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량世説新語 雅量第六
1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러 피가 요를 적셨다
豫章太守顧邵,是雍之子。邵在郡卒,雍盛集僚屬,自圍棊。外啓信至,而無兒書,雖神氣不變,而心了其故。以爪掐掌,血流沾褥。賓客既散,方嘆曰:「已無延陵之髙,豈可有喪明之責?」於是豁情散哀,顏色自若。
예장태수 고소는 고옹의 아들이다.
고소가 고을에서 죽었는데, 고옹이 아전과 붙이를 성대히 모아 놓고 스스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밖에서 기별이 이르렀다 아뢰는데 아들의 글이 없으니, 비록 정신과 기운은 바뀌지 않았으나 마음으로 그 까닭을 알았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러 피가 흘러 요를 적셨다.
손이 흩어진 뒤에야 탄식하였다. "이미 연릉계자의 높음이 없는데 어찌 눈을 잃었다는 꾸짖음까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정을 틔우고 슬픔을 흩으니 낯빛이 태연하였다.
협주 3
環濟《呉紀》曰:「邵字孝則,呉郡人。年二十七起家爲豫章太守,舉善以教民,風化大行。」
환제의 『오기』에 이르기를 「고소는 자가 효칙이요 오군 사람이다. 스물일곱에 벼슬을 시작하여 예장태수가 되었고, 착함을 들어 백성을 가르치니 풍속의 바뀜이 크게 행해졌다」 하였다.
《江表傳》曰:「雍字元歎,曾就蔡伯喈,伯喈賞異之,以其名與之。」《呉志》曰:「雍累遷尚書令,封陽遂鄕侯,拜侯還第,家人不知。爲人不飲酒,寡言語。孫權嘗曰:『顧侯在坐,令人不樂。』位至丞相。」
『강표전』에 이르기를 「고옹은 자가 원탄이다. 일찍이 채백개에게 나아가니 백개가 기려 남달리 여겨 제 이름을 그에게 주었다」 하였다. 『오지』에 이르기를 「고옹이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령에 이르고 양수향후에 봉해졌는데, 후에 임명되어 집에 돌아왔으나 집안 사람이 알지 못하였다. 사람됨이 술을 마시지 않고 말이 적었다. 손권이 일찍이 이르기를 『고후가 자리에 있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즐겁지 않게 한다』 하였다. 자리가 승상에 이르렀다」 하였다.
《禮記》曰:「延陵季子適齊,及其反也,其長子死,葬於嬴博之閒。孔子曰:『延陵季子,呉之習於禮者也。』往而觀其葬焉。其坎深不至於泉,其斂以時服。既葬而封,廣輪掩坎,其髙可隱也。既封,左袒,右還其封,且號者三,曰:『骨肉歸復於土,命也。若魂氣,則無不之也。』而遂行。孔子曰:『延陵季子之於禮也,其合矣乎!』子夏哭其子而喪其明,曾子弔之,曰:『朋友喪明則哭之。』曾子哭,子夏亦哭,曰:『天乎!予之無罪也。』曾子怒曰:『商,汝何無罪也?吾與汝事夫子於洙泗之間,退而老於西河之上,使西河之民,疑汝於夫子,爾罪一也。喪爾親,使民未有聞焉,爾罪二也。喪爾子,喪爾明,爾罪三也。』子夏投其杖而拜曰:『吾過矣!吾過矣!』」
『예기』에 이르기를 「연릉계자가 제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이르러 그 맏아들이 죽으니 영과 박 사이에 묻었다. 공자께서 『연릉계자는 오나라에서 예에 익은 이다』 하시고, 가서 그 장사를 보셨다. 그 구덩이는 깊이가 샘에 이르지 않았고 그 염은 철에 맞는 옷으로 하였다. 묻고 나서 봉분을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가 구덩이를 덮었고 그 높이는 기댈 만하였다. 봉분을 마치자 왼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으로 그 봉분을 돌며 또 세 번 부르짖어 이르기를 『뼈와 살이 흙으로 돌아감은 운명이다. 넋과 기운으로 말하면 가지 못할 데가 없다』 하고 마침내 갔다. 공자께서 『연릉계자가 예에 대하여 그 맞았도다』 하셨다. 자하가 그 아들을 곡하다가 눈을 잃으니 증자가 조문하며 『벗이 눈을 잃으면 곧 곡한다』 하였다. 증자가 곡하니 자하도 또한 곡하며 『하늘이시여, 저에게 죄가 없습니다』 하였다. 증자가 성내어 『상아, 네가 어찌 죄가 없느냐. 내가 너와 함께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선생님을 섬기다가, 물러나 서하 가에서 늙으며 서하의 백성으로 하여금 너를 선생님인가 의심하게 하였으니 네 죄가 하나요, 네 어버이 상에 백성이 들은 바가 없게 하였으니 네 죄가 둘이요, 네 아들 상에 네 눈을 잃었으니 네 죄가 셋이다』 하였다. 자하가 그 지팡이를 던지고 절하며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잘못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2광릉산이 이제 끊어지는구나
嵇中散臨刑東市,神氣不變。索琴彈之,奏《廣陵散》。曲終,曰:「袁孝尼嘗請學此散,吾靳,固不與,《廣陵散》於今絶矣!」太學生三千人上書,請以爲師,不許。文王亦尋悔焉。
혜중산이 동쪽 저잣거리에서 형을 받는데 정신과 기운이 바뀌지 않았다.
거문고를 찾아 타며 「광릉산」을 연주하였다. 곡이 끝나자 말하였다. "원효니가 일찍이 이 산을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내가 아껴 굳이 주지 않았다. 「광릉산」이 이제 끊어지는구나."
태학생 삼천 사람이 글을 올려 그를 스승 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문왕도 이윽고 뉘우쳤다.
협주 2
《晉陽秋》曰:「初,康與東平呂安親善。安嫡兄遜淫安妻徐氏,安欲告遜遣妻,以咨於康,康喩而抑之。遜内不自安,陰告安撾母,表求徙邊。安當徙,訴自理,辭引康。」《文士傳》曰:「呂安罹事,康詣獄以明之。鍾會庭論康,曰:『今皇道開明,四海風靡,邊鄙無詭隨之民,街巷無異口之議。而康上不臣天子,下不事王侯,輕時傲世,不爲物用,無益於今,有敗於俗。昔太公誅華士,孔子戮少正卯,以其負才亂群惑衆也。今不誅康,無以淸潔王道。』於是録康閉獄,臨死,而兄弟親族咸與共別。康顏色不變,問其兄曰:『向以琴來不邪?』兄曰:『以來。』康取調之,爲《太平引》,曲成,歎曰:『《太平引》於今絶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혜강이 동평의 여안과 가까이 사이가 좋았다. 여안의 맏형 여손이 여안의 아내 서씨를 더럽히니, 여안이 여손을 고발하여 아내를 내보내려 하며 혜강에게 여쭈니 혜강이 타일러 눌렀다. 여손이 안으로 스스로 편치 못하여 몰래 여안이 어미를 때렸다고 고발하고 표를 올려 변방으로 옮기기를 구하였다. 여안이 마땅히 옮겨지게 되매 하소연하여 스스로 밝히는데 말이 혜강을 끌어들였다」 하였다. 『문사전』에 이르기를 「여안이 일에 걸리자 혜강이 옥에 나아가 이를 밝히려 하였다. 종회가 조정에서 혜강을 논하여 이르기를 『이제 임금의 길이 열려 밝아 사해가 바람에 쓸리듯 하여, 변두리에 거짓으로 따르는 백성이 없고 거리에 다른 말 하는 의논이 없습니다. 그런데 혜강은 위로 천자를 신하로 섬기지 않고 아래로 왕후를 섬기지 않으며, 때를 가벼이 여기고 세상에 거만하여 사물에 쓰이지 않으니, 이제에 보탬이 없고 풍속에 무너뜨림이 있습니다. 옛날 태공이 화사를 베고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것은 그 재주를 지고 무리를 어지럽히며 뭇사람을 홀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혜강을 베지 않으면 왕의 길을 맑고 깨끗이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혜강을 적어 옥에 가두었다. 죽음에 다다라 형제와 가까운 겨레가 다 함께 헤어졌다. 혜강이 낯빛을 바꾸지 않고 그 형에게 묻기를 『아까 거문고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하니, 형이 『가져왔다』 하였다. 혜강이 가져다 고르고 「태평인」을 연주하여 곡이 이루어지자 탄식하기를 『「태평인」이 이제 끊어지는구나』 하였다」 하였다.
王隱《晉書》曰:「康之下獄,太學生數千人請之,於時豪俊皆隨康入獄,悉解喩,一時散遣。康竟與安同誅。」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혜강이 옥에 내려지자 태학생 수천 사람이 그를 청하였고, 그때 뛰어난 이들이 다 혜강을 따라 옥에 들어가려 하매 다 타일러 한때에 흩어 보냈다. 혜강은 마침내 여안과 함께 베였다」 하였다.
3벼락이 기댄 기둥을 깨뜨렸으나 낯빛이 바뀌지 않았다
夏侯太初嘗倚柱作書。時大雨,霹靂破所倚柱,衣服焦然,神色無變,書亦如故。賓客左右,皆跌蕩不得住。
하후태초가 일찍이 기둥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큰비가 내려 벼락이 기댄 기둥을 깨뜨려 옷이 그을렸는데도 정신과 낯빛이 바뀌지 않았고 글씨도 예전과 같았다.
손과 곁의 사람은 다 넘어지고 흔들려 서 있지 못하였다.
협주 1
見顧愷之《書贊》。《語林》曰:「太初從魏帝拜陵,陪列於松柏下。時暴雨霹靂,正中所立之樹。冠冕焦壞,左右睹之皆伏,太初顏色不改。」臧榮緒又以爲諸葛誕也。
고개지의 『화찬』에 보인다. 『어림』에 이르기를 「태초가 위나라 임금을 따라 능에 절하며 소나무와 잣나무 아래 벌여 모셨다. 그때 사나운 비에 벼락이 마침 선 자리의 나무에 맞았다. 관과 면류관이 그을려 무너지고 곁의 사람이 이를 보고 다 엎드렸는데 태초는 낯빛을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장영서는 또 제갈탄이라 하였다.
4길가에 있으면서 열매가 많으니 이는 반드시 쓴 오얏이다
王戎七歳,嘗與諸小兒遊,看道邊李樹多子折枝,諸兒競走取之,唯戎不動。人問之,答曰:「樹在道邊而多子,此必苦李。」取之信然。
왕융이 일곱 살에 일찍이 여러 어린아이와 노닐다가, 길가의 오얏나무에 열매가 많아 가지가 휜 것을 보았다.
여러 아이가 다투어 달려가 따는데 왕융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으니 대답하였다. "나무가 길가에 있으면서 열매가 많으니 이는 반드시 쓴 오얏이오."
따 보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협주 1
《名士傳》曰:「戎由是幼有神理之稱也。」
『명사전』에 이르기를 「왕융이 이로 말미암아 어려서 신령한 결이 있다는 일컬음이 있었다」 하였다.
5범이 난간을 붙들고 울부짖어도 담담히 움직이지 않았다
魏明帝於宣武塲上斷虎爪牙,縱百姓觀之。王戎七歳,亦往看。虎承閒攀欄而吼,其聲震地,觀者無不辟易顛仆;戎湛然不動,了無恐色。
위나라 명제가 선무장에서 범의 발톱과 이빨을 자르고 백성이 이를 보게 하였다.
왕융이 일곱 살에 또한 가서 보았다. 범이 틈을 타 난간을 붙들고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땅을 흔들어, 보던 이가 물러나 자빠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융은 담담히 움직이지 않고 도무지 두려워하는 낯빛이 없었다.
협주 1
《竹林七賢論》曰:「明帝自閣上望見,使人問戎姓名而異之。」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명제가 다락 위에서 바라보고 사람을 시켜 왕융의 성과 이름을 묻고 그를 남달리 여겼다」 하였다.
6왕융이 받지 않으면서도 그 글에 두터이 답하다
王戎爲侍中,南郡太守劉肇遺筒中牋布五端,戎雖不受,厚報其書。
왕융이 시중이 되었을 때 남군태수 유조가 통 안에 든 고운 베 다섯 필을 보냈다.
왕융이 비록 받지는 않았으나 그 글에는 두터이 답하였다.
협주 1
《晉陽秋》曰:「司隸校尉劉毅奏:『南郡太守劉肈以布五十疋雜物遺前豫州刺史王戎,請檻車徴付廷尉治罪,除名終身。』戎以書未達,不坐。」《竹林七賢論》曰:「戎報肈書,議者僉以爲譏。世祖患之,乃發口詔曰:『以戎之爲士,義豈懷私?』」議者乃息,戎亦不謝。」
『진양추』에 이르기를 「사예교위 유의가 아뢰기를 『남군태수 유조가 베 오십 필과 여러 물건을 앞선 예주자사 왕융에게 보냈으니, 함거로 불러 정위에 붙여 죄를 다스리고 이름을 지워 한평생 벼슬하지 못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융은 글이 이르지 않았다 하여 걸리지 않았다」 하였다.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왕융이 유조에게 답한 글을 두고 따지는 이들이 다 나무람이라 여겼다. 세조가 이를 근심하여 이에 입으로 조칙을 내려 『왕융의 선비 됨으로 옳음이 어찌 사사로움을 품겠는가』 하니, 따지는 이들이 이에 그쳤고 왕융도 사죄하지 않았다」 하였다.
7배숙칙이 잡히고도 몸가짐이 태연하였다
裴叔則被收,神氣無變,舉止自若。求紙筆作書。書成,救者多,乃得免。後位儀同三司。
배숙칙이 잡혔을 때 정신과 기운이 바뀌지 않고 몸가짐이 태연하였다.
종이와 붓을 구하여 글을 짓고, 글이 이루어지자 건지려는 이가 많아 이에 벗어날 수 있었다. 뒤에 자리가 의동삼사에 이르렀다.
협주 1
《晉諸公贊》曰:「楷息瓚,取楊駿女。駿誅,以相婚黨,收付廷尉。侍中傅祗證楷素意,由此得免。」《名士傳》曰:「楚王之難,李肇惡楷名重,收將害之。楷神色不變,舉動自若,諸人請救,得免。」《晉陽秋》曰:「楷與王戎倶加儀同三司。」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배해의 아들 배찬이 양준의 딸을 맞았다. 양준이 베이자 서로 혼인한 무리라 하여 잡아 정위에 붙였다. 시중 부지가 배해의 본디 뜻을 증언하여 이로 말미암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였다. 『명사전』에 이르기를 「초왕의 난에 이조가 배해의 이름이 무거운 것을 미워하여 잡아 해치려 하였다. 배해가 정신과 낯빛이 바뀌지 않고 몸가짐이 태연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건지기를 청하여 벗어날 수 있었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배해가 왕융과 함께 의동삼사를 더해 받았다」 하였다.
8내 눈빛을 보아라, 이에 소 등 위로 나온다
王夷甫嘗屬族人事,經時未行,遇於一處飲燕,因語之曰:「近屬尊事,那得不行?」族人大怒,便舉樏擲其面。夷甫都無言,盥洗畢,牽王丞相臂,與共載去。在車中照鏡語丞相曰:「汝看我眼光,迺出牛背上。」
왕이보가 일찍이 겨레붙이에게 일을 부탁하였는데 때가 지나도 행해지지 않았다.
한 곳에서 마시고 잔치하다가 만나매 이로 인해 그에게 말하였다. "요사이 그대에게 일을 부탁하였는데 어찌 행하지 않는가."
겨레붙이가 크게 성내어 곧 찬합을 들어 그 낯에 던졌다.
이보가 도무지 말이 없이 씻기를 마치고, 왕승상의 팔을 끌어 함께 수레를 타고 갔다.
수레 안에서 거울을 비추어 보며 승상에게 말하였다. "자네, 내 눈빛을 보게. 이에 소 등 위로 나온다네."
협주 1
王夷甫蓋自謂風神英俊,不至與人校。
왕이보는 대개 스스로 풍모와 정신이 뛰어나고 빼어나 남과 겨루는 데 이르지 않는다 여긴 것이다.
9바로 어둡게 감당한 것일 뿐이오
裴遐在周馥所,馥設主人。遐與人圍棊,馥司馬行酒。遐正戲,不時爲飲。司馬恚,因曳遐墜地。遐還坐,舉止如常,顏色不變,復戲如故。王夷甫問遐:「當時何得顏色不異?」答曰:「直是闇當故耳。」
배하가 주복의 처소에 있을 때 주복이 주인 노릇을 하였다.
배하가 남과 바둑을 두는데 주복의 사마가 술을 돌렸다. 배하가 한창 두느라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사마가 성내어 이로 인해 배하를 끌어 땅에 떨어뜨렸다. 배하가 자리로 돌아와 몸가짐이 여느 때 같고 낯빛이 바뀌지 않았으며 다시 예전처럼 두었다.
왕이보가 배하에게 물었다. "그때 어찌 낯빛이 다르지 않을 수 있었소."
대답하였다. "바로 어둡게 감당한 것일 뿐이오."
협주 2
鄧粲《晉紀》曰:「馥字祖宣,汝南人。代劉淮爲鎭東將軍,鎭壽陽。移檄四方,欲奉迎天子。元皇使甘卓攻之,馥出奔,道卒。」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주복은 자가 조선이요 여남 사람이다. 유회를 대신하여 진동장군이 되어 수양을 지켰다. 사방에 격문을 옮겨 천자를 받들어 맞으려 하였다. 원황제가 감탁을 시켜 그를 치니 주복이 달아나다 길에서 죽었다」 하였다.
一作「闇故當耳」。一作「眞是鬥將故耳」。
한 본에는 「어둡기 때문에 감당한 것일 뿐이오」로, 한 본에는 「참으로 싸우는 장수인 까닭일 뿐이오」로 되어 있다.
10작은 사람의 생각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렸다 하겠다
劉慶孫在太傅府,於時人士,多爲所構。唯庾子嵩縱心事外,無迹可閒。後以其性儉家富,説太傅令換千萬,冀其有吝,於此可乘。太傅於衆坐中問庾,庾時頽然已醉,幘墜几上,以頭就穿取,徐答云:「下官家故可有兩娑千萬,隨公所取。」於是乃服。後有人向庾道此,庾曰:「可謂以小人之慮,度君子之心。」
유경손이 태부의 관부에 있을 때, 그때 인사들이 흔히 그에게 얽어 넣어졌다. 오직 유자숭만이 마음을 일 밖에 놓아 틈낼 자취가 없었다.
뒤에 그 성품이 검소하고 집이 넉넉하다 하여, 태부에게 천만을 바꾸어 달라 하게 하고 그가 아까워하기를 바라 이로써 틈탈 수 있으리라 하였다.
태부가 뭇 자리 가운데서 유자숭에게 물으니, 유자숭이 그때 무너지듯 이미 취하여 두건이 안석 위에 떨어졌는데 머리를 대어 꿰어 쓰고 천천히 대답하였다. "하관의 집에 짐짓 두 자락 천만이 있으니 공께서 가지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에 곧 따랐다.
뒤에 어떤 이가 유자숭에게 이를 말하니 유자숭이 말하였다. "작은 사람의 생각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렸다 하겠다."
협주 1
《晉陽秋》曰:「劉輿字慶孫,中山人。有豪俠才算,善交結。爲范陽王虓所暱,虓薨,太傅召之,大相委仗,用爲長史。」《八王故事》曰:「司馬越字元超,髙密王泰長子。少尚布衣之操,爲中外所歸。累遷司空、太傅。」
『진양추』에 이르기를 「유여는 자가 경손이요 중산 사람이다. 호협한 재주와 셈이 있고 사귀어 맺기를 잘하였다. 범양왕 사마효에게 가까이 여겨졌고 사마효가 죽자 태부가 그를 불러 크게 서로 맡기고 의지하여 장사로 썼다」 하였다. 『팔왕고사』에 이르기를 「사마월은 자가 원초요 고밀왕 사마태의 맏아들이다. 젊어서 베옷의 지조를 높여 안팎이 돌아가는 바가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사공과 태부에 이르렀다」 하였다.
11흰 눈 아이가 마침내 하는구나
王夷甫與裴景聲志好不同。景聲惡欲取之,卒不能回。乃故詣王,肆言極罵,要王答己,欲以分謗。王不爲動色,徐曰:「白眼兒遂作。」
왕이보와 배경성은 뜻과 좋아함이 같지 않았다.
경성이 미워하여 그를 얻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돌이키지 못하였다. 이에 짐짓 왕이보를 찾아가 멋대로 말하며 지극히 꾸짖어, 왕이보의 답을 끌어내 이로써 헐뜯음을 나누려 하였다.
왕이보가 이 때문에 낯빛을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말하였다. "흰 눈 아이가 마침내 하는구나."
협주 1
《晉諸公贊》曰:「邈字景聲,河東聞喜人。少有通才,從兄頠器賞之,毎與淸言,終日達曙。自謂理構多如,輙毎謝之,然未能出也。歴太傅從事中郎、左司馬,監東海王軍事。少爲文士,而經事爲將,雖非其才,而以罕重稱也。」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배막은 자가 경성이요 하동 문희 사람이다. 젊어서 통하는 재주가 있어 사촌형 배위가 그릇으로 기렸는데, 함께 맑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온종일 새벽에 이르렀다. 스스로 결의 얽음이 많이 같다 하여 문득 늘 그에게 사례하였으나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태부종사중랑과 좌사마를 지내고 동해왕의 군사 일을 감독하였다. 젊어서는 글하는 선비였는데 일을 겪어 장수가 되니, 비록 그 재주는 아니었으나 드묾으로 무겁게 일컬어졌다」 하였다.
12절로 그대의 우아한 뜻을 온전히 할 수 있소
王夷甫長裴成公四歳,不與相知。時共集一處,皆當時名士,謂王曰:「裴令令望何足計!」王便卿裴。裴曰:「自可全君雅志。」
왕이보가 배성공보다 네 살 많았는데 서로 알지 않았다.
그때 함께 한곳에 모였는데 다 그때의 이름난 선비였다. 왕이보에게 말하였다. "배령의 명망을 어찌 헤아리기에 넉넉하겠소."
왕이보가 곧 배씨를 「경」이라 불렀다.
배씨가 말하였다. "절로 그대의 우아한 뜻을 온전히 할 수 있소."
협주 1
裴頠,已見。
배위니 이미 보인다.
13내가 각건 쓰고 곧장 오의로 돌아가면 된다
有往來者云庾公有東下意,或謂王公可潛稍嚴,以備不虞。王公曰:「我與元規雖倶王臣,本懷布衣之好,若其欲來,吾角巾徑還烏衣,何所稍嚴。」
오가는 이가 유공에게 동쪽으로 내려올 뜻이 있다 하니, 어떤 이가 왕공에게 남몰래 조금 삼엄히 하여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기를 권하였다.
왕공이 말하였다. "나와 원규는 비록 함께 왕의 신하이나 본디 베옷 적의 좋음을 품었소. 만일 그가 오려 한다면 내가 각건 쓰고 곧장 오의로 돌아가면 되지, 무엇을 조금이라도 삼엄히 하겠소."
협주 2
《丹陽記》曰:「烏衣之起,呉時烏衣營處所也。江左初立,琅邪諸王所居。」
『단양기』에 이르기를 「오의의 일어남은 오나라 때 오의영이 있던 곳이다. 강좌가 처음 서자 낭야 여러 왕씨가 살던 데다」 하였다.
《中興書》曰:「於是風塵自消,内外緝穆。」
『중흥서』에 이르기를 「이에 티끌바람이 절로 스러지고 안팎이 화목해졌다」 하였다.
14주부와 어울리려는 것이지 남의 책상 사이 일을 알려는 것이 아니다
王丞相主簿欲檢校帳下,公語主簿,欲與主簿周旋,無爲知人几案間事。
왕승상의 주부가 장막 아래를 검사하려 하니, 공이 주부에게 말하였다. 주부와 어울리려는 것이지 남의 책상 사이 일을 알려는 것이 아니라고.
15한평생 몇 켤레 나막신을 신을지 알지 못하겠다
祖士少好財,阮遙集好屐並恒自經營。同是一累而未判其得失。人有詣祖,見料視財物。客至,屛當未盡,餘兩小簏箸背後,傾身障之,意未能平。或有詣阮,見自吹火蠟屐,因嘆曰:「未知一生當箸幾量屐?」神色閑暢。於是勝負始分。
조사소는 재물을 좋아하고 완요집은 나막신을 좋아하여 아울러 늘 스스로 꾸렸다. 한가지로 하나의 얽매임인데 그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조사소를 찾아가니 재물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손이 이르매 치우기를 다하지 못하여 남은 두 작은 상자를 등 뒤에 두고 몸을 기울여 가리는데 뜻이 편치 못하였다.
어떤 이가 완요집을 찾아가니 스스로 불을 불며 나막신에 밀을 먹이고 있다가, 이로 인해 탄식하였다. "한평생 몇 켤레 나막신을 신을지 알지 못하겠구나."
정신과 낯빛이 한가롭고 시원하였다. 이에 이기고 짐이 비로소 갈렸다.
협주 2
《祖約別傳》曰:「約字士少,范陽遒人。累遷平西將軍、豫州刺史,鎭壽陽。與蘇峻反,峻敗,約投石勒。約本幽州冠族,賓客塡門,勒登髙望見車騎,大驚。又使佔奪鄕里先人田地,地主多恨。勒惡之,遂誅約。」《晉陽秋》曰:「阮孚字遙集,陳留人,咸第二子也。少有智調,而無俊異。累遷侍中、吏部尚書、廣州刺史。」
『조약별전』에 이르기를 「조약은 자가 사소요 범양 주 사람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평서장군과 예주자사에 이르러 수양을 지켰다. 소준과 함께 배반하였는데 소준이 무너지자 조약이 석륵에게 갔다. 조약은 본디 유주의 으뜸가는 겨레라 손이 문에 가득하니, 석륵이 높은 데 올라 수레와 말을 바라보고 크게 놀랐다. 또 시골의 앞선 사람의 밭과 땅을 차지하게 하니 땅 주인이 흔히 한스러워하였다. 석륵이 이를 미워하여 마침내 조약을 베었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완부는 자가 요집이요 진류 사람이니 완함의 둘째 아들이다. 젊어서 슬기와 고름이 있었으나 뛰어나게 남다르지는 않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과 이부상서와 광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孚別傳》曰:「孚風韻疎誕,少有門風。」
『부별전』에 이르기를 「완부는 풍모와 운치가 성글고 방자하였으나 젊어서 집안의 풍모가 있었다」 하였다.
16이 안에서도 잠자리를 얻기 어렵구나
許侍中、顧司空倶作丞相從事,爾時已被遇,遊宴集聚,略無不同。嘗夜至丞相許戲,二人歡極,丞相便命使入己帳眠。顧至曉回轉,不得快孰。許上床便咍臺大鼾。丞相顧諸客曰:「此中亦難得眠處。」
허시중과 고사공이 함께 승상의 종사가 되었는데, 그때 이미 대접을 받아 노닐고 잔치하며 모이는 것이 거의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밤에 승상의 처소에 이르러 놀다가 두 사람이 지극히 기뻐하매, 승상이 곧 제 휘장 안에 들어와 자게 하였다.
고사공은 새벽에 이르도록 뒤척이며 시원히 잠들지 못하였고, 허시중은 평상에 오르자 곧 드르렁드르렁 크게 코를 골았다.
승상이 여러 손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안에서도 잠자리를 얻기 어렵구나."
협주 2
《晉百官名》曰:「許璪字思文,義興陽羡人。」《許氏譜》曰:「璪祖艶,字子良,永興長。父裴,字季顯,烏程令。璪仕至吏部侍郎。」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허조는 자가 사문이요 의흥 양선 사람이다」 하였다. 『허씨보』에 이르기를 「허조의 할아버지 허염은 자가 자량이요 영흥의 장이다. 아버지 허배는 자가 계현이요 오정령이다. 허조는 벼슬이 이부시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顧和字君孝,少知名。族人顧榮曰:「此吾家騏驥也,必興吾宗。」仕至尚書令。五子:治、隗、淳、履之。
고화는 자가 군효요 젊어서 이름이 알려졌다. 겨레 사람 고영이 「이는 우리 집안의 천리마이니 반드시 우리 마루를 일으키리라」 하였다. 벼슬이 상서령에 이르렀다. 다섯 아들은 고치와 고외와 고순과 고이지다.
17아공을 보면 원규가 거짓이 아님을 안다
庾太尉風儀偉長,不輕舉止,時人皆以爲假。亮有大兒數歳,雅重之質,便自如此,人知是天性。温太眞嘗隱幔怛之,此兒神色恬然,乃徐跪曰:「君侯何以爲此?」論者謂不減亮。蘇峻時遇害。或云:「見阿恭,知元規非假。」
유태위는 풍모와 몸가짐이 훌륭하고 커서 몸가짐을 가벼이 하지 않으니, 그때 사람들이 다 거짓이라 여겼다.
유량에게 몇 살 된 큰아들이 있었는데 우아하고 무거운 바탕이 곧 절로 이러하니, 사람들이 이것이 타고난 성품임을 알았다.
온태진이 일찍이 휘장에 숨었다가 놀래키니, 이 아이가 정신과 낯빛이 편안하고 이에 천천히 무릎 꿇고 말하였다. "군후께서는 어찌 이러십니까."
따지는 이들이 유량에 못하지 않다 하였다. 소준 때에 해를 입었다.
어떤 이는 말하였다. "아공을 보면 원규가 거짓이 아님을 안다."
협주 2
《庾氏譜》曰:「會字會宗,太尉亮長子。年十九,咸和六年遇害。」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회는 자가 회종이요 태위 유량의 맏아들이다. 열아홉에 함화 육 년에 해를 입었다」 하였다.
阿恭,會小字也。
아공은 유회의 아이 적 이름이다.
18저부가 외양간 아래에서 명함을 닦아 나아가다
褚公於章安令遷太尉記室參軍,名字已顯而位微,人未多識。公東出,乘估客船,送故吏數人投錢唐亭住。爾時呉興沈充爲縣令,當送客過浙江,客出,亭吏驅公移牛屋下。潮水至,沈令起彷徨,問:「牛屋下是何物人?」吏云:「昨有一傖父來寄亭中,有尊貴客,權移之。」令有酒色,因遙問「傖父欲食䴵不?姓何等?可共語。」褚因舉手答曰:「河南褚季野。」遠近久承公名,令於是大遽,不敢移公,便於牛屋下脩刺詣公。更宰殺爲饌,具於公前,鞭撻亭吏,欲以謝慚。公與之酌宴,言色無異,狀如不覺。令送公至界。
저공이 장안령에서 태위기실참군으로 옮겨졌는데, 이름은 이미 드러났으나 자리가 미미하여 사람들이 아직 많이 알지 못하였다.
저공이 동쪽으로 나갈 때 장사꾼 배를 타고 옛 아전 몇 사람이 배웅하여 전당정에 들어 묵었다.
그때 오흥의 심충이 현령이었는데, 마땅히 손을 배웅하여 절강을 건너게 되었다. 손이 나오매 정의 아전이 저공을 몰아 외양간 아래로 옮겼다.
밀물이 이르자 심령이 일어나 서성이며 물었다. "외양간 아래에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아전이 말하였다. "어제 한 북쪽뜨기가 와서 정 안에 붙어 있었는데, 높고 귀한 손이 계시므로 잠시 옮겼습니다."
현령이 술기운이 있어 이로 인해 멀리서 물었다. "북쪽뜨기가 떡을 먹으려는가. 성이 무엇인가. 함께 말할 만한가."
저공이 이로 인해 손을 들어 대답하였다. "하남의 저계야요."
멀고 가까운 데서 오래 공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현령이 이에 크게 당황하여 감히 공을 옮기지 못하고, 곧 외양간 아래에서 명함을 닦아 공에게 나아갔다.
다시 잡아 죽여 반찬을 만들어 공 앞에 갖추고, 정의 아전을 매질하여 부끄러움을 사죄하려 하였다.
공이 그와 함께 술을 나누고 잔치하는데 말과 낯빛이 다름이 없어 마치 깨닫지 못한 듯하였다. 현령이 공을 지경까지 배웅하였다.
협주 4
按,庾亮《啓參佐名》:「裒時直爲參軍,不掌記室也。」
살피건대 유량의 「참좌 이름을 아뢴 글」에 「저부가 그때 다만 참군이었고 기실을 맡지 않았다」 하였다.
《錢唐縣記》曰:「縣近海,爲潮漂沒,縣諸豪姓,斂錢雇人,輦土爲塘,因以爲名也。」
『전당현기』에 이르기를 「현이 바다에 가까워 밀물에 떠내려가 잠기므로, 현의 여러 큰 성씨가 돈을 거두어 사람을 사서 흙을 날라 둑을 삼았으니 이로 인해 이름 삼았다」 하였다.
未詳
자세하지 않다.
《晉陽秋》曰:「呉人以中州人爲傖。」
『진양추』에 이르기를 「오 땅 사람이 중원 사람을 창이라 하였다」 하였다.
19동쪽 평상 위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못 들은 듯한 이가 있습니다
郗太傅在京口,遣門生與王丞相書,求女壻。丞相語郗信:「君往東廂,任意選之。」門生歸,白郗曰:「王家諸郎,亦皆可嘉,聞來覓婿,咸自矜持;唯有一郎,在東床上坦腹臥,如不聞。」郗公云:「正此好!」訪之,乃是逸少,因嫁女與焉。
치태부가 경구에 있으면서 문생을 보내 왕승상에게 글을 주어 사윗감을 구하였다.
승상이 치씨의 기별꾼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동쪽 곁방에 가서 뜻대로 고르시오."
문생이 돌아와 치씨에게 아뢰었다. "왕씨 집안의 여러 도령이 또한 다 아름다울 만한데, 사윗감을 찾으러 왔다는 말을 듣고 다들 스스로 몸가짐을 꾸몄습니다. 오직 한 도령이 동쪽 평상 위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못 들은 듯하였습니다."
치공이 말하였다. "바로 이 사람이 좋다."
찾아보니 곧 일소였으므로 이로 인해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협주 1
《王氏譜》曰:「逸少,羲之小字。羲之妻,太傅郗鑒女,名璿,字子房。」
『왕씨보』에 이르기를 「일소는 왕희지의 아이 적 이름이다. 왕희지의 아내는 태부 치감의 딸로 이름은 선이요 자는 자방이다」 하였다.
20양고의 넉넉하고 화려함이 양만의 참되고 시원함만 못하다
過江初,拜官,輿飾供饌。羊曼拜丹陽尹,客來蚤者,並得佳設。日晏漸罄,不復及精,隨客早晩,不問貴賤。羊固拜臨海,竟日皆美供。雖晩至,亦獲盛饌。時論以固之豐華,不如曼之眞率。
강을 건너온 처음에는 벼슬에 임명되면 수레를 꾸미고 음식을 대접하였다.
양만이 단양윤에 임명되었을 때, 손이 일찍 오면 아울러 좋은 상을 받았고 날이 저물어 차츰 다하면 다시 고운 것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손이 이르고 늦음에 따를 뿐 귀하고 천함을 묻지 않았다.
양고는 임해에 임명되었을 때 온종일 다 아름다운 대접이라, 비록 늦게 이르러도 또한 성한 반찬을 얻었다.
그때의 논은 양고의 넉넉하고 화려함이 양만의 참되고 시원함만 못하다 하였다.
협주 2
《曼別傳》曰:「曼字延祖,泰山南城人。父暨,陽平太守。曼頽縱宏任,飲酒誕節,與陳留阮放等號『兗州八達』。累遷丹陽尹,爲蘇峻所害。」
『만별전』에 이르기를 「양만은 자가 연조요 태산 남성 사람이다. 아버지 양기는 양평태수다. 양만은 무너지듯 놓아 두고 크게 맡기며 술을 마시고 마디를 함부로 하여, 진류의 완방 들과 함께 『연주팔달』이라 불렸다. 여러 벼슬을 거쳐 단양윤에 이르렀고 소준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明帝《東宮僚屬名》曰:「固字道安,太山人。」《文字志》曰:「固父坦,車騎長史。固善草行,著名一時,避亂渡江,累遷黃門侍郎。褒其淸儉,贈大鴻臚。」
명제의 『동궁요속명』에 이르기를 「양고는 자가 도안이요 태산 사람이다」 하였다. 『문자지』에 이르기를 「양고의 아버지 양탄은 거기장사다. 양고는 초서와 행서를 잘 써서 한때에 이름이 났고, 난을 피해 강을 건너 여러 벼슬을 거쳐 황문시랑에 이르렀다. 그 맑고 검소함을 기려 대홍려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21아우의 불 공격은 본디 아랫계책일 뿐이다
周仲智飲酒醉,瞋目還面謂伯仁曰:「君才不如弟,而橫得重名!」須臾,舉蠟燭火擲伯仁。伯仁笑曰:「阿奴火攻,固出下策耳!」
주중지가 술을 마셔 취하여 눈을 부릅뜨고 낯을 돌려 백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재주가 아우만 못한데 함부로 무거운 이름을 얻었소."
잠깐 뒤에 촛불을 들어 백인에게 던졌다.
백인이 웃으며 말하였다. "아우의 불 공격은 본디 아랫계책일 뿐이다."
협주 1
《孫子兵法》曰:「火攻有五:一曰火人,二曰火積,三曰火車,四曰火軍,五曰火隊。凡軍必知五火之變,故以火攻者,明也。」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불로 치는 데 다섯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불사름이요, 둘째는 쌓아 둔 것을 불사름이요, 셋째는 수레를 불사름이요, 넷째는 군사를 불사름이요, 다섯째는 대오를 불사름이다. 무릇 군사는 반드시 다섯 불의 바뀜을 알아야 하므로, 불로 치는 것은 밝음이다」 하였다.
22이 안이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 데요
顧和始爲揚州從事。月旦當朝,未入頃,停車州門外。周侯詣丞相,歴和車邊。和覓蝨,夷然不動。周既過,反還,指顧心曰:「此中何所有?」顧搏蝨如故,徐應曰:「此中最是難測地。」周侯既入,語丞相曰:「卿州吏中有一令僕才。」
고화가 처음 양주종사가 되었다.
초하루에 마땅히 조회할 때인데 아직 들어가기 전에 잠깐 주 문 밖에 수레를 세웠다.
주후가 승상을 찾아가며 고화의 수레 곁을 지나갔다. 고화가 이를 잡고 있는데 태연히 움직이지 않았다.
주후가 이미 지나갔다가 도로 돌아와 고화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안에 무엇이 있소."
고화가 예전처럼 이를 잡으며 천천히 응하였다. "이 안이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 데요."
주후가 들어가서 승상에게 말하였다. "경의 주 아전 가운데 상서령과 복야가 될 재목이 하나 있소."
협주 2
《語林》曰:「周侯飲酒已醉,著白祫,憑兩人來詣丞相。」
『어림』에 이르기를 「주후가 술을 마셔 이미 취하여 흰 겹옷을 입고 두 사람에게 기대어 승상을 찾아왔다」 하였다.
《中興書》曰:「和有操量,弱冠知名。」
『중흥서』에 이르기를 「고화는 몸가짐과 도량이 있어 스무 살에 이름이 알려졌다」 하였다.
23이 솜씨를 어찌 도적에게 붙게 하겠는가
庾太尉與蘇峻戰,敗,率左右十餘人,乘小船西奔。亂兵相剝掠,射誤中柂工,應絃而倒。舉船上咸失色分散,亮不動容,徐曰:「此手那可使著賊!」衆迺安。
유태위가 소준과 싸워 지고 곁의 사람 열 남짓을 이끌고 작은 배를 타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어지러운 군사가 서로 벗기고 빼앗는데, 활을 쏘다가 잘못 키잡이를 맞혀 시위 소리에 응하여 쓰러졌다. 배 위에 있던 이들이 다 낯빛을 잃고 흩어졌다.
유량이 낯빛을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말하였다. "이 솜씨를 어찌 도적에게 붙게 하겠는가."
무리가 이에 편안해졌다.
협주 1
《晉陽秋》曰:「蘇峻作逆,詔亮都督征討,戰於建陽門外,王師敗績,亮於陳攜二弟奔温嶠。」
『진양추』에 이르기를 「소준이 거스름을 지으니 조칙으로 유량에게 치고 토벌하기를 도독하게 하여 건양문 밖에서 싸웠는데, 왕의 군사가 무너져 유량이 진중에서 두 아우를 이끌고 온교에게 달아났다」 하였다.
24말에서 떨어져 땅에 굴렀으나 뜻과 낯빛이 태연하였다
庾小征西嘗出未還。婦母阮是劉萬安妻,與女上安陵城樓上。俄頃翼歸,策良馬,盛輿衞。阮語女:「聞庾郎能騎,我何由得見?」婦告翼,翼便爲於道開鹵簿盤馬,始兩轉,墜馬墮地,意色自若。
유소정서가 일찍이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의 어머니 완씨는 유만안의 아내인데 딸과 함께 안릉의 성루 위에 올랐다.
잠깐 뒤에 유익이 돌아오는데 좋은 말을 채찍질하고 수레와 호위가 성대하였다.
완씨가 딸에게 말하였다. "유랑이 말을 잘 탄다 들었는데 내가 어찌하면 볼 수 있겠느냐."
아내가 유익에게 알리니, 유익이 곧 길에서 의장을 벌이고 말을 돌렸다. 비로소 두 바퀴 돌자 말에서 떨어져 땅에 굴렀는데 뜻과 낯빛이 태연하였다.
협주 2
《劉氏譜》曰:「劉綏妻陳留阮蕃女,字幼娥。」綏,別見。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수의 아내는 진류 완번의 딸이니 자는 유아다」 하였다. 유수는 따로 보인다.
《庾氏傳》曰:「翼娶髙平劉綏女,字靜女。」
『유씨전』에 이르기를 「유익이 고평 유수의 딸을 맞았으니 자는 정녀다」 하였다.
25조정 사이에 짐짓 다시 이런 어진 이가 있구나
宣武與簡文、太宰共載,密令人在輿前後鳴鼓大叫。鹵簿中驚擾,太宰惶怖求下輿。顧看簡文,穆然淸恬。宣武語人曰:「朝廷間故復有此賢。」
선무가 간문제와 태재와 함께 수레를 타고, 몰래 사람을 시켜 수레 앞뒤에서 북을 울리고 크게 소리치게 하였다.
의장 가운데가 놀라 어지러워지자 태재가 두려워 수레에서 내리기를 구하였다. 간문제를 돌아보니 아득히 맑고 편안하였다.
선무가 남에게 말하였다. "조정 사이에 짐짓 다시 이런 어진 이가 있구나."
협주 3
桓温
환온이다.
武陵王晞
무릉왕 사마희다.
《續晉陽秋》曰:「帝性温深,雅有局鎭。嘗與桓温、太宰武陵王晞同乘,至板橋,温密敕令無因鳴角鼓譟,部伍並驚馳,温陽駭異,晞大震,帝舉止自若,音顏無變。温毎以此稱其德量,故論者謂温服憚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임금은 성품이 따뜻하고 깊으며 우아하게 국량과 진중함이 있었다. 일찍이 환온과 태재 무릉왕 사마희와 함께 수레를 타고 판교에 이르렀는데, 환온이 몰래 까닭 없이 뿔피리를 울리고 북 치며 떠들라 명하니, 대오가 아울러 놀라 내달렸다. 환온이 거짓으로 놀라 남달리 여기고 사마희는 크게 떨었는데, 임금은 몸가짐이 태연하여 소리와 낯빛이 바뀌지 않았다. 환온이 늘 이로써 그 덕과 도량을 일컬었으므로, 따지는 이들이 환온이 따르고 꺼렸다 이른다」 하였다.
26왕소가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다
王劭、王薈共詣宣武,正値收庾希家。薈不自安,逡巡欲去;劭堅坐不動,待收信還,得不定迺出。論者以劭爲優。
왕소와 왕회가 함께 선무를 찾아갔는데 마침 유희의 집을 잡아들이는 때였다.
왕회는 스스로 편치 못하여 머뭇거리며 가려 하였고, 왕소는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잡으러 간 기별이 돌아와 정해지지 않았음을 알고서야 이에 나왔다.
따지는 이들이 왕소를 나은 이로 여겼다.
협주 2
《劭薈別傳》曰:「劭字敬倫,丞相導第五子。淸貴簡素,研味玄賾。大司馬桓温稱爲『鳳鶵』。累遷尚書僕射、呉國内史。薈字敬文,丞相最小子。有淸譽,夷泰無競,仕至鎭軍將軍。」
『왕소·왕회별전』에 이르기를 「왕소는 자가 경륜이요 승상 왕도의 다섯째 아들이다. 맑고 귀하며 간결하고 수수하여 아득하고 깊은 데를 갈고 맛보았다. 대사마 환온이 일컬어 『봉의 새끼』라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복야와 오국내사에 이르렀다. 왕회는 자가 경문이요 승상의 가장 작은 아들이다. 맑은 기림이 있고 평온하여 다투지 않았으며 벼슬이 진군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中興書》曰:「希字始彦,司空冰長子。累遷徐兗二州刺史。希兄弟貴盛,桓温忌之,諷免希官,遂奔於暨陽。初,郭璞筮冰子孫必有大禍,唯固三陽可以有後。故希求鎭山陽,弟友爲東陽,希自家暨陽。及温誅希,弟柔、倩聞希難,逃於海陵。後還京口聚衆,事敗,爲温所誅。」
『중흥서』에 이르기를 「유희는 자가 시언이요 사공 유빙의 맏아들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서주와 연주 두 주의 자사에 이르렀다. 유희의 형제가 귀하고 성하니 환온이 이를 시새워 넌지시 유희의 벼슬을 면하게 하매 마침내 기양으로 달아났다. 처음에 곽박이 점쳐 유빙의 자손에게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니 오직 세 양을 굳게 하면 뒤를 둘 수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유희가 산양 지키기를 구하고 아우 유우가 동양이 되고 유희가 스스로 기양에 집을 삼았다. 환온이 유희를 베자 아우 유유와 유천이 유희의 어려움을 듣고 해릉으로 달아났다. 뒤에 경구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으나 일이 무너져 환온에게 베였다」 하였다.
27치생은 장막에 든 손이라 하겠소
桓宣武與郗超議芟夷朝臣,條牒既定,其夜同宿。明晨起,呼謝安、王坦之入,擲疎示之。郗猶在帳内,謝都無言,王直擲還,云:多!宣武取筆欲除,郗不覺竊從帳中與宣武言。謝含笑曰:「郗生可謂入幕賓也。」
환선무가 치초와 함께 조정 신하를 베어 없앨 일을 의논하여 조목과 문서가 이미 정해지자 그날 밤 함께 묵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사안과 왕탄지를 불러들이고 문서를 던져 보였다.
치초는 아직 휘장 안에 있었다. 사안은 도무지 말이 없었고 왕탄지는 곧바로 던져 돌려주며 말하였다. "많소."
선무가 붓을 들어 덜어 내려 하는데, 치초가 저도 모르게 몰래 휘장 안에서 선무와 말하였다.
사안이 웃음을 머금고 말하였다. "치생은 장막에 든 손이라 하겠소."
협주 2
《續晉陽秋》曰:「超謂温雄武,當樂推之運,遂深自委結。温亦深相器重,故潛謀密計,莫不預焉。」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치초가 환온을 씩씩하고 굳세어 마땅히 즐거이 밀어 주는 운수에 있다 여겨, 마침내 깊이 스스로 맡기고 맺었다. 환온도 또한 깊이 서로 그릇으로 무겁게 여겼으므로 남몰래 꾀하는 계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였다.
帳,一作帷。
장은 한 본에 유로 되어 있다.
28이와 같으면 장차 돌아가지 못하겠소
謝太傅盤桓東山時,與孫興公諸人汎海戲。風起浪涌,孫王諸人色並遽,便唱使還。太傅神情方王,吟嘯不言。舟人以公貌閑意説,猶去不止。既風轉急,浪猛,諸人皆諠動不坐。公徐云:「如此,將無歸!」衆人即承響而回。於是審其量,足以鎭安朝野。
사태부가 동산에서 서성이던 때에 손흥공 여러 사람과 바다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바람이 일고 물결이 솟구치니 손씨와 왕씨 여러 사람이 낯빛이 아울러 다급해져 곧 돌아가자고 외쳤다.
태부는 정신과 뜻이 바야흐로 왕성하여 읊고 휘파람 불며 말이 없었다. 뱃사람이 공의 모습이 한가롭고 뜻이 기쁘다 하여 오히려 가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바람이 더욱 급해지고 물결이 사나워 여러 사람이 다 떠들며 움직여 앉지 못하였다.
공이 천천히 말하였다. "이와 같으면 장차 돌아가지 못하겠소."
뭇사람이 곧 소리를 받들어 돌아갔다.
이에 그 도량이 조정과 들을 눌러 편안히 하기에 넉넉함을 살폈다.
협주 1
《中興書》曰:「安先居會稽,與支道林、王羲之、許詢共遊處。出則漁弋山水,入則談説屬文,未嘗有處世意也。」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안이 먼저 회계에 살며 지도림과 왕희지와 허순과 함께 노닐었다. 나가면 산과 물에서 고기 잡고 사냥하며 들어오면 이야기하고 글을 지어, 일찍이 세상에 나설 뜻이 없었다」 하였다.
29섬돌을 바라보며 자리로 나아가 바야흐로 낙생영을 하다
桓公伏甲設饌,廣延朝士,因此欲誅謝安、王坦之。王甚遽,問謝曰:「當作何計?」謝神意不變,謂文度曰:「晉阼存亡,在此一行。」相與倶前。王之恐狀,轉見於色。謝之寬容,愈表於貌。望階趨席,方作洛生詠,諷「浩浩洪流」。桓憚其曠遠,乃趣解兵。王謝舊齊名,於此始判優劣。
환공이 갑옷 입은 군사를 숨기고 음식을 베풀어 조정 선비를 널리 불렀으니, 이로써 사안과 왕탄지를 베려 한 것이었다.
왕탄지가 몹시 다급하여 사안에게 물었다. "마땅히 무슨 셈을 하겠소."
사안이 정신과 뜻이 바뀌지 않고 문도에게 말하였다. "진나라 왕조의 있고 없음이 이 한 걸음에 있소."
서로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왕탄지의 두려운 모습은 점점 낯빛에 드러났고 사안의 너그러움은 더욱 모습에 나타났다.
섬돌을 바라보며 자리로 나아가 바야흐로 낙생영을 하며 「넘실넘실 큰 흐름」을 읊었다.
환공이 그 트이고 멂을 꺼려 이에 서둘러 군사를 풀었다.
왕씨와 사씨가 예부터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로써 비로소 낫고 못함이 갈렸다.
협주 2
《晉安帝紀》曰:「簡文晏駕,遺詔桓温依諸葛亮、王導故事,温大怒,以爲黜其權,謝安、王坦之所建也。入赴山陵,百官拜於道側,在位望者,戰慄失色。或云自此欲殺王謝。」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간문제가 돌아가며 남긴 조칙에 환온에게 제갈량과 왕도의 옛일에 따르라 하니, 환온이 크게 성내어 그 권세를 물리친 것이 사안과 왕탄지가 세운 바라 여겼다. 능에 나아가 달려갈 때 온갖 벼슬아치가 길가에서 절하였는데, 자리에 있으며 바라보이는 이들이 떨며 낯빛을 잃었다. 어떤 이는 이로부터 왕씨와 사씨를 죽이려 하였다 한다」 하였다.
按,《宋明帝文章志》曰:「安能作洛下書生詠,而少有鼻疾,語音濁。後名流多斅其詠,弗能及,手掩鼻而吟焉。桓温止新亭,大陳兵衞,呼安及坦之,欲於坐害之。王入失措,倒執手版,汗流霑衣。安神姿舉動,不異於常。舉目徧歴温左右衞士,謂温曰:『安聞諸侯有道,守在四鄰。明公何有壁間著阿堵輩?』温笑曰:『正自不能不爾。』於是矜莊之心頓盡。命部左右,促燕行觴,笑語移日。
살피건대 『송명제문장지』에 이르기를 「사안이 낙하 서생의 읊기를 할 수 있었는데 조금 코 병이 있어 목소리가 흐렸다. 뒤에 이름난 이들이 흔히 그 읊기를 본떴으나 미치지 못하여 손으로 코를 막고 읊었다. 환온이 신정에 머물며 군사와 호위를 크게 벌여 놓고 사안과 왕탄지를 불러 자리에서 해치려 하였다. 왕탄지가 들어가 어찌할 바를 잃어 손판을 거꾸로 잡고 땀이 흘러 옷을 적셨다. 사안은 정신과 자태와 몸가짐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눈을 들어 환온의 곁 호위 군사를 두루 지나보고 환온에게 이르기를 『제가 듣기에 제후에게 도가 있으면 지킴이 사방 이웃에 있다 하였습니다. 명공께서는 어찌 벽 사이에 이런 무리를 두셨습니까』 하니, 환온이 웃으며 『바로 절로 그러지 않을 수 없소』 하였다. 이에 뽐내고 엄한 마음이 문득 다하였다. 곁의 사람에게 명하여 서둘러 잔치하고 잔을 돌리게 하여 웃고 말하며 날을 옮겼다」 하였다.
30목숨을 위해 잠깐을 참지 못하시오
謝太傅與王文度共詣郗超,日旰未得前,王便欲去。謝曰:「不能爲性命忍俄頃?」
사태부가 왕문도와 함께 치초를 찾아갔는데 날이 저물도록 앞에 나아가지 못하니 왕문도가 곧 가려 하였다.
사태부가 말하였다. "목숨을 위해 잠깐을 참지 못하시오."
협주 1
超得寵桓温,專殺生之威。
치초가 환온에게 사랑받아 죽이고 살리는 위엄을 오로지하였다.
31나는 본디 그대의 낯을 위해 셈하지 않았소
支道林還東,時賢並送於征虜亭。蔡子叔前至,坐近林公。謝萬石後來,坐小遠。蔡暫起,謝移就其處。蔡還,見謝在焉,因合褥舉謝擲地,自復坐。謝冠幘傾脱,乃徐起振衣就席,神意甚平,不覺瞋沮。坐定,謂蔡曰:「卿奇人,殆壞我面。」蔡答曰:「我本不爲卿面作計。」其後,二人倶不介意。
지도림이 동쪽으로 돌아갈 때 그때의 어진 이들이 아울러 정로정에서 배웅하였다.
채자숙이 먼저 이르러 임공 가까이 앉았고 사만석이 뒤에 와서 조금 멀리 앉았다.
채씨가 잠깐 일어나자 사씨가 그 자리로 옮겨 앉았다. 채씨가 돌아와 사씨가 거기 있음을 보고, 이로 인해 요를 합쳐 사씨를 들어 땅에 던지고 스스로 다시 앉았다.
사씨는 관과 두건이 기울어 벗겨졌는데 이에 천천히 일어나 옷을 털고 자리에 나아가니, 정신과 뜻이 몹시 고르고 성내거나 풀 죽음을 느끼지 못하였다.
자리가 정해지자 채씨에게 말하였다. "경은 기이한 사람이오. 하마터면 내 낯을 무너뜨릴 뻔하였소."
채씨가 대답하였다. "나는 본디 그대의 낯을 위해 셈하지 않았소."
그 뒤에 두 사람이 함께 마음에 두지 않았다.
협주 3
《髙逸沙門傳》曰:「遁爲哀帝所迎,遊京邑久,心在故山,乃拂衣王都,還就巖穴。」
『고일사문전』에 이르기를 「지둔이 애제에게 맞아져 서울에 노닌 지 오래되었으나, 마음이 옛 산에 있어 이에 왕의 도읍에서 옷을 떨치고 바위굴로 돌아갔다」 하였다.
《丹陽記》曰:「太安中,征虜將軍謝安立此亭,因以爲名。」
『단양기』에 이르기를 「태안 연간에 정로장군 사안이 이 정자를 세웠으므로 이로 인해 이름 삼았다」 하였다.
《中興書》曰:「蔡糸字子叔,濟陽人,司徒謨第二子。有文理,仕至撫軍長史。」
『중흥서』에 이르기를 「채계는 자가 자숙이요 제양 사람이니 사도 채모의 둘째 아들이다. 글과 결이 있어 벼슬이 무군장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32쌀을 덜었소
郗嘉賓欽崇釋道安德問,餉米千斛,修書累紙,意寄殷勤。道安答直云:「損米。」愈覺有待之爲煩。
치가빈이 석도안의 덕과 소문을 공경하고 높여, 쌀 천 섬을 보내고 여러 장에 걸쳐 글을 닦아 뜻과 부침이 도타웠다.
도안이 답하기를 곧바로 이르렀다. "쌀을 덜었소."
기다림이 있음이 번거로움임을 더욱 느끼게 한다.
협주 1
《安和上傳》曰:「釋道安者,常山薄柳人,本姓衞,年十二作沙門。神性聰敏而貌至陋,佛圖澄甚重之。値石氏亂,於陸渾山木食修學,爲慕容俊所逼,乃住襄陽。以佛法東流,經籍錯謬,更爲條章,標序篇目,爲之注解。自支道林等皆宗其理。無疾卒。」
『안화상전』에 이르기를 「석도안이라는 이는 상산 박류 사람이요 본디 성은 위씨인데, 열두 살에 사문이 되었다. 정신과 성품이 총명하고 재빠르나 모습이 지극히 추하였는데 불도징이 몹시 무겁게 여겼다. 석씨의 어지러움을 만나 육혼산에서 나무 열매를 먹으며 배움을 닦다가, 모용준에게 다그쳐져 이에 양양에 머물렀다. 불법이 동쪽으로 흐르며 경전이 어긋나고 그르므로 다시 조목과 장을 지어 편의 제목을 표시하여 차례 짓고 이를 위해 주해하였다. 지도림 들로부터 다 그 결을 마루로 삼았다. 병 없이 죽었다」 하였다.
33사봉은 짐짓 기이한 선비다
謝安南免吏部尚書還東,謝太傅赴桓公司馬出西,相遇破岡。既當遠別,遂停三日共語。太傅欲慰其失官,安南輙引以它端。雖信宿中塗,竟不言及此事。太傅深恨在心未盡,謂同舟曰:「謝奉故是奇士。」
사안남이 이부상서에서 물러나 동쪽으로 돌아가고, 사태부가 환공의 사마로 나아가 서쪽으로 가다가 파강에서 서로 만났다.
이미 멀리 헤어지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사흘을 머물러 함께 말하였다.
태부가 그 벼슬 잃음을 위로하려 하면 안남이 문득 다른 실마리로 이끌었다. 비록 길 가운데서 이틀 밤을 묵었으나 마침내 이 일에 미쳐 말하지 않았다.
태부가 마음에 다하지 못함을 깊이 한스러워하며 같은 배에 탄 이에게 말하였다. "사봉은 짐짓 기이한 선비다."
협주 1
《晉百官名》曰:「謝奉字弘道,會稽山陰人。」《謝氏譜》曰:「奉祖端,散騎常侍。父鳳,丞相主簿。奉歴安南將軍、廣州刺史、吏部尚書。」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사봉은 자가 홍도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하였다. 『사씨보』에 이르기를 「사봉의 할아버지 사단은 산기상시요 아버지 사봉은 승상주부다. 사봉은 안남장군과 광주자사와 이부상서를 지냈다」 하였다.
34사공이 아득히 그 도량을 알다
戴公從東出,謝太傅往看之。謝本輕戴,見但與論琴書。戴既無吝色,而談琴書愈妙。謝悠然知其量。
대공이 동쪽에서 나오자 사태부가 가서 보았다.
사공이 본디 대공을 가벼이 여겨, 보고서 다만 거문고와 글씨만 논하였다.
대공이 아까워하는 낯빛이 없고 거문고와 글씨를 말함이 더욱 묘하였다. 사공이 아득히 그 도량을 알았다.
협주 1
《晉安帝紀》曰:「戴逵字安道,譙國人。少有淸操,恬和通任,爲劉眞長所知。性甚快暢,泰於娯生。好鼓琴,善屬文,尤樂遊燕,多與髙門風流者游,談者許其通隱。屢辭徴命,遂著髙尚之稱。」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대규는 자가 안도요 초국 사람이다. 젊어서 맑은 지조가 있고 편안하고 화하며 통하고 맡겨, 유진장에게 알려졌다. 성품이 몹시 시원스럽고 삶을 즐기기에 넉넉하였다.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고 글 짓기를 잘하였으며 더욱 노닐고 잔치하기를 즐겨, 흔히 높은 문의 풍류 있는 이들과 노니니 이야기하는 이들이 그 통한 숨음을 허락하였다. 자주 부름을 사양하여 마침내 높고 높다는 일컬음을 지었다」 하였다.
35아이들이 도적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謝公與人圍棊,俄而謝玄淮上信至。看書竟,默然無言,徐向局。客問淮上利害?答曰:「小兒輩大破賊。」意色舉止,不異於常。
사공이 남과 바둑을 두는데 이윽고 사현이 회수 가에서 보낸 기별이 이르렀다.
글을 다 보고 잠잠히 말이 없이 천천히 판을 향하였다.
손이 회수 가의 이롭고 해로움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아이들이 도적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뜻과 낯빛과 몸가짐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협주 1
《續晉陽秋》曰:「初,苻堅南寇,京師大震。謝安無懼色,方命駕出墅,與兄子玄圍棋。夜還乃處分,少日皆辦。破賊又無喜容。其髙量如此。」《謝車騎傳》曰:「氐賊苻堅,傾國大出,衆號百萬。朝廷遣諸軍距之,凡八萬。堅進屯壽陽,玄爲前鋒都督,與從弟琰等選精鋭決戰。射傷堅,俘獲數萬計,得僞輦及雲母車,寶器山積,錦剡萬端,牛、馬、臚、騾、駝十萬頭匹。」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부견이 남쪽으로 쳐들어오자 서울이 크게 떨었다. 사안이 두려워하는 낯빛이 없이 바야흐로 수레를 내라 명하여 별장에 나가, 형의 아들 사현과 바둑을 두었다. 밤에 돌아와 이에 나누어 처리하니 며칠 안에 다 갖추어졌다. 도적을 깨뜨리고도 또 기뻐하는 낯빛이 없었다. 그 높은 도량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사거기전』에 이르기를 「저족 도적 부견이 나라를 기울여 크게 나오니 무리가 백만이라 일컬었다. 조정이 여러 군사를 보내 막았는데 무릇 팔만이었다. 부견이 나아가 수양에 진 치니 사현이 앞선 봉우리의 도독이 되어 사촌아우 사염 들과 함께 날래고 굳센 이를 가려 결단코 싸웠다. 부견을 쏘아 다치게 하고 사로잡은 것이 수만으로 헤아려졌으며, 거짓 임금의 수레와 운모 수레를 얻고 보배 그릇이 산처럼 쌓였으며 비단이 만 필이요 소와 말과 나귀와 노새와 낙타가 십만 마리였다」 하였다.
36세상이 이로써 두 왕씨의 정신 그릇을 정하다
王子猷、子敬曾倶坐一室,上忽發火,子猷遽走避,不惶取屐;子敬神色恬然,徐喚左右,扶憑而出,不異平常。世以此定二王神宇。
왕자유와 자경이 일찍이 함께 한방에 앉았는데 위에서 홀연 불이 났다.
자유는 다급히 달려 피하느라 나막신 챙길 겨를도 없었고, 자경은 정신과 낯빛이 편안하여 천천히 곁의 사람을 불러 부축을 받아 나오는데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세상이 이로써 두 왕씨의 정신 그릇을 정하였다.
협주 2
《晉百官名》曰:「王徽之,字子猷。」《中興書》曰:「徽之,羲之第五子。卓犖不羈,欲爲傲達,仕至黃門侍郎。」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왕휘지는 자가 자유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휘지는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이다. 우뚝하고 매이지 않아 거만하고 통달하려 하였으며 벼슬이 황문시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續晉陽秋》曰:「獻之雖不脩賞貫,而容止不妄。」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헌지는 비록 기림과 익힘을 닦지 않았으나 몸가짐이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하였다.
37굴대를 잡아 이곳을 마치게 할 만하오
苻堅遊魂近境,謝太傅謂子敬曰:「可將當軸,了其此處。」
부견의 떠도는 넋이 지경에 가까이 오자 사태부가 자경에게 말하였다. "굴대를 잡아 이곳을 마치게 할 만하오."
협주 1
堅,別見。
부견은 따로 보인다.
38위군, 승미가 자못 삼가 살피지 않아 이에 윗나라를 넘보는구려
王僧彌、謝車騎共王小奴許集。僧彌舉酒勸謝云:「奉使君一觴。」謝曰:「可爾。」僧彌勃然起,作色曰:「汝故是呉興溪中釣碣耳!何敢譸張!」謝徐撫掌而笑曰:「衞軍,僧彌殊不肅省,乃侵陵上國也。」
왕승미와 사거기가 함께 왕소노의 처소에 모였다.
승미가 술을 들어 사씨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사군께 한 잔 올립니다."
사씨가 말하였다. "그러시오."
승미가 발끈 일어나 낯빛을 지으며 말하였다. "너는 짐짓 오흥 시내의 낚시하는 돌덩이일 뿐인데 어찌 감히 속이는가."
사씨가 천천히 손뼉을 치며 웃고 말하였다. "위군, 승미가 자못 삼가 살피지 않아 이에 윗나라를 넘보는구려."
협주 3
王珉、謝玄並已見。小奴,王薈小字也。
왕민과 사현은 아울러 이미 보인다. 소노는 왕회의 아이 적 이름이다.
謝玄曾爲徐州,故云使君。
사현이 일찍이 서주자사가 되었으므로 사군이라 한 것이다.
玄叔父安,曾爲呉興,玄少時從之遊。故珉云然。
사현의 작은아버지 사안이 일찍이 오흥을 맡았고 사현이 젊어서 그를 좇아 노닐었다. 그러므로 왕민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39이는 공보의 그릇이다
王東亭爲桓宣武主簿,既承藉,有美譽,公甚欲其人地爲一府之望。初,見謝失儀,而神色自若。坐上賓客即相貶笑。公曰:「不然,觀其情貌,必自不凡。吾當試之。」後因月朝閣下伏,公於内走馬直出突之,左右皆宕仆,而王不動。名價於是大重,咸云「是公輔器也」。
왕동정이 환선무의 주부가 되었는데, 이미 이어받은 바가 있고 아름다운 기림이 있어, 공이 그 사람됨과 문벌로 한 관부의 바람이 되게 하고자 몹시 바랐다.
처음에 뵐 때 몸가짐을 잃었는데도 정신과 낯빛이 태연하였다. 자리 위의 손들이 곧 서로 낮추어 비웃었다.
공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그 정과 모습을 보건대 반드시 절로 예사롭지 않소. 내가 마땅히 그를 시험하겠소."
뒤에 초하루 조회 때 관아 아래에 엎드려 있는데, 공이 안에서 말을 달려 곧장 나와 그에게 부딪쳤다. 곁의 사람이 다 자빠졌으나 왕동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값이 이에 크게 무거워져 다들 「이는 공보의 그릇이다」 하였다.
협주 1
《續晉陽秋》曰:「珣初辟大司馬掾,桓温至重之,常稱『王掾必爲黑頭公,未易才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순이 처음에 대사마의 아전으로 불렸는데 환온이 지극히 무겁게 여겨, 늘 『왕 아전은 반드시 검은 머리의 공이 되리니 쉽지 않은 재목이다』 하였다」 하였다.
40긴 별아, 너에게 술 한 잔을 권한다
太元末,長星見,孝武心甚惡之。夜,華林園中飲酒,舉桮屬星云:「長星!勸爾一桮酒。自古何時有萬歳天子?」
태원 말에 긴 별이 나타나니 효무제가 마음에 몹시 이를 미워하였다.
밤에 화림원 안에서 술을 마시다가 잔을 들어 별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긴 별아, 너에게 술 한 잔을 권한다. 예부터 언제 만세 가는 천자가 있었느냐."
협주 1
徐廣《晉紀》曰:「泰元二十年九月,有蓬星如粉絮,東南行,歴須女、至央星。」按,太元末,唯有此妖,不聞長星也。且漢文八年,有長星出東方。文穎注曰:「長星有光芒,或竟天,或長十丈,或二、三丈,無常也。」此星見,多爲兵革事。此後十六年,文帝乃崩。蓋知長星非關天子,世説虚也。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태원 이십 년 구월에 쑥 같은 별이 있어 솜 부스러기 같았는데, 동남쪽으로 가서 수녀를 지나 앙성에 이르렀다」 하였다. 살피건대 태원 말에 오직 이 요망한 별이 있었을 뿐이요 긴 별이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또 한나라 문제 팔 년에 긴 별이 동쪽에 나왔다. 문영이 주하여 이르기를 「긴 별은 빛살이 있어 더러는 하늘에 뻗치고 더러는 길이가 열 길이며 더러는 두세 길로 늘 그러함이 없다」 하였다. 이 별이 나타나면 흔히 군사의 일이 있다. 이 뒤 열여섯 해에 문제가 이에 돌아갔다. 대개 긴 별이 천자와 상관없음을 알겠으니 『세설』이 헛되다.
41은중감이 서운히 스스로 잃다
殷荊州有所識,作賦,是束皙慢戲之流。殷甚以爲有才,語王恭:「適見新文,甚可觀。」便於手巾函中出之。王讀,殷笑之不自勝。王看竟,既不笑,亦不言好惡,但以如意帖之而已。殷悵然自失。
은형주에게 아는 이가 있어 부를 지었는데 속석의 우스개 무리였다.
은형주가 몹시 재주가 있다 여겨 왕공에게 말하였다. "마침 새 글을 보았는데 몹시 볼 만하오."
곧 수건 상자 안에서 꺼냈다.
왕공이 읽는데 은형주가 웃음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왕공이 다 보고 나서 웃지도 않고 좋다 나쁘다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여의로 이를 덮었을 뿐이었다.
은형주가 서운히 스스로 잃었다.
협주 1
《文士傳》曰:「晳字廣微,陽平元城人,漢太子太傅踈廣後也。王莽末,廣曾孫孟達自東海避難元城,改姓,去『踈』之『足』以爲束氏。晳博學多識,問無不對。元康中,有人自嵩髙山下得竹簡一枚,上兩行科斗書,司空張華以問晳。晳曰:『此明帝顯節陵中策文也。』檢校果然。曾爲麥并賦諸文,文甚俳謔。三十九歳卒,元城爲之廢市。」
『문사전』에 이르기를 「속석은 자가 광미요 양평 원성 사람이니 한나라 태자태부 소광의 뒤다. 왕망 말에 소광의 증손 소맹달이 동해에서 원성으로 난을 피하며 성을 고쳐 『소』에서 『족』을 떼어 속씨로 삼았다. 속석은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많아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원강 연간에 어떤 사람이 숭고산 아래에서 죽간 하나를 얻었는데 위에 두 줄 올챙이 글씨가 있어, 사공 장화가 속석에게 물었다. 속석이 『이는 명제 현절릉 안의 책문입니다』 하였는데 헤아려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일찍이 「맥병부」 등 여러 글을 지었는데 글이 몹시 익살스러웠다. 서른아홉에 죽으니 원성이 그를 위해 저자를 파하였다」 하였다.
42저는 옳음으로 머물지 못하겠습니다
羊綏第二子孚,少有雋才,與謝益壽相好,嘗蚤往謝許,未食。俄而王齊、王暏來。既先不相識,王向席有不説色,欲使羊去。羊了不眄,唯腳委几上,詠矚自若。謝與王敘寒温數語畢,還與羊談賞,王方悟其奇,乃合共語。須臾食下,二王都不得餐,唯屬羊不暇。羊不大應對之,而盛進食,食畢便退。遂苦相留,羊義不住,直云:「向者不得從命,中國尚虚。」二王是孝伯兩弟。
양수의 둘째 아들 양부는 젊어서 뛰어난 재주가 있어 사익수와 서로 좋아하였다.
일찍이 일찍 사씨의 처소에 갔는데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 이윽고 왕제와 왕도가 왔다.
이미 앞서 서로 알지 못하였으므로 왕씨들이 자리를 향해 기뻐하지 않는 낯빛이 있어 양부를 가게 하려 하였다.
양부는 도무지 돌아보지 않고 오직 다리를 안석 위에 얹고 읊고 바라보며 태연하였다.
사씨가 왕씨들과 안부 몇 마디를 마치고 돌아와 양부와 이야기하며 기렸다. 왕씨들이 바야흐로 그 기이함을 깨닫고 이에 함께 말을 나누었다.
잠깐 뒤에 밥이 내려오니 두 왕씨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오직 양부에게 붙느라 겨를이 없었다.
양부는 그리 대꾸하지 않고 성하게 밥을 먹었으며, 먹기를 마치자 곧 물러났다.
마침내 괴롭게 서로 붙드니 양부가 옳음으로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말하였다. "아까 명을 좇지 못하였으니 뱃속이 아직 비었습니다."
두 왕씨는 효백의 두 아우다.
협주 2
益壽,謝混小字也。
익수는 사혼의 아이 적 이름이다.
王睹已見。齊,王熙小字也。《中興書》曰:「熙字叔和,恭次弟。尚鄱陽公主,太子洗馬,早卒。」
왕도는 이미 보인다. 제는 왕희의 아이 적 이름이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희는 자가 숙화요 왕공의 다음 아우다. 파양공주에게 장가들고 태자세마가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