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世説新語 方正第五
1원방이 문에 들어가며 돌아보지 않았다
陳太丘與友期行,期日中,過中不至,太丘舍去,去後乃至。元方時年七歳,門外戲。客問元方:「尊君在不?」答曰:「待君久不至,已去。」友人便怒曰:「非人哉!與人期行,相委而去。」元方曰:「君與家君期日中,日中不至,則是無信;對子罵父,則是無禮。」友人慚,下車引之。元方入門不顧。
진태구가 벗과 함께 갈 것을 기약하여 한낮으로 정하였는데, 한낮이 지나도 이르지 않으매 태구가 버리고 떠났다. 떠난 뒤에야 이르렀다.
원방이 그때 나이 일곱 살로 문 밖에서 놀고 있었다. 손이 원방에게 물었다. "어르신께서 계시냐."
대답하였다. "그대를 오래 기다리다 이르지 않으시매 이미 떠나셨습니다."
벗이 곧 성내어 말하였다. "사람이 아니로다. 남과 함께 가기로 기약하고 서로 버리고 떠나다니."
원방이 말하였다. "그대가 우리 아버지와 한낮으로 기약하고 한낮에 이르지 않았으니 곧 미쁨이 없는 것이요, 아들을 마주하고 그 아비를 꾸짖으니 곧 예가 없는 것입니다."
벗이 부끄러워 수레에서 내려 그를 잡아끌었다. 원방은 문에 들어가며 돌아보지 않았다.
협주 1
陳寔及紀,並已見。
진식과 진기는 아울러 이미 보인다.
2소나무와 잣나무의 뜻이 아직 남아 있소
南陽宗世林,魏武同時,而甚薄其爲人,不與之交。及魏武作司空,總朝政,從容問宗曰:「可以交未?」答曰:「松柏之志猶存。」世林既以忤旨見疎,位不配德。文帝兄弟毎造其門,皆獨拜床下,其見禮如此。
남양의 종세림은 위나라 무제와 같은 때 사람인데, 그 사람됨을 몹시 얇게 여겨 사귀지 않았다.
위나라 무제가 사공이 되어 조정의 정사를 거느리게 되자, 조용히 종세림에게 물었다. "이제는 사귈 수 있겠소."
대답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뜻이 아직 남아 있소."
세림은 이미 뜻을 거슬러 멀리해졌으므로 자리가 덕에 걸맞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 형제가 그 문에 나아갈 때마다 다 홀로 평상 아래에서 절하였으니 예로 대접받음이 이와 같았다.
협주 1
《楚國先賢傳》曰:「宗承字世林,南陽安衆人。父資,有美譽。承少而修德雅正,确然不群,徴聘不就,聞德而至者如林。魏武弱冠,屢造其門,値賓客猥積,不能得言。乃伺承起,往要之,捉手請交,承拒而不納。帝後爲司空,輔漢朝,乃謂承曰:『卿昔不顧吾,今可爲交未?』承曰:『松柏之志猶存。』帝不説,以其名賢,猶敬禮之。敕文帝修子弟禮,就家拜漢中太守。武帝平冀州,從至鄴,陳群等皆爲之拜。帝猶以舊情介意,薄其位而優其禮,就家訪以朝政,居賓客之右。文帝徴爲直諫大夫。明帝欲引以爲相,以老固辭。」
『초국선현전』에 이르기를 「종승은 자가 세림이요 남양 안중 사람이다. 아버지 종자는 아름다운 기림이 있었다. 종승은 젊어서 덕을 닦아 우아하고 발랐으며 확실하게 무리와 달랐다.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는데 덕을 듣고 이르는 이가 숲 같았다. 위나라 무제가 스무 살에 자주 그 문에 나아갔으나 손이 많이 쌓인 때를 만나 말을 나눌 수 없었다. 이에 종승이 일어나기를 엿보아 가서 맞아 손을 잡고 사귀기를 청하였으나 종승이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금이 뒤에 사공이 되어 한나라 조정을 돕게 되자 이에 종승에게 이르기를 『경이 옛날 나를 돌아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사귈 수 있겠소』 하니, 종승이 『소나무와 잣나무의 뜻이 아직 남아 있소』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지 않았으나 그 이름난 어진 이라 하여 오히려 예로 공경하였다. 문제에게 명하여 자제의 예를 닦게 하고 그 집에 나아가 한중태수에 임명하였다. 무제가 기주를 평정하고 업에 이르니 진군 들이 다 그를 위해 절하였다. 임금이 오히려 옛정을 마음에 두어 그 자리는 낮추고 그 예는 넉넉히 하여, 집에 나아가 조정의 정사를 묻고 손 가운데 윗자리에 두었다. 문제가 불러 직간대부로 삼았다. 명제가 이끌어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늙었다 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하였다.
3옳음이 오히려 낯빛에 드러납니다
魏文帝受禪,陳群有慼容。帝問曰:「朕應天受命,卿何以不樂?」群曰:「臣與華歆,服膺先朝,今雖欣聖化,猶義形於色。」
위나라 문제가 선양을 받자 진군에게 슬퍼하는 낯빛이 있었다.
임금이 물었다. "짐이 하늘에 응하여 명을 받았는데 경은 어찌 즐거워하지 않는가."
진군이 말하였다. "신은 화흠과 함께 앞선 조정을 가슴에 품었으므로, 이제 비록 거룩한 바뀜을 기뻐하나 옳음이 오히려 낯빛에 드러납니다."
협주 1
《華嶠譜敘》曰:「魏受禪,朝臣三公以下,並受爵位。華歆以形色忤時,徙爲司空,不進爵。文帝久不懌,以問尚書令陳群曰:『我應天受命,百辟莫不説喜,形於聲色;而相國及公獨有不怡者,何邪?』群起離席長跪曰:『臣與相國曾事漢朝,心雖説喜,義干其色,亦懼陛下,實應見憎。』帝大説,歎息良久,遂重異之。」
「화교보서」에 이르기를 「위나라가 선양을 받아 조정 신하 삼공 이하가 아울러 벼슬자리를 받았다. 화흠은 낯빛으로 때를 거슬러 사공으로 옮겨지고 벼슬이 오르지 않았다. 문제가 오래도록 기뻐하지 않다가 상서령 진군에게 물었다. 『내가 하늘에 응하여 명을 받으니 온갖 벼슬아치가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어 소리와 낯빛에 드러나는데, 상국과 공만이 홀로 기뻐하지 않음이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진군이 일어나 자리를 떠나 길게 무릎 꿇고 말하였다. 『신은 상국과 함께 일찍이 한나라 조정을 섬겨 마음은 비록 기뻐하나 옳음이 그 낯빛을 범하니, 또한 폐하께서 실로 마땅히 미워하실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탄식하기를 오래 하고 마침내 그를 무겁게 여기고 남달리 대하였다」 하였다.
4다섯 아들이 죽으면 또한 다시 곽회도 없습니다
郭淮作關中都督,甚得民情,亦屢有戰庸。淮妻,太尉王凌之妹,坐凌事當并誅。使者徴攝甚急,淮使戒裝,克日當發。州府文武及百姓勸淮舉兵,淮不許。至期,遣妻,百姓號泣追呼者數萬人。行數十里,淮乃命左右追夫人還,於是文武奔馳,如徇身首之急。既至,淮與宣帝書曰:「五子哀戀,思念其母,其母既亡,則無五子。五子若殞,亦復無淮。」宣帝乃表,特原淮妻。
곽회가 관중도독이 되어 백성의 마음을 몹시 얻었고 또한 자주 싸움의 공이 있었다.
곽회의 아내는 태위 왕릉의 누이인데, 왕릉의 일에 걸려 아울러 베이게 되었다. 심부름꾼이 부르고 잡아가는 것이 몹시 급하므로 곽회가 채비하게 하고 날을 정해 마땅히 떠나게 하였다.
주와 부의 문무와 백성이 곽회에게 군사를 일으키기를 권하였으나 곽회가 허락하지 않았다.
기약한 날에 이르러 아내를 보내니, 백성으로 부르짖어 울며 쫓아가 부르는 이가 수만이었다. 몇십 리를 가서 곽회가 이에 곁의 사람에게 부인을 뒤쫓아 돌아오게 하라 명하니, 이에 문무가 내달리기를 제 목숨을 좇는 급함처럼 하였다.
이르러 곽회가 선제에게 글을 올렸다. "다섯 아들이 슬피 그리워하며 그 어미를 생각합니다. 그 어미가 이미 없으면 곧 다섯 아들이 없고, 다섯 아들이 만일 죽으면 또한 다시 곽회가 없습니다."
선제가 이에 표를 올려 특별히 곽회의 아내를 용서하였다.
협주 3
《魏志》曰:「淮字伯濟,太原陽曲人。建安中,除平原府丞。黃初元年,奉使賀文帝踐阼,而稽留不及。群臣歡會,帝正色責之曰:『昔禹會諸侯於塗山,防風氏後至,便行大戮。今溥天同慶,而卿最留遲,何也?』淮曰:『臣聞五帝先教,導民以德,夏后政衰,始用刑辟。今臣遭唐虞之世,是以知免防風氏之誅。』帝説之,擢爲雍州刺史,遷征西將軍。淮在關中三十餘年,功績顯著,遷儀同三司,贈大將軍。」
『위지』에 이르기를 「곽회는 자가 백제요 태원 양곡 사람이다. 건안 연간에 평원부승에 임명되었다. 황초 원년에 심부름으로 문제의 자리에 오름을 하례하러 갔다가 머물러 늦어 미치지 못하였다. 뭇 신하가 기뻐 모였는데 임금이 낯빛을 바로 하고 꾸짖었다. 『옛날 우임금이 도산에 제후를 모을 때 방풍씨가 뒤에 이르매 곧 크게 죽였다. 이제 온 하늘 아래가 함께 경사스러운데 경이 가장 늦게 왔으니 어찌 된 일인가.』 곽회가 『신이 듣기에 다섯 임금은 가르침을 앞세워 백성을 덕으로 이끌었고, 하후씨는 정사가 쇠하여 비로소 형벌을 썼다 합니다. 이제 신은 요임금과 순임금의 세상을 만났으므로 방풍씨의 죽임을 벗어날 줄 알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뽑아 옹주자사로 삼고 정서장군으로 옮겼다. 곽회가 관중에 삼십여 해를 있으며 공적이 드러나 의동삼사로 옮겼고 대장군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魏略》曰:「凌字彦雲,太原祁人。歴司空、太尉、征東將軍。密欲立楚王彪,司馬宣王自討之。凌自縛歸罪,遙謂太傅曰:『卿直以折簡召我,我當不至邪?』太傅曰:『以卿非肯逐折簡者也。』遂使人送至西。凌自知罪重,試索棺釘,以觀太傅意,太傅給之。凌行至項城,夜呼掾屬與決曰:『行年八十,身名倶滅。命邪!』遂自殺。」
『위략』에 이르기를 「왕릉은 자가 언운이요 태원 기 사람이다. 사공과 태위와 정동장군을 지냈다. 몰래 초왕 조표를 세우려 하니 사마선왕이 몸소 이를 쳤다. 왕릉이 스스로 묶고 죄에 돌아가며 멀리 태부에게 이르기를 『경이 다만 짧은 편지로 나를 불렀어도 내가 마땅히 이르지 않았겠소』 하니, 태부가 『경이 짧은 편지를 좇을 이가 아니기 때문이오』 하였다. 마침내 사람을 시켜 서쪽으로 보냈다. 왕릉이 스스로 죄가 무거운 줄 알고 시험 삼아 널 못을 구하여 태부의 뜻을 보려 하니 태부가 이를 주었다. 왕릉이 가다 항성에 이르러 밤에 아전과 붙이를 불러 헤어지며 말하기를 『나이 여든에 몸과 이름이 함께 없어지는구나. 운명인가』 하고 마침내 스스로 죽었다」 하였다.
《世語》曰:「淮妻當從坐,侍御史往收。督將及羌胡渠帥數千人叩頭,請淮上表留妻,淮不從。妻上道,莫不流涕,人人扼腕,欲劫留之。淮五子叩頭流血請淮,淮不忍視,乃命追之,於是數千騎往追還。淮以書白司馬宣王曰:『五子哀母,不惜其身。若無其母,是無五子,五子若亡,亦無淮也。今輙追還,若於法未通,當受罪於主者。』書至,宣王乃表原之。」
『세어』에 이르기를 「곽회의 아내가 마땅히 연좌되게 되어 시어사가 가서 잡으려 하였다. 감독하는 장수와 강족·호족의 우두머리 수천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곽회에게 표를 올려 아내를 머물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곽회가 좇지 않았다. 아내가 길에 오르니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사람마다 팔을 부여잡으며 빼앗아 머물게 하려 하였다. 곽회의 다섯 아들이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며 곽회에게 청하니, 곽회가 차마 보지 못하여 이에 뒤쫓으라 명하매 이에 수천 기병이 가서 뒤쫓아 돌아왔다. 곽회가 글로 사마선왕에게 아뢰었다. 『다섯 아들이 어미를 슬퍼하여 제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만일 그 어미가 없으면 이는 다섯 아들이 없는 것이요, 다섯 아들이 만일 죽으면 또한 곽회도 없습니다. 이제 문득 뒤쫓아 돌아왔으니 만일 법에 통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맡은 이에게 죄를 받겠습니다.』 글이 이르자 선왕이 이에 표를 올려 용서하였다」 하였다.
5이는 반드시 신좌치다
諸葛亮之次渭濱,關中震動。魏明帝深懼晉宣王戰,乃遣辛毗爲軍司馬。宣王既與亮對渭而陳,亮設誘譎萬方。宣王果大忿,將欲應之以重兵。亮遣間諜覘之;還曰:「有一老夫,毅然仗黃鉞,當軍門立,軍不得出。」亮曰:「此必辛佐治也。」
제갈량이 위수 가에 진을 치니 관중이 흔들렸다.
위나라 명제가 진나라 선왕이 싸울까 깊이 두려워하여 이에 신비를 보내 군사마로 삼았다.
선왕이 이미 제갈량과 위수를 마주하고 진을 쳤는데, 제갈량이 온갖 방법으로 꾀어 속였다. 선왕이 과연 크게 성내어 무거운 군사로 응하려 하였다.
제갈량이 염탐꾼을 보내 엿보게 하니 돌아와 말하였다. "한 늙은이가 있어 굳세게 누런 도끼를 짚고 군문에 서 있으매 군사가 나오지 못합니다."
제갈량이 말하였다. "이는 반드시 신좌치다."
협주 3
《蜀志》曰:「亮字孔明,琅邪陽都人。客於荊州,躬耕隴畝,好爲《梁甫吟》。長八尺,毎自比管仲、樂毅,時人莫之許也。唯博陵崔州平、潁川徐元直謂爲信然。先主屯新野,徐庶見先主曰:『諸葛孔明,臥龍也。將軍豈願見之乎?』先主曰:『君與倶來。』庶曰:『此人可就見,不可屈致也。』先主遂詣亮,謂關羽、張飛曰:『孤之有孔明,猶魚之有水也。』累遷丞相、益州牧。率衆北征,卒於渭南。」
『촉지』에 이르기를 「제갈량은 자가 공명이요 낭야 양도 사람이다. 형주에 붙어 살며 몸소 밭이랑을 갈고 「양보음」 하기를 좋아하였다. 키가 여덟 자요 늘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견주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박릉의 최주평과 영천의 서원직만이 참으로 그러하다 하였다. 선주가 신야에 진을 쳤을 때 서서가 선주를 뵙고 『제갈공명은 누운 용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를 보시려 합니까』 하니, 선주가 『그대와 함께 오시오』 하였다. 서서가 『이 사람은 나아가 볼 수는 있어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찾아가고 관우와 장비에게 이르기를 『내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승상과 익주목에 이르렀다. 무리를 이끌고 북쪽을 치다가 위수 남녘에서 죽었다」 하였다.
《魏志》曰:「毗字佐治,潁川陽翟人。累遷衞尉。」
『위지』에 이르기를 「신비는 자가 좌치요 영천 양적 사람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위위에 이르렀다」 하였다.
《晉陽秋》曰:「諸葛亮寇於郿,據渭水南原,詔使髙祖拒之。亮善撫御,又戎政嚴明,且僑軍遠征,糧運艱澀,利在野戰。朝廷毎聞其出,欲以不戰屈之,髙祖亦以爲然。而擁大軍禦侮於外,不宜遠露怯弱之形以虧大勢,故秣馬坐甲,毎見呑併之威。亮雖挑戰,或遺髙祖巾幗。巾幗,婦女之飾,欲以激怒,冀獲曹咎之利。朝廷慮髙祖不勝忿憤,而衞尉辛毗骨鯁之臣,帝乃使毗仗節爲髙祖軍司馬。亮果復挑戰,髙祖乃奮怒,將出應之,毗仗節中門而立,髙祖乃止。將士聞見者益加勇鋭。識者以人臣雖擁衆千萬而屈於王人,大略深長,皆如此之類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제갈량이 미에 쳐들어와 위수 남녘 언덕을 차지하니 조칙으로 고조에게 막게 하였다. 제갈량은 어루만져 부리기를 잘하고 또 군사 정사가 엄하고 밝았으나, 옮겨 온 군사로 멀리 치는 데다 양식 나르기가 어렵고 껄끄러워 들에서 싸우는 것이 이로웠다. 조정이 그가 나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싸우지 않고 굽히려 하였고 고조도 그러하다 여겼다. 그러나 큰 군사를 안고 밖에서 업신여김을 막으면서 겁약한 꼴을 멀리 드러내어 큰 형세를 이지러뜨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므로, 말에 여물을 먹이고 갑옷 위에 앉아 삼킬 위엄을 보일 때마다 그러하였다. 제갈량이 비록 싸움을 돋우고 더러는 고조에게 부인의 머릿수건을 보냈다. 머릿수건은 부녀의 꾸밈이니 이로써 성나게 하여 조구의 이로움을 얻기를 바란 것이다. 조정이 고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였고, 위위 신비가 뼈대 있는 신하이므로 임금이 이에 신비에게 절월을 짚고 고조의 군사마가 되게 하였다. 제갈량이 과연 다시 싸움을 돋우니 고조가 이에 성내어 나가 응하려 하였는데, 신비가 절월을 짚고 가운뎃문에 서니 고조가 이에 그쳤다. 장수와 군사로 듣고 본 이가 더욱 날래고 굳세어졌다. 아는 이들이 신하 된 이가 비록 무리 천만을 안았어도 임금의 사람에게 굽히니, 큰 헤아림이 깊고 긴 것이 다 이런 것들이라 하였다」 하였다.
6비록 다시 형벌 받은 사람이나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소
夏侯玄既被桎梏,時鍾毓爲廷尉,鍾會先不與玄相知,因便狎之。玄曰:「雖復刑餘之人,未敢聞命!」考掠初無一言,臨刑東市,顏色不異。
하후현이 이미 차꼬와 수갑을 차게 되었을 때, 종육이 정위였는데 종회가 앞서 하후현과 서로 알지 못하다가 이로 인해 곧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하후현이 말하였다. "비록 다시 형벌 받은 사람이나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소."
매질하여 캐물어도 처음부터 한마디도 없었고, 동쪽 저잣거리에서 형을 받을 때 낯빛이 다르지 않았다.
협주 3
《魏氏春秋》曰:「玄字太初,譙國人,夏侯尚之子,大將軍前妻兄也。風格髙朗,弘辯博暢。正始中,護軍。曹爽誅,徴爲太常。内知不免,不交人事,不畜筆研。及太傅薨,許允謂玄曰:『子無復憂矣!』玄歎曰:『士宗,卿何不見事乎?此人尤能以通家年少遇我,子元、子上不吾容也。』後中書令李豐惡大將軍執政,遂謀以玄代之。大將軍聞其謀,誅豐,收玄送廷尉。」干寶《晉紀》曰:「初,豐之謀也,使告玄,玄答曰:『宜詳之爾,不以聞也。』故及於難。」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하후현은 자가 태초요 초국 사람이니 하후상의 아들이요 대장군의 앞아내의 오빠다. 풍모와 격이 높고 환하며 넓게 따지고 널리 시원하였다. 정시 연간에 호군이 되었다. 조상이 베이자 불려 태상이 되었다. 안으로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사람 일에 사귀지 않고 붓과 벼루를 두지 않았다. 태부가 죽자 허윤이 하후현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다시 근심할 것이 없소』 하니, 하후현이 탄식하기를 『사종, 경은 어찌 일을 보지 못하시오. 이 사람은 오히려 대를 이어 사귄 젊은이로 나를 대할 수 있으나, 자원과 자상은 나를 담아 두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뒤에 중서령 이풍이 대장군이 정사를 잡은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하후현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려고 꾀하였다. 대장군이 그 꾀를 듣고 이풍을 베고 하후현을 잡아 정위에 보냈다」 하였다. 간보의 『진기』에 이르기를 「처음에 이풍이 꾀할 때 하후현에게 알리게 하니 하후현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자세히 하시오』 할 뿐이었고 이를 알리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미쳤다」 하였다.
《世語》曰:「玄至廷尉,不肯下辭,廷尉鍾毓自臨履玄。玄正色曰:『吾當何辭?爲令史責人邪?卿便爲吾作。』毓以玄名士,節髙不可屈,而獄當竟,夜爲作辭,令與事相附。流涕以示玄,玄視之曰:『不當若是邪?』鍾會年少於玄,玄不與交,是日於毓坐狎玄,玄正色曰:『鍾君,何得如是!』」《名士傳》曰:「初,玄以鍾毓志趣不同,不與之交。玄被收時,毓爲廷尉,執玄手曰:『太初何至於此?』玄正色曰:『雖復刑餘之人,不可得交。』」按:郭頒,西晉人,時世相近,爲《晉魏世語》,事多詳覈。孫盛之徒皆采以著書,並云玄距鍾會。而袁宏《名士傳》最後出,不依前史,以爲鍾毓,可謂謬矣。
『세어』에 이르기를 「하후현이 정위에 이르러 진술서 쓰기를 즐기지 않으니 정위 종육이 몸소 하후현을 다루러 갔다. 하후현이 낯빛을 바로 하고 『내가 무엇을 진술하겠소. 영사가 사람을 꾸짖는 것이오. 경이 곧 나를 위해 지으시오』 하였다. 종육은 하후현이 이름난 선비요 절개가 높아 굽힐 수 없으나 옥사를 마쳐야 하므로, 밤에 그를 위해 진술서를 지어 일과 서로 맞게 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하후현에게 보이니 하후현이 보고 『마땅히 이와 같지 않겠소』 하였다. 종회는 하후현보다 나이가 어렸는데 하후현이 사귀지 않았다. 이날 종육의 자리에서 하후현을 함부로 대하니 하후현이 낯빛을 바로 하고 『종군, 어찌 이럴 수 있소』 하였다」 하였다. 『명사전』에 이르기를 「처음에 하후현이 종육과 뜻과 나아감이 같지 않다 하여 사귀지 않았다. 하후현이 잡혔을 때 종육이 정위였는데 하후현의 손을 잡고 『태초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소』 하니, 하후현이 낯빛을 바로 하고 『비록 다시 형벌 받은 사람이나 사귈 수 없소』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곽반은 서진 사람으로 때가 서로 가까워 『진위세어』를 지었는데 일이 자세하고 헤아려진 것이 많다. 손성의 무리가 다 이를 캐어 책을 지으며 아울러 하후현이 종회를 물리쳤다 하였다. 그런데 원굉의 『명사전』이 가장 뒤에 나와 앞선 역사에 기대지 않고 종육이라 하였으니 그르다 하겠다.
《魏志》曰:「玄格量弘濟,臨斬,顏色不異,舉止自若。」
『위지』에 이르기를 「하후현은 격과 도량이 넓고 건져, 베임에 다다라 낯빛이 다르지 않고 몸가짐이 태연하였다」 하였다.
7같이할 수는 있어도 섞일 수는 없소
夏侯泰初與廣陵陳本善。本與玄在本母前宴飲,本弟騫行還,徑入,至堂戸。泰初因起曰:「可得同,不可得而雜。」
하후태초가 광릉의 진본과 사이가 좋았다.
진본이 하후현과 함께 진본의 어머니 앞에서 잔치하며 마시는데, 진본의 아우 진건이 다니다 돌아와 곧장 들어와 마루 문에 이르렀다.
태초가 이로 인해 일어나며 말하였다. "같이할 수는 있어도 섞일 수는 없소."
협주 3
《世語》曰:「本字休元,臨淮東陽人。」《魏志》曰:「本,廣陵東陽人。父矯,司徒。本歴郡守、廷尉。所在操綱領,舉大體,能使群下自盡,有率御之才。不親小事,不讀法律,而得廷尉之稱。遷鎭北將軍。」
『세어』에 이르기를 「진본은 자가 휴원이요 임회 동양 사람이다」 하였다. 『위지』에 이르기를 「진본은 광릉 동양 사람이다. 아버지 진교는 사도다. 진본은 군수와 정위를 지냈다. 있는 곳마다 벼리를 잡고 큰 몸을 들어 아랫사람들이 스스로 다하게 할 수 있었으니 거느려 부리는 재주가 있었다. 작은 일을 몸소 하지 않고 법률을 읽지 않았으나 정위라는 일컬음을 얻었다. 진북장군으로 옮겼다」 하였다.
《晉陽秋》曰:「騫字休淵,司徒第二子,無謇諤風,滑稽而多智謀。仕至大司馬。」
『진양추』에 이르기를 「진건은 자가 휴연이요 사도의 둘째 아들이다. 바른말 하는 풍모는 없고 익살스러우면서 꾀가 많았다. 벼슬이 대사마에 이르렀다」 하였다.
《名士傳》曰:「玄以鄕黨貴齒,本不論德位,年長者必爲拜。與陳本母前飲,騫來而出,其可得同,不可得而雜者也。」
『명사전』에 이르기를 「하후현은 시골에서는 나이를 귀히 여기고 덕과 자리를 따지지 않아 나이 많은 이에게는 반드시 절하였다. 진본의 어머니 앞에서 마시다가 진건이 오매 나갔으니, 같이할 수는 있어도 섞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8그 위만 보았을 뿐 그 아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髙貴鄕公薨,内外諠譁。司馬文王問侍中陳泰曰:「何以靜之?」泰云:「唯殺賈充,以謝天下。」文王曰:「可復下此不?」對曰:「但見其上,未見其下。」
고귀향공이 죽자 안팎이 시끄러웠다.
사마문왕이 시중 진태에게 물었다. "무엇으로 이를 고요히 하겠소."
진태가 말하였다. "오직 가충을 죽여 천하에 사죄하는 것뿐입니다."
문왕이 말하였다. "다시 이보다 낮출 수는 없겠소."
대답하였다. "다만 그 위만 보았을 뿐 그 아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협주 3
《魏志》曰:「髙貴鄕公諱髦,字彦士,文帝孫,東海定王霖之子也。初封郯縣。髙貴鄕公好學夙成。齊王廢,群臣迎之,即皇帝位。」《漢晉春秋》曰:「自曹芳事後,魏人省徹宿衞,無復鎧甲,諸門戎兵,老弱而已。曹髦見威權日去,不勝其忿,召侍中王沈、尚書王經、散騎常侍王業謂曰:『司馬昭之心,路人所知也。吾不能坐受廢辱,今日當與卿自出討之。』王經諫不聽,乃出懷中板令投地曰:『行之決矣!正使死,何所恨!況不必死邪?』於是入白太后。沈業奔走告昭,昭爲之備。髦遂率僮僕數百,鼓譟而出。昭弟屯騎校尉伷入,遇髦於東止車門,左右訶之,伷衆奔走。中護軍賈充又逆髦,戰於南闕下。髦自用劍,衆欲退。太子舍人成濟問充曰:『事急矣!當云何?』充曰:『公畜汝等,正爲今日。今日之事,無所問也。』濟即前刺髦,刃出於背。」《魏氏春秋》曰:「帝將誅大將軍,詔有司復進位相國,加九錫。帝夜自將宂從僕射李昭、黃門從官焦伯等下陵雲臺,鎧仗授兵,欲因際會,遣使自出致討,會雨而卻。明日,遂見王經等,出黃素詔於懷曰:『是可忍也,孰不可忍?今當決行此事。』帝遂拔劍升輦,率殿中宿衞倉頭官僮,撃戰鼓,出雲龍門。賈充自外而入,帝師潰散,帝猶稱天子,手劍奮撃,衆莫敢逼。充率厲將士,騎督成倅、弟濟以矛進,帝崩於師。時暴雨,雷電晦冥。」
『위지』에 이르기를 「고귀향공은 휘가 모요 자가 언사니 문제의 손자요 동해정왕 조림의 아들이다. 처음에 담현에 봉해졌다. 고귀향공은 배우기를 좋아하여 일찍 이루어졌다. 제왕이 폐해지자 뭇 신하가 그를 맞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하였다.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조방의 일 뒤로 위나라 사람이 숙위를 덜어 다시 갑옷이 없었고 여러 문의 군사는 늙고 약한 이뿐이었다. 조모가 위엄과 권세가 날로 떠남을 보고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시중 왕침과 상서 왕경과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이르기를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이도 아는 바다. 나는 앉아서 폐하고 욕됨을 받을 수 없으니 오늘 마땅히 경들과 스스로 나가 그를 치겠다』 하였다. 왕경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이에 품속의 판을 꺼내 땅에 던지며 『행함이 정해졌다. 설령 죽는다 한들 무엇이 한이겠는가. 하물며 반드시 죽지도 않음에랴』 하였다. 이에 들어가 태후에게 아뢰었다. 왕침과 왕업이 달려가 사마소에게 알리니 사마소가 이를 대비하였다. 조모가 마침내 종 수백을 이끌고 북 치고 떠들며 나갔다. 사마소의 아우 둔기교위 사마주가 들어오다가 동지거문에서 조모를 만나니, 곁의 사람이 꾸짖으매 사마주의 무리가 달아났다. 중호군 가충이 또 조모를 맞아 남쪽 궐 아래에서 싸웠다. 조모가 스스로 칼을 쓰니 무리가 물러나려 하였다. 태자사인 성제가 가충에게 『일이 급합니다. 마땅히 어찌합니까』 물으니, 가충이 『공께서 너희를 기른 것이 바로 오늘을 위함이다. 오늘 일은 물을 바가 없다』 하였다. 성제가 곧 나아가 조모를 찔러 칼날이 등으로 나왔다」 하였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임금이 대장군을 베려 하매 맡은 이에게 조칙하여 다시 상국의 자리에 올리고 아홉 가지를 더하게 하였다. 임금이 밤에 몸소 용종복야 이소와 황문종관 초백 들을 거느리고 능운대에 내려가 갑옷과 무기로 군사를 주고, 만나는 틈을 타 사신을 보내 스스로 나가 치려 하였으나 마침 비가 와서 물러났다. 이튿날 마침내 왕경 들을 보고 품속에서 누런 비단 조칙을 꺼내며 『이를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을 참지 못하겠는가. 이제 마땅히 이 일을 결단해 행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칼을 뽑고 수레에 올라 대궐 안 숙위와 종과 관노를 거느리고 싸움북을 치며 운룡문을 나섰다. 가충이 밖에서 들어오니 임금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졌는데, 임금이 오히려 천자를 일컬으며 손수 칼로 떨쳐 치니 무리가 감히 다가서지 못하였다. 가충이 장수와 군사를 다그쳐 힘쓰게 하니 기독 성쉬와 아우 성제가 창으로 나아가매 임금이 군사 가운데서 돌아갔다. 그때 사나운 비가 오고 우레와 번개가 어두웠다」 하였다.
《魏志》曰:「泰字玄伯,司空群之子也。」
『위지』에 이르기를 「진태는 자가 현백이요 사공 진군의 아들이다」 하였다.
干寶《晉紀》曰:「髙貴鄕公之殺,司馬文王召朝臣謀其故,太常陳泰不至。使其舅荀顗召之,告以可不。泰曰:『世之論者,以泰方於舅,今舅不如泰也。』子弟内外咸共逼之,垂涕而入。文王待之曲室,謂曰:『玄伯,卿何以處我?』對曰:『可誅賈充以謝天下。』文王曰:『爲吾更思其次。』泰曰:『唯有進於此,不知其次。』文王乃止。」《漢晉春秋》曰:「曹髦之薨,司馬昭聞之,自投於地曰:『天下謂我何?』於是召百官議其事。昭垂涕問陳泰曰:『何以居我?』泰曰:「公光輔數世,功蓋天下,謂當並跡古人,垂美於後,一旦有殺君之事,不亦惜乎!速斬賈充,猶可以自明也。』昭曰:『公閭不可得殺也,卿更思餘計。』泰厲聲曰:『意唯有進於此耳,餘無足委者也。』歸而自殺。」《魏氏春秋》曰:「泰勸大將軍誅賈充,大將軍曰:『卿更思其他。』泰曰:『豈可使泰復發後言。』遂嘔血死。」
간보의 『진기』에 이르기를 「고귀향공이 죽임을 당하자 사마문왕이 조정 신하를 불러 그 까닭을 꾀하였는데 태상 진태가 이르지 않았다. 그 외숙 순의를 시켜 부르며 옳고 그름을 알렸다. 진태가 『세상에 따지는 이들이 나를 외숙에 견주는데 이제 외숙이 나만 못하오』 하였다. 자제와 안팎이 다 함께 그를 다그치니 눈물을 드리우며 들어갔다. 문왕이 굽은 방에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현백, 경은 무엇으로 나를 처리하겠소』 하니, 대답하기를 『가충을 베어 천하에 사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문왕이 『나를 위해 다시 그다음을 생각해 보시오』 하니, 진태가 『오직 이보다 나아감이 있을 뿐이요 그다음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문왕이 이에 그쳤다」 하였다.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조모가 죽자 사마소가 이를 듣고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지며 『천하가 나를 무어라 이르겠는가』 하였다. 이에 온갖 벼슬아치를 불러 그 일을 의논하였다. 사마소가 눈물을 흘리며 진태에게 묻기를 『무엇으로 나를 처리하겠소』 하니, 진태가 『공께서 여러 대를 빛나게 도와 공이 천하를 덮으니 마땅히 옛사람과 자취를 나란히 하여 뒤에 아름다움을 드리우리라 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임금을 죽인 일이 있으니 또한 아깝지 않습니까. 빨리 가충을 베면 오히려 스스로 밝힐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사마소가 『공려는 죽일 수 없으니 경은 다시 다른 셈을 생각하시오』 하니, 진태가 매서운 소리로 『뜻은 오직 이보다 나아감이 있을 뿐이요 나머지는 맡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돌아가 스스로 죽었다」 하였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진태가 대장군에게 가충을 베라 권하니 대장군이 『경은 다시 그 밖의 것을 생각해 보시오』 하였다. 진태가 『어찌 저로 하여금 다시 뒷말을 내게 하십니까』 하고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하였다.
9황태자의 거룩한 바탕은 처음과 같습니다
和嶠爲武帝所親重,語嶠曰:「東宮頃似更成進,卿試往看。」還問「何如?」答云:「皇太子聖質如初。」
화교가 무제에게 가까이 무겁게 여겨졌다. 무제가 화교에게 말하였다. "동궁이 요사이 더 나아진 듯하니 경이 시험 삼아 가서 보시오."
돌아오자 물었다. "어떠하오."
대답하였다. "황태자의 거룩한 바탕은 처음과 같습니다."
협주 1
《晉諸公贊》曰:「嶠字長輿,汝南西平人。父逌,太常,知名。嶠少以雅量稱,深爲賈充所知,毎向世祖稱之。歴尚書、太子少傅。」干寶《晉紀》曰:「皇太子有醇古之風,美於信受。侍中和嶠數言於上曰:『季世多僞,而太子信,非四海之主。憂太子不了陛下家事,願追思文武之阼。』上既重長適,又懷齊王,朋黨之論弗入也。後上謂嶠曰:『太子近入朝,吾謂差進,卿可與荀侍中共徃言。』及顗奉詔還,對上曰:『太子明識弘新,有如明詔。』問嶠,嶠對曰:『聖質如初。』上默然。」《晉陽秋》曰:「世祖疑惠帝不可承繼大業,遣和嶠、荀朂往觀察之。既見,朂稱歎曰:『太子德更進茂,不同於故。』嶠曰:『皇太子聖質如初,此陛下家事,非臣所盡。』天下聞之,莫不稱嶠爲忠,而欲灰滅朂也。」按:荀顗淸雅,性不阿諛。校之二説,則孫盛爲得也。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화교는 자가 장여요 여남 서평 사람이다. 아버지 화유는 태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화교는 젊어서 도량으로 일컬어져 가충에게 깊이 알려졌고 세조에게 늘 그를 일컬었다. 상서와 태자소부를 지냈다」 하였다. 간보의 『진기』에 이르기를 「황태자에게 순수하고 예스러운 풍모가 있어 믿고 받아들임이 아름다웠다. 시중 화교가 자주 임금께 말하기를 『말세에 거짓이 많은데 태자는 믿으니 사해의 주인이 아닙니다. 태자가 폐하의 집안일을 밝히지 못할까 근심하니, 바라건대 문왕과 무왕의 자리를 좇아 생각하십시오』 하였다. 임금이 이미 맏이를 무겁게 여기고 또 제왕을 마음에 품었으므로 붕당의 논이 들어가지 않았다. 뒤에 임금이 화교에게 이르기를 『태자가 요사이 조회에 드니 내가 조금 나아졌다 여기오. 경이 순시중과 함께 가서 말해 보시오』 하였다. 순의가 조칙을 받들고 돌아와 임금께 아뢰기를 『태자가 밝게 알고 넓고 새로우니 밝으신 조칙과 같습니다』 하였다. 화교에게 물으니 화교가 대답하기를 『거룩한 바탕이 처음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잠잠하였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세조가 혜제가 큰 업을 이어받을 수 없을까 의심하여 화교와 순욱을 보내 가서 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보고 순욱이 일컬어 탄식하기를 『태자의 덕이 더욱 나아가 무성하여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하였고, 화교는 『황태자의 거룩한 바탕은 처음과 같습니다. 이는 폐하의 집안일이니 신이 다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 화교를 참되다 일컫지 않는 이가 없었고 순욱은 재처럼 없애 버리려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순의는 맑고 우아하여 성품이 아첨하지 않는다. 두 설을 견주면 곧 손성이 옳다.
10신이 숯을 삼키고 몸에 옻칠하지 못하여 오늘 다시 거룩한 낯을 뵙습니다
諸葛靚後入晉,除大司馬,召不起。以與晉室有讎,常背洛水而坐。與武帝有舊,帝欲見之而無由,乃請諸葛妃呼靚。既來,帝就太妃間相見。禮畢,酒酣,帝曰:「卿故復憶竹馬之好不?」靚曰:「臣不能呑炭漆身,今日復覩聖顏。」因涕泗百行。帝於是慚悔而出。
제갈정이 뒤에 진나라에 들어가 대사마에 임명되었으나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나라 왕실과 원수가 있다 하여 늘 낙수를 등지고 앉았다.
무제와 옛 사이가 있어 임금이 그를 보고자 하였으나 말미암을 길이 없으므로, 이에 제갈비에게 청하여 제갈정을 부르게 하였다.
이윽고 오자 임금이 태비의 방으로 나아가 서로 보았다. 예를 마치고 술이 무르익자 임금이 말하였다. "경은 짐짓 대말 타고 놀던 좋음을 다시 기억하시오."
제갈정이 말하였다. "신이 숯을 삼키고 몸에 옻칠하지 못하여 오늘 다시 거룩한 낯을 뵙습니다."
이로 인해 눈물과 콧물이 온 낯에 흘렀다. 임금이 이에 부끄럽고 뉘우쳐 나갔다.
협주 1
《晉諸公贊》曰:「呉亡,靚入洛,以父誕爲太祖所殺,誓不見世祖。世祖叔母琅邪王妃,靚之姊也。帝後因靚在姊間,往就見焉,靚逃於廁中,於是以至孝發名。時嵇康亦被法,而康子紹死蕩陰之役。談者咸曰:『觀紹靚二人,然後知忠孝之道,區以別矣。』」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오나라가 망하자 제갈정이 낙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 제갈탄이 태조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세조를 보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세조의 작은어머니 낭야왕비는 제갈정의 누이다. 임금이 뒤에 제갈정이 누이의 방에 있음을 말미암아 가서 보려 하니 제갈정이 뒷간에 숨었다. 이에 지극한 효도로 이름을 냈다. 그때 혜강도 법을 받았는데 혜강의 아들 혜소는 탕음의 싸움에서 죽었다. 이야기하는 이들이 다 이르기를 『혜소와 제갈정 두 사람을 보고 나서야 참됨과 효도의 길이 나뉘어 갈림을 알겠다』 하였다」 하였다.
11한 자 베와 한 말 조의 노래를 늘 폐하를 위해 부끄러워하였습니다
武帝語和嶠曰:「我欲先痛罵王武子,然後爵之。」嶠曰:「武子雋爽,恐不可屈。」帝遂召武子,苦責之,因曰:「知愧不?」武子曰:「『尺布斗粟』之謠,常爲陛下恥之!它人能令疎親,臣不能使親疎,以此愧陛下。」
무제가 화교에게 말하였다. "내가 먼저 왕무자를 아프게 꾸짖고 그 뒤에 벼슬을 주려 하오."
화교가 말하였다. "무자는 뛰어나고 시원하니 굽힐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마침내 무자를 불러 괴롭게 꾸짖고 이로 인해 말하였다. "부끄러운 줄 아는가."
무자가 말하였다. "「한 자 베와 한 말 조」의 노래를 늘 폐하를 위해 부끄러워하였습니다. 남은 성긴 이를 친하게 할 수 있으나 신은 친한 이를 성기게 하지 못하니, 이로써 폐하께 부끄럽습니다."
협주 2
《晉諸公贊》曰:「齊王當出藩,而王濟諫請無數,又累遣常山主與婦長廣公主共入稽顙,陳乞留之。世祖甚恚,謂王戎曰:『我兄弟至親,今出齊王,自朕家計,而甄德、王濟連遣婦入來,生哭人邪?濟等尚爾,況餘者乎?』濟自此被責,左遷國子祭酒。」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제왕이 마땅히 울타리로 나가게 되었는데 왕제가 간하여 청하기를 여러 번 하고, 또 거듭 상산공주와 아내 장광공주를 함께 들여보내 머리를 조아리고 머물게 하기를 빌게 하였다. 세조가 몹시 성내어 왕융에게 이르기를 『우리 형제는 지극히 친한데 이제 제왕을 내보내는 것은 스스로 짐의 집안 셈이거늘, 견덕과 왕제가 잇달아 아내를 들여보내 산 사람을 곡하게 하는가. 왕제 들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나머지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왕제가 이로부터 꾸짖음을 받아 국자좨주로 낮추어졌다」 하였다.
《漢書》曰:「淮南厲王長,髙祖少子也。有罪,文帝徙之於蜀,不食而死。民作歌曰:『一尺布,尚可縫;一斗粟、尚可舂。兄弟二人,不能相容。』瓚注曰:『言一尺布帛,可縫而共衣;一斗米粟、可舂而共食。況以天下之廣,而不相容也。』」
『한서』에 이르기를 「회남여왕 유장은 고조의 작은아들이다. 죄가 있어 문제가 그를 촉으로 옮기니 먹지 않고 죽었다. 백성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한 자 베도 오히려 꿰맬 수 있고 한 말 조도 오히려 찧을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이 서로 담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신찬이 주하여 이르기를 『한 자 베와 비단은 꿰매어 함께 입을 수 있고 한 말 쌀과 조는 찧어 함께 먹을 수 있는데, 하물며 천하의 넓음으로 서로 담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12반드시 대하문 아래에서 말을 돌리고 있을 것이오
杜預之荊州,頓七里橋,朝士悉祖。預少賤,好豪俠,不爲物所許。楊濟既名氏,雄俊不堪,不坐而去。須臾,和長輿來,問:「楊右衞何在?」客曰:「向來,不坐而去。」長輿曰:「必大夏門下盤馬。」往大夏門,果大閲騎。長輿抱内車,共載歸,坐如初。
두예가 형주로 갈 때 칠리교에 머무니 조정의 선비가 다 배웅하였다.
두예는 젊어서 천하고 호협함을 좋아하여 사람들에게 허락받지 못하였다. 양제는 이미 이름난 겨레라 뛰어나고 씩씩하여 견디지 못하고 앉지 않고 가 버렸다.
잠깐 뒤에 화장여가 와서 물었다. "양우위는 어디 있소."
손이 말하였다. "아까 왔다가 앉지 않고 갔습니다."
장여가 말하였다. "반드시 대하문 아래에서 말을 돌리고 있을 것이오."
대하문에 가니 과연 크게 말달리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장여가 안아서 수레에 넣고 함께 타고 돌아오니 처음처럼 앉았다.
협주 2
王隱《晉書》曰:「預字元凱,京兆杜陵人,漢御史大夫延年十一世孫。祖畿,魏太保。父恕,幽州、荊州刺史。預智謀淵博,明於治亂,常稱立德者非所企及,立功、立言所庶幾也。累遷河南尹,爲鎭南將軍,都督荊州諸軍事,鎭襄陽。以平呉勳封當陽侯。預無伎藝之能,身不跨馬,射不穿札,而毎有大事,輙在將帥之限。贈征南將軍,儀同三司。」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두예는 자가 원개요 경조 두릉 사람이니 한나라 어사대부 두연년의 십일 대 손이다. 할아버지 두기는 위나라 태보요 아버지 두서는 유주와 형주의 자사다. 두예는 슬기와 꾀가 깊고 넓으며 다스림과 어지러움에 밝았는데, 늘 일컫기를 덕을 세우는 것은 바랄 바가 아니요 공을 세우고 말을 세우는 것이 거의 바랄 만하다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하남윤에 이르렀고 진남장군이 되어 형주의 여러 군사를 도독하며 양양을 지켰다.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후에 봉해졌다. 두예는 재주와 재간의 능함이 없어 몸이 말을 타지 못하고 활을 쏘아도 살촉을 뚫지 못하였으나, 큰일이 있을 때마다 문득 장수의 자리에 있었다. 정남장군과 의동삼사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八王故事》曰:「濟字文通,弘農人,楊駿弟也。有才識,累遷太子太保,與駿同誅。」
『팔왕고사』에 이르기를 「양제는 자가 문통이요 홍농 사람이니 양준의 아우다. 재주와 식견이 있어 여러 벼슬을 거쳐 태자태보에 이르렀고 양준과 함께 베였다」 하였다.
13두원개가 이에 다시 평상을 잇대어 손을 앉히는가
杜預拜鎭南將軍,朝士悉至,皆在連榻坐。時亦有裴叔則。羊穉舒後至,曰:「杜元凱乃復連榻坐客!」不坐便去。杜請裴追之,羊去數里住馬,既而倶還杜許。
두예가 진남장군에 임명되어 조정의 선비가 다 이르렀는데 다들 평상을 잇대어 앉았다. 그때 배숙칙도 있었다.
양치서가 뒤에 이르러 말하였다. "두원개가 이에 다시 평상을 잇대어 손을 앉히는가."
앉지 않고 곧 가 버렸다.
두예가 배숙칙에게 뒤쫓게 하니 양치서가 몇 리 가서 말을 세웠고, 이윽고 함께 두예의 처소로 돌아왔다.
협주 2
《語林》曰:「中朝方鎭還,不與元凱共坐。預征呉還,獨榻,不與賓客共也。」
『어림』에 이르기를 「중원의 방백이 돌아와도 두원개와 함께 앉지 않았다. 두예가 오나라를 치고 돌아와 평상을 홀로 하고 손과 함께하지 않았다」 하였다.
《晉諸公贊》曰:「羊琇字穉舒,泰山人。通濟有才榦,與世祖同年相善,謂世祖曰:『後富貴時,見用作領護軍各十年。』世祖即位,累遷左將軍、特進。」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양수는 자가 치서요 태산 사람이다. 통하고 건지며 재간이 있어 세조와 같은 나이로 사이가 좋았는데, 세조에게 이르기를 『뒷날 부귀해지시면 저를 영군과 호군으로 각각 열 해씩 쓰십시오』 하였다. 세조가 자리에 오르자 여러 벼슬을 거쳐 좌장군과 특진에 이르렀다」 하였다.
14중서감과 중서령이 각각 수레를 받은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晉武帝時,荀朂爲中書監,和嶠爲令。故事,監、令由來共車。嶠性雅正,常疾朂諂諛。後公車來,嶠便登,正向前坐,不復容朂。朂方更覓車,然後得去。監、令各給車自此始。
진나라 무제 때 순욱이 중서감이 되고 화교가 중서령이 되었다. 옛 일에 감과 영은 예부터 수레를 함께 탔다.
화교는 성품이 우아하고 발라 늘 순욱의 아첨을 미워하였다. 뒤에 공무 수레가 오자 화교가 곧 올라 바로 앞을 향해 앉아 다시 순욱을 담지 않았다. 순욱이 바야흐로 다시 수레를 찾은 뒤에야 갈 수 있었다.
중서감과 중서령이 각각 수레를 받은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협주 3
虞預《晉書》曰:「朂字公曾,潁川潁陰人,漢司空爽曾孫也。十餘歳能屬文,外祖鍾繇曰:『此兒當及其曾祖。』爲安陽令,民生爲立祠,累遷侍中、中書監。」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순욱은 자가 공증이요 영천 영음 사람이니 한나라 사공 순상의 증손이다. 열 남짓에 글을 지을 수 있으니 외조부 종요가 『이 아이가 마땅히 그 증조부에 미치리라』 하였다. 안양령이 되어 백성이 살아 있는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고,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중서감에 이르렀다」 하였다.
王隱《晉書》曰:「朂性佞媚,譽太子,出齊王,當時私議,損國害民,孫劉之匹也。後世若有良史,當著《佞倖傳》。」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순욱은 성품이 아첨하고 알랑거려 태자를 기리고 제왕을 내보내니, 그때 사사로운 의논에 나라를 덜고 백성을 해쳐 손씨와 유씨의 짝이라 하였다. 뒷세상에 만일 좋은 사관이 있다면 마땅히 「영행전」을 지어야 하리라」 하였다.
曹嘉之《晉紀》曰:「中書監、令常同車入朝。至和嶠爲令,而荀朂爲監,嶠意強抗,專車而坐,乃使監、令異車,自此始也。」
조가지의 『진기』에 이르기를 「중서감과 중서령은 늘 수레를 함께 타고 조회에 들었다. 화교가 영이 되고 순욱이 감이 됨에 이르러 화교의 뜻이 굳세게 맞서 수레를 오로지하고 앉으니, 이에 감과 영이 수레를 달리하게 되었으므로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였다.
15그때 논이 이에 산공보다 낫다 하였다
山公大兒著短帢,車中倚。武帝欲見之,山公不敢辭,問兒,兒不肯行。時論乃云勝山公。
산공의 큰아들이 짧은 두건을 쓰고 수레 안에 기대어 있었다.
무제가 그를 보려 하니 산공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물었는데, 아들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논이 이에 산공보다 낫다 하였다.
협주 1
《晉諸公贊》曰:「山該字伯倫,司徒濤長子也。雄有器識,仕至左衞將軍。」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산해는 자가 백륜이요 사도 산도의 맏아들이다. 씩씩하게 그릇과 식견이 있어 벼슬이 좌위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16싸움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은 것만도 이미 다행입니다
向雄爲河内主簿,有公事不及雄,而太守劉淮橫怒,遂與杖遣之。雄後爲黃門郎,劉爲侍中,初不交言。武帝聞之,敕雄復君臣之好,雄不得已,詣劉,再拜曰:「向受詔而來,而君臣之義絶,何如?」於是即去。武帝聞尚不和,乃怒問雄曰:「我令卿復君臣之好,何以猶絶?」雄曰:「古之君子,進人以禮,退人以禮;今之君子,進人若將加諸厀,退人若將墜諸淵。臣於劉河内,不爲戎首,亦已幸甚,安復爲君臣之好?」武帝從之。
상웅이 하내주부가 되었을 때 공적인 일이 상웅에게 미치지 않았는데도 태수 유회가 함부로 성내어 마침내 매를 치고 보냈다.
상웅이 뒤에 황문랑이 되고 유회는 시중이 되었는데 처음부터 말을 나누지 않았다.
무제가 이를 듣고 상웅에게 임금과 신하의 좋음을 되찾으라 명하니, 상웅이 마지못하여 유회를 찾아가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아까 조칙을 받고 왔으나 임금과 신하의 옳음은 끊어졌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이에 곧 떠났다.
무제가 오히려 화합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이에 성내어 상웅에게 물었다. "내가 경에게 임금과 신하의 좋음을 되찾게 하였는데 어찌 아직도 끊는가."
상웅이 말하였다. "옛날의 군자는 사람을 예로 나아가게 하고 예로 물러나게 하였는데, 이제의 군자는 사람을 나아가게 할 때는 무릎에 올려놓을 듯이 하고 물러나게 할 때는 못에 떨어뜨릴 듯이 합니다. 신이 유하내에 대하여 싸움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은 것만도 이미 몹시 다행인데 어찌 다시 임금과 신하의 좋음을 하겠습니까."
무제가 이를 좇았다.
협주 2
《漢晉春秋》曰:「雄字茂伯,河内人。」《世語》曰:「雄有節概,仕至黃門郎、護軍將軍。」按:王隱、孫盛不與故君相聞議曰:「昔在晉初,河内温縣領校向雄,送御犧牛,不先呈郡,輙隨比送洛。値天大熱,郡送牛多暍死。臺法甚重,太守呉奮召雄與杖,雄不受杖,曰:『郡牛者亦死也;呈牛者亦死也。』奮大怒,下雄獄,將大治之。會司隸辟雄都官從事,數年,爲黃門侍郎。奮爲侍中,同省,相避不相見。武帝聞之,給雄酒禮,使詣奮解,雄乃奉詔。」此則非劉淮也。《晉諸公贊》曰:「淮字君平,沛國杼秋人。少以淸正稱。累遷河内太守、侍中、尚書僕射、司徒。」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상웅은 자가 무백이요 하내 사람이다」 하였다. 『세어』에 이르기를 「상웅은 절개와 기개가 있어 벼슬이 황문랑과 호군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살피건대 왕은과 손성이 옛 임금과 서로 소식하지 않음을 의논하여 이르기를 「옛날 진나라 처음에 하내 온현의 영교 상웅이 임금께 바칠 희생 소를 보내며 먼저 고을에 보이지 않고 문득 견주어 낙양으로 보냈다. 마침 날이 몹시 더워 고을에서 보낸 소가 흔히 더위 먹어 죽었다. 대의 법이 몹시 무거우므로 태수 오분이 상웅을 불러 매를 치려 하니, 상웅이 매를 받지 않고 『고을의 소도 죽고 바친 소도 죽습니다』 하였다. 오분이 크게 성내어 상웅을 옥에 내려 크게 다스리려 하였다. 마침 사예가 상웅을 도관종사로 부르니 몇 해 만에 황문시랑이 되었다. 오분이 시중이 되어 같은 관아에 있었는데 서로 피하고 보지 않았다. 무제가 이를 듣고 상웅에게 술과 예를 주어 오분을 찾아가 풀게 하니 상웅이 이에 조칙을 받들었다」 하였다. 이는 곧 유회가 아니다.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유회는 자가 군평이요 패국 저추 사람이다. 젊어서 맑고 바름으로 일컬어졌다. 여러 벼슬을 거쳐 하내태수와 시중과 상서복야와 사도에 이르렀다」 하였다.
《禮記》曰:「穆公問於子思曰:『爲舊君反服,古邪?』子思曰:『古之君子,進人以禮,退人以禮,故有舊君反服之禮;今之君子,進人若將加諸淵,退人若將墜諸淵。無爲戎首,不亦善乎,又何反服之有?』」鄭玄曰:「爲兵主求攻伐,故曰戎首也。」
『예기』에 이르기를 「목공이 자사에게 묻기를 『옛 임금을 위해 도로 상복을 입는 것이 옛 법입니까』 하니, 자사가 『옛날의 군자는 사람을 예로 나아가게 하고 예로 물러나게 하였으므로 옛 임금을 위해 도로 상복 입는 예가 있었으나, 이제의 군자는 사람을 나아가게 할 때는 못에 밀어 넣을 듯이 하고 물러나게 할 때는 못에 떨어뜨릴 듯이 합니다. 싸움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는 것만도 또한 좋지 않습니까. 또 무슨 도로 상복 입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였다. 정현이 이르기를 「군사의 주인이 되어 치기를 구하므로 융수라 한다」 하였다.
17먼저 임금의 법다운 옷을 광대의 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齊王冏爲大司馬輔政,嵇紹爲侍中,詣冏咨事。冏設宰會,召葛旟、董艾等共論時宜。旟等白冏:「嵇侍中善於絲竹,公可令操之。」遂送樂器。紹推卻不受。冏曰:「今日共爲歡,卿何卻邪?」紹曰:「公協輔皇室,令作事可法。紹雖官卑,職備常伯。操絲比竹,蓋樂官之事,不可以先王法服,爲伶人之業。今逼髙命,不敢苟辭,當釋冠冕,襲私服,此紹之心也。」旟等不自得而退。
제왕 사마경이 대사마가 되어 정사를 도울 때, 혜소가 시중이 되어 사마경을 찾아가 일을 여쭈었다.
사마경이 잔치를 베풀고 갈여와 동애 들을 불러 함께 그때의 마땅함을 논하였다.
갈여 들이 사마경에게 아뢰었다. "혜시중이 실과 대의 악기를 잘하니 공께서 이를 다루게 하십시오."
마침내 악기를 보내니 혜소가 밀어내고 받지 않았다.
사마경이 말하였다. "오늘 함께 기뻐하는데 경은 어찌 물리치오."
혜소가 말하였다. "공께서 황실을 아울러 도우시니 하시는 일이 법이 될 만해야 합니다. 제가 비록 벼슬이 낮으나 자리는 상백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실을 다루고 대를 견주는 것은 대개 악관의 일이니, 먼저 임금의 법다운 옷을 광대의 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제 높은 명에 다그쳐져 감히 구차히 사양하지 못하니, 마땅히 관과 면류관을 벗고 사사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이 제 마음입니다."
갈여 들이 스스로 흡족하지 못하여 물러났다.
협주 3
虞預《晉書》曰:「冏字景治,齊王攸子也。少聰惠,及長,謙約好施。趙王倫篡位,冏起義兵誅倫,拜大司馬,加九錫,政皆決之。而恣用群小,不復朝覲,遂爲長沙王所誅。」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사마경은 자가 경치요 제왕 사마유의 아들이다. 젊어서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겸손하고 검소하며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조왕 사마륜이 자리를 빼앗자 사마경이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사마륜을 베고 대사마에 임명되어 아홉 가지를 더 받으니 정사가 다 그에게서 결단되었다. 그러나 뭇 소인을 멋대로 쓰고 다시 조회하지 않다가 마침내 장사왕에게 베였다」 하였다.
《齊王官屬名》曰:「旟字虚旟,齊王從事中郎。」《晉陽秋》曰:「齊王起義,轉長史。既克趙王倫,與董艾等專執威權。冏敗,見誅。」
『제왕관속명』에 이르기를 「갈여는 자가 허여요 제왕의 종사중랑이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제왕이 의를 일으키자 장사로 옮겼다. 조왕 사마륜을 이기고 나서 동애 들과 위엄과 권세를 오로지 잡았다. 사마경이 무너지자 베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八王故事》曰:「艾字叔智,弘農人。祖遇,魏侍中。父緩,祕書監。艾少好功名,不修士檢。齊王起義,艾爲新汲令,赴軍,用艾領右將軍。王敗,見誅。」
『팔왕고사』에 이르기를 「동애는 자가 숙지요 홍농 사람이다. 할아버지 동우는 위나라 시중이요 아버지 동완은 비서감이다. 동애는 젊어서 공과 이름을 좋아하고 선비의 검속을 닦지 않았다. 제왕이 의를 일으키자 동애가 신급령이 되어 군사에 나아가니, 동애를 우장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제왕이 무너지자 베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18귀신의 자식이 감히 이러는가
盧志於衆坐,問陸士衡:「陸遜、陸抗,是君何物?」答曰:「如卿於盧毓、盧珽。」士龍失色。既出戸,謂兄曰:「何至如此,彼容不相知也?」士衡正色曰:「我父祖名播海内,寧有不知?鬼子敢爾!」議者疑二陸優劣,謝公以此定之。
노지가 뭇 자리에서 육사형에게 물었다. "육손과 육항은 그대에게 무엇이 되오."
대답하였다. "그대가 노육과 노정에 대한 것과 같소."
사룡이 낯빛을 잃었다. 문을 나선 뒤 형에게 말하였다. "어찌 이러기까지 하십니까. 저이가 아마 서로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형이 낯빛을 바로 하고 말하였다.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이 온 세상에 퍼졌는데 어찌 알지 못함이 있겠느냐. 귀신의 자식이 감히 이러는가."
따지는 이들이 두 육씨의 낫고 못함을 의심하였는데, 사공이 이로써 이를 정하였다.
협주 5
《世語》曰:「志字子通,范陽人,尚書珽少子。少知名。起家鄴令,歴成都王長史、衞尉卿、尚書郎。」
『세어』에 이르기를 「노지는 자가 자통이요 범양 사람이니 상서 노정의 작은아들이다. 젊어서 이름이 알려졌다. 업령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성도왕장사와 위위경과 상서랑을 지냈다」 하였다.
抗,已見。《呉書》曰:「遜字伯言,呉郡人,世爲冠族。初領海昌令,號神君,累遷丞相。」
육항은 이미 보인다. 『오서』에 이르기를 「육손은 자가 백언이요 오군 사람이니 대대로 으뜸가는 겨레였다. 처음에 해창령을 거느리며 신군이라 불렸고 여러 벼슬을 거쳐 승상에 이르렀다」 하였다.
《魏志》曰:「毓字子家,涿人。父植,有名於世。累遷吏部郎、尚書。選舉,先性行而後言才,進司空。珽,咸熙中爲泰山太守,字子笏,位至尚書。」
『위지』에 이르기를 「노육은 자가 자가요 탁 사람이다. 아버지 노식은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랑과 상서에 이르렀다. 사람을 뽑을 때 성품과 행실을 앞세우고 말재주를 뒤로 하였으며 사공으로 나아갔다. 노정은 함희 연간에 태산태수가 되었고 자는 자홀이요 자리가 상서에 이르렀다」 하였다.
雲,別見。
육운이니 따로 보인다.
《孔氏志怪》曰:「盧充者,范陽人。家西三十里有崔少府墓。充先冬至一日,出家西獵,見一獐,舉弓而射,即中之。獐倒而復起,充逐之,不覺遠。忽見一里門如府舍,門中一鈴下有唱家前。充問:『此何府也?』答曰:『少府府也。』充曰:『我衣惡,那得見貴人?』即有人提襥新衣迎之。充著盡可體,便進見少府,展姓名。酒炙數行,崔曰:『近得尊府君書,爲君索小女婚,故相延耳。』即舉書示充。充,父亡時雖小,然已見父手跡,便歔欷無辭。崔即敕内,令女郎莊嚴,使充就東廊。充至,婦已下車,立席頭,共拜。爲三日畢,還見崔。崔曰:『君可歸矣。女有娠相,生男,當以相還;生女,當留自養。』敕外嚴車送客。崔送至門,執手零涕,離別之感,無異生人。復致衣一襲,被褥一副。充便上車,去如電逝,須臾至家。家人相見,悲喜推問,知崔是亡人,而入其墓,追以懊惋。居四年,三月三日臨水戲,忽見一犢車,乍浮乍沒。既上岸,充往開車後戸,見崔氏女與三歳男兒共載。充見之忻然,欲捉其手。女舉手指後車曰:『府君見人。』即見少府,充往問訊。女抱兒還充,又與金盌,別,并贈詩曰:『煌煌靈芝質,光麗何猗猗!華豔當時顯,嘉異表神奇。含英未及秀,中夏罹霜萎。榮曜長幽滅,世路永無施。不悟陰陽運,哲人忽來儀。會淺離別速,皆由靈與祇。何以贈余親,金盌可頤兒。愛恩從此別,斷絶傷肝脾。』充取兒盌及詩,忽不見二車處。將兒還,四坐謂是鬼魅,僉遙唾之,形如故。問兒:『誰是汝父?』兒逕就充懷。衆初怪惡,傳省其詩,慨然歎死生之玄通也。充詣市賣盌,髙舉其價,不欲速售,冀有識者。欻有一老婢,問充得盌之由。還報其大家,即女姨也。遣視之,果是。謂充曰:『我姨姊,崔少府女,未嫁而亡,家親痛之,贈一金盌,箸棺中。今視卿盌甚似,得盌本末,可得聞不?』充以事對。即詣充家迎兒。兒有崔氏狀,又似充貌。姨曰:『我舅甥三月末閒産。父曰春暖,温也,願休強也。即字温休。温休蓋幽婚也。其兆先彰矣。兒遂成爲令器。歴數郡二千石,皆著績。其後生植,爲漢尚書。植子毓,爲魏司空。冠蓋相承至今也。」
『공씨지괴』에 이르기를 「노충이라는 이는 범양 사람이다. 집 서쪽 삼십 리에 최소부의 무덤이 있었다. 노충이 동짓날 하루 앞서 집 서쪽으로 사냥 나가 노루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들어 쏘아 곧 맞혔다. 노루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매 노충이 이를 쫓다가 멀리 온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홀연 마을 문이 관아 같은 것을 보았는데 문 안에 종 하나가 있어 『집 앞으로 오시오』 하고 불렀다. 노충이 『여기가 무슨 관부요』 물으니 『소부의 부입니다』 하였다. 노충이 『내 옷이 나쁜데 어찌 귀한 이를 뵙겠소』 하니, 곧 어떤 이가 보따리에 새 옷을 들고 그를 맞았다. 노충이 입으니 다 몸에 맞았다. 곧 나아가 소부를 뵙고 성과 이름을 폈다. 술과 고기가 몇 순배 돌자 최씨가 『요사이 그대 아버님의 글을 받았는데, 그대를 위해 내 작은딸과 혼인을 청하셨으므로 짐짓 그대를 맞아들인 것이오』 하고, 곧 글을 들어 노충에게 보였다. 노충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비록 어렸으나 이미 아버지의 손자취를 보았으므로 곧 흐느껴 말이 없었다. 최씨가 곧 안에 명하여 딸을 꾸미게 하고 노충을 동쪽 행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노충이 이르니 각시가 이미 수레에서 내려 자리 머리에 서 있어 함께 절하였다. 사흘을 지내고 마치자 돌아가 최씨를 뵈었다. 최씨가 『그대는 돌아가도 좋소. 딸에게 아이 밴 상이 있으니 사내를 낳으면 마땅히 돌려보내겠고 딸을 낳으면 마땅히 남겨 스스로 기르겠소』 하고, 밖에 명하여 수레를 갖추어 손을 보내게 하였다. 최씨가 문까지 배웅하며 손을 잡고 눈물을 떨구니 헤어지는 느낌이 산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다시 옷 한 벌과 이불과 요 한 벌을 주었다. 노충이 곧 수레에 오르니 가기를 번개처럼 하여 잠깐 사이에 집에 이르렀다. 집안 사람이 서로 보고 슬프고 기뻐 밀어 물으니 최씨가 죽은 이요 그 무덤에 들어갔던 줄 알고 뒤늦게 애달파하였다. 네 해를 지내고 삼월 삼일 물가에서 노는데, 홀연 송아지 수레 하나가 떴다 잠겼다 하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언덕에 오르매 노충이 가서 수레 뒷문을 여니 최씨의 딸이 세 살 사내아이와 함께 타고 있었다. 노충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그 손을 잡으려 하니, 딸이 손을 들어 뒷수레를 가리키며 『부군께서 사람을 보십니다』 하였다. 곧 소부가 보이므로 노충이 가서 문안하였다. 딸이 아이를 안아 노충에게 돌려주고 또 금 사발을 주며 헤어질 때 아울러 시를 주었다. 『빛나는 영지의 바탕이 빛나고 고움이 어찌 그리 무성한가. 꽃다움이 그때에 드러나 아름답고 남달라 신기함을 드러냈네. 꽃부리를 머금고 아직 빼어나기 전에 한여름에 서리를 만나 시들었네. 빛남이 길이 그윽이 스러지고 세상길에 길이 베풀 데 없네. 음과 양의 운행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밝은 이가 홀연 오셨네. 만남이 얕고 헤어짐이 빨랐으니 다 신령과 땅신 때문이네. 무엇으로 내 사랑에게 주랴. 금 사발로 아이를 기를 만하네. 사랑과 은혜가 이로부터 헤어지니 끊어져 간과 지라가 상하네.』 노충이 아이와 사발과 시를 받으니 홀연 두 수레가 있던 데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니 온 자리가 귀신과 도깨비라 하여 다들 멀리서 침을 뱉었으나 꼴이 예전과 같았다. 아이에게 『누가 네 아비냐』 물으니 아이가 곧장 노충의 품으로 갔다. 뭇사람이 처음에는 괴이하고 미워하였으나 그 시를 돌려 보고는 북받쳐 죽음과 삶이 아득히 통함을 탄식하였다. 노충이 저자에 가서 사발을 파는데 그 값을 높이 불러 빨리 팔리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알아보는 이가 있기를 바란 것이다. 홀연 늙은 계집종 하나가 노충에게 사발 얻은 내력을 물었다. 돌아가 그 주인에게 알리니 곧 딸의 이모였다. 사람을 보내 보게 하니 과연 그러하였다. 노충에게 이르기를 『우리 이모의 딸인 최소부의 딸이 시집가기 전에 죽으매 집안 어버이가 이를 아파하여 금 사발 하나를 주어 널 속에 넣었소. 이제 그대의 사발을 보니 몹시 비슷하니, 사발을 얻은 처음과 끝을 들을 수 있겠소』 하였다. 노충이 일로 대답하였다. 곧 노충의 집에 나아가 아이를 맞았다. 아이에게 최씨의 모습이 있고 또 노충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이모가 『내 외조카가 삼월 그믐 사이에 낳았소. 아버지가 봄이 따뜻하니 따뜻함이라, 굳세고 튼튼하기를 바란다 하여 곧 온휴라 자를 지었소. 온휴는 대개 그윽한 혼인이니 그 조짐이 먼저 드러난 것이오』 하였다. 아이가 마침내 자라 좋은 그릇이 되었다. 여러 고을 이천석을 지내며 다 공적이 드러났다. 그 뒤에 노식을 낳으니 한나라 상서가 되었고 노식의 아들 노육은 위나라 사공이 되었다. 벼슬한 이가 서로 이어 오늘에 이른다」 하였다.
19양침이 화살을 좌우로 쏘아 심부름꾼이 나아가지 못하다
羊忱性甚貞烈。趙王倫爲相國,忱爲太傅長史,乃版以參相國軍事。使者卒至,忱深懼豫禍,不暇被馬,於是帖騎而避。使者追之,忱善射,矢左右發,使者不敢進,遂得免。
양침은 성품이 몹시 곧고 매서웠다.
조왕 사마륜이 상국이 되었을 때 양침이 태부장사였는데, 이에 글판으로 상국의 군사 일에 참여하게 하였다.
심부름꾼이 갑자기 이르니 양침이 화에 끼일까 깊이 두려워, 말에 안장 얹을 겨를도 없이 이에 맨말을 타고 피하였다.
심부름꾼이 뒤쫓으니 양침이 활을 잘 쏘아 화살을 좌우로 쏘매 심부름꾼이 감히 나아가지 못하여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협주 1
《文字志》曰:「忱字長和,一名陶,泰山平陽人。世爲冠族。父繇,車騎掾。忱歴太傅長史、揚州刺史,遷侍中。永嘉五年,遭亂被害,年五十餘。」
『문자지』에 이르기를 「양침은 자가 장화요 다른 이름은 도니 태산 평양 사람이다. 대대로 으뜸가는 겨레였다. 아버지 양요는 거기연이다. 양침은 태부장사와 양주자사를 지내고 시중으로 옮겼다. 영가 오 년에 난을 만나 해를 입으니 나이 쉰 남짓이었다」 하였다.
20그대는 그대의 법을 쓰고 나는 나의 법을 쓴다
王太尉不與庾子嵩交,庾卿之不置。王曰:「君不得爲爾。」庾曰:「卿自君我,我自卿卿。我自用我法,卿自用卿法。」
왕태위가 유자숭과 사귀지 않는데 유자숭이 그를 「경」이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태위가 말하였다. "그대는 그럴 수 없소."
유자숭이 말하였다. "그대는 절로 나를 그대라 하고 나는 절로 그대를 경이라 한다. 나는 절로 내 법을 쓰고 그대는 절로 그대의 법을 쓴다."
협주 1
王夷甫、庾敳。
왕이보와 유애다.
21나무를 베면 사가 옮겨 갈 뿐이오
阮宣子伐社樹,有人止之。宣子曰:「社而爲樹,伐樹則社亡;樹而爲社,伐樹則社移矣。」
완선자가 사당의 나무를 베는데 어떤 이가 이를 말렸다.
선자가 말하였다. "사가 나무가 된 것이라면 나무를 베면 사가 없어지고, 나무가 사가 된 것이라면 나무를 베면 사가 옮겨 갈 뿐이오."
협주 1
阮修,已見。《春秋傳》曰:「共工氏有子曰句龍,爲后土,后土爲社。」《風俗通》曰:「『《孝經》稱:社者,土也。廣博不可備敬,故封土以爲社而祀之報功也。』然則社自祀句龍,非土之祭也。」
완수니 이미 보인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공공씨에게 아들이 있어 구룡이라 하였는데 후토가 되었고 후토가 사가 되었다」 하였다. 『풍속통』에 이르기를 「『효경』에 일컫기를 사란 흙이다. 넓고 넓어 갖추어 공경할 수 없으므로 흙을 봉하여 사를 삼고 제사하여 공에 갚는다 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사는 절로 구룡에게 제사하는 것이지 흙의 제사가 아니다.
22사람이 죽어 귀신이 된다면 옷에도 다시 귀신이 있단 말인가
阮宣子論鬼神有無者,或以人死有鬼。宣子獨以爲無,曰:「今見鬼者云,著生時衣服;若人死有鬼,衣服復有鬼邪?」
완선자가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할 때, 어떤 이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있다 하였다.
선자만 홀로 없다 하며 말하였다. "이제 귀신을 본 이가 말하기를 살았을 때의 옷을 입었다 하오. 만일 사람이 죽어 귀신이 있다면 옷에도 다시 귀신이 있단 말이오."
협주 1
《論衡》曰:「世謂人死爲鬼,非也。人死不爲鬼,無知,不能害人。如審鬼者死人精神,人見之宜從裸袒之形,無爲見衣帶被服也。何則?衣無精神也。由此言之,見衣服象人,則形體亦象人。象人,知非死人之精神也。凡天地之間有鬼,非人死之精神也。」
『논형』에 이르기를 「세상에서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된다 이르나 그렇지 않다.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지 않으니 앎이 없고 사람을 해칠 수 없다. 만일 참으로 귀신이 죽은 사람의 정신이라면 사람이 이를 볼 때 마땅히 벌거벗은 꼴을 따를 것이요 옷과 띠와 입은 것을 볼 리 없다. 어째서인가. 옷에는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 말하면 옷을 사람처럼 본다면 곧 몸도 또한 사람처럼 보는 것이다. 사람처럼 본다면 죽은 사람의 정신이 아님을 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귀신이 있으나 사람이 죽은 정신은 아니다」 하였다.
23내가 늘 무홍보다 낫다 하였는데 이제야 못한 줄 알겠다
元皇帝既登阼,以鄭后之寵,欲舍明帝而立簡文。時議者咸謂:「舍長立少,既於理非倫,且明帝以聰亮英斷,益宜爲儲副。」周王諸公,並苦爭懇切。唯刁玄亮獨欲奉少主,以阿帝旨。元帝便欲施行,慮諸公不奉詔。於是先喚周侯、丞相入,然後欲出詔付刁。周王既入,始至階頭,帝逆遣傳詔,遏使就東廂。周侯未悟,即卻略下階。丞相披撥傳詔,徑至御床前曰:「不審陛下何以見臣。」帝默然無言,乃探懷中黃紙詔裂擲之。由此皇儲始定。周侯方慨然愧嘆曰:「我常自言勝茂弘,今始知不如也!」
원황제가 이미 자리에 오른 뒤, 정후의 사랑 때문에 명제를 버리고 간문제를 세우려 하였다.
그때 따지는 이들이 다 일렀다. "맏이를 버리고 어린 이를 세우는 것은 이미 결에 갈피가 아니요, 또 명제는 총명하고 밝게 끊으니 더욱 마땅히 다음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씨와 왕씨 여러 공이 아울러 괴롭게 다투며 간절하였다. 오직 조현량만이 홀로 어린 임금을 받들어 임금의 뜻에 아첨하려 하였다.
원제가 곧 베풀어 행하려 하면서 여러 공이 조칙을 받들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이에 먼저 주후와 승상을 불러들이고 그 뒤에 조칙을 내어 조현량에게 주려 하였다.
주씨와 왕씨가 들어와 비로소 섬돌 머리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미리 전갈하는 이를 보내 막아 동쪽 곁방으로 가게 하였다. 주후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곧 물러나 섬돌을 내려가려 하였다.
승상이 전갈하는 이를 헤치고 곧장 임금의 평상 앞에 이르러 말하였다. "폐하께서 무엇으로 신을 보시려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 잠잠히 말이 없다가 이에 품속의 누런 종이 조칙을 꺼내 찢어 던졌다. 이로 말미암아 황태자 자리가 비로소 정해졌다.
주후가 바야흐로 북받쳐 부끄러워 탄식하였다. "내가 늘 스스로 무홍보다 낫다 말하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못한 줄 알겠다."
협주 3
《中興書》曰:「鄭太后字阿春,滎陽人。少孤,先嫁田氏,夫亡,依舅呉氏。時中宗敬后虞氏先崩,將納呉氏,后與呉氏女遊後園,有言之於中宗者,納爲夫人,甚寵。生簡文。帝即位,尊之曰文宣太后。」
『중흥서』에 이르기를 「정태후는 자가 아춘이요 형양 사람이다.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먼저 전씨에게 시집갔는데 지아비가 죽어 외숙 오씨에게 의지하였다. 그때 중종의 경후 우씨가 먼저 죽어 오씨를 들이려 하였는데, 태후가 오씨의 딸과 뒤뜰에서 노닐 때 중종에게 이를 말한 이가 있어 들여 부인으로 삼고 몹시 사랑하였다. 간문제를 낳았다. 임금이 자리에 오르자 높여 문선태후라 하였다」 하였다.
刁協
조협이다.
《中興書》曰:「元皇以明帝及琅邪王裒並非敬后所生,而謂裒有大成之度,勝於明帝,因從容問王導曰:『立子以德不以年,今二子孰賢?』導曰:『世子、宣城倶有爽明之德,莫能優劣。如此,故當以年。』於是更封裒爲琅邪王。」而此與《世説》互異,然法盛采摭典故,以何爲實?且從容調諫,理或可安。豈有登階一言,曾無奇説,便爲之改計乎?
『중흥서』에 이르기를 「원황제가 명제와 낭야왕 사마부가 아울러 경후 소생이 아니므로, 사마부에게 크게 이룰 도량이 있어 명제보다 낫다 여겨 조용히 왕도에게 물었다. 『아들을 세움에 덕으로 하고 나이로 하지 않는데 이제 두 아들 가운데 누가 어진가.』 왕도가 『세자와 선성이 함께 시원하고 밝은 덕이 있어 낫고 못함을 가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으니 짐짓 마땅히 나이로 하십시오』 하였다. 이에 다시 사마부를 낭야왕으로 봉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설』과 서로 다르니, 하법성이 옛일을 캐어 모은 것에서 무엇을 실상으로 삼겠는가. 또 조용히 고르게 간하는 것이 결에 혹 편안할 수 있다. 어찌 섬돌에 오르며 한마디 하는데 일찍이 기이한 말이 없이 곧 그를 위해 셈을 고치는 일이 있겠는가.
24작은 언덕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소
王丞相初在江左,欲結援呉人,請婚陸太尉。對曰:「培塿無松柏,薰蕕不同器。玩雖不才,義不爲亂倫之始。」
왕승상이 처음 강좌에 있을 때 오 땅 사람과 도움을 맺으려 하여 육태위에게 혼인을 청하였다.
대답하였다. "작은 언덕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고, 향풀과 누린내 나는 풀은 그릇을 같이하지 않소.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옳음으로 갈피를 어지럽히는 처음이 되지는 않겠소."
협주 2
杜預《左傳注》曰:「培塿,小阜。松柏,大木也。薰,香草。蕕,臭草。」
두예의 『좌전』 주에 이르기를 「배루는 작은 언덕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큰 나무다. 훈은 향풀이요 유는 누린내 나는 풀이다」 하였다.
玩,已見。
육완이니 이미 보인다.
25내가 딸을 보낼 때에도 겨우 이만하였을 뿐이다
諸葛恢大女適太尉庾亮兒,次女適徐州刺史羊忱兒。亮子被蘇峻害,改適江虨。恢兒娶鄧攸女。於時謝尚書求其小女婚。恢乃云:「羊鄧是世婚,江家我顧伊,庾家伊顧我,不能復與謝裒兒婚。」及恢亡,遂婚。於是王右軍往謝家看新婦,猶有恢之遺法,威儀端詳,容服光整。王嘆曰:「我在遣女裁得爾耳!」
제갈회의 큰딸은 태위 유량의 아들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서주자사 양침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유량의 아들이 소준에게 해를 입어 강빈에게 고쳐 시집갔다. 제갈회의 아들은 등유의 딸을 맞았다.
그때 사상서가 그 작은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였다. 제갈회가 이에 말하였다. "양씨와 등씨는 대를 이은 혼인이요, 강씨 집안은 내가 저를 돌보았고 유씨 집안은 저가 나를 돌보았소. 다시 사부의 아들과 혼인할 수는 없소."
제갈회가 죽자 마침내 혼인하였다.
이에 왕우군이 사씨 집안에 가서 새댁을 보니 오히려 제갈회가 남긴 법도가 있어 몸가짐이 단정하고 자세하며 낯과 옷이 빛나고 가지런하였다.
왕우군이 탄식하였다. "내가 딸을 보낼 때에도 겨우 이만하였을 뿐이다."
협주 6
《恢別傳》曰:「恢字道明,琅邪陽都人。祖誕,司空。父靚,亦知名。恢少有令問,稱爲明賢。避難江左,中宗召補主簿,累遷尚書令。」《庾氏譜》曰:「庾亮子會,娶恢女,名文彪。」庾會,別見。
『회별전』에 이르기를 「제갈회는 자가 도명이요 낭야 양도 사람이다. 할아버지 제갈탄은 사공이요 아버지 제갈정도 또한 이름이 알려졌다. 제갈회는 젊어서 좋은 소문이 있어 밝고 어질다 일컬어졌다. 강좌로 난을 피하니 중종이 불러 주부에 채웠고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령에 이르렀다」 하였다.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량의 아들 유회가 제갈회의 딸을 맞았으니 이름이 문표다」 하였다. 유회는 따로 보인다.
《羊氏譜》曰:「羊楷字道茂。祖繇,車騎掾。父忱,侍中。楷仕至尚書郎。娶諸葛恢次女。」
『양씨보』에 이르기를 「양해는 자가 도무다. 할아버지 양요는 거기연이요 아버지 양침은 시중이다. 양해는 벼슬이 상서랑에 이르렀다. 제갈회의 둘째 딸을 맞았다」 하였다.
虨別見。
강빈은 따로 보인다.
《諸葛氏譜》曰:「恢子衡,字峻文,仕至滎陽太守。娶河南鄧攸女。」
『제갈씨보』에 이르기를 「제갈회의 아들 제갈형은 자가 준문이요 벼슬이 형양태수에 이르렀다. 하남 등유의 딸을 맞았다」 하였다.
《永嘉流人名》曰:「裒字幼儒,陳郡人。父衡,博士。裒歴侍中、吏部尚書、呉國内史。」
『영가유인명』에 이르기를 「사부는 자가 유유요 진군 사람이다. 아버지 사형은 박사다. 사부는 시중과 이부상서와 오국내사를 지냈다」 하였다.
《謝氏譜》曰:「裒子石,娶恢小女,名文熊。」《中興書》曰:「石字石奴,歴尚書令,聚斂無厭,取譏當世。」
『사씨보』에 이르기를 「사부의 아들 사석이 제갈회의 작은딸을 맞았으니 이름이 문웅이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석은 자가 석노요 상서령을 지냈는데 거두어 모으기를 싫어하지 않아 그때 세상에 나무람을 받았다」 하였다.
26이 사람은 곧 아녀자다
周叔治作晉陵太守,周侯、仲智往別。叔治以將別,涕泗不止。仲智恚之曰:「斯人乃婦女,與人別唯啼泣!」便舍去。周侯獨留,與飲酒言話,臨別流涕,撫其背曰:「奴好自愛。」
주숙치가 진릉태수가 되니 주후와 중지가 가서 헤어졌다.
숙치가 헤어지게 되었다 하여 눈물과 콧물을 그치지 않았다.
중지가 성내어 말하였다. "이 사람은 곧 아녀자다. 남과 헤어지는데 오직 울 뿐이로구나."
곧 버리고 갔다.
주후만 홀로 남아 함께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그 등을 어루만지고 말하였다. "아우야, 스스로를 잘 아껴라."
협주 2
鄧粲《晉紀》曰:「周謨字叔治,顗次弟也。仕至中護軍。嵩字仲智,謨兄也。性絞直果俠,毎以才氣陵物。顗被害,王敦使人弔焉。嵩曰:『亡兄,天下有義人,爲天下無義人所殺,復何所弔?』敦甚銜之。猶取爲從事中郎,因事誅嵩。」《晉陽秋》曰:「嵩事佛,臨刑猶誦經。」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주모는 자가 숙치요 주의의 다음 아우다. 벼슬이 중호군에 이르렀다. 주숭은 자가 중지요 주모의 형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고 곧으며 과감하고 호협하여 늘 재주와 기운으로 남을 업신여겼다. 주의가 해를 입자 왕돈이 사람을 보내 조문하였다. 주숭이 『죽은 형은 천하에 옳음이 있는 사람인데 천하에 옳음이 없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조문하겠는가』 하니 왕돈이 몹시 이를 마음에 품었다. 그런데도 데려다 종사중랑으로 삼았다가 일을 빌려 주숭을 베었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주숭이 부처를 섬겨 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경을 외웠다」 하였다.
阿奴,謨小字。
아노는 주모의 아이 적 이름이다.
27그대가 어찌 아첨하는 조협과 정이 있소
周伯仁爲吏部尚書,在省内夜疾危急。時刁玄亮爲尚書令,營救備親好之至。良久小損。明旦,報仲智,仲智狼狽來。始入戸,刁下床對之大泣,説伯仁昨危急之狀。仲智手批之,刁爲辟易於戸側。既前,都不問病,直云:「君在中朝,與和長輿齊名,那與佞人刁協有情?」逕便出。
주백인이 이부상서가 되어 관아 안에서 밤에 병이 위급하였다.
그때 조현량이 상서령이었는데 살려 내려 애쓰기를 가까운 벗의 지극함으로 갖추었다. 한참 뒤에 조금 덜해졌다.
이튿날 아침에 중지에게 알리니 중지가 허둥지둥 왔다. 비로소 문에 들어서니 조현량이 평상에서 내려 그를 마주하고 크게 울며 백인의 어젯밤 위급하던 모습을 말하였다.
중지가 손으로 그를 후려치니 조현량이 문 곁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앞에 나아가서는 도무지 병을 묻지 않고 곧바로 말하였다. "그대가 중원에 있을 때 화장여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어찌 아첨하는 사람 조협과 정이 있소."
곧장 나가 버렸다.
협주 1
虞預《晉書》曰:「刁協字玄亮,勃海饒安人。少好學,雖不研精,而多所博渉。中興制度,皆稟於協。累遷尚書令,中宗信重之。爲王敦所忌,舉兵討之,奔至江南,敗死。」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조협은 자가 현량이요 발해 요안 사람이다.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여 비록 곱게 갈지는 않았으나 널리 걸친 바가 많았다. 중흥의 제도가 다 조협에게서 나왔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령에 이르렀고 중종이 믿고 무겁게 여겼다. 왕돈에게 꺼려져 군사를 일으켜 그를 치니 강남으로 달아나다 져서 죽었다」 하였다.
28저는 곧 여강 사람인데 들은 바가 이와 다릅니다
王含作廬江郡,貪濁狼籍。王敦護其兄,故於衆坐稱:「家兄在郡定佳,廬江人士咸稱之!」時何充爲敦主簿,在坐,正色曰:「充即廬江人,所聞異於此!」敦默然。旁人爲之反側,充晏然,神意自若。
왕함이 여강군을 맡아 탐하고 흐림이 낭자하였다.
왕돈이 그 형을 감싸 짐짓 뭇 자리에서 일컬었다. "우리 형이 고을에 있으면서 참으로 좋으니 여강 인사가 다 그를 일컫는다."
그때 하충이 왕돈의 주부로 자리에 있다가 낯빛을 바로 하고 말하였다. "저는 곧 여강 사람인데 들은 바가 이와 다릅니다."
왕돈이 잠잠하였다. 곁의 사람들이 이 때문에 몸을 뒤척였으나 하충은 편안하여 정신과 뜻이 태연하였다.
협주 1
《中興書》曰:「王敦以震主之威,收羅賢俊,辟充爲主簿。充知敦有異志,逡巡疎外。及敦稱含有惠政,一坐畏敦,撃節而已,充獨抗之。其時衆人爲之失色。由是忤敦,出爲東海王文學。」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돈이 임금을 흔드는 위엄으로 어질고 뛰어난 이를 거두어 모으며 하충을 불러 주부로 삼았다. 하충은 왕돈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머뭇거리며 성기게 밖에 있었다. 왕돈이 왕함에게 은혜로운 정사가 있다 일컬음에 이르러 온 자리가 왕돈을 두려워하여 무릎을 칠 뿐이었는데 하충만이 홀로 맞섰다. 그때 뭇사람이 이 때문에 낯빛을 잃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돈의 뜻을 거슬러 동해왕문학으로 나갔다」 하였다.
29어찌 곧 마룻대와 들보로 스스로를 대접하겠는가
顧孟著嘗以酒勸周伯仁,伯仁不受。顧因移勸柱,而語柱曰:「詎可便作棟梁自遇。」周得之欣然,遂爲衿契。
고맹저가 일찍이 술을 주백인에게 권하였는데 백인이 받지 않았다.
고맹저가 이로 인해 기둥에게 옮겨 권하며 기둥에게 말하였다. "어찌 곧 마룻대와 들보로 스스로를 대접하겠는가."
주백인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옷깃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협주 1
徐廣《晉紀》曰:「顧顯字孟著,呉郡人,驃騎榮兄子。少有重名,泰興中爲騎郎。蚤卒,時爲悼惜之。」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고현은 자가 맹저요 오군 사람이니 표기장군 고영의 조카다. 젊어서 무거운 이름이 있었고 태흥 연간에 기랑이 되었다. 일찍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고 아까워하였다」 하였다.
30이제 비록 임금은 한가지나 어찌 거룩한 다스림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明帝在西堂,會諸公飲酒,未大醉,帝問:「今名臣共集,何如堯舜?」時周伯仁爲僕射,因厲聲曰:「今雖同人主,復那得等於聖治!」帝大怒,還内,作手詔滿一黃紙,遂付廷尉令收,因欲殺之。後數日,詔出周,群臣往省之。周曰:「近知當不死,罪不足至此。」
명제가 서당에서 여러 공을 모아 술을 마시는데, 크게 취하기 전에 임금이 물었다. "이제 이름난 신하가 함께 모였으니 요임금과 순임금 때에 견주어 어떠하오."
그때 주백인이 복야였는데 이로 인해 매서운 소리로 말하였다. "이제 비록 임금은 한가지나 어찌 다시 거룩한 다스림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크게 성내어 안으로 돌아가 손수 조칙을 누런 종이 하나 가득 써서 마침내 정위에게 주어 잡아들이게 하고, 이로 인해 죽이려 하였다.
며칠 뒤에 조칙으로 주백인을 내보내니 뭇 신하가 가서 살폈다.
주백인이 말하였다. "요사이 죽지 않을 줄 알았소. 죄가 이에 이르기에는 넉넉하지 않소."
협주 1
按,明帝未即位,顗已爲王敦所殺,此説非也。
살피건대 명제가 아직 자리에 오르기 전에 주의가 이미 왕돈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 설은 그르다.
31처중은 사납고 뻣뻣하며 굳세고 어그러진 이인데 왕평자가 어디 있는가
王大將軍當下,時咸謂無縁爾。伯仁曰:「今主非堯舜,何能無過?且人臣安得稱兵以向朝廷?處仲狼抗剛愎,王平子何在?」
왕대장군이 마땅히 내려오려 할 때 그때 사람들이 다 그럴 까닭이 없다 하였다.
백인이 말하였다. "이제 임금이 요임금과 순임금이 아닌데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소. 또 신하 된 이가 어찌 군사를 일컬어 조정을 향할 수 있겠소. 처중은 사납고 뻣뻣하며 굳세고 어그러진 이인데 왕평자가 어디 있는가."
협주 1
《顗別傳》曰:「王敦討劉隗,時温太眞爲東宮庶子,在承華門外,與顗相見,曰:『大將軍此舉有在,義無有濫。』顗曰:『君年少,希更事,未有人臣若此而不作亂,共相推戴數年而爲此者乎?處仲狼抗而強忌,平子何在?』」《晉陽秋》曰:「王澄爲荊州,群賊並起,乃奔豫章。而恃其宿名,猶陵侮敦,敦使勇士路戎等搤而殺之。」《裴子》曰:「平子從荊州下,大將軍因欲殺之。而平子左右有二十人,甚健,皆持鐵楯馬鞭,平子恆持玉枕。大將軍乃犒荊州文武,二十人積飲食,皆不能動,乃借平子玉枕,便持下床。平子手引大將軍帶絶,與力士鬥甚苦,乃得上屋上,久許而死。」
『의별전』에 이르기를 「왕돈이 유외를 칠 때 온태진이 동궁서자로 승화문 밖에 있다가 주의와 서로 보고 말하기를 『대장군의 이 거사에 까닭이 있으니 옳음에 넘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주의가 『그대는 나이 어려 일을 겪음이 드무오. 신하 된 이로 이와 같으면서 난을 일으키지 않고 함께 서로 여러 해를 받들어 이고서 이러는 이가 있은 적이 없소. 처중은 사납고 뻣뻣하며 굳세고 시새우는 이인데 평자가 어디 있소』 하였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징이 형주가 되었을 때 뭇 도적이 아울러 일어나매 이에 예장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제 묵은 이름을 믿고 오히려 왕돈을 업신여기니 왕돈이 날랜 군사 노융 들을 시켜 목 졸라 죽였다」 하였다. 『배자』에 이르기를 「평자가 형주에서 내려오니 대장군이 이로 인해 죽이려 하였다. 그런데 평자의 곁에 스무 사람이 있어 몹시 굳세고 다 쇠방패와 말채찍을 지녔으며 평자는 늘 옥베개를 지녔다. 대장군이 이에 형주의 문무를 먹이니 스무 사람이 마시고 먹기를 쌓아 다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평자의 옥베개를 빌려 곧 지니고 평상에서 내려왔다. 평자가 손으로 대장군의 띠를 당겨 끊고 힘센 이들과 몹시 괴롭게 싸워 이에 지붕 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한참 만에 죽었다」 하였다.
32작은 사람이 군자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王敦既下,住船石頭,欲有廢明帝意。賓客盈坐,敦知帝聰明,欲以不孝廢之。毎言帝不孝之狀,而皆云温太眞所説。温嘗爲東宮率,後爲吾司馬,甚悉之。須臾,温來,敦便奮其威容,問温曰:「皇太子作人何似?」温曰:「小人無以測君子。」敦聲色並厲,欲以威力使從己,乃重問温:「太子何以稱佳?」温曰:「鉤深致遠,蓋非淺識所測。然以禮侍親,可稱爲孝。」
왕돈이 이미 내려와 석두에 배를 대고 명제를 폐할 뜻을 두었다.
손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왕돈은 임금이 총명함을 알고 효도하지 않는다 하여 폐하려 하였다. 임금이 효도하지 않는 모습을 말할 때마다 다 온태진이 말한 바라 하며, 온태진이 일찍이 동궁의 솔이었고 뒤에 내 사마였으니 이를 몹시 잘 안다 하였다.
잠깐 뒤에 온태진이 오니 왕돈이 곧 그 위엄 있는 낯빛을 떨치며 온태진에게 물었다. "황태자는 사람됨이 어떠하오."
온태진이 말하였다. "작은 사람이 군자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왕돈이 소리와 낯빛을 아울러 매섭게 하여 위엄과 힘으로 저를 따르게 하려고, 이에 거듭 온태진에게 물었다. "태자가 무엇으로 좋다 일컬어지오."
온태진이 말하였다. "깊은 데를 끌어내고 먼 데를 이룸은 대개 얕은 식견으로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로 어버이를 모시니 효라 일컬을 만합니다."
협주 1
劉謙之《晉紀》曰:「敦欲廢明帝,言於衆曰:『太子子道有虧,温司馬昔在東宮悉其事。』嶠既正言,敦忿而愧焉。」
유겸지의 『진기』에 이르기를 「왕돈이 명제를 폐하려 하여 뭇사람에게 말하기를 『태자가 아들의 도리에 이지러짐이 있으니, 온사마가 옛날 동궁에 있어 그 일을 다 안다』 하였다. 온교가 이미 바른말을 하니 왕돈이 성내면서도 부끄러워하였다」 하였다.
33왕의 군사가 떨치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공을 저버렸습니다
王大將軍既反,至石頭,周伯仁往見之。謂周曰:「卿何以相負?」對曰:「公戎車犯正,下官忝率六軍,而王師不振,以此負公。」
왕대장군이 이미 배반하여 석두에 이르니 주백인이 가서 보았다.
주백인에게 말하였다. "경은 어찌 나를 저버렸소."
대답하였다. "공께서 병거로 바름을 범하시매 하관이 외람되이 여섯 군사를 거느렸으나 왕의 군사가 떨치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공을 저버렸습니다."
협주 1
《晉陽秋》曰:「王敦既下,六軍敗績。顗長史郝嘏及左右文武勸顗避難,顗曰:『吾備位大臣,朝廷傾撓,豈可草間求活,投身胡虜邪?』乃與朝士詣敦,敦曰:『近日戰有餘力不?』對曰:『恨力不足,豈有餘邪?』」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돈이 이미 내려와 여섯 군사가 무너졌다. 주의의 장사 학하와 곁의 문무가 주의에게 난을 피하기를 권하니, 주의가 『내가 대신의 자리에 갖추어져 조정이 기울어 흔들리는데 어찌 풀숲에서 살기를 구하여 오랑캐에게 몸을 던지겠는가』 하였다. 이에 조정 선비들과 왕돈에게 나아가니 왕돈이 『요사이 싸움에 남은 힘이 있었소』 하매, 대답하기를 『힘이 모자란 것이 한이니 어찌 남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였다.
34동호가 장차 죽간을 잡고 나아갈까 두렵소
蘇峻既至石頭,百僚奔散,唯侍中鍾雅獨在帝側。或謂鍾曰:「見可而進,知難而退,古之道也。君性亮直,必不容於寇讎;何不用隨時之宜,而坐待其弊邪?」鍾曰:「國亂不能匡,君危不能濟,而各遜遁以求免,吾懼董狐將執簡而進矣!」
소준이 이미 석두에 이르러 온갖 벼슬아치가 달아나 흩어지고 오직 시중 종아만이 홀로 임금 곁에 있었다.
어떤 이가 종아에게 말하였다. "할 만함을 보고 나아가며 어려움을 알고 물러남이 옛길이오. 그대는 성품이 밝고 곧아 반드시 원수에게 담기지 못할 터인데, 어찌 때에 따르는 마땅함을 쓰지 않고 앉아서 그 무너짐을 기다리시오."
종아가 말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운데 바로잡지 못하고 임금이 위태로운데 건지지 못하면서, 저마다 물러나 숨어 벗어나기를 구한다면, 나는 동호가 장차 죽간을 잡고 나아갈까 두렵소."
협주 1
王隱《晉書》曰:「峻字子髙,長廣掖人。少有才學,仕郡主簿,舉孝廉。値中原亂,招合流舊三千餘家,結壘本縣,宣示王化,收葬枯骨,遠近感其恩義,咸共宗焉。討王敦有功,封公,遷歴陽太守。峻外營將表曰:『鼓自鳴。』峻自斫鼓曰:『我鄕里時有此,則空城。』有頃,詔書徴峻。峻曰:『臺下云我反,反豈得活邪?我甯山頭望廷尉,不能廷尉望山頭。』乃作亂。」《晉陽秋》曰:「峻率衆二萬,濟自橫江、至於蔣山,王師敗績。」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소준은 자가 자고요 장광 액 사람이다. 젊어서 재주와 배움이 있어 고을 주부로 벼슬하고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중원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 흘러 떠도는 옛 삼천여 집을 불러 모아 제 고을에 진을 얽고 왕의 가르침을 널리 보이며 마른 뼈를 거두어 묻으니, 멀고 가까운 데서 그 은혜와 옳음에 느껴 다들 함께 그를 마루로 삼았다. 왕돈을 침에 공이 있어 공에 봉해지고 역양태수로 옮겼다. 소준의 바깥 진 장수가 표를 올려 『북이 절로 웁니다』 하니, 소준이 스스로 북을 찍으며 『내 시골에 때로 이런 일이 있으면 곧 성이 빈다』 하였다. 얼마 뒤 조서로 소준을 불렀다. 소준이 『대에서 내가 배반한다 하는데, 배반한다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차라리 산꼭대기에서 정위를 바라볼지언정 정위에서 산꼭대기를 바라볼 수는 없다』 하고 이에 난을 일으켰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소준이 무리 이만을 이끌고 횡강에서 건너 장산에 이르니 왕의 군사가 무너졌다」 하였다.
35마룻대가 꺾이고 서까래가 무너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庾公臨去,顧語鍾後事,深以相委。鍾曰:「棟折榱崩,誰之責邪?」庾曰:「今日之事,不容復言,卿當期克復之效耳!」鍾曰:「想足下不愧荀林父耳。」
유공이 떠날 때 종아를 돌아보며 뒷일을 말하고 깊이 맡겼다.
종아가 말하였다. "마룻대가 꺾이고 서까래가 무너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유공이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다시 말할 것이 못 되오. 경은 마땅히 되찾을 보람을 기약할 뿐이오."
종아가 말하였다. "그대가 순림보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협주 1
《春秋傳》曰:「楚莊王圍鄭,晉使荀林父率師救鄭,與楚戰於邲,晉師敗績。桓子歸,請死。晉平公將許之,士貞子諫而止。後林父敗赤狄於曲梁,賞桓子、狄臣千室,亦賞士伯以瓜衍之田,曰:『吾獲狄田,子之功也。微子,吾喪伯氏矣。』」
『춘추전』에 이르기를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에워싸니 진나라가 순림보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정나라를 건지게 하여 초나라와 필에서 싸웠는데 진나라 군사가 무너졌다. 환자가 돌아와 죽기를 청하였다. 진나라 평공이 이를 허락하려 하였는데 사정자가 간하여 그쳤다. 뒤에 순림보가 적적을 곡량에서 깨뜨리자 환자에게 상 주고 오랑캐 신하 천 집을 주었으며, 또 사백에게도 과연의 밭으로 상 주며 이르기를 『내가 오랑캐 밭을 얻은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대가 없었다면 나는 백씨를 잃었을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36매가 비둘기로 바뀌어도 아는 이는 오히려 그 눈을 미워합니다
蘇峻時,孔群在橫塘爲匡術所逼。王丞相保存術,因衆坐戲語,令術勸酒,以釋橫塘之憾。群答曰:「德非孔子,厄同匡人。雖陽和布氣,鷹化爲鳩,至於識者,猶憎其眼。」
소준 때에 공군이 횡당에서 광술에게 다그침을 받았다.
왕승상이 광술을 보전해 주려고, 뭇 자리에서 놀리는 말로 광술에게 술을 권하게 하여 횡당의 한을 풀게 하였다.
공군이 대답하였다. "덕은 공자가 아니나 막힘은 광 사람에게 당한 것과 같소. 비록 볕과 화기가 기운을 펴 매가 비둘기로 바뀌어도, 아는 이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그 눈을 미워하오."
협주 3
《會稽後賢記》曰:「群字敬休,會稽山陰人。祖竺,呉豫章太守。父奕,全椒令。群有智局,仕至御史中丞。」《晉陽秋》曰:「匡術爲阜陵令,逃亡無行。庾亮徴蘇峻,術勸峻誅亮,遂與峻同反。後以宛城降。」
『회계후현기』에 이르기를 「공군은 자가 경휴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할아버지 공축은 오나라 예장태수요 아버지 공혁은 전초령이다. 공군은 슬기로운 국량이 있어 벼슬이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광술이 부릉령이 되었다가 달아나 숨어 행실이 없었다. 유량이 소준을 부르자 광술이 소준에게 유량을 베라 권하고 마침내 소준과 함께 배반하였다. 뒤에 완성으로 항복하였다」 하였다.
《家語》曰:「孔子之宋,匡簡子以甲士圍之。子路怒,奮戟將戰。孔子止之曰:『夫詩書之不講,禮樂之不習,是丘之過也。若述先王之道而爲咎者,非丘罪也。命也夫!歌,予和汝。』子路彈劍,孔子和之。曲三終,匡人解甲罷。」
『가어』에 이르기를 「공자가 송나라로 가는데 광간자가 갑옷 입은 군사로 그를 에워쌌다. 자로가 성내어 창을 떨쳐 싸우려 하였다. 공자가 이를 말리며 『무릇 시와 서를 강하지 않고 예와 악을 익히지 않은 것은 나의 허물이다. 만일 앞선 임금의 도를 서술한 것이 허물이 된다면 나의 죄가 아니다. 운명이로다. 노래하라, 내가 너와 화답하겠다』 하였다. 자로가 칼을 타니 공자가 화답하였다. 곡이 세 번 끝나자 광 사람이 갑옷을 풀고 물러났다」 하였다.
《禮記·月令》曰:「仲春之月,鷹化爲鳩。」鄭玄曰:「鳩,播穀也。」《夏小正》曰:「鷹則爲鳩。鷹也者,其殺之時也;鳩也者,非殺之時也。善變而之仁,故具之。」
『예기·월령』에 이르기를 「중춘의 달에 매가 비둘기로 바뀐다」 하였다. 정현이 이르기를 「구는 씨 뿌리는 새다」 하였다. 『하소정』에 이르기를 「매가 곧 비둘기가 된다. 매란 그 죽이는 때요 비둘기란 죽이지 않는 때다. 잘 바뀌어 어짊으로 가므로 이를 갖춘 것이다」 하였다.
37이제도 오히려 도마 위 썩은 고기라 남이 저미고 자르는 대로 맡길 뿐입니다
蘇子髙事平,王庾諸公欲用孔廷尉爲丹陽。亂離之後,百姓彫弊,孔慨然曰:「昔肅祖臨崩,諸君親升御床,並蒙眷識,共奉遺詔。孔坦疎賤,不在顧命之列。既有艱難,則以微臣爲先,今猶俎上腐肉,任人膾截耳!」於是拂衣而去,諸公亦止。
소자고의 일이 평정되자 왕씨와 유씨 여러 공이 공정위를 단양윤으로 쓰려 하였다. 난리 뒤라 백성이 시들고 헐어 있었다.
공정위가 북받쳐 말하였다. "옛날 숙조께서 돌아가시려 할 때 여러분은 몸소 임금의 평상에 올라 아울러 돌보아 알아주심을 입고 함께 남기신 조칙을 받들었소. 공탄은 성기고 천하여 유명을 받는 줄에 있지 않았소. 이미 어려움이 있으매 곧 작은 신하를 앞세우니, 이제도 오히려 도마 위의 썩은 고기라 남이 저미고 자르는 대로 맡길 뿐이오."
이에 옷을 떨치고 가니 여러 공도 그만두었다.
협주 3
《靈鬼志謠徴》曰:「明帝初,有謠曰:『髙山崩,石自破。』髙山,峻也。碩,峻弟也。後諸公誅峻,碩猶據石頭,潰散而逃,追斬之。」
『영귀지요징』에 이르기를 「명제 처음에 노래가 있어 이르기를 『높은 산이 무너지고 돌이 절로 깨진다』 하였다. 높은 산은 소준이요 석은 소준의 아우다. 뒤에 여러 공이 소준을 베었는데 소석이 오히려 석두를 차지하다가 무너져 흩어져 달아나매 뒤쫓아 베었다」 하였다.
孔坦。
공탄이다.
按,王隱《晉書》:「蘇峻事平,陶侃欲將坦,上用爲豫章太守,坦辭母老不行。臺以爲呉郡。呉郡多名族,而坦年少,乃授呉興内史,不聞尹京。」
살피건대 왕은의 『진서』에 「소준의 일이 평정되자 도간이 공탄을 데려다 위에 아뢰어 예장태수로 쓰려 하니, 공탄이 어머니가 늙었다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대에서 오군으로 삼으려 하였다. 오군에 이름난 겨레가 많은데 공탄은 나이가 어리므로 이에 오흥내사에 임명하였다」 하였고, 서울의 윤이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38겨레 아우가 미쳤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용서하시오
孔車騎與中丞共行,在御道逢匡術,賓從甚盛,因往與車騎共語。中丞初不視,直云:「鷹化爲鳩,衆鳥猶惡其眼。」術大怒,便欲刃之。車騎下車,抱術曰:「族弟發狂,卿爲我宥之!」始得全首領。
공거기가 중승과 함께 다니다가 임금의 길에서 광술을 만났는데 손과 따르는 이가 몹시 성하였다. 이로 인해 가서 거기와 함께 말하였다.
중승이 처음부터 보지 않고 곧바로 말하였다. "매가 비둘기로 바뀌어도 뭇 새는 오히려 그 눈을 미워한다."
광술이 크게 성내어 곧 칼로 치려 하였다.
거기가 수레에서 내려 광술을 안고 말하였다. "겨레 아우가 미쳤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용서하시오."
비로소 목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
협주 1
《孔愉別傳》曰:「愉字敬康,會稽山陰人。初辟中宗參軍,討華軼有功,封餘不亭侯。愉少時嘗得一龜,放於餘不溪中,龜於路左顧者數過。及後鑄印,而龜左顧,更鑄猶如此。印師以聞,愉悟,取而佩焉。累遷尚書左僕射、贈車騎將軍。」中丞,孔群也。
『공유별전』에 이르기를 「공유는 자가 경강이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처음에 중종의 참군으로 불렸고 화일을 치는 데 공이 있어 여불정후에 봉해졌다. 공유가 젊었을 때 일찍이 거북 한 마리를 얻어 여불계에 놓아 주었는데, 거북이 길 왼쪽으로 돌아보기를 여러 번 하였다. 뒤에 인장을 부을 때 거북이 왼쪽으로 돌아보므로 다시 부어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인장 만드는 이가 아뢰니 공유가 깨닫고 가져다 찼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좌복야에 이르렀고 거기장군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중승은 공군이다.
39매중진의 무릎을 내일 다시 굽힐 수 있겠습니까
梅頤嘗有惠於陶公。後爲豫章太守,有事,王丞相遣收之。侃曰:「天子富於春秋,萬機自諸侯出,王公既得録,陶公何爲不可放?」乃遣人於江口奪之。頤見陶公,拜,陶公止之。頤曰:「梅仲眞厀,明日豈可復屈邪?」
매이가 일찍이 도공에게 은혜를 베푼 일이 있었다.
뒤에 예장태수가 되어 일이 있으매 왕승상이 사람을 보내 잡아들이게 하였다.
도간이 말하였다. "천자께서 봄가을이 넉넉하시고 만 가지 일이 제후에게서 나오니, 왕공이 이미 잡아들일 수 있다면 도공이 어찌 놓아 줄 수 없겠는가."
이에 사람을 강 어귀로 보내 그를 빼앗았다.
매이가 도공을 보고 절하니 도공이 이를 말렸다. 매이가 말하였다. "매중진의 무릎을 내일 다시 굽힐 수 있겠습니까."
협주 1
《晉諸公贊》曰:「頤字仲眞,汝南西平人。少好學隱退,而求實進止。」《永嘉流人名》曰:「頤,領軍司馬。頤弟陶,字叔眞。」鄧粲《晉紀》曰:「初,有讚侃於王敦者,乃以從弟廙代侃爲荊州,左遷侃廣州。侃文武距廙而求侃,敦聞大怒。及侃將蒞廣州,過敦,敦陳兵欲害侃。敦咨議參軍梅陶諫敦,乃止,厚禮而遣之。」王隱《晉書》亦同。按,二書所敘,則有惠於陶是梅陶,非頤也。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매이는 자가 중진이요 여남 서평 사람이다.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물러나 숨었으며 실다운 나아감과 멈춤을 구하였다」 하였다. 『영가유인명』에 이르기를 「매이는 영군사마다. 매이의 아우 매도는 자가 숙진이다」 하였다.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처음에 왕돈에게 도간을 기린 이가 있어, 이에 사촌아우 왕이로 도간을 대신하여 형주를 삼고 도간을 광주로 낮추었다. 도간의 문무가 왕이를 막고 도간을 구하니 왕돈이 듣고 크게 성내었다. 도간이 광주에 나아가려 할 때 왕돈에게 들르니 왕돈이 군사를 벌여 도간을 해치려 하였다. 왕돈의 자의참군 매도가 왕돈에게 간하니 이에 그치고 두터운 예로 보냈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도 또한 같다. 살피건대 두 책이 서술한 바로는 곧 도간에게 은혜를 베푼 이는 매도요 매이가 아니다.
40채공이 기뻐하지 않고 갔으나 왕승상도 붙들지 않았다
王丞相作女伎,施設床席。蔡公先在坐,不説而去,王亦不留。
왕승상이 여자 광대를 두고 평상과 자리를 베풀었다.
채공이 먼저 자리에 있다가 기뻐하지 않고 갔는데 왕승상도 붙들지 않았다.
협주 1
《蔡司徒別傳》曰:「謨字道明,濟陽考城人。博學有識,避地江左,歴左光祿、録尚書事、揚州刺史。薨,贈司空。」
『채사도별전』에 이르기를 「채모는 자가 도명이요 제양 고성 사람이다. 널리 배우고 식견이 있었으며 강좌로 피난하여 좌광록과 녹상서사와 양주자사를 지냈다. 죽자 사공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41폐하께서 용처럼 나신 것은 유빙의 공이지 신의 힘이 아닙니다
何次道、庾季堅二人並爲元輔。成帝初崩,於時嗣君未定,何欲立嗣子,庾及朝議以外寇方強,嗣子沖幼,乃立康帝。康帝登阼,會群臣,謂何曰:「朕今所以承大業,爲誰之議?」何答曰:「陛下龍飛,此是庾冰之功,非臣之力。於時用微臣之議,今不覩盛明之世。」帝有慚色。
하차도와 유계견 두 사람이 아울러 으뜸 도움이 되었다.
성제가 처음 돌아가고 그때 이을 임금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하차도는 이을 아들을 세우려 하였고, 유계견과 조정의 의논은 바깥 도적이 바야흐로 굳세고 이을 아들이 어리다 하여 이에 강제를 세웠다.
강제가 자리에 올라 뭇 신하를 모으고 하차도에게 일렀다. "짐이 이제 큰 업을 이어받은 것은 누구의 의논이오."
하차도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용처럼 나신 것은 이것이 유빙의 공이지 신의 힘이 아닙니다. 그때 작은 신하의 의논을 썼더라면 이제 성하고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임금이 부끄러운 낯빛이 있었다.
협주 3
《晉陽秋》曰:「庾冰字季堅,太尉亮之弟也。少有檢操,兄亮常器之,曰:『吾家晏平仲。』累遷車騎將軍、江州刺史。」
『진양추』에 이르기를 「유빙은 자가 계견이요 태위 유량의 아우다. 젊어서 검속과 지조가 있어 형 유량이 늘 그를 그릇으로 여겨 『우리 집안의 안평중이다』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거기장군과 강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中興書》曰:「帝諱岳,字世同,成帝同母弟也。成帝崩,即位,年二十二。」
『중흥서』에 이르기를 「임금은 휘가 악이요 자가 세동이니 성제와 어머니가 같은 아우다. 성제가 돌아가자 자리에 올랐는데 나이 스물둘이었다」 하였다.
《晉陽秋》曰:「初,顯宗臨崩,庾冰議立長君,何充謂宜奉皇子。爭之不得,充不自安,求處外任。及冰出鎭武昌,充自京馳還,言於帝曰:『冰不宜出,昔年陛下龍飛,使晉德再隆者,冰之勳也。臣無與焉。』」
『진양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현종이 돌아가시려 할 때 유빙이 어른 임금을 세우자 의논하였고 하충은 마땅히 황자를 받들어야 한다 하였다. 다투었으나 뜻을 얻지 못하매 하충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바깥 벼슬에 있기를 구하였다. 유빙이 무창에 나가 진을 치자 하충이 서울에서 달려 돌아와 임금께 아뢰기를 『유빙은 나가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 폐하께서 용처럼 나시어 진나라 덕을 다시 높아지게 한 것은 유빙의 공입니다. 신은 함께한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42이 젊은이는 바둑으로만 이기는 것이 아니다
江僕射年少,王丞相呼與共棊。王手嘗不如兩道許,而欲敵道戲,試以觀之。江不即下。王曰:「君何以不行?」江曰:「恐不得爾。」傍有客曰:「此年少戲迺不惡。」王徐舉首曰:「此年少非唯圍棊見勝。」
강복야가 나이 어릴 때 왕승상이 불러 함께 바둑을 두었다.
왕승상의 솜씨는 일찍이 두 점쯤 못하였는데, 맞바둑으로 두어 시험 삼아 그를 보려 하였다. 강복야가 곧바로 두지 않았다.
왕승상이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 두지 않는가."
강복야가 말하였다. "그럴 수 없을 듯합니다."
곁에 있던 손이 말하였다. "이 젊은이는 바둑이 이에 나쁘지 않소."
왕승상이 천천히 머리를 들고 말하였다. "이 젊은이는 바둑으로만 이기는 것이 아니오."
협주 2
徐廣《晉紀》曰:「江虨字思玄,陳留人。博學知名,兼善弈,爲中興之冠。累遷尚書左僕射、護軍將軍。」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강빈은 자가 사현이요 진류 사람이다. 널리 배워 이름이 알려졌고 겸하여 바둑을 잘 두어 중흥의 으뜸이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좌복야와 호군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范汪《棋品》曰:「虨與王恬等,棋第一品,導第五品。」
범왕의 『기품』에 이르기를 「강빈과 왕념 들은 바둑 첫째 품이요 왕도는 다섯째 품이다」 하였다.
43대장부가 죽으려 하는데 아녀자처럼 묻는가
孔君平疾篤,庾司空爲會稽,省之,相問訊甚至,爲之流涕。庾既下床,孔慨然曰:「大丈夫將終,不問安國寧家之術,迺作兒女子相問!」庾聞,回謝之,請其話言。
공군평의 병이 깊어지자 유사공이 회계를 맡고 있으면서 살피러 와, 서로 문안하기를 몹시 지극히 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유사공이 이미 평상에서 내려가자 공군평이 북받쳐 말하였다. "대장부가 죽으려 하는데 나라를 편안히 하고 집을 안정시키는 길은 묻지 않고 이에 아녀자처럼 서로 묻는가."
유사공이 듣고 돌아와 사죄하고 그 말씀을 청하였다.
협주 2
庾冰
유빙이다.
王隱《晉書》曰:「坦方直而有雅望。」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공탄은 모나고 곧으며 우아한 바람이 있었다」 하였다.
44사군께서 이러시니 어찌 싸워서 이기려 하십니까
桓大司馬詣劉尹,臥不起。桓彎彈彈劉枕,丸迸碎床褥間。劉作色而起曰:「使君如馨地,寧可鬬戰求勝?」桓甚有恨容。
환대사마가 유윤을 찾아갔는데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환온이 활을 당겨 유윤의 베개를 쏘니 알이 튀어 평상과 요 사이에 부서졌다.
유윤이 낯빛을 바꾸고 일어나 말하였다. "사군께서 이러시니 어찌 싸워서 이기려 하십니까."
환온이 몹시 한스러운 낯빛이 있었다.
협주 2
《中興書》曰:「温曾爲徐州刺史。」沛國屬徐州,故呼温使君。鬥戰者,以温爲將也。
『중흥서』에 이르기를 「환온이 일찍이 서주자사가 되었다」 하였다. 패국은 서주에 딸리므로 환온을 사군이라 부른 것이다. 싸운다는 것은 환온을 장수로 여긴 것이다.
劉尹,眞長。已見。
유윤은 진장이니 이미 보인다.
45누런 입 젊은이는 오래된 선비를 평하지 마라
後來年少,多有道深公者。深公謂曰:「黃吻年少,勿爲評論宿士。昔嘗與元明二帝、王庾二公周旋。」
뒤에 온 젊은이들이 흔히 심공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심공이 일러 말하였다. "누런 입 젊은이는 오래된 선비를 평하지 마라. 옛날 일찍이 원제와 명제 두 임금, 왕공과 유공 두 공과 어울렸다."
협주 1
《髙逸沙門傳》曰:「晉元明二帝,遊心玄虚,託情道味,以賓友禮待法師。王公、庾公傾心側席,好同臭味也。」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진나라 원제와 명제 두 임금이 아득하고 빈 데에 마음을 노닐고 도의 맛에 정을 부쳐, 손과 벗의 예로 법사를 대접하였다. 왕공과 유공이 마음을 기울이고 자리를 곁으로 하여 좋아함이 냄새와 맛을 같이하였다」 하였다.
46강을 건너온 뒤로 상서랑은 바로 둘째가는 사람을 쓰는데
王中郎年少時,江虨爲僕射領選,欲擬之爲尚書郎。有語王者。王曰:「自過江來,尚書郎正用第二人,何得擬我?」江聞而止。
왕중랑이 나이 어릴 때 강빈이 복야로 사람 뽑는 일을 거느렸는데 그를 상서랑으로 헤아리려 하였다.
왕중랑에게 말한 이가 있었다. 왕중랑이 말하였다. "강을 건너온 뒤로 상서랑은 바로 둘째가는 사람을 쓰는데 어찌 나를 헤아리는가."
강빈이 듣고 그만두었다.
협주 2
坦之,已見。
왕탄지니 이미 보인다.
按,《王彪之別傳》曰:「彪之從伯導謂彪之曰:『選曹舉汝爲尚書郎,幸可作諸王佐邪?』」此知郎官,寒素之品也。
살피건대 『왕표지별전』에 이르기를 「왕표지의 사촌백부 왕도가 왕표지에게 이르기를 『뽑는 조에서 너를 상서랑으로 천거하였는데 다행히 여러 왕씨의 보좌가 될 만한가』 하였다」 하였다. 이로써 낭관이 한미한 이의 품계임을 알겠다.
47이미 감당한다 하고서 어찌 다시 사양하겠느냐
王述轉尚書令,事行便拜。文度曰:「故應讓杜許。」藍田云:「汝謂我堪此不?」文度曰:「何爲不堪!但克讓自是美事,恐不可闕。」藍田慨然曰:「既云堪,何爲復讓?人言汝勝我,定不如我。」
왕술이 상서령으로 옮겨져 일이 진행되매 곧 임명을 받았다.
문도가 말하였다. "짐짓 두씨와 허씨에게 사양하셔야 합니다."
남전이 말하였다. "너는 내가 이를 감당한다고 여기느냐."
문도가 말하였다. "어찌 감당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다만 이겨 사양함이 절로 아름다운 일이니 빠뜨려서는 안 될 듯합니다."
남전이 북받쳐 말하였다. "이미 감당한다 하고서 어찌 다시 사양하겠느냐. 사람들이 네가 나보다 낫다 하나 참으로 나만 못하다."
협주 1
《述別傳》曰:「述常以爲人之處世,當先量己而後動,義無虚讓,是以應辭便當固執。其貞正不踰皆此類。」
『술별전』에 이르기를 「왕술은 늘 사람이 세상에 살면 마땅히 먼저 저를 헤아린 뒤에 움직여야 하며 옳음에 헛된 사양이 없어야 한다 여겼다. 이 때문에 응하여 사양하면 곧 마땅히 굳게 잡아야 한다 하였다. 그 곧고 바름이 넘지 않음이 다 이런 것들이었다」 하였다.
48돌아가신 아버님과 그대는 절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소
孫興公作《庾公誄》,文多託寄之辭。既成,示庾道恩。庾見,慨然送還之,曰:「先君與君,自不至於此。」
손흥공이 「유공뢰」를 지었는데 글에 기대어 부친 말이 많았다.
이루어지자 유도은에게 보였다. 유도은이 보고 북받쳐 돌려보내며 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그대는 절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소."
협주 2
《綽集》載誄文曰:「咨予與公,風流同歸。擬量託情,視公猶師。君子之交,相與無私。虚中納是,吐誠悔非。雖實不敏,敬佩絃韋。永戢話言,口誦心悲。」
『작집』에 뇌문이 실려 있으니 이르기를 「아, 나와 공은 풍류가 돌아감을 같이하였다. 헤아림을 견주고 정을 부쳐 공 보기를 스승같이 하였다. 군자의 사귐은 서로 함께함에 사사로움이 없다. 마음을 비워 옳음을 받아들이고 정성을 토하여 그름을 뉘우쳤다. 비록 실로 재빠르지 못하나 삼가 활시위와 가죽을 찼다. 길이 그 말씀을 간직하니 입으로 외며 마음이 슬프다」 하였다.
道恩,庾羲小字。徐廣《晉紀》曰:「羲,字叔和,太保亮第三子。拔尚率到。位建威將軍、呉國内史。」
도은은 유희의 아이 적 이름이다.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유희는 자가 숙화요 태보 유량의 셋째 아들이다. 빼어나고 높으며 시원하고 이르렀다. 자리는 건위장군과 오국내사였다」 하였다.
49사람들이 회계왕을 어리석다 하더니 참으로 어리석다
王長史求東陽,撫軍不用。後疾篤,臨終,撫軍哀嘆曰:「吾將負仲祖於此,命用之。」長史曰:「人言會稽王痴,眞痴。」
왕장사가 동양을 구하였으나 무군이 쓰지 않았다.
뒤에 병이 깊어 죽으려 할 때 무군이 슬퍼 탄식하였다. "내가 장차 이 일로 중조를 저버리겠구나. 명하여 그를 쓰라."
장사가 말하였다. "사람들이 회계왕을 어리석다 하더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협주 2
簡文
간문제다.
王濛,已見。
왕몽이니 이미 보인다.
50어차피 쓰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劉簡作桓宣武別駕,後爲東曹參軍,頗以剛直見疎。嘗聽記,簡都無言。宣武問:「劉東曹何以不下意?」答曰:「會不能用。」宣武亦無怪色。
유간이 환선무의 별가가 되었다가 뒤에 동조참군이 되었는데, 자못 굳세고 곧아 멀리해졌다.
일찍이 보고를 듣는데 유간이 도무지 말이 없었다.
선무가 물었다. "유동조는 어찌 뜻을 내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어차피 쓰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무도 또한 괴이한 낯빛이 없었다.
협주 1
《劉氏譜》曰:「簡字仲約,南陽人。祖喬,豫州刺史。父珽,潁川太守。簡仕至大司馬參軍。」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간은 자가 중약이요 남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유교는 예주자사요 아버지 유정은 영천태수다. 유간은 벼슬이 대사마참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51작은 사람과는 도무지 인연을 맺을 수 없소
劉眞長、王仲祖共行,日旰未食。有相識小人貽其餐,肴案甚盛,眞長辭焉。仲祖曰:「聊以充虚,何苦辭?」眞長曰:「小人都不可與作縁。」
유진장과 왕중조가 함께 다니는데 날이 저물도록 먹지 못하였다.
아는 작은 사람이 그들에게 밥을 보냈는데 안주와 상이 몹시 성하였다. 진장이 이를 사양하였다.
중조가 말하였다. "애오라지 빈 데를 채울 뿐인데 어찌 괴로이 사양하시오."
진장이 말하였다. "작은 사람과는 도무지 인연을 맺을 수 없소."
협주 1
孔子稱:「唯女子與小人爲難養,近之則不遜,遠之則怨。」劉尹之意,蓋從此言也。
공자께서 일컫기를 「오직 여자와 작은 사람은 기르기 어려우니, 가까이하면 겸손하지 않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하였다. 유윤의 뜻은 대개 이 말을 좇은 것이다.
52왕수령이 주리면 절로 사인조에게 밥을 구하리라
王脩齡嘗在東山甚貧乏。陶胡奴爲烏程令,送一船米遺之,卻不肯取。直答語:「王脩齡若飢,自當就謝仁祖索食,不須陶胡奴米。」
왕수령이 일찍이 동산에 있으면서 몹시 가난하고 모자랐다.
도호노가 오정령이 되어 쌀 한 배를 보내 주었으나 물리치고 받으려 하지 않았다.
곧바로 대답하였다. "왕수령이 만일 주리면 절로 마땅히 사인조에게 나아가 밥을 구할 것이요 도호노의 쌀은 쓰지 않겠다."
협주 2
司州,已見。
사주니 이미 보인다.
胡奴,陶範小字也。《陶侃別傳》曰:「範字道則,侃第十子也。侃諸子中最知名。歴尚書、祕書監。」何法盛以爲第九子。
호노는 도범의 아이 적 이름이다. 『도간별전』에 이르기를 「도범은 자가 도칙이요 도간의 열째 아들이다. 도간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상서와 비서감을 지냈다」 하였다. 하법성은 아홉째 아들이라 하였다.
53내가 들어가면 마땅히 안석의 물가에 댈 뿐이다
阮光祿赴山陵,至都,不往殷劉許,過事便還。諸人相與追之,阮亦知時流必當逐己,乃遄疾而去,至方山不相及。劉尹時爲會稽,乃嘆曰:「我入當泊安石渚下耳。不敢復近思曠傍,伊便能捉杖打人,不易。」
완광록이 능에 가느라 서울에 이르렀으나 은씨와 유씨의 처소에 가지 않고 일을 지나자 곧 돌아갔다.
여러 사람이 서로 그를 쫓으니, 완광록도 그때 흐름을 따르는 이들이 반드시 저를 쫓으리라 알고 이에 빨리 가 버려 방산에 이르도록 미치지 못하였다.
유윤이 그때 회계를 맡고 있었는데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들어가면 마땅히 안석의 물가에 댈 뿐이다. 감히 다시 사광의 곁에 가지 못하겠으니, 저이는 곧 지팡이를 잡고 사람을 칠 수 있어 쉽지 않다."
협주 2
阮裕,已見。
완유니 이미 보인다.
《中興書》曰:「裕終日頽然,無所錯綜,而物自宗之。」
『중흥서』에 이르기를 「완유는 온종일 무너지듯 있으며 얽어 다스리는 바가 없었으나 사물이 절로 그를 마루로 삼았다」 하였다.
54저이가 어찌 낯빛으로 남에게 굴 수 있는가
王劉與桓公共至覆舟山看。酒酣後,劉牽腳加桓公頸。桓公甚不堪,舉手撥去。既還,王長史語劉曰:「伊詎可以形色加人不?」
왕씨와 유씨가 환공과 함께 복주산에 가서 보았다.
술이 무르익은 뒤 유윤이 다리를 끌어다 환공의 목에 얹었다. 환공이 몹시 견디지 못하여 손을 들어 밀쳐 냈다.
이윽고 돌아와 왕장사가 유윤에게 말하였다. "저이가 어찌 낯빛으로 남에게 굴 수 있겠소."
협주 1
《温別傳》曰:「温有豪邁風氣也。」
「온별전」에 이르기를 「환온에게 호탕한 풍모와 기운이 있었다」 하였다.
55만석이 흔들리고 약한 여느 재주인데 무슨 범하기 어려운 낯이 있는가
桓公問桓子野:「謝安石料萬石必敗,何以不諫?」子野答曰:「故當出於難犯耳!」桓作色曰:「萬石撓弱凡才,有何嚴顏難犯?」
환공이 환자야에게 물었다. "사안석이 만석이 반드시 무너질 줄 헤아리고서 어찌 간하지 않았는가."
자야가 대답하였다. "짐짓 범하기 어려운 데서 나왔을 뿐입니다."
환공이 낯빛을 바꾸어 말하였다. "만석은 흔들리고 약한 여느 재주인데 무슨 엄한 낯이 있어 범하기 어렵겠는가."
협주 1
子野,桓伊小字也。《續晉陽秋》曰:「伊字叔夏,譙國銍人。父景,護軍將軍。伊少有才藝,又善聲律,加以標悟省率,爲王濛、劉惔所知。累遷豫州刺史,贈右將軍。」
자야는 환이의 아이 적 이름이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환이는 자가 숙하요 초국 질 사람이다. 아버지 환경은 호군장군이다. 환이는 젊어서 재주와 재간이 있고 또 소리와 가락을 잘하였으며, 더하여 드러나 깨치고 살펴 시원하매 왕몽과 유담에게 알려졌다. 여러 벼슬을 거쳐 예주자사에 이르렀고 우장군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56아는 이가 이미 많으니 다시 그러기를 번거로이 하지 않겠습니다
羅君章曾在人家,主人令與坐上客共語。答曰:「相識已多,不煩復爾。」
나군장이 일찍이 남의 집에 있었는데 주인이 자리에 있는 손과 함께 말하게 하였다.
대답하였다. "아는 이가 이미 많으니 다시 그러기를 번거로이 하지 않겠습니다."
협주 1
《羅府君別傳》曰:「含字君章,桂陽棗陽人。蓋楚熊姓之後,啓土羅國,遂氏族焉。後寓湘境,故爲桂陽人。含,臨海太守彦曾孫,滎陽太守緩少子也。桓宣武辟爲別駕,以官廨諠擾,於城西池小洲上立茅茨,伐木爲床,織葦爲席,布衣蔬食,晏若有餘。桓公嘗謂衆坐曰:『此自江左之淸秀,豈惟荊楚而已!』累遷散騎常侍、廷尉、長沙相。致仕,中散大夫,門施行馬。含自在官舍,有一白雀棲集堂宇,及致仕還家,階庭忽蘭菊挺生。豈非至行之徴邪?」
『나부군별전』에 이르기를 「나함은 자가 군장이요 계양 조양 사람이다. 대개 초나라 웅씨의 뒤로 나국에 땅을 열어 마침내 겨레를 삼았다. 뒤에 상수 지경에 붙어 살았으므로 계양 사람이 되었다. 나함은 임해태수 나언의 증손이요 형양태수 나완의 작은아들이다. 환선무가 불러 별가로 삼으니, 관아가 시끄럽다 하여 성 서쪽 못의 작은 섬에 띠집을 세우고 나무를 베어 평상을 삼고 갈대를 엮어 자리를 삼아, 베옷과 나물밥으로 편안하기가 남음이 있는 듯하였다. 환공이 일찍이 뭇 자리에서 이르기를 『이는 절로 강좌의 맑고 빼어남이니 어찌 형초뿐이겠는가』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산기상시와 정위와 장사상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중산대부가 되어 문에 행마를 베풀었다. 나함이 절로 관사에 있을 때 흰 참새 한 마리가 마루에 깃들여 모였고,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돌아오자 섬돌과 뜰에 홀연 난초와 국화가 빼어나게 났다. 어찌 지극한 행실의 조짐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57이것이 왕망 때와 무엇이 다른가
韓康伯病,拄杖前庭消搖。見諸謝皆富貴,轟隱交路,嘆曰:「此復何異王莽時?」
한강백이 병들어 지팡이를 짚고 앞뜰에서 거닐었다.
여러 사씨가 다 넉넉하고 귀하여 우렁차게 길에 오가는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 "이것이 다시 왕망 때와 무엇이 다른가."
협주 2
韓伯,已見。
한백이니 이미 보인다.
《漢書》曰:「王莽宗族凡十侯、五大司馬。」
『한서』에 이르기를 「왕망의 겨레붙이에 무릇 열 후와 다섯 대사마가 있었다」 하였다.
58환온의 낯짝을 두려워하니 어찌 딸을 시집보내겠는가
王文度爲桓公長史時,桓爲兒求王女,王許咨藍田。既還,藍田愛念文度,雖長大猶抱著厀上。文度因言桓求己女婚。藍田大怒,排文度下厀曰:「惡見,文度已復痴,畏桓温面兵,那可嫁女與之!」文度還報云:「下官家中先得婚處。」桓公曰:「吾知矣,此尊府君不肯耳。」後桓女遂嫁文度兒。
왕문도가 환공의 장사였을 때, 환공이 아들을 위해 왕문도의 딸을 구하니 왕문도가 남전에게 여쭙기로 허락하였다.
이윽고 돌아오니 남전이 문도를 아끼고 생각하여, 비록 자라 컸어도 오히려 안아 무릎 위에 놓았다.
문도가 이로 인해 환온이 제 딸과 혼인하기를 구한다고 말하였다.
남전이 크게 성내어 문도를 무릎에서 밀어내며 말하였다. "밉게도 보이는구나. 문도가 이미 다시 어리석어졌구나. 환온의 낯짝을 두려워하니 어찌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겠느냐."
문도가 돌아와 알렸다. "하관의 집안에 먼저 혼처를 얻은 데가 있습니다."
환공이 말하였다. "내가 알겠소. 이는 그대의 아버님께서 즐겨하지 않으신 것이오."
뒤에 환온의 딸이 마침내 문도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협주 2
王坦之、王述並已見。
왕탄지와 왕술이 아울러 이미 보인다.
《王氏譜》曰:「坦之子愷,娶桓温第二女,字伯子。」《中興書》曰:「愷字茂仁,歴呉國内史、丹陽尹,贈太常。」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탄지의 아들 왕개가 환온의 둘째 딸을 맞았으니 자는 백자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개는 자가 무인이요 오국내사와 단양윤을 지냈고 태상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59멀리로는 순봉천에게 부끄럽고 가까이로는 유진장에게 부끄럽다
王子敬數歳時,嘗看諸門生樗蒲。見有勝負,因曰:「《南風》不競。」門生輩輕其小兒,迺曰:「此郎亦管中窺豹,時見一斑。」子敬瞋目曰:「遠慚荀奉倩,近愧劉眞長!」遂拂衣而去。
왕자경이 몇 살 때 여러 문생이 저포 노는 것을 보았다.
이기고 짐이 있음을 보고 이로 인해 말하였다. "「남풍」이 굳세지 못하구나."
문생들이 그 어린아이임을 가벼이 여겨 이에 말하였다. "이 도령도 대롱 속으로 표범을 엿보아 때로 한 점 무늬를 보는군."
자경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멀리로는 순봉천에게 부끄럽고 가까이로는 유진장에게 부끄럽다."
마침내 옷을 떨치고 갔다.
협주 2
《春秋傳》曰:「楚伐鄭,師曠曰:『不害,吾驟歌《南風》。』《南風》不競,多死聲,楚必無功。」杜預曰:「歌者吹律,以詠八風,《南風》音微,故曰不競也。」
『춘추전』에 이르기를 「초나라가 정나라를 치니 사광이 『해롭지 않다. 내가 자주 「남풍」을 노래하였는데 「남풍」이 굳세지 못하고 죽는 소리가 많으니 초나라가 반드시 공이 없으리라』 하였다」 하였다. 두예가 이르기를 「노래하는 이가 율을 불어 여덟 바람을 읊는데, 「남풍」의 소리가 작으므로 굳세지 못하다 한 것이다」 하였다.
荀劉,已見。
순씨와 유씨는 이미 보인다.
60사공이 양수를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謝公聞羊綏佳,致意令來,終不肯詣。後綏爲太學博士,因事見謝公,公即取以爲主簿。
사공이 양수가 좋다는 말을 듣고 뜻을 전하여 오게 하였으나 끝내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뒤에 양수가 태학박사가 되어 일로 사공을 뵈니 사공이 곧 데려다 주부로 삼았다.
협주 1
《羊氏譜》曰:「綏字仲彦,太山人。父楷,尚書郎。綏仕至中書侍郎。」
『양씨보』에 이르기를 「양수는 자가 중언이요 태산 사람이다. 아버지 양해는 상서랑이다. 양수는 벼슬이 중서시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61사람을 밀어 주기가 바로 절로 어렵소
王右軍與謝公詣阮公,至門語謝:「故當共推主人。」謝曰:「推人正自難。」
왕우군이 사공과 함께 완공을 찾아가며 문에 이르러 사공에게 말하였다. "짐짓 마땅히 함께 주인을 밀어 주어야 하오."
사공이 말하였다. "사람을 밀어 주기가 바로 절로 어렵소."
협주 1
阮思曠也。
완사광이다.
62위나라 왕조가 길지 못한 까닭입니다
太極殿始成,王子敬時爲謝公長史,謝送版,使王題之。王有不平色,語信云:「可擲箸門外。」謝後見王曰:「題之上殿何若?昔魏朝韋誕諸人,亦自爲也。」王曰:「魏阼所以不長。」謝以爲名言。
태극전이 처음 이루어졌을 때 왕자경이 그때 사공의 장사였는데, 사공이 현판을 보내 왕자경에게 쓰게 하였다.
왕자경이 언짢은 낯빛이 있어 심부름꾼에게 말하였다. "문 밖에 던져 두어도 좋소."
사공이 뒤에 왕자경을 보고 말하였다. "이를 써서 전각에 올리는 것이 어떻겠소. 옛날 위나라 조정의 위탄 같은 이들도 또한 절로 하였소."
왕자경이 말하였다. "위나라 왕조가 길지 못한 까닭입니다."
사공이 이름난 말이라 하였다.
협주 2
徐廣晉紀曰:「孝武寧康二年,尚書令王彪之等啓改作新宮。太元三年二月,内外軍六千人始營築,至七月而成。太極殿髙八丈,長二十七丈,廣十丈。尚書謝萬監視,賜爵關内侯。大匠毛安之關中侯。」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효무제 영강 이 년에 상서령 왕표지 들이 새 궁을 고쳐 짓기를 아뢰었다. 태원 삼 년 이월에 안팎 군사 육천 사람이 비로소 지어 쌓아 칠월에 이루었다. 태극전은 높이 여덟 길, 길이 스물일곱 길, 너비 열 길이다. 상서 사만이 살펴보아 관내후 벼슬을 내려 주고 대장 모안지에게 관중후를 주었다」 하였다.
宋明帝《文章志》曰:「太原中,新宮成,議者欲屈王獻之題榜,以爲萬代寶。謝安與王語次,因及魏時起陵雲閣忘題榜,乃使韋仲將縣梯上題之。比下,鬚髮盡白,裁餘氣息。還語子弟云:『宜絶楷法!』安欲以此風動其意。王解其旨,正色曰:『此奇事。韋仲將魏朝大臣,寧可使其若此?有以知魏德之不長。』安知其心,迺不復逼之。」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태원 연간에 새 궁이 이루어지자 따지는 이들이 왕헌지를 굽혀 현판을 쓰게 하여 만대의 보배로 삼으려 하였다. 사안이 왕헌지와 말하던 차에 이로 인해 위나라 때 능운각을 세우고 현판 쓰기를 잊어 이에 위중장에게 사다리를 매달아 올라가 쓰게 한 일에 미쳤는데, 내려올 즈음에 수염과 머리털이 다 세고 겨우 숨만 남았다 하였다. 돌아가 자제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해서법을 끊어라』 하였다 하니, 사안이 이로써 그 뜻을 바람처럼 움직이려 한 것이다. 왕헌지가 그 뜻을 알고 낯빛을 바로 하여 『이는 기이한 일입니다. 위중장은 위나라 조정의 대신인데 어찌 그를 그렇게 하게 할 수 있습니까. 이로써 위나라 덕이 길지 못하였음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사안이 그 마음을 알고 이에 다시 다그치지 않았다」 하였다.
63사람이 스스로를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王恭欲請江盧奴爲長史,晨往詣江,江猶在帳中。王坐,不敢即言。良久乃得及,江不應。直喚人取酒,自飲一盌,又不與王。王且笑且言:「那得獨飲?」江云:「卿亦復須邪?」更使酌與王,王飲酒畢,因得自解去。未出戸,江嘆曰:「人自量,固爲難。」
왕공이 강노노를 장사로 청하려 하여 새벽에 강씨를 찾아가니 강씨가 아직 휘장 안에 있었다.
왕공이 앉아서 감히 곧바로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말을 꺼낼 수 있었는데 강씨가 응하지 않았다.
곧바로 사람을 불러 술을 가져오게 하여 스스로 한 사발을 마시고 또 왕공에게 주지 않았다.
왕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어찌 홀로 마시시오."
강씨가 말하였다. "경도 또한 필요하오."
다시 따라 왕공에게 주게 하니, 왕공이 술을 다 마시고 이로 인해 스스로 풀고 갈 수 있었다.
아직 문을 나서기 전에 강씨가 탄식하였다. "사람이 스스로를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협주 2
盧奴,江敳小字也。《晉安帝紀》曰:「敳字仲凱,濟陽人。祖正,散騎常侍。父虨,僕射。並以義正器素,知名當世。敳歴位内外,簡退箸稱,歴黃門侍郎、驃騎咨議。」
노노는 강애의 아이 적 이름이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강애는 자가 중개요 제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강정은 산기상시요 아버지 강빈은 복야인데, 아울러 옳고 바르며 그릇이 수수하여 그때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강애는 안팎의 자리를 지내며 간결하고 물러남으로 일컬어졌고 황문시랑과 표기자의를 지냈다」 하였다.
《宋書》曰:「敳即湘州江夷之父也,夷字茂遠,湘州刺史。」
『송서』에 이르기를 「강애는 곧 상주자사 강이의 아버지다. 강이는 자가 무원이요 상주자사다」 하였다.
64풍류가 빼어남은 제가 왕공만 못하나 참됨과 효도야 어찌 남에게 빌리겠습니까
孝武問王爽:「卿何如卿兄。」王答曰:「風流秀出,臣不如恭,忠孝亦何可以假人!」
효무제가 왕상에게 물었다. "경은 경의 형에 견주어 어떠한가."
왕상이 대답하였다. "풍류가 빼어남은 신이 왕공만 못하나, 참됨과 효도야 또한 어찌 남에게 빌릴 수 있겠습니까."
협주 1
《中興書》曰:「爽忠孝正直。烈宗崩,王國寶夜開門入,爲遺詔。爽爲黃門郎,距之曰:『大行晏駕,太子未立,敢有先入者,斬!』國寶懼,乃止。」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상은 참되고 효도로우며 곧고 발랐다. 열종이 돌아가자 왕국보가 밤에 문을 열고 들어와 남기신 조칙을 지으려 하였다. 왕상이 황문랑이었는데 이를 막으며 『대행께서 돌아가시고 태자가 아직 서지 않았으니, 감히 먼저 들어오는 이가 있으면 베겠다』 하니, 왕국보가 두려워하여 이에 그쳤다」 하였다.
65무슨 작은 놈이 있겠습니까
王爽與司馬太傅飲酒。太傅醉,呼王爲「小子。」王曰:「亡祖長史,與簡文皇帝爲布衣之交。亡姑、亡姊,伉儷二宮。何小子之有?」
왕상이 사마태부와 술을 마셨다. 태부가 취하여 왕상을 「작은 놈」이라 불렀다.
왕상이 말하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장사는 간문황제와 베옷 적 사귐이었고, 돌아가신 고모와 돌아가신 누이는 두 궁의 짝이었습니다. 무슨 작은 놈이 있겠습니까."
협주 1
《中興書》曰:「王濛女諱穆之,爲哀帝皇后。王蘊女諱法惠,爲孝武皇后。」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몽의 딸은 휘가 목지니 애제의 황후가 되었고, 왕온의 딸은 휘가 법혜니 효무제의 황후가 되었다」 하였다.
66장조희가 만일 알고자 하면 절로 마땅히 찾아와야 하오
張玄與王建武先不相識,後遇於范豫章許,范令二人共語。張因正坐斂衽,王孰視良久,不對。張大失望,便去。范苦譬留之,遂不肯住。范是王之舅,乃讓王曰:「張玄,呉士之秀,亦見遇於時,而使至於此,深不可解。」王笑曰:「張祖希若欲相識,自應見詣。」范馳報張,張便束帶造之。遂舉觴對語,賓主無愧色。
장현과 왕건무가 앞서 서로 알지 못하다가 뒤에 범예장의 처소에서 만나니, 범예장이 두 사람에게 함께 말하게 하였다.
장현이 이로 인해 바로 앉아 옷깃을 여몄는데, 왕건무가 한참을 익히 보기만 하고 마주하지 않았다.
장현이 크게 바람을 잃고 곧 갔다. 범예장이 괴롭게 타이르며 붙들었으나 마침내 머물려 하지 않았다.
범예장은 왕건무의 외숙이라 이에 왕건무를 나무랐다. "장현은 오 땅 선비의 빼어난 이요 또한 그때에 대접받는 이인데, 이 지경에 이르게 하니 깊이 알 수 없구나."
왕건무가 웃으며 말하였다. "장조희가 만일 알고자 하면 절로 마땅히 찾아와야 하오."
범예장이 달려가 장현에게 알리니 장현이 곧 띠를 매고 찾아갔다. 마침내 잔을 들어 마주 말하니 손과 주인이 부끄러운 낯빛이 없었다.
협주 3
張玄已見。建武,王忱也。《晉安帝紀》曰:「忱初作荊州刺史,後爲建武將軍。」
장현은 이미 보인다. 건무는 왕침이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왕침이 처음에 형주자사가 되었다가 뒤에 건무장군이 되었다」 하였다.
范甯,已見。
범녕은 이미 보인다.
《王氏譜》曰:「王坦之娶順陽郡范汪女,名蓋,即甯妹也,生忱。」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탄지가 순양군 범왕의 딸을 맞았으니 이름이 개요 곧 범녕의 누이인데 왕침을 낳았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