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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감世説新語 識鑒第七

세설신어 世說新語 · 유의경(劉義慶) 엮음 · 유효표(劉孝標) 주 · 남조 송(5세기) · 양 유효표 주 · 단락 28 · 한자 2,051자 · 낭독 8.2분

「세설신어」 中巻上 「식감」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해가 멉니다. 사람이 해 가에서 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 몇 살 난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서 한 대답이다. 이튿날 다시 묻자 「해가 가깝습니다. 눈을 들면 해는 보이나 장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했다.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 이백여 해,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과 몸짓만을 서른여섯 갈래로 나누어 모았다. 덕행·언어·정사·문학에서 시작해 사치·성냄·시새움·원수까지 내려가니, 기릴 것과 나무랄 것을 같은 무게로 놓은 셈이다. 대숲의 일곱 사람이 나오고, 왕희지가 사위로 뽑히고, 눈 오는 밤 배를 저어 벗의 집 앞까지 갔다가 흥이 다했다며 돌아온다. 한 조각이 대개 서너 줄, 길어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유효표가 백여 종의 책을 끌어와 단 주는 그 책들이 거의 다 없어진 지금 도리어 본문보다 길게 남았다.

1그대는 어지러운 세상의 영웅이요 다스려진 세상의 간사한 도적이오

曹公少時見喬玄,玄謂曰:「天下方亂,群雄虎爭,撥而理之,非君乎?然君實亂世之英雄,治世之姦賊。恨吾老矣,不見君富貴,當以子孫相累。」

조공이 젊었을 때 교현을 뵈니 교현이 일러 말하였다. "천하가 바야흐로 어지러워 뭇 영웅이 범처럼 다투는데, 이를 다스려 바로잡을 이가 그대가 아니겠소. 그러나 그대는 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영웅이요 다스려진 세상의 간사한 도적이오. 내가 늙어 그대의 부귀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니, 마땅히 자손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협주 1

《續漢書》曰:「玄字公祖,梁國睢陽人。少治禮及《嚴氏春秋》。累遷尚書令。玄嚴明有才略,長於知人。初,魏武帝爲諸生,未知名也,玄甚異之。」《魏書》曰:「玄見太祖曰:『吾見士多矣,未有若君者!天下將亂,非命世之才不能濟也。能安之者,其在君乎?』」按,《世語》曰:「玄謂太祖:『君未有名,可交許子將。』太祖乃造子將,子將納焉。」孫盛《雜語》曰:「太祖嘗問許子將:『我何如人?』固問,然後子將答曰:『治世之能臣,亂世之姦雄。』太祖大笑。」《世説》所言謬矣。

『속한서』에 이르기를 「교현은 자가 공조요 양국 수양 사람이다. 젊어서 예와 엄씨의 『춘추』를 닦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령에 이르렀다. 교현은 엄하고 밝으며 재주와 헤아림이 있고 사람 알아보는 데 뛰어났다. 처음에 위나라 무제가 여러 유생이었을 때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교현이 몹시 그를 남달리 여겼다」 하였다. 『위서』에 이르기를 「교현이 태조를 보고 이르기를 『내가 선비를 많이 보았으나 그대 같은 이가 있지 않았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터인데 세상에 이름날 재주가 아니면 건지지 못한다. 이를 편안히 할 수 있는 이가 그대에게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세어』에 이르기를 「교현이 태조에게 『그대는 아직 이름이 없으니 허자장과 사귈 만하다』 하였다. 태조가 이에 자장을 찾아가니 자장이 받아들였다」 하였다. 손성의 『잡어』에 이르기를 「태조가 일찍이 허자장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오』 물으며 굳이 물으니, 그런 뒤에야 자장이 대답하기를 『다스려진 세상의 재능 있는 신하요 어지러운 세상의 간사한 영웅이오』 하매 태조가 크게 웃었다」 하였다. 『세설』이 말한 바는 그르다.

2변두리에 기대어 험한 데를 지키면 한 지방의 주인이 되기에 넉넉합니다

曹公問裴潛曰:「卿昔與劉備共在荊州,卿以備才如何?」潛曰:「使居中國,能亂人,不能爲治。若乘邊守險,足爲一方之主。」

조공이 배잠에게 물었다. "경이 옛날 유비와 함께 형주에 있었는데, 경은 유비의 재주를 어떻게 보오."

배잠이 말하였다. "중원에 살게 하면 사람을 어지럽힐 수는 있어도 다스림을 하지는 못합니다. 만일 변두리에 기대어 험한 데를 지키면 한 지방의 주인이 되기에 넉넉합니다."

협주 1

《魏志》曰:「潛字文行,河東人。避亂荊州,劉表待之賓客禮。潛私謂王粲、司馬芝曰:『劉牧非霸王之才,而欲以西伯自處,其敗無日矣!』遂南渡,適長沙。」

『위지』에 이르기를 「배잠은 자가 문행이요 하동 사람이다. 형주로 난을 피하니 유표가 손의 예로 대접하였다. 배잠이 남몰래 왕찬과 사마지에게 이르기를 『유목은 패왕의 재주가 아닌데 서백으로 스스로를 대하려 하니 그 무너짐이 며칠 남지 않았다』 하고, 마침내 남으로 건너 장사로 갔다」 하였다.

3이 세 어진 이는 다 덕을 무너뜨리는 사람일 뿐이오

何晏、鄧颺、夏侯玄並求傅嘏交,而嘏終不許。諸人乃因荀粲説合之,謂嘏曰:「夏侯太初一時之傑士,虚心於子,而卿意懷不可,交合則好成,不合則致隟。二賢若穆,則國之休,此藺相如所以下廉頗也。」傅曰:「夏侯太初志大心勞,能合虚譽,誠所謂利口覆國之人。何晏、鄧颺有爲而躁,博而寡要,外好利而内無關籥,貴同惡異,多言而妬前。多言多釁,妬前無親。以吾觀之:此三賢者,皆敗德之人爾!遠之猶恐罹禍,況可親之邪?」後皆如其言。

하안과 등양과 하후현이 아울러 부하와 사귀기를 구하였으나 부하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이에 순찬을 말미암아 달래어 맞추려 하며 부하에게 일렀다. "하후태초는 한때의 뛰어난 선비로 그대에게 마음을 비우는데 경의 뜻은 옳지 않다 품고 있소. 사귀어 맞으면 좋음이 이루어지고 맞지 않으면 틈이 생기오. 두 어진 이가 만일 화목하면 곧 나라의 아름다움이니, 이것이 인상여가 염파에게 몸을 낮춘 까닭이오."

부하가 말하였다. "하후태초는 뜻이 크고 마음이 수고로워 헛된 기림을 모을 수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날카로운 입으로 나라를 엎을 사람이오. 하안과 등양은 함이 있으면서 조급하고 넓으면서 요긴함이 적으며, 밖으로 이로움을 좋아하고 안으로 빗장이 없으며, 같음을 귀히 여기고 다름을 미워하며 말이 많고 앞선 이를 시새우오. 말이 많으면 틈이 많고 앞선 이를 시새우면 친함이 없소. 내가 보건대 이 세 어진 이는 다 덕을 무너뜨리는 사람일 뿐이오. 멀리해도 오히려 화에 걸릴까 두려운데 하물며 가까이할 수 있겠소."

뒤에 다 그 말과 같았다.

협주 3

《魏略》曰:「鄧颺字玄茂,南陽宛人,鄧禹之後也。少得士名。明帝時爲中書郎,以與李勝等爲浮華被斥。正始中,遷侍中尚書。爲人好貨,臧艾以父妾與颺,得顯官,京師爲之語曰:『以官易富鄧玄茂。』何晏選不得人,頗由颺,以黨曹爽誅。」

『위략』에 이르기를 「등양은 자가 현무요 남양 완 사람이니 등우의 뒤다. 젊어서 선비의 이름을 얻었다. 명제 때 중서랑이 되었는데 이승 들과 뜬 꽃 같다 하여 물리쳐졌다. 정시 연간에 시중상서로 옮겼다. 사람됨이 재물을 좋아하여 장애가 아비의 첩을 등양에게 주고 드러난 벼슬을 얻으니, 서울에서 이를 두고 말하기를 『벼슬로 넉넉함과 바꾼 등현무』 하였다. 하안이 사람 뽑는 데 사람을 얻지 못한 것이 자못 등양을 말미암은 것이다. 조상의 무리라 하여 베였다」 하였다.

《史記》曰:「相如以功大拜上卿,位在廉頗右。頗怒,欲辱之。相如毎稱疾,望見,引車避匿。其舍人欲去之,相如曰:『夫以秦王之威而吾廷叱之,何畏廉將軍哉?顧秦彊趙弱,秦以吾二人故不敢加兵於趙。今兩虎鬥,勢不倶生,吾以公家急而後私讎也。』頗聞,謝罪。」

『사기』에 이르기를 「인상여가 공이 크다 하여 상경에 임명되어 자리가 염파의 위에 있었다. 염파가 성내어 그를 욕보이려 하였다. 상여가 늘 병을 핑계하고, 멀리서 보면 수레를 끌어 피하여 숨었다. 그 집사람이 떠나려 하니 상여가 『무릇 진나라 왕의 위엄으로도 내가 조정에서 그를 꾸짖었는데 어찌 염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다만 진나라가 굳세고 조나라가 약한데, 진나라가 우리 두 사람 때문에 감히 조나라에 군사를 더하지 못한다. 이제 두 범이 싸우면 형세가 함께 살지 못하니, 나는 나라의 급함을 앞세우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염파가 듣고 죄를 사죄하였다」 하였다.

《傅子》曰:「是時何晏以才辯顯於貴戚之閒,鄧颺好交通,合徒黨,鬻聲名於閭閻,夏侯玄以貴臣子,少有重名,皆求交於嘏,嘏不納也。嘏友人荀粲有淸識遠志,然猶勸嘏結交云。」

『부자』에 이르기를 「이때 하안이 재주와 말솜씨로 귀한 외척 사이에 드러났고, 등양은 사귀어 통하기를 좋아하여 무리와 패를 모으고 마을에 이름을 팔았으며, 하후현은 귀한 신하의 아들로 젊어서 무거운 이름이 있어, 다 부하와 사귀기를 구하였으나 부하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하의 벗 순찬은 맑은 식견과 먼 뜻이 있었으나 그래도 부하에게 사귀어 맺기를 권하였다 한다」 하였다.

4산소부의 말이 이에 천하의 이름난 말이다

晉武帝講武於宣武塲,帝欲偃武修文,親自臨幸,悉召群臣。山公謂不宜爾,因與諸尚書言孫呉用兵本意。遂究論,舉坐無不咨嗟。皆曰:「山少傅乃天下名言。」後諸王驕汰,輕遘禍難,於是寇盜處處蟻合,郡國多以無備,不能制服,遂漸熾盛,皆如公言。時人以謂山濤不學孫呉而闇與之理會。王夷甫亦嘆云:「公闇與道合。」

진나라 무제가 선무장에서 무예를 강할 때, 임금이 무예를 눕히고 글을 닦으려 하여 몸소 나아가고 뭇 신하를 다 불렀다.

산공이 그리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이로 인해 여러 상서와 함께 손무와 오기가 군사를 쓴 본디 뜻을 말하였다. 마침내 캐어 논하니 온 자리가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들 말하였다. "산소부의 말이 이에 천하의 이름난 말이다."

뒤에 여러 왕이 교만하고 넘쳐 화와 어려움을 가벼이 만나니, 이에 도적이 곳곳에 개미처럼 모였다. 고을과 나라가 흔히 대비가 없어 눌러 다스리지 못하매 마침내 차츰 성해졌으니 다 공의 말과 같았다.

그때 사람들이 산도가 손무와 오기를 배우지 않고도 어둡게 그 결에 맞았다 하였다. 왕이보도 또한 탄식하였다. "공이 어둡게 도와 맞았다."

협주 2

《史記》曰:「孫武,齊人。呉起,衞人。並善兵法。」《竹林七賢論》曰:「咸寧中,呉既平,上將爲桃林、華山之事,息役弭兵,示天下以大安。於是州郡悉去兵,大郡置武吏百人,小郡五十人。時京師猶講武,山濤因論孫呉用兵本意。濤爲人常簡默,蓋以爲國者不可以忘戰,故及之。」《名士傳》曰:「濤居魏晉之閒,無所標明,嘗與尚書盧欽言及用兵本意。武帝聞之,曰:『山少傅名言也。』」

『사기』에 이르기를 「손무는 제나라 사람이요 오기는 위나라 사람인데 아울러 병법을 잘하였다」 하였다.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함녕 연간에 오나라가 이미 평정되매 위에서 장차 도림과 화산의 일을 하여 부역을 쉬고 군사를 그쳐 천하에 크게 편안함을 보이려 하였다. 이에 주와 고을에서 다 군사를 없애고 큰 고을에는 무예 아전 백 사람을 두고 작은 고을에는 쉰 사람을 두었다. 그때 서울에서 오히려 무예를 강하매 산도가 이로 인해 손무와 오기가 군사를 쓴 본디 뜻을 논하였다. 산도는 사람됨이 늘 간결하고 잠잠하였는데, 대개 나라 된 것은 싸움을 잊을 수 없다 여겼으므로 이에 미친 것이다」 하였다. 『명사전』에 이르기를 「산도가 위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살며 드러내 밝힌 바가 없었는데, 일찍이 상서 노흠과 함께 군사 쓰는 본디 뜻을 말하였다. 무제가 이를 듣고 『산소부의 이름난 말이다』 하였다」 하였다.

《竹林七賢論》曰:「永寧之後,諸王構禍,狡虜欻起,皆如濤言。」《名士傳》曰:「王夷甫推歎濤『晻晻爲與道合,其深不可測』。皆此類也。」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영녕 뒤로 여러 왕이 화를 얽고 교활한 오랑캐가 홀연 일어나니 다 산도의 말과 같았다」 하였다. 『명사전』에 이르기를 「왕이보가 산도를 밀어 탄식하기를 『어둡고 어둡게 도와 맞으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다 이런 것들이다」 하였다.

5천하를 어지럽힐 이는 반드시 이 아이다

王夷甫父乂爲平北將軍,有公事,使行人論不得。時夷甫在京師,命駕見僕射羊祜、尚書山濤。夷甫時總角,姿才秀異,敘致既快,事加有理,濤甚奇之。既退,看之不輟,乃嘆曰:「生兒不當如王夷甫邪?」羊祜曰:「亂天下者,必此子也!」

왕이보의 아버지 왕예가 평북장군이 되었을 때 공적인 일이 있어 심부름꾼을 보내 따졌으나 되지 않았다.

그때 이보가 서울에 있었는데 수레를 내어 복야 양호와 상서 산도를 뵈었다.

이보가 그때 더벅머리였는데 자태와 재주가 빼어나고 남달랐으며 펴 이룸이 이미 시원하고 일에 결이 있기까지 하니, 산도가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물러난 뒤에도 보기를 그치지 않고 이에 탄식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왕이보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양호가 말하였다. "천하를 어지럽힐 이는 반드시 이 아이다."

협주 1

《晉陽秋》曰:「夷甫父乂,有簡書,將免官,夷甫年十七,見所繼從舅羊祜,申陳事狀,辭甚俊偉。祜不然之,夷甫拂衣而起。祜顧謂賓客曰:『此人必將以盛名處當世大位,然敗俗傷化者,必此人也!』」《漢晉春秋》曰:「初,羊祜以軍法欲斬王戎,夷甫又忿祜言其必敗,不相貴重。天下爲之語曰:『二王當朝,世人莫敢稱羊公之有德。』」

『진양추』에 이르기를 「이보의 아버지 왕예에게 문서가 있어 장차 벼슬을 잃게 되었는데, 이보가 열일곱에 이어받은 외숙 양호를 뵙고 일의 형편을 펴 아뢰니 말이 몹시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양호가 그렇게 여기지 않으니 이보가 옷을 떨치고 일어났다. 양호가 손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장차 성한 이름으로 당세의 큰 자리에 있겠으나, 풍속을 무너뜨리고 가르침을 다칠 이도 반드시 이 사람이다』 하였다」 하였다.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양호가 군법으로 왕융을 베려 하였고, 이보도 또 양호가 저가 반드시 무너지리라 말한 것을 분히 여겨 서로 귀히 여기고 무겁게 대하지 않았다. 천하가 이를 두고 말하기를 『두 왕씨가 조정에 있으니 세상 사람이 감히 양공에게 덕이 있다 일컫지 못한다』 하였다」 하였다.

6벌의 눈은 이미 드러났으나 승냥이 소리가 아직 떨치지 않았을 뿐이오

潘陽仲見王敦少時,謂曰:「君『蜂目』已露,但『豺聲』未振耳。必能食人,亦當爲人所食。」

반양중이 왕돈이 젊었을 때를 보고 일러 말하였다. "그대는 「벌의 눈」이 이미 드러났으나 다만 「승냥이 소리」가 아직 떨치지 않았을 뿐이오. 반드시 사람을 먹을 수 있겠고 또한 마땅히 남에게 먹히리다."

협주 1

《晉陽秋》曰:「潘滔字陽仲,滎陽人,太常尼從子也。有文學才識。永嘉末,爲河南尹,遇害。」《漢晉春秋》曰:「初,王夷甫言東海王越,轉王敦爲揚州。潘滔初爲太傅長史,言於太傅曰:『王處仲蜂目已露,豺聲未發,今樹之江外,肆其豪彊之心,是賊之也。』」《晉陽秋》曰:「敦爲太子舍人,與滔同僚,故有此言。」習孫二説,便小遷異。《春秋傳》曰:「楚令尹子上謂世子商臣,蜂目而豺聲,忍人也。」

『진양추』에 이르기를 「반도는 자가 양중이요 형양 사람이니 태상 반니의 조카다. 글과 배움과 재주와 식견이 있었다. 영가 말에 하남윤이 되었다가 해를 입었다」 하였다.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왕이보가 동해왕 사마월에게 말하여 왕돈을 양주로 옮기게 하였다. 반도가 처음에 태부장사가 되어 태부에게 말하기를 『왕처중은 벌의 눈이 이미 드러났고 승냥이 소리가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를 강 밖에 심어 그 호탕하고 굳센 마음을 멋대로 하게 하면 이는 도적을 기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돈이 태자사인이 되어 반도와 같은 동료였으므로 이런 말이 있었다」 하였다. 습씨와 손씨 두 설이 곧 조금 옮겨 다르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초나라 영윤 자상이 세자 상신을 이르기를 벌의 눈에 승냥이 소리니 모진 사람이라 하였다」 하였다.

7이런 것이 있어 다행이구나

石勒不知書,使人讀《漢書》。聞酈食其勸立六國後,刻印將授之,大驚曰:「此法當失,云何得遂有天下?」至留侯諫,迺曰:「賴有此耳!」

석륵이 글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한서』를 읽게 하였다.

역이기가 여섯 나라의 뒤를 세우기를 권하여 도장을 새겨 주려 하였다는 데를 듣고 크게 놀라 말하였다. "이 법은 마땅히 잃을 것인데 어찌 마침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는가."

유후가 간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에 말하였다. "이런 것이 있어 다행이구나."

협주 2

《石勒傳》曰:「勒字世龍,上黨武鄕人,匈奴之苗裔也。雄勇好騎射。晉元康中,流宕山東,與平原茌平人師歡家庸,耳恆聞鼓角鞞鐸之音,勒私異之。初,勒鄕里原上地中生石日長,類鐵騎之象。國中生人參,葩葉甚盛。於時父老相者皆云:『此胡體貌奇異,有不可知。』勸邑人厚遇之,人多哂而不信。永嘉初,豪傑並起,與胡王陽等十八騎詣汲桑,爲左前督。桑敗,共推勒爲主。攻下州縣,都於襄國。後僭正號,死,諡明皇帝。」

『석륵전』에 이르기를 「석륵은 자가 세룡이요 상당 무향 사람이니 흉노의 자손이다. 씩씩하고 날래며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진나라 원강 연간에 산동을 떠돌며 평원 치평 사람 사환의 집에서 품을 팔았는데, 귀에 늘 북과 뿔피리와 방울 소리가 들려 석륵이 남몰래 이를 남달리 여겼다. 처음에 석륵의 시골 언덕 땅 가운데 난 돌이 날로 자라 쇠 탄 기병의 모습 같았고, 나라 안에 인삼이 났는데 꽃과 잎이 몹시 성하였다. 그때 노인과 관상 보는 이들이 다 이르기를 『이 오랑캐는 몸과 모습이 기이하고 남다르니 알 수 없는 데가 있다』 하고, 고을 사람에게 그를 두터이 대접하라 권하였으나 사람들이 흔히 비웃고 믿지 않았다. 영가 처음에 호걸이 아울러 일어나매, 오랑캐 왕 양 들 열여덟 기병과 함께 급상을 찾아가 좌전독이 되었다. 급상이 무너지자 함께 석륵을 밀어 주인으로 삼았다. 주와 현을 쳐서 내리고 양국에 도읍하였다. 뒤에 참람히 임금 이름을 하였고 죽자 시호를 명황제라 하였다」 하였다.

鄧粲《晉紀》曰:「勒手不能書,目不識字,毎於軍中令人誦讀,聽之,皆解其意。」《漢書》曰:「項羽急圍漢王於滎陽,漢王與酈食其謀撓楚權。食其勸立六國後,王令趣刻印。張良入諫,以爲不可。輟食吐哺駡酈生曰:『豎儒幾敗乃公事!』趣令銷印。」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석륵이 손으로 글을 쓰지 못하고 눈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여, 군중에서 사람을 시켜 외어 읽게 하고 이를 들을 때마다 다 그 뜻을 풀었다」 하였다. 『한서』에 이르기를 「항우가 급히 한왕을 형양에서 에워싸니 한왕이 역이기와 초나라의 권세를 꺾을 일을 꾀하였다. 역이기가 여섯 나라의 뒤를 세우기를 권하니 왕이 서둘러 도장을 새기게 하였다. 장량이 들어와 간하며 옳지 않다 하니, 먹기를 그치고 씹던 것을 뱉으며 역생을 꾸짖기를 『하찮은 선비가 하마터면 네 어른의 일을 그르칠 뻔하였다』 하고, 서둘러 도장을 녹이게 하였다」 하였다.

8내가 늙어 그 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衞玠年五歳,神衿可愛。祖太保曰:「此兒有異,顧吾老,不見其大耳!」

위개가 나이 다섯 살에 정신과 옷깃이 사랑스러웠다.

할아버지 태보가 말하였다. "이 아이에게 남다름이 있는데, 다만 내가 늙어 그 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협주 1

《晉諸公贊》曰:「瓘字伯玉,河東安邑人。少以明識淸允稱。傅嘏極貴重之,謂之甯武子。仕至太保,爲楚王瑋所害。」《玠別傳》曰:「玠有虚令之秀,淸勝之氣,在群伍之中,有異人之望。祖太保見玠五歳曰:『此兒神爽聰令,與衆大異,恐吾年老,不及見爾。』」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위관은 자가 백옥이요 하동 안읍 사람이다. 젊어서 밝은 식견과 맑고 미더움으로 일컬어졌다. 부하가 지극히 귀하게 무겁게 여겨 그를 영무자라 일렀다. 벼슬이 태보에 이르렀고 초왕 사마위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개별전』에 이르기를 「위개는 비고 좋은 빼어남과 맑고 뛰어난 기운이 있어, 무리 가운데 있으면 남다른 사람의 바람이 있었다. 할아버지 태보가 위개의 다섯 살 적을 보고 『이 아이는 정신이 시원하고 총명하며 좋아 뭇사람과 크게 다르니, 내가 나이 늙어 미쳐 보지 못할까 두렵다』 하였다」 하였다.

9화언하(華彦夏)는 식견과 재주가 모자라고 굳센 결단이 남는다

劉越石云:「華彦夏識能不足,彊果有餘。」

유월석이 말하였다. "화언하(華彦夏)는 식견과 재주가 모자라고 굳센 결단이 남는다."

협주 1

虞預《晉書》曰:「華軼字彦夏,平原人,魏太尉歆曾孫也。累遷江州刺史。傾心下士,甚得士歡心。以不從元皇命見誅。」《漢晉春秋》曰:「劉琨知軼必敗,謂其自取之也。」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화일은 자가 언하요 평원 사람이니 위나라 태위 화흠의 증손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강주자사에 이르렀다. 마음을 기울여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 선비의 기뻐하는 마음을 몹시 얻었다. 원황제의 명을 좇지 않아 베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유곤이 화일이 반드시 무너지리라 알고 스스로 취한 것이라 일렀다」 하였다.

10어찌 몇천 리 밖에 벼슬에 매여 이름과 벼슬을 구하겠는가

張季鷹辟齊王東曹掾,在洛見秋風起,因思呉中菰菜羹、鱸魚膾,曰:「人生貴得適意爾,何能羈宦數千里以要名爵!」遂命駕便歸。俄而齊王敗,時人皆謂爲見機。

장계응이 제왕의 동조연으로 불렸는데, 낙양에 있으며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이로 인해 오 땅의 순채국과 농어회를 생각하고 말하였다. "사람이 살면서 뜻에 맞음을 얻는 것이 귀할 뿐인데, 어찌 몇천 리 밖에 벼슬에 매여 이름과 벼슬을 구하겠는가."

마침내 수레를 내라 명하고 곧 돌아갔다.

이윽고 제왕이 무너지니 그때 사람들이 다 낌새를 보았다 하였다.

협주 1

《文士傳》曰:「張翰字季鷹。父儼,呉大鴻臚。翰有淸才美望,博學善屬文,造次立成,辭義淸新。大司馬齊王冏辟爲東曹掾。翰謂同郡顧榮曰:『天下紛紛未已,夫有四海之名者,求退良難。吾本山林間人,無望於時久矣。子善以明防前,以智慮後。』榮捉其手,愴然曰:『吾亦與子採南山蕨,飲三江水爾!』翰以疾歸,府以輙去除吏名。性至孝,遭母艱,哀毀過禮。自以年宿,不營當世,以疾終於家。」

『문사전』에 이르기를 「장한은 자가 계응이다. 아버지 장엄은 오나라 대홍려다. 장한은 맑은 재주와 아름다운 바람이 있고 널리 배우고 글 짓기를 잘하여 갑작스레도 곧 이루었으며 말과 뜻이 맑고 새로웠다. 대사마 제왕 사마경이 불러 동조연으로 삼았다. 장한이 같은 고을 고영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어지러워 아직 그치지 않았소. 무릇 사해에 이름이 있는 이는 물러나기를 구하기가 참으로 어렵소. 나는 본디 산림 사이 사람이라 때에 바람을 둔 지 오래오. 그대는 밝음으로 앞을 잘 막고 슬기로 뒤를 헤아리시오』 하였다. 고영이 그 손을 잡고 서글피 『나도 또한 그대와 함께 남산의 고사리를 캐고 삼강의 물을 마실 뿐이오』 하였다. 장한이 병으로 돌아가니 관부에서 문득 갔다 하여 아전 이름을 지웠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 상을 당하매 슬픔에 헒이 예를 넘었다. 스스로 나이가 많다 하여 당세를 꾸리지 않고 병으로 집에서 마쳤다」 하였다.

11부군께서는 마땅히 검은 머리의 공이 되시리다

諸葛道明初過江左,自名道明,名亞王庾之下。先爲臨沂令,丞相謂曰:「明府當爲黑頭公。」

제갈도명이 처음 강좌를 건너와 스스로 도명이라 이름 하니 이름이 왕씨와 유씨의 아래에 버금갔다.

앞서 임기령이 되었는데 승상이 일러 말하였다. "부군께서는 마땅히 검은 머리의 공이 되시리다."

협주 2

《中興書》曰:「恢避難過江,與潁川荀道明、陳留蔡道明倶有名譽,號曰『中興三明』。時人爲之語曰:『京都三明各有名,蔡氏儒雅荀葛淸。』」

『중흥서』에 이르기를 「제갈회가 난을 피해 강을 건너 영천의 순도명과 진류의 채도명과 함께 다 이름과 기림이 있어 『중흥삼명』이라 불렸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서울의 세 명이 저마다 이름이 있으니, 채씨는 유아하고 순씨와 제갈씨는 맑다』 하였다」 하였다.

《語林》曰:「丞相拜司空,諸葛道明在公坐,指冠冕曰:『君當復著此。』」

『어림』에 이르기를 「승상이 사공에 임명되었을 때 제갈도명이 공의 자리에 있다가 관과 면류관을 가리키며 『그대가 마땅히 다시 이것을 쓰시리다』 하였다」 하였다.

12뜻이 그 도량보다 크니 마침내 성벽 사이에서 죽으리라

王平子素不知眉子,曰:「志大其量,終當死塢壁間。」

왕평자가 본디 미자를 알아주지 않으며 말하였다. "뜻이 그 도량보다 크니 마침내 성벽 사이에서 죽으리라."

협주 1

《晉諸公贊》曰:「王玄字眉子,夷甫子也。東海王越辟爲掾,後行陳留太守。大行威罰,爲塢人所害。」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왕현은 자가 미자요 이보의 아들이다. 동해왕 사마월이 불러 아전으로 삼았고 뒤에 진류태수를 다스렸다. 위엄과 벌을 크게 행하다가 성벽 사람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13양랑이 뒷날 여러 사람을 알아 씀에 사람들이 그 사람 알아보는 눈을 일컫다

王大將軍始下,楊朗苦諫不從,遂爲王致力,乘「中鳴雲露車」逕前曰:「聽下官鼓音,一進而捷。」王先把其手曰:「事克,當相用爲荊州。」既而忘之,以爲南郡。王敗後,明帝收朗,欲殺之。帝尋崩,得免。後兼三公,署數十人爲官屬。此諸人當時並無名,後皆被知遇,於時稱其知人。

왕대장군이 처음 내려올 때 양랑이 괴롭게 간하였으나 좇지 않으매, 마침내 왕돈을 위해 힘을 다하였다.

「중명운로거」를 타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하관의 북소리를 들으시고 한 번 나아가면 이기실 것입니다."

왕돈이 먼저 그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그대를 형주로 쓰겠소."

이윽고 이를 잊고 남군으로 삼았다.

왕돈이 무너진 뒤 명제가 양랑을 잡아 죽이려 하였다. 임금이 이윽고 돌아가 벗어날 수 있었다.

뒤에 삼공을 겸하며 수십 사람을 벼슬아치와 붙이로 삼았는데, 이 여러 사람이 그때에는 아울러 이름이 없었으나 뒤에 다 알아줌과 대접을 받으니, 그때 그 사람 알아보는 눈을 일컬었다.

협주 1

《晉百官名》曰:「朗字世彦,弘農人。」《楊氏譜》曰:「朗祖囂,典軍校尉。父淮,冀州刺史。」王隱《晉書》曰:「朗有器識才量,善能當世。仕至雍州刺史。」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양랑은 자가 세언이요 홍농 사람이다」 하였다. 『양씨보』에 이르기를 「양랑의 할아버지 양효는 전군교위요 아버지 양준은 기주자사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양랑은 그릇과 식견과 재주와 도량이 있어 당세에 잘 맞았다. 벼슬이 옹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14오직 아우만이 그저 그러하여 어머니 눈 아래 있겠습니다

周伯仁母冬至舉酒賜三子曰:「吾本謂度江託足無所。爾家有相,爾等並羅列吾前,復何憂?」周嵩起,長跪而泣曰:「不如阿母言。伯仁爲人志大而才短,名重而識闇,好乘人之弊,此非自全之道。嵩性狼抗,亦不容於世。唯阿奴碌碌,當在阿母目下耳!」

주백인의 어머니가 동짓날 술을 들어 세 아들에게 내리며 말하였다. "내가 본디 강을 건너면 발 붙일 데가 없으리라 여겼다. 너희 집안에 도움이 있어 너희가 아울러 내 앞에 늘어서 있으니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느냐."

주숭이 일어나 길게 무릎 꿇고 울며 말하였다. "어머니 말씀과 같지 않습니다. 백인은 사람됨이 뜻은 크나 재주가 짧고, 이름은 무거우나 식견이 어두우며, 남의 무너짐을 타기를 좋아하니 이는 스스로를 온전히 하는 길이 아닙니다. 저는 성품이 사납고 뻣뻣하여 또한 세상에 담기지 못합니다. 오직 아우만이 그저 그러하여 마땅히 어머니 눈 아래 있겠습니다."

협주 1

鄧粲《晉紀》曰:「阿奴,嵩之弟周謨也。」三周並已見。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아노는 주숭의 아우 주모다」 하였다. 세 주씨는 아울러 이미 보인다.

15이것이 바로 마땅히 가야 할 까닭입니다

王大將軍既亡,王應欲投世儒,世儒爲江州。王含欲投王舒,舒爲荊州。含語應曰:「大將軍平素與江州云何?而汝欲歸之。」應曰:「此迺所以宜往也。江州當人彊盛時,能抗同異,此非常人所行。及覩衰厄,必興愍惻。荊州守文,豈能作意表行事?」含不從,遂共投舒。舒果沈含父子於江。彬聞應當來,密具船以待之,竟不得來,深以爲恨。

왕대장군이 이미 죽자 왕응은 세유에게 가려 하였으니 세유가 강주였고, 왕함은 왕서에게 가려 하였으니 왕서가 형주였다.

왕함이 왕응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평소에 강주와 어떠하였느냐. 그런데 네가 그에게 가려 하느냐."

왕응이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땅히 가야 할 까닭입니다. 강주는 남이 굳세고 성할 때에도 다름을 맞설 수 있었으니 이는 여느 사람이 행할 바가 아닙니다. 쇠하고 막힘을 보면 반드시 딱하고 애처로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킬 것입니다. 형주는 글을 지키니 어찌 뜻 밖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왕함이 좇지 않고 마침내 함께 왕서에게 갔다. 왕서가 과연 왕함 부자를 강에 잠갔다.

왕빈은 왕응이 오리라는 말을 듣고 몰래 배를 갖추어 기다렸는데 마침내 오지 못하니 깊이 한스러워하였다.

협주 4

《晉陽秋》曰:「應字安期,含子也。敦無子,養爲嗣,以爲武衞將軍,用爲副貳,伏誅。」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응은 자가 안기요 왕함의 아들이다. 왕돈이 아들이 없어 길러 뒤를 잇게 하고 무위장군으로 삼아 버금으로 썼는데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王彬別傳》曰:「彬字世儒,琅邪人。祖覽,父正,並有名德。彬爽氣出儕類,有雅正之韻。與元帝姨兄弟,佐佑皇業,累遷侍中。從兄敦下石頭,害周伯仁,彬與顗素善,往哭其屍,甚慟。既而見敦,敦怪其有慘容而問之。答曰:『向哭周伯仁,情不能已。』敦曰:『伯仁自致刑戮,汝復何爲者哉?』彬曰:『伯仁淸譽之士,有何罪?』因數敦曰:『抗旌犯上,殺戮忠良!』音辭慷慨,與涙倶下。敦怒甚。丞相在坐,代爲之解,命彬曰:『拜謝。』彬曰:『有足疾。比來見天子尚不能拜,何跪之有?』敦曰:『腳疾何如頸疾?』以親故不害之。累遷江州刺史、左僕射。贈衞將軍。」

『왕빈별전』에 이르기를 「왕빈은 자가 세유요 낭야 사람이다. 할아버지 왕람과 아버지 왕정이 아울러 이름과 덕이 있었다. 왕빈은 시원한 기운이 또래에 뛰어나고 우아하고 바른 운치가 있었다. 원제와 이종사촌 형제로 황실의 업을 도와 여러 벼슬을 거쳐 시중에 이르렀다. 사촌형 왕돈이 석두로 내려와 주백인을 해치자, 왕빈이 주의와 본디 사이가 좋았으므로 가서 그 주검에 곡하며 몹시 애통해하였다. 이윽고 왕돈을 보니 왕돈이 그 참담한 낯빛을 괴이히 여겨 물었다. 대답하기를 『아까 주백인에게 곡하느라 정을 그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왕돈이 『백인은 스스로 형벌을 부른 것인데 네가 다시 무엇을 하는가』 하니, 왕빈이 『백인은 맑은 기림의 선비인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고, 이로 인해 왕돈을 꾸짖기를 『깃발을 들어 위를 범하고 참되고 좋은 이를 죽였습니다』 하였다. 소리와 말이 북받쳐 눈물과 함께 내렸다. 왕돈이 몹시 성내었다. 승상이 자리에 있다가 대신 풀어 주려고 왕빈에게 명하기를 『절하고 사죄하라』 하였다. 왕빈이 『발에 병이 있습니다. 요사이 천자를 뵈어도 오히려 절하지 못하는데 무슨 무릎 꿇음이 있겠습니까』 하니, 왕돈이 『발병이 목병과 어떠하냐』 하였다. 친하다는 까닭으로 해치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강주자사와 좌복야에 이르렀고 위장군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傳》曰:「舒字處明,琅邪人。祖覽,知名。父會,御史。舒器業簡素,有文武榦。中宗用爲北中郎將、荊州刺史、尚書僕射。出爲會稽太守。以父名會,累表自陳。討蘇峻有功,封彭澤侯,贈車騎大將軍。」

『전』에 이르기를 「왕서는 자가 처명이요 낭야 사람이다. 할아버지 왕람은 이름이 알려졌고 아버지 왕회는 어사다. 왕서는 그릇과 업이 간결하고 수수하며 글과 무예의 재간이 있었다. 중종이 써서 북중랑장과 형주자사와 상서복야로 삼았다. 회계태수로 나갔는데 아버지 이름이 회라 하여 여러 번 표를 올려 스스로 아뢰었다. 소준을 침에 공이 있어 팽택후에 봉해졌고 거기대장군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含之投舒,舒遣軍逆之,含父子赴水死。昔酈寄賣友見譏,況販兄弟以求安,舒非人矣!

왕함이 왕서에게 가자 왕서가 군사를 보내 맞으니 왕함 부자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옛날 역기가 벗을 팔아 나무람을 받았는데, 하물며 형제를 팔아 편안함을 구한 것이겠는가. 왕서는 사람이 아니다.

16이분이 조금 남다르니 이가 아니겠습니까

武昌孟嘉作庾太尉州從事,已知名。褚太傅有知人鑒,罷豫章還,過武昌,問庾曰:「聞孟從事佳,今在此不?」庾云:「卿自求之。」褚眄睞良久,指嘉曰:「此君小異,得無是乎?」庾大笑曰:「然!」於時既嘆褚之默識,又欣嘉之見賞。

무창의 맹가가 유태위의 주종사가 되어 이미 이름이 알려졌다.

저태부가 사람 알아보는 눈이 있었는데, 예장에서 물러나 돌아오다가 무창을 들러 유공에게 물었다. "맹종사가 좋다 들었는데 이제 여기 있소."

유공이 말하였다. "경이 스스로 찾아보시오."

저태부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맹가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분이 조금 남다르니 이가 아니겠소."

유공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소."

그때 저태부의 잠잠한 앎을 감탄하고 또 맹가가 알아줌을 받음을 기뻐하였다.

협주 1

《嘉別傳》曰:「嘉字萬年,江夏鄳人。曾祖父宗,呉司空。祖父揖,晉廬陵太守。宗葬武昌陽新縣,子孫家焉。嘉少以淸操知名。太尉庾亮領江州,辟嘉部廬陵從事。下都還,亮引問風俗得失。對曰:『待還,當問從事吏。』亮舉麈尾掩口而笑,語弟翼曰:『孟嘉故是盛德人。』轉勸學從事。太傅褚裒有器識,亮正旦大會,裒問亮:『聞江州有孟嘉,何在?』亮曰:『在坐,卿但自覓。』裒歴觀久之,指嘉曰:『將無是乎?』亮欣然而笑,喜裒得嘉,奇嘉爲裒所得,乃益器之。後爲征西桓温參軍,九月九日温遊龍山,參寮畢集,時佐史並著戎服,風吹嘉帽墮落,温戒左右勿言,以觀其舉止。嘉初不覺,良久如廁,命取還之。令孫盛作文嘲之,成,著嘉坐。嘉還即答,四坐嗟歎。嘉喜酣暢,愈多不亂。温問:『酒有何好?而卿嗜之。』嘉曰:『明公未得酒中趣爾。』又問:『聽伎,絲不如竹,竹不如肉,何也?』答曰:『漸近自然。』轉從事中郎,遷長史。年五十三而卒。」

『가별전』에 이르기를 「맹가는 자가 만년이요 강하 맹 사람이다. 증조부 맹종은 오나라 사공이요 할아버지 맹읍은 진나라 여릉태수다. 맹종이 무창 양신현에 묻혀 자손이 거기에 집을 삼았다. 맹가는 젊어서 맑은 지조로 이름이 알려졌다. 태위 유량이 강주를 거느리며 맹가를 불러 여릉종사에 배정하였다. 서울에 내려갔다 돌아오매 유량이 이끌어 풍속의 잘잘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돌아가기를 기다려 마땅히 종사 아전에게 묻겠습니다』 하였다. 유량이 주미를 들어 입을 가리고 웃으며 아우 유익에게 이르기를 『맹가는 짐짓 덕이 성한 사람이다』 하고, 권학종사로 옮겼다. 태부 저부가 그릇과 식견이 있었는데, 유량이 설날에 크게 모였을 때 저부가 유량에게 『강주에 맹가가 있다 들었는데 어디 있소』 물었다. 유량이 『자리에 있으니 경이 다만 스스로 찾아보시오』 하였다. 저부가 한참을 두루 보다가 맹가를 가리키며 『아마 이가 아니겠소』 하였다. 유량이 기뻐 웃으며, 저부가 맹가를 알아본 것을 기뻐하고 맹가가 저부에게 알아봄을 받은 것을 기이하게 여겨 이에 더욱 그를 그릇으로 여겼다. 뒤에 정서 환온의 참군이 되었는데, 구월 구일에 환온이 용산에 노닐 때 참좌와 관료가 다 모였고 그때 보좌와 아전이 아울러 군복을 입었다. 바람이 불어 맹가의 모자가 떨어지니 환온이 곁의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경계하고 그 몸가짐을 보았다. 맹가가 처음에 깨닫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 뒷간에 가매, 명하여 가져다 돌려주게 하였다. 손성에게 글을 지어 놀리게 하니 이루어져 맹가의 자리에 놓았다. 맹가가 돌아와 곧 답하매 온 자리가 감탄하였다. 맹가는 즐겨 마시기를 좋아하여 많이 마실수록 더욱 어지럽지 않았다. 환온이 『술에 무슨 좋음이 있기에 경이 이를 즐기는가』 물으니, 맹가가 『명공께서 아직 술 가운데 맛을 얻지 못하셨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재주를 들을 때 실이 대만 못하고 대가 목소리만 못하니 어찌 된 일인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차츰 저절로 그러함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종사중랑으로 옮기고 장사로 옮겼다. 나이 쉰셋에 죽었다」 하였다.

17이 아이는 다만 그림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戴安道年十餘歳,在瓦官寺畫。王長史見之曰:「此童非徒能畫,亦終當致名。恨吾老,不見其盛時耳!」

대안도가 나이 열 남짓에 와관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왕장사가 보고 말하였다. "이 아이는 다만 그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마침내 마땅히 이름을 이루리라. 내가 늙어 그 성한 때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협주 1

《續晉陽秋》曰:「逵善圖畫,窮巧丹靑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대규는 그림을 잘하여 붉고 푸른 데에 재주를 다하였다」 하였다.

18경들은 참으로 은연원이 일어나지 않음을 근심하는 것이오

王仲祖、謝仁祖、劉眞長倶至丹陽墓所省殷揚州,殊有確然之志。既反,王謝相謂曰:「淵源不起,當如蒼生何?」深爲憂嘆。劉曰:「卿諸人眞憂淵源不起邪?」

왕중조와 사인조와 유진장이 함께 단양의 무덤 있는 데에 이르러 은양주를 살폈는데, 자못 굳게 정한 뜻이 있었다.

돌아온 뒤 왕씨와 사씨가 서로 말하였다. "연원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땅히 뭇 백성을 어찌하겠소."

깊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유씨가 말하였다. "경들은 참으로 연원이 일어나지 않음을 근심하는 것이오."

협주 1

《中興書》曰:「浩棲遲積年,累聘不至。」

『중흥서』에 이르기를 「은호가 여러 해를 물러나 지내며 여러 번 불러도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

19저를 보내면 반드시 서초를 이겨 정할 수 있으나 다시 누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小庾臨終,自表以子園客爲代。朝廷慮其不從命,未知所遣,乃共議用桓温。劉尹曰:「使伊去,必能克定西楚,然恐不可復制。」

작은 유공이 죽으려 할 때 스스로 표를 올려 아들 원객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조정이 그가 명을 좇지 않을까 걱정하여 보낼 이를 알지 못하다가, 이에 함께 의논하여 환온을 쓰기로 하였다.

유윤이 말하였다. "저를 보내면 반드시 서초를 이겨 정할 수 있으나, 다시 누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협주 2

園客,爰之小字也。《庾氏譜》曰:「爰之字仲眞,翼第二子。」《中興書》曰:「爰之有父翼風,桓温徙於豫章。年三十六而卒。」

원객은 유원지의 아이 적 이름이다.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원지는 자가 중진이요 유익의 둘째 아들이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유원지에게 아버지 유익의 풍모가 있었는데 환온이 예장으로 옮겼다. 나이 서른여섯에 죽었다」 하였다.

《陶侃別傳》曰:「庾翼薨,表其子爰之代爲荊州。何充曰:『陶公重勳也,臨終髙讓。丞相未薨,敬豫爲四品將軍,於今不改。親則道恩,優遊散騎,未有超卓若此之授。』乃以徐州刺史桓温爲安西將軍、荊州刺史。」宋明帝《文章志》曰:「翼表其子代任,朝廷畏憚之,議者欲以授桓温。時簡文輔政,然之。劉惔曰:『温去必能定西楚,然恐不能復制。願大王自鎭上流,惔請爲從軍司馬。』簡文不許。温後果如惔所算也。」

『도간별전』에 이르기를 「유익이 죽으며 그 아들 유원지로 대신하여 형주가 되게 하기를 표하였다. 하충이 『도공은 무거운 공이 있으면서도 죽음에 다다라 높이 사양하였습니다. 승상이 죽기 전에 경예가 사품장군이었는데 지금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친하기로는 도은이 산기에 여유롭게 있으니, 아직 이처럼 뛰어넘어 준 일이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서주자사 환온으로 안서장군과 형주자사를 삼았다」 하였다.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유익이 그 아들로 소임을 대신하게 하기를 표하니 조정이 그를 두려워하여, 따지는 이들이 환온에게 주려 하였다. 그때 간문제가 정사를 도왔는데 그렇게 여겼다. 유담이 『환온이 가면 반드시 서초를 정할 수 있으나 다시 누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스스로 상류를 지키십시오. 저는 종군사마가 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간문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환온이 뒤에 과연 유담이 헤아린 바와 같았다」 하였다.

20그 저포와 노름을 보건대 반드시 얻을 것이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桓公將伐蜀,在事諸賢咸以李勢在蜀既久,承藉累葉,且形據上流,三峽未易可克。唯劉尹云:「伊必能克蜀。觀其蒲博,不必得,則不爲。」

환공이 촉을 치려 할 때 일을 맡은 여러 어진 이가 다, 이세가 촉에 있은 지 이미 오래고 여러 대를 이어받았으며 또 형세가 상류를 차지하였으니 삼협을 쉬이 이길 수 없다 하였다.

오직 유윤만이 말하였다. "저는 반드시 촉을 이길 수 있소. 그 저포와 노름을 보건대 반드시 얻을 것이 아니면 하지 않소."

협주 1

《華陽國志》曰:「李勢字子仁,洛陽臨渭人。本巴西宕渠賨人也。其先李特,因晉亂據蜀,特子雄,稱號成都。勢祖驤,特弟也。驤生壽,壽篡位自立,勢即壽子也。晉安西將軍伐蜀,勢歸降,遷之揚州。自起至亡,六世三十七年。」《温別傳》曰:「初,朝廷以蜀處險遠,而温衆寡少,縣軍深入,甚以憂懼。而温直指成都,李勢面縛。」《語林》曰:「劉尹見桓公毎嬉戲必取勝,謂曰:『卿乃爾好利,何不焦頭?』及伐蜀,故有此言。」

『화양국지』에 이르기를 「이세는 자가 자인이요 낙양 임위 사람이다. 본디 파서 탕거의 종족이다. 그 선조 이특이 진나라의 어지러움을 말미암아 촉을 차지하였고, 이특의 아들 이웅이 성도에서 이름을 일컬었다. 이세의 할아버지 이양은 이특의 아우다. 이양이 이수를 낳고 이수가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섰으니 이세는 곧 이수의 아들이다. 진나라 안서장군이 촉을 치자 이세가 항복하여 양주로 옮겨졌다. 일어남부터 망함까지 여섯 대 서른일곱 해다」 하였다. 「온별전」에 이르기를 「처음에 조정이 촉이 험하고 먼 데 있고 환온의 무리가 적어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간다 하여 몹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환온이 곧장 성도를 가리키니 이세가 낯을 대고 묶였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유윤이 환공이 놀 때마다 반드시 이기려 하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경이 이에 그리 이로움을 좋아하니 어찌 머리를 그슬리지 않는가』 하였다. 촉을 침에 이르러 짐짓 이런 말이 있었다」 하였다.

21이미 남과 즐거움을 함께하였으니 또한 남과 근심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謝公在東山畜妓,簡文曰:「安石必出。既與人同樂,亦不得不與人同憂。」

사공이 동산에서 기녀를 두니 간문제가 말하였다. "안석은 반드시 나올 것이다. 이미 남과 즐거움을 함께하였으니 또한 남과 근심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협주 1

宋明帝《文章志》曰:「安縱心事外,踈略常節,毎畜女妓,攜持遊肆也。」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사안이 마음을 일 밖에 놓고 늘 하는 마디를 성글게 하며, 여자 기녀를 둘 때마다 데리고 노닐고 멋대로 하였다」 하였다.

22신 신고 나막신 신는 사이의 일까지도 그 맡을 데를 얻었다

郗超與謝玄不善。苻堅將問晉鼎,既已狼噬梁岐,又虎視淮陰矣。於時朝議遣玄北討,人間頗有異同之論。唯超曰:「是必濟事。吾昔嘗與共在桓宣武府,見使才皆盡,雖履屐之間,亦得其任。以此推之,容必能立勳。」元功既舉,時人咸嘆超之先覺,又重其不以愛憎匿善。

치초가 사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견이 장차 진나라 솥을 물으려 하여 이미 양과 기를 이리처럼 물고 또 회음을 범처럼 노려보았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사현을 보내 북쪽을 치게 하려 하니 사람들 사이에 자못 다른 논이 있었다.

오직 치초만이 말하였다. "이는 반드시 일을 건질 것이다. 내가 옛날 일찍이 그와 함께 환선무의 관부에 있었는데, 재주 부리기를 다하는 것을 보매 비록 신 신고 나막신 신는 사이의 일까지도 그 맡을 데를 얻었다. 이로 미루면 아마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

으뜸가는 공이 이미 이루어지자 그때 사람들이 다 치초의 먼저 깨달음을 감탄하고, 또 사랑과 미움으로 착함을 감추지 않음을 무겁게 여겼다.

협주 2

車頻《秦書》曰:「苻堅字永固,武都氐人也。本姓蒲,祖父洪,詐稱讖文,改曰『符』。言已當王,應符命也。堅初生,有赤光流其室,及誕,背赤色隱起,若篆文。幼有美度,石虎司隸徐正名知人,堅六歳時,嘗戲於路,正見而異焉,問曰:『符郎!此官街,小兒行戲,不畏縛邪?』堅曰:『吏縛有罪,不縛小兒。』正謂左右曰:『此兒有王霸相。』石氏亂,伯父健及父雄西入關,健夢天神使者朱衣冠,拜肩頭爲龍驤將軍。肩頭,堅小字也。健即拜爲龍驤,以應神命。後健僭帝號。死,子生立,凶暴,群臣殺之而立堅。堅立十五年,遣長樂公丕攻沒襄陽。十九年,大興師伐晉,衆號百萬,水陸倶進,次於項城。自項城至長安,連旗千里,首尾不絶。乃遣告晉曰:『已爲晉君於長安城中建廣夏之室,今故大舉渡江相迎,克日入宅也。』」

거빈의 『진서』에 이르기를 「부견은 자가 영고요 무도 저족 사람이다. 본디 성은 포씨인데 할아버지 포홍이 참서를 거짓 일컬어 『부』로 고쳤으니, 제가 마땅히 왕 노릇 하여 부명에 응한다고 말한 것이다. 부견이 처음 났을 때 붉은 빛이 그 방에 흘렀고, 태어남에 이르러 등이 붉은 빛으로 도드라져 전서 같았다. 어려서 아름다운 도량이 있었다. 석호의 사예 서정이 이름난 사람 알아보는 이였는데, 부견이 여섯 살 때 일찍이 길에서 놀았다. 서정이 보고 남달리 여겨 묻기를 『부랑, 이는 관가 거리인데 어린아이가 놀며 묶임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니, 부견이 『아전은 죄 있는 이를 묶지 어린아이를 묶지 않소』 하였다. 서정이 곁의 사람에게 『이 아이에게 왕과 패자의 상이 있다』 하였다. 석씨가 어지러워지자 큰아버지 부건과 아버지 부웅이 서쪽으로 관에 들어갔는데, 부건이 하늘 신의 심부름꾼이 붉은 옷과 관으로 견두에게 절하여 용양장군으로 삼는 꿈을 꾸었다. 견두는 부견의 아이 적 이름이다. 부건이 곧 용양에 임명하여 신의 명에 응하였다. 뒤에 부건이 참람히 황제 이름을 하였다. 죽자 아들 부생이 섰는데 흉하고 사나워 뭇 신하가 그를 죽이고 부견을 세웠다. 부견이 선 지 열다섯 해에 장락공 부비를 보내 양양을 쳐서 함락하였다. 열아홉 해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치는데 무리가 백만이라 일컬었고 물과 뭍으로 함께 나아가 항성에 머물렀다. 항성에서 장안까지 깃발이 이어져 천 리에 머리와 꼬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에 알려 이르기를 『이미 진나라 임금을 위해 장안성 안에 넓은 집을 지었으니, 이제 짐짓 크게 일으켜 강을 건너 맞이하여 날을 정해 집에 들게 하겠다』 하였다」 하였다.

《中興書》曰:「於時氐賊彊盛,朝議求文武良將可鎭靖北方者。衞大將軍安曰:『唯兄子玄可任此事。』中書郎郗超聞而歎曰:『安違衆舉親,明也。玄必不負其舉。』」

『중흥서』에 이르기를 「그때 저족 도적이 굳세고 성하매 조정이 글과 무예에 좋은 장수로 북방을 눌러 고요히 할 만한 이를 의논해 구하였다. 위대장군 사안이 『오직 형의 아들 사현이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하였다. 중서랑 치초가 듣고 탄식하기를 『사안이 뭇사람을 어기고 가까운 이를 든 것은 밝음이다. 사현이 반드시 그 천거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였다」 하였다.

23이 사람은 이름을 좋아하니 반드시 잘 싸울 것이다

韓康伯與謝玄亦無深好。玄北征後,巷議疑其不振。康伯曰:「此人好名,必能戰。」玄聞之甚忿,常於衆中厲色曰:「丈夫提千兵,入死地,以事君親,故發,不得復云爲名!」

한강백과 사현도 또한 깊이 좋아하지 않았다.

사현이 북쪽을 친 뒤 거리의 의논이 그가 떨치지 못할까 의심하였다.

강백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이름을 좋아하니 반드시 잘 싸울 것이다."

사현이 이를 듣고 몹시 분하여 늘 뭇사람 가운데서 낯빛을 매섭게 하고 말하였다. "대장부가 천 군사를 이끌고 죽을 땅에 들어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려 짐짓 떨쳐 나서는 것이지, 다시 이름을 위한다 이를 수 없다."

협주 1

《續晉陽秋》曰:「玄識局貞正,有經國之才略。」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사현은 식견과 국량이 곧고 발라 나라를 다스릴 재주와 헤아림이 있었다」 하였다.

24저기생이 만일 좋지 않다면 나는 다시 선비를 보지 않겠다

褚期生少時,謝公甚知之,恆云:「褚期生若不佳者,僕不復相士。」

저기생이 젊었을 때 사공이 그를 몹시 알아주어 늘 말하였다. "저기생이 만일 좋지 않다면 나는 다시 선비를 보지 않겠다."

협주 1

期生,褚爽小字也。《續晉陽秋》曰:「爽字茂弘,河南人。太傅裒之孫,祕書監韶之子。太傅謝安見其少時,歎曰:『若期生不佳,我不復論士。』及長,果俊邁有風氣。好《老》《莊》之言,當世榮譽,弗之屑也。唯與殷仲堪善。累遷中書郎、義興太守。女爲恭帝皇后。」

기생은 저상의 아이 적 이름이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저상은 자가 무홍이요 하남 사람이다. 태부 저부의 손자요 비서감 저소의 아들이다. 태부 사안이 그 젊은 때를 보고 탄식하기를 『만일 기생이 좋지 않다면 나는 다시 선비를 논하지 않겠다』 하였다. 자라서 과연 뛰어나고 훌륭하여 풍모와 기운이 있었다. 『노자』와 『장자』의 말을 좋아하고 당세의 영화와 기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은중감과 사이가 좋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랑과 의흥태수에 이르렀다. 딸이 공제의 황후가 되었다」 하였다.

25작은 이가 재주와 이름이 다 나으나 그대 집안을 지킬 이는 마침내 형일 것이오

郗超與傅瑗周旋,瑗見其二子並總髮。超觀之良久,謂瑗曰:「小者才名皆勝,然保卿家,終當在兄。」即傅亮兄弟也。

치초가 부원과 어울렸는데, 부원이 그 두 아들이 아울러 더벅머리인 것을 보였다.

치초가 한참 보다가 부원에게 말하였다. "작은 이가 재주와 이름이 다 나으나, 그대 집안을 지킬 이는 마침내 마땅히 형일 것이오."

곧 부량 형제다.

협주 1

《傅氏譜》曰:「瑗字叔玉,北地靈州人。歴護軍長史、安城太守。」《宋書》曰:「迪字長猷,瑗長子也。位至五兵尚書。贈太常。」丘淵之《文章録》曰:「亮字季友,迪弟也。歴尚書令,仕光祿大夫。元嘉三年,以罪伏誅。」

『부씨보』에 이르기를 「부원은 자가 숙옥이요 북지 영주 사람이다. 호군장사와 안성태수를 지냈다」 하였다. 『송서』에 이르기를 「부적은 자가 장유요 부원의 맏아들이다. 자리가 오병상서에 이르렀고 태상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구연지의 『문장록』에 이르기를 「부량은 자가 계우요 부적의 아우다. 상서령을 지내고 광록대부로 벼슬하였다. 원가 삼 년에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26아마 아대는 너의 벗이 아닐 것이다

王恭隨父在會稽,王大自都來拜墓。恭暫往墓下看之,二人素善,遂十餘日方還。父問恭:「何故多日?」對曰:「與阿大語,蟬連不得歸。」因語之曰:「恐阿大非爾之友。」終乖愛好,果如其言。

왕공이 아버지를 따라 회계에 있었는데, 왕대가 서울에서 와서 무덤에 절하였다.

왕공이 잠깐 무덤 아래로 가서 그를 보았는데, 두 사람이 본디 사이가 좋아 마침내 열 남짓 날 만에야 돌아왔다.

아버지가 왕공에게 물었다. "어찌 여러 날이 걸렸느냐."

대답하였다. "아대와 이야기하느라 이어져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에게 일렀다. "아마 아대는 너의 벗이 아닐 것이다."

마침내 아끼고 좋아함이 어그러졌으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협주 2

恭父蘊、王忱,並已見。

왕공의 아버지 왕온과 왕침은 아울러 이미 보인다.

忱與恭爲王緒所閒,終成怨隙。別見。

왕침과 왕공이 왕서에게 이간되어 마침내 원망과 틈을 이루었다. 따로 보인다.

27이 아이는 마땅히 높은 이름을 이루리라

車胤父作南平郡功曹,太守王胡之避司馬無忌之難,置郡於酆陰。是時胤十餘歳,胡之毎出,嘗於籬中見而異焉。謂胤父曰:「此兒當致髙名。」後遊集,恆命之。胤長,又爲桓宣武所知。淸通於多士之世,官至選曹尚書。

거윤의 아버지가 남평군 공조가 되었는데, 태수 왕호지가 사마무기의 난을 피하여 고을을 풍음에 두었다.

이때 거윤이 열 남짓이었는데, 왕호지가 나올 때마다 일찍이 울타리 안에서 보고 그를 남달리 여겼다.

거윤의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마땅히 높은 이름을 이루리라."

뒤에 노닐고 모일 때 늘 그를 불렀다.

거윤이 자라서 또 환선무에게 알려졌다. 선비가 많은 세상에 맑게 통하여 벼슬이 선조상서에 이르렀다.

협주 1

《續晉陽秋》曰:「胤字武子,南平人。父育,爲郡主簿。太守王胡之有知人識,裁見,謂其父曰:『此兒當成卿門戸,宜資令學問。』胤就業恭勤,博覽不倦。家貧不常得油,夏月則練囊盛數十螢火以繼日焉。及長,風姿美劭,機悟敏率。桓温在荊州取爲從事,一歳至治中。胤既博學多聞,又善於激賞,當時毎有盛坐,胤必同之,皆云:『無車公不樂。』太傅謝公遊集之日,開筵以待之。累遷丹陽尹、護軍將軍、吏部尚書。」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거윤은 자가 무자요 남평 사람이다. 아버지 거육은 고을 주부가 되었다. 태수 왕호지가 사람 알아보는 식견이 있어 겨우 보고 그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가 마땅히 그대의 문호를 이룰 터이니 마땅히 도와 학문하게 하시오』 하였다. 거윤이 학업에 나아가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늘 기름을 얻지 못하매 여름달에는 비단 주머니에 반딧불이 수십을 담아 낮을 잇게 하였다. 자라서는 풍모와 자태가 아름답고 훌륭하며 재빠르게 깨닫고 시원하였다. 환온이 형주에서 데려다 종사로 삼으니 한 해에 치중에 이르렀다. 거윤이 이미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은 데다 또 북돋아 기리기를 잘하여, 그때 성한 자리가 있을 때마다 거윤이 반드시 함께하매 다들 『거공이 없으면 즐겁지 않다』 하였다. 태부 사공이 노닐고 모이는 날에 자리를 열어 그를 기다렸다. 여러 벼슬을 거쳐 단양윤과 호군장군과 이부상서에 이르렀다」 하였다.

28중감의 이 일은 이에 나라가 망할 조짐이다

王忱死,西鎭未定,朝貴人人有望。時殷仲堪在門下,雖居機要,資名輕小,人情未以方嶽相許。晉孝武欲拔親近腹心,遂以殷爲荊州。事定,詔未出。王珣問殷曰:「陝西何故未有處分?」殷曰:「已有人。」王歴問公卿,咸云「非」。王自計才地必應在己,復問:「非我邪?」殷曰:「亦似非。」其夜詔出用殷。王語所親曰:「豈有黃門郎而受如此任?仲堪此舉迺是國之亡徴。」

왕침이 죽고 서쪽 진이 정해지지 않으니 조정의 귀한 이들이 사람마다 바람이 있었다.

그때 은중감이 문하에 있어 비록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밑천과 이름이 가볍고 작아,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한 지방을 맡을 만하다 허락하지 않았다.

진나라 효무제가 가깝고 심복인 이를 뽑아 올리려 하여 마침내 은중감으로 형주를 삼았다. 일이 정해지고 조칙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왕순이 은중감에게 물었다. "섬서에 무슨 까닭으로 아직 처분이 없소."

은중감이 말하였다. "이미 사람이 있소."

왕순이 공경을 차례로 물으니 다 「아니라」 하였다.

왕순이 스스로 헤아리기에 재주와 문벌이 반드시 저에게 있으리라 여겨 다시 물었다. "내가 아니오."

은중감이 말하였다. "또한 아닌 듯하오."

그날 밤 조칙이 나와 은중감을 썼다.

왕순이 가까운 이에게 말하였다. "어찌 황문랑으로서 이런 소임을 받는 일이 있는가. 중감의 이 일은 이에 나라가 망할 조짐이다."

협주 1

《晉安帝紀》曰:「孝武深爲晏駕後計,擢仲堪代王忱爲荊州。仲堪雖有美譽,議者未以方嶽相許也。既受腹心之任,居上流之重,議者謂其殆矣。終爲桓玄所敗。」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효무제가 깊이 붕어한 뒤의 셈을 하여 은중감을 뽑아 왕침을 대신하여 형주로 삼았다. 은중감이 비록 아름다운 기림이 있었으나 따지는 이들이 아직 한 지방을 맡을 만하다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심복의 소임을 받고 상류의 무거움에 있으매 따지는 이들이 위태롭다 하였다. 마침내 환현에게 무너졌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