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世説新語 政事第三
1참되지 않고 효도롭지 않으니 그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陳仲弓爲太丘長,時吏有詐稱母病求假,事覺收之,令吏殺焉。主簿請付獄,考衆姦。仲弓曰:「欺君不忠,病母不孝;不忠不孝,其罪莫大。考求衆姦,豈復過此?」
진중궁이 태구장이 되었을 때, 어떤 아전이 어머니가 병들었다고 속여 말미를 구한 일이 있었다. 일이 드러나 그를 잡아 아전에게 죽이게 하였다.
주부가 옥에 넘겨 여러 간사한 짓을 캐기를 청하니 중궁이 말하였다. "임금을 속였으니 참되지 않고, 어머니를 병들었다 하였으니 효도롭지 않다. 참되지 않고 효도롭지 않으니 그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여러 간사한 짓을 캐어 구한들 어찌 다시 이보다 더하겠는가."
협주 1
陳寔已別見。
진식은 이미 따로 보인다.
2도적이 재물 주인을 죽인 것이 살붙이끼리 죽이는 것만 하겠는가
陳仲弓爲太丘長,有劫賊殺財主,主者捕之。未至發所,道聞民有在草不起子者,回車往治之。主簿曰:「賊大,宜先按討。」仲弓曰:「盜殺財主,何如骨肉相殘?」
진중궁이 태구장이 되었을 때, 도적이 재물 주인을 죽인 일이 있어 맡은 이가 그를 잡으러 갔다.
아직 일어난 데에 이르기 전에 길에서 백성 가운데 갓 낳은 아이를 거두지 않은 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수레를 돌려 그리로 가서 다스렸다.
주부가 말하였다. "도적이 큰일이니 마땅히 먼저 살펴 치셔야 합니다."
중궁이 말하였다. "도적이 재물 주인을 죽인 것이 살붙이끼리 죽이는 것만 하겠는가."
협주 1
按,後漢時賈彪有此事,不聞寔也。
살피건대 후한 때 가표에게 이런 일이 있었고 진식에게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3주공은 공자를 스승 삼지 않았고 공자도 주공을 스승 삼지 않았습니다
陳元方年十一時,候袁公。袁公問曰:「賢家君在太丘,遠近稱之,何所履行?」元方曰:「老父在太丘,彊者綏之以德,弱者撫之以仁,恣其所安,久而益敬。」袁公曰:「孤往者嘗爲鄴令,正行此事。不知卿家君法孤?孤法卿父?」元方曰:「周公、孔子,異世而出,周旋動靜,萬里如一;周公不師孔子,孔子亦不師周公。」
진원방이 열한 살 때 원공을 뵈었다. 원공이 물었다. "그대의 아버님께서 태구에 계실 때 멀고 가까운 데서 다 일컬었는데, 무엇을 밟아 행하셨는가."
원방이 말하였다. "늙으신 아버지께서 태구에 계실 때, 굳센 이는 덕으로 편안히 하시고 약한 이는 어짊으로 어루만지시며 그 편안한 바를 마음껏 하게 하시니, 오래될수록 더욱 공경하였습니다."
원공이 말하였다. "내가 지난날 일찍이 업령이 되어 바로 이 일을 행하였다. 알지 못하겠구나. 그대의 아버님이 나를 본받으신 것인가, 내가 그대의 아버님을 본받은 것인가."
원방이 말하였다. "주공과 공자는 세상을 달리하여 나셨으나 돌고 움직이고 고요함이 만 리에 하나같았습니다. 주공은 공자를 스승 삼지 않았고 공자도 주공을 스승 삼지 않았습니다."
협주 3
陳紀已見。
진기는 이미 보인다.
袁宏《漢紀》曰:「寔爲太丘,其政不嚴而治,百姓敬之。」
원굉의 『한기』에 이르기를 「진식이 태구를 맡아 그 정사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다스려져 백성이 그를 공경하였다」 하였다.
檢衆《漢書》,袁氏諸公,未知誰爲鄴令?故闕其文以待通識者。
여러 『한서』를 살펴보아도 원씨의 여러 공 가운데 누가 업령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글을 비워 두어 널리 아는 이를 기다린다.
4회계 닭은 울지 못한다
賀太傅作呉郡,初不出門。呉中諸強族輕之,乃題府門云:「會稽鷄,不能啼。」賀聞故出行,至門反顧,索筆足之曰:「不可啼,殺呉兒!」於是至諸屯邸,檢校諸顧陸役使官兵及藏逋亡,悉以事言上,罪者甚衆。陸抗時爲江陵都督,故下請孫皓,然後得釋。
하태부가 오군 태수가 되어 처음에 문을 나서지 않았다. 오 땅의 여러 억센 겨레가 그를 가벼이 여겨 이에 관아 문에 적었다. "회계 닭은 울지 못한다."
하태부가 듣고 짐짓 나가 다니다가 문에 이르러 돌아보고, 붓을 찾아 이어 썼다. "울지 못하면 오 땅 아이를 죽이리라."
이에 여러 둔전과 저택에 이르러 고씨와 육씨가 관병을 부린 일과 달아난 이를 숨긴 일을 살펴 밝히고, 다 일로 위에 아뢰니 죄지은 이가 몹시 많았다.
육항이 그때 강릉도독이었는데 짐짓 내려가 손호에게 청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협주 2
環濟《呉紀》曰:「賀邵字興伯,會稽山陰人。祖齊,父景,並歴美官。邵歴散騎常侍,出爲呉郡太守。後遷太子太傅。」
환제의 『오기』에 이르기를 「하소는 자가 흥백이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할아버지 하제와 아버지 하경이 아울러 아름다운 벼슬을 지냈다. 하소는 산기상시를 지내고 오군태수로 나갔다. 뒤에 태자태부로 옮겼다」 하였다.
《呉録》曰:「抗字幼節,呉郡人,丞相遜子,孫策外孫也。爲江陵都督,累遷大司馬、荊州牧。」
『오록』에 이르기를 「육항은 자가 유절이요 오군 사람이니 승상 육손의 아들이요 손책의 외손이다. 강릉도독이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마와 형주목에 이르렀다」 하였다.
5누각 동쪽에 큰 소가 있다
山公以器重朝望,年踰七十,猶知管時任。貴勝年少,若和、裴、王之徒,並共言詠。有署閣柱曰:「閣東,有大牛,和嶠鞅,裴楷鞦,王濟剔嬲不得休。」或云:潘尼作之。
산공은 그릇이 무겁고 조정의 바람을 받아,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오히려 그때의 소임을 맡아 볼 줄 알았다.
귀하고 뛰어난 젊은이들, 이를테면 화교와 배해와 왕제 같은 무리가 아울러 함께 말하고 읊었다. 어떤 이가 누각 기둥에 적었다. "누각 동쪽에 큰 소가 있으니, 화교가 가슴걸이요 배해가 밀치끈이요 왕제는 후벼 대며 쉬지 못한다."
어떤 이는 반니가 지었다 한다.
협주 3
虞預《晉書》曰:「山濤字巨源,河内懷人。祖本,郡孝廉。父曜,冤句令。濤蚤孤而貧,少有器量,宿士猶不慢之。年十七,宗人謂宣帝曰:『濤當與景文共綱紀天下者也。』帝戲曰:『卿小族,那得此快人邪?』好莊老,與嵇康善。爲河内從事,與石鑒共傳宿,濤夜起蹋鑒曰:『今何等時而眠也!知太傅臥何意?』鑒曰:『宰相三日不朝,與尺一令歸第,君何慮焉?』濤曰:『咄!石生,無事馬蹄閒也。』投傳而去,果有曹爽事,遂隱身不交世務。累遷吏部尚書、僕射、太子少傅、司徒。年七十九薨,諡康侯。」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산도는 자가 거원이요 하내 회 사람이다. 할아버지 산본은 고을의 효렴이요 아버지 산요는 원구령이다. 산도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가난하였으나 젊어서 그릇과 도량이 있어 나이 든 선비도 오히려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열일곱에 겨레 사람이 선제에게 이르기를 『산도는 마땅히 경제·문제와 함께 천하를 벼리 잡을 이입니다』 하니, 임금이 놀리며 『경의 작은 겨레에서 어찌 이런 시원한 사람을 얻었는가』 하였다. 『장자』와 『노자』를 좋아하였고 혜강과 사이가 좋았다. 하내종사가 되어 석감과 함께 역참에 묵었는데, 산도가 밤에 일어나 석감을 밟으며 『이제 어떤 때인데 자는가. 태부가 누워 계신 뜻을 아는가』 하였다. 석감이 『재상이 사흘 조회하지 않으면 한 자 조서를 내려 집으로 돌아가게 할 뿐인데 그대가 무엇을 걱정하는가』 하니, 산도가 『쯧, 석생. 말굽 사이에 일없이 있지 마시게』 하고 역참 표를 던지고 떠났다. 과연 조상의 일이 있어 마침내 몸을 숨기고 세상일에 사귀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상서와 복야와 태자소부와 사도에 이르렀다. 일흔아홉에 죽으니 시호는 강후다」 하였다.
王隱《晉書》曰:「初,濤領吏部,潘岳内非之,密爲作謠曰:『閣東,有大牛,王濟鞅,裴楷鞦,和嶠刺促不得休。』」《竹林七賢論》曰:「濤之處選,非望路絶,故貽是言。」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처음에 산도가 이부를 거느리자 반악이 속으로 이를 그르다 하여 몰래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누각 동쪽에 큰 소가 있으니, 왕제가 가슴걸이요 배해가 밀치끈이요 화교는 찔러 대며 쉬지 못한다』 하였다」 하였다.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산도가 사람 뽑는 자리에 있어 바라던 길이 끊겼으므로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하였다.
《文士傳》曰:「尼字正叔,滎陽人。祖最,尚書左丞。父滿,平原太守。並以文學稱。尼少有淸才,文詞温雅。初應州辟,終太常卿。」
『문사전』에 이르기를 「반니는 자가 정숙이요 형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반최는 상서좌승이요 아버지 반만은 평원태수인데 아울러 글로 일컬어졌다. 반니는 젊어서 맑은 재주가 있고 글이 따뜻하고 우아하였다. 처음에 주의 부름에 응하였고 태상경으로 마쳤다」 하였다.
6고요의 엄하고 밝은 뜻은 제가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賈充初定律令,與羊祜共咨太傅鄭沖。沖曰:「皋陶嚴明之旨,非僕闇懦所探。」羊曰:「上意欲令小加弘潤。」沖乃粗下意。
가충이 처음 율령을 정할 때 양호와 함께 태부 정충에게 여쭈었다.
정충이 말하였다. "고요의 엄하고 밝은 뜻은 어둡고 나약한 제가 더듬을 바가 아닙니다."
양호가 말하였다. "위의 뜻은 조금 넓히고 다듬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정충이 이에 거칠게 뜻을 내렸다.
협주 3
《晉諸公贊》曰:「充字公閭,襄陵人。父逵,魏豫州刺史。充起家爲尚書,遷廷尉,聽訟稱平。晉受禪,封魯郡公。充有才識,明達治體,加善刑法,由此與散騎常侍裴楷共定科令,蠲除密網,以爲晉律。薨,贈太宰。」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가충은 자가 공려요 양릉 사람이다. 아버지 가규는 위나라 예주자사다. 가충은 상서로 벼슬을 시작하여 정위로 옮겼는데 송사 듣기를 고르게 한다 일컬어졌다. 진나라가 선양을 받자 노군공에 봉해졌다. 가충은 재주와 식견이 있고 다스림의 요체에 밝게 통하였으며 형법에 밝기까지 하여, 이로 말미암아 산기상시 배해와 함께 법령을 정하고 촘촘한 그물을 덜어 없애 진나라 율을 삼았다. 죽자 태재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王隱《晉書》曰:「沖字文和,滎陽開封人。有核練才,淸虚寡慾,喜論經史,草衣縕袍,不以爲憂。累遷司徒、太保。晉受禪,進太傅。」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정충은 자가 문화요 형양 개봉 사람이다. 헤아려 익히는 재주가 있고 맑고 비어 바라는 것이 적었으며, 경전과 사서 논하기를 즐겨 풀옷과 헌 솜옷을 입고도 이를 근심으로 여기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사도와 태보에 이르렀고 진나라가 선양을 받자 태부로 나아갔다」 하였다.
《續晉陽秋》曰:「初,文帝命荀朂、賈充、裴秀等分定禮儀律令,皆先咨鄭沖,然後施行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문제가 순욱과 가충과 배수 들에게 나누어 예의와 율령을 정하게 하였는데, 다 먼저 정충에게 여쭌 뒤에 베풀어 행하였다」 하였다.
7산사도가 사람 뽑은 것은 재주를 놓친 적이 없었다
山司徒前後選,殆周遍百官,舉無失才。凡所題目,皆如其言。唯用陸亮,是詔所用,與公意異,爭之不從。亮亦尋爲賄敗。
산사도가 앞뒤로 사람을 뽑아 거의 온갖 벼슬에 두루 미쳤는데, 천거함에 재주를 놓친 적이 없었다. 무릇 제목 붙인 바가 다 그 말과 같았다.
오직 육량을 쓴 것만은 조칙으로 쓰인 바라 공의 뜻과 달라 다투었으나 좇아지지 않았다. 육량도 이윽고 뇌물로 무너졌다.
협주 1
《晉諸公贊》曰:「亮字長興,河内野王人,太常陸乂兄也。性髙明而率至,爲賈充所親待。山濤爲左僕射領選,濤行業即與充異,自以爲世祖所敬,選用之事,與充咨論,充毎不得其所欲。好事者説充:『宜授心腹人爲吏部尚書,參同選舉。若意不齊,事不得諧,可不召公與選,而實得敘所懷。』充以爲然。乃啓亮公忠無私。濤以亮將與己異,又恐其協情不允,累啓亮可爲左丞相,非選官才。世祖不許,濤乃辭疾還家。亮在職果不能允,坐事免官。」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육량은 자가 장흥이요 하내 야왕 사람이니 태상 육예의 형이다. 성품이 높고 밝으며 시원하고 지극하여 가충에게 가까이 대접받았다. 산도가 좌복야로 사람 뽑는 일을 거느렸는데, 산도의 행실과 업이 곧 가충과 달랐고 스스로 세조에게 공경받는다 여겨, 뽑아 쓰는 일을 가충과 의논할 때 가충이 늘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일 좋아하는 이가 가충에게 달래기를 『마땅히 마음 붙은 사람에게 이부상서를 주어 뽑는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십시오. 만일 뜻이 가지런하지 않아 일이 어울리지 못하면, 공을 불러 함께 뽑지 않을 수도 있고 실은 품은 바를 펼 수 있습니다』 하였다. 가충이 그럴듯하게 여겨 이에 육량이 공변되고 참되어 사사로움이 없다고 아뢰었다. 산도는 육량이 저와 다를 줄 알고 또 그가 정에 맞추어 고르지 못할까 두려워, 육량은 좌승상은 될 만하나 사람 뽑는 벼슬의 재목은 아니라고 거듭 아뢰었다. 세조가 허락하지 않으니 산도가 이에 병으로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육량이 자리에 있으면서 과연 고르지 못하여 일에 걸려 벼슬을 잃었다」 하였다.
8하늘과 땅과 네 철에도 오히려 스러지고 불어남이 있다
嵇康被誅後,山公舉康子紹爲祕書丞。紹咨公出處,公曰:「爲君思之久矣!天地四時,猶有消息,而況人乎?」
혜강이 죽임을 당한 뒤 산공이 혜강의 아들 혜소를 천거하여 비서승으로 삼았다.
혜소가 산공에게 나아갈지 물러날지를 여쭈니 산공이 말하였다. "그대를 위해 생각한 지 오래다. 하늘과 땅과 네 철에도 오히려 스러지고 불어남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협주 3
《山公啓事》曰:「詔選祕書丞。濤薦曰:『紹平簡温敏,有文思,又曉音,當成濟也。猶宜先作祕書郎。』詔曰:『紹如此,便可爲丞,不足復爲郎也。』」《晉諸公贊》曰:「康遇事後二十年,紹乃爲濤所拔。」王隱《晉書》曰:「時以紹父康被法,選官不敢舉。年二十八,山濤啓用之,世祖發詔,以爲祕書丞。」
『산공계사』에 이르기를 「조칙으로 비서승을 뽑게 하니 산도가 천거하여 이르기를 『혜소는 고르고 간결하며 따뜻하고 재빠르고 글재주가 있으며 또 음률을 아니 마땅히 이룰 만합니다. 그래도 먼저 비서랑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조칙에 이르기를 『혜소가 이와 같다면 곧 승으로 삼을 만하니 다시 낭으로 삼기에 넉넉하지 않다』 하였다」 하였다.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혜강이 일을 당한 뒤 스무 해 만에 혜소가 이에 산도에게 뽑혔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그때 혜소의 아버지 혜강이 법을 받았으므로 뽑는 벼슬아치가 감히 천거하지 못하였다. 나이 스물여덟에 산도가 아뢰어 그를 쓰니 세조가 조칙을 내려 비서승으로 삼았다」 하였다.
《竹林七賢論》曰:「紹懼不自容,將解褐,故咨之於濤。」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혜소가 스스로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려 하면서 짐짓 산도에게 여쭈었다」 하였다.
王隱《晉書》曰:「紹字延祖,雅有文才,山濤啓武帝云云。」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혜소는 자가 연조요 우아하게 글재주가 있었는데 산도가 무제에게 아뢰기를 이러이러하다 하였다」 하였다.
9못의 물고기가 다시 무엇이 아깝겠는가
王安期爲東海郡,小吏盜池中魚,綱紀推之。王曰:「文王之囿,與衆共之。池魚復何足惜!」
왕안기가 동해군을 맡았을 때 작은 아전이 못 속의 물고기를 훔치니 벼리 맡은 이가 이를 캐물었다.
왕안기가 말하였다. "문왕의 동산도 뭇사람과 함께하였다. 못의 물고기가 다시 무엇이 아깝겠는가."
협주 2
《名士傳》曰:「王承字安期,太原晉陽人。父湛,汝南太守。承沖淡寡慾,無所循尚。累遷東海内史,爲政淸靜,吏民懷之。避亂渡江,是時道路寇盜,人懷憂懼,承毎遇艱險,處之怡然。元皇爲鎭東,引爲從事中郎。」
『명사전』에 이르기를 「왕승은 자가 안기요 태원 진양 사람이다. 아버지 왕담은 여남태수다. 왕승은 맑고 담박하며 바라는 것이 적어 좇아 높이는 바가 없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동해내사에 이르렀는데 정사를 맑고 고요히 하니 아전과 백성이 그를 그리워하였다. 난을 피해 강을 건널 때 길에 도적이 있어 사람들이 근심과 두려움을 품었는데, 왕승은 어렵고 험한 일을 만날 때마다 이를 태연히 대하였다. 원황제가 진동장군이 되어 이끌어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하였다.
《孟子》曰:「齊宣王問:『文王之囿,方七十里,有諸?若是其大乎?』對曰:『民猶以爲小也。』王曰:『寡人之囿,方四十里,民猶以爲大,何邪?』孟子曰:『文王之囿,芻蕘者往焉,與民同之,民以爲小,不亦宜乎?今王之囿,殺糜鹿者如殺人罪,是以四十里爲阱於國中也,民以爲大,不亦宜乎?』」
『맹자』에 이르기를 「제나라 선왕이 묻기를 『문왕의 동산이 사방 칠십 리였다 하니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렇게 컸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백성은 오히려 작다 여겼습니다』 하였다. 왕이 『과인의 동산은 사방 사십 리인데 백성이 오히려 크다 여기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니, 맹자가 『문왕의 동산은 꼴 베고 나무하는 이가 거기 가서 백성과 함께하였으니, 백성이 작다 여긴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제 왕의 동산은 고라니와 사슴을 죽이면 사람 죽인 죄와 같이 하니, 이는 사십 리로 나라 안에 함정을 만든 것입니다. 백성이 크다 여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하였다.
10영월을 채찍질하여 위엄을 세우는 것은 다스림의 뿌리가 아니다
王安期作東海郡,吏録一犯夜人來。王問:「何處來?」云:「從師家受書還,不覺日晩。」王曰:「鞭撻甯越以立威名,恐非致理之本。」使吏送令歸家。
왕안기가 동해군을 맡았을 때 아전이 밤에 다니는 것을 어긴 이 하나를 적어 데려왔다.
왕안기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말하였다. "스승의 집에서 글을 받고 돌아오는 길인데 날이 저문 줄을 몰랐습니다."
왕안기가 말하였다. "영월을 채찍질하여 위엄과 이름을 세우는 것은 다스림에 이르는 뿌리가 아닌 듯하다."
아전을 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협주 1
《呂氏春秋》曰:「甯越者,中牟鄙人也。苦耕稼之勞,謂其友曰:『何爲可以免此苦也?』其友曰:『莫如學也。學三十歳,則可以達矣。』甯越曰:『請以十五歳。人將休,吾不敢休;人將臥,吾不敢臥。』學十五歳而爲周威公之師也。」
『여씨춘추』에 이르기를 「영월은 중모의 시골 사람이다. 밭 갈고 심는 수고로움을 괴로워하여 그 벗에게 이르기를 『무엇을 하면 이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니, 그 벗이 『배우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서른 해를 배우면 통달할 수 있다』 하였다. 영월이 『열다섯 해로 하겠다. 남이 쉴 때 나는 감히 쉬지 않고, 남이 누울 때 나는 감히 눕지 않겠다』 하였다. 열다섯 해를 배워 주나라 위공의 스승이 되었다」 하였다.
11내 시중을 돌려 다오
成帝在石頭,任讓在帝前戮侍中鍾雅、右衞將軍劉超,帝泣曰:「還我侍中!」讓不奉詔,遂斬超、雅。事平之後,陶公與讓有舊,欲宥之。許柳兒思妣者至佳,諸公欲全之。若全思妣,則不得不爲陶全讓,於是欲并宥之。事奏,帝曰:「讓是殺我侍中者,不可宥!」諸公以少主不可違,并斬二人。
성제가 석두에 있을 때 임양이 임금 앞에서 시중 종아와 우위장군 유초를 죽였다.
임금이 울며 말하였다. "내 시중을 돌려 다오."
임양이 조칙을 받들지 않고 마침내 유초와 종아를 베었다.
일이 평정된 뒤 도공이 임양과 오랜 사이라 그를 용서하려 하였다. 허류의 아들 사비는 지극히 좋은 이라 여러 공이 그를 온전히 하려 하였다. 만일 사비를 온전히 하려면 도공을 위해 임양도 온전히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에 둘 다 용서하려 하였다.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임양은 내 시중을 죽인 자다. 용서할 수 없다."
여러 공이 어린 임금을 어길 수 없다 하여 두 사람을 아울러 베었다.
협주 6
《晉世譜》曰:「帝諱衍,字世根,明帝太子。年二十二崩。」
『진세보』에 이르기를 「임금은 휘가 연이요 자가 세근이니 명제의 태자다. 스물둘에 돌아갔다」 하였다.
《晉陽秋》曰:「讓,樂安人,諸任之後。隨蘇峻作亂。」《雅別傳》曰:「雅字彦胄,潁川長社人,魏太傅鍾繇弟仲常曾孫也。少有才志,累遷至侍中。」
『진양추』에 이르기를 「임양은 낙안 사람이니 여러 임씨의 뒤다. 소준을 따라 난을 일으켰다」 하였다. 『아별전』에 이르기를 「종아는 자가 언주요 영천 장사 사람이니 위나라 태부 종요의 아우 종중상의 증손이다. 젊어서 재주와 뜻이 있어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에 이르렀다」 하였다.
《晉陽秋》曰:「超字世踰,琅邪人,漢成陽景王六世孫。封臨沂慈鄕侯,遂家焉。父徴爲琅邪國上將軍。超爲縣小吏,稍遷記室掾、安東舍人。忠淸愼密,爲中宗所拔。自以職在中書,絶不與人交關書疎,閉門不通賓客,家無儋石之儲。討王敦有功,封零陽伯,爲義興太守。而受拜及往還朝,莫有知者,其愼默如此。遷右衞大將軍。」
『진양추』에 이르기를 「유초는 자가 세유요 낭야 사람이니 한나라 성양경왕의 육 대 손이다. 임기 자향후에 봉해져 마침내 거기에 집을 삼았다. 아버지 유징은 낭야국 상장군으로 불렸다. 유초는 현의 작은 아전이 되었다가 차츰 기실연과 안동사인으로 옮겼다. 참되고 맑고 삼가고 빈틈없어 중종에게 뽑혔다. 스스로 맡은 자리가 중서에 있다 하여 남과 사귀어 편지 주고받기를 끊고 문을 닫아 손을 통하지 않았으며 집에 한 섬 쌀의 쌓임도 없었다. 왕돈을 치는 데 공이 있어 영양백에 봉해지고 의흥태수가 되었다. 그런데 임명을 받은 것과 조정을 오간 것을 아는 이가 없었으니 그 삼가고 잠잠함이 이와 같았다. 우위대장군으로 옮겼다」 하였다.
《雅別傳》曰:「蘇峻逼主上幸石頭,雅與劉超並侍帝側匡衞,與石頭中人密期拔至尊出,事覺被害。」
『아별전』에 이르기를 「소준이 임금을 다그쳐 석두로 옮기게 하니, 종아가 유초와 함께 임금 곁에서 모시고 지키며 석두 안의 사람과 몰래 기약하여 임금을 빼내려 하였는데, 일이 드러나 해를 입었다」 하였다.
《許氏譜》曰:「柳字季祖,髙陽人。祖允,魏中領軍。父猛,吏部郎。」劉謙之《晉紀》曰:「柳妻,祖逖子渙女。蘇峻招祖約爲逆,約遣柳以衆會峻。既克京師,拜丹陽尹。後以罪誅。」
『허씨보』에 이르기를 「허류는 자가 계조요 고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허윤은 위나라 중령군이요 아버지 허맹은 이부랑이다」 하였다. 유겸지의 『진기』에 이르기를 「허류의 아내는 조적의 아들 조환의 딸이다. 소준이 조약을 불러 거스르게 하니 조약이 허류에게 무리를 이끌고 소준과 모이게 하였다. 서울을 이기고 나서 단양윤에 임명되었다. 뒤에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許氏譜》曰:「永字思妣。」
『허씨보』에 이르기를 「허영은 자가 사비다」 하였다.
12난도, 난도
王丞相拜揚州,賓客數百人並加霑接,人人有説色。唯有臨海一客姓任及數胡人爲未洽,公因便還到過任邊云:「君出,臨海便無復人。」任大喜説。因過胡人前彈指云:「蘭闍,蘭闍。」群胡同笑,四坐並懽。
왕승상이 양주자사에 임명되었을 때 손 수백 사람을 아울러 적셔 대접하니 사람마다 기뻐하는 낯빛이 있었다.
오직 임해에서 온 성이 임씨인 손 하나와 오랑캐 몇 사람만이 흡족하지 못하였다.
공이 이에 돌아 임씨 곁에 이르러 말하였다. "그대가 나오니 임해에는 다시 사람이 없겠구려."
임씨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 오랑캐 앞을 지나며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였다. "난도, 난도."
뭇 오랑캐가 함께 웃고 온 자리가 아울러 기뻐하였다.
협주 2
《語林》曰:「任名顒,時官在都,預王公坐。」
『어림』에 이르기를 「임씨는 이름이 옹이니 그때 벼슬로 서울에 있어 왕공의 자리에 참여하였다」 하였다.
《晉陽秋》曰:「王導接誘應會,少有牾者。雖疎交常賓,一見多輸寫款誠,自謂爲導所遇,同之舊暱。」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도는 맞이하고 이끌어 응대함에 거스르는 이가 적었다. 비록 성기게 사귄 여느 손이라도 한 번 보면 흔히 정성을 쏟아, 스스로 왕도에게 알아줌을 받아 오랜 친함과 같다 여겼다」 하였다.
13공은 어른이고 저는 아이라 그때는 할 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陸太尉詣王丞相咨事,過後輙翻異。王公怪其如此,後以問陸。陸曰:「公長民短,臨時不知所言,既後覺其不可耳。」
육태위가 왕승상을 찾아가 일을 여쭙고는, 지나고 나면 문득 뒤집어 달리 말하였다. 왕공이 그 이러함을 이상히 여겨 뒤에 육태위에게 물었다.
육태위가 말하였다. "공은 어른이고 저는 아이라 그때는 할 말을 알지 못하다가, 뒤에야 그것이 옳지 않음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협주 1
《陸玩別傳》曰:「玩字士瑤,呉郡呉人。祖瑁,父英,仕郡有譽。玩器量淹雅,累遷侍中、尚書左僕射、尚書令,贈太尉。」
『육완별전』에 이르기를 「육완은 자가 사요요 오군 오 사람이다. 할아버지 육모와 아버지 육영이 고을에서 벼슬하여 기림이 있었다. 육완은 그릇과 도량이 넓고 우아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상서좌복야와 상서령에 이르렀고 태위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14공께서 일을 버려두심을 천하가 또한 옳다 하지 않았습니다
丞相嘗夏月至石頭看庾公。庾公正料事,丞相云:「暑可小簡之。」庾公曰:「公之遺事,天下亦未以爲允。」
승상이 일찍이 여름철에 석두에 이르러 유공을 보았다. 유공이 마침 일을 헤아리고 있으니 승상이 말하였다. "더우니 조금 덜어도 좋겠소."
유공이 말하였다. "공께서 일을 버려두심을 천하가 또한 옳다 하지 않았습니다."
협주 1
《殷羡言行》曰:「王公薨後,庾冰代相,網密刑峻。羡時行,遇收捕者於途,慨然歎曰:『丙吉問牛喘,似不爾!』嘗從容謂冰曰:『卿輩自是網目不失,皆是小道小善耳。至如王公,故能行無理事。』謝安石毎歎詠此唱。庾赤玉曾問羡:『王公治何似?詎是所長?』羡曰:『其餘令績,不復稱論。然三捉三治,三休三敗。』」
『은선언행』에 이르기를 「왕공이 죽은 뒤 유빙이 대신 재상이 되어 그물이 촘촘하고 형벌이 매서웠다. 은선이 그때 다니다가 길에서 잡아가는 이를 만나 북받쳐 탄식하기를 『병길이 소가 헐떡이는 것을 물은 것은 이와 같지 않았을 듯하다』 하였다. 일찍이 조용히 유빙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절로 그물눈을 놓치지 않으나 다 작은 길과 작은 착함일 뿐이오. 왕공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짐짓 결에 맞지 않는 일도 행할 수 있었소』 하였다. 사안석이 이 노래를 늘 탄식하며 읊었다. 유적옥이 일찍이 은선에게 『왕공의 다스림은 어떠하며 무엇이 그의 나은 바요』 물으니, 은선이 『그 나머지 좋은 업적은 다시 일컬어 따지지 않겠소. 그러나 세 번 잡아 세 번 다스리고 세 번 쉬어 세 번 무너뜨렸소』 하였다」 하였다.
15내가 흐리멍덩하다 하나 뒷사람이 이 흐리멍덩함을 그리워하리라
丞相末年,略不復省事,正封籙諾之。自嘆曰:「人言我憒憒,後人當思此憒憒。」
승상이 말년에 거의 다시 일을 살피지 않고 다만 봉하여 적어 온 것에 그렇다고만 하였다.
스스로 탄식하였다. "사람들이 나를 흐리멍덩하다 하나, 뒷사람이 마땅히 이 흐리멍덩함을 그리워하리라."
협주 1
徐廣《歴紀》曰:「導阿衡三世,經綸夷險,政務寬恕,事從簡易,故垂遺愛之譽也。」
서광의 『역기』에 이르기를 「왕도가 세 대에 걸쳐 아형이 되어 평탄함과 험함을 다스리며, 정사에 힘씀을 너그럽고 용서함으로 하고 일을 간결하고 쉬움으로 좇았으므로 남긴 사랑의 기림을 드리웠다」 하였다.
16도공이 톱밥과 대뿌리를 모아 두다
陶公性檢厲,勤於事。作荊州時,敕船官悉録鋸木屑,不限多少,咸不解此意。後正會,値積雪始晴,聽事前除雪後猶濕,於是悉用木屑覆之,都無所妨。官用竹,皆令録厚頭,積之如山。後桓宣武伐蜀,裝船,悉以作釘。又云:嘗發所在竹篙,有一官長連根取之,仍當足,乃超兩階用之。
도공은 성품이 단속하고 매서웠으며 일에 부지런하였다.
형주에 있을 때 배 맡은 벼슬아치에게 톱밥을 다 적어 거두게 하고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으니 다들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뒤에 정월 조회에 마침 쌓인 눈이 막 갠 때를 만나 마루 앞뜰이 눈 온 뒤라 아직 축축하니, 이에 다 톱밥을 써서 덮으매 도무지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관에서 대를 쓸 때에는 다 두꺼운 뿌리를 적어 두게 하여 쌓인 것이 산 같았다. 뒤에 환선무가 촉을 칠 때 배를 꾸미며 다 이것으로 못을 만들었다.
또 이르기를, 일찍이 있는 곳의 대 상앗대를 낼 때 어떤 벼슬아치가 뿌리째 뽑아 그대로 발을 삼으니 이에 두 등급을 뛰어 그를 썼다 한다.
협주 1
《晉陽秋》曰:「侃練核庶事,勤務稼穡,雖戎陳武士,皆勸厲之。有奉饋者,皆問其所由。若力役所致,懽喜慰賜;若他所得,則呵辱還之。是以軍民勤於農稼,家給人足。性纖密好問,頗類趙廣漢。嘗課營種柳,都尉夏施盜拔武昌郡西門所種。侃後自出,駐車施門,問:『此是武昌西門柳,何以盜之?』施惶怖首伏,三軍稱其明察。侃勤而整,自強不息。又好督勸於人,常云:『民生在勤,大禹聖人,猶惜寸陰,至於凡俗,當惜分陰。豈可遊逸,生無益於時,死無聞於後,是自棄也。又老莊浮華,非先王之法言而不敢行。君子當正其衣冠,攝以威儀,何有亂頭養望,自謂宏達邪?』」《中興書》曰:「侃嘗檢校佐吏,若得樗蒲博弈之具,投之曰:『樗蒲,老子入胡所作,外國戲耳。圍棋,堯舜以教愚子。博弈,紂所造。諸君國器,何以爲此?若王事之暇,患邑邑者,文士何不讀書?武士何不射弓?』談者無以易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도간은 뭇일을 익히고 헤아렸으며 농사에 힘써, 비록 싸움터의 무사라도 다 권하고 힘쓰게 하였다. 바치는 이가 있으면 다 그 말미암은 바를 물어, 만일 힘써 일하여 이룬 것이면 기뻐하며 위로하고 내려 주었고, 만일 다른 데서 얻은 것이면 꾸짖어 욕하고 돌려주었다. 이 때문에 군사와 백성이 농사에 부지런하여 집집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만족하였다. 성품이 촘촘하고 묻기를 좋아하여 자못 조광한과 비슷하였다. 일찍이 진영에 버들 심기를 매겼는데 도위 하시가 무창군 서문에 심은 것을 훔쳐 뽑았다. 도간이 뒤에 몸소 나가 하시의 문 앞에 수레를 세우고 묻기를 『이는 무창 서문의 버들인데 어찌 훔쳤는가』 하니, 하시가 두려워 자백하였고 삼군이 그 밝게 살핌을 일컬었다. 도간은 부지런하고 가지런하며 스스로 힘써 쉬지 않았다. 또 남에게 살펴 권하기를 좋아하여 늘 이르기를 『백성의 삶은 부지런함에 있다. 큰 우임금은 성인인데도 오히려 한 치 그늘을 아꼈으니, 여느 사람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한 푼 그늘을 아껴야 한다. 어찌 놀고 게을러 살아서 때에 이로움이 없고 죽어서 뒤에 들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는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또 노자와 장자는 뜬 꽃이라 앞선 임금의 법다운 말이 아니니 감히 행하지 못한다. 군자는 마땅히 그 옷과 관을 바로 하고 몸가짐으로 다잡아야 하니, 어찌 머리를 헝클고 바람만 기르며 스스로 넓고 통달하다 이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도간이 일찍이 보좌하는 아전을 살펴 만일 저포와 바둑 두는 기구를 얻으면 이를 던지며 이르기를 『저포는 노자가 오랑캐에 들어가 지은 것이니 다른 나라 놀이일 뿐이다. 바둑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어리석은 아들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노름은 주가 지은 것이다. 그대들은 나라의 그릇인데 무엇으로 이를 하는가. 만일 왕의 일에 겨를이 있어 답답함을 걱정한다면, 글하는 선비는 어찌 글을 읽지 않으며 무예 하는 선비는 어찌 활을 쏘지 않는가』 하였다. 이야기하는 이들이 이를 바꿀 말이 없었다」 하였다.
17곽임종 같은 문지기를 얻을 수 있다면
何驃騎作會稽,虞存弟謇作郡主簿,以何見客勞損,欲白斷常客,使家人節量,擇可通者作白事成,以見存。存時爲何上佐,正與謇共食,語云:「白事甚好,待我食畢作教。」食竟,取筆題白事後云:「若得門庭長如郭林宗者,當如所白。汝何處得此人?」謇於是止。
하표기가 회계를 맡았을 때 우존의 아우 우건이 고을 주부가 되었는데, 하표기가 손 만나기에 지치고 상하는 것을 보고 여느 손을 끊자고 아뢰어 집사람이 헤아려 통할 만한 이를 가리게 하려 하였다. 아뢸 글을 지어 우존에게 보였다.
우존이 그때 하표기의 상좌였는데 마침 우건과 함께 밥을 먹다가 말하였다. "아뢸 글이 몹시 좋다. 내가 밥을 다 먹기를 기다려 답을 쓰겠다."
밥을 마치고 붓을 들어 아뢸 글 뒤에 적었다. "만일 곽임종 같은 문지기를 얻을 수 있다면 마땅히 아뢴 바와 같이 하리라. 너는 어디서 이런 사람을 얻겠느냐."
우건이 이에 그만두었다.
협주 3
《晉陽秋》曰:「何充字次道,廬江人。思韻淹通,有文義才情。累遷會稽内史、侍中、驃騎將軍、揚州刺史。贈司徒。」
『진양추』에 이르기를 「하충은 자가 차도요 여강 사람이다. 생각과 운치가 깊이 통하고 글과 뜻과 재주와 정이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회계내사와 시중과 표기장군과 양주자사에 이르렀고 사도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孫統存誄敘》曰:「存字道長,會稽山陰人也。祖陽,散騎常侍。父偉,州西曹。存幼而卓拔,風情髙逸,歴衞軍長史、尚書吏部郎。」范汪《棋品》曰:「謇字道眞,仕至郡功曹。」
손통의 「존뢰서」에 이르기를 「우존은 자가 도장이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할아버지 우양은 산기상시요 아버지 우위는 주의 서조다. 우존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고 풍모와 정이 높고 시원하였으며 위군장사와 상서이부랑을 지냈다」 하였다. 범왕의 『기품』에 이르기를 「우건은 자가 도진이요 벼슬이 고을 공조에 이르렀다」 하였다.
《泰別傳》曰:「泰字林宗,有人倫鑒識。題品海内之士,或在幼童,或在里肆,後皆成英彦六十餘人。自著書一巻,論取士之本,未行,遭亂亡失。」
『태별전』에 이르기를 「곽태는 자가 임종이요 사람됨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온 세상 선비를 제목 붙여 품평하였는데, 더러는 어린아이 가운데 있고 더러는 마을 저자에 있던 이들이 뒤에 다 뛰어난 인물이 된 것이 예순 남짓이었다. 스스로 책 한 권을 지어 선비 뽑는 근본을 논하였는데, 퍼뜨리기 전에 난을 만나 잃었다」 하였다.
18내가 이것을 보지 않으면 그대들이 어찌 살아가겠소
王劉與深公共看何驃騎,驃騎看文書不顧之。王謂何曰:「我今故與深公來相看,望卿擺撥常務,應對共言,哪得方低頭看此邪?」何曰:「我不看此,卿等何以得存?」諸人以爲佳。
왕몽과 유담이 심공과 함께 하표기를 보러 갔는데, 표기가 문서를 보며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왕몽이 하표기에게 말하였다. "내가 오늘 짐짓 심공과 함께 뵈러 왔으니, 그대가 늘 하던 일을 밀쳐 놓고 응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기를 바랐소. 어찌 바야흐로 머리를 숙이고 이것을 보고 계시오."
하표기가 말하였다. "내가 이것을 보지 않으면 그대들이 무엇으로 살아가겠소."
여러 사람이 좋은 말이라 하였다.
협주 1
《晉陽秋》曰:「何充與王濛、劉惔好尚不同,由此見譏於當世。」
『진양추』에 이르기를 「하충은 왕몽·유담과 좋아하고 높이는 바가 같지 않아,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에서 나무람을 받았다」 하였다.
19나는 오히려 그것이 무거울까 걱정하오
桓公在荊州,全欲以德被江漢,恥以威刑肅物。令史受杖,正從朱衣上過。桓式年少,從外來,云:「向從閣下過,見令史受杖,上捎雲根,下拂地足。」意譏不著。桓公云:「我猶患其重。」
환공이 형주에 있을 때 오로지 덕을 강수와 한수에 입히려 하고 위엄과 형벌로 사물을 다잡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영사가 매를 받을 때 다만 붉은 옷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환식이 나이 어렸는데 밖에서 와서 말하였다. "아까 관아 아래를 지나다가 영사가 매 받는 것을 보았는데, 위로는 구름 뿌리를 스치고 아래로는 땅바닥을 떨칠 뿐이더이다."
닿지 않는다고 나무라려는 뜻이었다.
환공이 말하였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무거울까 걱정한다."
협주 2
《温別傳》曰:「温以永和元年自徐州遷荊州刺史,在州寬和,百姓安之。」
『온별전』에 이르기를 「환온이 영화 원년에 서주에서 형주자사로 옮겼는데, 주에 있으며 너그럽고 화하니 백성이 편안히 여겼다」 하였다.
式,桓歆小字也。《桓氏譜》曰:「歆字叔道,温第三子,仕至尚書。」
식은 환흠의 아이 적 이름이다. 『환씨보』에 이르기를 「환흠은 자가 숙도요 환온의 셋째 아들이니 벼슬이 상서에 이르렀다」 하였다.
20하루에 만 가지 일인데 어찌 빠를 수 있겠소
簡文爲相,事動經年,然後得過。桓公甚患其遲,常加勸免。太宗曰:「一日萬機,那得速!」
간문제가 재상이 되었을 때 일이 움직이면 해를 넘긴 뒤에야 지나갈 수 있었다. 환공이 그 더딤을 몹시 걱정하여 늘 힘써 권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하루에 만 가지 일인데 어찌 빠를 수 있겠소."
협주 1
《尚書·皋陶謨》:「一日萬機。」孔安國曰:「幾,微也。言當戒懼萬事之微。」
『상서·고요모』에 「하루에 만 가지 기미다」 하였다. 공안국이 이르기를 「기는 작은 것이다. 마땅히 온갖 일의 작은 기미를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21사나운 정사를 이어받았으니 부드럽고 고요함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다
山遐去東陽,王長史就簡文索東陽云:「承藉猛政,故可以和靜致治。」
산하가 동양을 떠나자 왕장사가 간문제에게 동양을 구하며 말하였다. "사나운 정사를 이어받았으니 짐짓 부드럽고 고요함으로 다스림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
협주 1
《東陽記》云:「遐字彦林,河内人。祖濤,司徒。父簡,儀同三司。遐歴武陵王友、東陽太守。」《江惇傳》曰:「山遐爲東陽,風政嚴苛,多任刑殺,郡内苦之。惇隱東陽,以仁恕懷物,遐感其德,爲微損威猛。」
『동양기』에 이르기를 「산하는 자가 언림이요 하내 사람이다. 할아버지 산도는 사도요 아버지 산간은 의동삼사다. 산하는 무릉왕의 벗과 동양태수를 지냈다」 하였다. 「강돈전」에 이르기를 「산하가 동양을 맡아 풍모와 정사가 엄하고 가혹하여 흔히 형벌과 죽임에 맡기니 고을 안이 괴로워하였다. 강돈이 동양에 숨어 어짊과 용서로 사물을 품으니 산하가 그 덕에 느껴 위엄과 사나움을 조금 덜었다」 하였다.
22자사가 엄하여 감히 밤길을 다니지 못하오
殷浩始作揚州,劉尹行,日小欲晩,便使左右取襆,人問其故?荅曰:「刺史嚴,不敢夜行。」
은호가 처음 양주자사가 되었을 때 유윤이 다니다가 날이 조금 저물려 하니 곧 곁의 사람을 시켜 보따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자사가 엄하여 감히 밤길을 다니지 못하오."
협주 1
《浩別傳》曰:「浩字淵源,陳郡長平人。祖識,濮陽相。父羡,光祿勳。浩少有重名,仕至揚州刺史、中軍將軍。」《中興書》曰:「建元初,庾亮兄弟、何充等相尋薨,太宗以撫軍輔政,徴浩爲揚州,從民譽也。」
『호별전』에 이르기를 「은호는 자가 연원이요 진군 장평 사람이다. 할아버지 은식은 복양상이요 아버지 은선은 광록훈이다. 은호는 젊어서 무거운 이름이 있었고 벼슬이 양주자사와 중군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건원 처음에 유량 형제와 하충 들이 잇달아 죽으니, 태종이 무군장군으로 정사를 도우며 은호를 양주로 불렀는데 백성의 기림을 좇은 것이다」 하였다.
23이 무리를 두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서울이라 하겠는가
謝公時,兵厮逋亡,多近竄南塘,下諸舫中。或欲求一時搜索,謝公不許,云:「若不容置此輩,何以爲京都?」
사공 때에 군사와 종들이 달아나 숨는 일이 많아, 흔히 가까운 남당에 숨어 여러 배 안으로 내려갔다.
어떤 이가 한꺼번에 뒤지기를 구하니 사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만일 이 무리를 담아 두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서울이라 하겠는가."
협주 1
《續晉陽秋》曰:「自中原喪亂,民離本域,江左造創,豪族併兼,或客寓流離,名籍不立。太元中,外禦強氐,蒐簡民實,三呉頗加澄檢,正其里伍。其中時有山湖遁逸,往來都邑者。後將軍安方接客,時人有於坐言:『宜糾舍藏之失者。』安毎以厚德化物,去其煩細。又以強寇入境,不宜加動人情。乃答之云:『卿所憂,在於客耳!然不爾,何以爲京都?』言者有慚色。」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중원이 무너진 뒤로 백성이 본디 살던 땅을 떠나고 강좌가 새로 만들어지자, 호족이 아우르고 삼켜 더러는 붙어 살며 떠돌아 이름과 호적이 서지 않았다. 태원 연간에 밖으로 굳센 저족을 막으며 백성의 실상을 뽑아 헤아리는데, 삼오에서 자못 맑게 살펴 그 마을 조직을 바로잡았다. 그 가운데 때로 산과 호수에 숨었다가 도읍을 오가는 이가 있었다. 후장군 사안이 바야흐로 손을 맞을 때, 그때 사람 가운데 자리에서 『마땅히 숨겨 둔 잘못을 밝혀내야 합니다』 하는 이가 있었다. 사안이 늘 두터운 덕으로 사물을 바꾸어 그 번거롭고 잗단 것을 버렸고, 또 굳센 도적이 지경에 들어왔으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그대가 근심하는 바는 손에게 있을 뿐이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무엇으로 서울이라 하겠소』 하니, 말한 이가 부끄러운 낯빛이 있었다」 하였다.
24왕승미가 제 뜻으로 반쯤을 고치다
王大爲吏部郎,嘗作選草,臨當奏,王僧彌來,聊出示之。僧彌得便以己意改易所選者近半,王大甚以爲佳,更寫即奏。
왕대가 이부랑이 되어 일찍이 사람 뽑을 초안을 지었는데, 아뢰려 할 즈음에 왕승미가 오니 잠깐 꺼내 보였다.
승미가 얻어 곧 제 뜻으로 뽑은 이들을 반쯤 고쳐 바꾸었다. 왕대가 몹시 좋게 여겨 다시 베껴 곧 아뢰었다.
협주 2
王忱已見。
왕침은 이미 보인다.
僧彌,王珉小字也。《珉別傳》曰:「珉字季琰,琅邪人,丞相導孫,中領軍洽少子。有才蓺,善行書,名出兄珣右,累遷侍中、中書令。贈太常。」
승미는 왕민의 아이 적 이름이다. 『민별전』에 이르기를 「왕민은 자가 계염이요 낭야 사람이니 승상 왕도의 손자요 중령군 왕흡의 작은아들이다. 재주와 재주가 있고 행서를 잘 써서 이름이 형 왕순의 위에 났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중서령에 이르렀고 태상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25오직 장조희와 정이 날로 두터워질 뿐이오
王東亭與張冠軍善。王既作呉郡,人問小令曰:「東亭作郡,風政何似?」答曰:「不知治化何如,唯與張祖希情好日隆耳。」
왕동정이 장관군과 사이가 좋았다. 왕동정이 오군을 맡게 되자 사람들이 소령에게 물었다. "동정이 고을을 맡았는데 풍모와 정사가 어떠하오."
대답하였다. "다스림과 가르침이 어떠한지는 모르겠고, 오직 장조희와 정이 날로 두터워질 뿐이오."
협주 2
張玄已見。
장현은 이미 보인다.
《續晉陽秋》曰:「王獻之爲中書令,王珉代之,時人曰『大小王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헌지가 중서령이 되고 왕민이 그를 대신하니 그때 사람들이 『큰 왕령과 작은 왕령』이라 하였다」 하였다.
26고요가 형벌의 제도를 지었으나 어질지 않다 하지 않습니다
殷仲堪當之荊州,王東亭問曰:「德以居全爲稱,仁以不害物爲名。方今宰牧華夏,處殺戮之職,與本操將不乖乎?」殷答曰:「皋陶造刑辟之制,不爲不賢;孔丘居司寇之任,未爲不仁。」
은중감이 형주로 가려 할 때 왕동정이 물었다. "덕은 온전함에 머무는 것으로 일컬음을 삼고, 어짊은 사물을 해치지 않는 것으로 이름을 삼소. 이제 바야흐로 중원을 다스려 죽이는 자리에 계시게 되니, 본디 지키던 바와 어긋나지 않겠소."
은중감이 대답하였다. "고요가 형벌의 제도를 지었으나 어질지 않다 하지 않고, 공자가 사구의 소임에 있었으나 어질지 않다 하지 않습니다."
협주 2
《古史考》曰:「庭堅號曰皋陶,舜謀臣也。舜舉之於堯,堯令作士,主刑。」
『고사고』에 이르기를 「정견은 호를 고요라 하니 순임금의 꾀하는 신하다. 순임금이 요임금에게 그를 천거하니 요임금이 사가 되어 형벌을 맡게 하였다」 하였다.
《家語》曰:「孔子自魯司空爲大司寇,三日而誅亂法大夫少正卯。」
『가어』에 이르기를 「공자가 노나라 사공에서 대사구가 되어 사흘 만에 법을 어지럽힌 대부 소정묘를 베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