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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잠世説新語 規箴第十

세설신어 世說新語 · 유의경(劉義慶) 엮음 · 유효표(劉孝標) 주 · 남조 송(5세기) · 양 유효표 주 · 단락 27 · 한자 2,060자 · 낭독 8.2분

「세설신어」 「규잠」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해가 멉니다. 사람이 해 가에서 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 몇 살 난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서 한 대답이다. 이튿날 다시 묻자 「해가 가깝습니다. 눈을 들면 해는 보이나 장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했다.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 이백여 해,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과 몸짓만을 서른여섯 갈래로 나누어 모았다. 덕행·언어·정사·문학에서 시작해 사치·성냄·시새움·원수까지 내려가니, 기릴 것과 나무랄 것을 같은 무게로 놓은 셈이다. 대숲의 일곱 사람이 나오고, 왕희지가 사위로 뽑히고, 눈 오는 밤 배를 저어 벗의 집 앞까지 갔다가 흥이 다했다며 돌아온다. 한 조각이 대개 서너 줄, 길어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유효표가 백여 종의 책을 끌어와 단 주는 그 책들이 거의 다 없어진 지금 도리어 본문보다 길게 남았다.

1임금이 어찌 다시 네 젖 먹이던 때의 은혜를 기억하시겠느냐

漢武帝乳母嘗於外犯事,帝欲申憲;乳母求救東方朔。朔曰:「此非脣舌所爭。爾必望濟者,將去時,但當屢顧帝,慎勿言;此或可萬一冀耳。」乳母既至,朔亦侍側,因謂曰:「汝痴耳!帝豈復憶汝乳哺時恩邪?」帝雖才雄心忍,亦深有情戀;乃淒然愍之,即敕免罪。

한나라 무제의 유모가 일찍이 밖에서 죄를 지어 임금이 법을 펴려 하니, 유모가 동방삭에게 건져 달라 구하였다.

동방삭이 말하였다. "이는 입술과 혀로 다툴 바가 아니오. 그대가 반드시 건져지기를 바란다면, 떠날 때 다만 마땅히 임금을 자주 돌아보되 삼가 말하지 마시오. 이러면 혹 만에 하나를 바랄 수 있을 뿐이오."

유모가 이르자 동방삭도 곁에서 모시다가 이로 인해 말하였다. "너는 어리석구나. 임금께서 어찌 다시 네 젖 먹이던 때의 은혜를 기억하시겠느냐."

임금이 비록 재주가 씩씩하고 마음이 모질었으나 또한 깊이 정과 그리움이 있어, 이에 처량히 그를 가엾이 여기고 곧 죄를 면하라 명하였다.

협주 2

漢書曰:「朔字曼倩,平原厭次人。」朔別傳曰:「朔,南陽步廣里人。」列仙傳云:「朔是楚人。武帝時上書說便宜,拜郎中。宣帝初,棄官而去,共謂歲星也。」

『한서』에 이르기를 「동방삭은 자가 만천이요 평원 염차 사람이다」 하였다. 『삭별전』에 이르기를 「동방삭은 남양 보광리 사람이다」 하였다. 『열선전』에 이르기를 「동방삭은 초나라 사람이다. 무제 때 글을 올려 편한 일을 말하여 낭중에 임명되었다. 선제 처음에 벼슬을 버리고 떠나니 다들 세성이라 일렀다」 하였다.

史記滑稽傳曰:「漢武帝少時,東武侯母嘗養帝,後號大乳母。其子孫從奴,橫暴長安中,當道奪人衣物。有司請徙乳母於邊,奏可。乳母入辭。帝所幸倡郭舍人發言陳辭,雖不合大道,然令人主和說。乳母乃先見,為下泣。舍人曰:『即入辭,勿去,數還顧。』乳母如其言。舍人疾言罵之曰:『咄!老女子,何不疾行,陛下已壯矣,寧尚須乳母活邪?尚何還顧邪?』於是人主憐之。詔止毋徙,罰請者。」

『사기·골계전』에 이르기를 「한나라 무제가 어릴 때 동무후의 어머니가 일찍이 임금을 길렀으므로 뒤에 큰 유모라 불렸다. 그 자손과 따르는 종이 장안 가운데서 사납게 굴어 길을 막고 남의 옷과 물건을 빼앗았다. 맡은 이가 유모를 변방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유모가 들어와 하직하였다. 임금이 사랑하던 광대 곽사인이 말을 내어 말을 늘어놓으니, 비록 큰 도에는 맞지 않았으나 임금으로 하여금 화하고 기쁘게 하였다. 유모가 이에 먼저 뵙고 아래에서 울었다. 사인이 『들어가 하직할 때 곧 가지 말고 자주 돌아보시오』 하니 유모가 그 말대로 하였다. 사인이 빠르게 말하며 꾸짖었다. 『쯧, 늙은 여자야. 어찌 빨리 가지 않는가. 폐하께서 이미 자라셨는데 어찌 오히려 유모를 기다려 사시겠는가. 오히려 무엇을 돌아보는가.』 이에 임금이 그를 가엾이 여겨 조칙으로 옮기기를 그치게 하고 청한 이를 벌하였다」 하였다.

2뒷날이 이제를 보는 것이 이제가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까 두렵습니다

京房與漢元帝共論,因問帝:「幽、厲之君何以亡?所任何人?」答曰:「其任人不忠。」房曰:「知不忠而任之,何邪?」曰:「亡國之君,各賢其臣,豈知不忠而任之?」房稽首曰:「將恐今之視古,亦猶後之視今也。」

경방이 한나라 원제와 함께 논하다가, 이로 인해 임금에게 물었다. "유왕과 여왕은 어찌하여 망하였으며 맡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대답하였다. "그 맡긴 사람이 참되지 않았다."

경방이 말하였다. "참되지 않은 줄 알면서 맡겼다면 어찌 된 일입니까."

말하였다. "나라를 망치는 임금은 저마다 그 신하를 어질다 하니, 어찌 참되지 않은 줄 알면서 맡겼겠는가."

경방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장차 뒷날이 이제를 보는 것이 또한 이제가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까 두렵습니다."

협주 1

漢書曰:「京房字君明,東郡頓丘人。尤好鍾律,知音聲,以孝廉為郎。是時中書令石顯專權,及友人五鹿充宗為尚書令,與房同經,論議相是非,而此二人用事。房嘗宴見,問上曰:『幽、厲之君何以亡?所任何人?』上曰:『君亦不明,而臣巧佞。』房曰:『知其巧佞而任之邪?將以為賢邪?』上曰:『賢之。』房曰:『然則今何以知其不賢?』上曰:『以其時亂而君危知之。』房曰:『是任賢而理,任不肖而亂,自然之道也。幽、厲何不覺悟而蚤納賢?何為卒任不肖以至亡?』於是上曰:『亂亡之君,各賢其臣。令皆覺悟,安得亂亡之君?』房曰:『齊桓、二世何不以幽、厲疑之,而任豎刁、趙高,政治日亂邪?』上曰:『唯有道者能以往知來耳。』房曰:『自陛下即位,盜賊不禁,刑人滿市』云云,問上曰:『今治也?亂也?』上曰:『然愈於彼。』房曰:『前二君皆然。臣恐後之視今,猶今之視前也。』上曰:『今為亂者誰?』房曰:『上所親與圖事帷幄中者。』房指謂石顯及充宗。顯等乃建言,宜試房以郡守,遂以房為東郡。顯發其私事,坐棄市。」

『한서』에 이르기를 「경방은 자가 군명이요 동군 돈구 사람이다. 유난히 종률을 좋아하고 소리를 알아 효렴으로 낭이 되었다. 이때 중서령 석현이 권세를 오로지하였고 벗 오록충종이 상서령이 되었는데, 경방과 경전을 같이하여 논의로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이 일을 맡았다. 경방이 일찍이 잔치에서 뵙고 임금께 묻기를 『유왕과 여왕은 어찌하여 망하였으며 맡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임금이 『임금도 밝지 못하고 신하도 재주부려 아첨하였다』 하였다. 경방이 『그 재주부려 아첨함을 알고 맡겼습니까, 아니면 어질다 여겼습니까』 하니, 임금이 『어질다 하였다』 하였다. 경방이 『그렇다면 이제 무엇으로 그가 어질지 않음을 압니까』 하니, 임금이 『그때가 어지럽고 임금이 위태로웠음으로 안다』 하였다. 경방이 『이는 어진 이를 맡기면 다스려지고 못난 이를 맡기면 어지러워지는 저절로 그러한 길입니다. 유왕과 여왕은 어찌 깨달아 일찍 어진 이를 들이지 않고, 어찌하여 마침내 못난 이를 맡겨 망함에 이르렀습니까』 하였다. 이에 임금이 『어지러워 망하는 임금은 저마다 그 신하를 어질다 한다. 다 깨닫게 한다면 어찌 어지러워 망하는 임금이 있겠는가』 하였다. 경방이 『제 환공과 이세는 어찌 유왕과 여왕으로 의심하지 않고 수조와 조고를 맡겨 정사와 다스림이 날로 어지러워졌습니까』 하니, 임금이 『오직 도 있는 이라야 지난 것으로 올 것을 알 뿐이다』 하였다. 경방이 『폐하께서 자리에 오르신 뒤로 도적이 금해지지 않고 형벌 받은 이가 저자에 가득합니다』 이러이러하다 하고, 임금께 묻기를 『이제 다스려집니까 어지럽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러나 저보다 낫다』 하니, 경방이 『앞의 두 임금도 다 그러하였습니다. 신은 뒷날이 이제를 보는 것이 이제가 앞을 보는 것과 같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제 어지럽히는 이가 누구인가』 하니, 경방이 『위에서 가까이하시어 휘장 가운데서 일을 꾀하는 이입니다』 하였다. 경방은 석현과 오록충종을 가리켜 이른 것이다. 석현 들이 이에 아뢰기를 마땅히 경방을 군수로 시험하시라 하매, 마침내 경방으로 동군을 삼았다. 석현이 그 사사로운 일을 들추어 저자에서 죽는 벌을 받았다」 하였다.

3비단옷을 입고 쌀밥을 먹는 것이 네게 편안하냐

陳元方遭父喪,哭泣哀慟,軀體骨立。其母愍之,竊以錦被蒙上。郭林宗弔而見之,謂曰:「卿海內之雋才,四方是則,如何當喪,錦被蒙上?孔子曰:『衣夫錦也,食夫稻也,於汝安乎?』吾不取也!」奮衣而去。自後賓客絕百所日。

진원방이 아버지 상을 당하여 곡하고 울며 슬퍼 애통해하매 몸이 뼈만 남았다.

그 어머니가 가엾이 여겨 몰래 비단 이불을 덮어 주었다.

곽임종이 조문하러 와서 이를 보고 일러 말하였다. "경은 온 세상의 뛰어난 재주요 사방이 본받는 바인데, 어찌하여 상중에 비단 이불을 덮고 있는가. 공자께서 『비단옷을 입고 쌀밥을 먹는 것이 네게 편안하냐』 하셨으니 나는 취하지 않는다."

옷을 떨치고 갔다. 그 뒤로 손이 백 날쯤 끊겼다.

협주 2

論語曰:「宰我問:『三年之喪,期已久矣。』子曰:『食夫稻,衣夫錦,於汝安乎?夫君子居喪,食旨不甘,聞樂不樂,居處不安,故不為也!今汝安,則為之。』」

『논어』에 이르기를 「재아가 『세 해 상은 기한이 이미 오랩니다』 하니, 공자께서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네게 편안하냐. 무릇 군자가 상중에 있으면 맛난 것을 먹어도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가 편안하지 않으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네가 편안하다면 곧 그리하라』 하셨다」 하였다.

所,一作許。

소는 한 본에 허로 되어 있다.

4비록 작은 것이나 굳세고 꼿꼿함이 남보다 나아 짐이 좋아한다

孫休好射雉,至其時則晨去夕反。群臣莫不止諫:「此為小物,何足甚躭?」休曰:「雖為小物,耿介過人,朕所以好之。」

손휴가 꿩 쏘기를 좋아하여 그때가 되면 새벽에 나가 저녁에 돌아왔다.

뭇 신하가 말리고 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는 작은 것인데 어찌 이토록 빠지기에 넉넉합니까."

손휴가 말하였다. "비록 작은 것이나 굳세고 꼿꼿함이 남보다 나으니 짐이 이 때문에 좋아한다."

협주 1

環濟吳紀曰:「休字子烈,吳大帝第六子。初封琅邪王,夢乘龍上天,顧不見尾。孫琳廢少主,迎休立之。銳意典籍,欲畢覽百家之事。頗好射雉,至春,晨出莫反,唯此時舍書。崩,謚景皇帝。」條列吳事曰:「休在位烝烝無有遺事,唯射雉可譏。」

환제의 『오기』에 이르기를 「손휴는 자가 자열이요 오나라 대제의 여섯째 아들이다. 처음에 낭야왕에 봉해졌는데,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르다가 돌아보니 꼬리가 보이지 않는 꿈을 꾸었다. 손침이 어린 임금을 폐하고 손휴를 맞아 세웠다. 서적에 뜻을 날카롭게 하여 여러 집안의 일을 다 보려 하였다. 자못 꿩 쏘기를 좋아하여 봄이 되면 새벽에 나가 저물어 돌아오니 오직 이때만 책을 놓았다. 돌아가니 시호가 경황제다」 하였다. 「조열오사」에 이르기를 「손휴가 자리에 있으며 김이 오르듯 남긴 일이 없었고 오직 꿩 쏘기만 나무랄 만하였다」 하였다.

5이제 정사가 거칠고 백성이 헐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성하다 말하겠습니까

孫皓問丞相陸凱曰:「卿一宗在朝有幾人?」陸答曰:「二相、五侯、將軍十餘人。」皓曰:「盛哉!」陸曰:「君賢臣忠,國之盛也;父慈子孝,家之盛也。今政荒民弊,覆亡是懼,臣何敢言盛?」

손호가 승상 육개에게 물었다. "경의 한 겨레가 조정에 몇 사람이나 있소."

육개가 대답하였다. "두 재상과 다섯 후와 장군 열 남짓입니다."

손호가 말하였다. "성하구나."

육개가 말하였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참된 것이 나라의 성함이요,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하는 것이 집안의 성함입니다. 이제 정사가 거칠고 백성이 헐어 엎어져 망할까 두려운데 신이 어찌 감히 성하다 말하겠습니까."

협주 1

吳錄曰:「凱字敬風,吳人,丞相遜族子。忠鯁有大節,篤志好學。初為建忠校尉,雖有軍事,手不釋卷。累遷左丞相。時後主暴虐,凱正直彊諫,以其宗族彊盛,不敢加誅也。」

『오록』에 이르기를 「육개는 자가 경풍이요 오 땅 사람이니 승상 육손의 겨레 조카다. 참되고 뻣뻣하며 큰 절개가 있고 뜻을 도타이 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처음에 건충교위가 되어 비록 군사 일이 있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승상에 이르렀다. 그때 뒷임금이 사납고 모질매 육개가 바르고 곧게 굳세게 간하였으나, 그 겨레붙이가 굳세고 성하므로 감히 베지 못하였다」 하였다.

6이는 늙은 서생의 늘 하는 말이오

何晏、鄧颺令管輅作卦,云:「不知位至三公不?」卦成,輅稱引古義,深以戒之。颺曰:「此老生之常談。」晏曰:「知幾其神乎!古人以為難。交疎吐誠,今人以為難。今君一面盡二難之道,可謂『明德惟馨』。詩不云乎:『中心藏之,何日忘之!』」

하안과 등양이 관로에게 점을 치게 하며 말하였다. "자리가 삼공에 이를지 알지 못하겠소."

점이 이루어지자 관로가 옛 뜻을 일컬어 끌어대며 깊이 경계하였다.

등양이 말하였다. "이는 늙은 서생의 늘 하는 말이오."

하안이 말하였다. "『낌새를 앎이 신묘하다』 하였으니 옛사람이 어렵다 여겼소. 사귐이 성근데 정성을 토하는 것도 오늘날 사람이 어렵다 여기오. 이제 그대가 한 번 낯을 마주하고 두 어려움의 길을 다하였으니 『밝은 덕이 오직 향기롭다』 하겠소. 『시』에 이르지 않았소. 『마음 가운데 이를 감추었으니 어느 날에 잊으리오.』"

협주 2

輅別傳曰:「輅字公明,平原人也。明周易,聲發徐州。冀州刺史裴徽舉秀才,謂曰:『何、鄧二尚書有經國才略,於物理無不精也。何尚書神明清徹,殆破秋豪,君當慎之。自言不解易中九事,必當相問。比至洛,宜善精其理。』輅曰:『若九事皆至義,不足勞思。若陰陽者,精之久矣。』輅至洛陽,果為何尚書問,九事皆明。何曰:『君論陰陽,此世無雙也。』時鄧尚書在曰:『此君善易,而語初不論易中辭義,何邪?』輅答曰:『夫善易者,不論易也。』何尚書含笑贊之曰:『可謂要言不煩也。』因謂輅曰:『聞君非徒善論易,至於分蓍思爻,亦為神妙,試為作一卦,知位當至三公不?又頃夢青蠅數十來鼻頭上,驅之不去,有何意故?』輅曰:『鴟鴞,天下賤鳥也。及其在林食桑椹,則懷我好音。況輅心過草木,注情葵藿,敢不盡忠?唯察之爾。昔元、凱之相重華,宣慈惠和,仁義之至也。周公之翼成王,坐以待旦,敬慎之至也。故能流光六合,萬國咸寧,然後據鼎足而登金鉉,調陰陽而濟兆民,此履道之休應,非卜筮之所明也。今君侯位重山岳,勢若雷霆,望雲赴景,萬里馳風。而懷德者少,畏威者眾,殆非小心翼翼,多福之士。又鼻者,艮也,此天中之山,高而不危,所以長守貴也。今青蠅臭惡之物,而集之焉。位峻者顛,輕豪者亡,必至之分也。夫變化雖相生,極則有害。虛滿雖相受,溢則有竭。聖人見陰陽之性,明存亡之理,損益以為衰,抑進以為退。是故山在地中曰謙,雷在天上曰大壯。謙則裒多益寡,大壯則非禮不履。伏願君侯上尋文王六爻之旨,下思尼父彖象之義,則三公可決,青蠅可驅。』鄧曰:『此老生之常談。』輅曰:『夫老生者,見不生。常談者,見不談也。』」

『관로별전』에 이르기를 「관로는 자가 공명이요 평원 사람이다. 『주역』에 밝아 소리가 서주에 퍼졌다. 기주자사 배휘가 수재로 천거하며 이르기를 『하씨와 등씨 두 상서가 나라를 다스릴 재주와 헤아림이 있고 사물의 결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소. 하상서는 정신과 밝음이 맑고 꿰뚫어 거의 가을 터럭을 쪼개니 그대는 마땅히 삼가시오. 스스로 『역』 가운데 아홉 가지 일을 풀지 못한다 하니 반드시 마땅히 서로 물을 것이오. 낙양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그 결을 잘 곱게 하시오』 하였다. 관로가 『만일 아홉 가지 일이 다 지극한 뜻이면 생각을 수고롭게 하기에 넉넉하지 않습니다. 음과 양 같은 것이라면 곱게 한 지 오랩니다』 하였다. 관로가 낙양에 이르니 과연 하상서가 물었는데 아홉 가지 일에 다 밝았다. 하안이 『그대가 음과 양을 논함은 이 세상에 짝이 없소』 하였다. 그때 등상서가 있다가 『이분이 「역」을 잘한다는데 말에 처음부터 「역」 가운데 말과 뜻을 논하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오』 하였다. 관로가 대답하기를 『무릇 「역」을 잘하는 이는 「역」을 논하지 않습니다』 하니, 하상서가 웃음을 머금고 기려 이르기를 『요긴한 말은 번거롭지 않다 하겠소』 하고, 이로 인해 관로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다만 「역」을 잘 논할 뿐 아니라 시초를 나누고 효를 생각하는 데 이르러서도 또한 신묘하다 들었소. 시험 삼아 한 괘를 지어 자리가 마땅히 삼공에 이를지 알아 주시오. 또 요사이 푸른 파리 수십이 코 위에 오는데 쫓아도 가지 않으니 무슨 뜻이 있소』 하였다. 관로가 『올빼미는 천하의 천한 새입니다. 그것이 숲에 있어 뽕나무 열매를 먹으매 곧 우리에게 좋은 소리를 품어 줍니다. 하물며 저는 마음이 풀과 나무보다 낫고 정을 해바라기와 콩잎에 쏟으니 감히 참됨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이를 살피실 뿐입니다. 옛날 팔원과 팔개가 순임금을 도운 것은 베풀고 자애롭고 은혜롭고 화하여 어짊과 옳음의 지극함이요, 주공이 성왕을 도우며 앉아서 새벽을 기다린 것은 공경하고 삼감의 지극함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육합에 흘려 온 나라가 다 편안한 뒤에야 솥발을 차지하고 금솥귀에 올라, 음과 양을 골라 뭇 백성을 건질 수 있었으니, 이는 도를 밟은 아름다운 응함이지 점으로 밝힐 바가 아닙니다. 이제 군후의 자리가 산악처럼 무겁고 세력이 우레와 벼락 같아, 구름을 바라보고 그림자로 달려가며 만 리에 바람처럼 달립니다. 그런데 덕을 품은 이는 적고 위엄을 두려워하는 이는 많으니, 아마 조심조심 삼가 복이 많은 선비는 아닙니다. 또 코란 간이니 이는 하늘 가운데 산이라 높으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므로 오래 귀함을 지키는 바입니다. 이제 푸른 파리는 냄새나고 나쁜 것인데 이것이 거기 모입니다. 자리가 높은 이는 넘어지고 가벼이 호탕한 이는 망하니 반드시 이르는 몫입니다. 무릇 바뀜이 비록 서로 낳으나 끝에 이르면 해로움이 있고, 비고 참이 비록 서로 받으나 넘치면 마름이 있습니다. 성인은 음과 양의 성품을 보고 있고 없음의 결을 밝혀, 덜고 더함으로 쇠함을 삼고 누르고 나아감으로 물러남을 삼습니다. 이 때문에 산이 땅 가운데 있는 것을 겸이라 하고 우레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대장이라 합니다. 겸은 곧 많은 데서 덜어 적은 데에 더하는 것이요, 대장은 곧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군후께서는 위로 문왕의 여섯 효의 뜻을 찾으시고 아래로 공자의 단과 상의 뜻을 생각하시면, 곧 삼공을 결단할 수 있고 푸른 파리를 쫓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등양이 『이는 늙은 서생의 늘 하는 말이오』 하니, 관로가 『무릇 늙은 서생이란 나지 않음을 보는 것이요, 늘 하는 말이란 말하지 않음을 보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名士傳曰:「是時曹爽輔政,識者慮有危機。晏有重名,與魏姻戚,內雖懷憂,而無復退也。著五言詩以言志曰:『鴻鵠比翼遊,群飛戲太清。常畏大網羅,憂禍一旦并。豈若集五湖,從流唼浮萍。承寧曠中懷,何為怵惕驚。』蓋因輅言,懼而賦詩。」

『명사전』에 이르기를 「이때 조상이 정사를 도왔는데 식견 있는 이들이 위태로운 기틀이 있을까 걱정하였다. 하안은 무거운 이름이 있고 위나라와 혼인으로 얽혔으므로, 안으로는 비록 근심을 품었으나 다시 물러남이 없었다. 오언시를 지어 뜻을 말하기를 『큰기러기와 고니가 날개를 나란히 하여 노닐며 떼 지어 날아 큰 하늘에서 논다. 늘 큰 그물을 두려워하고 근심과 화가 하루아침에 아우를까 걱정한다. 어찌 오호에 모여 흐름을 따라 부평초를 쪼는 것만 하랴. 이어 넓은 마음에 편안하면 무엇 때문에 두려워 놀라랴』 하였다. 대개 관로의 말로 인해 두려워 시를 지은 것이다」 하였다.

7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晉武帝既不悟太子之愚,必有傳後意。諸名臣亦多獻直言。帝嘗在陵雲臺上坐,衛瓘在側,欲申其懷,因如醉跪帝前,以手撫床曰:「此坐可惜。」帝雖悟,因笑曰:「公醉邪?」

진나라 무제가 이미 태자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반드시 뒤를 전할 뜻이 있었다. 여러 이름난 신하가 또한 곧은 말을 많이 올렸다.

임금이 일찍이 능운대 위에 앉았는데 위관이 곁에 있다가 그 품은 바를 펴려 하여, 이로 인해 취한 척하며 임금 앞에 무릎 꿇고 손으로 평상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임금이 비록 깨달았으나 이로 인해 웃으며 말하였다. "공이 취하였는가."

협주 1

晉陽秋曰:「初,惠帝之為太子,咸謂不能親政事。衛瓘每欲陳啟廢之而未敢也。後因會醉,遂跪床前曰:『臣欲有所啟。』帝曰:『公所欲言者,何邪?』瓘欲言而復止者三,因以手撫床曰:『此坐可惜。』帝意乃悟,因謬曰:『公真大醉也。』帝後悉召東宮官屬大會,令左右齎尚書處事以示太子,令處決。太子不知所對。賈妃以問外人,代太子對,多引古詞義。給使張弘曰:『太子不學,陛下所知,宜以見事斷,不宜引書也。』妃從之。弘具草奏,令太子書呈,帝大說,以示瓘。於是賈充語妃曰:『衛瓘老奴,幾敗汝家。』妃由是怨瓘,後遂誅之。」

『진양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혜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다들 정사를 몸소 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위관이 늘 아뢰어 폐하려 하였으나 감히 하지 못하였다. 뒤에 모임에서 취한 김에 마침내 평상 앞에 무릎 꿇고 『신이 아뢸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공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하니, 위관이 말하려다 다시 그치기를 세 번 하고, 이로 인해 손으로 평상을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하였다. 임금의 뜻이 이에 깨달아 이로 인해 거짓으로 『공이 참으로 크게 취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뒤에 동궁의 벼슬아치와 붙이를 다 불러 크게 모으고, 곁의 사람에게 상서의 일 처리한 것을 가져다 태자에게 보여 처리하고 결단하게 하였다. 태자가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가비가 바깥 사람에게 물어 태자를 대신하여 대답하게 하니 옛말과 뜻을 많이 끌어왔다. 급사 장홍이 『태자가 배우지 않으신 것은 폐하께서 아시는 바이니, 마땅히 드러난 일로 판단하실 것이지 글을 끌어오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가비가 이를 좇았다. 장홍이 초안을 갖추어 아뢰고 태자에게 써서 올리게 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위관에게 보였다. 이에 가충이 가비에게 이르기를 『위관 늙은 종이 하마터면 네 집안을 무너뜨릴 뻔하였다』 하였다. 가비가 이로 말미암아 위관을 원망하여 뒤에 마침내 그를 베었다」 하였다.

8나만 그대를 안 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양도 그대를 안 된다 하오

王夷甫婦,郭泰寧女,才拙而性剛,聚斂無厭,干豫人事;夷甫患之,而不能禁。時其鄉人幽州刺史李陽,京都大俠,猶漢之樓護,郭氏憚之;夷甫驟諫之,乃曰:「非但我言卿不可,李陽亦謂卿不可!」郭氏小為之損。

왕이보의 아내는 곽태녕의 딸인데, 재주가 서툴고 성품이 굳세며 거두어 모으기를 싫증 내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하였다. 이보가 이를 걱정하였으나 막지 못하였다.

그때 그 시골 사람 유주자사 이양이 서울의 큰 협객이라 한나라의 누호 같았는데 곽씨가 그를 꺼렸다.

이보가 자주 간하며 이에 말하였다. "나만 그대를 안 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양도 또한 그대를 안 된다 하오."

곽씨가 조금 이를 덜었다.

협주 3

晉諸公贊曰:「郭豫字太寧,太原人。仕至相國參軍,知名。早卒。」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곽예는 자가 태녕이요 태원 사람이다. 벼슬이 상국참군에 이르렀고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 죽었다」 하였다.

晉百官名曰:「陽字景祖,高尚人。武帝時為幽州刺史。」語林曰:「陽性遊俠,盛暑,一日詣數百家別,賓客與別,常填門,遂死於几下,故懼之。」

『진백관명』에 이르기를 「이양은 자가 경조요 고상 사람이다. 무제 때 유주자사가 되었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이양은 성품이 노닐고 호협하여 한여름에 하루에 몇백 집을 찾아 하직하니, 손이 헤어지려고 늘 문을 메웠다. 마침내 안석 아래서 죽었으므로 짐짓 그를 두려워한 것이다」 하였다.

漢書遊俠傳曰:「護字君卿,齊人。學經傳,甚得名譽。母死,送葬車三千兩。仕至天水太守。」

『한서·유협전』에 이르기를 「누호는 자가 군경이요 제나라 사람이다. 경전을 배워 몹시 이름과 기림을 얻었다. 어머니가 죽자 장사 보내는 수레가 삼천 대였다. 벼슬이 천수태수에 이르렀다」 하였다.

9저 아도물을 들어 치워라

王夷甫雅尚玄遠,常嫉其婦貪濁,口未嘗言「錢」字。婦欲試之,令婢以錢遶床,不得行。夷甫晨起,見錢閡行,謂婢曰:「舉卻阿堵物。」

왕이보는 우아하게 아득하고 먼 것을 높여 늘 그 아내의 탐하고 흐림을 미워하였고, 입으로 「돈」이라는 글자를 말한 적이 없었다.

아내가 시험하려고 계집종을 시켜 돈으로 평상을 둘러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이보가 새벽에 일어나 돈이 다님을 막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말하였다. "저 아도물을 들어 치워라."

협주 1

晉陽秋曰:「夷甫善施舍,父時有假貸者,皆與焚券,未嘗謀貨利之事。」王隱晉書曰:「夷甫求富貴得富貴,資財山積,用不能消,安須問錢乎?而世以不問為高,不亦惑乎!」

『진양추』에 이르기를 「이보는 베풀고 버리기를 잘하여 아버지 때에 빌려 준 것이 있으면 다 문서와 함께 태워 주었고, 일찍이 재물과 이로움의 일을 꾀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이보는 부귀를 구하여 부귀를 얻고 재물이 산처럼 쌓여 다 쓰지 못하였으니, 어찌 돈을 물을 것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세상이 묻지 않은 것을 높다 하니 또한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하였다.

10옛날 시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도련님을 새댁에게 부탁하셨지

王平子年十四、五,見王夷甫妻郭氏貪欲,令婢路上儋糞。平子諫之,並言不可。郭大怒,謂平子曰:「昔夫人臨終,以小郎囑新婦,不以新婦囑小郎!」急捉衣裾,將與杖。平子饒力,爭得脫,踰窗而走。

왕평자가 나이 열넷 열다섯에, 왕이보의 아내 곽씨가 바라고 탐하여 계집종에게 길 위에서 똥을 지게 하는 것을 보았다.

평자가 간하며 아울러 안 된다 말하였다.

곽씨가 크게 성내어 평자에게 말하였다. "옛날 시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도련님을 새댁에게 부탁하셨지, 새댁을 도련님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소."

급히 옷자락을 붙들고 매를 치려 하니, 평자가 힘이 넉넉하여 다투어 벗어나 창을 넘어 달아났다.

협주 1

永嘉流人名曰:「澄父乂,第三,娶樂安任氏女,生澄。」

『영가유인명』에 이르기를 「왕징의 아버지 왕예는 셋째로 낙안 임씨의 딸을 맞아 왕징을 낳았다」 하였다.

11한 번 무르익게 마시고 이로부터 마침내 끊었다

元帝過江猶好酒,王茂弘與帝有舊,常流涕諫。帝許之,命酌酒,一酣,從是遂斷。

원제가 강을 건너와서도 오히려 술을 좋아하니, 왕무홍이 임금과 옛 사이라 늘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술을 따르라 명하여 한 번 무르익게 마시고, 이로부터 마침내 끊었다.

협주 1

鄧粲晉紀曰:「上身服儉約,以先時務。性素好酒,將渡江,王導深以諫,帝乃令左右進觴,飲而覆之,自是遂不復飲。克己復禮,官修其方,而中興之業隆焉。」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위에서 몸소 검소하고 절약함을 입어 때의 일을 앞세웠다. 성품이 본디 술을 좋아하였는데 강을 건너려 할 때 왕도가 깊이 간하니, 임금이 이에 곁의 사람에게 잔을 올리게 하여 마시고 이를 엎었으며 이로부터 마침내 다시 마시지 않았다. 저를 이겨 예로 돌아가 벼슬아치가 그 방도를 닦으매 중흥의 업이 높아졌다」 하였다.

12백성의 바람에 기대어 뭇 마음을 좇으십시오

謝鯤為豫章太守,從大將軍下至石頭。敦謂鯤曰:「余不得復為盛德之事矣。」鯤曰:「何為其然?但使自今已後,日亡日去耳!」敦又稱疾不朝,鯤諭敦曰:「近者,明公之舉,雖欲大存社稷,然四海之內,實懷未達。若能朝天子,使群臣釋然,萬物之心,於是乃服。仗民望以從眾懷,盡沖退以奉主上,如斯,則勳侔一匡,名垂千載。」時人以為名言。

사곤이 예장태수가 되어 대장군을 따라 석두에 내려갔다.

왕돈이 사곤에게 말하였다. "내가 다시 성한 덕의 일을 하지 못하겠구나."

사곤이 말하였다.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다만 이제부터 뒤로 날로 없애고 날로 버리게 하실 뿐입니다."

왕돈이 또 병을 일컬어 조회하지 않으니, 사곤이 왕돈을 타일렀다. "요사이 명공의 거사가 비록 크게 사직을 보전하려 한 것이나, 사해 안이 실로 통하지 못함을 품고 있습니다. 만일 천자께 조회하여 뭇 신하로 하여금 풀리게 하시면, 만물의 마음이 이에 따를 것입니다. 백성의 바람에 기대어 뭇 마음을 좇고 물러남을 다하여 임금을 받드시면, 이와 같이 하면 공이 한 번 바로잡음에 짝하고 이름이 천 해에 드리울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름난 말이라 하였다.

협주 2

鯤別傳曰:「鯤之諷切雅正,皆此類也。」

『곤별전』에 이르기를 「사곤이 넌지시 끊고 우아하게 바로잡음이 다 이런 것들이었다」 하였다.

晉陽秋曰:「鯤為豫章太守,王敦將肆逆,以鯤有時望,逼與俱行。既克京邑,將旋武昌,鯤曰:『不就朝覲,鯤懼天下私議也。』敦曰:『君能保無變乎?』對曰:『鯤近日入覲,主上側席,遲得見公,宮省穆然,必無不虞之慮。公若入朝、鯤請侍從。』敦曰:『正復殺君等數百,何損於時?』遂不朝而去。」

『진양추』에 이르기를 「사곤이 예장태수가 되었는데, 왕돈이 장차 거스름을 멋대로 하려 하며 사곤이 그때의 바람이 있다 하여 다그쳐 함께 갔다. 이미 서울을 이기고 무창으로 돌아가려 할 때, 사곤이 『조회하지 않으시면 저는 천하의 사사로운 의논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왕돈이 『그대가 바뀜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요사이 들어가 뵈니 임금께서 자리를 비켜 공 뵙기를 더디 여기시고 궁중이 화목하니 반드시 뜻하지 않은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공께서 만일 조회에 드시면 제가 모시고 따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돈이 『바로 다시 그대들 몇백을 죽인들 때에 무슨 덜림이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조회하지 않고 갔다」 하였다.

13장정위가 듣고 곧 문을 헐고 몸소 방산에 이르러 하공을 맞다

元皇帝時,廷尉張闓在小市居,私作都門,早閉晚開。群小患之,詣州府訴,不得理,遂至檛登聞鼓,猶不被判。聞賀司空出,至破岡,連名詣賀訴。賀曰:「身被徵作禮官,不關此事。」群小叩頭曰:「若府君復不見治,便無所訴。」賀未語,令且去,見張廷尉當為及之。張聞,即毀門,自至方山迎賀。賀出見辭之曰:「此不必見關,但與君門情,相為惜之。」張愧謝曰:「小人有如此,始不即知,蚤已毀壞。」

원황제 때에 정위 장개가 작은 저자에 살면서 사사로이 도문을 만들어 일찍 닫고 늦게 열었다.

뭇 작은 사람이 이를 괴로워하여 주와 부에 나아가 하소연하였으나 다스려지지 않으매, 마침내 등문고를 치기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판결받지 못하였다.

하사공이 나와 파강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름을 이어 적어 하공에게 나아가 하소연하였다.

하공이 말하였다. "제 몸이 예관으로 불려 왔으니 이 일에 상관없소."

뭇 작은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만일 부군께서 다시 다스려 주지 않으시면 곧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하공이 말하지 않고 우선 가게 하며, 장정위를 보면 마땅히 이에 미치겠다 하였다.

장개가 듣고 곧 문을 헐고 몸소 방산에 이르러 하공을 맞았다.

하공이 나와 보고 사양하며 말하였다. "이는 반드시 상관할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그대와 집안 정이 있어 서로 위해 아꼈을 뿐이오."

장개가 부끄러워 사죄하였다. "작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처음에 곧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벌써 이미 헐어 버렸습니다."

협주 2

葛洪富民塘頌曰:「闓字敬緒,丹陽人,張昭孫也。」中興書曰:「闓,晉陵內史,甚有威德。轉至廷尉卿。」

갈홍의 「부민당송」에 이르기를 「장개는 자가 경서요 단양 사람이니 장소의 손자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장개는 진릉내사로 몹시 위엄과 덕이 있었다. 옮겨 정위경에 이르렀다」 하였다.

賀循別傳曰:「循字彥先,會稽山陰人。本姓慶,高祖純,避漢帝諱,改為賀氏。父邵,吳中書令,以忠正見害。循少嬰家禍,流放荒裔,吳平乃還。秉節高舉,元帝為安東,王循為吳國內史。」

『하순별전』에 이르기를 「하순은 자가 언선이요 회계 산음 사람이다. 본디 성은 경씨였는데 고조 경순이 한나라 임금의 꺼릴 이름을 피하여 하씨로 고쳤다. 아버지 하소는 오나라 중서령으로 참되고 바름으로 해를 입었다. 하순은 젊어서 집안의 화를 만나 거친 변두리로 흘러 놓였다가 오나라가 평정되자 이에 돌아왔다. 절개를 잡고 높이 들어 원제가 안동이 되어 하순을 오국내사로 삼았다」 하였다.

14치감이 마침내 크게 성내어 옷깃을 얼리고 나가다

郗太尉晚節好談,既雅非所經,而甚矜之。後朝覲,以王丞相末年多可恨,每見,必欲苦相規誡。王公知其意,每引作它言。臨還鎮,故命駕詣丞相。丞相翹鬚厲色,上坐便言:「方當乖別,必欲言其所見。」意滿口重,辭殊不流。王公攝其次曰:「後面未期,亦欲盡所懷,願公勿復談。」郗遂大瞋,冰衿而出,不得一言。

치태위가 늘그막에 이야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미 우아하게 지나온 바가 아니면서도 몹시 이를 뽐내었다.

뒤에 조회할 때 왕승상의 말년에 한스러운 것이 많다 하여, 볼 때마다 반드시 괴롭게 서로 타이르고 경계하려 하였다.

왕공이 그 뜻을 알고 볼 때마다 다른 말을 끌어냈다.

진으로 돌아갈 즈음에 짐짓 수레를 내라 명하여 승상을 찾아갔다.

승상이 수염을 세우고 낯빛을 매섭게 하니, 윗자리에 앉자 곧 말하였다. "바야흐로 마땅히 어그러져 헤어지게 되었으니 반드시 그 본 바를 말하려 하오."

뜻은 가득하고 입은 무거워 말이 자못 흐르지 않았다.

왕공이 그 다음을 잡아채며 말하였다. "뒷날 만날 기약이 없으니 또한 품은 바를 다하고자 하오. 바라건대 공은 다시 이야기하지 마시오."

치감이 마침내 크게 성내어 옷깃을 얼리고 나가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협주 1

中興書曰:「鑒少好學博覽,雖不及章句,而多所通綜。」

『중흥서』에 이르기를 「치감은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널리 보아, 비록 글귀 풀이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통하여 아우른 바가 많았다」 하였다.

15어찌 소문을 캐어 들어 살피고 살피는 정사를 하시겠습니까

王丞相為揚州,遣八部從事之職。顧和時為下傳還,同時俱見。諸從事各奏二千石官長得失,至和獨無言。王問顧曰:「卿何所聞?」答曰:「明公作輔,寧使網漏吞舟,何緣采聽風聞,以為察察之政?」丞相咨嗟稱佳,諸從事自視缺然也。

왕승상이 양주가 되어 여덟 부의 종사를 그 소임에 보냈다.

고화가 그때 아래 전으로 돌아와 같은 때에 함께 뵈었다.

여러 종사가 저마다 이천석 벼슬아치와 어른의 잘잘못을 아뢰었는데, 고화에 이르러서만 홀로 말이 없었다.

왕공이 고화에게 물었다. "경은 들은 바가 무엇이오."

대답하였다. "명공께서 도움을 하시매 차라리 그물이 새어 배를 삼키는 고기를 놓치게 하실지언정, 어찌 소문을 캐어 들어 살피고 살피는 정사를 하시겠습니까."

승상이 감탄하며 좋다 일컬으니 여러 종사가 스스로 보기에 모자란 듯하였다.

16만일 어지러움의 사다리가 된다면 우리 집안에서 비롯하기를 청합니다

蘇峻東征沈充,請吏部郎陸邁與俱。將至吳,密勑左右,令入閶門放火以示威。陸知其意,謂峻曰:「吳治平未久,必將有亂。若為亂階,請從我家始。」峻遂止。

소준이 동쪽으로 심충을 치며 이부랑 육매에게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오나라 땅에 이르려 할 때 몰래 곁의 사람에게 명하여 창문(閶門)으로 들어가 불을 놓아 위엄을 보이게 하였다.

육매가 그 뜻을 알고 소준에게 말하였다. "오 땅이 다스려 평온해진 지 오래지 않은데 반드시 장차 어지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어지러움의 사다리가 된다면 우리 집안에서 비롯하기를 청합니다."

소준이 마침내 그쳤다.

협주 2

晉陽秋曰:「充字士居,吳興人。少好兵,諂事王敦。敦克京邑,以充為車騎將軍,領吳國內史。明帝伐王敦,充率眾就王含,謂其妻曰:『男兒不建豹尾,不復歸矣!』敦死,充將吳儒斬首於京都。」

『진양추』에 이르기를 「심충은 자가 사거요 오흥 사람이다. 젊어서 군사를 좋아하여 왕돈에게 아첨하여 섬겼다. 왕돈이 서울을 이기자 심충으로 거기장군을 삼고 오국내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명제가 왕돈을 칠 때 심충이 무리를 이끌고 왕함에게 나아가며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사내가 표범 꼬리를 세우지 못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왕돈이 죽자 심충의 장수 오유가 목을 베어 서울에 보냈다」 하였다.

陸碑曰:「邁字功高,吳郡人。器識清敏,風檢澄峻。累遷振威太守、尚書吏部郎。」

「육비」에 이르기를 「육매는 자가 공고요 오군 사람이다. 그릇과 식견이 맑고 재빠르며 풍모와 검속이 맑고 준엄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진위태수와 상서이부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17이제 재주가 모자라 그대를 기둥과 주춧돌로 쓰니 남의 마룻대와 들보를 기울이지 마시오

陸玩拜司空,有人詣之,索美酒,得,便自起,瀉箸梁柱間地,祝曰:「當今乏才,以爾為柱石之用,莫傾人棟梁。」玩笑曰:「戢卿良箴。」

육완이 사공에 임명되니 어떤 이가 그를 찾아가 좋은 술을 찾았다.

얻자 곧 스스로 일어나 들보와 기둥 사이 땅에 쏟으며 빌었다. "이제 재주가 모자라 그대를 기둥과 주춧돌로 쓰니, 남의 마룻대와 들보를 기울이지 마시오."

육완이 웃으며 말하였다. "경의 좋은 경계를 간직하겠소."

협주 1

玩別傳曰:「是時王導、郗鑒、庾亮相繼薨殂,朝野憂懼,以玩德望,乃拜司空。玩辭讓不獲,乃歎息謂朋友曰:『以我為三公,是天下無人矣。』時人以為知言。」

『완별전』에 이르기를 「이때 왕도와 치감과 유량이 잇달아 죽으니 조정과 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육완의 덕과 바람으로 이에 사공에 임명하였다. 육완이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매, 이에 탄식하며 벗에게 이르기를 『나를 삼공으로 삼으니 이는 천하에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니 그때 사람들이 아는 말이라 하였다」 하였다.

18바라건대 명공께서는 제 환공과 진 문공의 일을 하십시오

小庾在荊州,公朝大會,問諸僚佐曰:「我欲為漢高、魏武何如?」一坐莫答,長史江虨曰:「願明公為桓、文之事,不願作漢高、魏武也。」

작은 유공이 형주에 있을 때 공적인 조회에서 크게 모아 여러 아전과 보좌에게 물었다. "내가 한나라 고조나 위나라 무제처럼 되고자 하면 어떠하겠는가."

온 자리가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장사 강빈이 말하였다. "바라건대 명공께서는 제 환공과 진 문공의 일을 하시고, 한나라 고조와 위나라 무제가 되려 하지 마십시오."

협주 1

翼別見。宋明帝文章志曰:「庾翼名輩,豈應狂狷如此哉?時若有斯言,亦傳聞者之謬矣。」

유익은 따로 보인다.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유익의 이름난 무리가 어찌 이토록 미치고 좁았겠는가. 그때 만일 이런 말이 있었다면 또한 전해 들은 이의 그름이다」 하였다.

19어찌 공보다 나은 이가 그른 일을 행함이 있겠습니까

羅君章為桓宣武從事,謝鎮西作江夏,往檢校之。羅既至,初不問郡事;徑就謝數日,飲酒而還。桓公問有何事?君章云:「不審公謂謝尚何似人?」桓公曰:「仁祖是勝我許人。」君章云:「豈有勝公人而行非者,故一無所問。」桓公奇其意而不責也。

나군장이 환선무의 종사가 되었을 때, 사진서가 강하를 맡고 있어 가서 살펴 밝히게 되었다.

나군장이 이르러 처음부터 고을 일을 묻지 않고, 곧장 사진서에게 나아가 며칠 술 마시고 돌아왔다.

환공이 무슨 일이 있더냐 물으니 군장이 말하였다. "공께서는 사상을 어떤 사람이라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환공이 말하였다. "인조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오."

군장이 말하였다. "어찌 공보다 나은 이가 그른 일을 행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도 묻지 않았습니다."

환공이 그 뜻을 기이하게 여겨 꾸짖지 않았다.

협주 2

含別傳曰:「刺史庾亮初命含為部從事,桓溫臨州,轉參軍。」

『나함별전』에 이르기를 「자사 유량이 처음에 나함을 부종사로 명하였고 환온이 주에 임하자 참군으로 옮겼다」 하였다.

中興書曰:「尚為建武將軍、江夏相。」

『중흥서』에 이르기를 「사상이 건무장군과 강하상이 되었다」 하였다.

20마침을 삼가는 좋음이 없으니 백성이 취하지 않는 바입니다

王右軍與王敬仁、許玄度並善。二人亡後,右軍為論議更克。孔巖誡之曰:「明府昔與王、許周旋有情,及逝沒之後,無慎終之好,民所不取。」右軍甚愧。

왕우군이 왕경인과 허현도와 아울러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이 죽은 뒤에 우군이 논하고 따짐을 더욱 깎았다.

공암이 경계하여 말하였다. "부군께서 옛날 왕씨와 허씨와 어울려 정이 있었는데, 죽어 없어진 뒤에 마침을 삼가는 좋음이 없으니 백성이 취하지 않는 바입니다."

우군이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21이제에 어찌 이것을 번거로이 하겠는가

謝中郎在壽春敗,臨奔走,猶求玉帖鐙。太傅在軍,前後初無損益之言。爾日猶云:「當今豈須煩此?」

사중랑이 수춘에서 지고 달아나려 할 즈음에도 오히려 옥으로 꾸민 등자를 찾았다.

태부가 군중에 있으면서 앞뒤로 처음부터 덜고 더하는 말이 없었는데, 그날에는 오히려 말하였다. "이제에 어찌 이것을 번거로이 하겠는가."

협주 1

按萬未死之前,安猶未仕。高臥東山,又何肯輕入軍旅邪?世說此言,迂謬已甚。

살피건대 사만이 죽기 전에 사안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동산에 높이 누웠는데 또 어찌 가벼이 군사에 들었겠는가. 『세설』의 이 말은 에두르고 그름이 이미 심하다.

22어찌 승미와 겨루겠는가

王大語東亭:「卿乃復論成不惡,那得與僧彌戲!」

왕대가 동정에게 말하였다. "경은 이에 다시 논함이 나쁘지 않으나, 어찌 승미와 겨루겠는가."

협주 1

續晉陽秋曰:「珉有俊才,與兄珣並有名,聲出珣右。故時人為之語曰:『法護非不佳,僧彌難為兄。』」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민이 뛰어난 재주가 있어 형 왕순과 함께 이름이 있었는데 소리가 왕순의 위로 났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법호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승미가 형 되기 어렵다』 하였다」 하였다.

23내 병은 절로 마땅히 나을 터이니 바로 네 걱정이 근심스러울 뿐이다

殷覬病困,看人政見半面。殷荊州興晉陽之甲,往與覬別,涕零,屬以消息所患。覬答曰:「我病自當差,正憂汝患耳!」

은기가 병이 깊어 사람을 보아도 바로 반쪽 낯만 보였다.

은형주가 진양의 군사를 일으키며 가서 은기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앓는 데를 잘 다스리라 부탁하였다.

은기가 대답하였다. "내 병은 절로 마땅히 나을 터이니 바로 네 걱정이 근심스러울 뿐이다."

협주 2

春秋公羊傳曰:「晉趙鞅取晉陽之甲,以逐荀寅、士吉射,寅、吉射者,君側之惡人。」

『춘추공양전』에 이르기를 「진나라 조앙이 진양의 군사를 가져다 순인과 사길사를 쫓았으니, 순인과 사길사는 임금 곁의 나쁜 사람이다」 하였다.

晉安帝紀曰:「殷仲堪舉兵,覬弗與同,且以己居小任,唯當守局而已;晉陽之事,非所宜豫也。仲堪每邀之,覬輒曰:『吾進不敢同,退不敢異。』遂以憂卒。」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은중감이 군사를 일으키자 은기가 함께하지 않았고, 또 제가 작은 소임에 있으니 오직 마땅히 제 몫을 지킬 뿐이요 진양의 일은 끼일 바가 아니라 하였다. 은중감이 맞이할 때마다 은기가 문득 『나는 나아가 감히 함께하지 못하고 물러나 감히 달리하지 못한다』 하였다. 마침내 근심으로 죽었다」 하였다.

24바라건대 아침 볕의 빛이 때와 함께 밝을 뿐이다

遠公在廬山中,雖老,講論不輟。弟子中或有墮者,遠公曰:「桑榆之光,理無遠照;但願朝陽之暉,與時並明耳。」執經登坐,諷誦朗暢,詞色甚苦。高足之徒,皆肅然增敬。

원공이 여산 가운데 있으면서 비록 늙었으나 강론을 그치지 않았다.

제자 가운데 더러 게으른 이가 있으니 원공이 말하였다. "저무는 볕의 빛은 멀리 비칠 수 없다. 다만 바라건대 아침 볕의 빛이 때와 함께 밝을 뿐이다."

경을 잡고 자리에 올라 외고 읽음이 환하고 시원하며 말과 낯빛이 몹시 간절하니, 높은 제자의 무리가 다 엄숙히 공경을 더하였다.

협주 1

豫章舊志曰:「廬俗字君孝,本姓匡,夏禹苗裔,東野王之子。秦末,百越君長與吳芮助漢定天下,野王亡軍中。漢八年,封俗鄢陽男,食邑茲部,印曰廬君。俗兄弟七人,皆好道術,遂寓于洞庭之山,故世謂廬山。孝武元封五年,南巡狩,浮江,親睹神靈,乃封俗為大明公,四時秩祭焉。」遠法師廬山記曰:「山在江州尋陽郡,左挾彭澤,右傍通川,有匡俗先生,出自殷、周之際,遁世隱時,潛居其下。或云:匡俗受道於仙人,而共遊其嶺,遂託室崖岫,即巖成館,故時人謂為神仙之廬而命焉。」法師遊山記曰:「自託此山二十三載,再踐石門,四遊南嶺,東望香鑪峰,北眺九江。傳聞有石井方湖,中有赤鱗踊出,野人不能敘,直歎其奇而已矣。」

『예장구지』에 이르기를 「여속은 자가 군효요 본디 성은 광씨니 하나라 우임금의 자손이요 동야왕의 아들이다. 진나라 말에 백월의 임금과 어른이 오예와 함께 한나라를 도와 천하를 정할 때 야왕이 군중에서 죽었다. 한나라 팔 년에 여속을 언양의 남에 봉하고 자부를 식읍으로 주니 인장에 여군이라 하였다. 여속의 형제 일곱 사람이 다 도술을 좋아하여 마침내 동정의 산에 붙어 살았으므로 세상이 여산이라 이른다. 효무제 원봉 오 년에 남쪽으로 돌아보며 강에 배를 띄우고 몸소 신령함을 보고, 이에 여속을 대명공으로 봉하여 철마다 차례로 제사하였다」 하였다. 원법사의 「여산기」에 이르기를 「산이 강주 심양군에 있어 왼쪽으로 팽택을 끼고 오른쪽으로 통천에 기댔는데, 광속선생이 있어 은나라와 주나라 즈음에 나와 세상을 피하고 때에 숨어 그 아래에 잠겨 살았다. 어떤 이는 광속이 신선에게 도를 받아 함께 그 고개에 노닐다가 마침내 벼랑굴에 방을 부쳐 바위에 나아가 집을 삼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신선의 오두막이라 일러 이름 하였다 한다」 하였다. 법사의 「유산기」에 이르기를 「이 산에 몸을 부친 지 스물세 해에 두 번 석문을 밟고 네 번 남쪽 고개에 노닐며, 동쪽으로 향로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구강을 내려다보았다. 전해 듣기로 돌우물과 모난 못이 있어 그 가운데 붉은 비늘이 뛰어오른다 하는데, 들사람이 펴 말하지 못하고 다만 그 기이함을 탄식할 뿐이다」 하였다.

25공께서 사냥하시면 선비 묶기를 좋아하시니

桓南郡好獵,每田狩,車騎甚盛。五六十里中,旌旗蔽隰。騁良馬,馳擊若飛,雙甄所指,不避陵壑。或行陳不整,麏兔騰逸,參佐無不被繫束。桓道恭,玄之族也,時為賊曹參軍,頗敢直言。常自帶絳綿繩箸腰中,玄問「此何為?」答曰:「公獵,好縛人士,會當被縛,手不能堪芒也。」玄自此小差。

환남군이 사냥을 좋아하여 사냥할 때마다 수레와 기병이 몹시 성하였다. 오륙십 리 안에 깃발이 진펄을 덮었다.

좋은 말을 달려 나는 듯이 치고, 두 날개가 가리키는 데면 언덕과 골짜기를 가리지 않았다.

더러 행렬이 가지런하지 않아 노루와 토끼가 뛰어 달아나면 참좌가 매이고 묶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환도공은 환현의 겨레인데 그때 적조참군이었고 자못 감히 곧은 말을 하였다. 늘 스스로 붉은 솜 노끈을 띠에 차고 있으니, 환현이 「이것을 무엇하려 하는가」 물었다.

대답하였다. "공께서 사냥하시면 선비 묶기를 좋아하시니, 마침 묶이게 될 때 손이 까끄라기를 견디지 못할까 해서입니다."

환현이 이로부터 조금 나아졌다.

협주 1

桓氏譜曰:「道恭字祖猷,彝同堂弟也。父赤之,太學博士。道恭歷淮南太守、偽楚江夏相。義熙初,伏誅。」

『환씨보』에 이르기를 「환도공은 자가 조유요 환이의 사촌아우다. 아버지 환적지는 태학박사다. 도공은 회남태수와 거짓 초나라 강하상을 지냈다. 의희 처음에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26일찍이 옥리가 귀한 줄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王緒、王國寶相為脣齒,並上下權要。王大不平其如此,乃謂緒曰:「汝為此歘歘,曾不慮獄吏之為貴乎?」

왕서와 왕국보가 서로 입술과 이가 되어 아울러 위아래로 권세와 요긴함을 잡았다.

왕대가 그 이러함을 언짢게 여겨 이에 왕서에게 말하였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대는데, 일찍이 옥리가 귀한 줄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협주 2

王氏譜曰:「緒字仲業,太原人。祖延。父乂,撫軍。」晉安帝紀曰:「緒為會稽王從事中郎,以佞邪親幸。王珣、王恭惡國寶與緒亂政,與殷仲堪克期同舉,內匡朝廷。及恭表至,乃斬緒以說諸侯。國寶,平北將軍坦之第三子。太傅謝安,國寶婦父也,惡而抑之不用。安薨,相王輔政,遷中書令,有妾數百。從弟緒有寵於王,深為其說,國寶權動內外,王珣、王恭、殷仲堪為孝武所待,不為相王所眄。恭抗表討之,車胤又爭之。會稽王既不能拒諸侯兵,遂委罪國寶,付廷尉賜死。」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서는 자가 중업이요 태원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왕연이요 아버지 왕예는 무군이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왕서가 회계왕의 종사중랑이 되어 아첨하고 간사함으로 가까이 사랑받았다. 왕순과 왕공이 왕국보와 왕서가 정사를 어지럽힘을 미워하여, 은중감과 날을 정해 함께 일으켜 안으로 조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왕공의 표가 이르자 이에 왕서를 베어 제후들에게 설명하였다. 왕국보는 평북장군 왕탄지의 셋째 아들이다. 태부 사안은 왕국보의 장인인데 미워하여 눌러 쓰지 않았다. 사안이 죽고 상왕이 정사를 도우매 중서령으로 옮겼고 첩이 수백이었다. 사촌아우 왕서가 왕에게 사랑받아 깊이 그를 위해 말하니, 왕국보의 권세가 안팎을 움직였다. 왕순과 왕공과 은중감은 효무제에게 대접받았으나 상왕에게 돌아보아지지 못하였다. 왕공이 표를 올려 그를 치고 거윤이 또 다투었다. 회계왕이 이미 제후의 군사를 막지 못하매 마침내 죄를 왕국보에게 맡겨 정위에 붙여 죽음을 내렸다」 하였다.

史記曰:「有上書告漢丞相欲反,文帝下之廷尉。勃既出歎曰:『吾嘗將百萬之軍,安知獄吏之為貴也?』」

『사기』에 이르기를 「한나라 승상이 배반하려 한다고 고발한 글이 올라오매 문제가 그를 정위에 내렸다. 주발이 이윽고 나와 탄식하기를 『내가 일찍이 백만 군사를 거느렸으나 어찌 옥리가 귀한 줄 알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27소백의 어짊은 오히려 팥배나무에까지 미쳤습니다

桓玄欲以謝太傅宅為營,謝混曰:「召伯之仁,猶惠及甘棠;文靖之德,更不保五畝之宅。」玄慙而止。

환현이 사태부의 집을 진영으로 삼으려 하니, 사혼이 말하였다. "소백의 어짊은 오히려 은혜가 팥배나무에까지 미쳤는데, 문정의 덕은 도리어 다섯 이랑의 집도 지키지 못합니다."

환현이 부끄러워하며 그쳤다.

협주 1

韓詩外傳曰:「昔周道之隆,召伯在朝,有司請召民。召伯曰:『以一身勞百姓,非吾先君文王之志也。』乃暴處於棠下,而聽訟焉。詩人見召伯休息之棠,美而歌之曰:『蔽芾甘棠,勿翦勿伐,召伯所苃。』」

『한시외전』에 이르기를 「옛날 주나라 도가 높을 때 소백이 조정에 있었는데, 맡은 이가 백성을 부르기를 청하였다. 소백이 『한 몸으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우리 앞선 임금 문왕의 뜻이 아니다』 하고, 이에 팥배나무 아래에 볕을 쬐며 앉아 송사를 들었다. 시인이 소백이 쉬던 팥배나무를 보고 아름다이 여겨 노래하기를 『우거진 팥배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마라. 소백이 머물던 데다』 하였다」 하였다.