明公以法見繩,喜畏法而至耳!」
사마경왕이 동쪽을 치고 상당의 이희를 데려다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이에 이희에게 물었다. "옛날 아버님께서 그대를 부르셨을 때는 나아가지 않더니 이제 내가 그대를 부르니 어찌 왔는가."
이희가 대답하였다. "아버님께서는 예로 대하셨으므로 예로 나아가고 물러날 수 있었고, 명공께서는 법으로 얽으시니 저는 법이 두려워 왔을 뿐입니다."
협주 2
《魏書》曰:「司馬師字子元,相國宣文侯長子也。以道德淸粹,重於朝廷,爲大將軍、録尚書事。毋丘儉反,師自征之,薨諡景王。」
『위서』에 이르기를 「사마사는 자가 자원이요 상국 선문후의 맏아들이다. 도와 덕이 맑고 순수하여 조정에서 무겁게 여겨 대장군과 녹상서사가 되었다. 관구검이 반란하자 사마사가 몸소 이를 치고 죽으니 시호를 경왕이라 하였다」 하였다.
《晉諸公贊》曰:「喜字季和,上黨銅鞮人也。少有髙行,研精藝學。宣帝爲相國,辟喜,喜固辭疾。景帝輔政,爲從事中郎,累遷光祿大夫,特進。贈太保。」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이희는 자가 계화요 상당 동제 사람이다. 젊어서 높은 행실이 있고 재주와 학문을 깊이 닦았다. 선제가 상국이 되어 이희를 부르니 이희가 굳이 병으로 사양하였다. 경제가 정사를 도울 때 종사중랑이 되었고 여러 벼슬을 거쳐 광록대부와 특진에 이르렀다. 태보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17봉이여 봉이여 — 본디 봉 하나입니다
鄧艾口吃,語稱「艾艾……」。晉文王戲之曰:「卿云『艾艾……』,爲是幾艾?」對曰:「『鳳兮,鳳兮』,故是一『鳳』。」
등애는 말을 더듬어 말할 때 「애가, 애가」 하였다. 진나라 문왕이 놀려 말하였다. "경이 『애가, 애가』 하니 애가 몇이오."
대답하였다. "『봉이여, 봉이여』 하였으니 본디 봉 하나입니다."
협주 2
《魏志》曰:「艾字士載,棘陽人,少爲農人養犢。年十二,隨母至潁川,讀故太丘長碑文曰『言爲世範,行爲士則』。遂名範,字士則。後宗族有同者,故改焉。毎見髙山大澤,輒規度指畫軍營處所,時人多笑焉。後見司馬宣王,三辟爲掾,累遷征西將軍。伐蜀,蜀平,進位太尉。爲衞瓘所害。」
『위지』에 이르기를 「등애는 자가 사재요 극양 사람이니 어려서 농부로 송아지를 길렀다. 열둘에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러 옛 태구장의 비문에 『말이 세상의 본이 되고 행실이 선비의 법이 된다』 한 것을 읽었다. 마침내 이름을 범이라 하고 자를 사칙이라 하였다. 뒤에 겨레붙이에 같은 이가 있어 고쳤다. 높은 산과 큰 못을 볼 때마다 문득 군영 자리를 헤아려 가리키니 그때 사람들이 흔히 웃었다. 뒤에 사마선왕을 뵈니 세 번 불러 아전으로 삼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정서장군에 이르렀다. 촉을 쳐서 촉이 평정되자 태위로 자리가 올랐다. 위관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朱鳳《晉紀》曰:「文王諱昭,字子上,宣帝次子也。」《列仙傳》曰:「陸通者,楚狂接輿也。好養性,遊諸名山。嘗遇孔子而歌曰:『鳳兮鳳兮,何德之衰!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後入蜀,在峨嵋山中也。」
주봉의 『진기』에 이르기를 「문왕은 휘가 소요 자가 자상이니 선제의 둘째 아들이다」 하였다. 『열선전』에 이르기를 「육통은 초나라의 미친 접여다. 성품 기르기를 좋아하여 여러 이름난 산에 노닐었다. 일찍이 공자를 만나 노래하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덕이 쇠하였는가. 간 것은 간할 수 없으나 올 것은 오히려 좇을 수 있다』 하였다. 뒤에 촉으로 들어가 아미산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18소보와 허유는 좁게 지킨 선비라 그리 흠모할 것이 못 됩니다
嵇中散既被誅,向子期舉郡計入洛,文王引進,問曰:「聞君有箕山之志,何以在此?」對曰:「巣許狷介之士,不足多慕。」王大咨嗟。
혜중산이 죽임을 당한 뒤 상자기가 고을의 회계 문서를 들고 낙양에 들어가니 문왕이 이끌어 들이고 물었다. "그대에게 기산의 뜻이 있다 들었는데 어찌 여기 있는가."
대답하였다. "소보와 허유는 좁게 지킨 선비라 그리 흠모할 것이 못 됩니다."
문왕이 크게 감탄하였다.
협주 1
《向秀別傳》曰:「秀字子期,河内人。少爲同郡山濤所知,又與譙國嵇康、東平呂安友善,並有拔俗之韻,其進止無不同,而造事營生業亦不異。常與嵇康偶鍛於洛邑,與呂安灌園於山陽,不慮家之有無,外物不足怫其心。弱冠著儒道論,棄而不録,好事者或存之。或云是其族人所作,困於不行,乃告秀,欲假其名。秀笑曰:『可復爾耳。』後康被誅,秀遂失圖。乃應歳舉,到京師,詣大將軍司馬文王,文王問曰:『聞君有箕山之志,何能自屈?』秀曰:『常謂彼人不達堯意,本非所慕也。』一坐皆説,隨次轉至黃門侍郎、散騎常侍。」
『상수별전』에 이르기를 「상수는 자가 자기요 하내 사람이다. 젊어서 같은 고을 산도에게 알려졌고, 또 초국의 혜강과 동평의 여안과 벗하여 다 세속을 벗어난 운치가 있었으며, 그 나아가고 멈춤이 같지 않은 것이 없고 일을 짓고 살림을 꾸리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늘 혜강과 낙읍에서 짝하여 쇠를 두드리고 여안과 산양에서 밭에 물을 대었으며, 집에 있고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바깥 것이 그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넉넉하지 않았다. 스무 살에 유가와 도가를 논한 글을 지었으나 버리고 적어 두지 않았는데 일 좋아하는 이가 더러 간직하였다. 어떤 이는 그 겨레붙이가 지은 것인데 퍼지지 않아 괴로워 상수에게 알리고 그 이름을 빌리려 하였다 한다. 상수가 웃으며 『다시 그리하시오』 하였다 한다. 뒤에 혜강이 죽임을 당하자 상수가 마침내 헤아림을 잃었다. 이에 해마다 있는 천거에 응하여 서울에 이르러 대장군 사마문왕을 찾아가니, 문왕이 『그대에게 기산의 뜻이 있다 들었는데 어찌 스스로 굽힐 수 있는가』 하였다. 상수가 『늘 그 사람들이 요임금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여겼으니 본디 그리워한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온 자리가 다 기뻐하였고 차례를 따라 황문시랑과 산기상시로 옮겼다」 하였다.
19하늘이 하나를 얻어 맑아진다
晉武帝始登阼,探策得「一」。王者世數,繫此多少。帝既不説,群臣失色,莫能有言者。侍中裴楷進曰:「臣聞:『天得一以淸,地得一以寧,侯王得一以爲天下貞。』」帝説。群臣嘆服。
진나라 무제가 처음 자리에 올라 산가지를 뽑으니 「하나」를 얻었다. 임금 노릇 하는 대수가 이 많고 적음에 달렸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니 뭇 신하가 낯빛을 잃고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시중 배해가 나아가 말하였다. "신이 듣기에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고, 제후와 왕은 하나를 얻어 천하의 곧음이 된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기뻐하고 뭇 신하가 탄복하였다.
협주 2
《晉世譜》曰:「世祖諱炎,字安宇,咸熙二年受魏禪。」
『진세보』에 이르기를 「세조는 휘가 염이요 자가 안우니 함희 이 년에 위나라의 선양을 받았다」 하였다.
王弼《老子注》云:「一者,數之始,物之極也。各是一物,所以爲主也。各以其一,致此淸、寧、貞。」
왕필의 『노자』 주에 이르기를 「하나는 수의 처음이요 사물의 끝이다. 저마다 한 사물이니 그러므로 주인이 된다. 저마다 그 하나로써 이 맑음과 편안함과 곧음에 이른다」 하였다.
20신은 오나라 소와 같아 달을 보고 헐떡입니다
滿奮畏風,在晉武帝坐;北窗作琉璃屛,實密似疎,奮有難色。帝笑之。奮荅曰:「臣猶呉牛,見月而喘。」
만분이 바람을 두려워하였다. 진나라 무제의 자리에 있는데 북쪽 창에 유리 병풍을 하여 실은 빽빽한데 성긴 듯 보이니 만분이 난처한 낯빛을 지었다. 임금이 웃었다.
만분이 대답하였다. "신은 오나라 소와 같아 달을 보고 헐떡입니다."
협주 2
荀綽《冀州記》曰:「奮字武秋,髙平人,魏太尉寵之孫也。性淸平有識,自吏部郎出爲冀州刺史。」《晉諸公贊》曰:「奮體量淸雅,有曾祖寵之風,遷尚書令,爲荀顗所害。」
순작의 『기주기』에 이르기를 「만분은 자가 무추요 고평 사람이니 위나라 태위 만총의 손자다. 성품이 맑고 고르며 식견이 있어 이부랑에서 기주자사로 나갔다」 하였다.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만분은 몸과 도량이 맑고 우아하여 증조부 만총의 풍모가 있었다. 상서령으로 옮겼다가 순의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今之水牛,唯生江淮間,故謂之呉牛也。南土多暑,而此牛畏熱,見月疑是日,所以見月則喘。
오늘날의 물소는 오직 강수와 회수 사이에서만 나므로 오나라 소라 한다. 남쪽 땅은 더위가 많은데 이 소는 더위를 두려워하여 달을 보면 해인가 의심하니, 이 때문에 달을 보면 헐떡인다.
21집에서는 효를 생각하고 임금을 섬겨서는 충을 생각합니다
諸葛靚在呉,於朝堂大會。孫皓問:「卿字仲思,爲何所思?」對曰:「在家思孝,事君思忠,朋友思信,如斯而已。」
제갈정이 오나라에 있을 때 조정 마루에서 큰 모임이 있었다. 손호가 물었다. "경의 자가 중사인데 무엇을 생각하는가."
대답하였다. "집에서는 효를 생각하고, 임금을 섬겨서는 참됨을 생각하고, 벗에게는 미쁨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을 뿐입니다."
협주 1
《晉諸公贊》曰:「靚字仲思,琅邪人,司空誕少子也。雅正有才望。誕以壽陽叛,遣靚入質於呉,以靚爲右將軍、大司馬。」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제갈정은 자가 중사요 낭야 사람이니 사공 제갈탄의 작은아들이다. 우아하고 바르며 재주와 명망이 있었다. 제갈탄이 수양에서 배반하고 제갈정을 오나라에 볼모로 보내니, 오나라가 제갈정을 우장군과 대사마로 삼았다」 하였다.
22밤을 밝히는 구슬이 반드시 맹진 물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蔡洪赴洛,洛中人問曰:「幕府初開,群公辟命,求英奇於仄陋,采賢㒞於巖穴。君呉楚之士,亡國之餘,有何異才而應斯舉?」蔡荅曰:「夜光之珠,不必出於孟津之河;盈握之璧,不必采於崑崙之山。大禹生於東夷,文王生於西羌,聖賢所出,何必常處?昔武王伐紂,遷頑民於洛邑,得無諸君是其苗裔乎?」
채홍이 낙양에 나아가니 낙양 사람들이 물었다. "막부가 갓 열려 여러 공이 불러 명하며, 낮고 좁은 데서 뛰어난 이를 구하고 바위굴에서 어진 이를 캡니다. 그대는 오나라와 초나라의 선비요 망한 나라의 나머지인데 무슨 남다른 재주가 있어 이 부름에 응하셨소."
채홍이 대답하였다. "밤을 밝히는 구슬이 반드시 맹진의 물에서 나오지는 않고, 한 줌 되는 옥이 반드시 곤륜산에서 캐어지지는 않소. 큰 우임금은 동이에서 나셨고 문왕은 서강에서 나셨으니, 성인과 어진 이가 나는 데가 어찌 반드시 정해진 곳이겠소.
옛날 무왕이 주를 치고 완악한 백성을 낙읍으로 옮겼는데, 여러분이 그 자손이 아니겠소."
협주 5
《洪集録》曰:「洪字叔開,呉郡人,有才辯,初仕呉朝。太康中,本州從事,舉秀才。」王隱《晉書》曰:「洪仕至松滋令。」
『홍집록』에 이르기를 「채홍은 자가 숙개요 오군 사람이다. 재주와 말솜씨가 있어 처음에 오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였다. 태강 연간에 본주의 종사가 되고 수재로 천거되었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채홍은 벼슬이 송자령에 이르렀다」 하였다.
舊説云:「隋侯出行,有蛇斬而中斷者,侯連而續之,蛇遂得生而去。後銜明月珠以報其德,光明照夜同晝,因曰『隋珠』。」左思《蜀都賦》所謂「隋侯鄙其夜光也」。
옛말에 이르기를 「수후가 길을 가는데 뱀이 베여 가운데가 끊어진 것이 있어 수후가 이어 붙이니 뱀이 마침내 살아 갔다. 뒤에 밝은 달 구슬을 물고 와 그 덕을 갚으니 밝기가 밤을 낮같이 비추었으므로 『수후의 구슬』이라 하였다」 하였다. 좌사의 「촉도부」에 이른바 「수후가 그 밤을 밝히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한 것이다.
按,《孟子》曰:「舜生於諸馮,東夷人也;文王生於岐周,西戎人也。」則東夷是舜非禹也。
살피건대 『맹자』에 이르기를 「순임금은 제풍에서 나셨으니 동이 사람이요, 문왕은 기주에서 나셨으니 서융 사람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동이는 순임금이지 우임금이 아니다.
《尚書》曰:「成周既成,遷殷頑民,作多士。」孔安國注曰:「殷大夫心不則德義之經,故徙於王都,邇教誨也。」
『상서』에 이르기를 「성주가 이루어지자 은나라의 완악한 백성을 옮기고 「다사」를 지었다」 하였다. 공안국이 주하여 이르기를 「은나라 대부가 마음으로 덕과 옳음의 떳떳함을 본받지 않으므로 왕도로 옮겨 가까이 가르친 것이다」 하였다.
按,華令思舉秀才入洛,與王武子相酬對,皆與此言不異,無容二人同有此辭。疑《世説》穿鑿也。
살피건대 화영사가 수재로 천거되어 낙양에 들어가 왕무자와 서로 주고받은 말이 다 이 말과 다르지 않으니, 두 사람이 같이 이런 말을 하였을 리 없다. 『세설』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23낙수에 놀고 돌아와 오늘 놀이가 즐거웠는지 묻다
諸名士共至洛水戲。還,樂令問王夷甫曰:「今日戲,樂乎?」王曰:「裴僕射善談名理,混混有雅致;張茂先論《史》《漢》,靡靡可聽;我與王安豐説延陵、子房,亦超超玄箸。」
여러 이름난 선비가 함께 낙수에 가서 놀았다. 돌아와 악령이 왕이보에게 물었다. "오늘 놀이가 즐거웠소."
왕이보가 말하였다. "배복야는 이름과 결을 잘 말하여 도도하게 우아한 맛이 있었고, 장무선은 『사기』와 『한서』를 논하여 부드럽게 들을 만하였으며, 나와 왕안풍은 연릉계자와 장자방을 말하였는데 또한 아득히 높고 그윽하였소."
협주 7
《竹林七賢論》曰:「王濟諸人嘗至洛水解禊事。明日,或問濟曰:『昨遊,有何語議?』濟云云。」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왕제 등 여러 사람이 일찍이 낙수에 가서 액막이를 하였다. 이튿날 어떤 이가 왕제에게 『어제 놀이에 무슨 말과 따짐이 있었소』 물으니 왕제가 이러이러하다 하였다」 하였다.
廣也
악광이다.
虞預《晉書》曰:「王衍字夷甫,琅邪臨沂人,司徒戎從弟。父乂,平北將軍。夷甫蚤知名,以淸虚通理稱,仕至太尉,爲石勒所害。」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왕연은 자가 이보요 낭야 임기 사람이니 사도 왕융의 사촌아우다. 아버지 왕예는 평북장군이다. 이보는 일찍 이름이 알려져 맑고 비어 결에 통한다 일컬어졌고 벼슬이 태위에 이르렀다가 석륵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晉惠帝起居注》曰:「裴頠字逸民,河東聞喜人,司空秀之少子也。」《冀州記》曰:「頠弘濟有淸識,稽古善言名理。履行髙整,自少知名。歴侍中、尚書左僕射,爲趙王倫所害。」
『진혜제기거주』에 이르기를 「배위는 자가 일민이요 하동 문희 사람이니 사공 배수의 작은아들이다」 하였다. 『기주기』에 이르기를 「배위는 널리 건지고 맑은 식견이 있어 옛일을 상고하고 이름과 결을 잘 말하였다. 몸가짐이 높고 가지런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이 알려졌다. 시중과 상서좌복야를 지내다가 조왕 사마륜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晉陽秋曰:「華博覽洽聞,無不貫綜。世祖嘗問漢事,及建章千門萬戸。華畫地成圖,應對如流,張安世不能過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장화는 널리 보고 두루 들어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조가 일찍이 한나라 일과 건장궁의 천 문 만 호를 물으니, 장화가 땅에 그려 그림을 이루고 응대함이 물 흐르는 듯하여 장안세도 넘지 못하였다」 하였다.
戎也
왕융이다.
《晉諸公贊》曰:「夷甫好尚談稱,爲時人物所宗。」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이보는 이야기와 일컬음을 좋아하여 그때 인물의 마루가 되었다」 하였다.
24제 고장 산천과 인물을 서로 자랑하다
王武子、孫子荊、各言其土地人物之美。王云:「其地坦而平,其水淡而淸,其人廉且貞。」孫云:「其山㠑巍以嵯峨,其水㳌渫而揚波,其人磊砢而英多。」
왕무자와 손자형이 저마다 제 고장의 땅과 인물의 아름다움을 말하였다.
왕무자가 말하였다. "그 땅은 판판하고 고르며, 그 물은 맑고 깨끗하며, 그 사람은 청렴하고 곧다."
손자형이 말하였다. "그 산은 우뚝하고 험준하며, 그 물은 넘실거려 물결을 일으키고, 그 사람은 우람하고 뛰어난 이가 많다."
협주 3
《晉諸公贊》曰:「王濟字武子,太原晉陽人,司徒渾第二子也。有俊才,能淸言。起家中書郎,終太僕。」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왕제는 자가 무자요 태원 진양 사람이니 사도 왕혼의 둘째 아들이다. 뛰어난 재주가 있고 맑은 이야기를 잘하였다. 중서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태복으로 마쳤다」 하였다.
《文士傳》曰:「孫楚字子荊,太原中都人也。」《晉陽秋》曰:「楚,驃騎將軍資之孫,南陽太守弘之子。鄕人王濟,豪俊公子,爲本州大中正,訪問弘爲鄕里品狀,濟曰:『此人非鄕評所能名,吾自狀之曰:「天才英特,亮拔不群。」』仕至馮翊太守。」
『문사전』에 이르기를 「손초는 자가 자형이요 태원 중도 사람이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손초는 표기장군 손자의 손자요 남양태수 손홍의 아들이다. 고을 사람 왕제는 호탕한 공자로 본주의 대중정이었는데, 손홍의 고을 품평을 물으니 왕제가 『이 사람은 고을 평으로 이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스스로 평하여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고 밝게 빼어나 무리와 다르다」 하겠다』 하였다. 벼슬이 풍익태수에 이르렀다」 하였다.
按,《三秦記》、《語林》載蜀人伊籍稱呉土地人物,與此語同。
살피건대 『삼진기』와 『어림』에 촉 사람 이적이 오나라 땅과 인물을 일컬은 것이 실려 있는데 이 말과 같다.
25어찌 아들 다섯을 딸 하나와 바꾸겠습니까
樂令女適大將軍成都王頴。王兄長沙王執權於洛,遂構兵相圖。長沙王親近小人,遠外君子,凡在朝者,人懷危懼。樂令既允朝望,加有婚親,群小讒於長沙。長沙嘗問樂令,樂令神色自若,徐荅曰:「豈以五男易一女?」由是釋然,無復疑慮。
악령의 딸이 대장군 성도왕 사마영에게 시집갔다. 사마영의 형 장사왕이 낙양에서 권세를 잡아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서로 도모하였다.
장사왕은 작은 사람을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하여, 무릇 조정에 있는 이가 다 마음에 위태로움을 품었다. 악령은 조정의 바람에 맞는 데다 혼인으로 맺은 친함까지 있으니 뭇 소인이 장사왕에게 헐뜯었다.
장사왕이 일찍이 악령에게 물으니 악령이 낯빛이 태연히 천천히 대답하였다. "어찌 아들 다섯을 딸 하나와 바꾸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풀려 다시 의심하고 걱정하는 일이 없었다.
협주 3
虞預《晉書》曰:「樂廣字彦輔,南陽人。淸夷沖曠,加有理識。累遷侍中、河南尹。在朝廷用心虚淡,時人重其貞貴,代王戎爲尚書令。」《八王故事》曰:「司馬頴字叔度,世祖第十九子,封成都王、大將軍。」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악광은 자가 언보요 남양 사람이다. 맑고 평온하며 시원하고 너그러운 데다 결과 식견이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하남윤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마음 쓰기를 비고 담박하게 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 곧고 귀함을 무겁게 여겨 왕융을 대신하여 상서령이 되었다」 하였다. 『팔왕고사』에 이르기를 「사마영은 자가 숙도요 세조의 열아홉째 아들이니 성도왕과 대장군에 봉해졌다」 하였다.
《晉百官名》曰:「司馬乂字士度,封長沙王。」《八王故事》曰:「世祖第十七子。」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사마예는 자가 사도요 장사왕에 봉해졌다」 하였다. 『팔왕고사』에 이르기를 「세조의 열일곱째 아들이다」 하였다.
《晉陽秋》曰:「成都王之起兵,長沙王猜廣,廣曰:『寧以一女而易五男?』乂猶疑之,遂以憂卒。」
『진양추』에 이르기를 「성도왕이 군사를 일으키자 장사왕이 악광을 의심하니, 악광이 『차라리 딸 하나로 아들 다섯을 바꾸겠습니까』 하였다. 사마예가 오히려 그를 의심하니 마침내 근심으로 죽었다」 하였다.
26천 리 순채국이 있으나 아직 소금과 된장을 넣지 않았을 뿐이오
陸機詣王武子,武子前置數斛羊酪,指以示陸曰:「卿江東何以敵此?」陸云:「有千里蓴羹,但未下鹽豉耳!」
육기가 왕무자를 찾아가니 무자가 앞에 양젖 몇 섬을 두고 가리켜 육기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경의 강동에서는 무엇으로 이에 맞서겠소."
육기가 말하였다. "천 리 순채국이 있으나 다만 아직 소금과 된장을 넣지 않았을 뿐이오."
협주 1
《晉陽秋》曰:「機字士衡,呉郡人。祖遜,呉丞相。父抗,大司馬。機與弟雲並有俊才。司空張華見而説之,曰:『平呉之利,在獲二俊。』」《機別傳》曰:「博學善屬文,非禮不動。入晉,仕著作郎,至平原内史。」
『진양추』에 이르기를 「육기는 자가 사형이요 오군 사람이다. 할아버지 육손은 오나라 승상이요 아버지 육항은 대사마다. 육기와 아우 육운이 아울러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사공 장화가 보고 기뻐하며 『오나라를 평정한 이로움은 두 뛰어난 이를 얻은 데 있다』 하였다」 하였다. 『기별전』에 이르기를 「널리 배우고 글을 잘 지었으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다. 진나라에 들어가 저작랑으로 벼슬하여 평원내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27군자에게 와서 앓게 하니 그래서 학질입니다
中朝有小兒,父病,行乞藥。主人問病,曰:「患瘧也。」主人曰:「尊侯明德君子,何以病瘧?」荅曰:「來病君子,所以爲瘧耳。」
중원에 어떤 아이가 있어 아버지가 병들자 다니며 약을 빌었다. 주인이 병을 물으니 말하였다. "학질을 앓습니다."
주인이 말하였다. "그대의 아버님은 밝은 덕을 지닌 군자이신데 어찌 학질을 앓으시는가."
대답하였다. "군자에게 와서 앓게 하니 그래서 학질인 것입니다."
협주 1
俗傳行瘧鬼小,多不病巨人。故光武嘗謂景丹曰:「嘗聞壯士不病瘧,大將軍反病瘧耶?」
세속에 전하기를 학질 귀신은 작아서 흔히 큰 사람은 앓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광무제가 일찍이 경단에게 「일찍이 씩씩한 선비는 학질을 앓지 않는다 들었는데 대장군이 도리어 학질을 앓는가」 하였다.
28제가 최저와 떨어진 것은 부군께서 진항과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崔正熊詣都郡。都郡將姓陳,問正熊:「君去崔杼幾世?」荅曰:「民去崔杼,如明府之去陳恆。」
최정웅이 도군에 나아갔다. 도군의 장수는 성이 진씨였는데 정웅에게 물었다. "그대는 최저와 몇 대나 떨어졌소."
대답하였다. "제가 최저와 떨어진 것은 부군께서 진항과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협주 1
《晉百官名》曰:「崔豹字正熊,燕國人,惠帝時官至太傅丞。」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최표는 자가 정웅이요 연나라 사람이니 혜제 때 벼슬이 태부승에 이르렀다」 하였다.
29남의 나라에 붙어 사니 늘 부끄럽소
元帝始過江,謂顧驃騎曰:「寄人國土,心常懷慚。」榮跪對曰:「臣聞王者以天下爲家,是以耿亳無定處,九鼎遷洛邑。願陛下勿以遷都爲念。」
원제가 처음 강을 건너와 고표기에게 말하였다. "남의 나라 땅에 붙어 사니 마음에 늘 부끄러움을 품소."
고영이 무릎 꿇고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임금 된 이는 천하로 집을 삼는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경과 박이 정해진 곳이 없었고 아홉 솥이 낙읍으로 옮겨졌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도읍 옮긴 것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협주 3
朱鳳《晉書》曰:「帝諱叡,字景文。祖伷,封琅邪王,父恭王瑾嗣。帝襲爵爲琅邪王。少而明惠,因亂過江起義,遂即皇帝位。諡法曰:『始建國都曰元。』」
주봉의 『진서』에 이르기를 「임금은 휘가 예요 자가 경문이다. 할아버지 사마주는 낭야왕에 봉해졌고 아버지 공왕 사마근이 이었다. 임금이 벼슬을 이어받아 낭야왕이 되었다. 어려서 밝고 슬기로웠으며 난리를 틈타 강을 건너 의를 일으켜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랐다. 시호법에 이르기를 『처음으로 나라의 도읍을 세운 것을 원이라 한다』 하였다」 하였다.
《帝王世紀》曰:「殷祖乙徙耿,爲河所毀,今河東皮氏耿鄕是也。盤庚五遷,復南居亳,今景亳是也。」
『제왕세기』에 이르기를 「은나라 조을이 경으로 옮겼는데 하수에 무너졌으니 오늘날 하동 피씨의 경향이 이곳이다. 반경이 다섯 번 옮겨 다시 남쪽으로 박에 살았으니 오늘날의 경박이 이곳이다」 하였다.
《春秋傳》曰:「武王克商,遷九鼎於洛邑。」今之偃師是也。
『춘추전』에 이르기를 「무왕이 상나라를 이기고 아홉 솥을 낙읍으로 옮겼다」 하였다. 오늘날의 언사가 이곳이다.
30맑고 빈 것이 날로 오고 찌꺼기가 날로 가기 때문일세
庾公造周伯仁,伯仁曰:「君何所欣説而忽肥?」庾曰:「君復何所憂慘而忽瘦?」伯仁曰:「吾無所憂,直是淸虚日來,滓穢日去耳。」
유공이 주백인을 찾아가니 백인이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이 기뻐 홀연 살이 쪘소."
유공이 말하였다. "그대는 또 무엇이 근심스러워 홀연 여위었소."
백인이 말하였다. "나는 근심하는 바가 없소. 다만 맑고 빈 것이 날로 오고 찌꺼기가 날로 갈 뿐이오."
협주 1
虞預《晉書》曰:「周顗字伯仁,汝南安城人,揚州刺史浚長子也。」《晉陽秋》曰:「顗有風流才氣,少知名,正體嶷然,儕輩不敢媟也。汝南賁泰淵通淸操之士,嘗歎曰:『汝潁固多賢士,自頃陵遲,雅道殆衰,今復見周伯仁。伯仁將祛舊風,淸我邦族矣。』舉寒素,累遷尚書僕射,爲王敦所害。」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주의는 자가 백인이요 여남 안성 사람이니 양주자사 주준의 맏아들이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주의는 풍류와 재기가 있어 젊어서 이름이 알려졌는데, 몸가짐이 반듯하고 우뚝하여 또래가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여남의 분태는 넓게 통하고 맑은 지조를 지닌 선비인데 일찍이 탄식하기를 『여수와 영수 땅에 본디 어진 선비가 많았으나 요사이 기울고 무너져 우아한 도가 거의 쇠하였는데, 이제 다시 주백인을 본다. 백인이 장차 옛 풍모를 떨쳐 우리 고장을 맑게 하리라』 하였다. 한소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복야에 이르렀다가 왕돈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31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산하가 다를 뿐이다
過江諸人,毎至美日,輒相邀新亭,藉卉飲宴。周侯中坐而嘆曰:「風景不殊,正自有山河之異。」皆相視流涕,唯王丞相愀然變色曰:「當共戮力王室,克復神州,何至作楚囚相對邪?」
강을 건너온 이들이 좋은 날마다 문득 서로 신정으로 불러 풀을 깔고 마시며 잔치하였다.
주후가 자리 가운데서 탄식하였다. "풍경은 다르지 않은데 다만 산과 물이 다를 뿐이오."
다들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오직 왕승상만이 낯빛을 슬프게 고치며 말하였다. "마땅히 함께 왕실에 힘을 다하여 신주를 되찾아야 할 터인데, 어찌 초나라 죄수처럼 마주 앉아 있을 것이오."
협주 4
《丹陽記》曰:「新亭,呉舊立,先基崩淪。隆安中,丹陽尹司馬恢之徙創今地。」
『단양기』에 이르기를 「신정은 오나라 때 세운 것인데 앞선 터가 무너졌다. 융안 연간에 단양윤 사마회지가 오늘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었다」 하였다.
顗。
주의다.
導也
왕도다.
《春秋傳》曰:「楚伐鄭,諸侯救之。鄭執鄖公鍾儀獻晉,景公觀軍府,見而問之曰:『南冠而縶者爲誰?』有司對曰:『楚囚也。』使稅之。問其族,對曰:『伶人也。』『能爲樂乎?』曰:『先父之職,敢有二事。』與之琴,操南音。范文子曰:『楚囚,君子也。樂操土風,不忘舊也。君盍歸之?以合晉楚之成。』」
『춘추전』에 이르기를 「초나라가 정나라를 치니 제후들이 이를 건졌다. 정나라가 운공 종의를 잡아 진나라에 바쳤다. 경공이 군영의 창고를 보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남쪽 관을 쓰고 묶여 있는 이는 누구인가.』 맡은 이가 대답하기를 『초나라 죄수입니다』 하였다. 풀어 주게 하였다. 그 겨레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악공입니다』 하였다. 『음악을 할 수 있는가』 하니 『선친의 맡은 일이니 감히 다른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거문고를 주니 남쪽 가락을 탔다. 범문자가 『초나라 죄수는 군자입니다. 음악에 제 고장 가락을 타니 옛것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어찌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십니까. 그로써 진나라와 초나라의 화친을 이루십시오』 하였다」 하였다.
32이 아득함을 보니 온갖 생각이 뒤섞인다
衞洗馬初欲渡江,形神慘顇,語左右云:「見此芒芒,不覺百端交集。苟未免有情,亦復誰能遣此!」
위세마가 처음 강을 건너려 할 때 몸과 정신이 참담하고 여위었는데, 곁의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 아득함을 보니 나도 모르게 온갖 생각이 뒤섞이는구나. 진실로 아직 정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또 누가 이를 떨칠 수 있겠는가."
협주 1
《晉諸公贊》曰:「衞玠字叔寶,河東安邑人。祖父瓘,太尉。父恆,黃門侍郎。」《玠別傳》曰:「玠穎識通達,天韻標令,陳郡謝幼輿敬以亞父之禮。論者以爲出王眉子、平子、武子之右。世咸謂『諸王三子,不如衞家一兒』。娶樂廣女。裴叔道曰:『妻父有冰淸之姿,婿有璧潤之望,所謂秦晉之匹也。』爲太子洗馬。永嘉四年,南至江夏,與兄別於梁里澗,語曰:『在三之義,人之所重,今日忠臣致身之道,可不勉乎?』行至豫章,乃卒。」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위개는 자가 숙보요 하동 안읍 사람이다. 할아버지 위관은 태위요 아버지 위항은 황문시랑이다」 하였다. 『개별전』에 이르기를 「위개는 빼어난 식견이 통하고 통달하였으며 타고난 운치가 뛰어나고 아름다워, 진군의 사유여가 아버지 다음가는 예로 공경하였다. 따지는 이들이 왕미자와 왕평자와 왕무자의 위에 난다 하였다. 세상이 다 『여러 왕씨의 세 아들이 위씨 집 한 아이만 못하다』 하였다. 악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배숙도가 『장인은 얼음처럼 맑은 자태가 있고 사위는 옥처럼 윤나는 바람이 있으니, 이른바 진나라와 진나라의 짝이다』 하였다. 태자세마가 되었다. 영가 사 년에 남쪽으로 강하에 이르러 형과 양리간에서 헤어지며 말하기를 『세 가지 섬김의 옳음은 사람이 무겁게 여기는 바이니, 오늘 참된 신하가 몸을 바치는 길에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예장에 이르러 이에 죽었다」 하였다.
33이 사람은 규장처럼 홀로 통하고 재빠르며 날이 섰다
顧司空未知名,詣王丞相。丞相小極,對之疲睡。顧思所以叩會之,因謂同坐曰:「昔毎聞元公、道公協贊中宗,保全江表;體小不安,令人喘息。」丞相因覺,謂顧曰:「此子珪璋特達,機警有鋒。」
고사공이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왕승상을 찾아갔다. 승상이 조금 지쳐 그를 마주하고 졸았다.
고사공이 그를 두드려 깨울 길을 생각하여 이에 같이 앉은 이에게 말하였다. "옛날 원공과 도공이 중종을 도와 강남을 온전히 지키셨다는 말을 늘 들었는데, 몸이 조금 편찮으시니 사람을 숨 가쁘게 하는구려."
승상이 이에 깨어 고사공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규장처럼 홀로 통하고 재빠르며 날이 섰다."
협주 3
《顧和別傳》曰:「和字君孝,呉郡人。祖容,呉荊州刺史。父相,晉臨海太守。和總角知名,族人顧榮雅相器愛,曰『此吾家之騏驥也,必振衰族。』累遷尚書令。」
『고화별전』에 이르기를 「고화는 자가 군효요 오군 사람이다. 할아버지 고용은 오나라 형주자사요 아버지 고상은 진나라 임해태수다. 고화는 어릴 때부터 이름이 알려졌는데 겨레붙이 고영이 몹시 그릇으로 아껴 『이는 우리 집안의 천리마이니 반드시 쇠한 겨레를 떨치리라』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령에 이르렀다」 하였다.
顧榮
고영이다.
鄧粲《晉紀》曰:「導與元帝有布衣之好,知中國將亂,勸帝渡江,求爲安東司馬,政皆決之,號『仲父』。晉中興之功,導實居其首。」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왕도는 원제와 베옷 적부터 좋아하였는데, 중원이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임금께 강을 건너기를 권하고 안동사마가 되기를 구하여 정사를 다 결단하니 『둘째 아버지』라 불렸다. 진나라가 다시 일어난 공은 왕도가 실로 으뜸이다」 하였다.
34동남의 아름다움일 뿐 아니라 실로 온 세상의 빼어남이다
會稽賀生,體識淸遠,言行以禮。不徒東南之美,實爲海内之秀。
회계의 하생은 몸과 식견이 맑고 멀며 말과 행실을 예로 하였다. 동남의 아름다움일 뿐 아니라 실로 온 세상의 빼어남이다.
협주 2
賀循別見
하순은 따로 보인다.
《爾雅》曰:「東南之美者,有會稽之竹箭焉。」
『이아』에 이르기를 「동남의 아름다운 것으로 회계의 대살이 있다」 하였다.
35내가 하북에서 공을 세울 테니 그대는 강남에서 이름을 펴라
劉琨雖隔閡寇戎,志存本朝,謂温嶠曰:「班彪識劉氏之復興,馬援知漢光之可輔。今晉阼雖衰,天命未改。吾欲立功於河北,使卿延譽於江南。子其行乎?」温曰:「嶠雖不敏,才非昔人,明公以桓文之姿,建匡立之功,豈敢辭命!」
유곤이 비록 오랑캐에게 막혀 있었으나 뜻은 본조에 있어 온교에게 말하였다. "반표는 유씨가 다시 일어날 것을 알았고 마원은 한나라 광무제를 도울 만한 줄 알았소. 이제 진나라 왕조가 비록 쇠하였으나 하늘의 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소. 나는 하북에서 공을 세우고 그대로 하여금 강남에서 이름을 펴게 하고자 하오. 그대는 가겠소."
온교가 말하였다. "제가 비록 재빠르지 못하고 재주가 옛사람만 못하나, 명공께서 제 환공과 진 문공의 자질로 바로잡아 세우는 공을 세우시는데 어찌 감히 명을 사양하겠습니까."
협주 3
王隱《晉書》曰:「琨字越石,中山魏昌人。祖邁,有經國之才。父璠,光祿大夫。琨少稱俊朗,累遷司徒長史、尚書右丞。迎大駕於長安,以有殊勳,封廣武侯。年三十五,出爲并州刺史,爲段日磾所害。」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유곤은 자가 월석이요 중산 위창 사람이다. 할아버지 유매는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있었고 아버지 유번은 광록대부였다. 유곤은 젊어서 뛰어나고 밝다 일컬어져 여러 벼슬을 거쳐 사도장사와 상서우승에 이르렀다. 장안에서 임금의 수레를 맞아 남다른 공이 있다 하여 광무후에 봉해졌다. 서른다섯에 병주자사로 나갔다가 단일제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漢書·敘傳》曰:「彪字叔皮,扶風人,客於天水。隴西隗囂有窺覦之志,彪作《王命論》以諷之。」《東觀漢記》曰:「馬援字文淵,茂陵人。從公孫述、隗囂遊,後見光武曰:『天下反覆,盜名字者不可勝數,今見陛下寥廓大度,同符髙祖,乃知帝王自有眞也。』帝甚壯之。」
『한서·서전』에 이르기를 「반표는 자가 숙피요 부풍 사람인데 천수에 붙어 살았다. 농서의 외효에게 엿보려는 뜻이 있으므로 반표가 「왕명론」을 지어 넌지시 일렀다」 하였다. 『동관한기』에 이르기를 「마원은 자가 문연이요 무릉 사람이다. 공손술과 외효를 좇아 노닐다가 뒤에 광무제를 보고 『천하가 뒤집혀 이름을 훔치는 이를 이루 셀 수 없는데, 이제 폐하의 넓고 큰 도량이 고조와 부신이 맞는 듯함을 보니, 이에 제왕에게 절로 참됨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몹시 씩씩하게 여겼다」 하였다.
虞預《晉書》曰:「嶠字太眞,太原祁人。少標俊淸徹,英穎顯名,爲司空劉琨左司馬。是時二都傾覆,天下大亂,琨聞元皇受命中興,慷慨幽朔,志存本朝。使嶠奉使,嶠喟然對曰:『嶠雖乏管張之才,而明公有桓文之志,敢辭不敏,以違髙旨?』以左長史奉使勸進,累遷驃騎大將軍。」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온교는 자가 태진이요 태원 기 사람이다. 젊어서 두드러지고 맑고 환하며 뛰어나고 빼어나 이름이 드러났고 사공 유곤의 좌사마가 되었다. 이때 두 도읍이 무너지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유곤이 원황제가 명을 받아 다시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북녘에서 북받쳐 뜻이 본조에 있었다. 온교를 심부름 보내니 온교가 크게 탄식하며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관중과 장량의 재주는 모자라나 명공께 제 환공과 진 문공의 뜻이 있으니, 감히 재빠르지 못하다 사양하여 높은 뜻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좌장사로 심부름 가서 오르기를 권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표기대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36강좌에 절로 관이오가 있으니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
温嶠初爲劉琨使來過江。於時江左營建始爾,綱紀未舉。温新至,深有諸慮。既詣王丞相,陳主上幽越,社稷焚滅,山陵夷毀之酷,有黍離之痛。温忠慨深烈,言與泗倶,丞相亦與之對泣。敘情既畢,便深自陳結,丞相亦厚相酬納。既出,懽然言曰:「江左自有管夷吾,此復何憂?」
온교가 처음 유곤의 심부름으로 강을 건너왔다. 그때 강좌는 이제 막 세워 벼리가 아직 서지 않았는데, 온교가 갓 이르러 여러 가지로 깊이 걱정하였다.
왕승상을 찾아가 임금이 갇히고 사직이 불타고 능이 헐린 참혹함을 아뢰며 기장 이삭의 아픔이 있었다. 온교의 참됨과 북받침이 깊고 매서워 말과 눈물이 함께 나오니 승상도 그와 마주 울었다.
뜻을 다 펴고 나서 곧 깊이 스스로를 아뢰며 맺으니 승상도 두터이 응하고 받아들였다.
나와서 기뻐하며 말하였다. "강좌에 절로 관이오가 있으니 이 무슨 근심이 다시 있으랴."
협주 1
《史記》曰:「管仲夷吾者,潁上人。相齊桓公,九合諸侯,一匡天下。」《語林》曰:「初温奉使勸進,晉王大集賓客見之。温公始入,姿形甚陋,合坐盡驚。既坐,陳説九服分崩,皇室弛絶,晉王君臣莫不歔欷。及言天下不可以無主,聞者莫不踴躍,植髮穿冠。王丞相深相付託。温公既見丞相,便遊樂不住,曰『既見管仲,天下事無復憂。』」
『사기』에 이르기를 「관중 이오는 영수 가 사람이다. 제나라 환공을 도와 아홉 번 제후를 모으고 천하를 한 번 바로잡았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처음에 온교가 심부름으로 오르기를 권할 때 진왕이 손들을 크게 모아 보았다. 온공이 처음 들어오는데 모습이 몹시 추하여 온 자리가 다 놀랐다. 앉고 나서 아홉 겹 땅이 갈라지고 황실이 늘어져 끊어짐을 아뢰니, 진왕과 신하가 흐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천하에 임금이 없을 수 없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듣는 이가 뛰지 않는 이가 없어 머리털이 서서 관을 뚫었다. 왕승상이 깊이 서로 맡기고 부탁하였다. 온공이 승상을 보고 나서 곧 즐거워 마지않으며 『이미 관중을 보았으니 천하 일에 다시 근심이 없다』 하였다」 하였다.
37삼가 존체의 기거가 어떠하신지요
王敦兄含爲光祿勳。敦既逆謀,屯據南州,含委職奔姑孰。王丞相詣闕謝。司徒、丞相、揚州官僚問訊,倉卒不知何辭。顧司空時爲揚州別駕,援翰曰:「王光祿遠避流言,明公蒙塵路次,群下不寧,不審尊體起居何如?」
왕돈의 형 왕함이 광록훈이었다. 왕돈이 거스르는 꾀를 내어 남주에 진을 치자 왕함이 자리를 버리고 고숙으로 달아났다. 왕승상이 대궐에 나아가 사죄하였다.
사도와 승상부와 양주의 벼슬아치들이 문안하려 하였으나 갑작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고사공이 그때 양주별가였는데 붓을 들어 썼다. "왕광록께서는 멀리 떠도는 말을 피하시고 명공께서는 길에서 티끌을 쓰고 계시니, 아랫사람들이 편치 않습니다. 삼가 존체의 기거가 어떠하신지 여쭙습니다."
협주 3
《含別傳》曰:「含字處弘,琅邪臨沂人。累遷徐州刺史、光祿勳,與弟敦作逆,伏誅。」
『함별전』에 이르기를 「왕함은 자가 처홍이요 낭야 임기 사람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서주자사와 광록훈에 이르렀는데, 아우 왕돈과 거스르는 일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鄧粲《晉紀》曰:「初,王導協贊中興,敦有方面之功。敦以劉隗爲閒己,舉兵討之。故含南奔武昌,朝廷始警備也。」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처음에 왕도가 중흥을 도왔고 왕돈에게 한 지방의 공이 있었다. 왕돈이 유외가 저를 막는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그러므로 왕함이 남쪽 무창으로 달아나니 조정이 비로소 경계하였다」 하였다.
《中興書》曰:「導從兄敦,舉兵討劉隗,導率子弟二十餘人,旦旦到公車,泥首謝罪。」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도의 사촌형 왕돈이 군사를 일으켜 유외를 치니, 왕도가 자제 스무 남짓을 이끌고 날마다 공거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빌었다」 하였다.
38주박의 우는 소리가 마음에 참으로 부끄럽다
郗太尉拜司空,語同坐曰:「平生意不在多,値世故紛紜,遂至臺鼎。朱博翰音,實愧於懷。」
치태위가 사공에 임명되어 같이 앉은 이에게 말하였다. "한평생 뜻이 많은 데 있지 않았는데, 세상일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 마침내 삼공에 이르렀소. 주박의 우는 소리가 참으로 마음에 부끄럽소."
협주 1
《漢書》曰:「朱博字子元,杜陵人。爲丞相,臨拜,延登受策,有大聲如鐘鳴。上問揚雄,李尋對曰:『洪範所謂鼓妖者也。人君不聰,空名得進,則有無形之聲。』博後坐事自殺。」《故序傳》曰:「博之翰音,鼓妖先作。」《易·中孚》曰:「上九,翰音登於天,貞凶。」王弼注曰:「翰,髙飛也。飛者,音飛而實不從也。」
『한서』에 이르기를 「주박은 자가 자원이요 두릉 사람이다. 승상이 되어 임명을 받을 때 이끌려 올라가 책을 받는데 종 울리는 듯한 큰 소리가 났다. 임금이 양웅에게 물으니 이심이 대답하기를 『홍범에 이른바 북 치는 요괴입니다. 임금이 밝지 못하여 헛된 이름이 나아가면 꼴 없는 소리가 있습니다』 하였다. 주박이 뒤에 일에 걸려 스스로 죽었다」 하였다. 『고서전』에 이르기를 「주박의 우는 소리에 북 치는 요괴가 먼저 일어났다」 하였다. 『역·중부』에 이르기를 「상구, 우는 소리가 하늘에 오르니 곧아도 흉하다」 하였다. 왕필이 주하여 이르기를 「한은 높이 나는 것이다. 나는 것은 소리는 날아도 실상이 따르지 않는다」 하였다.
39응대의 번거로움을 덜려는 것이다
髙坐道人不作漢語,或問此意,簡文曰:「以簡應對之煩。」
고좌 도인이 중국말을 쓰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 뜻을 물으니 간문제가 말하였다. "응대의 번거로움을 덜려는 것이다."
협주 1
《髙坐別傳》曰:「和尚胡名尸黎密,西域人。傳云國王子,以國讓弟,遂爲沙門。永嘉中,始到此土,止於大市中。和尚天姿髙朗,風韻遒邁。丞相王公一見奇之,以爲吾之徒也。周僕射領選,撫其背而歎曰:『若選得此賢,令人無恨。』俄而周侯遇害,和尚對其靈坐,作胡祝數千言,音聲髙暢,既而揮涕收涙,其哀樂廢興皆此類。性髙簡,不學晉語。諸公與之言,皆因傳譯。然神領意得,頓在言前。」《塔寺記》曰:「尸黎密冢曰髙坐,在石子岡。常行頭陀,卒於梅岡,即葬焉。晉元帝於冢邊立寺,因名髙坐。」
『고좌별전』에 이르기를 「화상의 오랑캐 이름은 시려밀이요 서역 사람이다. 전하기를 나라의 왕자였는데 나라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마침내 사문이 되었다 한다. 영가 연간에 처음 이 땅에 이르러 큰 저자 가운데 머물렀다. 화상은 타고난 자질이 높고 환하며 풍모와 운치가 굳세고 뛰어났다. 승상 왕공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우리 무리라 하였다. 주복야가 사람 뽑는 일을 맡았을 때 그 등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만일 이 어진 이를 뽑을 수 있다면 사람에게 한이 없겠다』 하였다. 이윽고 주후가 해를 입자 화상이 그 영좌를 마주하고 오랑캐 말로 몇천 마디를 축원하는데 소리가 높고 시원하였으며, 이윽고 눈물을 뿌리고 거두었으니 그 슬픔과 즐거움의 일어나고 스러짐이 다 이런 것들이었다. 성품이 높고 간결하여 진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다. 여러 공이 그와 말할 때는 다 통역을 말미암았다. 그러나 정신으로 알아채고 뜻으로 얻어 문득 말보다 앞섰다」 하였다. 『탑사기』에 이르기를 「시려밀의 무덤을 고좌라 하니 석자강에 있다. 늘 두타행을 하다가 매강에서 죽어 곧 거기 묻었다. 진나라 원제가 무덤 곁에 절을 세우고 이로 인해 고좌라 이름 하였다」 하였다.
40어찌 감히 가까이 명공을 두고 멀리 혜강과 완적을 바라겠습니까
周僕射雍容好儀形,詣王公,初下車,隱數人,王公含笑看之。既坐,傲然嘯詠。王公曰:「卿欲希嵇阮邪?」荅曰:「何敢近舍明公,遠希嵇阮!」
주복야가 넉넉하고 조용하며 몸가짐이 좋았다. 왕공을 찾아가 처음 수레에서 내리는데 몇 사람을 가릴 만하니 왕공이 웃음을 머금고 그를 보았다. 앉고 나서 거만하게 휘파람 불며 시를 읊으니 왕공이 말하였다. "경은 혜강과 완적을 바라는 것이오."
대답하였다. "어찌 감히 가까이 명공을 두고 멀리 혜강과 완적을 바라겠습니까."
협주 1
鄧粲《晉紀》曰:「伯仁儀容弘偉,善於俛仰應答,精神足以蔭映數人。深自持,能致人,而未嘗往焉。」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백인은 몸가짐이 크고 훌륭하며 굽어보고 우러러 응대하기를 잘하여, 정신이 몇 사람을 덮어 가리기에 넉넉하였다. 스스로를 깊이 지키고 사람을 오게 할 수 있었으나 일찍이 남에게 가지는 않았다」 하였다.
41이분은 나루와 다리 놓기에 지쳤구나
庾公嘗入佛圖,見臥佛,曰:「此子疲於津梁。」於時以爲名言。
유공이 일찍이 절에 들어가 누운 부처를 보고 말하였다. "이분은 나루와 다리 놓기에 지치셨구나."
그때 사람들이 이름난 말이라 하였다.
협주 1
《涅槃經》云:「如來背痛,於雙樹閒北首而臥,故後之圖繪者爲此象。」
『열반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등이 아프시어 사라쌍수 사이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우셨다. 그러므로 뒤에 그림 그리는 이가 이 모습을 만들었다」 하였다.
42감라에 견주면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摯瞻曾作四郡太守、大將軍戸曹參軍,復出作内史,年始二十九。嘗別王敦,敦謂瞻曰:「卿年未三十,已爲萬石,亦太蚤!」瞻曰:「方於將軍,少爲太蚤;比之甘羅,已爲太老。」
지첨이 일찍이 네 고을의 태수와 대장군의 호조참군을 지내고 다시 나가 내사가 되었는데 나이가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일찍이 왕돈과 헤어질 때 왕돈이 지첨에게 말하였다. "경은 나이 서른도 안 되어 이미 만석이 되었으니 또한 너무 이르오."
지첨이 말하였다. "장군께 견주면 조금 너무 이르나, 감라에 견주면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협주 2
《摯氏世本》曰:「瞻字景游,京兆長安人,太常虞兄子也。父育,涼州刺史。瞻少善屬文,起家著作郎。中朝亂,依王敦爲戸曹參軍。歴安豐、新蔡、西陽太守。見敦以故壞裘賜老病外部都督。瞻諫曰『尊裘雖故,不宜與小吏。』敦曰:『何爲不可?』瞻時因醉,曰:『若上服皆可用賜,貂蟬亦可賜下乎?』敦曰:『非喩,所引如此,不堪二千石。』瞻曰:『瞻視去西陽,如脱屣耳!』敦反,乃左遷隨郡内史。」
『지씨세본』에 이르기를 「지첨은 자가 경유요 경조 장안 사람이니 태상 지우의 조카다. 아버지 지육은 양주자사였다. 지첨은 젊어서 글을 잘 지어 저작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중원이 어지러워지자 왕돈에게 붙어 호조참군이 되었고 안풍·신채·서양 태수를 지냈다. 왕돈이 헌 갖옷을 늙고 병든 바깥 도독에게 주는 것을 보고 지첨이 간하기를 『높으신 갖옷이 비록 헐었으나 작은 아전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왕돈이 『어찌 안 되는가』 하니, 지첨이 그때 취한 김에 『만일 윗옷을 다 내려 줄 수 있다면 담비와 매미 장식도 아랫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돈이 『비유가 아니다. 이끌어 온 것이 이러하니 이천석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지첨이 『제가 서양을 떠나는 것은 신 벗듯 할 뿐입니다』 하였다. 왕돈이 배반하고 이에 수군내사로 낮추었다」 하였다.
《摯氏世本》曰:「瞻髙亮有氣節,故以此答敦。後知敦有異志。建興四年,與第五琦據荊州以距敦,竟爲所害。」《史記》曰:「甘羅,秦相茂之孫也。年十二,而秦相呂不韋欲使張唐相燕,唐不肯行,甘羅説而行之。又請車五乘以使趙,還報秦,秦封甘羅爲上卿,賜以甘茂田宅。」
『지씨세본』에 이르기를 「지첨은 높고 밝으며 기개와 절조가 있었으므로 이로써 왕돈에게 대답한 것이다. 뒤에 왕돈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았다. 건흥 사 년에 제오기와 함께 형주를 차지하고 왕돈을 막다가 마침내 그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사기』에 이르기를 「감라는 진나라 재상 감무의 손자다. 열둘에 진나라 재상 여불위가 장당을 연나라 재상으로 보내려 하였는데 장당이 가려 하지 않으니, 감라가 달래어 가게 하였다. 또 수레 다섯 대를 청하여 조나라에 심부름 갔다가 돌아와 진나라에 알리니, 진나라가 감라를 상경에 봉하고 감무의 밭과 집을 주었다」 하였다.
43공작이 선생 집 새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梁國楊氏子,九歳,甚聰惠。孔君平詣其父,父不在,乃呼兒出,爲設果。果有楊梅,孔指以示兒曰:「此是君家果。」兒應聲荅曰:「未聞孔雀是夫子家禽。」
양나라 양씨의 아들이 아홉 살인데 몹시 총명하였다. 공군평이 그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없어 이에 아이를 불러내니 아이가 과일을 차려 놓았다.
과일 가운데 양매가 있으니 공군평이 가리켜 아이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이것이 그대 집 과일이구나."
아이가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였다. "공작이 선생 집 새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협주 1
王隱《晉書》曰:「孔坦字君平,會稽山陰人。善《春秋》,有文辯。厯太子舍人,累遷廷尉卿。」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공탄은 자가 군평이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춘추』를 잘하였고 글과 말솜씨가 있었다. 태자사인을 지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정위경에 이르렀다」 하였다.
44안평중의 검소함에도 여우갖옷을 수십 해 입었소
孔廷尉以裘與從弟沈,沈辭不受。廷尉曰:「晏平仲之儉,祠其先人,豚肩不掩豆,猶狐裘數十年,卿復何辭此?」於是受而服之。
공정위가 갖옷을 사촌아우 공침에게 주니 공침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정위가 말하였다. "안평중은 검소하여 그 선조에게 제사할 때 돼지 어깨가 제기를 덮지 못하였는데도 오히려 여우갖옷을 수십 해 입었소. 경은 또 무엇을 사양하시오."
이에 받아 입었다.
협주 2
《孔氏譜》曰:「沈字德度,會稽山陰人。祖父奕,全椒令。父群,鴻臚卿。沈至琅邪王文學。」
『공씨보』에 이르기를 「공침은 자가 덕도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할아버지 공혁은 전초령이요 아버지 공군은 홍려경이다. 공침은 낭야왕 문학에 이르렀다」 하였다.
《劉向別録》曰:「晏平仲名嬰,東萊夷維人。事齊靈公、莊公,以節儉力行重於齊。」《禮記》曰:「晏平仲祀其先人,豚肩不掩豆,君子以爲儉也。」又曰:「晏子一狐裘三十年,晏子焉知禮?」注:「豚,俎實也。豆,徑尺。言併豚之兩肩不能掩豆,喩少也。」
『유향별록』에 이르기를 「안평중은 이름이 영이요 동래 이유 사람이다. 제나라 영공과 장공을 섬겼는데 절약하고 검소하며 힘써 행함으로 제나라에서 무겁게 여겨졌다」 하였다. 『예기』에 이르기를 「안평중이 그 선조에게 제사할 때 돼지 어깨가 제기를 덮지 못하니 군자가 검소하다 하였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안자는 여우갖옷 하나를 서른 해 입었으니 안자가 어찌 예를 알겠는가」 하였다. 주에 이르기를 「돈은 제기에 담는 것이다. 두는 지름이 한 자다. 돼지의 두 어깨를 아울러도 제기를 덮지 못한다는 것은 적음을 빗댄 것이다」 하였다.
45불도징이 석호를 갈매기로 여긴다
佛圖澄與諸石遊,林公曰:「澄以石虎爲海鷗鳥。」
불도징이 여러 석씨와 사귀니 임공이 말하였다. "불도징은 석호를 바다 갈매기로 여긴다."
협주 2
《澄別傳》曰:「道人佛圖澄,不知何許人,出於燉煌,好佛道,出家爲沙門。永嘉中,至洛陽,値京師有難,潛遁草澤間。石勒雄異好殺害,因勒大將軍郭默略見勒。以麻油塗掌,占見吉凶。數百里外聽浮圖鈴聲,逆知禍福。勒甚敬信之。虎即位,亦師澄,號大和尚。自知終日,開棺無屍,唯袈裟法服在焉。」
『징별전』에 이르기를 「도인 불도징은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돈황에서 나왔다. 불도를 좋아하여 집을 나와 사문이 되었다. 영가 연간에 낙양에 이르렀는데 서울에 난리가 있는 때를 만나 풀숲 사이에 숨어 지냈다. 석륵이 뛰어나고 남달랐으나 죽이기를 좋아하므로, 석륵의 대장군 곽흑략을 말미암아 석륵을 보았다. 삼씨 기름을 손바닥에 발라 좋고 궂음을 점쳐 보았고, 몇백 리 밖에서 탑의 방울 소리를 듣고 화와 복을 미리 알았다. 석륵이 몹시 공경하고 믿었다. 석호가 자리에 오르자 또한 불도징을 스승 삼아 대화상이라 불렀다. 스스로 죽을 날을 알았는데 널을 여니 주검이 없고 오직 가사와 법복만 있었다」 하였다.
《趙書》曰:「虎字季龍,勒從弟也。征伐毎斬將搴旗。勒死,誅勒諸兒,襲位。」《莊子》曰:「海上之人好鷗者,毎旦之海上,從鷗遊,鷗之至者數百而不止。其父曰『吾聞鷗鳥從汝遊,取來玩之。』明日之海上,鷗舞而不下。」
『조서』에 이르기를 「석호는 자가 계룡이요 석륵의 사촌아우다. 치고 칠 때마다 장수를 베고 깃발을 뽑았다. 석륵이 죽자 석륵의 여러 아들을 베고 자리를 이었다」 하였다. 『장자』에 이르기를 「바닷가 사람으로 갈매기를 좋아하는 이가 있어 아침마다 바닷가에 가 갈매기와 노니니, 이르는 갈매기가 수백에 그치지 않았다. 그 아비가 『내가 들으니 갈매기가 너를 따라 논다 하니 가져와 놀게 해 다오』 하였다. 이튿날 바닷가에 가니 갈매기가 춤추며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다.
46자리에 공자가 없는데 어찌 안회를 가리겠습니까
謝仁祖年八歳,謝豫章將送客,爾時語已神悟,自參上流。諸人咸共嘆之曰:「年少一坐之顏回。」仁祖曰:「坐無尼父,焉別顏回?」
사인조가 여덟 살 때 사예장이 손을 배웅하는데, 그때 이미 말이 신묘하게 깨쳐 스스로 윗자리에 끼었다.
여러 사람이 다 함께 탄식하였다. "나이 어린 한자리의 안회로다."
인조가 말하였다. "자리에 공자가 없는데 어찌 안회를 가리겠습니까."
협주 2
鯤子別見
사곤의 아들이니 따로 보인다.
《晉陽秋》曰:「謝尚字仁祖,陳郡人,鯤之子也。齠齔喪兄,哀慟過人。及遭父喪,温嶠唁之,尚號叫極哀。既而收涕告訴,有異常童。嶠奇之,由是知名,仕至鎭西將軍、豫州刺史。」
『진양추』에 이르기를 「사상은 자가 인조요 진군 사람이니 사곤의 아들이다. 젖니 갈 나이에 형을 잃고 슬퍼함이 남보다 더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하자 온교가 조문하니 사상이 부르짖으며 지극히 슬퍼하였다.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아뢰는데 여느 아이와 다름이 있었다. 온교가 기이하게 여겨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고 벼슬이 진서장군과 예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47그때에 수조가 없었으므로 도공이 남길 말이 없었다
陶公疾篤,都無獻替之言,朝士以爲恨。仁祖聞之曰:「時無豎刁,故不貽陶公話言。」時賢以爲德音。
도공의 병이 깊었는데 아무 간언도 남기지 않으니 조정의 선비들이 서운해하였다.
인조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그때에 수조 같은 이가 없었으므로 도공이 남길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어진 이들이 덕 있는 말이라 하였다.
협주 2
《陶氏敘》曰:「侃字士衡,其先鄱陽人,後徙尋陽。侃少有遠概綱維宇宙之志。察孝廉入洛,司空張華見而謂曰:『後來匡主寧民,君其人也。』劉弘鎭沔南,取爲長史,謂侃曰:『昔吾爲羊太傅參佐,見語云:「君後當居身處。」今相觀,亦復然矣。』累遷湘廣荊三州刺史,加羽葆鼓吹,封長沙郡公、大將軍。贊拜不名,劍履上殿。進太尉,贈大司馬,諡桓公。」按,王隱《晉書》載侃臨終表曰:「臣少長孤寒,始願有限,過蒙先朝厯世異恩。臣年垂八十,位極人臣,啓手啓足,當復何恨!但以餘寇未誅,山陵未復,所以憤慨兼懷,唯此而已!猶冀犬馬之齒,尚可少延,欲爲陛下北呑石虎,西誅李雄,勢遂不振,良圖永息。臨書振腕,涕泗橫流。伏願遴選代人,使必得良才,足以奉宣王猷,遵成志業。則雖死之日,猶生之年。」有表若此,非無獻替。
『도씨서』에 이르기를 「도간은 자가 사형이요 그 선조는 파양 사람인데 뒤에 심양으로 옮겼다. 도간은 젊어서 멀리 내다보는 기개와 우주를 벼리로 삼을 뜻이 있었다. 효렴으로 살펴져 낙양에 드니 사공 장화가 보고 이르기를 『뒷날 임금을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히 할 이는 그대일 것이다』 하였다. 유홍이 면남을 지킬 때 데려다 장사로 삼고 도간에게 이르기를 『옛날 내가 양태부의 참좌였을 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뒤에 마땅히 내 자리에 있으리라」 하셨는데, 이제 그대를 보니 또한 그러하다』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주·광주·형주 세 주의 자사에 이르렀고 우보고취를 더하여 장사군공과 대장군에 봉해졌다. 절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칼 차고 신 신은 채 전에 오르게 하였다. 태위로 나아갔고 대사마를 내려 주었으며 시호는 환공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왕은의 『진서』에 도간이 죽음에 다다라 올린 표가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신은 젊어서 외롭고 추운 데서 자라 처음 바란 바에 한이 있었는데, 앞선 조정에서 대를 이어 남다른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습니다. 신의 나이 여든에 가깝고 자리가 사람의 신하로 지극하니, 손을 펴고 발을 펴며 다시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남은 도적을 베지 못하고 능을 되찾지 못하였으므로 북받침과 서러움이 아울러 품기는 것이 오직 이뿐입니다. 오히려 개와 말 같은 나이가 조금이라도 늘어나 폐하를 위해 북으로 석호를 삼키고 서로 이웅을 베고자 하였으나, 세가 마침내 떨치지 못하여 좋은 꾀가 길이 그쳤습니다. 글을 앞에 두고 팔목을 떨며 눈물과 콧물이 가로 흐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신할 이를 잘 가려 반드시 좋은 재주를 얻어 임금의 도를 펴 이루기에 넉넉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비록 죽는 날이라도 오히려 사는 해와 같겠습니다」 하였다. 이런 표가 있으니 간언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呂氏春秋》曰:「管仲病,桓公問曰:『子如不諱,誰代子相者?豎刁何如?』管仲曰『自宮以事君,非人情,必不可用!』後果亂齊。」
『여씨춘추』에 이르기를 「관중이 병들자 환공이 묻기를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그대를 대신하여 재상이 되겠는가. 수조는 어떠한가』 하였다. 관중이 『스스로 거세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니 반드시 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뒤에 과연 제나라를 어지럽혔다」 하였다.
48그대가 스스로 붉은 문으로 보는 것이요 나는 쑥대문에 노니는 듯하오
竺法深在簡文坐,劉尹問:「道人何以遊朱門?」荅曰:「君自見其朱門,貧道如遊蓬戸。」或云卞令。
축법심이 간문제의 자리에 있는데 유윤이 물었다. "도인께서는 어찌 붉은 문에 노니십니까."
대답하였다. "그대가 스스로 그것을 붉은 문으로 보는 것이요, 빈도는 쑥대문에 노니는 듯합니다."
어떤 이는 변령이라 한다.
협주 2
《髙逸沙門傳》曰:「法師居會稽,皇帝重其風德,遣使迎焉,法師暫出應命。司徒會稽王天性虚澹,與法師結殷勤之歡。師雖升履丹墀,出入朱邸,泯然曠達,不異蓬宇也。」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법사가 회계에 사니 황제가 그 풍모와 덕을 무겁게 여겨 사신을 보내 맞이하였고, 법사가 잠깐 나와 명에 응하였다. 사도 회계왕이 타고난 성품이 비고 담박하여 법사와 도타운 즐거움을 맺었다. 법사가 비록 붉은 섬돌을 밟고 붉은 집을 드나들었으나, 아무 자취 없이 시원하고 통달하여 쑥대 집과 다름이 없었다」 하였다.
別見。
따로 보인다.
49작은 이도 큰 이도 없이 공을 따라 간다
孫盛爲庾公記室參軍,從獵,將其二兒倶行。庾公不知,忽於獵塲見齊莊,時年七八歳。庾謂曰:「君亦復來邪?」應聲荅曰:「所謂『無小無大,從公于邁』。」
손성이 유공의 기실참군이 되어 사냥을 따라가는데 그 두 아들을 데리고 함께 갔다. 유공이 알지 못하다가 홀연 사냥터에서 제장을 보니 그때 나이 일고여덟이었다.
유공이 말하였다. "그대도 또 왔는가."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였다. "이른바 『작은 이도 큰 이도 없이 공을 따라 간다』입니다."
협주 1
《中興書》曰:「盛字安國,太原中都人。博學強識,厯著作郎,瀏陽令。庾亮爲荊州,以爲征西主簿,累遷祕書監。」
『중흥서』에 이르기를 「손성은 자가 안국이요 태원 중도 사람이다.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였으며 저작랑과 유양령을 지냈다. 유량이 형주에 있을 때 정서주부로 삼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비서감에 이르렀다」 하였다.
50성인은 나면서 아니 그러므로 그리워하기 어렵습니다
孫齊由、齊莊二人,少時詣庾公,公問:「齊由何字?」荅曰:「字齊由。」公曰:「欲何齊邪?」曰:「齊許由。」「齊莊何字?」荅曰:「字齊莊。」公曰:「欲何齊?」曰:「齊莊周。」公曰:「何不慕仲尼而慕莊周?」對曰:「聖人生知,故難企慕。」庾公大喜小兒對。
손제유와 손제장 두 사람이 어릴 때 유공을 찾아가니 유공이 물었다. "제유는 무엇을 자로 하였는가."
대답하였다. "자가 제유입니다."
유공이 말하였다. "무엇과 가지런하려는 것인가."
말하였다. "허유와 가지런하려는 것입니다."
"제장은 무엇을 자로 하였는가."
대답하였다. "자가 제장입니다."
유공이 말하였다. "무엇과 가지런하려는 것인가."
말하였다. "장주와 가지런하려는 것입니다."
유공이 말하였다. "어찌 중니를 그리워하지 않고 장주를 그리워하는가."
대답하였다. "성인은 나면서 아시니 그러므로 바라 그리워하기 어렵습니다."
유공이 어린아이의 대답을 크게 기뻐하였다.
협주 2
《晉百官名》曰:「孫潛字齊由,太原人。」《中興書》曰:「潛,盛長子也。豫章太守殷仲堪下討王國寶,潛時在郡,逼爲咨議參軍,固辭不就,遂以憂卒。」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손잠은 자가 제유요 태원 사람이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손잠은 손성의 맏아들이다. 예장태수 은중감이 내려가 왕국보를 칠 때 손잠이 마침 고을에 있었는데, 억지로 자의참군으로 삼으려 하니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마침내 근심으로 죽었다」 하였다.
《孫放別傳》曰:「放字齊莊,監君次子也。年八歳,太尉庾公召見之。放淸秀,欲觀試,乃授紙筆令書,放便自疎名字。公題後問之曰:『爲欲慕莊周邪?』放書答曰:『意欲慕之。』公曰:『何故不慕仲尼而慕莊周?』放曰:『仲尼生而知之,非希企所及;至於莊周,是其次者,故慕耳。』公謂賓客曰:『王輔嗣應答,恐不能勝之。』卒長沙王相。」
『손방별전』에 이르기를 「손방은 자가 제장이요 감군의 둘째 아들이다. 여덟 살에 태위 유공이 불러 보았다. 손방이 맑고 빼어나므로 살펴 보고자 이에 종이와 붓을 주어 쓰게 하니, 손방이 곧 스스로 이름과 자를 적었다. 유공이 뒤에 제목을 붙여 물었다. 『장주를 그리워하려는 것인가.』 손방이 써서 대답하기를 『뜻은 그를 그리워하려 합니다』 하였다. 유공이 『무슨 까닭으로 중니를 그리워하지 않고 장주를 그리워하는가』 하니, 손방이 『중니는 나면서 아셨으니 바라 미칠 바가 아닙니다. 장주에 이르러서는 그 다음가는 이이므로 그리워할 뿐입니다』 하였다. 유공이 손들에게 이르기를 『왕보사가 대답하더라도 아마 이를 이기지 못하리라』 하였다. 장사왕의 상으로 마쳤다」 하였다.
51잊을 수 있으므로 울지 않고 잊지 못하므로 웁니다
張玄之、顧敷,是顧和中外孫,皆少而聰惠。和並知之,而常謂顧勝,親重偏至,張頗不懕。於時張年九歳,顧年七歳,和與倶至寺中。見佛般泥洹像,弟子有泣者,有不泣者,和以問二孫。玄謂「被親故泣,不被親故不泣」。敷曰:「不然,當由忘情故不泣,不能忘情故泣。」
장현지와 고부는 고화의 안팎 손자인데 다 어리면서 총명하였다. 고화가 둘 다 알아보았으나 늘 고부가 낫다 하여 아끼고 무겁게 여김이 한쪽으로 치우치니 장현지가 자못 언짢아하였다.
그때 장현지는 아홉 살이요 고부는 일곱 살이었는데, 고화가 둘을 데리고 절에 갔다. 부처가 열반에 드는 상을 보니 제자 가운데 우는 이도 있고 울지 않는 이도 있었다. 고화가 이를 두 손자에게 물었다.
장현지는 "가까이한 이는 그러므로 울고 가까이하지 않은 이는 그러므로 울지 않습니다" 하였다.
고부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땅히 정을 잊었으므로 울지 않고 정을 잊지 못하므로 우는 것입니다."
협주 2
敷別見。《續晉陽秋》曰:「張玄之字祖希,呉郡太守澄之孫也。少以學顯,厯吏部尚書,出爲冠軍將軍、呉興太守。會稽内史謝玄同時之郡,論者以爲南北之望。玄之名亞謝玄,時亦稱『南北二玄』,卒於郡。」
고부는 따로 보인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장현지는 자가 조희요 오군태수 장징지의 손자다. 젊어서 학문으로 드러났고 이부상서를 지내다가 관군장군과 오흥태수로 나갔다. 회계내사 사현이 같은 때에 고을에 있었는데, 따지는 이들이 남북의 바람이라 하였다. 장현지의 이름이 사현에 버금가므로 그때 또한 『남북의 두 현』이라 일컬었다. 고을에서 죽었다」 하였다.
《大智度論》曰:「佛在陰菴羅雙樹閒入般涅槃,臥北首,大地震動。諸三學人,僉然不樂,郁伊交涕。諸無學人,但念諸法,一切無常。」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부처께서 그늘진 암라쌍수 사이에서 반열반에 드시어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우시니 큰 땅이 흔들렸다. 세 배움에 있는 이들이 다 즐거워하지 않고 답답하여 눈물을 흘렸다. 배움을 마친 이들은 다만 온갖 법이 다 덧없음을 생각하였다」 하였다.
52청렴한 이는 구하지 않고 탐하는 이는 주지 않으므로 남아 있소
庾法畼造庾太尉,握麈尾至佳,公曰:「此至佳,那得在?」法畼曰:「廉者不求,貪者不與,故得在耳。」
유법창이 유태위를 찾아갔는데 손에 쥔 주미가 지극히 좋았다. 유공이 말하였다. "이것이 지극히 좋은데 어찌 남아 있소."
법창이 말하였다. "청렴한 이는 구하지 않고 탐하는 이는 주지 않으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협주 1
法畼氏族所出未詳。法畼著《人物論》,自敘其美云:「悟鋭有神,才辭通辯。」
법창의 겨레와 나온 데는 자세하지 않다. 법창이 『인물론』을 지어 스스로 제 아름다움을 아뢰어 이르기를 「깨침이 날카롭고 정신이 있으며 재주와 말이 통하고 말솜씨가 있다」 하였다.
53좋아서 올린 것이지 새것이라고 올린 것이 아닙니다
庾穉恭爲荊州,以毛扇上武帝。武帝疑是故物。侍中劉劭曰:「柏梁雲構,工匠先居其下;管絃繁奏,鍾夔先聽其音。穉恭上扇,以好不以新。」庾後聞之曰:「此人宜在帝左右。」
유치공이 형주에 있을 때 털부채를 무제에게 올렸다. 무제가 헌 물건인가 의심하였다.
시중 유소가 말하였다. "백량대의 구름 같은 얽음도 장인이 먼저 그 아래 있었고, 관현을 어지러이 타는 것도 종자기와 기가 먼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치공이 부채를 올린 것은 좋아서이지 새것이라서가 아닙니다."
유치공이 뒤에 이를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마땅히 임금 곁에 있어야 한다."
협주 4
《庾翼別傳》曰:「翼字穉恭,潁川鄢陵人也。少有大度、時論以經略許之。兄太尉亮薨、朝議推才,乃以翼都督七州。進征南將軍、荊州刺史。」
『유익별전』에 이르기를 「유익은 자가 치공이요 영천 언릉 사람이다. 젊어서 큰 도량이 있어 그때 따지는 이들이 나라 다스릴 재주로 허락하였다. 형 태위 유량이 죽자 조정에서 재주를 헤아려 이에 유익에게 일곱 주를 도독하게 하였다. 정남장군과 형주자사로 나아갔다」 하였다.
傅咸《羽扇賦》序曰:「昔呉人直截鳥翼而搖之,風不減方圓二扇,而功無加,然中國莫有生意者。滅呉之後,翕然貴之,無人不用。」按,庾懌以白羽扇獻武帝,帝嫌其非新,反之,不聞翼也。
부함의 「우선부」 서문에 이르기를 「옛날 오나라 사람이 새 날개를 곧게 잘라 흔들었는데 바람이 모난 부채나 둥근 부채보다 덜하지 않으면서 품이 더 들지 않았으나, 중국에서는 만들 뜻을 낸 이가 없었다. 오나라를 없앤 뒤에 훌쩍 이를 귀히 여겨 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다. 살피건대 유역이 흰 깃 부채를 무제에게 바쳤는데 임금이 새것이 아님을 꺼려 돌려주었다 하니, 유익이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文字志》曰:「劭,字彦祖,彭城叢亭人。祖訥,司隸校尉。父松,成皋令。劭博識好學,多藝能,善草隸。初仕領軍參軍,太傅出東,劭謂京洛必危,乃單馬奔揚州。歴侍中、豫章太守。」
『문자지』에 이르기를 「유소는 자가 언조요 팽성 총정 사람이다. 할아버지 유눌은 사예교위요 아버지 유송은 성고령이다. 유소는 널리 알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재주가 많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처음에 영군참군으로 벼슬하였는데, 태부가 동쪽으로 나가자 유소가 서울이 반드시 위태로우리라 여겨 이에 홀로 말을 타고 양주로 달아났다. 시중과 예장태수를 지냈다」 하였다.
鍾,鍾期也。夔,舜樂正。
종은 종자기다. 기는 순임금의 악정이다.
54나라에 절로 주공이 있소
何驃騎亡後,徴褚公入。既至石頭,王長史、劉尹同詣褚。褚曰:「眞長何以處我?」眞長顧王曰:「此子能言。」褚因視王,王曰:「國自有周公。」
하표기가 죽은 뒤 저공을 불러들였다. 석두에 이르자 왕장사와 유윤이 함께 저공을 찾아갔다.
저공이 말하였다. "진장은 나를 어떻게 두겠소."
진장이 왕장사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말할 수 있소."
저공이 이에 왕장사를 보니 왕장사가 말하였다. "나라에 절로 주공이 있소."
협주 2
何充別見。
하충은 따로 보인다.
《晉陽秋》曰:「充之卒,議者謂太后父裒宜秉朝政,裒自丹徒入朝。吏部尚書劉遐勸裒曰『會稽王令德,國之周公也,足下宜以大政付之。』裒長史王胡之亦勸歸藩,於是固辭歸京。」
『진양추』에 이르기를 「하충이 죽자 따지는 이들이 태후의 아버지 저부가 마땅히 조정의 정사를 잡아야 한다 하니, 저부가 단도에서 조정에 들어왔다. 이부상서 유하가 저부에게 권하기를 『회계왕은 아름다운 덕이 있어 나라의 주공이니, 그대는 마땅히 큰 정사를 그에게 맡기십시오』 하였다. 저부의 장사 왕호지도 번방으로 돌아가기를 권하니, 이에 굳이 사양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하였다.
55나무도 이러한데 사람이 어찌 견디랴
桓公北征經金城,見前爲琅邪時種柳,皆已十圍,慨然曰:「木猶如此,人何以堪!」攀枝執條,泫然流涙。
환공이 북쪽을 치며 금성을 지나다가, 앞서 낭야내사였을 때 심은 버들이 다 이미 열 아름이 된 것을 보고 북받쳐 말하였다. "나무도 이러한데 사람이 어찌 견디랴."
가지를 붙들고 잔가지를 잡으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협주 1
《桓温別傳》曰:「温字元子,譙國龍亢人,漢五更桓榮後也。父彝,有識鑒。温少有豪邁風氣,爲温嶠所知,累遷琅邪内史,進征西大將軍,鎭西夏。時逆胡未誅,餘燼假息,温親勒郡卒,建旗致討,淸蕩伊洛,展敬園陵。薨,諡宣武侯。」
『환온별전』에 이르기를 「환온은 자가 원자요 초국 용항 사람이니 한나라 오경 환영의 뒤다. 아버지 환이는 사람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환온은 젊어서 호탕한 기개가 있어 온교에게 알려졌고, 여러 벼슬을 거쳐 낭야내사에 이르렀다가 정서대장군으로 나아가 서하를 지켰다. 그때 거스르는 오랑캐가 베이지 않아 남은 불씨가 숨을 붙이고 있었는데, 환온이 몸소 고을 군사를 이끌고 깃발을 세워 쳐서 이수와 낙수를 맑게 쓸고 능에 공경을 폈다. 죽자 시호는 선무후다」 하였다.
56맏이가 창을 잡고 임금의 앞잡이가 된다
簡文作撫軍時,嘗與桓宣武倶入朝,更相讓在前。宣武不得已而先之,因曰:「伯也執殳,爲王前驅。」簡文曰:「所謂『無小無大,從公于邁』。」
간문제가 무군장군이던 때에 일찍이 환선무와 함께 조회에 드는데 서로 앞서라고 사양하였다. 선무가 마지못해 앞서며 말하였다. "『맏이가 창을 잡고 임금의 앞잡이가 된다』."
간문제가 말하였다. "이른바 『작은 이도 큰 이도 없이 공을 따라 간다』입니다."
협주 1
《衞詩》也。殳,長一丈二尺,無刃。
『위시』다. 수는 길이가 한 길 두 자요 날이 없다.
57부들과 버들은 가을만 바라보아도 지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서리를 이기고 무성합니다
顧悅與簡文同年,而髮蚤白。簡文曰:「卿何以先白?」對曰:「蒲柳之姿,望秋而落;松柏之質,凌霜猶茂。」
고열이 간문제와 나이가 같은데 머리가 일찍 세었다. 간문제가 말하였다. "경은 어찌 먼저 세었소."
대답하였다. "부들과 버들의 자질은 가을만 바라보아도 지고, 소나무와 잣나무의 바탕은 서리를 이기고도 오히려 무성합니다."
협주 2
《中興書》曰:「悅字君叔,晉陵人。初爲殷浩揚州別駕。浩卒,上疎理浩。或諫以浩爲太宗所廢,必不依許,悅固爭之,浩果得申,物論稱之。後至尚書左丞。」
『중흥서』에 이르기를 「고열은 자가 군숙이요 진릉 사람이다. 처음에 은호의 양주별가가 되었다. 은호가 죽자 글을 올려 은호를 밝히려 하니, 어떤 이가 은호는 태종이 폐한 이라 반드시 허락하지 않으리라 간하였으나 고열이 굳이 다투어 은호가 과연 펴지니 사람들이 이를 일컬었다. 뒤에 상서좌승에 이르렀다」 하였다.
顧凱之爲父傳曰:「君以直道陵遲於世。入見王,王髮無二毛,而君已斑白,問君年,乃曰:『卿何偏蚤白?』君曰:『松柏之姿,經霜猶茂;臣蒲柳之質,望秋先零。受命之異也。』王稱善久之。」
고개지가 아버지를 위해 지은 전에 이르기를 「군이 곧은 도로 세상에 늦어졌다. 들어가 왕을 뵈니 왕은 머리에 두 빛깔이 없는데 군은 이미 반백이었다. 군의 나이를 묻고 이에 『경은 어찌 유독 일찍 세었소』 하니, 군이 『소나무와 잣나무의 자질은 서리를 지나도 오히려 무성하고, 신의 부들과 버들의 바탕은 가을만 바라보아도 먼저 집니다. 명을 받은 것이 다른 탓입니다』 하였다. 왕이 오래도록 좋다 일컬었다」 하였다.
58이미 충신이 되었으니 효자는 되지 못하는구나
桓公入峽,絶壁天懸,騰波迅急。迺嘆曰:「既爲忠臣,不得爲孝子,如何?」
환공이 협곡에 드니 깎아지른 벼랑이 하늘에 매달리고 솟는 물결이 빠르고 급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이미 참된 신하가 되었으니 효자는 되지 못하는구나. 어찌하겠는가."
협주 2
《晉陽秋》曰:「温以永和二年,率所領七千餘人伐蜀,拜表輒行。」
『진양추』에 이르기를 「환온이 영화 이 년에 거느린 바 칠천 남짓을 이끌고 촉을 치는데, 표를 올리고 곧 떠났다」 하였다.
《漢書》曰:「王陽爲益州刺史,行部至邛僰九折阪,歎曰:『奉先人遺體,奈何數乘此險!』以病去官。後王尊爲刺史,至其阪,問吏曰:『非王陽所畏之道邪?』吏曰:『是!』叱其馭曰:『驅之,王陽爲孝子,王尊爲忠臣。』」
『한서』에 이르기를 「왕양이 익주자사가 되어 고을을 돌다가 공북의 아홉 굽이 비탈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선인이 남긴 몸을 받들고서 어찌 이런 험한 데를 자주 지나겠는가』 하고 병으로 벼슬을 떠났다. 뒤에 왕존이 자사가 되어 그 비탈에 이르러 아전에게 묻기를 『왕양이 두려워한 길이 아닌가』 하니 아전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 마부를 꾸짖어 『몰아라. 왕양은 효자가 되고 왕존은 참된 신하가 되겠다』 하였다」 하였다.
59뜻있는 선비는 조정이 위태로움을 아파하고 참된 신하는 임금의 욕됨을 슬퍼한다
初,熒惑入太微,尋廢海西。簡文登阼,復入太微,帝惡之。時郗超爲中書在直。引超入曰:「天命脩短,故非所計,政當無復近日事不?」超曰:「大司馬方將外固封疆,内鎭社稷,必無若此之慮。臣爲陛下以百口保之。」帝因誦庾仲初詩曰:「志士痛朝危,忠臣哀主辱。」聲甚悽厲。郗受假還東,帝曰:「致意尊公,家國之事,遂至於此!由是身不能以道匡衞,思患預防,愧嘆之深,言何能喩?」因泣下流襟。
처음에 형혹성이 태미원에 들어가더니 이윽고 해서공이 폐해졌다. 간문제가 자리에 오르자 다시 태미원에 드니 임금이 이를 싫어하였다.
그때 치초가 중서로 당직하고 있었는데, 치초를 이끌어 들이고 말하였다. "하늘이 준 길고 짧음은 본디 헤아릴 바가 아니나, 다만 요사이 같은 일이 다시는 없겠지요."
치초가 말하였다. "대사마께서 바야흐로 밖으로 지경을 굳게 하고 안으로 사직을 누르려 하시니 반드시 이와 같은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신이 폐하를 위해 온 집안 백 사람으로 이를 보증하겠습니다."
임금이 이에 유중초의 시를 외웠다. "뜻있는 선비는 조정이 위태로움을 아파하고, 참된 신하는 임금의 욕됨을 슬퍼한다."
소리가 몹시 처량하고 매서웠다.
치초가 말미를 얻어 동쪽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말하였다. "아버님께 내 뜻을 전하시오. 집과 나라의 일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소. 이는 내 몸이 도로써 바로잡아 지키고 근심을 헤아려 미리 막지 못한 탓이니,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이 깊어 말로 어찌 다 하겠소."
이에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협주 5
《晉陽秋》曰:「泰和六年閏十月,熒惑守太微端門。十一月,大司馬桓温廢帝爲海西公。」《晉安帝紀》曰:「桓温於枋頭奔敗,知民望之去也,乃屠袁眞於壽陽。既而謂郗超曰:『足以雪枋頭之恥乎?』超曰:『未厭有識之情也。公六十之年,敗於大舉,不建髙世之勳,未足以鎭厭民望。』因説温以廢立之事。時温夙有此謀,深納超言,遂廢海西。」
『진양추』에 이르기를 「태화 육 년 윤시월에 형혹성이 태미원 단문을 지켰다. 십일월에 대사마 환온이 임금을 폐하여 해서공으로 삼았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환온이 방두에서 달아나 무너지고 백성의 바람이 떠난 줄 알고, 이에 원진을 수양에서 죽였다. 이윽고 치초에게 이르기를 『방두의 부끄러움을 씻기에 넉넉한가』 하니, 치초가 『아직 식견 있는 이의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공께서 예순 나이에 크게 일으킨 싸움에서 지고 세상에 높은 공을 세우지 못하셨으니, 백성의 바람을 눌러 채우기에 넉넉하지 않습니다』 하고, 이로 인해 환온에게 폐하고 세우는 일을 말하였다. 그때 환온이 본디 이런 꾀가 있었으므로 치초의 말을 깊이 받아들여 마침내 해서공을 폐하였다」 하였다.
徐廣《晉紀》曰:「咸安元年十二月,熒惑逆行入太微,至二年七月,猶在焉。帝懲海西之事,心甚憂之。」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함안 원년 십이월에 형혹성이 거꾸로 가 태미원에 들었는데 이 년 칠월까지 오히려 거기 있었다. 임금이 해서공의 일에 데어 마음에 몹시 근심하였다」 하였다.
《中興書》曰:「超字景興,髙平人,司空愔之子也。少而卓犖不羈,有曠世之度。累遷中書郎、司徒左長史。」
『중흥서』에 이르기를 「치초는 자가 경흥이요 고평 사람이니 사공 치음의 아들이다. 젊어서 뛰어나고 매이지 않아 세상에 드문 도량이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랑과 사도좌장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庾闡《從征詩》也
유천의 「종정시」다.
《續晉陽秋》曰:「帝外壓彊臣,憂憤不得志,在位二年而崩。」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임금이 밖으로 굳센 신하에게 눌려 근심하고 성내어 뜻을 얻지 못하고, 자리에 있은 지 두 해 만에 돌아갔다」 하였다.
60아무개가 여기 있소
簡文在暗室中坐,召宣武。宣武至,問上何在?簡文曰:「某在斯。」時人以爲能。
간문제가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선무를 불렀다. 선무가 이르러 임금이 어디 계시냐 물으니 간문제가 말하였다. "아무개가 여기 있소."
그때 사람들이 잘하였다 하였다.
협주 1
《論語》曰:「師冕見,及階,子曰:『階也。』及席,子曰:『席也。』皆坐,子告之曰:『某在斯,某在斯。』」注:「歴告坐中人也。」
『논어』에 이르기를 「악사 면이 뵈러 와서 섬돌에 이르자 공자께서 『섬돌입니다』 하시고, 자리에 이르자 『자리입니다』 하시고, 다 앉자 공자께서 일러 주시기를 『아무개가 여기 있고 아무개가 여기 있습니다』 하셨다」 하였다. 주에 이르기를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차례로 일러 준 것이다」 하였다.
61마음에 맞는 데가 반드시 먼 데 있지는 않다
簡文入華林園,顧謂左右曰:「會心處,不必在遠。翳然林水,便自有濠濮閒想也。覺鳥獸禽魚,自來親人。」
간문제가 화림원에 들어가 곁의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마음에 맞는 데가 반드시 먼 데 있지는 않다. 그늘진 숲과 물이면 절로 호수와 복수 사이의 생각이 있으니, 새와 짐승과 물고기가 절로 와서 사람을 가까이하는 듯하구나."
협주 1
濠濮,二水名也。《莊子》曰:「莊子與惠子遊濠梁水上,莊子曰:『儵魚出游從容,是魚樂也。』惠子曰:『子非魚,安知魚之樂邪?』莊子曰:『子非我,安知我之不知魚之樂也?』」「莊周釣在濮水,楚王使二大夫造焉,曰:『願以境内累莊子。』莊子持竿不顧,曰:『吾聞楚有神龜者,死已三千年矣,巾笥而藏於廟。此寧曳尾於塗中,寧留骨而貴乎?』二大夫曰:『寧曳尾於塗中。』莊子曰:『往矣!吾亦寧曳尾於塗中。』」
호수와 복수는 두 물 이름이다. 『장자』에 이르기를 「장자가 혜자와 호수 다리 위에 노니는데 장자가 『피라미가 나와 한가로이 노니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오』 하였다.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시오』 하니,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줄 아시오』 하였다」 하였다. 「장주가 복수에서 낚시하는데 초나라 왕이 대부 둘을 보내 이르기를 『나라 안 일로 장자를 얽으려 합니다』 하니, 장자가 낚싯대를 잡은 채 돌아보지 않고 『내가 들으니 초나라에 신령한 거북이 있어 죽은 지 이미 삼천 해인데 수건에 싸 사당에 간직해 두었다 하오. 이것이 진흙 속에 꼬리를 끌기를 바라겠소, 뼈를 남겨 귀해지기를 바라겠소』 하였다. 두 대부가 『차라리 진흙 속에 꼬리를 끌겠지요』 하니, 장자가 『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 꼬리를 끌겠소』 하였다」 하였다.
62중년에는 슬픔과 즐거움에 상하니 거문고와 피리에 기대어 풀 뿐이오
謝太傅語王右軍曰:「中年傷於哀樂,與親友別,輒作數日惡。」王曰:「年在桑楡,自然至此,正賴絲竹陶寫。恆恐兒輩覺,損欣樂之趣。」
사태부가 왕우군에게 말하였다. "중년에는 슬픔과 즐거움에 상하여, 가까운 벗과 헤어지면 문득 며칠을 언짢게 지내오."
왕우군이 말하였다. "나이가 저물녘에 이르렀으니 절로 이에 이르는 것이오. 다만 거문고와 피리에 기대어 풀어낼 뿐인데, 늘 아이들이 알아채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맛을 덜까 두렵소."
협주 1
《文字志》曰:「王羲之字逸少,琅邪臨沂人。父礦,淮南太守。羲之少朗拔,爲叔父廙所賞。善草隸,累遷江州刺史、右軍將軍、會稽内史。」
『문자지』에 이르기를 「왕희지는 자가 일소요 낭야 임기 사람이다. 아버지 왕광은 회남태수다. 왕희지는 젊어서 밝고 빼어나 작은아버지 왕이에게 인정받았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여러 벼슬을 거쳐 강주자사와 우군장군과 회계내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63빈도는 그 정신의 빼어남을 무겁게 여깁니다
支道林常養數匹馬。或言,道人畜馬不韻,支曰:「貧道重其神駿。」
지도림이 늘 말 몇 필을 길렀다. 어떤 이가 도인이 말을 기르는 것은 운치가 없다 하니 지도림이 말하였다. "빈도는 그 정신의 빼어남을 무겁게 여깁니다."
협주 1
《髙逸沙門傳》曰:「支遁字道林,河内林慮人,或曰陳留人,本姓關氏。少而任心獨往,風期髙亮,家世奉法。嘗於餘杭山沈思道行,泠然獨暢。年二十五始釋形入道。年五十三終於洛陽。」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지둔은 자가 도림이요 하내 임려 사람인데 어떤 이는 진류 사람이라 하며 본디 성은 관씨다. 젊어서 마음 가는 대로 홀로 다녀 풍모와 기약이 높고 밝았으며 집안이 대대로 법을 받들었다. 일찍이 여항산에서 도의 행함을 깊이 생각하니 시원하게 홀로 통창하였다. 스물다섯에 비로소 형체를 벗고 도에 들었다. 쉰셋에 낙양에서 마쳤다」 하였다.
64이는 지극한 데와는 상관없고 절로 금화전의 말입니다
劉尹與桓宣武共聽講《禮記》。桓云:「時有入心處,便覺咫尺玄門。」劉曰:「此未關至極,自是金華殿之語。」
유윤과 환선무가 함께 『예기』 강의를 들었다. 환선무가 말하였다. "때로 마음에 드는 데가 있으니 곧 아득한 문이 지척인 듯하오."
유윤이 말하였다. "이는 지극한 데와는 상관없고 절로 금화전의 말이오."
협주 1
《漢書·敘傳》曰:「班伯少受詩於師丹。大將軍王鳳薦伯於成帝,宜勸學,召見宴暱,拜爲中常侍。時上方向學,鄭寬中、張禹朝夕入説《尚書》、《論語》於金華殿,詔伯受之。」
『한서·서전』에 이르기를 「반백이 젊어서 사단에게 시를 배웠다. 대장군 왕봉이 반백을 성제에게 천거하며 배움을 권하기에 마땅하다 하니, 불러 보고 가까이 두어 중상시에 임명하였다. 그때 임금이 바야흐로 배움에 마음을 두어 정관중과 장우가 아침저녁으로 들어와 금화전에서 『상서』와 『논어』를 말하니, 조칙으로 반백에게 이를 받게 하였다」 하였다.
65이름은 하늘의 들으심에 퍼졌으나 대는 거룩한 세상에 끊겼습니다
羊秉爲撫軍參軍,少亡,有令譽。夏侯孝若爲之敘,極相讚悼。羊權爲黃門侍郎,侍簡文坐。帝問曰:「夏侯湛作《羊秉敘》絶可想。是卿何物?有後不?」權潸然對曰:「亡伯令問夙彰,而無有繼嗣。雖名播天聽,然胤絶聖世。」帝嗟慨久之。
양병이 무군참군이 되었는데 젊어서 죽었고 좋은 기림이 있었다. 하후효약이 그를 위해 서를 지어 지극히 기리고 슬퍼하였다.
양권이 황문시랑이 되어 간문제의 자리에서 모시는데 임금이 물었다. "하후담이 지은 「양병서」가 지극히 생각할 만하오. 그는 경의 무엇이오. 뒤가 있소."
양권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였다. "돌아가신 백부의 좋은 소문은 일찍 드러났으나 뒤이을 이가 없습니다. 비록 이름은 하늘의 들으심에 퍼졌으나 대는 거룩한 세상에 끊겼습니다."
임금이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협주 3
《羊秉敘》曰:「秉字長達,太山平陽人。漢南陽太守續曾孫。大父魏郡府君,即車騎掾元子也。府君夫人鄭氏無子,乃養秉。齠齔而佳,小心敬愼。十歳而鄭夫人薨,秉思容盡哀,俄而公府掾及夫人並卒,秉群從父率禮相承,人不閒其親,雍雍如也。仕參撫軍將軍事,將奮千里之足,揮沖天之翼,惜乎春秋三十有二而卒。昔罕虎死,子産以爲無與爲善,自夫子之沒,有子産之歎矣!亡後有子男又不育,是何行善而禍繁也?豈非司馬生之所惑歟?」
「양병서」에 이르기를 「양병은 자가 장달이요 태산 평양 사람이다. 한나라 남양태수 양속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위군부군이니 곧 거기장군 아전의 맏아들이다. 부군의 부인 정씨가 아들이 없어 이에 양병을 길렀다. 젖니 갈 때부터 아름다웠고 조심스럽고 공경하며 삼갔다. 열 살에 정부인이 죽으니 양병은 그리는 얼굴로 슬픔을 다하였고, 이윽고 공부의 아전과 부인이 아울러 죽으니 양병이 여러 사촌 아버지와 예를 좇아 서로 받들어, 사람들이 그 친함을 가릴 수 없어 화목하였다. 벼슬하여 무군장군의 일에 참여하여 천 리를 갈 발을 떨치고 하늘 찌를 날개를 휘두르려 하였는데, 아깝게도 나이 서른둘에 죽었다. 옛날 한호가 죽자 자산이 더불어 착함을 할 이가 없다 하였는데, 이 사람이 죽은 뒤로 자산의 탄식이 있다. 죽은 뒤에 아들이 있었으나 또 자라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착함을 행하는데 화가 잦은 것인가. 어찌 사마천이 헷갈린 바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別見
따로 보인다.
羊氏譜曰:「權字道輿,徐州刺史悅之子也。仕至尚書左丞。」
『양씨보』에 이르기를 「양권은 자가 도여요 서주자사 양열의 아들이다. 벼슬이 상서좌승에 이르렀다」 하였다.
66이는 하늘이 절로 높은 것과 같을 뿐이오
王長史與劉眞長別後相見,王謂劉曰:「卿更長進。」荅曰:「此若天之自髙耳。」
왕장사가 유진장과 헤어진 뒤에 서로 보고, 왕장사가 유진장에게 말하였다. "경이 더욱 나아갔소."
대답하였다. "이는 하늘이 절로 높은 것과 같을 뿐이오."
협주 2
《王長史別傳》曰:「濛字仲祖,太原晉陽人。其先出自周室,經漢魏,世爲大族。祖父佐,北軍中候。父訥,葉令。濛神氣淸韶,年十餘歳,放邁不群。弱冠檢尚,風流雅正,外絶榮競,内寡私慾。辟司徒掾、中書郎,以后父贈光祿大夫。」
『왕장사별전』에 이르기를 「왕몽은 자가 중조요 태원 진양 사람이다. 그 선조는 주나라 왕실에서 나와 한나라와 위나라를 지나며 대대로 큰 겨레였다. 할아버지 왕좌는 북군중후요 아버지 왕눌은 섭령이다. 왕몽은 정신과 기운이 맑고 아름다워 열 남짓에 훌쩍 뛰어나 무리와 달랐다. 스무 살에 몸가짐을 삼가 풍류가 우아하고 바르며, 밖으로 영화를 다투기를 끊고 안으로 사사로운 바람이 적었다. 사도의 아전과 중서랑으로 불렸고 왕후의 아버지로 광록대부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語林》曰:「仲祖語眞長曰:『卿近大進。』劉曰『卿仰看邪?』王問何意?劉曰:『不爾,何由測天之髙也。』」
『어림』에 이르기를 「중조가 진장에게 『경이 요사이 크게 나아갔소』 하니, 유진장이 『경이 우러러보는 것이오』 하였다. 왕장사가 무슨 뜻이냐 물으니 유진장이 『그렇지 않으면 무엇으로 하늘의 높음을 재겠소』 하였다」 하였다.
67긴 소나무 아래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다
劉尹云:「人想王荊産佳,此想長松下當有淸風耳。」
유윤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왕형산을 좋다 여기는데, 이는 긴 소나무 아래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있으리라 여기는 것일 뿐이다."
협주 1
荊産,王微小字也。《王氏譜》曰:「微字幼仁,琅邪人。祖父乂,平北將軍。父澄,荊州刺史。微歴尚書郎、右軍司馬。」
형산은 왕미의 아이 적 이름이다.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미는 자가 유인이요 낭야 사람이다. 할아버지 왕예는 평북장군이요 아버지 왕징은 형주자사다. 왕미는 상서랑과 우군사마를 지냈다」 하였다.
68만일 개갈로가 와서 조회하면 이 말에 어둡지 않으리라
王仲祖聞蠻語不解,茫然曰:「若使介葛盧來朝,故當不昧此語。」
왕중조가 오랑캐 말을 듣고 알지 못하자 아득해하며 말하였다. "만일 개갈로가 와서 조회한다면 짐짓 이 말에 어둡지 않으리라."
협주 1
《春秋傳》曰:「介葛盧來朝魯,聞牛鳴曰:『是生三犧,皆用之矣。其音云。』問之而信。」杜預注曰:「介,東夷國。葛盧,其君名也。」
『춘추전』에 이르기를 「개갈로가 노나라에 와서 조회할 때 소 우는 소리를 듣고 『이 소가 새끼 셋을 낳았는데 다 제물로 썼구나. 그 소리가 그러하다』 하였다. 물으니 참말이었다」 하였다. 두예가 주하여 이르기를 「개는 동이의 나라다. 갈로는 그 임금의 이름이다」 하였다.
69길흉이 사람에게서 말미암는 줄 안다면 내 어찌 이를 지키지 못하겠소
劉眞長爲丹陽尹,許玄度出都就劉宿,床帷新麗,飲食豐甘。許曰:「若保全此處,殊勝東山。」劉曰:「卿若知吉凶由人,吾安得不保此!」王逸少在坐曰:「令巣許遇稷契,當無此言。」二人並有愧色。
유진장이 단양윤이 되었을 때 허현도가 서울에 나와 유진장의 집에 묵었다. 평상과 휘장이 새롭고 고우며 마시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달았다.
허현도가 말하였다. "만일 이곳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동산보다 훨씬 낫겠소."
유진장이 말하였다. "경이 만일 길흉이 사람에게서 말미암는 줄 안다면 내가 어찌 이를 지키지 못하겠소."
왕일소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였다. "소보와 허유로 하여금 직과 설을 만나게 하였다면 마땅히 이런 말이 없었을 것이오."
두 사람이 다 부끄러운 낯빛이 있었다.
협주 2
《續晉陽秋》曰:「許詢字玄度,髙陽人,魏中領軍允玄孫。總角秀惠,衆稱神童,長而風情簡素,司徒掾辟,不就,蚤卒。」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허순은 자가 현도요 고양 사람이니 위나라 중령군 허윤의 현손이다. 젖니 갈 때부터 빼어나고 슬기로워 뭇사람이 신동이라 일컬었고, 자라서 풍모와 정이 간결하고 수수하였다. 사도의 아전으로 불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일찍 죽었다」 하였다.
《春秋傳》曰:「吉凶無門,唯人所召。」
『춘추전』에 이르기를 「길함과 흉함은 문이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바다」 하였다.
70헛된 이야기가 일을 없애고 뜬 글이 요긴한 것을 막습니다
王右軍與謝太傅共登冶城。謝悠然遠想,有髙世之志。王謂謝曰:「夏禹勤王,手足胼胝;文王旰食,日不暇給。今四郊多壘,宜人人自效。而虚談廢務,浮文妨要,恐非當今所宜。」謝荅曰:「秦任商鞅,二世而亡,豈淸言致患邪?」
왕우군과 사태부가 함께 야성에 올랐다. 사태부가 아득히 멀리 생각하여 세상을 벗어난 뜻이 있었다.
왕우군이 사태부에게 말하였다. "하나라 우임금은 왕사에 부지런하여 손발에 못이 박였고, 문왕은 해가 기울어서야 밥을 먹어 날이 넉넉하지 않았소. 이제 사방 들에 보루가 많으니 마땅히 사람마다 스스로 힘써야 하오. 그런데 헛된 이야기가 일을 없애고 뜬 글이 요긴한 것을 막으니, 아마 오늘에 마땅한 바가 아닌 듯하오."
사태부가 대답하였다. "진나라가 상앙을 썼으나 두 대 만에 망하였으니, 어찌 맑은 이야기가 근심을 부른 것이겠소."
협주 5
《揚州記》曰:「冶城,呉時鼓鑄之所。呉平,猶不廢。王茂弘所治也。」
『양주기』에 이르기를 「야성은 오나라 때 풀무질하여 쇠 부어 만들던 곳이다. 오나라가 평정된 뒤에도 오히려 폐하지 않았다. 왕무홍이 다스리던 곳이다」 하였다.
《帝王世紀》曰:「禹治洪水,手足胼胝。世傳禹病偏枯,足不相過,今稱禹歩是也。」
『제왕세기』에 이르기를 「우임금이 큰물을 다스리느라 손발에 못이 박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우임금이 몸 한쪽이 마르는 병을 앓아 발이 서로 지나치지 못하였다 하니, 오늘날 우보라 일컫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尚書》曰:「文王自朝至於日昃,不遑暇食。」
『상서』에 이르기를 「문왕이 아침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이 없었다」 하였다.
《禮記》曰:「四郊多壘,卿大夫之辱也。」
『예기』에 이르기를 「사방 들에 보루가 많은 것은 경과 대부의 부끄러움이다」 하였다.
《戰國策》曰:「衞商鞅,諸庶孽子,名鞅,姓公孫氏。少好刑名學,爲秦孝公相,封於商。」
『전국책』에 이르기를 「위나라 상앙은 여러 서자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앙이요 성은 공손씨다. 젊어서 형명학을 좋아하였고 진나라 효공의 재상이 되어 상에 봉해졌다」 하였다.
71버들개지가 바람에 일어난다 함만 못합니다
謝太傅寒雪日内集,與兒女講論文義。俄而雪驟,公欣然曰:「白雪紛紛何所似?」兄子胡兒曰:「撒鹽空中差可擬。」兄女曰:「未若柳絮因風起。」公大笑樂。即公大兄無奕女,左將軍王凝之妻也。
사태부가 눈 오는 날 집안을 모아 아이들과 글 뜻을 강론하였다. 이윽고 눈이 몰아치니 사태부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 것이 무엇과 비슷하냐."
형의 아들 호아가 말하였다. "소금을 공중에 뿌린 것에 견줄 만합니다."
형의 딸이 말하였다. "버들개지가 바람에 일어난다 함만 못합니다."
사태부가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곧 사태부의 큰형 무혁의 딸이요 좌장군 왕응지의 아내다.
협주 2
胡兒,謝朗小字也。《續晉陽秋》曰:「朗字長度,安次兄據之長子。安蚤知之。文義艷發,名亞於玄,仕至東陽太守。」
호아는 사랑의 아이 적 이름이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사랑은 자가 장도요 사안의 다음 형 사거의 맏아들이다. 사안이 일찍 그를 알아보았다. 글 뜻이 곱게 피어나 이름이 사현에 버금갔고 벼슬이 동양태수에 이르렀다」 하였다.
《王氏譜》曰:「凝之字叔平,右將軍羲之第二子也。歴江州刺史、左將軍、會稽内史。」《晉安帝紀》曰:「凝之事五斗米道。孫恩之攻會稽,凝之謂民吏曰:『不須備防,吾已請大道,許遣鬼兵相助,賊自破矣。』既不設備,遂爲恩所害。」《婦人集》曰:「謝夫人名道蘊,有文才。所著詩、賦、誄、頌傳於世。」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응지는 자가 숙평이요 우장군 왕희지의 둘째 아들이다. 강주자사와 좌장군과 회계내사를 지냈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왕응지는 오두미도를 섬겼다. 손은이 회계를 칠 때 왕응지가 백성과 아전에게 이르기를 『막을 것이 없다. 내가 이미 큰 도에 빌어 귀신 군사를 보내 도우실 것을 허락받았으니 도적이 절로 무너지리라』 하였다. 이미 막을 채비를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손은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부인집』에 이르기를 「사부인은 이름이 도온이요 글재주가 있었다. 지은 시와 부와 뇌와 송이 세상에 전한다」 하였다.
72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소
王中郎令伏玄度、習鑿齒論靑楚人物。臨成,以示韓康伯。康伯都無言,王曰:「何故不言?」韓曰:「無可無不可。」
왕중랑이 복현도와 습착치에게 청주와 초 땅의 인물을 논하게 하였다. 다 이루어지자 한강백에게 보였다.
강백이 아무 말이 없으니 왕중랑이 말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말하지 않소."
한강백이 말하였다.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소."
협주 3
《王中郎傳》曰:「坦之字文度,太原晉陽人。祖東海太守承,淸淡平遠。父述,貞貴簡正。坦之器度淳深,孝友天至,譽輯朝野,標的當時。累遷侍中、中書令,領北中郎將,徐兗二州刺史。」《中興書》曰:「伏滔,字玄度,平昌安丘人。少有才學,舉秀才。大司馬桓温參軍,領大著作,掌國史,遊撃將軍,卒。習鑿齒,字彦威,襄陽人。少以文稱,善尺牘。桓温在荊州,辟爲從事。歴治中別駕,遷滎陽太守。」
『왕중랑전』에 이르기를 「왕탄지는 자가 문도요 태원 진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동해태수 왕승은 맑은 이야기가 고르고 멀었으며, 아버지 왕술은 곧고 귀하며 간결하고 바르다. 왕탄지는 그릇과 도량이 도탑고 깊으며 효성과 우애가 하늘에서 이르러, 기림이 조정과 들에 모이고 그때의 과녁이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중서령에 이르렀고 북중랑장을 겸하여 서주와 연주 두 주의 자사가 되었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복도는 자가 현도요 평창 안구 사람이다. 젊어서 재주와 학문이 있어 수재로 천거되었다. 대사마 환온의 참군이 되고 대저작을 겸하여 나라 역사를 맡았으며 유격장군을 지내다 죽었다. 습착치는 자가 언위요 양양 사람이다. 젊어서 글로 일컬어졌고 편지를 잘 썼다. 환온이 형주에 있을 때 불러 종사로 삼았다. 치중과 별다를 지내고 형양태수로 옮겼다」 하였다.
滔集載其論略曰:「滔以春秋時鮑叔、管仲、隰朋、召忽、輪扁、甯戚、麥丘人、逢丑父、晏嬰、涓子;戰國時公羊髙、孟軻、鄒衍、田單、荀卿、鄒奭、莒大夫、田子方、檀子、魯連、淳于髡、盻子、田光、顏歜、黔子、於陵仲子、王叔、即墨大夫;前漢時伏徴君、終軍、東郭先生、叔孫通、萬石君、東方朔、安期先生;後漢時大司徒伏三老、江革、逢萌、禽慶、承幼子、徐防、薛方、鄭康成、周孟玉、劉祖榮、臨孝存、侍其、元矩、孫賓碩、劉仲謀、劉公山、王儀伯、郎宗、禰正平、劉成國;魏時管幼安、邴根矩、華子魚、徐偉長、任昭先、伏髙陽。此皆靑士有才德者也。鑿齒以神農生於黔中,《邵南》詠其美化,春秋稱其多才,《漢廣》之風,不同《鷄鳴》之篇,子文、叔敖,羞與管仲比德。接輿之歌《鳳兮》,《漁父》之詠滄浪,漢陰丈人之折子貢,市南宜僚、屠羊説之不爲利回,魯仲連不及老萊夫妻,田光之於屈原,鄧禹、卓茂無敵於天下,管幼安不勝龐公,龐士元不推華子魚,何鄧二尚書,獨歩於魏朝,樂令無對於晉世。昔伏羲葬南郡,少昊葬長沙,舜葬零陵。比其人,則準的如此;論其土,則群聖之所葬;考其風,則詩人之所歌;尋其事,則未有赤眉、黃巾之賊。此何如靑州邪?」滔與相往反,鑿齒無以對也。
복도의 문집에 그 논의 줄거리가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내가 춘추 때의 포숙과 관중과 습붕과 소홀과 윤편과 영척과 맥구 사람과 봉축보와 안영과 연자, 전국 때의 공양고와 맹가와 추연과 전단과 순경과 추석과 거 땅 대부와 전자방과 단자와 노련과 순우곤과 혜자와 전광과 안촉과 검자와 어릉중자와 왕숙과 즉묵 대부, 전한 때의 복징군과 종군과 동곽선생과 숙손통과 만석군과 동방삭과 안기선생, 후한 때의 대사도 복삼로와 강혁과 봉맹과 금경과 승유자와 서방과 설방과 정강성과 주맹옥과 유조영과 임효존과 시기와 원구와 손빈석과 유중모와 유공산과 왕의백과 낭종과 예정평과 유성국, 위나라 때의 관유안과 병근구와 화자어와 서위장과 임소선과 복고양을 들었다. 이들은 다 청주 선비로 재주와 덕이 있는 이들이다」 하였다. 습착치는 신농이 검중에서 나셨고 「소남」이 그 아름다운 가르침을 읊었으며 『춘추』가 그 재주 많음을 일컬었고 「한광」의 풍이 「계명」의 시와 같지 않으며, 자문과 숙오가 관중과 덕을 견주기를 부끄러워하였고, 접여가 「봉이여」를 노래하고 「어부」가 창랑을 읊었으며, 한음의 노인이 자공을 꺾었고 시남의료와 양 잡는 열이 이로움에 마음을 돌리지 않았으며, 노중련이 노래자 부부에 미치지 못하고 전광이 굴원에 대하여 그러하며, 등우와 탁무가 천하에 맞설 이가 없고 관유안이 방덕공을 이기지 못하며 방사원이 화자어를 밀지 않았고, 하안과 등양 두 상서가 위나라 조정에서 홀로 걸었으며 악광이 진나라 세상에 짝이 없었다 하였다. 「옛날 복희는 남군에 묻히고 소호는 장사에 묻히고 순임금은 영릉에 묻혔다. 그 사람을 견주면 과녁이 이와 같고, 그 땅을 논하면 뭇 성인이 묻힌 데요, 그 풍속을 상고하면 시인이 노래한 바요, 그 일을 찾으면 아직 적미와 황건 같은 도적이 있은 적이 없다. 이것이 청주와 어떠한가」 하였다. 복도가 서로 주고받았으나 습착치가 대답할 말이 없었다.
馬融注《論語》曰:「唯義所在。」
마융이 『논어』에 주하여 이르기를 「오직 옳음이 있는 데를 따를 뿐이다」 하였다.
73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면 문득 현도가 생각난다
劉尹云:「淸風朗月,輒思玄度。」
유윤이 말하였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면 문득 현도가 생각난다."
협주 1
《晉中興士人書》曰:「許珣能淸言,於時士人皆欽慕仰愛之。」
『진중흥사인서』에 이르기를 「허순은 맑은 이야기를 잘하여 그때 선비들이 다 우러러 그리워하고 아꼈다」 하였다.
74진나라와 한나라의 임금이었다면 반드시 옷을 걷고 발을 적셨으리라
荀中郎在京口,登北固望海云:「雖未覩三山,便自使人有凌雲意。若秦漢之君,必當褰裳濡足。」
순중랑이 경구에 있을 때 북고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비록 삼신산은 보지 못하나 곧 절로 사람에게 구름을 넘는 뜻을 갖게 한다. 만일 진나라와 한나라의 임금이었다면 반드시 옷을 걷고 발을 적셨으리라."
협주 3
《晉陽秋》曰:「荀羡字令則,潁川人,光祿大夫崧之子也。淸和有識裁,少以主婿爲駙馬都尉。是時殷浩參謀百揆,引羡爲援,頻蒞義興、呉郡,超授北中郎將、徐州刺史,以蕃屛焉。」《中興書》曰:「羡年二十八,出爲徐兗二州。中興方伯之少,未有若羡者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순선은 자가 영칙이요 영천 사람이니 광록대부 순숭의 아들이다. 맑고 화하며 식견과 마름이 있었고, 젊어서 공주의 사위로 부마도위가 되었다. 이때 은호가 온갖 벼슬을 헤아려 꾀하다가 순선을 끌어 도움으로 삼으니, 잇달아 의흥과 오군을 다스리다가 뛰어 북중랑장과 서주자사를 받아 울타리로 삼았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순선이 나이 스물여덟에 서주와 연주 두 주로 나갔다. 중흥 이래 방백의 젊음이 순선 같은 이가 있지 않았다」 하였다.
《南徐州記》曰:「城西北有別嶺入江,三面臨水,髙數十丈,號曰北固。」
『남서주기』에 이르기를 「성 서북에 따로 산줄기가 강으로 들어가 세 면이 물에 닿고 높이가 수십 길이니 북고라 부른다」 하였다.
《史記·封禪書》曰:「蓬萊、方丈、瀛洲此三山,世傳在海中,去人不遠。嘗有至者,言諸仙人不死藥在焉。黃金白銀爲宮闕,草物禽獸盡白,望之如雲。及至,反居水下。欲到,即風引船而去,終莫能至。秦始皇登會稽,並海上,冀遇三神山之奇藥。漢武帝既封泰山,無風雨變至,方士更言蓬萊諸藥可得,於是上欣然東至海,冀獲蓬萊者。」
『사기·봉선서』에 이르기를 「봉래와 방장과 영주 이 세 산은 세상에 바다 가운데 있어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고 전한다. 일찍이 이른 이가 있어 말하기를 여러 신선의 죽지 않는 약이 거기 있다 하였다.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삼고 풀과 짐승이 다 희어 바라보면 구름 같다. 이르러서는 도리어 물 아래 있고, 이르려 하면 곧 바람이 배를 끌어 가 마침내 이를 수 없다. 진시황이 회계에 올라 바다를 끼고 세 신산의 기이한 약을 만나기를 바랐다. 한나라 무제가 태산에 봉선한 뒤 바람과 비의 바뀜이 이르지 않으니, 방사가 다시 봉래의 여러 약을 얻을 수 있다 하매 이에 임금이 기뻐하며 동쪽 바다에 이르러 봉래를 얻기를 바랐다」 하였다.
75만일 치초가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은하수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謝公云:「賢聖去人,其間亦邇。」子姪未之許。公嘆曰:「若郗超聞此語,必不至河漢。」
사공이 말하였다. "어진 이와 성인이 사람과 떨어진 사이가 또한 가깝다."
아들과 조카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사공이 탄식하였다. "만일 치초가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은하수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협주 1
《超別傳》曰:「超精於理義,沙門支道林以爲一時之俊。」《莊子》曰:「肩吾問於連叔曰:『吾聞言於接輿,大而無當,往而不反。怪怖其言,猶河漢而無極也。』」
『초별전』에 이르기를 「치초는 결과 옳음에 정통하여 사문 지도림이 한때의 뛰어난 이라 여겼다」 하였다. 『장자』에 이르기를 「견오가 연숙에게 묻기를 『내가 접여에게 말을 들었는데 크되 마땅함이 없고 가되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말이 괴이하고 두려워 은하수처럼 끝이 없었다』 하였다」 하였다.
76하늘을 뚫을 자태가 있는데 어찌 남의 눈요기가 되려 하겠는가
支公好鶴,住剡東𡵙山,有人遺其雙鶴;少時,翅長欲飛。支意惜之,乃鎩其翮。鶴軒翥不能復起,乃舒翼反頭視之,如有懊喪意。林曰:「既有凌霄之姿,何肯爲人作耳目近玩?」養令翮成,置使飛去。
지공이 학을 좋아하여 섬현 동쪽 앙산에 살았는데, 어떤 이가 학 한 쌍을 보내 주었다. 얼마 뒤 날개가 자라 날려 하니 지공이 마음에 아까워 이에 그 깃촉을 잘랐다.
학이 날개를 치켜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이에 날개를 펴고 머리를 돌려 이를 보니 언짢고 서운한 뜻이 있는 듯하였다.
임공이 말하였다. "이미 하늘을 뚫을 자태가 있는데 어찌 남의 귀와 눈의 가까운 노리개가 되려 하겠는가."
길러 깃촉이 이루어지자 놓아 날아가게 하였다.
협주 1
《支公書》曰:「山去會稽二百里。」
『지공서』에 이르기를 「산이 회계에서 이백 리 떨어져 있다」 하였다.
77본디 깊이 고여 머물러 받아들이되 흘러 나가지 않겠구나
謝中郎經曲阿後湖,問左右:「此是何水?」荅曰:「曲阿湖。」謝曰:「故當淵注渟著,納而不流。」
사중랑이 곡아 뒷호수를 지나며 곁의 사람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물인가."
대답하였다. "곡아호입니다."
사중랑이 말하였다. "본디 마땅히 깊이 고여 머물러 받아들이되 흘러 나가지 않겠구나."
협주 2
《中興書》曰:「謝萬字萬石,太傅安弟也。才氣髙俊,蚤知名,歴吏部郎、西中郎將、豫州刺史、散騎常侍。」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만은 자가 만석이요 태부 사안의 아우다. 재주와 기운이 높고 뛰어나 일찍 이름이 알려졌고 이부랑과 서중랑장과 예주자사와 산기상시를 지냈다」 하였다.
《太康地記》曰:「曲阿本名雲陽,秦始皇以有王氣,鑿北阬山以敗其勢,截其直道,使其阿曲,故曰曲阿也。呉還爲雲陽,今復名曲阿。」
『태강지기』에 이르기를 「곡아는 본디 이름이 운양인데, 진시황이 임금 기운이 있다 하여 북쪽 갱산을 뚫어 그 기세를 꺾고 그 곧은 길을 끊어 그 언덕을 굽게 하였으므로 곡아라 한다. 오나라가 도로 운양으로 하였는데 이제 다시 곡아라 이름 한다」 하였다.
78바라는 이가 많지 않으므로 주는 이가 적음을 잊게 한 것입니다
晉武帝毎餉山濤恒少。謝太傅以問子弟,車騎荅曰:「當由欲者不多,而使與者忘少。」
진나라 무제가 산도에게 내리는 것이 늘 적었다. 사태부가 이를 자제에게 물으니 거기장군이 대답하였다. "바라는 이가 많지 않았으므로 주는 이로 하여금 적음을 잊게 한 것입니다."
협주 3
安也
사안이다.
玄也
사현이다.
謝車騎家傳曰:「玄字幼度,鎭西奕第三子也。神理明俊,善微言。叔父太傅嘗與子姪燕集,問:『武帝任山公以三事,任以官人。至於賜予,不過斤合。當有旨不?』玄答:『有辭致也。』」
「사거기가전」에 이르기를 「사현은 자가 유도요 진서장군 사혁의 셋째 아들이다. 정신과 결이 밝고 뛰어나며 은미한 말을 잘하였다. 작은아버지 태부가 일찍이 아들과 조카들과 모여 잔치하다가 묻기를 『무제가 산공에게 세 가지 일을 맡겨 사람 뽑는 일을 맡겼다. 그런데 내려 주는 데 이르러서는 근이나 홉에 지나지 않았으니 뜻이 있는가』 하니, 사현이 『말맛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79강백이 오면 강을 건너 배를 태우겠소
謝胡兒語庾道季:「諸人莫當就卿談,可堅城壘。」庾曰:「若文度來,我以偏師待之;康伯來,濟河焚舟。」
사호아가 유도계에게 말하였다. "여러 사람이 그대와 이야기하러 오지 못할 터이니 성벽을 굳게 하실 만하오."
유도계가 말하였다. "만일 문도가 오면 나는 곁군사로 그를 맞겠고, 강백이 오면 강을 건너 배를 태우겠소."
협주 2
道季,庾龢小字。徐廣《晉紀》曰:「龢字道季,太尉亮子也。風情率悟,以文談致稱於時。歴仕至丹陽尹,兼中領軍。」
도계는 유화의 아이 적 이름이다.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유화는 자가 도계요 태위 유량의 아들이다. 풍모와 정이 시원스레 깨쳐 글과 이야기로 그때에 일컬어졌다. 벼슬하여 단양윤에 이르고 중령군을 겸하였다」 하였다.
《春秋傳》曰:「秦伯伐晉,濟河焚舟。」杜預曰:「示必死。」
『춘추전』에 이르기를 「진나라 임금이 진나라를 치는데 강을 건너 배를 태웠다」 하였다. 두예가 이르기를 「반드시 죽을 것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
80궁한 원숭이가 숲으로 달아나는데 어느 겨를에 나무를 가리겠습니까
李弘度常嘆不被遇。殷揚州知其家貧,問:「君能屈志百里不?」李荅曰:「北門之嘆,久已上聞;窮猿奔林,豈暇擇木?」遂授剡縣。
이홍도가 늘 알아줌을 받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은양주가 그 집이 가난함을 알고 물었다. "그대는 뜻을 굽혀 백 리 고을을 맡을 수 있겠소."
이홍도가 대답하였다. "북문의 탄식은 이미 오래전에 위에 들렸습니다. 궁한 원숭이가 숲으로 달아나는데 어느 겨를에 나무를 가리겠습니까."
마침내 섬현을 주었다.
협주 3
《中興書》曰:「李充字弘度,江夏郢人也。祖康、父矩,皆有美名。充初辟丞相掾、記室參軍,以貧,求剡縣,遷大著作、中書郎。」
『중흥서』에 이르기를 「이충은 자가 홍도요 강하 영 사람이다. 할아버지 이강과 아버지 이구가 다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다. 이충이 처음에 승상의 아전과 기실참군으로 불렸는데, 가난하여 섬현을 구하였고 대저작과 중서랑으로 옮겼다」 하였다.
殷浩別見
은호는 따로 보인다.
《衞詩》:「北門,刺仕不得志也。」
『위시』에 「북문은 벼슬하여 뜻을 얻지 못함을 나무란 것이다」 하였다.
81사람의 마음을 열어 씻을 뿐 아니라 해와 달도 맑고 밝아진다
王司州至呉興印渚中看,嘆曰:「非唯使人情開滌,亦覺日月淸朗。」
왕사주가 오흥 인저에 이르러 보고 탄식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열어 씻을 뿐 아니라 또한 해와 달이 맑고 밝아짐을 느낀다."
협주 1
《王胡之別傳》曰:「胡之字脩齡,琅邪臨沂人,王廙之子也。歴呉興太守,徴侍中、丹陽尹、祕書監,並不就。拜使持節,都督司州諸軍事、西中郎將、司州刺史。」《呉興記》曰:「於潛縣東七十里,有印渚,渚傍有白石山,峻壁四十丈。印渚蓋衆溪之下流也。印渚已上至縣,悉石瀨惡道,不可行船;印渚已下,水道無險,故行旅集焉。」
『왕호지별전』에 이르기를 「왕호지는 자가 수령이요 낭야 임기 사람이니 왕이의 아들이다. 오흥태수를 지냈고 시중과 단양윤과 비서감으로 불렸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사지절과 사주의 여러 군사를 도독하는 서중랑장과 사주자사에 임명되었다」 하였다. 『오흥기』에 이르기를 「어잠현 동쪽 칠십 리에 인저가 있고 물가 곁에 백석산이 있어 험한 벼랑이 사십 길이다. 인저는 대개 여러 시내가 흘러내리는 곳이다. 인저 위쪽부터 현까지는 다 돌여울에 길이 험하여 배를 다닐 수 없고, 인저 아래부터는 물길에 험함이 없으므로 길손이 모인다」 하였다.
82아령이 본디 재주와 그릇이 좀 있구나
謝萬作豫州都督,新拜,當西之都邑,相送累日,謝疲頓。於是髙侍中往,徑就謝坐,因問:「卿今仗節方州,當疆理西蕃,何以爲政?」謝粗道其意。髙便爲謝道形勢,作數百語。謝遂起坐。髙去後,謝追曰:「阿酃故麤有才具。」謝因此得終坐。
사만이 예주도독이 되어 새로 임명받고 서쪽 도읍으로 가게 되니, 여러 날 배웅하여 사만이 지치고 고단하였다.
이에 고시중이 가서 곧장 사만의 자리로 나아가 물었다. "경이 이제 절월을 짚고 한 주를 맡아 마땅히 서쪽 울타리를 다스려야 하는데 무엇으로 정사를 하시겠소."
사만이 거칠게 그 뜻을 말하였다. 고시중이 곧 사만을 위해 형세를 말하는데 몇백 마디를 하니 사만이 마침내 일어나 앉았다.
고시중이 간 뒤 사만이 뒤이어 말하였다. "아령이 본디 재주와 그릇이 좀 있구나."
사만이 이로 말미암아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협주 2
《中興書》曰:「髙崧字茂琰,廣陵人。父悝,光祿大夫。崧少好學,善史傳,累遷吏部郎、侍中,以公累免官。」
『중흥서』에 이르기를 「고숭은 자가 무염이요 광릉 사람이다. 아버지 고회는 광록대부다. 고숭은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역사에 밝았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랑과 시중에 이르렀다가 공의 허물에 걸려 벼슬을 잃었다」 하였다.
阿酃,崧小字也。
아령은 고숭의 아이 적 이름이다.
83강산이 아득히 트여 완연히 만 리의 기세가 있다
袁彦伯爲謝安南司馬,都下諸人送至瀨鄕。將別,既自悽惘,嘆曰:「江山遼落,居然有萬里之勢。」
원언백이 사안남의 사마가 되었을 때 서울의 여러 사람이 뇌향까지 배웅하였다. 헤어지려 하니 이미 스스로 슬프고 서운하여 탄식하였다. "강산이 아득히 트여 완연히 만 리의 기세가 있구나."
협주 2
安南,謝奉,別見。
안남은 사봉이니 따로 보인다.
《續晉陽秋》曰:「袁宏字彦伯,陳郡人,魏郎中令煥六世孫也。祖猷,侍中。父勗,臨汝令。宏起家建威參軍,安南司馬記室。太傅謝安賞宏機捷辯速,自吏部郎出爲東陽郡,乃祖之於冶亭,時賢皆集。安欲卒迫試之,執手將別,顧左右取一扇而贈之。宏應聲答曰:『輒當奉揚仁風,慰彼黎庶。』合坐歎其要捷。性直亮,故位不顯也。在郡卒。」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원굉은 자가 언백이요 진군 사람이니 위나라 낭중령 원환의 육 대 손이다. 할아버지 원유는 시중이요 아버지 원욱은 임여령이다. 원굉이 건위참군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안남사마기실이 되었다. 태부 사안이 원굉의 재빠르고 말이 빠름을 아꼈는데, 이부랑에서 동양군으로 나가게 되자 이에 야정에서 배웅하니 그때 어진 이들이 다 모였다. 사안이 갑작스레 그를 시험해 보고자 손을 잡고 헤어지려 하면서 곁을 돌아보아 부채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원굉이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기를 『곧 어진 바람을 받들어 드날려 저 백성을 위로하겠습니다』 하니, 온 자리가 그 요긴하고 빠름을 탄식하였다. 성품이 곧고 밝았으므로 자리가 드러나지 않았다. 고을에서 죽었다」 하였다.
84단풍나무와 버드나무는 아름드리라도 어디에 쓰겠소
孫綽賦《遂初》,築室畎川,自言見止足之分。齋前種一株松,恒自手壅治之。髙世遠時亦鄰居,語孫曰:「松樹子非不楚楚可憐,但永無棟梁用耳!」孫曰:「楓柳雖合抱,亦何所施?」
손작이 「수초부」를 짓고 견천에 집을 지어 스스로 그치고 넉넉할 몫을 보았다 하였다. 서재 앞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늘 몸소 북돋우고 손질하였다.
고세원이 그때 또한 이웃하여 살았는데 손작에게 말하였다. "솔가지가 곱고 어여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길이 마룻대와 들보로 쓸 데가 없을 뿐이오."
손작이 말하였다. "단풍나무와 버드나무는 비록 아름드리라도 또한 어디에 쓰겠소."
협주 2
《中興書》曰:「綽字興公,太原中都人。少以文稱,歴太學博士、大著作、散騎常侍。」《遂初賦》敘曰:「余少慕老莊之道,仰其風流久矣。卻感於陵賢妻之言,悵然悟之。乃經始東山,建五畝之宅,帶長阜,倚茂林,孰與坐華幕撃鐘鼓者同年而語其樂哉!」
『중흥서』에 이르기를 「손작은 자가 흥공이요 태원 중도 사람이다. 젊어서 글로 일컬어졌고 태학박사와 대저작과 산기상시를 지냈다」 하였다. 「수초부」 서에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 노자와 장자의 도를 그리워하여 그 풍류를 우러른 지 오래다. 도리어 어릉의 어진 아내의 말에 느껴 서운히 이를 깨달았다. 이에 동산을 처음 다스려 다섯 이랑의 집을 세우고 긴 언덕을 두르고 우거진 숲에 기대니, 화려한 장막에 앉아 종과 북을 치는 이와 어찌 한 해를 두고 그 즐거움을 말하겠는가」 하였다.
世遠,髙柔字也。別見。
세원은 고유의 자다. 따로 보인다.
85멀리 층층한 성을 바라보니 붉은 다락이 노을 같다
桓征西治江陵城甚麗,會賓僚出江津望之,云:「若能目此城者有賞。」顧長康時爲客,在坐,目曰:「遙望層城,丹樓如霞。」桓即賞以二婢。
환정서가 강릉성을 다스린 것이 몹시 아름다웠다. 손과 아전을 모아 강나루에 나가 바라보며 말하였다. "만일 이 성을 잘 그려 낼 수 있는 이가 있으면 상을 주겠소."
고장강이 그때 손으로 자리에 있다가 그려 말하였다. "멀리 층층한 성을 바라보니 붉은 다락이 노을 같다."
환정서가 곧 계집종 둘로 상 주었다.
협주 1
盛弘之《荊州記》曰:「荊州城臨漢江,臨江王所治。王被徴,出城北門而車軸折,父老泣曰:『吾王去不還矣!』從此不開北門。」
성홍지의 『형주기』에 이르기를 「형주성은 한수에 닿아 있으니 임강왕이 다스리던 곳이다. 왕이 부름을 받아 성 북문을 나서다가 수레굴대가 부러지니 노인들이 울며 『우리 왕이 가서 돌아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이로부터 북문을 열지 않았다」 하였다.
86동작대 위의 기녀만 못하다
王子敬語王孝伯曰:「羊叔子自復佳耳,然亦何與人事?」故不如銅雀臺上妓。」
왕자경이 왕효백에게 말하였다. "양숙자는 절로 또한 좋을 뿐이오. 그러나 또한 사람 일에 무슨 상관이오. 그러므로 동작대 위의 기녀만 못하오."
협주 2
《晉諸公贊》曰:「羊祜字叔子,太山平陽人也。世長吏二千石,至祜九世,以淸德稱。爲兒時,遊汶濱,有行父止而觀焉,歎息曰:『處士大好相,善爲之,未六十,當有重功於天下。即富貴,無相忘。』遂去,莫知所在。累遷都督荊州諸軍事。自在南夏,呉人説服,稱曰羊公,莫敢名者。南州人聞公喪,號哭罷市。」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양호는 자가 숙자요 태산 평양 사람이다. 대대로 이천석 벼슬을 지내 양호에 이르러 아홉 대인데 맑은 덕으로 일컬어졌다. 아이 때 문수 가에 노니는데 지나가던 노인이 멈추어 보고 탄식하기를 『처사가 크게 좋은 상이니 잘 하시게. 예순이 되기 전에 마땅히 천하에 무거운 공이 있으리라. 곧 부귀해지거든 서로 잊지 마시게』 하고 마침내 떠나 있는 데를 알지 못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주의 여러 군사를 도독하기에 이르렀다. 남녘에 있으면서 오나라 사람이 기뻐 따라 양공이라 일컫고 감히 이름을 부르는 이가 없었다. 남녘 사람들이 공의 상을 듣고 부르짖어 울며 저자를 파하였다」 하였다.
魏武遺令曰:「以吾妾與妓人皆著銅雀臺上,施六尺床繐帷,月朝十五日,輒使向帳作伎。」
위나라 무제의 유언에 이르기를 「내 첩과 기녀를 다 동작대 위에 두고 여섯 자 평상과 얇은 휘장을 베풀어,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이면 문득 휘장을 향해 재주를 하게 하라」 하였다.
87어찌 그리 평평하게 뻗었는가
林公見東陽長山曰:「何其坦迤!」
임공이 동양의 장산을 보고 말하였다. "어찌 그리 평평하게 뻗었는가."
협주 1
《會稽土地志》曰:「山靡迤而長,縣因山得名。」
『회계토지지』에 이르기를 「산이 비스듬히 뻗어 길므로 현이 산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얻었다」 하였다.
88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나고 만 골짜기가 다투어 흐른다
顧長康從會稽還,人問山川之美。顧云:「千巖競秀,萬壑爭流,草木蒙籠其上,若雲興霞蔚。」
고장강이 회계에서 돌아오니 사람들이 산과 물의 아름다움을 물었다.
고장강이 말하였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나고 만 골짜기가 다투어 흐르며, 풀과 나무가 그 위에 우거지니 구름이 일고 노을이 성한 듯합니다."
협주 1
丘淵之《文章録》曰:「顧愷之字長康,晉陵人。父説,尚書左丞。愷之,義熙初爲散騎常侍。」
구연지의 『문장록』에 이르기를 「고개지는 자가 장강이요 진릉 사람이다. 아버지 고열은 상서좌승이다. 고개지는 의희 처음에 산기상시가 되었다」 하였다.
89슬픔이 이르면 곡하는 것이지 어찌 정한 때가 있으랴
簡文崩,孝武年十餘歳立,至暝不臨。左右啓「依常應臨」。帝曰:「哀至則哭,何常之有!」
간문제가 돌아가고 효무제가 나이 열 남짓에 섰는데, 저물도록 곡하지 않았다. 곁의 사람이 "늘 하던 대로 곡하셔야 합니다"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슬픔이 이르면 곡하는 것이지 어찌 정한 때가 있으랴."
협주 1
宋明帝《文章志》曰:「孝武皇帝諱昌明,簡文第三子也。初,簡文觀讖書曰:『晉氏阼盡昌明。』及帝誕育,東方始明,故因生時以爲諱,而相與忘告。簡文問之,乃以諱對。簡文流涕曰:『不意我家昌明便出。』帝聰惠,推賢任才,年三十五崩。」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효무황제는 휘가 창명이요 간문제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에 간문제가 참서를 보니 이르기를 『진나라의 자리는 창명에서 다한다』 하였다. 임금이 태어날 때 동녘이 비로소 밝았으므로 난 때로 휘를 삼고 서로 알리기를 잊었다. 간문제가 물으니 이에 휘로 대답하였다. 간문제가 눈물을 흘리며 『뜻하지 않게 우리 집 창명이 곧 나왔구나』 하였다. 임금은 총명하고 슬기로워 어진 이를 밀고 재주 있는 이를 맡겼는데 서른다섯에 돌아갔다」 하였다.
90밝은 거울이 자주 비추기에 지치고 맑은 물이 은혜로운 바람을 꺼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孝武將講《孝經》,謝公兄弟與諸人私庭講習,車武子難苦問謝,謂袁羊曰:「不問則德音有遺;多問則重勞二謝。」袁曰:「必無此嫌。」車曰:「何以知爾?」袁曰:「何嘗見明鏡疲於屢照,淸流憚於惠風?」
효무제가 『효경』을 강하려 하니 사공 형제와 여러 사람이 사사로운 뜰에서 미리 익혔다.
거무자가 사공에게 어렵게 묻기를 괴로워하며 원양에게 말하였다. "묻지 않으면 덕스러운 말씀을 빠뜨리고 많이 물으면 두 사공을 거듭 수고롭게 하오."
원양이 말하였다. "반드시 이런 꺼림은 없을 것이오."
거무자가 말하였다. "무엇으로 그리 아시오."
원양이 말하였다. "밝은 거울이 자주 비추기에 지치고 맑은 물이 은혜로운 바람을 꺼리는 것을 어찌 본 적이 있소."
협주 3
《續晉陽秋》曰:「寧康三年九月九日,帝講《孝經》。僕射謝安侍坐,吏部尚書陸納兼侍中卞耽讀,黃門侍郎謝石、吏部袁宏兼執經,中書郎車胤、丹陽尹王混摘句。」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영강 삼 년 구월 구일에 임금이 『효경』을 강하였다. 복야 사안이 모시고 앉고, 이부상서 육납과 겸시중 변탐이 읽고, 황문시랑 사석과 이부 원굉이 겸하여 경을 잡고, 중서랑 거윤과 단양윤 왕혼이 구절을 뽑았다」 하였다.
車胤別見。
거윤은 따로 보인다.
袁羊,喬小字也。《袁氏家傳》曰:「喬字彦升,陳郡人。父瑰,光祿大夫。喬歴尚書郎、江夏相。從桓温平蜀,封湘西伯、益州刺史。」
원양은 원교의 아이 적 이름이다. 『원씨가전』에 이르기를 「원교는 자가 언승이요 진군 사람이다. 아버지 원괴는 광록대부다. 원교는 상서랑과 강하상을 지냈다. 환온을 좇아 촉을 평정하고 상서백과 익주자사에 봉해졌다」 하였다.
91산음 길 위를 가면 응대하기에 겨를이 없다
王子敬云:「從山陰道上行,山川自相映發,使人應接不暇;若秋冬之際,尤難爲壞。」
왕자경이 말하였다. "산음 길 위를 가면 산과 물이 절로 서로 비추고 어울려 사람으로 하여금 응대하기에 겨를이 없게 한다. 만일 가을과 겨울 사이라면 더욱 마음에 두기 어렵다."
협주 2
《會稽土地志》曰:「邑在山陰,故以名焉。」
『회계토지지』에 이르기를 「고을이 산음에 있으므로 이로써 이름 하였다」 하였다.
《會稽郡記》曰:「會稽境特多名山水,峰崿隆峻,吐納雲霧。松栝楓柏,擢榦竦條,潭壑鏡徹,淸流瀉注。王子敬見之曰:『山水之美,使人應接不暇。』」
『회계군기』에 이르기를 「회계 땅에는 이름난 산과 물이 유난히 많아 봉우리와 벼랑이 높고 험하여 구름과 안개를 뱉고 삼킨다. 소나무와 노송나무와 단풍나무와 잣나무가 줄기를 뽑고 가지를 세우며, 못과 골짜기가 거울처럼 맑고 맑은 물이 쏟아져 흐른다. 왕자경이 이를 보고 『산과 물의 아름다움이 사람으로 하여금 응대하기에 겨를이 없게 한다』 하였다」 하였다.
92지초와 난초와 옥나무가 뜰에 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謝太傅問諸子姪:「子弟亦何預人事,而正欲使其佳?」諸人莫有言者,車騎荅曰:「譬如芝蘭玉樹,欲使其生於階庭耳。」
사태부가 여러 아들과 조카에게 물었다. "자제가 또한 무슨 사람 일에 상관이기에 굳이 그들을 좋게 하려 하는가."
여러 사람이 말하는 이가 없었는데 거기장군이 대답하였다. "비유하자면 지초와 난초와 옥나무 같아서 그것이 섬돌과 뜰에 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협주 1
謝玄
사현이다.
93들과 고을은 바야흐로 흩날리는데 숲과 봉우리는 이미 새하얗더이다
道壹道人好整飾音辭,從都下還東山,經呉中。已而會雪下,未甚寒。諸道人問在道所經。壹公曰:「風霜固所不論,乃先集其慘澹。郊邑正自飄瞥,林岫便已皓然。」
도일 도인이 말을 가다듬어 꾸미기를 좋아하였다. 서울에서 동산으로 돌아오며 오 땅 가운데를 지났다. 이윽고 마침 눈이 내렸는데 그리 춥지는 않았다.
여러 도인이 길에서 지나온 바를 물으니 도일공이 말하였다. "바람과 서리는 본디 말할 것이 없고, 이에 먼저 그 참담함이 모였습니다. 들과 고을은 바야흐로 흩날리는데 숲과 봉우리는 이미 새하얗더이다."
협주 1
王珣《遊嚴陵瀨詩》敘曰:「道壹姓竺氏,名德。」沙門題目曰:「道壹文鋒富贍,孫綽爲之贊曰:『馳騁遊説,言固不虚。唯茲壹公,綽然有餘。譬若春圃,載芬載敷。條柯猗蔚,枝榦扶疎。』」
왕순의 「유엄릉뢰시」 서에 이르기를 「도일은 성이 축씨요 이름이 덕이다」 하였다. 사문의 제목에 이르기를 「도일은 글의 칼끝이 넉넉하다. 손작이 이를 기려 이르기를 『달려 나가 말로 달래니 말이 참으로 헛되지 않다. 오직 이 도일공만이 넉넉하고 남음이 있다. 비유하자면 봄 남새밭 같아 향기를 싣고 퍼뜨린다. 가지와 줄기가 우거지고 곁가지가 뻗어 나간다』 하였다」 하였다.
94뽕나무 열매가 달고 향기로우며 올빼미가 소리를 고칩니다
張天錫爲涼州刺史,稱制西隅。既爲苻堅所禽,用爲侍中。後於壽陽倶敗,至都,爲孝武所器;毎入,言論無不竟日。頗有嫉之者,於坐問張:「北方何物可貴?」張曰:「桑椹甘香,鴟鴞革響;淳酪養性,人無嫉心。」
장천석이 양주자사가 되어 서쪽 모퉁이에서 임금을 일컬었다. 부견에게 사로잡히자 시중으로 썼다. 뒤에 수양에서 함께 지고 서울에 이르니 효무제에게 그릇으로 여겨져, 들어올 때마다 이야기가 온종일 끝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못 그를 시새우는 이가 있어 자리에서 장천석에게 물었다. "북방에는 무슨 물건이 귀할 만하오."
장천석이 말하였다. "뽕나무 열매가 달고 향기로우며 올빼미가 소리를 고치고, 진한 젖이 성품을 기르며 사람에게 시새우는 마음이 없소."
협주 3
張資《涼州記》曰:「天錫字純嘏,安定烏氏人,張耳後也。曾祖軌,永嘉中爲涼州刺史,値京師大亂,遂據涼土。天錫簒位,自立爲涼州牧。苻堅使將姚萇攻沒涼州,天錫歸長安,堅以爲侍中、比部尚書、歸義侯。從堅至壽陽,堅軍敗,遂南歸。拜散騎常侍、西平公。」《中興書》曰:「天錫後以貧拜廬江太守。薨,贈侍中。」
장자의 『양주기』에 이르기를 「장천석은 자가 순하요 안정 오씨 사람이니 장이의 뒤다. 증조부 장궤가 영가 연간에 양주자사가 되었는데 서울이 크게 어지러운 때를 만나 마침내 양주 땅을 차지하였다. 장천석이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양주목이 되었다. 부견이 장수 요장을 시켜 양주를 쳐서 함락하니 장천석이 장안으로 돌아갔고, 부견이 시중과 비부상서와 귀의후로 삼았다. 부견을 따라 수양에 이르렀다가 부견의 군사가 지자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왔다. 산기상시와 서평공에 임명되었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장천석이 뒤에 가난하여 여강태수에 임명되었다. 죽자 시중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詩·魯頌》曰:「翩彼飛鴞,集於泮林。食我桑椹,懷我好音。」
『시·노송』에 이르기를 「펄펄 나는 저 올빼미가 반궁 숲에 모여 우리 뽕나무 열매를 먹고 우리에게 좋은 소리를 품어 준다」 하였다.
《西河舊事》曰:「河西牛羊肥,酪過精好,但寫酪置革上,都不解散也。」
『서하구사』에 이르기를 「하서에는 소와 양이 살져 젖이 지나치게 좋아, 다만 젖을 부어 가죽 위에 두어도 도무지 흩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95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르면 물고기와 새가 무엇을 기대랴
顧長康拜桓宣武墓,作詩云:「山崩溟海竭,魚鳥將何依。」人問之曰:「卿憑重桓乃爾,哭之狀其可見乎?」顧曰:「鼻如廣莫長風,眼如懸河決溜。」或曰:「聲如震雷破山,涙如傾河注海。」
고장강이 환선무의 무덤에 절하고 시를 지었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르니 물고기와 새가 장차 무엇을 기대랴."
사람들이 물었다. "경이 환공을 이토록 무겁게 기댔으니 곡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소."
고장강이 말하였다. "코는 넓고 아득한 큰바람 같고 눈은 매달린 강이 터져 흐르는 듯하였소."
어떤 이는 말하였다. "소리는 우레가 진동하여 산을 깨뜨리는 듯하고 눈물은 강을 기울여 바다에 쏟는 듯하였소."
협주 2
宋明帝《文章志》曰:「愷之爲桓温參軍,甚被親暱。」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고개지가 환온의 참군이 되어 몹시 가까이 사랑받았다」 하였다.
《春秋考異郵》曰:「距不周風四十五日,廣莫風至。廣莫者,精大備也。蓋北風也,一日寒風。」
『춘추고이우』에 이르기를 「부주풍에서 마흔닷새 떨어져 광막풍이 이른다. 광막이란 고움이 크게 갖추어진 것이다. 대개 북풍이니 다른 이름은 한풍이다」 하였다.
96차라리 난초가 꺾이고 옥이 부러질지언정 쑥과 쑥대로 우거지지 않겠다
毛伯成既負其才氣,常稱:「寧爲蘭摧玉折,不作蕭敷艾榮。」
모백성이 이미 제 재주와 기운을 자부하여 늘 일컬었다. "차라리 난초가 꺾이고 옥이 부러질지언정 쑥과 쑥대로 우거지지는 않겠다."
협주 1
《征西寮屬名》曰:「毛玄字伯成,潁川人。仕至征西行軍參軍。」
『정서요속명』에 이르기를 「모현은 자가 백성이요 영천 사람이다. 벼슬이 정서행군참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97세존께서 잠잠하셨으니 곧 허락하신 것입니다
范甯作豫章,八日請佛有板。衆僧疑,或欲作荅。有小沙彌在坐末曰:「世尊默然,則爲許可。」衆從其義。
범녕이 예장태수가 되어 사월 초파일에 부처께 청하는 글판을 올렸다. 뭇 승려가 망설이며 더러는 답을 지으려 하였다.
어린 사미가 자리 끝에 있다가 말하였다. "세존께서 잠잠하셨으니 곧 허락하신 것입니다."
뭇 승려가 그 뜻을 따랐다.
협주 1
《中興書》曰:「甯字武子,愼陽縣人。博學通覽,累遷中書郎、豫章太守。」
『중흥서』에 이르기를 「범녕은 자가 무자요 신양현 사람이다. 널리 배우고 두루 보아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랑과 예장태수에 이르렀다」 하였다.
98엷은 구름이 점점이 박힌 것만 못한 듯합니다
司馬太傅齋中夜坐,於時天月明淨,都無纖翳;太傅嘆以爲佳。謝景重在坐,荅曰:「意謂乃不如微雲點綴。」太傅因戲謝曰:「卿居心不淨,乃復強欲滓穢太淸邪?」
사마태부가 서재에서 밤에 앉았는데, 그때 하늘의 달이 밝고 깨끗하여 도무지 실낱같은 가림도 없었다. 태부가 탄식하며 아름답다 하였다.
사경중이 자리에 있다가 대답하였다. "제 생각에는 엷은 구름이 점점이 박힌 것만 못한 듯합니다."
태부가 이에 사경중을 놀렸다. "경은 마음가짐이 깨끗하지 못하여 이에 다시 억지로 큰 맑음을 더럽히려 하는가."
협주 2
《孝文王傳》曰:「王諱道子,簡文皇帝第五子也。封會稽王,領司徒、揚州刺史,進太傅。爲桓玄所害,贈丞相。」
「효문왕전」에 이르기를 「왕은 휘가 도자요 간문황제의 다섯째 아들이다. 회계왕에 봉해지고 사도와 양주자사를 거느렸으며 태부로 나아갔다. 환현에게 해를 입었고 승상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續晉陽秋》曰:「謝重字景重,陳郡人。父朗,東陽太守。重明秀有才會,終驃騎長史。」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사중은 자가 경중이요 진군 사람이다. 아버지 사랑은 동양태수다. 사중은 밝고 빼어나며 재주와 모임이 있었고 표기장사로 마쳤다」 하였다.
99양이 스러지고 음이 불어나므로 하늘 걸음이 험했을 뿐입니다
王中郎甚愛張天錫,問之曰:「卿觀過江諸人經緯,江左軌轍,有何偉異?後來之彦,復何如中原?」張曰:「研求幽邃,自王何以還;因時脩制,荀樂之風。」王曰:「卿知見有餘,何故爲苻堅所制?」荅曰:「陽消陰息,故天歩屯蹇;否剝成象,豈足多譏?」
왕중랑이 장천석을 몹시 아껴 그에게 물었다. "경이 보기에 강을 건너온 이들의 다스림과 강좌의 자취에 무슨 뛰어나고 남다른 것이 있소. 뒤에 오는 뛰어난 이들은 또 중원과 견주어 어떠하오."
장천석이 말하였다. "그윽하고 깊은 데를 갈고 찾은 것은 왕필과 하안 이래요, 때를 따라 제도를 닦은 것은 순씨와 악씨의 풍입니다."
왕중랑이 말하였다. "경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넉넉한데 무슨 까닭으로 부견에게 눌렸소."
대답하였다. "양이 스러지고 음이 불어나므로 하늘 걸음이 험하고 어려웠던 것입니다. 비괘와 박괘가 모습을 이루었으니 어찌 많이 나무라기에 넉넉하겠습니까."
협주 2
荀顗、荀勗脩定法制,樂則未聞。
순의와 순욱이 법과 제도를 닦아 정하였고 악씨는 듣지 못하였다.
張資《涼州記》曰:「天錫明鑒穎發,英聲少著。」
장자의 『양주기』에 이르기를 「장천석은 밝게 살펴 빼어나게 드러났고 뛰어난 소리가 젊어서 알려졌다」 하였다.
100어찌 아들 다섯을 딸 하나와 바꾸겠습니까
謝景重女適王孝伯兒,二門公甚相愛美。謝爲太傅長史,被彈;王即取作長史,帶晉陵郡。太傅已構嫌孝伯,不欲使其得謝,還取作咨議。外示縶維,而實以乖閒之。及孝伯敗後,太傅繞東府城行散,僚屬悉在南門要望候拜,時謂謝曰:「王甯異謀,云是卿爲其計。」謝曾無懼色,斂笏對曰:「樂彦輔有言:『豈以五男易一女?』」太傅善其對,因舉酒勸之曰:「故自佳!故自佳!」
사경중의 딸이 왕효백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두 집안 어른이 서로 몹시 아끼고 아름답게 여겼다.
사경중이 태부의 장사가 되었다가 탄핵을 받으니 왕효백이 곧 데려다 장사로 삼고 진릉군을 띠게 하였다. 태부가 이미 왕효백과 사이가 벌어져 그가 사경중을 얻는 것을 바라지 않아, 도로 데려다 자의로 삼았다. 밖으로는 붙들어 매는 척하였으나 실은 둘을 갈라 놓으려 한 것이다.
왕효백이 무너진 뒤 태부가 동부성을 돌며 약 기운에 거니는데, 아전들이 다 남문에서 바라 기다리다가 절하였다. 그때 사경중에게 말하였다. "왕녕이 다른 꾀를 낸 것은 경이 그 꾀를 내었다 하오."
사경중이 조금도 두려운 낯빛이 없이 홀을 여미고 대답하였다. "악언보의 말이 있습니다. 『어찌 아들 다섯을 딸 하나와 바꾸겠습니까.』"
태부가 그 대답을 좋게 여겨 이에 술잔을 들어 권하며 말하였다. "본디 절로 좋다. 본디 절로 좋다."
협주 3
《謝女譜》曰:「重女月鏡,適王恭子愔之。」
『사녀보』에 이르기를 「사중의 딸 월경이 왕공의 아들 왕음지에게 시집갔다」 하였다.
《丹陽記》曰:「東府城西,有簡文爲會稽王時第,東則孝文王道子府。道子領揚州,仍住先舍,故俗稱東府。」
『단양기』에 이르기를 「동부성 서쪽에 간문제가 회계왕이던 때의 집이 있고, 동쪽은 효문왕 사마도자의 부다. 사마도자가 양주를 거느리며 그대로 먼저 살던 집에 머물렀으므로 세속에서 동부라 일컫는다」 하였다.
阿甯,王恭小字也。
아녕은 왕공의 아이 적 이름이다.
101어지러운 의논은 거룩한 헤아림으로 마름하실 일입니다
桓玄義興還後,見司馬太傅,太傅已醉,坐上多客,問人云:「桓温來欲作賊,如何?」桓玄伏不得起。謝景重時爲長史,舉板荅曰:「故宣武公黜昏暗,登聖明,功超伊霍。紛紜之議,裁之聖鑒。」太傅曰:「我知!我知!」即舉酒云:「桓義興,勸卿酒。」桓出謝過。
환현이 의흥에서 돌아온 뒤 사마태부를 뵈니 태부가 이미 취하였고 자리에 손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물었다. "환온이 와서 도적질하려 하였으니 어떠한가."
환현이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사경중이 그때 장사였는데 홀을 들어 대답하였다. "돌아가신 선무공께서는 어둡고 어리석은 이를 물리치고 거룩하고 밝은 이를 올리셨으니 공이 이윤과 곽광을 넘습니다. 어지러운 의논은 거룩한 헤아림으로 마름하실 일입니다."
태부가 말하였다. "내가 아오, 내가 아오."
곧 잔을 들며 말하였다. "환의흥, 경에게 술을 권하오."
환현이 나와 허물을 사죄하였다.
협주 2
《晉安帝紀》曰:「温在姑孰,諷朝廷,求九錫。謝安使吏部郎袁宏具其草,以示僕射王彪之。彪之作色曰:『丈夫豈可以此事語人邪?』安徐問其計。彪之曰:『聞其疾已篤,且可緩其事。』安從之,故不行。」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환온이 고숙에 있으면서 조정에 넌지시 아홉 가지 내려 줌을 구하였다. 사안이 이부랑 원굉을 시켜 그 초안을 갖추게 하고 복야 왕표지에게 보였다. 왕표지가 낯빛을 고치며 『대장부가 어찌 이런 일을 남에게 말하겠소』 하였다. 사안이 천천히 그 꾀를 물으니 왕표지가 『그 병이 이미 깊다 들었으니 우선 그 일을 늦추십시오』 하였다. 사안이 이를 좇았으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檀道鸞論之曰:「道子可謂易於由言,謝重能解紛紜矣。」
단도란이 이를 논하여 이르기를 「사마도자는 말로 말미암기 쉬웠다 하겠고, 사중은 어지러움을 풀 수 있었다」 하였다.
102굽이돌게 하였으므로 헤아릴 수 없는 듯합니다
宣武移鎭南州,制街衢平直。人謂王東亭曰:「丞相初營建康,無所因承,而制置紆曲,方此爲劣。」東亭曰:「此丞相乃所以爲巧。江左地促,不如中國;若使阡陌條暢,則一覽而盡;故紆餘委曲,若不可測。」
선무가 진을 남주로 옮기고 거리를 곧고 반듯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왕동정에게 말하였다. "승상께서 처음 건강을 지으실 때 이어받을 데가 없었는데도 굽이돌게 마련하셨으니, 이에 견주면 못합니다."
동정이 말하였다. "이것이 승상께서 재주를 부리신 까닭이오. 강좌는 땅이 좁아 중원만 못하오. 만일 길과 밭두렁을 시원하게 통하게 하면 한눈에 다 보이고 마오. 그러므로 굽이돌고 구불구불하게 하여 헤아릴 수 없는 듯하게 하신 것이오."
협주 2
《王司徒傳》曰:「王珣字元琳,丞相導之孫,領軍洽之子也。少以淸秀稱。大司馬桓温辟爲主簿,從討袁眞,封交趾望海縣東亭侯,累遷尚書左僕射、領選、進尚書令。」
『왕사도전』에 이르기를 「왕순은 자가 원림이요 승상 왕도의 손자요 영군 왕흡의 아들이다. 젊어서 맑고 빼어나다 일컬어졌다. 대사마 환온이 불러 주부로 삼았고 원진을 치는 데 따라가 교지 망해현 동정후에 봉해졌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좌복야로 사람 뽑는 일을 거느리다가 상서령으로 나아갔다」 하였다.
《晉陽秋》曰:「蘇峻既誅,大事克平之後,都邑殘荒。温嶠議徙都豫章,以即豐全。朝士及三呉豪傑,謂可遷都會稽,王導獨謂『不宜遷都。建業,往之秣陵,古者既有帝王所治之表,又孫仲謀、劉玄德倶謂是王者之宅。今雖凋殘,宜修勞來旋定之道,鎭靜群情。且百堵皆作,何患不克復乎!』終至康寧,導之策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소준이 베인 뒤 큰일이 다스려진 다음에 도읍이 헐고 거칠어졌다. 온교가 예장으로 도읍을 옮겨 넉넉함에 나아가자 의논하였고, 조정의 선비와 삼오의 호걸들은 회계로 도읍을 옮길 만하다 하였다. 왕도만이 홀로 이르기를 『도읍을 옮겨서는 안 됩니다. 건업은 옛 말릉이니 옛적에 이미 제왕이 다스리던 표시가 있었고, 또 손중모와 유현덕이 다 이곳이 임금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비록 시들고 헐었으나 마땅히 위로하고 오게 하여 돌려 안정시키는 길을 닦아 뭇 마음을 고요히 눌러야 합니다. 또 온갖 담을 다 쌓는데 어찌 되찾지 못할까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편안함에 이르렀으니 왕도의 꾀다」 하였다.
103어찌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기를 여색 좋아하듯 하지 않았겠소
桓玄詣殷荊州,殷在妾房晝眠,左右辭不之通。桓後言及此事,殷云:「初不眠,縱有此,豈不以『賢賢易色』也。」
환현이 은형주를 찾아갔는데 은형주가 첩의 방에서 낮잠을 자므로 곁의 사람이 사양하고 알리지 않았다.
환현이 뒤에 이 일을 말하니 은형주가 말하였다. "처음부터 잠들지 않았소. 설령 그러하였더라도 어찌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기를 여색 좋아하듯』 한 것이 아니겠소."
협주 1
孔安國注《論語》曰:「言以好色之心好賢人則善。」
공안국이 『논어』에 주하여 이르기를 「여색 좋아하는 마음으로 어진 사람을 좋아하면 좋다는 말이다」 하였다.
104요사스러우면서도 뜨기 때문이겠지요
桓玄問羊孚:「何以共重呉聲?」羊曰:「當以其妖而浮。」
환현이 양부에게 물었다. "무엇으로 다들 오나라 소리를 무겁게 여기오."
양부가 말하였다. "마땅히 그 요사스러우면서도 뜨기 때문이겠지요."
협주 1
《羊氏譜》曰:「孚字子道,泰山人。祖楷,尚書郎。父綏,中書郎。孚歴太學博士、州別駕、太尉參軍。年四十六卒。」
『양씨보』에 이르기를 「양부는 자가 자도요 태산 사람이다. 할아버지 양해는 상서랑이요 아버지 양수는 중서랑이다. 양부는 태학박사와 주별가와 태위참군을 지냈고 마흔여섯에 죽었다」 하였다.
105그러므로 신을 맞이하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謝混問羊孚:「何以器舉瑚璉?」羊曰:「故當以爲接神之器。」
사혼이 양부에게 물었다. "무엇으로 그릇 가운데 호련을 드시오."
양부가 말하였다. "본디 신을 맞이하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협주 1
《晉安帝紀》曰:「混字叔源,陳郡人,司空琰少子也。文學砥礪立名。累遷中書令、尚書左僕射。坐黨劉毅伏誅。」《論語》:「子貢問曰:『賜也何如?』子曰:『汝器也。』曰:『何器也?』曰:『瑚璉也。』」鄭玄注曰:「黍稷器。夏曰瑚,殷曰璉。」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사혼은 자가 숙원이요 진군 사람이니 사공 사염의 작은아들이다. 글과 학문을 갈고닦아 이름을 세웠다.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령과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유의의 무리에 걸려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논어』에 「자공이 묻기를 『저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너는 그릇이다』 하셨다.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호련이다』 하셨다」 하였다. 정현이 주하여 이르기를 「기장을 담는 그릇이다. 하나라는 호라 하고 은나라는 연이라 하였다」 하였다.
106거룩한 덕이 깊고 무거워 두터운 땅이 싣지 못하는 것입니다
桓玄既簒位,後御床微陷,群臣失色。侍中殷仲文進曰:「當由聖德淵重,厚地所以不能載。」時人善之。
환현이 자리를 빼앗은 뒤 임금의 평상이 조금 꺼지니 뭇 신하가 낯빛을 잃었다.
시중 은중문이 나아가 말하였다. "마땅히 거룩한 덕이 깊고 무거워 두터운 땅이 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좋게 여겼다.
협주 1
《續晉陽秋》曰:「仲文字仲文,陳郡人。祖融,太常。父康,呉興太守。仲文聞玄平京邑,棄郡投焉。玄甚説之,引爲咨議參軍。時王謐見禮而不親,卞範之被親而少禮。其寵遇隆重,兼於王卞矣。及玄簒位,以佐命親貴,厚自封崇。輿馬器服,窮極綺麗,後房妓妾數十,絲竹不絶音。性甚貪吝,多納賄賂,家累千金,常若不足。玄既敗,先投義軍。累遷侍中尚書。以罪伏誅。」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은중문은 자가 중문이요 진군 사람이다. 할아버지 은융은 태상이요 아버지 은강은 오흥태수다. 은중문이 환현이 서울을 평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고을을 버리고 그에게 갔다. 환현이 몹시 기뻐하여 이끌어 자의참군으로 삼았다. 그때 왕밀은 예로 대하되 가깝지 않았고 변범지는 가까우면서 예가 적었는데, 그 사랑과 대접의 두터움은 왕밀과 변범지를 아울렀다. 환현이 자리를 빼앗자 도운 공으로 가깝고 귀해져 스스로 두터이 봉하고 높였다. 수레와 말과 그릇과 옷이 곱고 화려함을 다하였고 뒷방의 기녀와 첩이 수십이며 실과 대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성품이 몹시 탐하고 인색하여 뇌물을 많이 받아 집에 천금이 쌓였는데도 늘 모자란 듯하였다. 환현이 무너지자 먼저 의로운 군사에게 갔다.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상서에 이르렀다가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107반악의 「추흥부」 서에 이르기를
桓玄既簒位,將改置直舘,問左右:「虎賁中郎省,應在何處?」有人荅曰:「無省。」當時殊忤旨。問:「何以知無?」荅曰:「潘岳《秋興賦》敘曰:『余兼虎賁中郎將,寓直散騎之省。』玄咨嗟稱善。
환현이 자리를 빼앗은 뒤 당직 관사를 고쳐 두려 하여 곁의 사람에게 물었다. "호분중랑의 관사는 마땅히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어떤 이가 대답하였다. "관사가 없습니다."
그때 몹시 뜻을 거슬렀다. 물었다. "무엇으로 없는 줄 아는가."
대답하였다. "반악의 「추흥부」 서에 이르기를 『내가 호분중랑장을 겸하여 산기의 관사에 붙어 당직하였다』 하였습니다."
환현이 감탄하며 좋다 일컬었다.
협주 2
岳別見。其賦敘曰:「晉十有四年,余年三十二始見二毛,以太尉掾兼虎賁中郎將,寓直散騎之省。髙閣連雲,陽景罕曜。僕野人也,猥廁朝列,譬猶池魚籠鳥!有江湖山藪之思。於是染翰操紙,慨然而賦。於時秋至,故以秋興命篇。」
반악은 따로 보인다. 그 부의 서에 이르기를 「진나라 열넷째 해에 내 나이 서른둘에 비로소 흰 털이 보였는데, 태위의 아전으로 호분중랑장을 겸하여 산기의 관사에 붙어 당직하였다. 높은 다락이 구름에 닿아 볕이 드는 일이 드물었다. 나는 들사람인데 외람되이 조정의 줄에 섞였으니, 비유하자면 못의 물고기와 새장의 새 같아 강과 호수와 산과 늪의 생각이 있다. 이에 붓을 적시고 종이를 잡아 북받쳐 부를 짓는다. 이때 가을이 이르렀으므로 가을의 흥으로 편 이름을 삼는다」 하였다.
劉謙之《晉紀》曰:「玄欲復虎賁中郎將,疑應直與不,訪之僚佐,咸莫能定。參軍劉簡之對曰:『昔潘岳《秋興賦》敘云:「余兼虎賁中郎將,寓直於散騎之省。」以此言之,是應直也。』玄懽然從之。」此語微異,又答者未知姓名,故詳載之。
유겸지의 『진기』에 이르기를 「환현이 호분중랑장을 되살리려 하면서 당직을 서야 할지 아닐지 의심하여 아전과 보좌에게 물으니 다들 정하지 못하였다. 참군 유간지가 대답하기를 『옛날 반악의 「추흥부」 서에 이르기를 「내가 호분중랑장을 겸하여 산기의 관사에 붙어 당직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로 말하면 마땅히 당직해야 합니다』 하니, 환현이 기뻐하며 이를 좇았다」 하였다. 이 말은 조금 다르고 또 대답한 이의 성과 이름을 알 수 없으므로 자세히 싣는다.
108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이가 아직 마음을 잊지 못한 것이겠지요
謝靈運好戴曲柄笠,孔隱士謂曰:「卿欲希心髙遠,何不能遺曲蓋之貌?」謝荅曰:「將不畏影者,未能忘懷。」
사영운이 굽은 자루 삿갓 쓰기를 좋아하니 공은사가 말하였다. "경이 마음을 높고 먼 데 두고자 하면서 어찌 굽은 일산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시오."
사영운이 대답하였다.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이가 아직 마음을 잊지 못한 것이겠지요."
협주 3
丘淵之《新集録》曰:「靈運,陳郡陽夏人。祖玄,車騎將軍。父渙,祕書郎。靈運歴祕書監、侍中、臨川内史。以罪伏誅。」
구연지의 『신집록』에 이르기를 「사영운은 진군 양하 사람이다. 할아버지 사현은 거기장군이요 아버지 사환은 비서랑이다. 사영운은 비서감과 시중과 임천내사를 지냈다.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宋書曰:「孔淳之字彦深,魯國人。少以辭榮就約,徴聘無所就。元嘉初,散騎郎徴,不到,隱上虞山。」
『송서』에 이르기를 「공순지는 자가 언심이요 노나라 사람이다. 젊어서 영화를 버리고 간소함에 나아가 부름에 나아가는 바가 없었다. 원가 처음에 산기랑으로 불렸으나 이르지 않고 상우산에 숨었다」 하였다.
《莊子》云:「漁父謂孔子曰:『人有畏影惡跡而去之走者,舉足逾數而跡逾多,走逾疾而影不離,自以尚遲,疾走不休,絶力而死。不知處陰以休影,處靜以息跡,愚亦甚矣!子脩心守眞,還以物與人,則無異矣。不脩身而求之人,不亦外事者乎?』」
『장자』에 이르기를 「어부가 공자에게 이르기를 『사람 가운데 제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제 발자국을 싫어하여 이를 떨치려 달아난 이가 있었소. 발을 들수록 발자국은 더 많아지고 달릴수록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소. 스스로 아직 느리다 여겨 빨리 달리기를 쉬지 않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소.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쉬고 고요히 있으면 발자국이 그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리석음이 또한 심하오. 그대가 마음을 닦고 참됨을 지켜 사물을 남에게 돌려주면 다를 것이 없소. 몸을 닦지 않고 남에게서 구하니 또한 밖에서 일삼는 것이 아니오』 하였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