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世説新語 文學第四
1정현이 마융의 문하에서 세 해를 뵙지 못하다
鄭玄在馬融門下,三年不得相見,髙足弟子傳授而已。嘗算渾天不合,諸弟子莫能解。或言玄能者,融召令算,一轉便決,衆咸駭服。及玄業成,辭歸,既而融有「禮樂皆東」之嘆。恐玄擅名而心忌焉。玄亦疑有追,乃坐橋下,在水上據屐。融果轉式逐之,告左右曰:「玄在土下水上而據木,此必死矣。」遂罷追,玄竟以得免。
정현이 마융의 문하에 있으면서 세 해 동안 서로 뵙지 못하고 뛰어난 제자가 전해 줄 뿐이었다.
일찍이 혼천의를 셈하는데 맞지 않아 여러 제자가 풀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정현이 할 수 있다 하니 마융이 불러 셈하게 하매 한 번 돌리자 곧 풀리니 뭇사람이 다 놀라 따랐다.
정현이 학업을 이루고 하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마융이 「예와 악이 다 동쪽으로 간다」는 탄식을 하였다. 정현이 이름을 오로지할까 두려워 마음으로 시새운 것이다.
정현도 뒤쫓아 올까 의심하여 이에 다리 아래에 앉아 물 위에서 나막신을 짚었다. 마융이 과연 점판을 돌려 그를 좇다가 곁의 사람에게 일렀다. "정현이 흙 아래 물 위에 있으면서 나무를 짚었으니 이는 반드시 죽었다."
마침내 쫓기를 그만두니 정현이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협주 3
《融自敘》曰:「融字季長,右扶風茂陵人。少而好問,學無常師。大將軍鄧騭召爲舍人,棄,遊武都。會羌虜起,自關以西道斷。融以謂古人有言:『左手據天下之圖,而右手刎其喉,愚夫不爲。何則?生貴於天下也。豈以曲俗咫尺爲羞,滅無限之身哉?』因往應之,爲校書郎,出爲南郡太守。」
「마융자서」에 이르기를 「마융은 자가 계장이요 우부풍 무릉 사람이다. 어려서 묻기를 좋아하였고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대장군 등즐이 불러 사인으로 삼았으나 버리고 무도에 노닐었다. 마침 강족 오랑캐가 일어나 관 서쪽으로 길이 끊겼다. 마융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왼손으로 천하의 그림을 잡고 오른손으로 제 목을 찌르는 일은 어리석은 사내도 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삶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어찌 굽은 세속의 자잘함을 부끄러워하여 끝없는 몸을 없애겠는가』 하고, 이로 인해 가서 응하여 교서랑이 되었고 남군태수로 나갔다」 하였다.
《髙士傳》曰:「玄字康成,北海髙密人。八世祖崇,漢尚書。」《玄別傳》曰:「玄少好學書數,十三誦五經,好天文占候,風角隱術。年十七,見大風起,詣縣曰:『某時當有火災。』至時果然,智者異之。年二十一,博極群書,精暦數圖緯之言,兼精算術。遂去吏,師故兗州刺史第五元。先就東郡張恭祖受《周禮》、《禮記》、《春秋傳》。周流博觀,毎經歴山川,及接顏一見,皆終身不忘。扶風馬季長以英儒著名,玄往從之,參考同異。季長后戚,嫚於待士,玄不得見,住左右,自起精廬,既因紹介得通。時涿郡盧子榦爲門人冠首,季長又不解剖裂七事,玄思得五,子榦得二。季長謂子榦曰:『吾與汝皆弗如也。』季長臨別,執玄手曰:『大道東矣,子勉之!』後遇黨錮,隱居著述,凡百餘萬言。大將軍何進辟玄,乃縫掖相見。玄長八尺餘,鬚眉美秀,姿容甚偉。進待以賓禮,授以几杖。玄多所匡正,不用而退。袁紹辟玄,及去,餞之城東,欲玄必醉。會者三百餘人,皆離席奉觴,自旦及莫,度玄飲三百餘桮,而温克之容,終日無怠。獻帝在許都,徴爲大司農,行至元城卒。」
『고사전』에 이르기를 「정현은 자가 강성이요 북해 고밀 사람이다. 팔 대 조상 정숭은 한나라 상서다」 하였다. 『현별전』에 이르기를 「정현은 어려서 글과 셈을 좋아하여 열셋에 오경을 외웠고, 천문과 점치기와 바람 보기와 숨은 술법을 좋아하였다. 열일곱에 큰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현에 나아가 『아무 때에 마땅히 불난리가 있으리라』 하였는데 그때가 되어 과연 그러하니 슬기로운 이가 기이하게 여겼다. 스물하나에 뭇 책을 널리 다하고 책력과 도참의 말에 정통하였으며 셈법까지 정통하였다. 마침내 아전을 그만두고 옛 연주자사 제오원을 스승 삼았다. 먼저 동군 장공조에게 나아가 『주례』와 『예기』와 『춘추전』을 받았다. 두루 흘러 널리 보아 산과 내를 지날 때마다 또 낯을 맞대 한 번 보면 다 한평생 잊지 않았다. 부풍의 마계장이 뛰어난 선비로 이름났으므로 정현이 가서 좇아 같고 다름을 견주어 상고하였다. 마계장은 뒷날의 외척이라 선비 대접에 게을러 정현이 뵙지 못하고 곁에 머물며 스스로 정려를 세웠다가, 이윽고 소개를 말미암아 통할 수 있었다. 그때 탁군의 노자간이 문인 가운데 으뜸이었는데, 마계장이 또 일곱 가지 일을 쪼개지 못하니 정현이 생각하여 다섯을 얻고 자간이 둘을 얻었다. 마계장이 자간에게 이르기를 『나와 너는 다 그만 못하다』 하였다. 마계장이 헤어질 때 정현의 손을 잡고 『큰 도가 동쪽으로 간다. 그대는 힘쓰라』 하였다. 뒤에 당고를 만나 숨어 살며 글을 지으니 무릇 백만여 마디였다. 대장군 하진이 정현을 부르니 이에 넓은 소매 옷으로 서로 보았다. 정현은 키가 여덟 자 남짓이요 수염과 눈썹이 아름답고 빼어나며 모습이 몹시 훌륭하였다. 하진이 손의 예로 대하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 정현이 바로잡을 바가 많았으나 쓰이지 않으매 물러났다. 원소가 정현을 부르고 떠날 때 성 동쪽에서 전송하며 정현을 반드시 취하게 하려 하였다. 모인 이가 삼백여 사람이었는데 다 자리를 떠나 잔을 받들어,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정현이 삼백여 잔을 마신 것으로 헤아려지는데도 따뜻하고 다잡은 모습이 온종일 게으름이 없었다. 헌제가 허도에 있을 때 불러 대사농으로 삼았는데 가다가 원성에 이르러 죽었다」 하였다.
馬融海内大儒,被服仁義。鄭玄名列門人,親傳其業,何猜忌而行鴆毒乎?委巷之言,賊夫人之子。
마융은 온 세상의 큰 선비로 어짊과 옳음을 옷으로 입었다. 정현은 이름이 문인에 들어 몸소 그 학업을 전해 받았는데, 무엇을 시새워 짐독을 행하였겠는가. 뒷골목의 말이니 남의 자식을 해치는 것이다.
2이제 주 낸 것을 다 그대에게 드리겠소
鄭玄欲注《春秋傳》,尚未成時,行與服子愼遇宿客舍,先未相識,服在外車上與人説己注傳意。玄聽之良久,多與己同。玄就車與語曰:「吾久欲注,尚未了。聽君向言,多與吾同。今當盡以所注與君。」遂爲服氏注。
정현이 『춘추전』에 주를 내려 하여 아직 이루지 못하였을 때, 길을 가다 복자신과 만나 여관에 묵게 되었다. 앞서 서로 알지 못하였는데, 복자신이 밖에서 수레 위에 있으면서 남에게 제가 전에 주 낸 뜻을 말하였다.
정현이 한참을 듣자니 제 것과 같은 것이 많았다. 정현이 수레로 나아가 말하였다. "내가 오래전부터 주를 내려 하였으나 아직 마치지 못하였소. 그대가 아까 한 말을 들으니 나와 같은 것이 많소. 이제 마땅히 주 낸 것을 다 그대에게 드리겠소."
마침내 복씨의 주가 되었다.
협주 1
《漢南紀》曰:「服虔字子愼,河南滎陽人。少行淸苦,爲諸生,尤明《春秋左氏傳》,爲作訓解。舉孝廉,爲尚書郎、九江太守。」
『한남기』에 이르기를 「복건은 자가 자신이요 하남 형양 사람이다. 젊어서 맑고 괴로이 행하여 여러 유생이 되었고, 『춘추좌씨전』에 더욱 밝아 뜻풀이를 지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과 구강태수가 되었다」 하였다.
3어찌하여 진흙 속에 있는가
鄭玄家奴婢皆讀書。嘗使一婢,不稱旨,將撻之。方自陳説,玄怒,使人曳箸泥中。須臾,復有一婢來,問曰:「胡爲乎泥中?」荅曰:「薄言往愬,逢彼之怒。」
정현의 집에서는 사내종과 계집종이 다 글을 읽었다.
일찍이 한 계집종을 부렸는데 뜻에 맞지 않아 매를 치려 하였다. 바야흐로 스스로 아뢰어 말하니 정현이 성내어 사람을 시켜 진흙 속에 끌어다 두게 하였다.
잠깐 뒤에 또 한 계집종이 와서 물었다. "어찌하여 진흙 속에 있는가."
대답하였다. "잠깐 가서 하소연하다가 저이의 성냄을 만났다."
협주 2
《衞·式微》詩也。毛公曰:「泥中,衞邑名也。」
『위풍·식미』의 시다. 모공이 이르기를 「이중은 위나라 고을 이름이다」 하였다.
衞邶《柏舟》之詩。
위나라 「패풍·백주」의 시다.
4자신아, 자신아
服虔既善《春秋》,將爲注,欲參考同異,聞崔烈集門生講傳,遂匿姓名,爲烈門人賃作食。毎當至講時,輙竊聽戸壁間。既知不能踰己,稍共諸生敘其短長。烈聞,不測何人,然素聞虔名,意疑之。明蚤往,及未寤,便呼:「子愼!子愼!」虔不覺驚應,遂相與友善。
복건이 『춘추』를 잘하여 주를 내려 하면서 같고 다른 데를 견주어 상고하고자 하였다. 최열이 문생을 모아 『춘추전』을 강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성과 이름을 숨기고 최열의 문인을 위해 삯 받고 밥 짓는 일을 하였다.
강할 때가 될 때마다 문득 문과 벽 사이에서 몰래 들었다. 이윽고 저를 넘지 못함을 알고 차츰 여러 제자와 함께 그 낫고 못함을 말하였다.
최열이 듣고 어떤 사람인지 헤아리지 못하였으나 본디 복건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마음에 그를 의심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가서 아직 깨어나기 전에 곧 불렀다. "자신아, 자신아."
복건이 저도 모르게 놀라 대답하니 마침내 서로 벗이 되어 사이가 좋았다.
협주 1
摯虞《文章志》曰:「烈字威考,髙陽安平人,駰之孫,瑗之兄子也。靈帝時,官至司徒、太尉,封陽平亭侯。」
지우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최열은 자가 위고요 고양 안평 사람이니 최인의 손자요 최원의 조카다. 영제 때 벼슬이 사도와 태위에 이르렀고 양평정후에 봉해졌다」 하였다.
5종회가 사본론을 지어 문 밖에서 던지고 달아나다
鍾會撰《四本論》,始畢,甚欲使嵇公一見。置懷中,既定,畏其難,懷不敢出,於戸外遙擲,便回急走。
종회가 『사본론』을 지어 처음 마치고, 혜공에게 한 번 보이고 싶어 몹시 바랐다.
품속에 넣고 이르러서는, 그가 따질까 두려워 품은 채 감히 꺼내지 못하고 문 밖에서 멀리 던지고 곧 돌아서서 급히 달아났다.
협주 1
《三國志·魏志》曰:「會論才性同異,傳於世。『四本』者:言才性同,才性異,才性合,才性離也。尚書傅嘏論同,中書令李豐論異,侍郎鍾會論合,屯騎校尉王廣論離。文多不載。」
『삼국지·위지』에 이르기를 「종회가 재주와 성품의 같고 다름을 논하여 세상에 전한다. 『사본』이란 재주와 성품이 같음, 재주와 성품이 다름, 재주와 성품이 합함, 재주와 성품이 갈림을 말한 것이다. 상서 부하는 같음을 논하고, 중서령 이풍은 다름을 논하고, 시랑 종회는 합함을 논하고, 둔기교위 왕광은 갈림을 논하였다. 글이 많아 싣지 않는다」 하였다.
6왕필이 스스로 손과 주인이 되어 몇 번을 오가다
何晏爲吏部尚書,有位望,時談客盈坐,王弼未弱冠,往見之。晏聞弼名,因條向者勝理語弼曰:「此理僕以爲極,可得復難不?」弼便作難,一坐人便以爲屈,於是弼自爲客主數番,皆一坐所不及。
하안이 이부상서가 되어 자리와 바람이 있으니, 그때 이야기하는 손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왕필이 아직 스물이 안 되었는데 가서 그를 뵈었다.
하안이 왕필의 이름을 듣고 이에 아까 나온 뛰어난 결을 조목조목 들어 왕필에게 말하였다. "이 결을 나는 지극하다 여기는데 다시 따질 수 있겠소."
왕필이 곧 따지니 온 자리 사람이 곧 굽혔다 여겼다. 이에 왕필이 스스로 손과 주인이 되어 몇 번을 오가니 다 온 자리가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협주 2
《文章敘録》曰:「晏能淸言,而當時權勢,天下談士,多宗尚之。」《魏氏春秋》曰:「晏少有異才,善談《易》《老》。」
『문장서록』에 이르기를 「하안은 맑은 이야기를 잘하였고, 그때의 권세 있는 이와 천하의 이야기하는 선비가 흔히 그를 마루로 삼고 높였다」 하였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하안은 젊어서 남다른 재주가 있어 『역』과 『노자』를 잘 말하였다」 하였다.
《弼別傳》曰:「弼字輔嗣,山陽髙平人。少而察惠,十餘歳便好《莊》《老》。通辯能言,爲傅嘏所知。吏部尚書何晏甚奇之,題之曰:『後生可畏。若斯人者,可與言天人之際矣!』以弼補臺郎。弼事功雅非所長,益不留意,頗以所長笑人,故爲時士所嫉。又爲人淺而不識物情。初與王黎、荀融善,黎奪其黃門郎,於是恨黎,與融亦不終好。正始中以公事免。其秋遇癘疾亡,時年二十四。弼之卒也,晉景帝嗟歎之累日,曰:『天喪予!』其爲髙識悼惜如此。」
『필별전』에 이르기를 「왕필은 자가 보사요 산양 고평 사람이다. 어려서 살피고 슬기로워 열 남짓에 곧 『장자』와 『노자』를 좋아하였다. 통하여 따지고 말을 잘하여 부하에게 알려졌다. 이부상서 하안이 몹시 기이하게 여겨 제목 붙이기를 『뒤에 난 이가 두렵다. 이 같은 사람이라면 더불어 하늘과 사람의 갈피를 말할 만하다』 하고 왕필을 대랑에 채웠다. 왕필은 일의 공로가 우아하게 잘하는 바가 아니라 더욱 마음을 두지 않았고, 자못 잘하는 바로 남을 비웃었으므로 그때 선비들에게 시새움을 받았다. 또 사람됨이 얕아 사물의 실정을 알지 못하였다. 처음에 왕려·순융과 사이가 좋았는데, 왕려가 그 황문랑 자리를 빼앗으매 이에 왕려를 한하였고 순융과도 끝까지 좋지 못하였다. 정시 연간에 공의 일로 벼슬을 잃었다. 그 가을에 돌림병을 만나 죽으니 그때 나이 스물넷이었다. 왕필이 죽자 진나라 경제가 여러 날 탄식하며 『하늘이 나를 버리셨다』 하였으니, 높은 식견 있는 이에게 슬퍼하고 아까워함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7이런 사람이라면 하늘과 사람의 갈피를 말할 만하다
何平叔注《老子》,始成,詣王輔嗣。見王注精奇,迺神伏曰:「若斯人,可與論天人之際矣!」因以所注爲《道德二論》。
하평숙이 『노자』에 주를 내어 처음 이루고 왕보사를 찾아갔다.
왕필의 주가 곱고 기이함을 보고 이에 정신으로 엎드리며 말하였다. "이런 사람이라면 더불어 하늘과 사람의 갈피를 말할 만하다."
이로 인해 주 낸 것을 『도덕이론』으로 삼았다.
협주 1
《魏氏春秋》曰:「弼論道約美不如晏,自然出拔過之。」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왕필은 도를 논함이 간결하고 아름답기로는 하안만 못하나 저절로 그러함이 빼어남은 그를 넘었다」 하였다.
8성인은 없음을 몸으로 하니 없음은 또 가르칠 수 없다
王輔嗣弱冠詣裴徽,徽問曰:「夫無者,誠萬物之所資,聖人莫肯致言,而老子申之無已,何邪?」弼曰:「聖人體無,無又不可以訓,故言必及有;《老》《莊》未免於有,恆訓,其所不足。」
왕보사가 스무 살에 배휘를 찾아가니 배휘가 물었다. "무릇 없음이란 참으로 만물이 밑천 삼는 바인데 성인은 즐겨 말한 적이 없고 노자는 이를 펴기를 그치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가."
왕필이 말하였다. "성인은 없음을 몸으로 하는데 없음은 또 가르칠 수 없으므로 말이 반드시 있음에 미쳤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있음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늘 그 모자란 바를 가르친 것입니다."
협주 2
《永嘉流人名》曰:「徽字文季,河東聞喜人,太常潛少弟也。仕至冀州刺史。」
『영가유인명』에 이르기를 「배휘는 자가 문계요 하동 문희 사람이니 태상 배잠의 작은아우다. 벼슬이 기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弼別傳》曰:「弼父爲尚書郎,裴徽爲吏部郎,徽見異之,故問。」
『필별전』에 이르기를 「왕필의 아버지가 상서랑이었고 배휘가 이부랑이었는데, 배휘가 보고 기이하게 여겼으므로 물은 것이다」 하였다.
9배기주가 두 집안의 뜻을 풀어 주다
傅嘏善言虚勝,荀粲談尚玄遠。毎至共語,有爭而不相喩。裴冀州釋二家之義,通彼我之懷,常使兩情皆得,彼此倶暢。
부하는 비고 뛰어난 것을 잘 말하였고 순찬은 이야기가 아득하고 먼 것을 높였다. 함께 말할 때마다 다투면서도 서로 깨우치지 못하였다.
배기주가 두 집안의 뜻을 풀어 저와 나의 품은 바를 통하게 하니, 늘 두 마음이 다 얻어지고 이쪽저쪽이 함께 시원해졌다.
협주 3
《魏志》曰:「嘏字蘭碩,北地泥陽人,傅介子之後也。累遷河南尹、尚書。嘏嘗論才性同異,鍾會集而論之。」《傅子》曰:「嘏既達治好正,而有淸理識要,如論才性,原本精微,鮮能及之。司隸鍾會年甚少,嘏以明知交會。」
『위지』에 이르기를 「부하는 자가 난석이요 북지 이양 사람이니 부개자의 뒤다. 여러 벼슬을 거쳐 하남윤과 상서에 이르렀다. 부하가 일찍이 재주와 성품의 같고 다름을 논하니 종회가 모아 논하였다」 하였다. 『부자』에 이르기를 「부하는 이미 다스림에 통달하고 바름을 좋아하였으며, 맑은 결과 식견의 요긴함이 있었다. 재주와 성품을 논한 것 같은 것은 뿌리를 캐고 곱고 은미하여 미칠 수 있는 이가 드물었다. 사예 종회가 나이 몹시 젊었는데 부하가 밝게 알아 사귀었다」 하였다.
《粲別傳》曰:「粲字奉倩,潁川潁陰人,太尉彧少子也。粲諸兄儒術論議各知名。粲能言玄遠,常以子貢稱『夫子之言性與天道,不可得而聞也』,然則六籍雖存,固聖人之糠秕。能言者不能屈。」
『찬별전』에 이르기를 「순찬은 자가 봉천이요 영천 영음 사람이니 태위 순욱의 작은아들이다. 순찬의 여러 형은 유가의 학술과 논의로 저마다 이름이 알려졌다. 순찬은 아득하고 먼 것을 잘 말하여, 늘 자공이 『선생님의 성품과 하늘의 도에 대한 말씀은 얻어 들을 수 없었다』 한 것을 들어, 그렇다면 여섯 경전이 비록 있으나 본디 성인의 쭉정이라 하였다. 말 잘하는 이도 그를 굽히지 못하였다」 하였다.
《粲別傳》曰:「粲太和初到京邑,與傅嘏談,嘏善名理,而粲尚玄遠,宗致雖同,倉卒時或格而不相得意。裴徽通彼我之懷,爲二家釋。頃之,粲與嘏善。」《管輅傳》曰:「裴使君有髙才逸度,善言玄妙也。」
『찬별전』에 이르기를 「순찬이 태화 처음에 서울에 이르러 부하와 이야기하였는데, 부하는 이름과 결을 잘하고 순찬은 아득하고 먼 것을 높여, 마루로 삼는 바는 비록 같아도 갑작스러운 때에는 더러 막혀 서로 뜻을 얻지 못하였다. 배휘가 저와 나의 품은 바를 통하게 하여 두 집안을 위해 풀어 주었다. 얼마 뒤 순찬이 부하와 사이가 좋아졌다」 하였다. 「관로전」에 이르기를 「배사군은 높은 재주와 뛰어난 도량이 있어 아득하고 묘한 것을 잘 말하였다」 하였다.
10하안이 왕필의 말을 듣고 다시 주를 내지 않다
何晏注《老子》未畢,見王弼自説注《老子》旨。何意多所短,不復得作聲,但應諾諾。遂不復注,因作《道德論》。
하안이 『노자』에 주 내기를 마치지 못하였을 때, 왕필이 『노자』에 주 낸 뜻을 스스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하안의 뜻이 짧은 데가 많아 다시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만 예예 하고 응할 뿐이었다. 마침내 다시 주를 내지 않고 이로 인해 『도덕론』을 지었다.
협주 1
《文章敘録》曰:「自儒者論以老子非聖人,絶禮棄學。晏説與聖人同,著論行於世也。」
『문장서록』에 이르기를 「유가들의 논으로부터 노자는 성인이 아니어서 예를 끊고 배움을 버렸다 하였다. 하안은 성인과 같다고 말하여 논을 지으니 세상에 퍼졌다」 하였다.
11배일민이 요사이 여기 있으니 그대가 가서 물으시오
中朝時,有懷道之流,有詣王夷甫咨疑者。値王昨已語多,小極,不復相酬荅,乃謂客曰:「身今少惡,裴逸民亦近在此,君可往問。」
중원 때에 도를 품은 무리가 있었는데, 왕이보를 찾아가 의심나는 것을 여쭈려는 이가 있었다.
마침 왕이보가 어제 이미 말을 많이 하여 조금 지쳐 다시 응대하여 답하지 못하고, 이에 손에게 말하였다. "제가 오늘은 조금 언짢고 배일민도 요사이 여기 있으니 그대가 가서 물으시오."
협주 1
《晉諸公贊》曰:「裴頠談理,與王夷甫不相推下。」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배위가 결을 말함에 왕이보와 서로 밀치지 않았다」 하였다.
12배위가 숭유론을 짓다
裴成公作《崇有論》,時人攻難之,莫能折。唯王夷甫來,如小屈。時人即以王理難裴,理還復申。
배성공이 『숭유론』을 지으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쳐서 따졌으나 꺾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오직 왕이보가 오면 조금 굽히는 듯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곧 왕이보의 결로 배위를 따졌으나 결이 도로 다시 펴졌다.
협주 1
《晉諸公贊》曰:「自魏太常夏侯玄、歩兵校尉阮籍等,皆著《道德論》。於時侍中樂廣、吏部郎劉漢亦體道而言約,尚書令王夷甫講理而才虚,散騎常侍戴奧以學道爲業,後進庾敳之徒皆希慕簡曠。頠疾世俗尚虚無之理,故著《崇有》二論以折之。才博喩廣,學者不能究。後樂廣與頠淸閒欲説理,而頠辭喩豐博,廣自以體虚無,笑而不復言。」《惠帝起居注》曰:「頠著二論以規虚誕之弊。文詞精富,爲世名論。」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위나라 태상 하후현과 보병교위 완적 들로부터 다 『도덕론』을 지었다. 그때 시중 악광과 이부랑 유한도 도를 몸으로 하되 말이 간략하였고, 상서령 왕이보는 결을 강하되 재주가 비었으며, 산기상시 대오는 도 배우기를 업으로 삼았고, 뒤에 난 유애의 무리는 다 간결하고 넓음을 바라 그리워하였다. 배위는 세속이 헛되고 없는 결을 높이는 것을 미워하였으므로 『숭유』 두 논을 지어 이를 꺾었다. 재주가 넓고 비유가 넓어 배우는 이가 다하지 못하였다. 뒤에 악광이 배위와 맑고 한가로이 결을 말하려 하였는데, 배위의 말과 비유가 넉넉하고 넓으니 악광이 스스로 빔과 없음을 몸으로 한다 하여 웃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하였다. 『혜제기거주』에 이르기를 「배위가 두 논을 지어 헛되고 거짓된 폐단을 바로잡았다. 글과 말이 곱고 넉넉하여 세상에 이름난 논이 되었다」 하였다.
13제갈굉이 장자와 노자를 보고 오다
諸葛厷年少不肯學問。始與王夷甫談,便已超詣。王嘆曰:「卿天才卓出,若復小加研尋,一無所愧。」厷後看《莊》《老》,更與王語,便足相抗衡。
제갈굉이 나이 어려 배우고 묻기를 즐기지 않았다. 처음 왕이보와 이야기하는데 곧 이미 뛰어나게 이르렀다.
왕이보가 탄식하였다. "경은 하늘이 준 재주가 우뚝 빼어나니, 만일 다시 조금 갈고 찾는다면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겠소."
제갈굉이 뒤에 『장자』와 『노자』를 보고 다시 왕이보와 말하니 곧 서로 맞겨루기에 넉넉하였다.
협주 1
王隱《晉書》曰:「厷字茂遠,琅邪人,魏雍州刺史緒之子。有逸才,仕至司空主簿。」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제갈굉은 자가 무원이요 낭야 사람이니 위나라 옹주자사 제갈서의 아들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벼슬이 사공주부에 이르렀다」 하였다.
14이 아이 가슴속에는 반드시 고황의 병이 없으리라
衞玠總角時問樂令「夢」,樂云:「是想。」衞曰:「形神所不接,而夢豈是想邪?」樂云:「因也。未嘗夢乘車入鼠穴,擣噉鐵杵,皆無想無因故也。」衞思因,經日不得,遂成病。樂聞,故命駕爲剖析之。衞即小差。樂嘆曰:「此兒胸中當必無膏肓之疾!」
위개가 더벅머리 때에 악령에게 「꿈」을 물으니 악령이 말하였다. "이는 생각이다."
위개가 말하였다. "몸과 정신이 닿지 않은 것인데 꿈이 어찌 생각이겠습니까."
악령이 말하였다. "말미암음이다. 일찍이 수레를 타고 쥐구멍에 들어가거나 쇠공이를 찧어 먹는 꿈을 꾼 적이 없는 것은 다 생각도 없고 말미암음도 없기 때문이다."
위개가 말미암음을 생각하다가 며칠이 지나도록 얻지 못하여 마침내 병이 되었다. 악령이 듣고 짐짓 수레를 내어 그를 위해 쪼개어 밝혀 주니 위개가 곧 조금 나았다.
악령이 탄식하였다. "이 아이 가슴속에는 마땅히 반드시 고황의 병이 없으리라."
협주 2
《周禮》有六夢:一曰正夢,謂無所感動,平安而夢也。二曰噩夢,謂驚愕而夢也。三曰思夢,謂覺時所思念也。四曰寤夢,謂覺時道之而夢也。五曰喜夢,謂喜説而夢也。六曰懼夢,謂恐懼而夢也。按,樂所言「想」者,蓋思夢也。「因」者,蓋正夢也。
『주례』에 여섯 가지 꿈이 있다. 첫째는 정몽이니 느껴 움직이는 바 없이 평안히 꾸는 꿈을 이른다. 둘째는 악몽이니 놀라고 두려워 꾸는 꿈을 이른다. 셋째는 사몽이니 깨어 있을 때 생각하던 바를 이른다. 넷째는 오몽이니 깨어 있을 때 말하던 것이 꿈이 됨을 이른다. 다섯째는 희몽이니 기뻐 즐거워 꾸는 꿈을 이른다. 여섯째는 구몽이니 두려워하여 꾸는 꿈을 이른다. 살피건대 악광이 말한 「생각」이란 대개 사몽이요, 「말미암음」이란 대개 정몽이다.
《春秋傳》曰:「晉景公有疾,求醫於秦,秦伯使醫緩爲之。未至,公夢疾爲二豎子。曰:『彼,良醫也。懼傷我焉!』其一曰:『居肓之上,膏之下,若我何?』醫至,曰:『疾不可爲也!在肓之上,膏之下,攻之不可達,刺之不可及,藥不至焉。』公曰:『良醫也。』」注:「肓,鬲也。心下爲膏。」
『춘추전』에 이르기를 「진나라 경공이 병들어 진나라에 의원을 구하니 진백이 의원 완을 보냈다. 이르기 전에 공이 병이 두 더벅머리 아이가 된 꿈을 꾸었다. 하나가 『저이는 좋은 의원이다. 우리를 다치게 할까 두렵다』 하니, 다른 하나가 『황의 위, 고의 아래에 있으면 우리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의원이 이르러 『병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황의 위, 고의 아래에 있어 다스리려 해도 이를 수 없고 찔러도 미칠 수 없으며 약이 닿지 않습니다』 하였다. 공이 『좋은 의원이다』 하였다」 하였다. 주에 이르기를 「황은 격막이다. 심장 아래를 고라 한다」 하였다.
15도무지 남의 뜻과 다르지 않구나
庾子嵩讀《莊子》,開巻一尺許便放去,曰:「了不異人意。」
유자숭이 『장자』를 읽는데, 책을 펴 한 자쯤 보고 곧 놓아 버리며 말하였다. "도무지 남의 뜻과 다르지 않구나."
협주 1
《晉陽秋》曰:「庾敳字子嵩,潁川人,侍中峻第三子。恢廓有度量,自謂是老莊之徒。曰:『昔未讀此書,意嘗謂至理如此。今見之,正與人意暗同。』仕至豫州長史。」
『진양추』에 이르기를 「유애는 자가 자숭이요 영천 사람이니 시중 유준의 셋째 아들이다. 넓고 트여 도량이 있었고 스스로 노자와 장자의 무리라 하였다. 이르기를 『전에 이 책을 읽지 않았을 때 뜻으로 일찍이 지극한 결이 이러하리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바로 사람의 뜻과 몰래 같다』 하였다. 벼슬이 예주장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16이른다면 어찌 갈 수 있겠소
客問樂令旨「不至」者,樂亦不復剖析文句,直以麈尾柄确几曰:「至不?」客曰:「至!」樂因又舉麈尾曰:「若至者,那得去?」於是客乃悟服。樂辭約而旨達,皆此類。
어떤 손이 악령에게 「이르지 않는다」는 뜻을 물으니, 악령이 또한 다시 글귀를 쪼개지 않고 다만 주미 자루로 안석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이르렀소."
손이 말하였다. "이르렀습니다."
악령이 이에 또 주미를 들며 말하였다. "만일 이른 것이라면 어찌 갈 수 있겠소."
이에 손이 이내 깨닫고 따랐다. 악령이 말은 간략하되 뜻이 통한 것이 다 이런 것들이었다.
협주 1
夫藏舟潛往,交臂恆謝,一息不留,忽焉生滅。故飛鳥之影,莫見其移;馳車之輪,曾不掩地。是以去不去矣,庸有至乎?至不至矣,庸有去乎?然則前至不異後至,至名所以生;前去不異後去,去名所以立。今天下無去矣,而去者非假哉?既爲假矣,而至者豈實哉?
무릇 배를 감추어 몰래 옮겨져도 팔짱 끼는 사이에 늘 물러나고, 한 숨도 머물지 않아 홀연히 나고 스러진다. 그러므로 나는 새의 그림자는 그 옮김을 보지 못하고, 달리는 수레의 바퀴는 일찍이 땅을 덮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감이 감이 아니니 어찌 이름이 있겠는가. 이름이 이름이 아니니 어찌 감이 있겠는가. 그러한즉 앞의 이름이 뒤의 이름과 다르지 않으니 이름이라는 이름이 생기는 까닭이요, 앞의 감이 뒤의 감과 다르지 않으니 감이라는 이름이 서는 까닭이다. 이제 천하에 감이 없으니 간다는 것이 빌린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빌린 것이라면 이른다는 것이 어찌 실하겠는가.
17곽상이 상수의 주를 훔쳐 제 것으로 삼다
初,注《莊子》者數十家,莫能究其旨要。向秀於舊注外爲解義,妙析奇致,大暢玄風。唯《秋水》、《至樂》二篇未竟而秀卒。秀子幼,義遂零落,然猶有別本。郭象者,爲人薄行,有雋才。見秀義不傳於世,遂竊以爲己注。乃自注《秋水》、《至樂》二篇,又易《馬蹄》一篇,其餘衆篇,或定點文句而已。後秀義別本出,故今有向郭二《莊》,其義一也。
처음에 『장자』에 주를 낸 이가 수십 집안이었으나 그 뜻의 요긴함을 다한 이가 없었다.
상수가 옛 주 밖에 뜻풀이를 지어 묘하게 쪼개고 기이하게 이르러 아득한 바람을 크게 시원하게 하였다. 오직 「추수」와 「지락」 두 편만 마치지 못하고 상수가 죽었다.
상수의 아들이 어려 뜻풀이가 마침내 흩어졌으나 그래도 딴 본이 있었다.
곽상이라는 이는 사람됨이 행실이 얇으나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상수의 뜻풀이가 세상에 전하지 않음을 보고 마침내 훔쳐 제 주로 삼았다.
이에 스스로 「추수」와 「지락」 두 편에 주를 내고 또 「마제」 한 편을 바꾸었으며, 그 나머지 여러 편은 더러 글귀를 정하고 점을 찍었을 뿐이다.
뒤에 상수의 뜻풀이 딴 본이 나왔으므로 이제 상수와 곽상의 두 『장자』가 있으나 그 뜻은 하나다.
협주 3
《秀別傳》曰:「秀與嵇康、呂安爲友,趣舍不同。嵇康傲世不羈,安放逸邁俗,而秀雅好讀書。二子頗以此嗤之。後秀將注《莊子》,先以告康安,康安咸曰:『此書詎復須注?徒棄人作樂事耳!』及成,以示二子。康曰:『爾故復勝不?』安乃驚曰:『莊周不死矣!』後注《周易》,大義可觀,而與漢世諸儒互有彼此,未若隱莊之絶倫也。」《秀本傳》或言,秀遊託數賢,蕭屑卒歳,都無注述。唯好《莊子》,聊應崔譔所注,以備遺忘云。《竹林七賢論》云:「秀爲此義,讀之者無不超然,若已出塵埃而窺絶冥,始了視聽之表。有神德玄哲,能遺天下,外萬物。雖復使動競之人顧觀所徇,皆悵然自有振拔之情矣。」
『수별전』에 이르기를 「상수는 혜강·여안과 벗하였는데 나아가고 버림이 같지 않았다. 혜강은 세상에 거만하여 매이지 않았고 여안은 멋대로 놓아 세속을 넘었는데, 상수는 우아하게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두 사람이 자못 이로써 그를 비웃었다. 뒤에 상수가 『장자』에 주를 내려 하며 먼저 혜강과 여안에게 알리니, 혜강과 여안이 다 『이 책에 어찌 다시 주가 필요한가. 부질없이 남의 즐거운 일을 버릴 뿐이다』 하였다. 이루어져 두 사람에게 보이니, 혜강이 『네가 짐짓 다시 나은가』 하였고 여안은 이에 놀라며 『장주가 죽지 않았구나』 하였다. 뒤에 『주역』에 주를 내니 큰 뜻이 볼 만하였으나 한나라 세상 여러 유생과 서로 이러니저러니 하는 데가 있어, 『장자』를 숨겨 낸 것이 무리에서 끊어진 것만 못하였다」 하였다. 『수본전』에는 더러 이르기를 상수가 여러 어진 이에게 붙어 노닐며 쓸쓸히 해를 마쳤고 도무지 지어 서술한 바가 없었다 한다. 오직 『장자』를 좋아하여 애오라지 최선이 주 낸 것에 응하여 잊어버림에 갖춘다 하였다 한다.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상수가 이 뜻풀이를 하니 읽는 이가 훌쩍 뛰어나지 않는 이가 없어, 이미 티끌을 벗어나 끝없이 어두운 데를 엿보아 비로소 보고 듣는 밖을 깨닫는 듯하였다. 신령한 덕과 아득한 밝음이 있어 천하를 버리고 만물을 밖으로 할 수 있으니, 비록 다시 움직이고 다투는 사람으로 하여금 좇는 바를 돌아보게 하여도 다 서운해하며 스스로 떨쳐 뽑을 마음이 있었다」 하였다.
《文士傳》曰:「象字子玄,河南人。少有才理,慕道好學,託志《老》《莊》。時人咸以爲王弼之亞,辟司空掾、太傅主簿。」
『문사전』에 이르기를 「곽상은 자가 자현이요 하남 사람이다. 젊어서 재주와 결이 있고 도를 그리워하며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자』와 『장자』에 뜻을 부쳤다. 그때 사람들이 다 왕필의 다음이라 여겼고 사공의 아전과 태부주부로 불렸다」 하였다.
《文士傳》曰:「象作《莊子注》,最有淸辭遒旨。」
『문사전』에 이르기를 「곽상이 『장자주』를 지으니 가장 맑은 말과 굳센 뜻이 있다」 하였다.
18아마 같겠지요
阮宣子有令聞,太尉王夷甫見而問曰:「《老》《莊》與聖教同異?」對曰:「將無同!」太尉善其言,辟之爲掾。世謂「三語掾」。衞玠嘲之曰:「一言可辟,何假於三?」宣子曰:「苟是天下人望,亦可無言而辟,復何假一?」遂相與爲友。
완선자가 좋은 소문이 있었다. 태위 왕이보가 보고 물었다. "『노자』와 『장자』가 성인의 가르침과 같은가 다른가."
대답하였다. "아마 같겠지요."
태위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불러 아전으로 삼으니 세상이 「세 마디 아전」이라 하였다.
위개가 놀렸다. "한 마디로도 불릴 수 있었을 터인데 어찌 셋을 빌렸소."
선자가 말하였다. "진실로 천하가 바라는 이라면 또한 말 없이도 불릴 수 있었을 터인데 다시 어찌 하나를 빌렸겠소."
마침내 서로 벗이 되었다.
협주 1
《名士傳》曰:「阮脩字宣子,陳留尉氏人。好《老》《易》,能言理。不喜見俗人,時誤相逢,即舍去。傲然無營,家無儋石之儲,晏如也。琅邪王處仲爲鴻臚卿,謂曰:『鴻臚丞差有祿,卿常無食,能作不?』脩曰:『爲復可耳。』遂爲鴻臚丞、太子洗馬。」
『명사전』에 이르기를 「완수는 자가 선자요 진류 위씨 사람이다. 『노자』와 『역』을 좋아하고 결을 말할 수 있었다. 속된 사람 보기를 즐기지 않아 때로 잘못 만나면 곧 버리고 떠났다. 거만하게 꾀하는 바 없이 집에 한 섬 쌀의 쌓임도 없었으나 태연하였다. 낭야의 왕처중이 홍려경이 되어 이르기를 『홍려승은 조금 녹이 있는데 그대는 늘 먹을 것이 없으니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완수가 『또한 괜찮겠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홍려승과 태자세마가 되었다」 하였다.
19그대들은 그러지 마시오, 내 사위에게 곤욕을 치르리라
裴散騎娶王太尉女。婚後三日,諸壻大會,當時名士,王裴子弟悉集。郭子玄在坐,挑與裴談。子玄才甚豐瞻,始數交未快。郭陳張甚盛,裴徐理前語,理致甚微,四坐咨嗟稱快。王亦以爲奇,謂諸人曰:「君輩勿爲爾,將受困寡人女壻!」
배산기가 왕태위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혼인한 지 사흘 만에 여러 사위가 크게 모이니, 그때의 이름난 선비와 왕씨·배씨의 자제가 다 모였다.
곽자현이 자리에 있다가 돋우어 배씨와 이야기하였다. 자현은 재주가 몹시 넉넉하여 처음 몇 번 오갈 때는 시원하지 못하였다.
곽상이 펴 놓고 벌인 것이 몹시 성하니, 배씨가 천천히 앞의 말을 다스리는데 결과 이룸이 몹시 은미하여 온 자리가 감탄하며 시원하다 일컬었다.
왕태위도 기이하게 여겨 여러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그러지 마시오. 장차 내 사위에게 곤욕을 치르리다."
협주 2
《晉諸公贊》曰:「裴遐字叔道,河東人。父緯,長水校尉。遐少有理稱,辟司空掾、散騎郎。」《永嘉流人名》:「衍字夷甫,第四女適遐也。」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배하는 자가 숙도요 하동 사람이다. 아버지 배위는 장수교위다. 배하는 젊어서 결로 일컬어졌고 사공의 아전과 산기랑으로 불렸다」 하였다. 『영가유인명』에 「왕연은 자가 이보요 넷째 딸이 배하에게 시집갔다」 하였다.
鄧粲《晉紀》曰:「遐以辯論爲業,善敘名理,辭氣淸暢,泠然若琴瑟。聞其言者,知與不知,無不歎服。」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배하는 따져 논함을 업으로 삼아 이름과 결을 잘 폈고, 말과 기운이 맑고 시원하여 서늘하기가 거문고와 비파 같았다. 그 말을 들은 이는 알든 알지 못하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다.
20위개가 사유여와 밤새 은미한 말을 나누다
衞玠始度江,見王大將軍。因夜坐,大將軍命謝幼輿。玠見謝,甚説之,都不復顧王,遂達旦微言。王永夕不得豫。玠體素羸,恆爲母所禁。爾夕忽極,於此病篤,遂不起。
위개가 처음 강을 건너 왕대장군을 뵈었다. 밤에 앉게 되니 대장군이 사유여를 불렀다.
위개가 사유여를 보고 몹시 기뻐하여 도무지 다시 왕대장군을 돌아보지 않고, 마침내 새벽에 이르도록 은미한 말을 나누었다. 왕대장군은 밤이 다하도록 끼어들지 못하였다.
위개는 몸이 본디 여위어 늘 어머니에게 말림을 받았다. 그날 밤 홀연 지쳐 이로부터 병이 깊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협주 3
《敦別傳》曰:「敦字處仲,琅邪臨沂人。少有名理,累遷靑州刺史。避地江左,歴侍中、丞相、大將軍、揚州牧。以罪伏誅。」
『돈별전』에 이르기를 「왕돈은 자가 처중이요 낭야 임기 사람이다. 젊어서 이름과 결이 있어 여러 벼슬을 거쳐 청주자사에 이르렀다. 강좌로 피난하여 시중과 승상과 대장군과 양주목을 지냈다.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晉陽秋》曰:「謝鯤字幼輿,陳郡人。父衡,晉碩儒。鯤性通簡,好《老》《易》,善音樂,以琴書爲業。避亂江東,爲豫章太守,王敦引爲長史。」《鯤別傳》曰:「鯤四十三卒,贈太常。」
『진양추』에 이르기를 「사곤은 자가 유여요 진군 사람이다. 아버지 사형은 진나라의 큰 선비다. 사곤은 성품이 통하고 간결하며 『노자』와 『역』을 좋아하고 음악을 잘하여 거문고와 글을 업으로 삼았다. 강동으로 난을 피하여 예장태수가 되었고 왕돈이 이끌어 장사로 삼았다」 하였다. 『곤별전』에 이르기를 「사곤이 마흔셋에 죽어 태상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玠別傳》曰:「玠少有名理,善《易》《老》,自抱羸疾,初不於外擅相酬對。時友歎曰:『衞君不言,言必入眞。』武昌見大將軍王敦,敦與談論,咨嗟不能自已。」
『개별전』에 이르기를 「위개는 젊어서 이름과 결이 있어 『역』과 『노자』를 잘하였으나, 스스로 여윈 병을 안아 처음에 밖에서 멋대로 서로 응대하지 않았다. 그때 벗이 탄식하기를 『위군이 말하지 않으나 말하면 반드시 참됨에 들어간다』 하였다. 무창에서 대장군 왕돈을 뵈니 왕돈이 더불어 논하며 감탄하기를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다」 하였다.
21강좌를 건너와 세 가지 결만을 말하였다
舊云:王丞相過江左,止道《聲無哀樂》、《養生》、《言盡意》,三理而已。然宛轉關生,無所不入。
예부터 이르기를, 왕승상이 강좌를 건너와 다만 「소리에는 슬픔과 즐거움이 없다」와 「삶을 기름」과 「말이 뜻을 다한다」 세 가지 결만을 말하였을 뿐이라 한다.
그러나 굽이돌아 얽혀 나면서 들어가지 않는 데가 없었다.
협주 3
嵇康《聲無哀樂論略》曰:「夫殊方異俗,歌笑不同。使錯而用之,或聞哭而懽,或聽歌而戚,然哀樂之情均也。今用均同之情,發萬殊之聲,斯非音聲之無常乎?」
혜강의 「성무애락론」 줄거리에 이르기를 「무릇 다른 곳 다른 풍속은 노래와 웃음이 같지 않다. 어긋나게 이를 쓰게 하면 더러는 곡소리를 듣고 기뻐하고 더러는 노래를 듣고 슬퍼하나, 슬픔과 즐거움의 정은 고르다. 이제 고르고 같은 정을 써서 만 가지 다른 소리를 내니, 이것이 소리에 늘 그러함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嵇叔夜《養生論》曰:「夫蝨箸頭而黑,麝食柏而香,頸處險而癭,齒居晉而黃。豈唯蒸之使重無使輊,芬之使香無使延哉?誠能蒸以靈芝,潤以醴泉,無爲自得,體妙心玄。庶與羡門比壽,王喬爭年。何爲不可養生哉?」
혜숙야의 「양생론」에 이르기를 「무릇 이가 머리에 붙으면 검어지고 사향노루가 잣을 먹으면 향기로우며, 목이 험한 데 있으면 혹이 나고 이가 진나라에 있으면 누레진다. 어찌 다만 쪄서 무겁게 하고 가볍게 하지 않으며, 향기롭게 하여 향기 나게 하고 늘어지게 하지 않을 뿐이겠는가. 참으로 영지로 찌고 단 샘으로 적셔 함이 없이 스스로 얻어 몸이 묘하고 마음이 아득할 수 있다면, 거의 선문과 목숨을 견주고 왕교와 나이를 다툴 것이니 어찌 삶을 기를 수 없겠는가」 하였다.
歐陽堅《石言盡意論略》曰:「夫理得於心,非言不暢。物定於彼,非名不辨。名逐物而遷,言因理而變,不得相與爲二矣。苟無其二,言無不盡矣。」
구양견석의 「언진의론」 줄거리에 이르기를 「무릇 결이 마음에서 얻어지나 말이 아니면 펴지지 않고, 사물이 저기에 정해지나 이름이 아니면 가려지지 않는다. 이름은 사물을 좇아 옮기고 말은 결을 말미암아 바뀌니, 서로 둘이 될 수 없다. 진실로 그 둘이 없다면 말이 다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22정시의 소리가 바로 이러할 뿐이다
殷中軍爲庾公長史,下都,王丞相爲之集,桓公、王長史、王藍田、謝鎭西並在。丞相自起解帳帶麈尾,語殷曰:「身今日當與君共談析理。」既共淸言,遂達三更。丞相與殷共相往反,其餘諸賢,略無所關。既彼我相盡,丞相乃嘆曰:「向來語,乃竟未知理源所歸,至於辭喩不相負。正始之音,正當爾耳!」明旦,桓宣武語人曰:「昨夜聽殷王淸言甚佳,仁祖亦不寂寞,我亦時復造心,顧看兩王掾,輙翣如生母狗馨。」
은중군이 유공의 장사가 되어 서울로 내려오니 왕승상이 그를 위해 모임을 열었다. 환공과 왕장사와 왕남전과 사진서가 아울러 있었다.
승상이 몸소 일어나 휘장 띠에 걸린 주미를 풀고 은중군에게 말하였다. "제가 오늘은 마땅히 그대와 함께 이야기하며 결을 쪼개겠소."
이윽고 함께 맑은 이야기를 하여 마침내 삼경에 이르렀다. 승상과 은중군이 서로 오갔고 그 나머지 여러 어진 이는 거의 끼어들지 못하였다.
이윽고 저와 내가 서로 다하자 승상이 이에 탄식하였다. "아까 한 말이 마침내 결의 근원이 돌아가는 데는 알지 못하였으나, 말과 비유가 서로 저버리지 않는 데 이르러서는 정시의 소리가 바로 이러할 뿐이오."
이튿날 아침 환선무가 남에게 말하였다. "어젯밤 은씨와 왕씨의 맑은 이야기를 들으니 몹시 좋았고 인조도 또한 쓸쓸하지 않았소. 나도 때로 다시 마음이 이르렀는데, 두 왕씨 아전을 돌아보니 문득 부채질하는 어미 개 같더이다."
협주 3
按,庾亮僚屬名及《中興書》,浩爲亮司馬,非爲長史也。
살피건대 유량의 아전 이름과 『중흥서』에 은호는 유량의 사마가 되었지 장사가 된 것이 아니다.
《王述別傳》曰:「述字懷祖,太原晉陽人。祖湛,父承,並有髙名。述蚤孤,事親孝謹,簞瓢陋巷,宴安永日。由是爲有識所知,襲爵藍田侯。」
『왕술별전』에 이르기를 「왕술은 자가 회조요 태원 진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왕담과 아버지 왕승이 아울러 높은 이름이 있었다. 왕술은 일찍 아비를 여의고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스럽고 삼가 하였으며,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온종일 편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식견 있는 이에게 알려졌고 남전후 벼슬을 이어받았다」 하였다.
王濛、王述,並爲王導所辟。
왕몽과 왕술이 아울러 왕도에게 불린 이들이다.
23결이 또한 마땅히 이 위에 있겠구나
殷中軍見佛經云:「理亦應阿堵上。」
은중군이 불경을 보고 말하였다. "결이 또한 마땅히 이 위에 있겠구나."
협주 1
佛經之行中國尚矣,莫詳其始。《牟子》曰:「漢明帝夜夢神人,身有日光,明日,博問群臣。通人傅毅對曰:『臣聞天竺有道者號曰佛,輕舉能飛,身有日光,殆將其神也。』於是遣羽林將軍秦景、博士弟子王遵等十二人之大月氏國,寫取佛經四十二部,在蘭臺石室。」劉子政《列仙傳》曰:「歴觀百家之中,以相檢驗,得仙者百四十六人,其七十四人已在佛經,故撰得七十。可以多聞博識者遐觀焉。」如此,即漢成哀之間,已有經矣。與《牟子》、傳記便爲不同。《魏略·西戎傳》曰:「天竺城中有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圖。浮圖者,太子也。父曰屑頭邪,母曰莫邪。浮屠者,身服色黃,髮如靑絲,爪如銅。其母夢白象而孕。及生。從右脅出,而有髻,墜地能行七歩。』天竺又有神人曰沙津。昔漢哀帝元壽元年,博士弟子景慮,受大月氏王使伊存口傳《浮屠經》。曰復豆者,其人也。」《漢武故事》曰:「昆邪王殺休屠王,以其衆來降,得其金人之神,置之甘泉宮。金人皆長丈餘,其祭不用牛羊,唯燒香禮拜。上使依其國俗祀之。」此神全類於佛,豈當漢武之時,其經未行於中土,而但神明事之邪。故驗劉向、魚豢之説,佛至自哀成之世明矣。然則《牟》、傳所言四十二者,其文今存非妄。蓋明帝遣使廣求異聞,非是時無經也。
불경이 중국에 행해진 지 오래이나 그 처음은 자세하지 않다. 『모자』에 이르기를 「한나라 명제가 밤에 신인이 몸에 햇빛이 있는 꿈을 꾸고 이튿날 뭇 신하에게 널리 물었다. 널리 아는 이 부의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에 천축에 도 있는 이가 있어 부처라 부르는데, 가벼이 들어 날 수 있고 몸에 햇빛이 있다 하니 아마 그 신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우림장군 진경과 박사제자 왕준 들 열두 사람을 대월지국에 보내 불경 마흔두 부를 베껴 오게 하여 난대 석실에 두었다」 하였다. 유자정의 『열선전』에 이르기를 「여러 집안 가운데를 두루 보아 서로 검증하여 신선이 된 이 백마흔여섯 사람을 얻었는데, 그 일흔넷은 이미 불경에 있으므로 일흔을 얻어 지었다. 많이 듣고 널리 아는 이는 멀리 볼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와 같다면 곧 한나라 성제와 애제 사이에 이미 경이 있었다. 『모자』와 전기와는 곧 같지 않게 된다. 『위략·서융전』에 이르기를 「천축성 안에 임아국이 있다. 『부도경』에 이르기를 『그 나라 왕이 부도를 낳았다. 부도란 태자다. 아버지는 설두야요 어머니는 막야다. 부도는 몸의 빛깔이 누렇고 머리털이 푸른 실 같으며 손톱이 구리 같다. 그 어머니가 흰 코끼리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태어남에 이르러서는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나왔는데 상투가 있었고 땅에 떨어져 일곱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하였다. 천축에 또 신인이 있어 사진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애제 원수 원년에 박사제자 경려가 대월지왕의 사신 이존에게서 『부도경』을 입으로 전해 받았다. 복두라 한 이가 그 사람이다」 하였다. 『한무고사』에 이르기를 「곤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로 와서 항복하며 그 금인의 신을 얻어 감천궁에 두었다. 금인은 다 길이가 한 길 남짓인데 그 제사에 소와 양을 쓰지 않고 오직 향을 사르고 예배할 뿐이었다. 임금이 그 나라 풍속대로 제사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 신은 온전히 부처와 같으니, 어찌 한나라 무제 때에 그 경이 아직 중국에 행해지지 않고 다만 신명으로 섬겼을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유향과 어환의 말을 헤아려 보면 부처가 애제와 성제의 세상부터 이르렀음이 밝다. 그렇다면 『모자』와 전기가 말한 마흔둘이라는 것은 그 글이 이제 남아 있어 헛되지 않다. 대개 명제가 사신을 보내 남다른 들음을 널리 구한 것이지 이때에 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4말할 줄 아는 이도 얻기 어렵지만 풀어낼 이를 찾기도 어렵다
謝安年少時,請阮光祿道白馬論。爲論以示謝,於時謝不即解阮語,重相咨盡。阮乃嘆曰:「非但能言人不可得,正索解人亦不可得!」
사안이 나이 어릴 때 완광록에게 「백마론」을 말해 달라 청하였다. 논을 지어 사안에게 보였는데, 그때 사안이 완광록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여 거듭 여쭈어 다하였다.
완광록이 이에 탄식하였다. "다만 말할 줄 아는 사람을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바로 풀어낼 사람을 찾기도 얻기 어렵구나."
협주 2
《孔叢子》曰:「趙人公孫龍云:『白馬非馬。馬者所以命形,白者所以命色。夫命色者非命形,故曰白馬非馬也。』」
『공총자』에 이르기를 「조나라 사람 공손룡이 이르기를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말이란 꼴을 이름하는 바요 흰 것이란 빛깔을 이름하는 바다. 무릇 빛깔을 이름하는 것은 꼴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라 한다』 하였다」 하였다.
《中興書》曰:「裕甚精論難。」
『중흥서』에 이르기를 「완유는 따져 묻기에 몹시 밝았다」 하였다.
25북쪽 사람의 학문은 깊고 넓고 남쪽 사람의 학문은 맑고 요긴하다
褚季野語孫安國云:「北人學問,淵綜廣博。」孫答曰:「南人學問,淸通簡要。」支道林聞之曰:「聖賢固所忘言。自中人以還,北人看書,如顯處視月;南人學問,如牖中窺日。」
저계야가 손안국에게 말하였다. "북쪽 사람의 학문은 깊이 아우르고 넓소."
손안국이 대답하였다. "남쪽 사람의 학문은 맑게 통하고 간결하고 요긴하오."
지도림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어진 이와 성인은 본디 말을 잊은 바요. 가운데 사람 이하로 말하면, 북쪽 사람이 글 보는 것은 드러난 데서 달을 보는 것 같고, 남쪽 사람의 학문은 들창 안에서 해를 엿보는 것 같소."
협주 2
褚裒、孫盛並已見。
저부와 손성은 아울러 이미 보인다.
支所言,但譬成孫褚之理也。然則學廣則難周,難周則識闇,故如顯處視月;學寡則易覈,易覈則智明,故如牖中窺日也。
지도림이 말한 바는 다만 손씨와 저씨의 결을 빗대어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배움이 넓으면 두루 하기 어렵고 두루 하기 어려우면 식견이 어두우므로 드러난 데서 달을 보는 것 같고, 배움이 적으면 헤아리기 쉽고 헤아리기 쉬우면 슬기가 밝으므로 들창 안에서 해를 엿보는 것 같다.
26그대는 좋은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우러러 치려 하지 않소
劉眞長與殷淵源談,劉理如小屈,殷曰:「惡,卿不欲作將善雲梯仰攻。」
유진장이 은연원과 이야기하는데 유진장의 결이 조금 굽히는 듯하니 은연원이 말하였다. "어, 그대는 좋은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우러러 치려 하지 않소."
협주 1
《墨子》曰:「公輸般爲髙雲梯,欲以攻宋。墨子聞之,自魯往。裂裳裹足,日夜不休,十日十夜而至於郢。見楚王曰:『聞大王將攻宋,有之乎?』王曰:『然!』墨子曰:『請令公輸般設攻宋之具,臣請試守之。』於是公輸般設攻宋之計,墨子縈帶守之。輸九攻之,而墨子九卻之。不能入,遂輟兵。」
『묵자』에 이르기를 「공수반이 높은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송나라를 치려 하였다. 묵자가 듣고 노나라에서 갔다. 치마를 찢어 발을 싸매고 밤낮 쉬지 않아 열흘 열밤 만에 영에 이르렀다. 초나라 왕을 보고 『대왕께서 송나라를 치려 하신다 들었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왕이 『그렇다』 하였다. 묵자가 『공수반에게 송나라 칠 기구를 베풀게 하시고 신은 이를 지켜 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수반이 송나라 칠 꾀를 베푸니 묵자가 띠를 둘러 지켰다. 공수반이 아홉 번 쳤으나 묵자가 아홉 번 물리쳤다. 들어가지 못하매 마침내 군사를 그쳤다」 하였다.
27강백이 아직 내 어금니 뒤의 슬기를 얻지 못하였다
殷中軍云:「康伯未得我牙後慧。」
은중군이 말하였다. "강백이 아직 내 어금니 뒤의 슬기를 얻지 못하였다."
협주 1
《浩別傳》曰:「浩善《老》《易》,能淸言。」康伯,浩甥也,甚愛之。
『호별전』에 이르기를 「은호는 『노자』와 『역』을 잘하고 맑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하였다. 강백은 은호의 생질인데 몹시 그를 아꼈다.
28수건을 가져다 사씨 도령에게 낯을 닦게 하라
謝鎭西少時,聞殷浩能淸言,故往造之。殷未過有所通,爲謝標榜諸義,作數百語。既有佳致,兼辭條豐蔚,甚足以動心駭聽。謝注神傾意,不覺流汗交面。殷徐語左右:「取手巾與謝郎拭面。」
사진서가 젊을 때 은호가 맑은 이야기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짐짓 가서 찾아갔다.
은호가 아직 지나치게 통한 바가 없이 사진서를 위해 여러 뜻을 드러내 보이며 몇백 마디를 하였다. 이윽고 좋은 이룸이 있고 겸하여 말의 가닥이 넉넉하고 무성하여 마음을 움직이고 귀를 놀라게 하기에 몹시 넉넉하였다.
사진서가 정신을 쏟고 뜻을 기울여 저도 모르게 흐르는 땀이 낯에 뒤엉켰다.
은호가 천천히 곁의 사람에게 말하였다. "수건을 가져다 사씨 도령에게 낯을 닦게 하라."
협주 1
按,殷浩大謝尚三歳,便是時流。或當貴其勝致,故爲之揮汗。
살피건대 은호가 사상보다 세 살 많으니 곧 같은 또래다. 더러 그 뛰어난 이룸을 귀히 여겼으므로 그를 위해 땀을 뿌린 것이다.
29뜻에 절로 어렵고 쉬움이 있는데 한 괘로 끊는단 말인가
宣武集諸名勝講《易》,日説一卦。簡文欲聽,聞此便還。曰:「義自當有難易,其以一卦爲限邪?」
환선무가 여러 이름난 이를 모아 『역』을 강하는데 하루에 한 괘를 말하였다.
간문제가 들으려 하다가 이를 듣고 곧 돌아가며 말하였다. "뜻에 절로 어렵고 쉬움이 있을 터인데 한 괘로 끊는단 말인가."
협주 1
《易·乾·鑿度》曰:「孔子曰:『易者,易也,變易也,不易也。三成德,爲道包籥者,易也。其德也光明四通,日月星辰布,八卦序,四時和也。變也者,天地不變,不能成朝;夫婦不變,不能成家。不易者,其位也。天在上,地在下;君南面,臣北面;父坐,子伏。此其不易也。故易者天地人道也。』」鄭玄序《易》曰:「易之爲名也,一言而函三義:簡易一也,變易二也,不易三也。《繫辭》曰:『乾坤,易之蘊也,易之門戸也。』又曰:『乾確然示人易矣,坤隤然示人簡矣。易則易知,簡則易從。』此言其簡易法則也。又曰:『其爲道也屢遷,變動不居,周流六虚,上下無常,剛柔相易,不可以爲典要,唯變所適。』此則言其從時出入移動也。又曰:『天尊地卑,乾坤定矣;卑髙以陳,貴賤位矣;動靜有常,剛柔斷矣。』此則言其張設布列不易也。」據此三義而説,易之道,廣矣,大矣。
『역·건·착도』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역이란 쉬움이요 바뀜이요 바뀌지 않음이다. 셋이 덕을 이루어 도를 싸는 자물쇠가 되는 것이 역이다. 그 덕은 빛이 밝아 사방에 통하여 해와 달과 별이 펼쳐지고 여덟 괘가 차례 지어지고 네 철이 어울린다. 바뀜이란 하늘과 땅이 바뀌지 않으면 아침을 이루지 못하고, 지아비와 지어미가 바뀌지 않으면 집을 이루지 못한다. 바뀌지 않음이란 그 자리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며, 임금은 남쪽을 보고 신하는 북쪽을 보며, 아비는 앉고 아들은 엎드린다. 이것이 그 바뀌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역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다』 하셨다」 하였다. 정현이 『역』에 서하여 이르기를 「역이라는 이름은 한마디에 세 뜻을 머금는다. 간단하고 쉬움이 하나요, 바뀜이 둘이요, 바뀌지 않음이 셋이다. 『계사』에 이르기를 『건과 곤은 역의 쌓임이요 역의 문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건은 굳세게 사람에게 쉬움을 보이고 곤은 무너지듯 사람에게 간단함을 보인다. 쉬우면 알기 쉽고 간단하면 좇기 쉽다』 하였으니, 이는 그 간단하고 쉬운 법칙을 말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그 도 됨이 자주 옮겨 움직여 머물지 않고 여섯 빈 데를 두루 흘러 위아래에 늘 그러함이 없으며, 굳셈과 부드러움이 서로 바뀌어 법도로 삼을 수 없고 오직 바뀜을 따라 갈 뿐이다』 하였으니, 이는 곧 그 때를 좇아 나고 들며 옮겨 움직임을 말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과 곤이 정해지고, 낮음과 높음으로 벌여지니 귀함과 천함이 자리 잡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늘 그러함이 있으니 굳셈과 부드러움이 끊어진다』 하였으니, 이는 곧 그 펴 놓고 벌여 두어 바뀌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 세 뜻에 기대어 말하면 역의 도는 넓고도 크다.
30흰 전단이 향기롭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어찌 바람을 거스르겠는가
有北來道人好才理,與林公相遇於瓦官寺,講小品。於時竺法深、孫興公悉共聽。此道人語,屢設疑難,林公辯答淸析,辭氣倶爽。此道人毎輙摧屈。孫問深公:「上人當是逆風家,向來何以都不言?」深公笑而不答。林公曰:「白旃檀非不馥,焉能逆風?」深公得此義,夷然不屑。
북쪽에서 온 도인이 있어 재주와 결을 좋아하였는데, 임공과 와관사에서 만나 『소품반야경』을 강하였다. 그때 축법심과 손흥공이 다 함께 들었다.
이 도인의 말이 자주 의심스러운 데를 세워 따졌는데, 임공의 따지고 답함이 맑고 쪼개어져 말과 기운이 함께 시원하였다. 이 도인이 그때마다 문득 꺾여 굽혔다.
손흥공이 심공에게 물었다. "상인께서는 마땅히 바람을 거스르는 집안이신데 아까부터 어찌 도무지 말씀이 없으십니까."
심공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임공이 말하였다. "흰 전단이 향기롭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어찌 바람을 거스를 수 있겠소."
심공이 이 뜻을 얻고 태연히 하찮게 여겼다.
협주 2
庾法暢《人物論》曰:「法深學義淵博,名聲蚤著,弘道法師也。」
유법창의 『인물론』에 이르기를 「법심은 학문과 뜻이 깊고 넓으며 이름이 일찍 드러났으니 도를 넓힌 법사다」 하였다.
《成實論》曰:「波利質多天樹,其香則逆風而聞。」
『성실론』에 이르기를 「파리질다천의 나무는 그 향기가 곧 바람을 거슬러 맡아진다」 하였다.
31그대는 억센 입 가진 말이 되지 마시오
孫安國往殷中軍許共論,往反精苦,客主無間。左右進食,冷而復煗者數四。彼我奮擲麈尾,悉脱落滿餐飯中。賓主遂至莫忘食。殷乃語孫曰:「卿莫作強口馬,我當穿卿鼻。」孫曰:「卿不見決鼻牛,人當穿卿頰。」
손안국이 은중군의 처소에 가서 함께 논하는데, 오가기를 곱고 괴롭게 하여 손과 주인 사이에 틈이 없었다.
곁의 사람이 밥을 올리니 식었다가 다시 데운 것이 서너 번이었다. 저와 내가 주미를 떨쳐 던지니 털이 다 빠져 먹는 밥 가운데 가득하였다. 손과 주인이 마침내 저물도록 밥 먹기를 잊었다.
은중군이 이에 손안국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억센 입 가진 말이 되지 마시오. 내가 마땅히 그대의 코를 뚫겠소."
손안국이 말하였다. "그대는 코 터진 소를 보지 못하였소. 사람이 마땅히 그대의 뺨을 뚫으리다."
협주 1
《續晉陽秋》曰:「孫盛善理義。時中軍將軍殷浩擅名一時,能與劇談相抗者,唯盛而已。」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손성은 결과 옳음을 잘하였다. 그때 중군장군 은호가 한때에 이름을 오로지하였는데, 더불어 세차게 이야기하며 맞설 수 있는 이는 오직 손성뿐이었다」 하였다.
32지도림이 소요유에 새 결을 세우다
《莊子·逍遙篇》,舊是難處,諸名賢所可鑽味而不能拔理於郭向之外。支道林在白馬寺中,將馮太常共語,因及《逍遙》。支卓然標新理於二家之表,立異義於衆賢之外,皆是諸名賢尋味之所不得。後遂用支理。
『장자』의 「소요유」 편은 예부터 어려운 데라, 여러 이름난 어진 이가 뚫어 맛볼 수 있었으나 곽상과 상수 밖에서 결을 뽑아내지는 못하였다.
지도림이 백마사 안에 있으면서 풍태상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소요유」에 미쳤다. 지도림이 우뚝하게 새 결을 두 집안의 밖에 드러내고 남다른 뜻을 뭇 어진 이의 밖에 세우니, 다 여러 이름난 어진 이가 찾아 맛보아도 얻지 못하던 바였다.
뒤에 마침내 지도림의 결을 썼다.
협주 2
《馮氏譜》曰:「馮懷字祖思,長樂人。歴太常、護國將軍。」
『풍씨보』에 이르기를 「풍회는 자가 조사요 장락 사람이다. 태상과 호국장군을 지냈다」 하였다.
向子期、郭子玄《逍遙義》曰:「夫大鵬之上九萬,尺鷃之起楡枋,小大雖差,各任其性。苟當其分,逍遙一也。然物之芸芸,同資有待,得其所待,然後逍遙耳。唯聖人與物冥而循大變,爲能無待而常通,豈獨自通而已。又從有待者不失其所待;不失,則同於大通矣。」支氏《逍遙論》曰:「夫逍遙者,明至人之心也。莊生建言人道,而寄指鵬、鷃。鵬以營生之路曠,故失適於體外;鷃以在近而笑遠,有矜伐於心内。至人乘天正而髙興,遊無窮於放浪;物物而不物於物,則遙然不我得,玄感不爲,不疾而速,則逍然靡不適。此所以爲逍遙也。若夫有欲當其所足;足於所足,快然有似天眞。猶饑者一飽,渇者一盈,豈忘烝嘗於糗糧,絶觴爵於醪醴哉?苟非至足,豈所以逍遙乎?」此向郭之注所未盡。
상자기와 곽자현의 「소요의」에 이르기를 「무릇 큰 붕새가 구만 리를 오르고 한 자 되는 메추라기가 느릅나무와 다목나무에서 일어나니, 작고 큼이 비록 다르나 저마다 그 성품에 맡긴다. 진실로 그 몫에 마땅하면 거니는 것은 하나다. 그러나 사물이 많고 많아 다 같이 기다림이 있음에 밑천 삼으니, 그 기다리는 바를 얻은 뒤에야 거닐 뿐이다. 오직 성인만이 사물과 아득히 하나 되어 큰 바뀜을 좇아 기다림 없이 늘 통할 수 있으니, 어찌 홀로 스스로 통할 뿐이겠는가. 또 기다림이 있는 이를 좇아 그 기다리는 바를 잃지 않게 하니, 잃지 않으면 곧 큰 통함과 같아진다」 하였다. 지씨의 「소요론」에 이르기를 「무릇 거닒이란 지극한 사람의 마음을 밝힌 것이다. 장자가 사람의 도를 세워 말하면서 붕새와 메추라기에 뜻을 부쳤다. 붕새는 삶을 꾸리는 길이 넓으므로 몸 밖에서 맞음을 잃었고, 메추라기는 가까운 데 있으면서 먼 것을 비웃으니 마음 안에 뽐냄이 있다. 지극한 사람은 하늘의 바름을 타고 높이 일어나 끝없는 데에 멋대로 노닐며, 사물을 사물로 하되 사물에 사물 되지 않으니, 곧 아득히 내가 얻는 바가 없고 아득히 느끼되 하지 않아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니, 곧 거닐어 맞지 않는 데가 없다. 이것이 거닒이 되는 까닭이다. 만일 무릇 바람이 있어 그 넉넉한 바에 마땅하고 넉넉한 바에 넉넉하다면, 시원하여 하늘의 참됨과 비슷하다. 이는 주린 이가 한 번 배부르고 목마른 이가 한 번 채우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마른 양식에서 제사를 잊고 단술에서 잔을 끊겠는가. 진실로 지극한 넉넉함이 아니라면 어찌 거닒이 되겠는가」 하였다. 이는 상수와 곽상의 주가 다하지 못한 바다.
33시골뜨기가 억지로 남을 배워 저런 말을 하는구나
殷中軍嘗至劉尹所淸言。良久,殷理小屈,遊辭不已,劉亦不復答。殷去後,乃云:「田舍兒,強學人作爾馨語。」
은중군이 일찍이 유윤의 처소에 이르러 맑은 이야기를 하였다. 한참 지나 은중군의 결이 조금 굽히니 겉도는 말이 그치지 않았고, 유윤도 다시 답하지 않았다.
은중군이 간 뒤에 이에 말하였다. "시골뜨기가 억지로 남을 배워 저런 말을 하는구나."
협주 2
浩也
은호다.
劉惔,已見。
유담은 이미 보인다.
34끓는 못과 쇠 성 같아 칠 만한 형세가 없다
殷中軍雖思慮通長,然於才性偏精。忽言及四本,便苦湯池鐵城,無可攻之勢。
은중군이 비록 생각과 헤아림이 통하고 길었으나 재주와 성품에 대해서는 치우쳐 정통하였다. 홀연 말이 「사본」에 미치면 곧 끓는 못과 쇠 성 같아 칠 만한 형세가 없었다.
협주 1
《神農書》曰:「夫有石城七仞,湯池百歩,帶甲百萬而無粟者,不能自固也。」
『신농서』에 이르기를 「무릇 일곱 길 되는 돌 성과 백 걸음 되는 끓는 못이 있고 갑옷 입은 군사 백만이 있어도 곡식이 없는 이는 스스로 굳게 할 수 없다」 하였다.
35문수가 없으니 누가 알아주겠소
支道林造《即色論》,論成,示王中郎。中郎都無言。支曰:「默而識之乎?」王曰:「既無文殊,誰能見賞?」
지도림이 「즉색론」을 지어 논이 이루어지자 왕중랑에게 보였다. 중랑이 도무지 말이 없었다.
지도림이 말하였다. "잠잠히 마음에 새기시오."
왕중랑이 말하였다. "이미 문수가 없으니 누가 알아줄 수 있겠소."
협주 4
支道林《集妙觀章》云:「夫色之性也,不自有色。色不自有,雖色而空。故曰色即爲空,色復異空。」
지도림의 『집묘관장』에 이르기를 「무릇 빛깔의 성품은 스스로 빛깔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빛깔이 스스로 있지 않으므로 비록 빛깔이라도 비었다. 그러므로 빛깔이 곧 빔이 되고 빛깔이 다시 빔과 다르다 한다」 하였다.
王坦之,已見。
왕탄지는 이미 보인다.
《論語》曰:「默而識之,誨人不倦,何有於我哉?」
『논어』에 이르기를 「잠잠히 마음에 새기고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무엇이 나에게 있겠는가」 하였다.
《維摩詰經》曰:「文殊師利問維摩詰云:『何者是菩薩入不二法門?』時維摩詰默然無言。文殊師利歎曰:『是眞入不二法門也。』」
『유마힐경』에 이르기를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보살이 둘 아닌 법문에 드는 것입니까』 하니, 그때 유마힐이 잠잠히 말이 없었다. 문수사리가 탄식하기를 『이것이 참으로 둘 아닌 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36지도림이 소요유를 말하자 왕희지가 옷깃을 풀다
王逸少作會稽,初至,支道林在焉。孫興公謂王曰:「支道林拔新領異,胸懷所及,乃自佳,卿欲見不?」王本自有一往雋氣,殊自輕之。後孫與支共載往王許,王都領域,不與交言。須臾,支退,後正値王當行,車已在門。支語王曰:「君未可去,貧道與君小語。」因論《莊子·逍遙遊》。支作數千言,才藻新奇,花爛映發。王遂披襟解帶,留連不能已。
왕일소가 회계를 맡아 처음 이르렀을 때 지도림이 거기 있었다.
손흥공이 왕일소에게 말하였다. "지도림은 새것을 뽑아내고 남다른 것을 거느려 가슴에 품은 바가 이르는 데가 이에 절로 좋소. 경은 보려 하시오."
왕일소는 본디 한 번 나아가는 뛰어난 기운이 있어 자못 그를 가벼이 여겼다.
뒤에 손흥공이 지도림과 함께 수레를 타고 왕일소의 처소에 가니, 왕일소가 도무지 테두리를 지키고 말을 나누지 않았다.
잠깐 뒤 지도림이 물러나는데, 마침 왕일소가 나가려 할 때라 수레가 이미 문에 있었다.
지도림이 왕일소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아직 가지 마시오. 빈도가 그대와 잠깐 이야기하겠소."
이로 인해 『장자』의 「소요유」를 논하였다. 지도림이 몇천 마디를 하는데 재주와 문채가 새롭고 기이하여 꽃이 흐드러져 비추어 피어나는 듯하였다.
왕일소가 마침내 옷깃을 헤치고 띠를 풀어 머물러 그치지 못하였다.
협주 1
《支法師傳》曰:「法師研十地,則知頓悟於七住;尋莊周,則辯聖人之逍遙。當時名勝,咸味其音旨。」道賢論以七沙門比竹林七賢。遁比向秀,雅尚《莊》《老》。二子異時,風尚玄同也。
『지법사전』에 이르기를 「법사가 십지를 갈면 곧 칠주에서 문득 깨침을 알았고, 장주를 찾으면 곧 성인의 거닒을 가렸다. 그때의 이름난 뛰어난 이들이 다 그 소리와 뜻을 맛보았다」 하였다. 『도현론』에 일곱 사문을 죽림칠현에 견주었다. 지둔은 상수에 견주니 우아하게 『장자』와 『노자』를 높였다. 두 사람이 때는 다르나 풍모와 높임이 아득히 같다.
37세 수레의 막힌 뜻을 지도림이 갈라 밝히다
三乘佛家滯義,支道林分判,使三乘炳然。諸人在下坐聽,皆云可通。支下坐,自共説,正當得兩,入三便亂。今義弟子雖傳,猶不盡得。
세 수레는 불가에서 막힌 뜻이었는데, 지도림이 나누어 판가름하여 세 수레를 환하게 하였다.
여러 사람이 아랫자리에서 듣고 다 통할 만하다 하였다. 지도림이 자리에서 내려간 뒤 저희끼리 말해 보니 바로 둘까지는 얻었으나 셋에 들면 곧 어지러워졌다.
이제 그 뜻을 제자가 비록 전하나 아직 다 얻지는 못하였다.
협주 1
《法華經》曰:「三乘者:一曰聲聞乘,二曰縁覺乘,三曰菩薩乘。聲聞者,悟四諦而得道也。縁覺者,悟因縁而得道也。菩薩者,行六度而得道也。然則羅漢得道,全由佛教,故以聲聞爲名也。辟支佛得道,或聞因縁而解,或聽環珮而得悟。神能獨達,故以縁覺爲名也。菩薩者,大道之人也。方便則止行六度,眞教則通修萬善,功不爲己,志存廣濟,故以大道爲名也。」
『법화경』에 이르기를 「세 수레란 첫째는 성문승이요 둘째는 연각승이요 셋째는 보살승이다. 성문이란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아 도를 얻는 것이다. 연각이란 인연을 깨달아 도를 얻는 것이다. 보살이란 여섯 건넘을 행하여 도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한이 도를 얻음은 온전히 부처의 가르침을 말미암으므로 성문으로 이름을 삼는다. 벽지불이 도를 얻음은 더러는 인연을 듣고 풀고 더러는 고리와 패옥 소리를 듣고 깨치는데, 정신이 홀로 이를 수 있으므로 연각으로 이름을 삼는다. 보살이란 큰 도의 사람이다. 방편으로는 다만 여섯 건넘을 행하고 참된 가르침으로는 두루 온갖 착함을 닦으며, 공을 저를 위해 하지 않고 뜻이 널리 건짐에 있으므로 큰 도로 이름을 삼는다」 하였다.
38그대의 말이 좋기는 좋으나 어찌 서로 괴롭히는 데 이르렀소
許掾年少時,人以比王苟子,許大不平。時諸人士及於法師並在會稽西寺講,王亦在焉。許意甚忿,便往西寺與王論理,共決優劣。苦相折挫,王遂大屈。許復執王理,王執許理,更相覆疎;王復屈。許謂支法師曰:「弟子向語何似?」支從容曰:「君語佳則佳矣,何至相苦邪?豈是求理中之談哉!」
허연이 나이 어릴 때 사람들이 왕구자에 견주니 허연이 몹시 언짢아하였다.
그때 여러 인사와 우법사가 아울러 회계 서사에서 강하고 있었는데 왕구자도 거기 있었다.
허연이 뜻에 몹시 분하여 곧 서사에 가서 왕구자와 결을 논하며 함께 낫고 못함을 가렸다. 괴롭게 꺾고 눌러 왕구자가 마침내 크게 굽혔다.
허연이 다시 왕구자의 결을 잡고 왕구자가 허연의 결을 잡아 서로 뒤집어 폈는데, 왕구자가 다시 굽혔다.
허연이 지법사에게 말하였다. "제자의 아까 말이 어떠하였습니까."
지법사가 조용히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좋기는 좋으나 어찌 서로 괴롭히는 데 이르렀소. 어찌 결을 구하는 가운데의 말이겠소."
협주 2
詢也
허순이다.
苟子,王脩小字也。《文字志》曰:「脩字敬仁,太原晉陽人。父濛,司徒左長史。脩明秀有美稱,善隸行書,號曰『流奕淸舉』。起家著作佐郎,琅邪王文學,轉中軍司馬,未拜而卒,時年二十四。昔王弼之沒,與脩同年,故脩弟熙乃歎曰:『無愧於古人,而年與之齊也。』」
구자는 왕수의 아이 적 이름이다. 『문자지』에 이르기를 「왕수는 자가 경인이요 태원 진양 사람이다. 아버지 왕몽은 사도좌장사다. 왕수는 밝고 빼어나 아름다운 일컬음이 있었고 예서와 행서를 잘 써서 『흐르듯 이어지고 맑게 들린다』 불렸다. 저작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낭야왕 문학과 중군사마로 옮겼는데, 임명받기 전에 죽으니 그때 나이 스물넷이었다. 옛날 왕필이 죽은 것이 왕수와 같은 나이였으므로, 왕수의 아우 왕희가 이에 탄식하기를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데 나이도 그와 가지런하구나』 하였다」 하였다.
39이 아이에게 한평생을 부쳤을 뿐입니다
林道人詣謝公,東陽時始總角,新病起,體未堪勞。與林公講論,遂至相苦。母王夫人在壁後聽之,再遣信令還,而太傅留之。王夫人因自出云:「新婦少遭家難,一生所寄,唯在此兒。」因流涕抱兒以歸。謝公語同坐曰:「家嫂辭情忼慨,致可傳述,恨不使朝士見。」
임도인이 사공을 찾아갔는데, 동양이 그때 갓 더벅머리로 새로 병에서 일어나 몸이 아직 수고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임공과 강론하다가 마침내 서로 괴롭히는 데 이르렀다. 어머니 왕부인이 벽 뒤에서 이를 듣고 두 번 기별을 보내 돌아오게 하였으나 태부가 붙들었다.
왕부인이 이에 몸소 나와 말하였다. "새댁이 젊어서 집안의 어려움을 만나 한평생 부친 바가 오직 이 아이에게 있습니다."
이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안고 돌아갔다.
사공이 같이 앉은 이에게 말하였다. "집안 형수의 말과 뜻이 북받쳐 자못 전하여 서술할 만한데, 조정의 선비들에게 보이지 못한 것이 한이오."
협주 2
東陽,謝朗也,已見。《中興書》曰:「朗博渉有逸才,善言玄理。」
동양은 사랑이니 이미 보인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랑은 널리 걸치고 뛰어난 재주가 있어 아득한 결을 잘 말하였다」 하였다.
《謝氏譜》曰:「朗父據,取太康王韜女,名綏。」
『사씨보』에 이르기를 「사랑의 아버지 사거가 태강 왕도의 딸을 맞았으니 이름이 수다」 하였다.
40두 집안의 아름다움만 함께 감탄할 뿐 결이 어디 있는지는 가리지 못하였다
支道林、許掾諸人共在會稽王齋頭。支爲法師,許爲都講。支通一義,四坐莫不厭心。許送一難,衆人莫不抃舞。但共嗟詠二家之美,不辯其理之所在。
지도림과 허연 여러 사람이 함께 회계왕의 서재에 있었다.
지도림이 법사가 되고 허연이 도강이 되었다. 지도림이 한 뜻을 통하면 온 자리가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허연이 한 번 따짐을 보내면 뭇사람이 손뼉 치며 춤추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만 두 집안의 아름다움을 함께 감탄하고 읊을 뿐, 그 결이 어디에 있는지는 가리지 못하였다.
협주 2
簡文
간문제다.
《髙逸沙門傳》曰:「道林時講《維摩詰經》。」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도림이 그때 『유마힐경』을 강하였다」 하였다.
41오늘 사효와 실컷 이야기하고 오는 길이오
謝車騎在安西艱中,林道人往就語,將夕乃退。有人道上見者問云:「公何處來?」答云:「今日與謝孝劇談一出來。」
사거기가 안서의 상중에 있을 때 임도인이 가서 이야기하다가 저물어서야 물러났다.
어떤 이가 길 위에서 보고 물었다. "공은 어디서 오십니까."
대답하였다. "오늘 사효와 실컷 이야기하고 오는 길이오."
협주 2
安西,謝奕。已見。
안서는 사혁이니 이미 보인다.
《玄別傳》曰:「玄能淸言,善名理。」
『현별전』에 이르기를 「사현은 맑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이름과 결을 잘하였다」 하였다.
42그대의 뜻과 말이 도무지 나아가지 않았소
支道林初從東出,住東安寺中。王長史宿構精理,并撰其才藻,往與支語,不大當對。王敘致作數百語,自謂是名理奇藻。支徐徐謂曰:「身與君別多年,君義言了不長進。」王大慚而退。
지도림이 처음 동쪽에서 나와 동안사 안에 머물렀다.
왕장사가 미리 고운 결을 얽고 아울러 그 재주와 문채를 가려, 가서 지도림과 이야기하였는데 크게 맞서지 못하였다.
왕장사가 뜻을 펴 몇백 마디를 하며 스스로 이름과 결의 기이한 문채라 여겼다.
지도림이 천천히 말하였다. "제가 그대와 헤어진 지 여러 해인데, 그대의 뜻과 말이 도무지 나아가지 않았소."
왕장사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협주 1
《髙逸沙門傳》曰:「遁居會稽,晉哀帝欽其風味,遣中使至東迎之。遁遂辭丘壑,髙歩天邑。」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지둔이 회계에 사니 진나라 애제가 그 풍모와 맛을 흠모하여 중사를 동쪽에 보내 맞이하였다. 지둔이 마침내 언덕과 골짜기를 하직하고 하늘 도읍에 높이 걸었다」 하였다.
43소품에 이백 쪽지를 붙이다
殷中軍讀小品,下二百籤,皆是精微,世之幽滯。嘗欲與支道林辯之,竟不得。今小品猶存。
은중군이 『소품반야경』을 읽으며 이백 쪽지를 붙였는데 다 곱고 은미하여 세상이 그윽하게 막힌 데였다.
일찍이 지도림과 이를 가리려 하였으나 마침내 하지 못하였다. 이제 『소품』이 아직 남아 있다.
협주 2
釋氏《辨空經》,有詳者焉,有略者焉。詳者爲大品,略者爲小品。
석씨의 『변공경』에 자세한 것이 있고 간략한 것이 있다. 자세한 것을 『대품』이라 하고 간략한 것을 『소품』이라 한다.
《髙逸沙門傳》曰:「殷浩能言名理,自以有所不達,欲訪之於遁。遂邂逅不遇,深以爲恨。其爲名識賞重,如此之至焉。」《語林》曰:「浩於佛經有所不了,故遣人迎林公,林乃虚懷欲往。王右軍駐之曰:『淵源思致淵富,既未易爲敵,且己所不解,上人未必能通。縱復服從,亦名不益髙。若佻脱不合,便喪十年所保。可不須往!』林公亦以爲然,遂止。」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은호는 이름과 결을 말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통달하지 못한 바가 있다 하여 지둔에게 물으려 하였다. 마침내 어긋나 만나지 못하고 깊이 한으로 여겼다. 그가 이름 있는 식견으로 알아주고 무겁게 여김을 받음이 이토록 지극하였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은호가 불경에 알지 못하는 바가 있어 짐짓 사람을 보내 임공을 맞으려 하니, 임공도 이에 마음을 비우고 가려 하였다. 왕우군이 이를 막으며 『은연원은 생각과 이룸이 깊고 넉넉하여 이미 쉬이 맞설 수 없고, 또 제가 풀지 못하는 바를 상인께서 반드시 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설령 다시 따르게 하더라도 이름이 더 높아지지 않고, 만일 가벼이 벗어나 맞지 않으면 곧 열 해 지켜 온 바를 잃습니다. 가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하였다. 임공도 그러하다 여겨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였다.
44봉우리에 올라 끝에 이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佛經以爲袪練神明,則聖人可致。簡文云:「不知便可登峰造極不?然陶練之功,尚不可誣。」
불경에서 정신과 밝음을 떨어 다스리면 성인에 이를 수 있다 하였다.
간문제가 말하였다. "봉우리에 올라 끝에 이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그러나 빚고 다스리는 공은 오히려 속일 수 없소."
협주 1
釋氏經曰:「一切衆生,皆有佛性。但能修智慧,斷煩惱,萬行具足,便成佛也。」
석씨의 경에 이르기를 「온갖 중생에게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 다만 슬기를 닦고 번뇌를 끊어 만 가지 행이 갖추어지면 곧 부처를 이룬다」 하였다.
45그대가 어찌 남의 짐을 싣고 왔는가
于法開始與支公爭名,後情漸歸支,意甚不分,遂遁跡剡下。遣弟子出都,語使過會稽。於時支公正講小品。開戒弟子:「道林講,比汝至,當在某品中。」因示語攻難數十番,云:「舊此中不可復通。」弟子如言詣支公。正値講,因謹述開意。往反多時,林公遂屈。厲聲曰:「君何足復受人寄載來!」
우법개가 처음에 지공과 이름을 다투었는데, 뒤에 정이 차츰 지공에게 돌아가니 뜻에 몹시 나누어지지 않아 마침내 섬현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제자를 서울로 내보내며 회계를 들르라 말하였다. 그때 지공이 마침 『소품』을 강하고 있었다.
우법개가 제자를 타일렀다. "도림이 강하는데 네가 이를 때쯤이면 마땅히 어느 품에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쳐 따질 말 수십 번을 일러 주며 말하였다. "예부터 이 가운데는 다시 통할 수 없다."
제자가 말대로 지공을 찾아가니 마침 강하는 때였다. 이로 인해 삼가 우법개의 뜻을 서술하였다. 오가기를 여러 때 하니 임공이 마침내 굽혔다.
매서운 소리로 말하였다. "그대가 어찌 남의 짐을 싣고 왔는가."
협주 1
《名德沙門題目》曰:「于法開才辨從橫,以數術弘教。」《髙逸沙門傳》曰:「法開初以義學著名,後與支遁有競,故遁居剡縣,更學醫術。」
『명덕사문제목』에 이르기를 「우법개는 재주와 말솜씨가 종횡하여 술수로 가르침을 넓혔다」 하였다.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법개가 처음에 뜻을 배움으로 이름났는데, 뒤에 지둔과 겨룸이 있었으므로 지둔이 섬현에 살자 다시 의술을 배웠다」 하였다.
46물을 땅에 붓는 것과 같아 반듯하거나 둥근 것이 거의 없다
殷中軍問:「自然無心於稟受,何以正善人少,惡人多?」諸人莫有言者。劉尹答曰:「譬如寫水著地,正自縱橫流漫,略無正方圓者。」一時絶嘆,以爲名通。
은중군이 물었다. "저절로 그러함은 받아 주는 데 마음이 없는데, 어찌 바로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사람은 많은가."
여러 사람이 말하는 이가 없었다.
유윤이 대답하였다. "비유하자면 물을 땅에 붓는 것과 같아, 바로 절로 이리저리 흘러 퍼져 반듯하거나 둥근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한때에 지극히 감탄하며 이름난 통함이라 하였다.
협주 1
《莊子》曰:「天籟者,吹萬不同,而使其自己也。」郭子玄注曰:「無既無矣,則不能生有。有之未生,又不能爲生。然則生生者誰哉?塊然而自生耳,非我生也。我不生物,物不生我,則自然而已然,謂之天然。天然非爲也,故以天言之,所以明其自然故也。」
『장자』에 이르기를 「하늘 퉁소란 만 가지를 불되 같지 않아 그 스스로 그러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곽자현이 주하여 이르기를 「없음은 이미 없으니 곧 있음을 낳을 수 없다. 있음이 아직 나지 않았으면 또 낳음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것을 낳는 이는 누구인가. 흙덩이처럼 스스로 날 뿐이지 내가 낳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물을 낳지 않고 사물이 나를 낳지 않으니 곧 저절로 그러하여 이미 그러할 뿐이라, 이를 하늘 그러함이라 이른다. 하늘 그러함은 함이 아니므로 하늘로 말한 것이니, 그 저절로 그러함을 밝히려는 까닭이다」 하였다.
47강승연이 처음 강을 건너다
康僧淵初過江,未有知者,恆周旋市肆,乞索以自營。忽往殷淵源許,値盛有賓客,殷使坐,麤與寒温,遂及義理。語言辭旨,曾無愧色。領略麤舉,一往參詣。由是知之。
강승연이 처음 강을 건널 때 아는 이가 없어, 늘 저잣거리를 돌며 빌어 스스로 꾸렸다.
홀연 은연원의 처소에 갔는데 마침 손이 성하게 있었다. 은연원이 앉게 하고 거칠게 안부를 나누다가 마침내 뜻과 결에 미쳤다.
말과 뜻이 일찍이 부끄러운 낯빛이 없었고, 거느려 살펴 거칠게 드는 것이 한 번에 이르러 나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알게 되었다.
협주 1
僧淵氏族,所出未詳。疑是胡人。尚書令沈約撰《晉書》,亦稱其有義學。
승연의 겨레와 나온 데는 자세하지 않다. 아마 오랑캐 사람인 듯하다. 상서령 심약이 지은 『진서』에도 그가 뜻을 배움이 있었다 일컬었다.
48눈이 만 가지 꼴에 가는가, 만 가지 꼴이 눈에 들어오는가
殷謝諸人共集。謝因問殷:「眼往屬萬形,萬形來入眼不?」
은씨와 사씨 여러 사람이 함께 모였다.
사공이 이로 인해 은호에게 물었다. "눈이 만 가지 꼴에 가는 것이오, 만 가지 꼴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오."
협주 2
殷浩、謝安
은호와 사안이다.
《成實論》曰:「眼識不待到而知虚塵,假空與明,故得見色。若眼到色到,色閒則無空明。如眼觸目,則不能見彼。當知眼識不到而知。」依如此説,則眼不往,形不入,遙屬而見也。謝有問,殷無答,疑闕文。
『성실론』에 이르기를 「눈의 앎은 이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빈 티끌을 알며, 빔과 밝음을 빌리므로 빛깔을 볼 수 있다. 만일 눈이 이르고 빛깔이 이른다면 빛깔 사이에 빔과 밝음이 없다. 눈이 눈알에 닿는 것과 같으면 곧 저를 볼 수 없다. 마땅히 눈의 앎이 이르지 않고 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이 말에 기대면 곧 눈이 가지 않고 꼴이 들어오지 않으며 멀리 붙어서 보는 것이다. 사공에게 물음이 있고 은호에게 답이 없으니 글이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49벼슬은 본디 썩은 냄새요 재물은 본디 거름흙이다
人有問殷中軍:「何以將得位而夢棺器,將得財而夢矢穢?」殷曰:「官本是臭腐,所以將得而夢棺屍;財本是糞土,所以將得而夢穢汙。」時人以爲名通。
어떤 이가 은중군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벼슬을 얻으려 할 때는 널을 꿈꾸고, 재물을 얻으려 할 때는 똥과 더러운 것을 꿈꿉니까."
은중군이 말하였다. "벼슬은 본디 썩은 냄새이므로 얻으려 할 때 널과 주검을 꿈꾸고, 재물은 본디 거름흙이므로 얻으려 할 때 더러운 것을 꿈꾼다."
그때 사람들이 이름난 통함이라 하였다.
50처음에는 많음을 의심하고 나중에는 적음을 한하다
殷中軍被廢東陽,始看佛經。初視《維摩詰》,疑般若波羅密太多,後見小品,恨此語少。
은중군이 폐해져 동양에 있을 때 비로소 불경을 보았다.
처음 『유마힐경』을 볼 때는 「반야바라밀」이 너무 많다 의심하였는데, 뒤에 『소품』을 보고는 이 말이 적음을 한하였다.
협주 3
浩黜廢事,別見。
은호가 물러나 폐해진 일은 따로 보인다.
僧肇注《維摩經》曰:「維摩詰者,秦言淨名,蓋法身之大士,見居此土,以弘道也。」
승조가 『유마경』에 주하여 이르기를 「유마힐이란 진나라 말로 정명이니, 대개 법의 몸을 지닌 큰 선비로 이 땅에 나타나 살며 도를 넓힌 것이다」 하였다.
波羅密,此言到彼岸也。經云:「到者有六焉:一曰檀;檀者,施也。二曰毗黎;毗黎者,持戒也。三曰羼提;羼提者,忍辱也。四曰尸羅;尸羅者,精進也。五曰禪;禪者,定也。六曰般若;般若者,智慧也。然則五者爲舟,般若爲導,導則倶絶有相之流,升無相之彼岸也。故曰波羅密也。」淵源未暢其致,少而疑其多;已而究其宗,多而患其少也。
바라밀은 여기 말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이르는 데 여섯이 있다. 첫째는 단이니 단은 베풂이다. 둘째는 비려니 비려는 계를 지님이다. 셋째는 찬제니 찬제는 욕됨을 참음이다. 넷째는 시라니 시라는 힘써 나아감이다. 다섯째는 선이니 선은 안정이다. 여섯째는 반야니 반야는 슬기다」 하였다. 그렇다면 다섯이 배가 되고 반야가 이끎이 되니, 이끌면 곧 함께 모습 있는 흐름을 끊고 모습 없는 저 언덕에 오른다.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한다. 은연원이 아직 그 이룸을 시원하게 알지 못하여 처음에는 그 많음을 의심하였고, 이윽고 그 마루를 캐고서는 많으면서도 그 적음을 걱정한 것이다.
51재주와 성품은 은연원의 효산과 함곡 같은 굳음이오
支道林、殷淵源倶在相王許。簡文相王謂二人:「可試一交言。而才性殆是淵源崤函之固,君其愼焉!」支初作,改轍遠之,數四交,不覺入其玄中。相王撫肩笑曰:「此自是其勝塲,安可爭鋒!」
지도림과 은연원이 함께 상왕의 처소에 있었다.
간문 상왕이 두 사람에게 일렀다. "한번 말을 섞어 보시오. 그런데 재주와 성품은 아마 은연원의 효산과 함곡 같은 굳음이니 그대는 삼가시오."
지도림이 처음 지을 때는 바퀴 자국을 고쳐 멀리 돌았는데, 서너 번 오가더니 저도 모르게 그 아득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상왕이 어깨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이는 절로 그의 이기는 마당이니 어찌 칼끝을 다투겠소."
협주 1
崤,謂二陵之地;函,函谷關也。並秦之險塞,王者之居。左思《魏都賦》曰:「崤函,帝王之宅。」
효는 두 언덕의 땅을 이르고 함은 함곡관이다. 아울러 진나라의 험한 요새요 임금 된 이의 거처다. 좌사의 「위도부」에 이르기를 「효산과 함곡은 제왕의 집이다」 하였다.
52우모정명 원유진고 — 이 구절에 우아한 사람의 깊은 이룸이 있다
謝公因子弟集聚,問毛《詩》何句最佳?遏稱曰:「昔我往矣,楊柳依依;今我來思,雨雪霏霏。」公曰:「訏謨定命,遠猷辰告。」謂此句偏有雅人深致。
사공이 자제가 모인 김에 물었다. "모씨의 『시』에서 어느 구절이 가장 좋으냐."
사현이 일컬어 말하였다. "「옛날 내가 갈 때에는 버들이 하늘하늘하더니, 이제 내가 돌아옴을 생각하니 눈비가 부슬부슬하다."
사공이 말하였다. "「큰 꾀로 명을 정하고 먼 헤아림을 때맞추어 알린다."
이 구절에 유난히 우아한 사람의 깊은 이룸이 있다고 이른 것이다.
협주 2
謝玄小字,已見。
사현의 아이 적 이름이니 이미 보인다.
《大雅詩》也。毛萇注曰:「訏,大也。謨,謀也。辰,時也。」鄭玄注曰:「猷,圖也。大謀定命,謂正月始和,布政於邦國都鄙。」
『대아』의 시다. 모장이 주하여 이르기를 「우는 큼이요 모는 꾀요 신은 때다」 하였다. 정현이 주하여 이르기를 「유는 헤아림이다. 큰 꾀로 명을 정한다는 것은 정월에 비로소 어울려 나라와 도읍과 시골에 정사를 펴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53장빙이 말석에서 판가름하다
張憑舉孝廉出都,負其才氣,謂必參時彦。欲詣劉尹,鄕里及同舉者共笑之。張遂詣劉。劉洗濯料事,處之下坐,唯通寒暑,神意不接。張欲自發無端。頃之,長史諸賢來淸言。客主有不通處,張乃遙於末坐判之,言約旨遠,足暢彼我之懷,一坐皆驚。眞長延之上坐,淸言彌日,因留宿至曉。張退,劉曰:「卿且去,正當取卿共詣撫軍。」張還船,同侶問何處宿?張笑而不答。須臾,眞長遣傳教覓張孝廉船,同侶惋愕。即同載詣撫軍。至門,劉前進謂撫軍曰:「下官今日爲公得一太常博士妙選!」既前,撫軍與之話言,咨嗟稱善曰:「張憑勃窣爲理窟。」即用爲太常博士。
장빙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서울에 나오는데, 제 재주와 기운을 자부하여 반드시 그때의 뛰어난 이들과 어울리리라 여겼다.
유윤을 찾아가려 하니 시골 사람과 함께 천거된 이들이 다 그를 비웃었다. 장빙이 마침내 유윤을 찾아갔다.
유윤은 씻고 일을 헤아리며 그를 아랫자리에 두고 오직 안부만 통할 뿐 정신과 뜻을 맞대지 않았다. 장빙이 스스로 말을 꺼내려 하였으나 실마리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장사와 여러 어진 이가 와서 맑은 이야기를 하였다. 손과 주인이 통하지 못하는 데가 있으니, 장빙이 이에 멀리 말석에서 이를 판가름하는데 말이 간략하고 뜻이 멀어 저와 나의 품은 바를 시원하게 하기에 넉넉하니 온 자리가 다 놀랐다.
진장이 그를 윗자리로 이끌어 온종일 맑은 이야기를 하고, 이로 인해 붙들어 재워 새벽에 이르렀다.
장빙이 물러나니 유윤이 말하였다. "경은 우선 가시오. 바로 마땅히 경을 데리고 함께 무군을 찾아가겠소."
장빙이 배로 돌아오니 같이 온 이들이 어디서 잤느냐 물었다. 장빙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뒤에 진장이 전갈을 보내 장효렴의 배를 찾으니 같이 온 이들이 놀라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곧 함께 수레를 타고 무군을 찾아갔다. 문에 이르러 유윤이 앞서 나아가 무군에게 말하였다. "하관이 오늘 공을 위해 태상박사 한 사람을 묘하게 뽑아 왔습니다."
이윽고 앞에 나아가니 무군이 그와 말을 나누고 감탄하며 좋다 일컬었다. "장빙은 뚫고 나오는 결의 굴이로다."
곧 써서 태상박사로 삼았다.
협주 1
宋明帝《文章志》曰:「憑字長宗,呉郡人。有意氣,爲鄕閭所稱。學尚所得,敏而有文。太守以才選舉孝廉,試策髙第。爲惔所舉,補太常博士。累遷吏部郎、御史中丞。」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장빙은 자가 장종이요 오군 사람이다. 뜻과 기운이 있어 마을에서 일컬어졌다. 배움에서 높이 얻은 바가 있고 재빠르며 글이 있었다. 태수가 재주로 가려 효렴으로 천거하니 시험 답안이 높은 등급이었다. 유담에게 천거되어 태상박사에 채워졌고,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랑과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하였다.
54육신통과 삼명은 돌아가는 데가 같고 이름만 다를 뿐이다
汰法師云:「『六通』、『三明』同歸,正異名耳。」
태법사가 말하였다. "「육신통」과 「삼명」은 돌아가는 데가 같으니 바로 이름만 다를 뿐이다."
협주 1
《安法師傳》曰:「竺法汰者,體器弘簡,道情冥到,法師友而善焉。」一説法汰即安公弟子也。經云:「六通者,三乘之功德也。一曰天眼通,見遠方之色;二曰天耳通,聞障外之聲;三曰身通,飛行隱顯;四曰它心通,水鏡萬慮;五曰宿命通,神知已往;六曰漏盡通,慧解累世。三明者:解脱在心,朗照三世者也。」然則天眼、天耳、身通、它心、漏盡此五者,皆見在心之明也。宿命則過去心之明也。因天眼發未來之智,則未來心之明也。同歸異名,義在斯矣。
『안법사전』에 이르기를 「축법태라는 이는 몸과 그릇이 넓고 간결하며 도의 정이 아득히 이르러, 법사가 벗하여 사이가 좋았다」 하였다. 한 설에는 법태가 곧 안공의 제자라 한다. 경에 이르기를 「육신통이란 세 수레의 공덕이다. 첫째는 천안통이니 먼 곳의 빛깔을 보는 것이요, 둘째는 천이통이니 가림 밖의 소리를 듣는 것이요, 셋째는 신통이니 날아다니며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요, 넷째는 타심통이니 온갖 생각을 물과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요, 다섯째는 숙명통이니 정신이 이미 지나간 것을 아는 것이요, 여섯째는 누진통이니 슬기로 여러 세상의 얽매임을 푸는 것이다. 삼명이란 벗어남이 마음에 있어 세 세상을 환히 비추는 것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천안·천이·신통·타심·누진 이 다섯은 다 지금 있는 마음의 밝음이요, 숙명은 곧 지나간 마음의 밝음이다. 천안으로 말미암아 올 것의 슬기를 내면 곧 올 마음의 밝음이다. 돌아가는 데가 같고 이름이 다르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
55어부 한 편을 놓고 저마다 뜻을 통하다
支道林、許、謝盛德,共集王家。謝顧謂諸人:「今日可謂彦會,時既不可留,此集固亦難常。當共言詠,以寫其懷。」許便問主人,有《莊子》不?正得《漁父》一篇。謝看題,便各使四坐通。支道林先通,作七百許語,敘致精麗,才藻奇拔,衆咸稱善。於是四坐各言懷畢。謝問曰:「卿等盡不?」皆曰:「今日之言,少不自竭。」謝後麤難,因自敘其意,作萬餘語,才峰秀逸。既自難干,加意氣擬託,蕭然自得,四坐莫不厭心。支謂謝曰:「君一往奔詣,故復自佳耳。」
지도림과 허씨와 사씨의 성한 덕이 함께 왕씨의 집에 모였다.
사공이 여러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오늘은 뛰어난 이들의 모임이라 이를 만하오. 때는 이미 붙들 수 없고 이 모임도 본디 또한 늘 있기 어렵소. 마땅히 함께 말하고 읊어 그 품은 바를 그려 냅시다."
허씨가 곧 주인에게 『장자』가 있는지 물으니 바로 「어부」 한 편을 얻었다.
사공이 제목을 보고 곧 각자 온 자리가 통하게 하였다. 지도림이 먼저 통하여 칠백 마디쯤 지었는데, 펴 이룸이 곱고 고우며 재주와 문채가 기이하고 빼어나 뭇사람이 다 좋다 일컬었다.
이에 온 자리가 각자 품은 바를 말하기를 마쳤다.
사공이 물었다. "그대들은 다하였소."
다들 말하였다. "오늘의 말은 조금도 스스로 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공이 뒤에 거칠게 따지고 이로 인해 스스로 그 뜻을 펴 만여 마디를 지으니, 재주의 봉우리가 빼어나고 시원하였다. 이미 절로 범하기 어려운 데다 뜻과 기운을 기대어 붙임을 더하여 쓸쓸하게 스스로 얻으니, 온 자리가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지도림이 사공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한 번 내달아 이르니 짐짓 다시 절로 좋을 뿐이오."
협주 3
許詢、謝安、王濛。
허순과 사안과 왕몽이다.
《莊子》曰:「孔子遊乎緇帷之林,休坐乎杏壇之上。孔子絃歌鼓琴,奏曲未半,有漁者下船而來,鬚眉交白,被髮揄袂,行原以上,距陸而止,左手據膝,右手持頤以聽。曲終而招子貢、子路語曰:『彼何爲者也?』曰:『孔氏。』曰:『孔氏何治?』子貢曰:『服忠信,行仁義,飾禮樂,選人倫,孔氏之所治也。』曰:『有土之君歟?』曰:『非也。』漁父曰:『仁則仁矣,恐不免其身。』孔子聞而求問之,遂言八疵、四病,以誡孔子。」
『장자』에 이르기를 「공자가 검은 휘장 같은 숲에 노닐다가 살구나무 단 위에 앉아 쉬었다. 공자가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데 가락이 반도 이르지 않아, 고기잡는 이가 배에서 내려 왔다. 수염과 눈썹이 온통 희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매를 늘어뜨렸는데, 언덕을 걸어 올라와 뭍에 이르러 멈추었다. 왼손으로 무릎을 짚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들었다. 가락이 끝나자 자공과 자로를 불러 말하기를 『저이는 무엇 하는 이요』 하니, 『공씨입니다』 하였다. 『공씨는 무엇을 다스리오』 하니, 자공이 『참됨과 미쁨을 따르고 어짊과 옳음을 행하며 예와 음악을 꾸미고 사람의 갈피를 가리는 것이 공씨가 다스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땅을 가진 임금이오』 하니 『아닙니다』 하였다. 어부가 『어질기는 어지나 그 몸을 벗어나지 못할까 두렵소』 하였다. 공자가 듣고 찾아가 물으니, 마침내 여덟 흠과 네 병을 말하여 공자를 타일렀다」 하였다.
《文字志》曰:「安神情秀悟,善談玄速。」
『문자지』에 이르기를 「사안은 정신과 정이 빼어나게 깨쳐 아득한 것을 말함이 빨랐다」 하였다.
56진장이 오면 짐짓 저를 누를 바가 있으리라
殷中軍、孫安國、王、謝能言諸賢,悉在會稽王許。殷與孫共論《易》象妙於見形。孫語道合,意氣干雲。一坐咸不安孫理,而辭不能屈。會稽王慨然嘆曰:「使眞長來,故應有以制彼。」既迎眞長,孫意己不如。眞長既至,先令孫自敘本理。孫麤説己語,亦覺殊不及向。劉便作二百許語,辭難簡切,孫理遂屈。一坐同時拊掌而笑,稱美良久。
은중군과 손안국과 왕씨와 사씨 등 말 잘하는 여러 어진 이가 다 회계왕의 처소에 있었다.
은중군과 손안국이 함께 『역』의 상이 꼴을 드러내는 것보다 묘하다는 것을 논하였다. 손안국의 말이 도에 맞아 뜻과 기운이 구름을 찔렀다. 온 자리가 다 손안국의 결에 편치 않았으나 말로 굽히게 하지 못하였다.
회계왕이 북받쳐 탄식하였다. "진장을 오게 하면 짐짓 저를 누를 바가 있으리라."
이윽고 진장을 맞으니 손안국의 뜻이 이미 못하였다. 진장이 이르러 먼저 손안국에게 본디 결을 스스로 펴게 하였다. 손안국이 제 말을 거칠게 말하는데 또한 아까에 자못 미치지 못함을 느꼈다.
유윤이 곧 이백 마디쯤 지으니 말과 따짐이 간결하고 절실하여 손안국의 결이 마침내 굽혔다. 온 자리가 한때에 손뼉 치며 웃고 아름답다 일컫기를 한참 하였다.
협주 1
其論略曰:「聖人知觀器不足以達變,故表圓應於蓍龜。圓應不可爲典要,故寄妙跡於六爻。六爻周流,唯化所適,故雖一畫,而吉凶並彰,微一則失之矣。擬器託象,而慶咎交著,繫器則失之矣。故設八卦者,蓋縁化之影跡也。天下者,寄見之一形也。圓影備未備之象,一形兼未形之形。故盡二儀之道,不與乾、坤齊妙。風雨之變,不與巽、坎同體矣。」
그 논의 줄거리에 이르기를 「성인은 그릇을 보아서는 바뀜에 이르기에 넉넉하지 않음을 알았으므로 둥근 응함을 시초와 거북에 드러냈다. 둥근 응함은 법도로 삼을 수 없으므로 묘한 자취를 여섯 효에 부쳤다. 여섯 효가 두루 흘러 오직 바뀜이 가는 데를 따르므로, 비록 한 획이라도 좋고 궂음이 아울러 드러나니 하나를 은미하게 하면 이를 잃는다. 그릇에 견주고 상에 부쳐 경사와 허물이 서로 드러나니 그릇에 매이면 이를 잃는다. 그러므로 여덟 괘를 베푼 것은 대개 바뀜을 말미암은 그림자와 자취다. 천하란 봄을 부친 한 꼴이다. 둥근 그림자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을 갖추고, 한 꼴이 아직 꼴 지어지지 않은 꼴을 겸한다. 그러므로 두 거동의 도를 다하되 건과 곤과 묘함을 가지런히 하지 않고, 바람과 비의 바뀜이 손괘와 감괘와 몸을 같이하지 않는다」 하였다.
57누가 성인을 부린단 말입니까
僧意在瓦官寺中,王苟子來,與共語,便使其唱理。意謂王曰:「聖人有情不?」王曰:「無。」重問曰:「聖人如柱邪?」王曰:「如籌算,雖無情,運之者有情。」僧意云:「誰運聖人邪?」苟子不得答而去。
승의가 와관사 안에 있는데 왕구자가 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곧 그에게 결을 부르게 하였다.
승의가 왕구자에게 말하였다. "성인에게 정이 있습니까."
왕구자가 말하였다. "없소."
거듭 물었다. "성인이 기둥과 같습니까."
왕구자가 말하였다. "산가지와 같아서 비록 정이 없으나 이를 부리는 이에게 정이 있소."
승의가 말하였다. "누가 성인을 부린단 말입니까."
구자가 대답하지 못하고 갔다.
협주 3
未詳僧意氏族所出
승의의 겨레와 나온 데는 자세하지 않다.
苟子,王脩小字。
구자는 왕수의 아이 적 이름이다.
諸本無僧意最後一句,意疑其闕,慶校衆本皆然。唯一書有之,故取以成其義。然王脩善言理,如此論,特不近人情,猶疑斯文爲謬也。
여러 본에 승의의 마지막 한 구절이 없어 빠진 것인가 하였는데, 여러 본을 헤아려 보아도 다 그러하였다. 오직 한 책에 이것이 있으므로 취하여 그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왕수가 결을 잘 말하였는데 이런 논은 자못 사람의 정에 가깝지 않으니, 오히려 이 글이 그른 것이 아닌가 한다.
58혜시의 다섯 수레 책에 어찌 아득한 데 든 말이 하나도 없소
司馬太傅問謝車騎:「惠子其書五車,何以無一言入玄?」謝曰:「故當是其妙處不傳。」
사마태부가 사거기에게 물었다. "혜시는 그 책이 다섯 수레인데 어찌 한마디도 아득한 데 든 것이 없소."
사거기가 말하였다. "짐짓 그 묘한 데가 전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협주 1
《莊子》曰:「惠施多方,其書五車,其道舛駮,其言不中。謂卵有毛,鷄三足,馬有卵,犬可爲羊,火不熱,目不見,龜長於蛇,丁子有尾,白狗黑,連環可解。能勝人之口,不能服人之心。蓋辯者之囿也。」
『장자』에 이르기를 「혜시는 방술이 많아 그 책이 다섯 수레인데 그 도는 어그러지고 뒤섞였으며 그 말은 맞지 않았다. 이르기를 알에 털이 있고 닭에 발이 셋이며 말에 알이 있고 개를 양이라 할 수 있으며, 불은 뜨겁지 않고 눈은 보지 못하며 거북이 뱀보다 길고 두꺼비에 꼬리가 있으며 흰 개는 검고 이어진 고리를 풀 수 있다 하였다. 남의 입은 이길 수 있었으나 남의 마음은 따르게 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따지는 이의 울타리다」 하였다.
59오직 사수에 이르러 알지 못하다
殷中軍被廢,徙東陽,大讀佛經,皆精解。唯至「事數」處不解。遇見一道人,問所籤,便釋然。
은중군이 폐해져 동양으로 옮겨져 불경을 크게 읽었는데 다 곱게 풀었다. 오직 「사수」라는 데 이르러 풀지 못하였다.
마침 한 도인을 만나 쪽지 붙인 데를 물으니 곧 시원하게 풀렸다.
협주 1
事數:謂若五陰、十二入、四諦、十二因縁、五根、五九、七覺之聲。
사수란 다섯 쌓임과 열두 들어옴과 네 진리와 열두 인연과 다섯 뿌리와 다섯 아홉과 일곱 깨침 따위의 소리를 이른다.
60내가 사본을 풀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이만하지 않았으리라
殷仲堪精覈玄論,人謂莫不研究。殷乃嘆曰:「使我解四本,談不翅爾。」
은중감이 아득한 논을 곱게 헤아리니, 사람들이 갈고 캐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은중감이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사본」을 풀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이만할 뿐이 아니었으리라."
협주 1
周祗《隆安記》曰:「仲堪好學而有理思也。」
주지의 『융안기』에 이르기를 「은중감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결의 생각이 있었다」 하였다.
61구리산이 서쪽에서 무너지자 신령한 종이 동쪽에서 울린 것이 곧 역입니까
殷荊州曾問遠公:「易以何爲體?」答曰:「易以感爲體。」殷曰:「銅山西崩,靈鐘東應,便是易耶?」遠公笑而不答。
은형주가 일찍이 원공에게 물었다. "『역』은 무엇으로 몸을 삼습니까."
대답하였다. "『역』은 느낌으로 몸을 삼습니다."
은형주가 말하였다. "구리산이 서쪽에서 무너지자 신령한 종이 동쪽에서 울렸다는 것이 곧 『역』입니까."
원공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협주 2
《張野遠法師銘》曰:「沙門釋惠遠,鴈門樓煩人。本姓賈氏,世爲冠族。年十二,隨舅令狐氏遊學許洛。年二十一,欲南渡,就范宣子學,道阻不通,遇釋道安以爲師。抽簪落髮,研求法藏。釋曇翼毎資以燈燭之費。誦鑒淹遠,髙悟冥賾。安常歎曰:『道流東國,其在遠乎?』襄陽既沒,振錫南遊,結宇靈嶽。自年六十,不復出山。名被流沙,彼國僧衆,皆稱漢地有大乘沙門。毎至然香禮拜,輙東向致敬。年八十三而終。」
「장야원법사명」에 이르기를 「사문 석혜원은 안문 누번 사람이다. 본디 성은 가씨요 대대로 벼슬한 겨레였다. 열둘에 외숙 영호씨를 따라 허와 낙에서 배우러 다녔다. 스물하나에 남쪽으로 건너 범선자에게 나아가 배우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하고, 석도안을 만나 스승으로 삼았다. 비녀를 뽑고 머리를 깎아 법의 곳간을 갈고 구하였다. 석담익이 늘 등불 값을 대 주었다. 외고 살핌이 깊고 멀며 높은 깨침이 아득한 데를 파고들었다. 도안이 늘 탄식하기를 『도가 동쪽 나라에 흐르는 것이 그 혜원에게 있으리라』 하였다. 양양이 무너지자 지팡이를 떨쳐 남쪽으로 노닐어 영악에 집을 얽었다. 예순부터 다시 산을 나오지 않았다. 이름이 사막에 미쳐 그 나라 승려들이 다 한나라 땅에 큰 수레 사문이 있다 일컬었다. 향을 사르고 예배할 때마다 문득 동쪽을 향해 공경을 폈다. 여든셋에 마쳤다」 하였다.
《東方朔傳》曰:「孝武皇帝時,未央宮前殿鐘無故自鳴,三日三夜不止。詔問太史待詔王朔,朔言恐有兵氣。更問東方朔,朔曰:『臣聞:銅者,山之子;山者,銅之母,以陰陽氣類言之,子母相感,山恐有崩弛者,故鐘先鳴。《易》曰:「鳴鶴在陰,其子和之。」精之至也。其應在後五日内。』居三日,南郡太守上書言山崩,延袤二十餘里。」樊英別傳曰:「漢順帝時,殿下鐘鳴,問英。對曰:『蜀瑉山崩。山於銅爲母,母崩子鳴,非聖朝災。』後蜀果土山崩,日月相應。」二説微異,故並載之。
「동방삭전」에 이르기를 「효무황제 때 미앙궁 앞 전각의 종이 까닭 없이 스스로 울어 사흘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 조칙으로 태사대조 왕삭에게 물으니 왕삭이 아마 군사의 기운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다시 동방삭에게 물으니 동방삭이 『신이 듣기에 구리는 산의 아들이요 산은 구리의 어미라 하니, 음과 양의 기운과 무리로 말하면 아들과 어미가 서로 느끼는 것이라 산에 아마 무너져 내린 데가 있을 것이므로 종이 먼저 운 것입니다. 『역』에 이르기를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그 새끼가 화답한다」 하였으니 고움의 지극함입니다. 그 응함이 뒤 닷새 안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흘 있다가 남군태수가 글을 올려 산이 무너져 이십여 리에 뻗쳤다 하였다」 하였다. 「번영별전」에 이르기를 「한나라 순제 때 전각 아래 종이 울어 번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촉 땅 민산이 무너졌습니다. 산은 구리에게 어미가 되니 어미가 무너져 아들이 우는 것이요 거룩한 조정의 재앙이 아닙니다』 하였다. 뒤에 촉에서 과연 흙산이 무너졌는데 날짜가 서로 맞았다」 하였다. 두 설이 조금 다르므로 아울러 싣는다.
62그대는 네 번 오간 뒤에 마땅히 같아짐을 보리라
羊孚弟娶王永言女。及王家見壻,孚送弟倶往。時永言父東陽尚在,殷仲堪是東陽女壻,亦在坐。孚雅善理義,乃與仲堪道《齊物》。殷難之,羊云:「君四番後,當得見同。」殷笑曰:「乃可得盡,何必相同?」乃至四番後一通。殷咨嗟曰:「僕便無以相異。」嘆爲新拔者久之。
양부의 아우가 왕영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왕씨 집안이 사위를 볼 때 양부가 아우를 배웅하여 함께 갔다.
그때 왕영언의 아버지 동양태수가 아직 살아 있었고, 은중감이 동양태수의 사위라 또한 자리에 있었다.
양부가 우아하게 결과 뜻을 잘하여, 이에 은중감과 「제물론」을 말하였다. 은중감이 이를 따지니 양부가 말하였다. "그대는 네 번 오간 뒤에 마땅히 같아짐을 보리다."
은중감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에 다할 수는 있겠으나 어찌 반드시 서로 같겠소."
마침내 네 번 오간 뒤에 하나로 통하였다.
은중감이 감탄하였다. "나는 곧 서로 다르다 할 것이 없소."
새로 빼어난 이라 탄식하기를 오래 하였다.
협주 4
孚弟,輔也。《羊氏譜》曰:「輔字幼仁,泰山人。祖楷,尚書郎。父綏,中書郎。輔仕至衞軍功曹。娶琅邪王訥之女,字僧首。」
양부의 아우는 양보다. 『양씨보』에 이르기를 「양보는 자가 유인이요 태산 사람이다. 할아버지 양해는 상서랑이요 아버지 양수는 중서랑이다. 양보는 벼슬이 위군공조에 이르렀다. 낭야 왕눌지의 딸을 맞았으니 자는 승수다」 하였다.
《王氏譜》曰:「訥之字永言,琅邪人。祖彪之,光祿大夫。父臨之,東陽太守。訥之歴尚書左丞、御史中丞。」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눌지는 자가 영언이요 낭야 사람이다. 할아버지 왕표지는 광록대부요 아버지 왕임지는 동양태수다. 왕눌지는 상서좌승과 어사중승을 지냈다」 하였다.
《殷氏譜》曰:「仲堪娶琅邪王臨之女,字英彦。」
『은씨보』에 이르기를 「은중감이 낭야 왕임지의 딸을 맞았으니 자는 영언이다」 하였다.
《莊子》篇也
『장자』의 편이다.
63사흘만 도덕경을 읽지 않으면 혀뿌리가 뻣뻣해진다
殷仲堪云:「三日不讀《道德經》,便覺舌本間強。」
은중감이 말하였다. "사흘만 『도덕경』을 읽지 않으면 곧 혀뿌리 사이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낀다."
협주 1
《晉安帝紀》曰:「仲堪有思理,能淸言。」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은중감은 생각과 결이 있어 맑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하였다.
64제바가 아비담을 강하다
提婆初至,爲東亭第講《阿毗曇》。始發講,坐裁半,僧彌便云:「都已曉。」即於坐分數四有意道人更就餘屋自講。提婆講竟,東亭問法岡道人曰:「弟子都未解,阿彌那得已解?所得云何?」曰:「大略全是,故當小未精覈耳。」
제바가 처음 이르러 동정후의 집에서 『아비담』을 강하였다.
비로소 강을 펴 자리가 겨우 반쯤 되었을 때 승미가 곧 말하였다. "다 이미 알았소."
곧 자리에서 뜻 있는 도인 서너 사람을 나누어 다시 다른 방으로 가서 스스로 강하였다.
제바가 강을 마치자 동정후가 법강 도인에게 물었다. "제자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는데 아미가 어찌 이미 알았겠소. 얻은 바가 어떠하오."
말하였다. "대체로 온전히 옳으나 짐짓 조금 곱게 헤아리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협주 3
《出經敘》曰:「僧伽提婆,罽賓人,姓瞿氏。俊朗有深鑒,苻堅至長安,出諸經。後渡江,遠法師請譯《阿毗曇》。」遠法師《阿毗曇敘》曰:「阿毗曇,心者,三藏之要領,詠歌之微言。源流廣大,管綜衆經,領其宗會,故作者以心爲名焉。有出家開士字法勝,以阿毗曇源流廣大,卒難尋究,別撰斯部,凡二百五十偈,以爲要解,號之曰『心』。罽賓沙門僧伽提婆,少玩斯文,因請令譯焉。」阿毗曇者,晉言大法也。道標法師曰:「阿毗曇者,秦言無比法也。」
「출경서」에 이르기를 「승가제바는 계빈 사람이요 성은 구씨다. 뛰어나고 밝으며 깊은 살핌이 있었는데, 부견이 장안에 이르자 여러 경을 내었다. 뒤에 강을 건너 원법사가 청하여 『아비담』을 옮기게 하였다」 하였다. 원법사의 「아비담서」에 이르기를 「아비담이란 세 곳간의 요긴한 벼리요 노래로 읊는 은미한 말이다. 근원과 흐름이 넓고 커서 뭇 경을 아울러 다스리고 그 마루와 모임을 거느리므로, 지은 이가 마음으로 이름을 삼았다. 집을 나온 큰 선비로 자가 법승인 이가 있어, 아비담이 근원과 흐름이 넓고 커서 마침내 찾아 캐기 어려우므로 따로 이 부를 지었으니, 무릇 이백쉰 게송으로 요긴한 풀이를 삼아 『마음』이라 불렀다. 계빈 사문 승가제바가 젊어서 이 글을 즐겼으므로 청하여 옮기게 하였다」 하였다. 아비담이란 진나라 말로 큰 법이다. 도표법사가 이르기를 「아비담이란 진나라 말로 견줄 데 없는 법이다」 하였다.
法岡,未詳氏族。
법강은 겨레를 자세히 알 수 없다.
《出經敘》曰:「提婆以隆安初遊京師,東亭侯王珣迎至舍講《阿毗曇》。提婆宗致既明,振發義奧,王僧彌一聽便自講,其明義易啓人心如此。未詳年卒。」
「출경서」에 이르기를 「제바가 융안 처음에 서울에 노니니 동정후 왕순이 맞아 집에 이르러 『아비담』을 강하게 하였다. 제바의 마루와 이룸이 이미 밝고 뜻의 깊음을 떨쳐 일으키니, 왕승미가 한 번 듣고 곧 스스로 강하였다. 그 뜻을 밝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이 이와 같이 쉬웠다. 죽은 해는 자세하지 않다」 하였다.
65이는 바로 그대가 더 알게 된 것이오
桓南郡與殷荊州共談,毎相攻難。年餘後,但一兩番。桓自嘆才思轉退。殷云:「此乃是君轉解。」
환남군이 은형주와 함께 이야기할 때 서로 쳐 따질 때마다 그러하였다. 한 해 남짓 뒤에는 다만 한두 번뿐이었다.
환남군이 스스로 재주와 생각이 물러났다 탄식하니 은형주가 말하였다. "이는 바로 그대가 더 알게 된 것이오."
협주 1
周祗《隆安記》曰:「玄善言理,棄郡還國,常與殷荊州仲堪終日談論不輟。」
주지의 『융안기』에 이르기를 「환현은 결을 잘 말하였는데, 고을을 버리고 제 나라로 돌아와 늘 은형주 은중감과 온종일 이야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였다.
66콩깍지가 솥 밑에서 타고 콩이 솥 안에서 운다
文帝嘗令東阿王七歩中作詩,不成者行大法。應聲便爲詩曰:「煮豆持作羹,漉菽以爲汁。萁在釜下然,豆在釜中泣。本自同根生,相煎何太急?」帝深有慚色。
문제가 일찍이 동아왕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게 하고 이루지 못하면 큰 법을 행하겠다 하였다.
소리에 응하여 곧 시를 지었다. "콩을 삶아 국을 만들고 콩을 걸러 즙을 낸다. 콩깍지는 솥 밑에서 타고 콩은 솥 안에서 운다. 본디 같은 뿌리에서 났거늘 서로 볶기를 어찌 그리 급히 하는가."
임금이 깊이 부끄러운 낯빛이 있었다.
협주 1
《魏志》曰:「陳思王植字子建,文帝同母弟也。年十餘歳誦詩論及辭賦數萬言。善屬文,太祖嘗視其文曰:『汝倩人邪?』植跪曰:『出言爲論,下筆成章,顧當面試,柰何倩人?』時鄴銅雀臺新成,太祖悉將諸子登之,使各爲賦。植援筆立成,可觀。性簡易,不治威儀,輿馬服飾,不尚華麗。毎見難問,應聲而答,太祖寵愛之,幾爲太子者數矣。文帝即位,封鄄城侯,後徙雍丘,復封東阿。植毎求試不得,而國亟遷易,汲汲無懽。年四十一薨。」
『위지』에 이르기를 「진사왕 조식은 자가 자건이요 문제와 어머니가 같은 아우다. 열 남짓에 시와 논과 사와 부 수만 마디를 외웠다. 글 짓기를 잘하여 태조가 일찍이 그 글을 보고 『네가 남을 빌렸느냐』 하니, 조식이 무릎 꿇고 『말을 내면 논이 되고 붓을 대면 글이 되니, 낯을 맞대 시험해 보시면 될 터인데 어찌 남을 빌리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업에 동작대가 새로 이루어져 태조가 여러 아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 각자 부를 짓게 하니, 조식이 붓을 당겨 선 자리에서 이루었는데 볼 만하였다. 성품이 간결하고 쉬워 위엄과 몸가짐을 다스리지 않았고, 수레와 말과 옷과 꾸밈에 화려함을 높이지 않았다. 어려운 물음을 볼 때마다 소리에 응하여 답하니 태조가 그를 사랑하여 태자로 삼으려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문제가 자리에 오르자 견성후에 봉해졌고 뒤에 옹구로 옮겼다가 다시 동아에 봉해졌다. 조식이 시험받기를 구할 때마다 얻지 못하고 나라가 자주 옮겨 바뀌어, 급급하여 즐거움이 없었다. 마흔하나에 죽었다」 하였다.
67완적이 취한 채 일어나 붓을 대니 고칠 데가 없었다
魏朝封晉文王爲公,備禮九錫,文王固讓不受。公卿將校當詣府敦喩。司空鄭沖馳遣信就阮籍求文。籍時在袁孝尼家,宿醉扶起,書札爲之,無所點定,乃寫付使。時人以爲神筆。
위나라 조정이 진나라 문왕을 공으로 봉하고 예를 갖추어 아홉 가지를 내리니, 문왕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공경과 장교가 마땅히 관부에 나아가 두터이 타일러야 하였다. 사공 정충이 급히 기별을 보내 완적에게 글을 구하였다.
완적이 그때 원효니의 집에 있었는데, 묵은 술이 덜 깬 채로 부축을 받아 일어나 글로 지으니 점 찍어 고칠 데가 없었다. 이에 베껴 심부름꾼에게 주었다.
그때 사람들이 신령한 붓이라 하였다.
협주 3
沖,已見。
정충은 이미 보인다.
《袁氏世紀》曰:「準字孝尼,陳郡陽夏人。父渙,魏郎中令。準忠信居正,不恥下問,唯恐人不勝己也。世事多險,故治退不敢求進。著書十萬餘言。」荀綽《兗州記》曰:「準有雋才,泰始中,位給事中。」
『원씨세기』에 이르기를 「원준은 자가 효니요 진군 양하 사람이다. 아버지 원환은 위나라 낭중령이다. 원준은 참되고 미쁘며 바름에 머물러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직 남이 저를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세상일에 험한 데가 많으므로 물러남을 다스리고 감히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았다. 책 십만여 마디를 지었다」 하였다. 순작의 『연주기』에 이르기를 「원준은 뛰어난 재주가 있어 태시 연간에 자리가 급사중이었다」 하였다.
顧愷之《晉文章記》曰:「阮籍勸進,落落有宏致,至轉説徐而攝之也。」一本注阮籍《勸進文》略曰:「竊聞明公固讓,沖等眷眷,實懷愚心。以爲聖王作制,百代同風,褒德賞功,其來久矣。周公藉已成之業,據既安之勢,光宅曲阜,奄有龜蒙。明公宜奉聖旨,受茲介福也。」
고개지의 『진문장기』에 이르기를 「완적의 「권진문」은 우뚝하게 넓은 이룸이 있고, 돌려 말하는 데 이르러서는 천천히 이를 잡았다」 하였다. 한 본의 주에 완적의 「권진문」 줄거리에 이르기를 「가만히 듣건대 명공께서 굳이 사양하시니 저희가 그리워 실로 어리석은 마음을 품습니다. 성인 임금이 제도를 지어 백대에 풍속을 같이하고 덕을 기려 공에 상 준 것이 그 온 지 오래라 여깁니다. 주공은 이미 이룬 업을 빌리고 이미 편안한 형세에 기대어 곡부에 빛나게 자리 잡고 구산과 몽산을 다 가졌습니다. 명공께서는 마땅히 거룩한 뜻을 받들어 이 큰 복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68좌사가 삼도부를 짓고 황보밀에게 서를 받다
左太沖作《三都賦》初成,時人互有譏訾,思意不愜。後示張公。張曰:「此二《京》可三,然君文未重於世,宜以經髙名之士。」思乃詢求於皇甫謐。謐見之嗟嘆,遂爲作敘。於是先相非貳者,莫不斂袵讚述焉。
좌태충이 「삼도부」를 지어 처음 이루었을 때, 그때 사람들이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 좌사의 뜻이 흡족하지 않았다.
뒤에 장공에게 보이니 장공이 말하였다. "이는 두 「경도부」와 셋이 될 만하오. 그러나 그대의 글이 아직 세상에 무겁지 않으니 마땅히 높은 이름의 선비를 거쳐야 하오."
좌사가 이에 황보밀에게 물어 구하였다. 황보밀이 보고 감탄하여 마침내 서를 지어 주었다.
이에 앞서 그르다 하고 두 마음을 품던 이들이 옷깃을 여미고 기려 서술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협주 4
《思別傳》曰:「思字太沖,齊國臨淄人。父雍起於筆札,多所掌練,爲殿中御史。思蚤喪母,雍憐之,不甚教其書學。及長,博覽名文,遍閲百家。司空張華辟爲祭酒,賈謐舉爲祕書郎。謐誅,歸鄕里,專思著述。齊王冏請爲記室參軍,不起。時爲《三都賦》未成也。後數年疾終。其《三都賦》改定,至終乃上。初,作《蜀都賦》云:『金馬電發於髙岡,碧鷄振翼而雲披。鬼彈飛丸以礌礉,火井騰光以赫曦。』今無鬼彈,故其賦往往不同。思爲人无吏幹而有文才,又頗以椒房自矜,故齊人不重也。」
『사별전』에 이르기를 「좌사는 자가 태충이요 제나라 임치 사람이다. 아버지 좌옹은 붓과 글로 일어나 맡아 익힌 바가 많아 전중어사가 되었다. 좌사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좌옹이 그를 가엾이 여겨 그 글과 배움을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 자라서 이름난 글을 널리 보고 여러 집안을 두루 읽었다. 사공 장화가 불러 좨주로 삼았고 가밀이 천거하여 비서랑으로 삼았다. 가밀이 베이자 시골로 돌아가 오로지 글 짓기에 마음을 쏟았다. 제왕 사마경이 청하여 기실참군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삼도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해 뒤에 병으로 마쳤다. 그 「삼도부」는 고쳐 정하여 마칠 때에야 올렸다. 처음에 「촉도부」를 지어 이르기를 『금마가 높은 언덕에서 번개처럼 나오고 벽계가 날개를 떨쳐 구름을 헤친다. 귀탄이 탄알을 날려 부딪치고 화정이 빛을 올려 붉게 빛난다』 하였는데, 이제 귀탄이 없으므로 그 부가 이따금 같지 않다. 좌사는 사람됨이 아전의 재간이 없고 글재주가 있었으며, 또 자못 왕비의 겨레임을 자랑하였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하였다.
張華,已見。
장화는 이미 보인다.
王隱《晉書》曰:「謐字士安,安定朝那人,漢太尉嵩曾孫也。祖叔獻,灞陵令。父叔侯,舉孝廉。謐族從皆累世富貴,獨守寒素。所養叔母歎曰:『昔孟母以三徙成子,曾父以亨家存教,豈我居不卜鄰,何爾魯之甚乎?修身篤學,自汝得之,於我何有?』因對之流涕,謐乃感激。年二十餘,就鄕里席坦受書,遭人而問,少有寧日。武帝借其書二車,遂博覽。太子中庶子、議郎徴,並不就,終於家。」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황보밀은 자가 사안이요 안정 조나 사람이니 한나라 태위 황보숭의 증손이다. 할아버지 황보숙헌은 파릉령이요 아버지 황보숙후는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황보밀의 겨레붙이는 다 여러 대에 걸쳐 넉넉하고 귀하였는데 홀로 가난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기른 숙모가 탄식하기를 『옛날 맹자의 어머니는 세 번 옮겨 아들을 이루었고 증자의 아버지는 돼지를 삶아 가르침을 지켰는데, 어찌 내가 사는 데에 이웃을 가리지 않았기에 어찌 그리 미련함이 심한가. 몸을 닦고 배움을 도타이 함은 네가 스스로 얻는 것이지 나에게 무엇이 있겠느냐』 하고, 이로 인해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니 황보밀이 이에 북받쳤다. 스무 살 남짓에 시골의 석탄에게 나아가 글을 받았는데, 사람을 만나면 묻느라 편안한 날이 적었다. 무제가 그 책 두 수레를 빌려 주니 마침내 널리 보았다. 태자중서자와 의랑으로 불렸으나 아울러 나아가지 않고 집에서 마쳤다」 하였다.
《思別傳》曰:「思造張載,問瑉蜀事,交接亦疎。皇甫謐西州髙士,摯仲治宿儒知名,非思倫匹。劉淵林、衞伯輿並蚤終,皆不爲思賦序注也。凡諸注解,皆思自爲,欲重其文,故假時人名姓也。」
『사별전』에 이르기를 「좌사가 장재를 찾아가 민산과 촉 땅 일을 물었는데 사귐도 성글었다. 황보밀은 서주의 높은 선비요 지중치는 오래된 선비로 이름났으니 좌사의 짝이 아니다. 유연림과 위백여는 아울러 일찍 죽었으니 다 좌사의 부에 서와 주를 지어 준 것이 아니다. 무릇 여러 주와 풀이가 다 좌사가 스스로 지은 것인데, 그 글을 무겁게 하고자 그때 사람의 성과 이름을 빌린 것이다」 하였다.
69유령이 주덕송을 짓다
劉伶著《酒德頌》,意氣所寄。
유령이 「주덕송」을 지었으니 뜻과 기운을 부친 바다.
협주 1
《名士傳》曰:「伶字伯倫,沛郡人。肆意放蕩,以宇宙爲狹。常乘鹿車,攜一壺酒,使人荷鍤隨之,云:『死便掘地以埋。』土木形骸,遨游一世。」《竹林七賢》論曰:「伶處天地閒,悠悠蕩蕩,无所用心。嘗與俗士相牾,其人攘袂而起,欲必築之。伶和其色曰:『鷄肋豈足以當尊拳!』其人不覺廢然而返。未嘗措意文章,終其世,凡著《酒德頌》一篇而已。其辭曰:『有大人先生者,以天地爲一朝,萬期爲須臾,日月爲扃牖,八荒爲庭衢。行无轍跡,居无室廬,幕天席地,縱意所如。行則操巵執瓢,動則挈榼提壺,唯酒是務,焉知其餘?有貴介公子,縉紳處士,聞吾風聲,議其所以。乃奮袂攘襟,怒目切齒,陳説禮法,是非鋒起。先生於是方捧罌承糟,銜杯漱醪,奮髯箕踞,枕麴藉糟。無思無慮,其樂陶陶。兀然而醉,慌爾而醒,靜聽不聞雷霆之聲,熟視不見太山之形,不覺寒暑之切肌,利欲之感情。俯觀萬物之擾擾,如江、漢之載浮萍。二豪侍側焉,如蜾蠃之與螟蛉』。」
『명사전』에 이르기를 「유령은 자가 백륜이요 패군 사람이다. 뜻을 멋대로 하여 놓아 방탕하며 우주를 좁다 여겼다. 늘 사슴 수레를 타고 술 한 병을 끼고서 사람에게 삽을 메고 따르게 하며 이르기를 『죽거든 곧 땅을 파고 묻으라』 하였다. 흙과 나무 같은 몸으로 한 세상을 노닐었다」 하였다.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유령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면서 아득하고 넘실거려 마음 쓰는 바가 없었다. 일찍이 속된 선비와 서로 어긋났는데, 그 사람이 소매를 걷고 일어나 반드시 치려 하였다. 유령이 낯빛을 화하게 하여 『닭갈비가 어찌 높으신 주먹을 감당하기에 넉넉하겠소』 하니, 그 사람이 저도 모르게 맥이 풀려 돌아갔다. 일찍이 글에 뜻을 두지 않아 그 세상을 마치도록 무릇 「주덕송」 한 편을 지었을 뿐이다. 그 말에 이르기를 『대인선생이라는 이가 있어 하늘과 땅을 한 아침으로 삼고 만 년을 잠깐으로 삼으며, 해와 달을 지게와 들창으로 삼고 팔방 거친 데를 뜰과 거리로 삼는다. 다님에 바퀴 자국이 없고 삶에 방과 집이 없으며, 하늘을 장막 삼고 땅을 자리 삼아 뜻이 가는 대로 멋대로 한다. 다니면 곧 잔을 잡고 바가지를 들며 움직이면 곧 통을 끼고 병을 드니, 오직 술에 힘쓸 뿐 어찌 그 나머지를 알겠는가. 귀한 공자와 벼슬한 처사가 있어 내 풍문을 듣고 그 까닭을 따진다. 이에 소매를 떨치고 옷깃을 걷으며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면서 예법을 늘어놓으니 옳고 그름이 칼끝처럼 일어난다. 선생이 이에 바야흐로 항아리를 받들고 지게미를 이며 잔을 물고 막걸리를 헹구고, 수염을 떨치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누룩을 베고 지게미를 깔고 눕는다.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어 그 즐거움이 도도하다. 우뚝하게 취하고 어렴풋이 깨어, 고요히 들어도 우레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세히 보아도 태산의 꼴을 보지 못하며, 추위와 더위가 살갗에 스미는 것과 이로움과 바람이 정을 흔드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굽어 만물의 어지러움을 보니 강수와 한수가 부평초를 실은 듯하다. 두 호걸이 곁에서 모시니 나나니벌과 명령 같다』 하였다」 하였다.
70악광이 뜻을 내고 반악이 글을 짓다
樂令善於淸言,而不長於手筆。將讓河南尹,請潘岳爲表。潘云:「可作耳。要當得君意。」樂爲述己所以爲讓,標位二百許語。潘直取錯綜,便成名筆。時人咸云:「若樂不假潘之文,潘不取樂之旨,則無以成斯矣。」
악령은 맑은 이야기를 잘하였으나 붓 잡는 데는 뛰어나지 못하였다.
하남윤을 사양하려 하며 반악에게 표를 지어 달라 청하니 반악이 말하였다. "지을 수는 있소. 다만 그대의 뜻을 얻어야 하오."
악령이 저가 사양하려는 까닭을 서술하여 자리와 뜻을 이백 마디쯤 드러내니, 반악이 곧바로 가져다 얽어 놓으매 곧 이름난 글이 되었다.
그때 사람들이 다 말하였다. "만일 악광이 반악의 글을 빌리지 않고 반악이 악광의 뜻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것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협주 1
《晉陽秋》曰:「岳字安仁,滎陽人。夙以才穎發名。善屬文,淸綺絶世,蔡邕未能過也。仕至黃門侍郎,爲孫秀所害。」
『진양추』에 이르기를 「반악은 자가 안인이요 형양 사람이다. 일찍이 재주가 빼어나 이름을 냈다. 글 짓기를 잘하여 맑고 고움이 세상에 뛰어나 채옹도 넘지 못하였다. 벼슬이 황문시랑에 이르렀고 손수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71이는 다만 따뜻하고 우아할 뿐 아니라 효도와 공경의 성품이 따로 보인다
夏侯湛作《周詩》成,示潘安仁。安仁曰:「此非徒温雅,乃別見孝悌之性。」潘因此遂作《家風詩》。
하후담이 「주시」를 지어 이루고 반안인에게 보였다.
안인이 말하였다. "이는 다만 따뜻하고 우아할 뿐 아니라 이에 효도와 공경의 성품이 따로 보인다."
반악이 이로 인해 마침내 「가풍시」를 지었다.
협주 3
《文士傳》曰:「湛字孝若,譙國人,魏征西將軍夏侯淵曾孫也。有盛才,文章巧思,善補雅詞,名亞潘岳。歴中書侍郎。」《湛集》載其敘曰:「《周詩》者,《南陔》、《白華》、《華黍》、《由庚》、《崇丘》、《由儀》六篇,有其義而亡其辭。湛續其亡,故云《周詩》也。」
『문사전』에 이르기를 「하후담은 자가 효약이요 초국 사람이니 위나라 정서장군 하후연의 증손이다. 성한 재주가 있고 글의 생각이 재주 있었으며 우아한 말 깁기를 잘하여 이름이 반악에 버금갔다. 중서시랑을 지냈다」 하였다. 『담집』에 그 서가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주시」란 「남해」·「백화」·「화서」·「유경」·「숭구」·「유의」 여섯 편이 그 뜻은 있으나 그 말이 없어졌으므로, 내가 그 없어진 것을 이었으니 그러므로 「주시」라 이른다」 하였다.
其詩曰:「既殷斯虔,仰説洪恩。夕定辰省,奉朝侍昏。宵中告退,鷄鳴在門。孳孳恭誨,夙夜是敦。」
그 시에 이르기를 「이미 도타이 삼가며 우러러 넓은 은혜를 기린다. 저녁에 잠자리를 정하고 새벽에 살피며 아침을 받들고 저물녘을 모신다. 밤중에 물러남을 아뢰고 닭이 울면 문에 있다. 부지런히 삼가 가르치며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이를 도타이 한다」 하였다.
岳《家風詩》載其宗祖之德及自戒也。
반악의 「가풍시」는 그 조상의 덕과 스스로 경계함을 실은 것이다.
72글이 정에서 나는가 정이 글에서 나는가
孫子荊除婦服,作詩以示王武子。王曰:「未知文生於情,情生於文。覽之悽然,增伉儷之重。」
손자형이 아내의 상복을 벗고 시를 지어 왕무자에게 보였다.
왕무자가 말하였다. "글이 정에서 나는지 정이 글에서 나는지 알지 못하겠소. 이를 보니 서글퍼져 짝의 무거움을 더하게 하오."
협주 2
《孫楚集》云:「婦胡毋氏也。」其詩曰:「時邁不停,日月電流。神爽登遐,忽已一周。禮制有敘,告除靈丘。臨祠感痛,中心若抽。」
『손초집』에 이르기를 「아내는 호무씨다」 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때가 가서 멎지 않고 해와 달이 번개처럼 흐른다. 정신과 밝음이 멀리 오르니 홀연 이미 한 해가 되었다. 예의 제도에 차례가 있어 신령한 언덕에 벗음을 고한다. 사당에 다다라 아픔을 느끼니 마음이 뽑히는 듯하다」 하였다.
一作「文於情生,情於文生」。
한 본에는 「글이 정에서 나고 정이 글에서 난다」로 되어 있다.
73태숙광은 말솜씨요 지중치는 붓솜씨라 서로 비웃다
太叔廣甚辯給,而摯仲治長於翰墨,倶爲列卿。毎至公坐,廣談,仲治不能對。退著筆難廣,廣又不能答。
태숙광은 말솜씨가 몹시 좋았고 지중치는 붓과 먹에 뛰어났는데 함께 여러 경이 되었다.
공적인 자리에 이를 때마다 태숙광이 말하면 지중치가 대답하지 못하였고, 물러나 글을 지어 태숙광을 따지면 태숙광이 또 답하지 못하였다.
협주 1
王隱《晉書》曰:「廣字季思,東平人。拜成都王爲太弟。欲使詣洛,廣子孫多在洛,慮害,乃自殺。摯虞字仲治,京兆長安人。祖茂,秀才。父模,太僕卿。虞少好學,師事皇甫謐,善校練文義,多所著述。歴祕書監、太常卿。從惠帝至長安,遂流離鄠杜間。性好博古,而文籍蕩盡。永嘉五年,洛中大饑,遂餓而死。虞與廣名位略同,廣長口才,虞長筆才,倶少政事。衆坐廣談,虞不能對;虞退筆難廣,廣不能答。於是更相嗤笑,紛然於世。廣無可記,虞多所録,於斯爲勝也。」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태숙광은 자가 계사요 동평 사람이다. 성도왕을 태제로 삼기를 청하였다. 낙양에 나아가게 하려 하였는데, 태숙광의 아들과 손자가 흔히 낙양에 있어 해를 입을까 걱정하여 이에 스스로 죽었다. 지우는 자가 중치요 경조 장안 사람이다. 할아버지 지무는 수재요 아버지 지모는 태복경이다. 지우는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여 황보밀을 스승으로 섬겼고, 글 뜻을 헤아려 익히기를 잘하여 지어 서술한 바가 많았다. 비서감과 태상경을 지냈다. 혜제를 좇아 장안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호와 두 사이를 떠돌았다. 성품이 옛것을 널리 아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글과 서적이 다 없어졌다. 영가 오 년에 낙양 가운데 크게 흉년이 들어 마침내 굶어 죽었다. 지우는 태숙광과 이름과 자리가 대략 같았는데, 태숙광은 말재주에 뛰어나고 지우는 붓재주에 뛰어나 아울러 정사에는 서툴렀다. 뭇 자리에서 태숙광이 말하면 지우가 대답하지 못하고, 지우가 물러나 붓으로 태숙광을 따지면 태숙광이 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서로 비웃어 세상에 어지러웠다. 태숙광은 기록할 만한 것이 없고 지우는 적은 바가 많으니 이 점에서 나았다」 하였다.
74너는 다시 내 논을 생각해 보아라
江左殷太常父子,並能言理,亦有辯訥之異。揚州口談至劇,太常輙云:「汝更思吾論。」
강좌의 은태상 부자가 아울러 결을 말할 수 있었으나 또한 말솜씨와 어눌함의 다름이 있었다.
양주자사가 입으로 이야기함이 지극히 세차면 태상이 문득 말하였다. "너는 다시 내 논을 생각해 보아라."
협주 1
《中興書》曰:「殷融字洪遠,陳郡人。桓彝有人倫鑒,見融甚歎美之。著象不盡意、大賢須易論,理義精微,談者稱焉。兄子浩亦能淸言,毎與浩談,有時而屈,退而著論,融更居長。爲司徒左西屬。飲酒善舞,終日嘯詠,未嘗以世務自嬰。累遷吏部尚書、太常卿,卒。」
『중흥서』에 이르기를 「은융은 자가 홍원이요 진군 사람이다. 환이가 사람됨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는데 은융을 보고 몹시 감탄하고 아름다이 여겼다. 「상불진의」와 「대현수역론」을 지으니 결과 뜻이 곱고 은미하여 이야기하는 이들이 일컬었다. 형의 아들 은호도 맑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은호와 이야기할 때마다 때로 굽히는 일이 있었으나, 물러나 논을 지으면 은융이 다시 나았다. 사도좌서속이 되었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춤을 잘 추며 온종일 휘파람 불고 읊어 일찍이 세상일로 스스로를 얽매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상서와 태상경에 이르렀다가 죽었다」 하였다.
75바로 뜻이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 있다
庾子嵩作《意賦》成,從子文康見,問曰:「若有意邪?非賦之所盡;若無意邪?復何所賦?」答曰:「正在有意無意之間。」
유자숭이 「의부」를 지어 이루니 조카 문강이 보고 물었다. "만일 뜻이 있다면 부로 다할 바가 아니요, 만일 뜻이 없다면 다시 무엇을 부로 짓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바로 뜻이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 있다."
협주 1
《晉陽秋》曰:「敳,永嘉中爲石勒所害。先是敳見王室多難,知終嬰其禍,乃作意賦以寄懷。」
『진양추』에 이르기를 「유애는 영가 연간에 석륵에게 해를 입었다. 이에 앞서 유애가 왕실에 어려움이 많음을 보고 마침내 그 화에 걸릴 줄 알아 이에 「의부」를 지어 품은 바를 부쳤다」 하였다.
76숲에 고요한 나무가 없고 내에 멎은 흐름이 없다
郭景純詩云:「林無靜樹,川無停流。」阮孚云:「泓崢蕭瑟,實不可言。毎讀此文,輙覺神超形越。」
곽경순의 시에 이르기를 "숲에 고요한 나무가 없고 내에 멎은 흐름이 없다" 하였다.
완부가 말하였다. "깊고 높고 쓸쓸하여 실로 말할 수 없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문득 정신이 뛰어넘고 몸이 넘어서는 것을 느낀다."
협주 2
王隱《晉書》曰:「郭璞字景純,河東聞喜人。父瑗,建平太守。」《璞別傳》曰:「璞奇博多通,文藻粲麗,才學賞豫,足參上流。其詩賦誄頌,並傳於世,而訥於言。造次詠語,常人無異。又不持儀檢,形質穨索,縱情嫚惰,時有醉飽之失。友人干令升戒之曰:『此伐性之斧也。』璞曰:『吾所受有分,恆恐用之不盡,豈酒色之能害!』王敦取爲參軍。敦縱兵都輦,乃咨以大事,璞極言成敗,不爲回屈。敦忌而害之。」詩,璞《幽思篇》者。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곽박은 자가 경순이요 하동 문희 사람이다. 아버지 곽원은 건평태수다」 하였다. 『박별전』에 이르기를 「곽박은 기이하게 넓고 많이 통하였으며 글의 문채가 빛나고 고와, 재주와 배움이 알아줌을 받아 윗자리에 끼기에 넉넉하였다. 그 시와 부와 뇌와 송이 아울러 세상에 전하나 말에는 어눌하였다. 갑작스레 읊는 말은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또 몸가짐과 검속을 지니지 않아 몸과 바탕이 무너지고 흐트러졌으며, 정을 멋대로 하고 게을러 때로 술과 배부름의 잘못이 있었다. 벗 간영승이 경계하기를 『이는 성품을 베는 도끼입니다』 하니, 곽박이 『내가 받은 바에 몫이 있어 늘 다 쓰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술과 여색이 해칠 수 있겠소』 하였다. 왕돈이 데려다 참군으로 삼았다. 왕돈이 군사를 서울에 멋대로 하며 이에 큰일을 물으니, 곽박이 이룸과 무너짐을 다 말하고 굽히지 않았다. 왕돈이 꺼려 그를 해쳤다」 하였다. 시는 곽박의 「유사편」이다.
阮孚,別見。
완부는 따로 보인다.
77유천이 양도부를 지어 온교와 유량을 기리다
庾闡始作《揚都賦》,道温庾云:「温挺義之標,庾作民之望。方響則金聲,比德則玉亮。」庾公聞賦成,求看,兼贈貺之。闡更改「望」爲「雋」,以「亮」爲「潤」云。
유천이 처음 「양도부」를 지을 때 온교와 유량을 말하여 이르기를 "온교는 옳음의 푯대를 빼어 세우고 유량은 백성의 바람이 된다. 소리에 견주면 쇠 소리요 덕에 견주면 옥의 맑음이다" 하였다.
유공이 부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보기를 구하며 겸하여 선물을 보냈다. 유천이 다시 「바람」을 「뛰어남」으로 고치고 「맑음」을 「윤남」으로 하였다 한다.
협주 1
《中興書》曰:「闡字仲初,潁川人,太尉亮之族也。少孤,九歳便能屬文。遷散騎侍郎,領大著作。爲《揚都賦》,邈絶當時。五十四卒。」
『중흥서』에 이르기를 「유천은 자가 중초요 영천 사람이니 태위 유량의 겨레다. 어려서 아비를 여의었는데 아홉 살에 곧 글을 지을 수 있었다. 산기시랑으로 옮기고 대저작을 거느렸다. 「양도부」를 지으니 그때에 아득히 뛰어났다. 쉰넷에 죽었다」 하였다.
78이를 보니 마음이 풀린다
孫興公作《庾公誄》。袁羊曰:「見此張緩。」於時以爲名賞。
손흥공이 「유공뢰」를 지으니 원양이 말하였다. "이를 보니 마음이 풀린다."
그때에 이름난 기림이라 하였다.
협주 1
《袁氏家傳》曰:「喬有文才。」
『원씨가전』에 이르기를 「원교는 글재주가 있었다」 하였다.
79이는 집 아래에 집을 얽은 것일 뿐이다
庾仲初作《揚都賦》成,以呈庾亮;亮以親族之懷,大爲其名價云:「可三二京,四三都。」於此人人競寫,都下紙爲之貴。謝太傅云:「不得爾。此是屋下架屋耳!事事擬學,而不免儉狹。」
유중초가 「양도부」를 지어 이루고 유량에게 드리니, 유량이 겨레붙이의 마음으로 크게 그 이름값을 매겨 말하였다. "「이경부」와 셋이 될 만하고 「삼도부」와 넷이 될 만하다."
이에 사람마다 다투어 베껴 서울의 종이가 이 때문에 귀해졌다.
사태부가 말하였다. "그럴 수 없다. 이는 집 아래에 집을 얽은 것일 뿐이다. 일마다 흉내 내 배워 검소하고 좁음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협주 1
王隱論揚雄《太玄經》》曰:「《玄經》雖妙,非益也。是以古人謂其屋下架屋。」
왕은이 양웅의 『태현경』을 논하여 이르기를 「『현경』이 비록 묘하나 보탬은 아니다. 이 때문에 옛사람이 그것을 집 아래 집을 얽었다 일렀다」 하였다.
80명공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형주의 늙은 종사였을 뿐입니다
習鑿齒史才不常,宣武甚器之,未三十,便用爲荊州治中。鑿齒謝牋亦云:「不遇明公,荊州老從事耳!」後至都見簡文,返命,宣武問「見相王何如?」答云:「一生不曾見此人!」從此忤旨,出爲衡陽郡,性理遂錯。於病中猶作《漢晉春秋》,品評卓逸。
습착치는 역사 재주가 예사롭지 않아 선무가 몹시 그릇으로 여겨, 서른이 되기 전에 곧 형주치중으로 썼다.
습착치가 사례하는 글에 또한 일렀다. "명공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형주의 늙은 종사였을 뿐입니다."
뒤에 서울에 이르러 간문제를 뵙고 돌아와 아뢰니, 선무가 물었다. "상왕을 뵈니 어떠하던가."
대답하였다. "한평생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뜻을 거슬러 형양군으로 나갔고 성품과 결이 마침내 어그러졌다. 병중에도 오히려 『한진춘추』를 지으니 품평이 우뚝하고 뛰어났다.
협주 1
《續晉陽秋》曰:「鑿齒少而博學,才情秀逸,温甚奇之。自州從事歳中三轉至治中。後以忤旨,左遷戸曹參軍、衡陽太守。在郡著《漢晉春秋》,斥温覬覦之心也。」《鑿齒集》載其論,略曰:「靜漢末累世之交爭,廓九域之蒙晦,大定千載之盛功者,皆司馬氏也。若以魏有代王之德,則不足;有靜亂之功,則孫劉鼎立,共王、秦政,猶不見敘於帝王,況暫制數州之衆哉?且漢有係周之業,則晉無所承魏之跡矣。春秋之時,呉楚稱王。若推有德,彼必自係於周,不推呉楚也。況長轡廟堂,呉蜀兩定,天下之功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습착치는 젊어서 널리 배우고 재주와 정이 빼어나고 시원하여 환온이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주종사에서 한 해 안에 세 번 옮겨 치중에 이르렀다. 뒤에 뜻을 거슬러 호조참군과 형양태수로 낮추어졌다. 고을에 있으면서 『한진춘추』를 지어 환온의 엿보는 마음을 물리쳤다」 하였다. 『착치집』에 그 논이 실려 있으니 줄거리에 이르기를 「한나라 말 여러 대에 걸친 다툼을 고요히 하고 아홉 지역의 어둠을 걷어 내어 천 해의 성한 공을 크게 정한 이는 다 사마씨다. 만일 위나라에 왕을 대신할 덕이 있다 하면 곧 넉넉하지 않고, 어지러움을 고요히 한 공이 있다 하면 곧 손씨와 유씨가 솥발처럼 서서 공왕과 진나라 정치와 함께하였으니 오히려 제왕에 차례 지어지지 못하는데, 하물며 잠깐 몇 주의 무리를 마름한 것이겠는가. 또 한나라에 주나라를 이은 업이 있다면 곧 진나라에는 위나라를 이은 자취가 없다. 춘추 때에 오나라와 초나라가 왕을 일컬었다. 만일 덕 있음을 민다면 저들이 반드시 스스로 주나라에 이어질 것이지 오나라와 초나라를 밀지 않는다. 하물며 조정에서 고삐를 길게 잡아 오나라와 촉나라를 둘 다 평정한 것은 천하의 공이다」 하였다.
81삼도부와 이경부는 오경의 나팔이다
孫興公云:「三都、二京,五經鼓吹。」
손흥공이 말하였다. "「삼도부」와 「이경부」는 오경의 나팔이다."
협주 1
言此五賦是經典之羽翼。
이 다섯 부가 경전의 날개라는 말이다.
82사내의 덕은 일과 행실에 드러나고 부인의 아름다움은 뇌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는다
謝太傅問主簿陸退「張憑何以作母誄而不作父誄?」退答曰:「故當是丈夫之德,表於事行;婦人之美,非誄不顯。」
사태부가 주부 육퇴에게 물었다. "장빙은 어찌하여 어머니의 뇌는 짓고 아버지의 뇌는 짓지 않았는가."
육퇴가 대답하였다. "짐짓 사내의 덕은 일과 행실에 드러나고, 부인의 아름다움은 뇌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협주 2
《陸氏譜》曰:「退字黎民,呉郡人。髙祖凱,呉丞相。祖仰,吏部郎。父伊,州主簿。退仕至光祿大夫。」
『육씨보』에 이르기를 「육퇴는 자가 여민이요 오군 사람이다. 고조부 육개는 오나라 승상이요 할아버지 육앙은 이부랑이요 아버지 육이는 주주부다. 육퇴는 벼슬이 광록대부에 이르렀다」 하였다.
《陸氏譜》曰:「退,憑婿也。」
『육씨보』에 이르기를 「육퇴는 장빙의 사위다」 하였다.
83경인의 지은 논을 보니 곧 은미한 말에 끼기에 넉넉하다
王敬仁年十三,作《賢人論》。長史送示眞長,眞長答云:「見敬仁所作論,便足參微言。」
왕경인이 나이 열셋에 「현인론」을 지었다.
장사가 진장에게 보내 보이니 진장이 대답하였다. "경인이 지은 논을 보니 곧 은미한 말에 끼기에 넉넉하오."
협주 1
《脩集》載其論曰:「或問『易稱賢人,黃裳元吉,苟未能闇與理會,何得不求通?求通則有損,有損則元吉之稱將虚設乎?』答曰:『賢人誠未能闇與理會,當居然人從,比之理盡,猶一豪之領一梁。一豪之領一梁,雖於理有損,不足以撓梁。賢有情之至寡,豪有形之至小,豪不至撓梁,於賢人何有損之者哉?』」
『수집』에 그 논이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어떤 이가 묻기를 『「역」에 어진 이를 일컬어 「누런 치마라 크게 좋다」 하였는데, 진실로 아직 어둡게 결에 맞지 못한다면 어찌 통함을 구하지 않겠는가. 통함을 구하면 곧 덞이 있고 덞이 있으면 크게 좋다는 일컬음이 헛되이 베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답하기를 『어진 이가 참으로 아직 어둡게 결에 맞지 못하여 마땅히 그대로 남을 좇는 것은, 결이 다한 데에 견주면 오히려 터럭 하나가 들보 하나를 거느리는 것과 같다. 터럭 하나가 들보 하나를 거느림은 비록 결에 덞이 있으나 들보를 흔들기에 넉넉하지 않다. 어진 이는 정 있는 이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이요 터럭은 꼴 있는 것 가운데 지극히 작은 것이다. 터럭이 들보를 흔드는 데 이르지 못하니 어진 이에게 무슨 덞이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84반악의 글은 비단을 펼친 듯하고 육기의 글은 모래를 헤쳐 금을 고르는 듯하다
孫興公云:「潘文爛若披錦,無處不善;陸文若排沙簡金,往往見寶。」
손흥공이 말하였다. "반악의 글은 흐드러져 비단을 펼친 듯하여 좋지 않은 데가 없고, 육기의 글은 모래를 헤쳐 금을 고르는 듯하여 이따금 보배가 보인다."
협주 2
《續文章志》曰:「岳爲文選言簡章,淸綺絶倫。」
『속문장지』에 이르기를 「반악은 글을 지음에 말을 가리고 글월을 다듬어 맑고 고움이 무리에 뛰어났다」 하였다.
《文章傳》曰:「機善屬文,司空張華見其文章,篇篇稱善,猶譏其作文大治。謂曰:『人之作文,患於不才;至子爲文,乃患太多也。』」
『문장전』에 이르기를 「육기는 글 짓기를 잘하였는데, 사공 장화가 그 글을 보고 편마다 좋다 일컬으면서도 오히려 그 글 지음이 지나치게 다듬어졌다 나무랐다. 이르기를 『사람이 글을 지음에 재주 없음을 걱정하는데, 그대의 글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너무 많음을 걱정한다』 하였다」 하였다.
85현도의 오언시는 그때 사람에 견주어 묘하게 뛰어나다 하겠다
簡文稱許掾云:「玄度五言詩,可謂妙絶時人。」
간문제가 허연을 일컬어 말하였다. "현도의 오언시는 그때 사람에 견주어 묘하게 뛰어나다 하겠다."
협주 1
《續晉陽秋》曰:「詢有才藻,善屬文。自司馬相如、王裦、揚雄諸賢,世尚賦頌,皆體則《詩》《騷》,傍綜百家之言。及至建安,而詩章大盛。逮乎西朝之末,潘陸之徒雖時有質文,而宗歸不異也。正始中,王弼、何晏好《莊》《老》玄勝之談,而世遂貴焉。至江左李充尤盛。故郭璞五言始會合道家之言而韻之。詢及太原孫綽轉相祖尚,又加以三世之辭,而《詩》《騷》之體盡矣。詢綽並爲一時文宗,自此作者悉體之。至義熙中,謝混始改。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허순은 재주와 문채가 있고 글 짓기를 잘하였다. 사마상여와 왕포와 양웅 등 여러 어진 이로부터 세상이 부와 송을 높였는데, 다 『시』와 「이소」를 본받고 곁으로 여러 집안의 말을 아울렀다. 건안에 이르러 시가 크게 성하였다. 서쪽 조정 끝에 이르러서는 반악과 육기의 무리가 비록 때로 바탕과 꾸밈이 있었으나 마루로 돌아감은 다르지 않았다. 정시 연간에 왕필과 하안이 『장자』와 『노자』의 아득하고 뛰어난 이야기를 좋아하니 세상이 마침내 이를 귀히 여겼다. 강좌에 이르러 이충이 더욱 성하였다. 그러므로 곽박의 오언시가 비로소 도가의 말을 모아 운을 붙였다. 허순과 태원의 손작이 서로 이어 높이고, 또 세 세상의 말을 더하여 『시』와 「이소」의 몸이 다하였다. 허순과 손작이 아울러 한때의 글 마루가 되어, 이로부터 짓는 이가 다 이를 몸으로 하였다. 의희 연간에 이르러 사혼이 비로소 고쳤다」 하였다.
86땅에 던지면 쇠와 돌 소리가 날 것이오
孫興公作《天台賦》成,以示范榮期,云:「卿試擲地,要作金石聲。」范曰:「恐子之金石,非宮商中聲!」然毎至佳句,輙云:「應是我輩語。」
손흥공이 「천태부」를 지어 이루고 범영기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경이 시험 삼아 땅에 던져 보시오. 마땅히 쇠와 돌 소리가 날 것이오."
범영기가 말하였다. "그대의 쇠와 돌이 궁과 상에 맞는 소리가 아닐까 두렵소."
그러나 좋은 구절에 이를 때마다 문득 말하였다. "마땅히 우리 무리의 말이오."
협주 2
《中興書》曰:「范啓字榮期,愼陽人。父堅,護軍。啓以才義顯於世,仕至黃門郎。」
『중흥서』에 이르기를 「범계는 자가 영기요 신양 사람이다. 아버지 범견은 호군이다. 범계는 재주와 옳음으로 세상에 드러났고 벼슬이 황문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赤城霞起而建標,瀑布飛流而界道」,此賦之佳處。
「붉은 성에 노을이 일어 푯대를 세우고, 폭포가 날아 흘러 길을 가른다」 하였으니 이 부의 좋은 데다.
87이는 안석의 부스러진 금이다
桓公見謝安石作《簡文諡議》,看竟,擲與坐上諸客曰:「此是安石碎金。」
환공이 사안석이 지은 「간문시의」를 보고 다 보고 나서 자리 위의 여러 손에게 던지며 말하였다. "이는 안석의 부스러진 금이오."
협주 1
劉謙之《晉紀》載安《議》曰:「謹按諡法:『一德不懈曰簡,道德博聞曰文。』易簡而天下之理得,觀乎人文,化成天下,儀之景行,猶有彷彿。宜尊號曰太宗,諡曰簡文。」
유겸지의 『진기』에 사안의 「의」가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삼가 시호법을 살피건대 『한결같은 덕으로 게으르지 않음을 간이라 하고 도와 덕이 넓고 들음이 많음을 문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쉽고 간단하여 천하의 결이 얻어지고, 사람의 무늬를 보아 천하를 바꾸어 이루니, 큰 행실에 견주면 오히려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마땅히 높여 태종이라 하고 시호를 간문이라 하십시오」 하였다.
88원굉이 조세 나르는 배에서 영사시를 읊다
袁虎少貧,嘗爲人傭載運租。謝鎭西經船行,其夜淸風朗月,聞江渚間估客船上有詠詩聲,甚有情致。所誦五言,又其所未嘗聞,嘆美不能已。即遣委曲訊問,乃是袁自詠其所作詠史詩。因此相要,大相賞得。
원호가 젊어서 가난하여 일찍이 남에게 삯을 받고 조세를 실어 날랐다.
사진서가 배로 지나가는데 그 밤에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있었다. 강 모래섬 사이 장사꾼 배 위에서 시 읊는 소리가 들리는데 몹시 정과 이룸이 있었다. 외는 오언시가 또 일찍이 듣지 못한 것이라 감탄하고 아름다이 여겨 그치지 못하였다.
곧 사람을 보내 자세히 물으니, 바로 원호가 스스로 지은 「영사시」를 읊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서로 맞이하여 크게 서로 알아주었다.
협주 2
虎,袁宏小字也。
원호는 원굉의 아이 적 이름이다.
《續晉陽秋》曰:「虎少有逸才,文章絶麗,曾爲詠史詩,是其風情所寄。少孤而貧,以運租爲業。鎭西謝尚,時鎭牛渚,乘秋佳風月,率爾與左右微服泛江。會虎在運租船中諷詠,聲既淸會,辭文藻拔。非尚所曾聞,遂住聽之,乃遣問訊。答曰:『是袁臨汝郎誦詩,即其詠史之作也。』尚佳其率有勝致,即遣要迎,談話申旦。自此名譽日茂。」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원호는 젊어서 뛰어난 재주가 있고 글이 지극히 고왔는데, 일찍이 「영사시」를 지었으니 그 풍모와 정을 부친 바다.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가난하여 조세 나르기를 업으로 삼았다. 진서장군 사상이 그때 우저를 지키다가, 가을의 좋은 바람과 달을 타고 문득 곁의 사람과 여느 옷차림으로 강에 배를 띄웠다. 마침 원호가 조세 나르는 배 안에서 읊는데 소리가 이미 맑게 모이고 말과 글이 빼어났다. 사상이 일찍이 들은 바가 아니라 마침내 머물러 들었고, 이에 사람을 보내 물었다. 대답하기를 『이는 원임여랑이 시를 외는 것이니 곧 그 영사의 지음입니다』 하였다. 사상이 그 시원하게 뛰어난 이룸이 있음을 아름다이 여겨 곧 사람을 보내 맞이하고, 이야기하며 새벽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이름과 기림이 날로 무성해졌다」 하였다.
89반악의 글은 얕으나 깨끗하고 육기의 글은 깊으나 거칠다
孫興公云:「潘文淺而淨,陸文深而蕪。」
손흥공이 말하였다. "반악의 글은 얕으나 깨끗하고 육기의 글은 깊으나 거칠다."
90배씨가 어림을 지어 멀고 가까운 데서 전하다
裴郎作《語林》,始出,大爲遠近所傳。時流年少,無不傳寫,各有一通。載王東亭作《經王公酒壚下賦》,甚有才情。
배랑이 『어림』을 지어 처음 나오자 크게 멀고 가까운 데서 전해졌다.
그때 흐름을 따르는 젊은이들이 베껴 전하지 않는 이가 없어 저마다 한 통씩 두었다.
왕동정이 지은 「왕공의 술도가 아래를 지나며 지은 부」가 실려 있는데 몹시 재주와 정이 있었다.
협주 1
《裴氏家傳》曰:「裴榮字榮期,河東人。父稚,豐城令。榮期少有風姿才氣,好論古今人物。撰《語林》數巻,號曰《裴子》。」檀道鸞謂裴松之,以爲啓作《語林》,榮儻別名啓乎?
『배씨가전』에 이르기를 「배영은 자가 영기요 하동 사람이다. 아버지 배치는 풍성령이다. 영기는 젊어서 풍모와 자태와 재주와 기운이 있고 옛날과 이제 인물 논하기를 좋아하였다. 『어림』 몇 권을 지어 『배자』라 불렀다」 하였다. 단도란이 배송지에게 이르기를 배계가 『어림』을 지었다 하니, 배영이 혹시 따로 계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인가.
91내가 지어도 그대가 이름 붙일 데가 없으리라
謝萬作《八賢論》,與孫興公往反,小有利鈍。謝後出以示顧君齊,顧曰:「我亦作,知卿當無所名。」
사만이 「팔현론」을 지어 손흥공과 오갔는데 조금 날카롭고 무딤이 있었다.
사만이 뒤에 꺼내어 고군제에게 보이니 고군제가 말하였다. "내가 또한 지어도 그대가 마땅히 이름 붙일 데가 없으리라."
협주 2
《中興書》曰:「萬善屬文,能談論。」《萬集》載其敘四隱四顯,爲八賢之論,謂漁父、屈原、季主、賈誼、楚老、龔勝、孫登、嵇康也。其旨以處者爲優,出者爲劣。孫綽難之,以謂體玄識遠者,出處同歸。文多不載。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만은 글 짓기를 잘하고 이야기하고 논할 수 있었다」 하였다. 『만집』에 네 숨은 이와 네 드러난 이를 서술하여 여덟 어진 이의 논을 삼은 것이 실려 있으니, 어부와 굴원과 계주와 가의와 초 땅 늙은이와 공승과 손등과 혜강을 이른다. 그 뜻은 숨은 이를 나은 것으로 삼고 나선 이를 못한 것으로 삼았다. 손작이 이를 따져 아득함을 몸으로 하고 멀리 아는 이는 나섬과 숨음이 함께 돌아간다 하였다. 글이 많아 싣지 않는다.
《顧氏譜》曰:「夷字君齊,呉郡人。祖廞,孝廉。父霸,少府卿。夷辟州主簿,不就。」
『고씨보』에 이르기를 「고이는 자가 군제요 오군 사람이다. 할아버지 고흠은 효렴이요 아버지 고패는 소부경이다. 고이는 주주부로 불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였다.
92흐르는 바람을 거슬러 홀로 쏟아 낸다
桓宣武命袁彦伯作《北征賦》,既成,公與時賢共看,咸嗟嘆之。時王珣在坐云:「恨少一句,得『寫』字足韻,當佳。」袁即於坐攬筆益云:「感不絶於余心,泝流風而獨寫。」公謂王曰:「當今不得不以此事推袁。」
환선무가 원언백에게 「북정부」를 짓게 하였다. 이루어지자 공이 그때의 어진 이들과 함께 보고 다들 감탄하였다.
그때 왕순이 자리에 있다가 말하였다. "한 구절이 적은 것이 한이오. 「사」 자를 얻어 운을 채우면 마땅히 좋겠소."
원언백이 곧 자리에서 붓을 잡고 더하여 이르기를 "느낌이 내 마음에 끊이지 않아 흐르는 바람을 거슬러 홀로 쏟아 낸다" 하였다.
공이 왕순에게 말하였다. "이제 이 일로 원언백을 밀지 않을 수 없소."
협주 2
《續晉陽秋》曰:「宏從温征鮮卑,故作《北征賦》,宏文之髙者。」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원굉이 환온을 좇아 선비를 쳤으므로 「북정부」를 지었으니 원굉의 글 가운데 높은 것이다」 하였다.
《宏集》載其賦云:「聞所聞於相傳,云獲麟於此野。誕靈物以瑞德,奚授體於虞者。悲尼父之慟泣,似實慟而非假。豈一物之足傷,實致傷於天下。感不絶於余心,溯流風而獨寫。」《晉陽秋》曰:「宏嘗與王珣、伏滔同侍温坐,温令滔讀其賦,至『致傷於天下』,於此改韻。云:『此韻所詠,慨深千載。今於「天下」之後便移韻,於寫送之致,如爲未盡。』滔乃云:『得益「寫」一句,或當小勝。』桓公語宏:『卿試思益之。』宏應聲而益,王伏稱善。」
『굉집』에 그 부가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전해 오는 데서 들은 바를 듣건대 이 들에서 기린을 얻었다 한다. 신령한 물건을 낳아 상서로운 덕으로 삼았는데 어찌 몸을 사냥꾼에게 주었는가. 공자의 통곡을 슬퍼하니 실로 통곡이요 거짓이 아닌 듯하다. 어찌 한 물건이 상하기에 넉넉하겠는가. 실은 천하에 상함이 이른 것이다. 느낌이 내 마음에 끊이지 않아 흐르는 바람을 거슬러 홀로 쏟아 낸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원굉이 일찍이 왕순과 복도와 함께 환온의 자리에 모시고 있었는데, 환온이 복도에게 그 부를 읽게 하여 『천하에 상함이 이르렀다』에 이르러 여기서 운을 바꾸었다. 이르기를 『이 운이 읊은 바는 북받침이 천 해에 깊다. 이제 「천하」 뒤에 곧 운을 옮기니 쏟아 보내는 이룸에 다하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복도가 이에 『「사」 한 구절을 더하면 혹 조금 나을 듯합니다』 하였다. 환공이 원굉에게 『경이 시험 삼아 더할 것을 생각해 보라』 하니, 원굉이 소리에 응하여 더하매 왕순과 복도가 좋다 일컬었다」 하였다.
93조보좌의 재주는 흰 바탕 명광 비단 같다
孫興公道:「曹輔佐才如白地明光錦,裁爲負版絝,非無文采,酷無裁製。」
손흥공이 말하였다. "조보좌의 재주는 흰 바탕의 명광 비단 같은데, 마름하여 문서 지는 이의 바지를 지었으니 문채가 없는 것은 아니나 몹시 마름이 없다."
협주 2
《中興書》曰:「曹毗字輔佐,譙國人,魏大司馬休曾孫也。好文籍,能屬詞,累遷太學博士、尚書郎、光祿勳。」
『중흥서』에 이르기를 「조비는 자가 보좌요 초국 사람이니 위나라 대사마 조휴의 증손이다. 글과 서적을 좋아하고 말 짓기를 잘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태학박사와 상서랑과 광록훈에 이르렀다」 하였다.
《論語》曰:「孔子式負版者。」鄭氏注曰:「版,謂邦國籍也。負之者,賤隸人也。」
『논어』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문서 진 이에게 수레 앞턱에 절하셨다」 하였다. 정씨가 주하여 이르기를 「판이란 나라의 호적을 이른다. 이를 진 이는 천한 종이다」 하였다.
94내가 일찍이 여러 사람과 강북 일을 말한 것은 다만 장난삼아 한 것일 뿐이오
袁伯彦作《名士傳》成,見謝公。公笑曰:「我嘗與諸人道江北事,特作狡獪耳!」彦伯遂以箸書。
원백언이 『명사전』을 지어 이루고 사공을 뵈었다.
사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여러 사람과 강북 일을 말한 것은 다만 장난삼아 한 것일 뿐이오."
언백이 마침내 이를 써서 책을 지었다.
협주 1
宏以夏侯太初、何平叔、王輔嗣爲正始名士,阮嗣宗、嵇叔夜、山巨源、向子期、劉伯倫、阮仲容、王濬仲爲竹林名士,裴叔則、樂彦輔、王夷甫、庾子嵩、王安期、阮千里、衞叔寶、謝幼輿爲中朝名士。
원굉은 하후태초와 하평숙과 왕보사를 정시의 이름난 선비로 삼고, 완사종과 혜숙야와 산거원과 상자기와 유백륜과 완중용과 왕준중을 죽림의 이름난 선비로 삼고, 배숙칙과 악언보와 왕이보와 유자숭과 왕안기와 완천리와 위숙보와 사유여를 중원의 이름난 선비로 삼았다.
95동정후가 아뢸 글을 다시 지으니 앞의 한 글자도 없었다
王東亭到桓公吏,既伏閣下;桓公令人竊取其白事。東亭即於閣下更作,無復向一字。
왕동정이 환공의 아전이 되어 이르렀을 때, 이미 관아 아래 엎드려 있었다. 환공이 사람을 시켜 그 아뢸 글을 몰래 가져오게 하였다.
동정이 곧 관아 아래에서 다시 지었는데 앞의 것과 다시 한 글자도 같지 않았다.
협주 1
《續晉陽秋》曰:「珣學渉通敏,文髙當世。」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순은 배움이 두루 걸치고 통하며 재빨라 글이 그때에 높았다」 하였다.
96원굉이 말에 기대선 채 일곱 장을 짓다
桓宣武北征,袁虎時從,被責免官。會須露布文,喚袁倚馬前會作;手不輟筆,俄得七紙,絶可觀。東亭在側,極嘆其才。袁虎云:「當令齒舌間得利。」
환선무가 북쪽을 칠 때 원호가 그때 따라갔다가 꾸지람을 받고 벼슬을 잃었다.
마침 노포문이 필요하여 원호를 불러 말 앞에 기대선 채 짓게 하니, 손이 붓을 그치지 않아 잠깐 사이에 일곱 장을 얻었는데 지극히 볼 만하였다.
동정이 곁에 있다가 그 재주를 지극히 감탄하였다.
원호가 말하였다. "마땅히 말로라도 덕을 보게 해 주시오."
협주 1
《温別傳>曰:「温以太和四年上疎自征鮮卑。」
「온별전」에 이르기를 「환온이 태화 사 년에 글을 올려 스스로 선비를 쳤다」 하였다.
97백 번 담금질한 고운 쇠는 베면 끊을 수 있다
袁宏始作《東征賦》,都不道陶公。胡奴誘之狹室中,臨以白刃,曰:「先公勳業如是!君作《東征賦》,云何相忽略?」宏窘蹙無計,便答:「我大道公,何以云無?」因誦曰:「精金百鍊,在割能斷。功則治人,職思靖亂。長沙之勳,爲史所讚。」
원굉이 처음 「동정부」를 지을 때 도공을 도무지 말하지 않았다.
호노가 그를 좁은 방으로 꾀어들여 흰 칼날을 들이대고 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공과 업이 이와 같은데, 그대가 「동정부」를 지으면서 어찌 이리 소홀히 하는가."
원굉이 다급하고 옹색하여 어찌할 꾀가 없어 곧 대답하였다. "내가 도공을 크게 말하였는데 어찌 없다 하시오."
이로 인해 외웠다. "백 번 담금질한 고운 쇠는 베면 끊을 수 있다. 공으로는 곧 사람을 다스렸고 맡음으로는 어지러움 가라앉히기를 생각하였다. 장사공의 공은 역사가 기린 바다."
협주 2
胡奴,陶範。別見。
호노는 도범이다. 따로 보인다.
《續晉陽秋》曰:「宏爲大司馬記室參軍,後爲《東征賦》,悉稱過江諸名望。時桓温在南州,宏語衆云:『我決不及桓宣城。』時伏滔在温府,與宏善,苦諫之,宏笑而不答。滔密以啓温,温甚忿,以宏一時文宗,又聞此賦有聲,不欲令人顯聞之。後遊靑山飲酌,既歸,公命宏同載,衆爲危懼。行數里,問宏曰:『聞君作《東征賦》,多稱先賢,何故不及家君?』宏答曰:『尊公稱謂,自非下官所敢專,故未呈啓,不敢顯之耳。』温乃云:『君欲爲何辭?』宏即答云:『風鑒散朗,或搜或引。身雖可亡,道不可隕。則宣城之節,信爲允也。』温泫然而止。」二説不同,故詳載焉。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원굉이 대사마기실참군이 되었고 뒤에 「동정부」를 지어 강을 건너온 여러 이름난 이를 다 일컬었다. 그때 환온이 남주에 있었는데 원굉이 뭇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결코 환선성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그때 복도가 환온의 관부에 있으면서 원굉과 사이가 좋아 괴롭게 간하였으나 원굉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가 몰래 환온에게 아뢰니 환온이 몹시 성내었으나, 원굉이 한때의 글 마루인 데다 또 이 부가 이름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남에게 드러내 알리려 하지 않았다. 뒤에 청산에 노닐며 술을 마시고 돌아온 뒤 환공이 원굉에게 함께 수레를 타라 명하니 뭇사람이 위태로이 여겼다. 몇 리를 가서 원굉에게 묻기를 『듣건대 그대가 「동정부」를 지어 앞선 어진 이를 많이 일컬었다는데, 무슨 까닭으로 우리 아버님께 미치지 않았는가』 하였다. 원굉이 대답하기를 『높으신 어른의 일컬음은 본디 하관이 감히 오로지할 바가 아니므로 아직 아뢰어 드러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환온이 이에 『그대는 어떤 말로 하려 하는가』 하니, 원굉이 곧 대답하기를 『풍모와 살핌이 흩어져 밝아 더러는 찾고 더러는 이끌었다. 몸은 비록 없어질 수 있어도 도는 떨어질 수 없다』 하였습니다. 곧 선성공의 절개이니 참으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환온이 눈물을 흘리며 그쳤다」 하였다. 두 설이 같지 않으므로 자세히 싣는다.
98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뒤에 나왔다고 버릴 것입니다
或問顧長康:「君《箏賦》何如嵇康《琴賦》?」顧曰:「不賞者作後出相遺,深識者亦以髙奇見貴。」
어떤 이가 고장강에게 물었다. "그대의 「쟁부」는 혜강의 「금부」에 견주어 어떠하오."
고장강이 말하였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뒤에 나왔다 하여 버릴 것이요, 깊이 아는 이는 또한 높고 기이함으로 귀히 여길 것이오."
협주 1
《中興書》曰:「愷之博學有才氣,爲人遲鈍而自矜尚,爲時所笑。」宋明帝《文章志》曰:「桓温云:『顧長康體中癡黠各半,合而論之,正平平耳。』世云有三絶,畫絶、文絶、癡絶。」《續晉陽秋》曰:「愷之矜伐過實,諸年少因相稱譽,以爲戲弄。爲散騎常侍,與謝瞻連省,夜於月下長詠,自云得先賢風制,瞻毎遙贊之。愷之得此,彌自力忘倦。瞻將眠,語搥腳人令代,愷之不覺有異,遂幾申旦而後止。」
『중흥서』에 이르기를 「고개지는 널리 배우고 재주와 기운이 있었는데, 사람됨이 더디고 무디면서도 스스로 자랑하고 높여 그때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였다.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환온이 이르기를 『고장강은 몸 가운데 어리석음과 약음이 반반인데 합하여 논하면 바로 그저 그럴 뿐이다』 하였다. 세상에서 세 가지 뛰어남이 있다 하니 그림이 뛰어나고 글이 뛰어나고 어리석음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하였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고개지가 자랑함이 실상을 넘으니 여러 젊은이가 이로 인해 서로 일컬어 기려 놀렸다. 산기상시가 되어 사첨과 관아를 잇대었는데, 밤에 달 아래서 길게 읊으며 스스로 앞선 어진 이의 풍모와 제도를 얻었다 하니 사첨이 늘 멀리서 그를 기렸다. 고개지가 이를 얻고 더욱 스스로 힘써 고단함을 잊었다. 사첨이 자려 하며 다리 두드리는 이에게 대신하라 이르니, 고개지가 다름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여 마침내 거의 새벽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하였다.
99은중문이 원표의 반만 읽었다면 재주가 반고에 못하지 않으리라
殷仲文天才宏贍,而讀書不甚廣,博亮嘆曰:「若使殷仲文讀書半袁豹,才不減班固。」
은중문은 하늘이 준 재주가 넓고 넉넉하였으나 글 읽은 것이 그리 넓지 않았다.
박량이 탄식하였다. "만일 은중문이 원표의 반만 읽었더라면 재주가 반고에 못하지 않았으리라."
협주 4
《續晉陽秋》曰:「仲文雅有才藻,著文數十篇。」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은중문은 우아하게 재주와 문채가 있어 글 수십 편을 지었다」 하였다.
亮,別見。
박량은 따로 보인다.
丘淵之《文章敘》曰:「豹字士蔚,陳郡人。祖耽,歴陽太守。父質,琅邪内史。豹隆安中著作佐郎,累遷太尉長史、丹陽尹。義熙九年卒。」
구연지의 「문장서」에 이르기를 「원표는 자가 사울이요 진군 사람이다. 할아버지 원탐은 역양태수요 아버지 원질은 낭야내사다. 원표는 융안 연간에 저작좌랑이 되었고 여러 벼슬을 거쳐 태위장사와 단양윤에 이르렀다. 의희 구 년에 죽었다」 하였다.
《續漢書》曰:「固字孟堅,右扶風人。幼有俊才,學無常師,善屬文,經傳無不究覽。」
『속한서』에 이르기를 「반고는 자가 맹견이요 우부풍 사람이다. 어려서 뛰어난 재주가 있고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글 짓기를 잘하여 경전에 캐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였다.
100맑음을 밑천 삼아 바뀌고 기운을 타고 흩날린다
羊孚作《雪贊》云:「資淸以化,乘氣以霏。遇象能鮮,即潔成輝。」桓胤遂以書扇。
양부가 「설찬」을 지어 이르기를 "맑음을 밑천 삼아 바뀌고 기운을 타고 흩날린다. 모습을 만나면 고울 수 있고 깨끗함에 나아가 빛을 이룬다" 하였다.
환윤이 마침내 부채에 써 두었다.
협주 1
《中興書》曰:「胤字茂祖,譙國人。祖沖,太尉。父嗣,江州刺史。胤少有淸操,以恬退見稱,仕至中書令。玄敗,徙安成郡,後見誅。」
『중흥서』에 이르기를 「환윤은 자가 무조요 초국 사람이다. 할아버지 환충은 태위요 아버지 환사는 강주자사다. 환윤은 젊어서 맑은 지조가 있어 조용히 물러남으로 일컬어졌고 벼슬이 중서령에 이르렀다. 환현이 무너지자 안성군으로 옮겨졌다가 뒤에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101만나는 것에 옛 물건이 없으니 어찌 빨리 늙지 않으랴
王孝伯在京行散,至其弟王睹戸前,問:「古詩中何句爲最?」睹思未答。孝伯詠「所遇無故物,焉得不速老」,此句爲佳。
왕효백이 서울에서 약 기운에 거닐다가 그 아우 왕도의 문 앞에 이르러 물었다. "옛 시 가운데 어느 구절이 가장 좋은가."
왕도가 생각하며 아직 답하지 못하였다.
효백이 "만나는 것에 옛 물건이 없으니 어찌 빨리 늙지 않으랴" 하고 읊으며, 이 구절이 좋다 하였다.
협주 1
睹,王爽小字也。《中興書》曰:「爽字季明,恭第四弟也。仕至侍中,恭事敗,贈太常。」
왕도는 왕상의 아이 적 이름이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상은 자가 계명이요 왕공의 넷째 아우다.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고 왕공의 일이 무너지자 태상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102환현이 강릉 남루에 올라 왕효백의 뇌를 짓다
桓玄嘗登江陵城南樓云:「我今欲爲王孝伯作誄。」因吟嘯良久,隨而下筆。一坐之間,誄以之成。
환현이 일찍이 강릉성 남루에 올라 말하였다. "내가 이제 왕효백을 위해 뇌를 짓겠다."
이로 인해 읊고 휘파람 불기를 한참 하다가 이어서 붓을 대었다. 한자리 앉은 사이에 뇌가 이로써 이루어졌다.
협주 1
《晉安帝紀》曰:「玄文翰之美,髙於一世。」《玄集》載其誄敘曰:「隆安二年九月十七日,前將軍、靑兗二州刺史、太原王孝伯薨。川岳降神,哲人是育。既爽其靈,不貽其福。天道茫昧,孰測倚伏?犬馬反噬,豺狼翹陸。嶺摧髙梧,林殘故竹。人之云亡,邦國喪牧。於以誄之,爰旌芳郁。」文多不盡載。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환현은 글과 붓의 아름다움이 한 세상에 높았다」 하였다. 『현집』에 그 뇌의 서가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융안 이 년 구월 십칠일에 전장군이요 청주와 연주 두 주의 자사인 태원 왕효백이 죽었다. 내와 산이 신을 내려 밝은 사람을 기르고, 이미 그 신령함을 시원하게 하고서 그 복을 내리지 않았다. 하늘의 도가 아득하니 누가 기대고 엎드림을 헤아리랴. 개와 말이 도리어 물어뜯고 승냥이와 이리가 우쭐거린다. 고개에 높은 오동이 꺾이고 숲에 옛 대가 상하였다. 사람이 죽으니 나라가 다스릴 이를 잃었다. 이로써 뇌하여 이에 꽃다운 향기를 드러낸다」 하였다. 글이 많아 다 싣지 않는다.
103다섯 군데 하례 글판이 함께 들어오다
桓玄初并西夏,領荊江二州,二府一國。於時始雪,五處倶賀,五版並入。玄在聽事上,版至即答。版後皆粲然成章,不相揉雜。
환현이 처음 서하를 아울러 형주와 강주 두 주를 거느리니 두 관부와 한 나라였다.
그때 처음 눈이 내려 다섯 군데에서 함께 하례하여 다섯 글판이 아울러 들어왔다.
환현이 마루 위에 있으면서 글판이 이르는 대로 곧 답하였다. 글판 뒤가 다 환하게 글을 이루어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협주 1
《玄別傳》曰:「玄既克殷仲堪,後楊佺期,遣使諷朝廷,朝廷以玄都督八州,領江州、荊州二刺史。」
『현별전』에 이르기를 「환현이 은중감을 이기고 뒤에 양전기를 이기자, 사신을 보내 조정에 넌지시 이르니 조정이 환현으로 여덟 주를 도독하게 하고 강주와 형주 두 주의 자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하였다.
104자도야, 자도야, 어찌 이리 늦었는가
桓玄下都,羊孚時爲兗州別駕,從京來詣門,牋云:「自頃世故睽離,心事淪薀。明公啓晨光於積晦,澄百流以一源。」桓見牋,馳喚前,云:「子道,子道,來何遲?」即用爲記室參軍。孟昶爲劉牢之主簿,詣門謝,見云:「羊侯,羊侯,百口賴卿!」
환현이 서울로 내려올 때 양부가 그때 연주별가였는데, 서울에서 와 문에 이르러 글을 올렸다. "요사이 세상일이 어그러져 갈리고 마음의 일이 잠겨 쌓였습니다. 명공께서 쌓인 어둠에 새벽빛을 여시고 온갖 흐름을 한 근원으로 맑히셨습니다."
환현이 글을 보고 급히 불러 앞에 오게 하며 말하였다. "자도야, 자도야, 어찌 이리 늦었는가."
곧 써서 기실참군으로 삼았다.
맹창이 유뇌지의 주부였는데 문에 이르러 사례하고 보며 말하였다. "양후여, 양후여, 백 사람 목숨이 그대에게 달렸습니다."
협주 2
別。
따로 보인다.
《續晉陽秋》曰:「牢之字道堅,彭城人,世以將顯。父遁,征虜將軍。牢之沈毅多計數,爲謝玄參軍。苻堅之役,以驍猛成功。及平王恭,轉徐州刺史。桓玄下都,以牢之爲前鋒,行征西將軍。玄至歸降,用爲會稽内史。欲解其兵,奔而縊死。」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유뇌지는 자가 도견이요 팽성 사람이니 대대로 장수로 드러났다. 아버지 유둔은 정로장군이다. 유뇌지는 가라앉고 굳세며 셈이 많아 사현의 참군이 되었다. 부견과의 싸움에서 날래고 사나움으로 공을 이루었다. 왕공을 평정함에 이르러 서주자사로 옮겼다. 환현이 서울로 내려오자 유뇌지를 앞선 봉우리로 삼아 정서장군의 일을 행하게 하였다. 환현이 이르자 항복하니 회계내사로 썼다. 그 군사를 풀려 하매 달아나 목매어 죽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