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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조世説新語 品藻第九

세설신어 世說新語 · 유의경(劉義慶) 엮음 · 유효표(劉孝標) 주 · 남조 송(5세기) · 양 유효표 주 · 단락 88 · 한자 3,908자 · 낭독 15.6분

「세설신어」 「품조」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해가 멉니다. 사람이 해 가에서 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 몇 살 난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서 한 대답이다. 이튿날 다시 묻자 「해가 가깝습니다. 눈을 들면 해는 보이나 장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했다.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 이백여 해,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과 몸짓만을 서른여섯 갈래로 나누어 모았다. 덕행·언어·정사·문학에서 시작해 사치·성냄·시새움·원수까지 내려가니, 기릴 것과 나무랄 것을 같은 무게로 놓은 셈이다. 대숲의 일곱 사람이 나오고, 왕희지가 사위로 뽑히고, 눈 오는 밤 배를 저어 벗의 집 앞까지 갔다가 흥이 다했다며 돌아온다. 한 조각이 대개 서너 줄, 길어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유효표가 백여 종의 책을 끌어와 단 주는 그 책들이 거의 다 없어진 지금 도리어 본문보다 길게 남았다.

1윗사람을 범하기는 어렵고 아랫사람을 잡기는 쉽다

汝南陳仲舉,潁川李元禮二人,共論其功德,不能定先後。蔡伯喈評之曰:「陳仲舉彊於犯上,李元禮嚴於攝下。犯上難,攝下易。」仲舉遂在三君之下,元禮居八俊之上。

여남의 진중거와 영천의 이원례 두 사람을 두고 함께 그 공과 덕을 논하였으나 앞뒤를 정하지 못하였다.

채백개가 이를 평하여 말하였다. "진중거는 윗사람 범하기에 굳세고 이원례는 아랫사람 잡기에 엄하다. 윗사람을 범하기는 어렵고 아랫사람을 잡기는 쉽다."

중거가 마침내 세 임금의 아래에 있고 원례가 여덟 뛰어난 이의 위에 있게 되었다.

협주 4

續漢書曰:「蔡伯喈,陳留圉人。通達有俊才,博學善屬文,伎藝術數,無不精綜。仕至左中郎將,為王允所誅。」

『속한서』에 이르기를 「채백개는 진류 어 사람이다. 통달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으며 널리 배우고 글 짓기를 잘하였고, 재주와 술수에 곱게 아우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벼슬이 좌중랑장에 이르렀고 왕윤에게 베였다」 하였다.

張璠漢紀曰:「時人為之語曰:『不畏彊禦陳仲舉,天下模楷李元禮。』」

장번의 『한기』에 이르기를 「그때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굳세고 막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중거요 천하의 본이 되는 이원례다』 하였다」 하였다.

謝沈漢書曰:「三君者,一時之所貴也。竇武、劉淑、陳蕃,少有高操,海內尊而稱之,故得因以為目。」

사침의 『한서』에 이르기를 「세 임금이란 한때에 귀히 여겨진 이들이다. 두무와 유숙과 진번이 젊어서 높은 지조가 있어 온 세상이 높이고 일컬었으므로 이로 인해 제목을 삼았다」 하였다.

薛瑩漢書曰:「李膺、王暢、荀緄、朱寓、魏朗、劉佑、杜楷、趙典為八俊。」英雄記曰:「先是張儉等相與作衣冠糾彈,彈中人相調,言:『我彈中誠有八俊、八乂,猶古之八元、八凱也。』」謝沈書曰:「俊者,卓出之名也。」姚信士緯曰:「陳仲舉體氣高烈,有王臣之節。李元禮忠壯正直,有社稷之能。海內論之未決,蔡伯喈抑一言以變之,疑論乃定也。」

설영의 『한서』에 이르기를 「이응과 왕창과 순곤과 주우와 위랑과 유우와 두해와 조전이 여덟 뛰어난 이가 되었다」 하였다. 『영웅기』에 이르기를 「앞서 장검 들이 서로 더불어 의관을 갖추고 규탄하였는데, 탄핵받는 이들이 서로 놀리며 말하기를 『우리 탄핵 가운데 참으로 여덟 뛰어난 이와 여덟 어진 이가 있으니 옛날의 여덟 착한 이와 여덟 화한 이 같다』 하였다」 하였다. 사침의 책에 이르기를 「준이란 우뚝하게 나온 것의 이름이다」 하였다. 요신의 『사위』에 이르기를 「진중거는 몸과 기운이 높고 매서워 왕의 신하의 절개가 있고, 이원례는 참되고 씩씩하며 바르고 곧아 사직의 재능이 있다. 온 세상이 이를 논하여 가리지 못하였는데, 채백개가 한마디를 눌러 바꾸매 의심스러운 논이 이에 정해졌다」 하였다.

2둔한 소가 하루에 백 리를 가면 이르게 하는 것이 어찌 한 사람이겠는가

龐士元至吳,吳人並友之。見陸績、顧劭、全琮而為之目曰:「陸子所謂駑馬有逸足之用,顧子所謂駑牛可以負重致遠。」或問:「如所目,陸為勝邪?」曰:「駑馬雖精速,能致一人耳。駑牛一日行百里,所致豈一人哉?」吳人無以難。「全子好聲名,似汝南樊子昭。」

방사원이 오나라에 이르니 오 땅 사람이 아울러 그와 벗하였다.

육적과 고소와 전종을 보고 두고 말하였다. "육씨는 이른바 둔한 말이 빠른 발의 쓰임이 있는 것이요, 고씨는 이른바 둔한 소가 무거운 것을 지고 멀리 이를 수 있는 것이오."

어떤 이가 물었다. "제목 붙인 대로라면 육씨가 나은 것이오."

말하였다. "둔한 말이 비록 곱고 빠르나 한 사람을 이르게 할 뿐이오. 둔한 소가 하루에 백 리를 가면 이르게 하는 것이 어찌 한 사람이겠소."

오 땅 사람이 따질 말이 없었다.

"전씨는 소리와 이름을 좋아하니 여남의 번자소와 비슷하오."

협주 4

蜀志曰:「周瑜領南郡,士元為功曹。瑜卒,士元送喪至吳,吳人多聞其名,及當還西,並會閶門與士元言。」

『촉지』에 이르기를 「주유가 남군을 거느릴 때 사원이 공조였다. 주유가 죽자 사원이 상여를 오나라까지 보냈는데, 오 땅 사람이 그 이름을 흔히 들었으므로 서쪽으로 돌아가게 되매 아울러 창문에 모여 사원과 말하였다」 하였다.

文士傳曰:「績字公紀,幼有俊朗才數,博學多通。龐士元年長於績,共為交友。仕至鬱林太守。自知亡日,年三十二而卒。」

『문사전』에 이르기를 「육적은 자가 공기요 어려서 뛰어나고 환한 재주와 셈이 있으며 널리 배우고 많이 통하였다. 방사원이 육적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함께 벗으로 사귀었다. 벼슬이 울림태수에 이르렀다. 스스로 죽을 날을 알았고 나이 서른둘에 죽었다」 하였다.

環濟吳紀曰:「琮字子黃,吳郡錢塘人。有德行義概,為大司馬。」

환제의 『오기』에 이르기를 「전종은 자가 자황이요 오군 전당 사람이다. 덕행과 옳음의 기개가 있어 대사마가 되었다」 하였다.

蔣濟萬機論曰:「許子將褒貶不平,以拔樊子昭而抑許文休。劉曄難曰:『子昭拔自賈豎,年至七十,退能守靜,進不苟競。』濟答曰:『子昭誠自幼至長,容貌完潔。然觀其插齒牙,樹頰頦,吐脣吻,自非文休之敵。』」

장제의 『만기론』에 이르기를 「허자장이 기리고 낮춤이 고르지 않아 번자소를 뽑고 허문휴를 눌렀다. 유엽이 따져 이르기를 『자소는 장사치에서 뽑혀 나이 일흔에 이르도록 물러나서는 고요함을 지키고 나아가서는 구차히 다투지 않았소』 하니, 장제가 답하기를 『자소가 참으로 어려서부터 자라도록 모습이 온전하고 깨끗하였소. 그러나 그 이를 끼우고 뺨과 턱을 세우고 입술을 내미는 것을 보면 절로 문휴의 짝이 아니오』 하였다」 하였다.

3임금과 패자의 남은 계책을 논함에는 하루의 나음이 있는 듯하오

顧劭嘗與龐士元宿語,問曰:「聞子名知人,吾與足下孰愈?」曰:「陶冶世俗,與時浮沈,吾不如子;論王霸之餘策,覽倚仗之要害,吾似有一日之長。」劭亦安其言。

고소가 일찍이 방사원과 묵으며 이야기하다가 물었다. "그대가 사람 알아보기로 이름났다 들었는데, 나와 그대 가운데 누가 나은가."

말하였다. "세속을 빚어 다스리고 때와 함께 뜨고 잠기는 데는 내가 그대만 못하오. 임금과 패자의 남은 계책을 논하고 기대고 짚는 것의 요긴한 데를 보는 데는 내가 하루의 나음이 있는 듯하오."

고소도 또한 그 말을 편안히 여겼다.

협주 2

吳志曰:「劭好樂人倫,自州郡庶幾及四方人事,往來相見,或諷議而去,或結友而別,風聲流聞,遠近稱之。」

『오지』에 이르기를 「고소가 사람의 갈피를 즐겨 좋아하여, 주와 고을의 여럿부터 사방 사람의 일에 이르기까지 오가며 서로 보아, 더러는 넌지시 따지고 가고 더러는 벗을 맺고 헤어지매, 바람 같은 소리가 흘러 들려 멀고 가까운 데서 그를 일컬었다」 하였다.

吳錄曰:「劭安其言,更親之。」

『오록』에 이르기를 「고소가 그 말을 편안히 여겨 더욱 그를 친하게 여겼다」 하였다.

4촉은 그 용을 얻고 오는 그 범을 얻고 위는 그 개를 얻었다

諸葛瑾弟亮及從弟誕,並有盛名,各在一國。于時以為「蜀得其龍,吳得其虎,魏得其狗」。誕在魏與夏侯玄齊名;瑾在吳,吳朝服其弘量。

제갈근의 아우 제갈량과 사촌아우 제갈탄이 아울러 성한 이름이 있어 저마다 한 나라에 있었다.

그때에 「촉은 그 용을 얻고 오는 그 범을 얻고 위는 그 개를 얻었다」 하였다.

제갈탄은 위나라에서 하후현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제갈근은 오나라에 있으매 오나라 조정이 그 넓은 도량에 따랐다.

협주 2

吳書曰:「瑾字子瑜,其先葛氏,琅邪諸縣人。後徙陽都,陽都先有姓葛者,時人謂『諸葛』,因為氏。瑾少以至孝稱。累遷豫州牧,六十八卒。」魏志曰:「誕字公休,為吏部郎,人有所屬託,輒顯其言而亟用之。後有當不,則公議其得失,以為褒貶。自是群寮莫不慎其所舉。累遷楊州刺史、鎮東將軍、司空。謀逆,伏誅。」

『오서』에 이르기를 「제갈근은 자가 자유요 그 선조는 갈씨로 낭야 여러 현 사람이다. 뒤에 양도로 옮겼는데 양도에 먼저 갈씨 성을 가진 이가 있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제갈』이라 일러 이로 인해 성이 되었다. 제갈근은 젊어서 지극한 효도로 일컬어졌다. 여러 벼슬을 거쳐 예주목에 이르렀고 예순여덟에 죽었다」 하였다. 『위지』에 이르기를 「제갈탄은 자가 공휴요 이부랑이 되었는데, 남이 부탁하는 바가 있으면 문득 그 말을 드러내고 서둘러 그를 썼다. 뒤에 마땅함과 마땅하지 않음이 있으면 곧 공변되게 그 잘잘못을 따져 기리고 낮춤을 삼았다. 이로부터 뭇 벼슬아치가 그 천거하는 바를 삼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양주자사와 진동장군과 사공에 이르렀다. 거스름을 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吳書曰:「瑾避亂渡江,大皇帝取為長史,遣使蜀,但與弟亮公會相見,反無私面。而又有容貌思度。時人服其弘量。」

『오서』에 이르기를 「제갈근이 난을 피해 강을 건너니 대황제가 데려다 장사로 삼았고, 사신으로 촉에 보내매 다만 아우 제갈량과 공적으로 모여 보았을 뿐 도리어 사사로이 낯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모습과 생각의 도량이 있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 넓은 도량에 따랐다」 하였다.

5공을 세우고 일을 세우는 데는 그를 넘습니다

司馬文王問武陔:「陳玄伯何如其父司空?」陔曰:「通雅博暢,能以天下聲教為己任者,不如也。明練簡至,立功立事,過之。」

사마문왕이 무해에게 물었다. "진현백은 그 아버지 사공과 견주어 어떠한가."

무해가 말하였다. "통하고 우아하며 넓고 시원하여 천하의 소리와 가르침으로 제 소임을 삼는 데는 못합니다. 밝게 익히고 간결하고 지극하여 공을 세우고 일을 세우는 데는 그를 넘습니다."

협주 1

魏志曰:「陔與泰善,故文王問之。」

『위지』에 이르기를 「무해가 진태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문왕이 그에게 물은 것이다」 하였다.

6다섯 순씨를 다섯 진씨에 견주고 여덟 배씨를 여덟 왕씨에 견주다

正始中,人士比論,以五荀方五陳:荀淑方陳寔,荀靖方陳諶,荀爽方陳紀,荀彧方陳群,荀顗方陳泰。又以八裴方八王:裴徽方王祥,裴楷方王夷甫,裴康方王綏,裴綽方王澄,裴瓚方王敦,裴遐方王導,裴頠方王戎,裴邈方王玄。

정시 연간에 인사들이 견주어 논하며 다섯 순씨를 다섯 진씨에 견주었다.

순숙을 진식에 견주고, 순정을 진심에 견주고, 순상을 진기에 견주고, 순욱을 진군에 견주고, 순의를 진태에 견주었다.

또 여덟 배씨를 여덟 왕씨에 견주었다.

배휘를 왕상에 견주고, 배해를 왕이보에 견주고, 배강을 왕수에 견주고, 배작을 왕징에 견주고, 배찬을 왕돈에 견주고, 배하를 왕도에 견주고, 배위를 왕융에 견주고, 배막을 왕현에 견주었다.

협주 6

逸士傳曰:「靖字叔慈,潁川人。有俊才,以孝著名。兄弟八人,號『八龍』。隱身修學,動止合禮。弟爽,亦有才學,顯名當世。或問汝南許章:『爽與靖孰賢?』章曰:『二人皆玉也。慈明外朗,叔慈內潤。』太尉辟,不就。年五十終,時人惜之,號玄行先生。」

『일사전』에 이르기를 「순정은 자가 숙자요 영천 사람이다. 뛰어난 재주가 있고 효도로 이름났다. 형제 여덟 사람이 『여덟 용』이라 불렸다. 몸을 숨겨 배움을 닦았고 움직임과 멈춤이 예에 맞았다. 아우 순상도 또한 재주와 배움이 있어 당세에 이름이 드러났다. 어떤 이가 여남의 허장에게 『순상과 순정 가운데 누가 어진가』 물으니, 허장이 『두 사람이 다 옥이오. 자명은 밖으로 환하고 숙자는 안으로 윤나오』 하였다. 태위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이 쉰에 마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아까워하여 현행선생이라 불렀다」 하였다.

典略曰:「彧字文若,潁川人。為漢侍中,守尚書令。彧為人英偉,折節待士,坐不累席。其在臺閣間,不以私欲撓意。年五十薨,謚曰敬侯。以其德高,追贈太尉。」

『전략』에 이르기를 「순욱은 자가 문약이요 영천 사람이다. 한나라 시중이 되어 상서령을 맡았다. 순욱은 사람됨이 뛰어나고 훌륭하며 몸가짐을 꺾어 선비를 대접하여 앉을 때 자리를 겹치지 않았다. 그가 대각 사이에 있으면서 사사로운 바람으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이 쉰에 죽으니 시호를 경후라 하였다. 그 덕이 높다 하여 태위를 좇아 내려 주었다」 하였다.

晉諸公贊曰:「顗字景倩,彧之子。蹈禮立德,思義溫雅,加深識國體,累遷光祿大夫。晉受禪,封臨淮公。典朝儀,刊正國式,為一代之制。轉太尉,為台輔,德望清重,留心禮教。卒,謚康公。」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순의는 자가 경천이요 순욱의 아들이다. 예를 밟아 덕을 세우고 옳음을 생각하며 따뜻하고 우아하였고, 나라의 몸을 깊이 앎을 더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광록대부에 이르렀다. 진나라가 선양을 받자 임회공에 봉해졌다. 조정의 의례를 맡아 나라의 법식을 깎아 바로잡아 한 세대의 제도를 삼았다. 태위로 옮겨 삼공의 자리가 되니 덕과 바람이 맑고 무거웠으며 예의 가르침에 마음을 두었다. 죽으니 시호가 강공이다」 하였다.

晉百官名曰:「康字仲豫,徽之子。」晉諸公贊曰:「康有弘量,歷太子左率。」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배강은 자가 중예요 배휘의 아들이다」 하였다.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배강은 넓은 도량이 있어 태자좌솔을 지냈다」 하였다.

王朝目錄曰:「綽字仲舒,楷弟也,名亞於楷。歷中書黃門侍郎。」

『왕조목록』에 이르기를 「배작은 자가 중서요 배해의 아우인데 이름이 배해에 버금갔다. 중서황문시랑을 지냈다」 하였다.

晉諸公贊曰:「瓚字國寶,楷之子。才氣爽俊,終中書郎。」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배찬은 자가 국보요 배해의 아들이다. 재주와 기운이 시원하고 뛰어났으며 중서랑으로 마쳤다」 하였다.

7내 두 아이의 낫고 못함이 이에 배씨와 악씨의 낫고 못함이로다

冀州刺史楊淮二子喬與髦,俱總角為成器。淮與裴頠、樂廣友善,遣見之。頠性弘方,愛喬之有高韻,謂淮曰:「喬當及卿,髦小減也。」廣性清淳,愛髦之有神檢,謂淮曰:「喬自及卿,然髦尤精出。」淮笑曰:「我二兒之優劣,乃裴、樂之優劣。」論者評之:以為喬雖高韻,而檢不匝;樂言為得。然並為後出之雋。

기주자사 양준의 두 아들 양교와 양모가 함께 더벅머리로 이룬 그릇이 되었다.

양준이 배위와 악광과 벗하여 사이가 좋았으므로 보냈다.

배위는 성품이 넓고 모나 양교의 높은 운치가 있음을 아껴 양준에게 말하였다. "양교는 마땅히 경에게 미칠 것이요 양모는 조금 못하오."

악광은 성품이 맑고 순수하여 양모의 정신과 검속이 있음을 아껴 양준에게 말하였다. "양교는 절로 경에게 미치겠으나 양모는 더욱 곱게 나왔소."

양준이 웃으며 말하였다. "내 두 아이의 낫고 못함이 이에 배씨와 악씨의 낫고 못함이로다."

따지는 이들이 이를 평하여, 양교가 비록 높은 운치가 있으나 검속이 두루하지 못하니 악광의 말이 얻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울러 뒤에 나온 뛰어난 이가 되었다.

협주 1

荀綽冀州記曰:「喬字國彥,爽朗有遠意。髦字士彥,清平有貴識。並為後出之俊。為裴頠、樂廣所重。」晉諸公贊曰:「喬似淮而疏,皆為二千石。髦為石勒所害。」

순작의 『기주기』에 이르기를 「양교는 자가 국언이요 시원하고 환하며 먼 뜻이 있었다. 양모는 자가 사언이요 맑고 고르며 귀한 식견이 있었다. 아울러 뒤에 나온 뛰어난 이가 되었다. 배위와 악광에게 무겁게 여겨졌다」 하였다.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양교는 양준과 비슷하나 성글었고 다 이천석이 되었다. 양모는 석륵에게 해를 입었다」 하였다.

8주홍무는 짧은 데를 쓰는 데 재주 있고 두방숙은 긴 데를 쓰는 데 서툴다

劉令言始入洛,見諸名士而嘆曰:「王夷甫太解明,樂彥輔我所敬,張茂先我所不解,周弘武巧於用短,杜方叔拙於用長。」

유영언이 처음 낙양에 들어와 여러 이름난 선비를 보고 탄식하였다. "왕이보는 너무 풀어 밝고, 악언보는 내가 공경하는 바요, 장무선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바다. 주홍무는 짧은 데를 쓰는 데 재주 있고 두방숙은 긴 데를 쓰는 데 서툴다."

협주 3

劉氏譜曰:「納字令言,彭城叢亭人。祖瑾,樂安長。父甝,魏洛陽令。納歷司隸校尉。」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납은 자가 영언이요 팽성 총정 사람이다. 할아버지 유근은 낙안의 장이요 아버지 유함은 위나라 낙양령이다. 유납은 사예교위를 지냈다」 하였다.

王隱晉書曰:「周恢字弘武,汝南人。祖斐,永寧少府。父隆,州從事。恢仕至秦相,秩中二千石。」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주회는 자가 홍무요 여남 사람이다. 할아버지 주비는 영녕소부요 아버지 주륭은 주종사다. 주회는 벼슬이 진나라 상에 이르러 봉록이 중이천석이었다」 하였다.

晉諸公贊曰:「杜育字方叔,襄城鄧陵人,杜襲孫也。育幼便岐嶷,號神童。及長,美風姿,有才藻,時人號曰『杜聖』。累遷國子祭酒。洛陽將沒,為賊所殺。」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두육은 자가 방숙이요 양성 등릉 사람이니 두습의 손자다. 두육은 어려서부터 곧 남달라 신동이라 불렸다. 자라서는 풍모와 자태가 아름답고 재주와 문채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두성』이라 불렀다. 여러 벼슬을 거쳐 국자좨주에 이르렀다. 낙양이 무너지려 할 때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9여구충이 만분과 학륭보다 낫다

王夷甫云:「閭丘沖,優於滿奮、郝隆。此三人並是高才,沖最先達。」

왕이보가 말하였다. "여구충이 만분과 학륭보다 낫다. 이 세 사람이 아울러 높은 재주인데 여구충이 가장 먼저 통달하였다."

협주 3

荀綽兗州記曰:「沖字賓卿,高平人,家世二千石。沖清平有鑒識,博學有文義。累遷太傅長史,雖不能立功蓋世,然聞義不惑,當世蒞事,務於平允,操持文案,必引經誥,飾以文采,未嘗有滯。性尤通達,不矜不假。好音樂,侍婢在側,不釋弦管。出入乘四望車,居之甚夷,不能虧損恭素之行,淡然肆其心志。論者不以為侈,不以為僭,至於白首,而清名令望,不渝於始。為光祿勳,京邑未潰,乘車出,為賊所害,時人皆痛惜之。」

순작의 『연주기』에 이르기를 「여구충은 자가 빈경이요 고평 사람이니 집안이 대대로 이천석이었다. 여구충은 맑고 고르며 살피는 식견이 있고 널리 배우고 글과 옳음이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태부장사에 이르렀는데, 비록 공을 세워 세상을 덮지는 못하였으나 옳음을 듣고 헷갈리지 않았고, 당세에 일에 임하여 고르고 미쁨에 힘썼으며, 문서를 잡아 다룰 때 반드시 경전을 끌어 문채로 꾸며 일찍이 막힘이 없었다. 성품이 더욱 통달하여 뽐내지 않고 빌리지 않았다. 음악을 좋아하여 모시는 계집종이 곁에 있어 실과 대를 놓지 않았다. 사방을 볼 수 있는 수레를 타고 드나들며 이를 몹시 평온히 여겼으나, 공손하고 수수한 행실을 이지러뜨리지 않고 담담히 그 마음과 뜻을 멋대로 하였다. 따지는 이들이 사치하다 여기지 않고 참람하다 여기지 않았으며, 흰머리에 이르도록 맑은 이름과 좋은 바람이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광록훈이 되어 서울이 아직 무너지기 전에 수레를 타고 나갔다가 도적에게 해를 입으니, 그때 사람들이 다 아프게 아까워하였다」 하였다.

晉諸公贊曰:「隆字弘始,高平人。為人通亮清識。為吏部郎、楊州刺史。齊王冏起義,隆應檄稽留,為參軍王邃所殺。」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학륭은 자가 홍시요 고평 사람이다. 사람됨이 통하고 환하며 맑은 식견이 있었다. 이부랑과 양주자사가 되었다. 제왕 사마경이 의를 일으키자 학륭이 격문에 응하는 것이 늦어 참군 왕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兗州記曰:「于時高平人士偶盛,滿奮、郝隆達在沖前,名位已顯,而劉寶、王夷甫猶以沖之虛貴,足先二人。」

『연주기』에 이르기를 「이때 고평의 인사가 마침 성하여 만분과 학륭이 여구충보다 앞서 통달하여 이름과 자리가 이미 드러났는데, 유보와 왕이보가 오히려 여구충의 빈 듯한 귀함이 두 사람보다 앞서기에 넉넉하다 하였다」 하였다.

10그때 드러내 이른바 악광의 짝이다

王夷甫以王東海比樂令,故王中郎作碑云:「當時標榜,為樂廣之儷。」

왕이보가 왕동해를 악령에 견주었으므로, 왕중랑이 비문을 지어 이르기를 「그때 드러내 이른바 악광의 짝이다」 하였다.

협주 1

江左名士傳曰:「承言理辯物,但明其旨要,不為辭費,有識伏其約而能通。太尉王夷甫一世龍門,見而雅重之,以比南陽樂廣。」

『강좌명사전』에 이르기를 「왕승이 결을 말하고 사물을 가릴 때 다만 그 뜻의 요긴함을 밝힐 뿐 말을 허비하지 않으니, 식견 있는 이들이 그 간결하면서도 통할 수 있음에 엎드렸다. 태위 왕이보는 한 세상의 용문이었는데 보고 우아하게 그를 무겁게 여겨 남양의 악광에 견주었다」 하였다.

11유중랑과 왕평자는 기러기처럼 나란히 간다

庾中郎與王平子鴈行。

유중랑과 왕평자는 기러기처럼 나란히 간다.

협주 1

晉陽秋曰:「初,王澄有通朗稱,而輕薄無行。兄夷甫有盛名,時人許以人倫鑒識。常為天下士目曰:『阿平第一,子嵩第二,處仲第三。』敳以澄、敦莫己若也。及澄喪,敦敗,敳世譽如初。」

『진양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왕징이 통하고 환하다는 일컬음이 있었으나 가볍고 얇아 행실이 없었다. 형 이보가 성한 이름이 있어 그때 사람들이 사람 갈피를 살피는 식견을 허락하였다. 늘 천하 선비를 두고 말하기를 『아평이 첫째요 자숭이 둘째요 처중이 셋째다』 하였다. 유애는 왕징과 왕돈이 저만 못하다 여겼다. 왕징이 죽고 왕돈이 무너짐에 미쳐 유애의 세상 기림은 처음과 같았다」 하였다.

12내가 나아간 것인지 백인이 물러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王大將軍在西朝時,見周侯輒扇障面不得住。後度江左,不能復爾。王嘆曰:「不知我進,伯仁退?」

왕대장군이 서쪽 조정에 있을 때 주후를 보면 문득 부채로 낯을 가리고 머무르지 못하였다.

뒤에 강좌를 건너와서는 다시 그러지 못하였다.

왕돈이 탄식하였다. "내가 나아간 것인지 백인이 물러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협주 2

敦性彊梁,自少及長,季倫斬妓,會無異色,若斯傲狠,豈憚於周顗乎?其言不然也。

왕돈은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젊어서부터 자라도록 석계륜이 기녀를 벨 때에도 마침 다른 낯빛이 없었다. 이토록 거만하고 사나운데 어찌 주의를 꺼렸겠는가. 그 말이 그렇지 않다.

沈約晉書曰:「周顗,王敦素憚之,見輒面熱,雖復臘月,亦扇面不休,其憚如此。」

심약의 『진서』에 이르기를 「주의를 왕돈이 본디 꺼려 보면 문득 낯이 달아올라, 비록 다시 섣달이라도 또한 낯에 부채질하기를 쉬지 않았으니 그 꺼림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13둘을 겸한 이가 그대에게 있지 않겠는가

會稽虞𩦎,元皇時與桓宣武同俠,其人有才理勝望。王丞相嘗謂𩦎曰:「孔愉有公才而無公望,丁潭有公望而無公才,兼之者其在卿乎?」𩦎未達而喪。

회계의 우비는 원황제 때에 환선무와 같은 무리였는데 그 사람이 재주와 결과 나은 바람이 있었다.

왕승상이 일찍이 우비에게 말하였다. "공유는 공의 재주가 있으나 공의 바람이 없고, 정담은 공의 바람이 있으나 공의 재주가 없소. 둘을 겸한 이가 그대에게 있지 않겠소."

우비가 통달하기 전에 죽었다.

협주 3

虞光祿傳曰:「𩦎字思行,會稽餘姚人。虞翻曾孫,右光祿潭兄子也。雖機榦不及潭,而至行過之。歷吏部郎、吳興守,徵為金紫光祿大夫,卒。」

「우광록전」에 이르기를 「우비는 자가 사행이요 회계 여요 사람이다. 우번의 증손이요 우광록 우담의 조카다. 비록 기틀과 줄기는 우담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지극한 행실은 그를 넘었다. 이부랑과 오흥태수를 지냈고 불려 금자광록대부가 되었다가 죽었다」 하였다.

愉已見。會稽後賢記曰:「潭字世康,山陰人,吳司徒固曾孫也。沈婉有雅望,少與孔愉齊名。仕至光祿大夫。」晉陽秋曰:「孔敬康、丁世康、張偉康俱著名,時謂『會稽三康』。偉康名茂,嘗夢得大象,以問萬雅。雅曰:『君當為大郡,而不善也。象,大獸也。取其音狩,故為大郡,然象以齒喪身。』後為吳郡,果為沈充所殺。」

공유는 이미 보인다. 『회계후현기』에 이르기를 「정담은 자가 세강이요 산음 사람이니 오나라 사도 정고의 증손이다. 가라앉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바람이 있어 젊어서 공유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벼슬이 광록대부에 이르렀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공경강과 정세강과 장위강이 함께 이름을 드러내니 그때 『회계 삼강』이라 하였다. 위강은 이름이 장무인데, 일찍이 큰 코끼리를 얻는 꿈을 꾸고 만아에게 물었다. 만아가 『그대는 마땅히 큰 고을을 맡겠으나 좋지 않다. 상은 큰 짐승이니 그 음이 수와 같음을 취하여 큰 고을이 되나, 그러나 코끼리는 이 때문에 몸을 잃는다』 하였다. 뒤에 오군이 되었다가 과연 심충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虞光祿傳曰:「𩦎未登台鼎,時論稱屈。」

「우광록전」에 이르기를 「우비가 삼공에 오르지 못하니 그때 논이 굽혔다 일컬었다」 하였다.

14치감이 저에게 견주면 공부가 있는 듯합니다

明帝問周伯仁:「卿自謂何如郗鑒?」周曰:「鑒方臣,如有功夫。」復問郗。郗曰:「周顗比臣,有國士門風。」

명제가 주백인에게 물었다. "경은 스스로 치감과 견주어 어떠하다 여기는가."

주백인이 말하였다. "치감이 저에게 견주면 공부가 있는 듯합니다."

다시 치감에게 물으니 치감이 말하였다. "주의가 저에게 견주면 나라 선비의 집안 풍모가 있습니다."

협주 1

鄧粲晉紀曰:「伯仁清正嶷然,以德望稱之。」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백인은 맑고 바르며 우뚝하여 덕과 바람으로 일컬어졌다」 하였다.

15아, 그것은 절로 공변된 논이 있소

王大將軍下,庾公問:「卿有四友,何者是?」答曰:「君家中郎,我家太尉、阿平、胡毋彥國。阿平故當最劣。」庾曰:「似未肯劣。」庾又問:「何者居其右?」王曰:「自有人。」又問:「何者是?」王曰:「噫!其自有公論。」左右躡公,公乃止。

왕대장군이 내려오자 유공이 물었다. "경에게 네 벗이 있다는데 누구요."

대답하였다. "그대 집안 중랑과 우리 집안 태위와 아평과 호무언국이오. 아평이 짐짓 마땅히 가장 못하오."

유공이 말하였다. "못하다 하기를 즐겨하지 않을 듯하오."

유공이 또 물었다. "누가 그 오른편에 있소."

왕돈이 말하였다. "절로 사람이 있소."

또 물었다. "누구요."

왕돈이 말하였다. "아, 그것은 절로 공변된 논이 있소."

곁의 사람이 공을 밟으니 공이 이에 그쳤다.

협주 2

八王故事曰:「胡毋輔之少有雅俗鑒識,與王澄、庾敳、王敦、王夷甫為四友。」今故答也。

『팔왕고사』에 이르기를 「호무보지는 젊어서 우아함과 속됨을 살피는 식견이 있어 왕징과 유애와 왕돈과 왕이보와 네 벗이 되었다」 하였다. 이제 짐짓 대답한 것이다.

敦自謂右者在己也。

왕돈이 스스로 오른편에 있는 이가 저라 여긴 것이다.

16장여는 우뚝하고 험하다

人問丞相:「周侯何如和嶠?」答曰:「長輿嵯櫱。」

어떤 이가 승상에게 물었다. "주후는 화교와 견주어 어떠하오."

대답하였다. "장여는 우뚝하고 험하오."

협주 1

虞預晉書曰:「嶠厚自封植,嶷然不群。」

우예의 『진서』에 이르기를 「화교는 스스로 두터이 봉하여 심으니 우뚝하여 무리와 달랐다」 하였다.

17한 언덕과 한 골짜기는 스스로 그를 넘는다 여깁니다

明帝問謝鯤:「君自謂何如庾亮?」答曰:「端委廟堂,使百僚準則,臣不如亮。一丘一壑,自謂過之。」

명제가 사곤에게 물었다. "그대는 스스로 유량과 견주어 어떠하다 여기는가."

대답하였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조정에 서서 온갖 벼슬아치의 본이 되게 하는 것은 신이 유량만 못합니다. 한 언덕과 한 골짜기는 스스로 그를 넘는다 여깁니다."

협주 1

晉陽秋曰:「鯤隨王敦下,入朝,見太子於東宮,語及夕,太子從容問鯤曰:『論者以君方庾亮,自謂孰愈?』對曰:『宗廟之美,百官之富,臣不如亮。縱意丘壑,自謂過之。』」鄧粲晉紀曰:「鯤與王澄之徒,慕竹林諸人,散首披髮,裸袒箕踞,謂之八達。故鄰家之女,折其兩齒。世為謠曰:『任達不已,幼輿折齒。』鯤有勝情遠概,為朝廷之望,故時以庾亮方焉。」

『진양추』에 이르기를 「사곤이 왕돈을 따라 내려와 조정에 들어 동궁에서 태자를 뵈었다. 말이 저녁에 이르매 태자가 조용히 사곤에게 묻기를 『따지는 이들이 그대를 유량에 견주는데 스스로 어느 쪽이 낫다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종묘의 아름다움과 온갖 벼슬아치의 넉넉함은 신이 유량만 못합니다. 뜻을 언덕과 골짜기에 멋대로 하는 것은 스스로 그를 넘는다 여깁니다』 하였다」 하였다.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사곤이 왕징의 무리와 함께 죽림의 여러 사람을 그리워하여 머리를 흩고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벌거벗어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이를 팔달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웃집 여자가 그 두 이를 부러뜨렸다. 세상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멋대로 통달하기를 그치지 않아 유여가 이를 부러뜨렸다』 하였다. 사곤에게 뛰어난 정과 먼 기개가 있어 조정의 바람이 되었으므로, 그때에 유량에 견준 것이다」 하였다.

18세상 논이 왕영을 등백도에 견주고 왕창을 온충무에 견주었다

王丞相二弟不過江,曰頴,曰敞。時論以頴比鄧伯道,敞比溫忠武。議郎、祭酒者也。

왕승상의 두 아우는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니 왕영과 왕창이다.

그때 논이 왕영을 등백도에 견주고 왕창을 온충무에 견주었다. 의랑과 좨주였다.

협주 1

王氏譜曰:「潁字茂英,位至議郎,年二十卒。敞字茂平,丞相祭酒,不就。襲爵堂邑公,年二十有二而卒。」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영은 자가 무영이요 자리가 의랑에 이르렀고 스물에 죽었다. 왕창은 자가 무평이요 승상좨주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읍공 벼슬을 이어받았고 나이 스물둘에 죽었다」 하였다.

19폐하께서는 저를 끌어다 견주실 것 없습니다

明帝問周侯:「論者以卿比郗鑒,云何?」周曰:「陛下不須牽顗比。」

명제가 주후에게 물었다. "따지는 이들이 경을 치감에 견주는데 어떠한가."

주후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저를 끌어다 견주실 것 없습니다."

협주 1

按顗死彌年,明帝乃即位。世說此言妄矣。

살피건대 주의가 죽은 지 한 해 남짓에 명제가 이에 자리에 올랐다. 『세설』의 이 말은 함부로 한 것이다.

20오직 함께 태위를 미니 이 사람이 유난히 빼어나다

王丞相云:「頃下論以我比安期、千里。亦推此二人。唯共推太尉,此君特秀。」

왕승상이 말하였다. "요사이 아래에서 논하기를 나를 안기와 천리에 견준다. 또한 이 두 사람을 민다. 오직 함께 태위를 미니 이 사람이 유난히 빼어나다."

협주 1

晉諸公贊曰:「夷甫性矜峻,少為同志所推。」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이보는 성품이 뽐내고 준엄하여 젊어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 밀렸다」 하였다.

21왕돈은 사군에 견주면 시골집과 귀한 사람일 뿐입니다

宋褘曾為王大將軍妾,後屬謝鎮西。鎮西問褘:「我何如王?」答曰:「王比使君,田舍、貴人耳!」鎮西妖冶故也。

송위가 일찍이 왕대장군의 첩이었다가 뒤에 사진서에게 딸렸다.

진서가 송위에게 물었다. "나는 왕돈과 견주어 어떠한가."

대답하였다. "왕돈은 사군에 견주면 시골집과 귀한 사람일 뿐입니다."

진서가 요염하였기 때문이다.

협주 1

未詳宋褘。

송위는 자세하지 않다.

22쓸쓸히 세상 밖으로는 유량이 저만 못하고 조용히 조정에서는 제가 유량만 못합니다

明帝問周伯仁:「卿自謂何如庾元規?」對曰:「蕭條方外,亮不如臣;從容廊廟,臣不如亮。」

명제가 주백인에게 물었다. "경은 스스로 유원규와 견주어 어떠하다 여기는가."

대답하였다. "쓸쓸히 세상 밖으로는 유량이 저만 못하고, 조용히 조정에서는 제가 유량만 못합니다."

협주 1

按諸書皆以謝鯤比亮,不聞周顗。

살피건대 여러 책이 다 사곤을 유량에 견주고 주의를 들지 않았다.

23참되고 홀로 간결하고 귀함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못하지 않다

王丞相辟王藍田為掾,庾公問丞相:「藍田何似?」王曰:「真獨簡貴,不減父祖;然曠澹處,故當不如爾。」

왕승상이 왕남전을 불러 아전으로 삼으니, 유공이 승상에게 물었다. "남전은 어떠하오."

왕승상이 말하였다. "참되고 홀로 간결하고 귀함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못하지 않소. 그러나 트이고 담박한 데는 짐짓 마땅히 못할 뿐이오."

협주 1

王述狷隘故也。

왕술이 좁고 막혔기 때문이다.

24치공의 몸 가운데 세 가지 뒤집힘이 있다

卞望之云:「郗公體中有三反:方於事上,好下佞己,一反。治身清貞,大脩計校,二反。自好讀書,憎人學問,三反。」

변망지가 말하였다. "치공의 몸 가운데 세 가지 뒤집힘이 있다. 윗사람 섬기는 데 모나면서도 아랫사람이 저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니 첫째 뒤집힘이다. 몸 다스리기를 맑고 곧게 하면서도 셈하고 헤아리기를 크게 닦으니 둘째 뒤집힘이다. 스스로는 글 읽기를 좋아하면서도 남이 배우고 묻는 것을 미워하니 셋째 뒤집힘이다."

협주 1

按太尉劉寔論王肅:方於事上,好下佞己,性嗜榮貴,不求苟合,治身不穢,尤惜財物。王、郗志性,儻亦同乎?

살피건대 태위 유식이 왕숙을 논하여 「윗사람 섬기는 데 모나면서도 아랫사람이 저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고, 성품이 영화와 귀함을 즐기면서도 구차히 맞추기를 구하지 않으며, 몸 다스리기를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재물을 유난히 아꼈다」 하였다. 왕씨와 치씨의 뜻과 성품이 혹시 또한 같았던 것인가.

25온태진은 강을 건너온 이 가운데 둘째 흐름의 높은 이다

世論溫太真,是過江第二流之高者。時名輩共說人物,第一將盡之間,溫常失色。

세상 논이 온태진은 강을 건너온 이 가운데 둘째 흐름의 높은 이라 하였다.

그때 이름난 무리가 함께 인물을 말할 때 첫째가 다해 가는 즈음에 온교가 늘 낯빛을 잃었다.

협주 1

溫氏譜序曰:「晉大夫卻至封於溫,子孫因氏,居太原祁縣,為郡著姓。」

「온씨보서」에 이르기를 「진나라 대부 극지가 온에 봉해져 자손이 이로 인해 성을 삼고 태원 기현에 살아 고을의 드러난 성이 되었다」 하였다.

26바로 절로 그러할 뿐이오

王丞相云:「見謝仁祖恆令人得上。與何次道語,唯舉手指地曰:『正自爾馨!』」

왕승상이 말하였다. "사인조를 보면 늘 사람으로 하여금 위에 오르게 한다. 하차도와 말할 때에는 오직 손을 들어 땅을 가리키며 『바로 절로 그러할 뿐이오』 한다."

협주 1

前篇及諸書皆云王公重何充,謂必代己相。而此章以手指地,意如輕詆。或清言析理,何不逮謝故邪?

앞 편과 여러 책에 다 왕공이 하충을 무겁게 여겨 반드시 저를 대신하여 재상이 되리라 하였다 이르는데, 여기서는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하니 뜻이 가벼이 헐뜯은 듯하다. 혹시 맑은 말과 결을 쪼갬에서 하충이 사상에 미치지 못한 까닭인가.

27베옷으로 재상 자리에 뛰어오른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何次道為宰相,人有譏其信任不得其人。阮思曠慨然曰:「次道自不至此。但布衣超居宰相之位,可恨!唯此一條而已。」

하차도가 재상이 되었을 때 어떤 이가 그 믿고 맡김이 그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 나무랐다.

완사광이 북받쳐 말하였다. "차도는 절로 이에 이르지 않았다. 다만 베옷으로 재상 자리에 뛰어오른 것이 한스러우니, 오직 이 한 가지일 뿐이다."

협주 2

晉陽秋曰:「充所暱庸雜,以此損名。」

『진양추』에 이르기를 「하충이 가까이한 이들이 그저 그렇고 뒤섞여 이로써 이름을 덜었다」 하였다.

語林曰:「阮光祿聞何次道為宰相,歎曰:『我當何處生活?』」此則阮未許何為鼎輔,二說便相符也。

『어림』에 이르기를 「완광록이 하차도가 재상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마땅히 어디서 살아가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이는 곧 완유가 하충을 삼공의 자리로 허락하지 않은 것이니 두 설이 곧 서로 들어맞는다.

28일소가 무슨 까닭으로 다시 만안만 못하겠는가

王右軍少時,丞相云:「逸少何緣復減萬安邪?」

왕우군이 젊었을 때 승상이 말하였다. "일소가 무슨 까닭으로 다시 만안만 못하겠는가."

협주 1

劉綏已見。

유수는 이미 보인다.

29만일 방회만 못하다면 짐짓 여느 종일 뿐이오

郗司空家有傖奴,知及文章,事事有意。王右軍向劉尹稱之。劉問「何如方回?」王曰:「此正小人有意向耳!何得便比方回?」劉曰:「若不如方回,故是常奴耳!」

치사공의 집에 북쪽뜨기 종이 있었는데 앎이 글에 미치고 일마다 뜻이 있었다.

왕우군이 유윤에게 그를 일컬으니, 유윤이 물었다. "방회와 견주어 어떠하오."

왕우군이 말하였다. "이는 바로 작은 사람이 뜻과 나아감이 있을 뿐이오. 어찌 곧 방회에 견주겠소."

유윤이 말하였다. "만일 방회만 못하다면 짐짓 여느 종일 뿐이오."

협주 1

郗愔別傳曰:「愔字方回,高平金鄉人,太宰鑒長子也。淵靖純素,無執無競,簡私暱,罕交遊。歷會稽內史、侍中、司徒。」

『치음별전』에 이르기를 「치음은 자가 방회요 고평 금향 사람이니 태재 치감의 맏아들이다. 깊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수수하여 잡음도 없고 다툼도 없었으며, 사사로이 가까이함을 간결히 하고 사귀어 노니는 일이 드물었다. 회계내사와 시중과 사도를 지냈다」 하였다.

30여러 사람의 아름다움을 겸하여 지녔다

時人道阮思曠:「骨氣不及右軍,簡秀不如真長,韶潤不如仲祖,思致不如淵源,而兼有諸人之美。」

그때 사람들이 완사광을 말하였다. "뼈와 기운은 우군에 미치지 못하고, 간결하고 빼어남은 진장만 못하고, 아름답고 윤남은 중조만 못하고, 생각과 이룸은 연원만 못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아름다움을 겸하여 지녔다."

협주 1

中興書曰:「裕以人不須廣學,正應以禮讓為先,故終日頹然,無所修綜,而物自宗之。」

『중흥서』에 이르기를 「완유는 사람이 넓게 배울 것 없이 바로 마땅히 예와 사양을 앞세워야 한다 하였으므로, 온종일 무너지듯 있으며 닦아 아우르는 바가 없었으나 사물이 절로 그를 마루로 삼았다」 하였다.

31하평숙은 재주 부림이 결에 얽매였고 혜숙야는 뛰어남이 그 도를 다쳤다

簡文云:「何平叔巧累於理,嵇叔夜雋傷其道。」

간문제가 말하였다. "하평숙은 재주 부림이 결에 얽매였고 혜숙야는 뛰어남이 그 도를 다쳤다."

협주 1

理本真率,巧則乖其致;道唯虛澹,俊則違其宗。所以二子不免也。

결은 본디 참되고 시원한 것이니 재주를 부리면 그 이룸에 어긋나고, 도는 오직 비고 담박한 것이니 뛰어나면 그 마루를 어긴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32아들이 아비의 업을 잇고 아우가 집안 제사를 받드는 것이 무엇이 안 될 일인가

時人共論晉武帝出齊王之與立惠帝,其失孰多?多謂立惠帝為重。桓溫曰:「不然,使子繼父業,弟承家祀,有何不可?」

그때 사람들이 함께, 진나라 무제가 제왕을 내보낸 것과 혜제를 세운 것 가운데 그 잘못이 어느 것이 많은지 논하였다. 흔히 혜제를 세운 것이 무겁다 하였다.

환온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아들이 아비의 업을 잇고 아우가 집안 제사를 받드는 것이 무엇이 안 될 일인가."

협주 2

晉陽秋曰:「齊王攸,字大猷,文帝第二子。孝敬忠肅,清和平允,親賢下士,仁惠好施。能屬文,善尺牘。初,荀勖、馮紞為武帝親幸,攸惡勖之佞,勖懼攸或嗣立,必誅己,且攸甚得眾心,朝賢景附。會帝有疾,攸及皇太子入問訊,朝士皆屬目於攸,而不在太子。至是勖從容曰:『陛下萬年後,太子不得立也。』帝曰:『何故?』勖曰:『百寮內外,皆歸心於齊王,太子安得立乎?陛下試詔齊王歸國,必舉朝謂之不可。若然,則臣言徵矣。』侍中馮紞又曰:『陛下必欲建諸侯,成五等,宜從親始,親莫若齊王。』帝從之。於是下詔,使攸之國。攸聞勖、紞間己,憂忿不知所為。入辭,出,歐血薨。帝哭之慟。馮紞侍曰:『齊王名過其實,而天下歸之。今自薨殞,陛下何哀之甚?』帝乃止。劉毅聞之,故終身稱疾焉。」

『진양추』에 이르기를 「제왕 사마유는 자가 대유요 문제의 둘째 아들이다. 효도롭고 공경하며 참되고 엄숙하고 맑고 화하며 고르고 미더워, 어진 이를 친히 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며 어질고 은혜로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글을 지을 수 있고 편지를 잘 썼다. 처음에 순욱과 풍담이 무제에게 가까이 사랑받았는데, 사마유가 순욱의 아첨을 미워하니 순욱이 사마유가 혹시 뒤를 이으면 반드시 저를 벨까 두려워하였고, 또 사마유가 뭇 마음을 몹시 얻어 조정의 어진 이들이 그림자처럼 붙었다. 마침 임금이 병이 있어 사마유와 황태자가 들어와 문안하니 조정 선비들이 다 사마유에게 눈을 붙이고 태자에게 있지 않았다. 이에 순욱이 조용히 이르기를 『폐하께서 만년 뒤에 태자가 서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슨 까닭인가』 하니, 순욱이 『온갖 벼슬아치와 안팎이 다 제왕에게 마음을 돌리는데 태자가 어찌 설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시험 삼아 제왕에게 나라로 돌아가라 조칙하시면 반드시 온 조정이 옳지 않다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면 곧 신의 말이 증험된 것입니다』 하였다. 시중 풍담이 또 이르기를 『폐하께서 반드시 제후를 세워 다섯 등급을 이루려 하신다면 마땅히 가까운 데서 비롯해야 하니, 가까운 이로 제왕만 한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를 좇았다. 이에 조칙을 내려 사마유를 나라로 가게 하였다. 사마유가 순욱과 풍담이 저를 이간한 것을 듣고 근심하고 분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들어가 하직하고 나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임금이 그를 통곡하였다. 풍담이 모시다가 『제왕은 이름이 실상을 넘었는데도 천하가 그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제 스스로 죽었는데 폐하께서 어찌 슬퍼하심이 심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에 그쳤다. 유의가 이를 듣고 짐짓 한평생 병을 일컬었다」 하였다.

武帝兆禍亂,覆神州,在斯而已。輿隸且知其若此,況宣武之弘俊乎?此言非也。

무제가 재앙과 어지러움의 조짐을 만들어 신주를 엎은 것이 여기에 있을 뿐이다. 수레 끄는 종도 또한 그 이러함을 아는데 하물며 선무의 넓고 뛰어남이겠는가. 이 말은 그르다.

33짐짓 마땅히 식견으로 어두운 데를 통합니다

人問殷淵源:「當世王公以卿比裴叔道,云何?」殷曰:「故當以識通暗處。」

어떤 이가 은연원에게 물었다. "당세의 왕공이 경을 배숙도에 견주는데 어떠하오."

은연원이 말하였다. "짐짓 마땅히 식견으로 어두운 데를 통합니다."

협주 1

遐與浩並能清言。

배하와 은호가 아울러 맑은 말을 할 수 있었다.

34짐짓 마땅히 나을 뿐이오

撫軍問殷浩:「卿定何如裴逸民?」良久答曰:「故當勝耳。」

무군이 은호에게 물었다. "경은 참으로 배일민과 견주어 어떠하오."

한참 뒤에 대답하였다. "짐짓 마땅히 나을 뿐이오."

35내가 나와 어울린 지 오래니 차라리 나를 하겠소

桓公少與殷侯齊名,常有競心。桓問殷:「卿何如我?」殷云:「我與我周旋久,寧作我。」

환공이 젊어서 은후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늘 다투는 마음이 있었다.

환공이 은호에게 물었다. "경은 나와 견주어 어떠하오."

은호가 말하였다. "내가 나와 어울린 지 오래니 차라리 나를 하겠소."

36이 마음만은 남에게 사양할 바가 없다 여기오

撫軍問孫興公:「劉真長何如?」曰:「清蔚簡令。」「王仲祖何如?」曰:「溫潤恬和。」「桓溫何如?」曰:「高爽邁出。」「謝仁祖何如?」曰:「清易令達。」「阮思曠何如?」曰:「弘潤通長。」「袁羊何如?」曰:「洮洮清便。」「殷洪遠何如?」曰:「遠有致思。」「卿自謂何如?」曰:「下官才能所經,悉不如諸賢;至於斟酌時宜,籠罩當世,亦多所不及。然以不才,時復託懷玄勝,遠詠老、莊,蕭條高寄,不與時務經懷,自謂此心無所與讓也。」

무군이 손흥공에게 물었다. "유진장은 어떠하오."

말하였다. "맑고 무성하며 간결하고 좋습니다."

"왕중조는 어떠하오."

말하였다. "따뜻하고 윤나며 편안하고 화합니다."

"환온은 어떠하오."

말하였다. "높고 시원하며 넘어 나옵니다."

"사인조는 어떠하오."

말하였다. "맑고 쉬우며 좋고 통달합니다."

"완사광은 어떠하오."

말하였다. "넓고 윤나며 통하고 깁니다."

"원양은 어떠하오."

말하였다. "넘실넘실 맑고 편합니다."

"은홍원은 어떠하오."

말하였다. "멀리 이룬 생각이 있습니다."

"경은 스스로 어떠하다 여기오."

말하였다. "하관의 재주와 능함이 지나온 바는 다 여러 어진 이만 못하고, 때의 마땅함을 헤아리고 당세를 덮어 싸는 데 이르러서도 또한 미치지 못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재주 없음으로 때로 다시 아득하고 뛰어난 데에 마음을 부치고, 멀리 노자와 장자를 읊으며 쓸쓸히 높이 부쳐 때의 일에 마음을 얽지 않으니, 스스로 이 마음만은 남에게 사양할 바가 없다 여깁니다."

협주 1

徐廣晉紀曰:「凡稱風流者,皆舉王、劉為宗焉。」

서광의 『진기』에 이르기를 「무릇 풍류를 일컫는 이는 다 왕몽과 유담을 마루로 든다」 하였다.

37첫째 흐름은 바로 우리 무리요

桓大司馬下都,問真長曰:「聞會稽王語奇進,爾邪?」劉曰:「極進,然故是第二流中人耳!」桓曰:「第一流復是誰?」劉曰:「正是我輩耳!」

환대사마가 서울에 내려와 진장에게 물었다. "회계왕의 말이 기이하게 나아갔다 들었는데 그러하오."

유윤이 말하였다. "지극히 나아갔소. 그러나 짐짓 이는 둘째 흐름 가운데 사람일 뿐이오."

환공이 말하였다. "첫째 흐름은 또 누구요."

유윤이 말하였다. "바로 우리 무리요."

협주 1

桓溫別傳曰:「興寧九年,以溫克復舊京,肅靜華夏,進都督中外諸軍事、侍中、大司馬,加黃鉞,使入參朝政。」

「환온별전」에 이르기를 「흥녕 구 년에 환온이 옛 서울을 되찾고 중원을 엄숙히 고요하게 하였다 하여, 도독중외제군사와 시중과 대사마로 나아가고 황월을 더하여 들어와 조정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하였다.

38내가 버리고 가면 저가 문득 가졌으니 짐짓 내 아래에서 나온다

殷侯既廢,桓公語諸人曰:「少時與淵源共騎竹馬,我棄去,己輒取之,故當出我下。」

은후가 이미 폐해지자 환공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였다. "젊었을 때 연원과 함께 대말을 탔는데, 내가 버리고 가면 저가 문득 가졌으니 짐짓 마땅히 내 아래에서 나온다."

협주 1

續晉陽秋曰:「簡文輔政,引殷浩為揚州,欲以抗桓。桓素輕浩,未之憚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간문제가 정사를 도우며 은호를 이끌어 양주를 삼아 환온을 맞서게 하려 하였다. 환온이 본디 은호를 가벼이 여겨 꺼리지 않았다」 하였다.

39남을 이기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뭇 마음을 주고받을 만하다

人問撫軍:「殷浩談竟何如?」答曰:「不能勝人,差可獻酬群心。」

어떤 이가 무군에게 물었다. "은호의 이야기는 마침내 어떠합니까."

대답하였다. "남을 이기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뭇 마음을 주고받을 만하다."

40맑고 좋음은 아우만 못하나 그대로 절로 낫다

簡文云:「謝安南清令不如其弟,學義不及孔巖,居然自勝。」

간문제가 말하였다. "사안남은 맑고 좋음이 그 아우만 못하고 배움과 옳음이 공암에 미치지 못하나, 그대로 절로 낫다."

협주 3

安南,謝奉也。已見。謝氏譜曰:「奉弟聘,字弘遠。歷侍中、廷尉卿。」

안남은 사봉이니 이미 보인다. 『사씨보』에 이르기를 「사봉의 아우 사빙은 자가 홍원이요 시중과 정위경을 지냈다」 하였다.

中興書曰:「巖字彭祖,會稽山陰人。父儉,黃門侍郎。巖有才學,歷丹陽尹、尚書、西陽侯,在朝多所匡正。為吳興太守,大得民和。後卒於家。」

『중흥서』에 이르기를 「공암은 자가 팽조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아버지 공검은 황문시랑이다. 공암은 재주와 배움이 있어 단양윤과 상서와 서양후를 지내며 조정에서 바로잡은 바가 많았다. 오흥태수가 되어 백성의 화합을 크게 얻었다. 뒤에 집에서 죽었다」 하였다.

言奉任天真也。

사봉이 하늘의 참됨에 맡겼음을 말한 것이다.

41차라리 관중이 되겠소

未廢海西公時,王元琳問桓元子:「箕子、比干,迹異心同,不審明公孰是孰非?」曰:「仁稱不異,寧為管仲。」

아직 해서공을 폐하지 않았을 때 왕원림이 환원자에게 물었다. "기자와 비간은 자취가 다르되 마음이 같은데, 명공께서는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였다. "어짊의 일컬음은 다르지 않으나 차라리 관중이 되겠소."

협주 1

論語曰:「微子去之,箕子為之奴,比干諫而死。子曰:『殷有三仁焉。』」「子路曰:『桓公殺公子糾,召忽死之,管仲不死,曰未仁乎?』子曰:『桓公九合諸侯,一匡天下,不以兵車,管仲之力。如其仁!如其仁!』」

『논어』에 이르기를 「미자는 떠나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 죽었다. 공자께서 『은나라에 세 어진 이가 있다』 하셨다」 하였다. 「자로가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어질지 못하다 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환공이 아홉 번 제후를 모으고 천하를 한 번 바로잡되 병거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다. 그 어짊과 같으랴, 그 어짊과 같으랴』 하셨다」 하였다.

42홍치는 살갗이 맑고 위호는 빛나 정신이 좋다

劉丹陽、王長史在瓦官寺集,桓護軍亦在坐,共商略西朝及江左人物。或問:「杜弘治何如衛虎?」桓答曰:「弘治膚清,衛虎奕奕神令。」王、劉善其言。

유단양과 왕장사가 와관사에 모였는데 환호군도 또한 자리에 있어, 함께 서쪽 조정과 강좌의 인물을 헤아려 말하였다.

어떤 이가 물었다. "두홍치는 위호와 견주어 어떠하오."

환호군이 대답하였다. "홍치는 살갗이 맑고 위호는 빛나 정신이 좋소."

왕씨와 유씨가 그 말을 좋게 여겼다.

협주 2

桓伊已見。

환이는 이미 보인다.

虎,衛玠小字。玠別傳曰:「永和中,劉真長、謝仁祖共商略中朝人。或問:『杜弘治可方衛洗馬不?』謝曰:『安得比!其閒可容數人。』」江左名士傳曰:「劉真長曰:『吾請評之,弘治膚清,叔寶神清。』論者謂為知言。」

호는 위개의 아이 적 이름이다. 『개별전』에 이르기를 「영화 연간에 유진장과 사인조가 함께 중원 사람을 헤아려 말하였다. 어떤 이가 『두홍치를 위세마에 견줄 수 있소』 물으니, 사씨가 『어찌 견주겠소. 그 사이에 몇 사람을 담을 만하오』 하였다」 하였다. 『강좌명사전』에 이르기를 「유진장이 『내가 이를 평하기를 청하오. 홍치는 살갗이 맑고 숙보는 정신이 맑소』 하니, 따지는 이들이 아는 말이라 하였다」 하였다.

43아우가 승상에 견주면 다만 아름답고 긺이 있소

劉尹撫王長史背曰:「阿奴比丞相,但有都長。」

유윤이 왕장사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아우가 승상에 견주면 다만 아름답고 긺이 있소."

협주 1

阿奴,濛小字也。都,美也。司馬相如傳曰:「閑雅甚都。」語林曰:「劉真長與丞相不相得,每曰:『阿奴比丞相,條達清長。』」

아노는 왕몽의 아이 적 이름이다. 도는 아름다움이다. 「사마상여전」에 이르기를 「한가롭고 우아하여 몹시 아름다웠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유진장이 승상과 서로 맞지 않아 늘 이르기를 『아우가 승상에 견주면 가지처럼 뻗어 맑고 길다』 하였다」 하였다.

44아우가 오늘은 다시 상자기에 못하지 않구나

劉尹、王長史同坐,長史酒酣起舞。劉尹曰:「阿奴今日不復減向子期。」

유윤과 왕장사가 함께 앉았는데, 장사가 술이 무르익어 일어나 춤추었다.

유윤이 말하였다. "아우가 오늘은 다시 상자기에 못하지 않구나."

협주 1

類秀之任率也。

상수의 시원히 맡김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45안석은 그대로 그 자리를 넘어 밟을 수 없으니 짐짓 이에 낫소

桓公問孔西陽:「安石何如仲文?」孔思未對,反問公曰:「何如?」答曰:「安石居然不可陵踐其處,故乃勝也。」

환공이 공서양에게 물었다. "안석은 중문과 견주어 어떠하오."

공씨가 생각하며 아직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공에게 물었다. "어떠합니까."

대답하였다. "안석은 그대로 그 자리를 넘어 밟을 수 없으니 짐짓 이에 낫소."

협주 1

西陽即孔巖也。

서양은 곧 공암이다.

46식견 있는 이가 과연 남의 뜻과 다르지 않구나

謝公與時賢共賞說,遏、胡兒並在坐。公問李弘度曰:「卿家平陽,何如樂令?」於是李潸然流涕曰:「趙王篡逆,樂令親授璽綬。亡伯雅正,恥處亂朝,遂至仰藥。恐難以相比!此自顯於事實,非私親之言。」謝公語胡兒曰:「有識者果不異人意。」

사공이 그때 어진 이들과 함께 기려 말하는데 사현과 사랑이 아울러 자리에 있었다.

사공이 이홍도에게 물었다. "경의 집안 평양은 악령과 견주어 어떠하오."

이에 이홍도가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조왕이 자리를 빼앗아 거스를 때 악령이 몸소 옥새와 인끈을 주었습니다. 돌아가신 백부는 우아하고 발라 어지러운 조정에 있기를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약을 마시는 데 이르렀습니다. 서로 견주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이는 절로 일의 실상에 드러난 것이지 사사로이 친한 이의 말이 아닙니다."

사공이 사랑에게 말하였다. "식견 있는 이가 과연 남의 뜻과 다르지 않구나."

협주 3

晉諸公贊曰:「李重字茂曾,江夏鍾武人。少以清尚見稱。歷吏部郎、平陽太守。」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이중은 자가 무증이요 강하 종무 사람이다. 젊어서 맑고 높음으로 일컬어졌다. 이부랑과 평양태수를 지냈다」 하였다.

晉陽秋曰:「趙王倫篡位,樂廣與滿奮、崔隨進璽綬。」

『진양추』에 이르기를 「조왕 사마륜이 자리를 빼앗자 악광이 만분과 최수와 함께 옥새와 인끈을 올렸다」 하였다.

晉諸公贊曰:「趙王為相國,取重為左司馬,重以倫將篡,辭疾不就。敦喻之,重不復自治,至於篤甚。扶曳受拜,數日卒。時人惜之。贈散騎常侍。」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조왕이 상국이 되어 이중을 데려다 좌사마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중이 사마륜이 자리를 빼앗으려 하므로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도타이 타이르니 이중이 다시 스스로를 다스리지 않아 몹시 심해지는 데 이르렀다. 부축을 받아 임명을 받고 며칠 만에 죽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아까워하였다. 산기상시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47완릉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

王脩齡問王長史:「我家臨川,何如卿家宛陵?」長史未答,脩齡曰:「臨川譽貴。」長史曰:「宛陵未為不貴。」

왕수령이 왕장사에게 물었다. "우리 집안 임천은 경의 집안 완릉과 견주어 어떠하오."

장사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수령이 말하였다. "임천은 기림이 귀하오."

장사가 말하였다. "완릉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

협주 1

中興書曰:「羲之自會稽王友,改授臨川太守。王述從驃騎功曹,出為宛陵令。述之為宛陵,多脩為家之具,初有勞苦之聲。丞相王導使人謂之曰:『名父之子,屈臨小縣,甚不宜爾。』述答曰:『足自當止。』時人未之達也。後屢臨州郡,無所造作,世始歎服之。」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희지가 회계왕의 벗에서 임천태수로 고쳐 받았다. 왕술이 표기공조에서 완릉령으로 나갔다. 왕술이 완릉이 되어 집안 살림 도구를 많이 닦으매 처음에 수고롭다는 소리가 있었다. 승상 왕도가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이름난 아버지의 아들이 작은 현에 굽혀 임하니 몹시 그리해서는 안 되오』 하니, 왕술이 대답하기를 『넉넉하면 절로 마땅히 그치겠습니다』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뒤에 여러 번 주와 고을에 임하여 지어 만드는 바가 없으니 세상이 비로소 탄식하며 따랐다」 하였다.

48소리와 말은 나만 못하나 가면 문득 과녁을 깨뜨리니 나보다 낫다

劉尹至王長史許清言,時苟子年十三,倚床邊聽。既去,問父曰:「劉尹語何如尊?」長史曰:「韶音令辭,不如我;往輒破的,勝我。」

유윤이 왕장사의 처소에 이르러 맑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구자가 나이 열셋으로 평상 곁에 기대어 들었다.

이미 간 뒤에 아버지에게 물었다. "유윤의 말은 아버님과 견주어 어떠합니까."

장사가 말하였다. "아름다운 소리와 좋은 말은 나만 못하나, 가면 문득 과녁을 깨뜨리니 나보다 낫다."

협주 1

劉惔別傳曰:「惔有俊才,其談詠虛勝,理會所歸,王濛略同,而敘致過之,其詞當也。」

『유담별전』에 이르기를 「유담은 뛰어난 재주가 있어 그 이야기와 읊음이 비고 뛰어나며 결이 모여 돌아가는 바가 왕몽과 대략 같으나, 펴 이룸이 그를 넘었으니 그 말이 마땅하였다」 하였다.

49시원히 맡기는 성품으로 슬기와 날램을 가르려 하였습니다

謝萬壽春敗後,簡文問郗超:「萬自可敗,那得乃爾失士卒情?」超曰:「伊以率任之性,欲區別智勇。」

사만이 수춘에서 진 뒤에 간문제가 치초에게 물었다. "사만은 절로 질 만하나 어찌 이에 그토록 군사의 마음을 잃었는가."

치초가 말하였다. "저이가 시원히 맡기는 성품으로 슬기와 날램을 가르려 하였습니다."

협주 1

中興書曰:「萬之為豫州,氐、羌暴掠司、豫,鮮卑屯結并、冀,萬既受方任,自率眾人潁,以援洛陽。萬矜豪傲物,失士眾之心。北中郎郗曇以疾還彭城,萬以為賊盛致退,便向還南,遂自潰亂,狼狽單歸。太宗責之,廢為庶人。」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만이 예주가 되었을 때 저족과 강족이 사주와 예주를 사납게 노략하고 선비가 병주와 기주에 진 치고 모였다. 사만이 이미 지방의 소임을 받아 스스로 무리를 이끌고 영수로 들어가 낙양을 도우려 하였다. 사만이 뽐내고 호탕하여 사물에 거만하매 군사와 무리의 마음을 잃었다. 북중랑 치담이 병으로 팽성에 돌아가니, 사만이 도적이 성하여 물러난 것이라 여겨 곧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마침내 스스로 무너져 어지러워져 허둥지둥 홀로 돌아왔다. 태종이 그를 꾸짖어 폐하여 여느 사람으로 삼았다」 하였다.

50내게 유가 있은 뒤로 나쁜 말이 귀에 이르지 않았다

劉尹謂謝仁祖曰:「自吾有四友,門人加親。」謂許玄度曰:「自吾有由,惡言不及於耳。」二人皆受而不恨。

유윤이 사인조에게 말하였다. "내게 네 벗이 있은 뒤로 문인이 더욱 친해졌다."

허현도에게 말하였다. "내게 유가 있은 뒤로 나쁜 말이 귀에 이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 받아들이고 한스러워하지 않았다.

협주 1

尚書大傳曰:「孔子曰:『文王有四友,自吾得回也,門人加親,是非胥附邪?自吾得賜也,遠方之士至,是非奔走邪?自吾得師也,前有輝,後有光,是非先後邪?自吾得由也,惡言不入於耳,是非禦侮邪?』」

『상서대전』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문왕에게 네 벗이 있었다. 내게 안회가 있은 뒤로 문인이 더욱 친해졌으니 이것이 서로 붙음이 아니겠는가. 내게 자공이 있은 뒤로 먼 곳의 선비가 이르렀으니 이것이 달려옴이 아니겠는가. 내게 자장이 있은 뒤로 앞에 빛남이 있고 뒤에 빛이 있으니 이것이 앞뒤가 아니겠는가. 내게 자로가 있은 뒤로 나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업신여김을 막음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하였다.

51생각의 씨와 날이 깊이 통하니 양숙자에 견준다

世目殷中軍:「思緯淹通,比羊叔子。」

세상이 은중군을 두고 말하였다. "생각의 씨와 날이 깊이 통하니 양숙자에 견준다."

협주 1

羊祜德高一世,才經夷險。淵源蒸燭之曜,豈喻日月之明也。

양호는 덕이 한 세상에 높고 재주가 평탄함과 험함을 다스렸다. 연원의 촛불 빛이 어찌 해와 달의 밝음에 견주겠는가.

52경은 남의 말 옮기기를 좋아하니 다시 경에게 말할 수 없소

有人問謝安石、王坦之優劣於桓公。桓公停欲言,中悔曰:「卿喜傳人語,不能復語卿。」

어떤 이가 사안석과 왕탄지의 낫고 못함을 환공에게 물었다.

환공이 말하려다 멈추고 중간에 뉘우쳐 말하였다. "경은 남의 말 옮기기를 좋아하니 다시 경에게 말할 수 없소."

53경은 재주가 이에 마땅히 구자를 이기지 못하나 이름에 모임이 많소

王中郎嘗問劉長沙曰:「我何如苟子?」劉答曰:「卿才乃當不勝苟子,然會名處多。」王笑曰:「痴!」

왕중랑이 일찍이 유장사에게 물었다. "나는 구자와 견주어 어떠하오."

유씨가 대답하였다. "경은 재주가 이에 마땅히 구자를 이기지 못하나, 그러나 이름에 모임이 많소."

왕중랑이 웃으며 말하였다. "어리석구나."

협주 1

大司馬官屬名曰:「劉奭字文時,彭城人。」劉氏譜曰:「奭祖昶,彭城內史。父濟,臨海令。奭歷車騎咨議、長沙相、散騎常侍。」

「대사마관속명」에 이르기를 「유석은 자가 문시요 팽성 사람이다」 하였다.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석의 할아버지 유창은 팽성내사요 아버지 유제는 임해령이다. 유석은 거기자의와 장사상과 산기상시를 지냈다」 하였다.

54한 번 읊고 한 번 노래함에는 허연이 마땅히 북면할 것이오

支道林問孫興公:「君何如許掾?」孫曰:「高情遠致,弟子蚤已服膺;一吟一詠,許將北面。」

지도림이 손흥공에게 물었다. "그대는 허연과 견주어 어떠하오."

손흥공이 말하였다. "높은 정과 먼 이룸에는 제자가 일찍이 이미 가슴에 품어 따랐고, 한 번 읊고 한 번 노래함에는 허연이 마땅히 북면할 것이오."

55안석은 짐짓 서로 씩씩할 터인데 아만이 마땅히 눈을 찢고 다투겠소

王右軍問許玄度:「卿自言何如安石?」許未答,王因曰:「安石故相為雄,阿萬當裂眼爭邪?」

왕우군이 허현도에게 물었다. "경은 스스로 안석과 견주어 어떠하다 말하오."

허현도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왕우군이 이로 인해 말하였다. "안석은 짐짓 서로 씩씩할 터인데 아만이 마땅히 눈을 찢고 다투겠소."

협주 1

中興書曰:「萬器量不及安石,雖居藩任,安在私門之時,名稱居萬上也。」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만은 그릇과 도량이 안석에 미치지 못하였다. 비록 울타리의 소임에 있었으나 안석이 사삿집에 있을 때에도 이름과 일컬음이 사만의 위에 있었다」 하였다.

56강빈은 이에 절로 밭과 집을 쌓았다

劉尹云:「人言江虨田舍,江乃自田宅屯。」

유윤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강빈을 시골집이라 하는데, 강빈은 이에 절로 밭과 집을 쌓았다."

협주 1

謂能多出有也。

있는 것을 많이 낼 수 있음을 이른 것이다.

57금곡 가운데 소소가 가장 나았다

謝公云:「金谷中蘇紹最勝。」紹是石崇姊夫,蘇則孫,愉子也。

사공이 말하였다. "금곡 가운데 소소가 가장 나았다."

소소는 석숭의 매부요 소칙의 손자며 소유의 아들이다.

협주 1

石崇《金谷詩敘》曰:「余以元康六年,從太僕卿出為使,持節監青、徐諸軍事、征虜將軍。有別廬在河南縣界金谷澗中,或高或下,有清泉茂林,眾果竹柏、藥草之屬,莫不畢備。又有水碓、魚池、土窟,其為娛目歡心之物備矣。時征西大將軍祭酒王詡當還長安,余與眾賢共送往澗中,晝夜遊宴,屢遷其坐。或登高臨下,或列坐水濱。時琴瑟笙筑,合載車中,道路並作。及住,令與鼓吹遞奏。遂各賦詩,以敘中懷。或不能者,罰酒三斗。感性命之不永,懼凋落之無期。故具列時人官號、姓名、年紀,又寫詩箸後。後之好事者,其覽之哉!凡三十人,吳王師、議郎、關中侯、始平武功蘇紹字世嗣,年五十,為首。」魏書曰:「蘇則字文師,扶風武功人。剛直疾惡,常慕汲黯之為人。仕至侍中、河東相。」晉百官名曰:「愉字休豫,則次子。」山濤啟事曰:「愉忠義有智意,位至光祿大夫。」

석숭의 「금곡시서」에 이르기를 「내가 원강 육 년에 태복경에서 나가 사신이 되어 절월을 지니고 청주와 서주의 여러 군사 일을 감독하는 정로장군이 되었다. 하남현 지경 금곡의 골짜기 안에 딴 별장이 있었는데, 더러는 높고 더러는 낮으며 맑은 샘과 무성한 숲과 뭇 과일나무와 대와 잣나무와 약초 무리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물레방아와 물고기 못과 흙 굴이 있어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물건이 갖추어졌다. 그때 정서대장군좨주 왕후가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어, 내가 여러 어진 이와 함께 골짜기 안까지 배웅하며 밤낮으로 노닐고 잔치하며 자주 그 자리를 옮겼다. 더러는 높은 데 올라 아래를 굽어보고 더러는 물가에 늘어앉았다. 그때 거문고와 비파와 생황과 축을 수레 안에 함께 싣고 길에서 아울러 연주하였다. 머무름에 이르러서는 북과 피리와 갈마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마침내 저마다 시를 지어 마음속을 폈다. 더러 하지 못하는 이는 술 서 말로 벌하였다. 목숨이 길지 않음을 느끼고 시들어 떨어짐에 기약이 없음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의 벼슬 이름과 성명과 나이를 갖추어 벌이고 또 시를 뒤에 적었다. 뒷날의 일 좋아하는 이는 이를 보라. 무릇 서른 사람이니 오나라 왕의 스승이요 의랑이요 관중후인 시평 무공의 소소는 자가 세사요 나이 쉰으로 으뜸이 되었다」 하였다. 『위서』에 이르기를 「소칙은 자가 문사요 부풍 무공 사람이다. 굳세고 곧으며 악함을 미워하여 늘 급암의 사람됨을 그리워하였다. 벼슬이 시중과 하동상에 이르렀다」 하였다.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소유는 자가 휴예요 소칙의 둘째 아들이다」 하였다. 『산도계사』에 이르기를 「소유는 참되고 옳으며 슬기와 뜻이 있어 자리가 광록대부에 이르렀다」 하였다.

58비록 잠잠하여 도 같지는 않으나 우뚝하여 그런대로 도에 견줄 만하다

劉尹目庾中郎:「雖言不愔愔似道,突兀差可以擬道。」

유윤이 유중랑을 두고 말하였다. "비록 말이 잠잠하여 도 같지는 않으나, 우뚝하여 그런대로 도에 견줄 만하다."

협주 1

名士傳曰:「敳頹然淵放,莫有動其聽者。」

『명사전』에 이르기를 「유애는 무너지듯 깊고 놓아 그 들음을 움직이는 이가 있지 않았다」 하였다.

59사공은 무혁보다 맑고 임도보다 윤나다

孫承公云:「謝公清於無奕,潤於林道。」

손승공이 말하였다. "사공은 무혁보다 맑고 임도보다 윤나다."

협주 2

中興書曰:「孫統字承公,太原人。善屬文,時人謂其有祖楚風。仕至餘姚令。」

『중흥서』에 이르기를 「손통은 자가 승공이요 태원 사람이다. 글 짓기를 잘하여 그때 사람들이 그 할아버지 손초의 풍모가 있다 하였다. 벼슬이 여요령에 이르렀다」 하였다.

陳逵別傳曰:「逵字林道,潁川許昌人。祖淮,太尉。父畛,光祿大夫。逵少有榦,以清敏立名。襲封廣陵公、黃門郎、西中郎將,領梁、淮南二郡太守。」

『진규별전』에 이르기를 「진규는 자가 임도요 영천 허창 사람이다. 할아버지 진준은 태위요 아버지 진진은 광록대부다. 진규는 젊어서 재간이 있어 맑고 재빠름으로 이름을 세웠다. 광릉공 벼슬을 이어받고 황문랑과 서중랑장이 되어 양군과 회남 두 고을의 태수를 거느렸다」 하였다.

60짐짓 마땅히 안석을 붙들고 만석을 이끈다

或問林公:「司州何如二謝?」林公曰:「故當攀安提萬。」

어떤 이가 임공에게 물었다. "사주는 두 사씨와 견주어 어떠하오."

임공이 말하였다. "짐짓 마땅히 안석을 붙들고 만석을 이끄오."

협주 1

王胡之別傳曰:「胡之好談諧,善屬文辭,為當世所重。」

『왕호지별전』에 이르기를 「왕호지는 이야기와 놀림을 좋아하고 글과 말을 잘 지어 당세에 무겁게 여겨졌다」 하였다.

61어떤 이는 손작의 재주와 문채를 아끼되 허순에게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孫興公、許玄度皆一時名流。或重許高情,則鄙孫穢行;或愛孫才藻,而無取於許。

손흥공과 허현도는 다 한때의 이름난 흐름이었다.

어떤 이는 허순의 높은 정을 무겁게 여겨 곧 손작의 더러운 행실을 낮추었고, 어떤 이는 손작의 재주와 문채를 아끼되 허순에게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협주 1

宋明帝文章志曰:「綽博涉經史,長於屬文,與許詢俱與負俗之談。詢卒不降志,而綽嬰綸世務焉。」續晉陽秋曰:「綽雖有文才,而誕縱多穢行,時人鄙之。」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손작은 경전과 사서에 널리 걸치고 글 짓기에 뛰어났는데, 허순과 함께 세속을 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허순은 마침내 뜻을 낮추지 않았고 손작은 세상일에 얽매였다」 하였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손작이 비록 글재주가 있었으나 크고 멋대로 하여 더러운 행실이 많으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낮추었다」 하였다.

62이르렀다 일컬을 수 없고 바로 벗이라 이를 뿐이오

郗嘉賓道謝公:「造厀雖不深徹,而纏綿綸至。」又曰:「右軍詣嘉賓。」嘉賓聞之云:「不得稱詣,政得謂之朋耳!」謝公以嘉賓言為得。

치가빈이 사공을 말하였다. "무릎이 닿음이 비록 깊이 꿰뚫지는 않으나 얽히고 이어져 지극하다."

또 말하기를 "우군이 가빈에게 이르렀다" 하였다.

가빈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이르렀다 일컬을 수 없고 바로 벗이라 이를 뿐이오."

사공이 가빈의 말을 얻은 것이라 여겼다.

협주 1

凡徹詣者,蓋深覈之名也。謝不徹,王亦不詣。謝、王於理,相與為朋儔也。

무릇 꿰뚫어 이른다는 것은 대개 깊이 헤아림의 이름이다. 사안이 꿰뚫지 못하였고 왕희지도 또한 이르지 못하였다. 사안과 왕희지가 결에서 서로 더불어 벗의 짝이 된 것이다.

63이로부터 아래로는 내가 다 백 배다

庾道季云:「思理倫和,吾愧康伯;志力彊正,吾愧文度。自此以還,吾皆百之。」

유도계가 말하였다. "생각과 결이 갈피에 화한 데는 내가 강백에게 부끄럽고, 뜻과 힘이 굳세고 바른 데는 내가 문도에게 부끄럽다. 이로부터 아래로는 내가 다 백 배다."

협주 1

庾龢已見。

유화는 이미 보인다.

64네 형을 배우지 마라, 네 형은 절로 저만 못하다

王僧恩輕林公,藍田曰:「勿學汝兄,汝兄自不如伊。」

왕승은이 임공을 가벼이 여기니 남전이 말하였다. "네 형을 배우지 마라. 네 형은 절로 저만 못하다."

협주 1

僧恩,王禕之小字也。王氏世家曰:「禕之字文劭,述次子。少知名,尚尋陽公主。仕至中書郎,未三十而卒。坦之悼念,與桓溫稱之,贈散騎常侍。」

승은은 왕위지의 아이 적 이름이다. 『왕씨세가』에 이르기를 「왕위지는 자가 문소요 왕술의 둘째 아들이다. 젊어서 이름이 알려졌고 심양공주에게 장가들었다. 벼슬이 중서랑에 이르렀고 서른이 못 되어 죽었다. 왕탄지가 슬퍼하고 그리워하여 환온에게 그를 일컬으매 산기상시를 내려 주었다」 하였다.

65알지 못하는 이는 그 재주를 저버리지 않고 아는 이는 그 몸가짐에 취할 것이 없다

簡文問孫興公:「袁羊何似?」答曰:「不知者不負其才;知之者無取其體。」

간문제가 손흥공에게 물었다. "원양은 어떠하오."

대답하였다. "알지 못하는 이는 그 재주를 저버리지 않고, 아는 이는 그 몸가짐에 취할 것이 없습니다."

협주 1

言其有才而無德也。

그가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66한강백은 비록 뼈대는 없으나 그래도 또한 살갗으로 선다

蔡叔子云:「韓康伯雖無骨榦,然亦膚立。」

채숙자가 말하였다. "한강백은 비록 뼈대는 없으나 그래도 또한 살갗으로 선다."

67혜공이 부지런히 발을 붙여야 겨우 갈 수 있을 뿐이오

郗嘉賓問謝太傅曰:「林公談何如嵇公?」謝云:「嵇公勤著腳,裁可得去耳。」又問:「殷何如支?」謝曰:「正爾有超拔,支乃過殷。然亹亹論辯,恐口欲制支。」

치가빈이 사태부에게 물었다. "임공의 이야기는 혜공과 견주어 어떠합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혜공이 부지런히 발을 붙여야 겨우 갈 수 있을 뿐이다."

또 물었다. "은호는 지둔과 견주어 어떠합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바로 그렇게 뛰어넘음이 있으니 지둔이 이에 은호를 넘는다. 그러나 부지런히 논하고 따지면 아마 입이 지둔을 누를 것이다."

협주 1

支遁傳曰:「遁神悟機發,風期所得,自然超邁也。」

『지둔전』에 이르기를 「지둔은 정신이 깨쳐 기틀이 피고 풍모와 기약이 얻은 바가 저절로 뛰어났다」 하였다.

68염파와 인상여는 천 해 위의 죽은 사람이나 늠름하여 늘 산 기운이 있는 듯하다

庾道季云:「廉頗、藺相如雖千載上死人,懍懍恆如有生氣。曹蜍、李志雖見在,厭厭如九泉下人。人皆如此,便可結繩而治,但恐狐狸猯狢噉盡。」

유도계가 말하였다. "염파와 인상여는 비록 천 해 위의 죽은 사람이나 늠름하여 늘 산 기운이 있는 듯하고, 조서와 이지는 비록 이제 있으나 시들시들하여 저승 사람 같다. 사람이 다 이와 같으면 곧 노끈을 맺어 다스릴 만하겠으나, 다만 여우와 삵과 오소리와 담비가 다 먹어 치울까 두렵다."

협주 4

史記曰:「廉頗者,趙良將也。以勇氣聞諸侯。藺相如者,趙人也。趙惠文王時,得楚和氏璧,秦昭王請以十五城易之。趙遣相如送璧,秦受之,無還城意。相如請璧示其瑕,因持璧卻立倚柱,怒髮上衝冠曰:『王欲急臣,臣頭今與璧俱碎。』秦王謝之。後秦王使趙王鼓瑟,相如請秦王擊筑。趙以相如功大,拜上卿,位在廉頗上。」

『사기』에 이르기를 「염파라는 이는 조나라의 좋은 장수다. 날랜 기운으로 제후에게 알려졌다. 인상여라는 이는 조나라 사람이다. 조나라 혜문왕 때에 초나라 화씨의 구슬을 얻으니 진나라 소왕이 열다섯 성으로 바꾸기를 청하였다. 조나라가 인상여를 보내 구슬을 보냈는데 진나라가 이를 받고 성을 돌려줄 뜻이 없었다. 인상여가 구슬에 흠을 보이겠다 청하여 이로 인해 구슬을 쥐고 물러나 기둥에 기대어, 성난 머리털이 관을 찌르며 이르기를 『왕께서 신을 다그치려 하시면 신의 머리가 이제 구슬과 함께 부서지겠습니다』 하니 진나라 왕이 사과하였다. 뒤에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에게 비파를 타게 하니 인상여가 진나라 왕에게 축을 치기를 청하였다. 조나라가 인상여의 공이 크다 하여 상경에 임명하니 자리가 염파의 위에 있었다」 하였다.

蜍,曹茂之小字也。曹氏譜曰:「茂之字永世,彭城人也。祖韶,鎮東將軍司馬。父曼,少府卿。茂之仕至尚書郎。」

서는 조무지의 아이 적 이름이다. 『조씨보』에 이르기를 「조무지는 자가 영세요 팽성 사람이다. 할아버지 조소는 진동장군사마요 아버지 조만은 소부경이다. 조무지는 벼슬이 상서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晉百官名曰:「志字溫祖,江夏鍾武人。」李氏譜曰:「志祖重,散騎常侍。父慕,純陽令。志仕至員外常侍、南康相。」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이지는 자가 온조요 강하 종무 사람이다」 하였다. 『이씨보』에 이르기를 「이지의 할아버지 이중은 산기상시요 아버지 이모는 순양령이다. 이지는 벼슬이 원외상시와 남강상에 이르렀다」 하였다.

言人皆如曹、李質魯淳慤,則天下無姦民,可結繩致治。然才智無聞,功跡俱滅,身盡於狐狸,無擅世之名也。

사람이 다 조씨와 이씨처럼 바탕이 미련하고 순박하고 성실하면 곧 천하에 간사한 백성이 없어 노끈을 맺어 다스림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재주와 슬기가 들림이 없고 공과 자취가 함께 없어져 몸이 여우와 삵에게 다하니, 세상에 오로지할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69위군장은 절로 결과 옳음의 사람이다

衛君長是蕭祖周婦兄,謝公問孫僧奴:「君家道衛君長云何?」孫曰:「云是世業人。」謝曰:「殊不爾,衛自是理義人。」于時以比殷洪遠。

위군장은 소조주의 아내의 오빠다.

사공이 손승노에게 물었다. "그대 집안에서 위군장을 말하기를 어떠하다 하오."

손씨가 말하였다. "대를 이어 업을 지킨 사람이라 합니다."

사공이 말하였다. "자못 그렇지 않소. 위씨는 절로 결과 옳음의 사람이오."

그때에 은홍원에 견주었다.

협주 1

僧奴,孫騰小字也。晉百官名曰:「騰字伯海,太原人。」中興書曰:「騰,紞子也。博學。歷中庶子、廷尉。」

승노는 손등의 아이 적 이름이다.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손등은 자가 백해요 태원 사람이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손등은 손담의 아들이다. 널리 배웠다. 중서자와 정위를 지냈다」 하였다.

70유공은 절로 임공을 덮고도 남는다

王子敬問謝公:「林公何如庾公?」謝殊不受,答曰:「先輩初無論,庾公自足沒林公。」

왕자경이 사공에게 물었다. "임공은 유공과 견주어 어떠합니까."

사공이 자못 받아들이지 않고 대답하였다. "앞선 어른들은 처음부터 논한 바가 없다. 유공은 절로 임공을 덮고도 남는다."

협주 1

殷羡言行曰:「時有人稱庾太尉理者。羡曰:『此公好舉宗本槌人。』」

『은선언행』에 이르기를 「그때 유태위의 결을 일컫는 이가 있었다. 은선이 『이 공은 마루의 근본을 들어 사람을 두드리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하였다.

71앞선 어른들은 처음부터 일곱 어진 이를 좋다 나쁘다 하지 않았다

謝遏諸人共道竹林優劣,謝公云:「先輩初不臧貶七賢。」

사현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죽림의 낫고 못함을 말하니, 사공이 말하였다. "앞선 어른들은 처음부터 일곱 어진 이를 좋다 나쁘다 하지 않았다."

협주 1

魏氏春秋曰:「山濤通簡有德,秀、咸、戎、伶朗達有俊才。於時之談,以阮為首,王戎次之,山、向之徒,皆其倫也。」若如盛言,則非無臧貶,此言謬也。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산도는 통하고 간결하며 덕이 있었고, 상수와 완함과 왕융과 유령은 환하고 통달하여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에 완적을 으뜸으로 삼고 왕융이 그다음이며 산도와 상수의 무리가 다 그 짝이라 하였다」 하였다. 만일 손성의 말과 같다면 곧 좋다 나쁘다 함이 없지 않았으니 이 말이 그르다.

72저이는 애쓰고 애써 이룬 이다

有人以王中郎比車騎,車騎聞之曰:「伊窟窟成就。」

어떤 이가 왕중랑을 거기에 견주니, 거기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저이는 애쓰고 애써 이룬 이다."

협주 1

續晉陽秋曰:「坦之雅貴有識量,風格峻整。」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탄지는 우아하고 귀하며 식견과 도량이 있고 풍모와 격이 준엄하고 가지런하였다」 하였다.

73유윤도 또한 기이하게 스스로를 아나 장사보다 낫다 말하지 않았다

謝太傅謂王孝伯:「劉尹亦奇自知,然不言勝長史。」

사태부가 왕효백에게 말하였다. "유윤도 또한 기이하게 스스로를 알았으나, 그러나 장사보다 낫다 말하지 않았다."

74좋은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다

王黃門兄弟三人俱詣謝公,子猷、子重多說俗事,子敬寒溫而已。既出,坐客問謝公:「向三賢孰愈?」謝公曰:「小者最勝!」客曰:「何以知之?」謝公曰:「『吉人之辭寡,躁人之辭多。』,推此知之。」

왕황문 형제 세 사람이 함께 사공을 찾아갔는데, 자유와 자중은 세속 일을 많이 말하였고 자경은 안부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나가자 자리의 손이 사공에게 물었다. "아까 세 어진 이 가운데 누가 낫습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작은 이가 가장 낫다."

손이 말하였다. "무엇으로 아십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좋은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안다."

협주 1

王氏譜曰:「操之字子重,羲之第六子。歷秘書監、侍中、尚書、豫章太守。」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조지는 자가 자중이요 왕희지의 여섯째 아들이다. 비서감과 시중과 상서와 예장태수를 지냈다」 하였다.

75바깥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謝公問王子敬:「君書何如君家尊?」答曰:「固當不同。」公曰:「外人論殊不爾。」王曰:「外人那得知?」

사공이 왕자경에게 물었다. "그대의 글씨는 그대의 아버님과 견주어 어떠하오."

대답하였다. "본디 마땅히 같지 않습니다."

사공이 말하였다. "바깥 사람의 논은 자못 그렇지 않소."

왕자경이 말하였다. "바깥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협주 1

宋明帝文章志曰:「獻之善隸書,變右軍法為今體。字畫秀媚,妙絕時倫,與父俱得名。其章草疏弱,殊不及父。或訊獻之云:『羲之書勝不?』『莫能判。』有問羲之云:『世論卿書不逮獻之?』答曰:『殊不爾也。』它日見獻之,問:『尊君書何如?』獻之不答。又問:『論者云,君固當不如?』獻之笑而答曰:『人那得知之也。』」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왕헌지는 예서를 잘 써서 우군의 법을 바꾸어 오늘의 몸을 삼았다. 글자의 획이 빼어나고 아름다워 그때 무리에 묘하게 뛰어났고 아버지와 함께 이름을 얻었다. 그 장초는 성글고 약하여 자못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 어떤 이가 왕헌지에게 묻기를 『왕희지의 글씨가 낫습니까』 하니 『가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어떤 이가 왕희지에게 묻기를 『세상 논이 경의 글씨가 왕헌지에 미치지 못한다 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자못 그렇지 않다』 하였다. 다른 날 왕헌지를 보고 묻기를 『아버님의 글씨는 어떠하오』 하니 왕헌지가 대답하지 않았다. 또 묻기를 『따지는 이들이 이르기를 그대가 본디 마땅히 못하다 합니다』 하니, 왕헌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사람이 어찌 이를 알겠소』 하였다」 하였다.

76저의 뜻이 바로 그러하오

王孝伯問謝太傅:「林公何如長史?」太傅曰:「長史韶興。」問:「何如劉尹?」謝曰:「噫!劉尹秀。」王曰:「若如公言,並不如此二人邪?」謝云:「身意正爾也。」

왕효백이 사태부에게 물었다. "임공은 장사와 견주어 어떠합니까."

태부가 말하였다. "장사는 아름다운 흥이 있다."

물었다. "유윤과 견주어 어떠합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아, 유윤은 빼어나다."

왕효백이 말하였다. "만일 공의 말씀과 같다면 아울러 이 두 사람만 못한 것입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저의 뜻이 바로 그러하오."

77아경은 요사이 왕씨와 유씨의 드러남을 움켜쥐었다

人有問太傅:「子敬可是先輩誰比?」謝曰:「阿敬近撮王、劉之標。」

어떤 이가 태부에게 물었다. "자경은 앞선 어른 가운데 누구에 견줄 만합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아경은 요사이 왕씨와 유씨의 드러남을 움켜쥐었다."

협주 1

續晉陽秋曰:「獻之文義並非所長,而能撮其勝會,故擅名一時,為風流之冠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헌지는 글과 옳음이 아울러 잘하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 나은 모임을 움켜쥘 수 있었으므로, 한때에 이름을 오로지하여 풍류의 으뜸이 되었다」 하였다.

78유윤이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미치지 않은 것입니다

謝公語孝伯:「君祖比劉尹,故為得逮。」孝伯云:「劉尹非不能逮,直不逮。」

사공이 효백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할아버지는 유윤에 견주면 짐짓 미친다 하겠소."

효백이 말하였다. "유윤이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미치지 않은 것입니다."

협주 1

言濛質,而惔文也。

왕몽은 바탕이요 유담은 무늬임을 말한 것이다.

79매질은 절로 사람 되기 어렵다

袁彥伯為吏部郎,子敬與郗嘉賓書曰:「彥伯已入,殊足頓興往之氣。故知捶撻自難為人,冀小卻,當復差耳。」

원언백이 이부랑이 되니, 자경이 치가빈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언백이 이미 들어가매 자못 나아가려던 기운을 꺾기에 넉넉하오. 그러므로 매질은 절로 사람 되기 어려움을 아오. 조금 물러나면 마땅히 다시 나을 것이오."

80장경이 세상을 업신여긴 것만 못하다

王子猷、子敬兄弟共賞高士傳人及贊。子敬賞井丹高潔,子猷云:「未若長卿慢世。」

왕자유와 자경 형제가 함께 『고사전』의 사람과 기림을 기렸다.

자경은 정단의 높고 깨끗함을 기렸는데, 자유가 말하였다. "장경이 세상을 업신여긴 것만 못하다."

협주 1

嵇康高士傳曰:「丹字大春,扶風郿人。博學高論,京師為之語曰:『五經紛綸井大春,未嘗書刺謁一人。』北宮五王更請,莫能致。新陽侯陰就使人要之,不得已而行。侯設麥飯、蔥菜,以觀其意,丹推卻曰:『以君侯能供美膳,故來相過,何謂如此!』乃出盛饌。侯起,左右進輦,丹笑曰:『聞桀、紂駕人車,此所謂人車者邪?』侯即去輦。越騎梁松,貴震朝廷,請交丹,丹不肯見。後丹得時疾,松自將醫視之。病愈久之,松失大男磊,丹一往弔之,時賓客滿廷,丹裘褐不完,入門,坐者皆悚,望其顏色。丹四向長揖,前與松語,客主禮畢後,長揖徑坐,莫得與語。不肯為吏,徑出,後遂隱遁。其贊曰:『井丹高潔,不慕榮貴。抗節五王,不交非類。顯譏輦車,左右失氣。披褐長揖,義陵群萃。』」「司馬相如者,蜀郡成都人,字長卿。初為郎,事景帝。梁孝王來朝,從遊說士鄒陽等,相如說之,因病免遊梁。後過臨卬,富人卓王孫女文君新寡,好音,相如以琴心挑之,文君奔之,俱歸成都。後居貧,至臨卬買酒舍,文君當壚,相如著犢鼻巾軍,滌器市中。為人口吃,善屬文。仕宦不慕高爵,常託疾不與公卿大事。終於家。其贊曰:『長卿慢世,越禮自放。犢鼻居市,不恥其狀。託疾避官,蔑此卿相。乃賦大人,超然莫尚。』」

혜강의 『고사전』에 이르기를 「정단은 자가 대춘이요 부풍 미 사람이다. 널리 배우고 높이 논하여 서울에서 이를 두고 말하기를 『오경이 어지러이 얽힌 정대춘은 일찍이 한 사람에게도 명함을 써서 뵌 적이 없다』 하였다. 북궁의 다섯 왕이 번갈아 청하였으나 오게 하지 못하였다. 신양후 음취가 사람을 시켜 맞으니 마지못하여 갔다. 후가 보리밥과 파와 나물을 차려 그 뜻을 보려 하니, 정단이 밀치며 『군후께서 좋은 반찬을 대접하실 수 있다 하여 짐짓 와서 들렀는데 어찌 이러십니까』 하였다. 이에 성한 반찬을 내었다. 후가 일어나매 곁의 사람이 손수레를 올리니, 정단이 웃으며 『걸과 주가 사람이 끄는 수레를 탔다 들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람 수레입니까』 하니 후가 곧 수레를 물렸다. 월기 양송이 귀함이 조정을 흔들었는데 정단과 사귀기를 청하였으나 정단이 보려 하지 않았다. 뒤에 정단이 돌림병을 얻으매 양송이 몸소 의원을 데리고 보러 왔다. 병이 나은 지 오래되어 양송이 큰아들 양뢰를 잃으니, 정단이 한 번 가서 조문하였다. 그때 손이 뜰에 가득하였는데 정단은 갖옷과 베옷이 성하지 않았다. 문에 들어서니 앉은 이들이 다 두려워 그 낯빛을 바라보았다. 정단이 사방으로 길게 읍하고 앞에 나아가 양송과 말하는데, 손과 주인의 예를 마친 뒤에 길게 읍하고 곧장 앉으니 아무도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다. 아전 되기를 즐겨하지 않고 곧장 나와 뒤에 마침내 숨었다. 그 기림에 이르기를 『정단은 높고 깨끗하여 영화와 귀함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다섯 왕에게 절개를 맞세우고 무리 아닌 이와 사귀지 않았다. 손수레를 드러내 나무라니 곁의 사람이 기운을 잃었다. 베옷을 걸치고 길게 읍하니 옳음이 뭇 무리를 넘었다』 하였다」 하였다. 「사마상여라는 이는 촉군 성도 사람이요 자는 장경이다. 처음에 낭이 되어 경제를 섬겼다. 양나라 효왕이 조회에 오며 노니는 유세객 추양 들을 따르게 하니, 상여가 그를 기뻐하여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양나라에 노닐었다. 뒤에 임공을 지나는데 부자 탁왕손의 딸 문군이 갓 과부가 되었고 음악을 좋아하매, 상여가 거문고 마음으로 그를 돋우니 문군이 그에게 달아나 함께 성도로 돌아왔다. 뒤에 가난하게 살아 임공에 이르러 술집을 사니, 문군은 술청을 맡고 상여는 잠방이를 입고 저잣거리에서 그릇을 씻었다. 사람됨이 말을 더듬었으나 글 짓기를 잘하였다. 벼슬살이에 높은 자리를 그리워하지 않고 늘 병을 핑계로 공경의 큰일에 끼지 않았다. 집에서 마쳤다. 그 기림에 이르기를 『장경은 세상을 업신여겨 예를 넘어 스스로 놓았다. 잠방이로 저자에 살며 그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병을 핑계로 벼슬을 피하고 이 경상을 업신여겼다. 이에 「대인부」를 지으니 뛰어나 높일 것이 없었다』 하였다」 하였다.

81문과 뜰이 쓸쓸한 데는 은중감이 한강백에 미치지 못하오

有人問袁侍中曰:「殷仲堪何如韓康伯?」答曰:「理義所得,優劣乃復未辨;然門庭蕭寂,居然有名士風流,殷不及韓。」故殷作誄云:「荊門晝掩,閑庭晏然。」

어떤 이가 원시중에게 물었다. "은중감은 한강백과 견주어 어떠하오."

대답하였다. "결과 옳음에서 얻은 바는 낫고 못함을 이에 다시 가리지 못하겠소. 그러나 문과 뜰이 쓸쓸하여 그대로 이름난 선비의 풍류가 있는 데는 은중감이 한강백에 미치지 못하오."

그러므로 은중감이 뇌를 지어 이르기를 「가시문이 낮에 닫히고 한가한 뜰이 고요하다」 하였다.

협주 1

袁氏譜曰:「恪之字元祖,陳郡陽夏人。祖王孫,司徒從事中郎。父綸,臨汝令。恪之仕黃門侍郎,義熙初為侍中。」

『원씨보』에 이르기를 「원각지는 자가 원조요 진군 양하 사람이다. 할아버지 원왕손은 사도종사중랑이요 아버지 원륜은 임여령이다. 원각지는 황문시랑으로 벼슬하고 의희 처음에 시중이 되었다」 하였다.

82가빈이 짐짓 절로 위다

王子敬問謝公:「嘉賓何如道季?」答曰:「道季誠復鈔撮清悟,嘉賓故自上。」

왕자경이 사공에게 물었다. "가빈은 도계와 견주어 어떠합니까."

대답하였다. "도계가 참으로 다시 맑은 깨침을 베껴 움켰으나 가빈이 짐짓 절로 위다."

협주 1

謂超拔也。

뛰어넘음을 이른 것이다.

83사람이 참으로 나이가 없어서는 안 되는구나

王珣疾,臨困,問王武岡曰:「世論以我家領軍比誰?」武岡曰:「世以比王北中郎。」東亭轉臥向壁,嘆曰:「人固不可以無年!」

왕순이 병들어 죽음에 다다라 왕무강에게 물었다. "세상 논이 우리 집안 영군을 누구에 견주오."

무강이 말하였다. "세상이 왕북중랑에 견줍니다."

동정이 돌아누워 벽을 향하고 탄식하였다. "사람이 참으로 나이가 없어서는 안 되는구나."

협주 2

中興書曰:「謐字雅遠,丞相導孫,車騎劭子。有才器,襲爵武岡侯,位至司徒。」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밀은 자가 아원이요 승상 왕도의 손자며 거기 왕소의 아들이다. 재주와 그릇이 있어 무강후 벼슬을 이어받고 자리가 사도에 이르렀다」 하였다.

領軍王洽,珣之父也。年二十六卒。珣意以其父名德過坦之而無年,故致此論。

영군 왕흡은 왕순의 아버지다. 나이 스물여섯에 죽었다. 왕순의 뜻은 그 아버지의 이름과 덕이 왕탄지를 넘었으나 나이가 없었으므로 이 논에 이른 것이다.

84장사는 비었고 유윤은 빼어났고 사공은 녹아 통한다

王孝伯道謝公:「濃至。」又曰:「長史虛,劉尹秀,謝公融。」

왕효백이 사공을 말하였다. "짙고 지극하다."

또 말하였다. "장사는 비었고 유윤은 빼어났고 사공은 녹아 통한다."

협주 1

謂條暢也。

가지처럼 뻗어 시원함을 이른 것이다.

85우군이 임공보다 나으나 임공도 사주 앞에서는 또한 귀하게 꿰뚫었다

王孝伯問謝公:「林公何如右軍?」謝曰:「右軍勝林公,林公在司州前亦貴徹。」

왕효백이 사공에게 물었다. "임공은 우군과 견주어 어떠합니까."

사공이 말하였다. "우군이 임공보다 나으나, 임공도 사주 앞에서는 또한 귀하게 꿰뚫었다."

협주 1

不言若羲之,而言勝胡之。

왕희지 같다 말하지 않고 왕호지보다 낫다 말한 것이다.

86돌아가신 작은아버지는 한때의 드러남이요 공은 천 해의 꽃부리입니다

桓玄為太傅,大會,朝臣畢集。坐裁竟,問王楨之曰:「我何如卿第七叔?」于時賓客為之咽氣。王徐徐答曰:「亡叔是一時之標,公是千載之英。」一坐懽然。

환현이 태부가 되어 크게 모으니 조정 신하가 다 모였다.

앉기를 겨우 마치자 왕정지에게 물었다. "나는 경의 일곱째 작은아버지와 견주어 어떠하오."

이때 손들이 이 때문에 숨이 막혔다.

왕정지가 천천히 대답하였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는 한때의 드러남이요 공은 천 해의 꽃부리입니다."

온 자리가 기뻐하였다.

협주 1

王氏譜曰:「楨之字公榦,琅邪人,徽之子。歷侍中、大司馬長史。」第七叔,獻之也。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정지는 자가 공간이요 낭야 사람이니 왕휘지의 아들이다. 시중과 대사마장사를 지냈다」 하였다. 일곱째 작은아버지는 왕헌지다.

87아가위와 배와 귤과 유자가 저마다 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桓玄問劉太常曰:「我何如謝太傅?」劉答曰:「公高,太傅深。」又曰:「何如賢舅子敬?」答曰:「樝、梨、橘、柚,各有其美。」

환현이 유태상에게 물었다. "나는 사태부와 견주어 어떠하오."

유씨가 대답하였다. "공은 높고 태부는 깊습니다."

또 말하였다. "어진 외숙 자경과 견주어 어떠하오."

대답하였다. "아가위와 배와 귤과 유자가 저마다 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협주 2

劉瑾集敘曰:「瑾字仲璋,南陽人。祖遐,父暢。暢娶王羲之女,生瑾。瑾有才力,歷尚書、太常卿。」

『유근집서』에 이르기를 「유근은 자가 중장이요 남양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유하요 아버지는 유창이다. 유창이 왕희지의 딸을 맞아 유근을 낳았다. 유근은 재주와 힘이 있어 상서와 태상경을 지냈다」 하였다.

莊子曰:「樝、梨、橘、柚,其味相反,皆可於口也。」

『장자』에 이르기를 「아가위와 배와 귤과 유자가 그 맛이 서로 반대나 다 입에 맞다」 하였다.

88우리 집안 중군이 어찌 이에 미치겠는가

舊以桓謙比殷仲文。桓玄時,仲文入,桓於庭中望見之,謂同坐曰:「我家中軍,那得及此也!」

예부터 환겸을 은중문에 견주었다.

환현 때에 중문이 들어오니 환현이 뜰 가운데서 바라보고 같이 앉은 이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 중군이 어찌 이에 미치겠는가."

협주 1

中興書曰:「謙字敬祖,沖第三子。尚書僕射、中軍將軍。」晉安帝紀曰:「仲文有器貌才思。」

『중흥서』에 이르기를 「환겸은 자가 경조요 환충의 셋째 아들이다. 상서복야와 중군장군이었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은중문은 그릇과 모습과 재주와 생각이 있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